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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17 12:41:19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

1. 개요2. 유래3. 해석
3.1. 상나라의 상황
4. 상나리 이외 역사적 사례5. 여담

1. 개요

가정 및 사회에서 여성이 남성보다 목소리가 크면 일이 잘 되지 않는다는 뜻의 속담이다. 유사한 의미의 고사성어로는 빈계지신(牝鷄之晨) 또는 빈계사신(牝鷄司晨)이 있다.

실제 은 날이 밝으면 어김없이 우는데 암탉은 꼬꼬하고 평이하게 울지만 수탉은 꼬끼오~하고 우렁차게 우는 습성이 있다. 이 아침 수탉 소리를 현대 이전에는 알람 용도로 썼다. 그런데 암탉이 꼬끼오하고 크게 울면 이를 불길한 징조로 보았던 미신에서 유래했다.

기존 질서의 붕괴를 우려하는 뜻에서 나왔으며 시간이 지나면서 부적절한 면이 점점 더 부각되어 현대에 이른 것으로, 중국에서 기원했지만 조선시대에서도 쓰였다. 2020년대 들어, 성차별 이슈가 극심화되고 있어 이 속담은 공식석상에서는 절대로 쓰면 안 되는 말 중 하나가 되었다.

2. 유래

유교 경전인 《상서(尙書)·주서(周書)·목서(牧誓)》 편에서 유래했다. 상나라 주왕이 여색에 빠지고, 부모형제를 돌보지 않았으며 간신들을 관리로 쓰는 것을 명분삼아 주나라 무왕이 상나라를 토벌하려 할 때 인용한 구절에서 유래했다.
王曰:「古人有言曰:『牝鷄無晨;牝鷄之晨,惟家之索。』 今商王受惟婦言是用,昏棄厥肆祀弗答,昏棄厥遺王父母弟不迪,乃惟四方之多罪逋逃,是崇是長,是信是使,是以爲大夫卿士。俾暴虐于百姓,以奸宄于商邑。
이 이르시되, 옛 사람이 말하길 "암탉은 새벽을 알리지 않는다. 암탉이 새벽을 알리는 것은 집안이 망한다"고 하였다. 그런데 지금 상나라의 왕인 주왕 수(受)는 오로지 여인의 말만 듣고 있으며, 마땅히 제사를 지내는 것도 경시하고 보답하지 않았으며, 살아 계신 임금의 부모 동생들도 버리고 쓰지도 않았다. 오로지 사방에서 죄를 짓고 도망온 자들을 높이고 공경하였고 이들을 믿고 써서 대부(大夫)와 경사(卿士)로 삼았다. 이들은 백성을 학대하였고 성읍을 혼란시켜 백성에게 해를 끼치는 일을 하였다.

今予發惟恭行天之罰。今日之事,不愆于六步、七步,乃止齊焉。勖哉夫子!不愆于四伐、五伐、六伐、七伐,乃止齊焉。勖哉夫子!尙桓桓如虎、如貔、如熊、如羆,于商郊弗迓克奔,以役西土,勖哉夫子!爾所弗勖,其于爾躬有戮!」
지금 나 무왕 발(發)은 하늘의 벌을 받들어 행한다. 지금의 거사는 6보, 7보를 넘지 않아야 하고 다만 멈추어 정돈해야 한다. 군인들이여, 용감하게 전진하라! 또 적을 치는 것은 4번, 5번, 6번, 7번을 넘지 않아야 하고 다만 멈추어 정돈해야 한다. 군인들이여, 용감하게 전진하라! 너희들 모두가 범처럼, 비휴처럼, 곰처럼, 불곰처럼 상나라로 진격하고 투항하는 자들를 공격하지 말라. 우리 서쪽 땅에 도움이 된다. 노력하라! 그대들이 힘쓰지 않으면 그대들의 몸에 죽음이 있으리라!

3. 해석

당연하지만 '집안이 망한다', 즉 국가 멸망의 경우는 따지고 보면 남성 지도자를 끝으로 나라가 망한 경우가 훨씬 더 많다. 물론, 이건 당연히 지도자 성별이 어떻고 간에 인물됨 자체가 글러먹었거나 이미 여러 상황이 종합되어서 망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많았기 때문이고, 거기에 지도자가 남성인 경우가 훨씬 많았기 때문에 자연스레 그렇게 된 것뿐이다.

