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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수왕/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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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내치
2.1. 평양 천도2.2. 국호 변경2.3. 숙청 가능성
3. 외정
3.1. 남진 정책
3.1.1. 하슬라/실직 침공(450년~468년)3.1.2. 백제 침공과 한성 함락(472년~475년)3.1.3. 신라 침공과 미질부 전투(481년)3.1.4. 한반도 남부에 대한 군사 작전(481년~491년)
3.2. 왜국과의 외교 혹은 정벌 가능성3.3. 북연 멸망전과 중국 남북조 국가들과의 외교3.4. 지두우 분할 시도

1. 개요

長壽王, 諱巨連.一作璉. 開土王之元子也. 體貌魁傑, 志氣豪邁.
장수왕(長壽王)은 이름이 거련(巨連)이다.연(璉)이라고도 한다. 광개토왕의 맏아들이다. 몸과 얼굴이 크고 잘생겼으며 뜻과 기운이 호걸을 초월하였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장수왕조-에 나오는 첫 문구. #

보통 아버지인 광개토대왕의 활발한 정복사업을 접고, 뒷수습과 남진정책으로 선회한 수성군주의 이미지가 강하다. 실제로도 광개토대왕만큼 정복에 적극적인 타입은 아니었고 내치에 주력한 시기도 분명 있었지만 실상은 한국사 전체를 통틀어 아버지 말고는 비견할 대상을 찾기 힘든 패왕 타입의 정복군주였다.

광개토대왕이 412년에 승하한 후, 즉위하여 맨 처음 한 일은 만 24개월 동안 3년상(만 24개월~27개월)을 치른 것으로 추정된다. 이것은 광개토대왕의 능비에서 알 수 있는데, 광개토대왕릉비에는 부왕이 412년에 승하했고, 414년 9월 29일에 능비를 이장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삼국사기》에서는 413년 10월에 승하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삼국사기》와 광개토대왕릉비의 1년 격절을 토대로 보정하면 정확히 24개월 동안 장사를 지냈음을 역산할 수 있다. 무령왕릉 지석에서도 승하한 연도와 장사를 지낸 연도가 딱 27개월의 차이가 나는 것을 보아, 당대에 널리 통용되었던 관습임을 알 수 있다.
비문을 포함한 다른 기록을 종합할 때 장수왕은 즉위 당시 나이가 18세에 지나지 않아[1][2] 왕으로서의 본격적인 권위를 발휘하기 대단히 힘들었다고 판단된다. 이런 그가 아버지의 3년상이 끝나는 시점에 맞추어 이 비를 세울 당시에는 21세였다. 동양의 전통적인 왕위 계승 시스템에서는 선왕의 3년상이 끝나는 시점이 어떤 면에서는 진정한 의미에서 친정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이로 본다면 장수왕은 아버지가 죽고 즉위한 바로 그때 실질적인 왕이 아니라 이 비를 세우는 그 시점에서 진정한 고구려 왕으로 등극했다고 할 수 있다.
〈廣開土王碑, 父王의 運柩 앞에서 靑年王이 보낸 경고〉, 김태식[3] #
북쪽으로는 몽골 초원으로 말을 달려 지두우 분할을 시도하는 동시에 몽골계 거란족과 퉁구스물길족을 압박하고, 서쪽으로는 요서 일대에서 북연의 절대 투항을 이끌어내 황제 풍홍을 포함한 풍씨 황족과 인구를 접수하고, 외교전략을 병행하여 북위를 상대로 기싸움에서 유리함을 선점했으며, 남쪽으로는 한강 유역과 충청도는 물론이고, 경상도 일대와 왜까지 매우 적극적인 군사 활동을 벌였다.
파일:고구려의 지도(장수왕 시대).png
조상들의 두 원수였던 북연백제의 수도인 화룡성과 위례성을 각각 불태우고, 북연 황제 풍홍과 백제 개로왕까지 죽여 조상들의 한을 풀었다. 게다가 신라의 실성 마립간의 죽음과 눌지 마립간의 즉위에도 관여했다는 기록도 있고 백제의 비유왕이 고구려에게 암살당했다는 설도 있다. 최소 2명, 최대 4명이나 다른 나라 군주를 바꿔버린 무시무시한 사람이었다. 저 시기 백제는 신라의 지원이 없었다면 고구려에게 짓밟혀 멸망할 뻔했고, 신라도 백제의 지원이 없었다면 경주까지 고구려군의 공세를 받을뻔 했다.

이때 고구려는 당연히 잘 나갔지만 장수왕은 아버지가 넓힌 땅, 흡수한 북연의 인구, 평양성 천도로 인해 생겼을지도 모르는 신·구세력 사이의 대립, 물길의 발흥, 북위의 압박, 나제동맹을 맺어 살아남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백제와 신라의 도전 등 신경쓸 일이 많았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장수왕은 해결 과제를 훌륭하게 수행해 고구려는 본격적으로 과거와 급을 달리하는 동아시아의 강대국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clearfix]

2. 내치

삼국사기》에는 내정 관련 기록이 빈약하여 아래 서술할 개로왕이 북위로 보낸 국서에 나오는 선전 문구를 바탕으로 당시 고구려는 장수왕이 왕권 강화를 위해 귀족들을 압박하여 전성기를 이루었다고 추측하기도 한다.

414년, 만주 일대에서 광개토대왕릉비를 건립했다. 아버지인 광개토대왕의 업적을 기려서 고구려 고씨 왕실의 권위를 세우고, 주변국과의 관계를 규정하며, 광개토대왕 때 입안된 수묘인 제도를 성문화하기 위한 조치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손자인 문자명왕 때 건립됐다는 설도 있다. 광개토대왕릉비의 건립 시점을 장수왕 시기로 보느냐, 문자명왕 시기로 보느냐는 건립 목적과 관련되어서 중요한 부분이라 논란이 많다.

