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육국춘추(十六國春秋)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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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9966cc><colcolor=#ece5b6> 노공(魯公) 요소 | 姚紹 | |
시호 | 없음 |
작위 | 동평공(東平公) → 노공(魯公) |
성 | 요(姚) |
휘 | 소(紹) |
자 | 불명 |
생몰 | ? ~ 417년 5월 |
출신 | 남안군(南安郡) 적정현(赤亭縣) |
부황 | 시조 경원황제 |
[clearfix]
1. 개요
후진의 황족. 시조 경원황제 요익중의 아들이자, 태조 무소황제 요장의 이복동생. 후진 후반기에 활약하여 여러 반란과 북하의 군대를 격파하는 등 나름 상당한 군공을 거두었으나, 유유의 북벌은 막아내지 못하고 분사하였다.2. 생애
초기에 무군장군을 지냈고 동평공에 책봉되었다.황초 4년(397년) 9월, 무도(武都)의 저족 도비(屠飛), 담철(啖鐵) 등이 하변(下辨)의 방산(方山)을 점거하고 후진을 배반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요소 등은 문환제 요흥의 명을 받고 이를 토벌한 뒤, 도비와 담철을 붙잡아 참수하였다.
홍시 원년(399년) 10월, 제공 요숭이 낙양성을 함락시키자, 진왕 요흥은 요소를 산동제군사(山東諸軍事)•예주목(豫州牧)으로 삼아 낙양을 임시로 통치하게 하였다.
홍시 18년(416년) 2월, 진왕 요흥의 병이 위독해지자, 요소는 중앙으로 돌아와 우위장군 호익도(胡翼度)와 더불어 전병금중(典兵禁中)으로 임명되어 황궁에서 숙위하며 금군(禁軍)을 감독하였다. 이때 남양공 요음(姚愔)이 아버지 요흥이 죽은 것으로 착각하여 무리를 모으고, 단문(端門)에 불을 질러 반란을 일으키니, 요흥은 병환을 참고 일어나서 전전(前殿)으로 나아가 이전부터 반란의 기미를 보이던 광평공 요필(姚弼)부터 사사하였다. 금군은 요흥의 모습을 보자 모두 뛸 듯이 기뻐하였고, 요음의 무리는 놀라 우왕좌왕하다가 태자우위솔 요화도와 동궁의 병사들에게 격파되어 흩어졌다. 요음은 대패하여 여산(驪山)으로 도망치고, 그 무리인 건강공 여륭은 옹(雍), 윤충(尹冲)과 윤홍(尹泓) 형제는 동진으로 도망쳐 모두 와해되었다.
요음의 반란을 진압한 요흥은 요소, 요찬(姚讚), 상서우복야 양희(梁喜), 경조윤 윤소(尹昭), 전중상장군 염만외(歛曼嵬)를 거느리고 침실로 들어가, 그들에게 유조를 남겨 태자 요홍을 후계자로서 받들고 보정케 하였다. 그리고 바로 다음 날, 요흥이 붕어하였고, 태자 요홍은 잠시 발상을 미룬 뒤, 아직 국경을 벗어나지 못한 남양공 요음, 건강공 여륭 등을 모두 붙잡아 주살한 뒤에 황제로 존호를 올려 즉위하였다. 요홍은 가족들에게 마음을 열어 의심하지 않았고, 요소에게 군정(軍政)을 총괄하게 하였으며, 요소 또한 감동하여 충성을 다하였다.
영화 원년(416년) 2월, 말제 요홍이 즉위하자마자,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이때 북지(北地) 태수 모옹(毛雍)이 조씨오(趙氏塢)를 점거하여 반란을 일으키니, 요소가 조씨오를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모옹을 사로잡았다. 또, 요홍의 동생인 장락공 요선(姚宣)이 주둔지인 이윤(李閏)을 버리고 멋대로 형망(邢望)으로 들어가니, 여러 강족들이 후진을 배반해 비어있는 이윤을 점거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요소는 다시 나아가 이윤의 반란군을 모조리 토벌하였고, 사죄하기 위해 찾아온 요선도 죽여버렸다.
영화 원년(416년) 6월, 혁련발발이 후진의 영역인 관중을 침구하여 옹성을 함락시키고, 이어서 동남쪽으로 진군하여 미성(郿城)을 노략질하였다. 요소는 정로장군 윤소 등과 함께 보•기 50,000명으로 혁련발발을 쳤고, 혁련발발은 안정(安定)으로 물러났다. 그러나 혁련발발에게 항복했던 호엄(胡儼)이 성문을 굳게 닫아걸고 북하의 장수 양구아(羊茍兒)와 선비족 무리를 모두 죽인 뒤, 안정을 들어 후진에게 다시 투항하였다. 갑자기 갈 곳이 없어진 혁련발발은 마안판(馬鞍阪)에서 요소의 군대를 만나 패하였고, 요소는 혁련발발을 추격하여 조나(朝那)까지 갔다가 그 군대의 기동력을 따라잡지 못하여 도중에 돌아왔다.
