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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5-14 14:12:33

명군이 되어보세!/개변된 역사/4부

명군이 되어보세!
등장인물 (1부 · 2부 · 3부 · 4부 · 이재석 · 김상희)

이 문서에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문서가 설명하는 작품이나 인물 등에 대한 줄거리, 결말, 반전 요소 등을 직·간접적으로 포함하고 있습니다.


1. 개요
1.1. 철도
2. 대아주3. 대유주4. 대미주
4.1. 대한령 미주
4.1.1. 북미주4.1.2. 남미주4.1.3. 빙주4.1.4. 중미주4.1.5. 서미주4.1.6. 동미주4.1.7. 동변
4.2. 캐나다 지역4.3. 서반아령 신서반아멕시코(맥고국)4.4. 프랑스령 누벨프랑스 → 누벨프랑스 제국(신불랑국)4.5. 미주합중국4.6. 중앙아메리카 연방 공화국 → 중앙아메리카 연맹4.7. 아이티 공화국
5. 대삼주6. 대상주7. 오세아니아

1. 개요

슈타인호프 작가의 웹소설, 명군이 되어보세!의 4부에서 작중 세상에 생긴 변화들을 소개하는 문서.

4부 시작 시점의 세계지도
대한-신불랑 회담 이후 시점의 세계지도
4부 시점 세계지도

4부에서 동아시아의 황제국 중 유구와 후금이 각각 대한과 청의 번국이 되면서 독립을 잃는 큰 변화가 생긴다.

1.1. 철도

대한으로부터 시작된 철도가 유럽으로도 전파되나 원역사도 그렇지만 궤간 통일이 이뤄지지 않은 상태이다.

2. 대아주

2.1. 대한

대한국
大韓國
파일:대한민국 국기(1945-1948).svg 파일:조선(명군이 되어보세)의 국기.png
국기 군함기
위치 한반도, 요서주, 북한 10도[1],
북변[2]], 동토[3],
구주총관부, 대남도, 주산 군도,
아모 열도, 연역주,
빙주, 북미주[4], 남미주, 동미주,
동변[5], 중미주, 서미주,
누손주[6], 해사도, 영귀 제도
번국 하와국, 조홀국, 술루국, 유구국, 안남국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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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국 1392년 8월 13일
훈민정음 반포 1446년
경국대전 반포 1474년
무자호란 1588년
경인왜란 1590년
을미동정 1595년
대한 수립(칭제건원) 1632년
경신대기근 1670년 ~ 1671년
을병대기근 1695년 ~ 1697년
무인지변 1698년
계미남변 1703년 ~ 1707년
수도 황도 한성부(皇都 漢城府)
민족 한민족, 여진족 등 퉁구스인,
한족, 일본인, 대만 원주민, 묘족, 말레이인, 필리핀인
유럽계 백인
에스키모, 아메리카 원주민, 하와이 원주민
언어 근대 한국어
문자 한자, 국문
종교 유교(성리학, 국교),
불교, 천주교, 무속 신앙
정치체제 전제군주정
국가원수 태황(太皇)(임금)
국성 전주 이씨(李)
연호 건원(建元) (1632년 ~ 1650년)
연가(延嘉) (1651년 ~ 1678년)
건복(建福) (1679년 ~ 1699년)
건흥(建興) (1700년 ~ 1740년)
원강(元康) (1741년 ~ 1775년)
영태(永泰) (1776년 ~ 1782년)
원평(元平) (1783년 ~ 1829년)
광덕(廣德) (1830년 ~ 1834년)
흥선(興宣)[7] (1835년 ~ )
통화 대한통보, 푼(分)<전(錢)<냥(兩)
[clearfix]

2.1.1. 정치

2.1.2. 언어

2.1.3. 지역

2.1.4. 인구

1823년 시점에서 본국 인구는 남한(한반도) 2200만 명, 북한(북방영토) 1200만 명으로 나온다. 그외 미주 8백만명, 누손주 등 해외영토까지 합치면 약 5천만 명 이상이라고 한다. 한양 인구는 100만 명.

4부 256화에서는 남한만 3000만에 근접하고 북한을 포함한 본국 전체는 4500만, 북구주 180만, 대남도 650만, 미주 1200만, 누손주 600만으로 총합 7100만 명 정도로 인구가 증가했다고 언급된다.

4부 466화에서는 남한 인구가 3천만을 돌파했고, 북한 지역은 2천 3백만, 미주는 1천 6백만, 누손주 8백만, 대남도 7백만, 북구주 2백만으로, 북변까지 포함하면 대략 9천만명에 달한다고 언급되었다.

2.1.5. 군사

2.1.6. 치안

2.1.6.1. 마약

2.1.7. 경제

2.1.8. 외교

2.1.9. 사회

2.1.10. 교육

2.1.11. 문화

2.1.12. 식생활

2.1.13. 의학

2.1.14. 과학, 공학

2.1.15. 환경, 생물

2.1.16. 종교

2.1.16.1. 불교
2.1.16.2. 예수교
2.1.16.3. 회회교
2.1.16.4. 덕성도
3부에서 타락의 조짐을 보여 사이비 종교가 되어 태평천국의 난과 비슷한 사건을 일으킬 것이라는 독자들의 추정과 달리 정상적인 종교로 발전하여 기성 종교들 중 하나가 되었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대한에서 난을 일으키지는 않았지만 후송에서 난을 일으켰다. 예수교와 불교 양쪽 모두에서 사이비 취급을 받는다. 서양 국가들도 예수교가 아닌 예수교의 영향을 받은 불교의 분파 정도로 보고있다.

2.1.17. 연도별 주요 사건

스포일러가 될 정도로 자세하게 기술될 경우 문피아 측에 대한 이익 침해로 항목이 삭제될 위험이 있으므로 지나치게 자세한 기술은 자제 바람.

2.2. 대한의 국외 영토(대한령 미주 제외)

2.2.1. 대남주

외지 출신 대과 합격자 중 절반 이상이 대남도 출신이라 한다.

2.2.2. 북구주

여전히 대한령이지만 명목상으로는 일본이 관리를 위임한 상태가 유지되고 있다. 일인들의 성향상 문과보단 무과 합격자가 많이 나온다고 한다.[35]

2.2.3. 누손주

대한이 스페인령 동인도 제도를 구입한 뒤 누손주 관할로 묶었다. 인구는 미주의 절반 정도이나 그 절반은 토인이다. 양반 이주자는 거의 없으며 대과 합격자가 한명도 없는 해가 허다하다고 한다.

2.2.4. 해사도

요충지인 해사도는 대한 직할령으로 병력 8천명과 함선 30여척이 항상 주둔하여 말라카 해협의 제해권을 확보하고 조홀국을 위협하는 아체 술탄국섬라국을 견제하고 있다.

2.3. 대한의 번국

2.3.1. 심왕

4부 시점에서도 유지되고 있다. 초대 심왕이었던 이준이 처음 심왕부가 설치되었을 때 한청금 세 나라로부터 받은 재산을 낭비하지 않고 철도와 포경선을 비롯한 생산적인 사업들에 투자하였고 이후의 후손들도 재산을 늘리는 데 공을 들인 덕택에 심왕부의 자산이 3부에서 연수익 10만냥이었던 게 4부 시점에서는 50만 냥으로 다섯 배 이상 늘었다.

2.3.2. 술루국

현종 말엽부터 본국에서 파견하던 집정이 폐지되고 술루국왕이 내정을 스스로 통치하는 것이 허락되었다. 술루 왕족들은 대한식 이름과 스페인식 이름을 같이 짓는 것과 술루 왕자들이 본국에 일정 기간 건너와 친위군에서 복무하는 전통은 유지되고 있다.

인구는 약 50만명 정도이며 그중 절반은 원주민과 안남인, 나머지 절반은 한인, 스페인인, 일본인이 3:1:1 정도 비율로 차지하고 있다. 인구가 부족하기에 보르네오섬 내륙은 직할령이 아니며 원주민들에게 선물을 주며 교류하여 신속시킨 상태이다. 국교는 가톨릭이지만 이슬람교도 제후들도 봉신으로 받아들이고 종교에 상관없이 인재를 등용하는 등 융통성을 보이고 있다고 한다.

보르네오섬 남부의 이슬람 토후국들과의 전쟁이 지속되어 대한 본국에서 군비 지원은 계속 받고 있으며, 가톨릭 왕국이란 점이 국가 정체성을 구성하는 나라임에도 보르네오 내륙의 무슬림 원주민 부족들을 회유하여 번국으로 끌어들이는 외교정책을 펴면서 대한 남방을 지키는 번국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다. 군대는 인구에 비해 좀 과한 규모인 3만명을 유지하고 있으며, 그로 인한 재정부담은 대한의 보조금으로 충당한다.

2.3.3. 조홀국

정주신이 반란을 진압하면서 말레이인과 화교를 탄압하고 그 대신 노동자로 영국 동인도 회사를 통해 인도인을 이민시키는 정책을 펴서, 1823년 현재 인도인이 30만명이 되어 가장 인구가 많고, 말레이인 인구는 15만 명, 화교 인구 6만 명, 대한인 14~15만 명, 일본인 14~15만 명 정도라 한다. 총합 100만명으로 번국 중 인구가 제일 많다.

정주신은 아체국과는 정면 충돌 대신 냉전 상태가 되지만, 말레이 반도의 소국들을 대부분 병합하고 섬라와 국경을 맞대게 된다. 정주신의 손자인 충정왕 정인선은 전쟁을 피하고 교역과 산업 진흥에 힘쓰고 있다. 특히 대한에서 석관식(통조림) 산업이 발달하면서 깡통의 원료인 주석 수요가 늘어나 조홀국은 주석 광산업으로 큰 이익을 본다. 그러나 정인선의 아들 정윤진은 왕위에 오른 후 어차피 대한이 지켜줄 것이라며 최정예 왜병들을 해고해 3만 명이던 군대를 1만으로 감축하고 남는 돈을 서양식 궁궐인 태서궁을 짓고 주지육림에 빠져 국가 안보와 산업 발전에는 게으른 모습을 보이고 있다.

