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미스터리 관련 정보 중 한국사에 관한 정보를 서술한 문서다.2. 역사 이전
- 한반도의 고인돌: 고인돌은 비단 한반도 뿐만 아니라 세계 곳곳에서도 발견되는 유적이긴 하지만 유독 한반도에 많이 집중되어 있다[1]. 이처럼 한반도에서 고인돌이 집중적으로 발견되는 이유에 대해서는 아직 명확히 해명된 바가 없다. 일단, 한반도는 타 지역에 비해 적은 노동력으로 고인돌을 쉽게 만들 수 있는 지형이 많다고 하지만, 그래도 무거운 돌을 이용해 어떤 구조물을 만드는 것 자체가 상당히 중노동에 속해서, 이를 만든 목적도 불분명하고 무엇보다도 이런 것의 공사를 강요할 권력자가 있는 것도 아닌 상태에서 고인돌을 만든 것 자체가 많은 의문을 남기는 상황이다.
3. 상고 시대 (고조선과 진국)
- 8조법: 한국사에 대한 고대 사료가 부족한 고로, 고조선의 8조법 중 익히 알려진 3가지 조항[2]을 제외한 나머지 5개의 조항이 무엇인지 전부 수수께끼에 싸여있다. 유사학계에서 별별 주장이 나오기는 했지만 그들이 근거라고 밝힌 것이 위서라고 밝혀진 오래이며 현재의 사학계에서는 이 '8조법'이 삼국시대 이후의 법령에도 계승되었음을 근거로 나머지 5개 조항은 불륜과 간통을 막는 법률이 아니었을까라고 추정하고 있다. 또 이것이 처음 제정할 때부터 8개였냐도 의문인데, 바로 앞에 써있는 3개의 조항 중 2번은 분명 곡물로 갚는다기에 현물경제를 전제로 한 것이지만, 3번은 화폐경제를 전제로 했기 때문에 동일 시기라고 볼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처럼 고조선의 사회를 대략 짐작하는 데 도움을 준 정보[3] 치고는 많은 부분이 미스터리이다.
- 고조선의 중심지(수도): 고조선의 중심지는 역사적으로 평양을 중심지로 삼았다는 설이 일반적이었지만 몇몇 사료에서 모순되는 부분이 있어 요동이라는 설도 소수에게서 제기되었다. 그러나 이렇게 하면 반대로 기존에 있던 평양이 중심지임을 시사하는 자료가 다 모순되어버리기에 어느 쪽도 확증할 수 없게되자 이에 대한 절충안으로 중심지가 사실은 여러번 이동된 게 아니냐는 설이 1960년대 들어 세롭게 제기되었는데, 이 설도 고조선의 중심지에 영향을 준 연나라와의 충돌과 관련하여 연나라의 세력이 어디까지 미쳤는지에 대한 통일된 학설이 없어서 현재까지도 고조선의 실질적인 중심지가 어디었는지 명확하게 결론나지 않은 상태로 남아있다.
