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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25 15:14:27

명군이 되어보세!/등장인물/4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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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군이 되어보세!
등장인물 (1부 · 2부 · 3부 · 4부 · 이재석 · 김상희)


1. 개요2. 대한(大韓)
2.1. 역대 태황2.2. 황실
2.2.1. 재석의 가족
2.3. 소왕파2.4. 내관2.5. 조정2.6. 군인2.7. 기타 관원2.8. 심왕부2.9. 대명동2.10. 종교인
2.10.1. 천주교2.10.2. 불교2.10.3. 덕성도
2.11. 민간2.12. 유림2.13. 상인2.14. 발명가2.15. 연예2.16. 번국
2.16.1. 술루국2.16.2. 조홀국2.16.3. 하와국
2.16.3.1. 역대 국왕2.16.3.2. 왕실2.16.3.3. 하와인2.16.3.4. 한인
2.16.4. 유구국
2.16.4.1. 역대 황제 → 국왕2.16.4.2. 황실 → 왕실2.16.4.3. 신료
2.16.5. 불나이2.16.6. 사라왁 왕국2.16.7. 남월국2.16.8. 중월국
2.17. 미주
2.17.1. 한인
2.17.1.1. 관료2.17.1.2. 공화주의자2.17.1.3. 원씨 가문2.17.1.4. 태원백 가문2.17.1.5. 기타 민간인
2.17.2. 토인2.17.3. 백인
2.17.3.1. 종교인
2.17.3.1.1. 후기 성도 교회
3. 대아주
3.1. 청
3.1.1. 역대 황제3.1.2. 황실3.1.3. 신료
3.2. 후금 → 실위
3.2.1. 역대 대칸 → 칸3.2.2. 황실 → 왕실3.2.3. 신료3.2.4. 성직자
3.3. 대진국 → 진왕부3.4. 후송
3.4.1. 역대 황제3.4.2. 황실3.4.3. 조정 신료3.4.4. 군부3.4.5. 기타
3.5. 양광총독부 → 월왕부3.6. 태평천국(배상제회/태평도/홍서당)
3.6.1. 왕실3.6.2. 신료
3.7. 서3.8. 일본
3.8.1. 역대 쇼군/내대신3.8.2. 도쿠가와 가문3.8.3. 천황가3.8.4. 좌막파3.8.5. 도막파3.8.6. 기타
3.9. 아모국3.10. 대남국 → 분할
3.10.1. 역대 황제3.10.2. 황실3.10.3. 신료3.10.4. 기타3.10.5. 점파국
3.11. 월남국(북월)3.12. 섬라국3.13. 무굴국3.14. 벵골 칸국3.15. 준가르 칸국3.16. 아체 술탄국3.17. 페르시아3.18. 돌궐3.19. 파수둔
4. 대유주5. 대미주
5.1. 미주합중국
5.1.1. 역대 총통5.1.2. 정치인과 정부 인사5.1.3. 군부5.1.4. 스미스&스크루지 상회(양수상회)5.1.5. 빅 존과 리틀 존5.1.6. 기타
5.2. 신불랑국5.3. 맥고국
6. 대삼주7. 대상주

1. 개요

슈타인호프 작가의 웹소설 명군이 되어보세! 4부의 등장인물들.
실존 인물
실존인물을 모티브로 한 가상인물

2. 대한(大韓)

2.1. 역대 태황

조선 제21대 국왕
대한 제7대 태황
영종 원평제 | 英宗 元平帝
영종익문선무장의희경영철현효태황
英宗 翼文宣武莊義熙敬英哲顯孝太皇
출생 1763년
대한 황도 한성부
즉위 1782년
대한 황도 한성부 경복궁 근정전
사망 1829년 음력 6월 2일
대한 황도 한성부 경복궁 강녕전
재위 대한 태황
1782년 ~ 1829년
(음력 1782년 ~ 음력 1829년)
연호 원평(元平)
황릉 양주 숭릉(崇陵)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본관 전주(全州)
금(昑)
부모 부황 목종 영태제, 모후 남양 홍씨
부인 황후 파평 윤씨 }}}}}}}}}
조선 제22대 국왕
대한 제8대 태황
헌종 광덕제 | 憲宗 廣德帝
헌종경문위무명인철효태황
憲宗 經文緯武明仁哲孝太皇
[7]
출생 1795년
대한 황도 한성부
즉위 1829년 음력 6월 2일
대한 황도 한성부 경복궁 근정전
사망 1834년 음력 9월 17일
대한 황도 한성부 경희궁 침전
재위 대한 태황
1829년 ~ 1834년
(음력 1829년 ~ 음력 1834년)
연호 광덕(廣德)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본관 전주(全州)
순(峋)
부모 부황 영종 원평제, 모후 파평 윤씨
부인 추존 순원황후 안동 김씨, 황후 반남 박씨 }}}}}}}}}

2.2. 황실

2.2.1. 재석의 가족

2.3. 소왕파

2.4. 내관

2.5. 조정

2.6. 군인

2.7. 기타 관원

2.8. 심왕부

2.9. 대명동

2.10. 종교인

2.10.1. 천주교

2.10.2. 불교

2.10.3. 덕성도

2.11. 민간

2.12. 유림

2.13. 상인

2.14. 발명가

2.15. 연예

2.16. 번국

2.16.1. 술루국

2.16.2. 조홀국

2.16.3. 하와국

2.16.3.1. 역대 국왕
2.16.3.2. 왕실
2.16.3.3. 하와인
2.16.3.4. 한인

2.16.4. 유구국

2.16.4.1. 역대 황제 → 국왕
2.16.4.2. 황실 → 왕실
2.16.4.3. 신료

2.16.5. 불나이

2.16.6. 사라왁 왕국

2.16.7. 남월국

2.16.8. 중월국

2.17. 미주

2.17.1. 한인

2.17.1.1. 관료
2.17.1.2. 공화주의자
2.17.1.3. 원씨 가문
2.17.1.4. 태원백 가문
2.17.1.5. 기타 민간인

2.17.2. 토인

2.17.3. 백인

2.17.3.1. 종교인
2.17.3.1.1. 후기 성도 교회

3. 대아주

3.1.

3.1.1. 역대 황제

3.1.2. 황실

3.1.3. 신료

3.2. 후금 → 실위

3.2.1. 역대 대칸 → 칸

3.2.2. 황실 → 왕실

3.2.3. 신료

3.2.4. 성직자

3.3. 대진국 → 진왕부

3.4. 후송

3.4.1. 역대 황제

3.4.2. 황실

3.4.3. 조정 신료

3.4.4. 군부

3.4.5. 기타

3.5. 양광총독부 → 월왕부

3.6. 태평천국(배상제회/태평도/홍서당)

3.6.1. 왕실

3.6.2. 신료

3.7.

3.8. 일본

3.8.1. 역대 쇼군/내대신

3.8.2. 도쿠가와 가문

3.8.3. 천황가

3.8.4. 좌막파

3.8.5. 도막파

3.8.6. 기타

3.9. 아모국

3.10. 대남국 → 분할

3.10.1. 역대 황제

3.10.2. 황실

3.10.3. 신료

3.10.4. 기타

3.10.5. 점파국

3.11. 월남국(북월)

3.12. 섬라국

3.13. 무굴국

3.14. 벵골 칸국

3.15. 준가르 칸국

3.16. 아체 술탄국

3.17. 페르시아

3.18. 돌궐

3.19. 파수둔

4. 대유주

4.1. 루스국

4.1.1. 역대 차르

4.1.2. 황실

4.1.3. 기타

4.2. 서반아

4.3. 외수터국

4.4. 포뢰선

4.5. 도이치

4.6. 불랑국

4.6.1. 부르봉 왕가

4.6.2. 공화국 정부

4.6.3. 프랑스 제2제국

4.6.4. 기타

4.7. 잉글국

4.7.1. 역대 국왕

4.7.2. 왕실

4.7.3. 역대 총리

4.7.4. 정치인&정부 각료

4.7.5. 기타

4.8. 수배국

4.9. 포도아국

4.10. 양시칠리아 왕국

4.11. 내달국

4.12. 벌기국

4.13. 법왕국

4.13.1. 카타이 근위대

4.14. 이탈리아

4.15. 그리스 왕국

4.16. 몰다비아 공국

5. 대미주

5.1. 미주합중국

5.1.1. 역대 총통

5.1.2. 정치인과 정부 인사

5.1.3. 군부

5.1.4. 스미스&스크루지 상회(양수상회)

5.1.5. 빅 존과 리틀 존


이 두 캐릭터는 개그 에피소드와 함께 대한 외부의 상황을 보여주는 역할을 하며 3부의 장호원-고구 콤비의 뒤를 잇는 감초같은 호감 조연으로 인기를 끌고 있다. 또한 유색인종 동성애자 커플로 소문나있다는 점 때문에 21세기가 되면 둘을 소재로 한 퀴어 영화나 드라마가 나올 것이라는 드립도 자주 나온다.

