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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휘

십육국춘추(十六國春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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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483D8B><colcolor=#fff> 평원도공(平原悼公)
苻暉 | 부휘
시호 (悼)
작위 평원공(平原公)
(苻)
(暉)
불명
생몰 ? ~ 385년 3월
출신 악양군(略陽郡) 임위현(臨渭縣)
부황 세조 선소황제
형제자매 7남 4녀 중 3남
1. 개요2. 생애

[clearfix]

1. 개요

전진의 황족. 세조 선소제 부견의 아들. 태자 부굉의 이복동생.

2. 생애

영흥 원년(357년) 6월, 아버지 선소제 부견이 황제 부생을 폐위시키고 천왕에 즉위하자, 부휘는 평원공(平原公)에 봉해졌다.

건원 16년(380년) 8월, 전진이 흥하면서 여러 부류의 저족들 또한 번성하여 인구가 대폭 늘어났다. 선소제 부견은 이들을 다스리기 위해 사예의 삼원(三原), 구종(九嵕), 견(汧), 옹(雍)와 남진주(南秦州)의 무도(武都)에 거주하는 저족을 500,000여 호씩 나누어 각기 종친로 하여금 통솔케 하였다. 이때 부휘는 도독예낙형남연동예양6주제군사(都督豫洛荊南兗東豫揚六州諸軍事), 진동대장군, 예주목(豫州牧)에 임명되어 낙양(洛陽)을 진수하면서 저족 3,200여 호를 이끌었다.

건원 19년(383년) 11월, 선소제 부견이 진군장군 모당에게 4,000 군사를 주고 낙양으로 보내 부휘를 보좌케 하였다.

건원 19년(383년) 12월, 비수대전에서의 패전으로 전진의 국력이 크게 기울자, 위군종사중랑을 지내던 정령(丁零)의 적빈(翟斌)이 하남(河南)에서 거병해 낙양을 노렸다. 이때 멸망한 전연의 황족 모용봉이 옛 전연의 신하인 왕등(王騰), 단연(段延)과 함께 적빈에게 귀부하여 낙양을 치니, 부휘는 모당을 내보내 이를 막게 하였으나, 오히려 모당이 대패하여 참수되었다. 부휘도 낙양의 능운대(陵雲臺)에서 모용봉과 싸웠지만 그 역시 패하여 군사 10,000명이 적군에게 사로잡혔다.

전황이 좋지 않자 선소제 부견은 업(鄴)으로 떠난 관군장군 모용수에게 서신을 보내 부휘를 구원하라 명하였다. 그러나 이미 자립할 마음을 품고 있던 모용수는 병력이 적다는 핑계로 하내(河内)에서 미적거리며 시간을 끌었다. 부휘는 모용수에게 사자를 보내 빨리 구원해달라 독촉하였는데, 이때 모용수가 부비가 감시차 붙인 부비룡(苻飛龍)과 저족 기병 1,000명을 기습해 살해하고 오히려 적빈과 연합해버리니, 부휘의 사자는 도중에 달아났다.

건원 20년(384년) 정월, 모용수가 군사들을 거느리고 낙양에 당도하자, 부비룡 살해 소식을 이미 알고있던 부휘는 성문을 굳게 닫고 그를 성 안으로 들이지 않았다. 이에 모용수는 형양(滎陽)으로 가 후연을 건국하고 독립을 선언하였다.

건원 20년(384년) 7월, 일전에 모용봉에게 살해당한 모당과 업에서 후연군에게 살해당한 효기장군 석월은 모두 선소제 부견이 하북을 통일할 때 많은 공을 세운 용장이었으므로, 그 둘의 잇달은 전사는 사람들의 마음을 더욱 어지럽혀 혼란을 가중시켰다. 관동 전역에서 여러 이민족들이 저마다 반란을 일으키며 혼란이 겉잡을 수 없게 되는 마당에, 서연모용충이 수도 장안으로 진격한다는 급보를 받은 부휘는 낙양을 포기하고 낙양과 섬성(陝城)의 군사 70,000명과 함께 장안으로 귀환하였다.

후진요장과 싸우던 부견 또한 모용충이 장안을 노린다는 보고를 전해듣고 서둘러 회군하면서 부휘를 사지절, 도독중외제군사, 산기상시, 거기대장군, 사예교위, 녹상서사로 삼아 군사 50,000명을 그에게 배속시켜 모용충을 요격하게 하고, 하간공 부림을 중군대장군으로 삼아 후속부대로서 부휘를 돕게 했다. 그 소식을 들은 모용충은 비전투인원들까지 전부 소나 말 위에 태워 마치 기병의 수가 많아 보이도록 만들고, 병사들에게 명령해 흙먼지를 최대한 일으키면서 진격했다. 이러한 모용충의 허장성세 계책은 부휘와 그의 군사들을 겁주기에 충분했고, 전진군의 사기는 크게 떨어져 대치 상태에서 싸우기를 거부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서연의 군사가 북을 치고 흙먼지를 휘날리며 먼저 돌격하자 부휘는 크게 놀라 후퇴하다가 정서(鄭西)에서 모용충에게 패배하고 말았다. 모용충은 이어서 아방성(阿房城)에서 선소제 부견이 구원군으로 보낸 전장군 강우의 30,000 군사와 부휘, 부림을 다시 격파하고 아방성을 점거하였다. 부휘는 겨우 살아남아 장안으로 도망쳤지만, 같이 싸웠던 동생 부림은 수많은 화살에 맞아 전사하였고, 전장군 강우 역시 난전 중에 전사하였다.

건원 21년(385년) 3월, 선소제 부견은 장안성에서 농성하면서 서연군과 승패를 주고 받았다. 이때 부휘가 출전하여 서연군과 싸울 때마다 매번 패하고 돌아오기만 하니, 부견은
"넌 내 재능을 물려받은 아들이고, 수만 군대를 거느렸음에도 백로(白虜)[1]의 애송이조차 꺾지 못 하다니, 살아서 무엇하느냐!"
라며 부휘를 크게 꾸짖었다. 선소제 부견은 져서 돌아올 바에 끝까지 싸우다 장렬히 전사하라는 뜻에서 한 소리였는데, 부휘는 이를 듣고 몹시 분노한 나머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에 부견은 비로소 후회하고 부휘의 시호를 '도(悼)'라 하였다.


[1] 당시 선비족에 대한 멸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