안 그랬던 곳이 드물었겠지만, 이 속담이 나온 고대 중원 사회도 남성이 권력을 장악하고 여성은 권력을 잡기 어려운 구조였다. 그리고 그런 상황에서 여성이 권력을 잡았다는 것은 어쩔 수 없을 때 혹은 질서가 다소 무너졌을 때 정도였다. 현대 여성계에서는 이를 유리절벽이라고 표현한다. 남성 군주가 정사에 관심이 없어서 위임했거나, 남성 후계자의 나이가 너무 어렸거나, 외척의 세력이 강대해서 압박을 통해 이뤄낸 것이거나. 이런 상황에서 여성들이 이런 패널티를 극복하고 권력을 잡았다는 사실은 정상적인 질서의 붕괴를 의미함과 동시에, 남성들이 상대적으로 무기력해서 여성이 권력을 잡는 걸 막지 못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간단히 말해 여자가 나서서 엉망이 된 게 아니라, "(기존 남성 지도층이) 얼마나 제구실을 못 했으면 원래 그런 역할이 아니었던 여자가 권력을 잡을 수 있을 정도로 개판을 만들어 놓았냐" 정도에 가깝다. 게다가 이미 이런 혼란한 상황이 벌어진 이상 그 권력자 여성이 제대로 나라를 이끌어 나가기란 쉽지 않다. 이런 사정을 생각하지 않고 단순히 결과만 본다면 여자는 지도자에 적합하지 않다는 단순한 해석을 내리기 쉽다.

무엇보다도 이 당시의 고위층 여성은 타 가문&국가와의 정략결혼을 위한 핵심요소였는데, 이를 반대로 말하자면 지도자로 등극하기 위한 준비 및 기반 세력이 당대 남성보다 취약할 수밖에 없다는 말이기도 했다. 게다가 설령 그럭저럭 나라를 잘 이끌었다 하더라도 진짜 성군급이 아닌 한은 단점도 있기 마련, 결국 안 그래도 수가 작은 여성 지도자 중에서 훌륭한 지도자는 더더욱 드물 수밖에 없다. 거기에 어찌어찌해서 여성 권력자가 나왔더라도 반대파에서 성별을 물고 늘어지는 경우도 많았다.

더욱이 국가 구조 자체가 남성 관료제를 중심으로 짜인 시대상 속에서, 특히 이 말의 원전이 된 중국에서 '여성의 권력 행사'는 개념 자체가 제대로 존재하지 않았다. 이 말인즉슨 후술하듯 필수불가결하다시피 했던 수렴청정과 같은 경우에도, 왕비(태후)가 어디까지 권한을 행사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가이드라인을 잡아줄 수 없었던 것이다. 더욱이 관료제 자체가 남성 위주로 짜여 있는 상황에서 왕비(태후) 등이 실질적으로 권한으로서 행사할 수 있는 것은 직접적으로는 최종적인 재가 정도에 한정되고, 간접적으로는 외척을 비롯한 인사를 국정에 투입하도록 하는 것이 상례였는데, 전자는 역할이 굉장히 제한될 수밖에 없었고 후자는 애초에 타인을 부리는 것이므로 본인의 의도를 벗어나 예상치 못한 부작용을 동반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그로부터 벗어나 눈에 튀는 정책을 펼치는 행위는 언제든지 왕비(태후)에게 (애초에 법에 제대로 된 '권력'을 보장하는 개념조차 없지만) '권력 남용'이라는 딱지를 붙이기에 충분했다. 그렇게 원래부터 존재하지도 않았던 '선을 넘는 행위'를 비난하는 것은 그 무엇보다도 쉬운 일이었고, 당연히 실제 행위보다 훨씬 더 많은 비난을 받는 일도 빈번했다.

그러나 그런 원초적인 구조 속의 위험성에도, 오히려 이 속담이 탄생한 중국 문화권에서 초기 오스만 제국과 같이 극단적으로 왕비와 그 주변인들을 제거하여, 스스로들 말하곤 했던 '정계 농단의 원흉'인 '암탉'을 애초부터 근절하려는 시도는 정작 극히 드물었다. 왕비(태후) 또한 왕실 집단을 보전케 하는 보호막으로서 자리할 수 있음이 확실히 인식되었고, 그들에게서 권력을 빼앗아와야 하는 당사자가 아닌 이상에야 누구도 그것을 부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국왕이 어릴 때 등장하는 임조칭제(수렴청정)라는 개념은 오히려 중국 문화권에서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당연한 정치적 수단 중 하나였다. 물론 이에 대해 왕비 못지않게 왕비를 뒷받침하는 외척의 세력이 중요했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지극히 당연하게도 왕비라는 연결고리 없이는 외척이라는 세력의 개념 자체부터 왕실 내에 있을 수 없었으므로 왕비(태후)의 존재는 필수불가결했다.

