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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5-22 01:56:50

저담지

<colbgcolor=#3F51BA> 유송의 인물
褚淡之 | 저담지
시호 질(質)
저(褚)
이름 담지(淡之)
중원(仲源)
아명 불(佛)
부친 저상
생몰 380년 ~ 424년
본관 하남군(河南郡) 양적현(陽翟縣)
국적 동진유송
주군 송무제
송소제

1. 개요2. 생애
2.1. 가계2.2. 동진의 멸망과 유송의 건국2.3. 손법량의 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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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동진, 유송의 인물. 자는 중원(仲源). 아명은 불(佛).

2. 생애

2.1. 가계

저담지의 조상은 하남군 양적현 출신으로 저담지의 아버지는 동진의 외척인 저상이었으며, 저담지는 동진의 마지막 황후인 공사황후와 남매 관계였다.

2.2. 동진의 멸망과 유송의 건국

저담지는 처음에 동진의 거기장군 유유의 종사중랑을 지냈고, 상서이부랑, 정위경, 좌위장군을 역임하였다.

420년, 유유가 동진의 황제인 공제 사마덕문으로부터 선양을 받아 유송을 건국하고 제위에 오르니 이가 초대 황제인 무제이다. 저담지는 유유가 즉위한 뒤 시중으로 임명되었다.

제위에서 물러나 영릉왕으로 책봉되고 말릉궁에 거처한 사마덕문은 자신에게 미칠 화를 염려하여 항상 저영원과 함께 있었고 음식을 직접 만들어서 먹었다. 사마덕문이 아들을 낳을 때마다 무제는 사람을 보내 사마덕문의 아들을 죽였다. 421년, 유유는 저유지, 저담지 형제에게 저영원을 만나도록 명했고 저유지 형제가 저영원과 대화를 나누는 사이에 부하를 파견하여 사마덕문을 살해하였다. 이후 회계군 태수의 자리가 비자, 유유는 저담지를 회계군 태수로 삼았다.

2.3. 손법량의 난

423년, 부양현(富陽縣)의 손씨(孫氏) 가문이(옛 오의 황족인 그 손씨라는 설이 있다) 반란을 모의했고 그들의 영향력이 영흥현에까지 몰래 퍼지고 있었다. 현령인 양순(羊恂)은 저담지에게 반란 모의를 사전에 알아내어 저담지에게 알렸으나, 저담지는 이를 믿지 않고 오히려 양순을 체포하여 수감하였다. 하지만 양순의 예측대로 손법량(孫法亮)이 관군대장군(冠軍大將軍)을 칭하고 손도경(孫道慶) 등과 함께 반란을 일으켜 부양현령인 고찬(顧粲)을 그대로 현령으로 삼고 보국장군(輔國將軍)을 더하였다. 또한 손도중(孫道仲), 손공희(孫公喜) 등을 파견하여 영흥현을 공격했다. 촉공기(灟恭期)는 처음에 손씨의 편에 붙었으나, 뒤에 양순에게 붙어서 손씨의 반군을 막았으나 힘이 부족하여 패퇴하였다. 손법량이 허조(許祖)를 현령으로 삼자, 양순은 강당산(江唐山)으로 달아나 숨었으나 이윽고 붙잡혀 다시 현의 사무를 맡았다.

저담지는 임시로 능강장군(凌江將軍)이 되어, 산음현령(山陰縣令) 육소(陸邵)에게 사마를 겸하고 진무장군(振武將軍)을 더하였으며, 원외산기상시였던 왕무지(王茂之)를 장사로 삼고, 국자박사였던 공흔(孔欣)과 원외산기상시였던 사금지(謝芩之)를 모두 참군사로 삼아 반란을 진압할 준비에 나섰다. 또한 공녕자(孔寧子)와 공산사(孔山士)를 장군으로 기용하였다. 저담지는 진원(陳願)과 우도납(虞道納)을 파견하였는데, 진원과 우도납은 포양강(浦陽江)을 건넌 뒤 반란군에게 패배하였고 반란군은 산음현으로부터 20리 떨어진 곳까지 접근했다. 이에 저담지는 육소에게 석침(石綝)과 광무장군(廣武將軍) 육윤(陸允)을 데리고 수군을 지휘하여 반란군을 막도록 명했고 별도로 촉공기에게 보병을 이끌어 육소와 합류하도록 한 뒤, 자신은 근교에 주둔했다. 촉공기는 아정(柯亭)에서 반란군을 토벌했고 이로 인해 반란군은 영흥까지 물러났다. 반란군에서 손륜(孫倫)을 파견하여 5백 명을 이끌고 전당을 공격했으나, 손륜은 패배하여 부양으로 물러났고 뒤에 유송 조정에 귀순했다. 조정에서는 전중원외장군(殿中員外將軍) 서탁(徐卓)에게 1천의 군사를 주고, 우장군 팽성왕 유의강이 용양장군 구현(丘顯)에게 5백의 군사를 주고, 사공 서선지가 양주(揚州) 주부 심사지(沈嗣之)를 부양현령으로 임명하여 5백의 군사를 주고 각각 파견시켰으나, 반란은 이미 평정되었다.

저담지는 반란이 평정된 이후인 424년에 사망하였고 질(質)이라는 시호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