- 왕검성의 위치 : 기원전 3세기 경 고조선-연 전쟁에서 연에게 참패하고 중심지를 옮긴 후의 도성이다. 기원전 194년 위만이 반정으로 준왕을 몰아 내 위만조선이 된 후, 기원전 108년 왕검성에서 한(漢)나라의 군대에 포위되어 수개월 동안의 항전 끝에 결국 투항하여 고조선이 멸망할 당시의 마지막 성인데, 위치가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 고조선어의 계통: 고조선의 언어에 대해 최초로 광범위하게 조사를 한 자료는 전한 시대의 언어학자인 양웅이 옛 고조선 지역[4]과 옛 연나라 지역을 방문하고 현지의 언어를 조사해 정리한 책인 방언이 있다. 이 책을 통해, 고조선어와 연나라 북부의 동이족들[5]의 언어가 동계라는 것을 확실히 입증할 수 있었다. 문제는 방언을 통해 재구된 고조선어가 무슨 어족에 속하느냐이다. 한국의 언어학계는 현대 한국어와 동계라고 보고 있으나, 양웅이 조사한 지역이 고대에는 동호의 영역이었다는 점에서 몽골어족이나 퉁구스어족에 속한다는 주장도 있다. 2021년에 막스 플랑크 연구소의 인류학자와 고고학자들이 발표한 연구 결과에 의하면, 고대 몽골인과 원시 퉁구스인, 고대 한국인은 야요이인[6] 및 원시 튀르크인과 함께 9000년 전에 랴오허 강 일대에서 기장 농사를 짓던 정주 농경민의 후손임이 밝혀졌는데, 이를 근거로 기존의 알타이 제어 가설을 확장한 트랜스유라시아어족 가설이 동 연구진들에 의해 제안되기도 했다[7]. 고조선의 언어의 계통이라도 밝혀낼 수 있다면, 고조선의 문화인류학적 구성을 알아낼 수도 있으며, 더 나아가서 고조선을 완전한 한국사로 볼 수 있을지의 여부도 판별할 수 있어서, 주류 역사학계의 초미의 관심을 받고 있다.
- 다뉴세문경의 제작 과정 : 대략 기원전 4세기 전후, 초기 철기 시대에 제작된 청동거울인데 아직도 그 제작과정을 명확히 밝혀내지 못했다. 당시의 기술력을 추측해 기원전의 방법으로[8] 제작을 시도했지만 현재까지도 정문경과 같은 수준의 청동거울을 제작하지 못했다.
- 위만조선 시기의 철기 도입 관련 논란 : 흔히 위만 조선시대에 철기 문화가 보편적으로 수용되었다고 보지만 문헌 상으로만 확인될 뿐 실제 위만 조선이 존속하던 것으로 추정된 시기에 생성된 것임이 입증된 철기 문화 관련 유적이 존재하지 않아서 확증되지는 못했다. 이를 출토하여 연구해야 명확하게 확인할 수 있겠지만, 하필 고조선의 주요 강역이 북한 지역인지라 발굴 조사가 진행되지 않기에[9] 현재는 보류 상태라 할 수 있다.
- 진국 : 고조선이 그나마 체제를 대강 추정할 수 있는 검증된 사료가 있는 반면, 동일 시기 평양 이남 한반도 지역에 존재했던 진은 기록이 부족해 대부분의 정체가 베일에 쌓여 있다. 당장 한반도 내의 학자들 사이에서도 진국이 단일 국가였는지 고조선과 비슷한 정치적 연맹체였는지에 대해 의견이 갈리며[10] 고조선과의 관계는 교역을 했다는 것을 제외한 일체의 내용이 대부분 전해지지 않아 정말 교역을 넘어선 우호 관계였는지 단순히 고조선과 인접한 무역 대상국인지 조차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4. 삼국 시대
- 가야와 관련된 미스터리