파일:신라 호우명 그릇.jpg파일:호우명 그릇 탁본.jpg

경주시 호우총에서 나온 그 유명한 호우명 그릇도 장수왕 3년(415년)에 제작하였다. 바닥에 새긴 글귀는 '을묘년국강상광개토지호태왕호우십'(乙卯年國岡上廣開土地好太王壺杅十)으로 '국강(國岡) 위에 있는 광개토대왕릉용 호우'라는 뜻이다. 한마디로 광개토대왕제사를 지내기 위해 만든 제기인데, 광개토대왕 장례식 1주년 당시 신라 사신이 기념식에 참석하였다가 하사품으로 받아 온 것으로 추측된다.

419년 여름, 나라의 동쪽에 홍수가 나서 사신을 보내 위문했다.

424년, 나라에 풍년이 들어 왕이 군신들에게 잔치를 베풀었다.

2.1. 평양 천도

파일:고구려 군기.svg
고구려의 도성 및 궁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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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본도읍기
동명성왕 ~ 유리명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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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명왕 ~ 장수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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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학궁 / 청암리 토성[3] 대성산성 장안성

||<-2><tablewidth=100%><tablebgcolor=#fff,#1f2023><rowbgcolor=#000> 별궁 || 전설 ||
두곡 이궁 구제궁 수정성

||<tablewidth=100%>[1] 졸본성이 구체적으로 어떤 성곽인지는 아직 알려지지 않음
[2] 졸본의 평지성으로 추정되는 토성
[3] 평양 천도 이전에 존재했던 평양의 평지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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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성 천도와 관련해서는 이미 아버지 광개토대왕 때부터 준비하고 있었다. 이는 《삼국사기》나 광개토대왕릉비 등 관련 기록을 통해 유추해 볼 수 있는데, 재위 2년째에 평양에 절을 무려 9개나 지었다는 기록이 나오고, 광개토대왕릉비에서는 영락 9년과 14년에 평양을 순시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고대 사회에서 은 사회망을 구축하는 기관으로서의 역할도 담당했다. 때문에 단기간에 평양에 사찰을 9개나 세우고 왕이 직접 남쪽에 위치한 곳을 순시했다는 기록이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공덕비'에서 나오는 점을 감안해 보면 평양 천도 정책은 광개토대왕 시절부터 진행중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장수왕은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그의 정책을 이어받아 평양성 천도를 단행했다. 고구려는 건국 시기부터 수도 체제를 평시에 사용하는 평지성과 전시에 사용하는 산성을 따로 짓는 이중 수도 체제를 유지해 왔는데 평양으로 천도를 하였을 때에 전시용으로 대성산성도 건축했다.

기존 고구려의 수도였던 국내성동천왕 때의 경험으로 그다지 방어하기 좋지 않은 곳이라는 게 입증된 데다[4] 척박하기까지 해서 생산력도 떨어지는 곳이었다. 이곳의 겨울 평균 기온은 -11℃. 철원보다 겨울에 6도 정도 낮은데 '냉대 동계 건조 기후(Dw)+(한반도보다) 내륙 지방+(평양성보다) 고위도'라는 악조건 때문에 여름엔 철원보다 더운 데다 춘천 평야의 반에 불과한 좁은 평야 말고는 모두 산이다.

반면 평양성은 황해도의 평야와 인구 밀도를 바탕으로 높은 생산력을 가지고 있음은 물론 고조선의 후기 수도였다는 점과 낙랑군의 치소 조선현이었던 덕에 당대 동방(중원에서 산해관 밖의 동쪽)의 정치, 문화, 경제 중심지였다. 심지어 평양성은 대동강과 평양성이 사방을 휘감고 있어서 북쪽의 을밀대만 제외하면 한반도에서 거의 유일하게 천연 해자가 성을 둘러싸서 기능하는 읍성이다. 사실상 평야 한 가운데에 있는 섬이라고 봐도 마찬가지이다. 심지어 을밀대가 있는 모란봉은 절벽 지형이라 천혜의 조건으로 방어하기도 좋은 곳이기도 하다.

더구나 광개토대왕이 백제, 신라, 가야, 왜의 세력을 미리 꺾어두었기 때문에 이들로부터 불의의 습격을 당할 위험도 적었다. 결과적으로는 후대에 돌궐, 북주, 물길(말갈), 신라, 백제로부터 전방위적인 압박을 받았다.[5] 6세기 말부터 신라에게 한강 유역을 빼앗긴 뒤로는 평양성이 국경과 인접해 버리는 위험한 꼴이 된다. 이건 100년 가까이 훗날의 이야기이니 장수왕이 예상하기 어려운 부분이긴 하지만.[6] 이 때 고구려는 신라가 우리 대신 백제를 공격하라는 밀약을 맺었고, 그 결과 일어난 사건이 관산성 전투이다.

평양성은 떠오르는 강자 북위를 방어할 만한 위치였다. 이 때 건설한 궁궐이 바로 안학궁(安鶴宮)이다. 그런데 안학궁은 이미 수·당 시대에는 사라진 한나라 미앙궁 양식의 궁궐 조성과 북위 궁전에서 보이는 태극전, 동•서당제 등이 확인된다. 이는 안학궁이 수·당 이전에 지어졌다는 것이며, 북위의 낙양궁이 지어진 때가 5세기 후반이므로 이를 참고한 것으로 보이는 안학궁이 (북위 낙양궁이 지어지기도 전인) 장수왕 15년(427)에 건설된 것으로 보기는 어렵기에 안학궁을 장수왕 대의 궁전으로 보지 않는 견해 역시 존재하고 지지를 얻고 있는 상황이다. 즉 북위ㆍ한 등 중국 건축 양식을 수용해서 지었다는 얘기다. 이러한 중국 양식은 후에 수, 당에도 계승되고 더 나아가 발해ㆍ신라ㆍ일본 수도 건설까지 영향을 끼치게 된다.

