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군이 되어보세! |
등장인물 (1부 · 2부 · 3부 · 4부 · 이재석 · 김상희) |
1. 개요2. 대한(大韓)
2.1. 역대 태황2.2. 황실
3. 대아주2.2.1. 재석의 가족
2.3. 소왕파2.4. 내관2.5. 조정2.6. 군인2.7. 기타 관원2.8. 심왕부2.9. 대명동2.10. 종교인2.11. 민간2.12. 유림2.13. 상인2.14. 발명가2.15. 연예2.16. 번국2.17. 미주3.1. 청3.2. 후금 → 실위3.3. 대진국 → 진왕부3.4. 후송3.5. 양광총독부 → 월왕부3.6. 태평천국(배상제회/태평도/홍서당)3.7. 서3.8. 일본3.9. 아모국3.10. 대남국 → 분할3.11. 월남국(북월)3.12. 섬라국3.13. 무굴국3.14. 벵골 칸국3.15. 준가르 칸국3.16. 아체 술탄국3.17. 페르시아3.18. 돌궐3.19. 파수둔
4. 대유주4.1. 루스국4.2. 서반아4.3. 외수터국4.4. 포뢰선4.5. 도이치4.6. 불랑국4.7. 잉글국4.8. 수배국4.9. 포도아국4.10. 양시칠리아 왕국4.11. 내달국4.12. 벌기국4.13. 법왕국
5. 대미주6. 대삼주7. 대상주4.13.1. 카타이 근위대
4.14. 이탈리아4.15. 그리스 왕국4.16. 몰다비아 공국1. 개요
슈타인호프 작가의 웹소설 명군이 되어보세! 4부의 등장인물들.실존 인물 | ★ |
실존인물을 모티브로 한 가상인물 | |
2. 대한(大韓)
2.1. 역대 태황
조선 제21대 국왕 | |||
대한 제7대 태황 영종 원평제 | 英宗 元平帝 | |||
영종익문선무장의희경영철현효태황 英宗 翼文宣武莊義熙敬英哲顯孝太皇 | |||
출생 | 1763년 | ||
대한 황도 한성부 | |||
즉위 | 1782년 | ||
대한 황도 한성부 경복궁 근정전 | |||
사망 | 1829년 음력 6월 2일 | ||
대한 황도 한성부 경복궁 강녕전 | |||
재위 | 대한 태황 | ||
1782년 ~ 1829년 (음력 1782년 ~ 음력 1829년) | |||
연호 | 원평(元平) | ||
황릉 | 양주 숭릉(崇陵)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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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 | 금(昑) | ||
부모 | 부황 목종 영태제, 모후 남양 홍씨 | ||
부인 | 황후 파평 윤씨 | }}}}}}}}} |
- 영종 원평제 이금(英宗 元平帝 李昑)[1]
4부 시작 시점인 1823년의 대한 태황이자 재석의 할아버지. 1763년생. 적자 둘을 병으로 잃고, 유일하게 남은 적자인 태자 이순이 망나니라서 고심이 크지만, 고조할아버지인 중종도 소싯적에 망나니였다가 개과천선한 전례 때문에 태자에게도 일말의 기대를 갖고 폐태자하지 않고 참고 있다. 하지만 아내를 죽게 만들고도 반성의 기색조차 없는 태자에겐 희망이 없다 판단했는지, 사고로 어머니를 잃고 (재석이 빙의하면서) 성숙해진 것으로 보이는 태손에게 기대를 품는다. 원역사의 이금처럼 매우 권위적이고 엄격한 성격이어서 자식, 손자들에게 사석에서도 폐하라고 부르게 하고,[2] 황제의 권위를 중시해 나폴레옹을 찬탈자에 참칭자라 비난하고[3] 네덜란드 본국이 프랑스에 점령당하자 네덜란드령 동인도에 대군을 파병하고 나폴레옹이 몰락한 후 대가 없이 돌려주기까지 했다.[4] 몰락한 나폴레옹이 루이지애나로 도주해 신불랑국을 세우자 한동안 신불랑국 승인을 거부했고[5], 멕시코 제1제국, 그란 콜롬비아 합중국도 같은 이유로 승인하지 않았다. 이는 즉위 초인 1788년 부황의 후궁 귀비 오씨가 원평제를 독살하려는 음모를 벌인 무신지변을 겪은 영향도 있는 듯. 태자 외에 후궁 소생 아들 다섯(그중 둘은 요절), 서녀 셋을 두었다. 한편 미식가 기질이 있어 신기하고 맛있는 음식을 좋아하며 서양딸기를 대한에 처음 도입했다고 한다. 건강관리에도 신경을 많이 써 의학에도 관심이 많고 담배나 아편 등 건강에 해로운 것들을 몹시 싫어한다.[6] 재위 중 장조 이래 200년 넘게 유지되었고 3부의 숙조 때도 폐지를 고려했었던 재한 네덜란드인들의 간택단자 제출 의무 예외를 폐지하고, 미주 백성들에게도 간택단자를 제출하게 해서 은근히 쌓인 불만을 해소해주는 뛰어난 정치력을 보였다. 신덕왕후와 정도전의 명예를 회복시켜 주기도 했다고. 또한 원역사 영조처럼 압슬을 폐지하는 등, 전반적으로 좋은 게 좋은거라고 넘어가던 부분들을 원칙에 따라 처리하는 등 원 역사의 옹정제에 비견될만한 통치를 했다.
태손이 미주에 간 동안 건강이 안 좋아져서 며칠이지만 태자에게 대리청정을 시키며 쉬고, 식욕도 떨어져 평소 좋아하던 딸기와 수박도 한 조각 먹고 물린다. 이것도 내관이 조금이라도 드시라고 간청해 억지로 먹은 것. 그래도 대리청정을 하는 태자가 사고 안 치고 무난하게 정사를 돌보는 것에는 기뻐하며, 한편으로는 좋아하는 과일을 재배하는 토실에 석탄을 그만 떼고 광혜원으로 돌리라면서 삶을 정리하려는 모습이 마지막 등장이 되었고 결국 재석이 진주만에 있을 때 폐렴으로 붕어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재석은 7년간 든든했던 할아버지의 죽음에 진심으로 슬퍼하며, 멕시코에서 시간을 지체하느라 임종을 지키지 못한 것을 후회한다.
서양에서는 원평제가 내린 외국 포경선 금지령에 반감을 품고 그를 '고래왕'이라는 별명으로 부른다고 한다.
조선 제22대 국왕 | |||
대한 제8대 태황 헌종 광덕제 | 憲宗 廣德帝 | |||
헌종경문위무명인철효태황 憲宗 經文緯武明仁哲孝太皇[7] | |||
출생 | 1795년 | ||
대한 황도 한성부 | |||
즉위 | 1829년 음력 6월 2일 | ||
대한 황도 한성부 경복궁 근정전 | |||
사망 | 1834년 음력 9월 17일 | ||
대한 황도 한성부 경희궁 침전 | |||
재위 | 대한 태황 | ||
1829년 ~ 1834년 (음력 1829년 ~ 음력 1834년) | |||
연호 | 광덕(廣德)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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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 | 순(峋) | ||
부모 | 부황 영종 원평제, 모후 파평 윤씨 | ||
부인 | 추존 순원황후 안동 김씨, 황후 반남 박씨 | }}}}}}}}} |
- 황태자 → 헌종 광덕제 이순(憲宗 廣德帝 李峋)
4부 초기 대한 태자이자 재석의 아버지. 1795년생. 삼남으로 태어났지만 형 둘은 그가 태어나기도 전에 요절했기에 태자가 되었다. 재석이 평하길 원본 성친왕이나 홍이 같은 놈. 어릴 때부터 온갖 사고를 치고 다녔는데, 그래도 살인이나 강간 같은 중범죄를 저지르지는 않는 등 폐태자될 일은 피하는 얍삽한 모습을 보여주고, 이금에게 다른 적자가 없는데다 과거 성친왕이 재석의 빙의 후 개과천선했던 사례 때문에 태자 자리는 잃지 않았다. 여색을 좋아하는데 4부 시작 시점에서 이미 정식 후궁만 넷이고 황손으로 인정받은 서자만 아들 둘에 딸 넷인데, 그후 4년 만에 7명이나 자식을 더 본다 제위에 오르고 2년이 지난 시점에서는 자식이 (영유아기에 일찍 죽은 아이들 빼고 살아있는 자녀들 숫자만 세어도)20명으로 늘어났다. 최종적으로 남긴 자식 숫자는 29명.[8] 취향이 아주 확실한지 조금만 미모와 몸매가 망가져도 바로 흥미를 잃어버린다고 한다. 그외에도 여자를 많이 두고 있으며 공식적으로 인정받지 못한 서자녀도 여럿 있다고 한다. 미주 방문 중에도 나라에 충성을 다한 미주 원씨 가문에게 역적 원균의 후손이라고 폭언을 하여 원씨 당주가 충격을 받아 세상을 떠나게 만들었으며,[9] 음주가무에 빠져 미주 백성들을 위무한다는 원래 목적은 팽개쳤으며, 자기 정실부인과 아들이 탄 마차를 몰면서 음주운전으로 폭주하다가 아내를 사고로 죽게 만들었고, 이 때문에 부황의 명으로 1년간 북한산성에서 근신했는데, 우연한 사고였는데 내가 뭘 반성하냐는 식으로 전혀 반성하지 않고 음주와 여색, 사냥 등 할 거 다 하는 것도 모자라 문안인사를 안 왔다고 어린 아들을 구박하고 큰딸에게 하루 8시간씩 바이올린 연습을 강요하는 등 막장부모 짓까지 벌여 재석을 분노케 한다.[10] 여성 교육에 대해서도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며 절대 반대하는 입장이다. 재석은 이런 자가 군주가 되면 틀림없이 나라를 말아먹을 것이기에 막아야 한다 생각하지만, 엄연히 혈통상 부친인 태자에게 대들 수 없는 노릇이기에 일단은 참으며 와신상담하고 있다. 다만 태황이 된 후에 신하들의 반대에 부딪혀서 자신의 뜻을 맘껏 펼치지 못하고 일부 타협하거나 포기하는 일이 잦은 모습이 과거 무종이었을 때 자신의 모습을 떠올리게 하는지라 복잡한 감정을 품게 된다.
그러나 100% 막장은 아닌 것이, 재석이 어린 나이에 공부에만 몰두하는 것을 안타까워 하면서 어릴 때는 마음껏 놀아야 한다며 다정하게 굴고[11] 재석이 그간 마포의 변화한 모습을 보고 싶어 하자 몰래 암행에 동참시켜주고 아이스크림을 사주는 다정한 아버지의 모습도 보여서 재석을 의아하게 만든다.[12] 게다가 장조와 중종의 예를 들며 재석에게 군주는 변란에 대비해 자기 몸을 지킬 수 있어야 한다며 승마, 궁술, 생존기술 등을 출중한 솜씨로 시범을 보인다거나 공부에 대해서 대놓고 자기는 '일부러' 지나치게 실망시키지 않을 정도로만 대충 한다고 말하고, 측근들도 부귀영화를 위해 몰려든 아첨꾼들과 국가를 위해 자신이 성군이 되길 바라는 충신들을 구분해서 전자는 지금은 같이 놀지만 즉위하면 손절해야 할 존재라고 생각하고 후자는 자신에 대한 희망을 놓지 않게 하는 등 뛰어난 정치적 처신을 보인다.[13] 태자비 박씨가 자신의 아들을 보위에 올리고 싶어서 아직 혼인도 하지 않은 재석을 미주 순행에 보내달라며 베겟머리 송사를 하자 그대로 부황에게 요청하고 성사시키지만 태자비의 검은 속마음을 다 꿰뚫어보고 있으며, 본인은 재석이 나폴레옹을 만나 외교적인 성과를 올려 태손의 지위가 굳건해지기를 바래 미주로 보내는 것으로 묘사된다. 주변에선 태손이 너무 치켜세워지면 이를 질투한 태자가 아들을 핍박하지 않을까 하고 걱정하기도 하지만 그의 시점으로 나오는 부분을 보면 의외로 전혀 그렇게 생각 안 한다. 태손이 미래의 태황감으로 각광받을수록 그 아비인 자신의 입지도 단단해진다며 좋아하는 중.[14][15]
재석이 미주에 간 동안 건강이 악화된 원평제가 명해서 사흘간 대리청정을 하는데, 눈치껏 성실하게 국정을 돌보고[16] 자신의 서양에 대한 지식을 과시하며 유창한 영어로 영국 대사를 접견했으며 그 이후에는 유흥도 자제하는 모습을 보였다고 한다. 결국 재석이 귀국하는 동안 원평제가 붕어하면서 제위에 오른다. 전 장인인 김조순을 보내서 재석을 맞이하게 하고,노예재석을 마주하자마자 바로 '태자'라고 칭하며 반기며 엄격했던 조부와 달리 자신을 '아바마마'라고 부르게 하고, 전례를 깨고 국상 기간 중에 태자 책봉식을 개최하여 정식으로 태자로 임명한다. 그렇게 재석에게 힘을 실어주면서 본인이 귀찮아하던 빈소 지키는 일도 재석에게 떠넘겨버린다. 그와 별개로 재석이 생각한 것과 정확히 같은 논리로 나폴레옹에게 캐나다 서부 땅을 사는 것에 동의하고, 재석이 생각했던대로 건주 양국에 재석을 사신으로 보내려고 한다는 구상을 밝히며, 놀이 친구들은 손절해서 조정의 호감을 사고, 국상 중임에도 재석의 태자 책봉을 밀어붙이는 정치력을 발휘한다. 막상 뚜껑 열어보니 군주로서 무능한 인물은 아니었다. 열심히 하지 않아서 그렇지.
하지만 재석이 북경에 간 사이 중종 건흥제의 유지를 대놓고 어기는, 유구를 동군연합으로 만들어 실질적으로 병합하겠다는 폭탄 같은 구상을 밝히고 일본을 달래기 위해 아모국을 일본에 넘기겠다는 구상을 밀어붙이며 재석과 독자들이 안심하지 못하게 만들고 있다. 심지어 주변국 모든 황실에 자기 딸들을 시집보내 혈연으로 묶어 동양의 외조부가 되겠다는 구상을 하기도 하였다. 다행히 이 안은 재석이 뜯어말려 일본과만 조카들을 통혼시키는 것으로 축소하였다. 그 과정에서 이복동생 전왕에게 딸을 일본에 시집보내라고 강압적으로 통보하는 등 이복동생들에게 원한을 스스로 쌓아가고 있어 독자들은 제 명에 못 살고 암살당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었으나, 사실은 소왕의 테러 음모를 다 꿰뚫어보고 있으면서 재석에게 수사 책임을 맡겼다.
즉위한 후 눈치볼 상대가 없어지자 운동을 그만둬버리고 음주와 여색은 그대로 몰두한 바람에 점점 비만이 되어가고 있어 성인병이 우려되었다. 일단 태의들은 건강에 문제가 없다는 진단을 하여서 당분간은 문제가 없을줄 알았으나... 어처구니없게도 후금에서 선물로 받은 한혈마를 타고 고선지, 나폴레옹 흉내를 내며 금강산을 무리하게 등산하려다가 낙마하여 10미터 절벽을 굴러떨어지면서 중상을 입어 사망하고 만다. 다발성 골절과 내장파열이 더쳐 결국 복막염으로 악화됐는데도 치료가 실패할까 두려워서 수술을 거부하고 마취약으로만 버티다가 결국 사고 15일 만에 붕어했다. 평소 내가 내일모레 마흔인데 살 날이 얼마나 많이 남았겠느냐며 태자에게 나랏일을 미리 가르쳐놔야 한다고 틈만 나면 재석에게 대리청정을 시켰는데, 모두들 지금은 건강하니 놀기 위한 핑계라고 생각했지만 이게 알고보니 사망 플래그였다.
재석에게는 애증이 교차한 인물이었지만[17] 백성들에게 이미지가 그리 나쁘지 않은 군주였다. 그의 재위기간 약 6년 동안 대내외적으로 큰 위기도 없었고, 작황도 전반적으로 좋았던데다가, 임금이 유흥을 즐기는 게 흠이 되는 시대도 아니고 노는 것도 국고를 축내거나 백성을 약탈하는 일 없이 술 마시고 유람 다니고 후궁이나 들이는 등 돈 많은 한량 수준으로만 개인적으로 놀았으며,[18]태자를 굴려서국정도 빈틈없이 운영했기 때문에 백성들은 태황의 죽음을 진심으로 애통해했다. 훗날 실록에서 재석이 이 시기에 대리청정을 수시로 하며 사실상 국가를 통치하고 본인은 국무 대부분을 방임하다시피 한 것이 드러난다면 "운이 좋았을 뿐인 범군과 암군 사이의 군주" 정도의 평가를 얻을 것으로 보인다. 여담으로 그의 재위기간은 작중 조선 왕실/대한 황실을 기준으로 하면 예종, 문종, 정종, 단종 다음으로 짧다.[19]
상희 대신 등장한 새로운 3번째 현대인 빙의자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군주 한 사람이 이 제국을 다스릴 수 없는 시대라며 입헌군주제를 지지하는 한편 재석에게 의회제도를 도입하는 게 어떻겠냐는 이야기도 하고, 재석을 태자로 책봉하며 선물로 내린 명마의 이름을 부케팔로스로 붙이고, 서양 음악과 오페라를 즐기며 세익스피어 전집을 읽고자 독학으로 영어를 마스터할 정도로 대한의 사상과 문화보다 서양의 사상과 문화를 찬양한다. 그외에도 간간히 아내들과 자식들을 모두 모아 파티를 열면서 다양한 양념의 무종계, 남만전, 흑장면, 탕수육을 메뉴로 내고 아이들이 손으로 뜯어먹어도 전혀 꾸짖지 않으며, 맥고국을 메히코가 아닌 멕시코로 부르고 아직 21세밖에 안된 청년이던 박규수의 능력을 알아보고, 그동안 무조건 거세를 시키던 양매창을 말라리아 감염법으로 치료하도록 하는 등 상당히 현대적인 모습을 보인다. 단순 서양빠이자 서양 사회의 장점만 보며 내로남불하는 국까에 불과하다는 설도 있었으나 재석이 빙의한 후 처음 만났을 때는 "네가 혼이라도 바뀌지 않은 이상 그렇게 조리있게 말할 리가 없다"는 날카로운 모습을 보이고, 황제가 된 이후엔 재석에게 일을 다 시키는 와중에 재석이 문서들 틈에 태황만 볼 수 있는 금위사 보고서가 섞여있는 것을 보고 이를 바치자 금위사 문서인지 어떻게 알았냐고 추궁하다가, 곧 언젠가 봤겠거니 하면서 그냥 보라고 하고 인생은 연극과 같다는 묘한 말을 하기도 한다. 이후에는 등선군의 명칭을 해병대로 바꾸자는 제안을 했는데, 굳이 등선군이라는 명칭을 바꿀 실익도 없을 뿐더러 해병대라는 단어가 작중 시기에서 떠올리기에는 좀 어색한 현대적인 명칭이다. 또한 만주에서 유정을 찾을 때 다칭유전부터 찾으라고 하여 석유 개발이 지연되거나, 수에즈 운하, 시나이 반도 등 당시 대한인들에게 생소할 중동 지명에 대해 잘 알고, 반영 성향이면서 가장 잘하는 외국어는 황실에서도 우선적으로 가르치지 않는 영어고 영국인들에게 유독 친근히 대하는 모순된 태도를 보이며 의혹이 점점 커졌다. 무엇보다 임종 때 재석에게 순원황후의 죽음에 대해 사과하고 "내가 할 일이 많을 줄 알았는데 이미 다른 이들이 많은 일들을 해놓아 내가 끼어들 필요도 능력도 없었다. 내가 아는 것들은 금방 쓸모없는 게 되어버렸다. 이제 이 꿈을 끝내고 내가 온 곳으로 돌아가노라."라는 취지의 유언을 남기고 숨을 거둔 것이 결정타. 독자들은 그가 재석, 상희처럼 원 역사에서 온 빙의자가 역시 맞았으며 재석이 무종 때부터 일으킨 변화로 인해 대한이 이미 대제국이 되어있어 원 역사 세계에서 갖고 온 지식도 별 쓸모가 없어지자 그냥 태자→군주라는 초특급 금수저 코스 인생을 한껏 즐겨보기로 하고 즐겁게 살다가 명이 다하자 원래 삶으로 돌아간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20][21] 사후 재석이 그의 유언을 곱씹으며 생각하는 장면이 나옴으로써 사실상 확정. 이번 생의 아버지가 자신과 같은 현대인 빙의자였을 가능성이 있음을 의심하게 된 재석은 내심 경악을 금치 못했으나, 그가 살아서 함께한 12년 동안 지켜봐온 모습을 돌이켜보며 위험인물은 아니라고 판단하며 일단 그가 이 삶에 만족했다고 하고 죽었으므로 자신처럼 윤회하지는 않을 가능성이 더 높지만[22] 혹시 다음 윤회에서 그를 다시 만나더라도 굳이 선빵치지는 않기로 한다.[23]
사후 흥선제 시기의 전개를 보면 광덕제의 여성 편력과 그로 인한 다산은 커다란 나비 효과를 낳았는데 황자와 황녀들의 숫자가 워낙 많아서 어지간한 경화사족 가문들은 전부 왕실과 통혼에 성공했다. 본국이 아닌 속지 출신인 대남도 정씨 가문 자제에게 평소라면 언강생심 쳐다도 못 봤을 적통 공주와 혼인할 기회가 주어질 정도였다. 덕분에 훗날 러시아, 청에서 국혼 제안이 들어왔을 때 완강한 반대가 아닌 반반으로 여론이 갈렸고 반대측도 흥선제가 결정을 내린 순간 군말 없이 따랐다. 흥선제의 외가인 장동 김씨는 어차피 참여할 수 없었고 나머지 가문들은 광덕제 소생을 통해 왕실과 사돈이 되어서 완강하게 반대할 필요가 없었던 것. 본의 아니게 황실의 국제화에 공헌한 것이다.##
한편 이 인간이 오래 재위했다면 대한이 흔해빠진 제국주의 국가로 전락하고 말았을 것이라는 감상도 있다.# 본격적으로 영토 확장을 개시한 2~3부에서 재석은 명분 있는 전쟁만 하고, 약소국이라도 존중하고, 충성의 대가로 정복한 지역의 원주민 권익을 보장하는 등 영토 확장에 으레 따라오기 마련인 패권주의를 최대한 지양하는 행보를 보였고 이것이 경로의존성으로 작용해 4부의 대한은 제국주의 시대에 다른 제국들과 확연히 다른 모습을 여럿 보여주는데[24] 서양식 동군연합 해보고 싶다는 이유로 대뜸 유구의 독립국 지위를 빼앗은 데서 보여주듯 머리에 든 게 딱 서양 근대와 제도에 대한 막연한 동경과 흉내 밖에 없는 인간이 오래 즉위했으면 광덕제 본인은 자제하더라도 기풍에 변화가 생겨 남의 나라에 아편 팔아먹고, 수탈과 침략 일삼는 영프나 아니면 최악의 경우 원역사에서의 일제와 다를 게 없는 국가로 바뀌어 갔을 거라는 것.[25][26]
2.2. 황실
- 황후 → 황태후 → 정성태황태후 윤씨
파평 윤씨 가문 사람으로, 성격이 원평제와 달리 인자해 손주들에게 할마마마라고 부르라고 명했다고 한다. 태손이 어머니를 잃은 후 1년간 자신 곁에 두고 직접 키웠다. 태자가 아들 둘을 잃고 둔 막내인지라 애지중지하다가 버릇을 잘못 들였다 한다. 광덕제가 사망하며 마지막 남은 자식까지 먼저 보내게 되고, 황실의 가장 큰 어른인 태황태후가 된다. 남편을 잃은 후에는 고양이 키우는 데 재미를 붙이고 있으며, 재석이 여성 의무교육을 시작하기로 하자 사재를 내어 사대부 여식에게 현모양처 교양을 가르칠 여학교인 이화학당(李花學堂)을 세워 재석에게 힘을 실어준다. 재석이 비행선을 직접 탄 것을 목격하고 몹시 진노해 웬만한 일에는 당황하지 않는 노괴 재석을 당황하게 만드는 엄한 면모도 있다. 1839년 음력 1월 19일(양력 3월 4일) 노환으로 붕어했다. 재석은 이번 생에서 어린 나이에 어머니를 잃은 자신을 따뜻하게 키워준 할머니의 죽음에 진심으로 애통해한다. - 효비 → 순원황후 김씨(孝妃 → 純元皇后 金氏)★
광덕제 이순의 아내이자 이진의 어머니. 안동 김씨 김조순의 딸. 원평 23년(1805년) 태자비로 간택되었다. 성품이 곧아 남편의 잘못된 행동에 대해 잔소리를 많이 했다고 한다. 1822년 태자 시절의 광덕제가 일으킨 음주운전 마차 사고로 끔살당한다. 아들을 끌어안아 감싼 채로 죽었으며 그래서 재석은 빙의 초장부터 눈떠보니 피투성이 시체의 품안이라 충격과 공포를 제대로 맛본다. 자녀로는 장녀 화원군주, 요절한 장남 이윤, 차남 황태손 이진, 삼남 이운이 있었다. 효비라는 시호를 받고, 훗날 남편이 제위에 오르면서 황후로 추존된다. 원역사에서는 68세까지 살았으나 이 세상에서는 훨씬 빨리 죽고 만 대체역사의 피해자. - 화원군주 → 화원공주 → 화원장공주 이○○
효비 김씨가 낳은 적장녀로 이 생에서 재석의 친누나. 1811년생. 광덕제의 자녀들 중 가장 맏이로 봉작도 가장 먼저 받아 작중 초반에는 군주였다가, 부친이 제위를 계승하며 공주로 승작되었다. 광덕제의 양악 취향 때문에 6살부터 강제로 매일 8시간씩이나 바이올린 연습을 하고 있었다. 1824년 조선창과 결혼하면서 막장 아버지에게서 벗어나지만, 바이올린 연습은 이미 습관이 되어버려서 지금도 매일 4시간씩 한다고 한다. 또 어머니가 죽은 이후로 남은 동생들을 돌봐야한다는 책임감 또한 강해서 동생들에게 어머니 노릇을 대신해준다. 손아래지만 황태손이라는 이유로 재석에게도 존대를 하는 것으로 보아 가족으로서 뿐만 아니라 황족으로써 갖는 책임감도 강한듯 하다. 정현공주의 국혼을 앞두고 그 성격을 교정하기 위한 방안으로 바이올린 교육을 제안하고 직접 가르친다.[27] - 창녕위 조선창
조식의 후손, 삼군부 참모본부 소속 부령. 화원장공주와의 사이에 2남 2녀를 두었다. 케임브리지 공과 알게 되면서 혼담이 오가는데, 둘째딸 조자현을 아내로 달라고 하자 탐탁지 않아 했으나 자현 본인이 혼인을 원하자 결국 허락한다. - 조미현
화원장공주와 조선창의 큰딸. 1850년 이전에 혼인했다. - 황손 이윤(李奫)
광덕제가 태자 시절 낳은 적장남으로 재석의 친형. 재석 빙의 전 어린 나이에 요절했다. - 순친왕 이운(順親王 李鄖)
광덕제의 적삼남. 1820년생. 효비 김씨의 막내아들로 이 생에서 재석의 친동생. 형 이진(재석)을 잘 따른다. 나이를 먹자 공부를 시작했으나 학업에는 별 뜻이 없고 주로 장난감과 만화책에만 관심을 보인다. 그래도 후계자가 아닌 이상 그냥 종친으로 살 운명이라 큰 문제는 안 되고 있다고.[28] 하지만 재석은 이운이 만화책만 좋아하다가 황후 소생 이복동생들과 비교당할까봐 이제 공부를 시켜야겠다고 다짐한다. 하지만 재석이 즉위한 후 친왕들에게 주어지던 시강원과 익위사를 폐지하고 종학에 가서 공부하라고 하자 땡땡이를 일삼으며 낚시에 푹 빠져 있는 등 공부를 계속 멀리하고 있다. 외전에서 묘사된 바에 따르면 공부를 싫어해서 땡땡이를 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위의 형제이자 친형인 재석이 너무 엄청난 신동이라(실은 인생 5회차라 그런 거였지만) 도저히 자신으로서는 발끝에도 따라갈 수 없는 재능임을 보고 자라면서 지레 좌절감을 갖고 공부에 흥미를 잃은 것이고,[29] 그나마 낚시 솜씨로 부황 광덕제에게 생전에 유일하게 관심을 받은 후로 낚시에 몰두하며 좌절감을 잊으려 하는 것이라고 묘사되어 이것이 어떤 복선으로 보인다. 영국에서 빅토리아 여왕 대관식이 열린다는 소식을 듣고 특사로 영국에 보내달라고 재석을 졸랐으나 거절당하고, 결혼 후에는 마차에 캠핑카를 차려서 아내를 데리고 며칠씩 낚시 여행을 하는데 때로는 단둘이 하루 종일 캠핑카에 틀어박히기도 한다고. 낚시를 위해 배 안에 물고기 가공시설까지 다 갖춘 500톤급 낚시 전용선을 건조해 유구까지 다녀오기도 한다. 태평천국과 전쟁 중 포로로 잡아온 홍천귀복의 보호자가 되어 친아들처럼 정성을 다해 양육한다. 영국에서 케임브리지 공이 방문한 후 여기에 대한 답방 겸 런던 만국박람회에 참가할 대표단장을 겸해 유주에 다녀오라는 명을 받는다. 전에는 그렇게 가고 싶어 조르던 것과 달리 그간 처자식이 생기고 철이 들어서인지 가야할지 고심하지만, 세계일주도 하고 미주의 물고기도 잡을 겸 해서 귀국할 때는 미주를 통해 오고 싶다고 청하고 재석이 이를 허락하자 유주행을 수락한다. - 순친왕비 남씨
전 학무대신 남명한의 손녀. 순친왕과의 사이에서 2남 1녀를 낳았다. 케임브리지 공자빈 조자현을 돌본다는 명목으로 남편의 세계일주에 동행한다. - 우산공(于山公) 이송
1840년생 순친왕의 적장남. 태자 이창이 가장 가깝게 여기는 사촌이다. 부모와 함께 세계일주에 동행한다. - ○○군주 이세연
1841년생 순친왕의 적장녀. 순친왕은 재석에게 자기 딸을 홍천귀복과 결혼시키는 것은 절대 안 된다고 말한다.[30] 노아나를 이화학당에 입학시키면서 학우로 같이 다니기 위해 함께 학당에 들어가느라 다소 이른 나이에 입학했다. 학업 때문에 가족의 세계일주에 동행하지 못하고 한양에 남고 그동안은 대궐에서 지내기로 했다. - 공자 이○
순친왕의 막내아들. 아직 어려 부모와 떼어놓을 수 없는 나이라 가족과 함께 세계여행을 하게 된다. - 풍어당 김씨(風禦堂 金氏), 만선당 심씨(萬扇堂 沈氏)
순친왕의 측실들. 낳은 자식은 없다. 당호에는 남편의 낚시 애호 취향이 반영된 듯하다(...) 한자는 적당히 바꿔서 말장난으로 지었지만.
- 태자비 → 황후 → 황태후 박씨
원평 41년(1823년) 겨울에 간택된 광덕제의 계비로 재석의 계모. 1809년생. 반남 박씨 가문으로 서경 요양부윤을 지낸 연암 박지원의 4남 박종선[31]의 딸. 최종 경쟁자인 풍양 조씨, 경주 김씨 가문의 여식보다 가문의 힘이 약간 약하므로 현재의 권력구도를 크게 뒤흔들 일이 없다는 정치적인 고려를 국상 정약용이 원평제에게 진언하여 간택되었고, 3년동안 아들을 둘을 낳고 셋째도 임신해 입지를 굳힌다. 그다지 부유한 편이 아닌 집안에서 태어나 자라다보니 부와 권력에 대한 욕망이 강해, 남편이 기분이 좋을 때마다 선물하는 휘황찬란한 보석들만 보면 기뻐서 아주 환장을 한다. 이에 남편에게 아무런 잔소리도 하지 않고 무슨 일을 하든 가만히 있으며 순종 내지 방관하는 등 철저히 비위를 맞추는 한편, 더한 부를 얻기 위해 자기 소생의 아들을 보위에 올릴 궁리 끝에 태손을 미주에 특사로치우라보내라고 광덕제(당시 태자)를 충동질한다. - 숙친왕 이용(李瑢)
광덕제의 적사남으로 1825년 생 박씨 소생의 장남. 상당히 영특하긴 하지만 어머니의 헛된 꿈 때문에 조기교육으로 혹사당할 운명에 처해졌다. 하지만 본인은 아직 어린아이에 불과해 스스로 한 게 없기에 재석은 별다른 유감이 없고 오히려 귀여워하는 편이다. 성인이 된 후로도 별다른 야심이 없고 성격이 무난해 재석도 동생들 본인들과의 사이는 좋다. 어머니가 태자를 바꾸려는 야망을 포기하고 재석과 동맹하여 공부 압박에서 벗어나나 싶었으나, 재석 즉위 후에도 종학에서 하교하자마자 독선생들에게 과외를 계속 받느라 놀 틈이 없다고 한다. 공부에 시달리는 삶 때문에 차라리 비행선을 타고 하늘을 훨훨 날아보고 싶다는 소망을 동생 경친왕에게 말한다. 물론 재석은 비행선을 타보고 싶다는 동생들의 요청을 안전 문제로 거절할 수밖에 없었지만 장장 4개월을 졸랐다고 한다. 1843년 이전에 혼인했다. 1849년 24살 나이에 결국 재석의 허락을 얻어 비행선을 타는 소원을 이룬다. - 경친왕 이전(李佺)
광덕제의 적오남으로 1826년 생 박씨 소생 차남. 형과 같이 어머니가 강요하는 과도한 공부에 시달리고 있지만 피할 수 없으면 즐긴다고 형과는 달리 공부에 나름 재미를 붙였다. 1843년 이전에 혼인했다. 1849년 형 숙친왕과 함께 처음으로 비행선을 타게 된다. - 화성장공주 이○
광덕제와 박씨 소생 장녀. 1827년생. 15세에 파평 윤씨 집안과 혼인했다. - 화선장공주 이○
광덕제와 박씨 소생 차녀, 1829년생. 박씨가 원평제 장례식에서 무리하다가 임신 8개월만에 조산으로 태어난다. 다행히 무사히 자라났고 대한이 유구를 복속하면서 유구국과 정략결혼을 할 것임이 결정된다. 당시 겨우 3살의 나이였으며, 당시 광덕제가 사돈을 맺기로 한 상육이 아직 아들을 낳지 못한 상태라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상대와 약혼하게 된 셈이다. 정작 나이가 찬 후에는 태후 박씨가 딸을 외국에 보내는 걸 내켜하지 않아서 결국 상육의 아들에게는 조카 정민공주가 대신 시집간다. 그런데 정민공주의 결혼식이 아주 성대하게 치러지는 것[33]을 보고 샘이 난 모후의 입방정 탓에 재석이 짜증이 나버려서 그 불똥으로 노처녀가 되도록 결혼을 못하게 생겼다. 그러다가 청나라에서 대한 공주를 태자비로 요청하자 태후 박씨가 그 자리를 노렸으나 장공주 본인도 외국으로 시집가는 게 싫고 재석도 자기 친딸을 보내려 하여 지나가고, 재석이 대남 정씨의 충성심을 다시 고취하기 위해 정지윤을 부마로 추천하자 태후는 경화사족이 아니라고 거부하려 했으나 재석이 그러면 평생 장공주는 시집 못 갈수도 있다는 은근한 협박을 하자 마지못해 동의하여 이 시대 기준으로는 늦은 결혼을 하게 되었다. - 정지윤
화선장공주의 부마. 대남 정씨 장손. 즉 1부 재석(무종대왕)의 자손이다. 갓 스물에 대과에 합격한데다 미남자여서 화선장공주도 마음에 들어한다.
일단 여리고 순하게 자란 배경 탓인지 궁중암투를 벌일 담은 없어서 예왕처럼 암살자를 고용하는 선 넘는 짓은 저지르진 않지만, 미래를 내다보고 선물받은 폐물을 팔아서 젊은이들을 포섭하고 소생 자식들에게 교육을 제대로 시켜서 두각을 드러내게 하려고 한다. 광덕제는 아내의 배겟머리 송사를 받아들여 재석을 미주로 보내게 했지만 그녀의 검은 속마음을 다 꿰뚫어보고 있고 후계자를 바꿀 마음은 추호도 없으며, 그녀가 매달리는 것을 즐기고 그녀 소생의 자식들을 귀여워할 뿐이다. 재석이 미주 방문 동안 병에 걸리거나 사고를 당해 죽기를 바랬으나 무사히 돌아오고, 재석의 평판을 깎으려고 힘들테니 쉬라고 권했으나 5회차 인생인 재석이 그 속을 다 꿰뚫어보고 쉬지 않고 원평제의 빈소를 지킨데다 광덕제가 서둘러 재석을 태자로 책봉하는 것을 보면서 내심 부들부들거리지만 티도 못 내고 있다. 임신 8개월의 몸으로 원평제의 장례식에서 무리했다가 넷째아이를 조산한 후 건강을 해쳐 다시 임신하기 힘든 몸이 되고 만다. 재석이 유구 복속까지 성공하고 돌아오자 결국 현실을 인정하고 재석을 태자로 지지할테니 자기 소생 황자들을 해치지 말아달라는 의사를 밝히고 화해한다. 다만 소왕 역모 미수 에피소드 이후에는, 소왕의 구상이 너무 수준이 낮아서 중전은 수주대토만 하는 선에서 멈췄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더 현명하다는 평이 생겼다. 광덕제가 사망하며 황태후가 된 후로도 재석과의 동맹을 유지하고 있다. 1840년 재석의 미주 순방과 신불랑과의 정상회담을 하는 동안 대리청정을 맡으면서 권력 맛을 좀 봤으나, 샤를 루이 나폴레옹에게 홀랑 넘어가 은자 2만냥을 선물로 준 일로 재석에게 다시 약점을 잡히게 되었다. 하지만 프랑스에서 일어난 혁명에서 자신이 후원한 나삼이 중요한 역할을 하자 콧대가 다시 높아져서 유구 국혼에 간섭한다. 그러나 샤를 루이 나폴레옹이 그 은자로 아편 장사를 하여 다시 위신이 떨어진다. 태자비 간택에 관여해 영향력을 키우려고 한러국혼에 반감을 표한 것이 재석의 빈정을 상하게 해 되려 국혼을 확정시킨다. 그 후에도 화선장공주를 청나라 태자비로 보내려 하거나 아나스타샤의 교육을 맡으려 하는 등 내명부 주도권을 쥐려 하지만 권씨와 재석에게 번번이 가로막힌다.[32]
- 재인 → 황빈 → 황비 홍씨
광덕제의 후궁. 1800년 생. 하와국 왕비가 된 현순공주 이아지의 생모. 미주 출신으로, 가장 총애받는 후궁이다. 정실 박씨 못지않게 온갖 패물을 자주 선물받았고, 광덕제가 임종 때 12명이나 되는 후궁들 중 유일하게 따로 유언을 남겨 챙겨준 후궁도 그녀다. 장장 20년 동안 총애를 잃지 않아 원하기만 했다면 귀비, 황귀비도 될 수 있을 정도였지만 본인이 칭호에는 별 욕심이 없어 광덕제 생전 내내 빈으로만 머물렀는데, 이 때문에 다른 후궁들의 봉작도 빈 이상이 아무도 없게 되는 의외의 불똥이 튀었다. 광덕제 사후에야 빈에서 비로 승작된다. 사위인 하진교를 통해 재석에게 로비를 하거나, 미주에서 동빈의 부친 김재정의 경거망동을 수습하는데 도움을 주는 등 뛰어난 정치력을 보이고 있다. - 석왕 이헌
광덕제의 서자. 1824년생. 홍씨 소생 외아들로 아지의 동복동생. - 석왕비 성씨
창녕 성씨. 법무대신을 역임한 성수재의 딸. - 노선옹주 이○
광덕제의 서녀, 홍씨의 막내딸. 1844년 혼인한다.
- 선시 → 귀인 최씨
광덕제의 후궁. 본래 광덕제가 궁궐 밖에서 끼고 놀던 기생 출신으로, 그로 인해 첫 아들을 대궐이 아닌 곳에서 출산했다. 광덕제는 아이 엄마를 궁궐로 데려와 후궁으로 들어앉히며 문제를 해결한다. - 희왕 이신
광덕제의 최 선시 소생 서자. 1827년생. 나이가 차면 왕으로 봉작될 것이다. 궐 밖에서 태어나 처음에는 사생아였다. 당연히 친자 논란이 있었지만 '문제의 기생 출신 후궁은 광덕제가 따로 집을 마련해 준 뒤로 다른 남자와 만난 적이 없다'는 이유로 어찌어찌 가라앉았다.[34] 재석은 이 아이를 볼 때마다 궐 밖에서 태어났다는 공통점 때문에 1부에서 상희와의 사이에서 가졌던 아이(훗날 2부에 등장한 정일한의 부친이자 정준석의 조부로 대남 정씨 및 조홀국 왕가의 시조가 되는 그 아이, 뱃속에 있을 때 자신이 죽는 바람에 얼굴도 못 본) 생각이 나서 씁쓸해한다. - ○○옹주 이○
광덕제의 최 선시 소생 서녀. 동복오빠와 연년생인 1828년생. - 영빈 이씨
광덕제의 후궁. 화선장공주가 파혼하자 자기 소생 작은딸을 유구 세자빈으로 대신 보내려고 자원했으나 무산됐다. - 미순옹주 이○○
광덕제의 서녀, 1823년생. 4부 시작 시점 가장 막내...였지만 이후로도 동생들이 1년에 2명씩 숨풍숨풍 태어나 곧 그 타이틀을 잃는다. - 현혜옹주 이○○
광덕제의 서녀, 1931년생.
- 선시 → 선빈 김씨(先嬪 金氏)
광덕제의 후궁. 광덕제의 첫아들을 낳고도 얼마 안 가 총애를 잃으면서 찬밥 신세로 처량하게 지냈다. 그나마 하나뿐인 자식 효왕이 효자인 덕에 아들의 분가 후로는 효도받으면서 잘 지낸다. - 효왕 이정(李嵉)
광덕제의 서장남이자 재석의 이복형. 1814년생. 어른들에게 별다른 관심을 못 받았는지라 애정결핍으로 심한 소외감과 자격지심을 느끼고 있어[35] 적자인 이복 남동생들을 피해다니고 재석이 불러도 통 오지 않는다. 1827년 청송 심씨 규수와 혼인해 출궁했다.[36] 혹여 그가 3부의 예왕처럼 될까 두려운 재석이 형을 직접 찾아가 형으로 대접하며 공을 들인 끝에 마음을 열었고 3부의 현왕처럼 재석과 사이가 좋아졌다. 재석이 미주에서 귀국하자 눈물을 쏟으며 반겼다. 분가 후로도 옛날 월산대군처럼 사람도 안 만나고 거의 집에만 틀어박혀 지내고 있지만, 그나마 아내와는 금슬이 좋다고 한다. 광덕제의 아들들 중 가장 연장자라는 이유로 소왕의 암살 타깃 리스트에 올랐지만 얼마 못 가 소왕이 자멸해버리면서 무사할 수 있었다. 재석이 즉위한 후에도 집에 틀어박혀 몸을 사리고 지내는 모습이 안타까워진 재석이 여행이라도 다녀오라는 의미로 청나라 봉선 의식 축하 사절로 임명해 보내져서 극진한 대접을 받는다. 막내딸 길성현주 이혜미는 실위세자 배음도의 세자빈이 된다.
- 진빈 최씨
광덕제의 후궁. 화선장공주가 파혼하자 자기 소생 딸을 대신 유구 세자빈으로 보내려고 자원했으나 무산됐다. - 현진옹주 이○○
광덕제와 최씨 사이의 장녀. - 명진옹주 이○○
1835년생, 광덕제와 최씨 사이의 차녀, 광덕제 사후 태어난 유복녀. 1852년 이전에 혼인했다.
- 숙빈 오씨
광덕제가 마지막으로 들인 후궁. 1818년생으로 재석보다 두 살이나 어린 소녀이다. 광덕제의 금강산행에 동행했다가 사고를 목격한다. - ○○옹주 이길현(李吉賢)
광덕제의 서녀. 1818년생. - 정왕 이철(靖王 李悊)
광덕제의 서자. 1822년생. - 황자 이○&이○
광덕제의 쌍둥이 서자들. 1833년생. 조선시대부터 헤아려 4백년 대한 역사상 임금의 자식이 쌍둥이로 태어난 최초 사례가 되었다. 그리고 2살만에 아버지를 잃게 됐다.
- 영왕 이선
원평제의 서자. 1788년생. 이복동생인 광덕제와 달리 멀쩡한 상식인이라고 하며 이하 이복동생들도 마찬가지라고 한다. 광덕제가 태자 시절에는 '저 행실로 보아 결국 폐태자될 것 같은데 그러면 나에게도 기회가 오지 않을까?'하고 기대했던 듯하나 결국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자 모든 걸 포기하고 아무것도 안 하고 조용히 살고 있다. 이건 전왕도 마찬가지. 1843년 사망한다. - 경흥공 이○
영왕의 장남. - 명주공 이결
영왕의 차남. 1818년생, 소왕의 난이 발각되면서 사촌동생 종성공의 부인으로 예정되었던 도쿠히메와 얼떨결에 대신 결혼하게 된다. - 명주공부인 덕희(德姬, 도쿠히메)
쇼군의 조카, 히로시마 번주의 딸. 1819년생. 어눌하지만 한국어를 어느정도 익혀왔으며 겉으로는 순진한 척 하지만 정치적인 머리는 잘 굴러가는 인물로 보인다. 키가 작고 귀여운 전형적인 일본 미소녀 스타일 외모라고 한다. 사촌동서들인 재석의 아내들 중 자신과 똑같이 바다를 건너온 김주희에게 동질감을 느낀다. - 공자 이○○
1837년 생 명주공의 적장남. - 문선후 이신
영왕의 서자.
- 전왕 이종
원평제의 서자로 광덕제의 이복동생. 1798년생. 이청의 친형. 광덕제가 그의 딸을 일본 간인노미야 친왕에게 시집보내겠다고 강압적으로 통보하자 광덕제에게 불만을 품지만 결국 체념하고 분부대로 한다. 재석이 흥선제로 즉위한 후 1845년 신불랑 황제 나폴레옹이 붕어하자 해외여행 겸 귀국길에 딸도 만나고 오라는 배려 차원에서 부부동반으로 조문 사절로 보낸다. - 전왕비 한씨
황양공주, 북원공을 비롯해 3남 2녀를 낳았다. - 북원공 이혼
1821년생, 이종의 장남.
- 신혜옹주 이○○
현종 이영의 막내딸로 원평제의 막내고모. 1765년생. 부황이 40세에 얻은 늦둥이라 실제 나이는 원평제보다 두살 어린 탓에 원평제와 거의 남매처럼 자라 매우 친하다.[37] 남편이 31세의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나 과부가 됐다. 태손빈 권나현의 조모이며 맏손녀 나현을 어렸을 때부터 굉장히 예뻐하며 빡세게 조기교육을 시켰다. 본래는 나현을 심왕부로 시집보내려 했으나[38] 심왕부 측에서 이번에는 청나라 공주를 세자빈으로 들이기로 했다며 완곡하게 거절하였으며 광덕제의 두번째 비 간택 때는 촌수가 가깝고 간택 연령에 맞지 않는 등 조건이 맞지 않아 포기했다. 그 후 들어온 광덕제의 서장자 이정과의 혼담은 손녀가 아깝다며 직접 거절하였다. 그녀의 까탈스러운 손녀사위 고르기에 진절머리가 난 아들 권세직[39]이 딸을 혹여 노처녀로 만들까 걱정하며 이제 다 그만두고 적당한 명문가에 시집보내자는 소릴 했다가 모친에게 호통만 듣고[40] 기껏 들어온 혼담도 다시 옹주가 걷어차 버릴 정도로 손녀사윗감 고르기에 까탈스럽게 굴었다. 그러다가 태손빈을 간택한다는 소식과 국혼을 당긴 그 뒷사정을 듣고서는 하늘이 내린 마지막 기회라며 손녀가 간택에 뽑히도록 전력을 다해 밀어붙였다. 간택에 뽑힌 나현이 태손만 미주로 가면 자신도 생과부로 죽은 인선황후 꼴이 날까봐 두려워 편지를 써 조모에게 도움을 요청하자 절대 자기 손녀에게 그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된다며 한걸음에 달려와선 나현의 이야기를 듣고 황후와 원평제에게 청을 올려 손녀와 잉첩으로 뽑힌 후궁 셋[41]을 태손인 재석과 함께 미주로 보냈다. 1839년 겨울 노환으로 사망한다.
- 수복장공주 → 수복대장공주 이○○
원평제의 동복동생. 1771년생으로 원평제보다 8살 어리다.
- 흥양백 이하응(興陽伯 李夏噟)
황실 종친. 원 역사의 흥선대원군과는 혈통부터 다른 동명이인이다.[42] 예술가들의 후원자로 이름 높은 종친으로 반촌극단 배우들과 다양한 남녀 작가들의 든든한 뒷배가 되어준다. 원 역사의 이하응과 달리 예술가로서의 재능은 별로 없지만 다른 이의 작품을 평가하는 안목과 사업가 역량은 탁월하여 원 소스 멀티 유즈(OSMU)와 PPL 개념을 도입했다.
2.2.1. 재석의 가족
- 태손빈 → 태자비 → 황후 권나현(權娜賢)
1814년생으로 이번 생의 재석보다 2살 연상. 안동 권씨로 권훤의 6대손이자 현종의 막내딸 신혜옹주의 손녀로 현종의 현손인 재석에게는 재종고모(7촌)가 된다. 모 아역 출신 배우를 닮은[43] 상당한 미녀이며 키도 상당히 크다.[44] 신혜옹주가 원래는 심왕비로 보내려고 조기교육을 시켰는데 결국 심왕비는 되지 못했지만 대신 태손빈이 되어, 미주행 직전에 만 14세의 나이로 재석과 혼인한다. 아직 어리지만 6대조 권훤과 이마리 부부룰 닮아 총명하고 강단있는 성격으로 본인 스스로 태황에게 청하여 측실 3명까지 모두 이끌고 미주까지 동행한다. 재석은 태손빈은 당연히 상희일 것이라며 근거도 없이[45] 확신하다가 결혼식 날 밤 연산군 이야기를 못 알아듣는 걸 보고 그녀가 상희가 아닌 것을 확인하고 크게 실망한 뒤 천녀를 원망했다.[46] 하지만 권씨 본인은 아무 잘못이 없는 게 사실인지라 결국 현실을 받아들이고 미주로 가는 배 안에서부터 권씨를 아내로 대하기 시작했고, 제법 잘 지내게 된다. 아직 12살인 연하남 남편이 사실 정신연령으로 따지면 130년 묵은 노괴란 것은 상상도 못하고 귀엽게 여기면서 남동생처럼 대하며,[47] 어려서 친모를 잃은 재석에게 모성애 비슷한 것을 느끼는 듯한 묘사도 있다. 신혼 시절에는 재석이 몸도 작고 아직 2차 성징을 하지 않아 성관계를 미뤄왔으나 재석이 13살이 되자 성장하여 키 차이도 5cm 정도로 따라잡았고, 신불랑 방문 중 누벨오를레앙에서 처음으로 부부관계를 시작한다. 재석이 태자로 책봉되면서 자동으로 함께 태자비가 되고, 조모의 조기교육 덕분에 어린 나이에도 금세 내명부를 장악한다. 1833년 초에 첫 출산을 하는데, 결혼 7년 만에야 겨우 얻은 아이가 딸이라서 실망하지만 재석이 나름 위로해준다. 광덕제가 사망하고 재석이 흥선제로 즉위하면서 중전이 되었다.
측실들과의 관계는 초기에는 남편의 사랑을 놓고 경쟁하는 사이라기보단 막내남동생을 둔 누나들처럼 친하게 지냈으며, 여느 십대 소녀들처럼 수다를 떨고 놀기도 했다. 다만 재석이 밤일을 할 수 있게 된 이후로는 미묘하게 경쟁과 긴장의 기류가 흐르기 시작했고, 다들 20대에 접어들며 4명 중 3명이 자기 소생 아이(모두 딸이었지만)를 갖고 난 후에는 자매 같던 분위기는 옛이야기가 되었고 확실하게 라이벌이 되었다. 1837년 드디어 첫아들을 출산하면서 라이벌들을 확실히 제압하게 되었다. 하지만 재석의 백두산 봉선 의식에 동참하려고 여성 제관들이 참여하게 하자는 아이디어를 내서 통과되긴 했으나 중전은 도성을 지켜야 한다는 신하들의 만류로 현귀비 최씨에게 대표 여제관 역할을 빼앗기게 되었다. 하지만 상궁들의 정보망을 통해 재석과 최씨의 동침과 성관계 횟수까지 전부 파악하는 치밀함을 보이고 있으며, 최씨나 김씨가 아들을 낳으면 그들의 친정인 북한이나 미주가 뒷배가 되어 원자의 자리를 위협할 수 있다고 판단해 아들을 낳을 경우 먼저 손을 쓸 생각도 하고 있는 등 이전 재석의 삶들과 달리 내명부에 피바람이 일어날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할머니 신혜옹주가 사망하자 법도를 깨고 사가에서 상을 치른 일 때문에 정치적으로 약점이 생겨 재석이 1840년 한-신불랑 정상회담을 위해 미주로 떠날때 대리청정 권한을 태후 박씨에게 넘겨주게 되었다. 하지만 태후가 샤를 루이 나폴레옹에게 속은 것 때문에 스스로 입지를 약화시킨데다 재석이 경복궁으로 이어할 때 태후가 자기는 생활이 편한 창덕궁에 남겠다고 자충수를 두는 덕분에 다시 내명부를 장악했다.
딸 현지를 시집 보내고 허전해 하던 차에 무뚝뚝하고 선병질적인 현지와는 전혀 다른 귀엽고 감정 표현이 다채로운 아나스타샤가 한국에 도착하자 정치적 이해관계를 떠나 껌뻑 죽는 모습을 보인다.
- 황태자 이창(李閶)
재석과 권씨의 장남. 1836년생. 출생과 동시에 원자가 되었으며, 10세 때 태자로 책봉되었다. 11살에 중용을 배우는 엄청난 공부량에, 태손 시절부터 천재로 주목받은 인생 5회차 아버지 재석과 비교까지 당하면서 거의 말라죽어가고 있으며 일이 바빠 아들에게 신경을 못 써주던 재석은 태자의 정신이 피폐해지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부자 간의 시간을 가져야겠다고 생각한다.
재석의 명으로 공부량이 줄어들고 부자 간의 시간으로 숨통이 트이게 되자 활발해지고 이성에 호기심도 생기는 등 그 나이대 아이다운 모습을 보인다. 누나 현지와 결혼할 청 황태자 영록에게 "누나 무서운 사람이다"라며 장난까지 칠 정도.
