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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1-25 20:58:06

명군이 되어보세!/개변된 역사/4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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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군이 되어보세!
등장인물 (1부 · 2부 · 3부 · 4부 · 이재석 · 김상희)


1. 개요
1.1. 철도
2. 대아주3. 대유주4. 대미주
4.1. 대한령 미주
4.1.1. 북미주4.1.2. 남미주4.1.3. 중미주4.1.4. 서미주4.1.5. 동미주4.1.6. 빙주 4.1.7. 동빙주4.1.8. 동변
4.2. 영국령 캐나다4.3. 서반아령 신서반아멕시코(맥고국)4.4. 프랑스령 누벨프랑스 → 누벨프랑스 제국(신불랑국)4.5. 미주합중국4.6. 중앙아메리카 연방 공화국 → 중앙아메리카 연맹4.7. 아이티 공화국
5. 대삼주6. 대상주7. 오세아니아

1. 개요

슈타인호프 작가의 웹소설, 명군이 되어보세!의 4부에서 작중 세상에 생긴 변화들을 소개하는 문서.

1853년 안남 분할 시점 세계지도

1.1. 철도

대한으로부터 시작된 철도가 유럽으로도 전파되나 원 역사도 그렇지만 궤간 통일이 이뤄지지 않은 상태이다.

2. 대아주

2.1. 대한

대한국
大韓國
파일:대한민국 국기(1945-1948).svg 파일:조선(명군이 되어보세)의 국기.png
국기 군함기
위치 한반도, 요서주, 북한 10도[2],
북변[3]], 동토[4],
구주총관부, 대남도, 주산 군도,
아모 열도, 연역주,
빙주, 북미주[5], 남미주, 동미주,
동변[6], 중미주, 서미주,
누손주[7], 해사도, 영귀 제도
번국 하와국, 조홀국, 술루국, 유구국, 불나이, 사라왁, 남월국, 중월국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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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국 1392년 8월 13일
훈민정음 반포 1446년
경국대전 반포 1474년
무자호란 1588년
경인왜란 1590년
을미동정 1595년
대한 수립(칭제건원) 1632년
경신대기근 1670년 ~ 1671년
을병대기근 1695년 ~ 1697년
무인지변 1698년
계미남변 1703년 ~ 1707년
수도 황도 한성부(皇都 漢城府)
민족 한민족, 여진족 등 퉁구스인,
한족, 일본인, 대만 원주민, 묘족, 말레이인, 필리핀인
유럽계 백인
에스키모, 아메리카 원주민, 하와이 원주민
언어 근대 한국어
문자 한자, 국문
종교 유교(성리학, 국교),
불교, 천주교, 덕성도, 무속 신앙
정치체제 전제군주정
국가원수 태황(太皇)(임금)
국성 전주 이씨(李)
연호 건원(建元) (1632년 ~ 1650년)
연가(延嘉) (1651년 ~ 1678년)
건복(建福) (1679년 ~ 1699년)
건흥(建興) (1700년 ~ 1740년)
원강(元康) (1741년 ~ 1775년)
영태(永泰) (1776년 ~ 1782년)
원평(元平) (1783년 ~ 1829년)
광덕(廣德) (1830년 ~ 1834년)
흥선(興宣)[8] (1835년 ~ )
통화 대한통보, 푼(分)<전(錢)<냥(兩)
[clearfix]

2.1.1. 정치

2.1.2. 언어

2.1.3. 지역

2.1.4. 인구

1823년 시점에서 본국 인구는 남한(한반도) 2200만 명, 북한(북방영토) 1200만 명으로 나온다. 그외 미주 8백만명, 누손주 등 해외영토까지 합치면 약 5천만 명 이상이라고 한다. 한양 인구는 100만 명.

4부 256화에서는 남한만 3000만에 근접하고 북한을 포함한 본국 전체는 4500만, 북구주 180만, 대남도 650만, 미주 1200만, 누손주 600만으로 총합 7100만 명 정도로 인구가 증가했다고 언급된다.

4부 466화에서는 남한 인구가 3천만을 돌파했고, 북한 지역은 2천 3백만, 미주는 1천 6백만, 누손주 8백만, 대남도 7백만, 북구주 2백만으로, 북변까지 포함하면 대략 9천만명에 달한다고 언급되었다.

1850년 시점에선 인구조사로 확정하지만 않았을 뿐 사실상 1억을 돌파하였다.

2.1.5. 소수민족

재석은 빙의한 이후 4번의 삶을 사는 동안 소위 '전투민족'을 육성해 왕가의 창과 방패로 거느리는 로망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했는데 기병 중심인 오도리와 왜인여진, 보병 중심인 대남병과 하와병으로 이를 이루는 데 성공했다. 특히 오도리와 왜인여진은 복무 기간 연장 이전 평시 30만인 대한 상비군의 절반 가까이, 기병 전력의 과반을 차지하는 태황의 사병으로 태황의 윤허 하에 군부에 협력해주는 체제를 유지 중이다.

2.1.6. 군사

2.1.7. 치안

2.1.7.1. 마약

2.1.8. 경제

2.1.9. 외교

2.1.10. 사회

2.1.11. 교육

2.1.12. 문화

2.1.13. 식생활

2.1.14. 의학

2.1.15. 과학, 공학

2.1.16. 환경, 생물

2.1.17. 종교

2.1.17.1. 불교
대한에 여러 종교가 유입된 지 오래지만 이미 불교가 대한에 뿌리내린지 오래고 원 역사에 비해 숭유억불 기조도 유해졌기 때문에 여전히 대한에서 가장 신자가 많은 종교이다. 다만 사대부 남성 신자는 드물고 주로 백성들이나 여성들이 믿는다. 대한의 불교 교단은 대승 불교이나 안남처럼 상좌부 불교를 적대하지는 않는다. 상좌부 불교 유적인 천축사를 적극적으로 보존하려 하고 상좌부 불교를 믿는 섬라, 승가라와의 교류도 활발하다.

한반도 불교의 역사를 살펴보면 종교 집단임과 동시에 삼국시대부터 국가의 조세, 행정, 군사와 밀접하게 이어진 이익 집단이기도 했는데 대한이 강대국으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이런 면모가 한층 강해졌다. 크리스트교 선교사들이 서구 열강 등에 업고 하던 행동을 불교는 교단 자체 무력집단까지 꾸려서 하는 통에 교리에 보복을 명시한 덕성도보다 더 호전적인 모습을 보인다.
2.1.17.2. 예수교
2.1.17.3. 회회교
2부에서 이기빈에 의해 조선으로 유입된 흑룡군 소속 흑인 무슬림들은 음주를 즐기는 나이롱 신자들이었고 3부에서 대한과 오스만이 국교를 수립한 이후 오스만에서 정기적으로 파견한 이맘들은 대한의 세속주의 분위기에 물들어 똑같이 나이롱화(...)되었다. 대한 본국 내에서 이슬람 신자가 유의미하게 있는 곳이라야 모로족이 준동하는 누손주 남부 갈로도 정도 밖에 없어서 대한 내에서 존재감이 미미하다.

재석이 석유 산지 확보를 위한 페르시아만 진출의 사전 작업으로 쿠웨이트에 상관을 설치하고 불나이를 5번째 번국으로 받아들여 이슬람 번국도 생겼으며, 벵골 전쟁 이후 대한이 서벵골과 비하르 등 인도 북부를 직접 통제하기로 함에 따라 그 지역에 거주하는 최소 수백만 명의 무슬림이 대한의 통제망 아래로 편입되면서 대한 내 이슬람 인구가 단박에 늘어나게 생겼다.

그리고 크림 전쟁에서 대한이 러시아를 지원하는 것을 우려한 오스만 술탄 압뒬메지트 1세가 재석에게 맏공주를 후궁으로 보내고 지참금으로 쿠웨이트를 대한에 양도하겠다고 제안한다. 후궁 운운한 건 내명부 제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하렘 제도와 동일시해서일 가능성이 높은데, 이를 위해 무슬리나를 이교도 남성과 혼인시키지 못한다는 율법을 배제하고 딸의 신앙만 존중하면 남편이 개종 안 해도 된다는 파격적인 조건을 내걸 정도였다. 이에 흥선제는 딸뻘인 압뒬메지트 1세의 장녀를 후궁으로 받아들이기 뭐해서 계획을 바꿔 자신의 막내 며느리로 받아들이고[66] 혜왕 이순을 쿠웨이트 번왕으로 삼지만 실제 통치는 현지의 에미르 가문[67]을 총독으로 삼아 그대로 맡기는 방식으로 타협한다. 흥선제가 오스만 공주의 이슬람 신앙을 존중하기로 약속한 만큼 대한 내 이슬람 신자도 이전보다 활기를 띌 것으로 보인다.
2.1.17.4. 덕성도
3부에서 타락의 조짐을 보여 사이비 종교가 되어 태평천국의 난과 비슷한 사건을 일으킬 것이라는 독자들의 추정과 달리 덕성도 자체는 정상적인 종교로 발전하여 기성 종교들 중 하나가 되었으며 대신 배상제회가 예수교가 아닌 덕성도의 분파로서 등장했다. 규모상 불교, 예수교에 이은 3위 교단이며 원 역사에서 전성기 시절의 천도교와 비슷하며 서로 다른 거대 종교의 특성을 혼합해 탄생한 신흥 종교가 기성 종교로 성공적으로 정착한 점은 시크교와 유사하다.

천주교에 힌두교 교리가 섞이면서 일견 비슷하면서도 확연히 다른 묘한 차이를 보이는데 가령 천주교의 예수는 '오른 뺨을 치거든, 왼쪽 뺨마저 돌려 대라'고 가르치는데 덕성도의 예수불은 '하지만 원수가 칼을 겨누면 너도 칼을 겨누라'는 구절이 추가로 붙어있다. 다툼을 피하고 비폭력 저항을 강조하는 천주교 교리에 비해 한층 적극적인 자기 방어를 주장하는 것이 특징. 덕성도가 중국과 안남에서 당한 모진 탄압을 생각하면 필요한 교리이기도 하다.

초대 대종사 김춘삼의 후손이 등장하는 것을 보면 성직자의 결혼을 허용하는 듯하다.

독자들이 4부에서 가장 놀랐던 것 중에 하나로 덕성도의 기성종교화를 꼽았으며, 기성종교화된 덕성도의 교리가 의외로 괜찮아서 빠르게 교세를 확장해 자리 잡을 만했다는 평을 내렸다.
2.1.17.4.1. 배상제회
태평천국의 홍수전이 만든 덕성도의 이단 분파. 홍서당의 난 이후 황건적의 재림 취급받으며 사교로서 배척되었다. 주로 묘노들이 믿는다. 전쟁이 끝나고 태평천국과의 관계가 개선된 이후 풍운산이 내한했을 때 공개적으로 신앙을 드러내지만 않으면 처벌은 하지 않겠다는 정도로 인정받았다.
2.1.17.5. 만신교
힌두교. 대한에서는 수많은 신들을 섬긴다고 해서 만신교(萬神敎)라고 부른다. 인도의 토착 종교라 대한 본국에는 유입되지 않았으나 천주교, 불교, 만신교를 혼합한 덕성도가 대한의 기성 종교가 되면서 간접적이나마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고 조홀국에 유입된 인도인 노동자들이나 옛 참파국의 후손인 참파인들 중에는 믿는 이들이 있다.

음식을 만드는 재료에 그다지 종교적 의미를 두지 않는 대한에서는 천향환(카레)의 기름 문제 때문에 세포이들이 벵골 전쟁을 일으켜 성지순례 중이었던 대한인들까지 학살하는 사태를 보고 '편식 때문에 남의 나라를 침공해 학살을 저지르는 광신자들' 수준으로 이미지가 악화되었다.

그래도 벵골 전쟁 이후 대한이 사태에 대한 보상 겸 벵골과 인도 사이의 완충지대로 서벵골과 비하르 등 인도 북부를 직접 통치하기로 결정하면서 거의 본국 인구에 버금가는 숫자의 만신교 신자들을 다스리게 된 만큼, 대한은 민심을 다스리는 차원에서 대한의 통치를 순순히 따르고 사티 등 비문명적인 악습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금지시키는 선에서 현지인들의 만신교 신앙을 존중하기로 한다.

2.1.18. 연도별 주요 사건

스포일러가 될 정도로 자세하게 기술될 경우 문피아 측에 대한 이익 침해로 항목이 삭제될 위험이 있으므로 지나치게 자세한 기술은 자제 바람.

2.2. 대한의 국외 영토(대한령 미주 제외)

2.2.1. 대남주

1850년 기준 인구는 약 770만. 속지 출신 대과 합격자 중 절반이 대남도 출신이라고 하며 누손주와 마찬가지로 경화사족 출신의 분가도 많기 때문에 정승 등 고관대작을 역임한 이들도 있다. 다만 이들은 한양에서 유학하고 한양에서 과거를 보기 때문에 과거 합격자 통계에서는 늘 한양 출신으로 잡힌다. 일종의 통계의 함정.

2.2.2. 북구주

여전히 대한령이지만 명목상으로는 일본이 관리를 위임한 상태가 유지되고 있다. 일인들의 성향상 문과보단 무과 합격자가 많이 나온다고 한다. 북구주 거주 한인들은 경상도로 가서 공부해서 과거 응시 때 경상도 연고로 집계되는 경우가 많다. 일종의 통계의 함정. 1850년 기준 인구 210만.

2.2.3. 누손주

감영은 남중성이다. 대한이 스페인에게서 매입한 괌, 팔라우, 북마리아나 제도 등 스페인령 태평양 제도 역시 누손주 관할이다. 인구는 1850년 기준 약 900만으로 미주의 절반 정도이나 그 절반은 토인이다. 대남도와 마찬가지로 경화사족 출신의 분가도 많아서 과거 합격자가 꽤 있으며 정승 등 고관대작을 역임한 이들도 있다. 다만 이들은 한양에서 유학하고 한양에서 과거를 보기 때문에 과거 합격자 통계에서는 늘 한양 출신으로 잡힌다. 일종의 통계의 함정.

흑단, 티크, 마닐라삼 등 본국에선 나지 않는 특산물이 많이 나며 각종 자원도 풍부하여 본국의 경화사족에서 소유·경영하는 농장이나 광산이 많다. 특산물인 누손주산 흑단으로 만드는 고급 가구는 대한 황실에서 주변국들에게 선물할 정도로 그 퀄리티가 매우 뛰어나다.

수많은 섬과 산으로 이뤄진 험준한 지형에 대한에 적대적인 토인부족과 도적떼가 산재해 있다보니 누손주 도독은 미주대총관과 마찬가지로 현지 순검대와 속오군에 대한 지휘권 행사가 가능하다. 군사 경험 쌓는 게 가능한 몇 안 되는 고위 문관직이라 문관 출신 육군대신들의 이력을 올라가보면 대개 누손주 도독을 역임했다.

2.2.4. 해사도

요충지인 해사도는 대한 직할령으로 병력 8천명과 함선 30여척이 항상 주둔하여 말라카 해협의 제해권을 확보하고 조홀국을 위협하는 아체 술탄국섬라국을 견제하고 있다.

2.2.5. 산번 직할령

몽족을 비롯해 안남의 남진정책으로 인해 평지를 안남인들에게 빼앗기고 산지로 밀려난 산번 부족들은 안남에 대한 원한으로 임자남정 당시 대한의 편에 섰는데, 이들은 여러 소수민족으로 이루어진 연합체여서 어느 한 부족의 대표를 왕으로 세우기 난감하였기 때문에 대한은 이들이 사는 땅을 남월국에서 떼어내 독립국을 세우는 대신 대한 본국에서 대관을 파견해 다스리는 대한의 직할령으로 삼는다. 직할령의 산번 부족들은 대남도 산번과 마찬가지로 대한에 충성을 바치는 대신 각 부족별로 자치를 누린다.

2.3. 대한의 번국

4부 초반 시점 술루국, 하와국, 조홀국이 공식적인 대한의 번국이고 안남은 대한과 후송에 이중으로 칭신한 명목상의 번국이었다. 술루국은 동남아 동부 해역 중간에서 토착 이슬람 세력과 해적을 밀어내며 드넓은 산악과 섬으로 이루어져 빠른 정복이 불가능한 누손, 나아가 동남아로의 안정적 세력 투사에 기여했다. 하와국은 본국과 미주를 잇는 징검다리이자 북대동양 해상 패권을 책임지는 기착지로 가동했으며 조홀국은 대한의 목구멍이라고 할 수 있는 말라카 해협의 안정을 유지해 대한의 행정적, 물적 부담을 크게 덜어주었다. 이후 4부가 진행되면서 광덕제 시절에 명목상 독립국이지만 사실상 대한의 속국이나 다름없던 유구국이 칭제를 내려놓고 대한의 네번째 번국으로 들어왔고, 이어서 1850년대부터 대한이 본격적인 동남아 서열 정리에 들어가면서 보르네오 북부의 불나이와 사라왁, 대한이 안남을 정벌한 후 안남을 분할하면서 세운 중월국과 남월국이 새로운 번국으로 들어오며 대한은 무려 8개의 번국을 거느리는 대제국이 된다. 불과 20여 년 만에 3개에서 8개로 수가 크게 늘어났다.

의전 서열은 초대 국왕이 건흥제의 서장자이며 동남아 지역으로 세력 확장에 큰 공을 세웠고 이후로도 100년간 대한 옆에서 변함없이 싸워온 술루국이 가장 높고 그 다음부턴 들어온 순서대로 하와국, 조홀국, 유구국, 불나이, 사라왁, 중월국&남월국 순이다.

번국의 외교권은 영사 수준으로 제한되며 공식적으로 조공을 면제받은 유구를 제외한 번국들은 1년 2회 조공의 의무와 상국이 요청시 군사를 내어 원호할 의무를 진다. 본국에서 집정 대신 파견 유무는 번국별로 차이가 있으나 남&중월을 제외하면 있어도 총독 역할과는 거리가 멀다.[83]

원나라의 속국이던 고려시대와 칭제건원 이전 명의 조공국이었던 조선 당시에 상국의 지나친 내정간섭, 과도한 공출과 수탈, 화번공주나 칙사의 갑질과 진상에 시달렸던 경험으로 을의 설움을 너무나도 잘 알던 대한은 중화권 국가들을 반면교사 삼아 휘하 번국들을 대상으로 무력을 앞세운 복속과 억압이 아닌 온건한 회유정책을 고수하며 상호간의 이익을 창출하는 지속적인 신뢰관계를 쌓았다.

지나친 내정간섭이나 공출을 삼가고 자국민이 번국에서 범법행위를 저지르면 처벌하고 피해보상을 해줬으며 군사를 징병할 경우 반드시 물질적 대가를 지불해주고 전공만큼 전리품과 포로를 보장해주었다. 무언가 문제가 되는 행위를 중지시키는 것도 강압적인 명령을 내리는 대신 합리적인 대안을 제시하며 설득하는 등 불만이 생기는 걸 미연에 방지했으며 조공에 있어서도 번국들이 바치는 것 이상의 답례품을 하사하는 등 번국들 입장에서 이상적인 상국이기에 애초에 이중칭신에 반골기질 강한 안남을 제외하고 각 번국들은 대한에게 진심으로 충성하며 매우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84]

종교의 자유를 허락하고 탄압을 금지한 대한의 번국들답게 종교 지도가 굉장히 다채로운 것도 특징. 왕가가 믿는 종교만 따져도 천주교(술루국), 하와이 전통 신앙(하와), 대승 불교(조홀국), 류큐 신토(유구국), 이슬람(불나이), 개신교(사라왁), 유교(남중월)[85]로 모두 다르며 피지배층은 전통 신앙 기반으로 종교의 용광로가 된 하와국이나 힌두교와 배화교, 이슬람이 공존하는 조홀국 등 지배층보다 한결 다양하게 얽혀서 살고 있다.

추가적인 번국 후보로는 안남과 섬라의 완충지대이자 각축장이었던 진랍과 남장, 공식적인 번국은 아니지만 그에 준하는 수준으로 대한과 밀접해 있어 은연중에 번국으로 여기는 시선이 존재하는 벵골 칸국 등이 꼽힌다. 이중 진랍은 임자남정 직후 바로 대한 밑으로 들어가 공식적으로 선언만 하지 않았지 사실상 이미 번국으로 편입된 상태이며, 남장은 셋으로 분할해 북부 난창국은 후송의 번국으로 넘긴 후 나머지는 대한의 번국으로 편입할 계획이며, 벵골은 세포이의 난과 면전국의 침공으로 위기에 몰린 나머지 신종을 조건으로 대한에 구원 요청을 하면서 번국 편입이 사실상 확정된 상태이다.

2.3.1. 술루국

술루국
述壘國
국호 술루국(Reino de Sulú)
위치 술루 제도, 보르네오섬 북부
수도 이사변(伊思邊, la Isabella)[86]
정치 체제 전제군주제
국성 이(李)
국가 원수
역대 군주 이진서(디에고 1세)
이성진(프란치스코 1세)
이정원(후안 1세)
이홍일(펠리페 1세)
이계성(아우구스틴 1세)
이원석(가스파르 1세)
문자 한자, 한글, 로마자
종교 가톨릭, 이슬람
민족 한인, 스페인인, 일본인, 안남인, 말레이인
[clearfix]

현종 말엽부터 본국에서 파견하던 집정이 폐지되고 술루국왕이 내정을 스스로 통치하는 것이 허락되었다. 술루 왕족들은 대한식 이름과 스페인식 이름을 같이 짓는 것과 술루 왕자들이 본국에 일정 기간 건너와 친위군에서 복무하는 전통은 유지되고 있다.

1840년대 중반 기준 인구는 약 50만 명. 고위 귀족 대부분을 차지하는 스페인계[87]는 인구의 10%가 되지 않으며 중하층 관료와 군인, 농민, 상공업자 등으로 구성된 한인계는 스페인계의 약 3배, 용병이나 상인 등으로 유입된 일본계는 한인계보단 적지만 스페인계보단 많으며, 안남의 천주교 박해를 피해 이주해 온 안남계는 스페인계와 숫자가 비슷하고 대부분 농업에 종사한다. 그리고 모로족을 포함한 원주민이 20만을 좀 넘는다.

인구가 부족하기에 보르네오섬 내륙은 직할령이 아니며 원주민 영주들에게 선물을 주며 교류하여 신속시킨 상태이다. 원주민 영주들은 신앙과 자기 세력권을 유지할 권리를 보장 받는 대신 조공과 병력 지원의 의무를 가진다. 국교는 가톨릭이지만 무슬림 영주들에게 개종을 강요하지는 않으며 무슬림도 중간 관료나 군인으로 출세가 가능하다.

대한의 번국 중에서 가장 오랫동안, 그리고 적극적으로 전쟁을 수행하는 국가로 건국 이래 쭉 보르네오섬의 이슬람 토후국들과의 전쟁을 지속 중이며 누손주의 모로족 토벌에도 적극 협력해 항상 병력 일부를 파견해 둔다. 이렇다 보니 전쟁보단 교역으로 방향을 튼 조홀국을 다소 못마땅한 시선으로 보기도 한다. 남부 보르네오를 식민 지배하는 네덜란드는 술루국의 확장을 마뜩찮아하나 대한에게 진 빚도 있고, 북부 보르네오와 네달란드령 남부 보르네오 사이에 어느 쪽 지배도 받지 않는 토후국들이 산재하고 있어 아직은 관망 중.

군대는 인구에 비해 좀 과한 규모인 3만 명을 유지하고 있으며, 유지비와 병기는 대한의 보조금으로 충당한다. 보르네오와 갈로도의 정글에서 매일 같이 교전을 벌인 덕분에 술루국 병사 개개인은 상국 대한 이상으로 실전 경험이 많고, 특히 정글전의 전문가들이다.

전체적으로 카스티야-아라곤 연합왕국 시절 스페인의 풍토가 여전히 진하게 남아있다. 당시 스페인은 레콩키스타로부터 얼마 되지 않아 유럽에서 가장 가톨릭 원리주의 성향이 강했는데 그게 술루국에서 그대로 유지된 것으로 보인다. 묘노를 쓰지 않아 홍서당의 봉기로 입은 피해가 전혀 없음에도 예수 그리스도의 형제를 자처했다는 이유로 대군을 파견해 토벌군에 합류했고 사로잡은 태평천국 포로들에게 딱 한 번 개종할 기회를 주고 거부하면 즉시 처형, 대한령 미주에 정착한 후 본격적으로 선교를 시작한 후기 성도 교회에 대해선 들어오는 순간 바로 화형에 처하겠다고 벼르며, 안남 정벌에서는 안남의 천주교 박해에 대한 보복으로 포로를 잡는 즉시 문답무용으로 전부 죽여버려 노예 사냥에 열중인 다른 번국들과 갈등을 빚는다.

다만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는 대한이 상국으로 존재하는 데다 소수의 스페인계, 대한계, 일본계, 안남계가 다수의 원주민을 통치해야 하는 국가 특성상 이교도 원주민을 학살하고 개종을 강요하자는 극단적인 의견은 왕실 차원에서 선을 긋는다. 개종은 직간접적인 회유를 통해 이뤄졌고 통치하는 원주민 인구의 절반인 10만 이상을 개종시키는 등 성과도 괜찮은 편이다. 본국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형성된 이주민 집단일수록 원래 문화가 고정되는 현상과 나라의 특성상 스페인 본국보다 레콩키스타에 진지할 수밖에 없다 보니 경직된 가톨릭 원리주의 문화도 그대로 유지된 걸로 보이는데, 그래도 건국 당시 스페인이 가톨릭 원리주의가 너무 강한 나머지 본국 경제에 피해를 주기도 했던 것과 당대 유럽 여러 나라들이 가톨릭-개신교 갈등으로 전쟁을 벌이거나 마녀사냥, 이단 사냥이 횡횡한 것과 비교하면 술루는 대한의 영향으로 나름 선을 지키는 편이다.

가스파르 1세의 치세 동안 브루나이 술탄의 봉신이 된 사라왁 국왕 제임스 브룩과 수년간 지리한 공방전을 벌인 끝에 대한이 지원해 준 신무기 화력을 앞세워 승리하고 보르네오 최대 항구도시인 아피아피[88]를 함락시키면서 전쟁 승리의 청신호를 쏘아올렸다. 술탄의 무리한 현지사수 명령 때문에 술탄의 직할군이 궤멸당하고 제임스 브룩을 비롯한 영주들까지 대거 이탈해버리면서 기세를 탄 술루국은 1851년 가을 브루나이 술탄국의 수도인 반다르브루나이[89]까지 함락시킨다. 결국 궁지에 몰린 브루나이 술탄국과 사라왁 왕국은 대한에 귀부하는 선택을 하여 술루국과 동일한 번국이 되었는데 수도인 반다르브루나이를 비롯해 이미 술루국이 차지한 영토는 술루국의 영토로 확정되면서 영토를 크게 확장하는데 성공한다.

당사자들은 아직 모르고 있지만 자원의 보고인 사바와 석유가 넘쳐나는 원 역사 브루나이 지역과 북칼리만탄 타라칸 지역을 전부 차지하고 있어 영토를 잘 지키기만 해도 후손들은 배 두드리며 평생 먹고 살 걱정 없이 살 수 있다.

초대 국왕인 디에고 1세가 (사생아라 황실 족보에 공식적으로 오르지는 못했지만) 건흥제의 친아들이었던 데다 대한의 세력 확장에 있어서 번국들 중 가장 공적이 크기 때문에 대한의 번국들 중에서 가장 서열이 높다. 조홀은 술루와 마찰 생길 일 자체를 피하고, 자기들이 가장 먼저 칭신했다며 으스대는 하와조차 뒤에서 안주거리 삼아 가볍게 떠들뿐 공식적으로 이 서열에 도전하는 일은 없다.

재밌는 사실은 이토록 대우도 좋고, 충실하게 관계를 이어온 술루가 가장 먼저 대한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 획책한 번국이라는 점. 4대 술루국왕 이홍일이 대한에 반기를 들고 독립할 내심을 품었으나 원평제가 나폴레옹 프랑스로부터 네덜란드령 동인도를 보호해주려 파견한 대군을 목도한 뒤 객기임을 깨닫고 접었다. 이 일은 술루 왕가 내에서 은밀한 비밀로 전해내려오는데 이홍일의 손자인 이원석은 스페인계 조모와 모친을 둔 자신도 하지 않은 생각을 조모가 이형준의 자손이고, 모친 역시 조선계인 조부가 했다는 사실을 황당해한다.

이원석 시대에도 스페인계 주민 중에선 이교도 태황의 신하 노릇이나 하는 것에 불만을 품고 독립을 꾀하는 인사들이 이따금 나오는데 발각되는 족족 유럽이나 아메리카로 추방해 뒷말이 나오지 않게 하고 있다.

2.3.2. 조홀국

조홀국
遭淴國
국호 조홀국(遭淴國)
위치 말레이반도 남부, 리아우 제도
수도 제홀(制㳷)
정치 체제 전제군주제
국성 정(鄭)[90]
국가 원수
역대 군주 진무왕 정명완
광현왕 정주신
홍제왕 정재원
○○왕 정재신
충정왕 정인선
헌제왕 정윤진
정호석
문자 한자, 한글, 범자, 자위 문자
종교 불교, 유교, 힌두교, 배화교, 이슬람
민족 한인, 일본인, 인도인, 말레이인, 화교, 파르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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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주신이 반란을 진압하면서 말레이인과 화교를 탄압하고 그 대신 노동자로 영국 동인도 회사를 통해 인도인을 이민시키는 정책을 펼친다. 이 이민을 바탕으로 대한의 번국 중 가장 많은 인구를 거느리고 있다. 4부 초반인 1823년 기준으로 인도인 30만, 말레이인 15만, 화교 6만, 대한인 14~15만 명, 일본인 14~15만 명 가량으로 80만을 살짝 웃돌았고 1840년대에 100만을 돌파했다. 화교 인구의 상당수는 중국에서 팔려온 묘노. 수도는 제홀(制㳷). 원 역사의 서말레이시아와 태국 남부[91], 리아우 제도를 영토로 점유하고 있다.

