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서(晉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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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范堅생몰연도 불명
동진의 인물. 자는 자상(子常). 형주 남양군(南陽郡) 순양현(順陽縣) 출신. 친척으로는 범왕이 있으나 서로 왕래한 기록은 없다. 박학하고 문장 짓기에 능했다고 한다. 《수서》 「경적지(經籍志)」에 따르면 《춘추석난(春秋釋難)》 3권을 편찬했다고 하나 소실되어 전해지지 않는다.
2. 생애
영가의 난을 피해 강동으로 피난 간 범견은 동진 정권에 임관해 좌저작랑, 무군참군을 지냈다. 소준이 반란을 일으키자, 진압에 공을 세워 도정후(都亭侯)에 봉해졌고, 누차 승진하여 상서우승에 임명되었다.성제가 재위하던 시기, 소광(邵廣)이라는 궁중의 장리(帳吏)가 국고에서 관포(官布) 30여 필을 횡령한 일이 발각되었다. 당해 사건을 담당한 정위가 법대로 소광에게 사형을 선고하자, 그의 두 아들인 13세의 소종(邵宗), 10세의 소운(邵雲)은 등문고(登聞鼓)[1]를 두드리며, 스스로 관노가 될 테니 아버지의 목숨만은 살려달라 빌었다. 조정에서 이 사안을 의논할 때, 대신들 대부분이 두 아들의 효심에 감복하여 상서랑 주영(朱暎)을 필두로 소광의 형을 감형해야 한다는 여론이 우세했다. 그때 범견이 나서서 정에 따라 형벌을 마음대로 바꿔서는 안 된다며 감형하자는 측의 주장을 조목조목 반박하니, 성제는 하는 수 없이 소광을 사형시켰다. 이후 범견은 호군장사로 옮겨졌고, 재직 중 사망했다.
아들로는 범계(范啟)가 있었는데, 비록 아버지에 미치지는 못했으나 문장 짓는 솜씨가 뛰어났고 하며, 관직은 황문시랑에 이르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