결국 그런 주장을 공개적으로 내놓는 사례가 드물었을 뿐, 왕권의 안정을 위해서는 왕비와 같은 여성 권위의 설 자리 또한 필요함을 중국 문화권의 위정자들 스스로도 모르지 않았던 것이다. 물론 스스로 국왕의 자리에 오르는 것은 중국사를 통틀어 단 한 차례 존재했을 뿐으로 금기시되었지만, 그렇게 따지면 애초에 제신과 달기의 사례부터 달기가 국왕 자리에 오르거나 그 자리를 넘본 것이 아니므로 귀납적 사례를 잘못 적용한 것이다. 왕비(태후)가 권력을 정상적으로, 바꾸어 말하면 '눈에 튀지 않게' 행사하는 경우에는 빈계지신의 고사를 인용한 비난 또한 나오지 않았지만 동시에 공개적인 칭찬도 드물었는데, 이는 결국 문헌에서 두드러지지 않게 되었으므로 다시 역사 전통 속에서 귀납적인 사례가 제대로 축적되지 못하고 '모범적인 여성 권력'의 상이 형성되지 못하는 것으로 되먹임되었다. 결국 중국사를 통틀어 보아도 빈계지신의 고사는 화살을 쏘아놓고 과녁을 그리는 식으로 인용된 것으로, 그 원초적인 차별적 성격을 배제하고 보더라도 합리적인 판단이라고 볼 수 없다고 할 수 있다.

3.1. 상나라의 상황

역설적인 것은 정작 상나라는 여성의 정치 참여가 그다지 드물고 기이한 사회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물론 이후 중국 문화권에서 계승되고 확대되었듯 상나라에서 부계 계승 의식은 굉장히 중요한 선대 인식 중 하나였으며 국가 제의에서 가장 큰 줄기가 그것이었음은 분명하다. 그러나 성읍 국가의 단계에서 정치 체제가 고도로 발달하지 못한 상나라에서 권력을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방법은 일부다처제에 입각한 내부, 그리고 외부의 유력자와의 잦은 혼인이었으며, 상나라는 그 중에서도 내부에서 권력을 구성하던 여러 씨족 사이의 혼인을 선호했다. 결국 이후 시대에 비해 직접 지배력이 약한 상나라에서 부인들은 그런 연합, 특히나 그 중에서도 아예 내부 국가 구성원 사이의 연합의 상징과 다름없었으므로 이들을 단순히 종속적으로 대할 수는 없었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무정의 부인인 부호의 경우이다. 부호는 갑골문의 발굴을 통해 상나라의 방국 정벌에 적극적으로 나서던 군사 지휘자로 나서던 인물임이 확인되기도 했고, 1976년 그 무덤이 발굴되어 화려한 부장품들이 확인되면서 그 위세가 실물로 확인되었다. 정작 그 무정의 치세는 전통 문헌에서는 명군의 아래에서 태평성대를 누리던 시기로 전해졌음은 큰 아이러니이다.

속담을 등장하게 만든 은주혁명 시기의 상황 또한 오늘날에는 제신달기의 악행이 굉장히 과장되었거나, 오히려 은나라의 전반적 경향과는 역행할 정도로 제신 대에는 타 세력에게 '악행'으로 인지되었던 인신 공양, 가혹한 형벌 등의 행위가 억제된 것으로 재평가되고 있다. 제신과 달기 대에 전대의 은나라와 달라진 것이 있었다면, 상나라 내부에서 부자 상속, 나아가 적장자 상속이 강화되면서 여러 부인들 사이에서도 한 사람의 부인만이 이전에 여러 부인들과 그 씨족들이 갖던 권력과 권위를 독점하였으며 국가 권력의 행사 또한 집중된 형태로 강하게 작용하게 되었다는 것 정도일 것이다. 결국 달기가 제신을 쥐고 흔들었다고 하는 빈계지신의 비난 또한, 얼마만큼 사실인지 재검토부터 필요하지만 일단 그것을 사실이라고 볼 때 그것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상나라의 국가 권력의 집중과 그 구조에 대한 인근 방국의 반발이라는 거대하디 거대한 문제가 터져나온 것인데, 정작 빈계지신의 이야기에서 그 화살은 모조리 달기 개인에게 돌아갔던 것이다.

