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밝은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6:30:31

명군이 되어보세!/개변된 역사/1부

이 문서에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문서가 설명하는 작품이나 인물 등에 대한 줄거리, 결말, 반전 요소 등을 직·간접적으로 포함하고 있습니다.


명군이 되어보세!
등장인물 (1부 · 2부 · 3부 · 4부 · 이재석 · 김상희)


1. 개요2. 목록
2.1. 조선
2.1.1. 정치2.1.2. 군사2.1.3. 기술2.1.4. 학문2.1.5. 식생활2.1.6. 경제2.1.7. 사회 · 문화2.1.8. 환경2.1.9. 주요 사건
2.2. 2.3. 일본

1. 개요

슈타인호프 작가의 웹소설, 명군이 되어보세!의 1부에서 작중 세상에 생긴 변화들을 소개하는 문서.

2. 목록

2.1. 조선

조선
朝鮮
파일:조선(명군이 되어보세)의 국기.png 파일:조선 어기.svg
국기 어기
위치 한반도, 부여주, 연해주,
대마도, 일기도
역사
[ 펼치기 · 접기 ]
개국 1392년 8월 13일
훈민정음 반포 1446년
경국대전 반포 1474년
수도 한성부(漢城府)
민족 한민족, 여진족 등 퉁구스인,
한족, 일본인
언어 중세 한국어
문자 한자, 국문
종교 유교(성리학, 국교),
불교, 미륵 신앙, 무속 신앙
정치체제 전제군주정
국가원수 조선국왕
국성 전주 이씨(李)
통화 저화

2.1.1. 정치

2.1.2. 군사

2.1.3. 기술

2.1.4. 학문

2.1.5. 식생활

2.1.6. 경제

2.1.7. 사회 · 문화

2.1.8. 환경

2.1.9. 주요 사건

2.2.

명군 또한 원 역사보다 훨씬 이른 시기에 조총으로 무장하게 된다. 사실 그 이전까지 조선의 기밀유지로 몰랐다가 조선의 여진 정벌 당시 여진족에게 잡혔다가 구출된 한인 농민들이 조선군의 조총 사용을 목격하면서 알게 된다. 신형 화통 정도로 파악된 조선의 신무기에 대한 농민들의 증언을 통해 높은 성능을 가진 것을 알고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이에 따라 칙사를 조선으로 파견해 조총의 견본과 숙련된 포수를 요구하게 된다. 물론 조선은 강선이 없고 미니에 탄이 아닌 구형탄을 사용하는 다운그레이드 버전을 바치고 사신단 휘하 무사들을 훈련시키는 것으로 기술유출을 최소화했다. 하지만 저 정도만 해도 황궁 뜰에서 시연을 한 명의 입장에서는 대만족이었고 즉시 조총 복제를 실시, 1,500정을 성능 실험을 위해 북원과의 전쟁에 배치된 부대에 보급한다. 그러나 일선 고위 장수들이 조총의 성능에 의구심을 표하고 이에 따라 조총은 치중대를 지휘하던 참장 장위덕 부대에게 전부 지급된다. 북원군의 공격을 받은 장위덕 부대가 장위덕의 지휘[46]와 북원군의 실책[47], 그리고 자연환경의 유리함[48]으로 십여 명의 사상자만 내고 100여명의 북원 병력을 사살, 군마 30여필 노획, 포로 17명을 얻은 대전과를 세운다.

이렇게 성과를 보이자 더욱 적극적으로 생산하고 있다.[49] 다만 단조 생산을 채택하여 약 300발 정도의 사격이 가능한 조선산과 달리, 경험 부족으로 주조 생산을 채택해 5~10발 사격 이후 폭발하는 등 내구성이 떨어진다. 어쨌든 조선의 공을 치하하고 조총 견본에 대한 포상[50]을 하고자 김보(金輔)와 이진(李珍)을 각각 정사와 부사로 임명한 칙사들을 파견하면서 조선으로부터 매년 1,000정의 조총을 조공으로 바치는 대가로 다른 조공을 모두 폐지한다.

조선의 여진 토벌 이후 조선에게 부여주와 연해주를 양도한다. 명 입장에서는 직접 통치하는 영토도 아니고, 조선이 통제하기에는 너무 방대해서 조선이 감당하지 못하고 약해질 것이라 판단하고 양도한 것.

