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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교/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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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화교, 화인, 화예의 구별3. 역사
3.1. 구한말3.2. 일제강점기3.3. 해방 시기3.4. 6.25 전쟁과 1950~1980년대3.5. 한중수교와 1990년대3.6. 한국 화교들의 정체성
4. 화교 현황
4.1. 좁은 의미의 재한화교4.2. 신화교4.3. 재한 일본 화교·중국계 일본인4.4. 재한 중국계 미국인/ 대만계 미국인/ 중국계 캐나다인4.5. 재한 중국계 러시아인4.6. 재한 동남아시아 화교4.7. 재한 만주족4.8. 재한 후이족4.9. 남한 내 북중혼혈 탈북자
5. 유명 인물
5.1. 연예인/스포츠/기타5.2. 기업인
6. 명백히 화교가 아닌 인물7. 대중매체에서 나온 화교 인물8. 대우
8.1. 화교 탄압에 대한 비판8.2. 특혜
8.2.1. 외국인 특별전형 혜택
8.3. 해외 여행 시
9. 한국에서의 인식10. 외환 위기 당시 루머11. 분포12. 관련항목13. 둘러보기

1. 개요

한국에 정착해 살고 있는 화교.

다른 나라의 화교들과는 다르게 한국의 화교는 한국과 지리적으로 가까운 중국 산둥성, 베이징, 허베이성, 톈진에 연고를 둔 사람들이 많고, 1990년대 이후 중국본토에서 이민 온 한족들도 산둥성, 베이징, 허베이성, 톈진 외 만주 지역 출신이 많다.

전 세계 화교들의 발상지라고 볼 수 있는 지역은 장쑤성, 상하이, 저장성, 푸젠성, 광둥성, 하이난성중국의 동남부 지역과 홍콩, 마카오인데 한국에서 멀기도 하고 남중국과 가까운 싱가포르, 호주, 뉴질랜드 등의 선진국들이 있는지라 이쪽 지역 출신 한국 화교는 거의 없다고 보면 된다.

그래서 대부분의 화교 사회에서 사용되는 언어가 광동어, 민어, 객가어인 것과 달리 재한 화교의 모어는 관화(표준 중국어)다. 지금도 인천, 평택, 군산에서 중국으로 가는 여객선은 대부분 산둥성 위주로 운항한다. 특히 웨이하이, 칭다오, 옌타이산둥성으로 가는 항로가 많다.[1]

중화민국 국적인 구 화교들이 산둥성, 허베이성, 베이징시 출신 위주였던 이유는 한국과 가까운 지리적 거리 때문이었고, 나중에 들어온 중화인민공화국 국적의 신화교들 역시 북방 지역 출신이 대부분이다. 전통적으로 장쑤성, 상하이, 저장성, 푸젠성, 광둥성, 하이난성, 홍콩/마카오 등 중국의 동남 해안 지역은 중국 내에서 가장 부유한 지역이다. 그리고 19세기 청나라가 망조가 들자 쿨리 일원으로 세계 각국에 진출하게 되었다. 그래서 이 쪽 지역 사람들은 이민을 가더라도 한국이 아니라 쿨리싱가포르, 말레이시아, 영국, 아메리카, 호주/뉴질랜드 등으로 갔다. 특히 북아메리카에선 쿨리들이 미국 대륙횡단 철도를 만들었으며 싱가포르는 쿨리들이 개간한 말레이반도 남단의 부속도서가 독립국이 된 경우고[2] 호주케언즈, 말레이시아쿠알라룸푸르도 쿨리들이 개간한 곳들이다.[3]

이러한 사정 때문에 재한 화교들은 타 국가 내 화교들과 지역적 소속감이 다르다. 일단 언어만 해도 푸젠성, 광둥성, 홍콩, 마카오 출신들은 광동어, 민어, 객가어를 쓰는데 반해 재한 화교들은 관화가 모어이다. 그래서 이들이 타 국가로 이민을 갈 때도 차이나타운에 가지 않았다.

재한 화교들은 대부분 중화민국 또는 한국 국적을 갖고 있다. 구 화교들은 국공내전 이전에 넘어온 사람들이고 냉전 시대의 국제관계로 인해 대륙에 공산국가가 수립된 이후에도 대부분 중화민국 국적을 유지했으며 지금도 중화민국 정체성을 강하게 가지고 있다.

한국 화교의 역사적 시작점은 1882년 임오군란이다. 바로 옆나라이지만 그전까지 중국인들이 한반도에 대거 거주한 적은 극히 드물었다.[4] 임오군란명성황후청나라에 군대 파병을 요청하였고 흥선대원군을 납치하게 하였다. 청나라는 군대 4천 명을 파견했는데 이들을 따라 상인 40여 명이 조선에 들어와 개항장인 인천에 정착했다. 이것이 현재 한국 화교의 시작이다. 이후 그 수는 점점 늘어나서 6천 명이 되었고, 1923년에는 화교들이 중국에 송금한 돈이 지금 돈으로 따지면 100억 엔에 달했다.

즉 한국화교의 시작점도 쿨리인데 이쪽은 북중국 쿨리들이라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일제는 화교들이 많은 자본을 해외로 유출하자 중일전쟁을 일으키기 전에 손을 써야겠다고 생각하여 만보산 사건을 조작하게 되었고, 사실 이전부터 한반도에 자리잡은 중국인과 생존경쟁을 하는 입장이었던 한반도의 조선인들 또한 화교에 매우 거부감을 가지고 있어 이런 혐중 감정에 편승하여 조선의 화교들은 평양을 시작으로 인천·서울·부산 등지에서 200여 명이 살해당하고 폭행·강도·강간을 당하는 등 잔혹한 만행이 지속되었다. 그리하여 화교들은 중국으로 귀국하기 시작하였고 그때부터 세력이 위축되기 시작하였다.

일제강점기때부터 이어졌던 중국인 혐오 정서는 광복 이후 세워진 대한민국 정부에도 이어져, 역시 화교가 경제적인 실권을 쥐는 것을 지속적으로 견제했고 박정희 정권 시절 화교에 대한 탄압이 제일 심했다. 특히 1961년 외국인 토지 소유 금지법으로 화교들의 부동산을 압수하고 소유 규모를 제한하였다. 이로 인한 직접적인 재산적 타격도 컸지만, 당시 화교들 중엔 부동산 중개업에 종사하던 이들도 많았기 때문에 이에 대한 타격도 컸다. 1962년의 화폐 개혁도 실제로는 화교들이 모아온 재산을 노린 것이라는 설도 있다.[5]

당시에는 인플레이션 때문에 돈을 은행에 예치시키는 것보다 현금으로 집에 보관하는 것을 선호했기 때문에 이런 장롱예금들을 은행으로 끌어들여 산업화 자금으로 충당하고자 하는 목적이었다. MBC 드라마 <제3공화국>에서도 5.16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이 경제정책을 검토하면서 "화교들이 엄청난 현금을 숨겨두고 있다는 거야"라는 대사를 하는 장면이 나온다.

지금도 이것이 화교들의 재산을 강탈하기 위해서였다는 이야기가 돌고 있다. 화교 어르신들 얘기를 들어보면 이때 환전량이 정해져 있어서 예금 안 하고 모아둔 현금 상당수를 울며 겨자먹기로 싸게 넘겨야 했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 화폐 신고액을 보면, 100만환 이하 금액이 90.5%를 차지하였고 1억환을 초과하는 경우는 불과 7건 12억에 불과하였다. 그래서 박정희 정부의 화교 정책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와 부정적인 평가가 상존한다.

사실 화교 출신 기업가들인 담철곤 오리온 회장이나 정주영 현대 회장과 60년 지기인 설영흥 현대차 부회장 등 화교들의 과거를 보면 외국인 취급을 받기는 했다. 당연한 게 담철곤이나 설영흥 같은 초창기 화교 세대들은 인생을 대충 봐도 정체성이 외국인이었다. 이는 삼성이나 LG도 마찬가지로 화교와 인연이 있었던 다른 양반 출신들의 기록에서도 비슷하게 묘사된다. 그럼에도 경제적 제약을 심하게 받았다는 썰과는 상당히 다른 점이 많이 보인다.

한국 화교들은 평범한 한국인들처럼 한국어가 제1언어, 즉 모어라서 언어로는 구별도 잘 안 된다. 노년층을 제외하면 대략 박정희 정권 시절 이후 태어난 중장년 이하는 당연하게도 말투부터 억양까지 다른 한국인들과 아무 차이가 없다. 이들 중 대다수가 중국 대륙인, 대만인, 홍콩인, 마카오인이나 중국계 말레이시아인/중국계 싱가포르인들과 상대할 때는 영어를 쓰는 경우가 많다. 요즘 시대에는 대화할 때 중국어를 섞어 쓰거나 중국어 억양이 드러나는 사람들은 대개 중국 국적의 조선족, 한족 이민자들이지 화교들이 아니다. 한국 사회에 화교가 얼마나 동화되었냐면 중국어도 많이 잊어버려 화교소학에서 따로 가르쳐야 할 정도이다. 물론 입말로 중국어를 조금씩 배웠지만 제대로 구사하려면 화교소학을 다녀야 하며 요즘엔 아예 대만에서 어학연수를 하고 오는 경우도 많다. 대신 이러한 이중언어 화자라는 장점을 크게 살리기도 하는데 조선족 고용을 꺼리는 회사들은 중국어 통역으로 한국화교를 선호한다.

간혹 이 때문에 한국화교를 조선족으로 착각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 경우 해당 본인에게는 굉장한 모욕이 되므로 말조심해야 한다. 조선족들은 한국화교들의 부모 및 조부모 세대가 실향민이 되게 한 원흉으로 불구대천지 원수일 뿐이며 대륙에 대한 반감이 있으니 시선이 좋을 리 없다. 당연히 조선족도 한국화교를 싫어한다. 한국화교는 조선족을 중국본토인 거지로 취급하며 조선족은 한국화교를 가짜 한국인에 돼지로 비하한다. 둘의 사이가 얼마나 나쁘냐면 조선족과 한국화교는 거주지도 철저히 분리되어 있고 한국화교 업주들은 절대 중국본토 한족이나 조선족은 고용조차 안 한다. 못 믿을 놈들이라고 생각해서이다.

2011년 당시 귀화자가 10만 명을 넘었을 때 중화인민공화국 출신이 7만 9천 명, 중화민국 국적자는 2천 명이었다. 특히 중화민국 국적자의 경우 이중국적인 경우가 흔하다. 귀화하지 않는 화교는 거진 이민을 택하거나 대만으로 귀국하는 것을 택했다.#

현재 2만 명 정도만이 중화민국 국적으로서 영주권자로 잔류해 있고 그나마 이들도 조금씩 귀화하는 중이다. 그 빈자리를 최근에 한국으로 넘어온 중국인들과 중국 출신 조선족이 메꾸는 경우가 더 많다고 보면 된다. 실제로 2000년대 이후 배달부노가다와 같은 블루 칼라는 조선족들이 점령한 업종이 되었다.

2020년대 현재 대한민국의 순수 화교 인구는 7만 명 정도로 아직 귀화하지 않은 중화민국 국적자로 점진적으로 귀화중이다. 나머지는 본국의 실효 지배 지역인 대만 지구로 귀국하거나[6] 싱가포르, 미국,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등으로 이민 갔다. 여기서 '순수 화교'란 중화민국 국적을 유지한 채 한국 영주권을 가진 사람들을 말한다. 싱가포르의 경우 똑같이 중화민국이 기원인 중국계 싱가포르인들이 70% 이상으로 다수여서 정착이 쉬워 일찍이 1990년대 초반부터 한식당 등을 개업하여 정착을 시작했으며 싱가포르 정부는 자국민 출산을 장려할 수 없어 귀화로 인구를 불려서 한국화교들의 귀화도 다 받아주었다. 미국과 캐나다의 경우에는 코리아타운에서 한국식 중국집을 운영하고 한인교회에 출석하는 등 한인사회에 합류하여 정착했으며 이제는 돈을 꽤 모은 사람도 많다.

일반적으로 1992년 한중수교 이후에 중국 본토에서 들어온 중국인(신화교)들이나 조선족들은 한국화교에 포함하지 않는다. 다만 중국에서 들어온 한족들을 화교로 치면 화교들의 숫자가 크게 불어나는 중이기는 하다. 2017년 기준으로 한국 내 거주 중국인은 110만~120만 명인데 이 중 조선족이 60만~70만 명이다. 물론 한국화교들은 이들을 절대 인정하지 않는다.

결국 한국에 체류하는 중화민국(대만)인은 결국 크게 두 부류이다.대만에서는 이 두 부류를 노교(老僑: 오래된 화교), 대교(臺僑: 대만에서 온 화교)로 구분하는 듯하다.

현재 국내에 체류 중인 중국계 주민들의 인구 비율로 따지면 이 순서대로 많다고 볼 수 있다.
  1. 중화인민공화국 국적의 조선족
    : 중국 조선족은 한국에서 재외동포 비자를 받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에, 중국 국적이어도 한족이나 다른 소수민족과 구별된다. 또한 기존에 3세대까지만 인정되었던 동포지위가 2019년부터 직계비속 전체로 확대되었다.
  2. 중화인민공화국 국적의 한족
  3. 중국 본토 출신의 후손이며 한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중화민국 국적자
    : 일반적으로 한국 화교, 재한 화교라고 하면 이 부류를 뜻한다. 한국에서 대만인은 그냥 대만인, 중국인은 그냥 중국인, 중국조선족은 그냥 조선족이라고 부르지 굳이 화교라고 부르지 않는다. 무호적 대만 여권한국 영주권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에 대만 출신의 대만인과 구별된다.
  4. 대만에서 태어나고 자란 중화민국 국적자
  5. 홍콩 특별행정구마카오 특별행정구 출신
    : 중국에 반환되었지만 여권을 따로 사용하고 해외에서 별도의 국적코드를 부여받아 홍콩 여권마카오 여권 보유자로 구별된다.
  6. 중화인민공화국 국적의 타 소수민족

재한 화교들이 조선족, 중국 국적 한족들보다 수에서 밀리는 이유는, 한국에서 나고 자란 전통적 화교들은 상술한 것처럼 한국 국적을 취득했거나 상당수가 대만으로 귀국을 택하거나 싱가포르, 미국 등 영미권으로 이민을 간 사례가 많기 때문이다.