정주신이 추진하던 아체 정벌은 반란 진압에 전념하느라 흐지부지되어 버리고 냉전 상태가 수십년째 이어지고 있다. 말레이 반도의 소국들을 병합하는 과정에서 국경을 마주하게 된 섬라와도 분쟁이 있으나 본국인 대한에서 적극적으로 지원해주지 않아 전쟁으로 영토를 확정짓지 못했다. 결국 정주신의 손자인 충정왕 정인선대부터 전쟁을 피하고 교역과 산업 진흥에 전념하기 시작한다. 술루와 반대로 국초의 상무적 기풍이 많이 희석되었으나 일본이 아체와의 전쟁에서 승리해 아체 북부 섬들과 주요 항구 일부를 장악하면서 안보 부담이 줄었다.

주산업은 광업. 대한에서 석관식(통조림) 산업이 발달하면서 깡통의 원료인 주석 수요가 늘어나 주석 광산이 풍부한 조홀국은 큰 이익을 본다. 그러나 정인선의 아들 정윤진은 왕위에 오른 후 어차피 대한이 지켜줄 것이라며 최정예 왜병들을 해고해 3만 명이던 군대를 1만으로 감축하고 남는 돈을 서양식 궁궐인 태서궁을 짓고 주지육림에 빠져 국가 안보와 산업 발전에는 게으른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대한령 연해주에서도 주석 광산이 발견되었다는 소식을 듣자 깜짝 놀라 정신을 차린다. 조홀국 주석 산업에 타격을 입으면 더이상 주지육림을 즐기지 못한다는 생각 때문이긴 했어도, 어쨌든 각성하게 되어 1만까지 줄었던 군대를 2만으로 늘리고, 간신들을 몰아낸 자리에 충신들을 재등용하였으며, 세자 정호석이 재석에게서 들은 고무 산업의 유망성에 대해 전하자 즉시 남미에서 고무 묘목을 들여와 고무 플랜테이션을 세우게 하면서 부흥의 발판을 마련한다. 술루, 사라왁과 마찬가지로 당사자들은 모르고 있으나 말레이 반도 동북부 해역에 산재한 해상 유전과 가스전 덕분에 미래에 마르지 않는 부가 약속되어 있다.

반란을 일으킨 말레이인과 중국인을 불신해 군 입대를 불허했고, 주석 광산에서 일하는 묘노들을 철저히 감시, 감독해왔기에 홍서당의 난 때 조기 진압으로 피해를 거의 입지 않았다. 단, 사회적 차별과 별도로 종교적 차별은 없다. 왕가는 대남도 정씨 시절부터 불교를 믿어왔으나 철저한 가톨릭 국가를 지향하며 통치하는 원주민 인구 절반을 개종시킨 술루와 달리 충성만 바치면 어떤 종교를 믿어도 상관없다는 게 기본 방침. 인도인들과 함께 파르시인들이 넘어와 대한 영역권에서 배화교가 유의미한 숫자로 존재하는 유일한 곳이다.

말라카 해협 안정화라는 중요한 임무를 띄고 있음에도 국방력 강화에 신경 쓰지 않고 교역에만 전념하다 보니 무슬림과 100년 넘게 전쟁 중인 술루국에서는 번국의 의무를 다하지 않는다며 고깝게 보는 시선이 있다.

2.3.3. 하와국

하와국
夏窪國
파일:하와국 국기.jpg
국호 하와국(夏窪國)
위치 하와이 제도
수도 홀랄루(惚㻋壘)
정치 체제 전제군주제, 봉건제[92]
국성 하(夏)
국가 원수
역대 군주 장명왕(莊明王) 하마위(마우이)
현도왕(賢度王) 하가위(카우이)
강정왕(剛精王) 하상운(카이헤코아)
진성왕(眞成王) 하원식(카울라나)
민애왕(閔哀王) 하정일(코아말루)
위강왕(威剛王) 하현생(카메하메하)
○○왕 하원호
하성왕(夏成王) 하민상(칼라니오푸)
하와국왕 하진교(카나이나)
문자 한글[93], 한자
종교 전통신앙, 유교, 불교, 천주교, 개신교
덕성도, 후기 성도 교회
민족 폴리네시아인, 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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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4. 유구국

<colbgcolor=#695370><colcolor=#fff> 유구국
琉球國
국호 유구국(流球國)
위치 우치나
수도 수이(首里, 수리)
정치 체제 전제군주정
국성 상(尙)
국가원수 유구국왕 → 유구황제 → 중산왕
연호 영락(永樂) (1710 ~ 1711)
천안(天安) (1712 ~ ?)
영원(永元) (? ~ ?)
○○(○○) (? ~ ?)
○○(○○) (? ~ ?)
대흥(大興) (? ~ ?)
성평(成平) (? ~ 1831)
문자 가나, 한자, 한글
종교 유구 신토, 불교, 유교, 신토
민족 유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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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0년 기준 인구는 약 42만. 하와국처럼 외부에서 유입된 질병에 취약한 건 아니나 조그마한 섬나라라 땅이 좁고 그 좁은 땅도 상당 부분을 사탕수수나 목화 농장 등 플랜테이션으로 활용하다보니 인구 성장이 느리다.

황제국으로 자처하며 자신들의 역사가 1만 8400년으로 대한, 일본보다 더 길다는 허세는 여전하나, 오히려 대한 주둔군이 8천 명으로 늘어나 유구군 5천 명을 숫자로도 압도하게 되어 사실상 대한의 속국인 상태가 지속된다. 대한이 유구를 번국으로 복속시키지 않는 것은 순전히 일본 도쿠가와 막부와 유지하는 평화를 깨트리기 싫은 것에다 건흥제 시절 초대 황제인 영락제 상익이 심양회맹의 증인으로 무리하게 참석했다가 병사한 것에 대한 대한의 죄책감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새로 대한의 태황으로 즉위한 광덕제는 인구가 대구 정도밖에 안되는 조그마한 섬나라 주제에 감히 대한과 맞먹으려 한다는 걸 매우 아니꼽게 보고 유구국을 번국으로 들이거나 아니면 아예 동군연합을 통해 병합하려는 계획을 신하들의 의견을 모조리 물리치고 추진하여 나라가 망할 위기에 처해있다. 여기에 유구 병합 계획이 대한 전국에 퍼지는 바람에 유구와의 관계를 완벽한 상하관계로 재정립한다는 광덕제의 정책이 유구 병합을 지지하는 대한 여론을 등에 업고 더욱 탄력을 얻었다. 결국 광덕제가 태자 재석을 건흥제 시절 경인조약으로 유구국과 아모국의 현 상태를 유지하기로 대한과 합의했던 일본으로 파견해 유구국을 대한의 번국으로 편입하는 것을 일본이 인정하는 대신 아모국을 일본의 번국으로 편입하는 것을 대한이 인정하기로 합의한다는 내용의 제2차 경인조약을 에도 막부와 체결하고 바로 재석은 유구국으로 파견되어 유구국에게 '황제국 지위를 포기하고 대한의 번국으로 들어오라'는 최후통첩을 한다. 유구 황실과 조정에서는 이를 어떻게든 막으려 했으나 이미 현실을 깨달은 유구 국민들은 나라를 지키는 것을 반쯤 포기한 상태였고[96], 결국 1831년(신묘년) 음력 1월 22일(양력 3월 6일) 유구국은 대한의 요구를 모두 수락, 대한의 번국으로 편입되어 독립을 잃었다. 유구 황제 작위는 대한 태황이 가져가고 유구 황제는 예전 명나라의 조공국이던 시절의 작위인 유구국 중산왕으로 격하, 대한의 번국으로서 유구국의 독자적인 외교권을 박탈한다. 또한 대한 본국에서 실질적인 총독인 집정대신을 유구국에 파견하고 유구국은 자치권과 치안 유지를 위한 경찰 병력 유지만을 허용한다. 유구를 번국으로 편입한 광덕제는 "내가 유구의 황제이기도 한데 대한에 조공을 바치게 하면 내가 나한테 조공을 바치란 말이냐"며 유구의 조공을 면제해 주었고, 재석과 신료들도 중종이 인정한 유구의 독립을 박탈했으니 이 정도 특권은 줘야한다는 데에 동의하여 다른 번국들과 달리 유구는 조공이 면제된다.[97]

대한의 번국으로 편입된 이후 유구에 주둔하는 대한군의 대민 행패가 심해지고 유구에서 사냥을 금지한 해우 밀렵을 대놓고 하는 등 부작용이 나타났으나, 이를 해결하는데 무관심했던 광덕제와 달리 흥선제는 자체적으로 자국민의 범죄 행위를 처벌하고 배상금을 지불했으며, 유구 왕실에는 누손주산 최고급 가구들을 선물하는 배려를 아끼지 않아서 유구 왕족과 신하들도 대한의 번국이 된 것에 더이상 불만을 품지 않게 되었다. 물론 유구의 사탕수수나 목화 농장 태반이 본국의 자본에 의해 운영되고 있으며 교역선이 유구 운반하는 상품도 유구 자체 상품이 아닌 본국과 속지를 오가면서 운반하는 물품이 태반인 등 본국의 자본이 유구의 경제를 잠식하면서 본국으로의 경제적 종속이 심화되고 있다. 대한 내 여행업이 발달하면서 본국과 적당히 가까우면서 전혀 다른 풍광을 즐길 수 있는 유구 관광이 인기를 얻어 다양한 여행 상품들도 생겨난다.

군사력으론 불나이와 함께 번국들 중 최약체. 레콩키스타와 콩키스타도르의 전통을 이어받아 건국 후 100년 넘게 무슬림 토후들과 전쟁을 벌인 술루, 말레이 반도 무슬림 토후국과 아체 해적, 말레이 반란군들을 모두 도륙내며 성장한 조홀, 대한의 번국이 되기 전부터 내부에서 암투가 치열했고 통일된 이후에도 노예 사냥이나 맹수 사냥, 상국 파병으로 상무적 분위기를 유지 해온 하와, 술루와 악전고투하며 싸워온 사라왁과 달리 이렇다 할 군사적 전통이 존재하지 않았고 홍서당 토벌 이전에는 대한과 발 맞춰 군사 활동을 한적도 없어 실전 경험이 전무했다.

일례로 사라왁이 번국이 된 직후 발발한 안남 정벌에 2천의 병력을 동원했는데 유구가 번국이 되고 10년 뒤에 발발한 홍서당 토벌에 동원한 병력이 고작 500. 그나마도 제대로 못 싸웠다. 스스로도 한계를 실감했는지 시간이 좀 더 지난 임자남정 때는 대한군 뒤만 따라다녔다. 다른 번국들은 전부 별동대 활동에 나섰는데 아예 포기했다.

2.3.5. 불나이

불나이
弗那而
국호 브루나이 술탄국(كسلطانن بروني)
위치 사라왁 동부
수도 반다르브루나이 → 빈툴루
정치 체제 전제군주제
국성 볼키아 가문
국가 원수 술탄
문자 자위 문자
종교 이슬람
민족 말레이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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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르네오 북동부를 두고 브루나이와 영토분쟁 중이던 술루 술탄국을 계승했다는 명분으로 보르네오 쪽으로 영토를 확장하려는 술루국과 3부 시절부터 100년 넘게 계속 전쟁 중이었는데, 브루나이 술탄 사이푸딘 2세는 술루국을 막기 위해 영국인 용병대장 제임스 브룩에게 사라왁을 봉토로 내리고 술루국과의 전쟁에 투입한다.

그러나 1850년 대한의 지원으로 술루국이 술루국의 서진을 막던 거점인 아피아피를 함락시킨 것이 전쟁의 결정적인 분기점이 되었다. 군사에 대해 무지했던 사이푸딘 2세가 '무조건 현지 사수'를 외친 덕분에 탈출하지 못 하고 아피아피에 포위된 술탄의 직할군이 포위섬멸당하고 술탄의 무리한 명령 때문에 자기 병사들이 떼죽음을 당한 영주들이 반란을 일으켰으며 심지어 포위망에서 가까스로 탈출한 제임스 브룩 역시 술탄의 명령을 무시하고 사라왁에 틀어박힌다.

결국 1851년 가을 술루국은 브루나이 술탄국의 수도인 반다르브루나이까지 함락시키는데 성공한다. 그런데 사이푸딘 2세는 수도까지 뺏겼음에도 계속해서 결사항전을 외치고 공세종말점에 도달한 술루국 역시 곤란해하고 있던 상황에 마침 안남 정벌을 위해 누손주에 집결하고 있던 대한군을 두고 재석이 힌트를 주자 술루국은 "대한이 술루국을 도와 브루나이 술탄국을 정벌하기 위해 병력을 모으고 있다"고 거짓 소문을 퍼트린다. 이 소식에 그나마 사이푸딘 2세 쪽에 남아있던 영주들도 이탈해버리고 사라왁에 틀어박혀있던 제임스 브룩 역시 브루나이 술탄국을 버리고 독립을 선언한다.

결국 궁지에 몰린[98] 사이푸딘 2세는 대한에 입조, 귀부하는 것을 선택하면서 대한의 첫번째 이슬람 번국이 되었다.

원 역사 브루나이 영토는 술루에 모두 빼앗겼고 바람강을 경계로 새로 국경을 정했다. 새로 정한 수도는 빈툴루.

군사력으로는 유구와 함께 최약체. 유구가 영토와 백성은 멀쩡한데 수백년간 실전 경험이 없어서 문제였다면 이쪽은 사이푸딘 2세의 현지 사수령 때문에 술루와 맞서온 정예 군조직이 소멸하고, 수도와 요충지들을 전부 상실해 재건에 필요한 인력과 행정력마저 증발한 탓이다. 최후의 정예군이라 할 수 있던 사라왁도 독립해 떨어져 나간터라 군사력 회복이 쉽지 않을 전망이다.

번국이 된 직후에 발발한 안남 정벌에는 6천의 병력을 보내겠다고 장담했으나 정작 2천 밖에 안 보내고 그마저도 중앙군이 아니라 토호들이 2백, 3백씩 어렵싸리 각출한 자투리 병력에 어중이떠중이 용병들을 더한 군대라 문자 그대로 오합지졸이었다. 대한군이 안남군에게 깨졌다는 소식만 들리면 불나이군이라 재석은 싸움도 못하는 주제에 고자질이나 한다며 탐탁차게 여긴다.

벵골 전쟁에서 황태자인 이창은 불내군을 소방수로 동원하여 충성을 확인하고 전선에 병력을 충원하려는 계획을 진언했지만 이재석은 불내국이 무슬림 국가라서 벵골국 보다는 적군인 무굴 무슬림들에게 동조할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해서 벵골 방면에 동원하지 않기로 한다. 하지만 벵골이 면전의 침공을 받았는데 독자들 사이에서 면전 전선 방면으로는 불내군을 동원할 가능성이 높다고 점쳐지고 있다. 술루국과의 전쟁 과정에서 정예병이 모두 소진되는 바람에 안남 전선에서 추태를 보여주기는 했지만 술루군과 밀림에서 전쟁을 벌였던 인적 자원이 아주 소멸한 것은 아니고 대한의 번국이 되어 안남 전선에 참전하면서 새로 소집한 군사들이 실전경험을 쌓으면서 어느 정도 전력을 복구했을 것이기 때문에 대한이 전비를 보태주면 면전 전선에서 그럭저럭 한 구역을 틀어막을 전력은 보낼 수 있다고 추측되기 때문이다. 일단 면전과 불내국 사이의 거리도 가깝고 전장 환경도 비슷하고 면전은 불교 국가이기 때문에 불내군이 적군에 동조할 가능성도 없기에 동원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2.3.6. 사라왁

사라왁
沙羅籰
국호 사라왁 왕국(Raj of Sarawak)
위치 사라왁 서부
수도 쿠칭
정치 체제 전제군주제
국성 브룩(Brooke)
국가 원수
문자 로마자, 자위 문자
종교 개신교, 이슬람, 애니미즘[99]
민족 다야크인, 말레이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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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루국과의 전쟁을 위해 브루나이 술탄에 의해 고용된 영국인 용병대장 제임스 브룩이 브루나이 술탄으로부터 라자 칭호와 함께 사라왁을 봉지로 받으면서 원 역사처럼 건국된다.

브루나이 술탄국이 질적으로 압도적인 술루군에 맞설 수 있게 해주는 가장 큰 전력이었으나 아피아피 공방전에서 술탄의 고집으로 많은 피해를 입고 간신히 탈출한 것에 앙심을 품은 브룩은 전투를 거부하고 봉지인 사라왁에 틀어박혀버린다. 술루국이 브루나이 수도 반다르브루나이까지 함락시키면서 승기를 잡고 대한군이 '술루국을 도와 브루나이를 정벌할 것이다'라는 소문을 듣자 아예 사라왁을 들고 이탈해 독립을 선언한다. 궁지에 몰린 브루나이 술탄국이 대한의 번국이 되길 택하자 제임스 브룩 본인도 마찬가지로 대한에 입조하여 대한의 번국이 된다.[100]

브룩이 백성들에게 개종을 강요하진 않지만 브록 본인이 개신교도고 선교 활동 자체는 이뤄지고 있어 명목상 개신교 번국이다. 당사자들은 아직 모르고 있으나 자원이 풍부한 사라왁 지역을 점유하고 있어 미래에 먹을 거리는 이미 확보되어 있다.

번국 중 가장 체급이 작으나 불나이가 100년 넘게 전쟁만 해온 술루군에 맞서 버틸 수 있게 해준 히든 카드였던 만큼 군대의 질은 우수하다. 사라왁군의 주축인 원주민 다야크족[101]은 대남도 토인들처럼 머리 사냥을 즐기는 용맹한 병사들로 이름이 높다. 번국이 된 직후 발발한 안남 정벌에는 다야크족 위주로 2천의 병력을 차출한다.[102] 이외에 브룩이 데려온 영국인 용병들도 다수 있다.

원 역사에선 제임스 브룩이 노동력 유치를 위해 화교 인구를 대거 유입시켰는데 역사 개변으로 동남아에서 화교들이 차지한 파이가 크게 줄어든 데다[103] 임자남정에 참전해 안남인 포로를 닥치는 대로 잡아들이고 있어 화교 대신 안남계가 새로운 구성원으로 정착할 가능성이 높다.

2.3.7. 대남국 → 남월국

대남국 → 남월국
大南國 → 南越國
국호 대남국(大南國) → 남월국(南越國)
별칭 안남, 남월
위치 베트남 전역 → 베트남 남부
수도 후에(化, 화)자딘(嘉定, 가정)
정치 체제 전제군주제
국성 완(阮)
국가원수 황제(외왕내제)
연호 가륭(嘉隆) (1802 ~ 1820)
명명(明命) (1820 ~ 1841)
소치(紹治) (1841 ~ 1847)
사덕(嗣德) (1847 ~ 1852)
문자 한자, 쯔놈, 쯔한, 쯔꾸옥응으
종교 유교, 대승 불교, 상좌부 불교, 천주교, 덕성도
민족 안남인, 참파인, 진랍인, 대한인, 왜인
기타 소수민족
[clearfix]

원 역사처럼 떠이선 농민 봉기가 일어나 북쪽의 찐씨 정권과 남쪽의 광남국 응우옌씨 정권을 모두 멸망시키고, 명목상의 황제인 후 레 왕조가 서나라에 청한 원군까지 모두 격파하여 떠이선 왕조를 세우나, 응우옌씨 정권의 후손 완복영대한의 지원을 받아[104] 떠이선 왕조를 다시 멸망시키고 응우옌 왕조를 세운다.

응우옌 왕조는 외왕내제 체제를 유지하여 국가 재건에 도움을 준 대한에 칭신하여 안남국왕 책봉을 받고 매년 조공을 바치며 복승항에 대한 육군 4,000명과 대한 수군 함대의 주둔을 허용하는 한편, 국경을 맞대고 있는 후송에게도 칭신하여 남월국왕 책봉을 받았다.

대한에서는 '안남'이라 부르지만 공식 국호는 '대남'이다. 안남에서는 '대월'이라는 국호를 회복하는 것을 원하여 옛 조선의 종계변무 처럼 대한에 사신을 보내 대월이라는 국호를 허용하기를 요청했으나, 대한 측에서 매번 거부하여 이 문제로 조정에는 대한에 대한 불만이 있다. 또한 원 역사처럼 주변국인 진랍, 남장을 침략하며 섬라와 갈등을 빚고 있다.

유럽에서는 대한의 속국으로 인식하고 있어서 원 역사와 달리 식민지가 되는 운명을 피했지만, 2대 황제 명명제가 천주교를 매국노라고 인식하여 탄압하는 바람에 많은 천주교인들이 대한군이 주둔한 복승을 통해 술루국으로 망명하고, 명명제의 호족 탄압 정책 때문에 제대하여 호족이 된 고참 왜병들이 동족 왜병들까지 불러들여 반란을 일으키고 북쪽에는 레 왕조의 후예를 자칭하는 반군이 준동하는 등 내부적으로 매우 불안정한 상태다.

이후 3대 황제 소치제는 반란 진압을 위해 프랑스를 끌여들였는데, 대남국을 발판으로 인도차이나를 차지하려는 샤를 루이 나폴레옹의 분탕질에 속아 넘어가 대남국 왕실과 프랑스 동인도 회사와의 관계가 가까워지면서 상국인 대한의 뜻을 거스르고 태평천국에 무기를 공급하고 아편 장사를 하는 등 프랑스를 끌어들여 대한의 영향력에서 벗어나려고 해 대한과 갈등을 벌일 기미가 보이고 있다. 이 사실을 안 재석은 대남국을 무력으로 응징하려고 했으나 때마침 청나라와의 국혼 직전에 대남국왕 소치제가 저승으로의 회피기동을 달성하면서 일단 3년상을 치르게 해준다는 이유로 안남 침공을 보류했다.

하지만 4대 황제 사덕제도 소치제보다 더한 친 프랑스 반 대한 정책을 계속 유지하고 있고 재석이 마지막 기회로 아버지인 소치제 당시의 행적에 대한 사죄를 요구했으나 안남에서는 "이 모든 게 아버지와 서나라 때문"이라는 사죄 같지도 않은 사죄문을 보내와 도리어 재석의 분노를 샀다. 대신들은 한 번 더 기회를 줘야 한다 주장했지만 분노한 재석은 이미 안남 정벌의 대략적인 밑그림까지 그려 놓은 상태로 문책사와 함께 철갑함 함대를 안남에 파견한다.

재석은 같잖은 외왕내제를 끝내주겠다고 공언하여 외왕내제와 이중봉신 체제가 붕괴된 완전한 대한의 번국으로 전락, 기존 4번국과는 완전히 다른 성격의 번국의 될 것으로 예상된다. 술루국, 조홀국, 하와국은 건국부터 대한이 깊게 관여하여 세워진 나라들로 하와국을 제외한 두 나라의 초대 국왕은 아예 대한인 핏줄이라 전형적인 번국보다는 (원래 의미의) 식민 개척에 가까웠다. 대한이 이들을 대하는 태도는 번국이라기보단 체급 작은 동맹국을 대하는 우두머리의 그것이다. 유구는 명목상 황제국일 뿐 세 번국보다 더 심하게 대한에 예속되어 있던 독립국이 광덕제 1명의 변덕으로 독립국 지위를 내려놓은 거라 실질적으로 달라진 건 황실과 조정에서 쓰이는 용어 뿐. 강제로 국권을 빼앗은 것에 대한 보상으로 조공이 철폐되고, 유구에서 범죄를 저지른 대한군 병사에 대해 엄벌 및 피해배상을 약속하여 민심을 잘 달래 물질적 부담은 오히려 독립국 시절에 비해 줄었다. 안남의 외왕내제와 이중봉신 구조가 청산된다면 일반적인 의미의 번국을 거느리는 최초의 사례가 된다.

한황의 분노를 산 것을 알고서도 사덕제는 어리석게도 이렇게 된 이상 대한과 싸워 황제국으로 자립하겠다고 전쟁준비를 명령하고 자신을 말리는 화평파 대신들을 투옥했으나, 종두도 대한이 발명한 것이니 맞지 않겠다고 똥고집을 부린 댓가로 천연두에 걸려 사경을 헤메게 되고, 사덕제의 친어머니인 황태후 범씨가 화평파 대신들을 풀어주고 대한 치죄사 이유원에게 직접 절을 올리는 굴욕을 감수하며 대한에 제대로 된 사죄를 하면서 위기를 일단 수습한다. 하지만 원 역사처럼 사덕제가 기적적으로 회복하여 재집권할 경우를 대비해 재석은 한번만 더 오만한 짓을 하면 그때는 정말 안남을 정복하겠다고 결심하고, 그 준비 작업으로 안남국 철도, 전신 부설권과 경비대 명목의 대한 육군 주둔권을 안남에게 강요한다.

사덕제 입장에서는 다행히도 천연두를 이겨내기는 했으나 그 후유증으로 고자가 되고 만다. 자기가 고자가 됐다는 현실에 눈이 돌아간 사덕제는 어떻게든 자기 물건을 세우기 위해 그렇게 싫어하던 대한에서 들여온 홍삼으로 만든 탕약 한 그릇을 마시고 지나가던 궁녀를 붙잡아 성관계를 하는 짓거리를 반복한 끝에 천만다행히 죽어버린 물건을 다시 세우는 데에는 성공했으나 이걸 증명한답시고 자기 어머니인 태후와 대신들 앞에서 궁녀와 성관계하는 장면을 보여주는 충격적인 행각을 벌인다. 이 충격적인 소식을 접한 대한 조정도 극악무도한 패륜을 저지른 안남국왕을 징벌하자는 여론이 대세가 되었고 좋은 껀수가 생긴 재석은 곧바로 안남 정벌을 지시한다.

안남의 양다리 상대이자 대한의 안남 정벌에 내키지 않아했던 후송도 대한의 정벌 결심이 확고하다는 걸 알고 지분을 챙기기 위해 대한의 침공에 발맞춰 월왕부가 주도하여 안남 북부를 침공하고 안남군에 고용된 미쓰이 용병을 무력화시켜주는 조건으로[105] 이권을 노리는 일본도 무관단을 파견하여 대한군을 지원하고 남장과 진랍을 두고 다투는 라이벌 섬라도 한입만을 노리고 참전을 검토하면서 사면초가의 상황에 몰린다.

완복시의 결사항전 선언이 무색하게 압도적인 강력함의 대한군에게 안남군은 무참하게 패배하고 수도 후에는 대한군에게 함락되었다. 한편 북부의 중심지인 동경은 통킹 해안에 기습적으로 상륙한 상륙한 후송군에게 함락, 남부의 중심지인 가정부도 대한군에 의해 포위당해 무자비한 폭격에 견디다 못해 성문을 열고 항복한다. 대한군의 최우선 목표였던 완복시는 수도 후에 함락 직전에 안남이 프랑스와 결탁했다는 증거가 될 각종 외교문서들을 파기하고 대한이 완복시 폐위 후 다음 안남왕으로 옹립할 가능성이 있는 완씨 종친들까지 전부 데리고 도망친다. 이 소식을 들은 재석은 안남 영토를 이루는 5개 기(圻) 중 북부의 북기(北圻)를 당초 계획대로 후송에게 양보하고 중부의 직기(直圻)와 우기(右圻)는 리 왕조의 후손인 화산 이씨의 일원 중 한 명을 중월왕(中越王)으로 책봉해 번국으로 삼으며, 남부의 좌기(左圻)와 남기(南圻)만 남게 된 안남은 완복시를 폐위하고 다른 완씨 왕족 중 한 명을 남월왕(南越王)으로 책봉해 정식으로 번국으로 편입할 계획을 세운다.

그리고 마침 완복시의 이복동생인 부록군공 완복홍항이 완복시의 손아귀에서 도망쳐 대한의 포로가 되자 재석은 그를 남월왕으로 책봉하고 이로서 안남은 정식으로 대한의 번국인 남월국이 된다. 이 과정에서 남월국은 영토가 크게 줄어들어 안남 중부와 함께 왕조의 수도이자 300년 가까이 완씨의 근거지였던 후에까지 중월국에게 넘겨주고, 완씨가 정복한 옛 참파와 진랍의 강역인 남기 6성[106]과 좌기 4성[107]만을 영토로 가지게 되었으며 수도도 후에에서 가정부로 옮기게 된다.

정글로 도망쳤던 폐제 완복시는 마을 소녀를 강간하는 추한 모습 끝에 결국 체포되어 모후와 함께 대한 본국으로 압송, 북한산성에 유폐된다. 생포된 나머지 완씨 종친들과 중신들은 전향할 기회를 줘 새로운 정권에 충성을 맹세하면 귀국시키고 끝까지 거부하면 벵골에 목화 따는 노예로 보내는 걸로 마무리하는데, 포로의 7할 가량이 완복승이 보위를 이은 남월국 행을 택했다.[108]

국호인 남월은 본래 중국 남부와 베트남 북부를 지배했던 고대 왕조의 이름이나 완씨 왕실에서 인정받고 싶어했던 남월은 그런 고대 왕조에서 영감을 얻은 게 아니라 안남에서 남을, 참파를 가리키는 중국의 옛말인 월상에서 월을 따와 지은 이름으로 남진을 완수하고 통일을 이룬 업적을 상징하는 국호로 받아들였다. 쪼개지기 이전 완씨 정권은 대남이 안 된다면 남월이라도 허락해 달라며 부단히도 애를 썼는데 몰락하고 나서 소원을 이뤘다.

인구 천만으로 대한에 칭신한 국가들 중 가장 체급이 컸고 대한이 번국으로서 지켜야 할 최소한의 선만 지키면 내정간섭 일절 없다는 점을 감안하면 대한의 비호 아래 남장과 진랍을 병합하고 인도차이나의 패자가 될 수도 있었으나 외왕내제 컨셉질에 잡아 먹혔는지 자신이 진짜 대국의 황제라도 되는 양 행세하는 과대망상 환자들과 국제적 안목 전혀 없는 기회주의자 암군만 연달아 배출하며 4대만에 처참하게 몰락했다. 국토와 인구가 세 토막나 맞수였던 섬라를 대한의 지원 없이 상대하는 건 불가능해졌으며 원래 적대적이었고 홀로 후송 영향력에 속하게 된 북기 지역은 영구히 떨어져 나갈 가능성도 제법 높다.[109]
2.3.7.1. 점파공부
안남에게 병탄당했던 옛 참파 왕국의 참족들은 대한이 안남을 정벌하자 참파 재건의 희망을 품고 대한에 협력했으나, 그렇지 않아도 작아진 남월국을 또 쪼개기 부담스러웠던 재석은 참파의 재건은 불허하고 대신 점파공부를 세워 안남에서 빼앗아간 참파 왕국의 종묘를 돌려주고 자치를 허락하는 선으로 타협한다.