다만 이 문제는 어쨌든 주나라에서는 꽤 큰 문제로 인식되었는지, 주나라는 건국 이후 봉건제를 통해 권력의 기반을 느슨한 형태로나마 넓히는 한편 같은 성씨 사이의 혼인을 예법으로 금지하고 서로 다른 성씨 사이의 혼인을 권장했다. 이는 결국 상나라에서 진행했던, 소수 유력 씨족 사이의 내부 혼인을 통해 권력을 독점해 나가는 구조를 버린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로 인해 약해질 수 있는 결속력은 봉건제와 필수적으로 짝을 이루던 종법제의 부계 질서가 널리 확산되며 주 왕실을 중심으로 한 피라미드 구조가 형성되어 메웠으며, 이와 같이 부계 중심 종법제가 국가 질서의 근간이 된 결과 여성의 역할은 통치 구조 속에서 크게 자리를 내주었다. 한편 주나라의 국가 체제 정립과 함께 관료제가 정비되어 나가면서 이전보다는 더 넓은 계층으로부터 지배 세력이 유입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남성 관료들의 존재 양태는 다양해진 반면 상나라 때의 부호와 같이 여성이 군사 활동에 나서는 등 여성이 권력자로서 발 디딜 수 있는 입지는 좁아져 사실상 사라졌다. 빈계지신의 고사 또한, 이와 같이 권력의 틀에서 여성을 배제해 나가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되고 확대되어 나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4. 상나리 이외 역사적 사례

중국 및 동양권에선 대부분 사람들이 성군이라고 합의할만한 여성 지도자가 거의 나오지 못했는데, 기본적으로 여성의 정치 개입을 정당화할 수 있는 논리 구조 자체가 이 속담을 비롯한 사회 분위기에 힘입어 거의 갖춰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이후 시대에 하나라-상나라-주나라 3대에 못지않게 중요한 고전으로 널리 인용되었던 한나라의 사례에서 건국 초 여태후전한 후기~후한 동안의 외척의 정책에 대한 반응이 아주 좋지 못했다. 여태후는 잔혹한 암살·형벌과 권력에 대한 집착으로 악명을 떨쳤으며, 전한 후기~후한 동안 어린 황제를 보호하기 위한 외척의 지속적인 부각은 끝내 왕망이라는 찬탈의 아주 전형적인 선례를 남겨 두고 두고 비난을 받았다. 여기다가 삼국지가 역사에 관심은 없더라도 한 번쯤은 들어보는 유명한 이야기가 되는 것까지 더해, 동양에서 '외척과 환관의 전횡'이라고 하면 거의 나라가 망할 때 필수코스 밟듯이 거치는 과정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결국 '외척'이라고 하면 아주 속 편하게 욕하면 되는 물건이 된 탓에, 외척, 그리고 그 외척의 존재를 뒷받침하는 태후의 정치적 역할과 구조적 위치는 전문적인 연구자 사이가 아니고서야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인지조차 잘 인식되지 않게 되었다.

'중국사의 유일한 여자 황제'라는 타이틀을 단 측천무후도 이런 사회 구조 속에서 결국 새로운 사회 질서를 도출해 내지는 못했다. 측천무후의 관롱집단과의 피비린내 나는 충돌은 현대에 들어서는 충분히 이유가 있었던 것으로 이해되고, 자체적인 의지만으로 해결되지 않는 외정의 문제는 배제하여 인물 자체는 긍정적인 재평가를 받기도 한다. 그러나 그런 측천무후 스스로조차 '측천무후 다음 황제는 누가 되어야 하는가?'에 대해 다른 답이 국가 체제상, 또 역사적으로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여성의 제위 계승은커녕 본인의 성씨인 무씨의 승계까지도 체계적으로 주장할 수 없었다.[1] 측천무후는 결국 본인 손으로 폐위시켰던 당 중종을 후계로 복귀시켜 당나라의 이씨 왕조를 복원하고, '황후'로서 다시 그 구조에 흡수되는 기형적 판단을 해야만 했다.

