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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불교의 성자
阿羅漢Arhat(산스크리트어, 로마자표기), arahant(팔리어).
한자문화권에서는 한자로 음차하여 아라한(阿羅漢), 흔히 줄여서 나한(羅漢)이라고 부른다.
팔리어로 '공경받을 자'라는 의미에서 유래했다. 깨달음을 얻어 능히 다른 사람들에게 공경받을 만하다는 의미로, 이를 한자로 번역하여 응공(應供)이라고도 하였다. 불교에서는 수행 끝에 번뇌가 소멸되어 더 이상 윤회하지 않는 경지에 도달한 사람을 가리킨다.[1][2] 원래는 부처를 가리키는 10가지 칭호 중 하나였으나 점차 뜻이 달라졌다.
본래, 불교가 형성되기 전 힌두교 전승에서 깨달음을 얻어 성품이 완벽한 사람을 뜻했다고 한다. 본디 부처도 넓은 의미에서 아라한이지만, 불교가 포교되는 과정에서 차츰 아라한이 붓다의 경지보다 낮은 의미로 전(傳)한 듯하다.
석가모니가 열반한 후 가르침이 흩어지는 것을 막고자 경(經)과 율(律)[3]을 모으려고 마하가섭이 석가모니의 제자들 중 아라한이 된 이들을 소집했다. 왕사성 인근 칠엽굴(七葉窟)에 그렇게 모인 이들이 약 500명이었다고 한다.[4][5]
불교(초기 불교) 성립 당시에는 수행자들의 최종목표였고 상좌부 불교에서는 여전히 그러하다. 상좌부 불교의 해석에 따르면, 아라한은 석가모니 부처가 설한 가르침을 따라 깨달았으므로 더 이상 번뇌로 시달리지 않고 윤회하지 않으며 그 깨달음은 부처와 다를 바 없으나, 그때까지 쌓은 공덕의 깊이가 달라 깨달음을 얻은 뒤 중생들을 제도할 수 있는 힘이 부처만 못하다고 한다.
석가모니가 열반한 뒤 세월이 흐르며 불교는 인도의 각지에서 서로 다른 부파로 갈라졌고 그 가르침은 어려워졌다. 서력기원 무렵, 기본 불교 부파들을 중생구제보다 자기 자신의 깨달음만을 추구하는 경향이 있다고 비판하여 대승 불교가 시작되었다. 대승 불교도 처음에는 기존 부파불교의 사원에서 같이 머물고 포살하는 등 어느 정도는 혼합된 양상이었지만, 시간이 흐르며 부파불교와 다른 또다른 불교로 정체성을 확립했다. (현재의 상좌부 불교는 인도 남쪽에 있던 분별설부의 후예이다.)
대승 불교에서는 이전의 부파불교, 또는 현 상좌부 불교와는 달리 아라한은 단지 더 이상 번뇌하지 않고 윤회하지 않을 만큼만 깨달았을 뿐 부처만큼 깨닫지는 못했다고 하여 깨달음의 경지 자체가 다르다고 가르친다. 그뿐 아니라 만약 아라한이 되면 해탈하여 더 이상 윤회할 수 없기 때문에 부처가 될 수 있는 기회를 잃는다는 이유로 아라한이 됨을 피하려는 경향도 있다.
본래 부파불교에서는 아라한의 경지에 다다르면 성욕이 소멸해서 몽정을 하지 않는다고 보았다. 그런데 대승불교의 기록에 따르면, 석가모니 사후 200여 년이 지나 마하데와(Mahadeva, 大天)라는 비구가 아라한을 두고 5가지 의문을 제기했다. 아라한이 되었다는 승려가 여전히 몽정을 하거나 괴롭다면서 탄식을 하는 등, '번뇌가 완전히 끊어졌다.'고 보기 어려운 경우가 보인다는 것이다. 마하데와가 5가지 의문을 제기한 사건을 한자로 대천오사(大天五事)라고 부른다. 붓다와 동등한 경지와 위상으로 대우받던 아라한의 권위가 흔들리기 시작했고, 아라한의 권위에 문제를 제기하는 세력인 대중부가 주축이 된 대승 불교 운동이 태동했다는 것이다.