2.3.8. 중월국

중월국
中越國
국호 중월국(中越國)
위치 베트남 중부
수도 후에(化, 화)
정치 체제 전제군주제
국성 이(李)
국가 원수
문자 한자, 쯔놈, 쯔한
종교 유교, 대승 불교
민족 안남인, 산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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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의 안남 정벌 이후 안남 분할 계획에 따라 재석은 완씨 왕실의 근본이라고 할 수 있는 직기 4성[112]과 우기 3성[113] 지역[114]에 중월국을 수립하고 화산 이씨 26대손이자 대한 관료 출신인 이택진을 초대 중월국왕으로 책봉한다.

완씨의 근거지로 수백 년 동안 완씨에게 충성을 바쳐온 중부 지역에 뚝 떨어져 신뢰할 수 있는 관료 집단이나 친위세력도 없고 믿을 구석이라곤 오로지 상국인 대한의 뒷배뿐인 이민족 왕조다.[115] 민족주의가 대두할 19세기 후반부터는 대체 나라를 어떻게 꾸려갈지 주목되는 상황.[116]

일단 현지에서 구한 협력자들과 저항할 동기가 약한 하급 관료들로 관료층을 꾸리고 대남 정부와 계약했던 왜인 용병들을 재고용해 최소한의 군사력을 확보했다. 폐주 완복시를 사로잡혔고 마지막까지 저항하는 반란군들만 남았다.

완씨 왕조의 원래 중심지이기도 했고, 순수 안남인들이 제일 많이 위치한 지역이라는 점에서 5부 시점에서 베트남 독립운동이 활발히 일어나거나 심하면 원 역사처럼 공산주의 또는 파시즘화될 가능성을 우려하고 있다. 북월 일대가 '월남'의 국호를 사용하고 후 레 왕조가 복귀했기 때문에 월남이 중월을 합병시키고 '월남'으로 합쳐지는 것이 아니냐는 가설도 있다.

2.4. 중원

2.4.1. 후송

대송국
大宋國
국호 대송국(大宋國)
별칭 후송(後宋)
위치 직예, 절강, 강서, 양광, 복건, 호남, 호북
번국 남월국 → 월남국
수도 남경
정치 체제 전제군주제[117]
국성 (趙)
국가원수 황제
연호 천개(天開) (1633 ~ 1668)
홍광(弘光) (1669 ~ 1680)
융무(隆武) (1681 ~ 1684)
소무(紹武) (1685 ~ 1736)
태안(太安) (1737 ~ ?)
태녕(○○) (? ~ ?)
소태(紹泰) (? ~ 1804)
영강(○○) (1805 ~ 1834)
함화(咸和) (1835 ~ )
언어 중국어(오어)
문자 한자
종교 유교, 대승 불교, 도교, 덕성도
민족 한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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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부와 4부 사이에 황제였던 혜종 태녕제 조경소는 19세에 즉위해서 12년 동안 재위하면서 사치와 향락에만 몰두하다 31세에 복상사로 사망한 암군으로, 작중에선 연산군을 대신해서 궁녀인 흥청을 3만 명이나 두면서 '흥청망청'이란 표현을 만들어냈다.

조경소 사후 제위에 오른 소태제 조승번은 부황의 막장짓 잔재를 수습하고, 서나라의 암군 함녕제가 안남 내란에 개입했다가 20만 대군을 날려먹은 틈을 타 1777년 정주도통사 홍사옥의 지휘 하에 양광을 침공한다. 서나라 양광총독 임호관이 중과부적으로 항복하자 홍사옥의 주선으로 황제 조승번이 임호관을 그대로 양광총독에 유임시키고, 이에 분노한 서나라 함녕제가 40만 대군을 보냈으나 양광군과 합동으로 이를 격파하고 양광 지역 정복에 성공하여 국력을 크게 끌어올리나, 이 여세를 몰아 북벌까지 감행하려던 조승번이 괜히 덕성도를 반역도당이라 의심하여 우환을 없애야한다는 이유로 탄압과 학살을 벌이다가 덕성도의 난이 일어나 5년간 혼란에 빠진 데다, 운남산 아편의 창궐로 기껏 끌어올린 국력을 다시 소모한다. 여기에 소태제가 자신의 장남이 요절한 충격까지 겹쳐 마음고생을 하다 1804년 화병으로 쓰러져 사망, 초반 4부 시점의 황제인 영강제 조형윤 대에 와서는 도통사들은 완전히 지방 군벌화되어 자식에게 직책을 세습하고 조정에는 사후에 표문만 올리는 데가 황궁에서도 환관의 힘이 커지는 등 완전히 당나라 말기같은 상황이 되어 버렸다. 영강제는 황제 직할령의 경제력을 끌어올려 간신히 도통사들에 대한 힘의 우위를 유지했으나, 후계자 문제로 인해 황후 송씨와 환관들에게 독살당한다. 뒤를 이은 태자 조심창은 함화제로 즉위한 이후 후궁에 틀어박혀 사치와 향락에만 몰두한 사이 태후가 된 송씨가 국정을 농단하며 아편 잠상들을 단속하기 위해 덕성도 탄압을 중단하고 덕성도에게 아편 잠상 단속권을 부여한 것도 덕성도 내에 홍수전의 배상제회가 세력을 키우고 있어 큰 위험요소로 작용 중이다.

또한 국제적으로도 무시당하고 있는 처지인데 서구권에서는 태평양을 재패한 한국은 물론이고, 용병업으로 영향력이 큰 일본, 천주교를 우대하는 건주 양국에게 인지도가 밀리는 처지이다. 동방 국가들과 수교해서 국제적 위상을 높이려는 프로이센도 후송은 인구수만 많을뿐인 비문명국이라고 무시할 정도. 서양에서는 시니카로 부른다.

결국 형산 봉선을 위해 백성을 착취했다가 민심이 흉흉해진 것을 계기로 배상제회가 반란을 일으켜 태평천국을 건국해 태평전쟁이 발발하고, 태평천국의 건국에 속수무책으로 밀리며 후송은 멸망 위기에 몰린다. 그러다 홍서당의 묘노 봉기에 자극받은 외국 연합군이 후송 편으로 참전해 태평전쟁에 개입하면서 멸망 위기에서 벗어나고 영토를 상당부분 수복하지만 태평전쟁의 전장이 되면서 큰 피해를 입는다. 관군이라는 작자들은 외국군에게 애먼 민간인들을 태평천국파라고 모함해 공격시킨 다음, 죽은 민간인들의 수급을 베어 전공을 조작하거나 살아있는 포로들을 묘노로 팔아넘기는 막장 짓거리를 하고 있어[118] 설령 난을 진압한다 해도 다른 반란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확실하게 망조가 든다. 3부에서 언더독 이미지로 인기를 끈 후송이 4부에선 원 역사의 중국 역사가 그랬듯이 순탄치 않을 거라 생각한 팬들은 많았으나, 이렇게까지 추하게 무너질 것이라는 예상은 없어서 적잖은 팬들을 당황케하고 있다.

결국 수년 간의 전쟁에 지친 외국군도 철군을 결정하면서 태평천국과의 전쟁은 휴전이라는 애매한 상태로 끝난다. 그러나 태평천국에게 영토의 절반을 상실했음에도 영토를 태평천국에게 빼앗기거나 주 전장이 된 도통부들이 큰 타격을 입고 중앙정부가 태평천국과의 전쟁으로 단련된 정예군까지 손에 쥐면서 역설적으로 중앙정부의 권력은 전쟁 전보다 오히려 더 강화되었다. 그리고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적극적으로 서양 무기와 기술을 도입하면서 대한보다 한참 느리긴 하지만 근대화의 길도 밟기 시작했으며 원 역사의 서태후와 달리 최소한의 개념은 있는 송태후가 상황의 심각성을 깨닫고 무능한 아들을 대신해 임칙서 등 유능한 신하들을 전적으로 기용하고 손녀를 대한 황태자의 후궁으로나마 보내어 대한과 국혼을 맺고 일전에 자신이 죽이려 했던 한왕 조심원을 복권시켜 월왕에 봉하고 무능한 아들을 폐위하고 조심원을 황제 자리에 앉힐까 진지하게 고심하는 등 어떻게든 나라를 건사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렇게 살아남고자 노력하던 와중 대한이 말 안 듣는 번국인 안남국 정벌을 결의하자 처음에는 대한과 후송의 이중봉신인 안남을 대한이 치는 것에 그다지 내키지 않아 했으나 대한의 결심이 확고하다는 것을 알고 이득이라도 챙기기 위해 대한의 안남 정벌에 동의, 안남 북부를 침공한다. 하지만 침공을 담당한 월왕 조심창이 북월을 자기 영토로 만들려는 욕심을 부리다가 안남인들의 거센 저항, 게다가 태평천국의 뒷공작으로 서나라가 안남을 도와 참전하면서 곤경에 빠진다. 이를 결국 얼굴마담이라도 번국으로 하면서 겨우 수습하려고 하는 중.

개방도 일찍 되었고 200년간 대한, 청의 칼끝을 직시하며 생존에 매달리다 보니 대한이 새로 병기를 개발하면 후송에서 유사한 열화판을 내놓는 모습이 3부의 인력 철갑선부터 4부의 귀갑차까지 꾸준히 묘사된다. 태평천국의 난으로 나라가 뒤집어진 와중에도 서양식 병기를 생산할 수 있는 조병창을 대거 신설했고 비행선도 어떻게든 자체 개발해 보려다 여의치 않자 마침 국혼으로 사이가 개선된 대한에게 매달려 기어이 수입해 오는 데 성공한다.

의외로 중국 왕조의 생존기한 암묵의 룰인 200년을 넘기면서 한나라 이후 역대 중국 왕조 중 가장 오래 살아남은 왕조 중 하나가 되었다. 통일 경력이 없는 순수 강남 한족 왕조이기는 하나, 위진남북조시대오대십국시대에 얼마나 자주 왕조가 갈렸는지를 생각하면 200년간 내우외환과 암군들의 잇따른 출몰 등을 겪으면서도 왕조 교체가 한 번도 안 일어나고 살아남은 게 놀라울 정도.[119]

그러나 허수아비 황제를 대신해 실질적으로 제국을 다스리는 태후, 가렴주구와 아편의 창궐, 사이비 종교의 발호로 무너져가는 사회상, 완전히 굴복시키지 못하여 지방에서 할거 중인 도통사, 애매하게 진행된 근대화, 신식 군대를 장악한 임칙서의 파벌 등 시국이 원 역사의 청말민초 분위기와 유사하고, 원 역사의 중화민국 초기 주요 인물의 상당수가 후송령 출신으로 추정 중이기에 5부에서 혁명이 일어나 제정이 무너지고 들어선 공화국으로 등장하거나 파시즘 세력으로 등장할 것이 유력시된다. 아니면 양광총독부가 월왕부라는 반독립 상태의 상인 공화국이 된 점과 쑨원을 비롯한 신해혁명의 주요 인물들이 엄밀히는 광동성 출신들이 대부분이라는 점을 들어 월왕부 일대만 혁명으로 공화국이 될 가능성도 있다.

20~21세기 시점까지 왕조가 유지될지는 미지수이나, 서나라가 몰락하면서 사실상 중국사 최후의 전통적인 한족 왕조이자 남조 국가로 역사의 기록에 남을 듯하다. 태평천국은 통일 진나라 이후부터의 일반적인 중국 왕조와 존재방식이 상당히 달라서 제외.

아이러니하게도 근대 이전 원 역사에서 그리 바랐던 인도차이나 반도 확장은 대한이 동남아시아에 영향력을 확장하는 과정에서 후송에게도 지분을 나누어 주면서 이루어지고 있다. 베트남과 수천 년간 전쟁을 벌이면서까지 원하던 베트남 북부 일대는 대한이 베트남을 3분할할 때 후송에게 넘겼으며, 란쌍 왕조(라오스)도 3개의 소국으로 분할하고 그 중 북부만 후송에게 넘기려던 당초 계획을 취소하고 통째로 후송에게 넘길 예정이다. 형식상 번국 체제인 만큼 초대 황제 조승복이 그리 외치던 천조 아래의 조공-책봉 질서도 어느 정도 부활했다.

다만 독자들은 5부에서 후송이 한족 민족주의 성향의 중화민국으로 전환되거나 양광부가 독립하여 중화민국으로 전환될 경우 이들의 처지가 오히려 위험해질 수 있다고 우려하고 있다. 그렇지만 일단 청나라 말기의 명신들이 있는 데다가 나라의 사정도 청나라보다 훨씬 좋고, 외세의 침략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 보니 후계자만 잘 고르면 나라가 망하지 않을 것이라 보기도 한다.[120]
2.4.1.1. 월남국
대한과 후송이 안남 정벌 이후 안남을 분할하기로 암묵적으로 합의함에 따라 후송 조정은 후 월왕 조심원에게 안남 북부를 정벌하고 후 레 왕조의 왕실인 여씨의 후손을 찾아 번왕으로 삼을 것을 명한다. 조심원은 월왕부와 안남 북부를 들고 자립하고자 하는 욕심에 안남 북부를 월왕부로 편입하려 성급하게 나섰다가 북부인들의 반발과 서나라를 앞세운 태평천국의 개입으로 통킹에 갇히는 신세가 되고 그제야 조정의 지시대로 후송의 번국인 월남국을 세우는 절차에 돌입한다.

조심원이 고전하는 사이 대한이 먼저 남월이라는 이름을 낚아채 남월국을 세우고, 중부에는 중월국을 세웠으니 북부는 북월국이라 명명하는 것이 궤에 맞을 것 같지만 한황의 장단에 맞춰주기는 싫고 그렇다고 중국에서 안남 북부를 가리키던 명칭인 교지는 안남인들이 절대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니 남월을 뒤집어 월남으로 명명,[122] 수소문 끝에 떠이썬 왕조에 밀려 서나라로 달아난 여씨 왕실의 마지막 군주 여유조의 차남의 손자(라고 주장하는) 여유기를 찾아 월남국왕으로 봉한다.

현지 발음으로 비엣남(Việt Nam)이 되는 한자어가 월남(越南)이니 원래 역사와 많이 달라지긴 했으나 베트남이 탄생하긴 했다.

역사와 전통의 반골 국가인 데다 오랫동안 갈등을 빚어온 중국의 속국 노릇을 해야 한다는 현실 때문에 북월에서는 후 레 왕조만 복귀시키고 후송을 통수칠 계획을 꾸미고 있다. 본작에서는 후 레 왕조가 응우옌 왕조 초기까지도 북부에서 잔당 세력이 남아있었을 만큼 오래 갔기 때문에 후 레 왕조의 복귀에는 별 불만이 없다고 한다.

독자들은 20세기 시점에서 중월이 베트남 독립운동의 중심지가 되거나 공산주의 또는 파시즘화될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있는데, 월남 또한 20세기에 후송이 몰락하거나 중화민국으로 분열되었을 때 중월과 합쳐서 '월남'이 되는 것이 아니냐는 가설이 있다.

2.4.2. 배상제회태평천국

태평천국
太平天國
국호 태평천국(太平天國)
별칭 홍서당(紅書黨), 홍적(紅賊)
위치 호남, 호북, 광서, 귀주, 사천
수도 천경(장사상덕)
정치 체제 제정일치 신정체제
국성 (洪)
국가원수 천왕
언어 중국어
문자 한자
종교 배상제회(국교), 유교, 대승 불교, 도교
민족 한족, 그 외 소수민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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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 역사와 다르게 홍수전이 덕성도 접주 출신이었기에 기독교가 아닌 덕성도의 이단으로 출발했으며, 교리가 많이 변질되고 구월산의 통제도 받지 않으면서 사실상 완전히 다른 종교가 되었다. 후송이 쇠한 틈을 타 거병해 태평천국을 건국, 중원의 일각을 장악하고 거의 전세계를 상대로 한 기나긴 전쟁 끝에도 버텨내면서 몰락한 서를 대신해 중원의 세 솥발 중 하나로 거듭날 것으로 보인다.

원 역사의 태평천국과 달리 마오쩌둥 시대의 중국공산당과 유사점이 많고, 마오쩌둥의 고향인 샹탄시가 4부 지도에 따르면 후송령 또는 태평천국령으로 추정되기 때문에 5부에서 태평천국이 중국공산당 포지션의 국가로 등장할 것이라는 추측이 많다.
2.4.2.1. 역사

2.4.3.

<colbgcolor=#008000><colcolor=#ece5b6>
대서국
大西國
국호 대서국(大西國)
위치 운남
정치 체제 전제군주정[126], 귀족공화정[127]
국성 장(張)
연호 대순(大順) (1635 ~ 1656)
영창(永昌) (1657 ~ 1715)
승평(承平) (1716 ~ 1728)
흥시(興始) (1729 ~ ?)
광안(廣安) (? ~ 1759)
함녕(○○) (1760 ~ 1787)
복흥(復興) (1788 ~ 1820)
영무(○○) (1821 ~  )
문자 한자
민족 한족, 회족, 묘족, 장족, 객가
기타 소수민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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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도 다른 두 중원 국가에 비해 국력이 딸리는 형편이었는데, 희대의 암군 함녕제 장시원의 만행으로 완전히 몰락해버렸다. 사치와 향락에만 빠져 놀고먹던 장시원은 안남의 후 레 왕조가 떠이썬 왕조에 의해 망하자 후 레 왕조를 구원한다는 명목으로 무리한 안남 원정을 감행했다가 주력군을 죄다 날려먹는다. 이 빈틈을 타서 양광 지방에 후송이 쳐들어왔고, 그러자 배후의 청은 생각하지 않고 사천의 병력을 다 뺐다가 청까지 빈집을 노리고 쳐들어온다. 결국 후송과 청이 영토 대부분을 갈라먹었으며, 함녕제는 청나라의 포로가 되어 끌려가 죽고, 서는 운남 지방만 남은 내륙국이 되어 더이상 다른 두 국가와 대등한 경쟁이 불가능한 수준이 되었다. 내륙국이 되면서 대한과의 외교도 단절되어 한양에 있던 서나라 주재관들은 명나라 황실의 후예인 대명공에게 귀부하였다.

원래부터 서 황제에게 별 충성심이 없던 운남인들이지만 과거 청이 화북에서 저지른 대학살의 기억 때문에 청에 귀부하기는 싫고, 서 황제를 폐위하고 새로운 황제를 옹립하려고 했다가는 자신들 사이에서 황제 자리를 놓고 내전이 나서 망하리라는 것을 알기에 합의를 하고 황제를 허수아비로 유지 중인 것이다. 황제와 황제를 따라 피난온 소수의 사천계 관료들은 허수아비에 불과하며 실제로 국가를 통치하는 것은 각 지역 호족들 수장 회의인 천산연(天山聯)이다.

청에서는 함녕제의 항복으로 서가 멸망했다고 간주하며 운남에 남은 서는 그냥 변방을 장악한 지방정권으로 취급하고 '서왕(西王)'으로 대하고 있다. 운남이 워낙 지형도 험하고 인구도 산업도 별볼일 없는 땅이라 놔두고 있을 뿐 청이든 후송이든 서를 정복하려고 마음만 먹으면 바로 무너질 수준. 그 후 탐보라 화산 분화로 인한 흉년과 벵골에서 들어온 콜레라까지 겹쳐 큰 피해를 입자 어떻게든 식량을 수입하기 위해 아편을 대량 재배해 의화당의 주도로 후송과 청으로 밀수출하여 특히 후송에 큰 사회 문제를 일으킨다. 호족들이 황제에게 바치는 세금도 아편팔이로 마련한 것이어서 황제 영무제가 자괴감에 괴로워할 정도. 벵골산 아편과 경쟁이 붙자 호족들이 황제에게 압력을 넣어 벵골 칸국에 항의 서한까지 보내게 할 정도다.

태평천국의 난이 발생하면서 아편 수출길이 막히자[128] 안남의 프랑스 동인도회사와 접촉하여 새로운 아편 무역 루트를 개척한다.

이렇게 지방 마약상 수준으로 추락하며 거의 잊혀진 국가가 되었으나 한송 연합군이 안남을 공격하고 후송이 북월을 장악하려 하자 국가 기간산업인 아편 밀매가 막힐 것을 우려해 대규모 병력을 파병해 후송군과 맞서며 다시 국제사회에 모습을 드러낸다. 여기에는 유일한 무역항인 통킹을 상실할 것을 우려한 태평천국이 과거 서를 통해 밀수한 무기를 '빌린 무기를 반납한다'는 명목으로 쥐어주며 파병을 부추긴 영향도 있었다. 나라 꼴이 개판인 것과 별개로 계투와 부족간 내전으로 실전 경험이 많았던 서군이 의외로 강력했기에 후송은 서가 요구하는 홍강 통행권을 내줘서 일단 돌려보내고, 대신 홍강 통행권만 인정했다며 홍강 밖의 바다에서 마약밀수선들을 단속하기로 결정한다.

국제무대에서 경쟁력을 잃은 것과 별개로 험한 운남 땅에서 계투로 이골이 난 소수민족 출신 병사들의 전투력만큼은 강력해서 후송을 고전시켰다.

2.4.4. 영국령 홍콩

홍적의 난으로 대한, 일본 다음으로 큰 피해를 입어 사망자 2천명, 재산 피해 6백만 파운드라는 큰 피해를 입었다. 이미 임칙서와 엘리엇의 협의로 의회 비준을 받아 홍서당 토벌군을 준비 중이던 영국은 이 사건을 계기로 여론도 찬성에 기울 수밖에 없게 되어 3만 명이란 대병력을 파병한다. 토벌의 대가로 구룡반도를 추가로 할양받고 그 북쪽에 공동조계인 소유주(小遺州)가 설치되었다.

2.5. 건주

여전히 대한과 우호관계지만, 대한에서 건주 양국을 자신들보다 아래인 오랑캐 취급하는 풍조가 있다는 걸 알기에 내심 대한에게 불만을 가지고 있다. 건주 양국은 여전히 북경을 공동수도로 여기는 등 겉으로는 가까운 사이지만 후금 대칸 후계자 문제를 놓고 점차 서로 상대방을 쳐 없애고 건주를 일통할 계획을 세우는 등 대한 중심의 동아시아 질서를 뒤흔들 위험이 보이고 있다. 서양에서는 이 두 나라를 호엔촐레른 가문처럼 본가와 분가로 보고 있으며, 후송과 구분하여 건주 양국을 카타이라고 부른다.

후금 내전의 결과로 1844년 후금이 청의 번국으로 격하되면서 드디어 건주일통이 이뤄진다.

2.5.1.

대청국
大淸國
국호 대청국(大淸國)
위치 직예, 산동, 산서, 하남, 섬서, 사천, 귀주, 감숙
수도 북경 > 동경 개봉부 > 북경
정치 체제 전제군주정
국성 아이신기오로(愛新覺羅, 애신각라)
국가원수 황제
연호 천명(天命) (? ~ ?)
숭덕(崇德) (? ~ 1663)
만방(滿邦) (1664 ~ 1671)
순치(順治) (1672 ~ 1695)
중통(○○) (1696 ~ 1728)
홍화(○○) (1729 ~ ?)
건강(建康) (? ~ ?)
강희(康熙) (? ~ ?)
계정(契正) (? ~ ?)
도광(道光) (? ~ 1838)
가정(嘉正) (1839 ~ ?)
언어 중국어(관화), 만주어
문자 한자, 만주 문자[129]
민족 만주족, 한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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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적인 재능이 출중한 계정제가 황위에 올라, 서나라가 후송과 양광을 놓고 싸우느라 전 병력을 양광으로 보낸 틈을 타 서나라의 중심지인 사천 지역을 기습 공격, 33일 만에 서나라 황제 함녕제를 사로잡아 항복을 받고 사천과 귀주 지역을 장악한다. 하지만 그 후 백련교의 난과 기근으로 국력이 약해지고 운남산 아편이 들어온다. 여기에 입관한 지 2백 년이 지나서인지 새로 영토로 편입한 사천과 귀주 지방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한다.

이런 상황에서도 청 도광제와 뒤를 이은 가경제는 후금의 황위 계승 분쟁을 물밑에서 조장했고 이후 벌어진 후금 내전에 개입하여 1844년 후금을 청나라의 번국으로 만들고 후금군을 흡수하며 건주일통을 이룬다. 그러나 후금 내전에 집중하는 동안 황하 대범람으로 수도 개봉을 비롯한 하남 지역이 큰 피해를 입었음에도 조정과 황실은 나몰라라한 채 북경으로 떠나면서 민심이 이반하고 기회를 노린 태평천국이 사천과 하남 방면으로 공격해오며 여기에 후송에서 태평천국 토벌을 위해 고용한 부상군이 반란을 일으킨 후 청나라 영토인 관중을 점거하여 왜진국을 세우는 등 건주일통을 이뤘음에도 오히려 국력은 흔들리고 있다.
2.5.1.1. 후금 → 실위
대금국
大金國
국호 대금국(大金國) → 실위국(室韋國)
위치 몽골
수도 상도, 카라코룸
정치 체제 전제군주정[131]
국성 아이신기오로(愛新覺羅, 애신각라)
국가원수 대칸(大汗)가한(可汗)
연호 천총(天聰) (? ~ ?)
명창(明昌) (? ~ ?)
천권(天券) (? ~ ?)
대덕(大德) (? ~ ?)
태화(○○) (? ~ 1722)
천정(天正) (1723 ~ 1760)
장락(長樂) (1761 ~ ?)
함녕(咸寧) (? ~ ?)
승광(承光) (? ~ ?)
덕창(德昌) (? ~ 1840)
언어 만주어, 몽골어
민족 만주족, 몽골족, 한족
종교 천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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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숭무적인 성향이 강했고 유목민족의 습속을 최대한 보존한 나라였지만 아이러니하게도 4부 들어서는 준가르 원정이나 청나라의 후송 공격에 지원병을 보내는 것 외에는 천주교를 보호하고 교역을 하며 가장 안정적으로 평화를 누린다.[132] 게다가 청과 후송이 장서 잔당이 퍼트린 아편으로 큰 사회 문제를 겪고 있는 것과 달리 국교인 천주교가 아편을 엄금하는 데다, 국민 대부분이 유목민인 몽골족과 수렵민인 만주족인지라 아편에 취해 있다가는 굶어죽는다는 현실적인 문제 때문에 한족 노예들 일부를 제외하면 아편도 퍼지지 않아 내정도 안정되어 있다. 주변국 중 대한과 청은 형제국이고, 준가르는 신장 지역만 간신히 유지할 정도로 약화되었고, 러시아와도 부수의 난 이후는 우호 관계인데다가 향후 남진과 서진에 더 주력할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아래에 나오는 후계 문제를 제외하면 4부에서도 큰 문제가 있진 않을 것으로 보였으나… 그 후계 문제 때문에 나라가 망하고 말았다.[133]

후금의 유일한 문제는 대칸 계승 문제로, 몽골족과 만주족의 옛 습속을 간직하여 선대 대칸들도 형제들과 서로 암살 음모를 꾸며가며 문자 그대로 목숨을 거는 싸움을 벌이고 패배한 황자들은 눈을 뽑히거나 수도원에 유폐되는 등 동로마 제국이나 오스만 제국 같은 일이 반복되고 있다. 문제는 현임 대칸인 박락이 서자만 셋 있고 청 공주인 대복진 소생 적자가 없어 박락의 서자들과 야심 많은 박락의 동생들 사이에 서로 자객을 보내는 암투가 벌어지고 있고 청 황실이 개입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으며 이를 견제하기 위해 박락의 동생들은 대한의 개입도 요청하고 있어, 박락이 후계 문제를 매듭짓지 못하고 죽을 경우 후금 판 왕좌의 게임이 벌어지고 이에 청과 대한이 말려들 위험성이 높다. 게다가 청 도광제는 이 기회에 후금을 아예 삼키려는 야심을 갖고 있어 4부 전반부에 일어날 대전쟁은 후금 황위 계승전쟁이 되었다. 그리고 결국 덕창제가 죽으면서 다섯 왕자들의 내전이 터지고 만다.

1844년 1월 청나라와 대한의 도움을 받은 럭더훈의 승리로 내전은 끝나지만, 청나라의 도움을 받은 댓가로 후금은 독립 황제국에서 청나라의 번국인 실위국으로 격하되고 군주도 황제와 동급인 대칸에서 심왕보다도 격이 낮은 청나라 친왕과 동급인 가한으로 격하, 외교권과 군사권도 박탈당하고 후금군은 청군으로 흡수되어 독립을 잃게 되었다.
2.5.1.2. 대진국 → 진왕부
후송이 태평천국과의 정전협정 후 일본 용병대인 10만 부상군을 토사구팽하려는 조짐을 보이자 부상군이 반란을 일으켰으며, 부상군의 주력을 장악한 도쿠가와 막부 타도파(도막파)가 본국에서 고모와 근친상간죄를 짓고 도막파의 도움으로 부상군으로 망명한 아키라 친왕을 황제로 세웠으며 일본계 외에도 부상군에서 일하던 후송 한족 문관들까지 대거 합세했다. 전설에 따르면 서복의 탐사단에 동행한 진시황의 황자가 일본 천황가에 피를 섞었으므로 아키라 친왕도 진시황의 후손이고 그래서 중국에 영유권이 있다고 주장하며 국호도 그래서 진나라를 따라 대진국이라고 지었다.

대진국 건국에 반대한 부상군 다치바나 사다마츠 부대가 후송 조정에 고변하여 후송군이 한양도통부 방면을 차단하자, 태평천국 영역인 강릉성 근처까지 진격한다. 정전협정 때문에 소규모 부대만 남겨뒀던 태평천국군은 속수무책으로 밀렸으나 마침 강릉에 있던 홍수전이 즉석 회담을 열고 대진국의 목표가 서안이라는 것을 듣고 길을 열어줄 테니 임시 동맹을 맺자며 담판을 짓는다. 이렇게 태평천국의 후방 지원에 힘입어 겨우 수천 명이 지키던 서안을 가볍게 점령하고 영토를 확보한다. 게다가 청나라와 사이가 틀어진 옛 후금의 왜인팔기들이 같은 왜인의 후예라고 대진국에 합류하면서 군사력도 강화하게 된다.