하지만 대한령 연해주에서도 주석 광산이 발견되었다는 소식을 듣자 깜짝 놀라 정신을 차린다. 조홀국 주석 산업에 타격을 입으면 더이상 주지육림을 즐기지 못한다는 생각 때문이긴 했어도(...) 어쨌든 각성하게 되어 간신들을 몰아내고 충신들을 재등용하였으며, 세자 정호석이 재석에게서 들은 고무 산업의 유망성에 대해 전하자 즉시 남미에서 고무 묘목을 들여와 고무 플랜테이션을 세우게 하면서 다시 부흥할 모습을 보이고 있다.

2.3.4. 하와국

파일:하와국 국기.jpg
하와국 국기[36]

2.4. 유구국

<colbgcolor=#695370><colcolor=#fff> 유구국
琉球國
국호 유구국(流球國)
위치 오키나와
수도 슈리(首里, 수리)
정치 체제 전제군주정
국성 상(尙)
국가원수 유구국왕 > 유구황제 > 중산왕
연호 영락(永樂) (1710 ~ 1711)
천안(天安) (1712 ~ ?)
영원(永元) (? ~ ?)
○○(○○) (? ~ ?)
○○(○○) (? ~ ?)
대흥(大興) (? ~ ?)
성평(成平) (? ~ 1831)
언어 유구어
민족 유구인
국교 유구 신토, 불교, 유교, 신토

황제국으로 자처하며 자신들의 역사가 1만 8400년으로 대한, 일본보다 더 길다는 허세는 여전하나, 오히려 대한 주둔군이 8천 명으로 늘어나 유구군 5천 명을 숫자로도 압도하게 되어 사실상 대한의 속국인 상태가 지속된다. 대한이 유구를 번국으로 합병하지 않는 것은 순전히 일본 도쿠가와 막부와 유지하는 평화를 깨트리기 싫어서이다. 그러나 새로 대한의 태황으로 즉위한 광덕제는 인구가 대구 정도밖에 안되는 초약소국 류큐가 대한과 감히 맞먹으려 한다는걸 매우 아니꼽게 보고 류큐를 번국으로 들이거나 아니면 아예 동군연합을 통해 병합하려는 계획을 신하들의 의견을 모조리 물리치고 추진하여 나라가 망할 위기에 처해있다. 여기에 류큐병합계획이 대한 전국에 퍼지는 바람에 광덕제의 유구와의 관계를 완벽한 상하관계로 재정립한다는 정책이 민간 여론을 등에 업고 더욱 탄력을 얻었다. 결국 광덕제가 태자 재석을 일본에 보내 제2차 경인조약으로 일본 도쿠가와 막부와 합의하여 유구 황제 직위는 대한 태황이 가져가고 유구 황제는 중산왕으로 격하, 대한에서 실질적 총독인 집정대신의 파견, 외교권은 박탈하고 자치권과 치안 유지를 위한 경찰 병력 유지만이 허용된 대한의 번국으로 삼도록 합의한다. 유구 조정에서는 이를 어떻게는 막으려 하고 있으나 이미 현실을 깨달은 유구 국민들은 나라를 지키는 것을 포기한 상태다.[38] 결국 1831년(신묘년) 음력 1월 22일(양력 3월 6일) 유구 조정이 대한의 요구를 모두 수락하며 독립을 잃었다.

이후 유구 주둔 대한군의 주둔비를 부담하고, 대한군의 대민 행패가 심해지고 대놓고 해우 밀렵을 하는 등 부작용이 나타났으나, 이를 다스리는데 무관심했던 광덕제와 달리 흥선제는 자체적으로 자국민의 범죄 행위를 처벌하고 배상금을 지불했으며, 유구 왕실에는 누손주산 최고급 가구들을 선물하는 배려를 아끼지 않아서 유구 왕족과 신하들도 대한의 번국이 된 것에 더이상 불만을 품지 않게 되었다. 한편 광덕제는 내가 유구의 황제이기도 한데 대한에 조공을 바치게 하면 내가 나한테 조공을 바치란 말이냐며 유구의 조공을 면제해 주었고, 재석과 신료들도 중종이 인정한 유구의 독립을 박탈했으니 이정도 특권은 줘야 한다고 동의하여 유구는 조공이 계속 면제된다.

인구는 약 40만.
[clearfix]

2.5. 중원

2.5.1. 후송

대송국
大宋國
국호 대송국(大宋國)
별칭 후송(後宋)
위치 직예, 절강, 강서, 양광, 복건, 호남, 호북
번국 남월국
수도 남경
정치 체제 전제군주제[39]
국성 (趙)
국가원수 황제
연호 천개(天開) (1633 ~ 1668)
홍광(弘光) (1669 ~ 1680)
융무(隆武) (1681 ~ 1684)
소무(紹武) (1685 ~ 1736)
태안(太安) (1737 ~ ?)
태녕(○○) (? ~ ?)
소태(紹泰) (? ~ 1804)
영강(○○) (1805 ~ 1834)
함화(咸和) (1835 ~ )
언어 중국어(오어)
문자 한자
종교 유교, 대승 불교, 도교, 덕성도
민족 한족
[clearfix]

3부와 4부 사이에 황제였던 혜종 태녕제 조경소는 19세에 즉위해서 12년 동안 재위하면서 사치와 향락에만 몰두하다 31세에 복상사로 사망한 암군으로, 작중에선 연산군을 대신해서 '흥청망청'이란 표현을 만들어냈다.

조경소 사후 제위에 오른 소태제 조승번은 부황의 막장짓 잔재를 수습하고, 서나라의 암군 함녕제가 안남 내란에 개입했다가 20만 대군을 날려먹은 틈을 타 1777년 정주도통사 홍사옥의 지휘 하에 양광을 침공한다. 서나라 양광총독 임호관이 중과부적으로 항복하자 홍사옥의 주선으로 황제 조승번이 임호관을 그대로 양광총독에 유임시키고, 이에 분노한 서나라 함녕제가 40만 대군을 보냈으나 양광군과 합동으로 이를 격파하고 양광 지역 정복에 성공하여 국력을 크게 끌어올리나, 황제 소태제 조승번이 덕성도를 괜히 의심하여 탄압하다가 덕성도의 난이 일어나 5년간 혼란에 빠진 데다, 운남산 아편의 창궐로 기껏 끌어올린 국력을 다시 소모한다. 소태제가 덕성도의 난으로 마음고생을 하다 1804년 사망한 후 4부 시점의 황제인 영강제 조형윤 대에 와서는 도통사들은 완전히 지방 군벌화되어 자식에게 직책을 세습하고 조정에는 사후에 표문만 올리는 데가 황궁에서도 환관의 힘이 커지는 등 완전히 당나라 말기같은 상황이 되버렸다. 영강제는 황제 직할령의 경제력을 끌어올려 간신히 도통사들에 대한 힘의 우위를 유지했으나, 후계자 문제로 인해 황후 송씨와 환관들에게 독살당하고, 뒤를 이은 태자 조심원은 어리석고 향락만 즐기는 암군인데다 태후가 된 송씨가 국정을 농단하고 있고, 아편 잠상들을 단속하기 위해 덕성도 탄압을 중단하고 덕성도에게 아편 잠상 단속권을 부여한 것도 덕성도 내에 홍수전의 배상제회가 세력을 키우고 있어 큰 위험요소로 작용 중이다.

또한 국제적으로도 무시당하고 있는 처지이다. 서구권에서는 태평양을 재패한 한국은 물론이고, 용병업으로 영향력이 큰 일본, 천주교를 우대하는 건주 양국에게 인지도가 밀리는 처지이다. 동방 국가들과 수교해서 국제적 위상을 높이려는 프로이센도 후송은 무시할 정도. 서양에서는 시니카로 부른다.

결국 원 역사대로 태평천국의 반란까지 일어나며 혼란이 가중되고, 홍서당의 묘노 봉기에 자극받은 외국들의 연합군이 도착해 전쟁을 치르면서 큰 피해를 입는다. 게다가 관군이라는 작자들이 외국군에게 애먼 민간인들을 태평천국파라고 모함해 공격시킨 다음, 죽은 민간인들의 수급을 베어 전공을 조작하거나 살아있는 포로들을 묘노로 팔아넘기는 막장 짓거리를 하고 있어[40] 설령 난을 진압한다 해도 다른 반란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확실하게 망조가 든다. 3부에서 언더독 이미지로 인기를 끈 후송이 4부에선 원 역사의 중국 역사가 그랬듯이 순탄치 않을 거라 생각한 팬들은 많았으나, 이렇게까지 추하게 무너질 것이라는 예상은 없어서 적잖은 팬들을 당황케하고 있다.

2.5.2. 태평천국

원역사와 다르게 홍수전이 덕성도 접주 출신이었기에 기독교가 아닌 덕성도의 분파로 출범했으며, 교리가 많이 변질되고 구월산의 통제도 받지 않으면서 사실상 완전히 다른 종교가 되었다. 홍수전은 장기적으로 배상제회를 바탕으로 후송을 멸망시키고 태평천국을 세울 계획이다. 1839년 가을 태평천국의 난을 일으키며 형주도통부를 격파하고 호남, 귀주, 광서 지역을 장악하고 국경 너머 청나라의 사천과 귀주까지 세력을 뻗친다. 다국적군의 공격으로 후송 방면 진격이 돈좌되자 대신 대홍수와 후금 내전 개입으로 전력이 약화된 청 쪽으로 세력을 확장하여 허창 근교까지 점령한다. 토벌전조차 장기화되며 태평천국 측에서도 종전을 원하며 접촉하고 있기에 재석은 이대로 간다면 태평천국이 몰락한 서를 대신해서 중원의 세 솥발 중 하나로 거듭날 수 있을 것이라고 예상한다.

2.5.3.