산둥성, 허베이성 등 북방 지역에 연고를 둔 재한 화교들의 입장에서는 아무리 현재 본국의 실효지배 지역이라지만 대만은 남방 문화권에 해당하는 지역인지라 상당한 이질감이 느껴지는 지역이다. 그렇다고 중화인민공화국이 지배하는 '연고지'로 돌아가려니 그곳에서도 이방인 취급받기 십상이다.[7] 그래서 차라리 미국, 캐나다, 서유럽, 호주, 뉴질랜드, 싱가포르 등 외국으로 이민을 간 한국 화교들이 생각보다 많다. 다만, 대만에 친척이 있거나 대만과 지리적으로 가까운 푸젠성, 광둥성, 상하이, 저장성, 장쑤성 출신의 화교들은 문화가 어느 정도 비슷하기 때문에 그런대로 대만으로 재이주하여 잘 적응하며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북방 계열 한국화교들도 결국 무호적 공민의 제약사항이 너무 많아 울며 겨자 먹기로 할 수 없이 대거 대만 귀국을 택해버렸다. 대만으로 귀국한 무호적 공민 한국화교들의 경우 민진당 정부가 집권하면 대만어를 강조하여 힘들어하기도 한다. 이들은 한국어표준 중국어만 알고 대만어를 모르며 대만어는 표준중국어와 상이하여 배우기 어렵기 때문이다.[8]

2. 화교, 화인, 화예의 구별

명칭 국적 해외 중국계 커뮤니티 참여 문화적 정체성[9]
화교 대만, 중국[10] 참여 대만, 중국
화인 체류국 참여 대만, 중국
화예 체류국 참여 or 불참 체류국

한국에서는 화교(華僑), 화인(華人), 화예(華裔) 등을 구분하지 않고 모두 '화교'라고 부르는 경우가 일반적이나 중화권에서는 이를 구분하여 부른다. 두산백과, "화교"

화교는 본국을 떠나 해외 각처로 이주하여 현지에 정착, 경제 활동을 하면서 본국과 문화적·사회적·법률적·정치적 측면에서 유기적인 연관을 유지하고 있는 중국인 또는 대만인과 그 자손을 통칭하는 말이다. 연관이라는 말은 개인으로서의 직접적인 연관에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고, 이주민의 가족이나 자손이 현지에서 동향단체를 통하여 연관성을 지속하고 있음을 뜻한다.#

근래에는 이보다 한정적인 뜻으로 쓰여, '외국에 살고 있는 중국국적의 소유자'를 지칭하며 국적을 기준으로 화인과 구분된다. 넓은 의미로 쓰일 때에도 보통 화예를 제외한 화교와 화인만을 ‘화교’라고 부른다. 유명인 중에는 대한민국에서 태어나고 자랐지만 대만 국적과 유지하고 있는 여경래가 있다.

화인은 넓은 의미로는 '해외로 이주한 중국계 중 체류국 국적 취득자'를 말하며, 중국 국적을 유지하는 화교와 구분된다.[12] 좁은 의미로는 국적은 체류하고 있는 나라로 귀화하였지만 문화적으로는 본국과 동질성을 유지하는 경우'를 말한다.[13]

예를 들면 중국에서 태어나고 자랐으며 성인이 된 이후에 대한민국 국적으로 귀화한 당예서, 전지희가 있다. 또는 한국에서 태어나고 자랐으며 대한민국 국적으로 귀화했지만, 화교학교를 다녔거나 중국계 사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등 여전히 본국의 문화적 정체성을 유지하는 이연복, 주현미가 있다.[14] '화인'은 '화교'만큼이나 해외에 거주하는 중국계을 지칭하는 말로 자주 사용된다. 중국에서는 다양한 유형의 이민자를 통칭하여 '해외화인(Oversea Chinese)'으로 부르며, 중국 학계에서는 해외 거주 중국계를 통칭하여 '화교・화인'으로 부른다.[15]

화예는 본래는 '조상이 중국인인 자손'을 이르는 말로[16], 중화민족의 특징을 가지고 있기는 하나 가장 민족적인 연계가 희박한 부류를 지칭한다.[17] 일반적으로 '국적도 체류하는 국가로 바꾸었을 뿐만 아니라 문화적으로도 본국과 단절하고 귀화한 나라에 깊이 동화된 경우'를 일컫는다. 현지 국적을 취득하고 혼혈 동화(混血同化)되어 이미 지연·혈연의 의식이 희박해져서 법률적·경제적·정치적·사회적·문화적으로도 본국과의 연관성이 약하며, 언어조차 모국어를 모르는 채 현지인화된 경우가 많다.[18] 일반적으로 선조가 5대 이상 현 거주국에 살아왔던 집안의 후예를 ‘화예’라고 칭하고 그보다 짧으면 ‘화인’으로 구분하고 있다.[19]

예를 들면 2PM닉쿤, (여자)아이들민니는 태국 국적이며 태국인의 정체성을 가진 화예이다. 또한 중원에서 한족 왕조가 이민족 왕조(금나라, 청나라 등)에게 멸망한 후 주변국(조선, 대월 등)으로 망명한 한족의 후예도 이 화예라고 할 수 있겠다. 물론 이들은 현지에 정착한지 수세기가 지난만큼 다른 화예들보다도 중국과의 민족적 연계가 희박하며 자기 조상이 중국 출신인것조차 모르는 사람들이 절대다수다.[20]

국적을 기준으로 명확히 구분되며 널리 쓰이는 화교화인에 비해 화예는 널리 쓰이지 않으며 비교적 정립이 덜 된 개념이라 할 수 있다. 화예를 넒은 의미에서 화인의 범주에 포함시키는 시각[21]도 있고, 화예로부터 '화족(華族)'[22] 개념이 다시 발전하였다고 보는 시각[23]도 있다. 그러나 '화예'가 중국계 해외이민자들에 대한 주요 명칭[24] 중 하나로 자리잡은 것만은 틀림 없으며[25], 중국 해외이민의 발전과 함께 여전히 연구되고 있는 개념이다.

한국은 동남아시아에 비해 화교 역사도 짧고 화교 인구도 많지 않아 이러한 구분이 일반적이지 않고 중국계 이민자들을 '화교'로 통틀어 부르고 인식한다. 그러나 최근 연구들에서 재한 화교 3,4세대를 1,2세대와 구분하여 이해할 필요가 있다는 의견이 제기되기 시작하였다. 최근 연구에 따르면, 재한 화교들이 가지던 "‘중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은 세대를 거듭하면서 약화되고 있"으며, 주관적 정체성과 사회적으로 인정된 정체성(국적)이 분리되는 경향[26]을 보인다.[27] 또 다른 연구에서는, 재한 화교 3,4세대는 1. 상상적인 고향으로서 중국[28] 2. 형식적 조국이자 초국적 네트워크로서 대만[29] 3. 전략적이고 선택적인 삶의 현장으로 한국[30]이라는 세 가지 국가 인식을 가졌으며, "한국어와 한국 일상생활 및 문화에 더 익숙"하고, "한국인처럼 살고 싶지만, 굳이 한국 국적으로의 귀화를 선택하고 싶지 않다는 모순된 욕망을 가졌"다고 하였다.[31] 다시 말해, 3,4세대는 1,2세대와 달리 중국, 대만, 한국 어느 한 곳에도 소속되지 않는 '초국가적 자기 정체성 및 국가 인식'을 지녔으며, 때문에 재한 화교를 단일한 공동체 집단으로 규정하거나 이들에게 문화적으로 동일한 ‘중국인다움(Chineseness)’을 강조하는 것은 편견임을 시사하였다. 앞으로 한국에서도 화교를 세대별 또는 유형별로 분리하여 바라볼 가능성이 커진 것이다.

3. 역사

3.1. 구한말

화교라는 단어는 역사적으로 청나라 말기부터 중국에서 이주한 중국인들을 부르는 호칭으로, 그 이전의 중국 사서나 문헌에서는 화교라는 단어가 보이지 않는 것을 감안하면 근대에 나온 용어로 보인다.

명나라 멸망 이후 명나라에서 조선으로 유민들이 수만명 이상 가량 유입되어 조선에 정착하였으며, 황조인이라고 해서, 이들은 소중화 사상에 의해 조정에게 세금우대를 받는 등 어느정도 우대받는 편이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조선에 동화되었다. 다만 우대 정책 자체는 고종까지도 존속해있었으며, 이들을 대상으로 별시를 시행해주는 등의 혜택이 있었다. 청나라 말기에 1882년 임오군란 이후 청나라군이 조선에 주둔한 시기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에 의해 청군을 보조하고, 이들을 대상으로 장사하기 위해, 청나라 상인들이 따라왔고, 이들이 조선에서의 상업 활동을 하기 시작하였던 때, 화교들은 조선에서 장사를 하며 수익은 본국인 청나라로 보냈다.

그러니까 조선인의 입장에서 보면 화교들은 일본인 상인과 다를 바 없는 달갑지 않은 집단이었고, 이 때문에 조선 중기에 정착한 중국인들의 후손인 황조인과는 대우가 달랐다.

사실 한국화교는 외국의 화교 집단과는 발생부터 굉장히 다르다. 다른 나라에 진출한 화교들은 농지 문제와 경제 문제 등으로 17세기부터 인구 유출이 발생하다 19세기 아편전쟁으로 쿨리로 세계 각국에 송출된 푸젠성이나 광둥성 출신들이 많았다. 일본으로 간 대만 출신 화교들을 비롯해 19세기 이후 신대륙인 아메리카로 간 화교들도 유럽 국가들과의 교류가 많았던 이 지역 출신들이 많았다. 광동성의 경우만 해도 벌써 16세기 명나라 시절에 포르투갈인들이 드나들기 시작했으며 이후 네덜란드, 영국, 프랑스, 독일, 덴마크 그리고 19세기에는 미국 등으로 확대되었다. 포르투갈은 아예 광동에 마카오라는 자기네 식민도시까지 만들어 놓았으며 수많은 중국어 차용어가 포르투갈어에 유입되었고 '중국과의 비즈니스'(대박 기회) 등 중국이 엮인 관용어들도 여럿 생겨났다. 이러한 상황에서 19세기에 아편전쟁 이후 영국인들이 쿨리를 모집하자 적극적으로 지원하여 수많은 중국인이 미국으로 건너갔으며 말레이반도에는 가족 단위로 대규모로 건너가서 싱가포르, 쿠알라룸푸르, 페낭, 이포, 쿠칭 등의 중국계 이민도시들을 개간하기도 했다. 거리가 먼 남아메리카에도 페루, 파나마, 코스타리카 등에 가족 단위로 많이 건너가 페루는 오늘날에도 광동어 라디오 방송이 있고 페루식 중국요리가 인기다.

반면, 한국화교들은 인천항과 직항이 있던 산둥성 출신들이 대부분이다. 청나라 팔기군의 잡일 등을 도와주기 위해 왔다가 상업을 하기 시작했으며 청나라군이 되돌아갔을 때 많은 자들이 산둥성으로 돌아갔지만 이들 중 일부는 남아서 상업활동을 계속했고, 이들이 한국화교의 시조가 된다.

그러던 중 1894년 발발한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청나라에게 승리하면서 조선과 청나라의 수교는 끊어진다. 5년 후 조선이 대한제국을 선포함에 따라 청에게 유리했던 과거의 수호조약을 수정한 새로운 조약을 체결했다. 이 때문에 화교 상인들이 일본인 상인들에게 점유율 면에서 밀리게 되지만 그 전에 확보해둔 유통망을 바탕으로 꾸준히 상업에 종사하여 살아남았다.

이후 1910년 경술국치로 대한제국이 사라졌고 청나라 역시 1911년 신해혁명으로 멸망하고, 중화민국이 들어선다. 물론 한국에 정착을 시작한 화교들은 중화민국 공민이 되어 계속 잘 살고 있었다. 그 유명한 공화춘도 이 때 공화국이라는 뜻으로 개명하여 현 이름을 갖게 되었다.[32]

3.2. 일제강점기

중화민국은 일본과 새로운 수교를 맺게 되고 조선을 멸망시키고 병합한 일본은 자국 상인들이 조선에서 힘을 갖도록 하기 위해 일부러 화상을 견제한다. 화상들의 주요 교역 상품은 영국면직물이나 청 혹은 일제 비단 등이었다.

1920년대 이전에는 일본 상인들의 주요 교역 물품 또한 동일했다. 영국산 면제품을 중계무역하는 것이 중국인 상인, 일본인 상인 등 외국 상인들이 조선에서 하는 중요한 사업이었다. 1920년대 이후에는 국제 무역에서 일본산 생사와 면제품 비중이 급격히 높아져서 오히려 미국 등으로 수출하는 상황이 된다.

그러자 일본은 1920년대 말에 높은 관세를 붙이는 식으로 이를 견제한다. 일본의 이러한 관세정책은 일본 본토에서 급성장한 방직, 방적 산업을 보호하고 조선 시장을 독점하기 위해서였다. 그러자 화상들은 한약상이나 청 요릿집 등을 차리고 주물공장 등을 운영한다. 이들의 숫자는 1930년에 6만 명에 이른다. 당시 조선의 인구가 약 2천 300만 명 정도를 겨우 넘겼고 일본인이 약 70만을 차지했는데 화상들은 조선 전체의 상인에서 2%를 차지했다.

특이한 점은 이런 화교들에 포함되지 않는 계절 노동자도 꽤 많았다는 것이다. 1920년대 조선에서 발생한 토목 공사에는 산둥에서 겨울이나 봄에 일자리를 찾으러 온 중국인 노동자들이 많았는데 공식 통계론 당시 화교의 인구가 9만에 달했다. 비공식적인 추계로는 1927년에 17만의 중국인 계절 노동자들이 왔다는 분석도 있다. 이들은 일본인 임금의 절반 수준인 조선인보다 임금이 좀 더 저렴했다.

화교 중에는 농업에 종사한 이도 많았다. 화농(華農)이라고 하는데 이들은 주로 채소를 재배했고 채소를 구매할 구매력을 갖춘 일본인들을 상대로 장사를 많이 했다. 당시 양파 등을 한국에 유입한 사람들도 대부분 화교 농민이었다.