대진국의 존재로 후송은 부상군에게 보상금을 안 줘도 되고 청나라가 후송 공략에 신경 못쓰게까지 해주니 결과적으론 이득이 되어 버렸다. 게다가 진나라 부활과 막부 타도라는 망상에 빠진 줄 알았던 아키라는 그저 자신과 황후가 행복한 생활을 누리기 위한 기반을 만들기 위해 도막파를 이용했을 뿐, 전장에서 솔선수범하고 검소한 생활을 하여 부상군과 왜인팔기들의 군심을 잡은 후 도막파를 전부 숙청하고[134] 직접 자금성에 입조하는 노력을 보이며 청나라에 칭신해 실위와 같은 청나라의 번국이 된다. 번국이 된 후에는 군대를 절반으로 줄이고 제대한 군인들은 농상공업에 투입하여 경제 발전 노력을 하며 출신 불문 유능한 인재를 등용하는 등 상당히 양호한 정치를 한다. 청나라에 칭신한 후에도 도막파가 계속 떠들자 마침 벵골 전쟁이 터져 청나라가 왜진국 병력을 대한군을 도와 파병하라고 명하자, 도막파들로 파병군을 구성해 벵골 전쟁터로 보내버리는 정치력을 보인다.

2000년 전 사람인 진시황의 후계를 주장하는 중원 최초의 일본계 왕조이자 초대 황제와 황후가 조카-고모 근친 관계인 중원 역사상 최악의 무근본 국가. 사이비 종교 신정국가인 태평천국이 존속된 것도 모자라 그 태평천국보다도 더 근본 없는 괴악한 국가가 등장하면서 독자들의 폭발적인 반응과 함께 현관국, 현관합체국, 근친국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하지만 아키라가 의외로 제법 멀쩡하게 정치를 하면서 앞으로 나라가 오래 존속할 가망이 섰다는 평을 받고 있다.

당연하지만 여전히 도쿠가와가 권력을 잡고 있는 일본 본국과는 사이가 최악으로, 일례로 공동으로 참전한 인도 원정에서는 일본군 장수들과 왜진군 장수들이 얼굴을 마주칠 때마다 '더러운 참칭자 패거리' vs '도쿠가와의 개'라고 서로를 비난하는 실정이다. 그렇지만 세포이들이 일본인들을 학살한 현장을 목도했을 때는 똑같이 분개하기도 한다.

팬덤에서는 5부 시점까지 진왕부가 존속할 경우 원 역사 2차대전기의 일제와 이탈리아 왕국 포지션을 합친 개그 트롤링 국가가 되지 않을까 추정한다.#

2.6. 일본

일본국
日本國
국호 일본국(日本國)
위치 혼슈, 시고쿠, 남규슈
수도 경도(京都, 교토)[136]
정치 체제 전제군주제
국성 일본 황실
국가 원수 천황[137]
문자 히라가나, 가타카나, 한자
종교 신토, 정토진종, 유교
민족 일본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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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는 4천만 명 미만. 일본 용병들은 3부에 이어 여전히 좋은 평가를 받으며 아메리카 대륙까지 활동 범위를 넓혔다. 아이러니하게도 대한이 북태평양을 사실상 호수로 만들며 본국 주변 바다는 전부 대한의 바다가 됐지만 동서양의 교류와 해양활동이 활발해진 기조를 정면으로 거스르지는 않은 덕분에 일본인들의 활동 영역은 원 역사보다 훨씬 넓어졌으며,[138] 벵골 칸국이 국교를 정토진종으로 개종하게 만드는 성과도 거두었다. 일본의 전국통일 이후 그렇게 열망하던 해외 진출도 대한이 확장 과정에서 지분을 나누어 주면서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3부의 광동진남으로 대한군과 합동으로 광동왕의 반란을 진압하여 하이난에 항구와 농장 등 이권을 확보하고 을사사변으로 아체 술탄국에게 승리를 거두면서 250년 만에 대외원정에 성공하여 아체에도 항구를 확보하였으며 벵골 전쟁에서도 대한군과 합동으로 인도 원정에 나서면서 항구 등 이권을 받을 예정이다.

쇼군의 권위 역시 쇼군가의 혈통이 6대인 이에노부 이후로는 끊어지지 않았고 계속 범군 이상은 되는 자들이 즉위한 덕분에 원 역사보다 훨씬 강하다. 원 역사와 똑같이 존황을 명분으로 무력으로 막부를 무너트리려는 존황토막파가 준동하여 막부의 골치를 썩이고는 있지만 원 역사보다 막부의 권위와 힘이 훨씬 강하며 용병 명분으로 존황토막파를 적극적으로 해외로 쫓아낸 덕분에 막부가 무너질 정도로 심각한 위협인 건 아니다.

1852년 쇼군 이에츠구의 계획에 따라 공무합체를 실시, 에도 막부는 1603년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수립한 지 249년 만에 문을 닫고 교토의 조정에 통합, 막부의 최고지도자였던 정이대장군은 조정의 내대신이 되어 정식으로 천황으로부터 전권을 위임받아 실권을 휘두른다. 여담으로 원 역사의 일본이 대정봉환메이지 유신 이후 수도를 교토에서 에도로 옮긴 것과 달리 작중 일본은 공무합체 이후 조정이 교토에 남고 참예회의도 교토에 설치되면서 수도가 교토로 확정된다.

2.6.1. 아모국

아모국
我母國
국호 아모국
위치 홋카이도
수도 오타올내
정치 체제 선거군주제귀족공화제
국가 원수 → 폐지[149]
언어 아모어, 일본어
문자 가나, 한글
종교 토속종교
민족 아모인, 일본인[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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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부에서처럼 여전히 정치적으로 통합되지 않았고 미주로 가는 도중에 들러 아모국의 실상을 확인한 재석도 답이 없다는 판단을 내릴 정도로 일본에게 경제적으로 종속되어 가는 중이다. 광덕제도 아모국이 사실상 일본에게 종속되었다 여겨 유구를 병합하는 대가로 아모국을 일본에게 넘기기로 막부와 합의한다. 유구국처럼 아모국 국왕의 직위를 쇼군의 신하로 낮추는 대신 자치권과 기존 추장들의 권력은 그대로 유지하기로 하자 아모국 추장들도 압도적인 찬성을 보여 일본의 번국으로 확정된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막부는 본색을 드러내어 아모국을 막부의 직할령으로 삼고, 텐포 대기근을 계기로 수많은 일본인들이 아모국에 몰려들면서 아모국을 난장판으로 만들자 아모국이 이를 제지하려던 시도도 무력 시위를 동원해서 막으면서 막부가 대놓고 아모국을 집어삼키는 상황을 속수무책으로 바라볼 수 밖에 없는 처지에 놓인다. 수세기 동안 자주성을 유지하려는 어떠한 노력도 하지 않고 허송세월 한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된 것이다.

2.7. 섬라국

원 역사와 동일하게 아유타야 왕조가 멸망한 후 짜끄리 왕조가 다스리는 중이다. 대한과는 미수교 상태. 동쪽으로 남장진랍을 두고 대남국과 대치 중이며, 남쪽으로 말레이 반도의 말레이계 소왕국들을 두고 조홀국과 대치 중이고, 서쪽으로 면전과 적대 관계에 있다. 섬라가 유독 외교를 이상하게 했다기 보다는 동남아 자체가 만국의 만국에 대한 투쟁 상태로 대한의 번국들 제외하면 서로 원만히 지내는 국가가 없다. 봉건제로, 수도 방콕과 핵심 요충지는 왕과 왕실에 충성하는 최고위 귀족들이 다스리나 외곽 지역은 반독립적인 영주들이 다스리는데 이들은 중앙의 통제를 잘 따르지 않고 독자적으로 분쟁을 일으켜 적대 관계를 심화시켰다.

남장과 진랍을 두고 다투던 라이벌인 대남국이 대한군과 후송군의 침공을 받자 한입만을 해볼 생각에 '남장과 진랍에서 대남군이 철수하지 않으면 대한과 후송 편을 들어 참전하겠다'는 협박문을 보낸다. 다만 협박문만 보낸 채 실질적인 움직임은 보이지 않고 있다가 갑작스럽게 끼어든 것에 대한 해명을 요구하는 힐문사가 대한에서 파견되자 회답으로 최고위 귀족이자 외교 경험이 풍부한 해군 제독 수리웡 대공을 특사로 임명해 대한에 파견한다.

회담 자리에서 대한에게 무례를 범하지도, 자국을 과하게 낮추지도 않는 절묘한 외교적 수사로 포문을 열고, 표면상 남장과 진랍이 모두 섬라의 영역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도 협상의 여지를 남겨두는 세련된 외교를 구사했다. 대한 역시 사절의 흠잡을데 없는 태도에 깊은 감명을 받고 섬라의 의중을 파악하고 일단 크게 부르면서 차차 차이를 좁혀나가기로 한다. 외왕내제 황제 놀음에 잡아먹혀 진심으로 자신들이 열강 대국들에 맞설 수 있는 천자국이라 여기며 막나간 안남과 달리 자신들의 한계를 명확히 인식하고 상대를 기분 나쁘게 하지 않으면서 얻을 건 얻어내려는 모습이 원 역사에서 이웃들이 다 서구 열강에 집어삼켜지는 가운데서 홀로 살아남을 때 보여준 모습 그대로이다.

섬라 측에서 먼저 정중하게 나온 것을 기껍게 여긴 대한 외무부의 배려로 남장의 절반 가량을 섬라측에 넘겨주는, 국력 대비 매우 유리한 방향으로 진행되었으나 그동안 후궁에 틀어박혀 국사는 내팽겨치더니 섬라 문제에 대해서는 느닷없이 "섬라는 반드시 후송의 번국으로 유지해야 한다"며 개입을 지시한 함화제의 엄명으로 명목상 섬라의 상국인 후송이 개입해버리면서 모든게 어그러지고 만다. 조공국으로서 격이 낮은 5년 1공이긴 하나 어쨌든 상국인 후송을 부정하면 19세기에도 전혀 흔들리지 않고 확고하게 유지중인 조공-책봉 지배질서를 일방적으로 부정한 못 믿을 국가가 되어 명분상 굉장히 불리한 입장에 놓일 것이오, 이를 무마하기 위해 대한의 번국이 되길 택하면 실질적으로 섬라에 개입할 능력이 없었던 후송과 달리 그럴 능력이 충분히 있는 대한으로부터 엄청난 압력이 가해질 것이었다.

막다른 골목에 부딪친 섬라국 특사 수리웡 대공은 주권을 지키는 유일한 선택지로 (실질적으로 섬라에 어떤 영향력도 미칠 수 없는)후송의 번국임을 다시 한 번 강조하며 후송 특사로 온 까마득한 하급 관료인 이홍장에게 고개를 숙이는 선택지를 골랐지만, 섬라의 이중적인 태도에 열받은 대한 외무부는 섬라에 유리하게 협상을 맺어주려던걸 취소, 남장과 진랍을 전부 토해내게 만들고 섬라에게는 딱 원 역사 만큼의 영토만 보장해주는 쪽으로 기울어 버린다. 이에 자신들만 땅을 내어줘야 하는게 불공평하다고 섬라가 항변하고, 후송도 섬라에 동조하자 대한은 섬라가 할 말이 없도록 안남이 차지했다 안남 정벌 후 중월국 영토로 귀속된 남장 영토도 전부 반환하고 후송에게는 난창국 전체를 줘서 후송도 입 다물게 만든다. 라이벌이었던 안남이 몰락해버렸으니 동남아 지역강국으로서 위상은 유지하겠으나 아쉽게 된 것은 사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면전이 눈치없이 세포이의 난이 터진 벵골을 침공해 대한의 심기를 건드리는 짓을 저질러 안남처럼 두들겨 맞을 상황에 놓이면서 사방으로 대한에 포위당한다는 안보 위기가 현실로 다가오게 된다.

2.8. 남장국

원 역사처럼 난창국(瀾滄國, 루앙프라방 왕국), 만상국(萬象國, 비엔티안 왕국), 점파색국(占巴塞國, 참파삭 왕국)으로 분열된 상태였으며 섬라와 안남이 각자 일부 영토를 점유한 채 대치 중이었다. 임자남정으로 안남이 몰락하고 그 자리를 대신한 대한이 섬라와 지분 협상을 하게 되는데, 섬라의 이중적인 태도에 분노한 대한 외무부는 난창국 북부는 후송의 번국으로 후송에게 넘기고, 난창국 남부와 만상국, 점파색국은 섬라의 영향권에서 떼어내 대한의 번국으로 만들 계획을 세운다.

섬라와 안남이 각기 남장국 일부를 점유한 채 대치하던 상황에서 자신들이 점유한 남장 영토를 전부 토해내게 생긴 섬라는 남장 소국들을 독립시켜주는 건 어쩔 수 없더라도 섬라만 일방적으로 영토를 상실하는 건 불공평하다 항변하고, 어떻게든 인도차이나에 지분을 확보하려는 후송까지 섬라 편을 들자 재석은 안남 분할로 중월국령이 된 남장국 영토도 반환해[153] 섬라가 할 말이 없도록 만들어 버리고, 난창국 분할을 취소한 후 난창국을 통째로 후송의 번국으로 넘겨줘 후송쪽에서 군말 나올 여지도 차단한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 쌓여 척박하고 부양력 떨어지는 내륙국이 최종적으로 3토막나게 되어 성장은 기대할 수 없게 되었고 오직 완충지대의 필요성만으로 존재하는 소왕국들로 전락할 전망이다.

2.9. 진랍국

원 역사처럼 섬라와 안남의 각축장에 치이는 신세로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두 나라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고 있었다. 임자남정으로 안남이 대한에 의해 몰락할 때 섬라에 대한 트라우마 때문에 잠깐 섬라 눈치를 보았으나 대한이 번국을 통해 동남아시아에 아예 눌러앉을 의사를 드러내자 편을 바꿔 대한 밑으로 들어간다. 대한은 척박한 산악지대라 나올 것도 없고, 진입하는 것부터 일인 남장은 섬라에 대폭 양보할 생각도 했었으나 남월과 평탄하게 이어져 있어 유사시 개입이 용이하고 불교계에서 탐내던 천축사가 자리한 진랍은 철저하게 대한이 차지하는 것을 염두에 두고 협상을 진행시킨다.

원 역사보다 영토는 다소 줄겠으나[154] 졸지에 후송의 번국이 되게 생긴 이웃 남장과 달리 상국으로서 번국 하나는 제대로 챙겨주는 대한의 번국이 되고, 미래에 닥칠 커다란 환란도 피해갈 희망이 생겼다.

2.10. 준가르 칸국

원 역사에서 건륭제에 의해 진작에 학살당해서 세상에서 사라진 것보다는 상황이 낫지만 본국에서 쫓겨난 로브 샨쇼노의 무리가 인도에서 벵골을 정복하고 잘 사는 데 반해, 준가르 본국은 러시아와 후금 사이에 끼어 거의 망하고 간신히 신강지역만을 지키고 있다. 결국 러시아의 위협에 굴복한 대칸 타마치가 러시아 차르에게 복속을 택하면서 러시아의 속국이 되고, 5년에 한번씩 칸이 직접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입조해 조공을 바치는 신세가 되고 만다. 이런 현실에 절망해서 동족의 나라인 남쪽 벵골로 떠나는 전사들도 종종 있다고 한다. 1840년 후금 내전이 터지고 후금 사패륵 찰니가 준가르에서 용병을 고용하자 이 기회에 원수 후금에 대한 복수의 의미로 용병들이 후금 서부 지역을 크게 약탈하게 된다.

수도는 굴자이다.

2.11. 티베트(호슈트 칸국)

준가르의 침략으로 통합됐었다가 중종 때 내란으로 다시 오이라트에서 갈라져 나온 호쇼트부가 다스리고 있으며 정치권력은 호슈트부의 칸이, 종교적 권위는 티베트 불교의 최고 권위자인 달라이 라마가 맡고 있다. 주적은 청, 준가르, 네팔이며 서나라와는 오랜 맹방이다. 서나라가 건재하던 시절엔 서천과 양광에 자리해 전마 구하기 힘든 서에 중기병을 공급해주는 역할을 했으며 서가 몰락한 다음에도 우호관계를 끊지 않고 청의 위협을 견재하고 있다. 청이 서천에 확고한 지배력을 행사하는 데 실패해 감숙성에 녹영 병력 일부를 주둔시키는 데 그쳤고, 또 다른 위협인 준가르는 약탈해봐야 털어먹을 거리도 많지 않고 토번 법왕의 권위로 네팔과의 전쟁에 준가르를 참전 시키려는 티베트에 관심을 기울이기 보단 벵골로 떠나는 길을 택하는 전사들이 많아져 안보 위협이 많이 줄었다. 달라이 라마를 배경으로 삼아 부탄 등 주변의 티베트 계열 소왕국을 병합하려 해 똑같은 티베트 불교를 믿고 있음에도 사이가 안 좋다. 역시 같은 오이라트 계열이지만 달라이 라마를 앞세운 호슈트 칸국의 개입이 싫어서 아예 일본 불교인 정토진종으로 개종해버린 벵골 칸국과도 사이가 안 좋다. 세포이의 난으로 벵골이 혼란에 빠지자 국경에 군대를 배치하며 기회를 보고 있다.

2.12. 네팔 왕국

원 역사처럼 고르카 왕조가 네팔을 통일했으며 북쪽의 티베트의 호슈트부와 전쟁 중이다. 세포이의 난으로 혼란에 빠진 벵골을 노리고 벵골을 공격했으나 벵골의 편을 들어 대한이 개입하자 바로 꼬리를 내린다.

2.13. 부탄 왕국

티베트 불교를 신봉하는 티베트계 국가이나 주변의 티베트계 왕국들을 통합하려는 호쇼트 칸국과 여러 번의 전쟁을 벌이면서 사이가 안 좋고 남쪽의 벵골 칸국과도 국경 분쟁으로 사이가 안 좋다.

세포이의 난 당시 혼란에 빠진 벵골을 노리고 벵골을 침공하자 벵골의 편을 들어 대한이 개입하자 바로 꼬리를 내린다.

2.14. 아라칸 왕국

원 역사에서는 1784년 미얀마의 꼰바웅 왕조에게 멸망했지만 준가르가 벵골로 들어와 벵골 칸국을 세울때 벵골술탄국 세력 일부를 흡수하여 멸망하지 않았다. 그러나 대한과 영국의 공장제 면포로 인해 손해를 본 벵골 칸국이 면포를 대체할 수출 상품인 쌀과 차를 재배할 땅을 확보하기 위해 다시 아라칸을 침공, 아삼을 비롯해 인도-미얀마 국경 서쪽의 모든 땅을 빼앗고 멸망 직전까지 몰아붙인다. 여기에 영국과의 전쟁에서 패해 해안지역을 잃어버린 꼰바웅 왕조 또한 손해를 만회하기 위해 아라칸 남부를 공격한다.

대한은 벵골을 거들어 우호국으로 단단히 묶어두는 한편 치타공 중심으로 남쪽으로 길게 뻗어 방어하기 난감한 아라칸 남부는 항구가 필요한 면전국에 넘기는 쪽으로 결론을 내리고 함대를 파견해 벵골군을 돕기로 한다. 결국 1852년 벵골과 면전에 의해 멸망한다.

2.15. 면전국

서가 건재하던 시절에는 서에게 신속했으나 서가 몰락한 이후에는 어디에도 줄을 대지 않은 채 독자 행보를 시작했다. 원 역사에서는 1784년 아라칸을 멸망시컸으나 벵골 칸국의 등장으로 불가능했으며 달라진 영국-버마 전쟁으로 인해 원 역사보다 더 빠르게 해안가 지역을 모조리 상실한다. 졸지에 내륙국이 된 꼰바웅 왕조는 벵골에 의해 망하기 직전인 아라칸을 공격해 해안을 얻으려 한다. 1852년 아라칸을 멸망시키고 얻은 전리품에 자국 사찰의 금박까지 전부 다 벗겨내 배상금을 완납. 영국군을 철수시키고 빼앗긴 영토를 수복한다.

대한의 안남 정벌로 안남이 몰락하면서 경쟁국인 섬라가 안남 방면에 신경쓸 수 밖에 없게 되자 같이 아라칸을 분할했으나 이후 사이가 나빠진 벵골과 서부 국경에서 국지전을 치른다. 그러다 천축군의 대대적인 침공으로 패닉 상태에 빠진 벵골 칸국이 국경에 있던 주력 부대를 모두 서쪽으로 돌리자 이때를 틈타 벵골을 침공한다. 벵골 뒤에 대한이 있다는 걸 알면서도 영국의 공격을 버텨냈듯 대한의 공격도 버텨낼 수 있다고 여기고 강행하나 출동한 대한 해군이 면전 해안 일대를 공격해 큰 피해를 입히자 황급히 철수한다.

넓은 국토에 비해 인구는 수백만에 불과하며 왜인 용병을 쓰지 않는 대신 사로잡은 왜인이나 서양인 용병 포로들을 강제로 정착시켜 동화시킨다고 한다.

2.16. 아체국

인도로 성지순례를 가던 일본 귀족 성지순례단이 아체 해적들에게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일본은 아체에게 전쟁을 선포, 이를 명분으로 태평천국 토벌군을 후송에서 빼내 아체로 파견한다. 대한에서도 비행선과 귀차로 편성된 지원군과 자원한 승병들을 파병하여 일본을 도우며, 2년에 걸친 전쟁으로 주요 항구와 지역을 빼앗기며 술탄이 네덜란드령 동인도로 도주하여 강화를 요청했고, 결국 일본에게는 항구 4곳과 아체 북쪽 섬 3개, 중재를 맡은 네덜란드에게도 항구 2곳을 넘겨준다.

2.17. 천축국 → 인도

시크 왕국과 벵골 칸국을 제외한 인도 대부분을 원 역사처럼 영국 동인도 회사가 지배하게 되었다. 굴람 카디르의 난을 계기로 무굴 황제는 완전히 동인도 회사의 허수아비가 되고 무굴 제국의 재상을 겸임하는 동인도회사 총재가 통치를 대리하면서 원래 회사의 설립 목적이었던 인도 무역 대신 무굴 제국의 행정을 대리하면서 거둬들이는 세수입이 주 수익원이 되었다. 그 때문에 수익을 늘리기 위해 중간 몫을 차지하는 토후국을 없애고 명목상 '황제가 다스리는 직할지'를 확대하는 중이다.

1833년에는 시크 왕국도 영국에게 굴복하여 대한이 지원하는 벵골 칸국만이 유일한 독립국으로 남게 된다. 벵골 칸국은 대한의 지원에 힘입어 아라칸 왕국 정벌에 나선다.

무굴 제국의 군대인 무굴군 역시 명목상으로는 영국의 동맹인 무굴 황제가 통솔하는 황제군이지만 영국 동인도 회사가 무굴 제국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는 영국이 수족으로 부리고 있다. 이 때문에 병력이 부족한 영국군을 지원해 태평전쟁이나 영국-아프가니스탄 전쟁, 러시아-튀르크 전쟁 등 영국이 치르는 여러 전쟁에 투입된다.

원 역사보다 일찍 황동 탄피가 개발되어 영국이 황동 탄피 소총을 세포이에게 보급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세포이 항쟁을 촉발시킨 페이퍼 카트리지의 기름 문제는 해결되었으나 이번에는 벵골 칸국이 영국 원정군에 납품하는 천향환을 원가 절감을 하겠다고 물소 젖으로 만든 버터 대신 소기름과 돼지 기름으로 만들어서 납품하는 사기를 쳤다가 이 사실을 알게 되어 분노한 북인도 토후국 세포이들이 벵골을 침공하면서 원 역사와 똑같이 세포이의 난이 터진다.

1차 원인은 벵골이 천향환 재료로 사기를 친 것이지만 이면에는 보다 복잡한 뒷사정이 있었다. 영국이 태평전쟁과 영국-아프가니스탄 전쟁을 치르면서 전비를 본국 정부가 지출하는게 아니라 영국 동인도 회사에게 전비 대부분을 떠넘겼는데, 전비로 악화된 재정을 미처 복구하기 전에 러시아-튀르크 전쟁이 터지면서 영국 동인도회사는 또 막대한 전비를 지출하게 되었다. 그래서 영국 동인도 회사는 무굴 제국의 국고(이자 회사의 금고)를 채우기 위해 수입을 늘리고 지출을 줄여야 했는데 황제 '직할령'에서 거두는 세금도 늘리고 매년 토후국에서 상납받는 상납금 액수도 늘렸다. 그리고 각종 지출을 줄이면서 군비도 줄이겠다고 군대 관련 예산도 대거 삭감하면서 군대에게 주는 봉급도 줄이고 창고에 쌓인 음식을 배급하는 등 군인에 대한 처우도 악화되었다. 그렇게 돈 문제로 인도인들의 불만이 쌓인 와중에 상술한 천향환 기름 문제가 터지면서 마침내 아와드 토후국의 번왕 와지드 알리 샤의 선동 하에 난이 폭발한 것이다.

그런데 난을 일으킨 세포이들이 불교 성지를 파괴하고 불교도들을 학살하는 과정에서 성지 순례를 하러 인도에 머물고 있던 대한인과 일본인, 중국인, 자신들을 압제하던 영국인들까지 학살하는 바람에 나라가 뒤집어진 대한과 일본은 즉시 인도 원정 준비를 시작하고 청은 대한군과 일본군을 도와 왜진군을 파병하고 후송도 물자 지원을 한다. 한편 한창 러시아와 전쟁 중인 와중에 인도에서 대규모 반란이 터지고 자국민이 세포이들에게 학살당한 영국 역시 나라가 발칵 뒤집어지면서 일련의 사태를 '폭동'으로 규정하고 대한이 개입하기 전에 신속히 진압한다는 계획을 수립, 반란의 진원인 북인도를 향한 두 강대국의 스피드런이 시작된다.

한편 무굴 황제 바하두르 샤 2세는 세포이 반란에 크게 당황하면서 스스로 책임을 지기로 하고 황태자 미르자 파크루를 탈출시키고 본인은 수도 델리에 남으나 황위 계승을 노리던 제2황자 미르자 무굴은 세포이 반군을 이용해 황위를 차지할 음모를 꾸민다. 이윽고 미르자 무굴은 델리를 장악한 세포이들과 결탁해 쿠데타를 일으켜 아버지 바하두르 샤 2세를 유페하고 제위를 찬탈, 악바르 3세로 즉위해 학살의 주모자 와지드 알리 샤를 재상에 임명하고 대한군과 영국에 항전을 선언한다.

재석은 델리를 함락시키고 인도 원정이 완료되면 사태에 대한 배상 겸 벵골과 나머지 인도 지역간 충돌을 막기 위한 완충지대 구축을 위해 불교 성지가 많은 인도 북부, 최소한 비하르는 뜯어내 식민지로 삼으려고 계획 중이다. 한편 영국도 이번 사태를 계기로 인도의 효율적인 통치를 위해 무굴 제국을 폐지하고 인도를 아예 자국의 직할 식민지로 전환하는 것을 계획 중이다.
세포이들이 벌인 작태에 경악한 대한은 이제 더 이상 '천(天)'자를 넣어 불러 줄 수 없다며 그동안 인도를 가리키던 공식 명칭이었던 '천축(天竺)'을 폐기하고 민간에서 많이 쓰던 표현인 '인도(印度)'로 공식 명칭을 바꾼다. 순례객 학살로 격분한 불교계에선 아예 '천축(賤畜)'이란 멸칭으로 부르기 시작한다.

2.18. 승가라

네덜란드의 식민지였으나 나폴레옹 전쟁 이후 영국과 네덜란드가 인도와 동인도의 식민지를 맞교환하면서 영국령이 되었다. 무굴 제국의 행정을 대리하고 있는 인도 총독부가 다스리고 있으나 무굴 제국의 영토는 아니다. 3부에서 네덜란드가 대한에게 빌려준 항구였던 탕갈라는 대한에 완전히 할양되어 대한령으로 남아있다. 주류 민족인 싱할라인은 독실한 소승불교 신자로 불교를 박해하려는 외부 세력과 투쟁해온 역사 때문에 자신들의 종교인 불교 수호에 매우 진심이다. 세포이의 난 당시 대한, 일본 불교계와 마찬가지로 불교 성지가 파괴되고 순례객들이 피해를 입은 것에 분노한 싱할라인은 영국에 토벌군 자원 의사를 밝혔으나 정작 실론을 다스리는 영국 당국이 러시아와의 전쟁으로 바빠서 여기에 제대로 신경쓰지도 못 하자 아예 대한령 탕갈라로 몰려와 대한에 참전을 청원. 불교 의용군인 만자군에 합류한다.

2.19. 벵골 칸국

3부 후반 나디르 샤의 무굴 정벌에 용병으로 따라왔던 준가르 왕자 '로브 산쇼노'가 재석 사망 직후 벵골 태수와 관계가 틀어진 대한의 골가타 상관의 지원을 받아 벵골 태수를 죽이고 벵골을 정복, 명목상 나디르 샤의 봉신국인 벵골 칸국을 세우고 본인을 구르칸으로 선포한다. 나디르 샤가 죽은 후 구르칸은 공식적으로 독립국을 칭하고, 마라타 동맹 등 다른 인도 국가들과 싸우면서 대한과 정식 외교관계를 맺어 지원을 받는다.

티베트가 네팔과의 전쟁에 자신들을 계속 끌어들이려 하자 티베트의 간섭을 차단하기 위해 국교 또한 준가르 시절 믿던 티베트 불교에서 일본 승려들이 포교한 정토진종으로 바꾸고, 무력으로 벵골인들에게 개종을 강요한다.[155] 그래서 새로운 카스트 제도가 생겼는데 최상위는 지배 민족인 준가르인[156], 2위는 일본 용병, 3위는 인도인 관료나 군인[157], 4위는 인도인 평민, 5위는 후송에서 팔려온 묘노, 그리고 불가촉천민으로 개종을 거부한 유랑민이 있다. 준가르인과 일본인을 다 합쳐도 전체 인구의 1할도 되지 않아 극도로 억압적인 정책을 펴고 있는데 강제 개종 이후에도 주기적으로 고기를 먹여 개종 여부를 검사하고 학살을 자행한다.

벵골을 제외한 인도 전역이 영국의 손아귀에 떨어지면서 대한의 지원이 더 절실한 상황이 되었다. 다행히 현재 영국 정부는 대한의 국력과 거리의 차이, 그리고 대한과의 우호관계의 중요성 때문에 벵골을 무력으로 병탄할 생각은 없다.[158] 가혹한 수탈을 일삼는 영국과 달리 정당한 값을 치르고 교역을 하는 대한의 보호에 만족하고 있으며, 주변국들도 고만고만하여 벵골의 가장 큰 적은 말라리아를 옮기는 모기라고 할 정도로 안정적 구도를 확립한다.