<colbgcolor=#008000><colcolor=#ece5b6>
대서국
大西國
국호 대서국(大西國)
위치 운남
정치 체제 전제군주정[42]
국성 장(張)
연호 대순(大順) (1635 ~ 1656)
영창(永昌) (1657 ~ 1715)
승평(承平) (1716 ~ 1728)
흥시(興始) (1729 ~ ?)
광안(廣安) (? ~ 1759)
함녕(○○) (1760 ~ 1787)
복흥(復興) (1788 ~ 1820)
영무(○○) (1821 ~  )
문자 한자
민족 한족, 그외 소수민족
[clearfix]

원래도 다른 두 중원 국가에 비해 국력이 딸리는 서였는데, 암군 함녕제 장시원의 활약(?)으로 완전히 몰락해버렸다. 사치와 향락에 빠져 놀고먹던 장시원은 무리한 안남 원정으로 주력군을 죄다 날려먹는다. 이 빈틈을 타서 양광 지방에 후송이 쳐들어왔고, 그러자 배후의 청은 생각하지 않고 사천의 병력을 다 뺐다가 청까지 빈집을 노리고 쳐들어온다. 결국 후송과 청이 영토 대부분을 갈라먹었으며, 함녕제는 청나라의 포로가 되어 끌려가 죽고, 서는 운남 지방만 남은 내륙국이 되어 더이상 다른 두 국가와 대등한 경쟁이 불가능한 수준이 되었다. 그나마 운남인들이 예전 청나라가 화북에서 저지른 대학살을 기억하여 서나라 유지를 택했기 때문에 국가가 유지되는 것으로, 서나라 황제는 세금만 받아먹는 허수아비이고 각 지역 호족들이 멋대로 할거하는 상태이다.

청에서는 함녕제의 항복으로 서가 멸망했다고 간주하며 운남에 남은 서는 그냥 변방을 장악한 지방정권으로 간주하고 '서왕(西王)으로 대하고 있다. 운남이 워낙 지형도 험하고 인구도 산업도 별볼일 없는 땅이라 놔두고 있지만 청이든 후송이든 서를 정복하려고 마음만 먹으면 바로 무너질 수준. 내륙국이 되면서 대한과의 외교도 단절되어 한양에 있던 서나라 주재관들은 명나라 황실의 후예인 대명공에게 귀부하였다. 그 후 탐보라 화산 분화로 인한 흉년과 벵골에서 들어온 콜레라까지 겹쳐 큰 피해를 입자 어떻게든 식량을 수입하기 위해 아편을 대량 재배해 의화당의 주도로 후송과 청으로 밀수출하여 특히 후송에 큰 사회 문제를 일으킨다. 호족들이 황제에게 바치는 세금도 아편팔이로 마련한 것이어서 황제 영무제가 자괴감에 괴로워할 정도. 벵골산 아편과 경쟁이 붙자 호족들이 황제에게 압력을 넣어 벵골 칸국에 항의 서한까지 보내게 할 정도다.

태평천국의 난이 발생하면서 아편 수출길이 막히자[43] 안남의 프랑스 총독부와 접촉하여 새로운 아편 무역루트를 마련한다.

2.5.4. 영국령 홍콩

홍적의 난으로 대한, 일본 다음으로 큰 피해를 입어 사망자 2천명, 재산 피해 6백만 파운드라는 큰 피해를 입었다. 이미 임칙서와 엘리엇의 협의로 의회 비준을 받아 홍서당 토벌군을 준비 중이던 영국은 이 사건을 계기로 여론도 찬성에 기울 수 밖에 없게 되어 3만명이란 대병력을 준비하게 된다. 토벌의 대가로 구룡반도를 추가로 할양받고 그 북쪽에 공동조계가 설치되었다.

2.6. 건주

여전히 대한과 우호관계지만, 대한에서 건주 양국을 자신들보다 아래인 오랑캐 취급하는 풍조가 있다는 걸 알기에 내심 대한에게 불만을 가지고 있다. 건주 양국은 여전히 북경을 공동수도로 여기는 등 겉으로는 가까운 사이지만 후금 대칸 후계자 문제를 놓고 점차 서로 상대방을 쳐 없애고 건주를 일통할 계획을 세우는 등 대한 중심의 동아시아 질서를 뒤흔들 위험이 보이고 있다. 서양에서는 이 두 나라를 호엔촐레른 가문처럼 본가와 분가로 보고 있으며, 후송과 구분하여 건주 양국을 카타이라고 부른다.

후금 내전의 결과로 1844년 후금이 청의 번국으로 격하되면서 드디어 건주일통이 이뤄진다.

2.6.1.

대청국
大淸國
국호 대청국(大淸國)
위치 직예, 산동, 산서, 하남, 섬서, 사천, 귀주, 감숙
수도 북경 > 동경 개봉부 > 북경
정치 체제 전제군주정
국성 아이신기오로(愛新覺羅, 애신각라)
국가원수 황제
연호 천명(天命) (? ~ ?)
숭덕(崇德) (? ~ 1663)
만방(滿邦) (1664 ~ 1671)
순치(順治) (1672 ~ 1695)
중통(○○) (1696 ~ 1728)
홍화(○○) (1729 ~ ?)
건강(建康) (? ~ ?)
강희(康熙) (? ~ ?)
계정(契正) (? ~ ?)
도광(道光) (? ~ 1838)
가정(嘉正) (1839 ~ ?)
언어 중국어(관화), 만주어
문자 한자, 만주문자
민족 만주족, 한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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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적인 재능이 출중한 계정제가 황위에 올라, 서나라가 후송과 양광을 놓고 싸우느라 전 병력을 양광으로 보낸 틈을 타 서나라의 중심지인 사천 지역을 기습 공격, 33일 만에 서나라 황제 함녕제를 사로잡아 항복을 받고 사천과 귀주 지역을 장악한다. 하지만 그 후 백련교의 난과 기근으로 국력이 약해지고 운남산 아편이 들어온다. 여기에 입관한 지 2백 년이 지나서인지 새로 영토로 편입한 지방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한다.

이런 상황에서도 청 도광제와 뒤를 이은 가경제는 후금의 황위 계승 분쟁을 물밑에서 조장했고 이후 벌어진 후금 내전에 개입하여 1844년 후금을 청나라의 번국으로 만들고 후금군을 흡수하며 건주 일통을 이룬다. 그러나 후금 흡수에 집중하는 동안 황하 대범람과 홍서당 세력의 침투로 국력을 손실하고 민심이 이반하며 건주일통을 이뤘음에도 오히려 국력은 흔들리고 있다.
2.6.1.1. 후금→실위
대금국
大金國
국호 대금국(大金國)→실위국(室韋國)
위치 몽골
수도 상도, 카라코룸
정치 체제 전제군주정[45]
국성 아이신기오로(愛新覺羅, 애신각라)
국가원수 대칸(大汗)가한(可汗)
연호 천총(天聰) (? ~ ?)
명창(明昌) (? ~ ?)
천권(天券) (? ~ ?)
대덕(大德) (? ~ ?)
태화(○○) (? ~ 1722)
천정(天正) (1723 ~ 1760)
장락(長樂) (1761 ~ ?)
함녕(咸寧) (? ~ ?)
승광(承光) (? ~ ?)
덕창(德昌) (? ~ 1840)
언어 만주어, 몽골어
민족 만주족, 몽골족, 한족
종교 천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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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숭무적인 성향이 강했고 유목민족의 습속을 최대한 보존한 나라였지만 아이러니하게도 4부 들어서는 준가르 원정이나 청나라의 후송 공격에 지원병을 보내는 것 외에는 천주교를 보호하고 교역을 하며 가장 안정적으로 평화를 누린다.[46] 게다가 청과 후송이 장서 잔당이 퍼트린 아편으로 큰 사회 문제를 겪고 있는 것과 달리 국교인 천주교가 아편을 엄금하는 데다, 국민 대부분이 유목민인 몽골족과 수렵민인 만주족인지라 아편에 취해 있다가는 굶어죽는다는 현실적인 문제 때문에 한족 노예들 일부를 제외하면 아편도 퍼지지 않아 내정도 안정되어 있다. 주변국 중 대한과 청은 형제국이고, 준가르는 신장 지역만 간신히 유지할 정도로 약화되었고, 러시아와도 부수의 난 이후는 우호 관계인데다가 향후 남진과 서진에 더 주력할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아래에 나오는 후계 문제를 제외하면 4부에서도 큰 문제가 있진 않을 것으로 보였으나… 그 후계 문제 때문에 나라가 망하고 말았다.

후금의 유일한 문제는 대칸 계승 문제로, 몽골족과 만주족의 옛 습속을 간직하여 선대 대칸들도 형제들과 서로 암살 음모를 꾸며가며 문자 그대로 목숨을 거는 싸움을 벌이고 패배한 황자들은 눈을 뽑히거나 수도원에 유폐되는 등 동로마 제국이나 오스만 제국 같은 일이 반복되고 있다. 문제는 현임 대칸인 박락이 서자만 셋 있고 청 공주인 대복진 소생 적자가 없어 박락의 서자들과 야심 많은 박락의 동생들 사이에 서로 자객을 보내는 암투가 벌어지고 있고 청 황실이 개입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으며 이를 견제하기 위해 박락의 동생들은 대한의 개입도 요청하고 있어, 박락이 후계 문제를 매듭짓지 못하고 죽을 경우 후금 판 왕좌의 게임이 벌어지고 이에 청과 대한이 말려들 위험성이 높다. 게다가 청 도광제는 이 기회에 후금을 아예 삼키려는 야심을 갖고 있어 4부 전반부에 일어날 대전쟁은 후금 황위 계승전쟁이 되었다. 그리고 결국 덕창제가 죽으면서 다섯 왕자들의 내전이 터지고 만다.

1844년 1월 청나라와 대한의 도움을 받은 럭더훈의 승리로 내전은 끝나지만, 청나라의 도움을 받은 댓가로 후금은 독립 황제국에서 청나라의 번국인 실위국으로 격하되고 군주도 황제와 동급인 대칸에서 심왕보다도 격이 낮은 청나라 친왕과 동급인 가한으로 격하, 외교권과 군사권도 박탈당하고 후금군은 청군으로 흡수되어 독립을 잃게 되었다.

2.7. 일본

도쿠가와 막부는 대한과의 우호정책을 잘 지켜가며 좋은 관계를 유지 중이다. 일본 용병들은 3부에 이어 여전히 좋은 평가를 받으며 아메리카 대륙까지 활동 범위를 넓혔다. 아이러니하게도 대한이 북태평양을 사실상 호수로 만들며 본국은 고립됐지만 동서양의 교류와 해양활동이 활발해진 기조를 정면으로 거스르지는 않은 덕분에 일본인들의 활동 영역은 원 역사보다 훨씬 넓어진 모양새로,[47] 준가르 라자국이 국교를 정토진종으로 개종하게 하는 성과도 거뒀다. 쇼군의 권위 역시 쇼군가의 혈통이 6대인 이에노부 이후로는 끊어지지 않았고 계속 범군 이상은 되는 자들이 즉위한 덕분에 원역사보다 훨씬 강하다.