만 13세에 다섯 명씩이나 되는 아내가 한꺼번에 생겼는데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다보니 부부관계는 이듬해가 되어서야 시작하지만 아내들에게 나름 정성을 쏟는다. 종종 아나스타샤의 하교 마중을 가기도 하고[48], 영화공주에게 가장 끌리지만 다른 후궁들도 외면하진 않는다. 할아버지 광덕제의 피를 물려받았는지 러시아와 후송이 자기 태자비와 후궁으로 자국 공주를 보내고 청나라 황태자가 자기 누나랑 결혼하는 걸 옆에서 보면서 주변국들이 대한과 혼인관계를 맺고 싶어한다는 걸 알게되자 "대한과 혼인관계를 맺지 못한 주변국들의 불만을 해소할 수 있게 주변국들에 연통을 돌려 혹시 공주를 후궁으로 보낼 의향 있는지 물어보자"는 엉뚱한 제안으로 재석을 당황하게 만들기도 했다. 1851년 아나스타샤와 정식으로 혼례를 치르는 시점에서 이미 후궁을 둘이나 임신시켰다. 이후 태자의 관례에 따라 미주를 방문하는데 사냥 도중 낙오되었다가 자신을 구해준 토인 소녀 콜레스타랑 그렇고 그런 사이가 되어버렸고, 아나스타샤에게 용서를 구하나 그녀가 쿨하게 인정해주면서 미주 유지 출신으로 한 명 더 들이라고까지 허락하며 후궁이 둘이나 더 늘어나게 된다. 할아버지 광덕제처럼 하렘을 만들면서도, 동시에 정처인 아나스타샤에게는 꼼짝도 못 하는 공처가의 길을 밟고 있다. 영록이 결혼하러 왔을 때 우리 누나 무섭다며 나중에 도움이 필요하면 독수리 깃털을 꽂아 보내라고 입을 털었는데 정작 이쪽이 깃털을 흔들게 생겼다. - 태자비/누국공주 노아나(壘國公主 露○○, 아나스타샤 니콜라예브나 로마노바)
루스국 차르 니콜라이 1세의 장녀. 1842년생. 국혼 대상인 대한 황태자 창보다는 5살 어리며 아버지인 니콜라이 1세가 대한과의 우호관계를 위해 대한 황태자와의 국혼을 추진하면서 대한 역사상 최초의 유주인 황태자비가 되어 8살 어린 나이에 대한에 시집을 왔다. 아무래도 나이가 어리다보니 입궁 후 2년간은 약혼자 신분으로 지내며 예법을 가르치고 혼례는 10살에, 초야는 다시 그로부터 몇 년 뒤에 치르는 것으로 합의하게 된다. 원래 3부의 성친왕과 올렝카를 모델로 한 기사왕 동화를 좋아해서 '동방의 왕자님'과 결혼하게 된다는 소식에 기뻐했다.
대한에 가서는 깜찍한 외모의 백인 미소녀가 한국어에 능숙하고 예절 바르기까지 하다는 점을 어필해 무뚝뚝한 맏딸 현지에 익숙해져 있던 중전의 혼을 쏙 빼놓는다. 로마노프, 노서아(露西亞)에서 따온 노(露)씨 성을 받는다. 자신보다 먼저 태자와 혼례를 올린 후궁들과의 첫 대면에서 후궁들이 텃세 겸 견제 의도로 올린 질문들을 천연덕스럽게 흘려넘기고[49], 태자에게 유도질문을 걸어 태자가 얼떨결에 지금 이상으로 후궁을 더 들이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게 만들 정도로 어린 나이임에도 정치력에서 뛰어난 자질을 보인다. 콜레스타의 일을 말끔하게 수습하는 수완을 보고받은 재석이 '얘 사실 인생 3회차쯤 도는 회귀자나 환생자 아니냐'고 혀를 내두르며 총명한 며느리를 보내준 차르에게 감사할 정도.
다만 아직 어린 나이고 대한 문화에 대해 아직 잘 모르다 보니 속궁합의 의미를 '몸 속 영혼이 잘 어울리는 것'으로 오해하고 중전 앞에서 "전 태자 전하와 속궁합이 잘 맞는 거 같아요!"라고 말해 중전이 문자 그대로 뿜게 만들었다. 1851년 정식으로 이창과 혼례를 올려 태자비가 된다. 어려서부터 친정 가족들에게 '아샤'라는 애칭으로 불렸는데 남편 이창에게도 동일하다. - 영화공주/재인 조씨(迎華公主/才人 趙氏)
후송 황제 함화제의 적장녀. 1832년생. 다국적군 철군과 한-청 국혼으로 다급해진 후송에서 대한에 태자 후궁으로 보내기로 결정한다. 즉 말이 국혼이지 사실상 화번공주 신세. 하지만 아직 2차 성징도 안한 태자에게 5살 연상 누나를 후궁으로 먼저 붙여줬다가 태자가 영화공주의 꼭두각시로 전락할 것을 우려하여 약혼만 해두고 입궁은 아나스타샤가 올 때까지 미루기로 결정된다. 대한의 우려와 달리 정치적 암투나 가스라이팅 같은 것과는 거리가 먼 소극적이고 유순한 성품으로, 송태후는 어설프게 음모를 꾸미거나 베갯머리송사할 생각은 하지 말고 그냥 순종적으로 남편을 받들며 살라고 당부한다. 국혼 전부터 대한식 예절을 교육하러온 대한의 상궁들에게 혹독하게 수련받아 고생한다. 송태후와 황후가 그래도 외국에서 온 사절이라고 교육을 부드럽게 해달라고 부탁했으나 이 상궁들은 국적을 떠나서도 감히 상대하기 어려운 태후 앞에서 자신들 교육을 정 못받아들이겠으면 그냥 돌아가겠다는 을질을 하여 송태후를 굴복시킨다. 일개 상궁인 그들이 감히 타국 황족 상대로 이런 배짱을 부릴 수 있었던 건 태황 재석의 지시에 따랐기 때문으로 아나스타샤가 대한에 입국하기 이전에 교육을 마치고 영화공주를 보내는 일을 막기 위해서, 어차피 대한에 들어오면 상궁들에게 겪는 것 이상의 질시와 의혹의 눈길이 따라다닐 것이기에 미리 단단해져 있으라는 뜻에서 그런 지시를 내렸다. 1849년 아나스타샤가 입궁한 뒤 마침내 입궁한다. 후궁이지만 일국의 공주 출신인지라 다소 특별대우를 받는데,[50] 이를 질시한 대한 경화사족 출신 간택후궁 3인방에게 심한 따돌림과 괴롭힘을 당한다. 그나마 위로가 되어주는 건 남편의 총애. 이창은 원칙대로 노아나를 1순위로 대하고는 있지만 그와 별개로 영화공주의 성숙한 미모에 푹 빠져, 냉담하고 까칠했던 친누나에게 시달린 반작용인지 오히려 영화공주를 막내동생이 큰누나 대하듯 하며 응석을 부린다.
미주 순행 중 새로 후궁으로 들어온 콜레스타가 정식으로 선시 첩지를 받은 후 아나스타샤에게 콜레스타의 교육 담당으로 지목되어 용어와 예법을 가르친다.[51] - 선시 → 재인 김씨(先侍 → 才人 金氏)
태자 창의 후궁. 1834년생으로 대한인 후궁들 중 최연장자. 안동 김씨 출신. 외국 공주와 국혼을 하게 되면서 태자비 자리를 놓치게 된 경화사족들을 달래주기 위해 그들 중에서 후궁들도 간택했는데, 미리 뽑아둔 후 정실(예정)인 아나스타샤가 약혼자 신분으로 입궁한 후에 가례를 올렸다. 나름 괜찮은 외모의 소유자지만 아예 인종부터가 달라 특색있는 외모의 아나스타샤와 절세미녀인 영화공주 사이에 애매하게 끼어버려 이창에게 큰 관심은 받지 못하는 신세다. 이상은 조씨와 박씨도 마찬가지. 시아버지 흥선제의 아내들은 초반부터 정실 권씨가 군기(?)를 꽉 잡아 별다른 암투는 없었던 것과 달리 입궁 직후부터 경쟁하느라 물밑에서 아수라장을 벌인다. 그나마 다른 후궁들과 한마음이 될 때가 있기는 한데 바로 영화공주 괴롭히기(...) 다만 총애와는 별개로 임신은 본인 포함 다른 후궁들이 먼저 하자, 우월감인지 텃세가 좀 시들해졌다고 한다. 이창이 미주로 순행을 떠날 때는 당시 임신 중이라 동행하지 않는다. 남편이 떠난 사이 아들을 낳았다. - 황손 이선
1852년생 이창의 서장남. - 선시 → 재인 조씨(先侍 → 才人 趙氏)
태자 창의 후궁. 풍양 조씨. 후궁들 중 가장 먼저 임신하여 이창의 첫 아이를 낳았다. 산후조리+갓난아기를 돌보느라 미주행에는 따라가지 않는다. - 황손녀 이혜윤
1851년생 이창의 서장녀. - 선시 박씨(先侍 朴氏)
태자 창의 후궁. 밀양 박씨. 미주행에 동행한다. - 선시 김요령(金曜鈴, 콜레스타)
★[52][53]
태자 창의 후궁. 미주 토인으로 북미주의 소부족 야카마족 출신. 온 가족이 천연두에 걸려 마을에서 버림받았고 결국 본인만 겨우 회복해 살아남고 가족들은 모두 죽어 고아가 되면서 혼자 살고 있었는데, 미주 순행을 갔다가 사냥 도중 낙오된 이창을 구해주며 인연을 맺었다. 육체노동을 많이 했기에 남자인데다 자신보다 큰 이창을 번쩍 들고 옮길 정도로 힘이 세다.[54] 병에 잘 안 걸리는 한인과 결혼하고 싶다는 생각에 이창에게 신랑이 되어달라고 요구한다.[55] 이창 또한 그녀에게 생명을 빚지기도 했고[56] 곰보자국을 감안해도 얼굴도 이뻤고 기존 후궁들의 부드러운 몸과 달리 육체노동으로 단련된 탄탄한 근육질 몸매에 반해서 수색대가 들이닥칠 때까지 며칠간 같이 밤을 보낸다.[57] 한국어가 서툴러서 '나는 황태자'라는 말을 듣고도 그게 이창의 이름인 줄 알고 있다가, 뒤늦게 통역을 통해 자신이 보쌈해서 동침까지 한 남자가 '바다 건너 큰아버지'(대한 태황)의 아들이라는 것을 듣고 경악한다. 이후 그대로 이창이 데리고 가 후궁으로 삼으며 팔자를 고치게 된다. 재석 왈 '소설로 써도 안 믿을 로망스의 정석'. 아나스타샤는 기존에 이창에게 후궁을 더 들이지 않겠다고 약속받기는 했지만 생명의 은인이니 그녀를 인정해주었으며, 미주 토인을 후궁으로 들이면 미주 한인들이 불만을 품을 것이라며 밸런스를 맞추기 위해 미주 한인 출신 후궁까지 하나 더 들이라고 양보까지 한다. 이 정도로 한미한 출신의 여인이 후궁이 된 전례가 거의 없는지라 무시당하고 고생할까 걱정한 재석은 일종의 신분세탁으로 신욱족 대추장에게 입양을 주선해 그나마 나은 친정 배경을 갖게 하고 정식 입궁 전에 양부모로부터 제대로 된 한국어와 기본 예법을 배울 수 있도록 배려를 했다.[58] 보통 미주 토인들의 한식 이름은 원래 이름의 뜻을 고려해서 짓지만 콜레스타라는 본명의 뜻을 알 수 없는 상황이라 그냥 '별처럼 빛나고 방울처럼 반가운 아이'라는 뜻의 김요령이라는 이름을 내려주었다.
- ○친왕 이적(李玓)
재석과 권씨의 차남. 1840년 음력 6월 19일 생.
- 양원 → 재인 → 현빈 → 현귀비 → 황귀비 최진영
태손빈 간택에서 삼간택까지 올랐다 탈락한 후보로 그대로 재석의 측실이 된다. 1814년생으로 재석보다 2살 연상이며 북인 계열 집안 출신이다.[59] 권씨처럼 미인이며 키도 크다고 한다. 이건 다른 후궁들도 마찬가지다. 본인 포함해 모두가 함께 대화하는 걸 보면 걸그룹 같다고 할 정도. 이는 원평제 부부가 여색을 밝히는 광덕제를 의식해 태손도 그리 될까 염려하여, 원래 군주가 여색에 심하게 빠질까봐 너무 미녀로 뽑지 않던 관례와 달리[60] 최대한 외모를 보고 손자며느릿감을 뽑았기 때문. 세 후궁 중 가장 연장자라 맏언니 노릇을 하고 있고 비록 후궁이지만 가장 먼저 태손의 아이를 낳아 가문의 위상이라도 높이고 싶어할 정도로 나름 야심이 있다. 그 노력이 결실을 맺어 재석의 아내들 중 처음으로 임신하여 품계도 재인으로 승작하고 광덕제에게도 선물을 많이 받아 콧대가 높아졌다. 재석이 즉위한지 3년째에 백두산 봉선 의식을 치를 것이 결정되면서 북방 출신이라는 점이 감안되어 대표 여제관 역할을 맡아 재석을 수행하게 되고 그 덕분에 품계도 귀비로 올랐다. 북방 순행 당시 백성들이 그녀를 중전으로 오해하고 중전마마 만세를 외치자 당혹스러워하면서도 중전 자리에 대한 야심도 느꼈으나 중전 권씨의 무서움을 알고 있기 때문에 내색하지는 않는다. 이후 돌아와서 후궁들 중 낳은 아이의 숫자도, 작호의 품계도 가장 앞서는 자신의 상황을 돌이켜보며 지금의 자신도 충분히 많은 것을 가졌다고 생각하며, 욕심부리지 않고 현재에 만족하기로 한다. 셋째 아이로 마침내 아들을 낳자 북인들은 아예 황귀비로 승작하자는 여론을 일으키고, 중전은 그녀를 잠재적인 적으로 생각하나 정치적인 이유로 황귀비 승작에는 찬성한다. 혼자만 너무 품계가 올라서인지 이 승작에 맞춰 다른 두 후궁도 덤으로 빈에서 비로 승작된다. 대한 역사상 최초로 사후 추서가 아닌 살아 생전에 황귀비가 되는 위업을 달성한 후로도 이전에 결심한 대로 암투 따위는 엄두도 내지 않고 평온한 세월을 보냈으나, 십여년 정도 지나자 자식들이 성장하면서 골머리를 앓는다. 정확히 말하면 맏딸과 막내아들은 크게 두드러지는 특징이 없으나, 유독 관종 기질을 타고난 둘째딸만 문제. - 정순옹주 이예지
최씨의 장녀. 1832년 12월 생. 이번 생에서 재석의 첫 아이다. - 나주위 박승진
정순옹주의 부마, 나주 박씨 출신. - 정단옹주(貞端翁主) 이윤지
최씨의 차녀. 1835년생. 무리의 중심이 되고 추앙받길 즐기는 성격으로, 이화학당에 다니면서 유일하게 재학 중인 태황의 친딸이라는 점을 십분 활용해 학교의 여왕님으로 군림하는 화려한 학창시절을 보냈다. 정현공주처럼 까칠하지 않아 자기 사람들에게는 잘하는 성격이라 대하기 어려운 사람은 아니기도 하고. 그런데 졸업하고 의사가 되겠다며 의학당에 진학하고 싶다는 뜻을 밝혀 역사상 최초의 황녀 출신 의학도가 된다. 황자라면 사람들을 만나고 돌아다니며 민심을 얻었을 때 다소 문제가 생길 수도 있지만, 애초에 계승권이 없는 여자라 그럴 우려도 없으니 재석도 허락했다. 의학교에 다니게 되면서 혼기가 늦어지게 되었지만 딱히 신경쓰지 않는다. 사실, 애초에 결혼을 하기 싫어서 최대한 미루려고 의학교에 들어간 것이었기 때문이다. 주목 받기 좋아하는 성격상 다른 학생들에게 옹주 자가라고 떠받들리는 여왕님 놀이를 계속 즐기고 싶기도 하고, 자신보다 신분이 낮은 남자와 강혼해야 한다는 걸 내심 견딜 수가 없었던 것.[61]
친모 최씨는 말렸지만, 황후 권씨가 그 뜻을 대견하게 여겨 적극적으로 과외선생을 붙여주며 후원하고 본인도 죽도록 공부한 끝에 결국 숙명의숙 의원반을 거쳐 오덕의학당에 입학해 진도를 무사히 따라잡았고, 3학년까지 여왕님 놀이를 즐기던 와중 임자남정에 파견되어 민심잡기 용도로 현지인을 진료할 의사들을 모집한다는 소식을 접하고 자기도 자신을 따르는 여학생들과 함께 안남에 파견되겠다고 나서며 부모님이 뒷목을 잡게 만든다. 조정에서도 '여의단 파견은 동의하나 옹주를 보낼 수는 없다'란 의견이 중론이었지만, 이 소식이 기자 귀에 들어가 언론을 대문짝만하게 타면서 기정사실이 되어버렸다.
이토록 천방지축이지만 황족으로서의 책임감과 의료인으로서의 소신 또한 분명히 있어서 자신을 태우고 안남으로 향할 어승선이 귀국하는 길에 현지에서 조치가 불가한 부상자들을 실어 보내자는 기특한 제안을 해 재석을 기쁘게 한다. 재석은 여기에 더해 전사자들의 관까지 운구하고 돌아오는 19세기로선 무척 파격적인 조치를 단행하는데 이것까지 윤지의 제안이었다며 공을 돌려 딸의 위상을 세워주었다. 안남 현지에선 남녀 유별로 군인들은 돌보지 못하는 대신 현지 여인들 치료와 위무에 전념, 대한과 안남 양쪽에서 명성이 드높아지고 있다.
3부에서 사랑하는 이들을 먼저 떠나보내고 남은 사람들을 돌아보게 된 재석은 올렝카 소생이 아닌 서자녀(활, 계, 희주)들에게 잘 해주지 못 한 것을 후회하며 적자녀와 동등하게 대해줄 수 없다면 하고 싶은 거라도 맘껏 하게 해줄 걸 그랬다며 후회와 미안함을 드러냈는데 그 덕을 제대로 누리는 중이다. - ○왕 이목(李坶)
1838년생, 흥선제의 서장남. 1852년 혼인한다. - 군왕비 임씨
부안 임씨 출신.
- 양원 → 선시 → 수빈 → 수비 송세련
1815년생. 재석보다 1살 연상이며 동인 계열 집안 출신이다. 세 후궁 중 가장 정신연령이 어리고 순진한 성격으로 3부의 정비 김씨처럼 딱히 야심은 없고 소설에서나 꿈꾸던 일이 이뤄져 기쁨에 빠져 있다. 성인이 되어서도 그 성품은 변함이 없어 여전히 야심이 없고 마음이 여리며, 그래서인지 후궁들 중 가장 비중이 적고 존재감이 희미하다. 결혼한 지 10년이 되도록 재석의 아내들 중 유일하게 자식을 낳지 못해서 마음고생한 탓도 있는 듯. 아이가 둘이나 있는 최씨가 또 임신하자 앞에서는 축하해줬지만 자기 처소로 돌아가서 한참동안 눈물바람을 했다고 한다. 그러다 마침내 자식을 보며 걱정을 좀 덜게 된다. - 황자 이경
흥선제와 수비 사이의 장남.
- 양원 → 선시 → 동빈(桐嬪) → 동비 김주희
1815년생으로 재석보다 1살 연상. 미주 출신으로 외가가 미주 토인 올로내족 대추장으로 3부에서 재석을 도왔던 김대송의 후손이다. 후궁들 중 유일하게 삼간택까지 오르지 못했음에도 측실로 지명된 규수로, 미주 출신이라는 배경을 고려해 특별히 뽑혔다. 미주에서 태어나고 자라 자유분방한[62] 성격이지만 자신을 높은 곳으로 올려보내고자 집에만 두고 엄하게 키운 아버지에게 서운함을 느끼면서도 나름 권세에 대한 욕망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부친의 경거망동 때문에 난처한 상황이 된다. 중전 권씨에게 호되게 야단을 맞으면서 벌벌 떨다가 결국 울면서 싹싹 빌고는 기가 팍 죽어 지내게 된다. 하지만 재석이 나폴레옹과의 정상회담을 위해 미주로 가면서 미주인을 위무하기 위해 동비만 데리고 가게 되면서 미주 고향 사람들의 칭송을 받아 기분이 풀렸고, 친딸 민지가 유구 왕실로 하가하여 일국의 왕비가 되는 경사도 누렸다. - 황자 이순
흥선제와 동비 사이의 둘째. 1845년생.
2.3. 소왕파
- 소왕 이청
원평제의 서자로 광덕제의 이복동생. 1802년생. 이종의 친동생. 광덕제와 같은 망나니가 적자라는 이유로 제위를 물려받았다는 현실에 분노하여 불만분자들을 모아 역모를 꾸미고 있다. 익명의 상소를 보내 광덕제와 재석의 사이에 불화를 유발하려 하는(이건 실패했다) 한편 합병당한 유구국 충신 또는 북구주 탈환을 외치는 일본 존황파의 소행으로 위장하여 광덕제와 그 태자 재석, 덤으로 효왕 이정[63]까지 동시다발 테러로 암살하고 제위를 찬탈할 음모를 세운다. 막대한 지참금과 역모 후 일본의 지원을 노리고 도쿠가와 막부에서 도쿠히메가 시집오게 되자 자신의 며느리로 들이겠다고 먼저 나선다.
그러나 공범들의 실수로 폭탄 제조 중 집이 불타버렸고, 그냥 실화라고 넘어갔으면 될 일을 도둑이 제 발 저린 것인지 누군가가 자신의 집에 방화를 저질렀다고 주장하면서 공식적으로 수사가 시작되게 만들어버렸다. 결국 재석에게 보호를 명분으로 감금당해 손도 못 쓰는 상태로 재석은 암살 음모의 진상을 다 파헤쳐버렸다. 이후에도 심문 중 자기 집에서 진행된 폭탄 제조에 대해 무조건 모른다고 발뺌하면 됐을 일을 약재와 불꽃놀이용으로 쓰려고 화약 재료를 샀다고 둘러대는 등 어설픈 모습을 보였다. 역모는 시작도 하기 전에 자멸해버렸지만 국제정략결혼이 예정된 군왕이 태황과 태자를 암살하려고 했다는 사실을 공표하면 심각한 국제망신이 될 것이기에 재석의 안배로 '모든 음모는 남응중 등 문객들이 꾸몄으며 소왕은 멍청해서 이를 전혀 몰랐지만 도의적인 책임을 지고 스스로 벽지로 떠난다'고 공표되고 온 일가가 현토도(사할린 섬)으로 평생 유배형에 처해져 그나마 목숨은 건졌다. 그리고 공식적으로는 유배가 아니라 자진 이주하는 것이므로 부동산을 제외한 재산은 보전할 수 있었고, 그동안 위세를 부리느라 막대한 노비세를 물면서 사노비를 40여명이나 유지하고 있었는데 역모와 연루되거나 화재로 죽은 노비들을 제외한 생존자 20여명을 다 데리고 갔으며 이후로는 정신을 좀 차렸는지 현지에서는 사람들에게 베풀기도 하고 서당을 여는 등 처신을 잘해 현토도 주민들에게 존경받고 있다. 1840년 신불랑과의 정상회담을 위해 미주로 가던 재석이 현토도에 들렸을 때 8년만에 장남 이훈이 비글 호를 타고 도주했다는 소식을 듣고 슬퍼하지만 드러내지 않고 참는 등 유배 생활 동안 인격적으로 좀더 성숙해진 모습을 보인다.
재석이 떠난 이후로도 현토도 주민들을 가르치고 교화하는데 계속 힘써 1849년 시점에선 그를 찾는 섬 주민들의 발길이 문전성시를 이룰 정도며 그가 유배를 떠난 진상을 모르는 젊은 관원들에게서 해배하고 한양으로 불러들이자는 건의가 올라오기도 한다. 자신의 욕심으로 신세를 망친 큰아들에 대한 미안함과 무언가 작은 거라도 해주고 싶다는 마음에 아들이 그곳에 없다는 걸 알면서도 해우도로 음식과 옷감을 계속 보내는 일은 멈추지 않는다.
3부의 예왕 포지션에 해당하는 국내 정적 빌런 포지션을 차지하는 인물이지만 지나치게 허술한 인물로 첫 등장부터 전혀 긴장감을 못 주는 빌런이라는 평을 들었다.[64] 물론 실제 역사에서도 가브릴로 프린치프처럼 어설픈 암살범이 초대형 사고를 친 사례는 많으며 광덕제도 방심하고 허술한 면모를 보여줬기에 암살 자체는 성공할 것 같다는 예측도 있었으나, 공범들의 어처구니없는 실수와 본인의 멍청한 대처로 허무할 정도로 쉽게 몰락해버렸다.[65] 게다가 광덕제가 방심하고 있었다고는 하지만 소왕이 수상한 사람들을 만나고 다닌다는 금위사 첩보가 올라오는데다가 그걸 고의적으로 재석이한테도 보게끔 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던지라 테러가 성공했더라도 황제자리에 오르는 건 불가능했을듯. - 소왕비 최씨
소왕의 정실부인. 첩 둘은 자식이 없어 소왕의 자식들을 혼자서 모두 낳았다. 남편의 음모에 대해서는 모르고 있다가 갑자기 장남과는 평생 생이별을 하고 온 식구가 현토도로 귀양가는 날벼락을 맞게 된다. - 명천공 이○
소왕의 차남. 1821년생. 제대로 된 혼처를 찾을 수 없었기에 현토도 토인과 결혼한다. - 이성
소왕의 삼남. 1825년생. 제대로 된 혼처를 찾을 수 없었기에 현토도 토인과 결혼한다.
- 남응중★[66]
소왕의 측근. 본래 광덕제의 태자 시절 술친구 중 하나였으나 광덕제가 태황 즉위 후 손절당하자 이에 원한을 품고 소왕에게 붙었다. 광덕제와 태자를 한번에 날려버리겠다는 폭탄 테러 계획을 짠다. 이 시대까지의 암살은 단검이나 활 등 냉병기를 쓰거나 독살을 하는 방식이었기에 폭탄을 암살용으로 쓴다는 발상은 없었고 관련 경호 대책도 없는데, 이 상황에서 인류 최초의 폭탄 테러를 이용한 암살을 생각해냈으니 나름 창의력은 뛰어난 인물이다.[67][68] 하지만 발상만 좋았을 뿐 폭탄 관련 전문 지식은 없었기에 책을 보면서 독학으로 폭탄 제작 중 소왕의 집을 반쯤 개박살내버리는 사고를 친다.[69] 함께 폭탄을 제조하던 공범들은 즉사했고 본인은 중상을 입고 살아서 탈출했으나 멍청하게도 잠적하는 대신 자기 집에서 치료하다가 그대로 체포당했고 고문 끝에 모든 것을 실토했으며, 황실의 위신 및 일본측과의 외교 문제를 우려한 광덕제와 재석에 의해 폭탄 테러 미수에 대한 모든 책임을 뒤집어쓰고 사건 이름에 자기 이름이 붙게 된다. 부상당한 상태로 고문을 받았으니 얼마 못 가 장살되어, 역적 일당의 형이 집행[70]될 무렵엔 이미 죽은 뒤였다.
2.4. 내관
- 권진동
원평제의 전담 내관으로 내시부 수장인 상선이다. 오랜 세월 원평제를 보필하며 함께 늙어왔으며, 원평제가 건강이 악화되고 가뭄에 마음고생을 하는 것을 보며 진심으로 안타까워하며 심신을 돌보는데 전력을 다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정치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절대 나서지 않고 철저하게 의견을 숨기며, 원평제는 그의 그런 점을 무척 마음에 들어한다. 원평제 사망 이후 등장이 없다.
- 송현승
이진의 전담 내관으로 재석이 빙의한 직후 마차에 갇힌 재석을 들어올린 뒤 태자비 김씨의 시신을 보지 못하도록 눈을 가려준 인물. 이 사람의 솥뚜껑만한 손이 자기 얼굴 전체를 덮는 것을 보고 재석은 자신이 어린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때 패닉한 재석이 송 내관의 손을 깨물어서 손에 큰 흉터가 남았다. 1부 시절의 이름 없는 내관 아저씨와 김처선 이후로 재석이 가장 가깝게 여기는 내관. 이후 쭉 재석을 보필하다가 1851년 시점엔 상선 자리에 올랐다.
- 홍진성
효왕 이정의 전담 내관. 올곧은 성품의 인격자로 이정을 진심으로 걱정해주고 있으며 혹시 이정이 어른들 앞에서 말실수할까봐 자신 앞에서라도 감정을 마음껏 풀 수 있도록 상전의 한을 다 받아주고 있다. 이정이 분가해서 출궁한 후에는 궁중 창고 관리직을 잠시 맡다가 순친왕의 전담 내관이 되어 효왕과는 다르면서도 비슷한 순친왕의 속앓이에 대해 알게 된다. 재석도 그를 깊이 신뢰하여 순친왕이 장성해 분가한 후에는 태자궁에서 태자 이창을 보필하게 하며, 이창의 미주 순행에도 동행시킨다.
- 이위현
송현승의 후임 내시부 상선.
2.5. 조정
- 고창후 김조순★
효비 김씨의 아버지. 이진(재석)의 외조부. 원평제가 원역사의 정조처럼 사돈을 맺었으나 효비가 이순의 음주운전 마차 사고로 죽게되었고, 원평제는 이를 미안해하여 아들인 김유근을 재석(이진)의 스승으로 가르치게 한다. 과거 미주합중국과의 육로 교역 문제를 놓고 외교 교섭을 담당했었다. 원 역사처럼 젊었을 때 '오대검협전'이라는 무협지를 썼다고 한다.[71] 삼국지연의도 한글로 번역해서 4부 시점에서 대한의 표준 삼국지연의 판본이 되었다고. 장남이 태손을 수행해서 미주로 가있는 동안 부인상을 당했다. 새 태자비 박씨의 음모를 알고 자식들과 함께 이를 막을 방법을 궁리하는데, 세도정치가 없는 세계라 국가가 잘 되어야 가문도 번창한다는 생각이 확고하며 대의를 떠나면 안 된다는 것을 거듭 강조한다.
귀국한 재석을 조정의 대표격으로 영접하는데, 당연히 빈전을 지켜야 할 그가 자신을 맞이하러 나오자 재석은 벌써 태자비 박씨 일가에 의해 밀린 것이 아닌가 의심했지만 부황 나름의 배려였으며 재석의 우려를 짐작하고 즉각 안심시켜주는 노회한 모습을 보인다. 1831년 정약용과 함께 은퇴하더니 문병 간 재석에게 자신이 집필한 소설들의 원고를 물려주고 원역사와 같은 1832년 음력 4월 3일 노환으로 세상을 뜬다.
- 김유근★
김조순의 장남이자 이진(재석)의 외숙부. 태손 강서원 사로 재석의 스승이기도 하다. 조카이자 제자인 태손이 공부보다 각종 세계사 이야기에 관심을 보이자 처음에는 당황하고 공부 진도를 못 빼니 마뜩치 않아 하지만 힘든 일을 겪은 조카라 그런지 할당량이 끝나면 설명해주곤 한다. 재석은 왕 노릇을 3번이나 하면서 배우는 모든 학문에 통달했지만 티를 내면 피곤해질까봐 모르는척 연기를 했는데 김유근은 재석의 진짜 정체는 몰라도 어른의 통찰로 공부를 좋아하고 잘 하는데 게으름을 피우고 그런 어린아이답지 않게 과시욕이 없다는 것을 눈치채고, 역사 이야기를 미끼로 진도를 빠르게 빼거나 남다른 식견을 이끌어내고 이를 근거로 진도를 심화시키는 데 이용한다.[72] 재석은 이를 갈지만 현직 왕이던 1, 2부에서처럼 원하는 자료에 다 접근할 수도 없고, 3부에서처럼 자연스럽게 알려줄 정호찬, 이형준 같은 측근도 없기 때문에 환생 공백기의 역사를 알기 위해서 어쩔수 없이 호응해주고 있다. 물론 외숙부로서 (그에겐 총명해도 어린아이에 불과한) 태손에게 예민한 정치적 문제들도 인지할 수 있도록 얘기해주고, 광덕제(당시 태자)에게 끌려다닐 때는 안쓰러워서 수업에 사정을 봐주기도 하는 등 가족으로서 역할도 충실히 한다. 신불랑과 회담 때 스승이자 협상대표의 일원으로 재석을 수행한다. 미주를 떠날 때 어머니의 부고를 듣고 슬퍼하면서도 가문에서 예쁨받았던 여동생이었던 효비의 아들이자 모친이 그녀가 세상에 남긴 후손인 태손을 그녀처럼 아꼈다는 것을 생각하며 귀국 권유를 거절하고 재석을 끝까지 수행하기로 한다. 귀국 후 재석이 완벽하게 국상을 수행하자 스승인 그의 명성과 가문의 위상도 더 높아지는 수혜를 입었고 한성판윤 직을 받았다가, 1831년에는 내무대신으로 승진한다. 재석의 즉위 후에는 좌참정대신을 맡고 있었으나, 후송 영강제의 조문 사절로 남경에 갔다가 원 역사처럼 중풍으로 쓰러진다. 이후 재석이 나폴레옹과 정상회담을 하기 위해 미주로 갔을 때 사망한다.
경화사족의 일원이지만 능력있는 관료이며 서연관답게 학식이 풍부하고 뛰어난 교수 능력을 갖췄으며, 세도정치가 없는지라 김정희와도 친하게 지내고 있다. 다만 실존 인물의 느낌을 살리려고 했는지 사치스럽고 화려한 것을 좋아하는데다가 미주에서 개신교가 하층민들에게 기초적인 교육을 시킨다는 사실을 알고 이는 관이 역할을 다 못 하고 있는 것임에도 "어차피 큰 일을 할 수도 없는데 뭐든 배우면 좋다"며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하는 엘리트주의적인 사고를 갖고 있다.
- 정약용★
1823년 시점의 국무총리대신. 원 역사보다 천주교가 빨리 공인되었기 때문에 증조부 때부터 독실한 천주교 가문에서 태어난데다가, 신유박해와 황사영 백서 사건도 없기 때문에 18년 유배생활 없이 더 오랜기간 조정의 관료로 활약해서 국상의 자리에까지 오른 대체역사의 수혜자가 되었다. 원평제가 내밀한 속내까지 털어놓을 정도의 최측근이며, 반남 박씨 규수가 새 태자비로 간택되는데에도 관여했다. 증기기관으로 가동되는 이동식 기중기인 기상(機象)을 발명하고 수원 화성은 물론이고 부산과 의주에 거대한 계획도시를 세우는 등 전국적으로 토목 인프라 재개발 업무도 잘 수행했다. 1830년 시점까지도 국상인데, 광덕제도 인정하는 천재로 중종 이후 셋 밖에 없었던 벽상삼한삼중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을 제수받은 명신. 하지만 원평제와 같은 세대라 그런지 재석과 광덕제가 추진하는 마리아나 제도와 서부 캐나다 구입에 대해 반대하는 등 국제 정세에 대해서는 고루한 면도 보인다. 1831년 노환으로 은퇴한다. 은퇴 후 얼마 안 가 사망한 김조순과 달리 건강이 좋아 저술 활동 등을 하며 유유자적하게 지내다가 광덕제 사후 조문한다. 1836년 사망한다. - 정학연★
정약용의 장남. 축산업 서적인 '종죽회통'을 집필했다. - 정학유★
정약용의 차남. 농업 서적인 '농가월령가'를 집필했다.
- 정약전★
직접 등장은 없다. 광덕제의 서장자 효왕 이정이 어렸을 때 그의 집에서 피접을 했다는 것을 볼때 동생처럼 고관직을 지낸 것으로 보인다. 나중에 언급되기로는 50세에 퇴직하고 그 후로는 취미인 해양생물 연구를 하며 대한의 영역인 북태평양 지역의 모든 해양생물을 총망라한 12권짜리 천하어보라는 책을 써서 서양에까지 널리 알려진다. 1830년 노환으로 사망한다.
- 김정희★
광덕제도 인정하는 천재. 이 세계에서는 세도정치도 당파싸움도 없기에 유배생활 없이 순탄하게 관료로 활동하며 안동 김씨인 김유근과도 친하게 지내고 있다. 작중에서는 한문뿐 아니라 라틴어와 프랑스어에도 명필에 서양화에도 조예가 있게 되었다. 첫 등장 시점인 1823년에는 학무협판으로, 재석의 미주 방문 때 서예, 미술 강사로 임명받아 동행하며 재석을 고통받게 하지만 배멀미로 고생한다. 광덕제가 즉위한 후 학무대신이 되며, 광덕제에게 여성 의무교육을 계속 주청했지만 거부당했으나 재석이 흥선제로 즉위한 후 김정희의 주장을 받아들이기로 한다. 이후 국상으로 임명된다.
- 윤시현
광덕제의 큰외숙부로 파평 윤씨 가문의 수장. 공무대신, 육군대신, 내무대신을 역임한 실력자로 태자 때부터 광덕제를 확고하게 지지했다.
- 심세원
1828년 시점의 외무대신. 청송 심씨. 효왕의 장인으로 왕실 사돈이다. 재석이 자신의 사위에게 호감을 보이고 잘 해주려고 노력하기 때문에 재석의 신변에 위협이 될 수 있는 미주행에 떨떠름한 반응을 보인다. 김조순, 정약용 은퇴 후 우참정대신으로 승진한다.
- 박지순
중추원 첨사로 신불랑과의 협상에서 협상대표의 일원으로 참석한다.
- 안변후 → 안변공(安邊侯 → 安邊公) 박종선
박지원의 4남, 태후의 부친.
- 박규원
태자비 박씨의 오빠. 첫 등장 때는 집현전 정7품 박사로 재직하다가 점차 승진하여 매제인 광덕제가 즉위한 후 정4품 한림원 학사가 되었고, 재석의 태자 책봉식도 주관하게 된다. 태자비의 소생을 보위에 올리려는 계획에 동조하고 있지만, 예왕처럼 극단적인 계획을 실행하지 못하게 단속하면서 태자가 젊은 만큼 이후 태손을 전폭 지지하는 노신들이 아닌 젊은이들을 포섭해서 미래를 대비하기로 한다. 그러면서 태손보다 두각을 드러내야 한다며 조카들을 교육시켜달라는 부탁도 받는데, 내심 직접 본 태손의 나이에 걸맞지 않는 학식과 인품에 감탄하고 안될거라고 생각하지만 일단 빡세게 교육을 시키기로 한다. 스승으로도 꽤나 뛰어났는지 조카들을 상당한 수준으로 키웠지만, 재석이 귀국 후 태자로 책봉되고 완벽하게 의례를 수행하는 모습에 조야의 평가가 높아지자 조카들의 평온한 삶을 보장받을 수 있도록 노력의 방향을 바꿔야 할 것 같다고 내심 생각한다. 재석의 외교 방문을 수행한 후로는 확실한 재석파가 되어 누이에게 현실을 받아들이라고 대놓고 설득한다. 광덕제게 금강산 유람을 갈 때 수행하며 국정을 돌보라고 간언하다가 짐을 실은 노새를 관리하며 따리 오라는 명으로 행렬 뒤로 밀려나 먼 발치에서 광덕제의 낙마를 목격하고, 현장을 수습한 후 귀경 후 상세한 내용을 재석에게 보고했다.[73]
- 남공철★
좌참정대신이다가 1831년 국상 정약용이 노환으로 물러나자 후임으로 국상이 된다.
- 한승룡
흥선 2년 우참정대신.
- 복주후(福州候) 권세직
황후 권나현의 친정아버지. 재무대신. 어머니나 딸과는 달리 소심한 성격인데 재무대신을 맡으니 돈 들어갈 일이 생기면 전전긍긍한다. 소심해서 발언 하나하나를 조심해서 말한다. 좌상, 우상과 영중추부사를 지내고 은퇴한다. 1852년 사망한다. - 국대부인 김씨(國大夫人 金氏)
황후의 모친. - 권대현
1803년생 권세직의 장남. 누손주 도독 임기를 마치고 한성판윤에 오른다. - 권중현
1808년생 권세직의 차남. 전 구주대총관.
- 이종석
좌참정대신.
- 박헌수
정2품 지의금부사. 의금부의 실질적인 수장. 1부에서 홍길동을 체포한 박헌과 2부 때 금위사장 박희성의 후손. 재석 즉위 후 병으로 사망한다.
- 이언신
금위사장 겸 의금부 동지사. 이인좌의 후손. 박헌수 후임으로 지의금부사가 된다.
- 김진범
1834년 시점의 의무대신. 학질이 매독의 치료법이라는 현상을 보고 받자 광덕제가 내세운 매독 환자의 거세 금지법에 동조한다.
- 박경완
1845년 시점의 외무대신.
- 서진홍
1845년 시점 육군부 대신. 장조 때 정착한 알바레스의 후손으로 스페인계 최초의 대신이다.
- 권승경
예무대신.
- 전대선
재무대신.
- 최승조
내무대신
- 민홍석
종2품 군기총관 겸 의금부 동지사. 3부 재석의 처남이었던 민지상의 후손. 이후 우참정대신이 된다.
- 이규성
학무대신. 최초의 유학자 출신이 아닌 자연학자, 정확히는 동물학 교수 출신 학무대신이다.
- 서호원
육군대신.
- 박승길
법무대신.
- 김수근
재무대신.
- 김제헌
의무대신.
- 전홍기
예무대신. 사직 후 중추원 지사 자리를 받는다.
- 김명국
재무대신. 김세룡의 현손.
- 한승진
외무대신.
- 한희일
예무대신.
- 이시우
육군대신.
- 백기홍
공무대신.
- 이상기
1853년 취임한 예무대신.
- 정예현
학무부 사전청 제조.
- 김병학★
승선.
- 김명근
안남 정벌 당시 치죄사. 사덕제의 항복을 받아내겠다는 공명심에 남부지방의 본군보다 먼저 후에를 직접 공략하기로 계획한 별군의 전략에 훼방을 놓고 항복을 가장한 안남 화공선의 통과를 허용해 대한 함대에 큰 피해를 줄 뻔하는 트롤링을 저지른다.
- 성희신
안남 정벌 당시 법무대신. 안남군의 대한인 학살에 분노하여 완복시를 생포한 후 전범재판에 회부하여 학살에 대한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 민정구
전 외무부 정랑. 진랍과 남장 문제와 관련해 섬라에 파견한 힐문사로 섬라를 방문한다.
2.6. 군인
- 이신환
태황 어승선인 동진 함의 선장인 수군 정령. 태손에게 눈도장을 찍으려고 하는지 매일 세번씩 항로를 보고하러 찾아와서 재석을 귀찮게 한다. 그와 별개로 괜히 어승선의 선장이 된 것이 아닌지 망망대해에서 와가촌으로 바로 배를 모는 뛰어난 항해술을 갖고 있다.
- 이희영
이순신의 8대손이자 이희권의 형. 이순신 이후 해군 복무가 전통이 된 덕수 이씨에서 특이하게 육군에서 복무하고 있다. 누손주 병마사로 조상 이순신을 닮아 깐깐한 원칙주의자. 이후 육군제조를 역임한다.
- 이희권
이순신의 8대손이자 이희원의 동생. 하와첨사로 첫 등장하여 미주 순행 후 귀국하는 길이던 재석을 영접하며, 원평제의 붕어 소식을 듣고 날뛰는 재석을 진정시킨다. 이후 해군대신, 해군제조를 역임한다.
- 공승일(公勝日)
요동에 거주하는 왜인여진 군관으로 2부에서 권율 휘하로 참전해 단밀현 전투의 대승에 크게 공헌한 공개선의 직계자손이다. 재석이 공개선의 공로를 되새기며 치하하자 크게 감격한다.
- 신헌★
몰래 권씨랑 데이트를 나온 재석을 경호한다. 원역사에서는 본명은 신관호이고 후에 신헌으로 개명했지만 작중에서는 처음부터 신헌으로 등장한다. 이후 태평전쟁에서 훈장을 3개나 받는 공을 세우고 부령으로 진급, 등선군 연대장이 되어 안남 정벌에 투입된다. 후에 함락 후 도망친 완복시의 행방을 쫓다가 어느 성을 함락시키고 그 성에 숨어있던 완복시의 이복동생 2명을 생포한다.
- 홍명규
좌포도대장. 충무대왕 이순신의 사돈 홍가신의 후손.
- 김시형
누손주에 복무 중인 군의관. 매독 환자 여섯 명이 학질에 걸리고 난 뒤 매독 증세가 낫는 현상을 조정에 보고한다.
- 이한제
해군제조, 이순신의 6대손.
- 양헌수★
강무관 소속 생도로 원역사랑 달리 출세 속도가 좀 더 빠르다. 이후 흥선제가 나폴레옹을 만나러 미주에 갔을 때 동행했으며, 나폴레옹에게 호평을 들었다. 영국-아프가니스탄 전쟁이 일어나자 관전무관[74]으로 파견되어 몇 년 동안 아프가니스탄에서 고생을 하다 전쟁이 끝나자 대한으로 귀국, 그 공로로 보상과 훈장을 받고 부령으로 진급한다. - 이용성
보로 이씨[75] 출신 군관. 보리스(이진용)의 현손자. 모로족 토벌 당시 참령. 이후 안남 정벌전에서 평남부원수로 임명되어 수도 후에를 직접 공략하는 별군의 지휘를 맡아 후에를 방어하는 요새인 순안보를 함락시킨다. 영달이나 전공에 연연하지 않는 담백한 성품에 통솔력과 노련함을 겸비한 숙장이나 보리스처럼 융통성이 모자라[76] 돌발 상황에 대처하는 능력은 떨어진다. 순안보 함락 이후에는 후에로 진격하여 후에를 점령한다. 융통성이 모자라다는 평판을 역으로 이용하여 완씨 왕실의 장손인 완복응복을 중월국 건국 밑작업에 이용해먹는 등 지혜로운 면모도 보인다.
- 김중겸
요심도 병마절도사.
- 사종태
사노부의 후손. 위소열이 이끄는 묘노들이 일으킨 난을 진압한다.
- 이근성
대한군 부장. 태평천국 토벌군 총사령관. 작중 대한군 최고의 명장으로 태평천국 토벌전에서 큰 전공을 세워 10여 개의 훈장을 받고, 현역 무장이 승진할 수 있는 최고위직인 종1품 삼군부 도총사로 영전하며 대장으로 진급한다. 이후 안남 토벌전에서도 대한군의 총지휘를 맡는다.
- 박진승
박문수의 후손. 태평전쟁 당시 미주원호군 사령. 이후 안남 정벌에서 평남대원수로 임명되어 안남 남부를 공략하는 본군을 지휘, 안남군에 포위된 복승의 정지승군을 구원한다. 이후 안남 남부의 주요 목표인 가정부로 진격하는데 안남군들이 대한인들을 학살한 것에 대한 보복으로 대한군이 안남인들을 학살하기 시작하자 민심이반을 우려해 이를 금한다. 가정부에 도착한 이후에는 가정부를 철저하게 포위한 다음 가정부 구원을 위해 오는 안남군 잔병을 때려잡는다.
- 이헌우
정2품 상장으로 초대 삼군부 참모본부장.
- 신필용
2대 삼군부 참모본부장.
- 이승윤
삼군부 참모본부장.
- 김홍술
응룡군 참령 → 부령. 태평천국과의 전쟁에 첫 실전 투입된 비행선 함장으로 열기구와 비행선을 10년이나 타본 비승군의 베테랑이다. 세계 최초의 항공 폭탄인 추격진천뢰를 개발했으며 태평천국군 열기구들과의 사이에서 벌어진 세계 최초의 공중전 또한 승리로 이끈다. 이런 엄청난 전과를 올리자 재석은 김홍술을 부령으로 특진시키고 자응장 4등을 내린 후 비행선을 5기로 증원한다. 그 후에도 홍천귀복 납치 작전을 성공시키는 등 세계 전쟁사에 이름을 남길 업적을 쌓고 있다. 삼군부 직할 항공대 항공대장으로 청, 후송, 영국 등 대한제 비행선을 도입한 모든 국가에 교관 노릇을 해줬다.
- 홍윤길
응룡군 참위.
- 사재식
등선군 참령. 동해위 사노부의 11대손. 태평천국 홍수전의 세자 홍천귀복을 납치하는 작전 현장지휘관으로 세계 최초의 공중 강습작전을 성공시키는 큰 공로를 세웠다. 이 공로로 정령으로 승진하여 정식으로 편성된 공수부대인 천강군의 초대 대대장이 된다.
- 황정섭
동부방면군 참모부 병부 부령.
- 이종무(李宗武)
선전관, 3부 보리스의 후손.
- 백재현
남상군 영장 참령. 일본에서 감사금 명목으로 주는 뇌물에 눈이 멀어 악천후에 무리하게 출격했다가 비행선 추락으로 승무원들과 함께 사망한다. 원래 사고의 책임을 물어 엄벌해야 했으나 죽어서 책임을 물을 수 없게 되어 전사자 특진에서 제외되는 것으로 처리된다.
- 김승식
순해국 탐사선 선장으로 계급은 정령이다.
- 정지승
복승영장 참장. 대남 정씨 출신으로 홍서당의 난 당시 누손주에서 토벌에 참여한 한왕 조심창이 큰 피해를 입자 대신 나서 대남병 부대를 여러 전장에 나가 싸웠으며 대남병 대대를 이끌고 맹활약하며 휘하 대대는 3백 개가 넘는 훈장을 받고 본인도 3개를 받을 정도로 용맹을 떨친 용장이다. 그 공로로 참장으로 승진해 복승영장으로 부임, 복승을 지키고 있던 와중 대한의 안남 정벌이 시작되고 안남군이 선제공격으로 복승을 포위하자 이를 격퇴한다. 복승 포위가 풀린 이후에는 가정부로 진격하면서 안남인들이 대한인들을 학살한 것에 대한 보복으로 안남인 포로 학살을 지시한다.
- 박숭빈
뇌주첨사. 안남 정벌에 별군 2군을 이끌고 출진하여 후에의 외항인 현항 공략을 준비하던 중 안남 함대가 먼저 싸움을 걸어오자 대파하고 현항을 함락시킨다.
- 이진명
대한군 참령. 러시아의 비행선 운용을 돕는 고문관.
- 이맹진
대한군 정위. 대남도 토인 출신의 대남병. 정지승의 명령에 따라 대한인 학살에 참여한 안남인 포로들을 학살하여 수급을 거둔다.
- 동승욱
오도리 출신 군관. 남월국에 의녀단으로 간 정단옹주를 호위하는 임무를 맡는다.[77]
2.7. 기타 관원
- 안기성
3부에서 디에고와 함께 키니네 원정대에 다녀왔던 안돈이의 후손. 의관으로서 출세의 정점인 정 3품 광혜원 정에 재직 중이다.
- 동계수
1부에 나왔던 일본인 포로 동고로의 자손. 외수사 관원으로 아모국에 20년째 주재관으로 재직 중이다.
- 박규수★
박지원의 손자이자 태자비 박씨의 사촌. 등장 시점 기준 아직 21세로 과거 급제도 못했지만 당시 태자였던 광덕제의 추천으로 재석의 미주행에 종사관으로 동행해서 협상을 보좌한다.[78] 총명한 젊은이라 김유근, 김정희도 그를 살갑게 대하고 재석 역시 그를 나쁘게 볼 이유가 없어서 대화에도 자주 끼워준다. 미주로 가던 중 호주가 수도를 어디에 두는 게 좋겠냐는 토의를 하다가 그에게 의견을 물었는데, 본국과 연계를 중시한 다른 이들과 달리 큰 항구를 둔 동남부를 선택하겠다며 원 역사와 같은 답을 하는 통찰을 보여준다. 신불랑국과 미국이 모두 대한이 영향력을 확대하는 것을 경계해서 조심스러워해야 함에도 협상이 타결되자 대한의 강역이 넓어진 것에 대놓고 기뻐하는 젊은이답게 미숙한 모습도 보인다. 하지만 경험이 쌓여가면서 원역사처럼 뛰어난 능력을 발휘해, 재석은 그를 대신급으로 승진시키기 전에 지방관직을 경험해야 하는 관례를 따라 동미주 부지사에 임명했고, 그 후 임기를 마친 지사 이용갑이 귀국하면서 후임 지사로 승진했다. 지사 임기를 마친 후에는 외무협판이 되고 홍콩 조약 조인에 참여한다. 1850년 시점에는 좌승선을 지낸다.
- 김원근★
김조순의 차남이자 김유근의 동생. 나이는 한살 차이밖에 안 나지만 과거에 10년 늦게 합격해서 품계가 아직 정8품에 불과하다. 형이 미주에 가있는 동안 모친상을 당해서 대신 상주를 선다. 1833년 부친상을 당하여 또 시묘살이를 하다가 건강이 악화되더니 말라리아에 걸려, 결국 그 해를 못 넘기며 줄초상이 나고 만다.
- 김좌근★
김조순의 삼남이자 김유근의 동생. 유흥을 즐기기 때문에 장문 김씨 삼형제 중 그나마 광덕제와 사이가 좋은 편이며, 한량으로 살면서 여행을 즐겨서 대한 본국 구석구석과 북한, 물론이고 구주, 유구까지 가봤다고 한다. 재석의 미주행에 형 김유근과 함께 가려고 했으나 아버지가 막는다. 그 후 원 역사보다 8년이나 빠른 34살에 대과에 합격해서 재석의 수행원으로 북경에 가게 된다. 국가의 공식 사절이면서도 가는 곳마다 제공받는 성상납을 거절하지 않고 잘 받아먹고 심지어 먼저 나서서 요구하는 추태를 부리고, 유비의 고향인 탁현 누상촌에 재석 일행이 관광 갔을 때 주민들에게 속아 쌍고검 모조품을 유비의 진품 쌍고검이라고 거액을 주고 사오는 등 머리는 좋지만 한심스런 면모를 보인다.[79] 하지만 큰형 김유근의 병환으로 가주 역할을 물려받은 후로는 그 성격이 친화력으로 작용하여 장동 김문의 세력을 잘 이끄는 리더십을 발휘하며 재석의 개인재산을 관리하는 내직사의 장인 판내직부사를 맡아자기 주머니도 적절히 채워 가면서일도 잘 하고 있다.
- 임승훈★
충민공 임경업의 후손으로 종2품 의주 부윤 겸 평안북도 관찰사. 정약용이 새로 건설한 의주부를 유능하게 관리하고 있다.
- 종의질(宗義質)
종의지의 후손. 하카타 대관이다.
- 김두원
서학당 총장. 화학 전공이지만, 의학이나 생물학같은 타 분야에 관한 학식이 있어 자연발생설이나 서양 의사들의 비위생적인 행동에 대해 유교적인 논리로 비판한다.
- 김홍근★
김유근 형제의 육촌형제. 하와이 주하사 이후 현토도 관찰사에 부임한다.
- 장덕순★
원역사에서처럼 이 세계에서도 정약전의 수제자. 광덕제에게 종5품 해우도 판관으로 특채되었다. 죄인 종성공이 비글 호에 밀항한 것을 뒤늦게 안 죄로[80] 3년 더 해우도에 있는 벌을 받게 된다.[81]
- 이명현
요심도 관찰사.
- 박홍선
부여도 관찰사.
- 조병석
연해도 관찰사.
- 양세동
심양부사.
- 송치상
부산부윤.
- 조학순
함흥부윤.
- 이재현
삼성부사.
- 김복겸
순원부사.
- 김성준
항가호(한카호) 감호관
- 조만영★
전임 외무대신으로 효왕과 함께 청나라 봉선의식을 본다.
- 유재업
벵골 주재 외수사 상관장. 후송의 일부 마약상으로 변질된 덕성도인들과 작당해서 아편 중개업으로 막대한 뒷돈을 챙기고 있다.
- 김원태
누손주 도독.
- 김병연★
내직사 관원. 원역사에선 홍경래에 가담한 조상을 욕한 후 세상을 방랑하며 인생을 망쳤지만 여기선 홍경래가 신불랑국의 신하가 되어 가문이 몰락하지 않았기에 그럴 이유가 없어져 멀쩡히 잘 살게 되었다. 흥선제의 명으로 홍경래가 고향땅에 들르는 것을 도와준다.