그리고 장수왕은 큰할아버지 소수림왕태학을 세운 것처럼 지방에도 학교를 세우는데, 그것이 바로 '경당'이다. 경당도 태학처럼 유교 경전을 가르치는 건 물론 무술ㆍ사냥ㆍ군사 교육도 담당했다.

2.2. 국호 변경

평양 천도를 기점으로 고구려의 국호는 고려(高麗)로 굳어지기 시작했다. 충주 고구려비에서 고려태왕(高麗太王)이라는 명문이 등장하므로 '고려'라는 국호는 이미 이전부터 존재했으나 공식적으로 굳어진 시기는 장수왕 시기로 본다. 중국 측 기록에서도 장수왕 재위 시기부터 고구려를 '고려'라고 일관적으로 기록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최소 고려 시대부터는 고구려라는 국호가 다시 보편화되어 있었다. 《삼국사기》가 좋은 예이다. 현대의 학계에서도 왕건이 건국한 고려 왕조와의 혼란을 피하기 위해 여전히 고구려라 부르고 있다. 조경철 등을 비롯한 다소 급진적인 소수의 연구자들은 아예 고대고구려중세고려를 각기 전고려, 후고려라 불러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이미 오랜 세월 동안 한민족고구려고려로 구분해 온 마당인지라 별다른 반응은 없었다.

단 한국 외에선 얘기가 달라지는데 중국을 비롯한 국외에서는 의외로 이 고구려와 고려의 구분이 되지 않는 사례가 존재하였다. 이 때문에 이후 왕건의 고려 왕조가 등장하자, 이 고려 왕조가 옛 고구려의 계승 의식을 표방한 수준이 아니라 정말로 옛 고구려 왕조가 부활한 것처럼 착각한 사례도 있었다.

2.3. 숙청 가능성

5세기 전반기 이래로 고구려의 자체 기록은 다소 빈약해진다. 개로왕472년북위로 보낸 국서에서
"今璉有罪, 國自魚肉, 大臣彊族, 戮殺無已. 罪盈惡積, 民庶崩離."
"지금 연(璉, 장수왕)의 죄로 고구려는 어육(魚肉)이 되었고, 대신들과 호족(豪族)들의 살육(殺戮)됨이 끝이 없어 죄악이 가득히 쌓였으며, 백성들은 이리저리 흩어지고 있습니다."
라는 문구로 고구려 공격 당위성을 주장한 기록이 있어 상상력을 자극한다.

임용한은 이 문구에서 착안하여 <토크멘터리 전쟁사>에서 고구려의 내분이 존재했다고 주장한다.
"장수왕이 평양으로 천도하고 나서 굉장히 오랫동안 내전에 휩싸이게 됩니다. (중략) 의외로 장수왕의 기록이 없어요. 기록이 없다는 것은 그 때 굉장히 혼란스러웠다는 거에요. 아마 평양 천도 하고 굉장히 심각한 내적 갈등이 있었던 것 같아요. 왜냐하면 국내성파와 평양 세력 간의 갈등은 고구려가 멸망할 때까지 끝나지 않거든요."
임용한, <토크멘터리 전쟁사> 中 #

좀더 상세하게 생각해 보자면, 일본서기에서 언급되는 안원왕 내지 안장왕 시기의 기록에서는 매우 직설적인 고구려의 내전이 확인된다. 평양성에서만 수천 명이 죽었고 도성이 초토화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와 같은 정황을 통해 적어도 고구려에는 정치적인 갈등이 명백하게 잔존했음을 알 수 있다. 장수왕 대에는 문제가 없었으리라는 보장도 없는 만큼, 숙청 가능성이 매우 높은 것이 사실이다.

3. 외정

내정이나 외정이나 고구려 자체의 사료가 거의 없다. 외정 관련 기록은 주변국에서 남긴 것들이 퍽 있기 때문에 그나마 사정이 나은 편. 특히 중국에서는 조공, 책봉 기록의 양이 후덜덜하고 중국과의 교섭 과정에서 벌어진 사소한 사건들도 주목할 만 하다. 일본에서는 신라가 고구려로부터 이탈하는 과정을 꽤 자세하게 기록으로 남겼다. 장수왕 대로 추정되는 시기의 고구려와 일본 간 교섭도 기록으로 남아있긴 한데 《일본서기》의 이주갑인상 때문에 정확하게 장수왕 시기의 기록인지는 확실하지가 않다.

3.1. 남진 정책

파일:/100/sub/133000_0.jpg 파일:장수왕의 한반도 남부 침공 지도(수정).png
흔히 교과서에서는 위와 같이 간략한 지도로 묘사되지만, 실제로 장수왕 시기 한반도 남부는 고구려군의 발길이 닿지 않은 곳이 거의 없을 정도로 털린다. 백제는 수도를 함락당하고, 우술군(현 대전광역시 일대)를 넘어 현재 모산성(현 전라북도 남원시) 일대에도 고구려군이 당도했다는 기록이 나오며[7], 신라 수도 목전인 미질부(현 포항시)까지 군대를 이끌고 침공하는 등 백제-신라-가야[8]- 이상 4개국이 뭉치지 않으면 막을 수가 없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3.1.1. 하슬라/실직 침공(450년~468년)