그리고 가족을 위해 외국에 돈을 벌러 왔다는 심리적 이유로 인해 조선인보다 더 악착같이 일하며 돈을 모았고 돈을 많이 벌어도 저축만 하고 소비를 잘하지 않는 특성 상 일본인 경영자들이 조선인보다 중국인 노동자를 선호하였다. 이 때문에 조선인들한테서 중국인들은 조선인의 일자리를 뺏으면서 조선 물건을 사지는 않는다는 경제적인 이유로 인해 조선 내에서 반중 감정은 점차 강해졌다.

조선총독부 입장에서도 조선 내에서 반중 바람이 거세게 불면 독립운동가들의 입지가 급속도록 좁아지고 반중 감정이 거세지면 상대적으로 일본에 대한 반감이 줄어든다는 측면으로 인해 일부러 이를 조장한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상하이에 위치한데다가 독립운동가들도 중국 국민당 등 중국 내의 정당들이나 단체들과 협력하는 경우가 많았다는 것을 노린 것이었다. 그래서 한국인과 화교 간의 갈등을 부추겨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방해하려는 의도가 있었다.

특히 조선인들과 화교 간의 갈등이나 언론을 통한 조선인-화교 대결구도 강조와 유언비어 유포를 부채질하였고, 여러번 오보사태가 터지며 1920년대 후반부터 1931년까지 화교를 상대로 폭동이 일어난다. 일제강점기 화교배척폭동, 1927년 화교배척폭동, 1931년 화교배척폭동, 1931년 평양화교 학살 문서 참고. 상황 발생 후 1주가 지나서야 총독부는 진화에 나서지만 평양 한 곳에서만도 약 120여명의 화교가 폭동으로 사망했다. 수치는 조선총독부 경무국은 사망 97/부상 118, 중국측에선 사망 142/부상 546, 국제연맹의 만주사변 조사 보고서에는 사망 127/부상 392였다. 이 폭동으로 화교 약 4천 명이 중화민국 영사관으로 대피했다고 할 정도였고 6만이었던 화교의 숫자는 그 해 겨울에 3만으로 반토막이 났다. 그리고 대다수가 중국으로 가는 경우가 많다.

일본의 이간질이 개입됐다는 것을 안 조선과 중국의 지식인들은 반일전선을 강화하기 위해 진실을 알리려고 노력했고 그 해 겨울에 윤봉길 의사가 훙커우 의거를 행하면서 조선과 중국의 감정은 완화되었다. 그러나 1931년 만보산 사건 후 일어난 일은 한국 화교들에게 꽤 큰 트라우마로 남았다.

1930년대에 만주사변, 중일전쟁이 일어나면서 화교들은 적성국의 국민으로 조선에서 생활했다. 이때 한국 화교들도 친일파와 반일파로 나뉘어 갈등을 빚었는데, 특히나 전쟁으로 본토와 무역이 불가능해지면서 화교들은 위축되었다. 하지만 그와중에도 1940년대에 지하조직을 만들어 항일 무장운동을 벌인 화교들이 존재하는 등 한국인들과 함께 일제강점기 때 공동의 적인 일제에 대항해 항일운동을 펼친 화교들 또한 꽤나 존재하였다. #

3.3. 해방 시기

1945년 일본 제국이 패망했다. 이 시기가 92년 한중수교로 조선족과 본토에서 중국인 이주, 이민이 시작되기 이전 마지막 화교 대량 유입이 있던 시기였는데, 국공내전을 피해서 많은 화교들이 피난 온 것은 잘 알려져 있지만 사실 그 이전에도 중일전쟁 때 일본에 협력했다는 이유로 국민정부에게 한간으로 몰려 처벌받을 것을 두려워했던 화교들도 유입되었다. 다만 이런 화교들은 일본 커넥션이 있었기 때문에 한국에 머물기보단 일본으로 다시 많이 넘어가서 일본 화교가 되었다. 한국에 진주한 미 군정2차 세계대전의 연합국 국적(중화민국) 사람들이었던 화교들에게 우호적이었다.

일본 패망과 한반도 남북 분단으로 기존의 식민지 시절의 네트워크였던 만주, 북한 지방, 일본과의 연결이 끊기면서 한반도 남부의 화교들은 중계무역 등을 독점하게 된다. 1946년엔 전체 무역량의 82%, 1948년에는 52.5%를 차지할 정도였다.

당시 화교의 숫자는 북부 지방에 5만[33], 중부 지역 및 남부 지역에 2만 정도가 살았다. 이런 화교들의 짧은 전성기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정부와 각종 사회 기능이 회복되면서 점점 줄어든다. 거기에다 본토에서 국공내전이 발생하고 1948년 한국 정부가 외국인의 출입을 제한하고 1949년 세워진 중화인민공화국이 자국민의 해외 이주를 금지하면서 한국의 화교들은 이산가족이 된다. 그리고 이들의 왕래가 끊기자 재한 화교들은 재산 상 손해를 입었다.

특히나 전쟁 직전에 한국 정부는 전쟁을 이유로 전국에 창고봉쇄령을 내려 중계무역을 하던 화교들은 타격을 입는다. 그리고 한국인들은 공업화를 하는데 대만이나 홍콩 같은 중화권이나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태국동남아시아 그리고 호주, 뉴질랜드오세아니아보다는 재일 한국인이 많은 일본이나 한국계 미국인, 한국계 캐나다인들이 많은 미국 + 캐나다, 파독 근로자가 많은 서유럽을 주요 수입 기지로 삼으면서 화교들이 무역에 유리한 점도 사라졌다.

사실 이는 어쩔 수 없는게 1950년대1960년대 시점에서는 사실 중국본토가 문화대혁명으로 개판이었으며 대만은 무역 수출입 기지를 삼기에는 너무 작았다. 영국 통치를 받던 홍콩도 이 때는 소규모 경공업으로 겨우 연명하여서 현재와는 많이 달랐다. 홍콩이 금융허브로 크기 시작한 건 1970년대 직후의 일인데 한국은 금융업이 미발달해서 더욱 파이가 없었다. 호주뉴질랜드의 경우는 농업국이라 그 당시 메리트가 별로 없었다. 동남아시아의 경우 한국이 공업화를 한참 실시하던 시절 싱가포르는 분명 한국보다 훨씬 잘 살았으나 아직 말레이시아의 일원으로 독립조차 안 했으며 태국말레이시아도 그 당시엔 농업국이었고 이 둘은 베트남 전쟁에서 병참기지로 쓰이며 비로소 공업화된다.

그런만큼 한국경제가 미일 편중으로 흘렀던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기에 동남아시아와 교역이 많아야 이득을 볼 화교들이 타격을 입은 것도 당연한 일이다. 물론 이는 한참 공업화를 진행하던 시절 얘기고 1986년 서울 아시안게임, 1988년 서울 올림픽을 개최하는 과정에서 중국본토가 참여하고 1992년 한중수교가 전면 실시되면서 이제는 중국과의 교역이 최대 비중으로 올라갔으며 동남아시아오세아니아도 신남방정책을 통해 교류가 확대되고 워킹홀리데이에 미국이 불참하고 호주와 뉴질랜드가 참여하면서 이제는 미국보다는 호주로 영어 배우러 많이 가게 되어 미일 편중도 옛 이야기가 되었다. 문제는 한국화교들이 그때까지 버티지 못했단 게 문제다.[34]

3.4. 6.25 전쟁과 1950~1980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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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한국에서 한국 전쟁이 터지면서 북한에 살던 화교들 중 약 1만 명이 중국으로 가거나 한국으로 월남한다. 특히 반공 성향 재북화교들은 대거 남한행을 택했다. 이 당시 중국본토는 이미 공산통일된 지 오래였기에 박해를 우려해서였다.

이때 장제스국공내전 직후인지라 다시 중화민국 국군을 투입하는 방안을 미국에 제안하지만 확전을 원치 않던 미국은 거절한다. 대신 국내 거주 반공 화교들이 1950년 10월 국군의 평양 입성 이후 제1보병사단에 합류하여 수색대원으로 활약하였으며, 그외 육군 첩보부대(HID)의 예하부대였 SC지대가 창설되자 여기에서 중공군을 상대로 한 정보공작과 심리전, 통역업무 등에 투입하였다.

당시 화교들은 전국에서 부산으로 피난을 많이 갔는데 군복을 입고 휴가 나온 화교들이 자주 임시 화교학교에 나타났다고 한다. 그리고 이들 중 국군에 입대해서 직접 참여한 사람들이 있기도 했다.

이들 중 일부는 나중에 대만으로 건너가서 중화민국 국군에 참여하기도 했다. 한국화교 중에 대만의 사관학교에 가 대만군이 된 사람도 꽤 있었다. 예전에 화교들은 대만에 들어가 몇 개월 이상 있으면 중화민국 국군에 입대해야 했는데 이때 오히려 대만군 장교단에 합류하고자 대만의 각군 사관학교에 간 케이스들이다.

남한 내 재한화교들은 반공 성향에 부유해서 북한이 그렇게 극혐하는 지주 계층에 해당되는데다 북한 특유의 극심한 외국인 혐오까지 더해져서 6.25 전쟁 당시 북한군 치하 서울에서 엄청난 고통을 겪어야 했다. 인민재판에서는 각종 누명으로 짚둥우리를 씌워 화교들을 처형했다. 서울 근교도 사정은 똑같아서 인천의 공화춘은 창립자 우희광 일가가 피난을 가버렸으며 남은 종업원들은 북한군이 난입한 뒤 엄청나게 괴롭힘당했다. 우희광 일가는 인천상륙작전 성공 이후 국군이 서울을 수복하자 되돌아올 수 있었다. 이러한 동포들에 대한 괴롭힘이 북한에 대한 적개심을 불러와서 재한화교들이 대거 국군에 합류한 것이 당연한 일이다. 역으로 무식한 미군들이 화교=중공군이라고 학대하고 죽이는 사례들도 없잖아 벌어지기도 했다.

국제 사회에서 중화민국의 대표성을 세우고 싶었던 장제스는 해외의 화교들에게 이를 얻기 위해 한국화교를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한국화교들은 대만 입시에서 꽤 혜택을 받았고 중국어를 배우기 위해 대만의 중학교/고등학교로 올 수 있게 여러 지원책을 마련한 게 오늘날까지도 남아있다. 심지어는 군함을 동원해 화교들이 대만에 와서 교육을 받을 수 있게 지원하기도 했다. 정부도 대만과의 협조를 위해 중공군 중 4천명의 반공 포로를 석방해 대만으로 보내기도 했다.[35] 허나 장제스 시절에는 이름 석자만 쓸 수 있으면 대만 유수의 대학에 그대로 입학 가능했던 수준으로 지원이 파격적이었으나 차차 지원이 약해지면서 민진당 이후에는 대만 독립론에 동조하지 않는 해외화교들을 골칫거리로 여겨서 혜택을 거의 없애버렸다.

6.25 전쟁이 끝나고 화교들은 사실상 가장 높은 비중을 차지했던 상업을 포기하고 요식업에 주력한다. 국내 산업 보호를 위해 1950년 창고봉쇄령과 화폐개혁, 그리고 1962년의 외국인 토지 소유 금지 등으로 인해 화농이 몰락하고 화상들도 헐값에 땅을 팔게 된 것이 그 이유다. 이러한 화교 견제 정책은 한국의 민족주의 정서와도 부합하였으므로 이후 정권들이 계승해서 1990년대까지 이어진다. 화교 요식업자들은 피로연 같은 큰 행사를 많이 했는데 토지 소유 제한으로 대규모 영업장의 운영이 불가능해진다. 운이 좋은 경우엔 한국인 바지 사장을 내걸기도 했다.

박정희 정권에 들어와서도 상황은 마찬가지였으며, 국내 공산업 발전을 위한 국산품 애용, 국민의식 고취 노력이 더 강해지며 화교 억제 정책은 계속되었다. 1970년엔 주거용 200평, 영업용 50평으로 약간 제한이 풀리긴 하지만 영세한 수준을 벗어나기 힘들었고 이러한 외국인 토지 소유 제한은 1997년 외환위기 이후에 풀리게 된다.

1970년엔 단 몇 개월 뿐이긴 하지만 중식당의 쌀밥 판매 금지 조치가 내려진 적도 있다. 이는 혼분식 장려 운동의 일환으로 진행되었는데 사실 타 식당도 혼분식 정책으로 애로사항이 꽃피기는 마찬가지였다. 이 당시 혼분식 정책을 박정희 정권이 얼마나 강압적으로 저질렀냐면 혼분식 단속원이 식당 사장딸이 먹는 밥이 흰 쌀밥인 것을 가지고 트집잡아서 영업정지 처분을 내린 일이 있었을 지경이었다. 이 혼분식 정책은 당시 화교들에게 상당히 심리적으로 위축될 만한 일이었다. 그 탓에 4천 곳에 달하던 화교 식당은 1천 곳으로 줄어들었다. 국편위의 구술기록을 보면 화교들이 당시 쌀밥 판매금지령이 한식당에도 내려진건지 모르겠는데 만약 우리에게만 내려진거면 진짜 우리를 죄다 죽이려는 악랄한 조치였다고 치를 떨고 있다. 여기에 더해 화교의 전유물인 중식당이 한국인 주방보조들이 대거 유입되면서 이후 한국인이 차리는 중식당이 폭발적으로 늘어난 점, 외식 문화가 발달하면서 중식당 외의 선택지가 늘어난 점, 예전엔 제대로 된 면요리를 먹으려면 중식당 외에 선택지가 없었으나 인스턴트 라면 종류가 급격히 발달하면서 중식당의 유인력이 떨어진 점 등으로 해서 한국의 화교 정책 및 80년 5.18을 본 화교들은 대만, 홍콩 등 중화권으로 많이 떠나기도 했고 돈을 훨씬 많이 벌 수 있는 일본으로도 많이 갔다.

한국은 1980년대부터 중화인민공화국과의 관계 개선을 추진했다. 중국 본토과의 수교가 가시화되면서 중국 대사관이 있던 서울 소공동 쪽에 주로 거주하던 화교들이 본토와의 연결이 상대적으로 편한 서울 연남동 등지로 이주하기도 했다. 한성화교학교가 있던 곳이다. 화교 출신 배우 하희라도 그 지역에서 자랐다.