- 김정호★
내무부 지리국 주부. 흥선제의 한-신불랑 정상회담 미주 방문을 수행하여 미주의 정밀지도를 제작한다.
- 권승현
러시아 주재 대한 공사. 차르 니콜라이 1세가 장녀 아나스타샤를 대한에 황태자비로 보내겠다고 제안하자 이를 말리느라 난감해한다.
- 왕진열
외수사 상관장.
- 최훈식
사간원 정1품 사.
- 이호원
사간원 정1품 부.
- 우경선
한성대학당 총장.
- 안문중
주산군도에 주재하는 익문사 별좌. 후송에 있는 대한 첩보망을 컨트롤하는 화이트요원이다.
- 유계원
박람회전람사. 외수사 출신 중추원 지사.
- 유병제
대한은행장.
2.8. 심왕부
- 이제원
이인호의 차남, 5대 심왕. 키는 보통이고 뚱뚱한 체격이나 의외로 승마는 잘 한다고 한다. - 심왕비 김씨
후금 공주 출신 심왕비. - 이경신
6대 심왕. 세자빈은 청나라 공주이자 후금 대칸의 조카이다. - 심왕비/고륜화완공주 김씨
도광제의 딸.
2.9. 대명동
- 주계신
제10대 대명공. 형인 9대 대명공이 아들 없이 죽어 대명공이 되었다. 주씨 가문을 후대하는 대한 황실에 감사하는 태도를 유지하고 있다. 다만 본인은 자식뻘인 재석을 만나는 것을 피하려는 등 미묘한 곳에서 자존심을 세우려고 한다. 1839년 병으로 사망한다. - 회신후 주성종
주계신의 차남. 대명공이 되면 대외활동을 중단하는 대명공부의 관례에 따라 칩거하는 형 주성진 대신 대외활동을 전담한다. 안남 왕제인 가정공 완복홍항에게 태황이 준 마지막 기회를 거부하지 말라고 조언한다.
- 주성진
주계신의 장자인 대공자. 첫 등장 시점 기준 만 11세의 소년이지만 영민한 성격으로, 한때 명나라의 신하였다가 현재는 자신들의 상전인 대한에 대해 미묘한 감정을 품고 있다. 재석의 북경 방문길에 조상의 무덤인 명십삼릉을 참배한다는 명목으로 동행하는데 처음에는 분위기 파악을 살짝 못하다가 재석의 압박을 받고 나중에는 눈치를 탑재한다. 부친 사망으로 제11대 대명공이 된 후 한양 대명관을 특급호텔로 개조하여 돈벌이를 하지만 한양을 찾아온 샤를 루이 나폴레옹을 재석이 하루 숙박비가 은화 100냥이나 되는 스위트룸에 묵게 하면서 숙박비를 대명관에 떠넘겨버려 손해를 보게 되었다. - 대명공부인 마씨
진양옥의 후손인 마씨 집안 출신.
- 오문욱
한양에서 대명관을 관리하는 대명관 봉사. 본래 그의 조부는 서나라의 대한 주재관이였으나 서나라 몰락 후 본국과 연락도 단절되고 청나라나 후송에 귀부하는 것도 싫어 대명공에게 귀부를 선택하여 대명동 소속이 되었다. 주성진이 대명관을 호텔로 바꾼 후에도 직을 유지하여 호텔 지배인 역할을 맡는다.
2.10. 종교인
2.10.1. 천주교
- 바르텔레미 브뤼기에르★
천주교 제26대 조선교구장.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원역사에서는 초대 교구장이었으나 조선으로 오는 도중에 만주의 한 교우촌에서 그만 병으로 사망하여 입국조차 좌절되고 말았는데, 작중에서는 건강하게 현직 주교로 있다. 대한의 문화에 대해서도 잘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라 재석도 호감을 갖고 있다.
- 정하상 바오로★
마포성당 주임신부. 정약용의 조카. 1828년 마포성당을 구경하러 온 재석을 안내한다. 대한령 미주에서 가톨릭보다 개신교가 더 퍼진 비화를 얘기해주면서 연신 죄스러워 한다. 원 역사에서는 천주교가 박해받아 몰래 신앙을 유지하며 숨어 살았고, 결국 처형당해 순교하면서 사제가 되려던 목표도 이루지 못했지만[82] 여기서는 오래전 천주교가 공인되었으므로 별 탈 없이 성직자가 되어 잘 사는 대체역사의 수혜자가 되었다. 다만 원 역사의 업적은 박해로 인한 열악한 조건 속에서 피눈물나는 노력을 하며 쌓은 것이라, 천주교가 탄압받지 않고 이미 한참 전에 조선 출신 추기경[83]까지 나온 작중 세계에서는 그만큼 존경받는 사람이 되기는 어려울 듯하다.
- 피에르 모방, 자크 샤스탕★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신부들. 원역사에서는 천주교 박해로 인해 숨어다니며 선교를 하다가 결국 1839년 순교했다. 작중에서는 진작에 2부에서 천주교가 전파되었기 때문에 백두산 봉선 의식 참관을 위해 동행하고 안남 정벌전에 천주교도 의용군 파병을 재석에게 요청하는 등 멀쩡히 대한을 활보하며 잘 살고 있다.
- 김대건(안드레아), 최방제(프란치스코), 최양업(토마스)★
원역사와 동일하게 천주교 사제가 되었다. 다만 작중 세계에서는 오래전에 기독교가 공인되었기에 해외 유학을 갔던 원역사와 달리 개성 신학교에서 서품받았으며 우수한 성적으로 인해 로마 사피엔차 대학교에 유학을 가서 굴마훈도 만난다. 이들 중 최방제는 원역사에서는 해외 유학 중 현지 풍토병으로 사망하는 바람에 꿈을 이루지 못했으나, 고국에서 공부한 덕인지 수명이 연장되어 무사히 서품까지 받았다.
2.10.2. 불교
- 해원
불교의 최고 승려인 도사. 1772년생, 덕망 높은 고승이다.
- 해명
승병군 총사령관인 도총섭. 해원과는 동갑에 동문이며, 승려이지만 무과와 강무관을 거친 정규 무관 출신이기도 하다.
- 진선
해명의 후후임 도총섭. 진랍의 천축사 보호를 이유로 승군 의용군 파견 허가를 재석에게 요청하는데 실상은 안남 정벌에 참여하고 앙코르와트의 소유권을 얻어 성지순례로 수익사업을 벌이려는 의도이다.
2.10.3. 덕성도
- 현도
덕성도 11대 천사. 후송의 덕성도 지부 중 상당수가 사교화되었음에도 수십만 교인들을 포기하기 어렵기에 이들을 이단이라고 선포하지 못하고 어떻게 다시 교화시킬 수 있을까 고민한다. 태평천국의 난이 터진 후에도 재석은 덕성도 본산에서 이단 토벌군이라도 보낼 것을 기대했으나 현도는 자신의 수양이 부족했으니 백일기도를 올리겠다는 식으로 나와서 재석이 짜증낸다.
- 김대순
덕성도의 2인자인 대종사. 시조대천사 광진의 최측근이자 초대 대종사였던 김춘삼의 4대손이다. 안남의 덕성도 탄압에 대한 복수를 위해 안남 정벌 시 덕성도 의용군 파견허락을 재석에게 요청한다. 그 와중에 "누가 네 오른뺨을 때리거든 왼뺨도 돌려 대어라. 너를 고소하여 속옷을 빼앗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겉옷까지 주어라"라고 한 예수의 발언을 비틀어서 "원수가 칼을 겨누면 너도 칼을 겨눌 것이며 너를 얼어죽도록 추위 속으로 내몰면 그자의 집에 불을 질러 몸을 덥혀라(...)"라고 하는 것이 가관.
2.11. 민간
- 윤원성
윤시현의 3남으로 광덕제의 외사촌동생. 공부와 담을 쌓고 주색잡기에 골몰하여 과거는커녕 문음에도 불합격하고 가문 덕에 겨우 명목상의 정7품 자리를 받았다. 태자 시절 광덕제의 가장 친한 술친구로 그의 비위를 맞췄으나, 즉위 후 손절당한다. 6품으로 품계가 올랐지만 그걸로 끝. 그나마 이게 태황 사촌이라는 이유로 좀 나은 대접을 받은 거였다. 나머지 술친구들은 정말 아무것도 못 받아먹고 완전히 버려졌으므로.
- 조경호, 이몽진
영국으로 간 유학생.
- 김건수
한성대학당 자연학부 총장. 해우도의 자연환경에 관심이 많다.
- 양재명
한성대학당 자연학부 교수.
- 김민성
황성매일신보의 기자. 임자남정 파견 여의단 지원서 접수처에서 1호 지원자 취재를 위해 뻗치기하고 있던 중, 황녀 신분 의학도인 정단옹주가 학우들과 함께 직접 지원을 하러 온 모습을 목격하자 이 소식으로 특종을 낸다.
- 김도경
아산조선소 장두(匠頭).
- 박강동
연역주 웅연포 출신 해우도 전신원.
- 이자옥
오덕의학당의 학도로 동대문 부근에서 대대로 의원을 경영한 집안 출신. 학우인 정단옹주를 잘 따르는데 신분 차이가 있다보니 대등한 친구 사이라고 하기는 어려우며, 본인도 황녀와 친분이 있으면 나중에 득이 되리라는 계산 하에 옹주의 비위를 열심히 맞추는 등 속셈이 있다. 남월국 여의단 파견도 같이 가면서 옹주 곁을 지킨다.
2.12. 유림
- 이광로★
원 역사에선 위정척사파의 거두였던 인물로 본작에선 경기도 양평에서 화서학파를 이끌고 있는 명성 높은 선비. 황후 박씨가 포섭 대상으로 삼지만 본인도 정치적인 욕심이 없고 박씨가 정치 싸움에 서툰 덕분에 재석의 정적이 되지 않고 재석의 충신이 되었다. 향선현 확대 문제로 중추원에 입성, 국문의 우월성을 강변하며 공문서 작성을 한문에서 국문으로 바꿀 것을 주장한다.
- 기정진★
원 역사에선 위정척사 운동에 참여했던 인물로 본작에선 지방관을 몇번 지낸 후 사직한 명성 높은 선비. 황후 박씨가 포섭 대상으로 삼는다.
2.13. 상인
- 임상옥★
이 세계선에서는 외수사에 들어가려 했으나 외수사는 송상이 독점하고 있어 받아주지 않자 해외로 떠나 영국 동인도 회사에서 경험을 쌓고 돌아와서, 3부에서 중종이 도입한 압력솥과 석탄가스를 이용해서 홍삼 제조법인 구증구포법을 혁신해서 만상과 송상의 관계를 역전시킨 대상인이 되었다. 나라에 기부금도 많이 내어 영종이 정3품 검교재무참의 명예직도 내렸다. 재석을 수행해서 청나라에 가서 인삼 교역 협상을 맡았으나, 재석이 북경에 온 것을 얕본 청나라 상인들이 원 역사처럼 협상조건을 후려치려는 수작을 부리자 홍삼을 불태우는 시위로 역전시켰다.
- 임병진
양무공 임꺽정의 10대손으로 임꺽정이 세운 전통에 따라 등선군 군졸로 군 입대하여 정 5품 정위까지 오른 후 퇴역하고 가업인 마장동 양무관을 이어받는다. 조상인 임꺽정을 꼭 닮아 하와국왕 하진교보다도 더 체구가 크고 힘이 천하장사여서, 재석의 백두산 봉선 의식 때 제물로 쓴 짐승들을 도축할 백정들의 총책임자로 동행했다가 여흥으로 열린 씨름대회에서 47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하진교를 꺾고 우승하는 기염을 토한다.
- 이상덕
동래철소 대행수, 조상이 잉글랜드 출신 귀화인이다.
- 왕중선
누손주 최대 상단인 송현상단 도방.
- 민재홍
여흥 민씨 집안 서자로 학문보다는 상업에 재능이 있어 30대 초반 젊은 나이에도 누손주에 있는 민씨 가문 농장 최고관리자로 일하며 많은 성과를 올린다.
- 오청주
오공충의 9대손으로 주산방 방주. 친분이 있던 후송 장문성의 부탁으로 후송 한왕 조심원과 우림위 상장군 고문휘의 주산군도 망명을 도와준다.
2.14. 발명가
- 김민생
의사의 아들로 미주행 배의 요리사 일을 하다가 염장반찬에 질린 선장의 구박에 대처하기 위해 궁리하다 병조림을 발명한다.
- 박춘제
제물포에 사는 철공으로 김민생이 만든 병조림의 단점이 깨지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통조림을 발명하고 석관식이라는 이름을 붙인다. 김민생과 동업하여 통조림 회사인 춘생식행을 세워 사업에 성공한다.
- 김기두
대구 열기창 장인으로 처음으로 석유를 연료로 쓰는 증기기관 발명에 성공하여 비행선의 성능을 높이게 된다.
- 노백안
함북대학당 화학과 교수. 니트로글리세린 안정화에 성공한다.
- 구영회
한성대학당 화학과 교수. 대나무 필라멘트를 활용한 백열전구를 발명한다.
- 이철원(李澈元)
송림제철소에서 일하는 기술자. 무연탄을 사용하는 열풍고로의 원리를 이용해 강철 생산용 전로를 발명, 전로법을 개발하여 그 공로로 정5품 벼슬을 받는다.
2.15. 연예
- 향란
반촌극단 소속 여배우. 재석의 미주행에 동행하여 나폴레옹, 하진교 등의 앞에서 공연을 했으나 누손에서 학질에 걸린다.
- 성진
반촌극단 소속 여배우. 재석의 미주행에 동행하여 나폴레옹, 하진교 등의 앞에서 공연을 했으나 누손에서 학질에 걸린다.
- 운랑
반촌극단 소속 여배우. 재석의 미주행에 동행하여 나폴레옹, 하진교 등의 앞에서 공연을 했으나 누손에서 학질에 걸린다.
- 초현
반촌극단 소속 여배우. 재석의 미주행에 동행하여 나폴레옹, 하진교 등의 앞에서 공연을 했으나 누손에서 학질에 걸린다.
2.16. 번국
2.16.1. 술루국
- 술루국왕 이계성(아우구스틴 1세)
4부 초반 시점의 5대 술루국왕. - 술루왕비 → 대비 발레리아
아우구스틴 1세의 왕비이자 가스파르 1세의 어머니. 스페인계. 늦둥이 시동생 볼내공을 미워하여 해치려 들었다. 1840년 사망한다.
- 비수공 → 술루국왕 이원석(가스파르 1세)
이계성의 셋째아들이자 술루국 세자인 비수공, 23살에 부왕이 훙서하여 왕위에 올랐다. 거만한 성격으로 4살 위인 삼촌 디에고를 싫어하는 줄 알았으나, 사실은 자신의 어머니가 삼촌을 경쟁자로 보고 암살하려 하는 것을 막기 위해 일부러 대한에 머무르게 하려고 츤데레짓을 한 것이었다. 미주에서 귀경길에 누손에 들린 재석을 알현하면서 디에고에게 이제 대비가 죽었으니 고향에 돌아와도 된다고 권한다.
왕위에 오른 이후에는 브루나이와의 전쟁에 집중, 수년간 지리한 공방전을 벌인 끝에 대한의 지원을 받아 술루국의 침공을 막는 거점인 항구도시 아피아피와 브루나이의 수도인 반다르브루나이까지 함락시키는데 성공한다. 그러나 공세종말점에 달한 술루국 역시 곤란한 상황에 처하면서 재석에게 도움을 요청하는데 재석이 안남 정벌을 위해 누손주에 집결중인 대한군를 이용하라는 힌트를 주자 '술루국을 도와 브루나이를 정벌하기 위해 대한군이 집결하는 중'이라는 거짓 소문을 퍼트린다. 이 계략이 제대로 먹혀들면서 브루나이의 영주들은 이탈, 궁지에 몰린 술탄은 대한의 신하가 되었고 기존에 점령한 브루나이의 영토는 술루국의 영토로 확정되면서 100년 넘게 이어지던 브루나이와의 전쟁을 최종 승리로 이끈다. 여기에 브루나이가 대한의 번국이 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사라왁 왕국까지 대한의 번국이 되면서 대한의 번국을 2개나 늘리는 공적을 세운다.
- 볼내공 이계진(디에고)
3부의 술루국왕 디에고 1세의 현손자로 선대 술루국왕 펠리페 1세와 한인계 후비 사이에서 태어난 아우구스틴 1세의 이복동생. 본래 술루국왕의 차남에게 하사되는 볼내공 작위를 아우구스틴 1세의 차남이 요절하면서 대신 받고 술루 왕실의 전통에 따라 대한에 와서 친위대 참령으로 복무하다가 태손 경호대장인 태손위종사 별좌로 임명받아 재석을 경호한다. 조상인 디에고 1세와는 반대로 신불랑, 맥고국 아가씨들에게 들이대는 플레이보이이다. 재석이 즉위하자 참장으로 승진하고 친위대 보병 1대대장이 된다. 대비 발레리아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지만 그대로 친위대에 있기로 한다. 자식으로 2남 1녀를 두었으며 딸은 러시아 미하일 대공과 결혼한다.
- 조르조 벨라르디
이탈리아 연대 연대장이자 대령. 볼내공 디에고의 검술 스승이기도 하다. 3부에 나온 조르조 벨라르디의 직계 후손으로, 3부 조르조가 사실은 건흥제의 알려지지 않은 사생아였을 거라는 암시가 있었는데, 이 조르조도 얼굴이 아우구스틴 1세와 매우 닮아서 사람들이 펠리페 1세의 사생아 아니냐고 수군댈 정도였다 하니 확실히 건흥제의 혈통이 맞는 것으로 보인다. 재석은 그가 늘어놓는 '증조할아버지 이야기'를 듣고 조르조가 2부의 정일한처럼 전생의 자신의 숨겨진 후손임을 뒤늦게 알고 깜짝 놀랐으나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는다.
2.16.2. 조홀국
- 충정왕(忠貞王) 정인선
5대 조홀국왕. 조홀 태조 정명완의 증손자로, 조부 광현왕 정주신이 확장시킨 조홀국을 안정시키고 전쟁보다는 교역과 산업 진흥에 힘쓴다. 1827년 사망한다. - 왕비 궁본씨(宮本氏)
정인선과 사이에서 2남 2녀를 두었다. - 관탄공 정윤성
정인선의 차남. 원평제의 국상에 조문하러 와서 재석과 만난다. 형의 암군짓에 불만이 많아서 내심 이대로 가면 형왕과 조카인 세자가 폐위되고 자신이 왕위를 차지할 수 있을거라고 기대했는데, 갑자기 정신을 차렸을 뿐만 아니라 아편 재배 같은 미친 짓도 하지 않아서 자기가 건흥제라도 되냐며 어이없어하며 내심 고마 플랜테이션 농장이 망하기를 기도한다. 그러나 각성 후 정윤진은 굉장히 유능한 군주가 되어버렸고, 사망 후 왕위도 세자에게 계승되어서 그냥 평범한 종친으로 살아야 할 처지가 됐다. - 피낭후 정윤식
정인선의 서자. 정윤진보다는 12살 아래. 이복형의 명을 받들어 대삼주(남미)에 가서 현지 관리들에게 거액의 뇌물을 주고 고무나무 종자를 잔뜩 구해 돌아와 형왕의 칭찬을 받는다. 상당히 유능한 인물인지 종자를 가져오는 목표를 달성했을 뿐만 아니라 현지인들이 고무를 이용해서 만든 물건들도 연구용으로 함께 가져오는 치밀함을 보였다.
- 헌제왕(憲齊王) 정윤진
6대 조홀국왕. 정인선의 장남이다. 부왕과는 정반대로 주지육림에 빠진 암군으로, 늘어난 국가 수입을 모두 향락에 퍼붓고, 간언하는 충신들을 전부 몰아내고 간신배들로 조정을 채웠다. 어차피 대한군이 지켜줄텐데 용병들 주는 월급이 아깝다고 최정예 고참 왜병들을 전부 해고하고 총병력을 4만에서 1만으로 줄여버리는 등, 자원의 저주에 걸리고 번국으로서의 의무를 소홀히 해서 교체될 것 같이 보였으나...
대한 본국 연해주에서도 주석 광산이 발견되어 조홀국의 주력 산업인 주석 광업에 타격이 예상된다는 보고를 받고 각성하는 반전을 보였다. 주석 외의 주력 산업을 찾아내라고 신하들을 들들 볶더니, 신통치 않은 답변들만 나오다가 세자 정호석이 과거 대한에서 들은대로 고마(고무)를 새로운 주력산업으로 육성하자고 진언하자 가납하고 즉시 원정대를 구성해서 남미로 보내서 고마나무 종자를 가져와서 플랜테이션을 세운다. 뿐만 아니라 그 회의에서 양귀비를 재배하자는 미친 소리나 나오는 것을 보고 느낀 바가 있었는지 조정을 차지하고 있던 술친구들을 모두 몰아내고 옛 충신들을 다시 등용하는 모습을 보여 옛날 건흥제가 각성하던 모습 같다는 평을 받는다.[84] 이후 군사력도 일부 복구한데다가 과거 내란의 경험을 살려서 홍적의 난도 다른 나라들보다 더 손쉽게 진압하는 등, 다시 타락하지 않고 국정을 성실히 수행하면서 나라를 무난히 잘 다스리다가 1847년 과음으로 갑작스럽게 사망한다. - 파항공(破抗公) 정호찬
정윤진의 5남. 작중 3번째로 재등장한 이름이 정호찬인 인물이며 1부 정호찬의 11대손이기도 하다. 이전의 정호찬들과 달리 당당하게 보상을 직접 요구하는 성격이다.[85] 내달국인 아내와 결혼하기 위해 대한에서 드문 예수교 종파인 네덜란드 개혁교회로 개종했다. 태황이 신기한 동물들을 좋아한다고 생각한 정윤진의 지시로 기린, 코뿔소 등을 잡아와 태황에게 진상하고 앞으로 대한 본국에서 계속 살겠다고 하여 내직사 직할의 해외무역 담당기관인 외무사 책임자인 전수가 된다. 우연히 일가족이 복어 독으로 몰살당해 흉가가 된 3부 정호찬 가문의 빈집을 사들여 가족과 함께 살게 되며, 집 안에 예배당도 만들어 야소님의 가호가 있으니 귀신 따위는 두렵지 않다고 하여 재석의 혀를 내두르게 한다. - 파항공비 한씨
정호찬의 내달국 출신 부인. 정호찬이 가족을 모두 한양으로 데려와 한양에서 산다.
- 정호석
7대 조홀국왕. 정윤진의 삼남으로 정윤진의 장남과 차남이 요절하여 세자 책봉된다. 세자 시절 부왕의 암군짓에 불만이 많았던 것을 보면 정상인으로 보인다. 부왕이 대한 본국에서 주석을 생산할 수 있다는 소식에 각성한 후 차기 주력 산업에 대해 고민하며 토의를 하는데 신통찮은 의견들만 나오자 기억을 쥐어짜서 대한에서 재석에게 들었던 고마 산업에 대해 진언하고 부왕은 이를 가납한다. 이후에는 불만이 줄어든 듯 것으로 보이며, 왕위도 무난히 승계받는다.
2.16.3. 하와국
2.16.3.1. 역대 국왕
- 하성왕(夏成王) 하민상(칼라니오푸)
하와국 8대 국왕. 선왕 하원호가 장수해서인지 47세가 되어서야 즉위했다. 1833년 제1왕비 칼레이아가 죽은 후 제2왕비 카네카폴레이의 참소에 넘어가 하진교를 폐세자하고 쿠아이와를 세자로 삼는 뻘짓을 하지만 하진교의 정난으로 결국 하진교에게 양위를 한 후 여생을 대한 본국에서 살게 된다. 광덕제는 그가 초성왕 같다고 아직 살아있는데도 하성왕이라는 시호를 미리 내리고 환영 연회에서도 곰발바닥 요리를 메인으로 내어 조롱한다.[86] 본인은 유배갈 줄 알았는데 저택에 별장까지 하사받고 대한에서 편한 노후를 보내게 되자 나름 만족하며 카네카폴레이와 쿠아이와를 바로 손절하는 태도를 보이고, 하진교와도 얼마 안 가 화해한다. 심지어 하진교가 자신의 정변을 극화한 연극 공연에 초대하자 좋다고 구경을 올 정도. 1836년 자연사한다. 유골은 고국으로 돌아와 왕실묘지에 안장된다.
- 하와국왕 하진교(카나이나)
하민상의 칠남인 하와국의 세자로 4부의 개그 캐릭터. 어머니 칼레이아가 과잉보호하면서 학문에 힘쓰도록 한 덕에 지성은 뛰어나지만 운동부족으로 심한 비만 상태이다. 재석은 처음에는 첫인상만 보고 비호감이라고 생각했지만 붙임성 좋은 성격이 마음에 들어 대한에 가면 살을 빼주겠다고 결심한다. 대한에 와서는 재석의 말동무 역할을 하고 있다. 재석의 북경 방문길에 동행했다가 심왕부에서 베푼 사냥대회에서 하와국 익위사 군사들의 도움을 받긴 했지만 호랑이 사냥에 성공한다. 재석의 일본 방문도 동행하는데, 재석 일행이 부산까지는 육로로 이동하는 동안 하진교는 제물포에서 동진을 타고 부산으로 이동해, 닷새 간 유일한 승객으로 호사를 누렸다고 한다. 일본에 가서는 요시와라 유곽에 쳐박혀 시간을 보내 재석이 한심스러워 할 정도. 그래도 5년간 함께하며 대한에서 수련해 단순한 비만 한량에서 문무를 겸비한 전사가 되었고, 재석과 친형제처럼 매우 친해졌으며, 재석의 이복누이인 현순옹주를 마음에 두게 되었는데 광덕제가 혼인을 허락하여 소원을 이루었다. 혼인 후에는 유흥도 끊고 부인에게만 충실해졌다.
하지만 그 사이 어머니 칼레이아가 죽고 계모 카네카폴레이의 수작에 폐세자당하는 위기를 맞았지만, 재석이 붙여준 호위무사 40명을 데리고 본궁에 쳐들어가[87] 쿠아이와를 꺾고 승리, 광덕제가 하민상에게 양위를 명해 9대 국왕으로 올랐다. 재석이 딱히 작정하고 가르치려고 한 적이 없는데도 함께 하며 자연스레 배우고 들은 검술, 승마, 사냥, 역사지식 등을 스펀지처럼 흡수하고 자신의 상황에 적절히 맞춰 활용한 것인데, 이에 재석도 놀라며 난 놈이라고 평가했다. 대한에 가기 전에는 정말 인기 없는 세자였다고 하는데, 몰라보게 달라져서 돌아온[88] 뒤 보여준 이런 모습으로 인해 지지자가 늘어났다.
국왕으로 즉위한 후에도 머리도 좋고 학식도 깊어 정사를 잘 돌보기는 하나, 일을 귀찮아하고 하와국보다는 즐길거리가 많은 대한 본국을 더 좋아하여 광덕제 조문 핑계로 대한에 와서는 왕비가 둘째를 낳았으니 아이가 배를 탈만큼 클때까지는 기다려야 한다며 3년이나 놀다가 재석이 등을 떠밀어서 겨우 귀국하는 등 여러 핑계를 대며 대한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다. 재석이 등떠밀다시피 하여 3년만에 귀국해서도 대한 본국처럼 호랑이를 들여와서 사냥도 하고 멧돼지 개체수도 줄이겠다며 직접 발리 섬에 가서 발리 왕의 허가를 받아 발리호랑이 15마리를 잡이다가 하와이 본도에 풀어놓는 짓을 저지르나 하진교가 태황태후 조문으로 본국에 다녀온 사이 호랑이들이 호환을 일으켜 민심이 뒤숭숭해지자[89] 어쩔수 없이 호랑이들을 다시 잡아다가 동물원에 가둬두고 사냥 이벤트가 있을 때 한마리씩 풀었다가 잡는 것으로 정책을 바꾼다. 몰몬교가 전도하러 오자 아내를 여럿 둘 수 있다는 교리에 혹하긴 하지만 몰몬교도 기독교인 건 마찬가지라 기존 하와이 신에 대한 신앙은 버려야 한다고 하자 대한처럼 본인은 개종 안 하고 하와국 내 선교는 허용한다. 그리고 술루국에 가면 너희는 화형 당할테니 절대 가지 말라고 조언해 준다.
작중 하와이에 대한 묘사가 조금 엉뚱하고 천방지축이어도 유쾌한 친구들 취급이어서인지, 4부 시점 기준 모든 등장인물을 통틀어서도 재석과 가장 허물 없이 막역한 사이인 사람이 하진교이다. 하진교가 재석과 오랜만에 재회하고 일국의 황제에게 베어허그를 시전하는데도[90], 당사자들은 서로 농담이나 해대고 주변인들도 "우리 하와국왕이 철이 없어서 죄송합니다" 수준으로 넘어가는 정도.
과학, 기술 발전에도 꾸준히 관심을 기울이고 있어 대구에서 제빙기가 개발되자 재석이 아직 실용화 단계가 아니라며 말리는 데도 기어이 설비를 구입하고 예비 부품까지 바리바리 실어갔다.
2.16.3.2. 왕실
- 순정왕후 정씨(順貞王后 征氏, 칼레이라)
하진교의 생모. 아들이 대한에 가 있는 사이 세상을 떠났다.
- 폐비 공씨(廢妃 攻氏, 카네카폴레이)
하민상의 제2왕비, 체구가 크고 풍만한 점이 하민상에게 어필되어 총애받는다고 한다. 성질이 억세어 자기 자식 쿠아이와를 세자로 올리기 위해 남편을 들볶아 뜻을 이루었으나 하진교가 가만히 있지 않고 정난을 일으킨다. 아들의 패색이 짙어지자 일기토 자리에 난입해 곧바로 하진교의 승리를 인정하며 목숨만 살려달라고 싹싹 빌었다. 그대로 투옥되었고 한양으로 압송당해 재판을 받은 후 현토도(사할린)으로 귀양간다. 현토도에 가서는 몰락한 것에 대한 충격으로 폐인이 되어 살다가 결국 2년째 겨울을 넘기지 못하고 죽는다.
- 현순옹주 → 현순공주/하와국왕비 이아지(賢順翁主→賢順公主 李阿只)
광덕제의 서녀. 1818년생. 미주 출신인 황빈 홍씨 소생. 하와국 세자 하진교와 결혼하며 화번공주로 승작된다. 재석이 이복형제들에게 별 관심이 없기도 하고 본인도 어릴 때는 동갑내기 이복자매인 길현과 친했던 듯하나 결혼 후에는 남편 하진교와 재석이 절친인지라 재석과 매우 가까워졌다. 생모인 홍씨는 딸을 멀리 보내기 싫어 결혼을 반대했지만 본인은 하진교와 금슬이 매우 좋다 못해 주변 사람들이 진저리칠 정도의 닭살 커플이다. 혼담이 오가기 전부터 내심 호감이 있었다고 하며, 하와국에 도착하기도 전에 임신했을 정도. 하와국 도착 직후 첫아들을 낳고, 이후로도 자식들을 숨풍숨풍 낳으면서 아주 행복하게 산다. - 하와세자 하태은(카니파후)
하진교와 현순공주의 장남. 1834년생. 어린 시절엔 재석의 딸 민지에게 마음이 있었으나 대한에서 사촌간 혼인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기에 무산되고 하와국 귀족과 혼인했다. - 하태성(카헤킬리)
하진교와 현순공주의 차남. 1836년생. - 하태진(칼레히나)
하진교와 현순공주의 삼남. 1838년생.
- 하성교(리홀리호)
하진교의 이복동생. 어렸을 때는 쿠아이와처럼 하진교를 무시했지만 대한에서 돌아온 하진교가 문무를 겸비한 용사가 된 것을 보고 진심으로 감동하여 하진교에게 충성하며 사이좋은 형제가 된다. 거북섬에 연례 거북사냥을 하러 갔다가 영국 탐험선 비글 호와 만난다. 1840년에 누손주 모로족 토벌에 하와국이 정식으로 파병[91]할 때 총대장을 맡는다.
2.16.3.3. 하와인
- 맹수동(猛首銅)
태손위종사→태자익위사 소속 종 7품 우종사. 충치가 심한데도 발치를 두려워하여 허세를 부리다가 발치보다 더 고통스러운 황산 신경치료를 받고 앓아눕고, 미주에서 잡은 회색곰을 산채로 하와국에 데려가겠다고 고집하는 등 개그 캐릭터로 활약한다. 함경도에서 냉면 맛집으로 암행을 갈 때 같이 갔는데 재석이는 냉면을 시켰는데 눈치없게 자기는 수육이 먹고싶다며 수육을 시키는 개그신을 선보인다.
- 카마우아와
하민상의 제1왕비 칼레이아의 오빠이자 하진교의 외삼촌. 윤호원의 명을 받고 하진교가 폐세자가 되었다는 것을 알렸고, 정난에 함께한다.
- 마우이
태평전쟁에 참전한 병사. 홍천귀복 납치 작전에 투입되었을 때 홍천귀복의 유모의 목을 꺾어서 죽여버렸다. 귀국한 후 이 작전의 전공 덕분에 하와국 최고의 유명인이 되었으며, 원래 본명은 따로 있었으나 독수리로 변신하는 신화 속 인물의 이름을 따 마우이라는 새로운 이름까지 받았다.
2.16.3.4. 한인
- 이성원
강녕왕과 하와인 첩의 5대손. 태황 친위대 소속 하와국 병사들의 지휘관(정 6품 정위)으로 태손 경호부대인 태손위종사 좌장사 직에 있다. 재석이 태자가 되면서 그대로 태자익위사로 변경되었다.
- 이보열
강녕왕의 증손자로 와가촌의 사또이다.
- 윤호원
대한에서 보내진 왕사. 하민상이 세자를 하진교에서 하원교로 바꾸자 본국에 이를 알렸고, 하진교가 돌아오자 하진교의 외삼촌인 카마우아와를 보내고 그를 통해 대책을 제시한다. 하진교가 말을 듣지 않고 무력으로 보위를 차지한 것이 속으로는 못마땅했지만 하진교가 태종처럼 했다고 말하는 바람에 윤호원은 반박할 말이 원천봉쇄되어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렇게 즉위한 하진교는 아예 나라를 비우고 한양에서 지내버려서 이에 골머리를 앓다가 하진교가 재석에게 등 떠밀려서 돌아오고 후임자 이동연이 오자 날아갈듯한 마음으로 하와국을 떠난다.
- 이동연
윤호원 후임 왕사. 하진교가 멧돼지 대책 핑계로 호랑이까지 들여오기로 하고 하와인 대신들도 적극 찬동하는 것을 보고 멘붕에 빠진다. 하지만 몇년 지내다 보니 하와국 방식에 적응해 하진교가 국사를 안 돌보고 자신이 대신 본 기간은 하진교 몫의 녹을 달라고 해 대신 녹봉을 두 배로 인상받거나 홍서당 토벌에 참전하고 싶다고 하고 후송 강남에서 호랑이 잡고 싶다는 하진교에게 양산박에서 산적으로 전업할 거 아니면 쓸데없는 얘기 하지 말라는 등 본국에선 상상도 못할 패기로운 직언을 날린다. 하진교가 한양에 몇년이나 있던 것에 질렸던 하와국 중신들은 자신들이 못하는 말을 하는 이동연에게 환호한다.[92] 그러다 아예 하와국에 뼈를 묻기로 하고 자신의 후임을 가르칠 게 많으니 미리 보내달라고 표문을 올린다. 그 표문에서도 하진교를 알아서 하라면 할 사람이 아니라서 목덜미를 쥐고 끌어야 한다고 직설적으로 표현해, 아무리 본국에서 보낸 왕사라지만 일국 국왕에게 못 하는 소리가 없다며 대한 조정에서 미친 사람 취급을 받았다. 그리고 후임자가 오고도 2년이나 귀국하지 않고 인수인계하다가 노환으로 사망한다. 하진교는 이동연의 장례를 성대히 치러 주었으며 선대 왕사들이 사망 후 시신이 본국으로 운구된 것과 달리 하와국 땅에 묻히면서 진짜로 하와국에 뼈를 묻었다.
- 박병선
이동연의 후임 왕사. 전임자가 한 성질하던 까닭에 하와국에 동화되어버린 탓에 성격이 좀 약한 인물로 골라 보냈다. 그러나 이쪽도 결국 하와국식 패기에 물들어서(...) 본국으로 보내는 편지에 하와국왕이 1년이나 안 오는 거 보니 세자에게 양위할 모양이라며 양위 교서를 요청하는 패기를 보인다.
2.16.4. 유구국
2.16.4.1. 역대 황제 → 국왕
- 대흥제 상호(大興帝 尙灝)★
유구 6대 황제, 조카 상성이 4세에 요절하여 즉위했다. 한때 나쁘지 않은 군주였던 것으로 보이나 유구 멸망 시점에서는 치매에 걸려 사리판단을 전혀 못하는 상태.
- 성평제 → 중산왕 상육(成平帝 → 中山王 尙育)★
병든 상호를 대신하여 대리청정 중이다. 재석이 유구에 오자 설마 하면서 희망회로를 굴리다가 유구의 독립을 박탈한다는 태황의 친서를 받고 절망한다. 재석에게 태황께 용서를 구할테니 제발 취소해달라고 사정하나 대명공과 에도에서도 찬성했다는 말을 듣고 충격을 받아 혼절했다. 치매 걸린 심신상실자가 한양에 와서 선양 의식을 치를 수는 없으므로 부득이하게 유구 제위를 양위받아 유구 7대 황제 성평제가 되었는데, 유구 백성들은 이를 상육이 하루라도 황제 소리가 듣고 싶어서 그런다고 오해하고 '하루살이 황제(一日帝)'라고 비웃는다. 1831년 양력 4월 한양 천단에서 대한 광덕제에게 유구 황제위를 선양하고 중산왕으로 책봉받는다. 대한에 보낸 외교관들을 통해 동생의 흑심을 눈치 챈다. 1847년 사망한다.
- 상준(尙濬)★
1832년 생, 상육의 장남. 원역사에서는 1844년 요절했지만 작중에서는 수명이 연장되어 1847년 부친이 사망하자 즉위한다.
2.16.4.2. 황실 → 왕실
- 상응(尙膺)★
상호의 차남, 상육의 동생. 요절했다.
- 대리왕 → 대리공 상돈(大里王 → 大里公 尙惇)★
상호의 삼남, 상육이 쓰러진 틈을 타 재석에게 형을 볼모로 끌고가시고 자신을 번왕으로 세워줄 것을 부탁하는 이기적인 면모를 보인다. 재석은 황제 자리가 중산왕으로 격하되고 나라가 망하는 상황에 보위나 탐내는 모습을 보고 한심해하며 이 자를 볼모로 끌고 가기로 결정한다. 한국에 온 뒤 이를 알게 되지만, 이번에는 태황에게 잘 보이면 자신이 중산왕에 봉해질 수 있을 거라는 희망회로를 돌리며 정신승리해 재석이 그 긍정왕스러운 면에 감탄한다 하지만 형왕이 상돈의 흑심을 알게 되고 싸우다 죽으라는 의도인지 태평천국 토벌전에 유구군 500명을 이끄는 지휘관으로 임명된다.
- 유구왕비/정민공주(貞珉公主) 이민지
1834년생, 김씨의 장녀. 생모 동비를 따라 미주에 동행한다. 생모의 성격을 많이 물려받았는지, 동미주의 마리아치, 하와국의 훌라 춤을 보며 자신도 저런 춤을 추는 무희가 되고 싶다고 떼쓴다. 그러나 3부에서 황녀들이 악기를 배우는 것도 천한 기녀들이나 하는 것이라며 반발이 있었는데 황녀가 기녀들이 추는 선정적인 춤을 배우는 것은 대한의 사회 분위기 상 절대 불가능한 일이다. 재석이 하진교에게 이런 고민을 공유하자 민지를 하와국으로 보내면 눈치 보지 않고 마음껏 취미 생활을 즐길 수 있다며 자신의 장남 하태은과 결혼시키자고 바람을 넣는다. 반면 동빈은 화선공주 대신 유구 세자빈으로 보내고 싶어하고 마침 황태후 박씨도 자기 딸은 유구에 안보내겠다고 하고, 민지 본인도 유구 세자빈이 되면 신분이 옹주에서 공주로 승작하는 것이 좋으니 시집가고 싶다고 동의하여 유구 세자빈이 된다. 1847년 세자 상준이 중산왕으로 즉위하며 왕비가 되었다.
2.16.4.3. 신료
- 마덕무
유구의 재상인 삼사관 중 하나. 태황의 친서를 받고 그동안 자신들이 너무 안일했음을 인정한다. 어떻게든 시간을 끌려고 시도하지만 실패한다.
- 모집공
삼사관 중 가장 연장자. 재석에게 분부를 거두어 주시면 자기 딸이라도 바치겠다고 읍소한다.
- 향정해
삼사관 중 한명. 키는 6척이 넘고 체중은 120kg을 가뿐히 넘을 만한 거구의 가라테 고수로 노인임에도 호위병들이 긴장할 만한 외견을 지녔다. 외교관으로 각국에 파견된 경험이 있으며 이를 바탕으로 대한이 일본에 유구를 댓가로 아모국을 팔아치웠음을 눈치채고 아모국의 가치를 주장하는 방향으로 유구를 지키려 한다.
2.16.5. 불나이
- 오마르 알리 사이푸딘 2세★
브루나이 술탄국의 23대 술탄. 100년 넘게 브루나이와 전쟁을 벌이는 중인 술루국의 침공을 막기 위해 영국인 용병대장 제임스 브룩을 사라왁의 라자로 임명하여 그를 고용한다.
그러나 군사에 문외한이라 무리하게 현지사수 명령을 내렸다가 아피아피 공방전에서 술루국에 대패하고 직할 중앙군을 모두 잃는다. 술탄의 무리한 명령에 휘하 군사들을 잃은 영주들도 대거 반란을 일으키고 가까스로 탈출한 제임스 브룩도 사라왁에 틀어박혀 술루국을 막을 군사가 아예 사라지면서 수도인 반다르브루나이까지 잃는다.
그럼에도 수도를 탈출해 결사항전을 부르짖었지만 브루나이 정벌을 위해 대한군이 집결중이라는 소문을 퍼트린 술루국의 계략에 그나마 남아있던 영주들도 이탈하고 대세를 읽은 제임스 브룩도 사라왁을 들고 이탈해 독립을 선언하면서 궁지에 몰린다. 결국 직접 대한에 입조, 술루국에 점령당한 영토에 사라왁까지 잃고 대한의 신하가 된다.
2.16.6. 사라왁 왕국
- 제임스 브룩★
술루국의 브루나이 침공을 막기 위해 브루나이에 고용된 영국인 용병대장. 브루나이 술탄에 의해 사라왁의 라자로 책봉된다. 전직 동인도회사군 장교 출신으로 제법 전투 실력이 있어 100년 넘게 전쟁으로 다져진 술루국의 공격을 수년간 막아내었으나 대한의 지원을 받은 술루국의 대대적인 공격과 술탄의 무리한 현지사수 명령으로 인해 아피아피(코타키나발루) 공방전에서 패배하고 가까스로 탈출한다.
이 일로 술탄에 앙심을 품고 전장에서 이탈해 봉지인 사라왁에 틀어박힌다. 이후 술루국의 공작으로 영주들이 술탄에게서 이탈할 때 마찬가지로 사라왁을 들고 이탈, 독립을 선언하며 독립국의 군주가 되었다가 브루나이가 대한의 번국이 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이후 대한군을 앞세운 브루나이의 보복을 피하기 위해 직접 한양으로 달려와 마찬가지로 대한의 신하가 된다.
2.16.7. 남월국
- 부록군공 → 가정공 완복홍항 → 남월국왕 완복승(富祿郡公 → 嘉定公 阮福洪伉→ 南越國王 阮福昇)★[93]
소치제의 9남. 1837년생. 왕위 계승과 거리가 먼 덕분에 한결 자유롭게 이것저것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자 학문과 독서에 전념했다. 성리학만 맹목적으로 파고든 완복시와 달리 다양한 분야를 폭 넓게 공부해 세상 넒은 줄 안다는 게 결정적 차이점. 대한에서 출간한 번역서들을 구해 읽는 과정에서 독학으로 한어도 습득했다. 피난 행렬에서 빠져나와 어느 성에 은신하고 있었으나 하필 그 성이 신헌이 이끄는 대한군에게 두들겨 맞고 투항하면서 그대로 포로가 된다. 남월왕으로 봉할 완씨 황족을 확보하는 데 성공한 대한은 왕족 조작이나 사망 날조 같은 금방 탄로날게 뻔한 극약처방을 쓸 필요가 없어졌고 서두르는 일 없이 차근차근 지방을 정리하며 나아갈 수 있게 되었고 재석은 그를 안남 정벌 종료 후 안남 남부를 다스릴 새 남월왕으로 책봉할 계획을 세운다.
한양에 불려와 재석을 알현한 자리에서 부친과 형의 잘못을 순순히 인정하고 공손한 태도를 유지했으며 서툴긴 해도 안남 조정에서 따로 가르치지 않는 한어를 스스로 배워 습득했다는 점과 호학 성향으로 재석은 물론 중신들에게도 호감을 산다. 중월과 남월로 쪼개려던 계획을 취소하고 그냥 완복홍항에게 맡겨도 되지 않겠냐는 말까지 나왔을 정도로. 재석은 부록군공이란 봉호가 점잖치 못하게 들린다고 여겨[94] 가정공이란 봉호를 새로 내린다. 자신을 남월국왕에 봉하겠다는 말을 듣고 처음에는 깜짝 놀라며 사양하려 했지만 주성종의 설득 끝에 책봉을 받아들인다. 그러나 수도 후에를 비롯해 원래 완씨 왕실의 근본이라고 할 수 있는 직기와 우기를 중월국에게 빼앗기고 본래 참파와 진랍의 영역이었던 곳이자 안남인의 비중이 절반도 안 되는 남기와 좌기를 영토로 받게 된다는 것에 큰 충격을 받는다.
책봉 이후 남월국의 수도가 될 가정부로 향하는데 대한군이 자기 이름으로 항복을 권고하는 효유문을 성안에 뿌리고 대한군의 폭격으로 성안이 아비규환이 되는걸 무력하게 지켜본다. 한편 안남 의료 봉사에 자원한 정단옹주와 같은 배를 타고 출국하는 과정에서 몇 번 얼굴을 보게 되면서 그녀에게 호감을 갖게 된다.
- 반청간(潘淸簡)★
대남국 이부상서. 중국계 혈통으로 사덕제의 국수주의 정책에 동조하는 강경파로 분류된다. 대한이 진심으로 분노한 상황에서 장등계와 함께 대한에 사죄사로 파견, 나폴레옹 3세가 안남을 통해 태평군과 주고받은 무역품 리스트를 재석에게 바치는 신세가 된다. 본인도 사덕제의 정책이 말도 안 되는 건 잘 알고 있지만 반란이라도 일으키지 않는 이상 사덕제의 생각을 바꾸는 것이 불가능하고 유학자로서 차마 반정은 할 수 없어 눈 감고 귀 막으며 따르고 있었다. 대한에 다녀오는 동안 사덕제가 차라리 죽어 있기를 바랐을 정도.
대한의 안남 침공 이후에는 남기경략사에 임명되어 안남 남부 방어를 맡게 되지만 압도적으로 강력한 대한군에 의해 가정부가 포위당하는 상황에 몰린다. 그나마 청야작전을 통해 대한군의 진격을 늦추고 대한인을 인질로 잡아 가정부 함락을 막기 위한 인간 방패로 쓰는 정도이다. 성내는 대한군이 계속해서 폭격하는 가운데 포위망을 단단히 구축한 대한군에게 내부에서의 돌파 시도도 외부에서의 구원 시도도 모두 막히면서 사면초가의 상황에 빠지고 대한군이 본격적인 공격 개시 전 남월국왕으로 책봉된 완복승의 이름으로 최후통첩을 하자 결국 포위 114일만에 성문을 열고 항복하여 완복승의 재상이 된다.
- 조석우
대한에서 파견한 집정대신으로 사실상의 총독 역할.
2.16.8. 중월국
- 중월국왕 이택진(中越國王 李擇振)
화산 이씨 26세손. 1805년생. 중월국왕감을 선발하게 된 화산 이씨 가문에서 고르고 골라 뽑은 인재다. 1852년 당시 48세로 번왕으로 적합한 나이에 그동안 함양 군수 및 공무부 정랑을 지내는 등 흠잡을 데 없는 관직 생활을 했고, 슬하 3남 2녀 중 세자가 될 장남이 마침 홀아비여서 화번공주를 시집보내는 데도 적합하여 초대 중월국왕으로 책봉된다. 일반 관료로만 살다가 갑자기 일국의 왕 자리에 앉혀진지라 내심 연고도 없고 말도 안 통하는 곳에서 나랏일이란 걸 어떻게 해야 할지 걱정이 태산인 상태이다.[95]
- 세자 이○○
이택진의 장남. 결혼을 했으나 상처하여 홀아비로 지내다 부친이 중월국왕으로 간택되면서 자신도 중월세자가 되고 흥선제의 사촌형인 문선후 이신의 딸[96]과 재혼한다. - 세자빈/○○공주 이○○
문선후의 딸로 화번공주로 뽑혀 5촌 당숙인 흥선제의 양녀로 입적되어 공주 작호를 받고 중월국왕으로 책봉된 이택진의 장남에게 하가하여 세자빈이 된다.
- 서유훈
본국 내무대신 출신 중월국 집정. 내무대신 시절에는 이택진의 상관이었으나 지금은 바뀐 처지에 따라 이택진에게 예를 갖추며, 진심어린 조언과 배려를 아끼지 않는다.
2.17. 미주
2.17.1. 한인
2.17.1.1. 관료
- 황사영★
신불랑이 건국되면서 증가한 외교 사무를 수행하기 위해 신설된 미주 주재 외무부 특설 주재관. 천주교가 공인된 후 수세기가 지난 이 세계에서는 역적이 되지 않고 대한의 충실한 외교관으로 잘 살고 있다. 재석이 미주에 갔을 때 현황을 보고하고 협상단의 일원으로 실무를 수행한다. 재석 즉위 이후엔 주미대사가 되었다.
- 이종우
미주대총관. 업무 차 나와있다가 재석을 뒤늦게 영접하고 지나치게 벌벌 떠는 심약한 모습을 보이며, 그가 협상 얼굴마담이라고 심각한 오해를 하고 있다.
- 김용관
이종우 후임 미주대총관. 김재정이 미주에서도 봉선 의식을 해달라는 연명 상소를 미주 유력자들에게 받고 다닌다는 것을 흥선제에게 보고한다.
- 남흠덕
북미주지사. 재석의 국혼 소식은 들었으나 태증손을 보고 넘어올 줄 알고 공무를 수행하다가 뒤늦게 알고 영접하면서김성권 mk.2가 될까봐 두려워서벌벌 떠는 심약한 모습을 보인다. 재석은 광덕제가 태자 때 미주에 왔을 때 벌인 만행 때문이 아닌가 의심한다. 이후 미주대총관이 된다.
- 박성일
학무대신 출신 미주대총관. 65세가 되자 은퇴하려고 했다가 마지막 관직이라며 권유받아 남흠덕의 후임이 되었다. 흥선제의 명령도 있었고 본인도 학무대신 출신답게 미주의 교육 문제 개선을 목표로 삼아, 2백여개였던 소학교가 그의 임기 동안 무려 7백여개로 늘어났다.
- 김신규
미주대총관.
- 장승원
동변관리사.
- 풍산백 이용갑
신불랑과의 협정으로 대한령이 된 멕시코 서북부를 동미주로 안정화시키기 위해 파견되는 안핵사. 미주 태생으로 본국 대과에 급제하고 여러 요직을 거치는 등 능력은 뛰어나나 탐욕스러운 성품을 가져 재석이 우려하는데, 독자들은 원역사의 조병갑, 이용태처럼 미주에서 큰 사고를 칠 복선이라고 추정하고 있다.[97] 그러나 이후 외전에서 추가로 묘사된 것을 보면 미주 출신으로 공직생활 내내 차별을 겪었음에도 임금에 대한 충성심은 굳건해서 공화파들은 다 때려잡겠다고 다짐하고 미주 자치에도 찬동하지 않으며, 재물은 공금엔 절대 손을 안 대고 전리품에서 부수입이나 조금 챙기는 정도에,[98] 자기가 조직한 아파치 사포대들이 민폐를 끼치는 것을 자기 출세에 지장이 올까봐 은폐하긴 하지만 따로 경고를 해서 자제시킬 정도의 판단력은 갖춘 복합적인 인물이었다. 그러나 새로운 영토가 편입되고 미주인들이 정체성을 확립해가며 공화파들이 늘어나서 더 섬세한 통치가 필요한 미묘한 시기에 적합한 인물은 분명 아닌 것으로 보이며, 어사대에서도 요주의 인물로 올랐다. 하지만 재석은 그가 임기를 연장해서 10년 가까이 채우면서 동미주를 거의 다 평정하는 업적을 세운데다가, 미주 출신으로 가장 출세한 인물로 우상이었고 능력도 뛰어났기 때문에 1840년 한-신불랑 정상회담을 위해 직접 미주를 방문했을 때 미주안핵사를 상설직인 동미주지사로 변경하면서 이용갑을 2~3년 더 유임시키기로 한다. 그 후 독자들의 우려와 달리 무사히 임기를 마치고 은퇴했다고 한다.
- 이유원
남미주지사. 1850년 시점에는 외무대신을 지낸다. 이후 박람회 영관사직를 맞는다.
- 윤행창
중미주지사.
- 강세일
북미주지사.
- 동풍길(童豊吉)
미주로 건너온 오도리의 수령. 본국 출신에다가 오도리는 임금의 활이라며 으스대는 매우 거만한 성격이라 부하들은 그를 싫어한다. 하지만 군사를 지휘하고 적을 쫓는 능력은 매우 뛰어나서 부하들도 불만이 많으면서도 그의 지시는 따른다.
2.17.1.2. 공화주의자
- 신규필
이용갑의 종사관으로 미주 태생. 미주 개척 200년이 넘도록 미주 출신들이 관직에서 차별을 당하고 미주대총관 등 요직도 본국인들만 임명되는 현실에 분개하고 신불랑에서 건너온 천부공화론을 공부하여, 태황은 그대로 모시되 모든 관직과 법률은 미주에서 자체적으로 정하는 자치권 획득을 바라고 있다. 관료 생활을 끝낸 이후 단속을 피해 산속에서 공화주의 회합을 연다.
- 이빈
미주합중국을 자주 오가는 상인으로 합중국인들의 영향을 받아 공화주의자가 되었다.
- 유승진
남미주 출신 서생으로 서양 책을 읽다가 공화주의자가 되었다. 암군이든 명군이든 군주의 존재 자체가 해로운 것이며 오히려 백성들에게 희망고문을 주는 명군이 암군보다 더 해롭다고 주장한다. 다만 군주정의 완전 폐지보다는 입헌군주제와 미주의 자치를 추구한다.
2.17.1.3. 원씨 가문
- 원대철
밀열공 원사웅의 9대손으로 미주 원씨 가문 현 당주. 13년 전 광덕제가 미주에 순행왔을 때 미주 원씨를 역적의 후손이라고 폭언하여 이에 충격받은 선친이 돌아가신 슬픔을 재석에게 하소연하다 하마터면 황실모독죄를 저지를 뻔 했으나 재석이 못들은 척 말을 고칠 기회를 줘서 무사히 넘어간다.