5.1.6. 기타

5.2. 신불랑국[188]

5.2.1. 역대 황제, 집정관

5.2.2. 황실

5.2.3. 군부

5.2.3.1. 나폴레옹의 26 원수
5.2.3.2. 카리브 후작가
5.2.3.3. 기타

5.2.4. 관료

5.2.5. 정치인

5.2.6. 기타

5.3. 맥고국

6. 대삼주

6.1. 그란 콜롬비아

6.2. 브라질 제국

7. 대상주

7.1. 애집투[202]

7.2. 알제리

7.3. 모로코

7.4. 애토피아


[1] 실제 역사상 영조와 휘와 묘호가 한자까지 동일하다.[2] 그 망나니 태자조차도 사석에서도 꼬박꼬박 폐하라고 칭한다. 다만 재석이 빙의한 태손 이진의 경우 워낙 끔찍한 사고를 겪은 걸 감안했는지 할바마마라 부르는 걸 용인했는데, 책봉을 받은 후 폐하라고 부르자 좋아하는 티를 숨기지 않는다.[3] 그렇게 싫어해서 그런거겠지만 그가 전 유주를 적으로 싸우고 있으니 패망할 것이라고 본의 아닌 예언을 해버리게 되기도 했다. 그래도 나폴레옹이 유주무쌍이라 부르며 뛰어난 걸물이었다는건 인정하고 있다.[4] 무작정 도리 때문만이 아니라 네덜란드령 동인도까지 차지하면 감당하기 어렵다는 실리적 판단도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추정의 영역이라 이 행동에 대해서는 독자들 사이에서는 '동남아 전체를 대한의 세력권을 만들 절호의 기회였는데 그냥 호구짓을 한 거 아니냐'는 논란이 있었다. 그러나 이후 연재분에서 이와 관련된 전후 사정들이 좀 더 밝혀졌는데, 파병을 한 이유가 단순히 이념적인 이유 때문만이 아니라 나폴레옹 전쟁으로 일대 해역이 난장판이 되어서 역내 안정을 꾀해야 한다는 실리적인 이유가 있었고, 이때 대군을 동원하는 것을 보고 독립을 획책하던 번국 술루국이 뜻을 접었으며, 식민지를 돌려준 이후 네덜란드는 대한에 철저히 저자세를 취해서 탕갈라를 할양해주는 실질적인 이득이 있었다.(술루국이 딴 생각하는지는 알지 못했고, 탕갈라도 네덜란드가 알아서 골라 건네준거라 의도했다고는 할 수 없다.) 그리고 이 사실이 국제사회에 알려지면서 대한의 국제적인 신인도도 올라갔으니 남는 장사였다.[5] 그래도 완충국으로서의 신불랑국의 가치 때문에 묵시적으로는 신불랑국의 존재를 인정하고 있다가 신불랑국이 대한에 대해 계속해서 우호적인 태도를 보이고 결정적으로 대한이 불랑국에게 자국을 황제국 대한으로 칭해달라고 요청한 것을 불랑국이 거부한 일에 대해 열받아서 불랑국을 엿먹일 겸 말년에 태도를 바꿔 재석을 미주로 보내 정식으로 신불랑국을 승인했다.[6] 태조부터 흥선제까지 23명의 국왕 중 환갑을 넘겨 장수한 사람이 태조, 정종, 중종, 영종. 단 4명인데 태조는 57세까진 고려의 신하였으며 7년 재위후 강제로 왕위에서 내려오며 수명이 연장되었다. 정종은 겨우 2년만 하고 왕위에서 내려왔다. 원래 친왕이었다 34세에 즉위한 중종은 3회차 회귀자였다. 즉, 궁에서 태어나 태자로 교육받고 죽을 때까지 보위를 지킨, 태자 시절부터 주어지는 어마어마한 공부량과 임금이 짊어져야 할 살인적인 격무를 전부 소화하며 환갑을 넘긴 건 영종이 유일하다. 다른 임금들은 도저히 한 사람이 감당하기 힘든 격무 앞에 불혹 넘어가서부터 건강이 급격하게 상해 숙조, 목종처럼 40대에 죽거나 오래 버텨봐야 50대 후반이었다. 평생 술 한 잔 안마신 현종도 50대 후반에 붕어했으니 66세에 붕어한 영종의 평소 관리가 얼마나 철저했는지 알 수 있다.[7] 원 역사 헌종과 동일.[8] 태자 이진(재석)+그보다 손위인 효왕과 화원공주+재석의 친동생 순친왕+이복동생들 25명. 막내는 유복자다. 그나마 적장남 이윤 같이 영아기에 사망한 아이들은 뺀 게 이 정도 숫자이며, 서른아홉에 죽지 않고 오래 살았다면 대체 얼마나 더 낳았을지 알 수 없다[9] 미주 원씨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충성심을 잃지 않아 다행이었지 만약에 원한을 크게 품었다면 북미주가 위태로워질 뻔했다. 또한 유교적 관점에서 이것은 원균의 죄를 가문에 연좌하지 않은 장조에 대한 모독에도 해당하므로, 부황 귀에 들어갔다면 결국 폭발해 폐태자되었을 가능성이 높은 사건이다.[10] 나폴레옹도 이 이야기를 듣자 뭐 그런 막장 아비가 있냐며 재석을 위로해줄 정도로 경악했다.[11] 이때 쓸모없는 성현의 말씀 열두마디보다 쇠를 다루는 법 여섯가지를 배우는 게 더 낫다고 하는 조야를 경천동지하게 할 만한 폭탄발언도 한다.[12] 그러나 이때도 자신 때문에 어머니를 잃은 아들에게 사과하지는 않았다. 또 후술되는 것처럼 자식들을 모아 파티나 낚시대회를 열었지만, 정서적으로 교감하는 장면은 없었고 그 많은 자식 중에 그 누구도 아버지를 그리워하지 않았다. 이순은 본인이 내키는 대로만 아버지 노릇을 했으며 정말 책임감을 느끼고 돌보거나 키워야 하는 생각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13] 게다가 대담하게도 전자에게는 자기가 즉위 후에도 너희들을 버리지 않을거란 암시를, 후자에게는 즉위한 뒤엔 아첨꾼들을 버릴거란 암시를 주는 묘사를 하는데 완전히 상반된 묘사임에도 양쪽 모두 자기들에게 해주는 말 쪽이 사실일거라 믿고 기대감을 품는다.[14] 아무리 태손의 능력이 뛰어나고 명군의 자질을 보여도 유교가 국시인 대한에서 자신을 내치면 태손의 입지가 불안해지는 것을 정확히 알고 있기 때문이다. 대제국인 대한을 한 사람이 다스릴 수 없다는 생각에 더해 아버지의 애정으로 재석이 공부(자신은 쓸모없다고 생각하는)에서 적당히 손 놓길 바랬지만, 자신의 조언을 무시하고 힘든 길을 걷겠다면 원하는 일을 실컷 시켜주겠다는 속셈. 자신이 태황이 됐을 때 절대 대들 수 없고 일을 잘하는 노예 후계자가 생겼으니 좋아할 수밖에 없고 공을 세우게 해서 입지를 더 견고하게 만들어주려고 하는 것. 게다가 태황이 태손에게 기대를 걸기 시작하자 자신에 관심도 끄게 되었으니 더 싫어할리가 없다. 현실에 비유하자면 사우디아라비아무함마드 빈 살만 알사우드처럼 자신은 제위에만 있고 재석에게 실질적인 일을 다 시키려는 의도로도 보인다. 실제 김조순의 사위였던 순조도 효명세자에게 전권을 넘기고 본인은 유유자적 쉬려 들기도 했다.[15] 확실한 것은 광덕제는 태자 시절부터 재석에게 평범한 아버지가 다 그렇듯이 나쁜 사람으로 비춰지지 않으려고 노력한다는 것이다. 태자비를 죽게 만든 음주운전도 다른 사람들에게는 "미안하긴 한데 뭐 어쩔"이란 태도를 보여서 처가 장문 김씨를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에게 분노를 일으키고 적들을 만든 것과는 달리, 재석 앞에서는 성의있게 변명하며 쩔쩔매기까지 한다.[16] 그 전에 부황의 건강이 좋지 않다는 것을 알고 미리 국정 현안을 파악하는 밑작업을 했다.[17] 그래도 12년 동안 부자의 연을 맺고 살아온 세월이 있어서 그가 죽을 때는 진심으로 눈물을 흘렸다.[18] 작중 대한 왕실은 재석이 중간중간 재위하며 각종 사업체를 설립해서 내수사 수입원을 소작료가 아닌 사업 수익으로 바꿔 체질개선을 해놓았기 때문에 국고를 건드리지 않아도, 백성을 수탈하지 않아도 왕실 재산 선에서 어지간한 유흥비는 감당 가능했다. 