2.3. 일본

대마도일기도가 조선의 영토로 넘어갔다. 대마도는 조선에서 직접 통치하고, 일기도는 종씨 일가가 통치하며 조선의 봉신으로 있는 간접통치 형태. 또한 일본에서 반 조선 연합군이 생기는 것을 막기 위해 형식적으로는 양국 모두에게 속한 영토로 되어 있다.

규슈 원정에서 쇼니군이 조총과 화포를 사용하는 조선군에게 말 그대로 무참히 박살나는 모습을 많은 사람이 목격했고 이를 보고 지옥에서 올라온 귀신들이라 생각한 이들도 있었다.[51] 조총의 위력을 목격한 일본 영주들은 조총을 손에 넣기를 간절히 원하지만 포르투갈 상인들이 도착할 때까지는 손에 넣지 못하였다.

규슈 원정과 이후 명종 때의 원정에서 야인 기병대가 규슈의 많은 민간인 마을을 무참하게 약탈하여 큰 피해를 입힌다. 기병 위주로 구성된 유목민의 약탈은 일본인들은 경험해보지 못한 일이었기에 이는 일본인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재석은 규슈 일대에 조선왕이 지옥에서 악귀들을 보내는 마왕 정도로 인식되고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리고 2부 시점에서 밝혀진 바로는 규슈 약탈로 삶의 터전을 잃은 일본인들이 고토 열도 해적단에 가담하면서 원 역사보다 고토 해적들의 세력이 커져 경인왜란 때 왜군이 전남을 바로 공격하게 하는 길잡이가 되었다. 여진족들은 규슈 약탈의 경험으로 일본에 대해 바다 건너의 약탈물이 가득하고 방비는 취약한 젖과 꿀이 흐르는 땅 정도로 인식하게 되었다. 왜군과 직접 충돌해본 적이 없고 방어가 취약한 촌락만 골라서 약탈했기에 왜군을 약해빠진 군대로 생각하고 있다.


