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D8D5C9><colcolor=#000000> 홀란트 왕국 로데베이크 1세의 왕비 오르탕스 드 보아르네 Hortense de Beauharnais | |
이름 | 오르탕스 외제니 세실 드 보아르네 (Hortense Eugénie Cécile de Beauharnais) |
출생 | 1783년 4월 10일 |
프랑스 왕국 파리 | |
사망 | 1837년 10월 5일 (향년 54세) |
스위스 투르가우 아르넨베르그 | |
배우자 | 루이 보나파르트 (1802년 결혼) |
자녀 | 나폴레옹 샤를, 나폴레옹루이, 나폴레옹 3세, 샤를[1](사생아) |
아버지 | 알렉상드르 드 보아르네 |
어머니 | 조제핀 타셰 드 라 파제리 |
형제 | 외젠 |
종교 | 가톨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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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랑스 제1제국의 황후 조제핀 드 보아르네가 첫 남편인 프랑스의 장군이자 보아르네 자작인 알렉상드르 프랑수아 마리 드 보아르네(Alexandre François Marie de Beauharnais, Vicomte de Beauharnais, 1760 ~ 1794)와 결혼했을 때 낳은 1남 1녀 중 둘째인 딸이다. 즉, 조제핀의 재혼 상대인 나폴레옹 1세의 의붓딸이기도 하다. 또한 나폴레옹의 친동생인 루이 보나파르트와 결혼했다가 이혼하기도 했다.2. 행적
의붓아버지인 나폴레옹과의 관계는 좋았지만, 나폴레옹 이외의 보나파르트 가문 사람들이 어머니 조제핀을 무척 싫어해서 오르탕스 역시 보나파르트 가문 사람들을 싫어했다. 그러나 친자가 없던 나폴레옹은 의붓딸을 자기 동생 루이 보나파르트와 결혼시켜 그 사이에서 태어나는 의붓손자 겸 친조카를 후계자로 삼을 생각을 했다.[2] 조제핀 역시 남편의 후계자를 낳지 못하는 상태에서 시가 식구들과 사이도 안 좋아서 황후로서의 위치가 불안정했기 때문에, 자기 딸이 시동생과 결혼하여 나폴레옹의 후계자가 될 아이를 낳는 것에 찬성했다. 사실 신부가 될 오르탕스 뿐 아니라 신랑이 될 루이 보나파르트도 이 결혼을 꺼렸고, 나폴레옹을 제외한 대부분의 보나파르트 가문 사람들이 이 결혼에 반대했다. 그러나 나폴레옹이 밀어붙여서 1802년에 의붓삼촌인 루이 보나파르트와 결혼하고, 나중에 루이가 홀란트 왕국의 왕이 되자 오르탕스 또한 왕비가 되었다.그러나 사이가 안 좋은 사람들끼리 정략결혼을 했으니 행복할 리 없었다. 더구나 나폴레옹 반대파가 나폴레옹의 권위를 실추시키기 위해, 나폴레옹이 의붓딸 오르탕스와 불륜관계이며 오르탕스가 임신한 첫 아이가 나폴레옹의 아이라고 소문을 냈다. 루이는 그 소문을 듣고 무척 자존심 상해하며 분노했기 때문에 원래도 나빴던 부부관계가 더욱 나빠졌다.[3] 결국 1810년에 오르탕스와 루이는 세 아들을 낳은 상태에서 이혼했다.[4]
이혼 후 오랫동안 흠모했던 오귀스트 샤를 조제프 드 플라오 백작과 연인 사이가 되어, 1811년 스위스에서 사생아인 샤를 오귀스트 루이 조제프(훗날의 모르니 공작)를 낳았다. 몇 년 후 플라오 백작이 한 여배우와 바람을 피운 탓에 두 사람의 관계는 끝났다.
나폴레옹이 패하여 엘바섬으로 유배를 떠나고 부르봉 왕정복고가 일어났으나, 루이 18세 치하에서 투옥되거나 추방되기는 커녕 러시아의 알렉산드르 1세에게 접근해 친분을 쌓은 덕분에 오히려 공작 부인 지위를 얻었다. 그러나 나폴레옹의 백일천하 시기에 다시 나폴레옹에게 붙었다가, 나폴레옹이 워털루 전투로 완전히 몰락하면서 프랑스에서 추방당했다.