- 원재현
원대철의 장남으로 독실한 개신교도. 아버지가 실언을 한 이후로 재석을 수행한다. - 원시훈
원재현의 차남, 미주순검대 부위. 육촌형 원시경이 본국에 가 출세하는 모습을 부러워했지만 혹시 아들이 잘못될까 우려한 아버지의 반대로 따라하려던 마음을 접었다. - 원재신
원대철의 차남으로 재석이 광덕제가 원씨 가문에 막말을 한 것을 알고 이를 보상하려고 보내달라고 요청한 영어 통역관으로 협상을 수행한다. 선교사에게 배운 동부 억양의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며 뉴욕에서 공부해서 목사가 되고 싶어한다. 예일 대학교에서 박사 과정을 밟으며 재석의 배려로 주미 대한 공사관 서기관 직위를 겸한다[99]. 그 와중에 스미스&스크루지 상회의 존 화이트를 만나 대한으로 인삼을 수출시켜달라는 청탁을 받지만 거절하고 대신 후송으로 수출할 수 있도록 추천서를 써준다.
- 원시경
미주원호군 참모부 소속 중위, 원재신의 5촌 조카.
2.17.1.4. 태원백 가문
- 태원백 김재정
재석의 후궁 동빈 김주희의 아버지. 1780년대 생. 과거 태자비 간택 때 홍씨 규수의 사례를 보고 자기 딸을 더 높은 곳으로 올려보내고자 매우 애지중지하며 엄격히 키웠고 결국 태손의 후궁으로 만들었다. 재석이 즉위한 후 백두산 봉선 소식을 듣고 봉선 의식의 의미를 잘못 파악해 재석이 미주로 왕림하여 미주에서도 봉선 의식을 해주십사 하는 연명 상소를 미주 유력자들에게 받으러 다니다가 이게 오해를 사서 역모로 몰리기 직전까지 가고 본국으로 소환된다. 소환령에 주변에선 난리가 나고 진짜 역모범으로 몰리기 전에 도망가라며 망명을 권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그랬다가 '잠적한 걸 보니 진짜 켕기는 게 있었나보다'가 되면 딸이 어떻게 될지를 생각하면 차마 그럴 수가 없어 그대로 출두했다. 그래도 진짜 역모는 아니었기에 재석은 그를 용서하고 대신 박규원에게 성리학 특별 과외를 1년동안 받는 것으로 벌을 갈음하도록 한다. 오자마자 석고대죄를 하고 있다가 버선발로 뛰어나온 동빈과 재회하는데 장장 10년만에 만난 아버지가 이러고 있으니 딸 입장에서는 가슴이 찢어질 수밖에. 결국 부녀는 중인환시 속에 끌어안고 대성통곡을 했고, 이 장면이 상당한 동정표를 사서 관대한 조치에도 별 반발은 없었다고. 교육 기간 동안 최씨의 황귀비 승작 논의가 일자 비록 본국의 사대부만한 지식은 부족했어도 정치 감각은 있어서 동빈에게 최씨의 황귀비 승작을 찬성하는 게 동빈에게도 결과적으로 이익이라고 조언해준다. 이후 속성교육을 받고 본국 사대부 수준의 학식을 갖추고, 아들을 순검대에 입대시키면서 남아있던 의심의 시선도 완전히 사라지게 된다. 김주성이 한양에서 지내고 3년쯤 지났을 때 재석에게 개인적으로 서신을 보내 한인들을 인구가 부족한 누벨 프랑스로 대거 이주시켜 주요 구성원으로 만들자는 의견을 제시한다. - 백작부인 박씨
김재정의 첫번째 아내. 김주희와 김주성 남매의 생모. 1830년대 중반에 사망했다. - 백작부인 홍씨
김재정의 후처. 전처 박씨가 병사한 5년 후 재혼했으며 그로 인해 나이 차이가 부녀지간 수준이다. 실제로 동빈 김씨와 동갑이라 의붓아들보다 겨우 8살 위일 정도. 김주성이 죽고 자기가 낳을 아들이 가문을 물려받길 원해서인지 김주성의 순검대 입대를 찬성한다. - 김주성
태원백 김재정의 넷째 아들이자 동빈 김씨의 남동생, 시위대 참령. 1823년생. 4남으로 태어났지만 형 3명이 모두 요절해서 사실상 외아들이다. 국문과 산학만 간신히 익히고 천자문조차 떼지 못한 채 공부와 담 쌓은 한량으로 지냈으나 17세 때 아버지가 본국에 다녀온 뒤 갑자기 주상에게 충성을 다하기 위해 미주순검대에 입대하라고 명령하여 원치 않은 군대 짬밥을 먹게 되는 날벼락을 맞는다. 이전부터 사냥을 즐기며 몸을 단련했기 때문인지 육혈포로 척탄을 던지려는 맥비의 손목을 정확히 맞추는 등 전투력은 뛰어나다. 식견은 여전히 짧아서 맥비들과 싸우고 전장에서 구르며 6년이나 고생을 하자 이게 다 임금 때문이라며 공화주의 사상에 혹한다. 미주순검대에서의 활약에 미주대총관이 박규수가 임기를 마치고 본국으로 갈 때 주성을 같이 가게 하면서 임금과 부친에 대한 분노 때문에 본국까지 가느니 그냥 신불랑으로 망명해야겠다고 마음먹고 실행에 옮기기 직전까지 간다.[100] 하지만 아내 최씨가 본국에 간다며 들떠서 기뻐하여 어쩔 수 없이 본국으로 오게 되었다. 이후 시위대 참령 계급을 받아 한양에 살게 되었는데 지선성보다 훨씬 화려하고 번성한 한양에서의 삶에 푹 빠지고 임금도 직접 만나보니 생각보다 좋은 사람이었다는 것을 깨닫고 개과천선한다. - 최씨
김주성의 아내. 지선성 내 최고의 미녀로 명성이 높았다. 남편이 입대하던 해 혼인했다. 1년 미만이라면 관광으로 놀러올 수 있는[101] 미주 남자들과 달리 미주 아녀자들은 본국행이 어렵기에 본국행 기회를 얻자 뛸 듯이 기뻐한다.
2.17.1.5. 기타 민간인
- 남양 홍씨 규수
3부에서 미주총관부 판관으로 미주에 가솔을 모두 데리고 온 홍주원의 자손으로, 광덕제가 가장 총애하는 후궁의 친언니. 원평제가 태자빈을 처음 간택할 때 미주인으로는 최초로 재간택 후보 10명 중에 들어, 온 미주가 기뻐 열광했다. 최종적으로는 뽑히지 못했지만 탈락자들에게 위로의 뜻으로 잔뜩 내리는 후한 선물을 혼수품으로 삼아, 고향으로 돌아간 뒤 좋은 가문과 혼인했다고 한다. 광덕제도 마음에 들었었는지 8년 후 미주 순행 때 이 규수를 잊지 않고 찾아봤으나 이미 시집간 뒤라 대신 그 여동생을 후궁으로 삼고 총애한다.
- 김철원
중미주 제철업자.
2.17.2. 토인
- 종이를 넘기는 곰
미주야인 유트족 추장. 대한 조정에서 내리는 은혜에 감사하고 충성하고 있다.
2.17.3. 백인
- 가르시아 '엘 차포' 델 루에라
맥고국인으로 동미주, 신불랑, 맥고국 국경지대를 오가며 도적질을 하던 도적단의 수괴. 마지막까지 남아 저항하다가 이용갑에게 생포되어 재석과 나폴레옹 앞에 끌려와 성모 마리아를 찾으며 저주를 퍼붓는다. 재석은 또 가르시아냐, 게다가 엘 차포라니 하고 속으로 웃은 다음. 남미주 납 광산에 종신 노역형에 처하기로 한다. 참고로 작중에서 5번째로 나온 가르시아이다.
2.17.3.1. 종교인
2.17.3.1.1. 후기 성도 교회
- 조셉 스미스 ★
예수 그리스도 후기 성도 교회(모르몬교)의 창시자. 원 역사처럼 그 교리 때문에 기존의 미주합중국 기독교 신자들에게 박해를 당하나 여기서는 반모르몬 폭도들한테 맞아 죽지 않고 생존하였다. 그래서 본인이 직접 신자 7천여 명을 이끌고 대한령 미주로 망명해 청구호 일대에 정착한다.[102] 일부다처제를 시행중인 모르몬교의 지도자 답게 무려 55명의 부인을 두어 첩 한두명 쯤은 기본으로 두고 있는 대한 본국의 중신들도 혀를 내두르게 한다.
- 브랜든 허친스
예수 그리스도 후기 성도 교회 선교사. 현대의 그들이 그러하듯 한국어를 마스터했으며 하와국에 선교를 하러 입국한다. 하진교 본인을 개종시키지는 못했으나 전부터 타 종파 예수교를 믿던 이들을 시작으로 일부 성과를 거둔다.
3. 대아주
3.1. 청
3.1.1. 역대 황제
- 광종 계정제 애신각라 윤선(光宗 契正帝 愛新覺羅 胤鐥)
청의 10대 황제, 명종 강희제의 5남. 어린 나이에 황위에 올랐지만 군사적인 천재성을 발휘해 15세때인 1778년 서나라가 안남, 후송과의 전쟁에서 대패하자 때를 놓치지 않고 서나라의 수도권인 사천성을 강습, 성도와 중경을 함락하고 서나라 황제 함녕제를 사로잡아 삼궤구고두례를 받고 서나라를 운남으로 몰아넣는 대업을 이룬다. 하지만 정복한 사천 지역에서 백련교를 탄압하다가 1793년 백련교의 난이 일어나고, 황궁까지 백련교 자객들이 침입하여 직접 자객들과 총으로 싸워야 할 정도로 4년이나 고생하게 된다.[103]
- 선종 도광제 애신각라 면녕(宣宗 道光帝 愛新覺羅 綿寧)
청의 11대 황제, 계정제의 아들로 부황 계정제 사후 제위에 올랐다. 모후는 후금 대칸 특이호의 딸이다. 후금의 황위 계승 내분을 뒤에서 조장하며 아예 후금을 청나라가 합병하여 건주일통을 이루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대한에서 재석이 백두산 봉선을 올리자 자신도 태산에서 봉선을 올리기로 한다. 그 후 후송이 형산에서 봉선을 올릴 때 뒤통수를 치려다가 후송의 명장 장문성에게 3만을 잃는 대패를 당하자 1838년 12월 친히 대군을 이끌고 후송을 치던 도중, 허무하게도 강을 건너다 얼음이 깨지는 사고로 익사한다. 향년 50세.
- 가정제 애신각라 덕명(嘉定帝 愛新覺羅 德明)
면녕의 황태자. 원평제 조문 사절로 대한을 방문한다. 나이는 이진(4부 재석)보다 다섯살 많다. 대한에 대해 할말은 하는 등 만만치 않은 상대다. 옛 명나라 황릉 참배 목적으로 청나라를 방문한 재석에게 후금 황위 계승 경쟁자 중 가장 뒷배가 없는 륵극덕혼을 재석에게 소개하며 지원을 요청한다. 1838년 겨울 부황의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황위에 오르자, 고모인 후금 대복진을 모시던 청나라 관원들을 전부 소환하여 굴마훈이 대복진을 해칠 것을 유도한 후 그것을 빌미로 후금을 쳐서 건주를 일통하고자 한다. 결국 후금 내전이 터지자 럭더훈에게 병사 3만을 주어 개입하도록 한다. 1841년 여름 황하 대홍수로 수도 개봉부가 궤멸적인 피해를 입자 다시 북경으로 천도하고, 황하 유역 주민들의 원성을 무시하고 대한에 보급 지원이라는 빚을 지면서까지 총 15만 대군을 후금 내전에 투입하여 결국 1844년 1월 부황의 숙원이던 건주일통을 이뤄내는 업적을 세운다. 하지만 건주일통에 집중하는 동안 남부 지역에서 태평천국이 하남, 사천, 귀주 일대에 침투하고 후송에서 반란을 일으킨 부상군은 관중을 점거해 왜진국을 세우는 등 나라가 흔들리고 있다. 왜진국을 번국에 봉하면서 왜진국 문제는 일단락 됐지만 태평천국과는 충돌을 계속하고 있다. 러시아가 대한과의 국혼을 추진한다는 소식을 접하고 나서 혹시나 싶어 대한과 러시아의 국혼이 성사될 경우 바로 대한과의 국혼을 성사시킨다는 계획을 세우는데 진짜로 국혼이 성사되자 세워두었던 계획을 바로 실행, 재석의 적녀인 정현공주를 황태자비로 들이는 대박을 터트린다.
3.1.2. 황실
- 황후 뉴호록씨(鈕祜祿氏)
계정제의 정실부인. 후금 함녕제의 딸이라 모친의 성으로 혼인했다.
- 효장문황후 패아지근씨(孝莊文皇后 孛兒只斤氏)
가정제의 정실부인. 정현공주의 속을 알 수 없고 냉담한 성격, 그리고 투후를 즐긴다는 것을 암살 기술을 연마했다는 것으로 오해한 것까지 겹쳐서 며느리를 거슬리는 아랫사람들에게 비수를 던지는 여후같은 무시무시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 고륜화정공주(固倫和靜公主)
가정제의 적녀.
- 태자 애신각라 영록
가정제의 장남. 1828년생. 대한과 러시아의 국혼이 성립된 이후 청나라가 제의한 국혼을 재석이 받아들이면서 재석의 적장녀인 정현공주 이현지와 약혼하게 된다. 상당한 미남인데다 예의바른 청년이다. 1847년 10월 20일 혼례를 올린다. 결혼 후로도 초야만 치르고, 몸이 약한 현지의 사정상 문자 그대로 잠만 같이 잘 뿐 성관계도 못 치르는 상황에도 억지로 하려 하지 않고 아내를 편안하게 하는 게 우선이라 현지는 잠시 영록이 겉만 멀쩡한 얼간이가 아닌가 생각도 할 정도였다. 하지만 대진국 사태 등에 대해 현지의 의견을 경청하는 등 현지를 그냥 아내가 아니라 대등한 친구처럼 대하고, 곧 낯선 이국으로 시집오게 될 현지를 최대한 도우려고 하는 등 이상적인 남편이 되려고 노력하며, 그런 태도가 현지의 마음을 여는데도 효과를 보인다. 독자들도 이 모습이 변치 않고 제위에 오르게 되면 청나라 최고의 성군이 될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다. - 태자비/정현공주(貞賢公主) 이현지
재석과 권씨의 장녀. 1833년생. 몸이 매우 병약하여 여러 차례 쓰러졌다고 하고 엄마를 닮아 미인이고 키는 큰데 저체중이다. 몸이 약한데 존귀한 신분이다 보니 주변에서 떠받들기만 하여, 동생이지만 신분상으로는 윗사람인 원자 이창이 무서워 할 정도로 성격이 뾰족해서 재석의 4회차 인생에서 아픈 손가락이 되고 있다. 크면서 건강은 조금 나아졌으며 최소한 재석, 권씨, 이창에게는 최소한의 예의는 차리게 되었지만 그 외의 인간들에게는 까칠하고 냉혹하게 대하는 것은 여전하며[104] 재석은 이 상태로 시집을 갔다가는 시댁을 초토화시킬 것이 분명하다고 걱정한다. 그러던 중 청에서 황태자 영록과 이현지의 혼사를 추진하면서 재석의 고민거리가 된다. 현지는 청나라로 시집가고 싶지 않았지만 어머니의 설득에 조금이나마 마음이 움직이고 결국 동의한다. 국혼을 앞두고는 성격 교정 차 화원장공주로부터 바이올린 연주 교육을 받는다. 음악적 재능이 상당하지만 본인은 큰 흥미를 느끼지 못한다. 결혼 후에도 첫날밤만 치르고 이후론 같이 자도 문자 그대로 잠만 자지만 매일 영록과 다과는 같이하면서 그가 자신을 대등한 친구로 존중해주는 배려심있는 태도에 영록에게 점차 마음을 열어간다. 이 자리에서 부상군이 세운 진나라가 일단 당장 필요한 땅만 우선 확보하는 게 목적 같다면서 그들의 의도를 눈치채는 식견을 보인다. 이후로도 이런저런 조언으로 청의 정책에 간접적으로 영향을 끼친다. 건강 때문에 후궁들이 먼저 자식을 낳는 와중에도 아이 소식이 없다가, 결혼 5년만에 어렵게 회임한다. 친정부모인 재석과 권황후는 황실의 적자를 낳아 현지의 권력기반이 든든해지는 것은 기뻐하면서도 딸이 너무 몸이 약하니 혹시 출산하다 잘못될까 걱정이 태산이다. - 황손 애신각라 ○○
영록의 적장남.
- 공친왕 애신각라 덕흔(愛新覺羅 德焮)
면녕의 차남이자 가정제 덕명의 바로 아래동생. 후금에 개입한 청군을 지휘하여 사패륵 찰니 군을 격파하고 찰니를 생포하는 공을 세운다.
- 애신각라 혁경
군기대신, 혁정의 형.
- 애신각라 혁정
직례총독. 혁경의 동생
- 애신각라 영린(愛新覺羅 永璘)
방계 황족 출신 주 대한 공사. 대한과 러시아의 국혼이 성사되었다는 소식이 청에 전해지자마자 바로 양우성의 뒤를 이어 부임, 재석에게 황태자와 정현공주의 국혼을 제안한다. 그러면서 능수능란하게 언론플레이를 하는데, 청나라 태자가 직접 와서 신부를 데려가겠다는 양보를 하면서도 대등한 황제국끼리의 혼인임을 강조했다. 청혼을 승낙받음으로써 실리와 체면을 모두 챙겼다.
3.1.3. 신료
- 송균(松筠)
한양 주재 청나라 공사. 몽골계로 문무의 요직을 역임하고 서나라가 몰락할 때 청군 선봉대로 사천에 입성하는 등 여러 업적을 쌓은 명신.
- 양우성
한양 주재 청나라 공사. 대한과 러시아 국혼 결정나자 정보수집 실패의 책임을 물어 본국으로 소환된다.
3.2. 후금 → 실위
3.2.1. 역대 대칸 → 칸
- 고종 → 순종 덕창제 애신각라 박락(德昌帝 愛新覺羅 博洛, 아이신기오로 보로)
후금의 11대 대칸, 부수의 현손으로 청나라 공주인 대복진에게서 적자가 없고 서자만 3명 있어 서자를 인정하지 않는 천주교 국가인 후금의 특성상 후계가 불안하다. 본인은 동생들보다는 자신의 서자들 중 하나를 태자로 삼고자 하여 대복진이나 서자들이 동생들을 암살하려고 음모를 꾸미는 것을 묵인하고 있다. 굴마훈이 후계자 다툼에서 승기를 잡자 내심 굴마훈을 태자로 인정하게 된다.
그러나 1840년 명확히 후계가 정해지지 않은 상황에서 카라코룸 순행을 갔다오던 중 병에 걸려 49세라는 비교적 이른 나이에 급사하면서 후금은 내전에 빠진다. 묘호는 고이마혼이 고종으로 올렸으나 륵극덕혼이 순종으로 바꾸었다.
- 실위가한 애신각라 륵극덕혼(室韋可汗 愛新覺羅 勒克德渾, 아이신기오로 럭더훈, 알렉상드르)
박락의 서장남. 1808년생. 세례명은 알렉산데르. 박락이 화석숙신공주와 국혼하기 전에 들인 평민 출신 측복진의 소생으로 다라순승군왕(도로이 다하스훈 군왕). 서장자라는 명분과 다른 두 다라군왕에 비해 모계가 한미하여 청나라의 입맛대로 다룰 수 있다는 점 때문에 청나라 태자 덕명의 지원을 받으며, 황태자 자리를 노리며 덕명의 주선으로 북경에서 재석을 만나 지원을 요청한다.[105] 전쟁에서 적을 처치하고 얻은 한혈마를 광덕제의 환심을 사기 위해 선물로 보내나 광덕제가 그 말을 타다 낙마하여 사망하자 장례식에 바로 달려와 사죄를 한다. 하지만 사인을 은폐하려는 대한 조정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하고 남들 다 있는 곳에서 전말을 언급하는 등 뛰어난 무인이기는 하나 머리 회전이 둔한 단점을 보여주었다. 결국 굴마훈의 모략에 넘어가 대칸의 애첩을 강간했다는 누명을 쓰고[106] 청나라로 도망친다. 후금 내전이 터지자 청나라에서 병사 3만을 빌려 후금 내전에 뛰어든다. 아직 자신을 추종하던 후금군 일부 병력까지 수하에 거두고, 두도가 서부로 가서 찰니와 싸우게 되자 굴마훈과 직접 대적하는 역할을 맡게 된다. 재석은 황후 권나현이 한 말에 착안하여 찰니가 외세를 끌어들여 청군의 직접 개입에 명분을 줘버렸기 때문에 최후의 승자는 럭더훈이 되리라 예상하고, 청군의 보급을 대한군이 지원하는 형식으로 럭더훈에 대한 군사지원에 동참하게 되며, 이 덕분에 내전에서 승리한다. 그러나 외세의 힘을 업고 승리한 대가로 후금은 대흥안령산맥 동쪽 요서 영토를 대한에게 넘기는 한편 외교권과 군사권을 잃고 금이라는 국호도 폐지되어 청의 완전한 속국인 실위국이 되었고 럭더훈은 보로의 후계자 대칸이 아닌 청의 번국인 실위가한으로 청나라의 책봉을 받고 청나라 친왕과 동급으로 격하된다.
우직한 무장으로 담백하고 뒤끝 없는 성격이라 자신을 함정에 빠뜨리고 나라를 몰락시킨 원흉이기도 한 굴마훈이 교황을 받들어 로마 공화국과 전쟁 중이라는 소식을 듣자 형제의 정리로 선뜻 신형 총기들을 보내준다.
3.2.2. 황실 → 왕실
- 대복진 애신각라씨/고륜숙신공주(固倫淑愼公主)
박락의 황후로 청나라 광종의 딸. 자신의 불임을 시동생들이 흑주술을 부린 탓으로 생각하여 증오하고, 박락이 원하는 서자들의 양자 입적도 더러운 첩년의 피를 들이밀지 말라고 대놓고 박락과 싸우는 등 조카인 청나라 태자 덕명도 비판할 정도의 행보를 보이고 있다. 서자들이나 시동생들이 자신을 해치려는 음모도 겪어 친정 청나라에서 200명의 바야라(호위병)를 받아 곁을 지키게 하는 한편 여전히 자식을 가지는 걸 포기 안 하고 어떻게든 아들을 얻고자 궁리하고 있다. 심지어는 40이 넘어 폐경이 되었는데도 구약성서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가 90세에 하느님의 권능으로 아들을 낳았으니 자기도 그럴수 있다며 나이가 들수록 광신도가 되어가고 있다. 조카인 덕명이 황위에 오른 후 그녀를 건주일통 전쟁의 명분으로 쓰기 위해 경호병력을 모두 철수시킨다. 하지만 대복진이 살해당할 경우 청이 이를 빌미로 개입하리라는 예상 때문에 아무도 건드리지 못하고 결국 박락이 죽을 때까지 양자를 들이지 않고 있다가, 박락이 죽은 후 굴마흔에게 연금당한 채 박락이 죽기 직전 굴마흔을 양자로 입적시켰다는 선전에 이용당한다. 하지만 굴마훈이 본진을 비운 사이 본진을 습격했던 얀신 부대에게 구출되어 청나라로 귀환한다.
- 애신각라 아파태(愛新覺羅 阿巴泰, 아이신기오로 아바타이)
박락의 바로 아랫동생인 이패륵. 셋째 두도의 지지를 받아 막내동생 찰니, 세 조카들과 황태제 자리를 놓고 목숨이 달린 경쟁을 하는 중이다. 결국 복어 독을 먹고 암살당하는데, 정황상 굴마훈이 범인으로 추정된다. - 진국공 애신각라 연신(愛新覺羅 延信, 아이신기오로 얀신)
아파태의 장남. 아버지를 암살한 범인이 사촌 한대라고 오해하고 한대를 암살하지만 나중에 굴마훈이 진범임을 깨닫고 굴마훈을 암살할 계획을 세우며 와신상담 중이다. 후금 내전이 일어나자 오로지 굴마훈에 대한 복수심으로 두도 편에 가담, 자신이 그동안 양성한 정예기병 2천을 거느리고 굴마훈 후방에서 게릴라전을 벌여 굴마훈에게 큰 피해를 준다. 복수심에 미쳐 날뛰는 모습에 적, 아군 할 것 없이 '미친 늑대'라는 별명을 얻게 된다. 자신은 복수만 할 수 있으면 누가 대칸이 되든 상관 없다는 입장. 대복진을 굴마훈 수중에서 구출하는 큰 성과도 올렸다. 러시아로 망명하는 굴마훈을 눈앞에서 놓치고 러시아까지 쫒아가려 했으나 앵베르 대주교의 만류로 겨우 참는다.
- 애신각라 두도(愛新覺羅 杜度, 토마)
박락의 둘째동생인 삼패륵. 세례명은 토마스. 형 아파태를 황태제로 밀어주기로 하며, 대한 태자(재석)에게 지원을 요청한다. 굴마훈에게 다른 경쟁자들이 다 암살당하거나 망명당했음에도 끝까지 굴마훈과 맞서고 있다. 굴마훈은 두도를 제거하기 위해 박락이 임종을 앞두고 후계자로 지명하려고 부르셨다는 미끼를 던지고 자기 외삼촌까지 죽이면서 함정으로 끌어들이지만 이를 눈치챈 두도가 변장한 가무사를 보내면서 암살은 실패하고 후금 내전이 일어난다. 하지만 중앙군을 쥔 굴마훈에게 전체적으로 밀리는 형세여서 자신을 지지하는 서부지역 귀족들의 지원을 고대하고 있었으나 찰니가 고용해 온 준가르 군대가 서부지역을 약탈하면서 자기 기반까지 흔들리자 굴마훈은 럭더훈에게 맡기고 서부로 달려가 찰니와 싸운다. 하지만 결국 승부가 나지 않자 청 공친왕 덕흔이 이끄는 청군의 지원을 받게 되면서 결국 럭더훈의 즉위를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된다. 자진항복했기에 찰니와 달리 목숨은 건진다.
- 애신각라 찰니(愛新覺羅 察尼, 아이신기오로 차니, 앙드레)
박락의 막내동생인 사패륵, 세례명은 안드레아. 원평제 승하에 대한 조문 진위사로 대한을 방문했을 때 자신을 황태제로 밀어달라는 로비를 하여 아파태와 두도에게 미움을 받는다. 굴마훈의 음모로 도적 두목 누명을 쓰자 측근 70명과 함께 초원을 달려 러시아 옴스크로 망명한다. 러시아 차르 알렉산드르 2세에게 군사를 빌려 후금으로 돌아갈 생각이지만 알렉산드르가 허용치 않고 있다. 하지만 후금 내전이 터지고 알렉산드르 2세도 비슷한 시기에 붕어하자, 후임 니콜라이 1세에게 허락을 받고 본인을 따라온 측근들에 처가인 키르기스에서 받은 병력 3백기로 시작하여 중앙아시아 이슬람 부족들, 게다가 후금에게 누대의 원한을 가진 준가르 병사들까지 약탈을 미끼로 고용하여 3만의 병력을 이끌고 내전에 뛰어들어 스스로 '쿠치테이 칸'을 자칭하고 형 두도와 싸운다. 준가르 병사들이 후금 서부지역을 보복약탈하여 백성이 도탄에 빠지는 등 사실상의 매국노 짓을 하고 있어 이전에 대한을 방문했을 때 그와 친분을 맺었던 대한 조정 대신들도 찰니를 욕할 정도. 게다가 외세를 끌어들여 청나라가 후금 내전에 개입할 명분까지 줘버렸다. 결국 총 15만명이 투입된 청군에게 패배를 거듭하다가 청군의 보급부대 미끼에 낚여 청군에게 잡혀 상도로 압송되어 처형된다.
- 다라통달군왕 애신각라 한대(多羅通達君王 愛新覺羅 漢垈, 도로이 하푸카 군왕 아이신기오로 한다이)
박락의 서삼남. 1823년생. 몽골 보르지긴씨 출신 측복진의 소생. 아파태가 독살당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한대를 의심한 얀신에 의해 사냥 중 20여발의 화살에 맞아 암살당한다.
- 애신각라 석탁(愛新覺羅 碩託, 아이신기오로 쇼토)
덕창제의 사촌.
- 애신각라 배음도(愛新覺羅 排音圖, 아이신기오로 바인투)
륵극덕혼의 장남으로 실위세자. - 길성현주 이혜미
효왕의 적녀. 륵극덕혼이 대한에 혼인동맹을 청하고 청제 덕명도 묵인하여 배음도와 혼인한다. 외국 생활에 잘 적응하며 2년만에 아들을 순산했다.
3.2.3. 신료
- 자라풍아
굴마훈의 외숙부. 굴마훈이 두도를 함정으로 끌어들여 암살하기 위해 확실히 믿도록 자신의 외숙부인 자라풍아를 사자로 보냈고 함정에 들어온 두도와 함께 쏴죽여버린다. 하지만 함정을 눈치챈 두도가 대신 가무사를 보냈기에 별 소득도 없이 외숙부만 죽인 꼴이 되었다.
- 합달나랍 탁혜(哈達那拉 托惠)
한양 주재 후금 공사. 만주 명문가 합달나랍씨 일족으로 문관이다.
3.2.4. 성직자
- 카예타노 피레스 피레이라★
카타이 교구 주교. 교황청에서 자신의 서자들을 적자로 인정하게 해달라는 대칸 박락의 요구에 시달려서 스트레스가 심하다.
- 로랑조제프마리위스 앵베르★
피레이라 후임 카타이 교구 주교. 원역사에서는 브뤼기에르 주교가 한국에 가던 중 객사한 탓에 그 후임으로 한국에 왔다가 박해로 1839년 순교했는데, 여기서는 그가 멀쩡하게 살아서 한국에서 잘만 사목 중이다보니 다른 나라로 파견되고 수명도 연장되었다. 그러나 취임하자마자 후금 내전에 휘말려 굴마훈의 인질 신세가 되었고 러시아 정교로 개종해버리겠다는 협박에 그를 인정한다. 내전 내내 굴마훈에게 끌려다녔으나 결국 굴마훈이 패배를 인정하고 러시아로 탈출하면서 작별인사를 하고 풀어준다.
3.3. 대진국 → 진왕부
시즈노미야 아키라→사세 황제/복광제→ 진왕 영황(四世 皇帝/復光帝 嬴晃, 아키라)★
구니이에의 서장남. 원 역사와 똑같이 2살 연하인 고모와 스캔들이 나 친왕 작위를 박탈당하고 유폐되었는데[107] 여기서는 도막파의 승려 묘운의 도움으로 고모를 데리고 일본을 탈출해 후송에 고용되어 가는 용병들 틈에 섞여 후송으로 도망쳤다. 본인은 정치 권력에는 뜻이 없는 한량이지만, 막부가 일본에서 내쫒아 후송으로 보낸 도막근황파 무사들이 그를 구심점으로 옹립하고 후송에 나라를 세워 세력을 키운 후 일본으로 쳐들어가려는 계획에 이용당한다.
태평천국과의 정전협정 이후 후송 측에서 부상군을 토사구팽하려는 움직임이 보이자 10만 부상군이 도막파의 선동으로 반란을 일으켜 자신이 진시황의 후손이라며 대진국(大秦國)이라는 국가를 건국하고 황제로 추대된다. 진시황, 호해, 자영에 이은 진나라 사세 황제라고 자칭하며 함양으로 가서 진나라를 재건하고 아방궁에 살겠다며 도막파도 당황시킨다. 이 상황을 청나라를 흔드는데 이용하려는 홍수전과 동맹을 맺고 서안을 가볍게 점령한다. 일본 막부에서는 아키라도 타카코도 모두 죽었고 저놈들은 사칭자라고 손절해버린다.
하지만 이후 서경에 기반을 다지자 왜인팔기를 이용해 도막파 지도부를 숙청하고 청의 번국이 된다. 애초에 막부 타도 따위 관심도 없었고 자신과 타카코가 행복하게 살기 위한 기반이 필요해서 도막파의 비위를 맞췄던 것으로, 아방궁을 새로 짓겠다는 호언과는 달리 대자은사를 환일궁으로 개명하여 궁으로 삼고 전장에서는 항상 선봉에 나서 부상을 입으면서까지 싸워 군대의 신망도 얻었으며, 고립된 내륙국인 대진국이 이대로 버텼다가는 말라죽을 뿐이라는 정확한 현실 인식도 가지고 있었다. 사실 여태까지의 또라이같은 행적도 전부 연기였고 근친상간이나 하는 무식한 또라이라고 생각하고 적당히 허수아비로 내세우려던 도막파가 역으로 이용당한 것이다. 청나라의 번국이 된 후에는 외왕내제도 허례허식이라고 생각하는지 모든 왕실 용어도 번왕에 맞춰 낮추고, 왕비와 둘이 알콩달콩 살려고 했는데 왕이 되니 업무가 너무 많다고 투덜거리면서도 군대를 절반으로 줄여 제대한 군인들은 농상공업에 투입하여 경제 발전 노력을 하며 출신 불문 유능한 인재를 등용하는 등 상당히 괜찮은 정치를 한다. 전형적인 똑게 타입인 듯. 오직 타카코 하나만을 바라보는 근친순정남으로, 후궁들이 여럿 있긴 하지만 어디까지나 정치적 이유 때문에 내키지 않아하며 들인 것이다.키사노미야 타카코→황후 동씨(東氏)→ 진왕비 동씨★
조카인 아키라와 근친상간 관계가 되어 후송으로 도주해서 함께 살다가 부상군 반란 이후 대진국의 초대 황후가 된다. 부상군 시절에는 근친상간 사실을 숨기지도 않고 당당하게 떠들고 다녔으나 서안 점령 후에는 대외적인 시선을 신경써서인지 사실 모친의 외도로 태어난 사생아(=즉 근친 아님)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자기들끼리 있을 때는 타카코라고 휘를 막 부르는 등 여염집처럼 체통없이 지낸다.- 왕녀 영○
아키라와 타카코의 장녀. 대진국 봉기 직전 태어났다. - 왕세자 영○
아키라와 타카코의 장남. 아키라는 이 아이가 청나라 칭신 전에 태어나서 잠깐이라도 황태자 칭호를 쓰게 하고 싶었으나 아쉽게도 청나라 칭신 후에 태어나 처음부터 왕세자가 된다. - 공승운
진나라 대장경(호부대신). 본래 후송에서 부상군에 파견한 문관 출신.
3.4. 후송
3.4.1. 역대 황제
- 헌종(獻宗) 영강제 조형윤
후송의 8대 황제, 소태제 조승번의 차남. 태자이던 형 조형연과 부황이 모두 조졸하는 바람에 15세 나이에 제왕 교육도 제대로 못받고 즉위하였고 처음 3년간은 모후 왕씨가 섭정을 맡고 어느 정도 나이가 찬 뒤 친정을 하게 된다. 하지만 조부 태녕제의 사치와 황음으로 망가져버린 재정에 부황 소태제가 촉발한 덕성도의 난 뒷수습을 하고 나니 나라 꼴이 완전히 당나라 말기처럼 도통사들에게 휘둘리고 있어 이를 극복하는데만도 힘들어한다. 그래도 직할지의 풍요로움을 기반으로 한 갖은 노력 끝에 국고를 채우고 금군과 직속인 2개 도통부를 강화시켜 직할지 내에서 반독립적이던 3개 도통부가 다시 황실의 눈치를 보게 만드는데는 성공했다. 그만큼 명군의 자질이 있지만 그래도 나라 전체를 예전으로 돌리기에는 아직 버겁다. 하지만 어리석은 장남 조심창을 태자에서 폐하고 똑똑한 후궁 소생 4남 조심원을 태자에 세우려다가 황후인 송씨의 음모로 인해 46세란 젊은 나이에 독살당한다.
- 함화제(咸和帝) 조심창
후송의 9대 황제, 1813년생. 조형윤의 유일한 적자. 성품이 어리석고 무능하여 부황에게 폐태자될 뻔 했으나 모친 송씨가 부황을 암살하고 황위에 올렸으며, 즉위 후에도 국정은 다 모친에게 맡기고는 주지육림에만 빠져, 며칠에 한 번 편전에 나와 도장만 찍어주고 바로 후궁에 틀어박혀버리는 암군이다. 그나마 유부녀는 건드리지 않는 등 선은 지킨다. 일을 안 하지만 하면 딱히 안 되는 일을 벌이지도 않는 게으름뱅이 스타일이라[108] 임칙서는 송태후가 권력을 장악하지만 않았다면 자신이 전권을 받아 국가를 대신 운영하며 나라가 무난하게 굴러갔을 것이라 생각한다. 태평천국의 난으로 나라가 아수라장이 된 상황에서도 국정에 일절 관심을 보이지 않고 주지육림에 몰두하면서 현 상황도 송태후의 탓으로 돌려서 그녀를 아연실색하게 만든다. 무려 10년이 넘게 이따위 식으로 사는 모습을 본 송태후는 자신이 저런 한심한 아들을 낳았고 즉위시켰다는 것을 자책하고 차라리 조심원을 지지했어야 한다고 후회한다. 어머니가 내 딸을 대한에 팔아 평화를 사려 한다고 자조하는 것을 보면 현실 인식은 있으나 실천하려는 의지가 없는 것으로 보인다. 여색에 몰두하며 80여명에 달하는 자식을 보았지만 전부 서자로 황후 진씨 사이에서 본 적자는 없고, 그렇다고 서자 중 하나를 골라 황태자로 책봉하지도 않는 상태라 후계구도가 불안하다.
3.4.2. 황실
- 태후 송씨
영강제 조형윤의 황후. 조형윤과의 사이에 1남 3녀를 두었다. 친아들 조심창을 황제로 올리기 위해 환관들을 포섭해 남편을 독살하고 후궁 소생 친왕들에게 역모 혐의를 씌워 감금하며, 암군인 조심창 대신 국정을 이끌고 있다. 태산에서 봉선을 올리지 않으면 이는 곧 북벌의 포기라는 큰 정치적 의미를 갖고 있는 줄도 모르고 단지 대한과 청의 봉선의식을 질투하여 형산에서 봉선의식을 올리기로 하며, 봉선의식이 끝난 뒤 감금해둔 친왕들을 처형하고[109], 천길이라는 방술사의 말을 맹신하는 등 원역사의 서태후와 비슷한 행보를 걷는다. 의외로 군사 등 자신이 모르는 분야는 확실한 전문가에게 맡기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여 고문휘, 임칙서 등을 중용하려 하는 등 정치적 감각이 아주 없지는 않다. 임칙서의 진언으로 친왕들을 지지했던 관료들은 석방하지만 친왕들은 봉선이 끝난 다음날로 모두 처형하여 잔혹하다는 악평을 듣는다. 재석 역시 송태후를 보며 서태후를 떠올리긴 했지만, 그래도 임칙서의 조언을 잘 들어주는 등의 행보로 인해 서태후보다는 낫다고 평가를 내렸다.[110] 태평천국의 난이 일어난 후에도 악화일로로 치닫는 상황에 괴로워하고 두려워하면서도 피하지 않는 등 범군 이상의 자질을 보이고 있었지만...... 태평천국과 싸우는 영국군의 뒤통수를 쳐 인질로 잡고 홍콩을 돌려받으려고 하면서 현실감각이 모자람을 인증하고 말았다. 그나마 임칙서를 비롯한 신료들이 영국군의 보복은 물론 동맹군을 배신하는 모습이 국제적으로 큰 악영향을 준다며 겨우 말려 정식으로 논의되지 않고 뜻을 접었지만, 어디선가 말이 새어나가 소문이 돌아서 재석의 귀에도 들어갔다. 그나마 풍문에 불과해서 영국을 비롯한 그 어느 나라도 이거로 후송에 조치할 명분이 없다는 게 다행.
대 태평천국 전선에서 대한이 빠져나가는 걸 막기 위해 대한 황태자 이창에게 맏손녀 영화공주를 시집보내는데 이제까지 보여준 부정적인 모습과 달리, 본처도 못 되고 첩이 되어야 하는지라 사실상 팔려가는 처량한 신세인 손녀에게 진심으로 미안해하면서 궁중암투 같은 건 할 생각도 말고 어른들 말씀 잘 듣고 신랑이랑 화목하게 지내라고 당부하는 애틋한 모습을 보여줘 독자들이 다시 봤다는 반응까지 나왔다.
오랜 독자들 사이에선 캐릭터 조형에 대해 호평이 자자한데 권력을 위해 남편이자 황제를 독살하는 악독한 면모를 보이지만 결코 아들을 허수아비로 만들어 권력을 독점하길 바란 적은 없고, 손녀를 대한에 후궁으로 보내며 미안함에 통곡하면서도, 암군인 아들을 자신이 죽기 전에 처리할 방안을 고심하고, 봉선을 무리하게 추진해 태평천국의 난의 원인을 제공하기도 했으나 중원 왕조로서 정통성을 유지하려면 어쩔 수 없는 조치이기도 했으며, 유능하고 충성스러운 임칙서를 전적으로 신용하며 설사 듣기 쓴 소리일 지라도 귀담아 듣고, 흔들리는 국정을 운영하기 위해 군사, 경제의 세세한 부분까지 챙기며 자기 몸을 갈아 넣는 등 행동 하나하나가 단순한 선악으로 재단할 수 없는 입체적 면모를 보여주기 때문. 사실상의 여제로서 국정을 돌본 지 17년이나 지나자 실제 정치력도 많이 나아져간다. - 청민공주
조형윤의 막내딸. 조형윤이 후금에 새 황후로 보내겠다는 제안을 해서 후금과 청,대한을 이간질시키려는 음모의 장기말로 이용하려 하였으나 흐지부지된다.
- 황후 진씨
함화제의 정실부인. 아들을 낳지 못했다.
3.4.3. 조정 신료
- 임칙서★
강소안찰사로 복건 출신이지만 홍씨 일족이 아니라 황제가 있는 조정에 출사했고, 능력을 인정받고 있는 명신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원인은 달라졌지만 원 역사와 똑같이 사회 문제로 부상한 아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흠차대신으로 임명되게 됐다. 그 외에 반독립적인 도통사 제압,[111] 아편 유통을 막기 위한 덕성도 공인, 국제적 위상 제고를 위해 유럽 국가들에 대사 파견 등을 제안하며, 2세기가 지나서인지 중원만을 천하로 인식하는 변화한 세계관을 드러낸다. 이후 4부에서 후송의 핵심 인물이 될 것으로 보인다. 광덕제의 조문 사절로 대한을 방문하는데, 자신이 아는 호복+변발의 노인 임칙서와 달리 단령을 입고 상투를 튼데다 아직 중년인 모습이 원역사와 달라서 재석은 속으로 재미있어한다. 영강제의 폐태자 계획에 대해 정치적 혼란을 우려하며 가장 앞장서서 반대했기 때문에[112] 송태후 집권 하에서도 중용되고 있으며 송태후 역시 아군의 필요성과 임칙서의 유능함은 알기에 임칙서의 부탁대로 폐태자에 찬성하던 조정 신료들을 모조리 처형하려는 계획을 취소하며 황족들만 처형한다. 아편 잠상들과 배상제회를 토벌하기 위해 오합지졸인 관군 대신 서양, 일본 용병과 중국인 지원병으로 조직한 멸독군(滅毒軍)이라는 특수부대를 만들어 큰 성과를 낸다. 그 후 태평천국 반란이 일어나자 멸독군을 강용군으로 개편한다. 본의 아니게 송태후가 유일하게 의지할 수 있는 유능한 신하로 권한 외의 국정 운영에도 손대게 되면서 권신으로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지속한다 태평천국군이 형주도통부를 점령하자, 영국에 수도 남경 개항, 광서 지역 개항장 설치, 아편 수출 중단을 조건으로 무기, 철도, 조선소 공장 시설을 대량 주문하고 영국 용병의 광서 지역 주둔도 허락하여 영국이 중국에 손을 뻗치는 문을 열어버린다.[113] 조정에서 월권이라는 비판이 나오자 송태후에게서 삼공집정흠차대신이라는 벼슬을 받아 명실상부하게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자리에 오른다. 17년간 장기 집권하면서 나라를 위해 애쓰는 마음은 변함이 없지만 차츰 독선적으로 변해가고 자신을 따르는 임당이 정권을 장악하여 다른 신료들을 배제하게 만드는 사실상의 권신이 되어 비 임당 신료들의 불만이 쌓여가고 있다. 원 역사보다 조국의 상황이 더 좋고 웬만한 건 다 자기 뜻대로 할 수 있는 전권도 있어서 스트레스를 덜 받아서인지 과로에도 불구하고 더 오래 살고 있다. - 정영담
환관 우두머리인 태관총감. 어린 나이에 갑자기 황제가 된 조형윤을 26년간 정성껏 보필하여 조형윤도 그를 아버지처럼 생각한다. 본인은 충신인것 같지만 그를 포함하여 환관의 힘이 매우 커진 것도 도통사들의 할거와 마찬가지로 후송이 당나라처럼 망조가 들었다는 징조를 보여준다.
- 이성원
한양 주재 후송 공사로 태황 원평제가 건강이 악화된 상황을 예의주시하며 광덕제(당시 태자)에 대한 정보를 수집해서 보고를 올린다.
- 서호증
좌승상 격인 좌추밀원지사.
- 황유광
예부상서.
- 왕사간
병부상서.
- 유지평
호부상서.
- 송위호
한양 주재 후송 공사. 유구의 복속을 축하하는 축하연 자리에서 광덕제에게 "대한이 대동양 전역을 다 차지하셨는데 그 한가운데 이방 국가 하나가 남아있으니 거슬리지 않으심?"하고 대한과 일본을 이간질시키는 발언을 대놓고 했으나 광덕제가 잘 받아넘기자 그 이방 국가가 일본이 아니라 신기니아를 말한 것이라고 발뺌하면서 분위기를 수습한다.
- 조귀염(趙貴閻)
송위호 후임 후송 공사.
- 송문호
조귀염 후임 한양 주재 후송 공사. 송태후의 친족이다. 본인의 능력에는 문제가 없었으나 재임 도중 한-청 국혼, 태평천국 토벌군 철수 등의 초대형 악재가 터지면서 자기 목을 걱정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으며, 재석이 망명하면 받아주겠다는 뜻을 비치자 잠시 화색이 돌 정도였다. 후송 조정에서도 처벌론이 일어 송태후도 비호 못해줄 판이었으나, 그 누구도 이 난국을 수습해야한 후임 공사 자리를 바라지 않아서 송문호에 대한 처벌은 유야무야되고 자리를 보전한다. 후궁으로라도 대한과 국혼을 맺어야 한다는 압박감에 영화공주의 자질을 소개하는 자리에서 공주께서는 황상과 하나도 안 닮았다는 후송 본국이었으면 바로 목이 날아갈 패기 넘치는 대사를 날린다. 대외적으로는 모친인 황후의 미모를 닮았다는 얘기지만 실은 막장인 송 황제를 사돈으로 맺기 꺼리는 한 황실의 우려를 삭히기 위해서였다.
- 하태청(河太靑)
대한으로 온 후송 특사. 누손에 있는 한왕 조심원의 처자식을 후송으로 보내달라고 요청한다.
- 송명도
태평전쟁 강화회담 교섭단장.
- 증국번★
원 역사에서는 태평천국 운동 당시 의용군인 상군을 조직해 태평천국군과 싸운 것과 달리 여기서는 전장에 직접 뛰어들지 않고 조정에서 문관으로 계속 근무한다. 삼년상을 마치고 온 뒤 그의 능력을 중용한 임칙서에 의해 예부상서로 임명된다. 사실상 대한의 속국 신세였지만 명목상 독립국이던 유구를 광덕제가 정식으로 병탄한 선례를 보고 대한이 그동안 해오던 도덕주의 외교를 깨고 본격적으로 패권을 추진하지 않을까 경계하는데, 명목상 후송의 번국인 섬라국이 안남 관련 문제로 대한과 교섭한다는 소식을 입수한 후 섬라를 최대한 지켜야 하며 만약 섬라를 포기해야 한다면 그 대신 대한에 합당한 대가를 요구할 것을 주장하며 이홍장과 함께 특사로 대한에 파견된다.
- 이홍장★
한림원 학사. 원 역사에서는 과거에 합격한 후 천거를 받아 태평천국군과 싸웠지만 여기서는 먼저 강용군 군관으로 입대해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기면서까지 전공을 세웠다. 전공을 세웠기 때문에 과거를 보지 않아도 출세가 가능함에도 꿋꿋이 과거를 보아 출사하는 대단한 업적을 세운다. 섬라 관련 문제로 증국번과 함께 대한에 특사로 파견되는데 대한에 오던 와중 음식을 잘못 먹어 탈이 난 증국번 대신 교섭을 맡는다.
3.4.4. 군부
- 장문성
황제가 유일하게 직접 임명할 수 있는 도통사인 회주도통사. 1766년대생. 3부에 나온 장호원의 자손으로 조상 장호원처럼 성실하고 꼼꼼한 성품으로 영강제의 큰 신임을 받는다. 초급장교인 천총 시절 수군이 퇴역시킨 고물 인력철갑선을 억지로 떠맡게 되어 속이 터졌지만 오히려 그 덕분에 덕성도의 난도 피해가고 청과의 전쟁에서 공도 세워 결국 도통사 자리까지 올라, 그 배를 행운의 배로 생각하고 계속 애지중지 관리하고 있다. 송태후가 영강제를 독살하고 함화제를 올린 후 전횡하자, 고문휘를 도와 한왕 조심원을 주산군도로 망명시킨다. 후송 봉선 직후인 1838년 음력 1월 청나라의 대군이 침공해오자 기동방어를 통해 청군 3만을 전사시키는 대승을 거뒀으며, 이에 분노한 청나라 황제 면녕이 친정을 나왔다가 강에 익사하는 나비효과까지 일으킨다. 이 공로로 '상승장군'이란 칭호까지 받으며 명성이 오른다. 하지만 1840년 조심원을 망명시킨 사실이 들통나 분노한 송태후에게 숙청당할 뻔하지만 명망높은 장문성을 지금 죽이면 그를 따르는 회주도통부의 반란과 민심이 요동칠 것을 우려한 임칙서의 간곡한 만류로 가까스로 목숨은 건지고 대외적으로는 노령으로 사퇴한 것으로 발표한 후 태평천국 토벌군인 강용군에 편입되는 백의종군에 처해진다. 송태후의 최초 의도는 그를 병졸로 전장에 보내서 소모되게 하는 것으로 처형을 갈음하는 것이었지만, 임칙서가 잘 설득해서 곁에 두고 비공식 군사고문이자 실질적인 강용군 총사령관 역할을 하였다. 한왕 조심원이 복권될때 함께 복권되었으며, 조심원이 월왕에 봉해지기 직전 노환으로 사망했다.
- 고문휘
우림상장군으로 3부에 나온 고구의 자손. 1760년대생. 조상 고구처럼 사석에서는 놀기 좋아하지만 공무에는 매우 엄정한 성격으로 영강제의 큰 신임을 받는다. 조상 고구와 장호원의 인연도 계속 아름답게 이어져 고문휘도 장문성과 호형호제 하는 절친으로 지내고 있다. 송태후의 전횡에 분노하여 자신과 한왕의 죽음을 위장하고 한왕 조심원을 구출해 모시고 주산군도로 망명한다. 정작 송태후는 정치적 욕심이 별로 없고 군사적 능력이 탁월한 고문휘를 좋게 평가하며 계속 중용할 생각이었다. 대한에 망명하여 대면한 재석도 그를 좋게 본다. 한왕 조심원이 복권될때 함께 복권되었으며, 조심원이 월왕에 봉해지기 직전 노환으로 사망했다. - 고벽진
고문휘의 장남, 시위군 정4품 편장군. 그러나 아버지가 망명을 하며 금릉 기기국 상무관이 된다.
- 좌종당★
호남성 악양부 출신 선비로 평소 유학 경전보다 병학 공부를 좋아한 밀덕후. 하급 관리 시절 임칙서의 눈에 띄어 측근이 되었고 태평천국의 난 때 강용군 감군(감찰관)이 되었는데 실전에서 여러 차례 대승을 거둬 정식으로 강용군 3영장이 되고, 대한제 후장식 소총을 도입하고 대한제 증기 귀차를 모방한 인력 귀갑차까지 만들어 연전연승을 거둔다. 태평군의 양수청이 대전차호라는 새로운 전술로 대항하여 귀갑차들이 격파당하고 패배하긴 하지만 나중에는 대한제 증기 귀차와 유사한 증기 귀갑차까지 만드는데 성공한다. 종전 후에는 호광총독으로 임명되어 태평천국군의 재침에 대비하는 최일선을 맡게 된다.
- 이진성
금의위 교위. 고문휘가 평소 뇌물로 구워삶아 꽌시를 만들어 둔 덕에 고문휘가 한왕 조심원을 탈출시키는 계획에 협조하고 송태후에게는 한왕이 고문휘를 살해하고 스스로 불을 질러 자살했다고 거짓 보고를 한다. 조심원이 대한령 누손에 살아있다는 소식이 퍼지자 재빨리 잠적하여 송태후가 아무리 찾아도 찾지 못했다고 한 것을 볼때 후송을 떠나 외국으로 도망친 듯.
- 홍명강
3부에서부터 정주도통부를 세습하고 있는 홍승주 가문의 후손으로 현직 정주도통사. 임지평에게 혼인동맹을 제의한다.
- 진계옥
형주도통사. 태평천국군을 상대로 장사성에서 4개월이나 버텼지만, 구원군이 오지 않아 [114]투항했지만 처형당한다. 그것도 그동안 착취한 은덩이들을 몸통 위에 얹어서 몸통이 으깨지는 식으로 끔살당했다. 자업자득인게 장사성 내의 병사들과 백성들은 식량이 떨어져 식인으로 연명할 때 진계옥 본인과 향신들은 1년 먹을 양식을 숨겨두고 호의호식 했던 것이 성이 함락되면서 밝혀진 것때문에 더 끔찍하게 죽은 것.
- 주종(住鍾)
요주도통사. 장사 공방전 때 원군 요청에도 불구하고 때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생색 내는 정도의 병력만 투입해서 패배에 일조했다. 그러나 청나라나 홍서당으로 넘어갈까봐 이를 갈면서도 조치를 취하지 못하고 있다.
- 이금(李錦)
한양도통사. 장사 공방전 때 원군 요청에도 불구하고 때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생색 내는 정도의 병력만 투입해서 패배에 일조했다. 그러나 청나라나 홍서당으로 넘어갈까봐 이를 갈면서도 조치를 취하지 못하고 있다.
