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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름 | 해론(奚論) |
| 출신 | 신라 서라벌 모량부(牟梁部) |
| 사망 | 618년 (향년 20여 세 추정) 가잠성(椵岑城) |
| 신분 | 5두품(추정)[1] |
| 관등 | 대나마(大奈麻) |
| 직위 | 금산(金山) 당주(幢主)[2] |
| 가족 | 아버지 찬덕(讚德) |
| 국가 | 신라 |
1. 개요
"내 아버지가 돌아가신 곳에서, 나 또한 죽으리라."
《삼국사기》 <해론 열전>
《삼국사기》 <해론 열전>
삼국시대 신라 진평왕 시대의 무신(武臣).
아버지 찬덕에 이어, 신라와 백제의 최대 격전지였던 가잠성에서 2대에 걸쳐 전사한 장수이다.
5두품 출신으로 추정되는 인물로, 신분적 한계 속에서도 국가에 대한 충성(忠)과 아버지에 대한 효(孝)를 동시에 실천하여 당대 사람들에게 큰 울림을 주었다. 그의 죽음을 슬퍼한 신라 사람들이 장가(長歌)를 지어 불렀다는 기록이 《삼국사기》 열전에 전해진다.
2. 아버지 찬덕의 최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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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가잠성 전투#|]] 부분을 참고하십시오.해론의 비극은 그의 아버지 찬덕(讚德)으로부터 시작되었다.
611년(진평왕 33년) 10월, 백제군이 대규모 병력을 이끌고 신라의 전략적 요충지인 가잠성(椵岑城)을 포위했다. 당시 가잠성 현령이었던 찬덕은 100일 넘게 성을 사수했으나, 조정에서 보낸 구원군마저 백제군에게 패퇴하여 돌아가 버리는 절망적인 상황에 처했다.
식량과 물이 바닥나 시신을 먹고 오줌을 마시는(食屍飮尿) 극한의 상황에서도 항전했으나, 끝내 성이 함락될 위기에 처하자 찬덕은 다음과 같이 외치며 느티나무에 달려가 부딪혀 자결했다.
"왕께서 나에게 성을 맡기셨으나 지키지 못했으니, 죽어서 귀신이 되어서라도 적을 잡아먹고 성을 되찾겠다!"
이 사건은 당시 어린 해론에게 씻을 수 없는 트라우마이자, 반드시 갚아야 할 복수의 맹세로 남게 되었다.
3. 성장과 출사
아버지가 순절(殉節)한 공으로 해론은 20여 세의 젊은 나이에 대나마(제10관등)의 관등에 올랐다.주목할 점은 그가 받은 '대나마'라는 관등이다. 해론은 5두품 출신으로 추정되는데, 신라 골품제 하에서 5두품이 오를 수 있는 관등의 상한선(마지노선)이 바로 대나마였다. 즉, 국가에서는 아버지의 공을 기려 해론에게 신분상 오를 수 있는 최고의 지위를 내려준 것이다.
이후 618년(진평왕 40년), 해론은 '금산당주(金山幢主)'로 임명된다. 당주(幢主)는 지방군 부대의 지휘관으로, 조선시대로 치면 영장이나 현대의 대대장급에 해당하는 실무 책임자였다. 그는 더 이상 올라갈 곳 없는 관등을 지닌 채, 오직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 전장으로 향했다.
4. 가잠성 전투와 최후
618년, 해론은 북한산주 군주(도독)인 변품(邊品)과 함께 군사를 일으켜, 아버지가 잃었던 가잠성을 공격해 탈환하는 데 성공했다.그러나 성을 빼앗긴 백제 역시 곧바로 군사를 일으켜 반격해왔다. 해론과 변품은 이에 맞서 싸웠으나, 백제군의 기세는 7년 전 아버지를 죽음으로 몰고 갔던 그때처럼 맹렬했다. 전황이 불리해지자 해론은 휘하 장수들에게 다음과 같이 비장한 유언을 남겼다.
"예전에 나의 아버지께서 여기서 돌아가셨다. 내가 지금 또한 여기서 백제인과 싸우게 되었으니, 오늘이 바로 내가 죽을 날이다."
《삼국사기》 <해론 열전>
《삼국사기》 <해론 열전>
말을 마친 해론은 적진을 향해 돌격했다. 기록에 따르면 그는 활이나 장창이 아닌 단병(短兵, 짧은 무기)을 들고 적진에 뛰어들었다고 한다. 이는 살아서 돌아오기를 포기하고, 적과 최대한 근접하여 육탄전을 벌이겠다는 뜻이었다. 그는 적군 수명을 베어 넘긴 뒤, 아버지와 같은 장소에서 장렬하게 전사했다.
5. 사후 평가
해론의 전사 소식이 서라벌에 전해지자 진평왕은 몹시 슬퍼하며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왕은 아버지 찬덕 때와 마찬가지로 남은 가족들에게 매우 후한 부의(賻儀)를 내렸다.조정의 공식적인 예우뿐만 아니라, 당시 신라 사람들의 추모 열기 또한 대단했다. 사람들은 해론의 비극적인 죽음을 애도하며 글을 지었는데, 이것이 노래가 되어 널리 불렸다. 이를 장가(長歌)라고 한다.[3]
6. 여담
- 아버지와 아들이 같은 성(城)에서, 같은 적(백제)에게, 같은 비극적 최후를 맞이했다는 점에서 신라판 '대를 이은 충절'의 상징으로 꼽힌다.
- 5두품이라는 신분적 한계를 지닌 무반(武班) 가문이 신라 사회에서 어떻게 충성을 증명했는지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진골 귀족들이 고위 사령관(군주/도독)으로서 군대를 지휘했다면, 해론과 같은 5두품들은 최전방의 돌격대장(당주)으로서 가장 먼저 피를 흘리는 역할을 수행했다.
- 그가 전사한 가잠성의 위치에 대해서는 학계의 의견이 분분하다. 경기도 안성시 죽산면의 죽주산성으로 보는 견해와, 충청북도 괴산군 인근으로 보는 견해 등이 대립하고 있다. 어느 쪽이든 당시 신라와 백제의 국경 최전방이었음은 분명하다.
- 함께 참전했던 사령관 변품(邊品)은 해론이 전사한 뒤 어떻게 되었는지 기록이 없다. 다만 해론이 선봉에서 전사할 동안 본진을 지휘했을 것으로 보이나, 전투의 최종 승패에 대해서는 명확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