게다가 국고에 손을 대더라도 당시 대한은 북태평양을 대한의 호수로 만들 정도로 최전성기를 달리고 있었기 때문에, 갑자기 궁궐을 여러 채 짓거나 어마어마한 사치품을 소모해대지 않는 이상에야 어느정도의 사치는 감당할만 했다. 여기에 나라 기둥뿌리를 뽑아 말아먹을 정도로 놀아대서 국가재정을 파탄낸 후송 태녕제와 아예 나라를 망조로 이끈 서나라 함녕제의 사례가 있었고, 그 이전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면 2대에 걸친 학정으로 나라를 멸망시킨 명나라의 만력제와 태창제의 사례도 있다보니 이런 주변국들에 존재했던 최악의 암군들과 워낙 비교가 되어 이 정도 일탈에는 관대해진 감도 있어 보인다.[19] 원 역사의 최단기 재임자는 약 9개월 재위한 인종이었으나 작중에선 역사의 변동으로 재석이 첫번째로 빙의한 무종 때 낳은 맏아들 인종(칭제건원 후 인조 추존)이 48년을 재위해 최장기간 임금 노릇을 했다.[20] 상희도 2부에서 '(무종 때 첫번째 빙의 인생에서는)조선에 온 걸 하나의 긴 꿈처럼 생각했다'고 말한 바 있으니.[21] 이게 진짜라면 작중의 의문스런 행동들도 잘 설명된다. 재석에게 말한 "쓸모없는 성현의 말씀 열두마디보다 쇠를 다루는 법 여섯가지를 배우는 게 더 낫다"고 하는 말도 원역사의 대한민국에서 조선은 전혀 실용적이지 못한 학문인 성리학밖에 모르는 우물 안 개구리라서 발전을 못해 망했다는 게 일반적인 인식이라 아무렇지 않게 저런 말을 내뱉은 걸 수 있다. 원씨 가문을 홀대한 건 빙의된지 얼마 안되어서 원사웅의 공적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 성리학적으로 원균 집안을 욕하는 게 무슨 의미인지 모르는 상태에서 원균 자손이란 것만 듣고 원균 후손이 호의호식하냐고 분개했을 수 있다. 조야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나폴레옹이 대한에 매각을 제안한 신불랑국 북부를 사는 걸 혼자 밀어붙이려 했던 것도 캐나다 지역이 자원의 보고라는 걸 이미 알고 있었으니 그랬을 것이다. 유구를 대한의 번국으로 편입시킨 것도 원 역사의 일본 제국의 첫번째 희생양이 유구였으니 일본이 유구를 차지해 본격적으로 제국주의 야욕을 드러내기 전 먼저 선수를 치기 위해 그랬을 것이고 유구를 대한이 차지하는 조건으로 아모국을 일본국에 넘긴 것도 아모국은 어차피 그가 살던 세계에서는 '일본의 영토인 홋카이도'였을테니 아모국을 일본에 넘기는 것에 대해 별다른 감정도 없었을 것이다. 금강산을 유독 좋아한 것도 그가 대한민국 사람이라 북한에 있는 금강산을 자유롭게 가보지 못 했을테니 그랬을 것이다. 여성 교육에 반대한 것도 그가 원래 살던 시기가 원역사 2020년대였다면(작중 재석이 조선 왕으로 빙의를 시작한 시점은 2017년이라 재석은 2010년대 후반 이후 격화된 대한민국의 젠더 분쟁에 대해 잘 모른다) 대한민국의 젠더 분쟁을 실시간으로 겪으면서 래디컬 페미니즘에 학을 떼여서 그랬을 가능성이 높다. 사후 재석의 언급에 따르면 생전 군대에서 단발령을 전면 시행할 것을 주장하기도 했는데 이것도 대한민국 국군에 입대하면서 삭발했던 경험에서 유래한 것이었을 가능성이 높다.[22] 소원이 뭐냐에 따라 다를 것이다. 재석은 "왕이 되게 해 달라"는 대단히 명확하고도 구체적인 소원을 빌었기 때문에 질릴 때까지 왕노릇 하게 해 주겠다는 천녀의 결정에 따라 계속 윤회하고 있는 것이다. 상희 역시 마찬가지로 "양한의학 구분 없이 마음껏 환자나 돌보고 싶다"고 했으므로 질릴 때까지 환자만 돌보는 윤회를 거듭하는 중이다. 그런데 광덕제 이순의 경우, 이 인물이 대체 어떤 소원을 빌어 황제가 되었는지, 아니 애초에 소원을 빌어서 황제가 된 건 맞는지, 천녀가 아닌 다른 루트로 빙의한 것인지, 전체적으로 의문투성이이다. 굳이 예를 들자면 이 인물이 (재석과 상희처럼 천녀에게 소원을 빌어 빙의하는 정석적 루트를 탔다는 가정 하에) 빌었던 소원이 "내가 역사를 바꾸게 해 달라"였다면, 본인 말마따나 재석이 다 해 놓았기 때문에 그는 바꾼 역사가 별것 없으므로 아무리 만족했더라도 윤회할 수도 있다. 그가 재석에 필적하는 나비효과를 불러일으킬 사건을 일으킬 때까지 계속.[23] 여담으로, 재석이 소원을 빌 때 사용한 물건은 연적이었고, 상희가 소원을 빌 때 던지면서 사용한 물건은 벼루였으므로, 광덕제 이순(에 빙의한 인물) 역시 문방(文房) 중 뭔가를 통해 천녀를 불러냈을 가능성이 있다. 연적은 먹을 갈 때 물을 공급하기 위한 일종의 물통이요, 벼루는 먹을 가는 판이므로, 먹이 있으면 깨끗하게 연적에서 벼루에 물을 따라 먹으로 간다는 인과관계가 성립된다. 따라서 이순에게 빙의한 사람이 건드린 물건은 일 가능성이 높고, 이후에도 유사한 현대인이 등장할 경우 붓, 종이, 문진, 종이 등 문방과 엮일 가능성이 있다.[24] 원평제의 동남아 정책이 대표적이다. 서양 국가라면 나폴레옹 전쟁의 여파로 무주공산이 된 네덜란드령 동인도에 세력을 뻗치거나 일정한 이권이라도 요구했을 텐데 함대를 파견해 지켜준 것도 모자라 아무런 대가도 요구하지 않고 깔끔히 물러났다. 작중 유럽에선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이었고 작품 외적으로 답답해하는 독자들도 있었으나 이를 통해 대한은 그 영국이 '대한은 먼저 공격하지 않으면 전쟁을 벌이지 않는다.'고 단언하고 우호 관계 유지에 집중할 정도로 다른 제국주의 국가들과는 다르다는 인식을 세계에 심어주었다.[25] 작중에서도 이는 "광덕제가 역대 태황의 유지를 깨고 독립국이던 유구국을 병탄했으니 대한이 예전 자신이 했던 약속을 깨고 힘으로 밀어붙일 수도 있다"며 섬라와 대한의 교섭 문제에 개입할 것을 주장하는 증국번의 발언으로 입증되었다.[26] 유구의 독립을 빼앗은 뒤 행보를 보면 자기 허영심 만족시킨 뒤 후속 조치는 조공 면제 하나 뿐. 그마저도 동군연합에선 자기가 자기에게 조공을 바치는 꼴이라서지 유구 인심에 대한 고려가 아니었다. 한인들의 범법 행위를 철저히 단속하고 배상하며, 유구 왕실을 꾸준히 챙겨 대한의 번국이란 국체에 만족하게 만든 건 재석이었다. 1년 2회 연공을 바치고, 200여년 넘게 대한군을 주둔시켜 사실상 번국이나 다름없는 위치였던 유구라서 백성들이 느끼는 박탈감이 약했고, 유구 지도층들도 올 것이 왔구나라는 마인드로 비교적 큰 저항 없이 받아들였기 망정이지 다른 소국이었으면 큰 소요 사태가 일어날 수 있었다. 400년간 성공일변도만 달리며 국수주의와 자국 우월주의가 뿌리 내리고 분리주의와 공화주의가 도전해오는 19세기에 이런 무책임한 리더쉽은 설령 본인이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폭주와 충돌을 불러올 가능성이 높다.[27] 실력이 더 좋은 일반 악공은 현지의 성격을 감당 못할 것이고, 현지에게 어른으로 대접받는 몇 안되는 인물이면서도 바이올린 연주도 할 줄 아는 사람이 화원장공주 뿐이기 때문이다.