3.4.5. 기타
- 천길(天吉)
추종자를 많이 거느린 방술사로 송태후의 친정 송씨 가문에서 송태후에게 소개해줘 송태후도 그를 맹신하게 된다. 후송판 라스푸틴 포지션이 될 것으로 예상되었으나 이후 언급이 사라졌는데 아들이 하는 꼬라지를 본 송태후가 정신을 차리면서 멀리한 듯하다.[115]
3.5. 양광총독부 → 월왕부
- 한왕 → 월왕(韓王 → 粤王) 조심원
조형윤의 4황자. 부황의 신임과 대신들의 신망을 받았으나 자신의 아들인 조심창을 황제 자리에 올리려던 황후 송씨가 부황을 독살하고 조심창을 황제 자리에 올리면서 유폐된다. 태후는 함화제가 봉선을 올리기 전에 그를 죽이면 부정을 탈까봐 봉선이 끝나면 죽이려 했으나, 후송의 충신인 고문휘와 장문상의 도움으로 탈출하여 주산군도로 망명한다. 고문휘에게 포섭된 금의위 교위 이진성이 한왕이 고문휘를 죽이고 자택에 불을 질러 자살했다고 거짓 보고를 하여 송태후는 대한 망명이 확인될 때까지는 그가 죽은 줄로만 알고 추적하지 않았다. 주산군도를 통해 대한으로 망명하자 재석은 그의 망명을 굳이 숨기지 않음으로써 후송 내부를 동요시키고, 한왕이라는 작호가 대한과 겹치므로 헌왕(獻王)으로 작호를 고치게 하고[116] 누손주에 2천석 짜리 농장 하나를 빌려주어 생활하게 하며 유사시 후송을 흔들 카드로 삼는다. 결국 1840년 송태후의 세작들이 그가 확실히 살아있다는 사실을 송태후에게 고하나 송태후는 임칙서의 간언을 받아들여 한왕은 화재로 죽었다는 공식 입장을 바꾸지는 않는다. 재석이 미주에서 나폴레옹을 만나고 귀경길에 누손주에 들렸을 때 재석을 알현하고 송태후를 몰아내는 반정을 일으키려면 군 경험이 있어야 함을 깨달았다며 자신과 고문휘가 누손주 화교들 중에서 의용병을 모집해 모로족 토벌을 돕겠다고 제의하여 재석은 대한군 고문관의 통제를 받는 것을 조건으로 허락한다. 그렇게 세력을 모으는가 싶었으나 1841년 홍서당 반란 때 자신이 모집한 병사들 중에도 홍서당이 있었고 그 진압을 대한군 대남도 토병들이 하게 되면서 난감한 처지에 빠졌지만, 태평천국 토벌에 대한이 참전하게 되면서 재석이 그를 후송을 통제할 장기말로 쓰려는 생각으로 휘하 병력과 함께 참전은 하되 후방에서 한왕이 살아있고 돌아왔다는 선무공작을 하도록 허락한다. 결국 함화제에게 희망을 버린 송태후가 플랜 B로 쓰기 위해 '역적들에 의해 누명을 썼었다'는 명목으로 복권된다. 복권되었으나 송태후를 완전히 신뢰하지는 못하기에 처자식은 아직 누손에 남아있다. 이후 양광총독부가 독립할 기미를 보이자 차라리 조심원을 양광의 번왕으로 삼아 독립을 막으라는 재석의 조언을 송태후가 받아들여, 양광을 분봉 받아 월왕으로 책봉되었다. 완씨를 폐위하고 여씨 가문의 후손을 찾아 새 안남국왕으로 옹립하라는 조정의 명을 받아 안남 정벌을 위해 출정하는데 섭정친왕 자리를 줄 테니 남경으로 돌아오라는 송태후의 제안과 송태후의 말을 무시하고 월왕부와 교지 땅을 들고 진짜 월왕이 되어 독립하라는 임지평의 제안을 두고 고민한다.
결국 욕심에 굴복했는지 '옛 여씨 왕조의 후손을 남월 국왕으로 임명해 안남 북부를 다스리게 하라'는 남경 조정의 지시를 무시하고 후송, 정확히는 월왕부 영토에 편입시키려다 정씨를 지지하는 현지 토착 세력의 어마어마한 반발에 부딪치고 들불처럼 들고 일어난 현지 게릴라에 밀려 전진은 엄두도 못낸다. 설상가상으로 태평천국을 배후를 둔 서나라도 개입하자 당황한다.[117] 결국 자신이 실수했음을 인정하고 원래 남경 조정이 지시한 대로 레 왕조의 후손이라 자칭하는 여유기라는 인물을 북월을 다스리는 월남왕으로 세우고 후송에 대항해 안남을 도왔다는 약점을 잡아 프랑스 동인도 회사의 협력을 얻으면서 차근차근 다시 시작한다. - 세자 조○○
조심원의 장남. 임지평의 막내딸과 혼인한다. - 조경호
조심원의 차남.
- 임지평
양광총독. 3부에 나온 임용완의 자손으로 대한에서 유학하고 온 주치의 덕분에 기생충 감염 위험성을 알게 되어 짐승의 생고기나 생피는 절대 먹지 않는다. 홍서당의 난 이후 월왕부가 세워지고 양광총독 자리에서 물러나지만 막내딸이 월왕 조심원의 아들과 혼인하여 조심원의 사돈이 된다. 안남 정벌군에 종군하여 조심원에게 송태후의 말을 듣지말고 아예 기존의 월왕부와 이번에 정복할 교지 땅을 들고 독립하라고 꼬드긴다. 그 말에 혹한 조심원은 정복한 교지 땅을 월왕부에 합병한다고 섣부르게 선언했다가 안남인들의 반발과 서나라를 앞세운 태평천국의 개입에 수렁에 빠진다.
- 오천현(吳天賢)
월왕부의 대상단 13공행의 협의회인 자의국 의장. 조정의 안남 정벌령에 응해 안남 정벌을 맡게된 조심원에게 병력을 제공한다.
3.6. 태평천국(배상제회/태평도/홍서당)
3.6.1. 왕실
- 홍수전★
배상제회의 천왕. 젊은 시절 덕성도 접주로 활동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예수불의 아우를 자처하며 배상제회를 창시하면서 원 역사와 다르게 기독교가 아닌 덕성도의 이단이 되었다.[118] 원역사의 홍수전과 비교도 안 되게 유능한 것으로 묘사되는데, 덕성도 시절 의술을 배워서 의원 노릇을 하기도 하며 배상제회 조직을 확고하게 장악하고 후송 전역은 물론 적국인 청나라, 심지어는 외국으로 팔려가는 쿨리들 속에 선교사를 끼워넣는 식으로 대한, 일본, 동남아시아 전역에 태평도 비밀지부를 설립하고 있으며, 장차 이를 바탕으로 천하를 거머쥘 계획을 갖고 있다. 원 역사의 홍수전이 사치와 향락에 빠져 하렘이나 차리고 논 것과 달리 천왕이 된 후에도 한동안 청렴하게 살았다. 황제라는 칭호는 하느님만 받을 수 있다고 천왕 칭호를 고집하는 등 정치 감각도 날카롭다. 아마도 원 역사의 홍수전은 한량이 기독교 교리를 겉핥기로 배우고 이단을 만든 것과 달리 작중의 홍수전은 덕성도의 정식 성직자로 교육받으면서 시조인 광진이 성공한 것을 그대로 따라갔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자신들이 승리하면 붉은 하늘이 다스리는 세상이 된다던지, 자신의 어록을 붉은 책으로 만들어 신도들에게 읽힌다든지 하는 것이 원역사 홍수전 외에도 마오쩌둥이 모티브인 듯. 결국 1839년 가을 태평천국 건국을 선포하고 태평천국의 난을 일으킨다. 그러나 장사를 함락하고 형주도통부를 장악한 후에는 조금씩 긴장이 풀어져서 미녀들을 탐하며 타락의 조짐을 보이기 시작한다. 하지만 재능이 어디 가지는 않아서 1841년 대한 본국은 물론이고 모든 번국들, 영국령 홍콩, 심지어 신불랑과 미주합중국 등 묘노를 부리던 곳 전역에서 동시에 홍서당 폭동을 일으켜 세계만방에 큰 충격을 준다. 폭동이 진압당하고 외국 군대들이 몰려와 지위가 흔들릴 위기에 처하지만 이마저도 역이용해 자신의 정적들을 숙청하는데 써먹는다. 외국 군대들과의 접전이 장기화되자 안남에 있는 프랑스 동인도 회사의 샤를루이 나폴레옹과 비밀리에 결탁해 유럽제 군수공장 시설을 도입해 신무기를 장비하는 한편 대한을 비롯한 참전국 정부에 각각 밀서를 보내 지난번 폭동에 대해서 유감을 표하고 충분히 배상할테니 물러가달라고 요청하는 회유책을 펴며, 세자인 아들까지 활용하는 출구전략을 선보여서 독자들을 경악하게 했다. 이렇듯 젊은 나이에 비해 매우 유능한 모습과 본인 독백으로 수십년에 걸쳐 얻은 지식과 경험이 있다고 묘사되어[119] 미래인 그것도 원역사 중국공산당 출신의 제4의 빙의자일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이 나타났다.[120][121][122] 자기 친아들이자 후계자인 홍천귀복을 휴전을 위한 미끼로 적국에 던져줬으며, "아들은 또 낳으면 된다."며 홍천귀복이 죽을 가능성에 대해서도 신경쓰지 않는 냉담하고 실리적인 성격을 가졌다.[123] 후송에서 반란을 일으킨 부상군이 관중으로 가기 위해 때마침 자신이 시찰을 온 강릉으로 몰려오자 직접 아키라 황제와 정상회담을 하고 청나라를 흔들기 위해 동맹을 맺는다. 임자남정으로 안남 북월 지방이 후송에게 먹히게 되자 그동안 자신들의 대외 교역항으로 쓰던 통킹이 막혀버릴 것을 우려, 서나라를 끌어들여 안남에 있던 후송군을 들이치는 음모를 꾸민다. - 왕후 유씨
홍천귀복의 생모. 홍수전이 장사 점령 후 들인 첩. 홍천귀복 외의 자식은 없으며, 홍수전의 사랑을 잃고 찬밥 신세지만 홍천귀복의 볼모 가치를 유지하기 위해 유일하게 왕후 자리를 유지하고 있다. - 진비 이씨
홍수전이 가장 총애하는 후궁. 대한에 볼모로 있는 홍천귀복을 세자 자리에서 끌어내리고 자신이 낳은 천산공을 세자 자리에 앉히려고 한다. - 천산공(天山公) 홍○○
1847년 생 홍수전의 서자.
- 홍천귀복
★
홍수전의 장남. 1841년 생으로 원역사보다 8년 빨리 태어났다. 3살이 되자 천왕세자로 책봉받고 상제의 손자라면서 대대적으로 홍보된다. 5세 때 홍수전이 군사들을 위무하라고 보내서 화려한 행렬과 함께 장사 인근을 지나다가 대한 정찰 비행선에게 목격당했고, 비행선을 동원한 사상 최초의 헬리본 작전으로 생포당하고 한양으로 압송된다. 이는 사실 홍수전이 의도했던 바로, 휴전을 원하던 홍수전이 대한에 상징적인 전리품을 안겨줘서 전쟁에서 빠질 명분을 주고, 내부 과격파들은 세자의 안위를 명분으로 침묵시킬 목적으로 의도적으로 전선 인근에서 화려한 행렬을 이끌고 돌아다니게 한 것이다. 후송에서는 자기들에게 넘겨달라고 하나 재석은 그를 인질로 삼고 동생 순친왕에게 맡겨 양육하게 한다. 이후 보통 홍귀복이라고 불리게 되는데, 개명한 것은 아니고 천귀복이라는 이름의 天자가 불순한 의도로 쓰였다고 다들 생각했기 때문. 순친왕은 그를 친아들처럼 아끼며 키워줬고 이송과 이세연도 그를 친형제처럼 대했기에 자신을 버림패로 써버린 친부와 태평천국을 별로 그리워하지 않고 순친왕 일가를 자기 가족으로 여긴다. 자연스레 이송의 시종 비슷한 위치가 된다. 순친왕의 유주행에도 따라가서 대한 뿐 아니라 세계 여러 나라를 경험하게 되었으며, 이 때 이세연과 떨어져 지내게되어 안타깝다고 한 것을 보면 세연에게 연심을 느끼는 듯하다.
- 홍천귀복의 유모
상당한 미녀였다고 한다. 홍천귀복 생포 작전에서 하와병 마우이가 목을 꺾어서 즉사한다. 재석은 홍천귀복과 유대감이 있는 유모를 생포하지 않고 죽여버린 것은 안타깝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긴박한 당시 작전 상황을 볼 때 유모까지 함께 납치해도 둘을 모두 데려오기는 어려웠을 것으로 보이며, 결론적으로는 홍천귀복이 아무도 없이 혼자 납치당한 덕분에 태평천국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순친왕 일가와 더 유대감을 가지게 된 면도 있다. 홍천귀복은 유모가 죽었다는 것을 모르며 풍운산은 유모는 배 타기가 무서워서 오지 않았다고 둘러댄다.
3.6.2. 신료
- 양부귀★
태평천국의 좌신위대원수. 본래 과거를 준비하던 유생 출신으로 배상제회 초기부터 측근이었다. 태평전쟁과 소영홍 숙청에 공을 세워 발언권이 높아진다.
- 소영홍★
태평천국의 우신위대원수. 본래는 정통 덕성도의 접주로 아편 잠상 토벌에서 군사적인 재능을 보였으나 송태후가 배상제회 토벌령을 내렸을 때 부패한 요주도통부 군사들이 임칙서를 도와 아편 잠상 토벌을 돕던 정통 덕성도인들까지 학살하는 모습에 분노하여 태평천국에 합류했다. 홍수전은 군사적 재능이 뛰어난 소영홍을 좋게 평가하면서도 지나치게 공격적인 동진을 주장하는데다 자신을 따르는 덕성도 출신 군벌을 이끄는 소영홍을 불안 요소로 여기고 있다. 결국 홍콩조약이 맺어질 때 '천왕의 명을 사칭해 제3국들에서 난을 일으키게 하고 그 책임을 천왕에게 돌려 천왕위를 찬탈하려 했다'는 누명을 쓰고 숙청, 처형당한다.
- 호일강
태평천국에 투항한 유학자로 수석 대신인 천정승상 직을 맡는다.
- 위소열
대한국 묘노 태평천국 접주 중 한명으로 난을 일으켰지만 사종태가 이끄는 군사들의 의해 진압당하고 본인도 전사한다.
- 양수청★
홍의군 병사였다가 홍수전이 홍의군을 동원해 내부 숙청을 할 때 공을 세워 여수(5백인장)로 출세하고, 악양 전역에서 좌종당 군의 귀갑차를 대전차호를 이용해 격파하는 공을 세워 대한군의 증기 귀차를 상대하는 강서 방면으로 파견된다. 초전에서는 강력한 증기기관과 무한궤도를 사용하는 대한군의 귀차가 대전차호에서 자력으로 빠져나오는 바람에 패주하였으나 그 후에는 수많은 인력을 동원해 협곡 수준의 대전차호를 파서 대한군의 귀차를 추락시켜 파괴하는 데 성공한다. 그 공을 인정받아 소영홍이 숙청된 후 우신위대원수 자리에 오른다. 후송과의 휴전이 끝나면 다시 후송을 치자는 강경파와 일단 기반부터 확고히 다지자는 온건파 사이에서 서나라을 쳐 운남을 차지하자는 타협안을 제시한다.
- 풍운산★
홍수전의 사촌.[124] 홍천귀복의 수행대 대장이며 홍천귀복은 당숙인 그를 '풍 숙부'라고 부르면서 잘 따른다. 본래 홍천귀복을 수행하면서 의도적으로 대한의 눈에 띄어 생포된 뒤 함께 대한으로 압송되라는 밀명을 받았으나 예상과 달리 대한이 특수작전으로 홍천귀복만 쏙 빼가면서 함께 압송되어 보호자 겸 공사 노릇을 하는 것은 실패한다. 이후 대한에 표면적으로는 홍천귀복 석방을 요구하며, 실제로는 석방이 안된다면 홍천귀복의 보호자라는 명목으로 함께 있겠다며 대한에 사실상의 공사로 파견되기 위해 밀사로 방문한다. 하지만 재석은 과거 차차가 시녀로 위장한 쿠노이치를 데려왔던 전례 때문에 거절하고, 만남과 물품 전달만 허락한다.
3.7. 서
- 인종 복흥제(仁宗 復興帝) 장인경
서나라 7대 황제. 함녕제의 3황자로 성도가 청군에게 함락될 때 황족 중 유일하게 탈출하여 운남으로 들어가 서나라의 명맥을 잇는다. - 장세흠
장세직의 형. 호족들을 숙청하고 중앙집권을 할 계획을 세우다가 호족들에게 암살당한다.
- 영무제 장세직
서나라 8대 황제. 장인경의 아들. 지방 호족들이 세워놓은 명목상의 황제에 아편팔이로 국가를 연명하는 현실에 자괴감을 느끼고 있다. 태평천국의 난이 터지자 청 가정제에게 함께 참전하여 태평군을 토벌하자는 제안을 보냈지만 비웃음만 받는다. 이후 대한이 안남을 정벌하고 북월 지역을 후송 월왕이 차지하려 하자 자신들의 무역항이 막힐 것을 우려한 태평천국의 부추김을 받아 북월 저항군을 지원하는 군사들을 파병한다.
- 당금도(唐金道)
호남 출신 거상으로 서나라의 실질적인 지배권을 가진 호족 수장 회의인 천산연의 일원. 태평천국의 지령을 받은 진삼숙에게 부추김을 받아 안남 전쟁에 참전할 것을 주장하여 천산연에서 안남 파병군 대원수로 선출된다.
- 진삼숙(陣三叔)
서나라 상인. 여러 나라를 드나들며 큰 거래를 하는 거상이다. 태평천국의 메신저 역할을 한다.
3.8. 일본
3.8.1. 역대 쇼군/내대신
- 도쿠가와 이에츠구
도쿠가와 막부 13대 쇼군. 이에시게의 차남으로 이에토시의 5대손이다. 대한과의 우호정책을 잘 지키고 있다. 존황양이파 토벌을 위해 신센구미를 창설하고, 막부와 조정을 통합하는 공무합체와 대한과 공조하여 일본 황실에 대한 황실과 도쿠가와 가의 핏줄을 집어넣는 황통보완계획을 통해 존황파의 명분을 와해시킬 계획을 세운다. 두 계획 모두 성공적으로 진행 중이었으나 끝은 보지 못한 채 1849년 10월 30일 사망한다.
- 도쿠가와 이에사토(徳川家達, 덕천가다)
1826년생. 이에츠구의 사남으로 형들이 모두 요절해 세사가 되었다. 1849년 이에츠구가 사망한 후 14대 쇼군이 된다. 1852년 공무합체가 실시됨에 따라 에도 막부의 문을 닫고 내대신 자리에 오른다.
3.8.2. 도쿠가와 가문
- 도쿠가와 무네타케(德川宗武, 덕천종무)
1821년생, 이에츠구의 차남이나 장남이 2세때 죽어 사실상 장남으로 후계자로 공인되어 있다. 대한에서는 세사(世嗣)로 예우한다. 재석을 따라 대한을 방문하였다. 재석과는 달리 평범한 어린아이지만 특별한 사고 없이 무난히 활동을 하고 귀환하였다. 그러나 1841년 요절한다.
- 도쿠가와 이에모토
이에츠구의 유일한 친동생, 히토쓰바시 도쿠가와 가문의 당주.
- 도쿠가와 요시하루
히로시마 번주, 이에츠구의 사촌.
- 도쿠가와 나리하루(德川斉温, 덕천제온)
오와리 번주. 도쿠가와 가문이지만 존왕파이다.
- 도쿠가와 나리아키(徳川斉昭, 덕천제소)
9대 미토 번주. 도쿠가와 가문이면서 존황양이 파벌의 수장이다.
3.8.3. 천황가
- 닌코 덴노★
일본의 덴노. 막부에게서 후한 대접을 받는 현상에 만족하여 존황양이파와 거리를 둔다. 1846년 사망한다.
- 히로노미야 오사히토 → 고메이 덴노★
닌코 덴노의 아들. 원 역사처럼 닌코 덴노가 사망한 후 고메이 덴노로 즉위한다. - 여왕 → 황후 야스코(寗子)
1837년생 나루히토와 황양공주의 장녀. 1849년 히로노미야와 혼인한다.
- 간인노미야 나루히토(愛仁)
★[125]
간인노미야 5대 당주, 이에츠구의 누이 아들이자 왜황의 당질. 제2차 경인조약에 따라 대한과 국혼을 맺을 당사자로 지목된다. 여담으로 이름의 한자를 한국식으로 읽으면 애인이라 읽혀서 광덕제가 살짝 거북해했다. 자식으로는 전왕의 딸 황양공주 사이에 1남2녀가 있다. - 황양현주 → 황양공주 이○(黃壤縣主→黃壤公主 李○)
이종의 차녀. 1819년생. 13세에 간인노미야의 나루히토의 아내감으로 간택되어 화번공주로 승작되고 혼인을 한다. 이후 나루히토 사이에서 딸을 낳는다.
- 후시미노미야 사다유키★
후시미노미야 19대 당주.
- 후시미노미야 구니이에★
후시미노미야 20대 당주.
3.8.4. 좌막파
- 이이 나오아키★
히코네 번주. 에도 막부의 다이로. 유구-아모국 처분 문제로 일본을 방문한 재석을 영접 책임자로 맞이한다. 존왕파를 피하기 위해 오사카에서 에도까지 기차로 무정차 통과하였다. 재석이 돌아간 이후 이에츠구와 대화하다 재석이 여색에 관심이 없던 것으로 이야기가 흘러가자 그가 사실 슈도를 즐기는 게 아니냐는 황당한 결론을 내려버린다.
- 하야시 다다후사★
관록있는 외교관으로 쇼군 이에츠구의 신임을 받는 원로로 막부의 로주 직위에 있으며, 1831년 봄 아모국을 방문해 아모국이 일본의 번국이 되었음을 통보한다.
- 미즈노 타다아키라★
막부의 로주, 국혼을 치르는 도쿠히메를 모시고 온 사절의 대표이다. 원각사에 예물로 높이가 다섯 자나 되고 갖가지 보석으로 장식된 7만냥 가치의 금동탑을 바쳐 광덕제의 심기를 불편케 한다.[126] 광덕제의 조문 사절로 온 뒤 얼마 후 사망한다. - 미즈노 타다쿠니
타다아키라의 아들, 사절단 정사.
- 호리 지카시게★
막부의 노주.
- 오쿠보 다다이치로
대한 주재 일본 관수.
- 아토베 요시스케★
오사카 동정봉행. 오시오의 난 때 즉사한다
- 호리 도시카타★
오사카 서정봉행. 오시오의 난 때 치명상을 입는다.
- 카이쇼 히데야스
오사카성 수성봉행.
- 에노모토 타다시
일본군 소장.
- 히라노 나가마스
대한 주재 일본 관수.
- 마쓰다이라 타다가츠
육군 봉행. 군마 마쓰다이라 가문 출신. 안남군에 고용된 미쓰이 용병의 계약 해지 명목으로 대한군과 동맹하는 일본군 관전무관단장으로 대한의 안남 정벌에 동행한다.
3.8.5. 도막파
- 오시오 헤이하치로★
오사카의 존경받는 학자로 원역사처럼 흉년이 들었는데도 곡물가를 올리려는 대상인들과 부패한 봉행들에게 분노해 반란을 일으켜 봉행들을 죽였지만, 진압당하고 머리에 탄환을 맞고 사망한다. 이때 이순신이 쳐들어 왔을 때도 불타지 않았던 오사카가 반절이나 불타버렸고, 이 반란 때문에 이에츠구는 대한 봉선 의식에 사자를 보내는 것을 취소하게 된다. 또한 얼굴에 총을 맞고 죽었기 때문에 '죽은 오시오는 가짜이고 내가 진짜 오시오'라는 반란자들이 계속 나타나고 있고 그중 일부는 존황양이파와 손을 잡는 등 막부 통치에 위험요소로 작용 중이다.
- 미야지마 준이치로
도사 번 출신의 무사로 미토에 가서 존황양이파가 된 후로 무력으로 막부를 타도하자는 도막론의 지도자가 되어 신센구미의 1급 수배 대상이다.
- 묘운(明雲)
쿄고코쿠지의 승려. 아키라 친왕에게 천황가의 조상 중에 서복과 함께 일본에 온 진시황의 후손도 있다며 바람을 넣고 유배지에서 탈출하게 돕는 등 아키라를 도막파의 얼굴마담으로 내세우려다가 결국 중국 관중지역에 대진국이 건국되는 나비효과를 일으키게 된다.
3.8.6. 기타
- 타치바나 사다마스
타치바나 무네시게의 후손. 부상군에서 용병으로 활약한다. 부상군 내의 도막파가 아키라 친왕을 황제로 받들고 대진국 건국을 선포하자 이는 신의를 어기는 짓이라 여겨 자기 부하들을 이끌고 부상군을 탈출. 후송 조정에 고변한다.
- 미쓰이 히사시게(三井久重)
미쓰이 상회 안남 주재 대리인.
3.9. 아모국
- 야마우에노 오토코(山上大男)
아모국 최대의 도시인 무역항 토카부치의 영주. 토카부치 지역도 다른 아모국 부족들처럼 주민들이 추장을 선출하는 방식이었으나, 선대 추장인 그의 아버지가 용병을 고용해 친위 쿠데타를 일으켜 추장직을 세습 영주로 바꿔버리고, 아모국의 다른 추장들이 머뭇거리는 사이 미주 방문길에 아모국에 들른 재석의 아버지 광덕제에게 향응을 베풀어 그가 말한 덕담 한마디를 대한 황실의 인정이라고 선전하며 세습제를 굳혔다.[127] 선대 추장도 본인도 친일파로 일본 문화에 젖어있어 이름도 일본식으로 지었을 정도. 아이누어 이름은 불명. 재석이 미주 가는 길에 들르자 재석을 초대했으나 그 속이 다 들여다보여 재석은 초대를 거절한다.
- 오니비시
1831년 초 시점에서의 아모국 '곰을 쏘는 자'(국왕). 제2차 경인조약으로 인해 아모국이 일본의 번국이 된다는 것을 추장회의에서 공표한다.
3.10. 대남국 → 분할
3.10.1. 역대 황제
- 명명제 완복교(明命帝 阮福皎)★
응우옌 왕조 2대 황제, 부왕의 뒤를 이어 대한에게는 안남국왕, 후송에게는 남월국왕으로 칭신하며 진랍, 남장을 침략하고 섬라와도 갈등을 빚는다. 선대 가륭제까지는 선을 지키며 행해진 동화 정책을 폭압적으로 변모해 소수 민족들을 무자비하게 탄압했으며 안남엔 안남식 대승불교만 존재해야 한다는 원리주의로 천주교, 덕성도, 소승불교 등 유교와 대승 불교를 제외한 모든 종교를 강도 높게 탄압해 원한을 쌓아올렸다. 여기에 용병으로 와서 지방에 정착한 일본인 호족들의 토지를 무리하게 회수하려다 여기저기서 반란이 일어나는 등 나라를 혼란에 빠뜨리는 암군이다.[128]
- 헌조 소치제 완복선(憲祖 紹治帝 阮福暶)★
명명제의 장남, 부친 사망 후 즉위한다. 정비를 두지 않고 후궁만 잔뜩 두었는데, 아들 딸 합쳐 무려 60명이 넘는 많은 자식을 낳았다. 천주교 금지령은 유지하지만 태평천국의 난이 안남으로 퍼질까 두려워 프랑스 군사고문을 초빙한다. 샤를 루이의 분탕질에 속아넘어가 대한이 반군에게 무기를 공급한다고 믿게 되어 편집증이 생기고 샤를 루이의 태평천국 무기 지원과 아편 장사를 돕는다. 대한에서도 뒤늦게 이를 알고 재석이 무력으로 응징하려 하였으나 하필 청 태자와 대한 정현공주의 국혼 직전, 40세의 때이른 나이에 갑자기 죽어버려 재석도 3년상 기간에는 봐줘야겠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문자 그대로 '저승으로 회피기동'을 완수한다.
- 사덕제 완복시(嗣德帝 阮福時)★
소치제의 차남. 초명은 완복홍임. 부황 소치제처럼 프랑스의 세력을 끌어들여 대한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다. 부황 이상으로 대한에 반감이 커서 대한과 관련된 거라면 뭐든지 다 싫어하는데 혐한이 도가 지나쳐 관민에서 편의성 때문에 잘만 쓰이던 국문(한글) 사용을 금지하고[129], 콜레라가 창궐했을 때 환자들에게 한후수(경구수액) 사용을 금지하고[130], 본인 또한 종두를 맞지 않을 정도다. 소치제 당시 프랑스가 태평천국에 무기를 판매할 때 묵인한 걸 대한이 다 아는데 숙여도 모자를 판에 모든 걸 서나라 때문이라며 남탓하는 4과문을 보내 대한의 심기를 거스르고 현실을 고려하지 않고 무작정 친 프랑스&반 대한 정책을 밀어붙이고 대한과의 일전도 불사하겠다며[131] 이를 위해 국론과 민심을 통합시킨답시고 정복한 타민족들을 대상으로 과격하고 극단적인 민족동화정책[132]을 추진하고 온건파 신하들이 이를 만류하면 전혀 듣지 않고 닥치는 대로 잡아가두는[133] 등 원 역사에서 베트남을 프랑스 식민지로 전락시킨 암군답게 암군짓을 일삼는다. 그러다 반한감정으로 종두를 맞지 않은 게 화근이 되어 천연두에 걸려 쓰러지고 간신히 목숨은 건졌으나 원 역사대로 고자가 되었다. 기어이 군대를 키워 대한이 맞서겠다는 망상을 버리지 않는 가운데 죽은 물건 세워보겠다고 구차하게 그렇게 싫어하던 대한산 홍삼탕을 꾸역꾸역 마시는 모습이 가관.
홍삼탕 한 그릇을 먹은 후 지나가던 궁녀를 아무나 잡아다 성폭행에 가까운 성관계를 시도하려다가 안 서면 쫓아내는 일을 반복, 그렇게 홍삼탕을 400그릇, 홍삼 뿌리도 200개, 마카 분말도 한 가마니 넘게 먹고도 안 서자 태의한테 홍삼탕 444그릇을 먹기 전에 자기 물건이 안 서면 죽이겠다고 난리를 피우는 등 추태를 부린다.[134][135] 441그릇째 홍삼탕을 먹고 겨우 죽은 물건을 세우는데 성공하고, 기쁨에 겨워 태후와 대신들을 죄다 불러서 자기 성관계 장면을 직관하게 하는 기행을 선보인다.[136] 발기는 가능해졌지만 그 안의 생식 능력이 돌아왔는지는 미지수이며 무엇보다 유교 사회에서 어머니한테 그걸 직관하게 만든 건 빼도박도 못 할 패륜[137]이라 완복시에 대한 여론은 더 나빠졌고, 이후 대한 덕분에 성기능을 되찾았으니 토지 국유화는 유보하겠지만 강제동화는 계속 하겠다고 선언, 이걸 대한에 국서로 통보하는 정신나간 짓까지 저지르며 대한의 안남 정벌을 확정지어버린다.[138]
대한의 안남 정벌이 시작된 후 정신줄을 놓아 결사항전을 부르짖고 충효사상에 호응해 안남군도 결사항전에 나서지만 그런 항전이 무색하게 안남군은 대한군에게 무참하게 패배하고 대한군에 의해 수도 후에가 포위당한다. 후에가 함락되기 직전까지 가자 피난민으로 위장하여 북쪽으로 몽진하는데 그 와중에도 안남이 프랑스와 결탁했다는 증거가 될 각종 문서들은 하나도 남기지 않았다. 형제들은 물론 삼촌, 사촌,오촌 당숙, 육촌형제들에 이르기까지 온 일가친척들을 다 챙겨갔는데, 혈육의 정이라기보다는 종친이 대한 손에 넘어가면 대한이 다음 안남왕으로 옹립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 뒤늦게나마 정신을 좀 차리고 피난길에서 군사들을 잘 독려하며 사기를 유지하고 자기 소생 아들들을 도주시킨 선황의 후궁 서빈에게도 죄를 묻지 않는 등 나름 개념있는 모습을 보이지만 그것도 잠시, 전술한 서빈의 아들들 완복홍항과 완복홍일이 자신을 떠나 도주하고 이복형 안풍군왕도 도망치려다가 붙잡힌 후 면전에서 그의 막장 행각을 비판하는 등 형제들까지 자신에게 등을 돌리기 시작하자 다시 평정을 잃어버린다. 안풍군왕을 처형해버리고[139] (이미 대한과 안남을 분할하기로 합의한) 후송군의 지원을 받아 대한군을 물리치겠다는 허무맹랑한 계획을 세우는[140] 등 답이 없다. 도피 중 대한에 의해 공식적으로 폐위된다. 이후로도 폭주해서 날뛰다가 진정해서 상식적인 지시를 내렸다가를 반복한다.
아우 완복홍항의 술회에 따르면 왕자 시절까지만해도 노름과 주색잡기에 빠져사는 형 완복홍보와 반대로 효심 깊고 공부에 전념해 평판에 흠잡을데가 없었다고 한다. 그를 무척 싫어하는 북부 출신 고백적 역시 사람은 무척 좋았다고 회상한 걸 보면 자기 가족과 유학자인 사대부들을 대하는 태도는 괜찮았던 게 확실하다. 하지만 정학이라며 성리학, 그것도 안남식 성리학만 맹목적으로 파고들며 다른 학문에는 관심을 두지 않은 탓에 세상을 보는 눈이 극도로 좁아졌고 제위에 올라 눈치볼 사람이 없어지자 행실마저 더러워지며 현실을 안 보고 망상과 아집에 빠져 나라를 말아먹었다.[141]
나폴레옹 2세에게도 손절 당한 상태에서 대한의 추격과 공중강습까지 죄다 피해가며 원 역사의 선조와 인조를 능가하는 런 실력을 선보이는 중. 런하는 와중에 의병 활동을 촉구하는 격문을 열심히 뿌려서 분탕을 치고 있다.
문인을 자처하며 측근들 데리고 시를 자주 지었는데 그 시 정리하던 업무를 맡았던 고백적은 형편없었다며 진저리를 친다.
3.10.2. 황실
- 완복경(阮福景)★
명명제의 맏형. 원역사처럼 천주교인이 되어 종묘 참배를 거부하는 등 물의를 빚다가 요절하였다. 이미 옛날부터 대한과 법왕청 간의 협상으로 인해 유교적 제사 및 국가제례와 관련해서 타협안이 나와 있었다는 걸 생각하면 우물 안 개구리였거나 근본주의 광신도였던 듯.
- 대비 범씨(范氏)★
소치제의 후궁이자 완복시의 모친. 소치제의 후궁들 중 가장 품계가 높은 일계귀비였으며, 이로 인해 그녀의 유일한 아들이 적자로 인정받아 즉위하고 대비가 되었다. 자신이 낳지 않은 왕자녀들(60명이 넘어간다!)의 생일까지 일일이 기억하며 챙겨주는 자애로운 성품으로 모두에게 존경받는다. 아들보다는 그래도 상황 판단능력이 좋아서, 대한의 치죄사 이유원이 도착하자 그 앞에서 절을 하는 굴욕을 감수하며 아들이 보낸 국서는 중간에 어떤 역적이 바꿔치기한 것이라고 변명하고 안남은 대한을 배반할 뜻이 없다고 싹싹 빈다. 이후 아들이 천연두 후유증으로 성불구자가 된 충격에 멘붕하여 정사에 손을 놓아버리자 수렴청정을 한다. 비교적 소극적으로 정치에 나섰음에도 현상유지를 잘 해낸다. 드디어 성기능을 되찾은 완복시가 기쁨에 겨워서 성관계 도중에 모친과 대신들을 방에 들어오라고 불렀고, 늘그막에 아들의 성관계 장면을 직관하는 봉변을 당한 뒤 주저앉아버린다.
- 안풍공 완복홍보(安豊公 阮福洪保)★
소치제의 서장남으로 완복시의 이복형. 역모 혐의로 별궁에 갇혀살고 있었는데, 후에 함락 직전에 도망치는 완복시가 그도 끌고 간다. 완복시와 같이 끌려가던 도중에 완복홍항과 완복홍일의 도망 소식을 듣고 자신도 살기 위해 감시하던 감시병들과 같이 도망을 시도하다 발각되었고 붙잡힌 후 완복시 앞에서 대한군의 침공을 부른 완복시의 막장 행각을 힐난하다 참수형에 처해진다. 여기까지보면 상식인 같지만 맏이임에도 제위에 오르지 못한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노름과 주색잡기에 지나치게 빠진 나머지 부친이 병으로 누워있는데도 음주가무나 즐기는 한심한 모습을 보인 탓에 보위에서 밀려난 것.[142] 왕자 시절 효심 지극하고 학업에 전념해 평이 좋았던 완복시가 겨우 5년만에 나라를 말아먹은 걸 감안하면 이쪽이 즉위했어도 방향만 다를 뿐 심각한 암군이 되었을 것이다. - 완복응복(阮福膺福)★
1846년생 안풍공의 장남. 아버지보다 먼저 탈출하여 대한군에 아버지를 구해달라고 하며 귀순한다. 자신이 소치제의 장손임을 내세워 안남 왕위를 요구하나 재석은 그의 아버지 안풍공이 불량한 행실로 부왕에게 내쳐진 인사라 정통성이 부족하고, 이미 됨됨이를 파악한 완복홍항과 달리 당시 7살로 너무 어려서 어찌 자랄지 계산이 서지 않으며,[143] 어린 아이를 왕위에 올리면 꼭두각시 삼아 부리는 게 너무 노골적이란 점을 내세워 반려한다. 본인은 자신이 중월왕이 될것으로 믿고 대한의 민사작전에 협조했는데 이택진이 중월왕에 봉해지자 분노하지만 평남부원수 이용성이아이스크림을 대접하며안남이 혼란한 시기에 어린 나이에 왕이 되면 그 정치적 부담을 다 받아야 하니 이택진을 임시로 왕에 세운 것이고 안남이 안정화되고 완복응복이 성인이 되면 정식 왕으로 책봉해줄 것이라고 둘러대 넘긴다. 대한측 관리들은 한 7~8년 정도는 조용할 것으로 예상하는데 그 7~8년 안에 현실을 깨닫고 조용히 사는 법을 배우거나, 숙부처럼 세상 모르고 날뛰다 신세를 망치거나 둘 중 하나가 될 것으로 보인다.
- 태국공 완복홍부(泰國公 阮福洪付)★
소치제의 삼남. 완복시의 이복동생.
- 의순숙비 완씨(議順淑妃 阮氏)★
소치제의 후궁. - 건서공 완복홍의(建瑞公 阮福洪依)★
1833년생 소치제의 사남.
- 영국공 완복홍비(永國公 阮福洪伾)★
소치제의 7남.
- 양비 무씨★
소치제의 후궁. 3남 1녀를 낳았다. - 가흥공 완복홍휴(嘉興公 阮福洪休)★
소치제의 8남. 양비 소생 중 가장 연장자.
- 서빈 장씨★
소치제의 후궁. 2남 1녀를 낳았다. 대한의 표적이 된 완복시와 함께 움직이는 것보단 따로 도피하는 게 안전하리라 생각해 자기 소생의 아들들을 몰래 빼돌렸다. - 완복홍일(阮福洪佚)★
소치제의 29남(막내아들). 1847년생. 친형 완복홍항과 함께 대한군의 포로가 된다. 대한군에 잡혔을 때는 만 6살도 안 된 어린 아이라 돌아가는 상황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한국어도 모르는 상태여서 재석을 알현할 때도 형 옆에서 가만히 있기만 했다. 재석이 꽤 괜찮은 집을 형과 함께 지낼 거처로 주고 시중을 들 하인들에, 어린 그가 친구로 삼으라며 개 한 마리까지 같이 내려준 덕에 육체적으로는 편하게 지낸다. 원 역사에서는 왕위에 오른 후 완복승으로 개명했는데, 작중에서는 친형이 왕위에 오르고 이 이름을 쓰게 되었다. 이로 인해 왕위에 오르지 못하거나 오르더라도 복승이 아닌 다른 이름을 쓰게 될 듯하다.
3.10.3. 신료
- 장등계(張登桂)★
대남국 재상이자 소치제의 사돈으로 근정전대학사, 청군공 작위를 갖고 있다. 대남 조정내 온건파의 수장으로 반대한 정책을 밀어붙이는 사덕제를 만류하다 투옥당했으나 사덕제가 천연두로 쓰러진 사이 황태후 범씨의 선처로 풀려나고 대한에 사죄사로 파견된다.
- 무문해(武文解)★, 완지방(阮知方)★, 임유협(林維浹)★
소치제의 고명대신들. 차남인 사덕제가 보위에 오르는 데 역할을 했다.
- 이봉성
대남국 태의. 한국 유학까지 다녀온 내의원 최고의 명의지만, 패악을 부리는 사덕제의 신경질에 허구한 날 시달리며 고생하다가 결국 태의 자리고 뭐고 다 버리고 도망쳐 잠적한다.
3.10.4. 기타
- 마리안느
프랑스인 혼혈인 샤를 루이 나폴레옹의 정부. 안남인 어머니를 프랑스인 아버지가 버리고 떠난 바람에 어렵게 살며 결국 창녀가 되었다가 샤를 루이의 눈에 들어 정부가 되었지만 어머니처럼 버려지고, 샤를 루이의 행적을 조사하는 대한 익문사 요원들에게 샤를 루이의 비리 행각을 전부 고발한다.
3.10.5. 점파국
- 완문승(阮文承)★
안남이 황제국 놀이를 하기 위해 살려두었던 괴뢰국인 점파국의 마지막 왕. 몇 대 전 선조가 참파인들을 이끌고 떠이선 왕조와 싸운 공적으로 완씨 성을 하사받았으나 완복교 시절 남기 지역에 대규모 반란이 일어났을 때 같이 반란을 일으켰다 무자비하게 진압당한 후 능지형으로 처형된다.
3.11. 월남국(북월)
- 월남국왕 여유기(越南國王 黎維祁)[144]
1815년생. 떠이썬 왕조의 공격에 서나라로 도망가 망명지에서 죽은 후 레 왕조 마지막 황제 여유조의 차남인 여유근의 손자...라고 주장하는 인물. 그럴듯한 증표를 내보이긴 했지만, 진위여부를 확인할 방법도 여유근 후손에 대한 기록도 없었다. 하지만 달리 여씨 후손 구하기도 힘들었던 조심원은 믿어주기로 한다. 후송에 의해 월남국왕으로 책봉된다.
- 여문구(黎文毆)
서나라에서 안남국왕으로 옹립한 여씨 왕실 방계.
- 고백적(高伯適)★
여유기의 최측근. 안남 북부에서 가장 유명한 문인으로 완씨 조정의 북부 지방 홀대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 소치제 시절 과거 채점관으로 재직하고 있다가 완씨 조정을 인정 못 하는 북부 출신 과거 응시생들이 과거 시험에서 피휘를 지키지 않은걸 발견하고 이를 고쳐주었다가 들통나서 처벌을 받았다. 명성이 높은 문인이라는걸 안 소치제의 아량으로 가벼운 처벌만 받았지만 그 후에는 한직만 맴돌다 결국 못 버티고 낙향했다. 소치제가 죽은 후에는 안남 중부 출신 고명대신들이 농간을 부려 정당한 후계자인 소치제의 장남 완복홍보 대신 차남 완복시를 왕으로 옹립하였는데 그렇게 옹립된 완복시는 고백적을 한림원으로 불러들였으나 자신이 쓴 형편없는 시나 정리하는 일을 맡겼다. 끝내 사덕제가 대한의 침공까지 부르자 폭발하여 뜻을 같이 하는 이들을 모아 안남 북부의 정당한 통치자로 여유기를 내세운다. 여씨의 후손을 번왕으로 삼으려는 월왕부와 이해관계가 맞아 일단 손을 잡지만 종국에는 월왕부까지 몰아내고 독립국을 세우려 기획한다. 원 역사에선 완복시에게 저항하는 민란 지도자가 되었다 처형되는 인물이니 바뀐 역사의 수혜자.
3.12. 섬라국
- 라마 4세★
섬라국왕. 한국 불교계와 교류가 많아서 출가 중에 이것저것 공부하던 중 한국어도 배웠다고 한다. 재임 중 미국과 수교를 했다. 대한과 안남의 전쟁 중 사덕제에게 남장과 진랍 지역을 섬라에 넘겨주고 주둔군을 물리라는 요구와 그 요구를 거절하면 대한 편으로 참전해 안남의 서쪽을 공격하겠다는 서한을 보냈다. 다만 여차하면 방콕을 포격할 궁리까지 하고 있던 재석과 달리 처음부터 전쟁까지 갈 의사는 없었는지 대한이 힐문사를 보내 연유를 묻자 시간 끌지 않고 바로 최고위 귀족을 답사로 동행시켰다.
표면적인 요구는 안남을 분할한 대한에게 남장과 진랍은 섬라의 세력권으로 인정해달라는 것이나 일부러 확언을 피하며 협상의 여지를 남겼다.
- 핑클라오 왕자★
라마 4세의 동생. 섬라국 부왕(副王).
- 솜뎃 차오프라야 보롬 마하 시 수리웡★
국왕 해군 사령관. 대한이 섬라에 사절을 파견한 것에 대한 답사로 대한을 방문하여 라마 4세의 친서를 전달한다. 군인일 뿐 아니라 외교 경력에 있어서도 숙련자라, 한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데다가 예를 지키면서도 당당한 태도와 능숙한 외교적 수사를 선보여서 재석과 대신들에게 좋은 인상을 준다. 중월국왕과 남월국왕에 책봉된 이택진과 완복승에게도 찾아가 이런저런 조언을 해주고 호감을 산다. 한창 대한과 교섭이 진행되던 와중 명목상 상국이라는 이유로 갑작스럽게 끼어든 후송 특사단에 당황하지만 자발적으로 후송의 번국이라고 후송에게 고개를 숙이는, 섬라 입장에선 최선의 선택지를 고른다.[145] 자주권을 지키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지만 이로인해 섬라에 꽤나 유리에게 진행되던 협상이 엎어져서 남장의 절반은 가져갈 수 있었던 것이 남장과 진랍을 전부 떨어져 나가는 쪽으로 협상이 기울어 버린다.
3.13. 무굴국
- 바하두르 샤 2세★
원 역사에서 세포이 항쟁을 계기로 폐위된 무굴 제국의 마지막 황제. 역시 허수아비 신세로 황궁인 델리의 붉은 요새에서 영국의 대접을 받으며 잘 먹고 잘 살고 있다.
- 1대 달후지 후작 제임스 브라운램지★
무굴국 재상 겸 영국의 인도 총독. 허수아비 신세인 무굴 황제를 대신해 인도를 실질적으로 다스리고 있다.
3.14. 벵골 칸국
- 토를로시
벵골 칸국의 5대 구르칸. 영국에게 정복당한 다른 인도 국가들과 달리 대한의 도움을 받아 잘 살고 있는 현실에 만족한다. 그래서 외부의 적보단 말라리아 모기 퇴치를 더 신경쓰고 있다. 대한 벵골 상관의 중개로 후송에 수출할 아편 농사가 번창하는 것도 만족해하고 있다. 65세에 말라리아로 사망한다. - 체렌볼드
토를로시의 장남. 호랑이 사냥 중 코끼리에 밟혀 사망한다. - 담바수렌
토를로시의 차남. 이복동생 소남자르갈에게 패하여 일가족 모두와 함께 살해당한다.
- 소남자르갈
벵골칸국 6대 대칸, 토를로시의 삼남. 태평천국의 난 때문에 대 후송 아편 수출이 급감하여 경제적 타격을 입자 더더욱 대한과 밀착하는 한편 아편을 대체할 쌀과 차를 재배할 땅을 얻기 위해 아라칸 왕국을 침공해 아라칸 북부 지역을 획득한다.
3.15. 준가르 칸국
- 체링 바투르
준가르 본가의 칸. 부왕 타마치가 러시아 복속을 택한 것을 불만스러워하면서도 현실에 체념하고 있다. 이 어려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러시아로 망명한 후금 삼패륵 찰니와 동맹을 맺고 후금 내전에 개입했으나 청군에게 찰니가 패망하면서 본전도 못찾게 된다.
3.16. 아체 술탄국
- 알라우딘 술라이만 알리 이스칸다르 샤★
아체 술탄국의 제32대 술탄. 아체 해적들이 인도 불교 성지 순례를 가던 일본 귀족들을 습격해 몰살시킨 사건에 대해 자신은 모르는 일이라고 책임회피를 하다 일본군의 침공을 당해 연전연패한다. 결국 적국인 네덜란드 바타비아로 망명하여 네덜란드, 페르시아, 오스만 제국 등에 동맹을 요청하나 아무 도움도 받지 못하고[146] 굴욕적인 정전 협정을 맺는다.
3.17. 페르시아
- 모하마드 샤★
페르시아의 샤한샤.
- 나스레딘 샤★
1848년 즉위한 모하마드 샤의 후임 샤한샤.
3.18. 돌궐
- 압뒬메지트 1세★
돌궐의 파디샤. 아체 술탄이 일본을 막아달라고 지원을 호소하자 일본에 경고 서한을 보냈으나 씹혔고 이에 분노해 대한에[147] 일본을 막아달라는 요청을 했으나 대한 역시 아체를 눈엣가시로 여겼고 우호 관계도 아닌 돌궐을 위해 우호국인 일본을 막아줄 이유도 없었기에 마찬가지로 단칼에 거절당하는 굴욕을 겪는다.
이후 러시아의 위협에 맞서 어떻게든 자국을 열강의 자리로 끌어올리기 위해 근대화 개혁을 추진한다. 프랑스의 지원을 받아 군사력을 강화하는데 국경에 집결중인 러시아군의 움직임을 보고 영국과 프랑스의 지원을 믿고 먼저 선제공격을 했다가 러시아의 반격에 큰 피해를 본다.
- 메흐메드 루쉬디 파샤★
군무대신. 국경에 집결중인 러시아군이 남하하기 전에 이쪽에서 먼저 선제공격을 할 것을 주장한다.
- 무스타파 레시드 파샤★
대재상. 자국이 러시아에 군사적으로 열세임을 인정하고 형식상 러시아에 선전포고를 하되 영국과 프랑스의 지원이 올 때까지 방어태세만 갖추자고 주장한다.
3.19. 파수둔
- 도스트 모하마드 칸★
아프가니스탄의 아미르.
4. 대유주
4.1. 루스국
4.1.1. 역대 차르
- 알렉산드르 2세
★[148]
표트르 3세의 유일한 적자. 즉위 당시 나이가 어려 모후인 마리 앙투아네트가 섭정을 맡았으나 15세가 되자 모후의 무능함에 질려 쿠데타를 일으켜 별궁에 유폐시키고 친정을 한다. 무난한 통치를 했으나 1840년 12월 가족들과 뱃놀이 도중 사고로 물에 빠진 것이 원인이 되어 폐렴에 걸려 사망한다.
- 니콜라이 1세(니콜라이 알렉산드로비치 로마노프)
알렉산드르 2세와 알렉산드라 황후의 장남이자 러시아 황태자. 1818년생. 젊었을 때는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을 짝사랑했으나 부황의 반대로 단념하고 헤센의 마리 공녀와 결혼한다. 1840년 부황의 갑작스러운 붕어로 인해 즉위하여 콘스탄티노플 수복 및 인도 진출을 위한 남진정책을 추진한다. 최종 목표는 콘스탄티노플을 수복하고 그리스를 제외한 발칸반도 전역을 보호국화해 러시아의 지배하에 둔 뒤 성지 예루살렘을 관리할 권한을 획득하는 것. 이를 위해 빠르게 중앙아시아를 정복해 후방을 안정시킴은 물론 대한과의 동맹 강화를 위해 대륙횡단철도를 빠르게 부설하고 사랑하는 딸 아나스타샤까지 대한 황태자비로 보낸다.
대한으로부터 신무기를 대거 도입하고 태평전쟁에서 대한군의 전훈을 적극적으로 반영하는 등 대대적으로 전쟁 준비를 하면서 오스만과 전쟁을 벌일 기회를 엿보다 영국이 아프가니스탄 전쟁의 수렁에 빠지고 프랑스가 세계 여러 곳에 판을 벌려놓은 1852년, 때가 무르익었다고 판단하고 왈라키아와 몰다비아를 자국 영향권에 넣고 오스만을 다뉴브강까지 밀어내기 위해 오스만과의 제11차 러시아-튀르크 전쟁을 결정한다.
4.1.2. 황실
- 마리야 표도로브나★
원 역사 마리 앙투아네트, 언니 마리아 요제파가 천연두로 죽지 않고 원래 계획대로 시집을 가 본인은 러시아로 시집을 갔다.[149] 남편의 이른 사망으로 섭정을 맡게 되지만 원 역사처럼 정치에 무지한 건 동일해 나폴레옹이 유럽에서 깽판치는 걸 오랫동안 방치해버렸다. 결국 아들 알렉산드르 2세에 의해 강제 은퇴당하고, 이후로는 별궁에서 조용히 살다가 1833년 3월 78세의 나이로 자연사한다. 원 역사에서 혁명세력에 의해 악녀로 매도되어 단두대에 처형당한 걸 생각하면 수명이 40여년이나 길어진 뒤바뀐 역사의 수혜자.
- 샤를로테 폰 프로이센 → 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
원 역사에서 프로이센을 침공한 나폴레옹을 피해 러시아로 피난왔다가 니콜라이 1세의 황후가 된 것처럼 여기서도 나폴레옹을 피해 러시아로 피난왔다가 알렉산드르 2세의 황후가 되어 니콜라이 1세를 포함해 4남 3녀를 낳았다. 대한인이 실은 백인이라는 세간의 소문을 진지하게 믿고 있을 정도의 친한파로 아들 니콜라이 1세가 손녀 아나스타샤를 대한 황태자 창과 혼인시키는 국혼을 추진하자 여기에 적극 찬성한다. 때문에 며느리 마리야 알렉산드로브나와의 사이는 좋지 않다. - 미하일 알렉산드로비치 로마노프
알렉산드르 2세와 알렉산드라 황후의 차남. 1844년 겨울 대한에 사절로 와서 굴마훈의 근황을 전한다. 대한에서 지내는 동안 보르네오 공녀 마리아와 눈이 맞아 결혼하고 러시아로 돌아가는데, 이후 아나스타샤가 대한으로 시집갈 때, 그리고 태자 창과 아나스타샤가 정식으로 혼례를 올릴 때 사절단 대표로서 다시 대한을 방문한다. - 보르네오 공녀 마리아
보르네오 공작(볼내공) 디에고의 딸이자 미하일의 부인. 미하일이 대한에 머물때 서로 눈이 맞았다. - 콘스탄틴 알렉산드로비치 로마노프
알렉산드르 2세의 삼남. - 빌겔름 알렉산드로비치 로마노프
알렉산드르 2세의 막내. 1832년생. 큰형 니콜라이와 나이차가 많이 나기 때문에 니콜라이의 딸인 조카 아나스타샤 황녀와는 숙부와 조카보다는 거의 오빠와 여동생처럼 지냈다. 아나스타샤가 입궁할 때와 결혼식 때 사절단의 일원으로서 미하일 대공과 함께 대한을 방문한다. - 안나 알렉산드로브나 로마노바
알렉산드르 2세의 차녀. 해외로 혼인을 갔다. - 알렉산드라 알렉산드로브나 로마노바
알렉산드르 2세의 삼녀. 1844년 요절했다.
- 마리아 알렉산드로브나 로마노바
알렉산드르 2세와 첫 부인인 러시아 귀족 사이의 장녀.
- 헤센 공녀 마리 → 마리야 알렉산드로브나★[150]
니콜라이 1세의 황후. 대한과의 국혼으로 딸 아나스타샤를 대한에 보내려는 남편을 탐탁지 않아하지만 니콜라이의 설득에 마지못해 동의한다. 그런데 대한이 아나스타샤의 황태자비 교육을 위해 아나스타샤를 일찍 보내줄 것을 요구하자 예상보다 더 일찍 딸과 헤어져야 한다는 현실을 맞닥뜨려 니콜라이 앞에서 오열하면서 강력하게 반발하지만 자신이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면서 어머니를 달래기 위해 스스로 가겠다고 선언한 아나스타샤의 눈물에 어쩔 수 없이 동의한다.
- 콘스탄틴 알렉산드로비치 로마노프
알렉산드르 1세의 막내 아들로 유일하게 성인까지 살아남은 표트르 3세의 남자 형제이다. 하지만 주색에 빠져 살다 1821년경 적자손도 남기지 못하고 사망했다.
4.1.3. 기타
- 세르게이 볼콘스키 공작★
주 대한 러시아 공사.