한국 화교는 1970년대 최대 8만에 이르렀다. 전쟁 이후에는 베이비 붐과 월남자 등으로 인해 자연증가한 것이다. 그래서 일부 수치에 따라 12만까지 보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각종 차별 문제에 더해 당시는 대만이 한국보다 더 잘 살았기 때문에 화교들 입장에서 군대 문제 정도를 빼면 한국을 떠나도 아쉬울 것이 별로 없었다. 그렇기에 대만으로 귀국하거나 당시 영국의 통치를 받던 영국령 홍콩으로 가는 등[36] 중화권으로 귀국 혹은 중국계 싱가포르인이 다수인 싱가포르나 한인 이주민이 많은 호주, 북아메리카 등으로 상당수가 이주하여 1990년에 2만 명까지 줄어들었다.

물론 대만 귀국자들의 경우 대만이 잘살았다고 해도 문화적 차이는 엄연히 있기 때문에 대만 생활에 적응하지 못한다거나 실패한다는 이유로 다시 돌아오는 경우도 꽤 있었다. 대만에서도 한국 화교들은 산동성 사투리를 쓰는 소수민족 취급에 가까웠다. 그러나 대만 귀국자들이 아닌 동남아시아북미 등으로 간 사람들은 거기 그냥 정착해버렸다.

3.5. 한중수교와 1990년대

1992년 한국중국과 수교하면서 대만과 단교했다. 한중수교 양해각서에 따라, 명동 자리에 있던 중화민국 대사관은 그대로 중화인민공화국이 차지했다. 당시 대만 정부가 혹시나 해당 부지를 화교 단체 등에 팔 것을 우려해 한국 정부는 단교 1주일 전에 비밀리에 통보하고 사흘 전에 공식 통보하여 부지를 빼돌릴 만한 시간을 주지 않았다. 결국 대만 정부는 부지를 강제로 중국에 넘겨주었는데, 청천백일만지홍기가 내려가고 오성홍기가 올라가는 동안 화교들이 몰려들어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그나마 한국 정부는 대만 대사관의 직원들을 무력으로 쫒아내지 않으면서 신사적으로 대우했고, 사전에 미리 철수를 할 수 있도록 길게 시간을 줬다고 한다.[37] 한국에서 중국 측에게 새로운 대사관을 마련해 줄 수 있는 방법도 있었지만 중국의 입장에서는 대만이 사용하던 대사관을 자신들이 점유하면서 양안관계의 자존심 싸움에서 이겼다는 것 때문에 오히려 대만 대사관에 들어가는 것을 더 좋아했고, 중국과 외교관계를 맺을 때 그걸 요구하기도 했다.

어쨌든 1992년은 화교들에게 중대한 분기점이었는데, 근래에는 신화교의 등장에 한국에서 중국 대륙인을 보기가 쉬워졌다. 그렇지만 전통적인 화교들은 중국 대륙인에게 매우 부정적이다. 화교들 중엔 국민당 당원들도 꽤 있다. 여기서 본인 연고가 산둥성 등 대륙 지역이기는 하지만 중화인민공화국에 대한 반감이 강하다보니 차라리 대만과 더욱 친근하게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1992년 이후 온 중국 대륙 출신 한족 이민자들보다는 대만인 커뮤니티와 더 가깝다.

실제로 화교들을 보면, 의사나 한의사가 꽤 많다. 특별전형으로 들어오는 수만 해도 세 자리를 훌쩍 넘어간다. 각 학교당 몇명 수준이지만, 전국 한의대 의대 숫자를 합치면 수십 개가 되기 때문이다. 당장 공상정의 아버지가 외과 의사였다.

미국 캘리포니아에는 약 1만 명에 가까운 한국 화교들이 이주했는데, 민남어를 쓰는 푸젠성이나 광동어를 쓰는 광둥성 출신들과 달리 대부분이 산둥성 출신들이라 소속감이 달라 한국 화교들은 미국 내 차이나타운 대신에 코리아타운에 거주하는 경우가 많다.

1989년 천안문 6.4 항쟁에 참가했다가 중국공산당의 탄압과 체포를 피해 한국으로 망명한 중국인들도 있다. 당시 중국 내 기독교인들이나 지식인들도 이들과 같이 망명했다고 한다. 이 사람들은 자신들이 중국 대륙이 아닌 대만에서 이주해온 것으로 철저하게 위장하면서 국내 화교 단체와도 연관을 맺지 않았다. 자국에 대한 증오보다는, 혹시 있을지 모를 중국 공산당의 테러를 피하기 위함이었다.

이들은 어쩔 수 없이 중공의 정치적 탄압을 피하기 위해서 적극적으로 한국 국적으로 귀화했으며 일부러 화교 단체와 관계를 맺지 않았으므로 화교학교를 보낼 수 없어서 자녀들도 한국인으로 키웠다. 그래서 그 중에는 본인이나 자녀들도 아예 한국인처럼 융화된 사람도 적지 않다. 인터뷰에 따르면 자녀들이 성인이 된 후에야 사실은 부모가 자신들은 중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중국인이라는 사실을 고백하였고, 자신을 완전한 한국인으로 믿고 자란 자녀들이 크게 놀라는 사례도 있었다고 한다. 그 정도로 철저하게 조심했다고 한다.

1990년대 이후에 태어난 화교들은 중국어가 스펙이 되자 중국어를 배우러 교육 기간의 일부를 대만에서 보내는 일이 생기고 있다. 집에서 중국어 사용이 줄어들고 화교학교 교육으로도 부족하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화교 3세대 이상의 경우 모어는 거의 한국어라 봐도 무방하다.

3.6. 한국 화교들의 정체성

재한 화교 중 한국 국적을 취득하지 않는 이상 대부분 중화민국 국적을 유지하며 이들은 중화인민공화국에 대해 부정적인 모습을 보인다. 다른 대만외성인들과 비슷하다. 이런 이유로 이들에게 접근할때 말조심해야 한다.

중화민국 국적 역시 혈통주의가 우선이다보니 3세대에서도 중화민국 국적을 유지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1998년 6월 14일 양계 혈통주의로 국적법이 개정된 것이 화교들이 통혼이나 귀화 없이 대한민국 국적을 가질 수 있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이전까지 한국은 부계주의를 택하여 아버지가 한국인인 경우에만 한국 국적[38]을 부여했지만, 개정 이후 출생 당시 부모 중 한 명이 한국 국적이면 자녀는 자동으로 한국 국적을 가지게 된 것이다.

1998년 개정 이후 자녀의 국적 취득을 위한 화교 여성의 귀화가 급속도로 증가하여 자녀 세대인 화교 4세대에서 한국 - 중화민국 이중국적을 가진 사례가 급증하였다. 또 2010년 복수국적을 허용하도록 국적법이 개정된 이후에는 대만 국적을 포기하지 않고도 대한민국 국적을 가질 수 있게 돼[39] 한국 - 중화민국 이중국적을 유지하는 경우가 많다.
저는 아직 생각하고 있습니다. 만약에 중국 남자랑 결혼하면 한국 국적으로 바뀔거예요. 왜냐하면, 다문화가정이라면 혜택이 많아요. 한국인과 결혼하면 대만 국적을 유지해요. 두 나라의 혜택을 다 받을 수 있어요. 결혼 대상에 따라서 국적을 선택할 거예요. 그 외에 사람이랑 결혼하면 국적을 바꿀 거예요. 중화민국 국적은 대만에 가도 비자가 필요하고, 중국에도 비자가 필요하니까 불편해요. (화교 E, 30대)
한국화교의 인터-아시아 정체성에 대한 고찰: 중국, 대만, 그리고 한국에 대한 인식을 중심으로.[40]

단, 선천적인 복수국적자는 만 22세 전까지한국 내 '외국 국적 불행사 서약'을 하고, 남자는 군복무를 이행하는 조건 하에 복수국적을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여기서 여자는 만 22세가 지나면 하나의 국적만을 선택해야 하지만, 남자는 만 22세가 지났어도 군복무 후 2년 내에 다시 외국 국적 불행사 서약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추가로 주어진다.

출생 당시 아버지 또는 어머니 중 한 쪽이라도 한국 국적을 가지고 있다면 출생신고를 할 수 있는데, 출생신고 시 아버지가 화교이고 어머니가 한국인이면 화교인 아버지의 성을 따르거나 어머니의 성과 본을 따라 신고할 수 있다. 혹은 화교 호적에 등록된 이름을 그대로 한글로 등록할 수도 있다.

국내 출생신고 시 외국인 아버지의 성을 따를 때는 성의 외국 발음대로 한글 표기하는 것이 원칙이다. 그러나 화교처럼 한자문화권 출신이라 그 아버지의 성에 한자가 있다면, 해당 한자에 대응하는 국내 통용 한자가 있다는 전제 하에 외국 발음대로 적지 않고 그 한자에 대한 한국 한자음의 한글과 한자를 병기할 수 있다. 만약 아버지가 신화교인 조선족이라면 성에 대응하는 국내 통용 한자가 있다는 전제 하에 '한자 병기 없이' 그 한자에 대한 한국 한자음만 단독 표기할 수 있다. 화교의 중국식 이름은 한자를 사용하더라도 중국인과 한국인의 작명법이 다르고, 한국인에는 없는 중국인의 성이 많아서 티가 나는 경우도 꽤 있다.

통혼에 관해서는 화교들은 한국인 남자와 화교 여자가 결혼하는 것에는 부정적이지만 화교 남자가 한국인 여성과 결혼하는 것에는 관용적이다. 아버지가 한국인이고 어머니가 화교인 화교가 드문 이유는 화교로서 정체성을 유지하려는 화교 여성들은 대부분 화교 남성과 결혼하기 때문이며, 한국인 남성과 결혼하는 화교 여자들은 남편을 따라 한국 국적을 취득하거나, 대만 국적을 유지하더라도 정체성 유지 목적이라기보다 다문화 가정 혜택이나 복수국적의 이익을 받기 위해서 유지할 뿐이기 때문이다.

한국인 아버지와 화교 어머니를 둔 자녀들은 대한민국 국적만 있어 화교 학교에 가지 못하거나 이중국적의 경우에도 화교 학교에 가지 않고 한국식 교육을 받고 자라는 경우가 많다. 이런 경우 대만식 교육과 중국어 습득을 할 기회와 화교 커뮤니티에 참여할 기회가 줄어들어, 가정에서 따로 화교 정체성을 유지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 이상 본인을 화교로 인식하는 경우가 드물다. 중국계 이주민 분류 상 화예가 한국에 있다면 이런 케이스로, 성인이 될 때까지도 모친이 화교이고 본인이 화교 혈통임을 모르는 경우가 많다.

화교 1, 2세대는 거의 완전한 중화민국인 정체성을 지니고 화교학교 등을 다니며 민족교육을 받아 강화된 면이 있지만, 아래 세대로 내려갈수록 한국에 동화되는 화교도 늘어났다. 3세대 화교 중에는 제1언어가 한국어이고 한국 문화에 더 익숙하며 중국어는 나중에 따로 배우는 경우도 흔하다.[41] 물론 여전히 화교 정체성을 고수하며 전통 문화를 지켜나가는 화교들도 많다.

1992년 한국이 중화인민공화국과 수교하면서 중국은 화교학교 등에 중국 본토식 교육을 하라고 압력을 넣는데, 화교들도 새롭게 넘어오는 신화교 등의 문제에 있어서 다양한 의견을 내고 있는 편이다.

1960~80년대에는 화교 2세대까지는 대부분의 한국화교가 대만으로 대학을 갔다. 대만 정부의 입학제도가 해외 화교에 관대하고 장학금 혜택도 많기 때문이다. 2세대까지만 해도 화교 사회에서 대만 유학은 자랑스러운 일인 반면 한국 대학에 진학하는 경우는 공부를 잘 못하는 학생으로 인식되기도 하였다.[42]

반면 화교 3·4세대로 올수록 한국 대학을 선호하는 경향이 늘어났는데, 화교는 수능을 보지 않고 외국인 전형 방식으로 대학교에 진학하기 때문에 이른바 명문대학교에 입학하기 쉽기 때문[43]이다. 특히 한국에서 계속 살아갈 계획이 있는 경우 한국 대학 진학을 선택하며 실제로 명문대에 진학하는 경우가 많다.

화교들이 외국인 전형 방식으로 쉽게 대학에 진학할 수 있는 것을 이용하여 의예・한의예과와 치의예, 수의학과 등에 집중 지원하고 실제로 진학하는 것이 알려져 논란이 되었다.[44] 원칙대로라면 부모 둘다 외국인이어야 지원할 수 있는 전형인데, 화교에 한해 예외 항목을 두어 지원할 수 있게 한 것.[45]

의・치・한・수 계열이 아니라도 논란이 일 만한데 이를 이용하여 상위권 학과에 집중 지원하니, 치열한 입시 경쟁을 겪고 있는 한국 수험생과 학부모 입장에서 공정성과 관련해 충분히 불편한 감정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 일반적인 중론이었다. 이런 내용이 2021년 교육부 국정감사에서 지적을 받아 2023학년도부터는 차차 사라질 예정이라고 하나 어디까지나 대학이 자체적으로 결정할 사항이라 빠른 시일 내 개선이 될 지는 지켜보아야 한다.

화교 3·4세대는 대학 입시에는 혜택을 받지만, 막상 한국 대학에 입학한 후에는 한국 학생들과의 경쟁에서 어려움을 겪는다고 한다.
아무래도 한국학생보다 한국에 대한 교육을 많이 받지 않았고 그런 수준 차이가 좀 드러났어요. 한국어 말하기 능력도 한국학생이 더 잘하고 한국 교육에 대해서 더 오래 받았으니까 처음에 힘들었어요. (화교 I, 20대)
한국화교의 인터-아시아 정체성에 대한 고찰: 중국, 대만, 그리고 한국에 대한 인식을 중심으로.[46]

화교 차별은 예전보다 제도적으로 많이 개선되고 있다. 특히 IMF 이후부터는 외국인도 한국부동산을 구입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예전에는 3년 또는 5년마다 장기거주외국인(F2) 사증을 갱신해야 했고 등본을 떼려면 동사무소가 아니라 출입국사무소에 가야 했지만 2002년부터 새롭게 시행된 대한민국 영주권이 나왔다.