반면 상좌부 불교 측에서 펴낸 논서 아비담마에서는 여전히 '아라한은 몽정을 하지 않는다.'고 설명한다.[6] 마하데와가 당시 아라한을 사칭하던 일부 비구들의 실상을 폭로하기 위해 설정한 가상인물이었다는 학설도 있으나, 어찌 되었든 이 대천오사 사건은 당시 상당한 논쟁거리가 되어 3차 결집을 하는 한 가지 원인이 되었다. 이렇듯 대승불교는 상좌부 불교와 비교하면 아라한을 많이 낮춰 본다.
대승불교에서는 부파불교와 비교하여 자신들이야말로 '더 크고 우월한 가르침'이란 뜻에서 대승(大乘)이라, 기본 부파불교를 '열등한 가르침'이란 뜻에서 소승(小乘)이라 칭했다. 대승불교에서는 이전 부파불교에서는 말하지 않은, 경지를 성취한 상태에서 어려운 중생을 구하고자 진력하는 보살이란 존재 또한 끌어들였다.[7] 다만, 독화살의 비유처럼 '내가 먼저 깨닫기도 전에 남을 도우려는 행위'가 수행에 장애가 되므로 이는 잘못이라는 부처님의 가르침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한편 대승불교에서는 '상구보리 하화중생(上求菩提 下化衆生)'이라 해서 깨달음과 중생구제를 함께 할 것을 강조하는데, 스님에 따라서는 이 한문 구절을 선후관계로 해석해서 '깨달음이 선행해야 올바른 방향으로 중생을 구제할 수 있다.'고 풀이하기도 한다.[8] 또한, 수행의 가장 기본 근저에는 '고통에서 벗어나려는 마음'이 토대가 되어야 하는데, 이런 마음을 품기는 생각보다 정말 쉽지 않다.
불경에선 수행자가 평상시에 어떤 수행을 했느냐에 따라 아라한과를 얻으며 6가지 신통력을 성취하는 경우도 있다고 설명한다. 또한 상좌부 교학에서는 재가자가 아라한이 되었다면 그 자리에서 다음 날 아침 해가 뜨기 전까지 출가해야 하며, 그렇지 못하면 바로 반열반에 든다고 본다. 반면 대승 전통에서는 아라한의 경지를 능가하는 재가자도 있다고 여기며, 이러한 사유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대승 경전으로 유마경이 있다.
우리말에는 "나한에도 모래 먹는 나한이 있다."라는 속담이 있다. 아라한인데도 신도들에게 공양을 받지 못해서 모래를 먹는다는 말인데, 높은 사람 중에도 고생하는 이가 있다는 뜻으로 쓰인다. 아라한의 여러 이명 중에 '응공(應供, 공양받을 만큼 존경스러운 자)'이 있는 것을 감안하면 역설적인 속담인 셈이다.
1.1. 십육나한
十六羅漢, Sixteen Arhats아미타경에는 석존의 학식과 품행이 뛰어난 제자(高足弟子)들 또는 대아라한난제밀다라소설법주기에는 부처의 명에 따라 영원히 사바세계에 왕래하며 정법을 지키는 성자들이라 서술하는 존재들이다. 이름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십대제자도 포함한다. 때로는 여기에 두 제자[9]를 더해 십팔나한(十八羅漢)이라 부르기도 한다. 대체로 알려진 이름들은 다음과 같다.