- 가야어의 분류: 가야의 옛 지명이나 국명 중에는 한국어에서 유래했다고 보기 어려운 미오야마국이나 사이기같은 명칭들이 대거 보이는데, 이런 국명의 유래를 고대 한국인들이 한반도에 유입되기 이전에 살았던 선주민들의 언어에서 찾는 경우가 점차 늘고있다. 그래서 주류 역사학계와 언어학계에서 그 선주민들의 언어와 동일한 언어거나, 그 직계 후손으로 추정되는 가야어에 대한 관심도가 늘고 있다. 가야어로 된 사료는 현전하지 않고, 따라서 가야어로 된 여러 국명과 지명에서 어휘들을 추려나가는 식으로 비교언어학적인 계통을 파악해나가는 연구가 진행 중이다. 2024년 현재는 주류 학계에서 가야어를 일본어족에 속하거나, 최소한 한국어와 동계는 아니었으리라고 보는 시각이 우세해졌고[11], 때문에 하술할 반도 일본어설이 학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 반도 일본어설: 반도 일본어설은 미국의 언어학자인 알렉산더 보빈이 제안한 가설로, 일본어족의 원향을 한반도의 중남부로 보는 학설이다. 이 가설에 의하면, 일본어족은 한반도에서 기원하여 일본 열도의 서부로 확산되었으며, 신라어와 백제어는 고대 한국어 화자들이 한반도에 남아있던 일본조어 화자들을 정복하고 동화시켜나가면서 형성된 언어라고 한다. 가야어는 한반도에 남은 최후의 일본어족계 언어이고, 이마저도 가야의 흥망에 따라 한국어 화자들에게 서서히 동화되어 늦어도 서기 7세기에는 완전히 소멸했다고 보는 것이다. 2023년 현재는 여러 근거를 바탕으로 주류 언어학계로부터 반도 일본어설이 많은 지지를 얻고 있지만, 정작 사료가 매우 부족하여 결정적인 물증이 없다는 점과, 고고학계의 연구 결과로는 선사 시대 한반도에 서로 이질적인 복수의 문화끼리 충돌이 일어났다고 볼 근거가 없다고 밝혀진 것이 이 가설의 치명적인 약점으로 작용하고 있다.
- 가야의 정확한 영토 : 기존 주류 사학계에서는 진주시를 고령가야라고 추측했지만 경상북도 상주시에서 고령가야의 태조왕릉과 왕비릉이 발견되었다. 또한 백제의 영토라고 알려진 전라북도의 동부 7개 지역(남원, 완주, 진안, 무주, 장수, 임실, 순창)에서 690개가 넘는 가야 유적이 발견되고 있다. 따라서 기존에 경상남도 남부에 국한되는 것으로 여겨졌던 가야의 영토를 크게 넓혀야 하는 것 아니냐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 반파국 및 장수가야의 존재 : 가야의 영토에 관한 미스터리와도 연결되는 부분으로, 기존 사학계에서 가야의 가장 큰 세력인 대가야는 현재의 고령군의 위치에 있었을 것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전라북도 남원시에서 가야의 대규모 야철지가 발견되고 장수군에서 가야세력이 운용했던 봉수유적이 발견되면서 '봉수왕국' 즉, '장수가야’의 존재가 고고학적으로 제기되고 있다. 이중 남원지역은 양직공도에서 백제의 주변 소국인 기문국(己文國)으로 알려진 곳이었는데 가야의 유적이 발견됨으로서 최근에는 일부 사학자들이 가야문화권의 중심이 대가야가 아닌 장수가야였으며 가야의 세력은 알려진것보다 더 클수 있다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 일본 역사서 일본서기와 중국 양(梁)의 양직공도에서는 가야 중 한곳을 이르는 것으로 추정되는 반파국(伴跛國)이라는 나라가 등장하는데, 기존 사학자들은 반파국을 고령군의 대가야로 추측했고 그것이 정설로 여겨졌다. 하지만 전라북도 지역에서 가야의 유적이 발견됨으로서 반파국을 별도의 가야, 즉 전북가야 또는 장수가야 등의 알려지지 않은 가야로 읽어야 하며 기존의 6가야설을 수정해야 한다 주장이 나오고 있는 중이다.
- 키노 오이와노스쿠네의 난: 한국식으로 기생반숙녜라고도 하는 키노 오이와노스쿠네는 삼한통일을 기치로 내걸고 가야에서 반란을 일으킨 일본인 장수였다. 하지만, 사료가 부족하여 이 반란이 구체적으로 어떤 과정을 거쳐서 진행되었다가 진압된 것인지가 불분명하다. 아래에서 소개되는 키노 오이와노스쿠네가 백제인인 목만치와 동일인일 가능성이 제기되면서, 이 반란의 경위를 파악할 실마리를 잡을 가능성이 생겼으나, 이 가설에 대한 물증이 부족한 상황이다.