2.8. 아모국

3부에서처럼 여전히 정치적으로 통합되지 않았고 미주로 가는 도중에 들러 아모국의 실상을 확인한 재석도 답이 없다는 판단을 내릴 정도로 일본에게 경제적으로 종속되어 가는 중이다. 태황 광덕제도 아모국이 사실상 일본에게 종속되었다 여겨 유구를 병합하는 대가로 아모국을 일본에게 넘기기로 일본 막부와 합의한다. 유구국처럼 아모국 국왕의 직위를 쇼군의 신하로 낮추는 대신 자치권과 기존 추장들의 권력은 그대로 유지하기로 하자 아모국 추장들도 압도적인 찬성을 보여 일본의 번국으로 확정된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막부는 본색을 드러내서, 기근을 빌미로 수많은 일본인 난민들이 아모국에 몰려들면서 아모국을 난장판으로 만드는데도 이를 제지하려는 시도를 무력 시위를 동원해서 막으면서 손놓고 바라보는 처지에 놓이면서, 수세기 동안 자주성을 유지하려는 어떠한 노력을 하지 않고 허송세월 한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된다.

2.9. 대남국

대남국
大南國
국호 대남국(大南國)
별칭 안남, 남월
위치 베트남
수도 후에(化, 화)
정치 체제 전제군주제
국성 완(阮)
국가원수 황제(외왕내제)
연호 가륭(嘉隆) (? ~ ?)
명명(明命) (? ~ 1840)
소치(紹治) (1841 ~ )
종교 유교, 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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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 역사처럼 떠이선 농민 봉기가 일어나 북쪽의 찐씨 정권과 남쪽의 광남국 응우옌씨 정권을 모두 멸망시키고, 명목상의 황제인 후 레 왕조가 서나라에 청한 원군까지 모두 격파하여 떠이선 왕조를 세우나, 응우옌씨 정권의 후손 응우옌푹아인대한의 지원을 받아 떠이선 왕조를 다시 멸망시키고 응우옌 왕조를 세운다. 응우옌 왕조는 외왕내제 체제를 유지하여 대한에 칭신하여 안남국왕 책봉을 받고 매년 조공을 바치며 복승항에 대한 육군 4000명과 대한 수군 함대의 주둔을 허용하는 한편 후송에게도 칭신하여 남월국왕 책봉을 받는다. 대한에서는 안남이라 부르지만 공식 국호는 대남이다. 또한 원 역사처럼 주변국인 진랍, 남장을 침략하며 섬라와 갈등을 빚고 있다. 유럽에서는 대한의 속국으로 인식하고 있어서 원 역사와 달리 식민지가 되는 운명을 피하게 됐다. 하지만 2대 황제 명명제가 천주교를 매국노라고 인식하여 탄압하는 바람에 많은 천주교인들이 대한군이 주둔한 복승을 통해 술루국으로 망명하고, 명명제의 호족 탄압 정책 때문에 제대하여 호족이 된 고참 왜병들이 동족 왜병들까지 불러들여 반란을 일으키고 북쪽에는 레 왕조의 후예를 자칭하는 반군이 준동하는 등 내부적으로 매우 불안정한 상태다. 결국 반군을 제압하기 위해 프랑스군을 불러들이는 등 어리석은 선택을 하고 만다.

2.10. 준가르 본국

원 역사에서 건륭제에 의해 진작에 학살당해서 세상에서 사라진 것보다는 상황이 낫지만 본국에서 쫒겨난 로브 샨쇼노의 무리가 인도에서 벵골을 정복하고 잘 사는 데 반해, 준가르 본국은 러시아와 후금 사이에 끼어 거의 망하고 간신히 신강지역만을 지키고 있다. 결국 러시아의 위협에 굴복한 대칸 타마치가 러시아 차르에게 복속을 택하면서 러시아의 속국이 되고, 5년에 한번씩 칸이 직접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입조해 조공을 바치는 신세가 되고 만다. 이런 현실에 절망해서 동족의 나라인 남쪽 벵골로 떠나는 전사들도 종종 있다고 한다. 1840년 후금 내전이 터지고 후금 사패륵 찰니가 준가르에서 용병을 고용하자 이 기회에 원수 후금에 대한 복수의 의미로 용병들이 후금 서부지역을 크게 약탈하게 된다.

수도는 '굴자'라는 도시이지만 성벽은 따로 없다.

2.11. 아라칸 왕국

대한과 영국의 공장제 면포로 인해 손해를 본 벵골이 다시 아라칸을 정복하기 위해 전쟁 준비를 하고 있다.

2.12. 아체국

인도로 향하던 일본 귀족 성지순례단이 아체 해적들에게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일본은 태평천국 토벌군을 철수시키고 아체를 토벌하려 한다.

2.13. 브루나이 술탄국

술루와의 전쟁으로 인해 영국인 용병대장 제임스 브룩에게 사라왁을 봉토로 내리는 등 대비하고 있다.

2.13.1. 사라왁 왕국

원역사처럼 제임스 브룩이 봉토로 받고 세워진다.

2.14. 천축국

시크 왕국과 벵골 칸국을 제외한 인도 대부분을 원역사처럼 영국 동인도 회사가 지배하게 되었다. 굴람 카디르의 난을 계기로 무굴 황제는 완전히 동인도 회사의 허수아비가 되고 동인도회사 총재가 무굴 제국 재상을 겸임하게 된다.

1833년에는 시크 왕국도 영국에게 굴복하여 대한이 지원하는 벵골 칸국만이 유일한 독립국으로 남게 된다.

2.14.1. 준가르 라자국(벵골 칸국)

나디르 샤의 무굴 정벌에 용병으로 따라왔던 준가르 왕자 '로브 산쇼노'가 벵골 태수와 관계가 틀어진 대한의 골가타 상관의 지원을 받아 벵골 태수를 죽이고 벵골을 정복, 명목상 나디르 샤의 봉신국인 벵골 칸국을 세우고 본인을 구르칸으로 선포한다. 나디르 샤가 죽은 후 구르칸은 공식적으로 독립국을 칭하고, 마라타 동맹 등 다른 인도 국가들과 싸우면서 대한과 다시 정식 외교관계를 맺어 지원을 받는다. 티베트가 네팔과의 전쟁에 자신들을 계속 끌어들이려 하자 티베트의 간섭을 차단하기 위해 국교 또한 준가르 시절 믿던 티베트 불교에서 일본 승려들이 포교한 정토진종으로 바꾸고, 무력으로 벵골인들에게 개종을 강요한다. 그래서 새로운 카스트 제도가 생겼는데 최상위는 준가르인,[54] 2위는 일본 용병, 3위는 인도인 관료나 군인,[55] 4위는 인도인 평민, 5위는 후송에서 팔려온 묘노, 그리고 불가촉천민으로 개종을 거부한 유랑민이 있다.

벵골을 제외한 인도 전역이 영국의 손아귀에 떨어지면서 대한의 지원이 더 절실한 상황이 되었다. 다행히 현재 영국 정부는 대한의 국력과 거리의 차이, 그리고 대한과의 우호관계의 중요성 때문에 벵골을 무력으로 병탄할 생각은 없다.[56] 가혹한 수탈을 일삼는 영국과 달리 정당한 값을 치루고 교역을 하는 대한의 보호에 만족하고 있으며, 주변국들도 고만고만하여 준가르의 가장 큰 적은 말라리아를 옮기는 모기라고 할 정도로 안정된 상태.

하지만 영국이 태평천국의 난 진압을 지원하여 정식으로 후송에서 이권을 얻는 대신 벵골산 아편의 수출을 중단하기로 하고, 그나마 남은 후송의 아편 수요도 안남국에 자리잡은 프랑스 동인도회사가 가로채는 바람에 벵골의 주산업 중 하나인 아편 산업이 큰 타격을 입는다. 이 와중에 대칸 토를로시가 말라리아로 사망하자 후계자 암투가 벌어져 3남 소남자르갈이 형 담바수렌을 죽이고 대칸이 되며, 취약한 정통성과 경제적 침체, 영국령 동인도 회사의 위협에 대처하기 위해 더욱 더 대한과 밀착하려 한다.

3. 대유주

세부적인 진행은 다르지만 이 세계선에서도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7년 전쟁, 미국 독립전쟁, 프랑스 대혁명, 나폴레옹 전쟁이 일어났다.

한편 유럽에도 증기기관이 본격적으로 사용되며, 영국과 프랑스 등에서는 철도망이 깔리기 시작하고, 7년 전쟁 중 도버 해협에서 프랑스 해군의 증기선 전투함과 영국 해군의 장갑함이 해전을 벌이기도 했다고 한다. 하지만 아직 대한보다는 기술이 딸려 전함이라기보다는 모니터함 수준이라고 한다. 열기구도 전쟁 중에 널리 사용된다. 특히 나폴레옹이 최초로 철도망을 이용한 병력 이동, 야포 견인용 증기자동차 도입 등으로 큰 승리를 거두었다.

대한 황실의 유별난 태자 교육, 그리고 명군만 배출되는 결과가 유명해졌는지 유럽 왕실들에서도 대한을 본받아 자식들을 빡새게 교육시키는 열풍이 불고 있다. 이 때문에 빅토리아처럼 대한에 악감정을 가진 사람이 나올 정도.

3.1. 외수터국

3부 시점까지는 '황제령'이라고 불렸으나 나폴레옹 전쟁으로 신성 로마 제국이 해체되면서 외스터라이히를 음차한 외수터국으로 불리고 있다.

요제프 1세가 종두를 맞아 장수하는 바람에 동생 카를 6세가 늦게 즉위하여 국사조칙 반포가 늦었지만 원역사처럼 마리아 테레지아프란츠 1세 부부가 즉위했고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동맹의 역전, 7년 전쟁을 치뤘다. 7년 전쟁 후 요제프 2세는 동맹이던 폴란드 왕국의 뒤통수를 치고 제2차 폴란드 분할에 참여한다. 하지만 프랑스 대혁명나폴레옹 전쟁으로 신성 로마 제국이 해체되는 등 큰 피해를 입는다. 나폴레옹 전쟁 후에는 원역사처럼 재상 메테르니히의 활약으로 국력을 상당히 회복하기는 한다.

