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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탑돌이는 불교 문화의 하나로 한국의 민속놀이이다. 사월 초파일에 사찰에서 봉축행사를 마친 다음 탑을 돌며 개인과 가정의 평안을 기원하는 풍속이다.예전에는 밤을 지새우며 탑돌이를 하였으나, 최근에는 해가 진 다음 연등(燃燈)을 들고 정근(精勤)하며 1~2시간 만에 마친다. 탑돌이는 초파일에만 하는 것이 아니라 각종 불사(佛事)를 회향할 때 하는 행사다. 또한 민간에서 전승되던 탑돌이는 이 불교의식에서 유래한 것이다. 한국민속대백과사전
2. 유래
불교에서는 석가모니가 입적하자 그 유골을 8개의 탑 속에 나누어 두었다 한다. 탑은 부처 사후 가장 대표적인 신앙대상이었으며, 이후 불상이 주요 신앙대상으로 자리잡은 후에도 그에 대한 신앙은 지속되었다. 탑신앙은 불교 전래와 동시에 우리나라에 유입되었으며 이로부터 불탑(佛塔)이 건립되었고, 재료에 따라 목탑·석탑·철탑(鐵塔)·전탑(塼塔) 등이 있다. 한국에는 석탑이 제일 많다.불교의 재(齋)를 지내거나 의식이 있을 때는 승려와 신도들은 불탑의 둘레를 돌면서 부처의 공덕을 찬미하고 소원을 빈다. 이때에 범음(梵音)·범패(梵唄)가 울려 퍼지고 때에 따라 삼현육각(三弦六角)도 등장했다. 달밝은 보름밤에 재가 끝나면 선남선녀들이 탑을 돌며 흥을 돋우기 위하여 춤을 추면서 자기 소원을 부처님께 비는 것을 잊지 않는다. 원래 탑돌이는 남몰래 염원을 하기 위한 것이었으나 사람들이 참가하게 됨에 따라 어느덧 즐거운 놀이로 변하고, 4월 초파일이나 중추가절에 모여서 노는 놀이로 변해왔다.
최초의 사료는 『삼국유사(三國遺事)』 「의상전교(義湘傳敎)」에 의상이 황복사에 있을 때 무리들과 함께 탑을 돌았다는 기록 및 「김현감호조(金現感虎條)」에 김현이 탑돌이를 하여 복을 받았다는 기록이다.[1] 이후 탑돌이와 관련한 사료는 무수히 많다. 사월 초파일은 고려 중기 이래 연등회가 민속화된 형태로 전승된 대표적인 날로 자리잡았다. 이에 대표적인 불교의식인 탑돌이가 성행했으나, 억불정책을 편 조선조의 기록은 영성(零星)한 편이며, 본래 종교의식의 장엄함이나 엄숙함보다는 지역민과 함께 즐기는 민속 축제로서의 성격이 강화되었다.
위키피디아 한국민속대백과사전
신앙의 대상이나 성소(聖所)를 도는 행위는 여러 문화권에서 보편적인 예경의식으로 널리 행해져왔다. 불교가 성립되기 전부터 고대 인도에서는 깨달은 자에 대한 예경으로 그 주위를 도는 요잡(繞) 의식이 있었고, 특히 오른쪽으로 세 번 도는 ‘우요삼잡(右繞三)’을 행하였다. 석가모니가 수행하던 시절에 마가다국의 왕이 그의 발에 예배하고 세 차례 돌았다는 기록이 전하고, 석가모니에 대한 예경의식에서도 처소에 가서 예배한 뒤 그 주변을 세 번 돌고 공덕을 찬미하도록 하였다.