영국이 태평천국의 난 진압을 지원하여 정식으로 후송에서 이권을 얻는 대신 벵골산 아편의 수출을 중단하기로 하고, 남은 후송의 아편 수요도 안남국에 자리잡은 프랑스 동인도회사가 가로채는 바람에 벵골의 주산업 중 하나인 아편 산업이 큰 타격을 입는다. 이 와중에 대칸 토를로시가 말라리아로 사망하자 후계자 암투가 벌어져 3남 소남자르갈이 형 담바수렌을 죽이고 대칸이 되며, 취약한 정통성과 경제적 침체, 영국령 동인도 회사의 위협에 대처하기 위해 더욱 더 대한과 밀착하는 선택을 한다.

소남자르갈은 앞서 타격을 입은 아편 산업, 대한과 영국의 공장제 면포로 인해 손해를 본 면포 산업을 대체할 수출 상품인 쌀과 차를 재배할 땅을 확보하기 위해 과거 실패했던 아라칸 침공을 재개, 아삼을 비롯해 인도-미얀마 국경 서쪽의 모든 땅을 빼앗고 결국 아라칸을 멸망시킨다. 대한은 괜히 방관했다 영국 동인도 회사의 도움을 받고 벵골내에 친영파가 형성되는 것을 저지하고 벵골을 계속 우호국으로 붙들어 두기 위해 함대를 파견해 벵골군을 지원하며, 종심이 얇고 남쪽으로 길게 뻗어 지키기 힘든 아라칸 남부 지역은 항구가 필요한 면전국에 넘기고 기름진 북부 지역은 벵골이 갖는 방향으로 매조지를 짓기로 한다.

7세기 이후 쇠퇴 일변도를 격다 13세기에 불교가 완전히 소멸한 인도에서 수백 년의 시차를 두고 부활한 불교 왕조로 건국 과정에서 힌두교도와 무슬림을 향한 강도 높은 강제 개종과 학살을 자행했고 국경 분쟁도 잦아 영국령 인도 밑으로 들어간 주변 힌두교, 이슬람 토후국들과의 사이는 무척 험악하다. 언제 전면전이 터져도 이상하지 않지만 각각 뒷배로 있는 대한과 영국 때문에 불안한 평화를 유지하고 있다.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치르는 영국에게 군수품을 납품하면서 영국과의 관계가 개선되었으나, 그뿐이었고 불교로 개종한 척만 한 힌두교도들이 벵골에서 금지된 사티 풍습을 암암리에 유지한 것을 적발하자 사티를 저지른 시댁&친정 식구들 전부와 적극적으로 동참한 이웃 주민들을 똑같이 불태워 죽이고 나머지 주민들은 조홀에 노예로 팔아버린 일로 힌두교도 토후국들과의 사이는 더 안 좋아졌다. 그러나 토후국들 위에 있는 영국과의 관계 개선 덕분에 무굴쪽 국경은 예전보다 안정화되었고 배후가 안정되자 아라칸 분할 이후 사이가 나빠진 면전 방면 국경에 전력을 투입해 면전과 국지전을 치른다.

그런데 영국에 인도군용 천향환을 납품하면서 원래는 물소 젖으로 만든 버터로 카레를 버무려서 만들어야 하는 천향환을 대한군 납품용과 인도군 납품용 공정을 따로 유지하는 것이 귀찮고 원가도 절감하겠답시고 힌두교도와 무슬림들이 입에 대서는 안 되는 소 기름과 돼지 기름으로 만들었다는 소문이 퍼지고 실제로 사실로 밝혀지면서 분노한 북인도 토후국 세포이들이 벵골 칸국을 침공한다.[159]

이를 제지해야 할 영국군이나 동인도 회사 직속 정예 세포이 부대는 러시아-튀르크 전쟁으로 차출된 상태고 벵골 칸국도 병력 대부분을 면전과 대치하는 동쪽 국경에 투입해 제대로 방비를 안 하고 있었기 때문에 벵골 칸국은 큰 피해를 입는다. 다급히 면전 쪽에 있던 군대를 빼내 무굴 방면으로 보냈으나 그 틈을 노려 면전국이 전면적으로 벵골 칸국을 침공하는 양면전선에 빠지고 벵골 내에서도 그동안 준가르인의 강제개종과 학정에 반발한 벵골 토인들의 반란이 일어나자 결국 소남자르갈은 대한의 신하가 되겠으니 빨리 군대를 보내 도와 달라는 구원 요청을 보낸다.

안남이 대한과 후송 양국에 칭신한 채 따로 노는 애매한 번국이라면 벵골은 대한의 번국은 아닌데 그에 준하는 수준으로 밀착되어 있어 애매한 국가다. 일단 재석이나 조정 대신들의 주류 인식은 벵골의 실질적 종주국은 대한이란 것이며 이를 한층 강화하기 위해 애쓰고 있었는데 벵골이 천향환으로 사기를 쳐서 쓸데없는 분란을 일으키자 재석은 이참에 아예 벵골을 정식으로 번국으로 편입해 목줄을 채우고, 더 나아가 벵골과 나머지 인도와의 충돌을 막기 위한 완충지대로 서벵골을 떼어내 직할령으로 삼기로 결심한다. 이로서 원 역사에 비해 벵골 분할이 1947년 인도-파키스탄 분단으로 따지면 거의 100년 일찍, 1905년 벵골 분할령로 따져도 50여 년 일찍 이루어지게 생겼다.

벵골 구원을 위해 개입한 대한군이 세포이들을 격퇴하고 한 입만을 노린 면전, 부탄, 네팔까지 물리치자 반격에 나서 반란을 일으킨 벵골 토인들을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무자비하게 학살한 후 대한군과 함께 인도로 진격한다.

1850년대 기준 인구가 대략 3천만[160]으로 대한의 번국으로 편입될 시 단연 압도적인 체급을 자랑하게 된다. 기존에 가장 큰 번국이었던 조홀의 30배이며 3분할 이전 안남과 비교해도 3배 인구수다. 대신 동서로 양면전선에 이미 타민족으로 바글바글한 땅에 굴러 들어온 정복왕조라 안정성도 낮다.[161] 벵골 전쟁 당시에 상당한 제노사이드가 일어나고 있다는 서술이 있기 때문에 편입 당시에는 인구가 더 적을 수도 있다.

2.20. 파수둔

러시아가 중앙아시아 쪽으로 남진을 개시하자 이를 방지한다는 명목으로 영국이 침공하면서 1848년 영국과 전쟁을 시작한다. 원 역사처럼 영국은 아프가니스탄의 수렁에 빠지면서 전비를 부담하는 동인도회사는 부담을 호소하고 인도 병사들 사이에서도 불만이 일자 영국은 전쟁을 시작한 존 러셀 내각의 후임 내각인 더비 백작 내각에서는 발을 뺄 궁리를 하다 1852년 러시아와 오스만 투르크가 전쟁을 시작하자 영국은 파수둔 칸의 왕위를 인정하고, 파수둔 측은 무굴 제국의 국경을 침범하지 않는다는 간략한 조건으로 평화협정이 성사되었다.

원래 역사보다 더 오랜 기간, 더 많은 전비를 들여 싸웠으나 별로 많은 걸 얻지도 못하고 3만의 사상자와 허술한 협정만 남긴 채 끝난다.

2.21. 쿠와이투

아직까지는 오스만 제국의 봉신국인 상태이다. 위치상 대한과 가장 가까운 오스만 항구로 외수사 상관이 설치되어 이곳을 거점으로 대중동 교역을 하고 있다. 세계 제1의 석유 산지로서 페르시아만 일대의 가치를 잘 알고 있는 재석은 쿠웨이트를 거점으로 페르시아만 일대를 완전히 장악해 향후 전세계의 석유 시장을 통제하려는 계획을 세운다.

종주국인 오스만의 술탄 압뒬메지트 1세가 대한과의 관계 개선을 위해 자신의 장녀인 메브히데 술탄을 대한에 시집보내면서 지참금으로 쿠웨이트의 종주권도 넘겨주는 제안을 하면서 대한의 번국이 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재석은 일단 술탄의 장녀를 자신의 막내아들인 혜왕 이순과 결혼시키고 명목상 쿠와이투 번왕으로 삼으려고 한다. 하지만 전략적 요충지인 점과 현지 민심을 고려해 이순은 번왕이 되어도 대한 본국에 머물러 있고 실제 통치는 현지의 에미르 사바 가문을 총독으로 삼아 그대로 맡길 계획이다.

독자들은 영국이 다른 곳에서 전쟁을 동시에 하느라 정신 팔려서 넘어가는 거지, 인도에 대한 집착이 대단한 영국이 조금이라도 여유 있는 상황이었으면 게거품 물고 대한에게도 그레이트 게임을 걸어서 바로 전쟁 났을 거라고 평했다. 벵골과 쿠웨이트가 동시에 대한에게 넘어가면 인도를 동서 양쪽에서 압박할 수 있기 때문. 실제로 작중에서도 주한 영국 공사 포틴저 남작이 재석을 항의 방문했고 재석은 단순한 중동 교역 거점일 뿐이라고 포틴저를 속여 돌려보냈다.

2.22. 나지두 토후국

와하비즘을 추종하는 사우드 왕조디리야 토후국을 세웠다가 이집트에게 깨진 후 재기해 세운 토후국. 아라비아 반도 내륙과 동부를 차지하고 있으며 재석은 자신이 차지하려는 쿠웨이트와 사우디 동부 해안 일대가 세계 최대의 석유 산지라는 이야기는 할 수 없으니 대신 와하비즘을 명분으로 주변에 깽판을 치는 광신자 집단인 네지드 토후국을 응징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아라비아 내륙으로 밀어내려고 한다.[162]

2.23. 트루셜 스테이트

원 역사처럼 영국이 현재의 오만, 아랍 에미리트 지역의 에미르국들을 묶어 보호령으로 만든 지역.

3. 대유주

세부적인 진행은 다르지만 이 세계선에서도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7년 전쟁, 미국 독립전쟁, 프랑스 대혁명, 나폴레옹 전쟁이 일어났다.

한편 유럽에도 증기기관이 본격적으로 사용되며, 영국과 프랑스 등에서는 철도망이 깔리기 시작하고, 7년 전쟁 중 도버 해협에서 프랑스 해군의 증기선 전투함과 영국 해군의 장갑함이 해전을 벌이기도 했다고 한다. 하지만 아직 대한보다는 기술이 딸려 전함이라기보다는 모니터함 수준이라고 한다. 열기구도 전쟁 중에 널리 사용된다. 특히 나폴레옹이 최초로 철도망을 이용한 병력 이동, 야포 견인용 증기자동차 도입 등으로 큰 승리를 거두었다.

대한 황실의 유별난 태자 교육과 건국 후 400년간 암군이 존재하지 않는 사실은 유럽에도 널리 알려져 플라톤이 이상향으로 내세운 철인 정치를 현실에 구현해냈다는 평가를 받으며 유럽 왕실들에서도 대한을 본받아 자식들을 혹독하게 교육시키는 가문들이 생겨나고 있다. 이 때문에 빅토리아처럼 대한에 악감정을 가진 사람이 나올 정도. 사실 원 역사를 보면 알겠지만 아무리 혹독하게 교육을 시켜도 안 되는 사람은 안 된다.(...)

영국인 교수가 대한인 유학생 앞에서 논어의 학이시습지를 자연스럽게 인용하고, 알렉상드르 뒤마와 러시아 차르 니콜라이 1세의 대화에서 호가호위, 용두사미 같은 사자성어가 등장하며, 대한의 속담이 서양식으로 현지화되어 쓰이는 등[163] 동서양의 문화 교류가 만들어 낸 소소한 변화들도 눈에 띈다.[164]

3.1. 외수터국

3부 시점까지는 '황제령'이라고 불렸으나 나폴레옹 전쟁으로 신성 로마 제국이 해체되면서 외스터라이히를 음차한 외수터국으로 불리고 있다.

요제프 1세가 종두를 맞아 원 역사보다는 오래 살긴 했지만 대신 매독에 걸려 아들을 낳지 못한 채 죽었다. 그래서 원 역사와 똑같이 동생 카를 6세가 즉위하였고, 국사조칙이 반포되는 것만 늦춰졌을 뿐 카를 6세 사후 마리아 테레지아프란츠 1세 부부가 즉위하고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동맹의 역전, 7년 전쟁을 치른 것도 원 역사와 똑같다. 7년 전쟁 후 요제프 2세는 동맹이던 폴란드 왕국의 뒤통수를 치고 제2차 폴란드 분할에 참여한다. 하지만 프랑스 대혁명나폴레옹 전쟁으로 신성 로마 제국이 해체되는 등 큰 피해를 입는다. 그런 상황에서도 프랑스 부르봉 왕조와의 거래로 합스부르크 가문이 양시칠리아 왕위를 가져갔으며 원 역사처럼 재상 메테르니히의 활약으로 국력을 상당히 회복하였다.

마리아 카롤리나가 마리 앙투아네트 대신 프랑스 왕비가 되며 원 역사와 달라진 영향으로 프란츠 2세의 부인이 바뀌어 프란츠 2세 사망 후 즉위한 페르디난트 1세부터는 가상인물이다. 그럼에도 원 역사와 똑같이 1848년 혁명이 터지고 그 결과 페르디난트 1세가 물러나고 프란츠 요제프 1세가 즉위한 후 러시아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혁명을 진압한다. 그러나 러시아-튀르크 전쟁에서는 러시아가 승리할 경우 러시아와 접한 동부 국경 뿐만 아니라 남부 국경과 접한 발칸빈도까지 러시아 세력권으로 편입되어 포위당하게 되고 나아가 자국내 슬라브계 신민들까지 영향을 받을 것이란 우려에 오스만의 편을 들어 개입을 주장한다.

3.2. 포뢰선

프리드리히 대왕이 원 역사처럼 군사적 천재성을 발휘,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과 7년 전쟁에서 거듭 승리한다. 원 역사와 달리 폴란드 왕국도 대 프로이센 동맹에 가담하여 '네 여인 동맹'과 싸웠지만 홀슈타인 공작 카를 페터 울리히가 스웨덴 국왕이 되면서 초장부터 스웨덴과 동맹한 데다, 러시아도 루시아 태후 사망과 함께 동맹에서 이탈하여 원 역사처럼 승리를 거두고 폴란드를 분할하며 동유럽의 강대국 반열에 들어선다. 나폴레옹 전쟁에서는 원 역사처럼 나폴레옹에게 털렸지만 나폴레옹이 신대륙으로 도망친 후로는 멸망한 신성로마제국의 영방 국가들이 재통합된 독일 연방에서 2인자격 위치에 올랐으며 의장국인 오스트리아를 재치고 독일어권을 통합하려 한다.

3.3. 불랑국

3.4. 루스국

원 역사에서는 표트르 1세의 남계 핏줄이 끊기고 즉위한 정통성 약한 여제들이 귀족들에게 대폭 양보하면서 농노제가 강화되었는데 재석 덕분에 알렉세이의 혈통이 문제 없이 쭉 이어지면서 그럴 필요가 없어져 원 역사보다 더 강한 황권에 농노제의 퇴행성도 덜 하다. 대한을 롤모델로 삼아 근대화 개혁을 추진한 표트르 1세 이래 꾸준한 교류로 관제, 도량형, 병기 등 다방면에서 대한을 많이 참고했다.

알렉세이 2세가 사망한 후 아들 표트르 2세가 즉위했지만, 루시아 태후가 아들이 성년이 되었는데도 섭정을 거두지 않아 표트르 2세는 이에 반감을 품었다. 루시아 태후는 딸 카타지나를 도와 7년 전쟁에서 대 프로이센 동맹에 참여했지만 표트르 2세는 프리드리히 대왕에게 친근감이 있던 데다 어머니에 대한 반감, 폴란드를 차지하려는 여동생 카타지나에 대한 미움 때문에 어머니가 죽고 친정을 선포하자마자 동맹을 이탈하고 프로이센 편으로 편을 바꿔 이 세계에서도 브란덴부르크 가의 기적이 일어난다. 표트르 2세의 배신으로 카타지나가 충격을 받고 사망하자 거리낄 것 없이 폴란드를 분할하여 동폴란드를 점령한다. 하지만 그 후 프랑스 대혁명나폴레옹 전쟁 기간 동안 차르 알렉산드르 1세와 표트르 3세가 모두 짧게 재위하고 죽고, 어린 알렉산드르 2세의 섭정태후 마리아 표도로브나의 우유부단한 대처로 국력에 큰 손실을 입었으며 알렉산드르 2세가 모후를 끌어내리고 친정하면서 국력 회복에 시동을 걸고 있다. 나폴레옹 전쟁 때는 대한 원평제의 무기 지원을 받기도 했다.

극동 방면으로의 진출은 대한의 존재로 인해 진작에 막혔고, 재석은 3부 중종 시절 표트르 1세와 의형제 관계와 혼인동맹을 맺으면서 동로마 제국의 후예를 명분삼아 러시아의 진출 방향을 콘스탄티노플로 돌렸으나, 후대 차르들은 오스만 제국과 그 뒷배인 영국을 상대하기 어렵다는 난관 때문에 원 역사처럼 중앙아시아를 통해 남진을 신도한다. 무굴 제국이 원 역사보다 빨리 영국의 손아귀에 떨어지면서 중앙아시아 칸국들의 수입원이던 무굴 제국에 대한 군마 수출도 끊기게 되어 중앙아시아 칸국들의 국력이 크게 약화되었고, 대한으로부터 최신 무기를 수입해 원 역사보다 군사력이 강해진 러시아군을 당해낼 여력이 없었기에, 카자흐 칸국은 아예 멸망, 히바 칸국부하라 에미르국은 원 역사처럼 러시아의 속국이 되면서 원 역사보다 빨리 중앙아시아 정복에 성공한다.[169]

역사 개변으로 기술 발전이 빨라지고 배후에 있는 대한과 활발히 교류하면서 원 역사 크림전쟁의 주요 패인이었던 부실한 산업화와 낙후된 병기, 교통망 문제가 상당부분 해결되었다. 여기에 대한이 개발한 회선포, 귀차, 비행선에 영국은 구매하지 않은 대한제 철조망도 도입해서[170] 원 역사보다 훨씬 강한 육군을 보유하고 있다. 대신 해군은 대한의 존재로 인해 태평양함대는 아예 없고 발트함대흑해함대는 산업화와 철도망 부설, 육군용 신무기 도입에 우선순위를 두다보니 연안해군 수준에 머물러서 원 역사보다 약하다. 사실상 발트해와 흑해에 갇힌 신세다 보니 해군은 해안포와 기뢰를 활용한 접근거부에 최대한 집중하고 정부는 대한을 통해 대동양을 이용할 수 있는 유라시아 대륙철도[171] 완공에 집중한다.

러시아 공주를 황태자비로 들여 황실에 로마노프 황실의 피가 섞이게 된 대한은 명시적인 군사동맹이나 조약으로 양국을 묶진 않았지만 유럽과 아시아를 통틀어 제1의 우호국으로서 할 수 있는 편의는 최대한 다 들어주고 있다.[172] 이미 병기와 생산 설비를 지원해줬고 전시에 물주 노릇 정도는 해줄 생각이며 영프와 부딪칠 시 영국 해군이 방비가 부족한 크림 반도로 들어올 가능성이 높으니 대비하라고 미리 언질을 주며 해안 방어용으로 사용할 최신 기뢰 2백발에 현지에서 생산할 수 있도록 설계도까지 넘겨주었다.

이후 영국이 아프가니스탄과의 전쟁, 프랑스가 베트남과 쿠바 문제에 집중하는 틈을 타 오스만과의 전쟁을 계획하고 마침내 1852년 오스만의 선제공격을 명분으로 오스만을 침공하면서 제11차 러시아-튀르크 전쟁이 발발한다.

영국과 프랑스의 지원을 받아 나름대로 자신감에 차 있었고 해군에서는 확실히 자신들이 우위라며 선공을 걸어온 오스만을 육지와 바다에서 모두 갈아버리며 승승장구한다.[173] 보급과 장병 처우에 면밀히 신경 씀은 물론 점령지 민사작전에 심혈을 기울이고 군납비리를 칼같이 잡아내 척결하는 등 다방면에서 대한을 참고한 영향이 묻어나며 독자들에게 익숙한 나사 빠진 러시아군과는 일억 광년 떨어진 모습을 보여준다. 오스만 편을 든 영국과 프랑스가 전쟁에 대대적으로 개입하면서 서서히 밀리기 시작하고 재석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영불 연합군의 크림반도 상륙을 허용하여 원 역사처럼 흑해함대의 모항인 세바스토폴이 포위당하는 상황에 놓인다. 그러내 포위당한 세바스토폴의 상황도 나쁘지 않고[174] 러시아도 크림반도에 상륙한 영불 연합군에게 큰 피해를 강요한다.

전쟁 와중에도 공사를 중단하지 않고 계속 공사를 이어간 끝에 1853년 원 역사보다 51년 일찍 유라시아 대륙철도를 개통한다. 이는 대한이 장사하겠다고 러시아에다 철도를 깔 돈부터 강재, 기계류, 군수품 원료까지 엄청나게 지원해준 덕분으로, 대한 덕분에 숨을 쉴 수 있게 된 러시아라 그런지 원 역사보다 훨씬 선전 중이다.

독자들은 숨만 쉬어도 강해질 수 있는 애들이 툭하면 숨 쉬는 법 까먹더니 드디어 숨을 쉰다는 평가. 귀족 특권과 농노제 같은 구조적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 숨을 다 쉬는 것도 아닌데도 이 정도 저력이 나오는 것을 보고 영국의 러시아공포증이 착각은 아니었다고 그레이트 게임을 재평가할 정도였다. 다만 러시아 특유의 기행은 여기에서도 건재해서 이 와중에 간간히 러시아스러운 기행을 벌여 독자들을 뿜게 만들었다.# 대부분 러시아 특유의 마초 문화에서 기인한 것들인데,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마초적 로망을 추구하는 러시아의 특성상 이것만큼은 교정이 불가능했던 모양. 그래도 원 역사보다는 훨씬 얌전한(?) 편에 속하긴 한다.[175]

하여튼 독자들은 이대로만 가면 원 역사처럼 5부에서 소련화될 일은 없을 거라 보고 있지만, 4부에서도 러시아 특유의 고질적인 문제점인 귀족들의 지나친 특권과 농노 문제가 아직도 해결되지 않았고 러시아 황실이 대한과 관계가 가까워질수록 농노 문제에 민감한 양상을 보이면서 이게 큰 사고로 터지지 않을까 우려하고 있다.

3.5. 폴수국

암군인 루드비크 2세 대신 국정을 맡은 카타지나 왕비가 주도하여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7년 전쟁에 오스트리아와 동맹하여 참전하나 프리드리히 2세에게 거듭 패전하고 만다. 7년 전쟁의 결과 친오빠 표트르 2세에게 배신을 당한 데다, 패전으로 국왕 친위군을 날려버리자 그동안 카타지나의 중앙집권 정책에 반감을 품었던 폴란드 귀족들도 배신을 때려 카타지나 왕비는 충격으로 1765년 사망하고, 후임 국왕 스타니스와프 2세 아우구스트가 최후의 노력을 했지만 결국 폴란드 분할을 당해 독립을 잃게 된다. 그 후 나폴레옹 전쟁나폴레옹 1세가 원 역사처럼 바르샤바 공국을 세우나 이 역시 나폴레옹이 유럽전선에서 패배하고 루이지애나로 파천하면서 멸망하고, 많은 폴란드인들이 나폴레옹을 따라 신불랑국으로 이주했다고 한다. 여담으로 과거 카타지나 왕비가 비발디를 시켜 만든 오페라의 영향으로 지금도 상당수 폴란드인들이 대한 황실이 귀비 소씨(올렝카)의 후손인 줄 안다.[A]

러시아령 폴란드는 명목상의 폴란드 왕국이 남아있는 동군연합으로 러시아 차르가 폴란드 국왕을 겸하며, 실권은 없지만 세임 의회도 남아있다.

3.6. 수배국

원 역사에서 러시아 황제 표트르 3세[177]가 되었던 홀슈타인-고토로프 공작 카를 페터 울리히와 예카테리나 2세였던 조피 프리데리케 부부가 이 역사에서는 스웨덴 국왕 '칼 13세' 부부가 되었다.

칼 13세는 원 역사처럼 프리드리히 대왕을 숭배하였기 때문에 7년 전쟁에서 처음부터 프로이센과 동맹하여 참전했으나, 승전했음에도 순수한 덕질이 목표였기에 아무 대가도 받지 않자 이에 반발한 귀족들과 아내 조피에 의해 강제로 퇴위, 연금된다. 조피 왕비는 원 역사와는 달리 스스로 왕위에 오르지는 않고 어린 아들 파울 1세를 국왕으로 옹립한 다음 스스로 섭정 태후가 되어 의회를 억눌러 왕권을 강화하고 스웨덴의 국력을 회복시키는 업적을 쌓는다.

파울 1세의 아들 구스타브 3세 시절에는 나폴레옹 전쟁 때 끝까지 나폴레옹과 맞서 싸워, 전후 빈 회의에서 그 보상으로 독일 내 영토를 잃는 대신 본가인 덴마크에게서 노르웨이를 얻어 스웨덴, 노르웨이, 핀란드까지 이어지는 통일 스칸디나비아를 완성했다.[178] 나폴레옹 전쟁 당시 러시아가 영국과의 무역으로 올리던 수익의 상당 부분을 스웨덴이 가져갔고 나폴레옹 몰락 이후에도 러시아가 스웨덴에게 빼앗긴 무역 지분을 다 되찾지 못해서 골머리를 앓고 있다는 것을 보아 나폴레옹 전쟁 당시 북해 무역망을 유지하는데 성공한 모양이다.

발트해 패권 유지가 최우선 국책이라 표트르 1세 시절 부딪쳤고 러시아가 발트해로 뻗어 나오는 상황을 경계해 러시아의 행보에 늘 예민하게 반응한다. 그러나 표트르 1세 시절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양국의 국력차가 벌어졌기 때문에 러시아와의 전면전은 최대한 피하면서 언제든 맞서 싸울 준비가 되었다는 사실을 숨기지는 않지만 직접적인 적대 행위는 하지 않는 등 미묘한 줄타기를 이어가고 있다.

러시아 역시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 코앞에 위치해 불편한 핀란드를 차지하는 걸 은근히 원하긴 하지만 스웨덴과 전면전을 치르는 것이 부담되어 스웨덴과 굳이 싸우려 들지는 않는다.

만국박람회 참가 겸 해서 러시아를 방문한 대한 대표단에 군함을 파견해 감시하는 등 러시아와 우호적인 대한과의 관계는 그다지 좋지 않다.

3.7. 잉글국

원 역사와 똑같이 7년 전쟁에서 승리하여 북미와 인도의 패권을 장악했으나 북미 13개 식민지미국 독립 전쟁으로 미주합중국으로 독립해버린 데다가 인도에서도 경제적 가치가 높은 벵골 영유에 실패하여 원 역사보다는 손해를 봤다. 원 역사와 똑같이 나폴레옹 전쟁미영전쟁을 치렀고, 미국을 견제하기 위해 나폴레옹의 누벨프랑스 건국을 방조했다고 한다.

나폴레옹이 스페인을 침공한 후 스페인 함대를 자국 해군으로 편입할 때 함대를 기습해서 몰살시키고[179], 누벨프랑스 건국 후 바다로의 통로를 차단하기 위해 미시시피강 하구를 점령하는 등 원 역사의 명성에 부끄럽지 않게 활약하고 있어서 대한 조정에서도 앞으로 대한의 세력권인 벵골과 말레이 지역으로 잉글국이 손을 뻗칠 것에 대한 경계의 목소리가 나올 정도이다.

원 역사처럼 1833년 노예제 완전 폐지 선언을 하여 대한, 미국 등 다른 열강에도 영향을 준다.

몰락한 서나라에서 아편을 제조해서 후송에 퍼지면서 원 역사의 악행을 저지를 일이 없어진 줄 알았지만, 후송 내에서 아편 수요가 계속 늘어나 자국 내에서 생산되는 것만으로는 충당이 안 되자 이 틈을 비집고 동인도회사가 벵골산 아편을 밀수해 후송에 팔아넘기면서 이득을 취했다.

이를 보다 못한 임칙서가 영국제 무기와 공작기계를 수입하는 조건으로 아편 밀매를 그만둘 것을 요구하자 받아들이는 대신 자신들도 태평천국 토벌에 동참하고 자국 상선들이 남경까지 입항할 수 있게 해 달라는 역제안을 해서 전개만 달라졌을 뿐 원 역사보다 악명도 덜 얻고 중국에 영향력을 끼치게 되었다. 게다가 원 역사와 달리 명분도 도덕적 정당성을 확보하였기 때문에, 원 역사 아편전쟁을 반대했던 윌리엄 이워트 글래드스턴 의원이 '아편 판매를 중단하는 계기일 뿐 아니라 사교도를 토벌하는 정의로운 전쟁'이라며 참전을 적극 찬성하는 모습을 보여 이 소식을 들은 재석이 쓴웃음을 짓는다.

후송 파병은 왜 남의 나라 반란 진압에 나서야 하냐는 부정적 여론도 많아 의회에서 55표 차이로 간신히 통과했으나, 그 후 홍서당의 난으로 홍콩이 초토화 되었기에 이 시점에 다시 투표한다면 250표 정도 차이가 날 거라 할 정도로 여론도 파병 찬성으로 돌아섰다. 그러나 태평천국 토벌전이 끝이 보이지 않는 수렁에 빠지면서 염전 여론이 높아졌고, 결국 다른 열강과 함께 발을 뺀다. 그리고 휴전협상에서는 태평천국에게는 배상금을 받고 후송에게는 구룡반도와 각종 이권을 뜯어내는 선에서 마무리 한다.

이후 다시 러시아 견제에 집중, 러시아가 중앙아시아 정복에 성공하면서 러시아 견제를 위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한다. 그러나 원 역사처럼 아프가니스탄의 수렁에 빠지고 오히려 원 역사의 영국-아프가니스탄 전쟁보다 훨씬 더 긴 시간 동안 더 많은 전비를 썼으면서 더 많은 전사자를 냈다. 결국 견디다 못한 영국도 전쟁을 시작한 존 러셀 내각의 후임 내각인 더비 백작 내각에서 아프가니스탄에게 인도를 침공하지 않겠단 약속만 받고 발을 뺀다.