영화 원년(416년) 9월, 동진의 태위 유유가 북벌하여 용양장군 왕진악, 관군장군 단도제 등이 여러 갈래의 군사를 이끌고 후진의 영토를 휩쓸었다. 이에 후진의 장수 왕구생(王苟生)이 칠구(漆丘)를 들어 왕진악에게 투항하고, 서주(徐州) 자사 요장(姚掌)이 항성(項城)을 들어 단도제에게 투항하니, 여러 후진의 주둔군들이 싸우지도 않고 줄줄이 그 뒤를 이어 동진에 투항하였다. 오로지 신채(新蔡) 태수 동준(董遵)만이 항복하지 않았으나, 단도제가 그 성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동준을 사로잡아 처형해버렸다. 이후 단도제는 계속 진군해서 허창(許昌)을 함락시키고, 후진의 영천(潁川) 태수 요원(姚垣)과 대장 양업(楊業)을 사로잡았다.
동진의 건무장군 심림자(沈林子)가 변수(汴水)에서 수군을 거느리고 황하로 진입하자, 양읍(襄邑) 사람 동신호(董神虎)가 병력 1,000여 명을 이끌고 항복해왔다. 태위 유유는 동신호를 임시로 참군으로 삼았고, 동신호는 심림자와 함께 창원(倉垣)을 공격하여 함락시켜 후진의 연주(兖州) 자사 위화(韋華)의 항복을 받아내었다. 이렇듯 전황이 후진에게 불리하게 돌아가니, 요소가 말제 요홍에게 말했다.
"진군(晉軍)이 이미 허창을 함락시키는 바람에 안정(安定)이 고립되어 구원하기 어렵습니다. 마땅히 그곳의 주민들을 수도로 옮겨 정병 10만 명을 확보해야 합니다. 그렇게 한다면 진(晉)과 하(夏)가 동시에 침입하더라도 국가는 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는다면 진나라가 예주(豫州)를 공격하고, 하나라가 안정을 공격하면 어떻게 대응해야 하겠습니까? 시기가 이미 도래하였으니 속히 결단을 내리셔야 합니다."
상서좌복야 양희가 말했다."제공(齊公) 요회(姚恢)는 위명이 높아 영북(嶺北)에서 모두 두려워합니다. 진나라 사람들은 이미 혁련발발과 깊은 원한이 있어 서로 죽을 때까지 싸울 것이므로, 혁련발발은 결코 안정을 넘어 원정을 행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경내에 충분한 병력이 있어 진나라를 막을 수 있으니, 예주를 자진해서 손실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에 요홍은 양희의 말을 채택하여 따랐다.영화 원년(416년) 12월, 병주목•평원공 요의(姚懿)의 사마 손창(孫暢)이 요의에게 장안을 습격해 요소를 죽이고 요홍을 폐위한 뒤, 황위에 오를 것을 제안하였다. 요의는 그 말을 옳게 여겨, 하북(河北) 이민족과 한족에게 곡식을 나누어주며 사사로운 은혜를 베풀려 하였다. 좌상시 장창(張敞)과 시랑 좌아(左雅)가 이에 대해 간언을 올리자, 요의는 노하여 이들을 매질해 죽였다.
요의가 장창과 좌아를 멋대로 살해하였다는 소식을 들은 말제 요홍은 은밀히 요소를 불러 상의하였다. 요소가 말했다.
"요의는 성격이 비루하고 사리를 분별하지 못하니, 이런 모의를 한 것은 틀림없이 손창의 짓입니다. 사신을 보내 손창을 소환하고, 무군장군 요찬(姚讚)을 섬성(陜城)에 주둔시키십시오. 그리고 제가 동관(潼關)에 주둔하여 여러 군대를 지휘하겠습니다. 손창이 소환에 응하면 요의를 하동(河東)으로 보내 병력을 모아 진군(晉軍)을 방어하도록 하고, 소환에 응하지 않으면 그의 죄를 공표하고 토벌하겠습니다."
요홍이 수락하며 말했다."숙부의 말이 곧 사직을 위한 계책이구려!"
이후 요홍은 무군장군 요찬, 관군장군 사마국번(司馬國璠), 건의장군 사현(虵玄)을 섬진(陜津)에 주둔시키고, 무위장군 요려(姚驢)를 동관에 주둔시켰다. 그러자 요의는 곧바로 거병하여 황제를 자칭하고, 주군(州郡)에 격문을 보내 흉노보(匈奴堡)의 곡식을 운반하여 자신을 따르는 번진들에게 공급하려 하였다. 녕동장군 요성도(姚成都)가 이를 거부하자, 요의는 겸손한 말로 그를 유인하고 칼을 보내 유혹했으나, 요성도는 끝내 따르지 않았다. 요의는 효기장군 왕국(王國)을 보내 갑사 수백 명을 거느리고 요성도를 공격하게 했으나, 요성도는 그들을 쳐서 전부 사로잡았다.요성도가 여러 성에 격문을 보내 순리를 설명하고 군대를 모아 요의를 토벌하려 하니, 요의는 다급히 여러 성의 병력을 동원하려 했으나, 요의의 부름에 응한 것은 임진(臨晉)의 수천 호뿐이었다. 그러나 이마저도 요성도가 격파하였고, 안정의 곽순(郭純)이 요의를 포위하였다. 이때 요소도 포판(蒲阪)으로 들어가 요의를 공격해 사로잡고 손창 등을 주살하였다.