- 안드레이 김노프 백작
볼콘스키 후임 러시아 공사. 3부에서 루시아 황후 연대로 러시아에 보내진 대한군 연대장 김홍선의 5대손으로, 김홍선이 김노프 백작위를 받아 러시아 귀족으로 살면서 혼혈이 되어 외모는 완벽한 백인이다.
- 알렉산드르 푸시킨
★
원역사처럼 외증조부는 흑인인 아브람 간니발이지만 친할머니의 조부가 3부에서 루시아를 따라간 대한인 연대 소대장이어서 한인의 피도 받고 있다. 그래서 한국어와 만주어에도 능통하고 대한인 연대를 소재로 한 '폴타바와 프루트 강에서', 루시아 황후를 주인공으로 한 '동쪽에서 온 차리나', 1차 후금 내전을 소재로 한 '프레스터 존의 제국', 3부 보리스의 삶을 다룬 '보리스 문코노프' 등 대한을 소재로 한 역사소설들을 썼다. 러시아 과학아카데미 동방학연구소 회원이기도 하다. 원역사처럼 자유주의 성향이라 니콜라이 1세 즉위 후 반쯤 추방되는 식으로 대한 주재 러시아 공사관 서기관이 되어 대한으로 오게 되어 아내 나탈리야 곤차로바는 러시아에 두고 오게 된다. 재석은 위대한 문호인 그의 시를 직접 들을 수 있게 된 것에 기뻐하며 자주 외교관 모임에 참석하게 된다. 약 4년간 대한에 주재한 후 러시아로 귀국한다.
- 나탈리아 푸시키나
★
알렉산드르 푸시킨의 아내. 엄청난 미녀인데다 작고 추남인 푸시킨보다 키도 한참 커서 둘이 같이 있으면 미녀와 야수를 넘어서 '미녀와 매미'처럼 보인다고 한다.
- 카를 폰 네셀로데 백작★
외무장관. 런던 만국박람회에서 자국산 공산품을 전시하지 못 해 국위 선양을 하지 못 한 것에 대해 아쉬워한다. 오스만과의 전쟁에 앞서 왈라키아와 몰다비아에 친러파를 육성하며, 러시아-튀르크 전쟁에서는 프로이센을 이용해 영국&프랑스 편에 선 오스트리아를 견제하자는 제안을 한다.
- 알렉산드르 막시모비치 크냐제비치★
재무장관. 런던 만국박람회에 전시할 물품을 고를 때 공산품으로는 영국제, 독일제, 한국제에 밀리고 러시아의 주력 수출품인 공업 원료는 국가 체면상 박람회에 전시할 수 없으니 러시아에서 자신있어 하는 분야인 수공예품을 선택한다.
- 알렉산드르 체르니쇼프★
전쟁장관. 나폴레옹 시대에 활약한 인물로 보수적인 인물이라 대한으로부터 신무기 도입에 부정적이다.
- 바실리 안드레예비치 돌고루고프 공작★
체르니쇼프 후임 전쟁장관. 전임 체르니쇼프와 달리 신무기와 전술 도입에 적극적으로 대한으로부터 철조망과 장갑차 등을 도입한다.
- 페르디난트 폰 브랑겔 남작
해군장관.
- 레프 톨스토이★
캅카스에서 포병으로 경험을 쌓고 신설 비행대로 옮긴 젊은 장교로 등장. 기동성을 일부 희생한 대신 방어력을 끌어올린 성능 개량에 만족하는 한편으로 앞으로도 더 크고 강력한 비행선들이 양산될 텐데 전후방 가리지 않고 전쟁이 얼마나 잔혹해질까 우려한다.
- 파벨 나히모프★
원 역사의 크림전쟁에서 활약했던 러시아 해군 제독. 오데사 해전에서 대한에서 수입한 최신식 기뢰를 도배한 기뢰밭으로 오스만 함대를 유인한다는 전략으로 흑해함대보다 규모가 큰 오스만 함대를 상대로 대승을 거둔다.
4.2. 서반아
- 호세 페르난도 2세
호세 페르난도 1세의 증손자인 페르난도 6세의 장남. 부왕 페르난도 6세가 나폴레옹에게 패배하여 온 가족이 함께 아비뇽으로 끌려가 유폐되고, 부왕이 35세의 젊은 나이에 유배지에서 죽는 모습을 13세의 어린 나이에 지켜보면서 나폴레옹은 말할 것도 없고 자유주의와 공화주의를 매우 증오하게 된다. 16세에 스페인 국왕으로 복위한 후 나폴레옹에게 복수하고 싶어하지만 스페인 본국도 쑥대밭이 된 데다 아메리카 식민지들이 모두 독립해버려 어쩔수 없이 나폴레옹의 신불랑국과 평화조약을 맺는다. 나라의 사정이 안 좋아져서인지 대한이 북마리아나 제도, 괌, 팔라우, 캐롤라인 제도를 50만 냥에 사들이겠다는 제안을 해오자 기쁨을 감추지 못하며 흔쾌히 수락했다. 그리고 호시탐탐 쿠바를 노리는 미국으로부터 쿠바를 지키기 위해 대한에 태평양 제도를 매각하면서 얻은 대금을 쿠바의 방위 강화에 투입한다. 1848년 사망한다. - 돈 펠리페
호세 페르난도 2세의 장남. 1829년 4세 나이에 요절한다.
- 카를로스 4세
호세 페르난도 2세의 차남.
- 세르히오 로페즈 가르시아(갈 장군)[151]
스페인 공화주의자로 나폴레옹 1세를 추종하다 신불랑까지 따라갔으나 거기서 샤를 루이 나폴레옹 지지자가 되어 샤를이 프랑스로 돌아갔다가 다시 대한으로, 다시 프랑스로 옮겨다닐 때에도 계속 수행하는 심복이다. 이후 샤를 루이가 프랑스 동인도 회사 책임자가 되어 안남에 주재하면서 태평천국에게 거금을 받고 공작기계와 용병 등을 공급해주는 연락책으로 다시 등장한다. 태편천국에서는 갈 장군으로 불린다.
- 산 안토니오
주한스페인공사.
4.3. 외수터국
- 프란츠 2세★
외수터국 황제. 사위인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를 싫어하지만 외손자인 라이히슈타트 공작은 무척 사랑한다. 하지만 그 방식이 잘못되었다. 손자가 신불랑국으로 못 떠나게 사실상 감금당한채 살다 결국 자살하자 큰 충격을 받고 절규한다. 충격이 컸던 탓인지 이듬해인 1835년 원 역사와 동일한 시기에 사망했는데, 아들의 죽음에 분노한 나폴레옹이 그를 규탄하고 저주하는 편지를 유럽 전 왕실에 뿌린 직후라 그 때문에 죽었다는 소문이 퍼졌다.
- 페르디난트 1세
★[A]
프란츠 2세의 장남. 가상 인물이지만 원 역사처럼 정신지체 환자로 프란츠 2세가 사망한 후 다음 황제로 즉위했으나 원 역사와 똑같이 1848년 혁명으로 물러난다.
- 프란츠 요제프 1세
★[A]
페르디난트 1세 다음 황제. 원 역사와 똑같이 러시아의 지원으로 가까스로 혁명을 진압했으나 제11차 러시아-튀르크 전쟁에서는 원 역사와 똑같이 영국-프랑스 편에 서며 러시아의 뒤통수를 친다.
- 클레멘스 폰 메테르니히 후작★
원역사처럼 능수능란한 재상으로, 노년이 되어서도 정신지체 환자인 페르디난트 1세 대신 제국을 실제로 다스리고 있다. 나폴레옹 사후 라이히슈타트 공작의 시신을 누벨프랑스로 보내 누벨프랑스와의 외교관계를 개선한다.
- 라이히슈타트 공작 나폴레옹 프랑수아
★[A]
신불랑국 황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유일한 적자. 신불랑국 황태자....이긴 한데 외할아버지 프란츠 2세가 신불랑국으로 못 떠나게 막고 있어서 명목상으로만 황태자일 뿐 신불랑국 황태자는 사실상 공석이다. 원 역사처럼 부자 간 사랑이 지극해서인지 쇤브룬 궁전 담을 넘어 탈출하려고 시도했던 적도 있다고 하며, 신불랑국에서도 구출하기 위해 스파이들을 보냈으나 전부 발각당했고, 나풀레옹 1세가 보내줄 것을 요청하는 편지도 너무 오만무례하게 쓰는 바람에 빡친 프란츠 2세가 더더욱 병을 핑계로 거부하거나 답장조차 하지 않았다. 결국 감금 생활에 지쳐서 정신에 문제가 생긴 것인지 자기 외숙모 조피 프리데리케와 근친상간을 하는 관계가 되었고[156] 이것이 들킨 후 권총으로 자살하고 만다. 향년 22세. 21세에 병으로 죽은 원역사보다 1년쯤 더 오래 살았지만 결국 요절하게 된다. 독자들도 차라리 자살로 위장하고 도망간 거였으면 좋겠다는 반응을 보일만큼 안타까워 했다. 공식적으로는 총기 손질 중 오발 사고사로 발표되었다. 게다가 죽은 후에도 프랑스 제2 제국을 세운 사촌형 샤를루이 나폴레옹이 원역사와 달리 그를 나폴레옹 2세로 추존하지 않고 자신이 나폴레옹 2세라고 선포하는 등 원역사보다 안타까운 신세가 되었다.
- 나이페르크 백작★
파르마 여공작의 정부. 사생아 3명을 두고 있다.
- 프리드리히 폰 툰 운트 호헨슈타인 백작★
독일 연방 의회 오스트리아 대사. 러시아-튀르크 전쟁에 독일 연방이 개입해야한다고 주장한다.
4.4. 포뢰선
-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
프로이센의 5대 국왕. 독일 연방의 소국들과 관세동맹을 체결하여 독일어권의 맹주가 되려고 한다. 하지만 국내 자유주의자들 탄압이 시급하지 대한과의 수교 그게 뭐가 급하냐며 필요성을 못느끼는 등 나이가 들어가면서 매우 고집스럽고 반동적인 정치를 했다.
-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
프로이센의 6대 국왕. 역사가 오랜 것들을 좋아해서 부왕과는 달리 대한과 친하게 지내려고 적극적으로 나선다. 언젠가 독일을 하나로 만들고 싶다는 꿈이 있다. 자기 대에서 안 된다면 후대에라도.
- 로툼 백작★
프로이센의 재상. 대한, 건주 양국, 일본과 상주 대사관을 설치하여 프로이센이 독일어권의 대표 국가임을 동양에 알리자고 한다.
- 알렉산더 폰 훔볼트★
나폴레옹이 신불랑으로 초빙하여 대한에서 건너온 유정 기술자들과 함께 텍사스 유전을 탐사해 1836년 드디어 유전 개발에 성공한다. 그 후 나폴레옹이 재석에게 고무나무 묘목을 보낼때 동행하여 대한에 왔으며, 대한에서 몇년간 머무르며 연구하고 싶다고 하자 재석이 서학당 초빙교수 직위를 주고 연구의 자유를 보장하여 대한에 머무른다. 함지선(咸智善)이라는 대한식 이름도 가지며, 1841년 1월에는 나우루의 인광석을 발견하고 재석에게 보고한다. 대한에서 국립 종합대학교인 한성대학당의 창설에도 도움을 주는 등 6년간 대한에서 활동한 후 74세가 되자 고향에서 눈을 감고 싶다고 재석에게 귀국을 신청한다. 재석은 귀국을 허락하고 그동안 대한에서 활동한 보답으로 사망 시까지 매년 은화 2천 탈러(한국 은화 9백냥)의 종신연금을 내리기로 한다.
- 하인리히 폰 뷜로 남작★
초대 주한 프로이센 공사.
- 헬무트 폰 몰트케★
뷜로 공사를 따라 공사관 무관 겸 군사고문 자격으로 대한에 온다. 아직 젊지만 식견이 높아 재석은 역시 그 대 몰트케라고 속으로 감탄한다. 강무관에서 자신의 프로이센 군사사상을 따르는 제자들도 만들고, 태평천국의 난이 터지자 미주원호군 참모장으로 참전하여 공을 세운 후 프로이센군 포츠담 의용연대장에 임명되고, 재석에게서도 대한군 명예 종3품 참장과 자응장 2등 훈장을 받는다. 대한의 복무기간 1년이 너무 짧다며 3년으로 늘릴 것을 건의했고 그게 2년으로 일부 받아들여졌기 때문에 후대에 크게 욕을 먹을 듯하다. 태평천국 토벌전이 끝난 후 귀국한다. - 마리 폰 부르트★
몰트케의 약혼녀로 요한나와 함께 대한에 와서 재석의 축복 하에 정식 결혼식을 올린다.
- 오토 폰 비스마르크★
뷜로 남작의 후임인 2대 주한 프로이센 공사로서 대한을 방문한다. 그 비스마르크란 걸 알고 있는 재석을 제외하고 1843년 시점에서 작위도 없고 아직 서른도 안된 젊은이[157]를 공사로 파견한 걸 두고 대한 조정에서 프로이센이 자신들을 우습게 아는 거 아니냐며 논란이 일었지만, 젊은 나이에도 한국어를 비롯한 여러 외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하고 대한 기준에서 봐도 매우 유능하고 예의바른 모습에 금방 조정 신료들에게 호감을 산다. 태평천국 토벌전이 끝난 후 귀국하고, 프랑스 공사와 독일 연방 의회 프로이센 측 대표단장, 외무장관을 역임하는 등 출세가도를 달린다. 프로이센 내 러시아 및 대한 전문가로서 러시아-튀르크 전쟁에서는 오스트리아와 반대로 독일 연방이 개입하면 안 된다고 주장하며 대륙횡단철도가 완공이 되면 대한까지 직통열차 운행을 위해 베를린에서 바르샤바까지 듀얼게이지 부설을 구상하는 등 친러시아, 친한 정책을 펼친다. - 요한나 폰 푸트카머★
비스마르크의 약혼녀. 매우 당찬 아가씨로 몰트케 부부와 합동결혼식을 올린다.
- 알브레히트 폰 베른스토프
주한 프로이센 공사.
- 에트빈 폰 만토이펠★
브란덴부르크 의용연대장으로 계급은 소령이다.
- 카를 폰 클라우제비츠★
군사사상가이자 전쟁론의 저자. 직접 등장은 없지만 원 역사에서 1831년에 죽은 것과 달리 1852년 기준 정정하게 살아있다고 언급된다.[158]
4.5. 도이치
- 바이에른 국왕 막시밀리안 1세 요제프★
바이에른의 초대 국왕. 외젠의 장인이다. - 아우구스테★
외젠의 부인, 벨기에의 태후.
- 호헨촐레른-헤힝겐 공작 콘스탄틴★
- 호헨촐레른-헤힝겐 공비 외제니★
외젠의 차녀.
- 뷔르템베르크 국왕 빌헬름 1세★
- 뷔르템베르크 백작 빌헬름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의 사촌. - 뷔르템베르크 백작부인 테오돌린★
외젠의 4녀.
- 루드비히 판 베토벤★
재석의 각성 당시 살아있었음이 바이올린 컬렉션을 보던 부황에 의해 언급된다.
- 카를 마르크스★
첫 등장 당시 프랑스에서 망명 생활 중이었으며, 대한을 비롯한 동방의 유교 체제가 일부 중세적인 면은 있어도 유럽의 기독교 체제에 비해 선진적이라며 유교를 동방사회주의라고 규정한다. 이후 원 역사와 동일하게 런던으로 이동, 런던 주재 대한 공사관을 통해 임금에게 자기 연구를 후원해달라고 졸라 재석이 뿜게 만든다.
-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유럽만이 축이 아니며 아메리카와 아시아가 세축의 하나가 될것이라 예견했다.
4.6. 불랑국
4.6.1. 부르봉 왕가
- 루이 18세
★
4부 초기 시점의 프랑스 국왕, 샤를 10세와 마리아 카롤리나 왕비의 아들이며, 부모가 혁명군에게 잡혔을 때 나폴레옹이 자비를 베풀어 영국 망명을 허락했다.[159] 나폴레옹이 패배하여 프랑스를 떠난 후 프랑스로 돌아와 국왕으로 즉위한다. 부모의 원수를 갚는다고 가혹한 반동 통치를 하는 동시에 술트에게 5만 병력을 맡겨 루이지애나로 탈출한 나폴레옹을 토벌하란 명령을 내리지만, 정작 술트가 병력을 이끌고 그대로 나폴레옹에게 투항해버려 기껏 모은 군대만 갖다바친 꼴이 되었다. 그 후에는 나폴레옹을 신대륙에 가둬둔 셈이니 이걸로 되었다고 정신승리를 했다고 한다.[160] 부친을 죽게 만든 나폴레옹에 대한 원한이 커서 퇴위 후 주기로 한 연금도 안 주었는데, 대한에선 아무리 선친의 원수라지만 자신을 구해준 이에게 왕으로서 한 약속을 안 지켰다고 좋지 않게 보는 듯.
- 루이 19세
★
루이 18세의 아들. 런던 망명 중 태어났고, 나폴레옹을 본 적이 없다보니 그의 무서움을 모르고 원정군을 파견한다는 어리석은 결정을 내렸다. 나폴레옹은 이 정보를 입수하고 상륙 거점을 제압하기 위해서 멕시코 침공을 서둘렀고, 상륙한 1만 병력은 아버지 대와 같이 나폴레옹에게 바로 투항하는 운명을 걷는다. 북태평양의 지배자인 대한에게도 미국, 영국, 신불랑은 상주 대사를 파견하여 우의를 다지려 하는데 루이 19세는 대한 영종이 먼저 친하게 지내자고 국서를 보내도 무시하고 상주 대사도 오래동안 보내지 않다가 광덕제 즉위 후에야 보낸 대사도 광덕제 면전에서 영국, 신불랑 대사를 모욕하는 언사를 하는 등 외교적으로도 무능한 태도를 보인다. 프랑스 본국에 남아있는 보나파르트파의 봉기를 경계해 모든 군대를 본국에 남겨놓느라 원 역사와 같은 알제리 원정을 하지 않았지만, 대신 이 때문에 1830년 7월 봉기와 1832년 6월 봉기를 진압하는 등 원역사와 다른 경로를 밟게 된다. 그래도 나이가 들어 경험이 쌓였는지 외교를 더 신경쓰고 대한 태황들을 본받아 워커홀릭이 되어 권위를 세우려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리고 수에즈 운하 계획과 원역사보다 늦었지만 알제리 원정을 계획하고 있다. 원정 전문 부대로 프랑스 외인부대 창설은 덤. 또한 앞으로 혁명이 일어나지 않으려면 대한처럼 전 국민이 왕에 대한 충성심을 어릴때부터 주입받아야 한다면서 전국민 의무교육 제도도 창설한다. 하지만 수에즈 운하 건설과 알제리 전쟁, 이집트 독립전쟁 개입으로 재정이 파탄나는데도 전제정치와 호화생활을 유지하다가 결국 민심이 폭발해 1842년 2월 일어난 혁명으로 폐위되고 조부에 이어서 부르봉 왕조를 또 망하게 만들고 만다. 그나마 영국으로 망명해 조부처럼 목이 잘리는 건 면했다. 그가 망명하면서 프랑스에는 프랑스 제2공화국이 수립된다.
- 앙굴렘 공작 샤를 필리프
루이 19세의 숙부. 루이 19세의 절대적인 신임을 등에 업고 수에즈 운하회사 총재 직을 맡아 분식회계, 횡령, 방만한 경영 등 온갖 전횡을 저지른다. - 루이 앙트완
앙굴렘 공작의 아들.
4.6.2. 공화국 정부
- 오를레앙 공작 → 프랑스 대총통 루이 필리프 3세★
원역사처럼 아버지 루이필리프 2세가 프랑스 대혁명을 이용하여 왕이 되려다 혁명정부에게 죽은 후 망명했다가 왕정 복고 후 돌아와 팔레 루아얄을 되찾는다. 앞으로 혁명이 또 일어날 경우 프랑스 왕위를 노리고 샤를루이 보나파르트를 프랑스로 불러들여 후원한다. 결국 1842년 2월 혁명의 결과 세워진 프랑스 제2공화국 초대 대총통 자리에 오른다. 하지만 국민들의 군주제 자체에 대한 반감이 너무 커서 왕정복고를 한다는 계획은 사실상 실패했고 스페인과의 동맹으로 지지도마저 떨어지자 불출마하고 샤를 루이를 후계자로 삼는다. 1850년 사망한다. - 오를레앙 공작 페르디낭 필리프
★[A]
루이 필리프의 장남. 프랑스군 소장. 알제리 전쟁에서 복무 중이다. 아버지 루이 필리프는 차차기 대권을 페르디낭에게 준다는 약속을 샤를 루이에게 받았지만 그가 제정을 부활시키며 공수표로 전락해버린다.
4.6.3. 프랑스 제2제국
- 샤를 루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 나폴레옹 2세★
아칸소 대공 루이 보나파르트의 아들. 사촌 라이히슈타트 공작의 사망 소식을 듣고 황태자 자리를 노리며 신불랑으로 건너갔으나, 외교술과 정치술은 뛰어나지만 군주로서 갖춰야 할 결단력이나 군사적 능력이 전혀 없다는 결점을 꿰뚫어본 백부 나폴레옹 1세에게 냉대만 받다가 결국 포기하고 프랑스로 귀국한다.
돌아와서는 큰아버지에게 작위를 받았다며 '메스칼레로 백작'을 자칭하면서 오를레앙 공작 루이 필리프 3세에게 후원을 받지만 다시 혁명이 일어나면 오를레앙 공작의 뒤통수도 치고 프랑스의 제위를 차지할 야망을 꿈꾸고 있다. 오를레앙 공작에게 아이티 원정을 권유하여 성과를 내자 오를레앙 공작에게 대한의 흥선제를 끌어들이자고 주장하여 본인이 직접 대한으로 온다. 오를레앙 공작이 준 선물을 본인이 준비했다고 거짓말을 하고 자신은 아직도 나폴레옹 1세에게 충성한다고 하며 재석을 속이려 하지만 100년 이상 살면서 웬만한 사람은 다 꿰뚫어 볼 수 있는 재석에게 다 간파당한다. 대한의 공주는 천주교도라 해도 동양인이므로 자신의 황후감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등 인종주의적인 면모도 보인다. 재석은 춘삼이가 생각나서 그를 속으로 '나삼이'라고 부르며, 나삼이가 신불랑 황제가 되면 신불랑이 미합중국에게 망할 것이 뻔하나 원역사대로 프랑스 황제가 된다면 대한이 마음대로 컨트롤할 수 있다고 판단하여 장기말로 쓰려고 하루 숙박비가 은화 100냥이나 되는 대명관 스위트룸에 공짜로 지내게 해주는 등 혜택을 준다. 1840년 재석이 나폴레옹과 정상회담을 위해 미주에 갈때 동행을 권했으나 큰아버지를 만나면 백작위 사칭 등이 들통날까봐 동행을 거절하고 재석이 돌아올 날이 다가오자 황태후 박씨를 독대하여 특유의 화술로 박씨를 구워삶아 은화 2만 냥이라는 거금을 받고 바로 프랑스로 도망간다. 1842년 2월 혁명 때 이 자금을 바탕으로 혁명군을 지휘하여 성과를 내면서 34살 나이에 프랑스 정계의 거물로 떠오른다.
그러자 대총통 루이 필리프의 견제를 받게 되어 안남에 있는 프랑스 동인도회사 CEO가 되어 안남으로 오는데, 안남에서도 영국이 후송과 협정을 맺으며 포기한 아편 공급망을 프랑스가 차지하게 하고 덤으로 서나라를 바지사장으로 내세워 군수공장 시설과 무기를 태평천국에 팔아 큰 돈을 버는 등 사업 수완은 좋은 편이다. 그의 목표는 먼저 차기 대선에서 승리해 프랑스를 장악한 다음 이를 기반으로 누벨프랑스 황제자리에 오르고 안남과 아프리카 식민지까지 손에 넣어 유럽, 아메리카, 아시아, 아프리카까지 전부 아우르는 대제국의 황제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아편장수를 하고있다는 소문이 신불랑까지 퍼지며 후계자 후보는커녕 나폴레옹의 이름에 먹칠을 하는 망나니 소리를 듣고 있기에 그 거창한 꿈을 이룰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 본인도 누벨 프랑스에서 차기 황제로 지명될 기약이 없는 걸 느끼고는 스페인과 손잡아 쿠바로 미합중국으로부터의 방어를 지원한다는 명목으로 프랑스군을 보내고, 거기서 누벨 프랑스를 기습해 황제로 즉위한다는 계획을 세운다.
이 계획을 드러낼 순 없으니 표면적인 부분만 알려져 왜 우리가 스페인을 위해 쿠바에 파병하느냐는 반감으로 루이 필리프의 지지율이 급락하자 루이 필리프에게 지금 재출마를 하면 반드시 낙선하며, 아들 페르디낭을 출마시킬 경우 루이 필리프의 실책에 대한 책임까지 페르디낭이 뒤집어쓰게 될테니 대신 이번에는 자신이 출마하여 임기를 딱 한 번만 지내고 페르디낭에게 정권을 넘겨주겠다는 약속으로 대선 후보가 된다. 물론 이는 거짓말이며 그 사이에 신불랑을 정복하고 자신이 황제로 취임할 계획이다. 대선에서 당선되어 2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후, 황제의 자리를 노리고 공화국 수비대를 동원해 1849년 12월 2일 아우스터리츠 전투 44주년 기념일을 디데이로 삼아 친위쿠데타를 일으킨다. 자신을 지지하는 노동자와 농민에게 우호적인 정책을 입안하고, 외교에도 관심을 쏟는다. 누벨 프랑스에도 노골적으로 나가지는 않고 일단 본래 같은 나라였으니 다시 합치자는 호소문부터 보냈으나 무시당하자 '스페인과 미국의 전쟁을 막기 위해 보내는 평화유지군' 명목으로 쿠바에 병력을 증파한다.
1851년 3월 국민투표를 통해 프랑스인의 황제 나폴레옹 2세로 즉위한다.[162] 오스만을 자국 영향권에 넣기 위해 무기와 군사고문을 지원하며 그 대신 오스만의 기독교 성지 관리권을 획득한다.
2부 노부나가, 3부 조형서의 뒤를 잇는 외부의 적 포지션이나, 끝내 재석에게 가로막히기는 했으나 자신의 인생을 갈아넣어 나라를 중흥시키기 위해 노력하면서 재석뿐만 아니라 독자들에게도 인정받은 조형서와는 달리 이쪽은 사기, 분탕, 마약 밀수나 일삼는 전형적인 삼류 악당이다.[163] 하지만 사람을 홀리는 능력만큼은 '인간 아편'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매우 뛰어나 재석은 영국을 방문하는 동생 순친왕에게 절대 나폴레옹 2세를 만나서는 안된다고 신신당부 할 정도.
대한의 안남 정벌이 진행되던 1852년 시점에 교황령을 수호한다는 명분으로 4만, 수에즈 운하를 지키기 위해 이집트에 2만, 알제리에 20만에 누벨 프랑스 침공을 노리고 쿠바에 3만을 배치한 상태로 러시아의 콘스탄티노플 탈환 시도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이미 4면 전선에 30만을 파병해 놓은 상태에다 러시아에 대비할 병력도 필요했던지라 이미 파견한 소수의 고문관을 제외하곤 안남에 어떠한 도움도 주지 못했다. 쿠바에 파병한 군대도 이들을 끌어들이려던 노예제 폐지 반대파의 쿠데타가 모의 단계에서 들통나 기회는 잡지도 못하고 누벨 프랑스의 경계만 받게 생겼다.
제11차 러투전쟁에서 오스만이 일방적으로 밀리자 당장 부족한 병력을 어디서 끌어올지 고심하다 쿠바에 있는 3만 중 2만을 발칸 전선으로 빼낸다. 쿠바에 눈독 들이던 미국에겐 호재였고, 미서전쟁 소식을 듣고 기겁한다.
4.6.4. 기타
- 샤를모리스 드 탈레랑페리고르★
불랑국 외무장관. 원 역사처럼 신기에 가까운 편 바꿔타기 능력으로 루이 19세 치세까지 외무장관을 지내며, 루이 19세의 전국민 의무교육 제도 실시도 책임을 맡아 실행한다.
- 아르망 폴린
불랑국에서 보낸 대한 상주 대사. 본래 군인 출신이라 그런지 외교적 감각이 없어 광덕제가 벌인 잔치 자리에서 영국, 신불랑 대사를 모욕하고 미국 대사인 데이비 크로켓에게는 친한 척을 하다가 크로켓에게 일침을 당한다. 그 후 광덕제와 재석이 수에즈 운하에 대한도 투자하겠다고 제안한 것을 루이 19세에게 전달했다가 오히려 국가기밀 누설 오해를 받고 해임당한다.
- 루아젤 남작
폴린의 후임 불랑국 공사.
- 오베르 자작
루아젤 남작 후임 불랑국 공사. 한국을 떠난 후 초대 안남 공사로 부임했다. 안남 공사로 있으면서 나폴레옹 2세로부터 안남에서 대한의 영향력을 일소하고 프랑스의 영향력을 확대하라는 지령을 받았다. 대한에 대해 잘 아는 본인은 이 허무맹랑한 계획에 찬동하지 않았지만 황제의 명령이라 어쩔 수 없이 따랐는데 여기에 홀라당 넘어간 완복시가 멋대로 대한을 자극하고 도발하면서 대한의 침공을 불러일으키고만다.
후에가 함락되고 북쪽으로 도망치는 완복시의 행렬에 어쩔 수 없이 동행하게 되었는데, 제3자가 봐도 망상에 가까운 희망사항만 늘어놓는 완복시에게 질려 본국과 연락을 취하고 지시를 받는 다는 핑계로 행렬에서 빠져나와 대한군에게 포로로 잡힌다. 신헌과 대면해 자신을 다낭으로 보내줄 것을 요청하지만 이미 대한군에게 의심을 산 상황이라 거부당한다.
- 장-바티스트-루이 그로 남작
오베르 자작 후임 불랑국 공사. 1849년 부임. 외교관 경력이 30년 가까이 된 베테랑이다.
- 페르디낭 마리 레셉스★
원역사처럼 수에즈 운하 건설을 주장하여 마침 업적에 목말라 있던 루이 19세의 눈에 든다. 하지만 루이 19세가 수에즈 운하 회사를 왕립으로 사유화하고, 총책임자 앙굴렘 공작도 방만한 경영과 횡령을 일삼아 뒷수습 하느라 죽을 지경이 된다. 2월 혁명으로 프랑스 제2공화국이 수립되어 앙굴렘 공작이 망명하자 대총통이 된 루이 필리프가 수에즈 운하 회사 사장으로 승진시키고 전권을 부여하지만 이번에는 메흐메드 알리의 꼬장으로 여전히 고생하고 있다.
- 알렉상드르 뒤마★
3부 중종의 빈 공방전 참전을 소재로 한 '빈 공방전에서의 기사왕'이라는 소설을 썼는데, 루이 14세의 역할을 실제보다 과장하여 서술하여 재석이 쓴웃음을 짓는다. 그외에도 원역사처럼 삼총사 시리즈와 몽테크리스토 백작을 썼는데 초판본은 재석이 바로 구매했다.
- 조르주 샤를 당테스★[164]
육군 대위, 원역사와 달리 부르봉 왕조가 프랑스를 다시 지배하게 되어 프랑스를 떠나지 않아 주한 프랑스 공사관 주재무관으로 대한에 온다. 원역사처럼 푸시킨을 모욕하지만 그자리에 있던 재석이 중재하여 사과한다. 철저한 부르봉 왕당파여서 루이 19세가 폐위되자 공화정부를 거부하고 대한군 복무를 신청하여, 재석이 푸시킨과 떼어놓을 겸 태평천국 토벌군에 끼워서 보내려고 한다.
- 모데
프랑스군 소장, 공화국수비대 사령관.
- 루이 파스퇴르(파수퇴)★
한성대학당에서 공부 중인 유학생으로 첫 등장. 파리 대학을 졸업하고 조교수로 임용되었으나 세계 최고 수준의 생물학과 의학을 자랑하는 대한에서 연구를 하고 싶다는 생각에 대한에 유학을 온다. 대한 의학계가 종두 이외의 백신 개발을 사실상 포기한 상태라서 재석은 광견병 백신을 개발한 파스퇴르가 대한에 눌러앉아 백신들을 개발해주기를 바라고 있다.
- 오스만 남작 조르주외젠 오스만★
파리시장. 원 역사처럼 루이 나폴레옹의 명에 따라 대대적으로 파리를 개조하고 있다는 언급이 나온다.
- 드 루이
외무장관.
- 막시밀리앵 뒤발
프랑스 동인도회사 안남 지사 지배인. 안남 정벌 때 하이퐁으로 쳐들어온 광동군에게 패해 포로로 잡힌 후 억류당한다. 안남을 도와 후송에 대항했다는 꼬투리를 잡히는 바람에 자신에게 협력하여 월남국을 지원하라는 조심원의 협박에 어쩔 수 없이 꼬리를 내린다.
4.7. 잉글국
4.7.1. 역대 국왕
- 조지 4세★
4부 초반 시점의 영국 국왕.
- 윌리엄 4세★
조지 4세의 동생.
- 빅토리아 여왕★
원 역사처럼 적자가 없는 숙부 윌리엄 4세의 추정상속인으로 제왕교육을 받았다. 어머니 켄트 공작부인이 대한 황실보다 더 공부해야 할 것 아니냐며 공부를 강요해서 너무 시달린 나머지 보위에 오르면 어머니를 궁에서 추방하겠다는 생각을 품고 있고 대한에 반감까지 갖게 된다. 보위에 오른 후 어머니와 의절하고 억눌린 스트레스를 푸느라 식탐도 많아졌다. 대한을 개인적으로는 증오하면서도 군주로서 대한의 통치 방식에 배울 점이 많다고 생각하고 있다. 어릴 때부터 주입식으로 받은 교육의 결과 대한식 군주로서의 생활 태도가 완전히 몸에 배어 임신 중에도 업무를 줄이지 않는다. 러시아가 대한과 국혼을 추진하려 한다는 소식을 듣고 우려하면서도 실현 가능성이 낮지만 영국도 필요하면 대한과 국혼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는 것을 보면 어릴 때의 감정 때문에 외교를 그르치지 않고 국제 정세를 살피는 식견도 가지고 있다.[165] 여자들은 기본적으로 남자 뒤에서 정숙하게 있어야 한다는 전통적 사고관의 소유자라 자기주장이 강하거나 여성의 사회진출을 주장하는 소위 '설치는' 여자들을 싫어한다. 자기 자신은 국왕이니까 예외.[166]
4.7.2. 왕실
- 켄트 공작부인 빅토리아★
빅토리아 여왕의 모친. 원역사에서도 지나치게 엄격한 양육 방식으로 딸과 사이가 나빴었는데 여기서는 대한 중종을 롤모델로 원역사보다 더 딸을 들볶는 바람에 의절당한다.
- 앨버트 공★
빅토리아 여왕의 남편. 명색이 대영제국 여왕의 부군임에도 소국 출신의 공자라는 신분 탓에 영국에서의 푸대접으로 고생한다. 형식적으로 받은 육군 원수 계급에 먹칠하지 않기 위해 나름대로 군사학 공부를 하고 있으며 비행선, 회선연자포, 귀차 등 한국산 신무기들을 도입하려 하지만 웰링턴 공작의 반대로 무산된다. 하지만 태평천국 전쟁에서 대한이 거둔 전과가 영국 언론을 통해 알려지면서 도입 여론이 커져 대한에서 비행선과 귀차 각 2대씩 완제품 수입 및 면허생산권을 얻는데 성공한다. - 빅토리아★
빅토리아 여왕의 장녀.
- 1대 케임브리지 공작 아돌푸스★
빅토리아 여왕의 작은 아버지. 1850년 향년 75세로 사망한다. - 2대 케임브리지 공작 조지★
1대 케임브리지 공작 아돌푸스의 외아들이자 빅토리아 여왕의 사촌. 1817년생. 여배우와 비밀결혼을 했다가 빅토리아 여왕에게 걸려 3부 재석처럼 반쯤 처벌 형식으로 대한, 청, 후송, 일본을 순방하는 사절이 되어 동방을 방문한다. 그런데 명색이 결혼까지 해놓고 적당히 데리고 놀다 버릴 생각이었는지 한국에서 새 신붓감을 찾으러 다닌다. 북경에서 정현공주를 보고 호감을 품었다면서 이미 혼인한 처지니 그 여동생 정단옹주를 달라고 하는 통에 재석이 깜짝 놀란다. 중전 권씨와 생모 최씨가 모두 달갑지 않게 여겨 성사되지 않을 것 같자 이번엔 재석에게 조카인 조자현을 달라고 조른다. 재석은 이미 사생아가 셋 딸린 돌싱인 그가 탐탁지 않았으나 당사자인 조자현이 유럽 왕실로 시집가고 싶다고 동의하고 이렇게 된 김에 영국 왕실과 연을 맺을 기회가 생긴 것도 좋은 일이니 결혼을 허락한다. 허락받지 않고 결혼했어도 차마 쫓아낼 수 없는 상대를 아내로 데려옴으로써 사촌인 여왕을 골탕먹이고 싶은 마음이 있었긴 하지만, 한국어도 배우고 '서양식 결혼식은 런던에서 다시 올리면 된다'며 결혼식도 한국식으로 치르는 등 어린 새신부에게 정성을 보인다. 이후 영국에서 열리는 만국박람회의 대한 대표단장 자격으로 영국을 방문하는 순친왕 일가와 함께 영국으로 돌아간다. - 케임브리지 공작부인 조자현
화원장공주와 조선창의 막내딸. 1831년생. 어머니가 프랑스어와 영어를 잊지 않으려고 들여둔 서양 책들을 보며 외국어를 익히고 서양에 대한 호기심을 품고 있었는데, 조지가 구애하자 유럽의 황실 일원이 될 수 있고 계승권을 가진 자식을 낳을 수 있다는 것에 야망을 품고 흔쾌히 받아들여 결혼한다. 14살 연상에 난봉기가 있는 것도 알지만 대한에서도 첩을 두거나 밖으로 나도는 남자들은 흔하니 신경쓰지 않는다. 이런 속내를 털어놓는 것을 보아 외삼촌인 재석과 꽤 가깝게 지냈던 듯.
4.7.3. 역대 총리
- 웰링턴 공작 아서 웰즐리★
웰즐리 후작의 동생이자 나폴레옹 전쟁 당시 대활약한 명장. 앨버트 공이 한국산 신무기들을 수입하자고 제안하자 귀차는 사용할 수 있는 환경에 너무 제약이 많아 기병보다 못하며, 비행선은 전과가 과장된 것이 분명하고, 회선연자포는 총알 낭비가 심하니 소총보다 못하다고 전부 저평가하며 도입을 반대한다. 하지만 이 무기들이 태평천국과의 전쟁에서 모두 대활약을 했다는 소식이 보도되며 크게 망신당한다. 하지만 이런 보고를 받아보고도 그래봤자 우연히 활약한 쓸모없는 장난감들이며 그 돈으로 차라리 보병 연대를 더 창설하는 게 좋다고 우기다가 육군 총사령관직에서 경질당하고 명예직인 남동부 해안 방위사령관으로 부임된다.
- 그레이 백작 찰스 그레이★
영국 총리대신. 1833년 노예해방령을 발표한데 이어 대한처럼 아동 노동 규제법도 추진할 생각이다.
- 멜번 자작 윌리엄 램★
그레이 백작 후임 총리대신, 원역사처럼 빅토리아 여왕의 정치적 스승으로서 여왕의 신임을 받는다.
- 로버트 필★
멜번 자작 후임 총리대신. 러시아가 대한과의 국혼을 추진한다는 소식이 나오자 빅토리아 여왕 앞에서 대한과 러시아의 국혼은 절대 불가능하다고 단언하고 아무런 대응도 안 하고 있다가[167]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가 되는 바람에 분노한 여왕한테 크게 혼쭐이 나고 의회에서도 책임론이 일어 사임한다.
- 존 러셀★
로버트 필의 후임 총리대신. 휘그당 출신의 자유지상주의자로 아일랜드 대기근에도 개입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지원 규모를 줄여 대참사를 일으키고 러시아의 남진을 방지한다는 명목으로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해 영국을 전쟁의 수렁에 빠트린다. 애버딘 백작 내각에서 외무장관으로 임명되어 내각에 재입성하는데, 오스만과 전쟁 중인 러시아군의 주요 보급선인 오데사-콘스탄차 간 항로를 차단하기 위해 러시아 흑해함대의 모항 세바스토폴이 있는 크림반도를 직접 공격할 것을 주장한다.
- 더비 백작 에드워드 스미스-스탠리★
존 러셀의 후임 총리대신. 보수당 소수파 출신으로 전쟁을 반대해 영국의 직접적인 개입을 최대한 배제하는 성향이다. 전임 내각인 존 러셀 내각이 벌려놓은 아프가니스탄과의 전쟁을 휴전으로 마무리짓는다. 그런데 전쟁을 끝내자마자 이번에는 아프가니스탄보다 훨씬 중요하고 유사시 영국이 지원 약속도 한 오스만과 러시아 사이에 전쟁이 터지면서 또 뒷목을 잡는다.[168] 오스만과의 약속에 따라 오스만에게 물자 지원은 하지만 러시아와의 싸움을 부담스럽게 여겨 파병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다가 적극적인 개입을 요구하는 야당과 여론의 비난으로 실각한다.
- 애버딘 백작 조지 해밀턴고든★
더비 백작의 후임 총리대신. 로버트 필 내각의 외무장관 출신으로 러시아보다는 프랑스를 더 경계하지만 강경한 반러 태세를 취하는 내각 구성원들 때문에 러시아에게 전쟁을 선포한다.
4.7.4. 정치인&정부 각료
- 웰즐리 후작 리처드 웰즐리★
초대 주한 영국 대사로 워털루 전투에서 나폴레옹을 이긴 웰링턴 공작의 친형. 부임 후 광덕제(당시 태자)와의 첫 회견이 대사관에서 가깝고 유럽식 궁전인 경희궁이 아닌 멀리 있고 좌식 문화라 익숙지 않은 경복궁에서 해야 하는 것에 불평하며 태자가 영국의 조지 4세와 같은 사람이란 이야기를 듣고 별 기대도 안 했지만 입식 문화와 티타임에 익숙한 영국인들 취향에 맞는 의자와 테이블과 홍차를 준비해놓고, 통역이 필요없을 정도로 영어에 유창하며, 셰익스피어와 워털루 전투 등 영국 문화와 역사에도 해박한 태자의 모습에 감탄하게 된다. 대한 황실이 셰익스피어의 친필 원고 전질을 소장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태자가 '그걸 읽으려고 영어를 공부했는데 2백년 전 옛 영어로 쓰여져서 읽어도 이해할 수가 없다'며 아쉬움을 표하자 최신본을 선물하겠다고 제안하면서 내심 새 책을 받았으니 헌 책을 주지 않겠냐는 파렴치한 기대를 품어서 독자들을 감탄하게 했다. 5년간 대한에 머무르면서 겨울 추위에 대한 불평을 본국에 계속했는데, 이 편지를 받은 내각에서는 한양의 위도가 나폴리보다 낮은데 말도 안되는 핑계를 댄다며 믿어주지 않았다 한다.[169] 귀국한 후 한국에 관한 책을 썼고, 오랜기간 인도, 한국 등에 근무한 경험을 바탕으로 앨버트 공에게 아시아에 대한 지식을 알려주다 82세의 나이에 눈을 감았다.
- 애머스트 백작 윌리엄 피트 애머스트★
2대 주한 영국 대사. 원평제 때 나폴레옹 전쟁 전후처리를 위해 대한에 이미 특사로 온 적이 있어 광덕제와 구면이다.
- 토머스 채프먼
3대 주한 영국 대사. 해군 출신이다. 대한과 러시아의 국혼이 이뤄지지 않을 것이라고 예측이 빗나가면서 입지가 위태로워졌다. 그러나 총리가 잘린 것과는 반대로 정상적으로 임기를 마치고 본국으로 돌아간다.
- 헨리 포틴저★
태평전쟁 영국군 사령관 출신 4대 주한 영국 대사.
- 고드리치 자작 프레데릭 존 로빈슨
전쟁 및 식민지 국무장관.
- 파머스턴 자작 헨리 존 템플★
전 외무장관. 아시아 최강국인 대한과의 우호관계 유지가 필요함을 잘 알고 있는 인물이다. 애버딘 백작 내각에서 내무장관에 임명된다.
- 헨리 골번
재무장관.
- 찰스 엘리엇★
3대 주송공사. 영국산 무기와 기계를 수입할테니 아편 밀수를 멈춰달라는 임칙서의 제안을 듣고 거기에 영국 상선들의 후송 수도 남경 입항과 광서 지역 개항장 설치를 받아주면 영국 용병들이 광서를 방어하겠다는 추가제안까지 하여 받아들여진다.
- 윌리엄 이워트 글래드스턴★
실제 역사에서는 아편전쟁에 반대하는 연설을 했지만, 여기선 임칙서-엘리엇 합의로 태평천국 토벌을 위해 파병하게 되어 영국이 도덕적으로 정당하다보니 의회에서 이 전쟁은 아편 판매 중단 및 사교도 토벌이라는 정의로운 전쟁이라며 참전 지지 연설을 한다. 이후 전쟁 및 식민지 국무장관에 취임한다.
- 조지 머레이★
병기부 총사령관.
- 앵글시 후작 헨리 퍼짓★
조지 머레이 후임 병기부 총사령관.
- 1대 하딘지 자작 헨리 하딘지★
전직 인도 총독이자 아서 웰즐리 후임 육군 총사령관. 군무에 관심이 없는 전쟁 및 식민지 국무장관 존 파킹턴 대신 군무를 담당한다.
- 3대 맘스베리 백작 제임스 해리스★
더비 백작 내각의 외무장관. 젊었을 때 그랜드 투어 중 대한을 방문한 경험이 있다. 영국처럼 대륙의 혼란에서 한발짝 떨어져서 조정자 역할로 현실적 이익을 챙기는 대한의 합리성을 극찬하는 친한파이지만 엄연히 문명개화론을 신봉하는 제국주의자로, 대한의 안남 정벌을 두고 '드디어 한국인들이 야만적인 비문명국들을 문명화된 세상으로 끌고나오는 자신들의 의무를 깨달았다'고 호평한다.
- 햄튼 남작 존 파킹턴★
더비 백작 내각의 전쟁 및 식민지 국무장관. 식민지 관랸 일이면 몰라도 군무에는 관심이 없어 하딘지 자작에게 일임한다. 이후에는 군무에 대해 공부해 조금은 익숙해졌는지 오스만과 러시아 간의 전쟁에 대한 대책회의에서 육군을 대규모로 투입하는데 6개월 이상 걸리니 정식 참전을 그때까지 미루는게 최선이나 만약 지금 참전한다면 해군이 시간을 끄는 동안 최대한 빠른 지원을 위해 무굴군을 투입하는게 옳다는 제안을 한다.
- 벤저민 디즈레일리★
더비 백작 내각의 재무장관으로 첫 등장. 대한군의 침공으로 안남에 대대적인 투자를 한 프랑스가 손해를 입게 되었다고 대한의 안남 정벌을 환영한다.
- 4대 노섬벌랜드 공작 앨저넌 퍼시★
더비 백작 내각의 해군장관.
- 5대 뉴캐슬 공작 헨리 펠럼클린턴★
애버딘 백작 내각의 전쟁 및 식민지 국무장관.
- 2대 준남작 제임스 그레이엄 경★
애버딘 백작 내각의 해군장관.
4.7.5. 기타
- 레스터 백작 토머스 코크★
17세였던 1771년 그랜드 투어를 떠난 김에 세계일주를 하기로 마음먹고 5년간 세계여행을 하면서 대한, 후금, 일본도 관광하고 갔다. 귀국 후 쓴 세계일주 여행기가 베스트셀러가 되고 정치인이 되어 업적도 남기고 레스터 백작 작위도 받았다.
- 존 콘로이★
켄트 공작부인 빅토리아의 심복.
- 애플턴
본래 제물포 상관에 주재하던 동인도회사 직원이었다가 주한 영국 대사관이 설치되자 지원하여 서기관으로 채용된다. 대한에 10년 이상 머물면서 결혼도 현지에서 할 정도로 오랜기간 체류했기에 대한의 문화와 역사에 해박하다.
- 로버트 피츠로이★
비글호 함장. 고지식한 인물이라서 빅 존과 리틀 존이 정식 선원으로 계약을 맺지 않았다는 이유로 숙식만 제공하고 진짜로 급료를 한 푼도 주지 않았다. 그래도 두 사람에게 신분증은 만들어줬다. - 찰스 다윈★
비글호를 타고 갈라파고스 군도를 방문한다. 이 세계에서는 대한 학자들이 갈라파고스 군도의 생물군에 대한 논문을 먼저 발표하여 영국에서 출발하기 전부터 사전 지식이 있는 상태였다. 대한령 해우도를 방문해 대해우 생태도 연구하고 싶다고 하와국을 통해 요청한다. 재석은 이를 허락해준 것은 물론 직접 만나서 다윈이 진화론을 더 빨리 정립할 수 있도록 최대한 힌트를 준다. 빈털터리인 빅 존과 리틀 존에게 미국으로 갈 여비를 주기 위해 웃돈을 주고 자신의 짐꾼으로 잠시 고용한다. 원래 그들을 마음에 들어해서 아예 조수로 삼고 싶어했지만, 두 존은 혹시라도 대한에서 추격대가 올 경우 다윈에게 피해를 주게 될까 우려해 거절한다.
- 에마 웨지우드★
찰스 다윈의 사촌누나이자 아내.[170][171] 다윈이 짐꾼으로 데려온 빅 존과 리틀 존을 동방의 왕자들이라고 소개하는 농담을 해서 두 존들은 다윈에게 자신들의 정체가 들킨 줄 알고 기겁했다.
- 존 프랜시스 데이비스
후송 주재 영국 공사.
- 존 벤자민 히스★
전직 영란은행 총재. 대한에서 새로 중앙은행을 세우기로 재석이 결정하면서 고문으로 초빙되어 대한에 온다. 안남정벌을 위한 전비를 조달하면서 원금을 상환해야하는 국채 발행을 꺼리는 재석에게 이자만 주고 원금을 상환할 필요가 없는 영구채를 발행할 것을 제안한다.
- 플로렌스 나이팅게일★
작중에서도 실제와 같이 엘리자베스 블랙웰의 친구이며 빅토리아 여왕을 알현하고 크림 전쟁에 간호사 파견을 청해서 허락받는다. 작중에선 2부에서 재석이 장조일 때 상희가 의사이자 수학자이자 사업가로 '레이디 이'라며 세계적으로 알려졌고 조선에서는 여의사가 250년 전부터 육성되었다는 것도 알려져서인지, 원 역사와는 조금 다르게 간호학교를 더 일찍 만들어서 운영했지만 간호사에 대한 세상의 편견 때문에 어려움에 봉착하자 돌파구를 만들기 위해서 전쟁터로 가게 되었다. 여담으로 까다롭스키 작가가 쓴 단편 팬픽을 오마쥬한 느낌이 있다.
4.8. 수배국
- 구스타브 4세
구스타브 3세의 아들. 1839년 즉위했다. 바람기가 심해 사생아를 여럿 두었다. - 요세피나★
스웨덴의 왕비, 외젠의 장녀. 1807년생. 4남 1녀를 낳았다.
- 알프레드 노벨★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공학을 전공하는 학생으로 첫 등장. 원 역사의 위인들을 대한으로 데려와 써먹어보고 싶던 재석이 노벨 가문에게 러시아 내 갑식보총 생산 라이센스를 주고 스카우트해서 데려왔다. 우수한 자질로 화학부 좌주들의 총애를 받으며 순조롭게 학업을 이어나간다. 그의 가문은 비록 적성국인 스웨덴에서 왔으나 러시아에서 오래 터잡고 지내며 현지인과 다를 바 없는 대우를 받으며 원역사처럼 무기공장을 세워 번창하고 있다.
4.9. 포도아국
- 마리아 2세
★[A]
포르투갈의 여왕. - 로이히텐베르크 공작 막시밀리앵★
외젠의 차남. 형제자매들 중 가장 막내라 갓난아기 때 아버지와 헤어졌다보니 기억 자체가 없어서 형과 달리 아버지를 원망조차 하지 않았다고 한다. 형이 벨기에 왕이 되면서 작위를 물려받았고 의붓조카인 마리아 여왕과 결혼했지만 두 달만에 급사. 원역사에서 형의 운명을 그대로 물려받았다.
4.10. 양시칠리아 왕국
- 페르디난도 1세
합스부르크 왕조 양시칠리아 국왕.
4.11. 내달국
- 빌럼 1세★
나폴레옹 전쟁 이후 대한에 실론의 탕갈라 항구를 양도한다.
4.12. 벌기국
- 오귀스트 1세★
외젠 드 보아르네의 장남. 벨기에가 독립하면서 원역사와 달리 벨기에 초대 국왕으로 추대된다. 어렸을 때는 가족을 놔두고 이역만리로 떠난 아버지를 원망했지만 성인이 되고 어머니의 설득으로 편지 교류를 오래 하면서 화해하게 된다. 러시아 알렉산드르 2세의 장녀 올가와 혼인한다. - 올가 알렉산드로브나 로마노바
알렉산드르 2세의 장녀. 시아버지인 외젠이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자 두 아들을 데리고 신불랑을 방문해 외젠의 임종을 지킨다.[173] - 브라반트 공작 외젠
오귀스트의 장남. - 로이히텐베르크 공작 레오폴드
오귀스트의 차남. 작은아버지 막시밀리앵이 요절해 작위를 이어받았다.
4.13. 법왕국
- 그레고리오 16세★
인자하고 자비로운 모범적인 성직자이나 정치적으로는 심한 수구파로 혁명운동 탄압은 물론 철도조차 금지할 정도의 꼴통이다. 러시아가 보내준 굴마훈 일행 3천명을 '성 베드로의 로마를 지키는 카타이 근위대'로 삼아 몬테카시노 수도원에 주둔시키고 교황령 내 준동하는 청년 이탈리아당 탄압에 투입한다.
- 피우스 9세★
그레고리오 16세 후임 교황. 선황과는 달리 철도와 전신을 허용하는 등 과학기술에는 호의적이나 혁명운동은 역시 탄압한다. 주세페 마치니가 이끄는 공화파의 혁명으로 로마에서 파천하여 굴마훈이 있는 몬테카시노 수도원으로 파천했다가 프랑스군의 개입으로 로마를 되찾는다.
- 안토니오
로마 사피엔차 대학교 교수이자 신부. 3부에서 이탈리아로 탈출했던 예왕의 딸 이연수(카타리나)와 개성 청년 안토니오의 4대손. 피가 많이 섞여 외모는 완전히 이탈리아 백인과 같다. 자신을 일본계 후손이라고 소개하는데 김대건, 최방제, 최양업에게 이 말을 하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는 묘사를 보면 가문 안에서는 이연수 부부의 진짜 신분이 비밀리에 전해지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
- 펠레그리노 로씨★
교황령 법무부 장관. 후금인들의 습성을 모르고 로마 시내 시위 진압에 투입했다가 사상자가 대량 발생하자 시민 여론을 우려해 형식적인 감사장과 돈을 주고 내보내버린다. 하지만 이 유혈진압의 책임자인 것으로 잘못 알려져 증오를 받게 되고 1848년 의회 개회식에서 암살당한다.