[28] 재석이 빙의하지 않았다면 형은 죽었을 테고, 그럼 이운은 대신 태손에 책봉되었겠지만 공부에 관심 없는 성격 때문에 조부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해 스트레스 받거나, 아예 계모 박씨의 야심이 실현되었을지도 모르니 사실상 재석의 빙의에 따른 수혜자다.[29] 공부를 그렇게 싫어하면서도 낚시에 관한 구절은 동서양을 가리지 않고 줄줄 꿰고 있는 걸 보면 정말로 머리가 나쁘진 않다. 그러면서도 낚시 하면 동양권에서 가장 먼저 떠올릴 태공망에 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 등 오해받을 일을 피할 식견 정도는 가지고 있다.[30] 독자들은 굳이 이런 발언이 나온 것을 보면 한 집에서 자란 홍천귀복과 이세연이 눈이 맞아 사고를 치게 된다는 복선 아니냐고 추측하고 있다.[31] 실제 박지원은 아들을 셋만 두었다. 즉 4남 박종선의 자손은 가상인물이다.[32] 다만 아나스타샤를 옆에 두려 한 건 내명부 정치싸움보다는 그냥 아샤가 너무 귀여워서 곁에 두고 싶어서란 이유가 더 컸다. 본인이 프랑스어를 못하다보니 아샤가 한국어를 할 줄 알기 전까진 크게 욕심 안내고 권씨쪽에 넘겼다.[33] 흥선제의 자식들 중 개혼인데다, 일국의 세자빈으로 시집가는 것이니 사실 당연했다.[34] 이걸 보면 광덕제가 여색에 쓴 돈이 상당히 많은 모양이다. 심지어 그나마 아들이니 챙겼지, 딸을 낳으면 나 몰라라 한다고 하니 사생아는 더 많을 듯.[35] 조부인 원평제부터가 후계자가 아닌 황손들은 그냥 쩌리 취급했다. 그나마 화원군주만 첫 손주 버프로 좀 예쁨받았을 뿐 나머지는 차별 대우해 태손인 재석이 창경궁 전체를 마음껏 사용하며 지내는 동안 이정 몫으로 주어진 공간은 겨우 낙선당의 방 한 칸이었으며 아버지 광덕제는 재석에게만 관심을 좀 보였지 총애가 식은 김 선시 소생인 이정에게는 관심을 전혀 보이지 않고 대궐 밖에 자주 나가면서도 단 한 번도 그를 찾아가지 않았다.[36] 원평제가 정을 특별히 총애하지는 않았지만 그나마 아들보다는 챙겨줘서, 분가할 때 재산은 넉넉히 주었다.[37] 원평제의 진짜 친동생 수복공주보다도 더 남매같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이다.[38] 그동안 몇차례 혼담이 들어와도 맏손녀를 어딜 감히 그런 집안에 시집보내냐고 걷어차버렸다고 한다.[39] 첫 언급 시에는 권세현이라고 나왔었다.[40] 어릴 때부터 홀어머니 슬하에서 자란 데다 모친이 태황의 절대적인 비호를 받는터라 반항할 수도 없었다.[41] 나현이 직접 조모에게 같이 데려가게 해달라고 요청하였는데, 미주 출신인 김씨를 데려가 미주 백성들의 지지를 올릴 목적이었으며 각각 북인, 동인 계열 집안 출신인 최씨와 송씨를 데려가지 않으면 각 계열에서 불만을 품을 수 있고 또 태손이 현지에서 여색을 탐하지 않게 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42] 2부에서 원 역사의 선조가 되었어야 하는 하성군이 왕이 되지 못했고 임해군의 역모로 후손들이 멸족되면서 원 역사의 하성군의 후손들인 인조 이후의 조선왕들과 종친들이 아예 태어나지도 못하게 되었다. 때문에 이 세계에서는 원 역사의 흥선대원군 이하응은 물론 아들인 고종 이명복도 존재하지 않는다.[43] 작가에 의하면 특정 연예인을 생각해두긴 했으나 상희와 올렝카가 실존하는 연예인들인 권나라, 마리나 본다코와 닮았다고 생각없이 말한 것이 당사자들에게 민폐라는 생각이 들었기에 권나현의 모델이 누구인지는 밝히지 않겠다고 한다. 독자들은 김유정 등으로 추측하고 있다.[44] 신혼 당시 재석의 키가 150cm 정도였는데 권씨의 키는 160cm도 넘어서 재석은 자신보다 눈높이가 한참 높은 권씨를 더 부담스러워한다. 어린 나이에도 이 시대 성인 여성들보다 큰 키이기에 재석은 권씨가 다 크면 상희나 올렝카만한 장신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 성인이 된 후 재석이 키를 역전했는지는 언급되지 않았는데, 재회한 나폴레옹이 이제는 아내보다 키가 크냐고 농담 섞인 질문을 건네자 정확히 대답하지 않는 것을 보면 성인이 되어서도 재석이 더 작을 수도 있다.[45] 사실 아주 근거없는 건 아니고, 상희의 신분이 환생할 때마다 계속 상승했기 때문이다. '지난번엔 정실부인+재취였으니 이번엔 처음부터 정실이겠지?'였는데...[46] 그러나 천녀는 상희를 만나게 해주겠다고 한 번도 약속한 적이 없으며 오히려 상희가 언급될 때마다 둘이 만나는 건 하기 나름이라고 말했다. 그걸 다 들어놓고도 재석 혼자 멋대로 기대해놓고 실망한 것이다.[47] 권씨의 입장에서는 귀엽다고 느낄 수밖에 없다. 겉보기에는 자신보다 2살 어린 정수리도 내려다보이는 작고 귀엽게 생긴 꼬마이고, 그녀에겐 다행스럽게도 자신이 원했던 상대가 아니어서 실망한 줄은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아직 여자를 대하기 어색해하는 것이라고만 생각한다.[48] 연애결혼이 아닌 이상 이 시대까지도 신랑신부는 결혼식 날 처음 보는 것이 대한 법도지만, 아나스타샤의 경우에는 특수성을 인정받아서 약혼자 신분일 때부터 만난다. 처음엔 미행(微行)하듯 마중을 갔지만 '누국공주가 외간남자를 만난다'는 헛소문이 나버리는 바람에 이후로는 태자 신분을 드러내고 나가게 된다. 덧붙여 소문을 퍼뜨린 이들은 금위사 방문을 받고 옻장 노역 7년에 처해졌다.[49] 유럽 사교계의 살벌함을 감안하면 당연한 결과다. 여전히 여성들의 대외 활동이 자유롭지 않은 대한에 비해 외유가 한결 자유로운 대신 평생에 걸쳐 스스로를 뽐내고 사교계에 적합한 인사임을 인정받아야 하며 살짝이라도 삐끗하면 즉시 뒷담화 대상이 된다. 똑같은 실책이라도 남녀간 리스크 차이가 현격한 것은 덤. 그런 유럽 사교계의 정점에 있는 왕족이었으니 대한 후궁들의 어설픈 견제는 이빨도 들어가지 않을 수밖에.#[50] 다른 후궁들이 선시로 시작하고 자녀를 생산하고 나서야 승작된 것과 달리 처음부터 재인 품계를 받고, 후궁들은 보통 생략하는 입궁 직후 웃어른들께 인사하는 절차도 거쳤다.[51] 표면상 이유는 연장자란 것이지만 실제론 후송 황실을 배경에 둔 조씨도 괴롭히며 텃세를 부린 경화 사족 출신 후궁에게 교육 담당을 맡길 순 없다는 의중이 깔려 있었다. 황태자비인 아샤 자신은 중립을 견지해야 하기에 직접 나설 수 없었고.[52] 실존인물 콜레스타는 야카마족 추장인 카미아킨의 다섯 아내 중 하나였다. 치료사(의사보다는 샤먼에 가깝다.)이자 직접 곤봉을 들고 전장에서 싸우기도 하는 여전사였다.[53] 현실이고 창작물이고 다른 인종엔 그러지 않으면서 유독 인디언 인명만은 직역해버리는 차별(존 베이커를 빵굽는 요한으로 직역해버리는 수준의)이 공공연하고 명군이 되어보세의 인디언 등장인물도 여태 그런 전철을 밟아왔기에 이름이 공개되기 전까지 설왕설래가 조금 있었는데, 다행히 실존 인물에 모티브를 가져와 제대로 지었다. 실제 인물은 1800년 생이니 무려 한 세대쯤 늦게 태어난 셈.[54] 이때 부축한 게 아니라 아예 들고 가버리면서 이창의 발자국이 사라졌고, 배척받는 처지라서 평소에 기척을 숨기고 다니는 데에 익숙했기에 추적에 능한 미주 병사들도 수색이 오래 걸렸다.