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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2-09 21:30:00

경인왜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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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인왜란
시기 서기 1590년 5월 ~ 1590년 10월
장소 조선
원인 오다 노부나가명나라 정복야욕
교전국 조선 파일:조선 어기.svg 일본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1920px-Goshichi_no_kiri_inverted.svg.png
지휘관 장조 경성군 이윤
대리청정 세자 이성
남도 수군통제사 이순신
오위군 총대장 신립
북방군 유극량
북방군 권율
오다 노부나가
하시바 히데요시
고니시 유키나가
가토 기요마사
병력 약 200,000명약 350,000명
피해 사상자: 40,000명사상자: 250,000명
결과일본의 패배. 오다 노부나가의 사망
영향오다 노부나가의 몰락과 하시바 히데요시천하인 등극
조선의 전라, 경상 양도의 초토화로 인한 섬라, 안남과의 교역. 장조의 왕권의 절대적 강화
조선의 보복원정 결의

1. 개요2. 왜란 전 상황
2.1. 조선
2.1.1. 왜란 대비에 대한 예상2.1.2. 작중 세균전에 대한 의견
2.2. 일본
3. 경인왜란
3.1. 왜군의 기습 선제공격3.2. 왜군의 연승과 하남벌의 패전3.3. 조선의 반격3.4. 경인왜란 개전 후 사건 연표3.5. 주요 전투
4. 결과5. 전라도 루트에 대한 개연성 논쟁6. 여담

1. 개요

2. 왜란 전 상황

2.1. 조선

2.1.1. 왜란 대비에 대한 예상

2.1.2. 작중 세균전에 대한 의견

2.2. 일본

이는 전후의 가톨릭 입장에선 최악의 사태가 될 수도 있는데, 가톨릭 주교가 전쟁에 자발적으로 적극 협력했다는 것이 조선에 알려지면, 기껏 자리를 잡을까 하던 천주교는 매국노 종교로 낙인찍히고, 대대적 탄압이 벌어져도 이상할 게 없다.
주인공은 가톨릭 덕분에 인도에서 수입하는 화약 재료들인 염초, 철 그리고 각궁용 물소뿔도 잔뜩 수입해 온 것이니 계속 보호하기로 하지만, 여차하면 조선의 천주교 박해가 더 일찍 시작될 수 있다. 정조처럼 일을 크게 벌이지 않고 넘길 수도 있지만, 정조 사후 벌어진 일들을 보면...

3. 경인왜란

3.1. 왜군의 기습 선제공격

3.2. 왜군의 연승과 하남벌의 패전

3.3. 조선의 반격

3.4. 경인왜란 개전 후 사건 연표

월일은 조선에서 사용하는 태음력 기준이다.

3.5. 주요 전투

4. 결과

5. 전라도 루트에 대한 개연성 논쟁

6. 여담



[1] 크기도 커지고, 철판을 두르고(프로토타입 당시에는 옻칠을 했지만, 주인공이 뒷목 잡으며 비용문제에 따라 철판으로 대체), 무기도 보강되었다.[2] 실제 역사와 달리 그리 전세에 큰 영향을 주지는 않았다.[3] 히데요시 휘하의 별동대와 다른 몇몇 소부대, 강릉에 주둔했던 부대를 제외한 거의 모든 병사들이 전사, 포로가 되었다.[4] 또한, 한양이 점령당하지 않았으니 성종의 왕릉도 도굴당하지 않고 무사할것이며, 조선 도공들이 일본으로 끌려가지 않아 현실의 일본 도자기의 토대가 되었던 조선 도자기 제작 기술이 유출되지 않았다.(이러면 일본의 도자기사업은 현실에 비해 훨씬 뒤쳐지겠지만, 조선은 일본 대신 유럽에 도자기를 독점적으로 팔아먹어 이득을 챙길 가능성이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