3.2. 포뢰선

프리드리히 대왕이 원역사처럼 군사적 천재성을 발휘,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과 7년 전쟁에서 거듭 승리한다. 원 역사와 달리 폴란드 왕국도 대 프로이센 동맹에 가담하여 '네 여인 동맹'과 싸웠지만 홀슈타인 공작 카를 페터 울리히가 스웨덴 국왕이 되면서 초장부터 스웨덴과 동맹한 데다, 러시아도 루시아 태후 사망과 함께 동맹에서 이탈하여 원역사처럼 승리를 거두고 폴란드를 분할하며 동유럽의 강대국 반열에 들어선다. 나폴레옹 전쟁에서는 원역사처럼 나폴레옹에게 털렸지만 나폴레옹이 신대륙으로 도망친 후로는 멸망한 신성로마제국의 영방 국가들이 재통합된 독일 연방에서 2인자격 위치에 올랐으며 의장국인 오스트리아를 재치고 독일어권을 통합하려 한다.

3.3. 불랑국

3.4. 루스국

차르 알렉세이 2세가 사망한 후 아들 표트르 2세가 즉위했지만, 루시아 태후가 아들이 성년이 되었는데도 섭정을 거두지 않아 표트르 2세는 이에 반감을 품었다. 루시아 태후는 딸 카타지나를 도와 7년 전쟁에서 대 프로이센 동맹에 참여했지만 표트르 2세는 프리드리히 대왕에게 친근감이 있던 데다 어머니에 대한 반감, 폴란드를 차지하려는 여동생 카타지나에 대한 미움 때문에 어머니가 죽고 친정을 선포하자마자 동맹을 이탈하고 프로이센 편으로 편을 바꿔 이 세계에서도 브란덴부르크 가의 기적이 일어난다. 표트르 2세의 배신으로 카타지나가 충격을 받고 사망하자 거리낄 것 없이 폴란드를 분할하여 동폴란드를 점령한다. 하지만 그 후 프랑스 대혁명나폴레옹 전쟁 기간 동안 차르 알렉산드르 1세와 표트르 3세가 모두 짧게 재위하고 죽고, 어린 알렉산드르 2세의 섭정태후 마리아 표도로브나의 우유부단한 대처로 국력에 큰 손실을 입었으며 알렉산드르 2세가 모후를 끌어내리고 친정하면서 국력 회복에 시동을 걸고 있다. 나폴레옹 전쟁 때는 대한 원평제의 무기 지원을 받기도 했다.

재석은 3부 중종일때 표트르 1세와 의형제 관계와 혼인동맹을 맺으면서 러시아의 진출 방향을 동로마제국 계승을 명분삼아 콘스탄티노플로 돌리려 했지만, 후대 차르들은 오스만 제국을 상대하기 어렵다는 난관 때문에 원 역사처럼 중앙아시아를 거쳐 인도로 남진하려고 하며, 무굴 제국이 원역사보다 빨리 영국의 손아귀에 떨어지면서 중앙아시아 소국들의 수입원이던 무굴 제국에 대한 군마 수출도 끊기게 되어 국력이 크게 약화되자 그 틈을 노리고 중앙아시아 소국들을 합병하면서 인도와 페르시아를 향해 남진하고 있어 영국과 조만간 그레이트 게임이 벌어질 것으로 보인다.

3.5. 폴수국

암군인 루드비크 2세 대신 국정을 맡은 카타지나 왕비가 주도하여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7년 전쟁에 오스트리아와 동맹하여 참전하나 프리드리히 2세에게 거듭 패전하고 만다. 7년 전쟁의 결과 친오빠 표트르 2세에게 배신을 당한 데다, 패전으로 국왕 친위군을 날려버리자 그동안 카타지나의 중앙집권 정책에 반감을 품었던 폴란드 귀족들도 배신을 때려 카타지나 왕비는 충격으로 1765년 사망하고, 후임 국왕 스타니스와프 2세 아우구스트가 최후의 노력을 했지만 결국 폴란드 분할을 당해 독립을 잃게 된다. 그 후 나폴레옹 전쟁나폴레옹 1세가 원역사처럼 바르샤바 공국을 세우나 이 역시 나폴레옹이 유럽전선에서 패배하고 루이지애나로 파천하면서 멸망하고, 많은 폴란드인들이 나폴레옹을 따라 신불랑국으로 이주했다고 한다. 여담으로 과거 카타지나 왕비가 비발디를 시켜 만든 오페라의 영향으로 지금도 상당수 폴란드인들이 대한 황실이 귀비 소씨(올렝카)의 후손인 줄 안다.

러시아령 폴란드는 명목상의 폴란드 왕국이 남아있는 동군연합으로 러시아 차르가 폴란드 국왕을 겸하며, 실권은 없지만 세임 의회도 남아있다.

3.6. 수배국

원 역사에서 러시아 황제 표트르 3세가 되었던 홀슈타인-고토로프 공작 카를 페터 울리히와 예카테리나 2세였던 조피 프리데리케 부부가 이 역사에서는 스웨덴 국왕 '칼 13세' 부부가 되었다. 칼 13세는 원 역사처럼 프리드리히 대왕을 숭배하였기 때문에 7년 전쟁에서 처음부터 프로이센과 동맹하여 참전했으나, 승전했음에도 순수한 덕질이 목표였기에 아무 대가도 받지 않자 이에 반발한 귀족들과 아내 조피에 의해 강제로 퇴위, 연금된다. 조피 왕비는 원역사와는 달리 스스로 왕위에 오르지는 않고 어린 아들 파울 1세를 국왕으로 옹립한 다음 스스로 섭정태후가 되어 의회를 억눌러 왕권을 강화하고 스웨덴의 국력을 회복시키는 업적을 쌓는다. 파울 1세의 아들 구스타브 3세(원 역사 알렉산드르 1세) 시절에는 나폴레옹 전쟁 때 끝까지 나폴레옹과 맞서 싸워, 전후 빈 회의에서 그 보상으로 독일 내 영토를 잃는 대신 덴마크에게서 노르웨이를 얻어 스웨덴, 노르웨이, 핀란드까지 이어지는 통일 스칸디나비아를 완성했다.

3.7. 잉글국

7년 전쟁에서 승리했으나 원 역사와 같은 양상으로 북미 식민지가 미주합중국으로 독립해버린 데다 인도에서도 경제적 가치가 높은 벵골 영유에 실패하여 원 역사보다는 손해를 봤다. 미영전쟁도 원역사처럼 치뤘고, 미국을 견제하기 위해 나폴레옹의 신불랑 건국을 방조했다고 한다.

나폴레옹이 스페인을 침공하고 함대를 인수할 때 기습해서 몰살시키고,[58] 누벨프랑스 건국 후 바다로의 통로를 차단하기 위해 미시시피강 하구를 점령하는 등 원 역사의 명성에 부끄럽지 않게 활약하고 있어서 대한 조정에서도 앞으로 대한의 세력권인 벵골과 말레이 지역으로 잉글국이 손을 뻗칠 것에 대한 경계의 목소리가 나올 정도이다.

원 역사처럼 1833년 노예제 완전 폐지 선언을 하여 대한, 미국 등 다른 열강에도 영향을 준다.

몰락한 서나라에서 아편을 제조해서 후송에 퍼지면서 원 역사의 악행을 저지를 일이 없어진 줄 알았지만, 후송 내에서 아편 수요가 계속 늘어나 자국 내에서 생산되는 것만으로는 충당이 안 되자 이 틈을 비집고 동인도회사가 벵골산 아편을 밀수해 후송에 팔아넘기면서 이득을 취한다. 이를 보다못한 임칙서가 영국제 무기와 공작기계를 수입하는 조건으로 아편 밀매를 그만둘 것을 요구하자 받아들이는 대신 자신들도 태평천국 토벌에 동참하고 자국 상선들이 남경까지 입항할 수 있게 해달라는 역제안을 해서 전개만 달라졌을 뿐 원 역사보다 악명도 덜 얻고 중국에 영향력을 끼치게 되었다. 게다가 원 역사와 달리 명분도 도덕적 정당성을 확보하였기 때문에, 원 역사 아편전쟁을 반대했던 글래드스턴 의원이 '아편 판매를 중단하는 계기일 뿐 아니라 사교도를 토벌하는 정의로운 전쟁'이라며 참전을 적극 찬성하는 모습을 보여 이 소식을 들은 재석이 쓴웃음을 짓는다.

후송 파병은 왜 남의 나라 반란 진압에 나서야 하냐는 부정적 여론도 많아 의회에서 55표 차이로 간신히 통과했으나, 그 후 홍서당의 난으로 홍콩이 초토화 되었기에 이 시점에 다시 투표한다면 250표 정도 차이가 날 거라 할 정도로 여론도 파병 찬성으로 돌아섰다.

3.8. 내달국

나폴레옹 전쟁 당시 나폴레옹에게 본국을 점령당했으나 네덜란드령 동인도 식민지는 나폴레옹에 반감을 가진 대한 원평제가 본국 해군, 조홀국과 술루국 육군을 파병하는 등 물심양면으로 지원하여 프랑스를 막아내고 나폴레옹 전쟁이 끝날 때까지 버텨낼 수 있었고, 독립을 회복한 후에도 대한에 저자세를 취하고 있다. 백이의국이 원역사대로 독립한 후 국력이 약화되었지만 홍서당의 난으로 네덜란드령 동인도도 큰 피해를 입었기 때문에 태평천국 토벌 다국적 연합군에 소수 병력이지만 참전을 표명한다.