[55] 이창이 은혜를 갚기 위해 일을 도우려 했는데 신분이 신분이라 노동을 해 본 적 없다보니 민폐만 끼쳤고, '아무 일도 안 해도 되니 대신 내 신랑 해라'라는 식으로 말한다. 이를 보면 어차피 일은 자기가 잘 하니 일은 잘 못하고 나약하지만 병은 안 걸리는 한인 남자를 기둥서방처럼 두고 살 생각이었던 듯.[56] 수색대가 마침내 이창을 찾아낸 것이 조난 후 8일이나 지난 시점이었으니 그녀가 없었다면 산속에서 어떻게 되었을지 몰랐다.[57] 수색대가 들이닥쳤을 때에도 성관계를 하는 중이라서 민망한 상황이 되었다고 한다.[58] 그런데 재석의 우려와 달리 의외로 선배 후궁들은 딱히 반발하지 않았다. 바로 그 한미한 출신 탓에, 애초에 견제 대상으로 여길 가치조차 없다고 여긴 것.[59] 고향은 심양이다.[60] 3부 때 태황태후가 뽑은 후궁들도, 평범 이상이긴 했으나 절색까지는 아니었다.[61] 원래 황녀들의 결혼은 다 강혼이기 마련이었지만, 본인 세대부터는 전례가 없던 국제결혼이 이루어져 이복언니들이 일국의 군주가 될 사람을 남편으로 맞았기 때문에 이야기가 달라졌다. 청태자비 정현공주야 황후가 낳은 적녀이니 한 수 접어줄 수밖에 없다 쳐도 같은 후궁 소생인 동비의 딸 정민공주도 공주 책봉을 받고 유구왕비가 되었다. 국제결혼 이야기가 또 나오지도 않고, 별수 없이 강혼할 처지가 되어야 할 것 같으니 배아파했다.[62] 아버지는 모르지만 어릴 적 담을 넘어 놀러나간 적도 많다고 한다.[63] 이쪽은 서자지만 장자라는 이유. 이미 성인이라 광덕제의 아들들 중에서 가장 적절하다고 다음 태황에 추대될 확률이 높기에, 동생이자 서자인 자기가 보위에 오르려면 얘도 없어지는 게 좋은 방해물이기 때문이다.[64] 그러나 치밀하긴 했지만 완벽하게 치밀하진 못 해서 어설픈 반정 시도가 실패로 돌아가고 결국 본인의 목숨도 날려버린 예왕과는 달리 이쪽은 너무 허술했어서 시도도 하기 전에 망했지만 역으로 그랬기에 목숨이라도 건질 수 있었다는 점이 아이러니한 부분이다.[65] 때문에 독자들 사이에서 예왕이 대대적으로 재평가받았다.[66] 실존인물. 원역사에선 헌종 시기 은언군의 손자를 왕으로 추대하고자 반란을 모의했다가 적발되어 처형당했다.[67] 원역사에서의 한반도 최초의 폭탄 테러는 1875년 일어난 민승호 암살 사건이었다.[68] 다만 테러의 대상이 한명은 미래인이고 다른 한명은 미래인으로 추정되는 인물인지라 당연히 폭탄테러의 가능성을 알고 있다는 점에서 성공하기는 힘들었다.[69] 정황상 폭탄을 만드는 방 안에서 담배를 피우다가 이렇게 된 듯.[70] 핵심 가담자 30여명은 참수형, 가담 정도가 아주 경미한 소수의 사람들은 석방되었고 나머지 단순 가담자 200여명은 기념함 겸 예식용으로 몇 척 남아있던 거북선판옥선의 노젓는 노예로 20년간 복무하는 벌을 받는다. 굳이 이런 처벌을 내린 데에는 광덕제의 서양 취향이 작용한 듯.[71] 재석이 몰래 읽는 '구대검협전'이란 무협지가 있는데, 제목이 비슷해서 그가 쓴게 아닐까라고 추정하고 있다. 김조순이 임종 전에 재석의 문안을 받았을 때 본인이 썼다고 인정한다.[72] 원평제 앞에서 학습을 점검하는 시간에선 배우지 않은 논어 구절을 물어서 재석을 낚고 진도를 더 빠르게 빼기도 한다. 이렇게 재석의 총명함을 이끌어내면 함박웃음을 짓는 걸 보면 즐기는 듯.[73] 만약 광덕제가 낙마할 때 곁에 있었다면 제대로 보필하지 못한 죄를 받을 수도 있었으니, 뒤로 밀려나 있던 게 박규원에게는 다행이었다.[74] 총 9명[75] 이진용(보리스)을 시조로 분가한 본관으로 보로는 이진용의 고향 러시아 보로네시에서 유래한다.[76] 안남에 군용 전신선을 깔자마자 본국에 처음 보고한 소식이 전투 코끼리를 앞세운 안남군에게 아군이 패전했다는 패전 보고였다.[77] 이하 호위대도 오도리 출신인데 이유는 옹주와 눈맞을 가능성이 전무한 게 오도리이기 때문이다.[78] 태자가 국정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아서 태자비는 관심을 안 가졌다가 박규수가 감사 인사를 올리러 와서야 뒤늦게 알게 되었다는 묘사를 보면 태자비와 본래 가까운 사이는 아니었던듯.[79] 재석은 외숙이 조롱당하면 결국 그 허물은 자기에게 돌아오는데다 비록 사기당해 산 것이지만 검 자체는 명검인 점을 고려해 태황에게는 장조의 아들 진안군이 사온 모조 장팔사모, 경조가 사온 모조 청룡언월도에 이어 쌍고검까지 갖춰서 삼국지 세트를 맞추기 위해 가품인 줄 알면서 샀다고 하자고 말을 맞춘다.[80] 사실 장덕순의 잘못은 아닌게 조정에서 기밀을 유지한다고 장덕순에게는 종성공이라고 알려주지 않고 소왕네 머슴이라고만 알려줬기 때문에 일반 유배죄인 수준으로 느슨하게 감시했기 때문이다.[81] 다만 스승을 닮아 출세보다 학문에 더 관심 많은 성격인지 재석은 속으로 장덕순은 벌이 아니라 상으로 여길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82] 그래서 김대건 안드레아가 1호 신부가 되었다.[83] 작중 세계의 광해군.[84] 사실 새로운 산업을 찾으려는 이유는 본국에서 주석을 생산하면 자신이 주지육림을 더이상 못 누리게 되기 때문이란 이유가 컸지만, 정말로 어리석은 자였다면 자기 생전에는 그럭저럭 버틸 수 있으니 생각을 정지하고 살던 대로 계속 살 수도 있었을테고 현실의 21세기의 자원 부국들 중에도 그런 생각으로 국가를 막장으로 밀어넣는 지도자들이 많다. 뒤늦게나마 제대로 된 길을 찾은 것을 보면 군주의 자질이 없진 않았다고 봐야 할 듯.[85] 1부 정호찬은 보상이 있건말건 우직히 충성하는 타입이었고 3부 정호찬도 충신이지만 나름 계산적이라 자기 이득은 자기가 알아서 챙겨먹는 타입이었다.[86] 조정 중신들은 물론이고 하진교도 이게 조롱이라는 걸 알지만 정작 본인은 그걸 모르고 좋다고 먹는다.[87] 이런 위험한 방법을 택한 이유는 재석에게 무인정사계유정난에 관한 설명을 들은 것을 바탕으로 최대한 빠르게 궁을 장악하는 것이 성공 가능성이나 전후 처리에서나 가장 바람직하다 판단했기 때문이다. 실제로도 대한에 빚을 지지 않고 최소한의 인명피해로 집권하여 하와국에도 별다른 부담을 지우지 않았기에 현명한 판단이었다. 재석도 자신이 하진교의 입장이였으면 같은 방법을 택했을 거라고 인정했다.[88] 비유적인 의미가 아니라 5년만에 만난 본국 사람들이 정말 못 알아보고 처음에 하진교인 줄 안 믿었다[89] 하진교의 이복동생 중 한 사람도 호환을 막겠다며 나갔다가 호랑이밥이 됐을 정도.[90] 국가원수에 대한 갑작스런 신체 접촉이니만큼 일반적이라면 암살시도 취급을 당해도 할말이 없고, 그나마 당사자들이 인척관계에 둘 다 국가원수 신분이라 암살 의심은 벗더라도 보통은 심각한 결례로 간주될 수 있다.[91] 그 전까지는 하와국 전사들이 대한 본국 근위대로 파견갔다가 다시 누손으로 파병가는 경우가 많았으나 하진교가 술루국처럼 정식으로 하와국 국군을 파병하기로 한 것.[92] 하진교는 하와인 중신들에겐 불만 있으면 전사로서 덤비라고 해서 중신들이 아무 말 못하지만, 이동연에게도 그럴 수는 없으니 말을 들어준다. 