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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fff> 김대우 金大羽 | Kim Dae-woo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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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00년 7월 10일 |
평안남도 강동군 | |
사망 | 1976년 4월 22일 (향년 75세) |
본적 | 서울특별시 종로구 삼청동 |
가족 | 동생 김호우 장남 김광연 며느리 이영희 차남 김광순 딸 김숙연 |
학력 | 강동공립보통학교 (졸업)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 (졸업) 경성공업전문학교 (광신과 / 졸업) 규슈제국대학 공학부 (채광학과 / 졸업) |
주요 경력 | 평안북도 박천군수 조선총독부 학무국 사회교육과장 전라북도지사 경상북도지사 |
비고 | 친일파 708인 명단 등재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 등재 친일인명사전 등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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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제강점기의 관료, 친일반민족행위자.1930년대 말 민족 말살 통치기에 만들어진 <황국신민서사>를 제정 입안한 장본인으로 유명하다.
2. 생애
2.1. 초기와 독립운동
1900년 7월 10일 평안남도 강동군에서 태어났다. 1913년 3월 평안남도 강동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17년 3월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를 졸업했다. 1918년 경성공업전문학교 광산학과에 입학했으며, 1919년 2학년에 재학 중이던 당시 3.1 운동이 일어나자 이에 가담하여 탑골공원 시위에 참여했다가 체포되어 징역 7개월형에 형집행정지 3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다가 석방되었다.1921년 3월 경성공업전문학교 광산학과를 졸업한 뒤, 일본으로 유학하여 규슈제국대학 공학부 채광학과에 입학했고, 1925년 3월 졸업했다. 이후 같은 해 조선총독부 관리 채용시험에 합격하면서 적극적인 친일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2.2. 친일 행적
1926년 2월 조선총독부 임야조사위원회 서기로써 관직을 시작하여 내무국 지방과 속을 겸임했다. 1928년 2월 군수로 승진해 평안북도 박천군수에 임명되었으며, 같은 해 11월 쇼와 덴노 즉위기념 대례기념장을 받았다. 1930년 2월 평안북도 이사관으로 승진했고, 3월부터 평안북도청 내무부 산업과장으로 근무했다.1932년 2월 경상남도 산업부 산업과장으로 전임되었으며, 이때 물산진열관장을 겸임하다가 10월부터 산업장려관장을 지내기도 했다. 같은 해 10월 조선곡물상조합연합회 경상남도협찬부 부회장이 되었고, 11월에는 경상남도 농촌지도위원회 간사를 지냈다. 1934년 1월 조선총독부 학무국 사무관으로 승진하여 사회과장으로 재직했으며, 이때 중추원 통역관과 서기관을 겸임했다. 같은 해 2월부터 1936년 5월까지 조선사편수회 간사를 지내기도 했다. 1934년 8월 최린 등 천도교 신파들을 중심으로 조직된 친일단체 시중회의 발기인으로 참여했으며, 1935년 12월에는 유만겸, 이승길, 김동원 등과 함께 평양에서 신사참배 문제와 관련한 간담회에 참석했다.
1936년 5월 학무국 사회과 사무관 자격으로 명륜학원 학감 사무취급과 제생원 서무과장 사무취급에 임명되었다. 같은 해 6월에는 조선보물고적명승천연기념물보존회 위원, 고적조사위원회 위원 및 간사, 조선간이생명보험심사회 위원, 농촌진흥위원회 위원 및 간사에 위촉되었고, 과학지식보급회 고문에 임명되었으며, 9월에는 임시재해대책조사위원회 간사에도 위촉되었다. 같은 해 10월에는 조선총독부 학무국 사회교육과장으로 직책이 변경됨과 동시에 임명되었다. 당시 황민화 정책의 첨병이었던 학무국 사회교육과장 자리는 일본 고등문관시험 출신들이 앉는 요직이었다. 이 직위를 재직할 당시 그는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퇴근도 미룬 채 매일 밤 10시까지 시국인식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계획 수립에 열중했다고 한다. 1937년 8월 중일전쟁의 정당성을 홍보할 목적으로 전국에 조선인 유력자를 파견하는 시국강연회를 계획하고 실시한 것이 그 계획의 대표적인 사례 중 하나다.