3.9. 서반아

3부에서 성립된 비텔스바흐 왕조 호세 페르난도 1세의 증손자인 페르난도 6세가 젊은 혈기에 프랑스 혁명전쟁에 반혁명군을 도와 마르세유를 침공하려다가 나폴레옹에게 박살나고, 1804년 나폴레옹이 친히 13만 대군을 이끌고 친정하여 페르난도 6세는 과달라하라 조약을 맺고 폐위, 나폴레옹의 형 조제프 보나파르트가 원역사처럼 괴뢰 군주가 되고 페르난도 6세는 가족과 함께 프랑스 아비뇽에 유폐되었다가 35세의 젊은 나이에 병사한다. 그 아들 호세 페르난도 2세가 나폴레옹 패배로 16세에 복위했지만 스페인 본국도 전쟁의 여파로 폐허가 된 데다 아메리카 식민지도 모조리 독립해버려 2류 국가로 전락한다.

필리핀의 상실로 가치가 없어진 태평양의 팔라우, 북마리아나 제도, 캐롤라인 제도를 대한의 제안으로 50만 냥을 받고 대한에 매각하였고 매각 대금을 쿠바의 방위 강화에 투입한다.

3.10. 백이의국

원역사대로 1831년 네덜란드로부터 독립했다. 약소국이지만 태평천국 토벌 다국적 연합군 파병 때 중국에 거점 마련을 노리고 참전을 선언한다. 프랑스를 견제하려는 영국의 개입으로 원역사의 작센코부르크고타 가문이 아닌 신불랑국 집정관 외젠 드 보아르네의 아들 오귀스트 드 보아르네가 오귀스트 1세로 즉위하면서 보아르네 가문이 왕위를 가져갔다.[59]

3.11. 포도아국

원역사대로 나폴레옹 전쟁에 휩쓸리고 브라질이 독립해 국력이 약화되었다. 홍서당의 난으로 마카오에서도 피해를 입어 태평천국 토벌 연합군에 참가를 선언한다.

3.12. 양시칠리아 왕국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 전쟁 당시 양시치리아의 보르보네 왕조의 후계가 끊기자 합스부르크 가문이 프랑스의 부르봉 가문을 지원하는 대가로 계승권을 얻어 원역사와 다른 아스부르고 왕조가 되었다.

3.13. 교황령

원역사대로 교황 그레고리오 16세가 강력한 수구반동 정책을 펼쳐 심지어 철도도 악마의 산물이라며 거부할 정도이다.

3.14. 돌궐국

원역사처럼 그리스 독립 전쟁에서 영불러 연합군이 그리스를 지원한 때문에 패배하여 그리스를 잃고, 이집트도 메흐메드 알리가 자립해 명목상의 봉신국으로만 남은 등 몰락의 길을 걷고 있다.

4. 대미주

4.1. 대한령 미주

4.1.1. 북미주

감영은 덕진성에 있다.

4.1.2. 남미주

감영은 지선성(至善城)에 있고 이곳은 사실상 미주의 주도(州都) 노릇을 한다. 매년 연말에 다섯 주지사가 모여 한해를 결산하는 자리를 갖는 것도 이곳. 천사동을 1840년 6월 한-신불랑 황제 회담 이후 제회부(帝會府)로 개칭한다.

4.1.3. 빙주

4.1.4. 중미주

감영은 위주(威州)에 있다.

4.1.5. 서미주

4.1.6. 동미주

신불랑국, 멕고국과의 협상을 통해 구입한 멕고국 북서부 영토, 처음에는 안정화를 위해 미주안핵사가 다스렸으나 9년 후 충분히 안정화되자 미주안핵사를 상설직인 동미주지사로 변경한다. 치소는 축손(逐損)이었으나 안정화된 후 에르모시요로 옮기기로 한다.

4.1.7. 동변

4.2. 캐나다 지역

태평양 연안지대는 대한령 북미주의 일부이고, 그외 서부는 신불랑 제국의 영토가 되어 대한령 북미주와 국경을 맞대고 있으며, 캐나다 중부는 원역사처럼 영국의 '허드슨 베이 회사'가 지배하는 '루퍼츠랜드'가 있고, 캐나다 동부는 영국령 캐나다 총독부가 있다.

1830년대 들어서 퀘벡의 프랑스계 주민들이 영국 총독의 영국 풍습 강요에 반발하여 잦은 폭동을 일으키고 있다.

4.3. 서반아령 신서반아멕시코(맥고국)

원역사처럼 멕시코 독립운동이 일어나 멕시코 제1제국을 선포하지만 아직 스페인과 전쟁 중이다. 대한 태황 원평제는 스페인으로부터 반란한 반적들이라면서 국가로 승인하지 않았다.

스페인 정부군 잔존세력과의 싸움이 끝나지 않은데다 아구스틴 1세의 독재정으로 민심이 혼란한 틈을 타, 1823년 텍사스를 노리던 신불랑국의 침공을 당하여 2년 만에 수도 멕시코시티가 신불랑군에게 함락되고 아구스틴 1세는 이탈리아로 망명하여 제1제국은 붕괴되고 신불랑의 보호령 신세로 전락한다. 그러나 신불랑군도 병력이 적어 멕시코시티와 동부 해안지역만을 확고히 장악한 상태이고 나머지 지역은 군벌과 도적들이 날뛰는 무법상태로 전락한다. 나폴레옹은 텍사스는 신불랑에 합병하고 나머지 멕시코 지역은 괴뢰국인 멕시코 공화국을 세웠으나 명목상의 정부인 상황이다.

4.4. 프랑스령 누벨프랑스 → 누벨프랑스 제국(신불랑국)

3부에서 묘사된 것처럼 많은 한인들이 루이지애나로 넘어와 농사와 교역이 발달하면서 원 역사보다 훨씬 경제적으로 풍요한 지역이 되었다. 때문에 7년 전쟁에서도 캐나다는 원역사와 똑같이 영국에게 할양했지만 루이지애나는 원역사와 달리 스페인에게 넘기지 않고 그대로 프랑스령으로 남았다. 원역사에서 나폴레옹이 미국에게 루이지애나를 판 루이지애나 구입 역시 일어나지 않았고 나폴레옹이 워털루 전투에서 패배한 후 한인 사략선장 클로드 홍(홍경래)의 도움으로 루이지애나로 탈출해 누벨프랑스 제국을 세웠다.

3부의 재석은 대한령 미주가 루이지애나를 장악하면 너무 커져서 독립할 것 같고, 그렇다고 미국이 가지게 두면 미국이 너무 커져서 대한령 미주를 노릴 것 같아 완충국으로 두기 위해 미주 토인들이 국가를 건설하도록 유도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하지만 건국의 주체는 달라도 원하던 위치에 완충국 역할을 할 세번째 국가가 생겨난 셈이니 미주는 이렇게 3강 구도를 유지할 듯하다.

1845년 건국황제 나폴레옹이 노환으로 사망한 후, 그의 양자 외젠 드 보아르네가 의회의 만장일치 추대에 의해 집정관 자리에 오르면서 국호는 제국이나 실제로는 공화국과 다름없게 되었다.

4.5. 미주합중국

원역사와 같은 양상으로 7년 전쟁 후 전쟁 비용 감당 문제로 영국 본국에서 세금을 늘리자 식민지인들의 반발이 일어나 보스턴 차 사건을 시벌점으로 미국 독립전쟁이 일어났고 조지 워싱턴을 초대 총통으로 미주합중국이 독립했다.[66] 프랑스는 원역사처럼 미국을 지원했고, 영국은 대한의 지원을 요청했으나 대한은 개입을 원하던 목종을 신료들이 영국 견제를 위해 방관하자고 말렸고 곧 목종이 죽는 바람에 방관만 했다고 한다. 이 역사에서는 북쪽은 영국령 캐나다가 있고, 서쪽은 그 나폴레옹이 다스리는 신불랑국이 있어 확장할 방향이 마땅치 않다. 여기에 원 역사와 다르게 인종주의 성향인 앤드루 잭슨이 당선되지 못하고 외교와 교역을 중시하는 헨리 클레이가 당선되어 연임에 성공하고 민주당으로 정권 교체 후에도 후임인 마틴 밴 뷰런 역시 확장을 지양하고 온건한 대외정책을 추구해 한동안 주변국들과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으나, 남부의 지지를 받는 제임스 포크 정부가 들어서면서 다시 확장주의 노선을 추구하려 한다.

4.6. 중앙아메리카 연방 공화국 → 중앙아메리카 연맹

원역사처럼 멕시코 독립전쟁의 혼란을 틈타 독립했으나 멕시코처럼 혼란스러운 상황이어서 멕시코의 산타 안나는 중앙아메리카를 정벌해 멕시코에 편입시킬 속셈이다. 그러나 1839년 12월 31일 연방공화국은 해산되고 중앙아메리카 연맹으로 재편되어 니카라과, 과테말라 등이 독립한다.

4.7. 아이티 공화국

원역사처럼 프랑스 대혁명의 혼란을 틈타 흑인 노예들의 봉기로 독립했고 나폴레옹 1세의 군대와 싸워 독립을 지켜냈다. 그때문에 신불랑과는 공식적인 적대관계이며 아메리카 국가회의에도 가입을 거부했다.

5. 대삼주

5.1. 그란 콜롬비아 합중국 → 그란 콜롬비아 연맹

원 역사처럼 시몬 볼리바르가 지도한 독립운동으로 건국되었으나, 대한 태황 원평제는 멕시코와 마찬가지로 국가로 승인하지 않고 있다. 볼리바르 사후 해체되어서 누에바그라나다 공화국, 베네수엘라, 에콰도르가 되었으나 나폴레옹의 중재로 그란 콜롬비아 연맹을 결성하고 나폴레옹이 만든 아메리카 국가 회의의 회원국이 되었다.

5.1.1. 누에바그라나다 공화국

그란 콜롬비아의 해체 후 건국했다.

5.1.2. 에콰도르

그란 콜롬비아의 해체 후 건국했다. 갈라파고스 제도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나 아메리카 국가연합의 맹주인 나폴레옹부터 대한을 지지하고, 이주민을 보냈더니 하와국 순찰사들에게 두들겨맞고 쫒겨나는 일이 반복되고 있다.

5.2. 브라질 제국

남아메리카의 맹주를 자처해 나폴레옹이 주도하는 아메리카 국가연합과는 비우호적인 상태이다.