대한민국 영주권자이자 지역사회의 주민으로서 지방 선거 투표권은 허용된다. 2005년 공직선거법이 개정으로, 화교 중 19세 이상으로 영주권을 취득한 지 3년이 지나면 지방 선거에 투표할 권리를 갖게 되었다. 도지사, 교육감, 도의원, 시장, 군수, 시군의원 선거권은 인정된다. 3월 기준 중국계 유권자 수는 11만 835명[47]으로 총 외국인 유권자 수의 87.3%에 달한다.[48] 물론 대한민국 국민이 아니므로 국회의원이나 대통령 선거 자격은 없다.

투표권이 처음 주어졌을 때, 이전까지 배척 속에 살던 화교 1·2세대는 사회 구성원으로 인정받은 느낌에 감격[49][50]했다고는 하나 3, 4세대[51]의 경우 투표권에 대하여 잘 모르거나 관심이 적다고 한다. 실제로 외국인 유권자의 지방선거 투표율은 계속 하락세이며 공개된 가장 최근 지표인 2018년 지방선거 투표율은 13.5%에 불과하다.[52]

실제로 지방선거 투표권을 행사하는 비율이 저조함에도 불구, '화교도 국회의원 및 대통령 선거 투표권을 가져야 한다'는 인식이 화교 세대 전반에 걸쳐 자리잡고 있다. 한 연구에 따르면 화교 3,4세대가 지방선거에 관심이 적은 이유는 지방선거 결과가 자신의 생활에 기여하는 바가 적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며, 반면 국회의원 선거권 혹은 대선 선거권을 요구하는 이유는 한국인과 동일하게 온전한 시민권을 행사하고 싶은 욕망이 반영된 것이라고 한다.
지방투표에 참여한 적은 없어요. 이유는 딱히 저희한테 혜택이 없기 때문이에요. 화교에게 대통령 투표권을 줘야 한다고 생각해요. 이유는 우리는 영주권만 가지고 있고, 아무런 혜택은 없고 세금은 꼬박꼬박 받아가면서, 지원은 안 되는 건 너무 형평성에 어긋나는 일인 것 같아요. (화교 E, 30대)
한국화교의 인터-아시아 정체성에 대한 고찰: 중국, 대만, 그리고 한국에 대한 인식을 중심으로.[53]

한국인 남성들 입장에선 군대에 안 간다는 게 화교 남성들을 싫어하는 이유가 되는 경우가 있다. 한국 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에서도 외국인을 자국 군대에 입대시키지는 않는다.
“한국 화교에게 이중국적을 부여하지 않으면 한국 화교의 발전이 없습니다. 한국인들은 ‘그럼, 한국으로 귀화하면 되지 않느냐’고 하지만, 화교의 문화도 보존해야 합니다. 한국으로 귀화하라는 논리는 냉전시대에는 가능할지 몰라도, 한쪽을 버리고 한쪽을 택하라는 것은 누구에게도 도움이 안됩니다. 한국 화교들에게만이라도 이중국적을 허용하면 한국 국적으로 군대도 가겠다는 것이 화교들의 생각입니다.
—군에 입대하겠다고요.
“그럼요.”
[심층연구] 중국계 한국인 ‘한국 화교’ 연구, 월간조선,

귀화자의 경우 기본적으로 면제이지만 2008년부터 희망 신청자에 한하여 병역판정검사를 받고 1~4급에 해당하는 자는 현역 또는 보충역으로 대한민국에서 군복무를 할 수 있도록 개정되었다. 선천적 이중국적자의 경우 대한민국 국적을 가진 동안 당연히 병역 의무를 갖는다.#

사실 공무원이 되려고 하거나 여러 차별이 싫어서 귀화하는 화교 중엔 드물게 군대를 가는 사람도 있다. 특이 케이스이지만 행정착오로 한국과 대만의 이중국적이 모두 말소되어 무국적자가 된 화교 출신 예비역 육군병장도 있었다. 이 경우 큰 문제였지만 다행히도 국적회복 제도를 통하여서 다시 한국 국적을 돌려받았다고 한다.

예전엔 귀화하려면 재산이 5천만 원 이상이어야 한다는 조건이 있었는데, 현재는 화교는 간이귀화 대상자로서 재산을 갖추지 않아도 귀화가 가능하도록 개정되었다. 부모 중 한 명과 본인이 한국에서 출생한 자, 또는 부모 중 한 명이 대한민국 국민이었던 자.

화교들 중엔 기독교 신자들도 많은 편이다. 중화권 중에서는 홍콩, 마카오가 기독교인이 많고 화교 중에서는 싱가포르중국계 싱가포르인말레이시아중국계 말레이시아인/ 인도네시아중국계 인도네시아인 등 말레이 제도 화교들 사이에 기독교인이 많다.[54] 중화인민공화국도 각종 박해 속에 지하 교회가 늘고 있다.

특히 인천의 화교들은 상당수가 기독교를 믿는다. 인천은 국내에서도 가톨릭개신교 모두 초강세 지역으로 유명하다. 개항 이후 국내 최초로 기독교 선교가 이뤄진 지역이고 개항과 개화기란 역사적 배경이 작용했기 때문이다.

한편 화교들과 그 본국 중화민국과의 관계도 복잡하다. 위에 언급했듯이 대체로 한국 화교들은 본토 산둥성 이주민 출신이므로 대만인보다는 중국인이라는 정체성이 있다. 그렇다고 이들이 중화인민공화국을 지지하는 것은 절대로 아니다. 이들은 '중화민국인'이라 할 수는 있어도 '대만인'은 아니다.

물론 자기 소개를 할 때, 중국이라고 하면 중화인민공화국을 연상하므로 편의상 남에게 대만인이라고 말하는 경우가 많다. 이렇다 보니, 대학에서 중화인민공화국 국적의 대륙 출신 유학생 무리와, 대만 출신의 중화민국 국적의 유학생 무리 어느 쪽에도 끼지 못 하는 경우도 일어난다. 그래서 이들은 차라리 한국인과 더 가까운 사례가 많았다. 중화권 출신 커뮤니티 중에서는 대만인 커뮤니티에 끼려고 하고 있다.

반대로 한국이 중화인민공화국과 교류가 거의 없던 시절에 대만에서 한국으로 와서 한국에 정착한 사람들, 예를 들면 한국에 유학 왔다가 아예 한국에서 일자리를 구하고 눌러 앉게 된 대만인 등은 본성인과 외성인을 막론하고 한국 화교 커뮤니티에 잘 끼지 못하거나 끼더라도 어느 정도 거리감을 느낀다. 그 시절에 온 사람들이면 만날 수 있는 동족의 절대 다수가 한국 화교였다.

물론 그런 거 상관없이 잘 어울려 노는 경우도 있지만, 중화민국을 지지하면서 대만인으로서의 정체성은 없는 상태라면, 어느 집단에 들어가도 이질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그래서 화교 2세들은 아예 본인들을 한국인으로 정의한다.

심지어 둘 다 중화민국 국적이면서도 중화민국에서 태어난 대만인은 중국인의 정체성을 부정하고 대만을 강조하는데, 한국에서 태어난 화교는 대만이 포함된 중국인의 정체성을 주장하는, 묘하게 정체성이 엇갈린 상황도 발생한다.

또한 한국 화교들은 중화민국 본국에는 호적이 없어서 국민 신분증이나 중국 본토의 후커우도 없다.

현재 중화민국대만 정부는 여권 발급에서 '무호적 국민'을 차별한다. 그래서 이들이 대만에 가서 국민 번호를 신청한다. 이에 대한 중화민국 정부의 입장은 자신들이 차별하는 것이 아니라 해당 국가에서 하며, 자신들은 이를 개선할 것을 각국에 요청한다는 것이다. 외관상 타이완 섬 거주민들과 차이가 없는 여권이지만 효력의 차이는 굉장히 크다. 중국본토의 일국양제에서 따와서 자기들에게 일국양제(一本兩制)가 적용된다고 말한다. 똑같은 여권이지만 대만, 펑후 제도, 진마(진먼/마쭈) 거주민과 자기들은 다른 제도를 적용한다고 한다. 물론 이는 대만 정부의 일방적인 주장일 뿐이며 현실적으로 무호적 공민을 차별한다고 봐도 무방하다. 대만인을 강조하는 민진당 정부에서는 더욱 그래서 한국화교 출신 대만인들의 시위도 자주 벌어진다.

중화민국 국민에게 비자를 면제하는 나라에 갈 때도 무호적 국민은 그 혜택을 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중화민국 국민번호가 있는 중화민국 국적자들에만 비자를 면제해주는 나라들과 그렇지 않은 나라들로 나뉘는데, 전자의 대표적인 경우가 미국, 캐나다이며, 후자의 경우로는 싱가포르, 한국, 아일랜드 등이 있다. 그런데 싱가포르와 아일랜드를 뺀 주요 선진국은 거의 다 전자라고 봐도 무방하다. 이것이 실질적 차별이 된다. 물론 저 둘도 2023년 1인당 PPP 순위에서 각각 2위 및 3위라 우스운 나라들은 절대 아니다.

심지어는 무호적 국민이 대만 국적을 가지고, 대만 여권을 들고, 대만에 들어가는 경우에도 비자를 받아야 한다. 무호적 국민이 대한민국 영주권 또는 F-2비자 소지시 도착비자로 발급가능하다. 대만 거주시에도 외국인등록증을 발급받아서 거주한다. 거주지가 확실하면 면제해 주기도 한다. 어쨌거나 '중화민국 여권'에 '중화민국 대만지구 비자'가 붙어 있는, 외부인이 보기에 황당한 상황도 생긴다 그래서 중화민국은 대한민국 국민에게 90일간 무비자 입국을 허가하므로 중화민국 국적을 유지하는 화교가 대만에 가는 것보다 한국으로 귀화한 화교가 대만에 가는 것이 오히려 쉽다.

무호적 국민이란 개념은 리덩후이 정권 때인 1991년에 생긴 듯하다. 본국인 대만에서는 '억울하면 와서 호적 만들어라.' 하는 식인데 1년 연속 대만 거주 등 요구조건을 맞추는게 쉽지도 않을뿐더러 남자의 경우는 대만이 징병제 국가라 군대 문제가 걸린다. #

결국 한국 화교들이 본국 정부에 시위를 한 사례도 있었다. 한국 화교들의 주장에 의하면 천수이볜 정권 이후로 호적 만들기가 어려워졌다고 한다. 다른 나라에도 중화민국의 무호적 국민이 있고 이들도 같은 문제를 겪고 있는데, 필리핀 화교가 대만에서 비슷한 이유로 시위를 한 사례도 있다. 기사 1기사 2

국부천대 이후의 중화민국은 축소된 영토에 많은 사람들이 있고 수많은 화교들마저 많이 와버리면 국가 운영에 상당한 어려움을 겪을 것이기에 이런 차별 정책을 실시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귀국 화교가 대만 거주민들의 일자리를 뺏어간다든지. 안 그래도 대륙에서 대만으로 온 외성인들도 꽤 됐는데 귀국 화교도 대다수가 대륙 출신이니 당연히 외성인에 포함된다. 여기에는 정치적 견제가 숨은 이유이기도 하다. 보통 외성인들이 대다수인 화교들은 국민당 지지율이 높다. 특히 1, 2세대들이 더욱 그렇다.

좌우지간 이러한 제약 땜에 현재는 귀화 화인이나 혼혈들이 더 눈에 띈다. 귀화자의 대표적인 예는 조리사 이연복과 가수 주현미, 배우 하희라와 빙상선수 공상정(특별귀화 케이스로 복수국적이다.), 기업인 담철곤 등이 있다.

전술했듯 반대륙/반공 성향이 강한지라 현재도 청천백일만지홍기를 중국 국기, 중화민국을 중국의 정통 정부로 인식하며 조선족에 대한 혐오도도 강하다. 물론 조선족도 한국화교를 극혐한다. 당연하지만 6.25 전쟁 당시 북한군에게 조리돌림당한 기억 때문에[55] 북한에 대해서도 혐오도가 강하다. 그러면서 한족 및 중화문명에 대해 자부심이 강하여 혐중 담론을 중화문명 그 자체에 대한 모욕으로 받아들여 참지 않는다. 이들 앞에서는 농담으로라도 혐중 뉘앙스 발언을 삼가야 한다. 애초 중화사상은 대륙보다 대만이 더 한 수 위라 중화문명부흥운동 등도 대만에서 벌였다. 재한화교에게 혐중 발언을 하는 것은 마치 북한이 싫다고 남한까지 싸잡아 혐한 발언을 하는 격이다.

4. 화교 현황

4.1. 좁은 의미의 재한화교

10만 명에 가깝던 화교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 초기부터 70년대까지 화교 경제 진출을 막기 위해 각종 제한을 걸어 대만, 홍콩, 싱가포르, 미국 등으로 이주해 한때 2만 명까지 줄었다가 1990-2000년대 이후 다시 돌아오고 있어 2010년대 귀화자를 포함한 화교 인구는 5만 명 정도이다. 이 중에 1만 3316명이 영주(F-5)이며 거주비자(F-2)는 6569명이다. 다만 이들은 자발적인 집계이고 실제 숫자는 현재 화교 3세 이상을 합산하면 5~7만 명 가량이며 모계가 화교인 혼혈들까지 합하면 10만명 가량이다.
서울특별시 8769명
경기도 2484명
인천광역시 2839명
부산광역시 1732명
대구광역시 871명
충청남도 647명
전라북도 585명
충청북도 569명
강원특별자치도 558명
대전광역시 514명
경상북도 432명
경상남도 358명
광주광역시 334명
제주시 295명
울산광역시 282명
전라남도 221명

지역별로는 중국과 지리적으로 인접한 수도권에 밀집했다. 인천 차이나타운은 물론이고 서울시 서대문구 연희동마포구 연남동엔 전통적으로 화교가 많이 살고, 근처에 화교 중.고등학교도 있다. 이 화교 학교가 전국적으로 대표적으로 큰 화교 학교에 속한다. 주차 안내 표시에 중국어 정체자로 안내도 적혀 있고 근처의 중국집 중에 화교가 운영하는 곳이 많다. 이연복 셰프도 연남동에 기반을 잡았다.