이처럼 석가모니 재세 시에도 우요삼잡이 행해졌고, 불멸후에는 그의 유골을 모신 탑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져 탑돌이의식이 성행한 것이다. 탑을 도는 횟수는 3회를 중심으로 7회·10회·100회 등으로 행해졌는데, 〈무구정경〉에는 8·13·14·15일에 탑을 오른쪽으로 77회 돌면서 다라니를 77회 염송토록 하는 등 다양한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고대인도의 불탑인 스투파를 보면 둘레에 탑을 돌 수 있는 길을 마련해두고, 그 바깥으로 난간을 둘러 탑돌이 구역이 신성한 영역임을 나타내었다. 우리나라에도 신라유적에서 이러한 탑돌이길[塔道]을 볼 수 있는데, 불국사 석가탑 주위를 돌아가며 바닥에 깔아놓은 여덟 개의 연꽃 돌이 바로 그것이다. 이에 대해 탑구(塔區)라 부르며 팔방금강좌(八方金剛座)를 뜻하는 것으로 보기도 하나, 그 기능은 탑돌이를 유도하는 길임을 알 수 있다.
대상을 중심으로 도는 예불전통은 탑돌이만이 아니라 다양한 방식으로 전개되었다. 불탑보다 뒤늦게 조성되기 시작한 불상을 도는 의식과, 불보살을 모신 법당을 도는 의식이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요잡의식이 석가모니에서 탑으로, 그리고 탑에서 불상과 법당으로 확대되어간 것이다. 우리의 고대 사찰법당에서 보이는 3칸×3칸 구조는 사방을 12개의 기둥으로 두르고 내부에 4개의 기둥을 둔 회(回)자형인데, 이는 요잡의례를 전제로 건축된 것이기도 하다.
성스러운 대상 앞에서 도는 유형도 있다. 법당에서 의식을 행할 때면 불단 앞에서 원을 그리며 도는 단계가 으레 따르게 된다. 본래 법당의 불단은 벽에 붙이지 않고 불벽(佛壁)을 두어 불상을 돌 수 있었으나, 근대 이후 법당을 중수하면서 많은 불벽이 사라져 불상을 돌며 예불하던 전통이 점차 그 앞을 도는 의식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법당 안에서뿐만 아니라 탑이 없는 법당 앞마당을 도는 의식도 일반화되어 있다. 이를테면 사십구재 때 다른 공간에서 관욕을 마치고 법당을 들어서기 전에 법당 앞을 돌거나, 시련(侍輦, 불상이나 죽은 사람의 위패를 연 안에 두고 절 안을 세 번씩 돌아다니는 일)을 하여 성중과 영가를 모시고 법당을 들어서기 전에도 대규모 행렬을 이루어 돌게 된다.
이처럼 성스러운 대상 앞에서 도는 것은 대상을 도는 것과 같은 의미를 지니면서 신성한 대상을 중심으로 다양한 ‘돌기의 의식’이 성행해왔다.
〈삼국유사〉에는 “신라 풍속에 해마다 2월이 되면 8일에서 15일까지 경주의 남녀가 다투어 흥륜사의 탑을 도는 복회(福會)를 가졌다”는 내용이 나온다. 출가절에서 열반절에 이르는 뜻깊은 시기에 많은 대중들이 저마다의 소망을 담아 탑을 돌았던 것이다. 아울러 마당에서 행하는 탑돌이의 특성으로 인해 이른 시기부터 축제적ㆍ민속적 성격을 지니면서 오랜 세월에 걸쳐 설행되어왔음을 알 수 있다.
금강신문 기사
3. 내용
탑돌이는 우요삼잡(右遶三匝) 방식에 따라 이루어졌다. 우요삼잡은 고대 인도의 고귀한 사람에 대한 최고의 예경법으로 오른쪽으로 세 번 도는 인사법이다. 인도에서는 오른쪽을 더 상위로 본다. 동아시아에서는 왼쪽을 더 상위로 보고 있으나, 불교에서 유래한 우요삼잡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동아시아에서도 준행되었다. 불보살과 더불어 탑에 대해서도 우요삼잡을 하는 것이 기본이다.우리나라에서는 탑돌이가 단순히 삼잡에 그치지 않고 밤새도록 도는 방식으로 전개되었다. 또한 불교의식보다는 대중적인 축제와 기원의 장으로 기능하였으므로, 조선 후기 이래로는 보렴(報念)이나 백팔정진가(百八精進歌) 같은 남도민요풍의 노래를 부르며 탑돌이를 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탑돌이가 가장 성행한 시기는 단연 사월 초파일이다. 더구나 우리나라에서 1970년대 사월 초파일이 부처님 오신 날이라 하여 기념일로 제정된 이후로는 전국의 사찰에서 법요식 후 저녁 제등행렬을 마치고, 각 사찰에서 탑돌이로 회향하는 방식이 일반화되었다.