당시 고구려의 속국이었던 신라에서 사냥을 하던 고구려 장수가 암살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후 신라에서 주둔하고 있었던 고구려 장군이 자신의 신라인 부하에게
"우리나라가 너희 나라를 멸망시킬 것이다!"
라고 불어서 경각심이 생긴 신라 측에서 신라 내 고구려 장수들을 몰살해버렸다. 이렇게 신라는 국내에서 일시적으로 고구려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그러나 신라는 갓 고구려의 영향력에서 벗어난 터라 아직 단독으로 고구려에게 비빌 국력은 안 되었기에 백제와 힘을 합쳐 나제동맹을 체결하고, 장수왕의 남진에 대항했다. 이 때는 둘을 합쳐도 고구려보다 강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대륙의 북위, 유연 등과 국경을 접한 고구려백제-신라-가야소백산맥을 끼고 방어하는 선을 완전히 제압할 정도의 전력을 투사하기 힘들었다.

장수왕 시기에 신라와 고구려의 국경 지대에서 잦은 마찰이 발생했는데 450년에는 신라의 하슬라(현 강원도 강릉시) 성주 삼직(三直)이 고구려의 변경 성주를 죽이는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다. 468년 장수왕은 신라를 공격하여 하슬라와 실직성(현 강원도 삼척시)을 점령했다.

3.1.2. 백제 침공과 한성 함락(472년~475년)

한편 백제의 개로왕북위에게 밀서를 보내 고구려를 침략해 달라고 요청한 사실이 472년 고구려로 전해졌다. 화가 난 장수왕은 조상들의 원수를 갚기 위한 방법으로 우선 첩자인 승려 도림을 백제로 파견하여 개로왕에게 접촉하게 한 뒤 왕권을 강화한다는 목적으로 궁궐 등을 짓게 하여 국고를 낭비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백제가 무너진 진짜 이유는 국고 낭비 때문이 아니라 도림의 꼬드김에 넘어가 개성 일대 방위선을 소홀히 하고, 한성 방어에만 불필요한 인력을 낭비했다는 것이 최근 대두되는 중이다.
사실 도림을 이용한 내부 분란뿐 아니라 고구려군은 침공과 관련하여 차근 차근 준비되었음이 고고학적인 증거로도 확인이 된다. 남한 지역에서 남진 정책과 관련한 고구려 유적들은 발굴 조사 누적이 상당히 진행되었고, 이러한 인식을 바탕으로 양주 분지에 위치하는 여러 보루들까지도 현재 조사하고 있다. 보루를 통한 고구려의 진출 방식은 한탄강, 임진강을 기점으로 이뤄진 것으로 추정한다. 황해도에서 주도권을 장악한 고구려는 임진강, 한탄강에서 백제와 국경을 형성하고, 이를 넘어 양주 분지 일대를 장악한 뒤 나아가 아차산 일대 보루군을 설치하면서 한강 유역 공세를 펼쳐 475년 한성을 공략한 것으로 추정한다.

다시 도림 이야기로 돌아와서, 도림의 분탕질에 의해 백제의 국고가 바닥날 낌새를 보이자 475년 장수왕은 백제를 전격적으로 침공해 수도 위례성을 함락하여 개로왕을 비롯한 여러 부여씨 왕족들과 귀족들을 죽여 조상들의 원수를 갚았다. 이 때 비로소 우리가 교과서에서 흔히 보는 고구려의 남방 강역 확장이 이루어졌는데 직접 출병한 장수왕의 나이는 82세. 일본서기에서는 이 때 아예 '백제가 멸망하였다'라고 표현한다. 도성이 함락되고 국왕이 비참하게 살해된데다 국가의 기원이자 중심지인 한강 유역을 통째로 상실했으니 이런 표현도 무리가 아니다.

21년(475년) 가을 9월, 고구려왕 거련(巨璉, 장수왕)이 병사 30,000명을 거느리고 와서 한성을 포위하였다. 임금이 성문을 닫고 나가 싸우지 못하였다. 고구려 사람들이 병사를 네 방면의 길로 나누어 협공하고 또 바람을 이용해서 불을 질러 성문을 태우니, 사람들이 두려워 성 밖으로 나가 항복하려는 자도 있었다. 임금은 상황이 어렵게 되자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기병 수십 명을 거느리고 성문을 나가 서쪽으로 달아났는데, 고구려 병사가 추격하여 임금을 살해하였다.
삼국사기》 제25권 <백제본기> 제3 -개로왕 #-

(475년) 가을 7월, 고구려 왕 거련(巨連, 장수왕)이 몸소 병사를 거느리고 백제를 공격하였다. 백제 왕 경(慶, 개로왕)이 아들 문주(文周)를 보내 구원을 요청하였다. 임금이 병사를 내어 구원하였으나, 병사들이 당도하기도 전에 백제는 이미 함락되었고 경(慶) 또한 살해당하였다.
삼국사기》 제3권 <신라본기> 제3 -자비 마립간 #-

백제기》(百濟記)에서는 "개로왕(蓋鹵王) 을묘년(475년) 겨울, 고구려[狛]의 대군이 와서 대성(大城)을 7일 낮 7일 밤을 공격하였다. 그리하여 왕성이 함락되고 마침내 위례(尉禮)를 잃었다. 국왕과 대후(大后), 왕자 등이 모두 적의 손에 죽었다"고 적고 있다.
일본서기웅략기 20년: 고구려가 백제를 쳐서 없앰 #
위례성 함락 때 살아남은 백제 왕자 부여문주는 고구려가 위례성을 침공하자 나제동맹을 맺고 있던 신라에게 지원군을 요청하기 위해 파견되었다. 신라 지원군을 이끌고 돌아오던 부여문주는 이미 위례성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도 포기하지 않은 채 위례성으로 진격하기를 선택했고, 위례성으로 진격하자 한강 이북으로 일단 물러간 고구려군을 마주하게 된다.

