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몬태규 John Montagu | |
출생 | 1718년 |
영국 런던 하운즐로우 치지크 | |
사망 | 1792년 (향년 74세) |
영국 런던 하운즐로우 치지크 |
[clearfix]
1. 개요
샌드위치 백작의 문장 |
John Montagu, 4th Earl of Sandwich
영국의 정치인으로 4대 샌드위치 백작이다. 음식 샌드위치의 유래가 되는 인물이다.
2. 생애
1718년에 잉글랜드의 미들섹스에 있는 치지크(Chiswick)[1]라는 곳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영국 해군의 요직을 맡아온 뼈대 있는 귀족 가문이었다. 초대 샌드위치 백작인 에드워드 몬태규부터 3차 영국-네덜란드 전쟁 당시 솔베이(Solebay) 해전에 참전했다가 기함이 공격받아서 탈출하던 도중 익사했다. 아버지 에드워드 몬태규는 그가 4살일 때 급서했고, 10살(1729년)에 할아버지로부터 샌드위치 백작 자리를 이어받았다. 그 후 이튼 칼리지와 트리니티 칼리지에서 교육받고, 졸업 후 그리스, 튀르키예, 이집트 등을 여행하였다.1739년에 영국에 귀국하고 나서는 귀족원 의원이 되었고, 진성 휘그당파가 되어 로버트 월폴과 그의 내각을 맹렬히 비판했다.
뼈대있는 가문의 수장으로써 그는 핸리 펠햄 내각의 일원으로 영국 해군의 요직에서 승승장구하여 30살이 되기도 전에 영국 해군성의 일을 거의 다 했다. 1748년에는 제1해군경(First Lord of the Admiralty)이 되어 영국 해군을 총지휘했다. 정국 변동으로 인해 잠시 제1해군경직을 내려놓은 적도 있지만 그래도 도합 3기 15년을 제1해군경으로 지냈다. 제임스 쿡 선장이 하와이 제도를 '샌드위치 제도'라고 명명한 것도 그가 쿡 선장의 탐사를 추진했기 때문이다.
그는 평화시에는 유능하게 임무를 수행한 편이었지만, 미국 독립전쟁에서 미국-프랑스-스페인 연합군과 맞섰을 때는 정보 판단에서의 오류로 영국 해군이 압도적으로 우세하다고 큰소리치다가 한때 영국 함대가 영국 근방에서 제해권을 잃고 프랑스군이 영국을 침공할지도 몰랐던 위기를 자초했다.
본국수역에 위치한 전열함은 총 42척이며, 그중 35척 이상은 승무원들이 배치되었으며, 항시 출동 준비가 되어있습니다. 저는 부르봉 왕가의 해군[2]이 우리를 상대로 적대적인 행위를 하리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후략) 중요한 것은, 우리 해군은 부르봉 왕가의 해군에 비해서 훨씬 더 강하고 전투 준비가 잘 되어있다고 저는 확신하고 있습니다. #
샌드위치 백작은 의회에서 이렇게 보고했지만, 영국의 본국 함대 사령관이었던 어거스터스 캐팰(1725~1786) 제독은 이렇게 말했다.