5.3. 영귀(英龜)제도

중종이 안용복을 보내 갈라파고스땅거북들을 데려오면서 대한에 알려졌다. 무주지여서 해적의 소굴이 되어있었는데, 대한 목종이 결단을 내려 함대를 보내 해적을 전부 쓸어버리고 하와국에게 관리를 맡긴다.[70] 하와국왕이 매년 한 차례 전사들을 보내 그 해 잡을 분량의 땅거북을 잡아와 등딱지로 잔치용 솥 등 사치품을 만든다.1835년 원역사처럼 영국 탐험선 비글 호가 도착하여 연구 도중 하와국에서 온 거북 사냥대와 접촉하게 된다.

신생국 에콰도르가 독립 이후 영유권 주장을 하고 개척민을 보내기도 했으나 하와국 관원들에게 바로 참교육당하고 쫒겨나는 일이 반복되고, 누벨프랑스 주재 대한 공사관과 에콰도르 공사관도 계속 투닥거리고 있으나 나폴레옹도 이 문제는 대한 편을 들고 있다.

6. 대상주

6.1. 알제리

프랑스 국왕 루이 19세가 국내의 자유주의자들과 보나파르트주의자들이 벌인 1830년 7월 봉기1832년 6월 봉기를 진압하느라 외부로 군사력을 투사할 겨를이 없어 일단은 프랑스의 침공을 받지 않았다. 그러나 프랑스가 수에즈 운하 공사의 걸림돌인 바르바리 해적 토벌을 위해 알제리 침공의 필요성을 느끼던 중 원역사와 마찬가지로 나폴레옹이 이집트 원정 당시 알제리에 진 식량값 상환 문제로 프랑스 대사와 싸우던 알제리 태수가 프랑스 대사를 파리채로 때린 일이 구실이 되어 루이 19세가 전면침공하면서 시간차만 있을 뿐 원역사대로 프랑스의 식민지로 전락한다.

6.2. 이집트

원역사처럼 오스만이 임명한 이집트 총독 메흐메드 알리가 자립하여 사실상의 독립국이 된다.

6.3. 모로코

프랑스의 위협 때문에 알제리를 지원하였으나 프랑스가 모로코까지 공격해 전쟁에 패배하며 알제리에 지원하지 않는 조건으로 평화조약을 맺는다.

7. 오세아니아

7.1. 신홀란도

3부에서 영국이 개척을 시작한 이래 4부 시점에서는 호주 해안 지역은 전부 영국 식민지가 들어섰고 아직 내륙 진출은 안한 듯. 원역사와 달리 죄수보다는 자코바이트 같은 정치적 추방자나 일반인 개척민의 인구가 더 많다. 개척을 네덜란드령 바타비아와 가까운 북서부부터 시작했기 때문에 총독부 소재지는 여전히 북서부 조지타운이다.

7.2. 신질란도[71]

원역사와 달리 하와국 노예사냥부대가 남태평양을 들쑤시고 다닌데다 대한이 북태평양에서 유럽, 미국의 포경을 금지하면서 포경선들이 남태평양으로 몰린 나비효과로 남태평양 여러 섬들의 정세가 불안해졌고, 이에 마오리족 추장들이 스스로 영국과 조약을 맺고 영국 영토가 된다. 마오리족들이 영국군에 복무하는 대신 부족 자치와 토지 소유가 허락되는 등 원역사보다는 더 나은 조건으로 조약을 맺었다.

7.3. 나오에로 → 대한령 나오도

원역사와 달리 하와국 노예사냥부대 출몰 때문에 유럽 교역상에게서 구식 수석총을 사들여 무장하는 수준까지는 되어 있다. 1841년 1월 대한 순해국 탐사선을 타고 온 알렉산더 폰 훔볼트와 제자들이 이 섬을 조사하다가 인광석이 가득하다는 것을 알고 돌아와 재석에게 보고하고, 재석은 3부에서부터 그렇게 찾았던 나우루가 사실 나오에로였다는 것에 허탈해하면서 남부통제영 함대를 보내 나오에로를 복속시도록하여 나오에로는 대한령 나오도가 되었으며 인근 부아나바 역시 복속하여 대한령 부아도가 되었다.

7.4. 부아나바 → 대한령 부아도

원역사의 키리바시 바나바섬. 나오에로가 대한에 복속하는 과정에서 인근 부아나바도 대한에 복속하여 대한령 부아도가 되었다.

7.5. 미크로네시아

대한에서는 섬들이 별처럼 흩어져 있다고 하여 초성해라고 부르며, 나오도와 부아도가 대한에 복속하여 하와국의 습격에서 벗어나면서 공물로는 돌덩이만 바치는 것을 보고 캐롤라인 제도, 마셜 제도의 추장들이 단체로 대한을 찾아와 흥선제에게 스스로 복속을 청하여 대한령이 된다.