툴툴거리긴 해도 화내지는 않고, 적당히 놀리기만 한다.[93] 원 역사에서는 그의 동생 완복홍일이 제위에 오른 뒤 이 이름으로 개명했다.[94] 동음이의어 부록이 자꾸 생각나서, 아무리 허수아비로 세울 예정이라지만 대놓고 그렇게 취급하는 것 같아 재석도 마음이 좋지 않았다.[95] 그래도 이렇게 진지한 고민을 한다는 것 자체가 그가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라 인재라는 뜻이긴 하다.[96] 화번공주로 뽑히며 태황의 양녀로 입적되어 족보상으로 흥선제의 딸이다.[97] 실제로 작가가 이용갑을 이병갑이라고 오타를 내기도 했기 때문에 독자들에게는 조병갑 + 이용태 설이 거의 정설이 되어있다.[98] 이 점은 1부의 박원종과 비슷하다.[99] 이 시점에선 양장을 입고 머리도 짧게 자른 서구화된 모습을 한다.[100] 시야는 좁았지만 감정적 이유는 충분했다. 아버지가 상소문에 헛소리를 적는 바람에 원한 적도 없는 군대에 가서 몇년동안 전방에서만 근무했다. 1년에 겨우 절반 들어오는 집에서는 애국하라면서 아예 말뚝 박을 걸 종용하는 아버지와 호시탐탐 자기 자리를 노리는 어린 계모와 부딪혔다. 그나마 예쁜 아내 때문에 마음을 잡고 가출까지는 참고 있었지만.[101] 1년 이상 본국에 체류하면 군대 영장이 나온다(...)[102] 원 역사에는 스미스 사후 모르몬교의 지도자가 된 브리검 영이 한 일이다.[103] 실제 역사 청나라에서 가경제 때인 1813년 자금성에 백련교 자객들이 침입하여 왕자 시절의 도광제가 직접 총을 들고 싸웠던 일의 오마쥬.[104] 재석이 실내운동이라도 하라고 현대식 다트를 투후라는 이름으로 만들어줬는데, 다트를 꽂을 때 풍기는 살벌함이 나인들은 물론 동생 이창까지도 벌벌 떨게 만들 정도다. 숙부와 고모들도 친왕과 장공주(작중 언급은 화선장공주 뿐이지만 태후 소생이란 점에선 친왕까진 포함일 것이다.)나 숙부, 고모로 불러주고 후궁 소생은 군왕이나 옹주들은 숙부, 고모로 부르지도 않는다. 그나마 제대로 어른 대우한 건 친부모와 화원장공주 내외, 순친왕 내외, 김좌근 뿐이라 태후 소생 자녀들은 호칭만 존칭인 수준인 듯 하다.[105] 처음에는 덕명의 주선으로 몰래 밀담을 했지만 그 후에는 덕명이 대놓고 그를 소개하고 공개적인 로비활동을 한다.[106] 대칸의 애첩을 굴마훈의 수하가 납치해서 결박하고 눈과 입을 막고 강간한 후 대칸이 부른다고 럭더훈을 속여 그 방으로 오게 했는데, 머리가 둔한 럭더훈이 다른 궁인들을 부르지도 않고 혼자 대칸의 애첩을 풀어주었다가 자신이 강간범으로 몰리게 되자 무작정 도망부터 쳐서 대칸에게 범인으로 찍히게 되었다. 게다가 굴마훈은 럭더훈이 성서의 압살롬처럼 아버지의 왕위를 뺏기 위해 아버지의 애첩을 강간했다는 헛소문까지 퍼트린다.[107] 작중 일본은 대한과의 교류와 성리학의 영향으로 원 역사보다 근친혼이 터부시되는 경향이 강해져서 사촌간 결혼도 망설일 정도가 되었다.[108] 송태후가 자신의 딸인 영화공주를 대한 황태자의 후궁으로 보내려는 것에 대해 "대한과 전쟁을 하면 대한군이 후송의 도시를 불태우고 대한과 우호를 맺으면 대한이 후송의 재물을 쓸어가니 어느쪽이든 결과는 같다"는 말을 남긴 거 보면 그나마 시국을 어느 정도 볼 줄 알기는 아는데 그냥 본인이 일을 안 하는 성격이다.[109] 이마저도 원래는 폐태자를 지지한 신하들까지 전부 숙청하려는 것을 임칙서 등 폐태자를 반대한 신하들이 만류했기에 친왕들만 본보기로 죽이는 것으로 타협한 것이다.[110] 그만큼 원 역사의 서태후가 막장이었던 것이다.[111] 대한과 상당히 우호적인 관계가 되었으니 당장은 불필요해진 요주, 항주, 명주 도통부를 먼저 군사적으로 제압해야 한다는 강경한 구상을 내놓는다.[112] 폐태자 계획을 반대한 이 중 가장 격렬하게 반대하여 사실상 폐태자 반대파의 대표였다.[113] 원 역사를 아는 독자들은 임칙서가 잘못된 선택을 했다고 우려했지만 작중에서는 대한의 존재로 인해 아시아 국가들도 세계와 끊임없이 교류하고 있고, 후송은 청과 끊임없이 싸워가며 발전을 멈추지 않았기 때문에 달리 봐야 할 것으로 보인다.[114] 구원군을 안보낸건 아니지만 전부 막혔고 본인은 조정에서 장사 사수를 강요받았다[115] 작품 외적으로 본다면 원래 서태후처럼 무개념 행보를 계속하며 나라를 말아먹는 캐릭터로 기획된 송태후가 일생을 바쳐 자기가 싸놓은 똥을 열심히 치우는 캐릭터로 변경되면서 등장이 사라졌을 듯하다.[116] 다만 대한인들만 헌왕으로 부르고, 조심원과 그 측근들은 자신들끼리는 한왕이라고 한다.[117] 안남 지역 민심이 그렇게 순순히 숙이고 들어올 거였으면 후송보다 국력이 앞서는 대한이 최소한 안남 절반은 직할령으로 삼아 다스리려 들었을 것이다. 대한조차 안남의 반골 기질과 통치의 어려움을 알고 완씨 왕조를 없애지 않았는데 그 완씨에게 백년 넘게 항거하는 북부 지역을, 그것도 겨우 3만의 직할군으로 병합하려 들었으니 될리가.[118] 덕성도 역시 예수교의 요소가 들어갔기 때문에 크게 보면 생겨난 배경은 원 역사와 같다고 할 수 있다.[119] 원 역사와 동일하게 1814년생이라, 이때 시점인 1843년 기준으로 아직 29세밖에 되지 않은 젊은이다.[120] 노란색을 상징색으로 쓴 원 역사의 태평천국과 달리 공산주의를 상징하는 붉은색을 상징색으로 쓰고, 마오쩌둥 어록과 유사한 자신의 어록을 담은 붉은색 표지의 책을 들고다니며, 태평천국이 전세계의 묘노들을 선동해 일으킨 홍적의 난도 추수봉기테트 공세 등 각지에 지하조직을 침투시켜 '여러 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봉기를 일으키는 공산당의 전략을 사용하는 등 여러모로 공산당과의 연관성이 많다.[121] 일부 독자들은 작중 홍수전이 미래인이 빙의했다기엔 19세기 기준으론 유능하나 21세기 기준으론 어딘가 부족한 점과 함께 외국과 은밀히 거래해 외국용병과 무기를 수입하고 조병창까지 세우는 군사적 식견, 홍수전의 가르침을 따르는 배상제회의 부자들을 약탈하고 죽여서라도 재산을 빼앗는 과격하고 폭력적인 부의 재분배 방식과 한족을 선택받은 민족이라 주장하며 다른 모든 민족을 배척하는 극단적인 외국인 혐오와 국수주의 성향 등을 들어 중국 공산당 출신 빙의자설과 엮어 어쩌면 평범한 공산당원이 아닌 중국 군벌이나 홍위병 또는 분청 출신일지도 모른다는 추측을 하기도 한다.[122] 일단 재석은 시작부터 왕으로 했으니 신하들의 반대가 있어도 어쨌든 자기 구상을 밀어부칠 권력을 기본으로 가지고 있었고 어려서 농사도 지어봤고 고시생 때도 꾸준히 덕질을 하는 등 아는 것도 많았다. 무엇보다 몇차례나 환생하면서 지식과 정략에 대해 통달하기 까지 했다. 그러나 홍수전은 어려서부터 별다른 기반은 없었고 지식도 얼마만큼 아는지 나온바 없으니 출발선상부터 다른 셈.[123] 같은 회차에서 송태후가 맏손녀에게 권력 같은 거 다 제쳐두고 손녀를 안쓰러워하는 할머니의 모습을 보여줘 독자들에게 더욱 욕먹었다.[124] 실제 풍운산과 홍수전이 사촌 관계였는지는 설만 있을 뿐 확실하진 않은데 작중에서는 실제 홍수전의 고종사촌인 것으로 설정되었다.