수도권 외에는 부울경에 많이 거주한다. 부산이 초기 개항장이었고, 개화기부터 화교 상인들이 유입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동구 초량동 부산역 앞에 차이나타운이 있다.

최근에는 그 차이나타운러시아, 우크라이나동유럽,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중앙아시아, 몽골 등에서 온 이민자들[56]이 정착하고 반대로 기존 화교들이 서면 - 동래, 해운대 등 신도심이나 인근 울산, 창원, 김해, 양산, 거제 등 위성도시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4.2. 신화교

1992년 한중 수교 이후에 들어온 대륙의 중국인들을 말한다. 2012년에 한국의 체류 외국인은 144만 명으로 장기체류자 112만 명, 단기체류자 32만 명 선이다. 여기에 잡히지 않는 불법체류자는 17만 명 정도이다. 한국 정부는 중국인과 한국계 중국인, 즉 중국 조선족을 구분하는데 합법 체류자 가운데 중국인은 25만, 불법체류자 중에 중국인은 5만 명 정도 수준으로 한국 내에 화교를 제외하고 중국계 인구 약 30만 명이 있는 것이다.#

다만 이들은 주로 취업비자 혹은 결혼이민을 통해 한국으로 오는 입장이고 한국의 영주권 등을 취득하기 쉬운 입장은 아니기 때문에, 영주권이나 귀화를 통해 한국에 정착하는 화교나 조선족과는 달리, 자신들만의 자체적인 커뮤니티를 자발적으로 구축하기보다 중국의 국제적 위상 및 한국에 대거 진출한 중국 자본의 존재에 의존하여 정체성을 유지하는 상황이다. 이에 비례해서 한국인들이 이들에 대한 시선은 곱지 않다.

4.3. 재한 일본 화교·중국계 일본인

일본 내 중국계(대만계 포함) 주민이 다시 한국으로 이주한 케이스인데 특히 일제강점기에 이들이 한국으로 이주해오는 경우가 많았으며, 8.15 광복 후에는 이들의 이주가 없어졌다가 훗날 한일수교로 다시 이들이 한국으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일반적인 재한화교들과는 다른 정체성을 가졌으며, 야마토 민족 혈통인 재한일본인들과 어울리는 따로국밥에 가깝다. 이들은 한국에서 짬뽕이 생겨나는 데 영향을 주기도 했다. 두산베어스의 선수 장빈이 해당 부류로 분류될 수 있다.

4.4. 재한 중국계 미국인/ 대만계 미국인/ 중국계 캐나다인

중국계 미국인이 다시 한국으로 이주해온 케이스다.

중국계 미국인이 한국 땅을 밟은 첫 사례는 미군정 이후로 중국계 미국인 혈통의 미군 장교와 병사들이 남한에 주둔하게 된 것이다. 같은 한족 혈통인 대만계 미국인들도 이는 똑같다.

주한미군 소속의 중국계 미국인이나 외교관을 제외하면 중국계 미국인들이 본격적으로 한국으로 이주하게 된 것은 한국경제가 2000년대 이후 선진국에 진입하며 높은 수준으로 성장하면서부터였다. 이들은 중국계 말레이시아인[57], 중국계 호주인, 중국계 캐나다인, 중국계 영국인들과 같이 원어민 교사강사, 사업가 등으로 진출했다.

다만 한국으로 직접 이주해온 중국인의 후손들에 비하면 그 수가 적은 편이며, 일반적인 재한화교들보다 재한 미국인들이나 그 외 다른 영미권 국가 국적을 가진 재한 외국인들과 더 가깝다. 특히 처지가 비슷한 호주나 캐나다 출신 화교들과 매우 친밀하다.

중국계 캐나다인들 역시 마찬가지로 한국이 선진국에 진입하고 국제화되자 한국으로 진출하기 시작하였으며 연예인 중에서 캐나다 혈통 중국계 멤버들도 찾아볼 수 있고 영어 원어민 강사로도 많이 진출했다.

배우 나광훈과 슈퍼주니어 전 멤버였던 헨리, FX 멤버였던 엠버 등이 부류에 속한다.

4.5. 재한 중국계 러시아인

중국계 러시아인이 다시 한국으로 이주해온 케이스다. 소련 해체 후에 남한과 러시아의 접촉이 잦아지기 시작하면서 러시아 백인들 및 고려인들뿐만 아니라 중국계 러시아인들도 남한으로 오는 경우가 생겨났다. 이쪽 또한 재한 러시아인들과 어울리는 따로국밥에 가깝다.

강원도 영동 지방의 화교들 중에 중국계 러시아인 정체성을 가진 이들이 많은 편이다. 이는 영동 지방이 동해안을 통한 러시아 극동 지방과의 해상 교류가 많기 때문이다. 같은 지역의 화교들 중 중화인민공화국 정체성을 가진 이들은 훈춘시 출신인 경우가 많다. 훈춘시가 두만강을 거쳐 동해안으로 빠져나가는 식으로 강원도와의 수상 교류를 하기 때문이다.

4.6. 재한 동남아시아 화교

한국과 동남아시아 국가들의 교류가 잦아지면서 동남아시아 사람들이 한국으로 이주해오는 경우가 많아졌는데, 동남아시아 자체가 다른 지역들에 비해 화교 인구가 매우 많은 만큼 해외 이민 자체를 안 하고 한국보다 잘 사는 싱가포르와 폐쇄국가 브루나이를 빼고는 당연히 동남아시아 화교가 한국으로 이주해오는 경우도 존재한다. 특히 태국인들 중에 중국계 태국인들이 많이 한국에 건너와 산다.

물론 이들 또한 한국 내 동남아시아인 공동체에 속한 따로국밥에 가깝다. 원주민인 자국 출신 대부분 이주민들과는 경제적인 차이부터가 현저한지라 이는 어쩔 수 없다. 같은 태국인이라도 외국인 노동자로 한국에 건너오는 대부분 태국인과 최소 중류층 이상인 중국계 태국인의 처지가 서로 다르다.

탕준상의 아버지[58]가 이 부류에 속한다.

한국에서 연예인으로 활동중인 닉쿤[59], 민니, 뱀뱀, 크리샤 츄[60], 태국인인 프래 또한 이 부류에 속할 수 있다.

4.7. 재한 만주족

대한민국에 거주하는 만주족. 신해혁명으로 청나라가 멸망한 후 일제강점기 조선으로 망명해온 만주족은 한민족에 완전히 동화되어 사라졌으며, 현존하는 재한 만주족은 만주족이 많이 거주하는 동북 3성과 베이징 그리고 허베이성이 한국과 중화인민공화국의 수교 이후 한국과의 교류가 잦아짐에 따라 중화인민공화국 국적을 가지고 해당 지역에서 이주해온 이들이다.

다만 만주족 자체가 언어, 문화적으로 한족에 거의 동화되어 사라질 위기에 처한 탓에 한국 내 조선족 및 한족계 화교들에 비해 존재감이 떨어지는 편이다. 그래서 재한 만주족은 자신들만의 공동체를 만들기보다 한국 내 조선족들 및 동북 3성 한족들과 어울리는 경향이 강하다. 재한일본인들이 도요토미 히데요시 정권과 일본 제국조선 침략을 정당화하는 말을 하지 않으면서 조용히 살아가는 것처럼, 이쪽도 정묘호란병자호란을 정당화하는 말을 하지 않으면서 조용히 살아가고 있다.[61]

서울특별시 대림동에 중화인민공화국계 신화교들이 많이 거주하는데, 이들은 조선족이 가장 많고 그 다음이 동북 3성계 한족[62]이며 그 외에 동북 3성 소수민족 계통이 존재한다. 그 중에 만주족도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강원도에도 훈춘시 출신 신화교들이 많이 거주하는데 이들 중에도 훈춘시 출신 만주족이 일부 존재할 것으로 추정된다.

대표적인 인물로 탁구선수 전지희(귀화)와 중국재한교민협회 회장인 왕하이쥔이 있다.

4.8. 재한 후이족

일본의 경우 후이족 출신 화교들이 어느 정도 있어서 청진 요리 식당도 여러 곳 존재하는 반면, 한국에서는 일반적인 한족계 재한화교들에 비해 존재감이 없다. 서울 이태원의 이슬람 사원에 예배보거나 아니면 둘러보러 오는 사람도 종종 있긴 하지만 대부분 사업 출장 차 오는 사람들이고 재한 화교 중에는 눈에 띄지 않는다.

4.9. 남한 내 북중혼혈 탈북자

최근에는 탈북자 중에서 북한인과 중국인 사이에서 태어난 북중혼혈인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이들 중 상당수는 남한으로 막 입국했을 당시 미성년자였던 경우이며, 일반적인 탈북자 공동체와 화교 공동체 그리고 한국인 중 어디에도 완전하게 섞이지는 못하는 TCK로서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들 중 일부는 만주족과의 혼혈인 경우도 있어서 재한 만주족으로 분류될 수도 있는데, 이들의 중국 쪽 부모가 만주족이 많이 거주하는 중국 동북 지역 출신인 경우가 대다수이기 때문이다. 부모 중 한명이 탈북자이고 간첩이 아님이 증명되면 한국 국적을 부여받기 때문에, 굳이 중국 국적을 유지하겠다는 의지가 강한 경우를 제외하고, 이들은 절대 다수가 대한민국 국적을 갖고 있다.

5. 유명 인물

화교(중국 또는 대만 국적을 유지하면서 한국에서 이민자로 체류하는 사람)과 화인(한국 국적으로 귀화한 사람), 화예 등의 구분 없이 일단 다 여기에 기재한다. 한국인이 중국, 대만 국적으로 귀화한 경우는 제외한다. 중국이나 대만은 공식적으로 귀화 제도가 없다. 다만 예외적으로 조상 중에 중국인이 있거나, 중국 혹은 대만의 국가적 이익에 부합하는 특별한 경우에는 귀화할 수 있다.

5.1. 연예인/스포츠/기타

5.2. 기업인

해방 당시 화교들은 대중(對中)무역 등으로 인해 1946년에 수입액의 90%를 화교가 차지할 정도였다. 그러던 중 국공내전에서 공산당이 승리하면서 무역이 차단되는 상황이 벌어졌다. 국민당 정권 때와 달리 중국 공산당은 공산국가답게 대외무역에 극도로 폐쇄적이었다. 게다가 한국 상인들도 역량 회복을 하게 된다. 일제강점기와 해방정국의 경제 혼란 등으로 한국인들의 경제력이 위축되었지만 국가가 어느 정도 안정화되자 순식간에 회복되었다.

사실 인구규모에서 차이(한국인 2천만 가량, 한국화교 3-4만)가 엄청 나고 독재정권이 화교를 견제했기 때문에 한국인들이 주도권을 되찾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리고 한국전으로 인한 창고봉쇄령이 내려져 당시 무역에 종사하던 화교들에게 타격을 주었고, 화폐개혁으로 은행을 잘 이용하지 않고 현금보유를 선호하던 화교들에게 타격이 되었다.

한국 정부는 동남아시아의 여러 국가들처럼 화교들이 경제력을 장악하는 것을 좌시할 수 없었다. 경제적 주도권을 넘겨줄 수 없었기 때문에 화교의 부동산 보유를 제한하는 등 정부 차원에서 여러가지 규제 정책을 펼쳤고, 그 결과 화교들의 경제력은 미미한 수준이 되었다. 이후 1990년대 들어 중국과의 교역이 늘어나면서 한국어와 중국어를 둘 다 구사할 수 있는 화교들이 경제 활동에 많이 참여하게 되었다.

중국과의 수교 이전에는 한국 기업에서 임원으로 승진하기가 힘들어서 중간에 나간 케이스가 많다.

화교들 중에서는 유독 요식업자가 많은데 그 이유는 이민자들이 쉽게 진출할 수 있는 분야가 바로 식당과 세탁소이기 때문이다. 전문적인 교육을 받지 않아도 종사할 수 있으며, 실제로 한국 화교들이 처음 진출한 업종도 식당이나 이발소, 재단사였다. 특히 한국 화교의 시작도 조선에 진주한 청나라 군인들의 짐을 나르거나 식사를 제공하는 쿨리들이었다.

한국 화교는 지리적으로 가까운 산둥성 출신들이 많아서 광둥성이나 푸젠성 출신의 화교들과는 교류가 적은 편이다. 그러나 완전히 담쌓고 사는 것은 아니라서 광둥성, 푸젠성 출신 위주의 일본 화교들과 지속적인 교류를 해오고 있다.

6. 명백히 화교가 아닌 인물

7. 대중매체에서 나온 화교 인물

8. 대우

외국 국적이기 때문에 차량 등록 하나만 해도 중형차 이상은 구비해야 할 서류 종류가 한국인의 4배에 가까우며 죄다 인지를 떼야하는데다가 서류 미비를 구실로 인지 재발행을 요구한다. 주민번호 맨 앞 자리도 1, 2, 3, 4가 아니라 5, 6, 7, 8로 시작하는데 사실 주민 등록번호가 아닌 외국인 등록번호라 그렇다.

과거엔 정부 주도로 화교의 경제 진출을 막았으나 지금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한중 수교 20주년 기념 KBS-CCTV 공동 제작 프로그램에 화교 출신 설영흥 현대 자동차 부회장이 출연하기도 했다.

6.25 전쟁 당시엔 화교 청년 중 일부가 한국군에 입대해서 활동한 적이 있다. 한국어중국어에 모두 능숙하다는 점을 이용해 공산군 진영에 침투, 정보를 수집하거나 중공군 포로를 심문하는 등의 임무를 맡았다. 하지만 대부분의 참전 용사들이 이에 대한 적절한 대우를 받지 못하는 실정이다. ##

그런데 국내에서 화교들의 중국 음식점이 굉장히 인기를 끌어서 문화적 영향은 제법 크다. 정작 중화권에서 한국식 짜장면은 한국 요리로 분류된다고 한다. 한국에서 대표적인 중국 음식이 짜장면인 것과는 정반대이다.

식객 19권 자장 3대[66]에서 화교에 대한 차별 대우가 언급되었는데 자장 3대가 신문에 연재되던 시절엔 인터넷 가입도 안되고 폰도 보증금을 내야 했다고 하며 그보다 더 옛날엔 200평이상의 주택 소유 금지, 50평 이상의 가게 소유 금지였다고 언급된다.