이에 문주왕은 백제-신라-가야 연합군의 비호 아래 위례성에서 즉위했던 것으로 보이며 1개월 동안이나 천도를 심사숙고했다. (한성백제박물관 발간 백제사 시리즈 11권 《한성에서 웅진》으로 참고.) 하지만 별다른 방법이 없었기에 결국은 남하하여 웅진성에서 진을 치고 항전 태세로 들어가자 장수왕은 파죽지세로 남진하여 웅진성 인근 대전까지 내려와 월평산성을 쌓았다.[9]
파일:attachment/goguryusung123.png
자세한 기록은 없지만 웅진성과 대전 사이에서 장수왕의 고구려군과 나제 연합군간의 치열한 교전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결국 장수왕의 고구려군을 저지하는데 성공한 백제는 멸망 위기에서 가까스로 살아남게 된다.

3.1.3. 신라 침공과 미질부 전투(481년)

이 시기 신라는 언제 고구려군이 수도를 기습할 수 있다는 판단을 하고 있었다. 위의 웅진-대전 전투 중에는 자비 마립간(제20대)이 명활산성에 임시로 들어가 항전을 대비도 하였고 꾸준히 축성을 하는 등 고구려 침공에 대비했다. 당시 신라의 소지 마립간(제21대)도 바보가 아닌지라 481년 2월에 고구려와의 최전선인 비열성(현 함경남도 안변군 일대)에 행차해 병사들을 위로하고 위로품을 나눠주며 전선 방비에 나섰을 정도였다. 문제는 상대가 당대 동아시아 최강의 위력을 자랑하던 장수왕의 고구려군이었다는 점이었다.

개로왕을 처단한 뒤 숨을 고른 장수왕은 481년 3월에는 신라에 대한 대대적인 침공을 진행한다. 1개월 전까지 신라 자비왕이 직접 최전방 순시를 하며 방비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장수왕은 침공 직후 신라 북변 7개 성을 순식간에 점령하고, 미질부(彌秩夫: 현재의 포항시)까지 진격에 성공한다. 지도상으로 보면 알겠지만 경주 바로 위가 포항이기 때문에 신라 입장에서는 수도가 불타기 직전 상황까지 내몰린 것이었다. 후에 642년에 백제에게 당한 대야성 사건이랑 유사한 상황인 셈.

이에 소지 마립간백제가야에 도움을 요청했고 백제와 가야가 호응, 신라-백제-가야 연합군이 고구려군과 맞서 싸워 미질부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며, 장수왕의 신라 침공은 무위로 돌아간다.
三月, 高句麗與靺鞨入北邊, 取狐鳴等七城, 又進軍於彌秩夫. 我軍與百濟·加耶援兵, 分道禦之, 賊敗退. 追擊破之泥河西, 斬首千餘級.
(481년) 3월, 고구려가 말갈과 함께 북쪽 변경에 쳐들어와 호명(狐鳴)[10] 등 일곱 성을 빼앗고, 또 미질부(彌秩夫)에 진군하였다. 우리 병사가 백제, 가야의 구원병과 함께 길을 나누어서 그들을 막았다. 적이 패하여 물러가자 니하(尼河)[11]의 서쪽까지 추격하여 쳐부수고 1,000여 명의 목을 베었다.
삼국사기》 제3권 <신라본기> 제3 -소지 마립간 #-

3.1.4. 한반도 남부에 대한 군사 작전(481년~491년)

이후 경기 이남 지역이 다소 혼란해진 상황에서 신라가 한강 진출을 시도하며 고구려와 마찰을 빚는다. 이 때 고구려는 위 보루들을 보강하여 신라와의 전쟁에서 활용하기도 하였다. 기록은 간단하게 나오지만 《삼국사기》나 《조선왕조실록》 〈지리지〉를 보면 경상북도 거의 절반 정도에서 고구려 행정구역이 기록되어 있다.
秋七月, 高句麗侵北邊, 我軍與百濟合擊於母山城下, 大破之.
(484년) 가을 7월, 고구려가 북쪽 변경을 침범하였기에 우리 병사가 백제군과 함께 모산성(母山城) 아래에서 공격하여 크게 쳐부수었다.
삼국사기》 제3권 <신라본기> 제3 -소지 마립간 #-
고구려군이 심지어 모산성[12][13]에서 등장하고, 왜국도 고구려에게 공격을 받아 출항이 힘들 정도였으니 각각 백제, 신라, 반파국(대가야) 왕성 반나절 거리까지 고구려 국경이 밀고 들어와 한반도 남부의 상황이 얼마나 절박했을지 짐작이 간다. 그러니까 장수왕은 단순한 '남진정책'에서 그친 것이 아니라, 1세기도 안 되어 국가의 중심을 한반도 중심도시인 평양으로 이주시키고, 구 백제세력의 근거지인 한성 백제를 아예 멸망시켰으며, 한반도 남부의 세력구도를 고(구)려와 남방 군소국가들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3.2. 왜국과의 외교 혹은 정벌 가능성

