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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2-01 00:31:22

조형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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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군이 되어보세!
등장인물 (1부 · 2부 · 3부 · 4부 · 이재석 · 김상희)

1. 개요

대송 현종 소무제(大宋 顯宗 紹武帝).
웹소설 명군이 되어보세! 3부에 등장하는 후송의 4대 황제로 연호는 소무(紹武).[1] 3부의 메인 반동인물중 하나.

2. 작중 행적

1680년생으로 부황 영종(榮宗)융무제 조광훈이 요절하여[2] 겨우 4살의 나이로 제위에 올랐다. 너무 어리기에 모후 진씨가 섭정을 했으나 1695년 건주의 약탈 원정을 계기로 친정을 시작한다.[3]
청에게 보복전을 준비하며 군비를 확장하고, 숙조의 사망을 계기로 대한과의 국교 수립을 시도해 청을 불안하게 만든다. 그러나 대한에서 침공을 늦추기 위해 의도적으로 사신들을 붙잡아놓자, 더 이상 참지 못하고 25만 군사로 회수를 건너 청나라 원정을 감행하는데 해하에서 청나라 팔기를 대파하고 숙주성을 함락 직전까지 몰아붙이는 등 청에게 큰 타격을 입히고 위신을 세우는 선에서 만족하고 물러난다. 여기에 자신이 공들인 대한과의 국교 수립도 1702년 달성하나 그 직후 청의 보복 침공으로 신양에서 대패하고 사수 이북의 영토와 함께 후송군 15만, 백성 4만을 잃는 큰 피해를 입는다. 이후 대한-스페인 전쟁이 영국-네덜란드와의 전쟁으로까지 확전되자 간신히 육성한 수군 함대를 영란군이 고용한 마다가스카르 해적들에게 줄줄이 털리는 굴욕을 당하고, 전쟁이 끝난 후에는 콜레라까지 펴져 백성 수십만을 잃은데다가, 기껏 관계 개선에 성공했나 싶었던 대한은 건주 양국과 함께 심양회맹을 결성하여 오히려 건주와의 동맹관계를 더 공고히 한다. 기대했던 서나라 왕자의 난도 일어나지 않고, 서나라에서 후송으로 줄을 갈아타려 하던 안남국 정씨 왕조도 후송을 통수치고 그대로 서나라 줄을 유지하는 등 하는 일마다 실패하고 굴욕을 당한데다 나라 안에서도 지방 향신층이 예전 육조시대처럼 문벌귀족화 되고 있어 나이보다 20년은 더 늙어보일 정도로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
대한의 증기기관 추진 철갑선에 대응하기 위한 허장성세로 백여명의 수졸이 인력으로 외륜을 돌리는 대형 철갑선을 만들어 주산군도 앞바다에서 무력시위도 하고, 1716년에는 원역사의 강희자전에 필적하는 소무자전을 편찬하여 중화문명의 정통은 후송에 있다는 문화적인 정통성이라도 세우려 한다.
1719년 서나라가 건주-준가르 전쟁에 한눈을 판 틈을 타 서나라령 형주를 침공, 동정호 전투에서 패해 형주 지역을 상실한지 63년만에 형주 지역을 재장악하여 창업주 조승복 이래 가장 큰 영토를 확보한 황제가 된다. 이후에는 소무자전을 편찬하면서 관화를 버리고 수도 난징에서 쓰는 오어를 표준어로 채택하여 북벌을 사실상 포기하고 강남 왕조의 정체성을 새로 세우려는 모습도 보인다. 소무자전이 편찬 완료된 1728년에는 백과사전인 팔고전서 편찬 작업도 시작하는 등 문화적인 업적을 차근차근 쌓아올렸다. 광동왕의 반란으로 서나라에 내전이 벌어지자 양광 지역을 빼앗을 준비를 하는 등 군사적인 확장정책도 아주 포기한 것은 아니었으나 조카 홍사옥이 준비도 안됐는데 서둘러 서나라 침공을 시작했다 패배하고 포로로 잡혀갔다 거액의 몸값을 물고 풀려나는 사고를 치는 바람에 또 좌절을 맛본다. 1735년 팔고전서 편찬이 끝나자 할 일을 다 마쳤다는 듯 1736년 57세 나이로 붕어한다. 묘호는 현종(顯宗).

3. 평가

3부에서 예왕이 내부의 적이었다면 조형서는 외부의 적이라고 할 수 있는데 재석은 호적수로 존중했던 조형서가 자기보다 먼저 떠난 것을 진심으로 아쉬워한다. 중원일통을 위한 자신의 계획이 번번이 재석에게 가로막히면서 좌절하긴 했지만 객관적으로 봤을 때 업적이 부족한 황제가 전혀 아니다. 형주 수복으로 영토도 충분히 넓혔고, 소무자전과 팔고전서를 편찬해 문화적 기틀도 다졌으며, 건흥제에게 그토록 이를 갈면서도 조승복 이래 완전히 파탄났던 대한과의 외교 창구를 다시 열어 4부 흥선제 시기에 양국이 준우호국 수준으로 밀접하는 계기를 다졌다. 이 모든 것이 후송이 이후로도 100년 이상 더 버티고, 태평천국의 난으로 무너질 수 있었던 상황에서도 기사회생할 수 있게한 기반이었으니 창업주인 조승복을 제외하면 그 누구도 비기지 못 할 업적을 세운 명군이다. 하지만 소무자전을 편찬하면서 북경어 대신 오어를 기준으로 편찬한 것 때문에 북쪽의 건주 청나라와 문화적으로 완전히 분기되는 기틀을 만들어 후세에 중원일통의 가능성을 낮추었다는 비판도 후세 중국인들에게 받을 가능성이 있다.
그럼에도 건흥제에게 번번이 좌절당하면서도 자기 수명을 깎아가면서 끊임없이 도전하고 뭐든 해보려 했던 삶이 너무나 처절하면서도 인상 깊었기에 사망 후 서나라에선 조형서가 죽으며 "하늘은 이 형서를 낳고 어찌 또 건흥을 낳으셨나이까!"라고 외치고 죽었다는 헛소문이 퍼졌다. 본인은 유능한 군주이나 적국에 더 뛰어난 군주가 있고 나라 내부사정이 어지러워 번번히 좌절한 점이 작중 동시대인인 칼 12세를 연상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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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실제로는 남명의 황제 중 하나인 주율오의 연호이다.[2] 후궁과 성교 도중 복상사했다.[3] 10.5장 1화에 의하면 조형서는 4살에 즉위하여 건주가 침공한 1695년까지 13년간 섭정을 받았다고 하는데 13장 4화에 의하면 조형서는 1680년생으로 4살에 즉위하여 14년간 섭정을 받았다고 한다. 연도가 미묘하게 어긋나는데 설정이 꼬인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