8.1. 화교 탄압에 대한 비판

재한 화교, 139년 역사의 외국인 집단. 해방 직후에는 한국 무역의 절반이나 담당했던 엄청난 경제력의 소유자들이었지만, 그 뒤 역대 정권의 억압책으로 음식업 등으로 몰리고 그 숫자도 이민 등으로 크게 준 것입니다. 지금은 불과 1만8천명 정도입니다. 정부가 '다문화' 등을 이야기하지만, 정작 다문화 기구인 화교 학교의 예산을 별로 보태주지도 않습니다. 인천 차이나타운이 '복구'됐을 때에 화교 주민들의 의견 수렴 한 번 없었습니다. 정부에 의해 완벽하게 '무시'를 당하고, 주변화를 당한 집단이죠.출처 : 박노자 블로그

한국의 화교들은 경제적으로는 상당한 비중을 차지했을지 몰라도 정치적 권리는 없었던 존재들이다. 한국 정부는 이를 이용해 정부 수립 이래 배타적 민족주의에 입각해 화교들의 권리를 억압했다. 이로 인해 수많은 화교들이 한국을 떠났다.

한국인으로 귀화하면 될텐데 왜 안 했냐고 반문할 수도 있다. 그러나 당시에는 한국으로 귀화하려면 재산이 어느 정도 있어야 했고 고위 공무원을 증인으로 내세워야 했으며 절차도 까다로웠고 동아시아의 속인주의 전통에 민족주의가 강하게 겹친 터라 국적을 포기하거나 새로 얻는 게 굉장히 어려웠다.

현재는 재한 화교들은 간이귀화 대상자에 속하여 한국 국적으로 귀화하는 것이 쉽게 개정되었다.

8.2. 특혜

한국은 화교에 대해 상대적으로 다른 힘없는 외국계에 비하면 당시에나 지금이나 오히려 특혜를 주고 있다는 주장도 있다. 이승만 정권부터가 외국으로부터 수입을 막기 위해 외국인 항만 창고 사용을 금지하기도 했다. 이러한 외국 국적자들에 대한 차별은 어느 정권이나 비슷했고 외환이 부족한 IMF 이후에 사라진다.

2002년 영주권 제도가 최초로 시행되면서 재한 화교에게는 모두 아무 조건 없이 한국 영주권을 부여했다. 당시 F-2 비자 보유자로 한정했는데 사실상 구 화교를 위해 만들어진 조항이다.

화교가 아닌 외국인들이 한국에서 영주권을 취득하려면 비자를 취득해서 만 5년 이상 체류해야 하고, 대학 졸업의 고학력이어야 하며, 한국 문화 및 한국어 필기 시험과 면접을 통과해야 하며, 범죄 기록이 없어야 하고, 전체 한국인의 중산층 수준에 맞먹는 재산 및 높은 영리적 능력(연봉 8500만원 이상)을 보유하고 있어야 한다. 기사에서 네팔 출신의 수잔 샤키야가 다른 일반 외국인들은 한국에서 체류 비자와 한국 영주권을 취득하기 매우 까다롭고 어렵다고 증언했다. 이 영상이 영상이 영상에서도 프랑스 출신의 파비앙미국 출신의 카메론이 외국인이 한국 거주 비자 및 한국 영주권을 취득하기까지 얼마나 까다롭고 어려운지 설명하고 있다. 러시아 출신의 일리야도 한국 영주권을 취득하는 것이 너무 어려워서, 차라리 한국 국적으로 귀화를 하는 것이 더 쉬워서 귀화를 선택했다고 언급한 바 있다.

또한 현재는 재한 화교들은 간이 귀화 대상자로 선정되어 다른 외국 출신의 외국인들에 비해 귀화를 상당히 쉽게 할 수 있도록 개정되었다. 국적법 제 6조 1항 2호는 화교라고 특정되지는 않았지만 누가 보아도 사실상 구 화교를 위해 만들어진 조항이다. 또한 한국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 한국 영주권 보유자만 한국 귀화를 신청할 수 있는데, 이미 한국 영주권이 있으므로 따로 영주권 취득 과정이 필요 없고 곧바로 귀화 신청을 할 수 있다.

대한민국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영주권이 있는 화교들에게 2006년부터 투표권이 부여된다. 물론 이 혜택은 화교에게만 주어진 것은 아니고 영주권 있고 체류기간 일정 수준 이상인 외국인에게 주어지는 것이지만 한국 화교들은 이미 역시 자동으로 해당 조건이 부여되어 투표권을 갖는다.#

노화교(老華僑)들은 지방참정권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을 가지고 있다. 한성 화교협회의 고문인 국백령 씨는 2018년 인터뷰에서 "지방참정권 부여 이전에 한국의 노화교에게 일본의 재일한국인과 비슷한 법적 지위를 부여하는 것이 먼저이며 지방참정권은 재일한국인의 지방참정권을 부여하기 위한 정치적인 의도에서 나온 것"이라고 했다.

화교의 경우 다른 외국계와 달리 여러 세대에 걸쳐 장기간 한반도에서 살아오면서 동화가 많이 이루어졌다는 점이 이러한 정책의 근거가 된 것으로 보인다.

8.2.1. 외국인 특별전형 혜택

화교들이 외국인 전형 방식으로 쉽게 대학에 진학할 수 있는 것을 이용하여 의예・한의예과와 치의예, 수의학과 등에 집중 지원하고 실제로 진학하는 것이 알려져 논란[67]이 되었다. 원칙대로라면 부모 둘다 외국인이어야 지원할 수 있는 전형인데, 화교에 한해 예외 항목을 두어 지원할 수 있게 한 것.[68] 이런 예외조항이 있는 이유는 2000년대 당시 대만 대학들이 부모 중 한 명인 경우에도 지원가능하게 해두었기 때문에, 한국에서도 상호주의적 차원에서 대만 국적 지원자를 동일하게 대우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화교 특별전형'이냐는 말까지 나왔고 실제로 화교 전형이 있는 것처럼 잘못 알려지기까지 했다.

따로 화교 전형이 있는 것처럼 잘못 알려지기는 하였으나, 화교들이 재외국민특별전형이나 외국인특별전형의 빈틈을 이용하여 대학 입학 시 상당한 수준의 혜택을 보는 것은 맞다.

이는 앞선 재한화교 연구에서도 밝혀진 명백한 사실이다.
최근에는 한국 대학을 선호하는 경향이 늘어났는데, 화교는 대학수학능력시험을 보지 않고 외국인 전형 방식으로 대학교에 진학하기 때문에 이른바 명문대학교에 입학하기 용이하기 때문이다. 인터뷰 대상자 중 4명[69]은 앞으로 한국에서 계속 살아갈 계획이 있기에 한국의 대학을 선택하였고, 모두 서울에 있는 우수 사립대학교 출신이었다.
한국화교의 인터-아시아 정체성에 대한 고찰: 중국, 대만, 그리고 한국에 대한 인식을 중심으로.[70]

의치한수 계열이 아니더라도 논란이 일 만한데, 화교들이 이를 이용하여 상위권 학과인 의치한수 계열에 집중 지원하니, 치열한 입시 경쟁을 겪고 있는 한국 수험생과 학부모 입장에서 공정성과 관련해 충분히 불편한 감정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 일반적인 중론이었다.

아무튼, 이들이 대학 입시에는 혜택을 받지만, 막상 한국 대학에 입학한 후에는 한국 학생들과의 경쟁에서 어려움을 겪는다고 한다.
아무래도 한국학생보다 한국에 대한 교육을 많이 받지 않았고 그런 수준 차이가 좀 드러났어요. 한국어 말하기 능력도 한국학생이 더 잘하고 한국 교육에 대해서 더 오래 받았으니까 처음에 힘들었어요. (화교 I, 20대)
한국화교의 인터-아시아 정체성에 대한 고찰: 중국, 대만, 그리고 한국에 대한 인식을 중심으로.[71]

논란이 일자 2021년 교육부 국정감사에서 지적을 받아 2023학년도부터는 차차 사라질 예정이라고 하나 어디까지나 대학이 자체적으로 결정할 사항이라 빠른 시일 내 개선이 될 지는 지켜보아야 한다.

8.3. 해외 여행 시

한국에 귀화한 경우 당연히 대한민국 여권을 사용하여 정상적인 출입국 절차를 거친다.[72]

문제는 미귀화 화교로 이들은 서류 상 중화민국 국적이기 때문에 대만 여권을 사용한다. 대만 국적을 부여받은 무호적 화교들은 해외여행이 많이 불편하다. 일단 국적이란게 자국으로 언제든지 돌아갈 수 있는 권리를 수반해야 하는데 화교들은 쌩뚱맞게 국적을 보유중인 대만이 아니라 오히려 영주권을 보유중인 한국에 언제든지 돌아갈 수 있는 권리만 있다. 대만은 호적이 없으면 무호적 국민[73]으로 처리하여 대만을 입국하는 데조차 비자가 필요하다. 그래서 이들이 대만에 가서 호적을 등록하고 여권을 갱신하는 경우가 많다.

대만 당국도 이러한 문제를 인지하고 대만 입출국시 대한민국 영주(F-5) 또는 거주(F-2)자격 소지자에게만 영주증 및 해당 외국인등록증을 보여주면 도착비자를 발급해주는 것으로 바꿨다.

한국인이나 일반 대만인은 여권만 들고가면 묻고 따지지도 않고 입국할 수 있는 일본, 싱가포르 등 아시아 선진국에 입국할 경우, 무호적 공민 화교들은 비자를 발급받아야 한다. 다만 대만 국적 화교는 체류자격에 상관없이 5년짜리 장기복수비자 신청이 가능하다. 비자 발급에 까다롭기로 소문난 일본이지만 재한화교에게는 그나마 쉬운 편이다. 싱가포르의 경우는 대만 무호적 공민도 무비자 방문 대상으로 인정해준다. 애초 싱가포르의 이민법은 미국, 일본에 비해 훨씬 널럴하다.

그러나 미국의 경우 일본, 싱가포르 등 아시아 선진국들과 달리 무호적 공민은 미국 비자를 받아야 입국이 가능하다. 미국에서 ESTA 대상이 되는 대만인중화민국 국민번호가 있는 후커우 보유자들에 한정된다. 무호적 공민 입장에서는 유독 미국만 입국이 까다롭다. 이 때문에 미국에 가는 걸 기피하는 무호적 공민 화교들도 있을 정도다.

무호적 공민 화교들이 가장 상실감을 느낄 때가 한국인 친구들과 해외여행을 갈 때 무비자가 아니라서 비자를 발급받아야 하거나 비자 발급과정이 너무 복잡해서 여행을 포기해야 할 때라고 한다. 대신 대만에서 1년만 거주하면 주민번호가 있는 대만 여권을 발급 받을 수 있다.

한국 여권은 전세계 195개국 중 189개국에 무비자로 입국이 가능하지만 무호적 중화민국 여권은 28개국으로써 숫자가 너무 압도적으로 차이가 난다. 이는 하희라가 귀화를 결심하게 된 이유이기도 하다.

결국 이러한 현실적 이유들로 요즘 세대의 한국화교들은 거진 귀화를 택하거나 대만으로 귀국하여 후커우를 살리는 등의 선택지를 통해 무호적 공민 신세를 면하고자 하고 있다.

9. 한국에서의 인식

최근 한국에서의 특혜, 혐한등으로 많이 알려져 조선족 만큼은 아니지만 화교도 싫어하는 사람이 많아진 추세이다.

그래도 짜장면한국식 중화 요리를 소개하기도 했고, 중화민국 정부중화민국 국군대한민국 임시정부한국광복군을 지원한 것과 재한 화교 6.25 전쟁 참전용사 등으로 인해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다.

한국 화교는 중화민국 국적자 출신[74] 중국인들의 후손들이다. 아니면 대만이 그냥 무슨 나라인지 잘 모르는 사람도 있다. 오히려 대만이 최근 중국 근현대사가 더욱 알려지면서 대만을 통치하는 정부가 중화민국임을 인식하고 대만이 진짜 중국이라는 소리를 듣는 판이다.

이러한 연유로 전술했듯 재한화교에게 접근할 때는 조심해야 한다. 잘못 접근하여 이들을 중국인=중화인민공화국 사람으로 동치시켜 접근하면 큰일난다.

10. 외환 위기 당시 루머

1997년 외환 위기 당시 해외 화교들이 한국 정부의 부채를 탕감해주는 대신 화교들의 권익 신장과 조계 지역 형태의 거주구를 요구했다는 주장이 있다. 하지만, 당시 한국 정부가 필요했던 건 부채 탕감이 아니라 국가 신용도와 국가 단위 유동성 확보로, 일개 이익 단체인 화교 레벨에서 어찌할 수가 없는 문제였다.

이는 1997년 인도네시아의 외환 위기를 혼동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 화교 자본이 강하게 영향을 주던 인도네시아는 화교 자본을 추방하려고 애썼는데 그 반작용으로 외환 위기를 겪었고 이 때문에 화교 자본들의 복귀를 수상이 요청한 바 있다. 이런 경제적인 반감으로 인해 이듬해인 1998년인도네시아 화교 학살이 일어났다.

사실 이 루머는 바리에이션이 많은데 통일교 버전도 있고, 중화민국이 중국과 단교, 자기네와 재수교하는 대가로 제안했다는 버전도 있다. 즉 근거없는 도시전설 혹은 농담에 가까운 내용이다.

11. 분포

한국 정부가 인정한 차이나타운인천, 부산에 있다. 각각 인천역, 부산역 앞에 위치한다.