[125] 원역사에서 나루히토의 모친은 다카쓰카사 요시코이다. 작 중 이에츠구의 누이의 아들이라는 것으로 보아 원역사와 이름만 같은 다른 인물이다.[126] 이유도 다른 이유 없고 그저 돈지랄 대결에서 졌기 때문(...)[127] 대한이 일본과의 합의를 어기고 아모국 내정에 간섭한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었지만, 부족장이 친일파니 일본에게는 오히려 이득이라 그냥 넘어갔다.[128] 하지만 원역사에서는 명군으로 평가받을 만한 점도 있었다. 북부에 지방관을 파견해 중앙집권을 강화했고 세금을 깎아줬다. 본작에서도 이런 점은 변함없는지 응우옌 왕조에 비판적인 고백적도 명명제가 능력은 있었다고 평가했다.[129] 지네가 기어가는 것 같은 문자라고 폄하하는 건 덤이다. 그렇다고 쯔꾸옥응으을 채용한 것도 아니다. 천주교 박해 때문에 이쪽은 국문보다 더 심하게 박해받았다. 한자와 쯔놈은 일반 백성이 배우기엔 너무 난해하다는 점을 감안하면 명색이 유학자면서 문맹 퇴치나 교육엔 아예 관심이 없었다고 봐야 한다.[130] 현장의 의원들은 그런 말도 안 되는 지시를 따르지 않았지만, 관에서 약을 공급하지 않으니 사망자가 폭증했다.[131] 정작 전쟁 준비는 전혀 안 되어 있고, 안남군은 딱 봐도 대한의 상대조차 못 되는 처지였다.[132] 이름부터 시작해 언어와 문자, 의식주, 종교까지 전부 안남식으로 바꿀 것과 안남인과의 결혼을 강제하고 이를 따르지 않으면 죽인다는 것이다. 말이 민족동화지, 문화말살에 가깝다. 심지어 이러한 정책을 대한인과 안남인들 사이에서 태어나 대한의 복식과 문자를 자연스럽게 사용하는 혼혈들에게도 똑같이 적용하려 했다.[133] 이런 식으로 공포정치를 벌여대니 대다수 신하들도 황제의 뜻을 거스르면 죽는다는 두려움에 더더욱 위축되어 무조건 따르는 예스맨이 되어버리는 악순환의 고리로 이어졌다.[134] 사실 홍삼을 이 지경으로 과용하면 간부터 작살나기 시작해 몸이 다 망가진다. 20대 초반 젊은 나이에다 천연두에 걸리고도 살아남을 정도로 건강한 체질이라 버티고 있는 듯.[135] 실제로 원역사에서 비슷한 시기 재위했던 조선 헌종의 사인이 과도한 정력음식 복용의 부작용으로 추정되기도 한다.[136] 실제로 의도한 것인지 생각없이 저질러놓고 갖다 붙인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이후 이것이 의도된 행동이었다고 주장했다. 자신이 고자라는 소문을 확실하게 반박하는 증거를 만들기 위해 조작이 어렵도록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직접 성행위 장면을 보여줬다는 것이다. 적장자가 없는 국왕에게 성기능 이상이 왔다는 소문은 작게는 체면 손상에서부터 크게는 후계구도에 대한 불안감까지 온갖 문제를 일으킬 수 있으니, 공개 성행위로 이미 깎인 체면을 좀 더 깎는 대신 후계구도 불안정성에 대한 의심을 말소하려는 의도였다면 나름대로 참작은 가능하다.[137] 태후에게 공개 섹스쇼를 선보이며 충격을 준 완복시는 본인이 효자라고 생각하고 있으며, 유독 태후의 의견에만 정면으로 거스르지 못하는 것을 보면 자기 나름대로 어머니를 아끼는 것은 확실하다. 문제는 완복시의 사고방식이 워낙 정상의 범주를 벗어나서, 어머니에게 아들의 성기능이 뛰어나다는 것을 직접 행동으로 보여준 것을 효행이라고 생각하고 있다.[138] 심지어 대한 귀에만 안 들어갔을 뿐 더 엽기적인 짓까지 하려고 했는데, 대한이 계속해서 치죄사를 보내 사죄를 요구하자 한황에게 받아먹은 홍삼탕을 돌려주겠다며 자기가 싼 똥을 상자에 담아서 보내라는 지시를 내렸으나 모두가 그것만은 안된다며 만류하여 이뤄지지는 않았다.[139] 그의 가솔들 일부가 달아나는 데 성공했기 때문에 완복시 일행의 행방을 대한군에 토설하는 일을 막으려면 살려서 인질로 두는 게 맞았다.[140] 이를 위해 후송과 협상하면서 필요하다면 자신의 여동생들을 전부 후송 황제에게 후궁으로 바치는 것도 주저하지 않겠다는 막장스런 생각까지 한다.[141] 성리학 원리주의 성향에 엽색 행각, 입으로는 성현의 가르침을 주워섬기지만 기실 치졸하고 잔인한 성격이란 점에서 2부의 원본 경성군과 판박이. 재석이 빙의하지 않고 경성군이 계속 재위한 조선의 말로를 보는 것 같다는 감상이 많다.[142] 대한의 광덕제도 태자 시절엔 비슷했으나 부황의 건강이 안 좋아서 대리청정을 할 때는 눈치껏 유흥을 줄이고 나름 국정을 챙겼던 것과도 대비된다.[143] 실제로 원 역사에서 그는 아버지 이상가는 색마로 자라났다. 사덕제가 치를 떨 정도로 엽색 행각이 심각했다. 명명제의 44녀, 즉 자신의 고모할머니(나이로는 겨우 12살 위였다) 완복유의(阮福柔儀)와 근친 불륜관계를 맺어 딸을 얻는 정신나간 짓을 하질 않나.##[144] 원 역사 후 레 왕조의 마지막 왕인 민제 여유기랑 한자까지 같은 동명이인이지만 민제는 여유조의 장남 여유의의 아들이다. 또한 실제로는 여유근의 후손에 대한 기록은 없어 족보를 조작했거나 가상인물인 것으로 보인다.[145] 후송의 종주권을 부인할 경우 대한한테 '신의가 없는 나라'로 찍혀 안남처럼 대한과 후송한테 응징당할 것이고 대한의 번국이 되겠다고 할 경우 명목상 상국이지만 섬라에 아무런 힘도 쓸 수 없는 후송과 달리 대한은 충분히 그럴만 한 힘이 있고 그 결과 양국의 관계가 상호적인 교섭이 아닌 일방적인 상명하복로 격하되어 대한에게 이리저리 휘둘릴 것이기 때문이다.[146] 네덜란드는 얼마 전까지 적국이였던 아체를 일본과 충돌하며 도울 이유가 없었고, 페르시아는 자기 코가 석자라 지원을 거절했다. 오스만은 그래도 이슬람의 종주국이란 체면 때문에 일본에 경고 서한을 보냈지만 씹혔고, 이에 대한에 일본을 막아달라는 요청을 했으나 대한 역시 일본을 막을 생각이 없어서 거절했다.[147] 아무래도 대한을 일본의 상국 쯔음으로 여긴 모양이다.[148] 원역사의 알렉산드르 2세와는 혈통부터가 다른 사람.[149] 원 역사에서 마리아 요제파는 나폴리의 페르디난도 1세와 혼인 예정이었으나 천연두로 사망해 원래 프랑스의 루이 16세와 혼인 예정이었던 마리아 카롤리나가 페르디난도 1세와 혼인하고 마리아 안토니아(마리 앙투아네트)가 프랑스로 간다.[150] 원역사에서는 알렉산드르 2세의 황후이다.[151] 명군이 되어보세 2부에서부터 계속 가르시아라는 이름의 스페인인 캐릭터가 대한에 반대하는 역할로 등장하는데 4부의 가르시아는 이 사람과 맥시코인 군벌 수장이고 각각 4번째, 5번째 가르시아이다.[A] 원 역사에서 프란츠 2세의 부인 마리아 테레사의 친모인 마리아 카롤리나가 원 역사와 다르게 프랑스의 왕비가 되었기에 원 역사의 마리아 카롤리나의 후손들은 태어나지 못 했다.[A] [A] [A] [156] 원역사에서도 둘이 불륜 관계였고 막시밀리아노 1세가 이 둘 사이에서의 사생아라는 소문이 있었다.[157] 1815년생으로 4부의 이재석이 빙의한 흥선제보다 1살 연상이다.[158] 원 역사에서는 콜레라에 걸려 사망했는데 작중 세계에서는 이미 3부에서 상희에 의해 경구수액이 일찍 등장했기에 그 영향으로 생존한 것으로 보인다.[159] 이때 루이지애나로 갈 것을 권유받았지만 거절했기 때문에 나폴레옹이 신불랑국을 건국해서 재기할 수 있었다.