그 외에도 북위의 개혁기조를 다진 문명태황태후, 장거정의 개혁을 지지했던 효정태후, 청나라의 통치기반을 안정화한 효장태후 등의 인물이 있지만, 이들은 사서가 효문제, 장거정, 강희제 등의 남성들을 띄워주면서 조연 비슷한 위치로 격하되었고, 요나라를 전성기로 이끈 소태후도 한족과 원수인 이민족 국가의 지도자여서 인지도가 묻혔다. 설령 국정운영을 잘한 여성 지도자가 나왔어도 "남자들이 밑에서 실무를 잘봐서 그렇다"는 식으로 폄하 당하거나, 아예 공기화 되어버린 것이다.

한편 측천무후와는 반대로 여성을 즉위시키는 것을 거부한다는 개념보다 국가의 정치 문화적 기조를 존속시키는 것이 중요했기 때문에 등장했던 것이 신라사에서의 여왕이다. 곧 신라사에서 여왕은 골품제에서의 성골 개념이 극도로 강조되었는데 정작 남성 후계자가 나오지 않은 선덕여왕-진덕여왕 대, 또 경문왕계의 왕위 계승이 이어지며 효공왕이 왕위를 승계하는 것은 당연하게 여겨졌으나 효공왕의 나이가 너무 어려 대책이 필요했던 진성여왕 대에 등장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 결과 선덕여왕-진덕여왕과 진성여왕의 치세가 끝난 지 얼마지 않아 성골 왕통과 경문왕계 왕통은 진골김춘추박씨 왕통으로 대체되면서, 결과적으로 훨씬 더 급격한 변화를 보였는데 이는 이전의 국가 체제 자체가 더 이상 유지될 수 없었기에 아예 통째로 바뀌어 버렸기 때문이다. 바꾸어 말하면 신라사에서의 여왕은 완전히 기울어버린 경기에 등장한 구원투수 자리를 맡은 셈이었다. 물론 결과적으로 말해 이 모든 것을 감안하더라도 이들의 성적 또한 그다지 좋지 못했음은 부정할 수 없지만, 고려, 조선시대 유학자들에게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의 실제 사례로 많이 까였던 것은 사실 억까라는 측면도 충분히 고려는 해야 한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중국 문화가 수입되어 남성 중심적 관념이 더 적극적으로 보급되었던 고려 이후로는 여왕의 즉위는 웬만한 체제의 위기 상황에서도 고를 만한 선택지가 아니게 되었다.

일본 열도에서는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처음으로 독자적으로 열전을 남긴 시대인 야마타이국 시대부터 히미코토요가 등장하여 여성 군주가 역사의 첫 장에서부터 나타나며, 현대에는 그로부터 사실성을 도출하기 어렵다고 여겨짐은 분명하나 『일본서기』 체계 속에서 전설적인 인물로서 설정된 진구 황후 또한 두 사람을 모티브로 하는 것으로 보이는 등 그 인상은 굉장히 강렬하게 남았다. 이 시대의 정치 체제 또한, 이른바 '히코-히메 제도'로서 남성 못지않은 역할을 지닌 정치 인물로 여성이 활동했을 가능성이 충분히 있었다고 여겨진다.

그렇지만 일본 열도에서도 늦어도 5세기부터는 완연히 남성 왕이 정치 질서의 주류가 되었다. 다만 5세기 후반의 혼란기 속에서 이이토요아오 황녀(飯豊青皇女)가 정치를 맡았다는 서술이 단편적으로 보인다. 신화적인 진구 황후의 사례를 제외하고 스이코 천황보다 100년 넘게 이른 사례로서 주목할 만은 하나, 이 때는 야마토 정권의 중심 질서가 일시적으로 약화되거나 붕괴했던 시기였다. 때문에 실제로 왕권을 행사했더라도 이는 어떠한 이유로 전대의 정치 질서가 파괴된 상황에서 위기 상황을 수습하는 것으로서 그 영향력은 크게 한정되었을 것으로 여겨져, 남성 중심 정치 질서가 강해졌던 대세를 거스르는 것은 아니었다고 여겨진다.