12. 관련항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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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산둥성 이외에는 톈진, 랴오닝성 단둥시다롄, 허베이성 친황다오, 장쑤성 롄윈강으로 가는 노선 뿐이다. 그리고 장쑤성 롄윈강을 제외하면 산둥성과 문화가 비슷한 북방 지역이다.[2] 이민국가라는 개념을 이해 못하는 대부분 한국인들이 착각하는데 싱가포르는 중국사의 범주에 포함되지도 않았으며 단순명쾌한 쿨리 출신 화교들의 동남아시아 이민국가에 불과하다. 애초 원주민은 말레이인이다. 19세기 이전까지 중국인들은 말레이반도 자체를 아예 몰랐는데다 중국과 말레이반도의 거리는 한참 동떨어져 있어 비행기가 없던 전근대에는 태풍의 위험을 무릅쓰고 남중국해를 가로지르는 험난한 항해를 해야 했으며 그나마 시암 등에서 기착이 불가피했다.[3] 쿠알라룸푸르는 클랑 계곡의 주석 광산 일대를 광동성 출신 쿨리들이 개간하면서 도시가 만들어진 곳이다. 자연히 중국계 말레이시아인의 비중이 높으며 역사는 명색이 수도임에도 일천하다. 대신 말레이시아는 물론 동남아시아에서도 손에 꼽을만큼 현대화되어 있다.[4] 명청교체기에 유입된 명나라 유민들이나 고조선, 삼국시대(특히 고구려)에 대규모로 건너온 중국인들은 지금 거의 대부분 후손들 흔적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한국에 동화되었다.[5] 그렇다 보니 대부분 중식당을 운영했다.[6] 대만은 원래 한국화교들의 연고인 중화민국의 통치권에 들어오니 귀국이 맞는 말이다.[7] 상술했듯 한국화교의 역사는 경술국치 이전까지 거슬러 올라가기에 1930년대 출생의 노인세대조차 한국땅에서 태어나 자란 경우가 많다. 여기에 수십년간의 체제차이까지 더해지니 가문의 고향과 심리적 괴리가 더 멀어지는 것이다.[8] 같은 중국어라지만 대만어가 속한 민 방언의 경우 독음 등이 타 방언들과 전혀 다르고 표현들도 매우 달라서 이질적이다. 吳(오)를 전혀 엉뚱한 고(Koh)로 발음하는데 오히려 일본어의 음독과 유사하다. 이는 민 방언이 가장 먼저 분화했기 때문이다. 광동어가 속한 월 방언은 중요한 것 몇개만 숙지하면 표준중국어 화자도 배우기 어렵지는 않다.[9] 화인과 화예를 구분하는 결정적인 차이점으로 국적과 상관없이 문화적 정체성이나 동화 여부를 의미한다.[10] 중화인민공화국, 홍콩, 마카오.[11] 한국과 일본의 구 화교들은 대만 국적, 북한 화교들은 중국 국적이다.[12] 김판준. (2015). 중국의 화교화인 역사·교육·문화 네트워크 연구. 재외한인연구, 35, 125-149.[13] 두산백과, "화교"[14] 주현미는 여전히 집안에서 스스로 중국의 명절을 챙기고 있다고 언급한 바 있다.[15] 김주아. (2018). 동남아 화인(華人)의 화문(華文)교육-인도네시아, 태국, 말레이시아, 싱가포르를 중심으로-. 중국연구, 76, 239-265.[16] 두산백과, "화교"[17] 홍재현. (2006). 화교사회의 형성과 특성 연구. 중국인문과학, 34, 631-646.[18] 두산백과, "화교"[19] 홍재현. (2006). 화교사회의 형성과 특성 연구. 중국인문과학, 34, 631-646.[20] 이것도 지역별로 다른데 명청교체기 대월로 망명한 중국인은 명향사(明鄕社)라는 마을을 조직하고 현지 왕조에 우대를 받으며 수세기가 넘도록 중국인 정체성을 보존한 반면에, 조선으로 망명한 중국인은 처음에 "황조유민"으로 대접받긴 했어도 동화 압력을 꾸준히 받아 말기에 가면 중국인 정체성이 흔적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사라진다. 아마 19세기까지 북부 왕조가 남부로 진출하면서 현지 이민족(참족, 캄보디아인 등)과 꾸준히 접촉하고 그들을 정복·포섭해왔기 때문에 다민족국가일수밖에 없고 그래서 역설적으로 유이민의 이질적인 정체성을 어느정도 용납할 수 있었던 대월과, 이미 15세기에 강역이 완성되어 더 이상 이민족을 포섭할 일이 없었고 그래서 유이민의 이질적 정체성을 용납할 수 없었던 조선 간의 상황 차이가 이런 결과를 낳았을 것이다. 당장 고려~조선 시기 병합된 한반도 북부의 여진족 원주민과 임진왜란 당시 남부에 정착한 일본인 유이민도 모두 정체성을 잃고 동화되었다.[21] 김판준. (2015). 중국의 화교화인 역사·교육·문화 네트워크 연구. 재외한인연구, 35, 125-149.[22]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등 화교 사회에서 다른 민족과 구별하기 위해 사용하는 개념. 외국에 살고 있는 중국계 가운데 ‘화교’도 ‘화인’도 아닌 중국인으로서 중화민족의 특징을 가진 부류. 화예에 비해 중국과 정서적 연계가 뚜렷함.[23] 김경국, 최승현, 이강복 and 최지현. (2005). 중국 海外移民의 諸 名稱 분석 연구. 중국인문과학, 31, 671-694.[24] 화교, 화인, 화예, 화족, 화인 디아스포라[25] 김경국, 최승현, 이강복 and 최지현. (2005). 중국 海外移民의 諸 名稱 분석 연구. 중국인문과학, 31, 671-694.[26] "한국인으로서의 주관적 정체성을 느끼지 않더라도 생활 편의를 위해 한국 국적(사회적 정체성)으로 변경하거나 대만국적을 소지하고 있지만 스스로 한국인이라고 생각하는 경우"[27] 허설화. (2020). 탈근대사회 유연한 정체성에 대한 고찰:재한 화교를 중심으로. 재외한인연구, 50, 85-110.[28] 중국을 "실질적 고향이 아닌 조부모와의 대화와 의례적인 문화 실천 속에 존재하는 상상적인 고향으로 인식"함.[29] "대만을 공식적인 조국으로 여기지만 스스로를 대만인으로 규정하기에 불편함을 호소"함.[30] "한국을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현장으로 인식하고 있으며 비자 정책, 선거권, 군대 복무 그리고 대학 진학 등의 변화하는 조건 속에서 전략적인 선택을 함".[31] 팽의훤 and 조영한. (2019). 한국화교의 인터-아시아 정체성에 대한 고찰: 중국, 대만, 그리고 한국에 대한 인식을 중심으로. 아시아리뷰, 8(2), 3-34.[32] 여담이지만 공화춘의 경우 공화(共和)라는 글자가 노골적으로 중화민국을 뜻하는지라 중국 대륙홍콩에 진출할 때 한자를 바꿔야 했다. 중국공산당 입장에서 민국 어쩌구 하는 소리가 듣기 좋을 리 없어서이다. 그래서 2018년 홍콩에 첫 진출할 때 공화춘 브랜드는 한자를 조금 바꾸어 홍콩에서 런칭했다.[33] 그 중 지리적으로 중국과 가까운 평안북도 한개 도에 3만명이 살았다.[34] 조금만 기다렸으면 한중수교와 남방정책 등으로 한국화교들이 엄청 이득을 볼 수 있었으나 애석하게 많은 재한화교들이 차별을 못 버티고 대만으로 귀국해버려 1990년대 들어선 화교 인구 숫자 자체가 급감한 뒤였다.[35] 당시 중공군은 반공포로가 아주 많았는데 국공내전 직후 구 국민당 계 군인들이 일종의 숙청 목적으로 중공군에 대거 끌려갔고 이들은 하기 싫은 전쟁을 억지로 수행하고 있었기에 그렇다. 당연하지만 이들 중공군 반공포로들은 대만으로 가길 원했으며 이를 수용하여 중공군 반공포로 전원은 대만으로 보내졌다.[36] 일부는 영국으로 가기도 했다.[37] 프랑스일본은 단교 때 수도와 전기를 끊고 경찰을 투입해 저항하는 대사관 직원들을 무력으로 퇴거시켰다. 미국같은 경우에는 시간을 주어 대만이 대사관으로 쓰던 부지를 대만계 단체에 매각할 수 있도록 했는데, 그 자리를 그대로 자신들의 대사관으로 쓰려던 중국에 자국 내 재산 동결과 같은 보복 조치를 당하기도 했다.[38] 부계주의가 남녀차별이며 UN 국제협약에서 벗어난다는 지적이 계속 있었고, 무엇보다 미혼모 밑에서 태어난 자식들이 호적에 등록되지 못하는 등 사회 문제가 발생하여 1998년 6월 14일 이후 출생자부터는 출생 당시 부모 중 어느 1명만 한국 국적이면 출생국가와 상관없이 무조건 한국 국적을 부여하는 양계혈통주의로 바뀌었다.[39] 대만의 국적법은 태생적 시민에 대해서는 아무 제한 없이 복수국적을 허용한다.[40] 팽의훤 and 조영한. (2019). 아시아리뷰, 8(2), 3-34.[41] 대표적인 예는 공상정으로 얼마나 한국인으로서 정체성이 강했는지 부모가 모두 화교인데도 이 사실을 모르다가 아버지가 5살 때 부모가 화교라는 사실을 알려주며 너는 대만 사람이다.라고 말하자 한국 사람 할래.라며 울었다고 한다.[42] 노혜진. 2012. “차별과 타자화 속의 한국화교의 정체성: 광주지역 화교를 중심으로.”[43] 팽의훤 and 조영한. (2019). 한국화교의 인터-아시아 정체성에 대한 고찰: 중국, 대만, 그리고 한국에 대한 인식을 중심으로. 아시아리뷰, 8(2), 3-34.[44] "화교 특별전형으로 의대 간다" 사실은?, SBS 뉴스, 2021.12.01.[45] 이 때문에 '화교 특별전형'이냐는 말까지 나왔고 실제로 화교 전형이 있는 것처럼 잘못 알려지기까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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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팽의훤 and 조영한. (2019). 아시아리뷰, 8(2), 3-34.[47] 중국 국적 9만 9969명, 대만 국적 1만 866명[48] 중국 국적 가진 '중국인' 9만 명… 6월 지방선거에서 투표권 행사한다, 뉴데일리, 2022.04.12.[49] 정은주. 2015. “국민과 외국인의 경계: 한국 내 화교의 시민권적 지위에 대한 성격 분석.” 『한국문화인류학』 48권 1호, 119-169,[50] 사상 첫 투표권 얻은 화교들…“진짜 한국국민 된 느낌”, 한겨례, 2006.05.26.[51] 이들은 한국 국적과 대만 국적을 같이 갖고 있다보니 총선 투표권이 있다.[52] 지방선거 '외국인 유권자' 느는데 투표율 하락세…이유는?, 경향신문, 2022.05.07.[53] 팽의훤 and 조영한. (2019). 아시아리뷰, 8(2), 3-34.[54] 중국계 말레이시아인중국계 인도네시아인 기독교인들은 호주에서 교회를 늘리고 있으며 싱가포르의 교회들도 중국계 말레이시아인들이 많이 들어와 있고 중국계 인도네시아인과 소수민족 이민자를 중심으로 한 인도네시아 기독교 커뮤니티도 여럿 있다. 이들은 마인어로 예배를 진행한다.[55] 공화춘을 창립한 우희광 일가도 이 때 피난을 갔으며 공화춘의 남은 종업원들은 난입한 북한군에게 모욕을 당해야 했다. 북한은 외국인에 대한 혐오도가 아주 강한 곳이라 점령지에서 한국화교들을 엄청 괴롭혔다.[56] 이들 중 일부는 고려인이나 중국계 러시아인인 경우도 있다.[57] 말레이시아도 버젓이 영어가 공용어인 영어 사용 국가다. 중국계 싱가포르인들이 해외여행 선호와 달리 자국의 높은 삶의 질과 현실적인 제약들 등으로 이민을 안 가는 것과 달리 중국계 말레이시아인들은 원체 해외진출에 적극적인데다 부미푸트라 정책 때문에 여차하면 인종차별이 심한 자국을 떠나고 싶어해 해외로 이민가는 중국계 말레이시아인들도 많다. 거리 때문에 북미로는 안 가고 바로 아래 싱가포르 및 아시아와 가까운 앵글로색슨 국가인 호주/뉴질랜드를 고르며 한국 및 일본, 대만에 원어민 영어 강사로 오는 사람들도 있다.[58] 중국계 말레이시아인 출신이며 한국으로 귀화[59] 중국계 태국인이다. 미국 국적도 있어서 재한 중국계 미국인으로 볼 수도 있다만 본인의 정체성을 태국인에 두는 만큼 재한 태국계 미국인으로 보는게 더 타당하다.[60] 필리핀 화교다. 미국 국적도 있어서 재한 중국계 미국인으로 볼 수도 있고 원래 필리핀 태생이라 재한 필리핀계 미국인으로 볼 수도 있다만 본인 정체성이 필리핀인에 가까우므로 후자가 더 타당하다.[61] 특히 한국 내에서 숭덕제(청태종)에 대한 부정적 재평가가 이루어지는 현 시점에서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정당화하는 말을 한다는 것 자체가 재한 만주족의 입장에서는 자멸행위나 다름없다.[62] 사실 이들도 생물학적으로는 퉁구스계에 가까운 편이다. 마치 광동인들과 본성인들이 생물학적으로 동남아시아계에 가까운 것처럼 말이다.[63] 본명 왕지현.[64] 과거 한국 묵씨 종친회 관련 웹사이트에서 전지현의 어머니는 한국인이 맞다고 공지를 올렸다. 현재는 시간이 매우 오래 지나서 사이트 자체가 검색이 되지 않는다.[65] 물론 해당 배우는 토종 한국인이다. 다만 위성락 연기가 워낙 뛰어나서 많이 오해했다고.[66] 2011년 짜장면이 복수 표준어가 되기 이전이라 자장 이라고 표기했다.[67] "화교 특별전형으로 의대 간다" 사실은?, SBS 뉴스, 2021.12.01.[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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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 총 10명 중 4명. 이 중 20대는 4명[70] 팽의훤 and 조영한. (2019). 아시아리뷰, 8(2), 3-34.[71] 팽의훤 and 조영한. (2019). 아시아리뷰, 8(2), 3-34.[72] 사실 애초에 이런 경우는 화라고 부르지 않고 화라고 따로 구분한다.[73] 여권에 국민번호가 없는데, 이게 무사증으로 여행이 가능한 국가 숫자를 가른다.[74] 신화교를 제외한 한국 화교의 경우 중화민국 출신으로서 국적상으로는 현대의 대만이지만 1949년 이전까지 한반도에 이주해 온 중국 대륙 산둥성 출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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