원 역사처럼 앨버트 공의 주도 하에 1851 런던 엑스포를 개최하며, 대한에서도 흥선제의 동복아우인 순친왕을 대표단장으로 대규모 대표단을 보낸다.

러시아 견제를 위해 프랑스랑 같이 오스만에게 유사시 지원 약속을 했는데 제11차 러시아-튀르크 전쟁에서 오스만이 러시아군에게 일방적으로 밀리자 급하게 병력 나올 구멍을 찾다 인도쪽 병력을 차출한다.[180] 그런데 인도에서 병력이 빠진 후 인도에 남아있던 세포이들이 벵골 칸국에서 영국군에 납품한 천향환에 소기름, 돼지기름이 들어갔다는 이유로 대한 영향권인 벵골 칸국을 침공하는 대형 사고를 친다. 여기에 난을 일으킨 세포이들이 인도에 있던 자국민까지 학살하자 발칵 뒤집힌 영국은 어쩔 수 없이 대한군의 인도 진공을 허용하고 동시에 인도쪽 병력을 다시 돌려보내 조기진압을 시도한다.

3.8. 내달국

나폴레옹 전쟁 당시 나폴레옹에게 본국을 점령당했으나 네덜란드령 동인도 식민지는 나폴레옹에 반감을 가진 대한 원평제가 본국 해군, 조홀국과 술루국 육군을 파병하는 등 물심양면으로 지원하여 프랑스를 막아내고 나폴레옹 전쟁이 끝날 때까지 버텨낼 수 있었고, 독립을 회복한 후에도 대한에 저자세를 취하고 있다. 벌기국이 원 역사대로 독립한 후 국력이 약화되었지만 홍서당의 난으로 네덜란드령 동인도도 큰 피해를 입었기 때문에 태평천국 토벌 다국적 연합군에 소수 병력이지만 참전을 표명한다.

원 역사 빌럼 2세의 부인 파벨 1세의 딸 안나 파블로브나 여대공이 태어나지 못했기에 빌럼 3세부터 왕실 가계도가 달라졌다.

3.9. 서반아

3부의 바비에라 왕조 초대 국왕 호세 페르난도 1세의 증손자인 페르난도 6세가 젊은 혈기에 프랑스 혁명전쟁에 반혁명군을 도와 마르세유를 침공하려다가 나폴레옹에게 박살났다. 그리고 1804년 역으로 친히 13만 대군을 이끌고 스페인을 침공한 나폴레옹에게 무참하게 패배한 후 과달라하라 조약을 체결한다. 그 결과 나폴레옹의 형 조제프 보나파르트가 원 역사처럼 스페인의 괴뢰왕이 되었고 폐위된 페르난도 6세는 가족과 함께 프랑스 아비뇽에 유폐되었다가 35세의 젊은 나이에 병사한다. 그 아들 호세 페르난도 2세는 나폴레옹이 몰락하면서 16세의 나이에 스페인 국왕으로 복귀했지만 부왕이 프랑스에서 객사한 것에 대한 반감으로 자유주의자들을 탄압하는 등 강력한 반동주의 통치를 시행하고 스페인 본토도 이베리아 반도 전쟁의 여파로 폐허가 된 데다 그 사이 아메리카 대륙의 식민지들도 반기를 들고 모조리 독립해버리면서 2류 국가로 전락한다. 그나마 바비에라 왕조가 계속해서 안정적으로 왕위를 계승한 덕분에 카를리스타 같은 19세기 스페인을 뒤흔든 정치적 혼란은 없다는 것이 위안거리.

마지막 남은 아메리카 식민지인 쿠바와 푸에르토리코도 누벨프랑스의 존재로 인해 서부 진출이 막힌 미국이 그나마 만만한 상대라며 노리고 있으며, 이에 대응해 필리핀의 상실로 가치가 없어진 태평양의 팔라우, 북마리아나 제도를 50만 냥에, 명목상 자국 영토로 선포해놓고 아예 방치 수준인 캐롤라인 제도를 추가로 5만 5천 냥에 대한에 매각, 매각 대금을 쿠바의 방위 강화에 투입하고, 누벨프랑스 침공 거점으로 쿠바를 주목한 나폴레옹 2세의 프랑스와 조약을 맺고 쿠바에 프랑스군을 주둔시킨다.

그러나 1849년 호세 페르난도 2세가 갑작스레 사망하고 그 아들인 카를로스 4세가 어린 나이에 즉위해 정국이 혼란에 빠진데다 제11차 러시아-튀르크 전쟁이 발발하면서 제 코가 석 자가 된 프랑스가 쿠바에서 자국군을 철수시키고 이 틈을 타 마탄사스에서 미국인 노예 밀수꾼이 강도에게 습격당해 살해당한 마탄사스 사건과 마탄사스 사건에 대한 항의를 목적으로 쿠바를 방문한 미 해군 군함 USS 플리머스가 원인미상의 이유로 폭발 후 침몰한 플리머스호 사건을 빌미로 미국이 쿠바를 침공하면서 원 역사보다 40여 년 일찍 미국-스페인 전쟁이 발발한다.

3.10. 벌기국

원 역사대로 1831년 네덜란드로부터 독립했다. 약소국이지만 태평천국 토벌 다국적 연합군 파병 때 중국에 거점 마련을 노리고 참전을 선언한다. 프랑스를 견제하려는 영국의 개입으로 원 역사의 작센코부르크고타 가문이 아닌 신불랑국 집정관 외젠 드 보아르네의 아들 오귀스트 드 보아르네가 오귀스트 1세로 즉위하면서 보아르네 가문이 왕위를 가져갔다.[181]

3.11. 포도아국

원 역사대로 나폴레옹 전쟁에 휩쓸리고 브라질이 독립해 국력이 약화되었다. 홍서당의 난으로 마카오에서도 피해를 입어 태평천국 토벌 연합군에 참가를 선언한다.

마리아 카롤리나가 프랑스 왕비가 된 영향으로 페드루 4세의 부인이 바뀌어 마리아 2세부터는 원 역사와 다른 가상인물이 왕이 된다.

3.12. 양시칠리아 왕국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 전쟁 당시 양시칠리아의 보르보네 왕조의 후계가 끊기자 오스트리아가 프랑스 부르봉 왕조를 지원하는 대가로 양시칠리아의 왕위를 얻어 아스부르고 왕조가 세워졌다.

3.13.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

원 역사의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의 외조부인 토스카나 대공 페르디난도 3세의 어머니 스페인의 마리아 루이사는 스페인에 보르본 왕조 대신 바비에라 왕조가 세워지면서 태어나지 못 했기 때문에 사보이아 왕조의 가계도가 달라졌다. 사실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의 가문인 사보이아-카리냐노 가문뿐만 아니라 카를로 알베르토 이전의 사보이아 왕조 본가도 비토리오 아메데오 3세의 배우자인 스페인의 인판타 마리아 안토니아 페르난다가 스페인에 보르본 왕조 대신 바비에라 왕조가 들어선 영향으로 태어나지 못했기 때문에 비토리오 아메데오 3세 이후로 가계도가 원 역사와 달라졌다.

원 역사와 달리 남부의 양시칠리아 왕국까지 합스부르크 가문이 차지하면서 사르데냐와 교황령을 제외한 이탈리아 전역이 오스트리아의 영향권에 들어갔기 때문에 원 역사보다 더 불리한 상황에서 이탈리아 통일을 시작한다. 때문에 오스트리아의 영향권에 속한 여러 공국들에서 민족주의 봉기를 부추기고 통일 과정에서 프랑스의 지원을 얻기 위해 러시아-튀르크 전쟁에도 프랑스 편으로의 참전을 역제안한다.

3.14. 그리스 왕국

원 역사처럼 오스만에게 독립에 성공했으나 비텔스바흐오토가 아닌 작센코부르크고타레오폴드[182]가 초대 국왕으로 즉위한다.

3.15. 법왕국

원 역사대로 교황 그레고리오 16세가 강력한 반동주의 정책을 펼쳐 심지어 철도도 악마의 산물이라며 거부할 정도이다. 피우스 9세 즉위 이후 철도 등 신기술 도입은 시작했으나 정치적으로는 여전히 반동적이다.

3.16. 돌궐국

원 역사처럼 그리스 독립 전쟁에서 영불러 연합군이 그리스를 지원한 덕분에 패배하여 그리스를 잃고, 이집트도 메흐메드 알리가 자립해 명목상의 봉신국으로만 남은 등 몰락의 길을 걷고 있다. 술탄 압뒬메지트 1세는 러시아의 위협으로 흔들리는 국가를 지키기 위해 근대화 개혁을 추진하는데 오스만에 자국의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프랑스의 나폴레옹 2세가 오스만에 접근, 무기와 군사고문을 지원하는 대신 그 대가로 오스만 내 기독교 성지 관리권을 가져간다.

1852년 오스만과의 전쟁을 위해 국경에 집결중인 러시아군의 움직임에 영국과 프랑스의 지원 약속을 믿고선 먼저 선전포고하고 선제공격을 했다가 러시아군의 반격에 큰 피해를 보고 저쪽에서 침공 명분을 퍼주길 기다리던 러시아에게 침공 명분까지 퍼주는 우를 범한다.

3부에서 대한과 국교를 수립한 이후에는 모카와 쿠웨이트를 통해 대한과 교역하고 한양에 있는 이슬람 공동체에 정기적으로 이맘을 파견하는 등 대한과 데면데면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아체를 침공 중인 일본을 대한이 말려 달라는 요청을 했다가 이미 일본을 지원하고 있던 대한인지라 바로 무시당한 이후로는 한동안 별 연락이 없었는데, 대한과 사실상 동맹 관계인 러시아의 위협이 가시화되고 대한에서 해독한 돌궐 문자에 대한 연구가 돌궐을 조상 국가로 여기는 오스만에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184]

술탄 압뒬메지트 1세는 오스만이 대한과 뿌리가 같은 형제의 나라라는 점을 어필하며 자신의 장녀를 대한에 흥선제의 후궁으로 시집 보내고 동시에 쿠웨이트의 종주권도 대한에게 넘겨주는 것으로 대한과 관계 개선을 하려 한다.[185] 얼마나 진지했는지 무슬리나는 이교도 남성과 결혼하면 안 된다는 율법을 깨고 딸의 신앙만 존중한다면 개종 안 해도 된다는 편의까지 제공할 정도. 재석은 압뒐메지트 1세의 장녀가 자신의 딸뻘이라는 점을 들어 자신의 후궁이 아니라 자신의 막내 며느리로 받아들이고 막내아들을 쿠웨이트 번왕으로 삼는 대신 현지 통치는 100년 넘게 쿠웨이트를 통치하던 토후 가문을 총독으로 삼아 맡기자고 역제안했다.

3.16.1. 도나우 공국(몰다비아 공국 & 왈라키아 공국)

원 역사처럼 그리스 독립 전쟁(제10차 러시아-튀르크 전쟁)에서 러시아가 승리를 거둔 결과 자치권을 얻었다. 러시아는 오스만이 전쟁 배상금을 완납할 때까지 몰다비아와 왈라키아, 두 공국에 러시아군을 주둔시켜 보호국으로 삼으려 했으나 오스만이 프랑스에게 거액의 차관을 빌려 배상금을 완납하면서 철수해야 했다. 이후 러시아는 다시 두 공국을 자국 영향권 안에 넣기 위해 두 공국 내에 친러파를 육성하면서 오스만과의 전쟁을 준비, 때가 무르익은 1852년 두 공국을 오스만으로부터 완전히 독립시키고 보호국으로 삼는 것을 목표로 제11차 러시아-튀르크 전쟁을 시작한다.

4. 대미주

4.1. 대한령 미주

대한령 미주 행정구역도

4.1.1. 북미주

감영은 덕진성에 있다.

4.1.2. 남미주

감영은 지선성(至善城)에 있고 이곳은 사실상 미주의 주도(州都) 노릇을 한다. 매년 연말에 다섯 주지사가 모여 한해를 결산하는 자리를 갖는 것도 이곳. 천사동을 1840년 6월 한-신불랑 황제 회담 이후 제회부(帝會府)로 개칭한다.

4.1.3. 중미주

감영은 위주(威州)에 있다.

4.1.4. 서미주

4.1.5. 동미주

신불랑국, 멕고국과의 협상을 통해 구입한 멕고국 북서부 영토, 처음에는 안정화를 위해 미주안핵사가 다스렸으나 9년 후 충분히 안정화되자 미주안핵사를 상설직인 동미주지사로 변경한다. 치소는 축손(逐損)이었으나 안정화된 후 에르모시요로 옮기기로 한다.

4.1.6. 빙주

정주민이 거의 없어 인구 통계가 아예 없다. 원 역사의 클론다이크 골드러시처럼 빙주 북부의 구론강(클론다이크강)에서 대량의 금이 발견되었다.

4.1.7. 동빙주

1853년 미국-스페인 전쟁에 참전을 결정했지만 전비 마련 문제로 고심하던 누벨프랑스 측이 나폴레옹이 생전에 대한에게 누벨프랑스 북쪽 땅(territoire du nord) 매입을 제안했던 것을 부활시켜 다시 대한에게 북쪽 땅을 매입할 것을 제안했고 석유와 천연가스, 우라늄 등이 풍부해 미래에 요긴한 땅임을 알고 있는 재석은 정치적으로 걸릴 것 없음을 확인하고 받아들인다. 막연히 우리가 안 사면 누벨프랑스가 영국한테 팔 테니 그전에 우리가 구입하자고 했다 역풍을 맞은 광덕제와 달리 힘든 처지에 놓인 우방국을 돕자는 확실한 명분을 갖고 논의를 이끌었기에 묘당에서도 어렵지 않게 통과. 로키 산맥 이동의 노스서스캐처원강-서스캐처원강 이북의 누벨프랑스 영토를 매입하고 그곳에 동빙주를 설치한다.

4.1.8. 동변

4.2. 영국령 캐나다

서쪽으로는 대한령 미주, 남쪽으로는 미주합중국과 누벨프랑스와 접한다. 원 역사의 캐나다 동부인 퀘벡, 온타리오, 프린스에드워드아일랜드, 뉴브런즈윅, 노바스코샤, 뉴펀들랜드 등 일대만 영국의 직할 식민지이며 나머지 영토는 원 역사처럼 허드슨 베이 회사의 사유지인 '루퍼츠랜드'가 들어서 있다.

1830년대 들어서 퀘벡의 프랑스계 주민들이 영국 총독의 영국 문화 강요에 반발하여 잦은 폭동을 일으키고 있다. 아일랜드 대기근 떄에는 영국 정부가 캐나다의 인구를 늘리기 위해 아일랜드인에게 캐나다행 배삯의 90%를 지원하면서 캐나다 이주를 장려하기도 한다. 1853년 대한의 누벨프랑스 북부 영토 매입에 대응하여 영국 정부가 허드슨 베이 회사에게서 루퍼츠랜드를 20만 파운드에 매입해 영국령 캐나다에 통합한다.

4.3. 서반아령 신서반아멕시코(맥고국)

원 역사처럼 멕시코 독립운동이 일어나 아구스틴 1세가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하고 멕시코 제1제국을 선포하지만 아직 스페인 본국에 충성하는 정부군 잔존세력과의 전투는 계속된다. 대한 태황 원평제는 반란을 일으킨 반적들이라면서 독립국으로 승인하지 않았었다.

스페인 정부군 잔존세력과의 싸움이 끝나지 않은 상황에서 아구스틴 1세의 독재로 민심이 이반한 틈을 타, 1823년 "아구스틴 1세가 혁명을 배신했다"는 명목으로 나폴레옹이 이끄는 누벨프랑스군이 멕시코를 침공한다. 2년에 걸친 전투 끝에 수도 멕시코시티가 누벨프랑스군에게 함락되었고 아구스틴 1세는 이탈리아로 망명하면서 제1제국은 붕괴된다. 나폴레옹은 텍사스를 누벨프랑스에 병합하고 나머지 멕시코 지역에는 괴뢰국인 멕시코 공화국을 세우면서 멕시코는 누벨프랑스의 보호국 신세로 전락한다. 물론 누벨프랑스군도 멕시코 전역을 통제하기엔 병력이 모자라 수도 멕시코시티와 베라크루스 등 동부 해안지역만을 간신히 통제한 상태였고 나머지 지역은 군벌과 도적들이 날뛰는 무법상태로 전락하는 것을 방치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원평제 말엽에 나폴레옹의 주선(을 가장한 강압)으로 뉴멕시코주 절반, 소노라주 전체와 치와와 주 ⅔를 900만 달러에 대한에게 매각하고 대한한테 독립국으로 승인받는다.

이와 같은 정국은 시간이 지나고 누벨프랑스의 후원을 받는 산타 안나가 대통령에 오르면서 변화한다. 집정관 외젠이 파견한 누벨프랑스군이 수도 멕시코시티와 동부 해안지역을 단단히 방어해주면서 산타 안나는 후방 걱정 없이 공세에 집중할 수 있었고 공화국 수립 20여 년만에 군벌들을 대부분 제압하여 내전을 마무리짓는다.

원 역사의 멕시코 서북부 지역을 대한한테 내어주면서 영토상으로 원 역사보다 더 큰 손해를 봤으며 국제적으로도 누벨 프랑스의 위성국에 가까운 신세다. 그나마 내전이 일찌감치 평정되었고 현대 멕시코를 카르텔 소굴로 만든 미국과 국경을 마주할 일이 없어져 보다 평화로운 방향으로 발전할 수 있게 된 점은 위안.

4.4. 프랑스령 누벨프랑스 → 누벨프랑스 제국(신불랑국)

3부에서 묘사된 것처럼 대한령 미주에서 루이지애나로 넘어온 많은 한인들에 의해 농업와 교역이 발달하면서 원 역사보다 경제적으로 훨씬 풍요로운 지역이 되었다. 때문에 7년 전쟁에서 프랑스는 원 역사와 똑같이 캐나다를 영국에게 할양했지만 루이지애나는 원 역사와 달리 스페인에게 넘기지 않고 그대로 프랑스령으로 남겼다. 프랑스 대혁명 이후 집권한 나폴레옹도 루이지애나를 아메리카 통치의 거점으로 삼으려 했기에 원 역사의 루이지애나 구입 역시 일어나지 않았고 나폴레옹이 워털루 전투에서 패배한 후 한인 사략선장 클로드 홍(홍경래)의 도움으로 루이지애나로 탈출해 누벨프랑스 제국을 세우며 원 역사에 없었던 새로운 독립국이 탄생했다.

나폴레옹 전쟁 시기에 영국 해군이 누벨 오를레앙을 점령했으나 이는 대서양 일대에서 프랑스 사략함대의 활동을 막기 위한 것이 주 목적이었기 때문에 루이지애나에서 영국은 누벨 오를레앙을 미영전쟁에서 미국을 침공하는 거점으로 활용한 것 외에는 미시시피강을 거슬러 올라가 내륙으로 진격한다 같은 다른 군사행동은 하지 않았고 그래서 생루이에 있던 나폴레옹의 루이지애나 총독부는 살아남을 수 있었다.

이후 나폴레옹이 엘바 섬에 유배되고 부르봉 왕정복고가 이루어지고 나서 영국은 누벨 오를레앙을 프랑스에 반환했는데, 그 직후 프랑스 국왕이 된 루이 18세는 루이지애나로 파견할 새 총독 인선을 정하기도 전에 백일천하로 다시 쫓겨나는 등 정신없는 시기를 보냈기 때문에 루이지애나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그래서 백일천하로 복귀한 나폴레옹은 워털루에서 패한 이후 아직 자신의 세력이 남아있는 루이지애나로 도주하기 위해 도주할 배를 찾다가 라로셸에서 우연히 클로드 홍을 만나 루이지애나에 영국군이 없는 절호의 타이밍에 영국 해군의 추격을 따돌리고 루이지애나로 도주하는데 성공했다. 어찌나 잘 도망쳤는지 유럽 국가들은 워털루 전투 이후 1년 동안 행방이 묘연했던 나폴레옹이 루이지애나에서 누벨프랑스 제국을 선포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난 후에야 나폴레옹이 루이지애나로 도망쳤다는 걸 알았을 정도였다.

3부에서 재석은 대한령 미주가 루이지애나를 장악하면 미주가 너무 커져서 독립할 것 같고, 그렇다고 미국이 루이지애나를 가지게 놔두면 미국이 너무 커져서 대한령 미주를 노릴 것 같아 완충국으로 두기 위해 미주 토인들이 하나로 뭉쳐 원주민들의 국가를 건설하도록 유도하려 했으나 우리가 왜 하나로 뭉쳐야하냐는 미주 토인들의 시큰둥한 반응에 실패했다. 하지만 건국의 주체는 달라도 원하던 지역에 완충국 역할을 할 제3의 국가가 생겨나면서 결과적으로 재석의 의도대로 이루어진 셈이다.

누벨프랑스 제국은 재석이 직접 개입해서 일어난 일이 아니라 오로지 본작의 여러 나비효과들이 중첩해서 생긴 나라라는 것이 특징으로, 재석이 흥선제에 빙의하기 전에 일어났다.

1845년 창업군주 나폴레옹이 노환으로 사망한 후 황제 직위는 영구결번이 되어 국가원수는 집정관이라는 직함을 달게 된다. 사실상 선거군주제 국가가 되어, 나폴레옹의 양자 외젠 드 보아르네가 의회의 만장일치 추대에 의해 집정관 자리에 올랐다. 외젠도 몇 년 후 나폴레옹이나 자신과 혈연관계가 아닌 필리프 드 뤼옹 중장을 자신의 후계자로 지명하면서 1852년 외젠이 노환으로 사망한 후 드 뤼옹이 2대 집정관이 된다.

창업군주 사후로는 혈연이 아닌 자들이 종신적으로 지위를 잇는지라 사실상 독재 공화정이라는 평을 듣는다. 미국의 인종차별에 실망해 그나마 인종차별이 적고 자유로운 누벨프랑스로 이주하는 자유주의 성향의 사람들과 비앵글로색슨계 대이주가 실시간으로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에 5부에서는 완전히 민주주의화될 가능성이 있다.

4.5. 미주합중국

원 역사와 같은 양상으로 7년 전쟁 후 전쟁 비용 감당 문제로 영국 본국에서 세금을 늘리자 식민지인들의 반발이 일어나 보스턴 차 사건을 시발점으로 미국 독립 전쟁이 일어났고 조지 워싱턴을 초대 대총통으로 미주합중국이 독립했다.[197] 프랑스는 원 역사처럼 미국을 지원했고, 영국은 대한의 지원을 요청했으나 대한은 개입을 원하던 목종을 신료들이 영국 견제를 위해 방관하자고 말렸고 곧 목종이 죽는 바람에 방관만 했다고 한다.

정치적으로는 독재정이지만 사회적으로는 미주합중국보다 훨씬 자유롭고 차별이 적은 누벨프랑스와 비교되며, 원 역사 중남미 공화국들과 같은 '모순과 위선'의 겉핥기 민주주의 국가의 전형을 보여준다.

이 역사에서는 북쪽은 영국령 캐나다가 있고, 서쪽은 그 나폴레옹이 다스리는 누벨프랑스가 있어 확장할 방향이 마땅치 않다. 여기에 원 역사와 다르게 인종주의 성향인 앤드루 잭슨이 당선되지 못하고 외교와 교역을 중시하는 헨리 클레이가 당선되어 연임에 성공하고 민주당으로 정권 교체 후에도 후임인 마틴 밴 뷰런 역시 확장을 지양하고 온건한 대외정책을 추구해 한동안 주변국들과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으나, 남부의 지지를 받는 제임스 포크 정부가 들어서면서 다시 확장주의 노선을 추구하려 한다. 다만 같은 백인 국가면서 대한이란 배후를 두고 있는 누벨프랑스나 누벨프랑스와 로키산맥을 넘어야 도달할 수 있는 대한에게 집적대기보단 스페인의 식민지인 남쪽의 쿠바에 눈독을 들이더니 결국 미국-스페인 전쟁을 일으켜 쿠바를 침공한다.

좋든 싫든 미국이란 단일 국가 아래 참고 살아야 했던 원 역사와 달리 많은 이주민들이 미국사회에 만연한 인종차별과 백인우월주의에 질려 보다 자유롭고 상대적으로 차별이 적은 누벨프랑스나 대한령 미주로 이주하는 다른 선택지를 고르면서 인권 의식이 개선되지 않고 오히려 악화되는 양상을 보인다. 원 역사에선 강제이주라는 선택지라도 있었던 인디언들은 꼼짝없이 학살당하거나 말라죽을 상황이고, 노예제에 대한 집착은 새로운 노예주 확보를 위해 여론을 선동하고 전쟁 명분을 조작해 전쟁을 일으킬 정도로 심각한 상황이다. 그런데 미 동부의 사기적인 지리적 여건 덕에 원 역사의 1/3 토막난 국토로도 열강 소리 듣기엔 충분한 국력이 나와서 최악의 경우에는 원 역사의 나치 독일처럼 파시즘화될 가능성도 있다고 여겨진다.

4.6. 중앙아메리카 연방 공화국 → 중앙아메리카 연맹

원 역사처럼 멕시코 독립전쟁의 혼란을 틈타 독립했으나 멕시코처럼 혼란스러운 상황이어서 멕시코의 산타 안나는 중앙아메리카를 정벌해 멕시코에 편입시킬 속셈도 있었다. 그러나 나폴레옹의 개입으로 1839년 12월 31일 연방공화국은 해산되고 니카라과, 과테말라, 엘살바도르, 온두라스, 코스타리카, 로스알토스가 독립하며 중앙아메리카 연맹으로 재편된다. 각 연맹국의 수도에는 쿠데타 방지를 위해 누벨프랑스군 수백명씩이 주둔하며, 그 덕분에 원 역사와 달리 이들 나라들은 쿠데타 없이 정치적으로 안정을 누린다.

4.7. 아이티 공화국

원 역사처럼 프랑스 대혁명의 혼란을 틈타 흑인 노예들의 봉기로 독립했고 나폴레옹 1세의 군대와 싸워 독립을 지켜냈다. 그때문에 신불랑과는 공식적인 적대관계이며 아메리카 국가회의에도 가입을 거부했다.

5. 대삼주

5.1. 그란 콜롬비아 합중국 → 그란 콜롬비아 연맹

원 역사처럼 시몬 볼리바르가 지도한 독립운동으로 건국되었으나, 대한 태황 원평제는 멕시코와 마찬가지로 국가로 승인하지 않고 있다. 볼리바르 사후 해체되어서 누에바그라나다 공화국, 베네수엘라, 에콰도르가 되었으나 나폴레옹의 중재로 그란 콜롬비아 연맹을 결성하고 나폴레옹이 만든 아메리카 국가 회의의 회원국이 되었다.

5.1.1. 누에바그라나다 공화국

그란 콜롬비아의 해체 후 건국했다.

5.1.2. 에콰도르

그란 콜롬비아의 해체 후 건국했다. 갈라파고스 제도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나 아메리카 국가연합의 맹주인 나폴레옹부터 대한을 지지하고, 이주민을 보냈더니 하와국 순찰사들에게 두들겨맞고 쫒겨나는 일이 반복되고 있다.

5.2. 브라질 제국

남아메리카의 맹주를 자처해 나폴레옹이 주도하는 아메리카 국가연합과는 비우호적인 상태이다.

나폴레옹 생전 유라시아 각국은 나폴레옹만을 신대륙의 유일한 황제로 인정했다는 것을 보아 브라질 제국은 제국으로 쳐주지 않았던 것 같다.

5.3. 영귀(英龜)제도

3부에서 중종 건흥제가 안용복을 보내 갈라파고스땅거북들을 데려오면서 대한에 알려졌다. 이후 해적 소굴이 되었는데 해적이 대한 본국과 미주를 오가는 대한 상선을 습격하는 일이 생기자 목종 영태제가 결단을 내려 함대를 보내 해적을 전부 쓸어버리고 하와국에게 관리를 맡긴다.[210] 하와국왕이 매년 한 차례 전사들을 보내 그 해 잡을 분량의 땅거북을 잡아와 등딱지로 잔치용 솥 등 사치품을 만든다.1835년 원 역사처럼 영국 탐험선 비글 호가 도착하여 연구 도중 하와국에서 온 거북 사냥대와 접촉하게 된다.
신생국 에콰도르가 독립 이후 영유권 주장을 하고 개척민을 보내기도 했으나 하와국 관원들에게 바로 참교육당하고 쫒겨나는 일이 반복되고, 누벨프랑스 주재 대한 공사관과 에콰도르 공사관도 계속 투닥거리고 있으나 나폴레옹도 이 문제는 대한 편을 들고 있다.

6. 대상주

6.1. 알제리

프랑스 국왕 루이 19세가 국내의 자유주의자들과 보나파르트주의자들이 벌인 1830년 7월 봉기1832년 6월 봉기를 진압하느라 외부로 군사력을 투사할 겨를이 없어 일단은 프랑스의 침공을 받지 않았다. 그러나 프랑스가 수에즈 운하 공사의 걸림돌인 바르바리 해적 토벌을 위해 알제리 침공의 필요성을 느끼던 중 1837년 원 역사와 마찬가지로 나폴레옹이 이집트 원정 당시 알제리에 진 식량값 상환 문제로 프랑스 대사와 싸우던 알제리 태수가 프랑스 대사를 파리채로 때린 일이 구실이 되어 루이 19세가 전면침공하면서 7년 늦긴 했지만 원 역사대로 프랑스의 식민지로 전락한다.

6.2. 애집투

원 역사처럼 오스만이 임명한 이집트 총독 메흐메드 알리가 자립하여 사실상의 독립국이 된다.

대한에서는 역사가 길긴 하지만 헤로도토스의 《역사》가 경조 재위기에 번역된 후로 그 책의 기술에 따라 이집트의 피라미드를 두고 군주가 백성들을 혹사시키며 자기 무덤을 지었다고 보아 이집트의 역대 파라오들을 진시황과 수양제와 같은 암군이라고 보고 혹평하며 애집투가 그러고도 망하지 않고 오래 지속되었던 이유는 오직 주변에 다른 강대국이 없었기 때문이지만 결국 돌궐의 속방으로 전락했다고 본다.[211]

6.3. 모로코

프랑스의 위협 때문에 알제리를 지원하였으나 프랑스가 모로코까지 공격해 전쟁에 패배하며 알제리에 지원하지 않는 조건으로 평화조약을 맺는다.