[1] 이 때문에 유성룡은 성균관이 아니라 집현전으로 바로 들어갔다고.[2] 주로 노비들처럼 유력자들 밑에서 일하는 이들이며 의금부 관원들이 공작금으로 매수하여 이용한다.[3] 그리고 정말로 금위사의 항왜 첩보공작은 2506 여단 못지않게 처참하게 망했다.[4] 재석은 이런 노력드립을 싫어하지만 조선 사회에서 제일 먹히는 논리라 어쩔 수 없었다고 한다. 사실 노력드립은 환경이나 제도 탓을 하지 말고 노력으로 돌파하라는 게 핵심인데, 이들은 조선 사회에서 가장 축복받은 환경에서 시작하니 노력드립 들어도 할 말 없긴 하다.[5] 사실 세조가 직전법을 실시해 현직 관리들에게만 땅을 주고 일을 그만두면 곧바로 반납하게 되긴 했지만, 알다시피 세조 대에 대신의 98%가 공신이 되어버렸는지라...[6] 볼트액션 방식의 소총을 제작하려면 단순히 총만 만들면 되는 것이 아니라 탄피를 이용한 일정 규격의 탄환도 양산해내야 하는데 이건 구조를 알아도 당시 기술 상황상 실현하기 어려운 부분이다.[7] 2부에서 스페인 용병들이 조선 강선조총의 성능을 목격하고 조선군과 싸웠다간 사거리 밖에서 일방적으로 총알세례만 받겠다고 평한다. 즉 19세기 수준의 라이플에서 발사만 플린트락이 아니라 화승식이라고 생각하면 된다.[8] 이 때문에 명 사신단은 조총입수를 위해 빠르게 한양으로 향하고 조총을 확보하자마자 빠르게 귀국했다.[9] 물론 황제에게 바치는 진상품이기에 개머리판과 총열 그리고 총몸에 금과 은으로 용을 새겼다.[10] 강선의 위엄도 잘 퍼져 있어서 함부로 못 쓰게 한 지 2세대나 지난 2부 시점에서도 임꺽정이나 원전 등이 강선총이 없는 걸 아쉬워하는 장면이 나온다.[11] 1부의 다지와 2부의 서림. 다지는 여자의 몸임에도, 남자 다섯 명을 쏴죽이고 호랑이까지 일격에 잡으며, 서림은 노부나가에게 스카웃제의를 받고 예의 환생이라 불린다.[12] 재석은 이 수레 탑재 자모포에 대해 자주포란 호칭을 내린다.[13] 원 역사에서는 한 방으로 경주성을 함락시키는 소설보다 더 소설 같은 모습을 보여준다.[14] 후에 오-대-여-기-초-사-부-영으로 변환.[15] 이는 일본 한자표기로 중국군은 각각 배-연-영-단-사로 불렀다.[16] 아무리 무지한이라도 대중소는 알 것이므로.[17] 하필 무성왕, 즉 강태공인 이유는 강태공이 주무왕의 군사 역할을 하고 병법서 육도삼략을 썼다고 알려지는 등 무(武)와 관계가 깊다고 여겼기 때문이다.[18] 한때는 관우를 메인으로 할까 했다가 역사책에 X종이 유교를 견제하기 위해 관우 신앙을 들여왔다고 기록되는 것은 쪽팔리다고 생각해서 그만둔다.[19] 김유신, 을지문덕, 유금필, 강감찬, 양규, 윤관, 조충, 김취려, 김경손, 박서, 김방경, 안우, 김득배, 이방실, 최영, 정지, 하경복, 최윤덕[20] 그러나 얼마나 충심이 깊고 유능했어도 패장은 배향되지 않는다. 무묘 건립 때 계백을 배향하면 어떠냐의 의견에 재석은 계백은 황산벌 전투에 패했다는 이유로 기각했다. 다만 척준경을 못 올리는 것을 아쉽게 생각한다. 척준경이 무묘에 배향될 수 없는 중요한 이유가 있는데, 척준경은 여진과의 전쟁 이후, 한 간신의 앞잡이가 되어 왕에게 반역을 저질렀기 때문이다. 반면 최영은 조선 건국에 적대했지만 고려의 충신이라 해서 무묘에 배향됐다.#[21] 지금 있는 북한산성은 숙종 대에 축조한 것인데, 이 북한산성과 동일한 북한산성인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숙종 시대의 북한산성은 쌓고 나서 보니 무용지물이라는 평가를 들었기 때문.[22] 지방의 장수들은 얘기가 달랐다. 남쪽에서 왜구의 침략을 막아낸 장수는 제멋대로 개선을 하기도 했다. 이순신의 경우 한 번 출정하고 돌아올 때마다 개선식을 했는데, 이것은 수군의 대승을 강조하여 민심을 수습하기 위한 작전의 일환이었다.[23] 인종 초기에 쇼니 씨가 일기도와 대마도로 쳐들어온 양도왜란은 성공적으로 적을 격퇴했지만 방어전이라고 개선식이 열리지 않았다. 명종 때의 류조지 지원 파병은 여진족만 보내 후방 약탈을 한 거라 누구도 개선식 열어줄 생각은 안 했을 것이다. 인종과 명종이 무종보다 온화한 성향인 점도 있을 듯.[24] 이키섬.[25] 1부에서는 재석을 경호하는 금군이 눈을 치울 때 묘사된 바 있고, 2부에서 무종 때 만들었다고 언급되었다.[26] 실제로 가평에 추정 매장량 1억톤 규모의 흑연광산이 있다. 다만 품위가 높지는 않은 듯.# 경기도와 가까운 황해도에도 정촌광산 등 흑연산지가 여럿 있다.[27] 참기름은 매우 비싸지만 재석은 만인지상의 임금 아니던가. 그 비싼 참기름으로 치킨을 튀겨먹는 몸인고로 그냥 치킨 좀 덜 먹는다고 생각한다.