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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3-21 11:46:48

강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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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강수 표준영정.jpg
이름 강수(強首)
성씨 석(昔)?
본명 우두(牛頭)
생몰년도 634년 이전 ~ 692년 8월?[1]

1. 개요2. 출생3. 성장4. 출세5. 죽음6. 대중매체에서7. 둘러보기

1. 개요

신라의 문인이자 외교관. 설총, 최치원과 함께 신라 역사상 3대 문장가로 꼽히는 인물이다. 흔히 강수라고 부르지만 사실 이것은 본명이 아니라 태종 무열왕이 붙여준 별명이고 원래 이름은 우두(牛頭)다. 하지만 문무왕도 '강수'라고 언급했고, 삼국사기 본인 열전 제목도 강수인 것을 보면 거의 본명처럼 쓰였던 듯하다. 어떤 의미에서는 필명이나 예명으로 활동하는 사람들의 원조 격일지도 모른다.

2. 출생

출신지는 오늘날의 충청북도 충주인 중원경 사량부. 아버지는 신라의 17관등 중 나마 벼슬을 지낸 석체(昔諦)라는 사람이다. 그의 어머니가 꿈에 뿔 달린 사람을 보고 임신한 후 출산했는데, 그 아이의 머리 뒷쪽에 툭 튀어나온 뿔 같은 게 있었다고 한다.

아버지 석체도 기이하게 여겼는지 아이를 안고 어떤 현자에게 달려가 아이의 머리에 대해 물었는데, 현자는 "원래 옛날 성인들은 생김새가 비범했던 사람들이 많았고, 본래 관상에서도 얼굴 사마귀가 안 좋지 머리의 사마귀는 나쁘지 않다고 했으니 이 아이는 반드시 큰 인물이 될 것입니다"라고 평가했다. 석체는 돌아와서 부인에게 이 아이를 반드시 나라의 인재로 만들 것이라고 다짐했다고 한다. 그리고 뿔 달린 머리를 가리켜 아이를 '우두(牛頭: 쇠머리)'라고 불렀다. '자두(字頭)'라고도 알려져 있는데, 이것은 조선 중종 때 나온 임신간본 삼국사기에 나온 이름이다. 삼국사기 판본 중 가장 오래된 판본인 성암본에는 '우두'라고 나와 있는데 이병도가 우두라고 교감한 바 있다. 성종 때 편찬된 삼국사절요에서도 '우두'라고 기록되어 있다.

뒷날 강수는 무열왕에게 자신이 '임나가량(任那加良)' 사람이라고 밝히는데 이것은 한국 사서에 유일하게 등장하는 '임나'라는 지명에 대한 기록이다.[2] '임나'가 임나일본부설 때문에 한국에선 이미지가 좋지 않지만 임나 자체는 가야의 여러 다른 표기 중 하나인 단순히 실존했던 지명으로 추정되고 있다. 임나 뒤의 加良(가량)은 '가라'로 읽을 수 있으며 이 역시 가야를 가리키는 여러 말 중 하나다. 왜 충주 출신인 그가 가야 사람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는지에 대해서는 가야 중에서 반파국(대가야)의 귀족 세력들이 562년 반파국 멸망 후 충주로 옮겨졌기 때문에 강수 집안을 반파국 출신으로 보는 설과, 신라가 진흥왕 18년(557년)에 충주에 국원소경을 설치한 이후 귀족 자제들과 6부 호민을 옮겨서 국원소경의 인구를 채웠는데, 직전 수도 금성에는 법흥왕 19년(532)에 항복한 금관국(금관가야) 국왕 및 그 일족의 후손들이 살고 있었기 때문에 강수 집안은 원래 금관국 출신이지만 국원소경 설치 당시에 충주로 옮겨졌다는 설이 있다. 즉, 강수 집안에 대해서는 금관국 출신설과 반파국 출신설이 있다. 다만 임나가 일본 기록에 나오는 임나일본부의 임나와 같은 지역을 가리킨다면 금관국쪽일 가능성이 조금 더 높다. 여러 사료를 통해 교차검증해 보았을 때 보통 임나라는 지명이 가리키는 곳은 바다에 인접한 김해 지역으로 비정되고 있기 때문이다.