추방 기간 동안 스위스에서 회고록을 쓰는가 하면 작곡이나 회화에 몰두하며, 스위스의 여러 문학가 및 음악가와 친하게 지냈다. 1830년, 프랑스에서는 혁명파였던 오를레앙가문의 루이필리프 1세가 시민들에 의해 쫒겨난 샤를 10세 대신 프랑스 왕위에 올랐고, 이는 유럽에 혁명의 기운을 다시 불러들였다. 이에 이탈리아에선 오스트리아의 통치에 반대하는 봉기가 일어났는데 그녀의 둘째 아들 나폴레옹루이(로데베이크 2세)[5]가 이에 참가했다가 도주중에 병사하는 사태가 발생했고, 그녀는 셋째 아들인 샤를 루이 나폴레옹(나폴레옹 3세)과 함께 프랑스로 복귀를 시도했다. 루이 필리프 1세는 원래 이들에게 우호적이었으나, 이들의 존재는 프랑스에서 보나파르트 복위운동을 야기했고, 결국 이들을 추방할 수밖에 없었다. 모자는 다시 스위스로 돌아갔다.
1837년 스위스에서 54세로 암에 걸려 사망했고, 시신은 프랑스로 돌아와 어머니 조제핀 드 보아르네 곁에 묻혔다.
3. 기타
- 셋째 아들인 나폴레옹 3세는 이혼 전에 루이 보나파르트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다. 부부 사이가 워낙 나쁘다 보니 당대에도 루이의 친자가 아니라 외도로 낳은 혼외자라는 소문이 자자했으나, 오늘날 역사학계에서는 악의적인 소문에 불과하다고 간주하고 있다. 2010년대 들어 나폴레옹 3세 및 친족 남성들의 Y염색체 DNA 연구가 이뤄지면서 혼외자 설이 다시 제기되기도 하였으나, DNA 시료가 불충분해 분석의 신뢰도가 떨어진다는 이유로 학계에서는 이러한 주장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6]
- 나폴레옹의 어머니 레티치아는 며느리 조제핀을 무척 싫어해서 조제핀이 첫 결혼으로 얻은 자녀인 외젠, 오르탕스 남매도 싫어했다. 하지만 아들 나폴레옹이 몰락한 후로는 나폴레옹에게 끝까지 신의를 지킨 외젠과 오르탕스에 대해 심경의 변화를 일으켜서, 말년에는 오르탕스와 같이 산책하며 나폴레옹에 대해 이야기하는 등 마음을 연 모습을 보였다.
4. 가족관계
자세한 내용은 보나파르트 가문 문서 참고하십시오.[1] 루이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은 아니고 애인이었던 오귀스트샤를조제프 드 플라오 백작(Auguste-Charles-Joseph de Flahaut de La Billarderie, comte de Flahaut)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다.[2] 나폴레옹은 이때까지 자식이 없는 이유가 자신이 불임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서(아내 조제핀은 나폴레옹과 재혼하기 전에 첫 남편과의 사이에서 아들 외젠과 딸 오르탕스를 낳았기 때문.) 궁여지책으로 친동생과 의붓딸을 결혼시킬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훗날 외도를 해서 사생아 2명이 태어나자 자신이 불임이 아니라는 걸 알게되고 아내와 이혼하고 오스트리아 황녀와 재혼하여 적법한 후계자(나폴레옹 2세)를 낳았다.[3] 두 사람은 같은 궁궐 안에서 살았지만 멀리 떨어진 처소에서 지내며 서로를 최대한 피했고, 오르탕스는 스스로를 죄수라고 표현했다.[4] 단, 첫 아들은 이혼 전에 사망했다.[5] 형이 유아 시절에 사망했기 때문에, 둘째 아들로 태어났지만 사실상 장남이었다.[6] 보다 자세한 이야기는 해당 항목을 참고하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