한편 《일본서기》에서는 고구려가 백제 한성을 함락시켰을 때, 고구려 장수들이 더 치고 내려가 백제를 완벽하게 멸하자고 건의하자 장수왕이 백제 뒤에 왜가 버티고 있다는 식으로 핑계를 대면서 거부하는 장면이 나온다. 또한 장수왕이 뜬끔없이 백제가 왜국의 속국이라는 것은 다 알고 있는 상식이라고 말한다. 물론 이는 《일본서기》 특유의 국수주의적 사관임을 생각해 보면 단순 허세이니 하고 넘어갈 대목이다. 그냥 수사 다 치우고 백제-신라-가야-왜까지 본격적으로 합세한 반고구려 동맹을 고려한 것으로 보면 된다. 참고용으로 해당 내용을 아래에 적어 놓는다.
20년 겨울에 고구려 장수왕이 크게 군사를 일으켜 백제를 쳐서 없앴다. 그런데 몇몇의 남은 무리들이 창고 아래에 모여 있었다. 무기와 양식이 이미 다 떨어지고 근심하여 우는 소리가 매우 심하였다. 이때 고구려의 여러 장수들이 왕에게 "백제의 마음가짐이 범상치 않습니다. 신들이 볼 때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제 정신을 잃습니다. 다시 덩굴이 뻗어 자라듯 되살아날까 두렵습니다. 뒤쫓아 가서 제거해야 합니다."라고 말하였다. 이에 왕이 "안 된다. 과인이 듣기에 백제는 왜국의 관가(官家)가 된 것이 그 유래가 오래되었다. 또한 그 왕이 들어가서 천황을 섬긴 것은 사방에서 모두 다 아는 사실이다."라고 말하니, 그만두었다.
일본서기》 <웅략기> 20년: 고구려가 백제를 쳐서 없앰 #[14]
일본서기》에 의하면 고구려에서 온 사신이 왜왕 앞에서 외교 문서를 읽는데, 내용이 '고구려왕이 교한다(=가르친다)'는 뜻이어서 왕자가 해당 문서를 찢어버렸다고 한다. 왜국 측이 남조에게 보낸 외교 문서에서는 고구려가 왜국의 변경을 약탈하고 사신을 차단해서 제대로 사신을 보낼 수 없다고 하소연하는 내용이 나온다. 장수왕도 아버지 광개토대왕의 외교 정책을 이어받아 왜를 적대시했던 것이다.

3.3. 북연 멸망전과 중국 남북조 국가들과의 외교

파일:external/cfs2.blog.daum.net/download.blog?fhandle=MEVSdVpAZnMyLmJsb2cuZGF1bS5uZXQ6L0lNQUdFLzAvMTEuanBnLnRodW1i&filename=11.jpg
1989년 중국의 화가 청빙이(成秉藝, 성병예)가 그린 장수왕 상상도.[15]
파일:요양 고씨 장수왕 영정.gif
요양 고씨가 그린 장수왕의 영정.[16]

한국사와 동아시아사를 배우면 교과서에서 잘 나오는 장수왕의 업적이 바로 이것이다.

우선 탁발선비부가 건립한 북위의 위협에 효과적으로 대처했다. 모용선비부의 후연(後燕)이 멸망한 직후, 건국된 한족의 북연(北燕, 407년 ~ 436년) 제3대 황제인 소성제 풍홍은 북위가 북연을 멸망시키려 하자 고구려에 구원을 요청했다(436년). 이때 장수왕은 갈로맹광의 지휘하에 군사 수만명을 파견해 화룡성의 주민들을 구출한 뒤 화룡성을 약탈, 방화하고 돌아왔다.

북연 황제 풍홍은 고구려로 망명했다가 분수를 모르며 대접을 바라다가 화가 난 장수왕한테 천대를 받게 되었다.
"龍城王馮君, 爰適野次, 士馬勞乎."
"용성왕 풍군이 여기까지 와서 노숙을 하고 있으니 병사와 말이 피곤하겠소."
북연의 황제 풍홍이 고구려로 도망쳐 왔을 때 사신을 통해 건넨 위로의 말.

용성은 북연의 수도 화룡성을 뜻하고, 풍씨는 북연의 국성이다. 엄연한 황제국의 황제였음에도 불구하고 연왕도 아닌 용성왕이라 대놓고 낮춰 부른 것은 국왕도 아니고 군왕(郡王)급으로 취급한 것이라 굉장히 모멸적인 호칭이다. 그 이후 행적을 봐도 조롱에 가까운 발언이었을 듯하다. 조상들의 원수 국가인 관계로 그렇게 대해도 할 말 없을 상황이었다.

장수왕은 북위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풍홍을 보내지 않았다. 충분히 할 일을 했다는 것. 이후 풍홍은 남조인 유송(劉宋, 420 ~ 479년)에 망명을 요청하면서 장수왕한테 까불고, 결국 화가 폭발한 장수왕은 손수(孫漱)와 고구(高仇) 등 부하 장수들을 보내 풍홍과 그의 자손 10여 명을 죽였다. 고조 할아버지 미천왕을 비롯하여 조상들의 한을 어느 정도 푼 셈이다. 풍홍은 특이하게도 한민족에게 처형된 유일한 중국 황제이다. #

이후 남북조 사이에서의 등거리 외교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데 유송 문제 유의륭이 북위를 공격하고자 하자 말 800필을 유송에 지원해 유송과 화해하고, 북위를 압박하기도 했다. 이때 유송의 사신 왕백구(王白駒)가 북연군의 잔당 7,000여명을 데리고 풍홍 일가를 죽인 고구려 장수인 고구를 죽이고 손수는 생포하는 일이 벌어졌다.

당시 왕백구를 장수왕 측에서 생포했지만 외교관계를 고려해서인지 송으로 압송시켰는데, 이때 손수도 풀려난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송 입장에서도 당대의 강국이자 북조 견제에 필수적이었던 고구려에 대놓고 적대할 순 없어서, 장수왕이 왕백구를 죽이라고 압박을 하자 그를 송환하여 가둔 뒤 몰래 풀어주었다.