어쨌든 강수의 집안 역시 우륵, 김유신 집안처럼 가야 출신으로 신라에 편입된 집안인 것이다. 그러나 강수의 최종 직급이 사찬이었던 것을 보면 왕족이었던 김유신 집안처럼 진골에 편입된 게 아니라 6두품으로 편입되었던 셈이다. 골품제에 의해 6두품은 신라 17관등 중 6위인 아찬까지 오를 수 있었으며, 강수의 최종 직위인 사찬은 아찬의 두 단계 아래 관등인 8위이다.

3. 성장

자라면서 스스로 글을 깨치고 문장의 뜻에 통달했다. 아버지 석체가 강수에게 "유학을 배우겠느냐? 불도를 배우겠느냐?"라고 묻자 우두는 "불도는 세속을 떠난 가르침이라 합니다. 저는 인간 세상에 사는 사람이니 어찌 그런 것을 배우겠습니까? 마땅히 유학을 공부할 것입니다"라고 대답했고, 석체도 아들의 뜻을 존중해 주어 여러 유학 서적에 통달했다. 삼국사기 열전에 따르면 배운 것은 얕았지만 깨달은 바는 훨씬 깊고 원대해서 젊을 때부터 문장과 한학으로 이름을 날렸다고 전한다.

성장하던 중 한 여인과 만나 연애를 하게 되었는데, 이 여인은 신분이 낮은 대장장이 집의 딸이었다. 열전에 '서로 그 정이 돈독했다'고 적혀 있을 정도로 매우 달달한 깊은 연애를 했던 모양인데[3], 우두가 20세가 되자 부모가 우두를 장가보내기 위해 고을의 처녀 중 한 여인을 중매하여 혼인시키려고 했다. 하지만 우두는 두 번 장가들 수 없다는 이유로 이를 거절했다. 화가 난 석체는 "네가 이미 나라에서 유명한 사람이 되었는데, 천한 여자를 아내로 삼는다면 수치스러운 일이 아니겠느냐?"라고 묻자 우두는 아래와 같이 대답하고 끝내 대장장이 집 딸을 아내로 맞아들였다.
"가난하고 천한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닙니다. 도를 배우고도 실행하지 않는 것이 정말로 부끄러운 일입니다. 일찍이 옛 사람의 말에 '고생을 같이 했던 아내는 쫓아내지 아니하고, 빈천한 시절의 친구는 잊어서는 안 된다'고 들었으니, 천한 아내라고 해서 차마 버릴 수는 없습니다."

오늘날 관점에서도 신분의 벽을 뛰어넘고 결혼해 유교 윤리를 몸소 실천한 대단한 애처가인데 당시 신라가 엄격한 신분제 사회였던 것에 비춰 보면 상당히 파격적인 행동이다.[4]

4. 출세

진덕여왕 때 김춘추가 신라와 당나라 사이 동맹 결성을 위해서 둘째 아들 김인문을 인질로 당에 넘겼었는데, 훗날 이 김인문을 풀어내 돌려보내달라는 의미에서 강수가 쓴 글이 '청방인문서'이다. 이후 신라와 당나라 사이가 벌어지고 나당전쟁이 벌어지자 쳐들어온 당나라의 장군 설인귀가 신라 진영에 보냈던 서신에 대해 답해주는 '답설인귀서'도 강수가 지은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태종 무열왕이 즉위한 후 당나라 사신이 황제의 조서를 전했는데, 조서의 한문 문장 중 해석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어서 다들 끙끙대고 있었는데 우두는 이것을 보고 명쾌히 설명하고 해석했다.[5] 무열왕은 놀라고 기뻐해서 그의 출신지를 물었는데, 그는 "신은 임나가량 사람으로 이름은 우두입니다"라고 대답했고 무열왕은 그의 특이한 뒷머리를 보더니 "경의 두골을 보니 강수(強首) 선생이라고 부를 만하다"라고 말했다. 여기서 '강수'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쇠머리(牛頭)→센(強) 머리(首)→강수가 되었다는 해석도 있다.