영화 2년(417년) 정월, 제공 요회가 안정에서 장안으로 진군하면서 황제 요홍의 곁에 있는 간악한 무리를 제거한다는 명목으로 반란하여 대도독•건의대장군을 자칭하였다. 요회가 미성을 공격해 진서장군•박릉공 요심(姚諶)을 격파하니, 장안이 크게 동요하였다. 황제 요홍은 사자를 보내 긴급히 요소를 부르고, 하간공 요유(姚裕)와 보국장군 호익도를 풍(灃) 서쪽에 주둔케 하였다. 이런 와중에도 부풍(扶風) 태수 요준(姚儁) 등이 요회에게 투항하였다.
소식을 들은 요소는 여러 군대를 이끌고 서쪽에서 돌아와 영대(靈臺)에서 요회의 반란군과 대치하였다. 그리고 녕삭장군 윤아(尹雅)를 홍농(弘農) 태수로 삼아 무군장군 요찬과 함께 남아서 동관을 지키게 하였다. 요소의 군대가 갑자기 몰려오는 것을 본 요회의 군사들은 모두 두려워 떨기 시작하였고, 요회의 장수 제황(齊黄) 등이 탈영하여 요소에게 항복하였다. 요회는 불리한 것을 느끼고 군대를 진격시켜 요소를 압박하였으나, 요찬이 동관에서 나와 요회의 후방을 쳤고, 요회의 군대는 무너져 대패하였다. 요소는 요회와 그 세 명의 동생을 모두 죽였고, 황제 요홍은 통곡하면서 요회를 공(公)의 예로 장사를 올렸다.
영화 2년(417년) 2월, 황제 요홍이 요소를 태재•대장군•도독중외제군사로 삼으면서 임시로 황월(黄鉞)을 하사하고, 노공(魯公)으로 개봉하였다.
영화 2년(417년) 3월, 단도제와 심림자가 동관에 이르니, 요소가 군대를 이끌고 출격하였다. 하지만 단도제와 심림자의 분투로 대패하여 참수되거나 포로된 자가 1,000여 명에 달했고, 요소는 후퇴하여 동관에서 서쪽으로 30리 떨어진 정성(定城)에 주둔하였다. 요소는 지형의 험준함에 의지하여 동진군의 진격을 막는 동시에, 독무위장군 요란(姚鸞)을 보내 대로(大路)에 주둔시켜 단도제의 보급로를 끊었다.
3월 4일[1], 심림자가 밤에 정예병을 거느리고 대로에 주둔해있는 요란을 습격하여 그를 붙잡아 참수하고, 그의 병사 수천 명도 아울러 죽였다. 이에 요소는 동평공 요찬을 보내 황하 상류에서 동진군의 수도(水道)를 끊게 하였는데, 요찬도 심림자에게 패하여 돌아갔다.
영화 2년(417년) 5월, 요소는 장사 요흡(姚洽), 녕삭장군 안란(安鸞), 호군 요묵려(姚墨蠡), 하동태수 당소방(唐小方)을 보내 병력 2,000명으로 구원(九原)에 주둔하여 황하를 단단히 막아 홍농군에서 보내오는 동진군의 군량을 끊고자 하였다. 그러나 또 심림자가 이를 요격하여 요흡, 요묵려, 당소방을 참수하였고, 나머지를 대부분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이로써 요소의 계획이 전부 수포로 돌아가자, 요소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병을 얻어 피를 토하였고, 결국 군권을 요찬에게 넘긴 뒤에 분사하였다.
3. 기타 일화
- 요소가 한 호승(胡僧)을 불러 국가의 운명을 물었을 때, 그 승려는 밀가루로 직경이 한 자(丈)나 되는 큰 호병(胡餅)을 만들더니, 아무 말도 없이 서쪽, 북쪽, 남쪽 순서로 먹었고, 남은 것을 말아서 삼킨 후에 떠났다고 한다.
- 요소는 죽기 전에 함곡관(函谷關)을 공격하였는데, 주방에서 밥을 지을 때마다 밥에서 혈흔이 나왔다. 요소는 이를 꺼려 더 이상 밥을 짓지 않게 하고, 여러 군사들에게 음식을 구걸하고 다니다가 80일 후에 병으로 죽었다고 한다.
[1] 정사년 갑진월 병자일. 음력으로 3월 4일이고, 양력으로 4월 6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