- 빈도라발라타자(賓度羅跋蘿惰闍, Piṇḍola Bhāradvāja)
- 가락가벌차(迦諾迦伐蹉, Kanakavatsa)
- 가락가발리타자(迦諾迦跋釐惰闍, Kanaka Bhāradvāja/Kanaka)
- 소빈다(蘇頻陀, Subinda/Abhedya)
- 낙구라(諾矩羅, Nakula/Bakula)
- 발타라(跋陀羅, Śrībhadra/Bhadra)
- 가리가(迦理迦, Mahākālika/Kālika)
- 벌자라불다라(伐闍羅弗多羅, Vajriputra)
- 수박가(戍博迦, Gopaka/Jīvaka)
- 반탁가(半託迦, Panthaka)
- 라호라(羅怙羅, Rāhula)
- 나가서나(那伽犀那, Nāgasena)[10]
- 인게타(因揭陀, Aṅgaja)
- 벌나바사(伐那婆斯, Vanavāsin)
- 아씨다(阿氏多, Ajita)
- 주다반탁가(注茶半託迦, Cūḍapanthaka/Kṣudrapanthaka)
1.2. 아라한을 소재로 한 작품
1.3. 관련 문서
2. 이름
[1] 윤회는 단순히 더 좋은 세상에서 태어나기 위한 과정이 아니다. 좋은 세상에서 태어나도 죽으면 다시 환생한다. 설령 좋은 세상에서 태어났더라도 완전히 해탈한 게 아니기 때문.[2] 법화경과 같은 일부 대승 경전에서는 아라한이 도달하는 열반의 경지를 보살과 부처를 추구하는 기나긴 항해에서 마주치는 일종의 '쉬어가는 섬'으로 보는 듯한 서술이 존재한다.[3] 경(經)은 부처의 가르침, 율(律)은 출가수행자가 지켜야 할 규율이다.[4] 여기서 아난다가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해야 했다. 석가모니의 가르침을 가장 많이 듣기도 했거니와 기억력이 대단했다고 한다. 다만 정작 본인의 경지는 아라한이 아니었기 때문에, 결집 전날까지 수행을 거듭한 끝에 겨우 깨우쳐서 참가할 수 있었다는 후일담이 전한다. 결집 전날, 도저히 깨달음을 얻지 못하고 탄식하며 잠자리에 눕는데, 머리가 베개에 닿으려 할 때 아라한과를 얻었다(...). 그리하여 마하가섭에게 자기가 아라한이 되었음을 인정받아 겨우 결집에 참석할 수 있었다. 또한 그 자리에서 마하가섭은 아난다의 잘못 10가지를 공개적으로 책하였는데, 석가모니에게 비구니를 받아들이라고 권한 것, 석가모니 열반 전에 "내가 열반한 뒤 소소한 계율은 파할 수 있다."라고 말했을 때 그 '소소한 계율'이 뭔지 묻지 않아 해석의 여지를 남겼다는 것 등이 중요한 질책사항이었다.[5] 아라한의 경지에 도달한 제자들은 더 있었지만, 붓다의 가르침을 전하고자 사방으로 흩어졌다. 본래 붓다를 따르는 아라한은 1천여 명 정도였고, 육사외도를 따르다 붓다에 귀의한 사리불과 목건련이 각각 1백명 씩을 더 데리고 왔으므로 흔히 '천이백 아라한'이라고 칭한다. 한국 불교의 예불문에 "천이백제대아라한(千二百諸大阿羅漢)"이라는 표현이 등장하는 것은 이 때문. 아라한이 이렇게 많았는데 십대제자라는 아난다가 붓다 생전에 아라한과를 얻지 못했음도 나름대로 놀라운 일이다.[6] 체내에서 생산된 정액이 오랫동안 배출되지 않을 경우 몸으로 다시 흡수되는 일은 생물학적으로도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로 인해 평생 몽정을 하지 않는 남성의 비율은 전 세계 남성 인구의 약 17%에 달하는 것으로 파악된다.[7] 원래 보살이라는 용어가 기존 불교계에도 있었다. 불교의 고문서에서는 석가모니가 깨달음을 얻기 전까지는 '보살'이라고 칭했다. 다만 기존 용어에 대승불교계가 새로운 의미를 넣었다.[8] 이는 한문에서 시간 순서에 따라 문장 성분을 배열하는 일이 매우 많기 때문에 발생하는 일이다. 이는 한문보다 정도가 덜할 뿐 현대 중국어에서도 여전하다.[9] 주로 가섭존자(迦葉尊者), 군도발탄 존자(軍徒鉢歎尊者)나 경우존자(慶友尊者), 빈두로존자(賓頭盧尊者).[10] 《밀린다왕문경》에서 인도-그리스 왕국의 왕 메난드로스에게 불법을 전한 나선존자가 이 사람이다.[11] 작중에서 아라한은 만다라의 수호자(석가모니)의 화신, 즉 환생자들 중에서 유일하게 <환생자의 섬>에 귀속되지 않고 외유할 수 있는 화신을 말한다. 처음 등장한 아라한은 니르바나 뫼비우스였으며, 그가 제 4의 벽에 먹힌 이후 유상아를 아라한으로 삼는다. 또한 언급된 정보로 보았을때 삼장법사 또한 그의 아라한이였던 것으로 추정된다.[12] 이 캐릭터의 중국어 표기는 韓艾拉. 하지만 이 캐릭터 자체나, 이 캐릭터의 전직들이 전부 불교에서 나온 용어들(제석천, 명왕, 아수라)이므로 이 캐릭터 또한 1번에게서 유래한 캐릭터라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