그러나 그런 문화 속에서도 7~8세기 동안, 스이코 천황의 즉위를 시작으로 여성 천황이 여럿 등장했는데, 유교적 정치 질서가 약했던 문화적 상황이 원인으로 지목되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왕권이 절대적인 단계에 진입하지 못해 합의체적 정치 구조가 오래 지속되었던 상황에서 '간판' 역할로 여성 천황이 후계자로 지목되곤 했던 구조가 원인으로 많이 지목된다. 예컨대 초기 사례인 스이코 천황이나 고교쿠(사이메이) 천황의 경우, 천황이 활동하는 시기에도 그 시대의 주도 인물로는 소가씨와 쇼토쿠 태자, 나카토미노 가마타리, 나카노오에 황자 등을 비롯한 다른 정치 인물들이 꼽히며, 스이코 천황이 활동하던 시기라고 하는 『수서』 왜국전의 시대에서 왜국 왕을 완연히 남성으로 언급한 것은 그런 현상을 뚜렷이 드러내준다. 애초에 고쿄쿠 천황이 사이메이 천황으로 '두 번' 즉위하는 기묘한 상황 또한, 그런 정치 질서의 격변 속에서 일시적으로나마 정국을 안정시킬 임시 방책으로서 여성 천황이 하나의 선택지로 쓰였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이후 지토 천황은 그런 기조를 뚫고 충분히 독자적으로 시대를 운영한 인물로 평가 받고 있으나, 덴무 천황이 죽은 뒤 완전히 성장하지 못했던, 지토 천황의 후계인 몬무 천황을 안정적으로 즉위시키려는 목적에서 즉위했다는 데 대해서는 큰 이견까지는 없어 한계가 없는 것은 아니다. 겐메이 천황겐쇼 천황은 마찬가지로 쇼무 천황의 안정적 즉위를 위해 등극한 것으로 여겨지며 후지와라노 후히토를 비롯한 후지와라씨 인물의 활동이 더 두드러진다는 점에서 역시 '간판' 역할이 크다고 보는 편. 고켄(쇼토쿠) 천황의 경우 충분히 주도적인 역할을 하기는 했으나, 애초에 치세가 둘로 나뉘어 사실상 두 번 즉위한 것이나 다름없는 상황이 된 데서 볼 수 있듯 정국 운영이 그다지 순탄치는 않았다. 그 뒤로 여성 천황이 등장하는 것은 800년 이상의 시간이 걸렸으며, 실권을 갖고 있었다고 보기도 어렵다.

결국 정리하면 지토 천황과 고켄(쇼토쿠) 천황의 사례와 같이 정국의 주도권이 천황 본인에게 있었던 때가 스이코 천황, 고쿄쿠(사이메이) 천황, 겐메이 천황, 겐쇼 천황과 같이 천황 본인보다는 다른 인물에게 있었던 사례가 많으나, 그래도 동아시아의 다른 국가에 비해서는 충분히 주도적 역할을 한 여성 군주를 꼽을 수 있으며, 특히 지토 천황의 경우 충분히 명군의 반열에 꼽힐 만한 인물로 꼽히곤 한다. 때문의 현대의 여성 천황론에 대해서도 역사적 근거가 적잖이 있다며 고대사에서의 사례가 언급되곤 한다. 결국 이 속담이 문제 삼는 부분은 개인의 탓으로 돌릴 것이 아니라 구조적 문제의 개선과 해결로 충분히 다른 결론을 낼 수 있음을 어느 정도 보여주는 셈이다.

서양에도 정쟁에서 상대가 여성임을 들먹이는 이런 식의 프로파간다 같은 게 없지 않았다. 다만 직접1적으로 비슷한 속담은 없었는데 실제로 엘리자베스 1세이사벨 1세, 예카테리나 2세처럼 역사적으로 명군으로 평가받은 여왕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서양에서는 남성 후계자가 없을 경우 여성이 왕으로 즉위할 수 있는 경우가 동아시아에 비해 상대적으로 자주 있었던 편이라 여성이 편법이 아닌 정통적인 방식으로 제대로 된 권력을 얻을 수가 있었다.

5. 여담


[1] 무삼사무승사의 황태자 등극 시도를 마주한 측천무후를 적인걸이 가로막으며 설득한 내용은 이현(당 중종)을 자리에 앉히면 어머니로서 측천무후를 황실에서 모시겠지만 조카인 무씨들에게 왕위를 넘기면 고모의 제사를 지내겠냐는 것이었다. 이는 완연히 부계 중심이던 중국의 제사 제도의 면모를 들어 약점을 정확히 찌른 것이며, 결국 이 결과 측천무후의 선택은 당나라의 부계 중심 가계에 측천무후가 합류하는 구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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