[1] 요동주 → 2도(요심도, 요동도), 부여주 → 3도(발해도, 부여도, 삼강도), 연해주 → 3도(연해도, 연흑도, 현토도), 속말주 → 1도, 영락주 → 1도[2] 흑룡강 이북 외만[3] 레나 강 이동 이르쿠츠크 주 극동 연방관구[4] 워싱턴 주, 브리티시 컬럼비아[5] 네바다, 유타 주[6] 남변(累蓀) → 누손주[7] 본래 작가가 흥녕(興寧)으로 설정했으나 4부 364화에서 설정을 변경하여 흥선으로 수정했다.[8] 즉, 대명공은 대명동 안에서는 폐하라고 불리고 있을 것이다.[9] 여기서도 절반 이상이 대남도 출신이다.[10] 다만 한 독자가 문의한 것에 대해 작가가 대답한 바에 따르면, 과거 급제자의 출신지 집계는 응시 지역을 기준으로 하기 때문에 실제 출신지가 외지였어도 내지에서 응시했으면 내지 출신으로 집계된다고 한다. 그래서 실제 출생지를 기준으로 하면 북구주인들은 대부분 영남에 유학하여 영남에서 응시하는 사람이 많다고 하므로 순위가 뒤바뀔 수 있다.[11] 사실 이는 재석의 지식수준이 너무 대단해서 경연관들이 부담스러울 지경인 것도 한몫했다.[12] 실상은 재석이 중종 건흥제의 몸에 들어가서지만 겉으로 보았을 때 유주에서 사실상 유배되있던 건흥제의 황자 시절 변화에 큰 지점이 올렝카와의 만남으로 알려져있고 이후 상희가 중전으로 들어오며 후궁의 신분으로 밀려났을 때에도 불만없이 받아들이며 소란을 일으키지 않았기에 성리학적 관점으로 보아도 올렝카는 유주인이라는 점을 제외하면 조선 선비들에게도 현모양처로써 높은 평가를 받았다. 때문에 3부 시점에서 아무도 '마트카'를 별다른 문제로 만들지 않았고 그대로 관습으로 굳어져 4부에 시점에 이른 상황이다.[13] 원역사의 화성과 다르게 둘레 10리의 팔각형 요새로 폭 60m의 해자인 축만제를 가지고 있다.[14] 군관은 공작 깃털, 사졸은 꿩 깃털.[15] 한제국건국사에 나오는 갑식 보총과는 작동 원리가 다르다. 그래도 이 명칭을 사용하기 위해 슈타인호프 작가가 친구인 윤민혁 작가에게 허락은 받았다고 한다.[16] 대한 측에서야 후금의 대칸이 누가 되는 별다른 손익이 없기는 하나 청나라가 후금 전체를 지배하는 것은 경계할 문제이다.[17] 개방적인 성향인 광덕제가 유독 여성 의무교육에는 반대했던 걸 두고 일부 독자들 사이에서 '광덕제 미래인 빙의자설' 떡밥과 엮어 미래에 벌어진 젠더갈등들을 겪고 학을 떼 그런 거 아니냐는 주장이 나오기도 했었다.[18] 김조순이 정체를 숨기기 위한 필명이다[19] 김좌근이 청나라 사기꾼에게 속아서 구입한 가품 쌍고검도 이 컬렉션에 추가될 예정이다.[20] 곱게 간 얼음이나 눈에 꿀을 뿌린 간식.[21] 과거 열기구가 처음 등장했을 때 일본인들이 이를 요괴로 여기며 공포에 질린 것과 달리 열기구 자체는 후송 관군은 물론 태평천국에서도 많이 쓰고 있기에 '자력추진이 가능한 열기구라니 대단하다' 정도의 반응을 보인다.[22] 이 에피소드가 나갔을 때 문피아 댓글과 대역갤에서 많은 독자들이 세계 최초로 증기기관을 만든 대한이 아직도 프로펠러를 못만들어서 영국에서 수입할 정도로 기술 발전이 정체되었느냐, 재석 없으면 곧 퇴보해서 망할 나라냐고 분노하는 의견을 달아서 작가가 기계공학은 영국보다 좀 뒤쳐지는 대신 화학은 대등하고 생물학은 영국보다 오히려 앞선다는 내용을 후속 연재분에 넣어서 겨우 수습했다.[23] 재석이 광덕제가 미래인이 아닐까라고 의심하게 된 또다른 근거로, 다칭유전에 대해서 듣기만 하고 깊이 파묻혀 있어서 1960년대가 돼서야 캐낼 수 있었다는 것을 모른게 아닐까라고 추정한다.[24] 원 역사와 달리 신불랑 수도인 뉴올리언스를 잇고 미국 남부를 통해 뉴잉글랜드 지역으로 올라가게 될 것이라, 작중 역사가 또 대격변을 겪을 것으로 보인다.[25] 명분상으로도 가장 최적인 곳. 다른 후보로는 서울 남산, 구월산, 금강산도 꼽혔지만 남산은 수도와 너무 가까워서, 구월산은 덕성도의 성지여서, 금강산은 선대 태황이 사고를 당한 장소이므로 기각되어 결국 백두산으로 결정되었다.[26] 환웅이 하늘에서 3천의 무리를 이끌고 태백산으로 내려온 것을 유래로 하여 고조선, 삼한, 발해, 고려를 계승하는 대한 역시 수행원을 3천으로 해야 한다는 대신 및 관료들의 강력한 주장으로 결정되었다.[27] 이는 곧 태산이 있는 화북을 수복하겠다는 국가 목표를 포기했다는 의미도 되기 때문에 추후 후송의 정세에 큰 영향을 줄 것으로 보인다.[28] 하와인들은 묘노를 안 쓰지만 한인 농장주들이 부렸다. 하와인들의 피지컬이 피지컬인지라 가장 쉽게 진압되었다.[29] 조홀국은 내부 반란 진압 경험이 많아 하와국 다음으로 쉽게 진압했다.[30] 이쪽은 흑인 노예들 일부는 주인들을 돕고 일부는 배상제회에 포섭되어 흑인들끼리도 싸웠다. 주인들을 도운 흑인들은 자유인으로 해방되고 상금도 받는다.[31] 대한 본국에서는 묘노들의 12%인 2만 4천명이 반란을 일으켜 대한 군경 전사자 300여명, 대한 민간인 사망자 1400명, 재산피해 5백만 냥, 그 외 속령들까지 합치면 약 20만의 묘노가 반란을 일으켜 10만명 이상이 사살된다. 일본에서도 인명피해 7000여명을 입었다.[32] 단, 영국군 파병 자체는 홍적의 난 이전에 통과한 것이다. 그 때는 왜 먼 나라 반란에 군대를 보내야 하냐는 반발이 많아 55표 차이로 간신히 통과했으나, 홍적의 난 이후에 투표했으면 여론이 뒤바뀌어 250표 정도 차이로 통과했을 거란다.[33] 재석이나 광덕제와 같은 회귀자라는 떡밥이 뿌려져있는 상태다.[34] 차이점이 있다면 당시 명나라 관군보다 후송 관군이 더 썩어있다는 점. 양응룡의 난 당시 명군도 조선 의병들이 실망했을 정도로 부패한 모습을 보여주었으나, 후송군은 더 심해서 외국군대를 끌어들여 무고한 양민을 습격해 포로로 둔갑시켜 팔아먹고 자기네 지역이 아니라고 타 지역민들에게 무고로 누명을 씌우는 등 단단히 맛이 간 상태이다.[35] 북구주 거주 한인들은 경상도로 가서 공부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36] 대한의 국기인 태극기를 기반으로 하와이 제도를 이루는 일곱 개의 큰 섬과 남십자성, 왕실의 본관인 하와이섬의 세 화산 마우나케아, 마우나로아, 후알랄라이를 형상화했다.[37] 하진교의 외숙부 카마우아와와 국사 윤호원은 하와첨사진으로 피해 태황의 도움을 받자고 제안했으나, 하진교는 시간이 오래 걸리며, 그 틈을 타 카네카폴레이가 어떤 암투를 벌일지 모르고, 대한에서 배운 무인정사계유정난의 사례를 들어 최대한 빨리 본궁으로 들이쳐 사태를 정리하는 방법을 선택했다.[38] 황제국을 칭해봤자 주변의 황제국들에게서 조롱을 받는 상황이었고, 오히려 번국이 아니라 차라리 대한의 직할령이 되면 대한에서 과거시험도 볼 수 있고 관세를 안 무니까 더 좋지 않냐는 여론도 상당히 있다.[39] 다만 각 성을 점유한 도통사들의 권한이 봉건군주수준이라 봉건제도도 혼재되어 있다.[40] 대한군은 재석이가 민사작전의 중요성을 철저하게 교육시켜서 넘어가지 않았으나, 지원병으로 구성된 미군은 인종차별과 종교적 열망과 약탈 욕심 때문에 알면서도 넘어가 아예 학살과 강간을 즐기는 지경이고, 유구군은 전공과 포로 욕심에 혈안이 된 후송관군이 제대로 정보를 알려주지 않아 무고한 민간인 마을 토루에 보병만으로 진압하다가 초전에서 참패하고 말았다. 영국군은 자기들을 환영하는 마을 촌장의 딸을 병사들이 윤간하고, 이에 촌장이 처벌을 요구하자 영국군은 형식적으로나마 문제를 일으킨 병사들에게 태형을 집행하려는데 오히려 후송군에서 더 막나가 감히 천병과 그 천병을 지원하러 온 군대에게 대들었으니 괘씸하단 이유로 대놓고 촌장을 매질하여 모욕을 주자 눈이 뒤집힌 촌장이 이웃 마을들까지 불러모아 영국군과 후송군을 습격하여 큰 피해를 입고 후퇴했다.[41] 예수불이 흘린 피와 예수불이 말세에 세상을 심판할 불을 상징한다고 한다.[42] 하지만 운남으로 쫓겨난 이후로는 황제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황태자가 호족에게 암살당해도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등 연맹왕국 수준으로 떨어졌다. 전제군주정의 탈을 쓴 연맹왕국.[43] 후송 관군과 태평천국군 모두 서나라의 아편상인을 보기만 하면 죽여버리고 아편을 빼앗아가버렸기 때문. 이 때문에 청나라에게 같이 태평천국과 후송을 정벌하자는 제안까지하지만 서나라를 같잖게 여기는 청나라에게 씹힌다.[44] 대신 그 자리는 청황실에 신자가 많은 일반 불교 사원과 후금의 국교이자 청에서도 우대받는 천주교 성당이 차지하였다.[45] 청나라와는 달리 몽골 귀족들의 영향력이 매우 크다. 각지에 영지까지 가진 대영주들이 존재하여 봉건제도 섞여있다.[46] 대한은 나폴레옹이 완충지대였던 루이지애나 지역에 신불랑국을 건국하면서 새로운 안보 환경에 접어들었고, 청은 귀주와 사천을 획득하면서 국력을 신장했지만 주적인 후송 역시 양광 지역을 획득해서 여전히 국운을 걸고 대치 중이다.[47] 당장 대한의 번국인 조홀국과 술루국에 각각 15만명, 4만명 정도의 일본인이 살고 있으며 건주 양국의 왜인팔기 역시 존속되고 있다. 왜군 용병의 명성 역시 여전해 누벨프랑스에서도 고용하려 할 정도이다.[48] 심지어 이중 1만은 막부 2중대나 다름없는 군마 마츠다이라번의 병력이니 실질적으로는 2만에 불과하다.[49] 특히나 원역사에서 존왕운동과 확장주의의 필두였던 조슈 번은 북구주와의 밀무역으로 얻는 수익 덕분에 친한파 번이 되었다고 한다.[50] 원역사에서는 도요토미 잔존 세력을 견제하기 위한 거점으로 지어졌기에 오사카 성에 밀리지 않는 규모로 만들었지만 본작에서는 도요토미가 일찍 몰락하였기 때문.[51] 미토 번은 히로시마 번에 밀려난 것으로도 보이나 함께 고산케로 묶여 언급되기도 하는 등 그에 준하는 대우를 받는 것으로 보인다.[52] '아모인'이라고 하면 대한에서는 원주민들을 지칭하지만 일본에서는 원주민은 에조라고 부르고 아모인은 일본에서 이주해서 아모국 호적으로 옮긴 일본인들을 지칭한다.[53] 일본에서는 기본세율 70%에 잡세도 있지만 아모국에서는 기본세율 50%만 내고 잡세도 없다.[54] 다만 카자흐 등의 타민족 출신이여도 북방계면 일단 준가르인으로 취급한다.[55] 고위에 오른 인물은 일본인 급으로 취급된다.[56] 다만 영국 동인도회사에서 왕자 한 명을 친영파로 포섭하려 했으나 그 왕자가 콜레라로 죽어버린 일이 있었다고 한다.[57] 오스트리아의 빠른 지원이 가능했던것은 철도망 이외에도 프랑스 혁명 시기 대가 끊어진 양시칠리아 왕위를 합스부르크 방계가 가져가는 것으로 거래를 해 동맹이었기에 가능했다.[58] 작중에선 트라팔가 해전을 대체하게 된다.[59] 작가의 댓글에 따르면 원역사 벨기에 왕국 초대 국왕 레오폴드 1세는 그리스 왕국으로 갔다.[60] 기병만 3천, 딸린 가족과 하인까지 합하면 5만.[61] 달리 말하면 나폴레옹은 대한에서 유방에 비유될 정도로 고평가받는 외국 군주라는 뜻이다.[62] 나폴레옹도 이를 의식하는지 대륙횡단철도를 미국에서 지척인 세인트루이스가 아니라 뉴올리언스로 연결하고자 한다.[63] 이 부분에 대해서는 대한 정서에 밝은 클로드 홍의 영향이 크다고 한다.[64] 이건 나폴레옹이 개선한 게 아니고, 본래 부르봉 왕조 시절부터 있었던 법이라고 한다.[65] 플랜테이션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현실에서 노예제가 없어진 후의 플랜테이션도 작중에서 묘사되는 것과 크게 다르진 않은 편이다. 오히려 국가가 감독하니 작중 시대에서는 선진적이라고 평가할 여지가 있긴 하다.[66] 여기서는 합중국 국가원수인 'president'를 '대통령'이 아닌 '총통'으로 번역하는데 원 역사에서 대통령이란 단어는 일본에서 만들어진 한자어를 그대로 사용한 거지만 여기선 대한이 일본을 거치지 않고 먼저 합중국의 존재를 인지하였기에 차이가 생긴 것. 재석은 총통이란 단어를 들을 때마다 원 역사의 그 인물이 떠오르는지 속으로 움찔거린다.[67] 유능하더라도 정치가 체질이 아니라서, 정치하는 능력만 떨어져서, 운이 안 좋아서 경쟁에서 밀려나는 경우는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68] 개변된 역사로 인해 기술발전은 빠르게 이루어졌지만 석탄•석유로의 연료 전환이 늦어 고래 기름을 얻으려는 수요는 폭발적으로 증가하는데, 공급이 따라가지 못하자 고래잡이가 기존 역사보다 크게 증가하면서 동양 바다까지 침범하는 것이다.[69] 다만 이들을 형식적으로나마 국가로 인정한다는 것은 이들이 미국의 침략을 받은 뒤 신불랑, 대한 등에 지원을 요청해도 내정간섭이 아니라는 의미와 같기에, 독자들은 한 치 앞만 보고 그 이상은 보지 못한 미국의 자충수가 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70] 하와국에선 영토를 하사한 것으로 여긴다. 하와국이 대한의 충실한 번국인 때는 실질적으로는 크게 다를 바 없으니 문제될 일도 없지만, 만약 훗날 하와국이 독립한다면 영토 분쟁이 생길수도 있다.[71] 新秩欄道