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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3-16 02:09:44

김예(통일신라)



1. 개요2. 생애3. 기타

1. 개요

金銳
? ~ 868년

통일신라시대 말기의 반란자. 문성왕의 사촌동생(從弟)이다. 최종 관등은 이찬.

2. 생애

855년 제작된 창림사무구정탑원기(昌林寺無垢淨塔願記)에 따르면 창림사 무구정탑을 건립할 당시 관등은 사지(舍知)[1]였고 관직은 행(行) 웅주(熊州) 기량현령(祁梁縣令)이었다고 한다. 또한 무구정탑 건축을 책임하는 탑사(塔使)라는 임시직을 맡았었다.

이후 경문왕 시기인 868년 정월 이찬 김현(金鉉)과 함께 반역을 꾀했다가 처형당했다.

3. 기타

김예와 함께 반역을 꾀했던 이찬 김현이 김예와 金 부수를 공유하기 때문에 김현이 김예의 동생일 수도 있다. 866년 이찬 윤흥(允興)도 남동생들인 숙흥(叔興), 계흥(季興)과 함께 모반을 계획했다 들켜서 처형당한 전례가 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문성왕의 조부 김균정의 아들은 정교부인의 아들 신무왕(문성왕의 아버지)과 조명부인의 아들 헌안왕밖에 기록에 남아있지 않은데, 국왕경응조무구정탑원기에서 김예가 문성왕의 사촌동생이라 나온 시기가 문성왕 재위기간인 855년이라 헌안왕의 아들로 유력시된다. 그러나 헌안왕 사후 아들이 아니라 장녀인 영화공주를 여왕으로 즉위시키자는 논의가 있었지만 여자라는 이유로 영화공주의 남편인 경문왕이 즉위한 것을 고려하면 김예가 헌안왕의 아들이 맞을 경우 적자가 아니라 서자였을 가능성이 높다.

이름의 특성상 궁예(弓裔)와 관련이 있으리라 추정되는데, 삼국사기에 따르면 궁예는 헌안왕 또는 경문왕의 서자이며 銳와 裔가 당시로서 통자라서 김예와 궁예는 서로 동명이인이기 때문이다. 물론 김예는 868년에 반란을 일으키려다 실패하고 사형당했으니 동일인물은 아니겠지만, 활동 시기상 경문왕의 서자로 더 유력시되는 궁예의 아버지에 대한 기록이 헌안왕 서자설과 경문왕 서자설로 엇갈린 이유가 김예와 궁예가 동명이인이라서 오인된 것일 수도 있다. 이 경우 헌안왕의 서자가 김예, 경문왕의 서자가 궁예가 된다. 여담으로 헌안왕 서자설의 경우 장보고의 딸이 845년 문성왕의 차비가 될 뻔했다가 실패한 뒤 김의정(헌안왕)의 첩이 되어 궁예를 낳았다는 가설도 있는데, 이 경우 헌안왕의 서자가 왕위계승에서 밀린 이유는 장보고의 외손자라서 그랬을 가능성이 높다.

다만 김예의 아버지가 헌안왕이 아닐 수도 있다. 헌안왕의 어머니 조명부인김균정과 혼인한 시기가 822년이며, 헌안왕의 장녀 문의왕후가 841년생임을 고려하면 김예가 헌안왕의 서자일 경우 빨리 잡아도 840년대생이 되는데 855년에 행(行) 웅주(熊州) 기량현령(祁梁縣令)을 맡고 868년 이찬이 되기에는 너무 젊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김균정은 정교부인과 먼저 혼인해서 신무왕을 낳았지만 정교부인이 김균정과 이혼하고 헌덕왕의 태자와 재혼해서(...)[2] 처제였던 조명부인과 재혼했다고 하는데, 이 때문에 신덕왕의 아들인 문성왕(810~820년대생)과 동생인 헌안왕(822년 전후생)의 나이가 가까웠음을 고려하면 김균정에게 기록에 안 남은 아들이 더 있었을 수도 있고, 종제(從弟)라는 특성상 6촌이나 8촌 형제일 가능성도 있다.

물론 신라 사회의 특성상 김예가 헌안왕의 서자가 맞는데 그냥 아주 빨리 출세했을 수도 있다. 또 삼국사기보다 훨씬 빨리 편찬된 속일본후기에서는 장보고가 846년이 아니라 841년 11월에 사망했다고 하며, 헌안왕이 822년 전후생이고 장보고의 딸과 처음 혼약이 있던 신무왕 839년에 사망했음을 고려하면 김예의 어머니가 장보고의 딸이든 아니든 830년대 말~840년대 초에 태어났다고 가정하면 855년 당시에는 10대 중후반으로 이미 신라에서 관직 가지고 사회생활 시작할 나이라서 불가능한 건 아니다.
[1] 17관등 중 13위에 해당된다.[2] 김균정의 아버지 김예영의 형이 헌덕왕의 아버지 김인겸이라서 헌덕왕의 태자는 부계로 김균정의 5촌 조카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