4.13.1. 카타이 근위대
- 다라극근군왕 애신각라 고이마혼(多羅克勤君王 愛新覺羅 固爾瑪渾, 도로이 키치허 군왕 아이신기오로 굴마훈, 피에르)[174]
박락의 서차남. 1816년생. 세례명은 피에트로. 만주 귀족 동가씨 출신 측복진의 소생. 황위 계승 경쟁자 중 가장 권력욕이 강하고 손속이 악독하여 대복진, 이복형제들, 삼촌들을 암살하려는 시도를 계속하고 있다. 암살을 피하기 위해서인지 북경산 복숭아 통조림을 즐겨먹는다. 권력투쟁 과정에서 이복형제 및 삼촌들보다 훨씬 더 적극적이고 악랄한 행보를 직접 보여 다른 후계자 후보들을 대부분 암살하거나 모략으로 축출하고 부황에게도 인정을 받아 후금 칸위의 계승자에 가장 가까워졌다. 럭더훈을 지지하는 청나라를 적대하는데 심지어 대한 태황태후 조문 사절로 와서 재석에게 자신을 대칸으로 지지해주면 청나라를 쳐서 건주일통을 이룰때 산동반도를 대한에 떼주겠다고 제안할 정도. 박락이 위독해지자 자라풍아를 보내 박락의 유언을 미끼로 두도를 유인해서 암살하려고 했으나 이를 눈치챈 두도가 가무사를 대신 보내면서 실패하고 후금 내전이 터지게 된다. 총 15만명이 투입된 청군에게 물량으로 밀려 수도 상도를 빼앗기게 되자 대복진과 앵배르 주교를 인질로 잡고 막북으로 후퇴하여 싸움을 계속하지만 청군의 물량전에 연전연패한데다 대한군까지 럭더훈을 지원하게 되고 대복진을 얀신에게 빼앗기게 되면서 부하들의 사기도 바닥나 군대가 거의 붕괴해가고, 대한군이 놓은 함정에 빠져 그나마 남은 부하들도 대한군의 회선포 사격의 제물이 되는 등 망하기 일보 직전이 되었다. 결국 1843년 12월 더이상 버티지 못하고 야심을 완전히 포기하고, 가족과 남은 부하 3천을 데리고 러시아로 망명했다. 이후 전투 실력도 확실하고 가톨릭 신자들인 것을 고려해 교황 근위대로 고용되었는데 러시아는 이들을 받아주자니 청과의 관계 악화가 부담되었고 교황령은 자유주의 세력을 막기 위해 병력이 필요했기에 이해관계가 일치했기 때문. 프랑스군에서 용병으로 뛰거나 나폴리 왕국을 약탈하면서 돈을 모으고 있으며 적당한 영지 하나를 차지하고 영주가 되고 싶어한다. 마침 1849년 로마에서 자유주의자 봉기가 일어나 교황이 로마를 떠나자 자신이 교황을 보호하면서 로마 탈환이라는 공을 세워 교황에게 정식으로 영주 책봉을 받으려는 계획으로 로마 공화국 토벌전을 벌였으나 샤를 루이가 파병한 프랑스군 4만명이 개입해 로마를 탈환하여 닭 쫓던 개 신세가 된다.
- 아무루 나하이(안토니오)
교수 안토니오와 동명이인. 굴마훈의 부하인 교황군 중위.
4.14. 이탈리아
- 주세페 가리발디★
피에몬테 왕국 출신 혁명가.
4.15. 그리스 왕국
4.16. 몰다비아 공국
- 그리고르 알렉산드루 기카★
몰다비아 대공.
5. 대미주
5.1. 미주합중국
5.1.1. 역대 총통
- 제임스 먼로★
1823년 시점의 미주합중국 총통. 신불랑국 나폴레옹 황제와 공동으로 나폴레옹-먼로 공동 선언을 발표한다.
- 존 퀸시 애덤스★
재석이 미주를 방문했을 때 합중국 총통. 원 역사와 비슷하게 헨리 클레이의 지원에 힘입어 앤드루 잭슨과의 경쟁에서 승리해 당선되었다.
- 헨리 클레이★
유일하게 원역사와 다른 총통. 원 역사대로 존 퀸시 애덤스에게 표를 몰아주고 국무장관이 되었다가 누벨 프랑스 주재 대사[176]로 부임, 포트샤를에서 재석과 안면을 튼다. 합중국에 방문해달라는 제의를 하는데 재석은 그의 대선에 이용할 꿍꿍이라고 짐작하며, 이를 빌미로 태자비에게 모략을 당할 수 있고, 합중국까지 다녀오는 사이 조부의 건강이 나빠지면 태자가 본국에서 무슨 난장판을 저지를지 모르니 좋게 거절한다. 임기를 마치고 미국으로 돌아간 뒤 누벨 프랑스에서 세운 외교적 성과를 내세워 민주공화당 후보로 차기 대선에 도전, 원 역사와 달리 앤드루 잭슨을 꺾고 총통에 당선된다. 노예제 찬성론자인 정적 잭슨의 기반을 깎고 대륙횡단철도를 놓기 위한 예산을 확보하기 위해 대한처럼 노예주들에게 노예보유세를 물릴 계획을 갖고 있다. 마틴 밴 뷰런을 상대로 승리하여 연임에 성공한다.
- 마틴 밴 뷰런★
민주당의 대선후보로 1836년 대선에서는 클레이에게 패배하나 1840년 대선에서 공화당의 윌리엄 해리슨을 꺾고 총통에 당선되어 12년만에 정권 교체를 이룩한다. 그러나 노예제 찬반 갈등으로 연임에 실패한다.
- 제임스 포크★
민주당 출신으로 1844년 대선에서 승리하고 미합중국 9대 총통이 된다. 원 역사처럼 잭슨파벌의 지지를 받는 확장주의자로 땅을 원하는 지지층들의 요구를 충족하고자 연방대법원에게 자치권을 인정받은 문명화된 다섯 부족 지역을 독립국으로 인정한 다음 연방대법원이 개입할 수 없는 '국가 대 국가 간의 전쟁'을 벌여 영토를 빼앗는다는 방식으로 합중국 영토 내의 원주민들을 정리하고 국력을 배양해서 스페인 식민지인 쿠바를 침공해 빼앗을 계획을 세운다. 하지만 이런 검은 속내를 모르는 시민들의 여론이 악화되어 다섯 부족 독립국 인정 계획은 철회되고 만다. 이후 원 역사에선 불출마한 1848년 대선에 재출마해서 승리, 연임에 성공하고 기존의 확장주의 정책을 이어나간다.[177] 누벨프랑스의 존재로 불가능해진 서부 진출 대신 스페인령 쿠바를 확장 목표로 정하고 겸사겸사 쿠바와 지척인 플로리다의 세미놀족의 땅을 빼앗기 위해 세미놀족과 전쟁을 벌인다.[178]
5.1.2. 정치인과 정부 인사
- 앤드루 잭슨★
원 역사와 비슷하게 미영전쟁에서 활약해 두각을 나타내고 대선에 출마했으나 애덤스에게 패배해 낙선한 뒤 절치부심해 차기 대선에 도전한다. 원 역사의 삶이 삶이고 작중에서도 인디언들을 몰아내 땅을 차지하고 더 나아가 누벨프랑스를 공격해 나폴레옹을 미주에서 쫓아내고 그 영토까지 합중국이 차지해야 한다는 무력을 통한 확장을 공개석상에서 주장하고 있어[179] 총통에 당선된다면 미주의 큰 위험요소가 될 것으로 독자들은 보고 있었지만... 누벨 프랑스에서 외교관으로 활동하며 큰 성과를 낸 헨리 클레이와의 경쟁에서 밀려 원역사와 달리 또 낙선하고 만다. 이후 고향인 테네시로 돌아가서, 남부의 노예주들을 결집하여 권토중래를 꾀하면서 대륙 중앙을 통과하는 철도를 놓고 누벨프랑스에 점진적으로 미국인들을 침투시키는 방식으로 전환한다. 하지만 자기네들 앞마당인 테네시와 조지아에서 원주민들을 추방하고 땅을 빼앗으려는 시도부터 연방대법원의 제지로 막히자, 대한과 누벨프랑스가 버티고 있는 서쪽으로의 확장은 어렵다는 걸 실감하고 이번에는 미주 본토 밖으로 눈을 돌려 연방대법원이나 아메리카 국가 회의의 영향에 들지 않는 스페인령 쿠바를 노리고 식민지 해방이란 명분을 내세워 빼앗아 노예주로 편입하려는 계획을 세운다.[180] 결국 총통 자리에 오르지 못하고 원역사와 같은 시기인 1845년 6월 자연사한다.
- 존 C. 칼훈★
헨리 클레이 이후 누벨프랑스 주재 대사가 되었고, 실제 인물처럼 노예제를 옹호하는 사람이라 누벨프랑스에서도 노예제가 유지되게 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 제임스 뷰캐넌★
제임스 포크 정권 국무장관.
- 윌리엄 마시★
제임스 포크 정권 전쟁장관.
- 로버트 워커★
제임스 포크 정권 재무장관.
- 존 메이슨★
제임스 포크 정권 법무장관.
- 조지 밴크로프트★
제임스 포크 정권 해군장관.
- 케이브 존슨★
제임스 포크 정권 체신장관.
- 제퍼슨 데이비스★
제임스 포크 정권 전쟁장관. 미시시피 출신 노예주이자 전직 장교로 인디언 전쟁, 태평전쟁 등에 참전한 경력으로 하원의원이 되었고 세미놀 전쟁에서도 공을 세워 전쟁장관으로 발탁되었다. 세미놀족의 준동을 명분으로 쿠바 침공을 노리는 포크 앞에서 눈치없이 세미놀족이 잠잠하다고 말했다 바로 말을 바꾼다.
- 데이비드 크로켓★
1대 주한미국대사로 임명된 연방 하원의원. 원역사처럼 검소한 삶을 지내고 인품과 성향도 모범적인 선비와 비슷해 대한에서 평판이 좋다. 6년간 대사로 근무하고 귀국하였다. 귀국 후에도 딕시들이 꾀하는 쿠바 침공 계획을 반대하고, 노예제 전면 폐지와 미터법 도입을 주장하는 등 모범적인 정치인으로 활동 중이다. 10대 총통 선거에 민주공화당 후보로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 에드먼드 로버츠
데이비드 크로켓 후임 주한미국대사.
- 캘빈 그랜저포드
민주당 밴 뷰런 정권에서 보낸 로버츠 후임 주한미국대사.
- 사이먼 개럿
5대 주한미국대사.
- 존 린지
주한미국대사.
- 윌리엄 수어드★
민주공화당 소속 뉴욕주 주지사.
- 존 영★
수어드 후임 민주공화당 소속 뉴욕주 지사.
- 밀러드 필모어★
존 영 후임 민주공화당 소속 뉴욕주 주지사이자 버펄로 대학교 총장. 1852년 대선에 민주공화당 후보로 출마했으나 프랭클린 피어스에게 패한다. 자신의 선거 운동을 도운 존 화이트에게 자신이 이겼으면 존 화이트에게 주한 미국공사 자리를 제수했을 것이라며 아쉬워한다.
- 호레이쇼 시모어★
1852년 대선에 출마한 필모어의 뒤를 이어 뉴욕주 주지사 선거에 출마한 민주당 후보. 뉴욕주 주지사 선거에서 민주공화당 후보인 워싱턴 헌트를 상대로 대승한다.
5.1.3. 군부
- 로버트 에드워드 리★
버지니아 연대 연대장, 계급은 대령이다.
- 셰퍼드슨 대위
제2차 세미놀 전쟁에 참전한 경력이 있는 버지니아 연대 장교. 후송 민간인 학살에 가담한다.
- 율리시즈 그랜트★
웨스트포인트 출신 버지니아 연대 중위.
- 존 시빙턴
버지니아 연대 중위, 순수 의용군이다.
- 존 켈리 존스턴
미해군 대령. USS 플리머스의 함장. 아바나에서 임무 수행 중 타고 있던 배가 느닷없이 폭침하는 봉변을 겪었으나 다행히 구조된다.
5.1.4. 스미스&스크루지 상회(양수상회)
- 윌리엄 스미스
'스미스 & 스크루지 상회'의 공동대표. 안정적인 경영 전략을 추구한다. 애팔래치아산 인삼을 아시아 쪽에 판매하기 위해 한국어와 한문을 비롯해 여러 언어를 구사하는 존 화이트를 사무원으로 고용한다.
- 프레데릭 스크루지 남작
'스미스 & 스크루지 상회'의 공동대표. 과감하고 모험적인 경영 전략을 추구한다. 모티브는 아마도 크리스마스 캐럴(소설)의 주인공 에비니저 스크루지. 메사추세츠[181] 출신이며 누벨 프랑스 정부에 10만 달러를 기부하고 남작 작위를 받았다. 업무에 대해서는 매우 깐깐한 성격이지만 개심한 후의 스크루지가 모델인지 부하 직원들에게는 공정한 대우를 하고, 존 화이트에 대해 사위가 되어도 좋다고 생각하는 등 인종적인 편견은 전혀 없는 모습을 보인다. - 앨리스 스크루지
프레데릭 스크루지의 장녀. 아버지와 많이 닮았지만 성격은 어머니를 닮아 순하다.
- 앤드루 플렌티
'스미스 & 스크루지 상회'의 담당 지배인. 존 화이트의 상관.
5.1.5. 빅 존과 리틀 존
- 종성공 이훈 → 거동 → 빅 존 → 존 화이트(유성업)
소왕의 장남. 1819년생. 재석과 친분은 거의 없었으며 키가 작다. 재석은 1부의 종성순이 떠오르는 불길한 봉호라고 생각한다. 야심가인 부친과 달리 소시민적인 성격으로, 어린 나이에 십삼경을 마스터한 사촌형 태자의 천재성에 질려 자신은 절대 태황 따위는 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13살 때 소왕의 주도로 도쿠히메와 약혼했지만, 그 직후 소왕의 반란 기도가 들통나며 역적의 아들이 된다. 이후 정작 역모를 저지른 소왕은 비교적 관대한 처벌인 현토도로 유배갔으나, 도쿠히메와 약혼 상태였던 종성공은 파혼 사유를 만들기 위해 연기 흡입으로 사망했다며 사망 처리되고 역모에 단순 가담했던 소왕가의 머슴 거동이라는 위장신분을 받아 혼자 머나먼 해우도로 유배간다.
소왕은 자신의 잘못을 가장 크게 뒤집어쓴 이훈에게 미안해서 노잣돈을 많이 주며 "절대 삶을 포기하지 말라"고 당부하지만 그를 일개 머슴 출신 역적으로 아는 관원들에게 죄다 빼앗겼고, 한양에서의 사치스러운 삶도 부유한 일본 미소녀와의 결혼도 잃어버린 이훈은 우울증에 걸려 수 차례 자살 시도를 하거나 섬 내에서 가출을 한다. 이런 일이 반복되자 그의 진짜 신분을 모르던 해우도 판관 장덕순은 정신이 불안정한 놈이니 건들지 않는다는 생각으로 그에게 일을 거의 시키지 않았고 그 또한 해우도 생활에 조금씩 적응해간다.
이후 해우도에 다윈이 탑승한 비글 호가 정박하자 대한 선박들과 달리 감시가 느슨할 것이라 판단하고 밀항해서 탈출한다. 장덕순은 거동이 또 가출했다고 생각하고 별로 신경쓰지 않았고, 이후 절벽에서 거동의 신발이 발견되자 거동이 이번에는 진짜로 자살했다고 생각하여 종성공의 탈출 사실은 한참 후에나 재석에게 알려진다. 재석은 역모에 가담조차 하지 않았던 13살 소년이 죄를 뒤집어쓴 것에 대해 미안함도 있었고 위협이 되지도 않으리라 생각해서 추적할 필요는 없으니 불문에 부치도록 지시한다.[182]
한편 비글 호에 탑승한 이훈은 거동을 대충 번역한 빅 존이라는 이름을 받고 선원이 된다. 우연히도 하와국 역적 쿠아이와가 같은 비글 호에 합류하며 '리틀 존'이라는 이름을 얻었고, 서로의 진짜 정체를 알게 된 후 모든 것을 잃은 역적이라는 동병상련으로 절친한 친구 사이가 된다. 재밌는 점은 덩치가 훨씬 큰 쿠아이와가 리틀 존, 덩치가 작은 이훈이 빅 존이라는 것. 잉글국에 도착한 후 잉글국에서는 딱히 먹고 살 길이 막막하고 추적이 붙을 수도 있으니 함께 미주합중국으로 가기로 한다. 잉글국에 도착한 후 피츠로이 선장이 존 화이트라는 이름으로 신분증을 만들어줬고, 그 신분증을 들고 미주합중국으로 떠난다.
미주합중국에 도착한 후 원래 가명을 다시 바꿀 생각이었으나 미국에 화이트라는 성이 흔하다는 것을 안 이후 계속 쓰기로 한다. 영어, 프랑스어, 라틴어, 한문, 한국어에 능하다는 점 덕분에 뉴욕에 있는 '스미스 & 스크루지 상회'라는 애팔래치아산 인삼을 파는 회사에 사무원으로 취직한다.[183] 존 블랙과 계속 동거 중인데, 미혼의 성인 남자 둘이 동거한다는 점 때문에 이웃들에게는 동성애자들로 소문나있다. 원재신과 만나 후송으로 인삼을 수출하는 성과를 올린 후 스미스의 도움으로 교육을 받아 대송인이 되기로 한다. 1842년 미국 최초의 유색인 변호사가 되고, 스크루지 사장의 둘째 딸 아그네스와 썸을 타게 된다.
홍적의 난을 토벌하기 위한 다국적 연합군에 미국도 의용군 버지니아 연대를 파견하게 되자 스미스와 스크루지가 아시아쪽 시장 개척을 위해 의용군에 참여하라고 한다. 만에 하나 자신을 아는 자를 만날 가능성을 우려해 어떻게든 거절하려 했으나 아그네스와의 교제를 허락하겠다는 말에 버지니아 연대에 자원하여 소령 계급을 받고 법무참모가 되어, 최초의 유색인 변호사에 이어 최초의 유색인 장교 타이틀까지 단다. 이동 도중 한양에 들러 태황을 알현한다는 것을 알고 '가족들이 병과 사고로 죽은 후 미국으로 떠난 개성 출신 청년 유성업'[184]이라는 설정을 만들어내 행세한다. 속으로 똥줄이 타면서 재석과 대면하여 이야기까지 몇 마디 하게 되지만, 만난지 너무 오래 지난데다 인상도 많이 달라졌기에[185] 재석은 전혀 알아보지 못한다. 무의식적인 끌림이었는지 이훈을 떠올리면서도, '전혀 안 닮았는데?왜 갑자기 걔 생각이 나는지 모르겠네'하고 넘어갔다. 영국에 숨어지내겠지 '설마' 들켜서 죽고싶어 환장해서 대한에 오겠느냐고 말이다. 연회는 그렇게 넘겼더니 한국까지 온 김에 휴가줄테니 고향에 다녀오라는 권유를 듣고 다른 장교들이 따라가고 싶어해 또 난감해지나, 다행히도(?) 미군들이 수원에 머무는 동안 사고를 치는 일이 많은 덕분에 법무장교로 한국과 교섭할 일이 많아 바쁘다는 이유로 휴가 없이 후송으로 떠난다. 후송에 도착한 후 버지니아 연대와 후송 관군의 민간인 학살 행위에 경악하며 당장은 할 수 있는 일이 없으나 전쟁이 끝나고 본국에 돌아가면 이에 대해 폭로할까 고민한다.
종전 후 귀국해서 아그네스와의 교제를 허락받은 후 결혼에 골인하여 아들 제이슨을 낳고, 의용군으로 쌓은 인맥 덕에 변호사로서 승승장구한다. 경력을 더 쌓은 후엔 연방법원이나 주법원 판사가 되는 것도 생각하고 있다. 그 명성으로 미국을 방문한 순친왕 환영 파티에 초대 받는데 일전에 한양에서 태황도 자신을 못 알아봤으니 더 어릴 때 헤어진 순친왕도 마찬가지일 거고, 만에 하나의 경우라도 자신의 정치인 인맥들이 강제로 끌려가는 걸 막아줄 것이라는 점에 자신감이 생겨 파티는 물론 순방 중 수행을 해달라는 순친왕의 요청에도 응한다. 본인도 이렇게까지 될 줄 상상하지 못했을 정도로 너무 잘나가면서 어째 점점 꼬리가 길어지고 있는데, 실제로 꼬리를 일부 밟혔다. 순친왕과의 재회에서는 예상대로 별 일 없었으나 전쟁이 끝난 후 뒤늦게 '유성업'의 개인사가 궁금해진 재석이 조사를 지시하면서 유성업이라는 사람의 일가족 묘지도, 개성부에 유성업이라는 사람이 살았던 호적 기록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수상한 정황을 알게 된 것. 그 와중에도 이훈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고 '본국에서 사고를 치고 도망친 놈'일 가능성이 가장 높다고 여기지만, 과거에 뭔가 잘못을 했어도 현재는 미국에서 잘 나가는 대송인으로 성실하게 살고 있는 사람을 굳이 과거를 캐내서 매장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하고 추적을 그만두고 넘어가 다행스럽게도 묻힌다. 그런데 너무나 유명해진 탓에 이제는 가만히 있고 싶어도 여기저기서 불러대며 살얼음판을 겪고 있다. 정계 인맥도 생기면서 대선캠프에까지 합류했는데 그가 지지한 후보 필모어가 낙선한 후 '당선되면 자네를 한국 공사로 임명하려고 했다'고 아쉬워하는 말을 듣고 십년감수하질 않나, 태평전쟁 때 여러 진영 간 갈등을 조율하던 실력과 경험을 높이 산 국무부에게 미서전쟁 의용군 고위직으로 스카우트되질 않나. - 아그네스 스크루지 → 아그네스 화이트
프레데릭 스크루지의 차녀. 1826년생. 언니와 반대로 아버지와 외모는 전혀 닮지 않았지만 성격은 빼닮았다. 존 화이트(이훈)와 사랑에 빠진다. 태평천국 토벌전쟁 때는 이훈과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버지니아 의용연대 후원회에서 활동한다. 전쟁이 끝나 돌아온 이훈과 결혼하고 아들 제이슨을 낳아 행복하게 살고 있다. - 제이슨 화이트(이재선)
존 화이트의 장남. 이재선이라는 한국식 이름은 존 화이트가 속으로만 생각해둔 이름으로 본인을 포함해 누구에게도 말해주지 않았다.
- 하원교(쿠아이와) → 리틀 존 → 존 블랙
하진교의 이복동생으로 카네카폴레이 소생. 학문과는 담을 쌓은 전형적인 하와인 전사 타입이다. 어머니의 책동으로 새 세자로 책봉되었다. 그러나 대한에서 수련한 하진교가 정난을 일으키자 갑옷을 입고 일기토를 벌였지만 완패, 투옥당하고 모친과 한양으로 압송당한다. 재석에게 단지 왕이 되고 싶었을 뿐이다라고한 당당한 태도를 보이며, 어머니와 함께 현토도로 귀양간다. 현지에서 사냥꾼이 되어 폐인이 된 어머니를 봉양하다가 어머니가 2년째 겨울에 죽자, 다음해 비글 호가 대해우 연구를 위해 해우도에 갔다가 돌아올때 현지에서 고용한 니부히족 선원들 틈에 섞여 탈출한다. 비글 호를 따라갔던 하진교에게 중간에 들키지만 그를 측은히 여긴 하진교가 눈감아줘서 무사히 영국으로 떠난다. 비글 호에서는 '리틀 존'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빅 존'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종성공 이훈과 서로 정체를 알게 된 후[186] 동병상련으로 단짝으로 지낸다. 비글 호가 영국에 도착한 후 호구지책을 위해 둘이 함께 미주합중국으로 가기로 한다. 잉글국에 도착한 후 피츠로이 선장이 '존 블랙'이라는 이름으로 신분증을 만들어줬고 이 신분증을 가지고 미주합중국으로 간다. 미주합중국에 도착한 후 뉴욕에서 부두 하역 노동자로 취직한다. 이후 대충 하와국 출신이 아닌 흑인으로 행세한다. 결혼이 무산된 이후 연애 경험이 전무한 이훈과 달리 하와국인 특유의 근육질 거구 덕분에 여자들에게 인기가 많아서 여러 명의 섹파를 두고 문란한 생활을 즐기고 있다. 이훈과는 계속 동거하는데 성인 남자 둘이 동거하니 이웃들에게는 동성애자 커플로 알려진 듯. 1841년 11월 홍서당의 난 때 뉴욕 항에서도 묘노들이 폭동을 일으켰는데 폭도 14(Fourteen)명을 혼자 때려눕혀 폭동 진압에 큰 공을 세운다. 이것이 40(Fourty)명을 때려눕힌 것으로 와전되며 신문사의 인터뷰 요청이 쇄도했으나 별거 아니라며[187] 다 거부하고 피해 다녔으나, 최초의 아시아인 변호사 존 화이트(이훈)을 인터뷰하러 온 기자가 존 블랙(쿠아이와)의 인터뷰를 시도했던 기자라 친구따라 얼떨결에 인터뷰하게 된다. 이훈이 의용군으로 파병가게 되자 혼자 보낼수 없다고 동반 입대하여 상사 계급을 받고 훈련교관 역할을 맡는다. 장교인 이훈과 달리 하사관 신분인지라 사적인 자리가 아닌 보는 눈이 있을 때는 존대를 하게 된다. 최초의 유색인 하사관이 되었는데, 의용군에서 자체적으로 만든 헌병대에서 활약한다. 본래 원체 뛰어난 전사였던지라 병사들을 다스리고 단속하는 데 상당한 재능을 보인다. 종전 후에는 5년이나 전사 노릇을 하다가 다시 부두노동자로 돌아가기는 싫고, 의용군이 아닌 미군 정규군에서 유색인종인 자신을 받아줄 리도 없다고 생각해서 어떤 직업을 가질지 고민하다 태평전쟁의 전공과 이훈의 인맥을 배경으로 뉴욕시 경찰이 된다. 이후 아일랜드에서 이민 온 넬리라는 여자와 결혼해 가정도 꾸렸다. 몇 년이 흘렀음에도 그를 잊지 못하고 기다리던 옛 애인들이 떼로 몰려와 난리치는 바람에 이사를 가야 했지만.(..)
이 두 캐릭터는 개그 에피소드와 함께 대한 외부의 상황을 보여주는 역할을 하며 3부의 장호원-고구 콤비의 뒤를 잇는 감초같은 호감 조연으로 인기를 끌고 있다. 또한 유색인종 동성애자 커플로 소문나있다는 점 때문에 21세기가 되면 둘을 소재로 한 퀴어 영화나 드라마가 나올 것이라는 드립도 자주 나온다.
5.1.6. 기타
- 조제프 보나파르트★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형. 나폴레옹이 유럽에서 축출된 후 정치에 염증을 느꼈다며 유럽에 남지도 신불랑국으로 따라가지도 않고 미주합중국으로 가버렸다.
- 로버트 코크
뉴욕 헤럴드 기자. 미합중국 최초의 아시아계 변호사인 존 화이트(이훈)을 인터뷰하러 왔다가 그 옆에 쿨리 폭동 당시 14명을 때려 눕히고도 인터뷰를 피해 다니던 존 블랙(쿠아이와)가 있는 걸 보고 두 분이 친구일 줄 몰랐다며 둘 다 인터뷰하는 일거양득의 행운을 누린다.
- 헨리 스폴딩
북미주에 거주하는 장로교 선교사.
- 엘리자베스 블랙웰★
영국 출신 미국인, 미국 최초 여의사. 원 역사처럼 나이팅게일과 친분이 있으며 빅토리아 여왕을 알현해 여의사와 여의사 양성을 위한 의대설립의 필요성을 설파했다. 나이팅게일의 언급으로 보수적인 미국에서 사회적 편견과 성차별 등 온갖 역경을 겪으며 고생끝에 힘들게 의학교를 졸업해 의사가 되었는데 나중에서야 대한에서는 여자도 얼마든지 의사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매우 허탈해하며 이럴 줄 알았으면 차라리 대한령 미주로 가서 거기 있는 의학교에 지원할 걸 그랬다며 한탄했다고 한다.
5.2. 신불랑국[188]
5.2.1. 역대 황제, 집정관
-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4년간의 프랑스 내전을 거치면서 두각을 나타내 마지막 국왕군 부대의 항복을 받아 직접 황제가 된다. 원 역사와 비슷하게 오스트리아 격파, 이탈리아 원정, 이집트 원정 등으로 유럽을 발 밑에 두었지만 러시아 원정 실패와 워털루 전투에서 패배하고 제위를 잃었다. 그러나 역사의 변화로 프랑스가 더 번영한 루이지애나를 미국에 팔지 않았기 때문에 홍경래의 도움을 받아 루이지애나로 도주한 후 그곳에 독립국을 세워 원 역사에 없던 새로운 나라 신불랑국의 황제가 되어 재기에 성공했다. 이후 새로 건국한 제국의 기반을 단단히 다지고, 1823년에는 멕시코 제1제국이 혁명 정신을 더럽혔다며[189] 멕시코를 침공하여 2년만에 수도 멕시코시티와 유카탄 반도까지 정복하고 멕시코를 보호령으로 삼는다. 원 역사에서는 1821년에 사망했지만 유배 생활로 인한 건강 악화, 몰락으로 인한 스트레스를 겪지 않아서인지 수명이 연장되었다.
'전쟁의 신'이라고 할만한 군사적 천재성은 기술 발전이 빨라진 작중에서도 똑같아서 철도를 이용한 병력의 전략적 이동, 증기자동차를 이용한 야포 견인 등의 군사혁신으로 유럽을 제패했고,[190] 누벨프랑스에서는 러시아 원정보다 더 긴 거리인 멕시코 원정을 성공시켰으며, 아파치 부족의 영역을 정복해서 전사추장으로 추앙받고 전사들을 공급 받는다. 명망도 똑같아서 부르봉 왕가가 파견한 진압군은 가는 족족 투항해서 훌륭한 병력 공급원이 될 뿐이었고, 재기에 성공하자 유럽에서 망명자들, 추종자들, 옛 부하들이 몰려들면서 빠르게 기반을 굳히는데 성공했다. 대한에서는 태황 원평제는 나폴레옹의 이름만 들어도 화를 내고, 황제가 아니라 번왕 취급을 하는 등 찬탈자라고 비난하지만[191], 대부분의 신료나 백성들에게는 프랑스 혁명이 수만명의 국민이 학살당하는 등 원 역사보다 더 참혹해지자 국민을 지키기 위해 거병하고 싸우는 족족 이겼기 때문에 불패자(佛覇者), 유주무쌍 등의 간지나는 칭호로 불리며 좋은 평가를 받는 듯.[192]
멕시코 원정 후 안보환경이 더 불안해졌다는 것을 의식하는지 대한의 협상 요청에 기꺼이 응하고 성대한 의전을 베풀며 사절단 단장인 재석과 드디어 회동하는데, 코르시카 사투리가 너무 심해서 재석은 그의 인사말을 하나도 못 알아듣고 통역이 대동해야 할 정도. 한때 유럽의 패자답게 오만한 면모를 숨기지 않고 투 머치 토커에 제멋대로 행동하는 편이지만 사치에 무관심하고, 과거의 영광에 얽메이지 않고 신불랑국에 부족한 것을 정확히 파악하고 대한과 협상을 통해 이를 보충하려고 하며, 수도 뉴올리언스를 미주의 교통 중심지로 만들 수 있는 대륙횡단철도 계획을 제시하는 등 뛰어난 지도자의 모습을 보인다. 오스트리아에 두고 온 아들과 비슷한 나이의 재석은 손주 대하듯 하며 그의 식견에 칭찬을 아끼지 않으면서도 어리기 때문에 피로하게 만드려고 여흥을 베푸며 협상을 지연시키는 노회한 모습도 보인다.
나이가 들면서 성격이 괴팍해지긴 했지만 대륙철도 부설에 힘을 쏟으며 여전히 정력적으로 통치하고 있으며, 아들을 그리워하며 아들을 돌려받기 위해 거의 모든 유럽의 군주들에게 인정을 내세워서 호소하고 구출 작전을 추진하는 등 모든 수단을 동원했다고 하며, 동생 루이가 제국의 안정을 명분으로 자신의 아들을 후계자로 내세우려고 하자 격노하며 쫓아낸다. 결국 아들이 자살했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처음엔 아예 존재를 숨기려고 하냐고 하다가 현실을 인정한 후에는 오스트리아에서 죽였다고 주장하며 나라 전역에서 위령미사를 올리게 했고,[193] 오스트리아를 포함 유럽 전 왕실에 분노와 저주가 담긴 편지를 보냈다. 그 이후에는 나라의 힘이 부족해서 아들을 잃었다고 여겼는지 제국 경영에 더 몰두하며, 재석과 함께 텍사스의 석유를 개발한다. 1840년 재석이 정상회담을 위해 미주로 찾아오자 크게 반가워한다. 노년이 되어서도 전략적인 식견은 여전하여, 아메리카 국가회의 회원국인 칠레에서 생산하는 구아노를 이용해 유럽의 목줄을 잡고, 그 칠레의 목줄은 텍사스의 석유를 통해 잡는다는 '자원의 무기화' 전략을 세우는가 하면 자신이 사망하면 후임 황제는 국민들이 선출하는 사실상 종신 대통령으로 변경할 것임을 계획하는 등 혜안을 보여주어 재석이 크게 감탄한다. 1844년 여름 노환으로 누벨 아작시오 황궁에서 향년 75세로 자연사한다.
- 마타모로스 공작 → 누벨프랑스 제국 집정관 외젠 드 보아르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양자. 의붓아버지 나폴레옹 1세가 신불랑국을 건국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지금 그분은 광대한 바다 저편에서 새로운 별을 띄우셨습니다. 그의 은혜를 입은 자로서 그 빛을 외면할 수는 없습니다.'라는 원 역사의 명언과 비슷한 말을 남기고 처자식을 처가 바이에른에 놓아둔 채로 나폴레옹에게 달려왔다. 이후 대한에서 사절단이 오자 접반사로 재석을 맞이한다. 나폴레옹은 자신을 배신한 바이에른 국왕이 내린 로이히텐베르크 공작 작위가 맘에 안 들어서인지 그가 점령한 멕시코 도시 이름을 따서 마타모로스 공작위를 새로 내린다. 황태자였던 라이히슈타트 공작 나폴레옹이 자살한 후 사실상 나폴레옹의 후계자로 여겨지고 있다. 그러나 친자는 아니기에 재석은 북한에서 김일성을 영원한 주석이라며 공석으로 남기고 김정일은 국방위원장을 자칭한 것처럼 황제가 아닌 칭호를 쓸 가능성도 있다고 본다. 1844년 나폴레옹이 노환으로 붕어한 후 재석의 예상대로 신불랑 의회에서 만장일치로 황제가 아닌 종신직인 집정관으로 선출되어 2대 국가원수가 된다. 원역사에서는 1824년 사망했지만 나폴레옹의 수명이 연장된 것처럼 이쪽도 훨씬 오래 살게 되었다.
샤를 루이 나폴레옹이 두 나라를 통일하자고 보낸 호소문을 묵살하고, 침공을 대비해 누벨 프랑스군의 30%인 6만 명을 수도와 경제중심지 주변에 모은다.
8년 동안 누벨프랑스를 성공적으로 다스리다가 1852년 후계자로 드 뤼옹을 지명하고 자신의 공작위를 물려준다. 나폴레옹의 동생들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나폴레옹의 "황제" 자리를 이을 진짜 황태자 책봉을 노리면서 그를 섭정이라고 불렀으나, 자신의 뒤를 이을 후임을 (그 자신이 그랬듯)나폴레옹의 핏줄과 무관한 이로 지목하면서 명실상부한 2대 국가원수가 된 셈이다. 집정관이 종신직인지라 일단 직위를 유지했으나, 결국 죽을 때까지 자리를 유지하지는 않고 스스로 은퇴한다. 말년에는 유럽에 두고 온 가족들과도 화해한 후 1852년 며느리와 두 손자가 보는 앞에서 사망한다.
- 마타모로스 공작 필리프 드 뤼옹
라이프치히 전투 때부터 나폴레옹을 따른 베테랑. 재석이 신불랑을 방문했을 때 친분을 쌓는다. 1845년에는 대령 계급을 달았고 태평천국 토벌군인 루이지애나 연대 연대장을 지낸다. 태평전쟁에서의 공적을 인정받아 소장으로 승진하고 베라크루스 방위사령관직에 올랐으며 이후 중장으로 승진하여 누벨 오를레앙 방위사령관을 맡으며 유력한 부집정관 후보로 떠올라 외젠의 후계자가 될 가능성이 생겼다. 건강이 안좋은 외젠이 자신의 작위인 마타모로스 공작위를 드 뤼옹에게 물려주고 육군 부사령관으로 임명하며 사실상 외젠의 후임 집정관으로 확정되었고 누벨프랑스의 노예제 폐지에 반발한 노예주들이 나폴레옹 2세 추대를 노리고 벌인 쿠데타 기도를 사전에 진압하면서 외젠의 후계자로서의 위상이 더 공고해진다. 외젠이 사망하여 제2대 집정관으로 취임했다.
5.2.2. 황실
- 슈니에 남작부인
수우족 라코타 분파 훙크파파 부족장인 훙크파파 백작의 딸. 나폴레옹이 수우족과의 혼인동맹을 위해 후궁으로 들였으며, 조상 중에 조선인이 있어 피부는 흰 편이라고 한다.[194] 이외에도 후궁들이 여럿 있으나 아무도 소생을 얻지는 못해서, 원역사에 없던 새로운 나폴레옹의 자식들이 태어나지는 않았다.
- 뒤몽 백작부인
나폴레옹의 정부, 루이지애나 토호의 딸.
- 아칸소 대공 루이 보나파르트★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동생. 나폴레옹을 따라 신불랑국으로 왔으며 아칸소 대공에 임명되었다. 실권은 없는 명예직이지만 아칸소 주민들을 위해 여러 복지 사업을 벌여 평판은 좋다. 명목상 후계자인 나폴레옹의 친아들 라이히슈타트 공작이 오스트리아 제국에 억류되자 차기 후계자로 자신의 아들인 샤를 루이를 밀어보지만 나폴레옹에게 호통만 듣는다. 나폴레옹 사후에도 샤를 루이 지원 세력을 모으기 위해 클로드 홍에게 찾아가지만 샤를 루이가 아편을 팔고 태평천국을 지원하는 문제로 완곡히 거절당한다. - 오르탕스 드 보아르네★
외젠의 여동생, 나폴레옹 2세(샤를 루이)의 친모. 1837년 암으로 사망한다.
- 미주리 대공 제롬 보나파르트★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막내동생. 나폴레옹을 따라 신불랑국으로 왔으며 미주리 대공에 임명되었다. - 제롬 나폴레옹★
미주리 대공의 장남. 미국에서 낳은 사생아다. 나폴레옹과 외모가 많이 닮았지만 사생아로 태어난지라 제대로 조카 대접을 받지는 못했다고 한다.
5.2.3. 군부
5.2.3.1. 나폴레옹의 26 원수
- 달마티 공작 장드디외 술트★
원 역사처럼 나폴레옹의 원수들 중 한 명. 처세에 능한 성격은 원 역사와 같아 나폴레옹이 워털루 전투에서 패하고 신불랑으로 떠나자 루이 18세에게 투항했고 루이 18세가 5만 정벌군을 맡겨 신불랑으로 보내지만, 도착하자마자 자신의 옛 주군 나폴레옹에게 바로 투항한다. 그가 데려온 정예병 5만 덕분에 나폴레옹은 신불랑 전역을 확고하게 장악한다. 신불랑국으로 건너온 다른 원수들이 하나둘 사망하고 주군 나폴레옹까지 사망한 가운데 그루시와 함께 나폴레옹 사후까지도 생존한 단 두 명 중 1명이 된다. 나폴레옹의 지명으로 상원의원으로 지내면서 그루시와 함께 외젠의 후계 구도에 대해 고민한다. 그루시 사망 후 누벨 프랑스 대원수 칭호를 받고 1851년 사망하여 나폴레옹을 따른 원수들 중 가장 장수하였다.[195]
- 뇌샤텔 대공 루이 알렉상드르 베르티에★
나폴레옹의 작전을 가장 잘 이해하는 참모장. 신불랑국 건국 소식을 듣자마자 나폴레옹의 옛 노병들과 함께 신불랑국으로 건너간다. 신불랑국 국경에서 재석 일행을 맞이한다. 회담장에서는 나폴레옹의 사투리를 표준 프랑스어로 통역한다. 나폴레옹보다 일찍 사망했다.
- 알뷔페라 공작 루이가브리엘 쉬셰★
나폴레옹의 멕시코 원정 후 점령지 안정화 작전의 총 책임을 맡아 점령지의 민심을 빠르게 안정시킨다. 그러나 한-신불 회담 직전에 병으로 인해 멕시코시티에서 세상을 떠났다.
- 장바티스트 주르당★
쉬셰 사후 후임으로 멕시코 안정화 업무를 맡게 된다. 1835년에 사망한다.
- 루이니콜라 다부★
주르당 사후 후임으로 멕시코 신불랑군 원수를 맡게 되지만 폐병이 생겨서 피를 수시로 토해내다 사망한다.
- 그루시 후작 에마뉘엘 그루시★
술트와 함께 나폴레옹 사후까지 생존한 둘 뿐인 원수. 술트와 함께 외젠의 후계 구도에 대해 고민한다. 1847년 사망한다.
- 위에 언급된 사람들 외에도 나폴레옹의 원수들 중 장바티스트 베르나도트, 에두아르 모르티에가 나폴레옹을 따라가 신불랑국 원수가 되었고, 조아킴 뮈라와 유제프 안토니 포니아토프스키는 살아있었다면 따라갔겠지만 원역사처럼 이미 죽은 뒤였다고 한다. 대부분 나폴레옹보다 먼저 사망하고 장드디외 술트, 에마뉘엘 그루시 단 2명만이 주군보다 장수했다.
5.2.3.2. 카리브 후작가
- 카리브 후작 클로드 홍(홍경래)
★
신불랑국 개국공신이자 해군 부사령관. 남미주 출신 한인으로, 미주 출신도 벼슬에 많이 나가게 해달라며 일으킨 소규모의 항의성 폭동이 규모가 좀 커지면서 주모자로 수배되어 신불랑으로 도망친 뒤 사략선 선원이 되었다.[196] 이렇게 시작한 해적질이었지만 재능이 있어 사략선 선장까지 되었고, 우연히 불랑국에 들렀다가 때마침 워털루 전투에서 패배하고 도망치던 나폴레옹을 만나 잉글국 해군의 포위를 뚫고 나폴레옹을 신불랑으로 탈출시켜 신불랑국을 건설하도록 돕는다. 이 일로 신불랑국의 최고 개국공신이 되었고 그 공로로 신불랑국 해군 총사령관이 된다. 신불랑이 인종차별은 적은 편이지만 대부분 백인들인 신불랑 국가 수뇌부에서 유일한 유색인종이다. 신불랑인이 된 후 본래 이름인 경래와 비슷한 클로드라는 이름을 사용하게 된다. 본래 작위는 백작이었으나 신불랑-맥고국 전쟁 때는 미국 사략선들을 포섭하여 카리브해에서 통상파괴전을 벌인 공로로 후작으로 승작한다. 연안경비정 8척 밖에 없는 해군을 재석에게 선보일 때 부끄러워하긴 하지만 기강이 잘 잡혀 있다는 묘사를 보면 지휘관으로서도 재능이 있는 듯. 신불랑국이 다른 서구 국가들과 다르게 조선이 아닌 대한이란 명칭을 사용하고 대공이 아닌 태손이란 명칭을 사용하는 등 유독 대한 정세에 밝은 것은 고위직에 오른 클로드 홍의 영향이라고 한다. 노년이 되어서도 미국의 정권이 잭슨 파벌로 바뀌게 될 경우 수도 누벨오를레앙이 위험해질 수 있다고 진언하여 새 수도 누벨 아작시오로 천도하게 하는 등 나폴레옹의 충신으로 활약 중이다. 1840년 한-신불랑 정상회담 때 나폴레옹을 수행해 고향 남미주를 수십년만에 금의환향하며 재석도 그의 옛 폭동죄를 즉시 사면하여 고향 방문에 아무 문제 없게 해준다. 1849년 69세의 나이로 사망하였고 외젠은 누벨프랑스 해군 대제독 칭호를 추서한다.
5.2.3.3. 기타
- 얀 헨리크 돔브로프스키★
원역사처럼 폴란드의 독립투사로 살았지만, 나폴레옹이 신불랑국을 세우자 은거했던 원역사와 달리 신불랑국으로 와 나폴레옹에게 원수로 임명되었다. 하지만 조국인 폴란드를 잊지 않아 재석에게 대한 황실은 중종과 올렝카의 후손이라는 것을 말하며 폴란드 재건을 위한 도움을 요청했으나 재석은 황실에 올렝카의 자손은 공주 2명밖에 없고 그마저 모두 외국에 시집가 현재 황실에는 올렝카의 후손이 없다는 사실과 폴란드 재건 같은 중대사항은 자신이 결정할 수 없음을 알리며 정중하게 거절한다.
- 느리게 나는 독수리(앙리)
코만치계 텍사스 레인저 대원.
5.2.4. 관료
- 에런 버★
신불랑국 대법원장. 원 역사와 마찬가지로 미주합중국 부총통을 지냈으나 에런 버와 알렉산더 해밀턴의 결투에서 해밀턴을 죽여버리고 프랑스로 망명했고, 나폴레옹 몰락 후 미국으로 돌아와서도 여전히 사회적인 비난을 받으며 지낸다. 그러던 중 안면이 있는 나폴레옹이 신불랑국을 건국하자 다시 신불랑으로 망명했고, 프랑스 시절에는 홀대받았지만 국가 시스템을 새로 세워야 하는 신불랑에는 부통령 경력에 걸맞게 바로 대법원장의 자리에 오른다. 1830년대 중반에 사망한다.
- 비뇽 남작
1831년 부임한 누벨 프랑스 공사.
- 마르슬랭 자작
비뇽 남작 후임 누벨 프랑스 공사.
- 몽페랑 남작
마르슬랭 자작 후임으로 1846년 부임한 누벨 프랑스 공사. 흥선제가 나폴레옹과 개인적으로 대화하는 것도 본 것을 근거로 대한에 러시아의 국혼 제안이 왔을 때 주한 외교관 중 유일하게 대한이 수락한다고 주장하며 술내기를 걸었고, 진짜 대한이 수락하자 멘붕에 빠진 외교관들 사이에서 홀로 좋아한다.
- 네스푸 남작
주한 누벨 프랑스 공사.
5.2.5. 정치인
- 벨레랑드 자작
국민의회(하원) 의장.
- 다미앵 명혁 남
★[199]
한국계 신불랑인 초선 하원의원. 이민 5세대로 4대 전 그의 고조부가 미주로 이민와서 머슴살이를 하다가 심한 착취에 분개, 주인을 폭행하고 조총을 훔쳐 프랑스령 루이지애나로 도주해와서 뿌리를 내렸다고 한다. 머리가 좋았지만 식민지 시절에 유색인종이 할만한 전문직이 성직자 정도밖에 없었기에 신학교에 진학했으나 신불랑국이 건국되며 차별이 철폐되자 그랑제콜에 들어가 행정관이 되어 12년간 재직한다. 나폴레옹이 붕어한 후 12년간의 행정 경험을 바탕으로 하원 선거에 출마하여 프랑스계 백인 4선 의원을 꺾고 당선된다. 하원에 입성한 후 가장 열정적인 노예제 폐지론자가 되었다. 그루시와 술트도 높이 평가해 차기 집정관 감으로도 잠시 생각했을 정도. 그러나 매우 유능하긴 해도 프랑스계가 아니며 군 경험도 없다는 약점 탓에 어려울 것이리라고 두 사람은 판단한다.
5.2.6. 기타
- 첸
사천 출신의 중국계 텍사스 유전 기사.
- 안스코위니 자작
개종한 샤이엔족 추장. 몽페랑 남작의 장인.
5.3. 맥고국
- 아구스틴 1세★
원역사처럼 독재자의 길을 걷다가 혁명의 배신자를 징벌하겠다는 명분으로 침공해온 나폴레옹에게 완패하고 1825년 퇴위, 이탈리아로 망명한다.
- 호세 마리아노 데 미켈레나★
나폴레옹이 세운 괴뢰정권인 멕시코 공화국의 신불랑 주재 대사.
- 과달루페 빅토리아★
자유주의적이면서도 중도를 지킬 줄 알아 나폴레옹이 멕시코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으로 내정했다.
- 산타 안나★
멕시코 공화국의 친나폴레옹 군벌 중 하나로 등장했다. 원 역사처럼 군사적 능력은 뛰어나나 허황되고 기회주의적인 성격으로, 나폴레옹이 파나마 운하에 관심을 갖고 있다며 재석에게 소개해줬지만 실상은 이를 빌미로 멕시코로부터 중앙아메리카를 병합해서 세력을 넓히려는 꿍꿍이었다는 것을 알고 허탈해한다.[200] 미국-멕시코 전쟁이 없어질테니 엄청난 영토를 잃은 치욕을 당하지 않고 멕시코 전쟁영웅으로만 남을 가능성이 높아졌지만, 재석은 나폴레옹이 그를 적당히 반란 진압용으로만 쓰고 버리지 않을까 의심한다. 하지만 그나마 멕시코에서 제일 능력이 있는 인물인지라 나폴레옹 사후 멕시코 대통령 자리에 올라 공화국 수립 20여년만에 군벌들을 대부분 제압하여 내전을 마무리짓는다. 6년제 대통령직 3연임에 성공한다.
6. 대삼주
6.1. 그란 콜롬비아
- 시몬 볼리바르 ★
원역사처럼 사망한 후 그란 콜롬비아 연방이 일단 해체되고 누에바그라나다 공화국, 베네수엘라, 에콰도르가 되었으나 나폴레옹의 중재로 다시 그란 콜롬비아 연맹을 결성하고 나폴레옹이 만든 아메리카 국가 회의의 회원국이 되어 그의 꿈이 절반이나마 이뤄지게 되었다.
6.2. 브라질 제국
- 페드루 1세★
브라질 제국 초대 황제, 황후 로이히텐베르크의 아멜리가 외젠 드 보아르네의 딸인데도 신불랑을 적대하고 아메리카 국가 회의도 가입을 거부하여 나폴레옹도 그를 몹시 싫어한다. 원역사처럼 즉위 5년만에 자진 퇴위하고 그 후 4년만에 사망한다. - 아멜리아★
브라질의 황후. 외젠의 삼녀. 자식으로 딸 하나가 있다.
7. 대상주
7.1. 애집투[202]
- 메흐메드 알리★
원역사처럼 현돌궐에서 이집트 총독으로 임명받았으나 자립하여 사실상의 독립 군주가 된다. 알바니아 출신이라 그동안 탄압받던 콥트교 교단을 지원하고 콥트어를 되살리는 노력을 했다. 프랑스 고문단의 도움을 받아 군대를 프랑스식으로 조련하는데, 이들이 프랑스 외인부대에 입대하기도 한다. 1849년 사망한다.
7.2. 알제리
- 후세인 데이★
알제의 베이. 38년전 나폴레옹이 이집트 원정 때 알제리에 빚진 식량 값을 갚으라고 프랑스 사신과 싸우다가 사신의 뺨을 파리채로 때린 일을 명분삼아 프랑스 루이 19세가 전면 침공하여 나라를 빼앗기고 분통이 터져 죽는다. 향년 72세.[203]
7.3. 모로코
- 아브드 알 라흐만★
모로코의 술탄.
7.4. 애토피아
- 사흘레 덴겔★
애토피아 황제. 실권없이 황후와 섭정 라스 알리의 필요에 따라 폐위와 복위를 반복하고 있다.
- 요하네스 3세★
애토피아(崖土彼亞) 황제. 실권없이 황후와 섭정 라스 알리의 필요에 따라 폐위와 복위를 반복하고 있다. - 황후 메넨 리벤★
요하네스 3세의 부인.
- 크와레 공작 카사 하일레★
솔로몬 왕가 방계 왕족. 요하네스 3세와 내전 중이다. 대한에 사신을 보내 도움을 요청한다. - 테와베흐 알리★
라스 알리의 딸.
- 섭정 라스 알리★
메넨 리벤과 전남편 사이의 아들.
- 요하네스
카사 하일레의 신하. 대한에 사신으로 방문하여 유창한 한국어로 카사 하일레를 지원해달라고 요청한다.