송으로서는 왕백구를 생포한 일이 자신들에 대한 정면도전으로 여길 수 있는 일이었으나 이러한 정도로 일을 끝내고 장수왕에게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은 것을 보면 이 시기 고구려의 국력이 상당히 강력했다고 볼 수 있다. 《남제서》에서는 고구려가 워낙 강국이라 마음대로 남북조와 동시에 교류하는데도 어찌할 수 없었다고 한다. 또한 북위는 고구려 사신의 관저를 남제에 버금가게 지었으며, 사신들의 의전 서열도 동등하게 했는데 이에 대해 중원 국가도 아닌 고구려를 그렇게까지 대접할 수 있냐고 남제 사신들이 화를 내도 북위는 그나마 이것도 당신들을 대접해준 것이라고 대꾸한 일화가 있다.[17]

이후 북위는 고구려 왕실과의 혼인을 바랬지만 장수왕의 한 신하가 "북위는 저런식으로 북연을 안심시킨 뒤 침공했다."라고 하는 바람에 없던 일이 되었다. 그러나 10여 년 뒤에는 역으로 고구려 측에서 북위에게 요구하여 혼인이 성사된다. 이때 고구려에서 북위로 건너간 자가 문소황후 고씨로, 그녀의 오빠 고조(高肇)는 북위의 권력자가 되어 북위의 정계를 주물렀다. 그래서인지 《삼국사기》에 장수왕이 승하했을 때 북위 황제가 애도의식까지 치렀다고 되어 있다.

참고로 일부에서는 장수왕이 북위에 역대 황제의 계보를 바치도록 요구하였고, 이에 응한 북위가 황실 계보를 바쳤다는 식으로 알려져 있지만 이는 해석의 오류로 기실 북위가 신하국으로서 계보를 고구려에 바친 것이 아닌 고구려가 봉물을 바치면서 일종의 조공국으로서 북위 황실에 대한 피휘(避諱)를 하기 위한 이유로 원한 것이다.

여하간 이 당시 고구려는 북위, 유송보다 강성한 것은 아니었지만 서로가 함부로 건드릴 수 없는 수준의 비교적 강한 국력을 자랑했다. 이때 고구려는 중원의 북위, 강남의 유송, 유목세계의 유연과 함께 동아시아 4강 체제를 구축하는 데 성공했다. 중국의 국가들은 경쟁적으로 고구려 왕에게 최대한의 높은 작위를 내리면서 고구려를 자신들 편으로 끌어들이려고 꾸준히 노력했다. 중국 국가들이 내린 작위 기준으로 장수왕보다 높은 위치에 오른 국왕도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

이를 능가했던 건 기껏해야 원 간섭기 몇몇 고려 왕들 정도가 고작이다. 원간섭기 고려 왕은 부계로만 고려인 피가 간신히 이어졌지, 모계로 치면 원나라 보르지긴 황금씨족의 일원이었다. 당연히 혈통상 국력보다 작위가 높을 수밖에 없었다. 즉 이는 왕실의 위상이 높은 것뿐이었기에 국가 자체의 위상이 높았던 고구려의 경우와는 그 결이 다를 수 밖에 없다. 고구려가 북위를 공격하고, 북위 사신의 고구려 통과를 불허하며, 대놓고 양다리 외교를 펼치는 등 피책봉국답지 않은 태도를 보여도 북위는 고구려를 함부로 대하지 못했을 지경이었다. 토욕혼, 유연, 유송은 틈만 나면 괴롭히면서도 고구려는 한 번도 건드리지 않았다.

이러한 장수왕의 외교정책은 후대 왕들인 문자명왕, 안장왕, 양원왕, 평원왕의 정책에도 영향을 끼치며, 수가 남북조 국가들을 멸망시킬 때 남북조 조공 정책은 끝난다.

3.4. 지두우 분할 시도

파일:attachment/장수왕~1.jpg
빨간 선은 원정로가 아니라 답사로다.

이후 479년에 몽골 고원의 유연과 모의하여 현재의 대흥안령(大興安嶺) 산맥에 위치한 유목부족 국가인 지두우의 분할을 시도했다. 유연과 지두우 분할 모의를 했다는 기사만 남아있고, 그 경과에 대해서는 기사가 남아있지 않기 때문에 성공 여부는 알 수 없다. 다만 지두우와 고구려 사이에 있었던 거란이 고려(물론 고구려)의 침략을 받아 대릉하 인근으로 도망했다는 기록이 2건이나 확인되는 것으로 보아 성공 여부는 차치하고서라도 분할 시도는 했던 것 같다.

헌데 그때 유연은 북위에게 털리고 있었던 터라 지두우에 원정을 보낼 사정이 못 되었고, 이후에도 지두우나 물길이 여전히 사신들을 보내 외교활동을 하는걸로 보아서는 실패했거나 완전히 삼키지는 못했을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다. 확실한 건 지두우 원정 성공 여부를 떠나서 시도는 이루어졌고 그 와중에 거란이 고구려에게 침략당하여 당시 내몽골의 유목민 세계에 혼란을 야기했다는 것이다. 종종 내몽골에서 발견되는 고구려 계통의 성터를 이 사건과 연관짓기도 한다.1994년 발굴 당시 기사

자세한 확인을 위해서는 고고학적 발굴 조사가 더 필요하지만, 중간 지역인 요서 지역에서 중국 정부가 협조하지 않기 때문에 조사가 쉽지 않은 상황이다. 이 때문에 고고학계에서는 단순히 양식의 전파일 가능성도 있다고 보는 의견도 있으며, 국사 교과서 <역사 부도> 표기에는 거의 나타내지 않되 흥안령 일대의 초원 지대를 장악하였다는 서술을 남김으로써 두리뭉실하게 다루고 있다.