바로 강수는 당 황제에게 보내는 답서를 작성했는데 교묘하면서도 뜻을 다 나타내고 있는 훌륭한 문장이어서 무열왕은 강수를 더욱 높이 평가했고, 존중의 의미에서 이름을 부르지 않고 '임생(任生)'이라는 이름으로 불렀다고 한다.[6] 임나가량 출신의 선생이라고 해서 이렇게 부른 것이다. 그리고 강수를 이제서야 뒤늦게 만난 것을 탄식했다고 한다.[7] 이렇듯 삼국통일전쟁기 신라의 중요한 여러 문서들이나 외교 문서는 강수가 전담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재물에 욕심이 없는 청백리였는지 자기 생계를 돌보지 않아 집이 가난했는데 그래도 강수는 이를 태연히 여겼다고 한다. 무열왕은 해마다 신성에서 거두는 곡식 1백 섬을 강수에게 주게 했고, 문무왕은 '고구려와 백제를 평정한 것은 비록 군사적 공로지만 당나라와의 외교를 문장(국서 작성)으로 담당한 강수의 공도 크다'고 하며 강수의 공을 높이 평가하며 사찬의 직위를 주고 녹봉을 높여 매년 곡식 2백 섬을 주도록 녹봉을 올려 주었다. 특히 삼국유사에 의하면 당나라 황제에게 문무왕의 동생 김인문의 구명을 청하는 글을 올렸다고 한다.

5. 죽음

문무왕을 거쳐 신문왕 때까지도 활약했는데, 신문왕 때 국학이 설치된 후 설총과 함께 유교 경전을 강의했다. 그의 높은 수준의 유학적 소양은 전시에는 주로 외교문서 작성에서 빛이 났지만 이젠 유학적 지배 이데올로기에 필요한 인재를 양성하는 데 쓰였다. 그러다 신문왕 재위 기간(681년 ~ 692년)에 세상을 떠났는데, 삼국사기 본기에는 강수가 죽었다는 기사가 없고, 열전에는 그냥 '신문왕 때 죽었다'고만 적혀 있다. 신문왕 재위 말년인 692년에 죽었다는 식으로 몰년이 서술되어 있는 경우도 있는데, 이건 조선 성종 때에 편찬된 삼국사절요에서 신문왕 재위 마지막 해인 692년에 강수가 죽었다는 기사가 있는 것이 그 출처. 다만 편년체 사서에서 정확한 연대를 모르고 왕대만 알 경우 그 왕의 마지막 해에 그 사건을 넣는 것이 보통이라서 그의 몰년을 692년이라고 확신할 수는 없다. 어쨌든 신문왕 재위기에 죽은 것은 분명하다.

그가 죽자 신문왕은 나라에서 장례비용을 부담하도록 했고 강수의 집안에 많은 옷가지들과 피륙을 내렸는데, 물욕이 없었던 주인의 습관을 닮았던 것인지 집안 사람들은 이것들을 모두 불사에 바쳤다고 한다.주인은 불교는 세속을 벗어난 가르침이라 했는데?

그리고 연애 끝에 결혼한 강수의 아내는 이때까지도 살아 있었는데, 나라에서 내린 물품들을 불사에 바치고 나자 먹을 것이 없어서 고향으로 내려가려 했다. 신료들이 이 소식을 듣고 신문왕에게 청했고, 신문왕은 곡식 1백 섬을 내려주도록 조치하려고 했다. 그러자 강수의 아내는 "저는 미천한 몸으로 입고 먹는 것을 지아비에게 의지하다 보니 나라의 은혜를 많이 입었습니다. 지금은 이미 홀몸이 되었는데 어찌 감히 다시 두터운 대우를 받겠습니까?"라는 말로 사양하며 끝내 고향으로 내려갔다고 한다.

가야계 인물 중에서는 꽤나 인지도가 높은 사람이지만 막상 후손에 관한 기록은 따로 없는데, 자식을 두지 못했거나 귀천상혼의 규범 때문에 6두품이 아닌 평민 신분으로 태어나서 존재감이 말소당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신라는 철저한 골품제 사회였고, 낮은 신분의 배우자와 결혼해서 태어난 아이는 신분이 낮은 부모 쪽을 따라갔기 때문(일천즉천). 전근대 사회에서 아이가 아예 없는 경우는 드무니, 사실상 후자 쪽일 확률이 더 높다.[8]

6. 대중매체에서

대왕의 꿈에서는 김태형이 배역을 맡았다. 여기서는 비담의 난의 주역인 염종과 함께 동문수학한 친구라는 설정. 뒷머리에 뿔을 달고 등장하며 이 때문에 비웃음을 당하곤 한다. 초명은 임신본 삼국사기에 나온 이름인 '자두'로 나온다.