[1] 실제 역사상 영조와 휘와 묘호가 한자까지 동일하다.[2] 그 망나니 태자조차도 사석에서도 꼬박꼬박 폐하라고 칭한다. 다만 재석이 빙의한 태손 이진의 경우 워낙 끔찍한 사고를 겪은 걸 감안했는지 할바마마라 부르는 걸 용인했는데, 책봉을 받은 후 폐하라고 부르자 좋아하는 티를 숨기지 않는다.[3] 그렇게 싫어해서 그런거겠지만 그가 전 유주를 적으로 싸우고 있으니 패망할 것이라고 본의 아닌 예언을 해버리게 되기도 했다. 그래도 나폴레옹이 유주무쌍이라 부르며 뛰어난 걸물이었다는건 인정하고 있다.[4] 무작정 도리 때문만이 아니라 네덜란드령 동인도까지 차지하면 감당하기 어렵다는 실리적 판단도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추정의 영역이라 이 행동에 대해서는 독자들 사이에서는 '동남아 전체를 대한의 세력권을 만들 절호의 기회였는데 그냥 호구짓을 한 거 아니냐'는 논란이 있었다. 그러나 이후 연재분에서 이와 관련된 전후 사정들이 좀 더 밝혀졌는데, 파병을 한 이유가 단순히 이념적인 이유 때문만이 아니라 나폴레옹 전쟁으로 일대 해역이 난장판이 되어서 역내 안정을 꾀해야 한다는 실리적인 이유가 있었고, 이때 대군을 동원하는 것을 보고 독립을 획책하던 번국 술루국이 뜻을 접었으며, 식민지를 돌려준 이후 네덜란드는 대한에 철저히 저자세를 취해서 탕갈라를 할양해주는 실질적인 이득이 있었다.(술루국이 딴 생각하는지는 알지 못했고, 탕갈라도 네덜란드가 알아서 골라 건네준거라 의도했다고는 할 수 없다.) 그리고 이 사실이 국제사회에 알려지면서 대한의 국제적인 신인도도 올라갔으니 남는 장사였다.[5] 그래도 완충국으로서의 신불랑국의 가치 때문에 묵시적으로는 신불랑국의 존재를 인정하고 있다가 신불랑국이 대한에 대해 계속해서 우호적인 태도를 보이고 결정적으로 대한이 불랑국에게 자국을 황제국 대한으로 칭해달라고 요청한 것을 불랑국이 거부한 일에 대해 열받아서 불랑국을 엿먹일 겸 말년에 태도를 바꿔 재석을 미주로 보내 정식으로 신불랑국을 승인했다.[6] 태조부터 흥선제까지 23명의 국왕 중 환갑을 넘겨 장수한 사람이 태조, 정종, 중종, 영종. 단 4명인데 태조는 57세까진 고려의 신하였으며 7년 재위후 강제로 왕위에서 내려오며 수명이 연장되었다. 정종은 겨우 2년만 하고 왕위에서 내려왔다. 원래 친왕이었다 34세에 즉위한 중종은 3회차 회귀자였다. 즉, 궁에서 태어나 태자로 교육받고 죽을 때까지 보위를 지킨, 태자 시절부터 주어지는 어마어마한 공부량과 임금이 짊어져야 할 살인적인 격무를 전부 소화하며 환갑을 넘긴 건 영종이 유일하다. 다른 임금들은 도저히 한 사람이 감당하기 힘든 격무 앞에 불혹 넘어가서부터 건강이 급격하게 상해 숙조, 목종처럼 40대에 죽거나 오래 버텨봐야 50대 후반이었다. 평생 술 한 잔 안마신 현종도 50대 후반에 붕어했으니 66세에 붕어한 영종의 평소 관리가 얼마나 철저했는지 알 수 있다.[7] 원 역사 헌종과 동일.[8] 태자 이진(재석)+그보다 손위인 효왕과 화원공주+재석의 친동생 순친왕+이복동생들 25명. 막내는 유복자다. 그나마 적장남 이윤 같이 영아기에 사망한 아이들은 뺀 게 이 정도 숫자이며, 서른아홉에 죽지 않고 오래 살았다면 대체 얼마나 더 낳았을지 알 수 없다[9] 미주 원씨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충성심을 잃지 않아 다행이었지 만약에 원한을 크게 품었다면 북미주가 위태로워질 뻔했다. 또한 유교적 관점에서 이것은 원균의 죄를 가문에 연좌하지 않은 장조에 대한 모독에도 해당하므로, 부황 귀에 들어갔다면 결국 폭발해 폐태자되었을 가능성이 높은 사건이다.[10] 나폴레옹도 이 이야기를 듣자 뭐 그런 막장 아비가 있냐며 재석을 위로해줄 정도로 경악했다.[11] 이때 쓸모없는 성현의 말씀 열두마디보다 쇠를 다루는 법 여섯가지를 배우는 게 더 낫다고 하는 조야를 경천동지하게 할 만한 폭탄발언도 한다.[12] 그러나 이때도 자신 때문에 어머니를 잃은 아들에게 사과하지는 않았다. 또 후술되는 것처럼 자식들을 모아 파티나 낚시대회를 열었지만, 정서적으로 교감하는 장면은 없었고 그 많은 자식 중에 그 누구도 아버지를 그리워하지 않았다. 이순은 본인이 내키는 대로만 아버지 노릇을 했으며 정말 책임감을 느끼고 돌보거나 키워야 하는 생각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13] 게다가 대담하게도 전자에게는 자기가 즉위 후에도 너희들을 버리지 않을거란 암시를, 후자에게는 즉위한 뒤엔 아첨꾼들을 버릴거란 암시를 주는 묘사를 하는데 완전히 상반된 묘사임에도 양쪽 모두 자기들에게 해주는 말 쪽이 사실일거라 믿고 기대감을 품는다.[14] 아무리 태손의 능력이 뛰어나고 명군의 자질을 보여도 유교가 국시인 대한에서 자신을 내치면 태손의 입지가 불안해지는 것을 정확히 알고 있기 때문이다. 대제국인 대한을 한 사람이 다스릴 수 없다는 생각에 더해 아버지의 애정으로 재석이 공부(자신은 쓸모없다고 생각하는)에서 적당히 손 놓길 바랬지만, 자신의 조언을 무시하고 힘든 길을 걷겠다면 원하는 일을 실컷 시켜주겠다는 속셈. 자신이 태황이 됐을 때 절대 대들 수 없고 일을 잘하는 노예 후계자가 생겼으니 좋아할 수밖에 없고 공을 세우게 해서 입지를 더 견고하게 만들어주려고 하는 것. 게다가 태황이 태손에게 기대를 걸기 시작하자 자신에 관심도 끄게 되었으니 더 싫어할리가 없다. 현실에 비유하자면 사우디아라비아의 무함마드 빈 살만 알사우드처럼 자신은 제위에만 있고 재석에게 실질적인 일을 다 시키려는 의도로도 보인다. 실제 김조순의 사위였던 순조도 효명세자에게 전권을 넘기고 본인은 유유자적 쉬려 들기도 했다.[15] 확실한 것은 광덕제는 태자 시절부터 재석에게 평범한 아버지가 다 그렇듯이 나쁜 사람으로 비춰지지 않으려고 노력한다는 것이다. 태자비를 죽게 만든 음주운전도 다른 사람들에게는 "미안하긴 한데 뭐 어쩔"이란 태도를 보여서 처가 장문 김씨를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에게 분노를 일으키고 적들을 만든 것과는 달리, 재석 앞에서는 성의있게 변명하며 쩔쩔매기까지 한다.[16] 그 전에 부황의 건강이 좋지 않다는 것을 알고 미리 국정 현안을 파악하는 밑작업을 했다.[17] 그래도 12년 동안 부자의 연을 맺고 살아온 세월이 있어서 그가 죽을 때는 진심으로 눈물을 흘렸다.[18] 작중 대한 왕실은 재석이 중간중간 재위하며 각종 사업체를 설립해서 내수사 수입원을 소작료가 아닌 사업 수익으로 바꿔 체질개선을 해놓았기 때문에 국고를 건드리지 않아도, 백성을 수탈하지 않아도 왕실 재산 선에서 어지간한 유흥비는 감당 가능했다. 게다가 국고에 손을 대더라도 당시 대한은 북태평양을 대한의 호수로 만들 정도로 최전성기를 달리고 있었기 때문에, 갑자기 궁궐을 여러 채 짓거나 어마어마한 사치품을 소모해대지 않는 이상에야 어느정도의 사치는 감당할만 했다. 여기에 나라 기둥뿌리를 뽑아 말아먹을 정도로 놀아대서 국가재정을 파탄낸 후송 태녕제와 아예 나라를 망조로 이끈 서나라 함녕제의 사례가 있었고, 그 이전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면 2대에 걸친 학정으로 나라를 멸망시킨 명나라의 만력제와 태창제의 사례도 있다보니 이런 주변국들에 존재했던 최악의 암군들과 워낙 비교가 되어 이 정도 일탈에는 관대해진 감도 있어 보인다.[19] 원 역사의 최단기 재임자는 약 9개월 재위한 인종이었으나 작중에선 역사의 변동으로 재석이 첫번째로 빙의한 무종 때 낳은 맏아들 인종(칭제건원 후 인조 추존)이 48년을 재위해 최장기간 임금 노릇을 했다.[20] 상희도 2부에서 '(무종 때 첫번째 빙의 인생에서는)조선에 온 걸 하나의 긴 꿈처럼 생각했다'고 말한 바 있으니.[21] 이게 진짜라면 작중의 의문스런 행동들도 잘 설명된다. 재석에게 말한 "쓸모없는 성현의 말씀 열두마디보다 쇠를 다루는 법 여섯가지를 배우는 게 더 낫다"고 하는 말도 원역사의 대한민국에서 조선은 전혀 실용적이지 못한 학문인 성리학밖에 모르는 우물 안 개구리라서 발전을 못해 망했다는 게 일반적인 인식이라 아무렇지 않게 저런 말을 내뱉은 걸 수 있다. 원씨 가문을 홀대한 건 빙의된지 얼마 안되어서 원사웅의 공적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 성리학적으로 원균 집안을 욕하는 게 무슨 의미인지 모르는 상태에서 원균 자손이란 것만 듣고 원균 후손이 호의호식하냐고 분개했을 수 있다. 조야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나폴레옹이 대한에 매각을 제안한 신불랑국 북부를 사는 걸 혼자 밀어붙이려 했던 것도 캐나다 지역이 자원의 보고라는 걸 이미 알고 있었으니 그랬을 것이다. 유구를 대한의 번국으로 편입시킨 것도 원 역사의 일본 제국의 첫번째 희생양이 유구였으니 일본이 유구를 차지해 본격적으로 제국주의 야욕을 드러내기 전 먼저 선수를 치기 위해 그랬을 것이고 유구를 대한이 차지하는 조건으로 아모국을 일본국에 넘긴 것도 아모국은 어차피 그가 살던 세계에서는 '일본의 영토인 홋카이도'였을테니 아모국을 일본에 넘기는 것에 대해 별다른 감정도 없었을 것이다. 금강산을 유독 좋아한 것도 그가 대한민국 사람이라 북한에 있는 금강산을 자유롭게 가보지 못 했을테니 그랬을 것이다. 여성 교육에 반대한 것도 그가 원래 살던 시기가 원역사 2020년대였다면(작중 재석이 조선 왕으로 빙의를 시작한 시점은 2017년이라 재석은 2010년대 후반 이후 격화된 대한민국의 젠더 분쟁에 대해 잘 모른다) 대한민국의 젠더 분쟁을 실시간으로 겪으면서 래디컬 페미니즘에 학을 떼여서 그랬을 가능성이 높다. 사후 재석의 언급에 따르면 생전 군대에서 단발령을 전면 시행할 것을 주장하기도 했는데 이것도 대한민국 국군에 입대하면서 삭발했던 경험에서 유래한 것이었을 가능성이 높다.[22] 소원이 뭐냐에 따라 다를 것이다. 재석은 "왕이 되게 해 달라"는 대단히 명확하고도 구체적인 소원을 빌었기 때문에 질릴 때까지 왕노릇 하게 해 주겠다는 천녀의 결정에 따라 계속 윤회하고 있는 것이다. 상희 역시 마찬가지로 "양한의학 구분 없이 마음껏 환자나 돌보고 싶다"고 했으므로 질릴 때까지 환자만 돌보는 윤회를 거듭하는 중이다. 그런데 광덕제 이순의 경우, 이 인물이 대체 어떤 소원을 빌어 황제가 되었는지, 아니 애초에 소원을 빌어서 황제가 된 건 맞는지, 천녀가 아닌 다른 루트로 빙의한 것인지, 전체적으로 의문투성이이다. 굳이 예를 들자면 이 인물이 (재석과 상희처럼 천녀에게 소원을 빌어 빙의하는 정석적 루트를 탔다는 가정 하에) 빌었던 소원이 "내가 역사를 바꾸게 해 달라"였다면, 본인 말마따나 재석이 다 해 놓았기 때문에 그는 바꾼 역사가 별것 없으므로 아무리 만족했더라도 윤회할 수도 있다. 그가 재석에 필적하는 나비효과를 불러일으킬 사건을 일으킬 때까지 계속.[23] 여담으로, 재석이 소원을 빌 때 사용한 물건은 연적이었고, 상희가 소원을 빌 때 던지면서 사용한 물건은 벼루였으므로, 광덕제 이순(에 빙의한 인물) 역시 문방(文房) 중 뭔가를 통해 천녀를 불러냈을 가능성이 있다. 연적은 먹을 갈 때 물을 공급하기 위한 일종의 물통이요, 벼루는 먹을 가는 판이므로, 먹이 있으면 깨끗하게 연적에서 벼루에 물을 따라 먹으로 간다는 인과관계가 성립된다. 따라서 이순에게 빙의한 사람이 건드린 물건은 먹일 가능성이 높고, 이후에도 유사한 현대인이 등장할 경우 붓, 종이, 문진, 종이 등 문방과 엮일 가능성이 있다.[24] 원평제의 동남아 정책이 대표적이다. 서양 국가라면 나폴레옹 전쟁의 여파로 무주공산이 된 네덜란드령 동인도에 세력을 뻗치거나 일정한 이권이라도 요구했을 텐데 함대를 파견해 지켜준 것도 모자라 아무런 대가도 요구하지 않고 깔끔히 물러났다. 작중 유럽에선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이었고 작품 외적으로 답답해하는 독자들도 있었으나 이를 통해 대한은 그 영국이 '대한은 먼저 공격하지 않으면 전쟁을 벌이지 않는다.'고 단언하고 우호 관계 유지에 집중할 정도로 다른 제국주의 국가들과는 다르다는 인식을 세계에 심어주었다.[25] 작중에서도 이는 "광덕제가 역대 태황의 유지를 깨고 독립국이던 유구국을 병탄했으니 대한이 예전 자신이 했던 약속을 깨고 힘으로 밀어붙일 수도 있다"며 섬라와 대한의 교섭 문제에 개입할 것을 주장하는 증국번의 발언으로 입증되었다.[26] 유구의 독립을 빼앗은 뒤 행보를 보면 자기 허영심 만족시킨 뒤 후속 조치는 조공 면제 하나 뿐. 그마저도 동군연합에선 자기가 자기에게 조공을 바치는 꼴이라서지 유구 인심에 대한 고려가 아니었다. 한인들의 범법 행위를 철저히 단속하고 배상하며, 유구 왕실을 꾸준히 챙겨 대한의 번국이란 국체에 만족하게 만든 건 재석이었다. 1년 2회 연공을 바치고, 200여년 넘게 대한군을 주둔시켜 사실상 번국이나 다름없는 위치였던 유구라서 백성들이 느끼는 박탈감이 약했고, 유구 지도층들도 올 것이 왔구나라는 마인드로 비교적 큰 저항 없이 받아들였기 망정이지 다른 소국이었으면 큰 소요 사태가 일어날 수 있었다. 400년간 성공일변도만 달리며 국수주의와 자국 우월주의가 뿌리 내리고 분리주의와 공화주의가 도전해오는 19세기에 이런 무책임한 리더쉽은 설령 본인이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폭주와 충돌을 불러올 가능성이 높다.[27] 실력이 더 좋은 일반 악공은 현지의 성격을 감당 못할 것이고, 현지에게 어른으로 대접받는 몇 안되는 인물이면서도 바이올린 연주도 할 줄 아는 사람이 화원장공주 뿐이기 때문이다.[28] 재석이 빙의하지 않았다면 형은 죽었을 테고, 그럼 이운은 대신 태손에 책봉되었겠지만 공부에 관심 없는 성격 때문에 조부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해 스트레스 받거나, 아예 계모 박씨의 야심이 실현되었을지도 모르니 사실상 재석의 빙의에 따른 수혜자다.[29] 공부를 그렇게 싫어하면서도 낚시에 관한 구절은 동서양을 가리지 않고 줄줄 꿰고 있는 걸 보면 정말로 머리가 나쁘진 않다. 그러면서도 낚시 하면 동양권에서 가장 먼저 떠올릴 태공망에 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 등 오해받을 일을 피할 식견 정도는 가지고 있다.[30] 독자들은 굳이 이런 발언이 나온 것을 보면 한 집에서 자란 홍천귀복과 이세연이 눈이 맞아 사고를 치게 된다는 복선 아니냐고 추측하고 있다.[31] 실제 박지원은 아들을 셋만 두었다. 즉 4남 박종선의 자손은 가상인물이다.[32] 다만 아나스타샤를 옆에 두려 한 건 내명부 정치싸움보다는 그냥 아샤가 너무 귀여워서 곁에 두고 싶어서란 이유가 더 컸다. 본인이 프랑스어를 못하다보니 아샤가 한국어를 할 줄 알기 전까진 크게 욕심 안내고 권씨쪽에 넘겼다.[33] 흥선제의 자식들 중 개혼인데다, 일국의 세자빈으로 시집가는 것이니 사실 당연했다.[34] 이걸 보면 광덕제가 여색에 쓴 돈이 상당히 많은 모양이다. 심지어 그나마 아들이니 챙겼지, 딸을 낳으면 나 몰라라 한다고 하니 사생아는 더 많을 듯.[35] 조부인 원평제부터가 후계자가 아닌 황손들은 그냥 쩌리 취급했다. 그나마 화원군주만 첫 손주 버프로 좀 예쁨받았을 뿐 나머지는 차별 대우해 태손인 재석이 창경궁 전체를 마음껏 사용하며 지내는 동안 이정 몫으로 주어진 공간은 겨우 낙선당의 방 한 칸이었으며 아버지 광덕제는 재석에게만 관심을 좀 보였지 총애가 식은 김 선시 소생인 이정에게는 관심을 전혀 보이지 않고 대궐 밖에 자주 나가면서도 단 한 번도 그를 찾아가지 않았다.[36] 원평제가 정을 특별히 총애하지는 않았지만 그나마 아들보다는 챙겨줘서, 분가할 때 재산은 넉넉히 주었다.[37] 원평제의 진짜 친동생 수복공주보다도 더 남매같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이다.[38] 그동안 몇차례 혼담이 들어와도 맏손녀를 어딜 감히 그런 집안에 시집보내냐고 걷어차버렸다고 한다.[39] 첫 언급 시에는 권세현이라고 나왔었다.[40] 어릴 때부터 홀어머니 슬하에서 자란 데다 모친이 태황의 절대적인 비호를 받는터라 반항할 수도 없었다.[41] 나현이 직접 조모에게 같이 데려가게 해달라고 요청하였는데, 미주 출신인 김씨를 데려가 미주 백성들의 지지를 올릴 목적이었으며 각각 북인, 동인 계열 집안 출신인 최씨와 송씨를 데려가지 않으면 각 계열에서 불만을 품을 수 있고 또 태손이 현지에서 여색을 탐하지 않게 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42] 2부에서 원 역사의 선조가 되었어야 하는 하성군이 왕이 되지 못했고 임해군의 역모로 후손들이 멸족되면서 원 역사의 하성군의 후손들인 인조 이후의 조선왕들과 종친들이 아예 태어나지도 못하게 되었다. 때문에 이 세계에서는 원 역사의 흥선대원군 이하응은 물론 아들인 고종 이명복도 존재하지 않는다.[43] 작가에 의하면 특정 연예인을 생각해두긴 했으나 상희와 올렝카가 실존하는 연예인들인 권나라, 마리나 본다코와 닮았다고 생각없이 말한 것이 당사자들에게 민폐라는 생각이 들었기에 권나현의 모델이 누구인지는 밝히지 않겠다고 한다. 독자들은 김유정 등으로 추측하고 있다.[44] 신혼 당시 재석의 키가 150cm 정도였는데 권씨의 키는 160cm도 넘어서 재석은 자신보다 눈높이가 한참 높은 권씨를 더 부담스러워한다. 어린 나이에도 이 시대 성인 여성들보다 큰 키이기에 재석은 권씨가 다 크면 상희나 올렝카만한 장신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 성인이 된 후 재석이 키를 역전했는지는 언급되지 않았는데, 재회한 나폴레옹이 이제는 아내보다 키가 크냐고 농담 섞인 질문을 건네자 정확히 대답하지 않는 것을 보면 성인이 되어서도 재석이 더 작을 수도 있다.[45] 사실 아주 근거없는 건 아니고, 상희의 신분이 환생할 때마다 계속 상승했기 때문이다. '지난번엔 정실부인+재취였으니 이번엔 처음부터 정실이겠지?'였는데...[46] 그러나 천녀는 상희를 만나게 해주겠다고 한 번도 약속한 적이 없으며 오히려 상희가 언급될 때마다 둘이 만나는 건 하기 나름이라고 말했다. 그걸 다 들어놓고도 재석 혼자 멋대로 기대해놓고 실망한 것이다.[47] 권씨의 입장에서는 귀엽다고 느낄 수밖에 없다. 겉보기에는 자신보다 2살 어린 정수리도 내려다보이는 작고 귀엽게 생긴 꼬마이고, 그녀에겐 다행스럽게도 자신이 원했던 상대가 아니어서 실망한 줄은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아직 여자를 대하기 어색해하는 것이라고만 생각한다.[48] 연애결혼이 아닌 이상 이 시대까지도 신랑신부는 결혼식 날 처음 보는 것이 대한 법도지만, 아나스타샤의 경우에는 특수성을 인정받아서 약혼자 신분일 때부터 만난다. 처음엔 미행(微行)하듯 마중을 갔지만 '누국공주가 외간남자를 만난다'는 헛소문이 나버리는 바람에 이후로는 태자 신분을 드러내고 나가게 된다. 덧붙여 소문을 퍼뜨린 이들은 금위사 방문을 받고 옻장 노역 7년에 처해졌다.[49] 유럽 사교계의 살벌함을 감안하면 당연한 결과다. 여전히 여성들의 대외 활동이 자유롭지 않은 대한에 비해 외유가 한결 자유로운 대신 평생에 걸쳐 스스로를 뽐내고 사교계에 적합한 인사임을 인정받아야 하며 살짝이라도 삐끗하면 즉시 뒷담화 대상이 된다. 똑같은 실책이라도 남녀간 리스크 차이가 현격한 것은 덤. 그런 유럽 사교계의 정점에 있는 왕족이었으니 대한 후궁들의 어설픈 견제는 이빨도 들어가지 않을 수밖에.#[50] 다른 후궁들이 선시로 시작하고 자녀를 생산하고 나서야 승작된 것과 달리 처음부터 재인 품계를 받고, 후궁들은 보통 생략하는 입궁 직후 웃어른들께 인사하는 절차도 거쳤다.[51] 표면상 이유는 연장자란 것이지만 실제론 후송 황실을 배경에 둔 조씨도 괴롭히며 텃세를 부린 경화 사족 출신 후궁에게 교육 담당을 맡길 순 없다는 의중이 깔려 있었다. 황태자비인 아샤 자신은 중립을 견지해야 하기에 직접 나설 수 없었고.[52] 실존인물 콜레스타는 야카마족 추장인 카미아킨의 다섯 아내 중 하나였다. 치료사(의사보다는 샤먼에 가깝다.)이자 직접 곤봉을 들고 전장에서 싸우기도 하는 여전사였다.[53] 현실이고 창작물이고 다른 인종엔 그러지 않으면서 유독 인디언 인명만은 직역해버리는 차별(존 베이커를 빵굽는 요한으로 직역해버리는 수준의)이 공공연하고 명군이 되어보세의 인디언 등장인물도 여태 그런 전철을 밟아왔기에 이름이 공개되기 전까지 설왕설래가 조금 있었는데, 다행히 실존 인물에 모티브를 가져와 제대로 지었다. 실제 인물은 1800년 생이니 무려 한 세대쯤 늦게 태어난 셈.[54] 이때 부축한 게 아니라 아예 들고 가버리면서 이창의 발자국이 사라졌고, 배척받는 처지라서 평소에 기척을 숨기고 다니는 데에 익숙했기에 추적에 능한 미주 병사들도 수색이 오래 걸렸다.[55] 이창이 은혜를 갚기 위해 일을 도우려 했는데 신분이 신분이라 노동을 해 본 적 없다보니 민폐만 끼쳤고, '아무 일도 안 해도 되니 대신 내 신랑 해라'라는 식으로 말한다. 이를 보면 어차피 일은 자기가 잘 하니 일은 잘 못하고 나약하지만 병은 안 걸리는 한인 남자를 기둥서방처럼 두고 살 생각이었던 듯.[56] 수색대가 마침내 이창을 찾아낸 것이 조난 후 8일이나 지난 시점이었으니 그녀가 없었다면 산속에서 어떻게 되었을지 몰랐다.[57] 수색대가 들이닥쳤을 때에도 성관계를 하는 중이라서 민망한 상황이 되었다고 한다.[58] 그런데 재석의 우려와 달리 의외로 선배 후궁들은 딱히 반발하지 않았다. 바로 그 한미한 출신 탓에, 애초에 견제 대상으로 여길 가치조차 없다고 여긴 것.[59] 고향은 심양이다.[60] 3부 때 태황태후가 뽑은 후궁들도, 평범 이상이긴 했으나 절색까지는 아니었다.[61] 원래 황녀들의 결혼은 다 강혼이기 마련이었지만, 본인 세대부터는 전례가 없던 국제결혼이 이루어져 이복언니들이 일국의 군주가 될 사람을 남편으로 맞았기 때문에 이야기가 달라졌다. 청태자비 정현공주야 황후가 낳은 적녀이니 한 수 접어줄 수밖에 없다 쳐도 같은 후궁 소생인 동비의 딸 정민공주도 공주 책봉을 받고 유구왕비가 되었다. 국제결혼 이야기가 또 나오지도 않고, 별수 없이 강혼할 처지가 되어야 할 것 같으니 배아파했다.[62] 아버지는 모르지만 어릴 적 담을 넘어 놀러나간 적도 많다고 한다.[63] 이쪽은 서자지만 장자라는 이유. 이미 성인이라 광덕제의 아들들 중에서 가장 적절하다고 다음 태황에 추대될 확률이 높기에, 동생이자 서자인 자기가 보위에 오르려면 얘도 없어지는 게 좋은 방해물이기 때문이다.[64] 그러나 치밀하긴 했지만 완벽하게 치밀하진 못 해서 어설픈 반정 시도가 실패로 돌아가고 결국 본인의 목숨도 날려버린 예왕과는 달리 이쪽은 너무 허술했어서 시도도 하기 전에 망했지만 역으로 그랬기에 목숨이라도 건질 수 있었다는 점이 아이러니한 부분이다.[65] 때문에 독자들 사이에서 예왕이 대대적으로 재평가받았다.[66] 실존인물. 원역사에선 헌종 시기 은언군의 손자를 왕으로 추대하고자 반란을 모의했다가 적발되어 처형당했다.[67] 원역사에서의 한반도 최초의 폭탄 테러는 1875년 일어난 민승호 암살 사건이었다.[68] 다만 테러의 대상이 한명은 미래인이고 다른 한명은 미래인으로 추정되는 인물인지라 당연히 폭탄테러의 가능성을 알고 있다는 점에서 성공하기는 힘들었다.[69] 정황상 폭탄을 만드는 방 안에서 담배를 피우다가 이렇게 된 듯.[70] 핵심 가담자 30여명은 참수형, 가담 정도가 아주 경미한 소수의 사람들은 석방되었고 나머지 단순 가담자 200여명은 기념함 겸 예식용으로 몇 척 남아있던 거북선과 판옥선의 노젓는 노예로 20년간 복무하는 벌을 받는다. 굳이 이런 처벌을 내린 데에는 광덕제의 서양 취향이 작용한 듯.[71] 재석이 몰래 읽는 '구대검협전'이란 무협지가 있는데, 제목이 비슷해서 그가 쓴게 아닐까라고 추정하고 있다. 김조순이 임종 전에 재석의 문안을 받았을 때 본인이 썼다고 인정한다.[72] 원평제 앞에서 학습을 점검하는 시간에선 배우지 않은 논어 구절을 물어서 재석을 낚고 진도를 더 빠르게 빼기도 한다. 이렇게 재석의 총명함을 이끌어내면 함박웃음을 짓는 걸 보면 즐기는 듯.[73] 만약 광덕제가 낙마할 때 곁에 있었다면 제대로 보필하지 못한 죄를 받을 수도 있었으니, 뒤로 밀려나 있던 게 박규원에게는 다행이었다.[74] 총 9명[75] 이진용(보리스)을 시조로 분가한 본관으로 보로는 이진용의 고향 러시아 보로네시에서 유래한다.[76] 안남에 군용 전신선을 깔자마자 본국에 처음 보고한 소식이 전투 코끼리를 앞세운 안남군에게 아군이 패전했다는 패전 보고였다.[77] 이하 호위대도 오도리 출신인데 이유는 옹주와 눈맞을 가능성이 전무한 게 오도리이기 때문이다.[78] 태자가 국정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아서 태자비는 관심을 안 가졌다가 박규수가 감사 인사를 올리러 와서야 뒤늦게 알게 되었다는 묘사를 보면 태자비와 본래 가까운 사이는 아니었던듯.[79] 재석은 외숙이 조롱당하면 결국 그 허물은 자기에게 돌아오는데다 비록 사기당해 산 것이지만 검 자체는 명검인 점을 고려해 태황에게는 장조의 아들 진안군이 사온 모조 장팔사모, 경조가 사온 모조 청룡언월도에 이어 쌍고검까지 갖춰서 삼국지 세트를 맞추기 위해 가품인 줄 알면서 샀다고 하자고 말을 맞춘다.[80] 사실 장덕순의 잘못은 아닌게 조정에서 기밀을 유지한다고 장덕순에게는 종성공이라고 알려주지 않고 소왕네 머슴이라고만 알려줬기 때문에 일반 유배죄인 수준으로 느슨하게 감시했기 때문이다.[81] 다만 스승을 닮아 출세보다 학문에 더 관심 많은 성격인지 재석은 속으로 장덕순은 벌이 아니라 상으로 여길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82] 그래서 김대건 안드레아가 1호 신부가 되었다.[83] 작중 세계의 광해군.[84] 사실 새로운 산업을 찾으려는 이유는 본국에서 주석을 생산하면 자신이 주지육림을 더이상 못 누리게 되기 때문이란 이유가 컸지만, 정말로 어리석은 자였다면 자기 생전에는 그럭저럭 버틸 수 있으니 생각을 정지하고 살던 대로 계속 살 수도 있었을테고 현실의 21세기의 자원 부국들 중에도 그런 생각으로 국가를 막장으로 밀어넣는 지도자들이 많다. 뒤늦게나마 제대로 된 길을 찾은 것을 보면 군주의 자질이 없진 않았다고 봐야 할 듯.[85] 1부 정호찬은 보상이 있건말건 우직히 충성하는 타입이었고 3부 정호찬도 충신이지만 나름 계산적이라 자기 이득은 자기가 알아서 챙겨먹는 타입이었다.[86] 조정 중신들은 물론이고 하진교도 이게 조롱이라는 걸 알지만 정작 본인은 그걸 모르고 좋다고 먹는다.[87] 이런 위험한 방법을 택한 이유는 재석에게 무인정사과 계유정난에 관한 설명을 들은 것을 바탕으로 최대한 빠르게 궁을 장악하는 것이 성공 가능성이나 전후 처리에서나 가장 바람직하다 판단했기 때문이다. 실제로도 대한에 빚을 지지 않고 최소한의 인명피해로 집권하여 하와국에도 별다른 부담을 지우지 않았기에 현명한 판단이었다. 재석도 자신이 하진교의 입장이였으면 같은 방법을 택했을 거라고 인정했다.[88] 비유적인 의미가 아니라 5년만에 만난 본국 사람들이 정말 못 알아보고 처음에 하진교인 줄 안 믿었다[89] 하진교의 이복동생 중 한 사람도 호환을 막겠다며 나갔다가 호랑이밥이 됐을 정도.[90] 국가원수에 대한 갑작스런 신체 접촉이니만큼 일반적이라면 암살시도 취급을 당해도 할말이 없고, 그나마 당사자들이 인척관계에 둘 다 국가원수 신분이라 암살 의심은 벗더라도 보통은 심각한 결례로 간주될 수 있다.[91] 그 전까지는 하와국 전사들이 대한 본국 근위대로 파견갔다가 다시 누손으로 파병가는 경우가 많았으나 하진교가 술루국처럼 정식으로 하와국 국군을 파병하기로 한 것.[92] 하진교는 하와인 중신들에겐 불만 있으면 전사로서 덤비라고 해서 중신들이 아무 말 못하지만, 이동연에게도 그럴 수는 없으니 말을 들어준다. 툴툴거리긴 해도 화내지는 않고, 적당히 놀리기만 한다.[93] 원 역사에서는 그의 동생 완복홍일이 제위에 오른 뒤 이 이름으로 개명했다.[94] 동음이의어 부록이 자꾸 생각나서, 아무리 허수아비로 세울 예정이라지만 대놓고 그렇게 취급하는 것 같아 재석도 마음이 좋지 않았다.[95] 그래도 이렇게 진지한 고민을 한다는 것 자체가 그가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라 인재라는 뜻이긴 하다.[96] 화번공주로 뽑히며 태황의 양녀로 입적되어 족보상으로 흥선제의 딸이다.[97] 실제로 작가가 이용갑을 이병갑이라고 오타를 내기도 했기 때문에 독자들에게는 조병갑 + 이용태 설이 거의 정설이 되어있다.[98] 이 점은 1부의 박원종과 비슷하다.[99] 이 시점에선 양장을 입고 머리도 짧게 자른 서구화된 모습을 한다.[100] 시야는 좁았지만 감정적 이유는 충분했다. 아버지가 상소문에 헛소리를 적는 바람에 원한 적도 없는 군대에 가서 몇년동안 전방에서만 근무했다. 1년에 겨우 절반 들어오는 집에서는 애국하라면서 아예 말뚝 박을 걸 종용하는 아버지와 호시탐탐 자기 자리를 노리는 어린 계모와 부딪혔다. 그나마 예쁜 아내 때문에 마음을 잡고 가출까지는 참고 있었지만.[101] 1년 이상 본국에 체류하면 군대 영장이 나온다(...)[102] 원 역사에는 스미스 사후 모르몬교의 지도자가 된 브리검 영이 한 일이다.[103] 실제 역사 청나라에서 가경제 때인 1813년 자금성에 백련교 자객들이 침입하여 왕자 시절의 도광제가 직접 총을 들고 싸웠던 일의 오마쥬.[104] 재석이 실내운동이라도 하라고 현대식 다트를 투후라는 이름으로 만들어줬는데, 다트를 꽂을 때 풍기는 살벌함이 나인들은 물론 동생 이창까지도 벌벌 떨게 만들 정도다. 숙부와 고모들도 친왕과 장공주(작중 언급은 화선장공주 뿐이지만 태후 소생이란 점에선 친왕까진 포함일 것이다.)나 숙부, 고모로 불러주고 후궁 소생은 군왕이나 옹주들은 숙부, 고모로 부르지도 않는다. 그나마 제대로 어른 대우한 건 친부모와 화원장공주 내외, 순친왕 내외, 김좌근 뿐이라 태후 소생 자녀들은 호칭만 존칭인 수준인 듯 하다.[105] 처음에는 덕명의 주선으로 몰래 밀담을 했지만 그 후에는 덕명이 대놓고 그를 소개하고 공개적인 로비활동을 한다.[106] 대칸의 애첩을 굴마훈의 수하가 납치해서 결박하고 눈과 입을 막고 강간한 후 대칸이 부른다고 럭더훈을 속여 그 방으로 오게 했는데, 머리가 둔한 럭더훈이 다른 궁인들을 부르지도 않고 혼자 대칸의 애첩을 풀어주었다가 자신이 강간범으로 몰리게 되자 무작정 도망부터 쳐서 대칸에게 범인으로 찍히게 되었다. 게다가 굴마훈은 럭더훈이 성서의 압살롬처럼 아버지의 왕위를 뺏기 위해 아버지의 애첩을 강간했다는 헛소문까지 퍼트린다.[107] 작중 일본은 대한과의 교류와 성리학의 영향으로 원 역사보다 근친혼이 터부시되는 경향이 강해져서 사촌간 결혼도 망설일 정도가 되었다.[108] 송태후가 자신의 딸인 영화공주를 대한 황태자의 후궁으로 보내려는 것에 대해 "대한과 전쟁을 하면 대한군이 후송의 도시를 불태우고 대한과 우호를 맺으면 대한이 후송의 재물을 쓸어가니 어느쪽이든 결과는 같다"는 말을 남긴 거 보면 그나마 시국을 어느 정도 볼 줄 알기는 아는데 그냥 본인이 일을 안 하는 성격이다.[109] 이마저도 원래는 폐태자를 지지한 신하들까지 전부 숙청하려는 것을 임칙서 등 폐태자를 반대한 신하들이 만류했기에 친왕들만 본보기로 죽이는 것으로 타협한 것이다.[110] 그만큼 원 역사의 서태후가 막장이었던 것이다.[111] 대한과 상당히 우호적인 관계가 되었으니 당장은 불필요해진 요주, 항주, 명주 도통부를 먼저 군사적으로 제압해야 한다는 강경한 구상을 내놓는다.[112] 폐태자 계획을 반대한 이 중 가장 격렬하게 반대하여 사실상 폐태자 반대파의 대표였다.[113] 원 역사를 아는 독자들은 임칙서가 잘못된 선택을 했다고 우려했지만 작중에서는 대한의 존재로 인해 아시아 국가들도 세계와 끊임없이 교류하고 있고, 후송은 청과 끊임없이 싸워가며 발전을 멈추지 않았기 때문에 달리 봐야 할 것으로 보인다.[114] 구원군을 안보낸건 아니지만 전부 막혔고 본인은 조정에서 장사 사수를 강요받았다[115] 작품 외적으로 본다면 원래 서태후처럼 무개념 행보를 계속하며 나라를 말아먹는 캐릭터로 기획된 송태후가 일생을 바쳐 자기가 싸놓은 똥을 열심히 치우는 캐릭터로 변경되면서 등장이 사라졌을 듯하다.[116] 다만 대한인들만 헌왕으로 부르고, 조심원과 그 측근들은 자신들끼리는 한왕이라고 한다.[117] 안남 지역 민심이 그렇게 순순히 숙이고 들어올 거였으면 후송보다 국력이 앞서는 대한이 최소한 안남 절반은 직할령으로 삼아 다스리려 들었을 것이다. 대한조차 안남의 반골 기질과 통치의 어려움을 알고 완씨 왕조를 없애지 않았는데 그 완씨에게 백년 넘게 항거하는 북부 지역을, 그것도 겨우 3만의 직할군으로 병합하려 들었으니 될리가.[118] 덕성도 역시 예수교의 요소가 들어갔기 때문에 크게 보면 생겨난 배경은 원 역사와 같다고 할 수 있다.[119] 원 역사와 동일하게 1814년생이라, 이때 시점인 1843년 기준으로 아직 29세밖에 되지 않은 젊은이다.[120] 노란색을 상징색으로 쓴 원 역사의 태평천국과 달리 공산주의를 상징하는 붉은색을 상징색으로 쓰고, 마오쩌둥 어록과 유사한 자신의 어록을 담은 붉은색 표지의 책을 들고다니며, 태평천국이 전세계의 묘노들을 선동해 일으킨 홍적의 난도 추수봉기나 테트 공세 등 각지에 지하조직을 침투시켜 '여러 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봉기를 일으키는 공산당의 전략을 사용하는 등 여러모로 공산당과의 연관성이 많다.[121] 일부 독자들은 작중 홍수전이 미래인이 빙의했다기엔 19세기 기준으론 유능하나 21세기 기준으론 어딘가 부족한 점과 함께 외국과 은밀히 거래해 외국용병과 무기를 수입하고 조병창까지 세우는 군사적 식견, 홍수전의 가르침을 따르는 배상제회의 부자들을 약탈하고 죽여서라도 재산을 빼앗는 과격하고 폭력적인 부의 재분배 방식과 한족을 선택받은 민족이라 주장하며 다른 모든 민족을 배척하는 극단적인 외국인 혐오와 국수주의 성향 등을 들어 중국 공산당 출신 빙의자설과 엮어 어쩌면 평범한 공산당원이 아닌 중국 군벌이나 홍위병 또는 분청 출신일지도 모른다는 추측을 하기도 한다.[122] 일단 재석은 시작부터 왕으로 했으니 신하들의 반대가 있어도 어쨌든 자기 구상을 밀어부칠 권력을 기본으로 가지고 있었고 어려서 농사도 지어봤고 고시생 때도 꾸준히 덕질을 하는 등 아는 것도 많았다. 무엇보다 몇차례나 환생하면서 지식과 정략에 대해 통달하기 까지 했다. 그러나 홍수전은 어려서부터 별다른 기반은 없었고 지식도 얼마만큼 아는지 나온바 없으니 출발선상부터 다른 셈.[123] 같은 회차에서 송태후가 맏손녀에게 권력 같은 거 다 제쳐두고 손녀를 안쓰러워하는 할머니의 모습을 보여줘 독자들에게 더욱 욕먹었다.[124] 실제 풍운산과 홍수전이 사촌 관계였는지는 설만 있을 뿐 확실하진 않은데 작중에서는 실제 홍수전의 고종사촌인 것으로 설정되었다.[125] 원역사에서 나루히토의 모친은 다카쓰카사 요시코이다. 작 중 이에츠구의 누이의 아들이라는 것으로 보아 원역사와 이름만 같은 다른 인물이다.[126] 이유도 다른 이유 없고 그저 돈지랄 대결에서 졌기 때문(...)[127] 대한이 일본과의 합의를 어기고 아모국 내정에 간섭한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었지만, 부족장이 친일파니 일본에게는 오히려 이득이라 그냥 넘어갔다.[128] 하지만 원역사에서는 명군으로 평가받을 만한 점도 있었다. 북부에 지방관을 파견해 중앙집권을 강화했고 세금을 깎아줬다. 본작에서도 이런 점은 변함없는지 응우옌 왕조에 비판적인 고백적도 명명제가 능력은 있었다고 평가했다.[129] 지네가 기어가는 것 같은 문자라고 폄하하는 건 덤이다. 그렇다고 쯔꾸옥응으을 채용한 것도 아니다. 천주교 박해 때문에 이쪽은 국문보다 더 심하게 박해받았다. 한자와 쯔놈은 일반 백성이 배우기엔 너무 난해하다는 점을 감안하면 명색이 유학자면서 문맹 퇴치나 교육엔 아예 관심이 없었다고 봐야 한다.[130] 현장의 의원들은 그런 말도 안 되는 지시를 따르지 않았지만, 관에서 약을 공급하지 않으니 사망자가 폭증했다.[131] 정작 전쟁 준비는 전혀 안 되어 있고, 안남군은 딱 봐도 대한의 상대조차 못 되는 처지였다.[132] 이름부터 시작해 언어와 문자, 의식주, 종교까지 전부 안남식으로 바꿀 것과 안남인과의 결혼을 강제하고 이를 따르지 않으면 죽인다는 것이다. 말이 민족동화지, 문화말살에 가깝다. 심지어 이러한 정책을 대한인과 안남인들 사이에서 태어나 대한의 복식과 문자를 자연스럽게 사용하는 혼혈들에게도 똑같이 적용하려 했다.[133] 이런 식으로 공포정치를 벌여대니 대다수 신하들도 황제의 뜻을 거스르면 죽는다는 두려움에 더더욱 위축되어 무조건 따르는 예스맨이 되어버리는 악순환의 고리로 이어졌다.[134] 사실 홍삼을 이 지경으로 과용하면 간부터 작살나기 시작해 몸이 다 망가진다. 20대 초반 젊은 나이에다 천연두에 걸리고도 살아남을 정도로 건강한 체질이라 버티고 있는 듯.[135] 실제로 원역사에서 비슷한 시기 재위했던 조선 헌종의 사인이 과도한 정력음식 복용의 부작용으로 추정되기도 한다.[136] 실제로 의도한 것인지 생각없이 저질러놓고 갖다 붙인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이후 이것이 의도된 행동이었다고 주장했다. 자신이 고자라는 소문을 확실하게 반박하는 증거를 만들기 위해 조작이 어렵도록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직접 성행위 장면을 보여줬다는 것이다. 적장자가 없는 국왕에게 성기능 이상이 왔다는 소문은 작게는 체면 손상에서부터 크게는 후계구도에 대한 불안감까지 온갖 문제를 일으킬 수 있으니, 공개 성행위로 이미 깎인 체면을 좀 더 깎는 대신 후계구도 불안정성에 대한 의심을 말소하려는 의도였다면 나름대로 참작은 가능하다.[137] 태후에게 공개 섹스쇼를 선보이며 충격을 준 완복시는 본인이 효자라고 생각하고 있으며, 유독 태후의 의견에만 정면으로 거스르지 못하는 것을 보면 자기 나름대로 어머니를 아끼는 것은 확실하다. 문제는 완복시의 사고방식이 워낙 정상의 범주를 벗어나서, 어머니에게 아들의 성기능이 뛰어나다는 것을 직접 행동으로 보여준 것을 효행이라고 생각하고 있다.[138] 심지어 대한 귀에만 안 들어갔을 뿐 더 엽기적인 짓까지 하려고 했는데, 대한이 계속해서 치죄사를 보내 사죄를 요구하자 한황에게 받아먹은 홍삼탕을 돌려주겠다며 자기가 싼 똥을 상자에 담아서 보내라는 지시를 내렸으나 모두가 그것만은 안된다며 만류하여 이뤄지지는 않았다.[139] 그의 가솔들 일부가 달아나는 데 성공했기 때문에 완복시 일행의 행방을 대한군에 토설하는 일을 막으려면 살려서 인질로 두는 게 맞았다.[140] 이를 위해 후송과 협상하면서 필요하다면 자신의 여동생들을 전부 후송 황제에게 후궁으로 바치는 것도 주저하지 않겠다는 막장스런 생각까지 한다.[141] 성리학 원리주의 성향에 엽색 행각, 입으로는 성현의 가르침을 주워섬기지만 기실 치졸하고 잔인한 성격이란 점에서 2부의 원본 경성군과 판박이. 재석이 빙의하지 않고 경성군이 계속 재위한 조선의 말로를 보는 것 같다는 감상이 많다.[142] 대한의 광덕제도 태자 시절엔 비슷했으나 부황의 건강이 안 좋아서 대리청정을 할 때는 눈치껏 유흥을 줄이고 나름 국정을 챙겼던 것과도 대비된다.[143] 실제로 원 역사에서 그는 아버지 이상가는 색마로 자라났다. 사덕제가 치를 떨 정도로 엽색 행각이 심각했다. 명명제의 44녀, 즉 자신의 고모할머니(나이로는 겨우 12살 위였다) 완복유의(阮福柔儀)와 근친 불륜관계를 맺어 딸을 얻는 정신나간 짓을 하질 않나.##[144] 원 역사 후 레 왕조의 마지막 왕인 민제 여유기랑 한자까지 같은 동명이인이지만 민제는 여유조의 장남 여유의의 아들이다. 또한 실제로는 여유근의 후손에 대한 기록은 없어 족보를 조작했거나 가상인물인 것으로 보인다.[145] 후송의 종주권을 부인할 경우 대한한테 '신의가 없는 나라'로 찍혀 안남처럼 대한과 후송한테 응징당할 것이고 대한의 번국이 되겠다고 할 경우 명목상 상국이지만 섬라에 아무런 힘도 쓸 수 없는 후송과 달리 대한은 충분히 그럴만 한 힘이 있고 그 결과 양국의 관계가 상호적인 교섭이 아닌 일방적인 상명하복로 격하되어 대한에게 이리저리 휘둘릴 것이기 때문이다.[146] 네덜란드는 얼마 전까지 적국이였던 아체를 일본과 충돌하며 도울 이유가 없었고, 페르시아는 자기 코가 석자라 지원을 거절했다. 오스만은 그래도 이슬람의 종주국이란 체면 때문에 일본에 경고 서한을 보냈지만 씹혔고, 이에 대한에 일본을 막아달라는 요청을 했으나 대한 역시 일본을 막을 생각이 없어서 거절했다.[147] 아무래도 대한을 일본의 상국 쯔음으로 여긴 모양이다.[148] 원역사의 알렉산드르 2세와는 혈통부터가 다른 사람.[149] 원 역사에서 마리아 요제파는 나폴리의 페르디난도 1세와 혼인 예정이었으나 천연두로 사망해 원래 프랑스의 루이 16세와 혼인 예정이었던 마리아 카롤리나가 페르디난도 1세와 혼인하고 마리아 안토니아(마리 앙투아네트)가 프랑스로 간다.[150] 원역사에서는 알렉산드르 2세의 황후이다.[151] 명군이 되어보세 2부에서부터 계속 가르시아라는 이름의 스페인인 캐릭터가 대한에 반대하는 역할로 등장하는데 4부의 가르시아는 이 사람과 맥시코인 군벌 수장이고 각각 4번째, 5번째 가르시아이다.[A] 원 역사에서 프란츠 2세의 부인 마리아 테레사의 친모인 마리아 카롤리나가 원 역사와 다르게 프랑스의 왕비가 되었기에 원 역사의 마리아 카롤리나의 후손들은 태어나지 못 했다.[A] [A] [A] [156] 원역사에서도 둘이 불륜 관계였고 막시밀리아노 1세가 이 둘 사이에서의 사생아라는 소문이 있었다.[157] 1815년생으로 4부의 이재석이 빙의한 흥선제보다 1살 연상이다.[158] 원 역사에서는 콜레라에 걸려 사망했는데 작중 세계에서는 이미 3부에서 상희에 의해 경구수액이 일찍 등장했기에 그 영향으로 생존한 것으로 보인다.[159] 이때 루이지애나로 갈 것을 권유받았지만 거절했기 때문에 나폴레옹이 신불랑국을 건국해서 재기할 수 있었다.[160] 다만 아주 틀린 건 아닌 게 누벨프랑스는 대서양을 건너 유럽에 군사를 상륙시킬 역량은 부족하므로 프랑스를 되찾고 싶어도 방법이 없다.[A] [162] 원역사와 달리 라이히슈타트 공작을 나폴레옹 2세로 인정하지 않았다.[163] 조형서가 재석에게 번번히 저지당했다고는 하나 서나라로부터 형주를 탈환하고 소무자전 편찬으로 대표되는 문화적 업적, 대한과의 외교가 정상화되어 뒷날 준우호국이 되는 기틀을 다지는 등 대외적으로 결코 업적이 모자란 황제가 아니다. 창업주인 조승복을 제외하면 그 누구도 조형서 이상의 업적을 쌓지 못했다.[164] 원역사에서 푸시킨을 결투로 죽여버린 사람이다.[165] 다만 국혼은 진지하게 추진한 게 아니라 혹시 가능할까 수준으로 필 총리와 얘기해본 정도인데다가, 남편 앨버트가 그토록 좋아하는 애들을 멀리 보낼 리 없다는 이유로 곧 생각을 접는다.[166] 플로렌스 나이팅게일과 엘리자베스 블랙웰의 호소를 받아들여 '여학생들을 위한 의대' 설립에 동의한 것도 여성의 사회진출을 긍정해서가 아닌, 어디까지나 정숙해야 할 여자들이 외간남자와 접촉하는 걸 최소화하기 위함이었다. 이는 조선/대한에서 의녀를 양성한 이유와도 일치하기 때문에 한국의 예를 본받는 격이기도 하다.[167] 물론 필의 주장에도 합리적인 근거는 있었다. 두 나라의 문화가 너무나 이질적이고, 대한 황실은 후사를 빨리 보기 위해 조혼을 하는데 아나스타샤는 너무 어리다는 것. 대한의 문화에 대한 상당한 이해를 갖고 있었다.[168] 러시아의 태평양 진출이 한국에게 막혀 그 힘이 오스만을 향하고, 러시아군이 한국산 최신 무기까지 사용하는 상황이 불만족스럽기는 하나, 자국 영토를 지키는 것과 돈 주고 상품을 파는 건 당연한 일일 뿐이라는 건 잘 알기 때문에 한국을 원망하지는 않는다.[169] 이게 유명해져 훗날 동아시아 순방을 온 케임브리지 공은 겨울 동안은 추위를 피해 한양을 떠나 일본에 머물렀다.[170] 찰스 다윈은 사촌간 혼인을 했는데, 별로 좋지 않은 사회적 인식과는 별개로 영국을 포함한 대부분의 서구 국가에서는 당시는 물론 현대까지도 사촌간 혼인이 합법이다.[171] 유명한 웨지우드 도자기 가문의 딸이라 재석이 우리 대한제 도자기의 경쟁자라고 농담을 하기도 했다.[A] [173] 러시아 황실은 3부에서 대한 공주 루시아가 시집온 후로 효도를 큰 가치로 받들게 되었다고 한다.[174] 원역사에서는 매국노 정명수의 만주 이름이 굴마훈이었다.[175] 원역사에서는 1830년 그리스 독립 때 왕으로 추대되었으나 본인이 거절했고 1831년 벨기에 왕위를 받아들인다.[176] 일반적으로 특명전권대사는 본국에서 가까울수록 선호도가 높고 관계의 비중이 클수록 요직인데 바로 이웃나라에 관계도 밀접한 누벨 프랑스 주재대사라면 국무장관을 지낸 거물이 가는 어마어마한 요직이라도 이상하지 않다.[177] 원 역사에선 퇴임 후 민주당 지도부의 요청을 받아 남부 지역을 순회여행하던 와중에 당시 뉴올리언스에서 유행하던 콜레라에 걸려 1849년 사망했지만 여기선 1852년 기준으로도 여전히 살아있다. 역사가 바뀌어 뉴올리언스에 가지 않았거나 설령 걸렸더라도 이미 3부에서 상희가 경구수액을 개발해 퍼뜨렸기에 그 덕택에 콜레라를 극복하여 사망하지 않은 것일 수도 있다.[178] 진출방향이 서쪽에서 남쪽으로 바뀌었을 뿐 원 역사와 비슷하게 명백한 운명을 명분으로 내세운다.[179] 그 나폴레옹이 있는 누벨프랑스를 상대로 전쟁을 벌여 이길 수 있다고 내세운 논리가 "나폴레옹은 영국에게 패배했고 자신들은 그 영국과 싸워 이겼으니 질 리가 없다"는 지극이 단순한 근자감이었다.[180] 여기서 지지세력을 설득할 때 스페인은 유럽열강도 아닌 대한 '따위'에게 패배해 필리핀을 뜯긴 나라니 별거 아니란 말을 하는데 작중 영국도 강대국으로 인정하는 대한을 우습게 안다. 그가 식견이 좁고 백인우월주의에 사로잡힌 편협한 인간임을 여실히 보여준다. 총통이 되었으면 나라를 말아먹을 뻔.[181] 운 좋은 괴짜 졸부로 유명한 티머시 덱스터 경을 동향 출신 선배 상인이라며 존경한다.[182] 이훈도 모든 잘못은 자기 아버지에게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서 재석에게 원한은 없었다.[183] 사장 스크루지는 신불랑에 돈을 내고 남작 작위를 산 사람인데, 업무에는 매우 깐깐하지만 직원들에게 공정한 대우를 한다는 점이 크리스마스 캐럴에서 개심한 후의 스크루지를 모티브로 한 듯.[184] 베니스의 개성상인의 주인공 유승업에서 모티브를 얻은 듯.[185] 어렸을 때는 키도 작고 샌님같은 외모였는데, 그동안 많은 역경을 극복해오면서 체구도 커지고 상남자 스타일로 외모가 달라졌다. 게다가 자신을 알던 사람이라도 못 알아볼 가능성을 높이려고 일부러 미국식 콧수염을 기른데다 안경까지 쓰기 시작하는 등, 작정하고 인상을 바꾸었다.[186] 이쪽이 한발 먼저 눈치챘다. 이훈의 한국어 말투가 상류층들이나 쓰는 상당한 고급 수준이었기 때문.[187] 겸손이 아니라 정말로 14명 잡은 정도는 별거 아니라고 여기고 있었다.[188] 프랑스어로는 누벨 프랑스 제국, 원미주에 위치.[189] 물론 이는 명분이고 실제로는 국가가 빠르게 팽창하는 데 필요한 재물을 확보하고 루이 19세의 침공을 대비한다는 목적이 있었다.[190] 원 역사에서는 증기선이나 열기구 등의 신병기를 불신하며 채용하지 않았는데 여기서는 철도나 증기 자동차가 이미 대한 등지에서 성능과 안정성이 입증된 기술이므로 대대적으로 채용한 것 으로 보인다.[191] 그래도 걸물이라는 것은 부정하지 않으며 그의 전술을 교육시키고 있다.[192] 작중 나폴레옹의 행보가 대한의 시조인 태조 이성계가 고려를 무너뜨리고 조선을 건국한 것과 비슷하기에 대한 입장에서는 마냥 비난만 할 수는 없을 것이다.[193] 자살하면 교회법 상 미사를 올릴 수 없기 때문이다.[194] 훙크파파 지파는 원 역사에서 웅크린 황소의 부족이었다.[195] 유럽에 남은 원수들까지 포함하면 오귀스트 마르몽이 가장 장수했으나 배신자를 그를 나폴레옹의 원수로 쳐주는 사람은 없었다.[196] 4부 초반 '추포를 할 정도로 큰 일은 아니었다'는 사건의 전모가 밝혀진 것. 원 역사의 홍경래의 난 같은 대규모 반란이나 3부의 장길산 정도만 됐어도 홍경래가 죽거나 숙청당하지 않는 이상 신불랑과의 협상은 불가능했겠지만 대한에선 '공부하기 싫은 놈들이 벌인 난리' 정도로 여긴다. 그래서 홍경래도 재석을 만났을 때 정중한 예를 표했고, 사대부로서의 자부심이 강한 김유근이나 못마땅해할 정도였다.[197] 덕분에 재석이 알아볼까 속으로 전전긍긍하던 이훈이 재석에게서 벗어날 수 있게 본의 아니게 도왔다.[198] 다만 이 드라마는 90년대 현대가 배경.[199] 기해박해 때 순교한 천주교 신자들 중 남명혁 다미아노라는 인물을 모티브로 한 듯하다.[200] 나폴레옹은 그 필요성은 인정하지만 공사의 어려움을 쉽게 짐작하고 대륙횡단철도가 우선이라는 입장이었다.[A] [202] 埃集骰[203] 파리채 사건은 원역사에서도 일어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