[1] 광개토대왕이 20세일 때 장수왕이 출생했기에 부자 사이의 나이차는 정상적이다. 다만 광개토대왕이 40세를 못 넘기고 죽었기 때문에 아들 장수왕 역시 나이가 어릴 수밖에 없었을 뿐이다.[2] 이를 보면 비슷하게 18세에 즉위한 즉시 사병을 국가군으로 통합한 뒤, 백제 북방의 10개 성을 집어 삼킨 광개토대왕이 얼마나 괴물이었는지를 강하게 실감할 수 있다.[3] 홍익대 가야사 전문가 김태식과 동명이인의 역사 전문 기자이다.[4] 다만 전반적인 흐름을 보면 국내성의 위치가 그 함락을 결정지었다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아무리 튼튼한 성이라도 왕이 전병력을 몰고 나갔다가 사실상 전멸했는데 굳건하게 지켜질 가능성은 낮았다.[5] 고구려가 전방위적인 압박을 받은 건 국가의 위치상 안고 갈 수밖에 없는 문제였고 따라서 공세적인 정책을 통해 빠르게 주변의 약한 나라들을 흡수하는 수밖에 없었으나 상시 있던 대륙 세력들의 위협 때문에 북방병력을 모두 한반도 남부로 돌리는 것 자체가 쉽지 않았다.[6] 사실 이 모든 걸 고려해도 대병력, 그것도 순식간에 수도를 칠 수 있는 대규모 기병을 운용하던 대륙세력들의 위협에 비하면 훨씬 나은 수준이었다. 백제, 신라는 평소 동원하는 병력이 수천 단위, 그것도 보병 위주로 운용하던 국가였기 때문에 한반도의 밀도 높은 산지를 이용해 방어하면 적은 병력으로도 비교적 수월한 방어가 가능했다. 그에 비해 고구려는 삼국시대에서 유일하게 십만 단위를 넘는 병력 동원이 가능했다. 실제로 고구려의 큰 성들은 요동반도와 압록강 유역을 중심으로 촘촘하게 설치되었고 남부전선에서는 수는 물론이고 규모도 비교적 작다. 이후 멸망한 것도 대륙 통일국가인 수, 당이 상식을 초월한 대병력을 수시로 동원해 요동과 압록강 방어선을 아예 정면으로 무식하게 뚫어버린 탓이 컸다.[7] 모산성 위치 비정은 연구에 따라 다르다.[8] 이 시기 가야는 대개 반파국(대가야)을 말한다.[9] 고구려 보루들은 서술한 3개 권역에 주로 분포하고 있다. 한강 이남 대전 월평동 유적(목책), 안성 도기동 목책, 청주 남성골 산성(목책)에서는 공통적으로 고구려 토기들이 나오는 점으로 보아 백제가 형성했던 방어 시설을 고구려가 지속 남하하여 점령한 뒤 재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가장 남쪽인 대전 월평동 유적에서 고구려 토기가 나오는 상황은 웅진성 상황이 얼마나 다급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웅진성 바로 옆인 지금의 세종특별자치시 나성동 유적에서도 고구려 토기가 나온 사례가 있다.[10] 정확한 위치는 불명이나 청송군 일대(이병도), 또는 영덕군 일대로 추정하고 있다.[11] 정확한 위치는 불명이나, 고구려의 신라 침공 때마다 언급되는 장소라는 점을 근거해 학계에서는 고구려와 신라의 최전선 부근이었던 강릉시 인근의 하천으로 추정하고 있다. 남한강 상류 인근, 강릉의 성남천(城南川), 대관령이 발원지인 연곡천(連谷川), 평창군 일대로 추정하기도 한다.[12] 아막성의 위치는 현 전라남도 남원시. 《삼국사기》 〈백제본기〉에서는 아막산성(阿莫山城) 또는 모산성(母山城)으로, 《삼국사기》 〈귀산열전〉에서는 아모성(阿暮城)이라고도 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참고로 '막'(莫)자가 '영'(英)자와 비슷해 아영성(阿英城)으로도 기록했는데 아영면(阿英面)이란 이름이 바로 여기서 딴 것이다. #
파일:baekje_map_ge.jpg
[13] 단, 현 학계에서는 이 기사에 나오는 모산성은 충청북도 진천군(이병도), 또는 경상북도 의성군(천관우)으로 추정하는 주장이 힘을 받고 있다. 신라 진평왕, 백제 무왕 기록에 등장하는 모산성을 아막성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14] "쳐서 없앴다"라는 표현을 쓰고 있는데, 당시 주변국들은 개로왕 사후 기존의 백제가 멸망했다고 여겼던 듯하다.[15] 한국 측 초상화나 표준 영정은 없다. 청빙이는 역대 고구려 왕들의 초상을 그렸는데 하나같이 유인원같은 얼굴을 하고 있다. 장수왕은 그나마 나은 편. 후술하듯 《삼국사기》에도 장수왕의 외모를 좋게 평가한 부분이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실제로는 외모가 뛰어났던 것으로 추정된다.[16] 중국 하얼빈시 요양 고씨 집성촌에 보관되고 있다.# 이 영정을 그릴 때 요양 고씨 연장자 두 사람의 골상을 토대로 하얼빈 화가가 보고 이를 기준으로 그렸다고 한다.#[17]남제서》(南齊書)에 따르면 489년(장수왕 77년) 북위 효문제가 사신을 대우할 때 남제의 사신과 고구려의 사신을 동등하게 대우해 남제의 사신들이 항의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또한 《삼국사기》에도 북위가 사신들의 숙소를 배치할 때 남제를 첫 번째로, 고구려를 두 번째로 두었다는 기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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