탑돌이는 경건한 수행으로서 예경의례 또는 민속 축제로 전승되었는데,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그 원형을 거의 상실하여 오늘날 예전의 탑돌이 방식을 정확히 살피기는 어렵다. 다만 법주사 팔상전, 원각사지(현재 탑골공원), 통도사 금강계단(金剛戒壇), 불국사 석가 다보탑에서 현재도 행해지는 탑돌이와 해인사의 정대불사(頂戴佛事)에서 그 흔적을 살펴볼 수 있을 뿐이다. 이 중 팔상전을 중심으로 십바라밀(十波羅密) 정진도(精進圖)를 도는 법주사 탑돌이는 1970년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 참가용으로 발굴, 재현되어 불교의식으로서의 장엄함과 대중적 축제 분위기가 결합된 예전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법주사 탑돌이에는 불교의식용 법구(法具)를 총동원하여 범패(梵唄)와 작법(作法) 같은 불교의식예술을 시연하며, 민속화된 회심곡류의 백발가, 몽한가, 권왕가와 같은 민요를 부른다. 법주사 탑돌이는 오늘날 속리산의 민속축제로서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한국민속대백과사전
4. 기타
- 탑돌이는 일본 오본의 축제인 본오도리 (盆踊り)와 유사한 점이 많다. 대표적으로 둘 모두 절의 경내에서 행해지는 불교 행사에서 유래하였다는 것, 탑과 같은 구조물 주변을 빙글빙글 도는 방식으로 이뤄진다는 것, 전래되는 과정에서 밤 늦게까지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며 이어지는 민속 축제의 장으로 변모하였다는 점, 그리고 청춘남녀들이 축제 중 눈이 맞아 원나잇 스탠드(...)가 이뤄져 과거 나이트 클럽[2]의 역할을 하였다는 점 등 많은 부분에서 매우 유사하다.
- 상술한 유사점들이 영향을 끼쳤는지는 몰라도, 일제강점기 시기 그 원형이 매우 많이 소실되었다. 1970년대에 이르러서는 전문가조차도 “그 자취를 감춘 지 60여 년이 된다.”고 하여, 일제강점기 초기인 1910년대에 상당수가 소실되었으며 현재 그 원형을 살피는 일은 매우 어렵다고 할 정도였다. 불교저널
- 탑돌이 축제는 1970년 경부터 월정사, 법주사 등을 중심으로 일부 사찰에서 복원되기 시작했지만, 아무래도 전승이 끊긴 지 60여년이 지난지라 과거와 같이 남녀노소가 춤 추며 즐기는 축제의 장이 되기보다는 비교적 경건하고 장엄한 불교 행사로써 기능하고 있다. 현재는 주로 불교 신자들이 참여하여 탑을 돌며 소원을 비는 등 그 종교적 기능이 과거에 비해 강화되었다.[3]
[1] 후자의 경우 탑돌이를 하던 도중 호랑이 처녀를 만나 서로 첫눈에 반하고, 성관계를 하였다고 해석된다.[2] 멀리 볼 것 없이 유명한 김현감호 설화의 내용을 보면 탑돌이 축제의 당시 특성을 알 수 있다.[3] 일본의 본오도리는 아무래도 일본 특유의 신불습합으로 마츠리 문화와 융합하거나 신사 앞마당에도 야구라를 세우는 등 민속종교와 융합하여 접근성이 좋아진 한편, 현대의 대한민국에서는 절은 불자들이 가는 경건한 곳이라는 인식이 있어 아무래도 과거와 같은 (혹은 본오도리와 같은) 페스티벌한 느낌을 내긴 쉽지 않다. 물론 다 떠나서 일제강점기 시기에 대다수 손실되고 현재는 탑돌이 행사가 복원된 사찰이 열 곳이 채 안되어 보편적 접근성이 떨어진 게 가장 큰 원인이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