황국신민서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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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해 10월에 그는 그 유명한 <황국신민서사>를 탄생시키게 된다. 당시 학무국 촉탁 이각종에게 문안을 작성하도록 하고, 이후 김대우가 실무를 담당해 황국신민서사를 제정하는 계획을 입안하면서 끝내 문안을 완성시킨 것이다. 그는 그렇게 만들어낸 <황국신민서사>를 각급 학교 등에서 암기, 제창하도록 하고 출판되는 모든 서적에도 반드시 실을 것을 강요했다. 같은 해 11월 『매일신보』에 「국민정신작흥주간실시에 당하야」라는 제목의 친일 논설을 3회에 걸쳐 기고했다. 그 밖에도 「영춘수상–국체명징여교학쇄신」(『경학원잡지』 1937년 2월호), 「시국과 사회교화」 (『매일신보』 1938년 1월 5일자), 「도의동양의 신건설 — 정신총동원조선연맹의 진로」 (『매일신보 』 1938년 9월 27일자), 「역사적 대국민운동 —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의 진로」 (『매일신보』 1938년 9월 28일~29일), 「지원병사 제군에게, 십만 돌파의 소식을 듣고 전 조선 청소년 제군을 격려하는 글」 (『삼천리』 1940년 7월호) 등 각종 친일 기고문을 여러 차례 배포했다.
1937년 2월 조선총독부박물관건설위원회 간사에, 6월 금강산탐승시설조사위원회 간사에, 7월 조선중앙정보위원회 간사에, 조선총독부자원위원회 간사에, 그리고 1938년 2월 시국대책준비위원회 간사에, 4월 저축장려위원회 간사에, 5월 제17회 조선미술심사위원회 간사 등에 위촉되었다.
1938년 5월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이사에 선임되었으며, 10월에는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이 주최한 제1회 비상시국민생활개선위원회 제1부 전문위원으로 선출되었고, 같은 해 조선청년단 단장을 지냈다. 1939년 3월 전라남도 참여관 겸 내무부 내무부장으로 전임되었고, 이후 전라남도농촌진흥위원회 위원과 조선금융조합연합회 전라남도지부 감리관, 전라남도 방공위원회 위원 등을 지냈으며, 같은 해 5월부터 1940년 10월까지 광주보호관찰심사회 예비위원을 지냈고, 10월에 훈6등 서보장을 받았다. 1940년 1월에는 전라남도 임금위원회 위원에 위촉되었다. 전라남도 참여관 겸 내무부 내무부장 재직 시절에 중일전쟁 지원과 관련된 업무를 적극 수행한 것으로 알려진다. 같은 해 9월 경상남도 참여관 겸 산업부장으로 전임되었으며, 같은 시기 경상남도 미곡통제조합연합회 회장, 경상남도 농회 회장, 경상남도 황민연성도장 장장, 경상남도 임금위원회 위원 등에 발촉되었다. 이후 11월에 열린 기원2600년축전 기념식전 및 봉축회에 초대받고 일제로부터 기원2600년축전기념장을 받았다.
1941년 2월 국민총력 경상남도연맹 경제부 부장에, 3월 경상남도 방공위원회 위원에 임명되었다. 1943년 8월 전라북도지사로 승진했으며, 9월 전라북도 농회 회장으로 임명되어 활동했다. 같은 해 10월 일제로부터 훈5등 서보장을 받았다. 1944년 4월 조선총독부 시가지계획위원회 임시위원에, 9월 징용을 관장하는 단체 조선근로동원원호회 전라북도지부장에 임명되었으며, 같은 해 국민총력 전라북도연맹 회장을 지내기도 했다. 그렇게 계속 승진을 거듭하다가 태평양 전쟁의 종전과 8.15 광복을 두 달 앞둔 1945년 6월 경상북도지사로 전임되었고, 7월에 경상북도 소득심사위원회 회장, 조선군의용대 경상북도 총사령에도 임명되었다.