[28] 원 역사에서도 이미 고대에 그리스 과학자 헤론이 초기적인 증기기관을 발명했지만 신전 문 여는 용도로나 쓰였고, 중세에서도 로마 제국이 외국 사신에게 보여줄 진귀한 볼거리 용도로 만든 바 있다.[29] 조선시대에는 고층건물이 없고 집들이 죄다 단층인지라 지면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 바로 궁궐이다. 그런데 거기에 피뢰침까지 달아 놨으니 한양 번개는 궁궐로 다 끌어들이는 꼴(...)[30] 사실은 임진왜란 직전까지만 해도 한양에서 복층 건물을 보기 힘들지는 않았다. 소설이 집필될 때는 밝혀지지 않은 부분으로 시대착오적 오류. 물론 그래도 궁궐 전각만큼 높은 민간건물이 존재할 수는 없었다.[31] 실제로 경주 인근에서는 '남석'이라 불리는 수정이 채굴되어 오랫동안 이를 이용해 고급 안경을 만들었다. 현재는 채굴이 중단되었다.[32] 당시에도 유리는 있었으나 투명도가 높지 못했다.[33] 창고에 오래 쌓아 놓은 천일염에서 간수가 밑으로 빠져나가면서 쓴맛이 줄어드는 것을 보고 깨달았다고 한다.[34] 이 고래국밥의 주재료는 기름을 짜고 남은 고래의 비계 찌꺼기이다. 1부에서는 고기가 부족한 조선 백성들에게 이 비계를 넣은 국밥이 좋은 별미가 되었지만, 2부에서는 부역을 하는 백성들에게 새참으로 제공될 정도로 흔한 음식이 되었다. 이 때문에 백성들 중에서도 "난 너무 기름진 건 싫어."라고 꺼리는 사람도 있다.[35] 돌고래도 포함. 수염고래만 이만큼 잡는 건 아니다.[36] 3부의 언급에 의하면 아직 살이 약한 어린 닭만 사용되었다고 한다.[37] 포계는 튀기는 것보다는 살짝 지져서 볶아 내는 방식으로 요리된다.[38] 원 역사의 영국에서도 전통적으로는 도로 건설이 교구나 장원의 몫이어서 부역을 통해 조잡한 수준의 도로들이 건설되었던 것이 전부였지만, 18세기 중엽부터는 사기업들이 통행징수권을 조건으로 하는 유료 도로들을 대거 건설했다.[39] 다만 노비종부법이 과연 노비종모법에 비해 양법(良法)인지는 논란이 있다. 자세한 사항은 노비종부법 항목 참조.[40] 보통 왕이 이런 쌍욕을 하면 실록에는 차마 들을 수 없는 말 정도로 기록되나 승정원일기에는 그대로 기록되니 이 일화는 후대에도 전해질 것이다. 그렇다면 현대에 무종 시대 배경의 사극에서 필수요소가 될 듯.[41] 이걸 시행한 무종부터 대군과 군은 다르다며 종친의 특권을 회수할 때도 제안대군과 진성대군은 그대로 놔뒀기 때문에, 일반 사대부들도 집안의 대만큼은 양보할 수 없을 것이다.[42] 다만 재석은 딱 한 번 썼을 뿐인데 이게 고문방법으로 유행됐다고 질색한다. 웃긴 건 정여립은 반대로 이걸 사용하면서 역시 무종대왕은 위대하시다며 찬양한다는 사실.[43] 마구잡이로 고문하는 게 아니라 심리적인 압박을 가해 실토하게 만드는 방식.[44] 1~3차는 문서 참고.[45] 명나라는 어차피 조선이 그 넓은 땅을 잘 관리할 수도 없을 것이고, 자신들이 가지고 있어도 아무 이득이 없으며, 여진도 토벌하게 하기 위해 조선에게 이 땅을 넘긴다. 조선이 이 땅 관리를 잘 못해서 국력이 약해지는 것도 바랬다. 실제로 재석이 빙의하지 않았으면 부여주와 연해주에 의해 조선의 국력이 약해졌을 수도 있다.[46] 당시 소수의 기병을 전부 척후로 보내는 등 불리한 상황에서도 보고를 듣자마자 차분하게 보급 수레들과 방패병들로 방벽을 완성시키고는 송나라 병서 속 노궁부대 배치를 원용하여 조총병들을 3열로 배치시켰다.[47] 해를 등진 상황에서 말이 일으킨 먼지를 더해 시야를 가리고자 서쪽으로만 진격했는데 도리어 명군이 화력을 집중시키는 요소가 되었다.[48] 서풍이 불면서 조총 발사 시 발생한 매연이 금세 사라졌다.[49] 실로 대국다운 생산력을 보이는데, 조선에서 300정 정도를 만들 때 3만 정이나 생산하는 중이다.[50] 각종 비단 3천 필, 은자 3천 냥, 산호와 비취 및 진주와 같은 보석 3상자.[51] 화포와 조총을 쓰는 조선군을 보며 염왕군(炎王軍)이라며 두려워하면서 도망쳐 온 쇼니 군을, 쇼니와 틈만 나면 서로 못 잡아먹어 안달이던 그 오우치 군 마저도 같은 인간으로써 불쌍하다며 사가 성 안으로 들여보내 준다. 그리고 지옥에서 온 염왕군이 자신들도 공격할까봐 두려워한다.

파일:CC-white.sv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문서의 r1302
, 2번 문단
에서 가져왔습니다. 이전 역사 보러 가기
파일:CC-white.sv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다른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 펼치기 · 접기 ]
문서의 r1302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