처음에 염종과 함께 나란히 비담과 면접 만나게 되는데 비담은 염종만 등용하고 자두는 반골의 상이 느껴진다는 이유로 그는 내친다. 그리고는 김춘추에게 가서 그의 책사가 된다. 역사와는 달리 김춘추의 즉위 전에 만나며 외교 문서 전담 뿐만 아니라 아예 김춘추의 참모로 캐릭터가 잡힌 듯. 김춘추, 김인문에게 각 나라의 글자들을 소개하면서 이두 개발의 떡밥을 뿌리며 그의 능력에 탄복한 김춘추가 '강수 선생'이라고 부른다.

김춘추가 즉위한 후에도 그를 가까이에서 보좌하며, 백제 멸망 후에는 김춘추의 입장을 따라 김진주와 함께 친당파에 서서 태자 김법민의 폐위와 김유신 축출에 찬성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지만 김춘추가 친당과 반당의 반목을 멈추기 위해 법민에게 섭정을 맡김으로써 갈등은 봉합되었고, 김춘추 사망 후에는 계속 김유신과 문무왕에게 항거하다 죽은 김진주와는 달리 계속 문무왕을 보좌하면서 마지막회까지 등장한다.

7.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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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9~31권까지 연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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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삼국사절요 기록. 실제로는 그 이전으로 보인다.[2] 우리나라 사서 중 유일한 것이고, 금석문도 찾아보면 광개토대왕릉비, 보물 363호 진경대사탑비 등 가야를 임나라고 쓴 기록이 몇 더 있다.[3] 아예 기록에서는 야합(野合), 즉 혼전관계라고 기재되어있다.[4] 다만 당시 제도상으로는 둘 사이에서 태어나는 아이들은 평민이 된다는 점을 감안하면 마냥 로맨틱하기만 한 이야기는 아니다. 조선시대에는 양반인 아버지와 평민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자녀들은 양반 아버지에게 인정을 받으면 가문을 세습받거나, 못해도 중인 신분으로는 살아갈 수 있었으나, 이 시대에는 아버지가 귀족이어도 어머니가 평민이면 자녀들도 평민이 되었기 때문이다.[5] 신라는 중국과 거리가 먼 한반도 동남쪽에서 시작했고 중국과 자유롭게 교역을 시작한 것이 6세기 중엽 진흥왕의 서해안 진출 때부터라, 신라는 중국식 한문 교육의 역사가 삼국 중 고구려나 백제에 비해서도 비교적 짧았다. 중국식 한문에 능통한 인재가 부족했던 배경은 이 때문이고, 8세기가 되면 비로소 신라 문인들의 한학 실력이 중국과 대등하다는 평가를 받게 된다.[6] 유교적 관점에서는 피휘 관습에 따라, 이름을 바로 부르는 것은 하대하는 격이고 임생과 같은 표현은 존중의 의미를 나타낸다. 현대 대한민국에서도 이름을 부르기보다는 선생님, 사장님 등으로 부르는 것이 상대를 높이는 뉘앙스를 갖는다.[7] 이미 김춘추가 왕이 된 이후에야 강수와 만난 것인데, 김춘추는 왕이 되기 전부터 외교관으로서 수십년간 활발히 활동해온 사람이다. 뒤늦은 인생 말년에서야 최고의 명문장가를 찾았으니 이런 표현이 나온 것. 그리고 순전히 강수의 문장력 덕분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실제로 김춘추가 즉위한 650년대부터 나당동맹이 본격화되었으니, 강수가 국서 작성을 맡기 시작하면서 실제로 외교도 이전보다 신라에 잘 풀리기 시작해 시기적으로 일치한다.[8] 대장장이가 정확히 몇 두품에 속하는지는 불분명하지만, 일단 귀족 계층의 하한선으로 치는 4두품 이하인 것만은 확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