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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5-26 16:39:29

부법

십육국춘추(十六國春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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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483D8B><colcolor=#fff> 동해헌애공(東海獻哀公)
苻法 | 부법
시호 헌애(獻哀)
작위 청하왕(清河王) → 동해공(東海公)
(苻)
(法)
영칙(永則)
아명 아법(阿法)
생몰 ? ~ 357년 11월
출신 악양군(略陽郡) 임위현(臨渭縣)
부황 문환제
형제자매 5남 중 장남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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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전진의 황족. 문환황제 부웅의 서장남. 세조 선소제 부견의 형.

2. 생애

경명제 부건 재위기에 후장군에 임명되고 청하왕(清河王)에 봉해졌다.

황시 2년(352년) 9월, 승상 부웅과 군사를 나누어 부웅은 지양(池陽)의 반란군인 공지(孔持)를 토벌하고, 부법은 좌위장군 부비(苻飛)와 함께 호(鄠)의 반란군인 유진(劉珍)과 하후현(夏侯顕)을 쳐 12월에 이들의 세력을 소탕하고 그 수괴들을 참수하였다.

수광 3년(357년) 6월, 어느 날 황제 부생이 밤 중에 시녀에게
"아법(阿法: 부법의 아명) 형제는 역시 믿을 수가 없으니, 날이 밝으면 마땅히 제거할 것이다."
라 말하였다. 그 날 부법은 자다가 신령이
"내일 아침에 화가 네 가문에게 미칠 것이나, 먼저 깨닫게 된다면 이를 면하리라."
라고 말하는 내용의 꿈을 꾸고, 이내 잠에서 깨어나 가슴이 두근거리는 불안한 상태로 다시 잠들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 마침 그 시녀가 찾아와 황제에게서 들은 내용을 전부 털어놓자, 정변을 일으키기로 결심한 부법은 어사중승 양평로, 광록대부 강왕(強汪)을 불러 장사 수백명을 거느리고 운룡문(雲龍門)을 통해 황궁에 잠입하였다. 그리고 동생 부견이 상서 여파루와 함께 사병 300명으로 북을 치고 함성을 지르며 부법의 뒤를 이으니, 궁중의 숙위병들은 모두 병장기를 버리고 부견에게 투항하였다. 부법과 부견의 병사들은 아직 술에 취해 잠들어 있던 황제 부생을 붙잡아 별실에 가두었고, 폐위시켜 월왕(越王)으로 삼았다가 나중에 살해하였다.

조정을 장악한 부견은 서출이지만 그래도 맏형인 부법에게 제위에 오를 것을 권했으나, 부법이 사양하며 말했다.
"네가 적자이지 않느냐. 그리고 더 현명한 이가 제위에 오르는 것이 옳다."
그러나 부견도 물러나지 않고 말했다.
"그래도 연장자이신 형님이 제위에 올라야 합니다."
부법과 부견이 서로에게 양보하면서 결론이 나지 않자, 부견의 생모인 구씨(苟氏)가 울면서 조정의 군신들에게
"부견은 아직 젊은 아이라 사직의 중대성을 모릅니다. 만약 다른 날에 오늘의 일로 후회가 있으면 그 화는 여러분께도 닥칠 것입니다."
라 말하며 부견의 편을 들어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에 군신들도 모두 부견에게 머리를 조아리면서 즉위를 청하니, 부견은 마침내 태극전(太極殿)에서 즉위한 후 황제 칭호를 버리고 대진천왕(大秦天王)을 칭하였다. 천왕 부견은 부법을 사지절, 시중, 도독중외제군사(都督中外諸軍事), 승상, 녹상서사로 삼고, 동해공(東海公)에 봉하였다.

영흥 원년(357년) 11월, 본디 구 태후는 부법이 부견보다 나이가 많고 현명하여 무리의 마음을 얻는 것을 꺼렸는데, 한번은 그녀가 선명대(宣明臺)로 향하다가 부법의 저택 문 앞에 수많은 마차가 주차되어 있는 것을 보고는 아들인 부견에게 이롭지 않을까 걱정한 나머지 위군장군 이위(李威)와 공모하여 부법을 독살하였다. 천왕 부견은 성품이 인자하고 효성이 지극했지만 부법과도 우애가 깊었기에, 부법의 관을 동당(東堂)에서 떠나보내면서 피를 토하고 통곡하였다. 이후 부법의 시호를 '헌애(獻哀)'라 하고, 그 아들 부양을 동해공, 부부(苻敷)를 청하공(清河公)으로 봉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