귀관도 이해하다시피 우리는 싸울 준비가 되어 있지 않네. 30척의 우리 함선 중 10척 이상은 1년 이상 바다에 나가본 적이 없는 배들이고, 수병들도 어중이떠중이들 뿐이지. 이 상황에서 우리가 프랑스-스페인을 상대로 이길 수 있다고 믿는 건, 망할 놈의 샌드위치 밖에 없을 걸세.#
이는 그의 전쟁 상황에서의 전반적인 무능함과도 연결되는데, 미국과 프랑스-스페인 연합군을 광범위한 지역에서 상대하게 되어 전력 면에서 열세인 상황에서 전략적으로 전력을 집중하지 못하고 모든 곳을 동시에 지키려다가, 영국 본국 해역을 비롯한 모든 곳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는 상태로 연이어 위기를 맞으며 끌려다녔던 것이다.#
더구나 그는 영국의 본국 함대가 패배하고 영국 근해에서의 제해권을 상실한 상황에서도 오히려 승리했다고 주장하고 정보 통제를 시도했으며, 이 패배로 군법 회의[3]에 회부된 함장들과 제독들은 이구동성으로 전쟁 준비를 제대로 하지 않고 큰소리만 친 샌드위치 백작을 강하게 비난했다. 게다가 해당 재판에서 당연히 유죄 판결을 받을 것으로 예상된[4] 샌드위치 백작과 절친한 필리저 제독이 분명한 이유 없이 무죄 판결을 받으면서, 격분한 여론에 폭동까지 일어나서 샌드위치 백작 집의 유리창이 전부 깨질 정도로 샌드위치 백작의 평판은 당대에 이미 최악으로 떨어져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샌드위치 백작에 대한 분노 때문에 많은 유능한 제독들이 샌드위치 아래에서는 어떠한 공직도 맡지 않겠다고 선언하게 만들어서 전황은 더더욱 어려워졌다. 그럼에도 해군 대장 자리를 고수했지만 영국이 미국 독립 전쟁에서 패하며 고전하는 터에 샌드위치 백작이 끼어들어 또 졌다는 소문이 퍼질 정도였다. 결국 샌드위치 백작이 속한 노스경 내각이 붕괴된 이후에야 영국은 전황을 수습할 수 있었다.
1782년에는 모든 공직에서 물러나 고향으로 돌아가 은둔하며 조용하게 살다가 1792년에 세상을 떠났다.
3. 결혼 생활
그의 결혼 생활은 그리 행복하지 못했다. 그는 1대 페인 자작 찰스 페인(Charles Fane)의 딸 도로시 페인(Dorothy Fane)과 결혼해 자식[5]을 보았지만, 아내가 얼마 못가 건강이 나빠지고 정신병 증세를 보였다. 결국 아내한테 질려서 오페라 가수 마사 레이와 불륜을 벌였고 그녀와의 사이에서 최소 5명에서 9명까지의 자녀를 가졌다고 한다.그러나 마사 레이는 1779년에 살해당했다. 범인은 전직 육군 장교이자 현직 신부인 제임스 해크먼인데 해크먼은 마사를 짝사랑하다가 고백했지만 거절당하자[6] 분노를 품고 마사를 살해한 것이다. 해크먼은 흉기로 마사를 살해했을 때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에 쫓겨서 체포될 위기에 놓이자 자살을 기도했지만 경찰의 제지로 실패하여 체포되었고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아 교수형당했다.[7] 이 사건으로 몬태규는 심적으로 엄청난 충격을 받고 매우 슬퍼했다. 게다가 이를 계기로 기자들이 신나게 샌드위치 백작과 마사 레이의 불륜 관계를 보도하며 샌드위치 백작의 가정은 그야말로 완전히 박살나고[8] 세간에서 무능으로도 모자라 불륜이나 벌이는 백작이라고 신나게 까이면서 좋지 않은 유명세를 얻게 된다.
4. 음식 샌드위치와의 관계
음식 샌드위치는 그의 백작 칭호에서 유래했다. 잘 알려진 기원으로 그는 트럼프 도박을 좋아했는데, 트럼프를 너무도 좋아한 나머지 트럼프를 하느라 식사할 시간조차도 아까웠던 백작은 트럼프를 할때 자신의 손에 쥐고있었던 트럼프카드를 보고, 트럼프를 하면서 먹을 수 있도록 빵 사이에 고기와 채소를 넣은 식사를 생각해냈다. 샌드위치 백작은 자신이 생각한 음식을 하인에게 주문했고 다른 사람들도 "샌드위치와 같은 것(The same as Sandwich)으로 주시오" 라고 하면서 샌드위치라는 이름이 생겨났다. 이 기록은 1772년에 영국을 여행한 프랑스 역사가 피에르 장 그로슬리가 출간한 책에 나와 있다.그러나 이 이야기는 실화가 아니며, 훗날 그가 정치적으로 몰락하고 토리당이 집권했을 때 정치적 이유로 토리당이 휘그당파였던 존 몬태규에 인신공격을 가하면서 만들어진 것이라는 반론도 강하다. 실제로는 "밥 먹을 시간도 아껴가며 한 손에 샌드위치를 들고 공무를 집행했다"라고 한다.