6.4. 애토피아

대한에서는 접점이 별로 없는 생소한 국가지만 우영만유기를 통해 현왕(賢王) 솔로몬의 아들이 세운 3천년 역사의 왕국으로 알려져 있어 인식은 좋은 편이다.

원 역사와 똑같이 황제와 여러 부족 대공들이 각지에서 할거해 내전을 벌이는 판관 시대를 겪는 중으로 내전에서 승기를 잡아가고 있는 카사 하일레[213]가 크림 전쟁을 목격한 후 유럽 열강에 대한 신뢰를 잃고 대신 국제적 신뢰도가 높은 것으로 알려진 대한에 사신을 보내 근대화를 위한 지원을 요청하면서 접점이 생긴다. 재석은 카사 하일레를 도와주는 대가로 지부티를 대한이 조차하여 수에즈 운하의 홍해 쪽 입구를 통제할 거점으로 삼으려 한다.

7. 오세아니아

7.1. 신홀란도

3부에서 영국이 개척을 시작한 이래 4부 시점에서는 호주 해안 지역은 전부 영국 식민지가 들어섰고 아직 내륙 진출은 안한 듯. 원 역사와 달리 죄수보다는 자코바이트 같은 정치적 추방자나 일반인 개척민의 인구가 더 많다. 개척을 네덜란드령 바타비아와 가까운 북서부부터 시작했기 때문에 총독부 소재지는 여전히 북서부 조지타운이다.

7.2. 신질란도[214]

원 역사와 달리 하와국 노예사냥부대가 남태평양을 들쑤시고 다닌데다 대한이 북태평양에서 유럽, 미국의 포경을 금지하면서 포경선들이 남태평양으로 몰린 나비효과로 남태평양 여러 섬들의 정세가 불안해졌고, 이에 마오리족 추장들이 스스로 영국과 조약을 맺고 영국 영토가 된다. 마오리족들이 영국군에 복무하는 대신 부족 자치와 토지 소유가 허락되는 등 원 역사보다는 더 나은 조건으로 조약을 맺었다.

7.3. 나오에로 → 대한령 나오도

하와국 노예사냥부대가 남태평양 전역을 들쑤신 덕분에 유럽 교역상에게서 구식 수석총을 사들여 무장하는 수준까지 되었다. 1841년 1월 대한 순해국 탐사선을 타고 온 알렉산더 폰 훔볼트와 제자들이 이 섬을 조사하다가 인광석이 가득하다는 것을 알고 돌아와 재석에게 보고하고, 재석은 3부에서부터 그렇게 찾았던 나우루가 사실 나오에로였다는 것에 허탈해하면서 남부통제영 함대를 보내 나오에로를 복속시켜 나오에로는 대한령 나오도가 되었다. 나오에로가 대한에 복속하는 것을 보고 인근 부아나바 역시 대한에 복속하여 대한령 부아도가 되었다.

재석은 나우루 성인 남녀가 매년 일정한 양의 인광석을 바치면 보상해주는 조치를 취하되 원 역사처럼 나우루인들이 생활력을 상실할 정도로 흥청망청하는 것을 방지하고자 인당 1년에 600kg으로 채굴 수량을 철저히 제한했다. 이후 인광석의 비료로서의 가치가 확인되고 비료의 수요가 늘자 중국인 노동자들을 파견해 연공으로 바치는 물량 이상의 인광석을 캐는 중이다.

7.4. 부아나바 → 대한령 부아도

원 역사의 키리바시 바나바섬. 나오에로가 대한에 복속하는 과정에서 인근 부아나바도 대한에 복속하여 대한령 부아도가 되었다.

7.5. 초성해

대한에서는 섬(礁)들이 별(星)처럼 흩어져 있는 바다(海)라고 하여 '초성해(礁星海)'라고 부른다. 나오도와 부아도가 대한에 복속하여 인광석을 바쳐 하와국의 노예사냥에서 벗어나는 것을 보고 1845년 캐롤라인 제도마셜 제도의 추장들이 단체로 대한을 찾아와 흥선제에게 스스로 복속을 청하면서 대한령이 된다. 주인이 없던 마셜 제도는 그대로 대한령이 되고, 명목상 스페인령이던 캐롤라인 제도는 대한이 스페인에게 5만 5천 냥을 주고 매입한다.