그의 빠른 승진 비결은 일제에 대한 특별한 충성이었다고 평가받는다. 같은 친일 관료 출신 이항녕의 증언에 따르면 자신이 경상남도 하동군수로 있을 때 경상남도 산업부장으로 근무하던 김대우가 군별로 공출미를 강제 할당한 것은 물론, 보고된 재고량을 못 믿겠다며 할당량을 터무니 없이 늘려 수탈을 조장한 바 있다고 한다.
2.3. 해방 이후
해방 당시 그는 일본 천황의 패전방송을 들으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그리고 경상북도 도청의 직원들을 모두 집합 호출 시켜 부른 뒤, 연단에 올라가 일제의 패망 소식을 발표하고, 그 후 발표가 끝나자마자 전 직원들과 함께 엄숙하게 신사참배를 올렸다. 그러고나서 도청 직원들에게 "조선의 참된 독립은 어렵다. 오늘 이후 일본과 조선은 손을 맞잡고 동양은 단결하여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라면서 훈시를 했다. 이후 조선총독 아베 노부유키의 지시에 따라 임시로 경무국장 직무대리에 임명되어 행정권 인수 인계 절차를 위한 송진우, 안재홍 등 조선인들과의 협상에 참가했고, 경상북도지사에 유임되었다. 같은 해 9월 2일 이후 미군정이 조선총독부의 행정 기능을 그대로 인수하면서 10월 19일까지 경상북도지사로 근무하다가 도지사의 고문직으로 물러났다.미군 제40사단과 서울의 군정은 그의 유임을 주장했다. 그동안 제40사단의 지원을 통해 경상북도 내 각 군과 타 지역 관리들의 해임, 파면을 진행하면서 일본인들을 제거하고 조선인들을 지명하여 자리에 앉혔다. 하지만 인사 교체 과정에서의 혼란으로 인해 10월 11일 미군정으로 보고가 올라가는 바람에 그는 곧 친일파라는 평판을 이유로 도지사 직에서 해임되었다.
미군정 시기 도지사로 근무할 때 공금 3만원을 횡령한 것이 드러나 1946년 2월 업무상횡령혐의로 특별범죄심사위원회 조사부에 소환되었으나 곧바로 도주했고, 도피 생활을 하는 동안 지명수배까지 되었지만 결국 흐지부지로 끝이 났다.
1948년 5월 10일 초대 제헌 국회의원 선거에 무소속으로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1949년 2월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 체포되어 9월 4일 반민특위 특별검찰부 소속 곽상훈에 의해 공민권 정지 3년형을 구형받았으나, 같은 달 16일 반민특위 특별재판부의 결심공판에서 증거 불충분으로 무죄 석방되었다. 이후 반민특위가 해체되면서 공민권 정지 3년형을 구형받은 것 외에는 어떠한 처벌도 받지 않았다.
이후 각종 스캔들에 부딪혔다. 1951년 조선총독부 관료로 조선에서 지방관을 역임한 일본인 고시진이 비밀리에 부산에 방문하여 장택상과 만났다가 족청계의 폭로로 장택상이 총리직에서 물러난 사건이 있었다. 이때 고시진의 밀입국과 부산 밀항의 관련자로 지목되어 1952년 9월 28일 경찰에 긴급 구속되었다. 10월 22일 구류기간이 만류되었으나 다른 이유로 계속 구속되었고, 이에 구속의 부당함을 주장하면서 장준택을 변호인으로 선임하여 항소했다. 끝내 1953년 2월 8일 불기소 및 유예처분을 받고 풀려났다.
1960년 7월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 민주당 공천으로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6월 22일에는 그가 민주당 공천을 받고 국회의원에 입후보한 것이 문제시되기도 했다. 일각에서는 장면 당시 민주당 대표가 그의 입후보를 권고하고 도왔다는 의혹도 존재한다. 1961년 7월 5.16 군사정변이 일어난 후 박정희 체제의 군정이 민주당 관련자들을 용공으로 몰아 재판할 당시 민주당 인사들을 도와 일본 약품을 밀입수 하려고 했다는 혐의를 받기도 했다. 1963년 11월 제6대 국회의원 선거에 다시 한 번 출마했으나 역시 낙선하게 되면서 출마한 모든 선거에서 처참한 3연패를 맞게 되었다.
1976년 4월 22일 향년 7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