20세기에 재연구를 통해 이 잘못된 사실이 밝혀졌으나, 아무래도 영국 외에는 그다지 알려지지 않은 듯하다. 실제 백작은 도박을 즐겨할 정도의 부자도 아니었고 취미는 아웃도어 스포츠였다고 한다.
사실 여부와는 별개로 일화 자체가 워낙 유명하다 보니, 이에 힘입어 존 몬태규의 직계 후손인 11대 샌드위치 백작 존 몬태규(John Montagu, 오른쪽 인물)[9]가 둘째 아들 올랜도 몬태규(Orlando Montagu, 왼쪽 인물)[10], 그리고 전문경영인 로버트 얼(Robert Earl)[11]와 함께 4대 샌드위치 백작에서 따온 샌드위치 브랜드 얼 오브 샌드위치(Earl of Sandwich)[12]를 창립하기도 했다. 2004년 미국 플로리다주 올랜도에 1호점을 연 것을 시작으로 디즈니랜드를 비롯한 미국 여러 곳뿐만 아니라 샌드위치의 본고장인 런던과 파리에도 지점이 있으며, 최근에는 한국에도 진출했다.[13] 공식적으로 추천되는 메뉴는 4대 샌드위치 백작도 좋아한 The Original 1762[14]이다.
[1] 현 런던 하운즐로우 치지크[2] 프랑스, 스페인을 의미[3] 승리했다고 주장한 전투에서의 패배를 이유로 군법 회의를 연 셈이 되어 국내외적으로 비웃음거리가 되었다.[4] 전장에서 벌인 추태를 생각하면 사형 선고도 충분히 가능한 상황이었다.[5] 이름은 아버지와 같은 존 몬태규. 아버지 사후 5대 샌드위치 백작이 된다.[6] 진짜 원인은 해크먼이 결혼할만큼 경제력이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때 몬태규는 빚이 많아서 금전 문제로 마사와 갈등이 심한터라 마사는 그와 헤어지고 돈을 아낌없이 주는 해크먼과 사귀었지만 해크먼의 경제력도 좋지 않다는 것을 알고 고백을 거절했다.[7] 마사 레이는 당시 영국에서 유명한 가수여서 그녀의 살인 사건은 몬태규는 물론이고 영국 전체를 충격받게 할 정도로 매우 파장이 크고 유명한 사건이었다. 그래서 해크먼은 광장에서 공개적으로 처형되었으며 많은 사람들이 그가 비참하게 죽는 걸 보고 기뻐했을 정도였다.[8] 특히 불륜을 알게 된 아내와 사이가 매우 나빠져 아내가 이혼은 하지 않았으나 별거하여 평생 서로 만나지 않았다.[9] 가업을 이어서 지금도 영국 백작이고 정치가로 활동하기도 했다.[10] 올랜도 몬태규는 제9대 웰링턴 공작 찰스 웰즐리의 장녀 아너 웰즐리와 결혼하여 슬하에 1남 1녀를 두었다. 참고로 아내 아너 웰즐리의 외할아버지가 프리드리히 폰 프로이센 왕자로 독일의 마지막 황제 빌헬름 2세의 넷째 손자이자 빌헬름 폰 프로이센 독일 황태자의 막내 아들이다.[11] 공교롭게도 성씨가 백작(Earl)이다.[12] 한국 매장 내에서는 '샌드위치 백작'이라는 이름으로 소개되어 있기도 하다.[13] 한국 공식홈페이지[14] 로스트비프, 체더 치즈, 홀스래디쉬 소스 조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