[1] pied. 단위 피트의 프랑스어.[2] 요동주 → 2도(요심도, 요동도), 부여주 → 3도(발해도, 부여도, 삼강도), 연해주 → 3도(연해도, 연흑도, 현토도), 속말주 → 1도, 영락주 → 1도[3] 흑룡강 이북 외만[4] 레나 강 이동 이르쿠츠크 주 극동 연방관구[5] 워싱턴 주, 브리티시 컬럼비아[6] 네바다, 유타 주[7] 남변(累蓀) → 누손주[8] 본래 작가가 흥녕(興寧)으로 설정했으나 4부 364화에서 설정을 변경하여 흥선으로 수정했다.[9] 그런데 3부 외전에서, 원 역사의 단종이 복권될 때 신덕왕후 또한 복권됐다는 언급이 이미 나왔다. 즉 이는 설정오류다.# 정황상 작가가 이미 신덕왕후가 복권됐었다고 언급했던 것을 잊어버리고 저지른 실수인 것으로 보인다.[10] 즉, 대명공은 대명동 안에서는 폐하라고 불릴 것이다.[11] 여기서도 절반 이상이 대남도 출신이다.[12] 다만 한 독자가 문의한 것에 대해 작가가 대답한 바에 따르면, 과거 급제자의 출신지 집계는 응시 지역을 기준으로 하기 때문에 실제 출신지가 외지였어도 내지에서 응시했으면 내지 출신으로 집계된다고 한다. 그래서 실제 출생지를 기준으로 하면 북구주인들은 대부분 영남에 유학하여 영남에서 응시하는 사람이 많다고 하므로 순위가 뒤바뀔 수 있다.[13] 사실 이는 5회차 인생인 재석의 지식수준이 너무 대단해서 경연관들이 부담스러울 지경인 것도 한몫했다.[14] 다만 복식 관련 선례는 올렝카가 최초로 만든 것은 아니고, 2부 장조의 손자였던 선조 건원제의 네덜란드인 후궁 원빈 때 처음 만든 선례긴 했다. 하지만 시녀들까지 서구식 복식이 허용된 것은 올렝카 때부터인 것으로 보인다. 올렝카가 유럽에서 정말 유명해져서 이게 제일 대표적인 사례처럼 여겨지는 것도 있어 보인다.[15] 그러나 미주에 이주해온 모르몬교 공동체와 아란인의 인구 증가 속도가 빨라서 대한 내 유주인 집단 규모로는 3위로 내려앉았다.[16] 대한 관리들을 구워삶기 위한 기타 비용까지 포함하면 소모한 비용은 은 1000만 냥(!)에 달했다.[17] 둘레 10리(약 4km)의 팔각형 요새이다.[18] 폭 60m의 해자 축만제가 성을 둘러싸고 있다.[19] 실제 역사의 그랜드 워커힐 서울 부지.[20] 재석의 명으로 미주로 이주한 오도리 전사 3천 명이 그 식구와 하인들까지 포함하면 실제로 이주한 인구는 5만 이상이었다는 것에서 역추산하면 실제 오도리 인구는 100만 이상일 것으로 추정된다.[21] 중기병과 경기병의 차이가 보다 뚜렷하던 2부 시절 오도리는 철갑으로 전신을 두르고 전면에서 타격하는 중기병, 왜인여진은 각자 알아서 맞춘 무장에 한결 다양한 임무를 소화하는 경기병이었다. 현대전에서 기갑부대의 역할을 감안하면 그 역할을 계승시키겠다는 뜻이다.[22] 물론 미주 출신 한인도 은연중에 차별당하는 판국인데 미주 토인 출신 관료가 순조롭게 출세할 리는 없지만, 거의 다 대남병으로 신분 상승을 노려서 여전히 문과 합격은 엄두도 못 내는 대남도 토인이나, 단순 노역에 종사하거나 관군에 토벌당하는 신세인 누손주 토인에 비하면 훨씬 나은 처지이다. 게다가 미주 토인들도 한인들도 합격이 어려운 과거에 합격한 것 자체를 영광으로 여기기 때문에 차별당한다는 인식도 없다. 애초에 합격 여부 자체가 양반과 상민의 계급 기준이 될 정도로 과거 시험이 한인 입장에서도 난이도가 대단히 어려운 시험이라는 걸 감안하면 교육 환경이 상대적으로 좋지 않은 미주에서 한인들과 모어도 다른 토인이 과거 시험의 최종 단계인 대과까지 통과해 관리로 임용되었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것이다.[23] 막부의 천주교 박해는 단순히 예수교를 믿는 외국을 끌어들여 막부 체제를 무너뜨리는 것을 막기 위한 권력구조적인 문제지만, 존황파의 천주교 혐오는 사상의 문제라서 더 타협이 안 된다.[24] 물론 조선의 양반도 귀족의 면모를 가지고 있으며 조선 후기로 갈수록 경화사족 중심의 귀족화가 심해졌고 이는 대한도 마찬가지이나, 동시대 유럽의 귀족만큼 절대적 특권을 가진 건 아니다. 당장 프랑스 혁명이 일어난 원인이 귀족의 세금 문제였는데, 양반들은 세금을 회피하기는 해도 어느 정도 낸다는 걸 생각해보자.[25] 청나라로 떠난 왜인 귀족들은 일본 용병들이 관중에 대진국을 세우자 다시 그쪽으로 대거 합류한다.[26] 용맹으로 이름난 마사이족은 노예가 되느니 자살해버리는지라 데려오지 못하고 잡다한 부족 출신들이 섞였다.[27] 군관은 공작 깃털, 사졸은 꿩 깃털.[28] 이름만 같을 뿐 K-2를 모티브로 제작했고 12.7mm 탄환을 쓰는 한제국건국사의 갑식 보총과는 작동 원리가 완전히 다르다. 그래도 이 명칭을 사용하기 위해 작가가 친구인 윤민혁 작가에게 허락은 받았다고 한다.[29] 슈작가가 밝힌 바에 의하면 완전히 똑같지는 않으나 A7V와 유사한 외형이라고 한다.[30] 무연화약과 주퇴복좌기가 개발되기 이전, 흑색화약과 원형탄을 쓰는 전장식 대포의 관통력, 명중률, 연사력으로는 움직이는 귀차를 잡는 건 고사하고 명중시키는 것부터가 일이다. 대포의 획기적인 발전 없이 작중에 나온 수단만 활용해 귀차를 잡으려면 같은 귀차로 받아치던가(물론 주포가 구려서 아직은 서로 교전해서 격파는 못하겠지만, 어쨌든 너만 쓰냐 나도 쓴다 식으로 대응은 가능하다), 대전차호를 파던가, 대포 여러 문을 동원한 일점사로 럭키 샷을 노리던가, 자돌폭뢰를 활용해 자폭공격하는 방법이 있다. 작중 활대기뢰는 러시아와 대한 해군도 채용했을 만큼 상당히 대중적인 무기 체계로 이걸 소형화하면 자돌폭뢰가 된다.[31] 비행선에 처음 탄 디에고는 폭탄을 모로족 머리 위에 떨어트리고 싶다는 소감을 밝혔고 김좌근은 아예 손잡이를 당기면 바닥의 문이 열리면서 폭탄이 땅에 흩뿌려지는 폭탄창의 아이디어까지 재석에게 제시한다.[32] 개념적으로는 1993년에 있었던 모가디슈 전투와 완전히 같다! 심지어 성공한다![33] 무종 시절부터 국립묘지를 구상했던 재석이 처음에 염두에 둔 이름은 충렬사였으나, 다른 일 때문에 구상이 자꾸 밀리는 와중에 전국에 충렬사라는 이름을 단 사당이 10곳 넘게 세워져서 쓸 수 없게 되었다.[34] 작중 청은 건주 내전에 황하 대홍수, 홍서당의 난, 왜진국 등 여러 사건사고 때문에 산업화에 집중할 수 없는 형편이고, 실위는 후금 시절부터 산업화에 관심이 없고, 후송은 영국으로부터 기술을 수입해 제철소를 세우긴 했으나 이 제철소는 무기 생산에 필요한 철을 공급하기 위한 것으로 생산량이 많지 않아 일반 수요는 재래식 고로를 이용해 생산한 철로 충당하고, 일본은 제대로 된 철광석 산지가 없어서 대한에서 산업용 철재를 수입하는 실정이며, 다른 국가들은 이마저도 시도조차 하지 못 하는 여건이다.[35] 이 때문에 독자들 사이에서 작중 일본을 두고 '아시아의 캐나다', '대한 2중대'로 부르는 밈이 있다.[36] 지정학상 영국이 무력으로 해결 보기는 어렵다는 것도 한몫했다. 해군력 자체는 영국이 앞서나 캐나다, 호주, 지중해, 인도양까지 사방으로 분산된 로열 네이비와 달리 대한은 북대동양을 독차지하고 있어 유사시 함대 전력 집결이 무척 편한 해군력 2위 국가다. 필리핀-팔라우-괌-북마리아나 제도-마셜 제도-하와이 순으로 북대동양에 들어가는 입구는 전부 잠궈 놓아 내부에 타국 거점이 존재하지도 않는다. 인도 방면에서 진입할 경우 해사도의 대한 함대와 조홀국을 뚫고 말라카 해협으로 진입해야 하는데 그 전에 누손과 대남도, 뇌주에 배치된 함대가 집결하고 본국 함대가 뒤를 잇는다.[37] 여기는 3부 시절부터 전용 공관인 북평관을 지어 썼다.[38] 원 역사에서 귀성 풍속은 이촌향도가 본격화되는 1970년대를 기점으로 민족 대이동 급으로 확대되었다.[39] 미주에서 죄를 짓고 처벌을 피하려고, 미주 정착 과정에서 진 빚에 몰려서, 천주교를 더 편하게 믿으려고, 미시시피강 유역의 비옥한 땅에서 농사나 지으려고 등등.[40] 개방적인 성향인 광덕제가 유독 여성 의무교육에는 반대했던 걸 두고 일부 독자들 사이에서 '광덕제 미래인 빙의자설' 떡밥과 엮어 미래에 벌어진 젠더 갈등들을 겪고 학을 떼 그런 거 아니냐는 주장이 나오기도 했었다.[41] 김조순이 자신의 정체를 숨기기 위한 필명이다.[42] 김좌근이 청나라 사기꾼에게 속아서 구입한 가품 쌍고검도 이 컬렉션에 추가될 예정이다.[43] 현실의 환빠와는 조금 다른데 현실에서는 암울했던 근현대사와 만족스럽지 못한 현실을 부정하고 민족의 영광스러운 과거에서 자긍심을 얻고 싶어하는 자위질이라면, 이쪽 세상에서는 지금 자신들이 강대국에 살면서 누리는 영광을 정당화하기 위한 명분과 이론을 찾는 쪽에 가깝다.[44] 당연하지만 삼간택을 통해 황후가 될 여인을 선정하는 대한에서 간택 후보로 나오는 여인들도 대부분 경화사족 등 행세 꽤나 집안 출신이기 때문에 가난한 소작농, 그것도 후송 출신을 황후로 간택할 리가 없다.[45] 다만 한문으로 작성하던 공문서를 국문으로 완전히 바꾸는데 아직도 손 볼 부분이 많고 또 '무식한 사람이 못 알아보면 어쩌냐'는 배운 사람 특유의 자존심에 기반한 반발도 있어서 일단 국문전용 대신 조사 빼고 한문으로 작성하는 국한문혼용이 채택되었다.[46] 덕분에 기존에 나와있던 번역본들은 부르는 게 값이 되었다.[47] 곱게 간 얼음이나 눈에 꿀을 뿌린 간식.[48] 한편 같은 시기 프랑스의 니콜라 아페르도 원 역사와 마찬가지로 독자적으로 병조림을 발명했다.[49] 현재의 호떡은 6.25 전쟁 이후 미국에서 원조한 밀가루와 설탕이 들어오면서 한국인들이 단순화해 변형시킨 것으로 중국식 오리지널 호떡은 물론 일제강점기 당시의 호떡과도 차이가 있다.[50] 추가로 대한이 물소젖 버터로 만든 천향환은 냄새가 묘하다고 별로 좋게 보지 않은 것도 있다.[51] 사실은 신경이 황산에 죽어버리는 바람에 통증을 못 느끼게 되는 것이지만.[52] 유럽에서는 '유라시아 대륙철도'라고 부른다.[53] 과거 열기구가 처음 등장했을 때 일본인들이 이를 요괴로 여기며 공포에 질린 것과 달리 열기구 자체는 후송 관군은 물론 태평천국에서도 많이 쓰고 있기에 '자력추진이 가능한 열기구라니 대단하다' 정도의 반응을 보인다.[54] 어차피 현실에서도 기술 발전이라는 건 균일하지 않지만 이 에피소드가 나갔을 때 문피아 댓글과 대역갤에서 많은 독자들이 세계 최초로 증기기관을 만든 대한이 아직도 프로펠러를 못만들어서 영국에서 수입할 정도로 기술 발전이 정체되었느냐, 재석 없으면 곧 퇴보해서 망할 나라냐고 분노하는 의견을 달아서 작가가 기계공학은 영국보다 좀 뒤쳐지는 대신 화학은 대등하고 생물학은 영국보다 오히려 앞선다는 내용을 후속 연재분에 넣어서 겨우 수습했다.[55] 재석이 광덕제가 미래인이 아닐까라고 의심하게 된 또다른 근거로, 다칭유전에 대해서 듣기만 하고 깊이 파묻혀 있어서 1960년대가 돼서야 캐낼 수 있었다는 것을 모른게 아닐까라고 추정한다.[56] 역사 개변으로 대한이 강대국으로 성장하면서 시베리아 호랑이의 공식 학명도 한국 호랑이로 바뀌었다. 하와국 등 번국에서는 본국호라고 칭한다.[57] 그게 다 헛짓거리라는 걸 아는 재석은 그들이 헛수고만 하게 될 것을 안타까워해서 최대한 말리고 있다.[58] 작품 외적으로 따지면 생물학 분야에서 영국보다 앞서 있다는 설정에 3부에서 4부 사이에 적응 개념까지 도입해 놓고도 진화론을 다윈에게 내준 전개나, 의학대국이라면서 백신에 대해선 감도 못 잡아 파스퇴르를 찾는 등 슈타인호프의 고질적인 '위인 덕질'에 진절머리 치는 독자들이 상당히 많았던지라 그들을 달래고 '뽕'을 채워주기 위한 전개로 보인다.[59] 참고로 대명동 제례에서 맺어진 인연 중에는 중종의 부황인 열조와 그 후궁 혜비 진씨도 있다. 즉, 대간의 주장을 선대황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지게 만든 것이다.[60] 천주교나 덕성도도 의용군 조직은 있으나 모병만 교단에서 할 뿐 관군에 지원해서 복무하는 형식으로 지휘통제, 보급, 편제는 전부 관군이 담당한다. 일반 예비역 부대와의 차이점은 군기에 종교적 상징이 추가되는 게 다다. 불교만이 독자적인 군 조직과 병기창을 갖추고 도총섭 같은 전담 직책을 갖고 있다.[61] 하얀 바탕 위에 붉은 색으로 卍을 쓴 깃발인데 이걸 본 재석은 원 역사의 그 깃발이 떠올라 순간 흠칫한다.[62] 작중 대한은 조선 시절부터 종교에 대해 일관적으로 '조용히 있으면 뭘 믿든 상관 안 하지만 사회적으로 분란 일으키면 말살한다'를 고수한다. 무종이 미륵 세력에게 암살당할 뻔해서 미륵 신앙이 말살당한 게 그 예시.[63] 대한은 엄밀히 말해 일부일처다첩제라서 일부다처제와 구별되는 개념이나, 이들 입장에서는 거기서 거기라 여긴 모양이다.[64] 당장 창시자부터 55명이나 아내를 두고 있어 첩 서너 명을 두는 경우가 많은 당시 사대부 기준으로도 지나치게 여자가 많았다.[65] 술루국의 창건자인 디에고는 건흥제의 사생아지만 사실상 스페인인이며, 이 때문에 디에고가 술루 왕이 되었을 당시 귀족으로 합류한 자들도 대부분 스페인계였다. 당시 스페인은 유럽에서 가톨릭 원리주의 성향이 제일 강한 나라였고, 현지 이슬람 세력과 지속적으로 레콩키스타를 하다 보니 19세기에도 여전히 가톨릭 원리주의를 고수하는 경우가 많다..[66] 원래는 조카에게 보내려 했는데 일국의 공주를 종친의 첩으로 보내는 건 외교적으로 심각한 결례고, 부담감을 느낀 흥선제의 형제들도 모두 거부해서 흥선제 본인이 나섰다.[67] 당시 쿠웨이트 토후 가문은 100년 넘게 쿠웨이트를 통치하고 있었다.[68] 원 역사와 달리 신불랑 수도인 뉴올리언스를 잇고 미국 남부를 통해 뉴잉글랜드 지역으로 올라가게 될 것이라, 작중 역사가 또 대격변을 겪을 것으로 보인다.[69] 3부에서 후금 내전에 대해 신하들과 논하던 재석은 "내가 작정하면 단 하루 만에 도성 안에서 역적 300명은 찾아낼 수 있다"고 공언해 신하들을 얼어붙게 했는데 4부에서 진짜로 역적 300명을 찾았다.[70] 명분상으로도 가장 최적인 곳. 다른 후보로는 서울 남산, 구월산, 금강산도 꼽혔지만 남산은 수도와 너무 가까워서, 구월산은 덕성도의 성지여서, 금강산은 선대 태황이 사고를 당한 장소이므로 기각되어 결국 백두산으로 결정되었다.[71] 환웅이 하늘에서 3천의 무리를 이끌고 태백산으로 내려온 것을 유래로 하여 고조선, 삼한, 발해, 고려를 계승하는 대한 역시 수행원을 3천으로 해야 한다는 대신 및 관료들의 강력한 주장으로 결정되었다.[72] 이는 곧 태산이 있는 화북을 수복하겠다는 국가 목표를 포기했다는 의미도 되기 때문에 추후 후송의 정세에 큰 영향을 줄 것으로 보인다.[73] 하와인들은 묘노를 안 쓰지만 한인 농장주들이 부렸다. 하와인들의 피지컬이 피지컬인지라 가장 쉽게 진압되었다.[74] 조홀국은 내부 반란 진압 경험이 많아 하와국 다음으로 쉽게 진압했다.[75] 묘노를 쓰지 않아서 반란이 일어나지 않았다. 설령 반란이 일어났다 하더라도 가톨릭 이외의 이단을 용납 못 하는 술루국 성격상 잔혹하게 진압했을 것이다.[76] 이쪽은 흑인 노예들 일부는 주인들을 돕고 일부는 배상제회에 포섭되어 흑인들끼리도 싸웠다. 주인들을 도운 흑인들은 자유인으로 해방되고 상금도 받는다.[77] 대한 본국에서는 묘노들의 12%인 2만 4천명이 반란을 일으켜 대한 군경 전사자 300여 명, 대한 민간인 사망자 1400여 명, 재산피해 5백만 냥의 피해를 입었고 그 외 속령들까지 합치면 약 20만의 묘노가 반란을 일으켜 10만 명 이상이 사살되었다. 일본도 7000여 명 이상의 인명피해를 입었다.[78] 단, 영국군 파병 자체는 홍적의 난 이전에 통과한 것이다. 그 때는 왜 먼 나라 반란에 군대를 보내야 하냐는 반발이 많아 55표 차이로 간신히 통과했으나, 홍적의 난 이후에 투표했으면 여론이 뒤바뀌어 250표 정도 차이로 통과했을 거란다.[79] 재석이나 광덕제와 같은 회귀자라는 떡밥이 뿌려져있는 상태다.[80] 차이점이 있다면 당시 명나라 관군보다 후송 관군이 더 썩어있다는 점. 양응룡의 난 당시 명군도 조선 의병들이 실망했을 정도로 부패한 모습을 보여주었으나, 후송군은 더 심해서 외국군대를 끌어들여 무고한 양민을 습격해 포로로 둔갑시켜 팔아먹고 자기네 지역이 아니라고 타 지역민들에게 무고로 누명을 씌우는 등 단단히 맛이 간 상태이다.[81] 안남 정벌에 투입된 10만에 번국에서 차출한 2만, 추가로 본국에서 기병 중심으로 3만을 동원한다.[82] 민심 이반을 우려한 재석이 대한군에게 포로 학살을 금지하는 명령을 내리자 대부분의 장수들은 거세게 반발하나 황명이라 어쩔 수 없이 따라야 하는 상황이 되자 아예 처음부터 포로를 잡지 않는 식으로 태도를 바꾼다.[83] 하와는 왕사 역할로 꾸준히 파견된 본국 대신에게 왕자 교육과 자문만 시키지 않고 자기들이 하기 귀찮은 국정 업무를 죄다 떠넘기는 악폐습(?)이 있고, 조홀은 처음부터 군국사무를 스스로 처리하도록 허락받았다. 술루는 대한 황실의 방계라는 특이성 때문에 건국 직후 한동안은 국왕은 군무만 수행하고 내정은 대한에서 파견된 집정 대신이 수행하다가(그래서 한동안 술루국왕의 중요한 책무가 현지에서 등용된 하급 관료와 본국 출신 대신 사이에서 중재와 화합유지였다.) 현종 말엽에 집정이 페지되고 내정도 양도받았다. 유구는 번국이 된 것 자체가 광덕제 1인의 고집이었고, 큰 문제 없이 돌아가던 나라인지라 자문 역할에 머무른다.[84] 일례로 대한 본국에서 노비제가 완전히 폐지되면서 궁궐에서 일하는 궁녀를 수급하는게 번거로워지자 하와국을 필두로 번국에서 자발적으로 궁녀를 수십 명씩 본국으로 보낼 정도이다.[85] 같은 유교 성리학이라도 남월 왕가는 폐쇄적인 외왕내제 체제를 고수하며 국수적으로 발전한 안남식 성리학, 중월 왕가는 국제 사회에 일원으로 교류한 대한식 성리학이라 차이가 꽤 크다.[86] 술루제도 홀로섬 홀로[87] 편의상 스페인계라고 하지만 스페인 출신 혈통뿐만 아니라 다른 유럽 국가 출신 혈통까지 모두 포함한다.[88] 이후 술루국이 '산타크루스 데 보르네오'로 개칭한다.[89] 이후 술루국이 '산티아고 데 보르네오'로 개칭한다.[90] 본인들도 모르지만 실제 부계는 무종 직계로 전주 이씨이다.[91] 원 역사에서 나라티왓, 얄라, 빠따니 3개주 전체와 송클라주 절반.[92] 제도내 각 섬을 다스리는 국왕과 여섯 공의 연합 왕국 성격을 띄고 있다.[93] 하와국 학무대신을 역임한 이종이 하와어해를 집필해 한글을 바탕으로한 하와어 표기법을 정립했다.[94] 하진교의 외숙부 카마우아와와 국사 윤호원은 하와첨사진으로 피해 태황의 도움을 받자고 제안했으나, 하진교는 시간이 오래 걸리며, 그 틈을 타 카네카폴레이가 어떤 암투를 벌일지 모르고, 대한에서 배운 무인정사계유정난의 사례를 들어 최대한 빨리 본궁으로 들이쳐 사태를 정리하는 방법을 선택했다.[95] 호랑이를 들여오기 위해 하진교는 '대한의 번국 중 조홀국에는 조홀호, 안남국에는 안남호, 술루국에는 발리에서 잡아온 발리호가 있는데 하와국에만 호랑이가 없다'는 해괴한 논리를 내세웠다. 유구는 작은 섬나라라서 논외라나 뭐라나. 대신들도 하진교의 무리수를 뜯어말리기는커녕 호랑이를 잡아 용맹한 전사임을 증명할 수 있다는 생각에 전부 쌍수를 들고 환호한다. 이 기가 막힌 광경에 하와국 조정 중 유일한 한인이었던 왕사 이동연은 컬처쇼크를 받는다.[96] 황제국을 칭해봤자 주변의 황제국들에게서 조롱을 받는 상황이었고, 오히려 번국이 아니라 더 나아가 아예 대한의 직할령이 되면 대한에서 과거시험도 볼 수 있고 관세도 안 무니까 더 좋지 않냐는 여론도 상당히 있다.[97] 조공과는 별개로 대한 태황께 바치는 '선물'은 유구 왕실에서 자발적으로 계속 바치고 있다.[98] 제임스 브룩이 외국으로 탈출하는 술탄을 잡아다 대한에 넘길 생각이어서 섣불리 탈출을 시도하지도 못했다.[99] Kaharingan이라 불리는 정령 숭배.[100] 대한의 신하가 된 브루나이 술탄은 기운을 차리고 나면 상국인 대한군과 함께 '반역자'인 제임스 브룩을 토벌하려 할 것이고, 제임스 브룩의 조국인 영국은 3부에서 적도를 경계로 세력권을 분할하기로 신사협정을 맺은 상태라 대한과 갈등을 벌이기 싫어서 브룩의 보호 요청을 외면할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브룩 입장에서 남은 선택지는 대한에 귀부하는 수밖에 없는 것.[101] 하나의 부족이 아니라 브루나이인들이 이슬람을 믿지 않는 보르네오 내륙 원주민들을 싸잡아 일컫던 말이다. 세세하게 분류하면 수백 개의 부족과 백수십 개의 언어로 나뉜다. 제임스 브룩의 모국인 영국은 독일과 네덜란드 학자들이 만든 세세한 분류를 적용하는 대신 사라왁 일대의 비다유족(Bidayuh, 육지 다야크)과 이반족(Iban, 바다 다야크)만 다야크족이라 부르길 선호했다.[102] 원 역사에서 브룩은 종교는 강요하지 않아도 머리 사냥 풍습만은 어떻게든 없애려고 강도 높은 금지 정책을 밀어붙였는데 다야크 병사들이 여전히 머리 사냥을 즐긴다는 언급을 보면 역사 개변으로 술루와 장기간 전쟁하느라 틈이 안 나서 + 상국이 된 대한이 대남병들의 머리 사냥 풍속을 막지 않으니 명분 세우기 애매해져서 놔둔 듯하다.[103] 3부 계미남변 당시 스페인 총독부의 중국인 학살로 필리핀 화교 소멸, 싱가포르가 대한에게 진상되어 대한령 해사도로 개발되며 화교국가 소멸, 중국인 노동력 아에 안 쓰는 술루와 반란을 빌미로 중국인 인구를 대거 학살하고 광산에서 철저하게 소모품으로 써먹는 조홀이 등장해 말레이시아 화교 소멸. 여기에 중국 본토가 쪼개져서 치열하게 쟁투중이다보니 원 역사에서 화교를 양산한 본토의 인구압이 크게 줄었다.[104] 원 역사에선 시암과 프랑스 선교사의 지원을 받았다.[105] 용병 계약을 체결할 때 '일본 관군과 전쟁 상태에 들어가면 즉시 계약을 파기하고 이탈한다'는 특약을 넣어놨다.[106] 비엔호아, 자딘, 딘뜨엉, 빈롱, 안장, 하띠엔.[107] 빈딘, 푸옌, 카인호아, 빈투언.[108] 2할은 고향을 떠날 수 없다고 고향인 중월국에 남기를 택했고, 1할은 완복시 외의 주인을 섬기지 않겠다며 자결하거나 벵골행을 택했다. 심지어는 북한산성에 유폐된 완복시를 보필하겠다고 자발적으로 북한산성으로 들어간 이도 있다.[109] 북월 일대가 후송의 식민 지배를 바라지 않아 후 레 왕조만 복귀시키고 독립할 생각이 있지만 반대로 남월로 쫓겨난 후 레 왕조의 봉신인 응우옌 왕조를 굳이 복귀시킬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110] 편의상 안남계 한인으로 불러왔으나 남부 지역에 순수 안남계 비율이 낮다보니 혈통상으로는 참인, 진랍인 혼혈이 대부분이다.[111] 흥선제 시기가 선황 광덕제가 수많은 자식들을 남긴 덕에 황자녀들을 둘러싼 혼맥 경쟁이 덜해 국제결혼이 용이한 특별한 시기고 이후 태황들은 경화사족을 제쳐두고 남월 왕실 따위에게 시집보낼 딸이 없을 가능성이 높으니 태황의 친딸과 결혼할 수 있는 사람은 완복승이 유일하다. 만약 완복승이 정단옹주와 혼인하고 이후 왕들은 조카나 수양딸과 혼인한다면 원 간섭기와 정말 비슷해진다. 이렇게 되면 고려가 그러했듯 기억의 변용이 일어날 수도 있다. 도망쳐 숨어있다 붙잡힌 완복승이 스스로 귀부했다는 식으로.[112] 꽝빈, 꽝찌, 트어티엔, 꽝남, 꽝응아이.[113] 타인호아, 응에안, 하띤.[114] 막 왕조후 레 왕조에게서 제위를 탈취한 후 완감이 타인호아에서 재건한 후 레 왕조의 강역과 유사하다.[115] 일단 과거 왕조의 후손을 왕위에 앉히긴 했는데, 핏줄만 그렇지 그간 교류도 없었다. 과거 조상님 무덤을 참배하려고 방문한 사람이 하나 있는 정도고, 그 역시 좋은 말로 할 때 돌아가라는 경고를 받고 바로 한국으로 도망쳤다고...무엇보다 화산 이씨가 다스리던 안남 영토는 떨어져 나간 월남(북월)땅으로 이씨네 종묘도 거기에 있다. 중월국 영토 반절은 이씨 시절엔 안남 영역조차 아니었다.[116] 이를두고 향후 안남에서 민족주의와 독립움직임이 대두할 경우 안남 완씨왕조의 몰락이 완복시를 포함해 역대 군주들이 벌인 삽질과 추태가 반복된 끝에 대한에게 응징당한 자업자득 인과응보인 것이 명백한 사실임에도 극성 민족주의 세력이 이를 대한의 날조라 우기며 부정하고 정신승리와 함께 완복시를 포함한 완씨들을 비운과 망국의 군주로 미화하는 거 아니냐는 의견이 있다.[117] 다만 각 성을 점유한 도통사들의 권한이 봉건군주수준이라 봉건제도도 혼재되어 있다.[118] 대한군은 재석이가 민사작전의 중요성을 철저하게 교육시켜서 넘어가지 않았으나, 지원병으로 구성된 미군은 인종차별과 종교적 열망과 약탈 욕심 때문에 알면서도 넘어가 아예 학살과 강간을 즐기는 지경이고, 유구군은 전공과 포로 욕심에 혈안이 된 후송관군이 제대로 정보를 알려주지 않아 무고한 민간인 마을 토루에 보병만으로 진압하다가 초전에서 참패하고 말았다. 영국군은 자기들을 환영하는 마을 촌장의 딸을 병사들이 윤간하고, 이에 촌장이 처벌을 요구하자 영국군은 형식적으로나마 문제를 일으킨 병사들에게 태형을 집행하려는데 오히려 후송군에서 더 막나가 감히 천병과 그 천병을 지원하러 온 군대에게 대들었으니 괘씸하단 이유로 대놓고 촌장을 매질하여 모욕을 주자 눈이 뒤집힌 촌장이 이웃 마을들까지 불러모아 영국군과 후송군을 습격하여 큰 피해를 입고 후퇴했다.[119] 육조시대 오 51년, 동진 103년, 송 58년, 제 23년, 양 55년, 진 32년, 오대 후량 16년, 후당 13년, 후진 10년, 후한 4년, 후주 9년. 특히 오대는 워낙 짧아서 재상 풍도가 후당~후주까지(요나라 포함) 11명의 황제를 섬기는 진기록을 세웠다.[120] 도통부들이 몰락하면서 오히려 중앙집권적인 면에서 좋아진 데다가 외교 상황도 개선됐고, 내부적으로도 이전보다 안정됐기 때문이다. 단지 집권자인 송태후와 임칙서의 나이가 불안요소인 상황이다.[121] 다만 이들 역시 실전으로 단련된 군사력이 생기긴 했다.[122] 원 역사에선 완씨를 책봉한 청나라가 남월 국호는 허락해주기 꺼림칙해 대신 제안한 국호가 월남이었다.[123] 예수불이 흘린 피와 예수불이 말세에 세상을 심판할 불을 상징한다고 한다.[124] 홍수전이 하필이면 마오쩌둥 어록과 유사한 홍서를 만들었다는 점은 이 세계의 홍수전이 원 역사의 중국공산당 출신 빙의자였다는 추측의 근거이기도 하다.[125] 대한은 아편을 받는 것을 거절했으나 잉글국과 불랑국은 받아들인다.[126] 명목상[127] 실제[128] 후송 관군과 태평천국군 모두 서나라의 아편상인을 보기만 하면 죽여버리고 아편을 빼앗아가버렸기 때문. 이 때문에 청나라에게 같이 태평천국과 후송을 정벌하자는 제안까지하지만 서나라를 같잖게 여기는 청나라에게 씹힌다.[129] 원 역사와 달리 한글의 파생문자.[130] 대신 그 자리는 청 황실에 신자가 많은 일반 불교 사원과 후금의 국교이자 청에서도 우대받는 천주교 성당이 차지하였다.[131] 청나라와는 달리 몽골 귀족들의 영향력이 매우 크다. 각지에 영지까지 가진 대영주들이 존재하여 봉건제도 섞여있다.[132] 대한은 나폴레옹이 완충지대였던 루이지애나 지역에 신불랑국을 건국하면서 새로운 안보 환경에 접어들었고, 청은 귀주와 사천을 획득하면서 국력을 신장했지만 주적인 후송 역시 양광 지역을 획득해서 여전히 국운을 걸고 대치 중이다.[133] 사실 전제군주국에서 국체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는 군주의 후계 문제는 국가의 존망을 결정짓는 문제인데 이걸 방치했으니 상술한 안정적인 면모들은 사상누각에 불과했던 셈이다.[134] 그래도 일본에서 계속 새로운 인적 자원이 들어와야 하기 때문에 숙청을 해도 죽이지는 않고 전부 명예직을 주어 달랬다고 한다.[135] 여기에 정철의 '로마제도 낙성기' 이래 로마 제국을 숭상하는 문화가 자리잡은 대한에서 그 무근본 국가를 동양에서 로마 제국을 가리키는 이름인 '대진국'이라고 불러주는 것 자체가 모욕이다.[136] 공무합체 이전 도쿠가와 막부 시절 실질적인 수도는 강호(江戸, 에도)였다.[137] 실질적인 국가 원수는 도쿠가와 가문의 정이대장군/내대신이다.[138] 대한의 기유진남에 동참해 해남도에 조차지를 얻어 농장과 항구를 건설했고 대한의 번국인 조홀과 술루에는 1820년대에 각각 15만, 5만 가량이 일본인이 주요 구성원으로 존재했다. 안남에도 왜인 용병들이 대규모로 흘러들어가 토착 호족화하면서 원 역사 동남아에서 화교들이 가졌던 지분을 대거 가져왔다. 건주 양국의 왜인팔기도 200년 넘게 건재했고 왜인 용병의 명성은 동남아와 인도를 넘어 누벨 프랑스에서도 고용하려 할 정도였다.[139] 이중 1만은 막부 2중대나 다름없는 군마 마츠다이라씨의 군마 번의 병력이니 실질적으로는 2만에 불과하다. 심지어 어떤 번은 번의 크기가 너무 작아서 다이묘를 경호하는 경호병력 수십 명이 번의 병력의 전부일 정도.[140] 특히나 원 역사에서 존황파의 필두이자 메이지 유신의 주역이었던 사쓰마 번과 조슈 번은 대한과의 밀무역으로 친한파 번이 되었다고 한다.[141] 단 대한령 북구주와 접한 타치바나의 치쿠고와 사나다의 분고는 대한의 군사적 움직임에 대비한다는 명목으로 일국일성령 대상에서 제외되었다.[142] 원 역사에서는 나고야 성이 도요토미 잔존 세력을 견제하기 위한 거점으로 지어졌기에 오사카 성에 밀리지 않는 규모로 만들었지만 본작에서는 도요토미가 일찍 몰락하였기 때문.[143] 원 역사를 알고있는 재석은 오사히토의 부인을 바꾸어서 껄끄러운 메이지 덴노가 즉위하지 못 하기를 원했고 황양공주의 딸이 황후가 되며 일단은 성공 한 것으로 보이나 메이지 덴노는 원래 서자이기에 출생은 불명이다.[144] 이미 2부와 3부 사이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친손자이자 오다 노부나가의 외손자이도 한 이에미츠가 쇼군이 되고나서 혈통에서 나오는 정통성을 무기로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던 전례가 있기에 아예 불가능한 건 아니다.[145] 현실에서도 명란젓은 전세계 소비량 90%를 일본이 차지할 정도로 일본에서 더 인기있는 한국음식으로 유명한데, 원 역사의 일본 명란젓 유행은 해방 이후에나 시작되었다는 차이가 있다.[146] 24만 석, 26만 석 같은 경우는 반올림하여 각각 2명, 3명으로 처리된다. 또한 5만 석 이하의 작은 번들을 배려하기 위해 영지가 아무리 작아도 다이묘면 무조건 1명은 대표를 보낼 수 있다. 영지 쪼개기 같은 꼼수는 인정되지 않는다.[147] 즉 정이대장군/내대신은 단독으로 무려 90명의 대표를 보낼 수 있다.[148] 그래도 명목상 아체의 상국인 오스만은 대한에게 일본을 제지해줄 것을 요구했으나 오스만과의 관계가 그다지 좋지 않고 이미 비행선과 승병을 파견해 일본을 도와주고 있던 대한은 그대로 무시했다.[149] 원래도 선거로 뽑힌 왕은 큰 실권은 없었기에 일본의 번국이 된 이후 선거군주제는 폐지 되고 쇼군의 대리인 막부 대관과 부족장 의회가 통치한다.[150] 일본에서는 아이누를 에조라 부르며 아모인은 아이누가 아닌 일본에서 아모국으로 이주한 일본인을 뜻한다.[151] '아모인'이라고 하면 대한에서는 원주민들을 지칭하지만 일본에서는 원주민은 에조라고 부르고 아모인은 일본에서 이주해서 아모국 호적으로 옮긴 일본인들을 지칭한다.[152] 일본에서는 기본세율이 70%에 잡세도 있지만 아모국에서는 기본세율이 50%이고 잡세도 없다.[153] 어차피 대한 입장에서는 자기 땅 떼어주는 것도 아니고 험준한 산속에 위치한데다 여전히 완복시를 지지하는 안남군이 장악 중인 중월국령 남장은 대한군이나 중월국 관군이 진격해 점령하기도 귀찮은 곳이라 별다른 미련도 없었다.[154] 원 역사의 캄보디아 영토는 캄보디아를 보호국으로 만든 프랑스가 태국에서 시엠립 등 서북부 지역과 베트남에서 스바이리엥, 캄포트, 케프 등 남부 해안 지역을 뜯어 캄보디아에 붙여주면서 완성되는데 대한은 앙코르와트가 있는 시엠립은 진랍의 고토란 명분으로 가져오려 하나 남월에서 별도로 영토를 떼내진 않아서 남부 해안 지역은 진랍인이 많이 사는 남월 영토로 남게 되었다.[155] 마을과 도시를 포위한 다음 힌두교도에겐 쇠고기, 무슬림에겐 돼지고기를 강제로 먹이고 거부하면 즉시 몰살시켰다. 일부 눈치 빠른 자들은 불교 교리에 따라 채식만 하며 살겠다고 선언한 뒤 뒤에서 신앙을 유지하는 방식으로 칼날을 피했으나 그럴 눈치가 없었던 이들은 어육이 되었다.[156] 피지배 민족에 비해 지배 민족인 준가르인의 수가 너무 적기 때문에 카자흐 등의 타 민족 출신이여도 중앙아시아에서 온 북방계면 준가르인으로 취급해준다. 대한에서는 이들을 '벵골인'이라 부르며 원래 벵골 지역에 살던 원 역사의 벵골인은 '벵골 토인'이라고 따로 구분한다.[157] 고위직에 오른 인물은 일본인 급으로 취급해준다.[158] 다만 영국도 가만히 있던 것은 아니고 벵골이 나디르 샤의 봉신국이었다는 점을 이용해 페르시아의 카자르 왕조를 앞세워서 간섭을 시도했으나 자신들은 나디르 샤의 명만 듣는다며 그 핏줄도 아닌 카자르 왕조의 종주권을 부정하고 샤가 보낸 친서를 찢어버리는 바람에 실패했다. 이후 왕자 한 명을 친영파로 포섭하는 것도 시도했으나 그 왕자가 콜레라로 죽어버렸다고 한다.[159] 이 말을 들은 재석은 영국 놈들의 미각이 저질이라 기름 카레랑 버터 카레도 구별 못 했다고 생각했다.(...)[160] 준가르 칸국이 되기 전에 벵골 인구가 대략 3천만이었는데 기회가 있을 때마다 탄압하고 학살하는 통에 전혀 늘지 않았다.[161] 역시 이민족 왕조인 술루와 조홀은 인구 넘쳐나는 본국의 지원 아래 인구 밀도가 낮은 동남아 도서 지역과 정글에서 시작했기에 지배 민족과 피지배 민족의 비율이 벵골 수준으로 심각하지 않다.[162] 원 역사에서 와하비즘이 세계적으로 깽판 치는 주요 이유가 와하비즘 광신도인 사우드 가문이 유전 지대를 쥐고 벌어들인 돈으로 와하비즘을 퍼뜨리는 것이 매우 커서, 와하비즘이 세계적인 문제로 확장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도 사우드 가문에게 유전지대가 넘어가면 안 된다. 즉 석유 문제와 와하비즘 문제는 서로 이어져 있다.[163] 예를 들어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라'는 속담이 술루국 스페인계들 사이에선 '여관이 맘에 안 들면 손님이 나가야 한다'로 바꿔 쓰인다.[164] 호가호위는 '호랑이의 위세를 빌린 여우'로, 용두사미는 '용의 머리에 뱀의 꼬리'라는 뜻이라 배경을 몰라도 단어 자체가 직관적으로 이해하기 쉬운 것도 한몫하는 것으로 보인다.[165] 그럼에도 여전히 백인들의 기준에서 생각해 그 강대한 힘으로 어째서 주변국들을 정복하거나 열강의 의무, 선지자의 짐을 지지 않는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A] 하지만 4부에서 올렝카의 딸인 루시아의 후손이 재석의 아들인 황태자의 황태자비가 되면서 재석의 맏며느리가 된지라 결과적으로는 이 오해가 어쩌다 보니 사실이 될 가능성도 생겼다.[167] 오스트리아의 빠른 지원이 가능했던 것은 철도망 이외에도 프랑스 혁명 시기 대가 끊어진 양시칠리아 왕위를 합스부르크 방계가 가져가는 것을 대가로 동맹을 맺었기 때문이다.[168] 원 역사와 달리 라이히슈타트 공작을 나폴레옹 2세로 추존하지 않았기 때문에 본인이 나폴레옹 2세가 되었다.[169] 부하라 에미르국이 러시아의 속국이 된게 1868년, 히바 칸국이 러시아의 속국이 된건 1873년으로 원 역사보다 20년 정도 빠르다.[170] 대한에서 넘겨준 교범에는 보병 저지에 효과가 있다고 해서 농노 출신 보병들한테 한번 철조망을 넘어가보라고 시켜봤더니 보병들이 어떻게든 철조망을 잡아뜯고 넘어가는 바람에 '기병 저지에는 효과가 좋지만 보병 저지용으로는 효과가 별로다'라는 러시아스러운 결론을 내린다.[171] 대한에서는 '연주대철도(連洲大鐵道)'라고 하며 유럽에서는 '동방대철도(Great Eastern Railway)'라는 별명으로도 부른다.[172] 대한은 일단 전쟁에 돌입하면 끝을 보는 대신, 상대가 명백히 적의를 내비치고 적대 행동을 하고, 최종적인 협상까지 거절하여 확실한 명분을 주지 않는 이상 전쟁이란 선택지를 고르지 않는다. 확장 욕구로 너무나 자연스럽게 전쟁하는 유주 국가들 행보에 발맞추기도 싫고 앞마당인 동남아의 이전투구를 정리하고 남중국해를 북대동양에 이은 대한의 호수로 만드는 계획이 한창 진행중이라 이역만리 유주에 돈과 인력과 시간을 낭비하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173] 수상함 전력 우위를 믿고 오데사로 밀고 들어갔다가 나히모프가 도배한 기뢰밭에 들어가는 바람에 코르벳 1척만 남기고 궤멸했다. 이 한국산 최신 기뢰를 러시아군이 보급한 회사가 대한에서 유학중인 알프레드 노벨의 가족 회사. 스웨덴 출신이나 러시아에 정착한지 오래되어 러시아인 대우를 받으며 군수사업에서 약진 중이다.[174] 기뢰밭에 가로막힌 영불 연합군 함대가 흑해 보급선 차단에 실패했고 비행선도 있어서 세바스토폴에 지속적으로 보급을 할 수 있게 되었으며 오데사 해전 승리의 주역이자 세바스토폴 방어를 맡은 나히모프가 신무기를 활용해 세바스토폴에 철벽 방어선을 구축했다. 보급과 병사 처우에도 신경을 써서 콜레라가 유행 중인 영불 연합군과 달리 깨끗한 식수를 병사들에게 보급하고 부상병들도 제대로 처치해서 비전투 손실도 적다.[175] 단 소소한 해프닝을 넘어 진지하게 위험한 기행도 있는데, 장병들이 비행선 가지고 노빠꾸로 급강하폭격 시도하다 대공사격에 격추당한 애들이 꽤 있다고 한다. 안 그래도 비행선 하나하나가 엄청나게 비싼데 고도만 잘 유지하면 절대 떨어질 일 없는 비행선을 폭격뽕에 차서(...) 꼴아박아 버렸다고.[A] [177] 원 역사에서는 스웨덴 의회에 의해 스웨덴 상속자로 지명되었으나 표트르 1세의 남계 후손이 끊어진 러시아에서 먼저 후계자로 지명되어 러시아 차르가 되었다. 그러나 본작에서는 표트르 1세 남계가 그대로 이어졌기 때문에 러시아 차르가 되는 일 없이 스웨덴 왕으로 즉위한다.[178] 참고로 파울 1세의 왕후가 원 역사와 다른 사람이라 구스타브 3세 때부터는 스웨덴 왕가가 가공인물이다.[179] 작중에서 원 역사의 트라팔가르 해전을 대체한 전투이다.[180] 당연히 전쟁이 날 건 알았지만 프랑스의 고문관과 장비 지원을 받았고, 수상함 전력은 더 앞서니 지원군이 도착할 때까지 어느 정도 버틸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대한인 고문들을 고용해 태평전쟁의 전훈을 녹여내고 대한제 신무기를 대거 양산한 러시아군에게 너무 빨리 무너져서 당장 동원할 병력이 없었다.[181] 작가의 댓글에 따르면 원 역사 벨기에 왕국 초대 국왕 레오폴드 1세는 그리스 왕국으로 갔다.[182] 원 역사 벨기에 왕국 초대 국왕. 원 역사에서는 1830년 그리스 왕국 왕위를 제안 받았으나 그리스가 너무 위태로워 보인다고 거절하고 1831년 벨기에 왕위를 받아들인다.[183] 수레바퀴형을 당할지 돼지고기와 독주를 먹고 배교한 후 자원입대할지 양자택일을 강요한다. 딱히 유주로 와서 그러는 것도 아니고 후금 시절부터 회교도 포로들에게 하던 일이다.[184] 유전적으로는 백인화된 지 오래지만 오스만은 튀르크에서 유래되었다는 정체성이 남아있었고 오스만어도 퀴르크어족에 속한다. 대한에서도 오스만을 돌궐이라 부르는 등 튀르크의 연장선으로 본다.[185] 원 역사에서 압뒬메지트 1세의 장녀는 천연두로 요절했지만 본작에서는 종두법이 일찍 퍼져 살아있었다. 다만 흥선제의 후궁으로 보내려던 것은 대한의 내명부를 오스만의 하렘과 같은 시스템이라 착각해서였을 가능성이 높다.[186] 예를 들어 제사 문제는 '우리는 다른 방법으로 조상님을 공경합니다.' 등으로 설명하지 제사는 우상숭배니까 없애야 한다는 말은 일단 안 하고 있다고. 원래 기독교는 가족을 소중히 여기는 종교이기 때문에 딱히 거짓말은 아니다. 애초에 혈통을 굉장히 따지는 유목민의 일종인 고대 유대인이 창시한 종교가 기원이다.[187] 현실적으로 가능성은 없다. 미주가 외부의 위협 없이 번영을 누릴 수 있는 건 본국에서 미주를 위협하는 외적들을 모두 처리해주었기 때문이고, 미주의 가장 큰 특혜 중 하나인 군역 면제는 본국에서 병력을 파병해 미주를 지켜주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미주가 번영을 누릴 수 있는 건 어디까지나 대한이라는 거대한 모국이 뒷배로 존재하기 때문이지 자체 병력이라고 해바야 단순 속오군 수준인 미주가 독립을 시도할 경우 당장 바로 옆에 위치한 누벨프랑스의 침공을 막는 것조차 불가능하다.[188] 기병만 3천, 딸린 가족과 하인까지 합하면 5만.[189] 정식 명칭은 '누벨프랑스와 아메리카를 다스리는 제국(L'empirequi gouverne l'amerique et la nouvelle france)', 약칭 EGANF.[190] 달리 말하면 나폴레옹은 대한에서 유방에 비유될 정도로 고평가받는 외국 군주라는 뜻이다.[191] 텍사스, 노스다코타, 뉴멕시코, 오클라호마, 콜로라도, 와이오밍, 루이지애나. 대한령인 캘리포니아와 알래스카, 대한에 판매한 캐나다(험지라 현대에도 개발이 쉽지 않다.)를 제외한 육상 유전 지대를 모두 확보하고 있다.[192] 프란츠 2세가 나폴레옹의 아들이자 자신의 외손자인 라이히슈타트 공작을 끝내 나폴레옹 곁으로 보내주지 않은 건 외손자를 옆에 두고 싶은 것과 망할 코르시카 촌놈의 왕조가 이어지는 꼴을 보기 싫다는 지극히 사적인 이유에서였다. 나폴레옹의 최대 적수였던 영국과 러시아를 비롯한 주변국들도 이제 나폴레옹은 위협이 안 되니 그만 보내주라고 설득했으나 프란츠 2세는 이를 다 거부했다.[193] 나폴레옹 본인이 직접 재석에게 누벨프랑스와 대한, 미주합중국을 가리켜 '아메리카를 번영으로 이끌 세 마리의 맹금류'라고 한다. 각각 누벨프랑스, 대한(령 미주), 미주합중국을 대표하는 맹금류인 검독수리, 미주독수리, 흰머리수리를 세 나라에 비유한 것.[194] 자기 관할에 태황의 통치를 부정하는 흉참한 자들이 있다는 사실이 밝혀져 좋을 게 없으니 무단 이주를 방관하는 관행이 미주 지방관들 사이에 널리 퍼져있다.[195] 이건 나폴레옹이 개선한 게 아니고, 본래 부르봉 왕조 시절부터 있었던 법이라고 한다.[196] 플랜테이션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현실에서 노예제가 없어진 후의 플랜테이션도 작중에서 묘사되는 것과 크게 다르진 않은 편이다. 오히려 국가가 감독하니 작중 시대에서는 선진적이라고 평가할 여지가 있긴 하다.[197] 여기서는 합중국 국가원수인 'president'를 '대통령'이 아닌 '대총통'으로 번역하는데 원 역사에서 대통령이란 단어는 일본에서 만들어진 한자어를 그대로 사용한 거지만 여기선 대한이 일본을 거치지 않고 먼저 합중국의 존재를 인지하였기에 차이가 생긴 것. 재석은 '대총통'이란 단어를 들을 때마다 원 역사의 콧수염 달린 그 인물이 떠오르는지 속으로 움찔거린다.[198] 실제로 서부의 개발이 이루어진 원 역사의 미국도 인구의 약 2/3은 여전히 미시시피강 동쪽에 거주하고 있다.[199] 미 서부는 금, 은, 구리는 풍부하지만 그것을 개발하고 독립국가로의 자립에 필수적인 수운, 철광석, 석탄이 전무하다시피하다. 미 동부에서 시작해 서부로 확장하면 원활한 개발이 가능하나, 미 서부에서 독립국가로 시작해 동부로 뻗어나가는 것은 불가능하며 대한령 미주가 절대 독립할 수 없는 이유로 꼽힌다.[200] 그러면서 같은 백인이라도 아일랜드계, 이탈리아계, 폴란드계 등 앵글로색슨계가 아닌 비주류를 '하얀 껌둥이'라 부르며 차별하는 것도 원 역사와 똑같다. 이 때문에 작중 아일랜드 대기근으로 고향을 떠나 신대륙으로 이주해야했던 아일랜드계의 절반이 종교가 다르고 자신들을 핍박한 영국인들과 같은 앵글로색슨계가 주류인 합중국 대신 종교가 같고 인종차별이 없는 누벨프랑스행을 택했고, 비용과 거리 문제로 처음에는 합중국행을 택했다가 극심한 차별에 질려 누벨프랑스로의 재이주를 선택한 아일랜드계도 나올 지경.[201] 유능하더라도 경쟁에서 밀려나는 경우는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정치가 체질이 아니라서, 정치하는 능력만 떨어져서, 운이 안 좋아서 등등.[202] 다만 모르몬교는 미국이 일부다처제를 법으로 금지하고 있어 위법 문제가 있기는 하다.[203] 대략 1:30이었던 교환비가 1:10이 된 정도.[204] 개변된 역사로 인해 기술발전은 빠르게 이루어졌지만 석탄•석유로의 연료 전환이 늦어 고래 기름을 얻으려는 수요는 폭발적으로 증가하는데, 공급이 따라가지 못하자 고래잡이가 기존 역사보다 크게 증가하면서 동양 바다까지 침범하는 것이다.[205] 델라웨어, 메릴랜드, 버지니아, 켄터키, 노스캐롤라이나, 사우스캐롤라이나, 테네시, 조지아, 앨라배마, 미시시피, 플로리다. 원 역사의 노예주였던 텍사스, 루이지애나, 아칸소, 미주리는 누벨프랑스 영토가 되었다.[206] 버몬트, 뉴햄프셔, 매사추세츠, 로드아일랜드, 뉴욕, 코네티컷, 뉴저지, 펜실베이니아, 오하이오, 미시간, 인디애나, 위스콘신, 일리노이. 메인은 미주리 타협이 일어나지 않아서 주로 승격되지 못 하고 매사추세츠의 일부로 남았다.[207] 연방대법원의 판결은 미국 내부의 사안에만 해당하고 행정부의 고유 업무인 외국과의 외교 사안에는 적용되지 않기 때문이다.[208] 독자들은 이러다 미국의 학살에서 살아남은 원주민들이 고향을 떠나 누벨프랑스나 대한령 미주로 도망친 뒤 그 후손들이 세계대전을 다룰 가능성이 높은 5부에서 미국에 복수하려는 전개가 나오는 게 아니냐 추측하고 있다.[209] 일부 민주공화당 의원들이 전쟁을 하더라도 사건 조사와 대통령 선거를 치르고 난 뒤 개전을 해야 한다며 제동을 걸려했으나 의회 다수당은 민주당이고 이들은 쿠바와 푸에르토리코를 병합해 노예주 3개를 신설하려는 속셈이라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210] 하와국에선 영토를 하사한 것으로 여긴다. 하와국이 대한의 충실한 번국인 때는 실질적으로는 크게 다를 바 없으니 문제될 일도 없지만, 만약 훗날 하와국이 독립한다면 영토 분쟁이 생길수도 있다.[211] 재석은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지만 아직 고고학이 발달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선입관에 대해서는 침묵한다.[212] 특히 운하 건설까지만 해도 시큰둥하던 영국이 정작 운하가 개통한 이후에는 가장 많이 운하를 이용한다고.[213] 원 역사에서는 내전에서 승리한 후 테워드로스 2세로 즉위해 에티오피아의 근대화 개혁을 추진하지만 영국과의 외교 분쟁으로 인해 발발한 영국-에티오피아 전쟁에서 패하여 자살한다.[214] 新秩欄道