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밝은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03-12 14:43:58

백련교도의 난

파일:청나라 국기.svg 청나라 실패한 내란
{{{#!wiki style="margin: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내란 주도 세력
삼번의 난
,1673 ~ 1681,
<colbgcolor=#ffffff,#1f2023> 오삼계
임상문의 난
,1786,
임상문
백련교도의 난
,1796 ~ 1804,
백련교
태평천국의 난
,1850 ~ 1864,
염군의 난
,1851 ~ 1868,
염군
천지회의 난
,1849 ~ 1850,
천지회
두문수의 난
,1856 ~ 1872,
평남국
야쿱 벡의 난
,1862 ~ 1877,
야쿱 벡 }}}}}}}}}

1. 개요2. 상세

1. 개요

白蓮敎徒-亂

청나라 건륭제가 황위를 아들 가경제에게 물려준 1796년부터 1805년까지 10년에 걸쳐 이어진 대반란. 삼대의 봄으로 일컬어지며 1세기 넘게 번영하던 청나라의 최전성기인 강건성세의 종언을 상징하는 사건으로, 백련교 신도들이 중심이 되어 일으킨 난이라고 하여 백련교도의 난이라 한다.

2. 상세

반란의 주요무대는 호북(湖北)·사천(四川)·섬서(陜西)의 3개 성(省)이 접경을 이룬 크고 넓은 산악 지대였다. 이 지대는 청초 이래 화남·광동 등 인구가 조밀한 지방으로부터 옮겨온 이주자가 많고 일시적으로는 옥수수를 비롯한 잡곡 생산과 목재·광산업이 성황을 이루었다. 그러나 후일 청조의 행정·재정 지배가 시행되고 시비(施肥) 기술의 미발달에 따른 토지 생산력의 고갈도 현저해지면서 궁핍화된 민중 사이에 불온한 움직임이 뚜렷해졌다.
이러한 배경에서 백련교가 빈농과 반부랑자적(半浮浪者的) 노동자 사이에 퍼져 1796년 후베이 서북부의 봉기를 발단으로 하여 각지에서 반권력(反權力) 폭동을 일으켰다. 이 반란은 통일적인 조직, 목표, 지도자가 결여되어 있었으나 교묘한 게릴라전으로 청조를 곤경에 몰아넣었다. 당시 청조는 묘족 반란이 일어나 팔기군을 보내 진압중이어서 초기에 백련교도의 난을 진압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후 진압을 시도했지만 이미 세력은 커져 있었고 고전한 데다 막대한 은을 소모하면서 주둔지가 있는 곳의 물가는 폭등했다.

결국 청은 주민들을 소개하고 성을 쌓아 그곳으로 수용하여 반군과 주민들을 분리시킨 끝에 겨우 진압했다. 더군다나 반란 진압의 공로자는 청조의 타락한 정규군[1]이 아니고 오히려 지방의 유력가들이 소집한 의용병인 ‘향용(鄕勇)’이었다. 결국 청조는 반란 진압에 막대한 전비(戰費)[2][3]와 10년이라는 세월을 소비하고 심각한 재정 위기가 초래되었다.

이들의 분파인 천리교 신도들은 아예 가경제를 암살하기 위해 자금성에 침투했다가 지친왕 면녕이 이끈 환관 및 황궁 시위들과 격전을 벌인 끝에 물러나기도 했는데 이를 계유지변이라고 한다.

비록 백련교도들의 반란은 1805년에 끝났지만 그 과정에서 많은 한족들은 만주족 팔기군은 물론 사실상 주력이던 녹영병까지 전투력이 처참하다고 깨달았고 그리하여 19세기부터 청나라는 태평천국 운동이나 염군 같은 한족들의 수많은 반란에 시달리면서 점차 쇠약해지다가 1911년 신해혁명으로 인해 무너지고 말았다.

청나라 말기의 권법 집단으로 의화단의 난을 일으킨 의화단이 원래 백련교도의 일파였다는 설이 있다. 다만 반청 성향이었던 백련교도의 난과 달리 의화단은 친청 성향을 드러낸게 차이점.


[1] 이 시기에 오면 팔기군녹영(청나라)으로 대표되는 청의 관군은 전투력이 크게 떨어져 무용지물에 가깝게 되었다.[2] 건륭제의 총애를 받던 니오후루 허션이 횡령하고 착복한 액수도 꽤 된다.[3] 다만 이렇게 시간이 오래 걸리고 전비가 많이 들어간 것은 백련교도들의 군사력이 막강해서가 아니라 청나라의 장군과 장교들이 더 많은 예산을 타내기 위해 일부러 반란 진압을 대충대충 했기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청나라 군대가 부패했기 때문에 백련교도 반란이 오래 끌었던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