[160] 다만 아주 틀린 건 아닌 게 누벨프랑스는 대서양을 건너 유럽에 군사를 상륙시킬 역량은 부족하므로 프랑스를 되찾고 싶어도 방법이 없다.[A] [162] 원역사와 달리 라이히슈타트 공작을 나폴레옹 2세로 인정하지 않았다.[163] 조형서가 재석에게 번번히 저지당했다고는 하나 서나라로부터 형주를 탈환하고 소무자전 편찬으로 대표되는 문화적 업적, 대한과의 외교가 정상화되어 뒷날 준우호국이 되는 기틀을 다지는 등 대외적으로 결코 업적이 모자란 황제가 아니다. 창업주인 조승복을 제외하면 그 누구도 조형서 이상의 업적을 쌓지 못했다.[164] 원역사에서 푸시킨을 결투로 죽여버린 사람이다.[165] 다만 국혼은 진지하게 추진한 게 아니라 혹시 가능할까 수준으로 필 총리와 얘기해본 정도인데다가, 남편 앨버트가 그토록 좋아하는 애들을 멀리 보낼 리 없다는 이유로 곧 생각을 접는다.[166] 플로렌스 나이팅게일과 엘리자베스 블랙웰의 호소를 받아들여 '여학생들을 위한 의대' 설립에 동의한 것도 여성의 사회진출을 긍정해서가 아닌, 어디까지나 정숙해야 할 여자들이 외간남자와 접촉하는 걸 최소화하기 위함이었다. 이는 조선/대한에서 의녀를 양성한 이유와도 일치하기 때문에 한국의 예를 본받는 격이기도 하다.[167] 물론 필의 주장에도 합리적인 근거는 있었다. 두 나라의 문화가 너무나 이질적이고, 대한 황실은 후사를 빨리 보기 위해 조혼을 하는데 아나스타샤는 너무 어리다는 것. 대한의 문화에 대한 상당한 이해를 갖고 있었다.[168] 러시아의 태평양 진출이 한국에게 막혀 그 힘이 오스만을 향하고, 러시아군이 한국산 최신 무기까지 사용하는 상황이 불만족스럽기는 하나, 자국 영토를 지키는 것과 돈 주고 상품을 파는 건 당연한 일일 뿐이라는 건 잘 알기 때문에 한국을 원망하지는 않는다.[169] 이게 유명해져 훗날 동아시아 순방을 온 케임브리지 공은 겨울 동안은 추위를 피해 한양을 떠나 일본에 머물렀다.[170] 찰스 다윈은 사촌간 혼인을 했는데, 별로 좋지 않은 사회적 인식과는 별개로 영국을 포함한 대부분의 서구 국가에서는 당시는 물론 현대까지도 사촌간 혼인이 합법이다.[171] 유명한 웨지우드 도자기 가문의 딸이라 재석이 우리 대한제 도자기의 경쟁자라고 농담을 하기도 했다.[A] [173] 러시아 황실은 3부에서 대한 공주 루시아가 시집온 후로 효도를 큰 가치로 받들게 되었다고 한다.[174] 원역사에서는 매국노 정명수의 만주 이름이 굴마훈이었다.[175] 원역사에서는 1830년 그리스 독립 때 왕으로 추대되었으나 본인이 거절했고 1831년 벨기에 왕위를 받아들인다.[176] 일반적으로 특명전권대사는 본국에서 가까울수록 선호도가 높고 관계의 비중이 클수록 요직인데 바로 이웃나라에 관계도 밀접한 누벨 프랑스 주재대사라면 국무장관을 지낸 거물이 가는 어마어마한 요직이라도 이상하지 않다.[177] 원 역사에선 퇴임 후 민주당 지도부의 요청을 받아 남부 지역을 순회여행하던 와중에 당시 뉴올리언스에서 유행하던 콜레라에 걸려 1849년 사망했지만 여기선 1852년 기준으로도 여전히 살아있다. 역사가 바뀌어 뉴올리언스에 가지 않았거나 설령 걸렸더라도 이미 3부에서 상희가 경구수액을 개발해 퍼뜨렸기에 그 덕택에 콜레라를 극복하여 사망하지 않은 것일 수도 있다.[178] 진출방향이 서쪽에서 남쪽으로 바뀌었을 뿐 원 역사와 비슷하게 명백한 운명을 명분으로 내세운다.[179] 그 나폴레옹이 있는 누벨프랑스를 상대로 전쟁을 벌여 이길 수 있다고 내세운 논리가 "나폴레옹은 영국에게 패배했고 자신들은 그 영국과 싸워 이겼으니 질 리가 없다"는 지극이 단순한 근자감이었다.[180] 여기서 지지세력을 설득할 때 스페인은 유럽열강도 아닌 대한 '따위'에게 패배해 필리핀을 뜯긴 나라니 별거 아니란 말을 하는데 작중 영국도 강대국으로 인정하는 대한을 우습게 안다. 그가 식견이 좁고 백인우월주의에 사로잡힌 편협한 인간임을 여실히 보여준다. 총통이 되었으면 나라를 말아먹을 뻔.[181] 운 좋은 괴짜 졸부로 유명한 티머시 덱스터 경을 동향 출신 선배 상인이라며 존경한다.[182] 이훈도 모든 잘못은 자기 아버지에게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서 재석에게 원한은 없었다.[183] 사장 스크루지는 신불랑에 돈을 내고 남작 작위를 산 사람인데, 업무에는 매우 깐깐하지만 직원들에게 공정한 대우를 한다는 점이 크리스마스 캐럴에서 개심한 후의 스크루지를 모티브로 한 듯.[184] 베니스의 개성상인의 주인공 유승업에서 모티브를 얻은 듯.[185] 어렸을 때는 키도 작고 샌님같은 외모였는데, 그동안 많은 역경을 극복해오면서 체구도 커지고 상남자 스타일로 외모가 달라졌다. 게다가 자신을 알던 사람이라도 못 알아볼 가능성을 높이려고 일부러 미국식 콧수염을 기른데다 안경까지 쓰기 시작하는 등, 작정하고 인상을 바꾸었다.[186] 이쪽이 한발 먼저 눈치챘다. 이훈의 한국어 말투가 상류층들이나 쓰는 상당한 고급 수준이었기 때문.[187] 겸손이 아니라 정말로 14명 잡은 정도는 별거 아니라고 여기고 있었다.[188] 프랑스어로는 누벨 프랑스 제국, 원미주에 위치.[189] 물론 이는 명분이고 실제로는 국가가 빠르게 팽창하는 데 필요한 재물을 확보하고 루이 19세의 침공을 대비한다는 목적이 있었다.[190] 원 역사에서는 증기선이나 열기구 등의 신병기를 불신하며 채용하지 않았는데 여기서는 철도나 증기 자동차가 이미 대한 등지에서 성능과 안정성이 입증된 기술이므로 대대적으로 채용한 것 으로 보인다.[191] 그래도 걸물이라는 것은 부정하지 않으며 그의 전술을 교육시키고 있다.[192] 작중 나폴레옹의 행보가 대한의 시조인 태조 이성계가 고려를 무너뜨리고 조선을 건국한 것과 비슷하기에 대한 입장에서는 마냥 비난만 할 수는 없을 것이다.[193] 자살하면 교회법 상 미사를 올릴 수 없기 때문이다.[194] 훙크파파 지파는 원 역사에서 웅크린 황소의 부족이었다.[195] 유럽에 남은 원수들까지 포함하면 오귀스트 마르몽이 가장 장수했으나 배신자를 그를 나폴레옹의 원수로 쳐주는 사람은 없었다.[196] 4부 초반 '추포를 할 정도로 큰 일은 아니었다'는 사건의 전모가 밝혀진 것. 원 역사의 홍경래의 난 같은 대규모 반란이나 3부의 장길산 정도만 됐어도 홍경래가 죽거나 숙청당하지 않는 이상 신불랑과의 협상은 불가능했겠지만 대한에선 '공부하기 싫은 놈들이 벌인 난리' 정도로 여긴다. 그래서 홍경래도 재석을 만났을 때 정중한 예를 표했고, 사대부로서의 자부심이 강한 김유근이나 못마땅해할 정도였다.[197] 덕분에 재석이 알아볼까 속으로 전전긍긍하던 이훈이 재석에게서 벗어날 수 있게 본의 아니게 도왔다.[198] 다만 이 드라마는 90년대 현대가 배경.[199] 기해박해 때 순교한 천주교 신자들 중 남명혁 다미아노라는 인물을 모티브로 한 듯하다.[200] 나폴레옹은 그 필요성은 인정하지만 공사의 어려움을 쉽게 짐작하고 대륙횡단철도가 우선이라는 입장이었다.[A] [202] 埃集骰[203] 파리채 사건은 원역사에서도 일어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