- 포상팔국의 난: 가야의 패권을 쥐고 있던 금관국 또는 안라국[12]을 가야에 속한 8개의 소국들이 연합하여 공격한 전쟁이며, 이 자체는 신라가 가야 방면으로의 영향력 확대를 노리고 안라국을 지원해주면서 대규모의 국제전으로 번진 초대형 사건이었다. 문제는 안라국을 공격했던 소국들의 정체인데, 삼국지 위지 동이전의 변진소국 명단에도 없는 나라가 많아 어디에 있던 어떤 나라들인지에 대해서 현대 사학계에서 오랫동안 논의의 대상이 되었다.[13] 이 전쟁은 전통적으로 가야의 패권을 쥐고 있던 낙동강 서부 지역이 크게 쇠퇴하였음을 보여주는 사건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신라가 이 지역으로 대규모 군대를 파병할 정도로 국력이 크게 신장했음을 보여주는 역대급 사건이어서 역사학계의 관심이 뜨겁지만, 관련 사료도 부족할 뿐더러 그나마도 고고학계의 연구 결과와는 상충되는 부분이 많다는 점은, 이 전쟁의 양상을 파악하는데 큰 애로사항으로 작용하고 있다.
- 허황옥의 실체: 가야, 정확히는 그중에서도 금관국의 초대 왕후였던 허황옥이 아유타국이라는 나라에서 이주해와서 김수로왕과 맺어진 이야기에 대해, 그 실체를 파악하려는 노력이 꾸준히 이루어져왔다. 그녀의 출신국이 인도라는 설에 대해서 주류 역사학계는 오랫동안 불교계에서 윤색을 가한 결과로 해석해왔는데, 21세기에 이르러서 서울대학교 연구진들이 가야 시대의 여러 고분군에서 출토된 가야 왕족들의 유골의 미토콘드리아 DNA[14]를 분석한 결과, 조몬인과의 혼혈이 있었음이 밝혀지면서, 그녀의 실체에 대해 다시금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15].
- 구태: 중국 정사에 속하는 역사서인 주서, 북사, 수서 그리고 책부원구에 백제의 시조라고 전해지는 수수께끼의 인물. 최근에는 이 구태란 인물이 백제를 건국한 인물이라기 보단 백제의 기틀을 잡은 고이왕의 다른 표기일 가능성이 높다고 추측되고 있다.
- 김함보: 금나라의 시조가 되었다고 여겨지는[16] 김씨 성을 가진 정체불명의 신라인이다.[17] 비록 '김함보가 신라인이니, 여진족이나 금나라가 모두 한국사다'는 이야기는 절대 아니지만, 적어도 여진족의 지배층 중에 신라계 인물이 있었을 가능성은 주류 학계에서도 꽤나 설득력있게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그러나 최근에는 김함보의 원래의 성씨가 여진족의 성씨인 '완안'이었음이 밝혀지면서 출신은 신라 또는 고려일지언정 일단은 여진계였다는 설이 힘을 얻었다. 즉, 그의 정체는 여진계 신라인이라는 것이다.[18]
- 낙랑군: 한사군 중에선 세 번째로 오랫동안 살아남은 군현인데,[19] 다른 군현들이 부여나 고구려 등의 토착민 국가들의 독립이나 정복으로 인해 폐지되어 사라진 것과 달리, 낙랑군은 고구려의 발흥과 함께 패망했다는 기록이 나오고 나서 한참 만에 또 고구려에게 정복당했다는 기록이 나오는 등[20]으로 관련 기록이 모순되기도 하고, 원래 낙랑군이 있던 자리에 최씨낙랑국이라는 독립국의 기록이 나왔다가[21] 느닷없이 중국 왕조의 소속 군현인 낙랑군으로 다시 언급되는 등, 관련 기록들이 개판이라서 역사학자들을 혼란에 빠뜨리고 있다. 때문에 낙랑군의 정확한 존속 기간은 물론, 중간에 등장하는 최씨낙랑국의 실체, 그리고 낙랑군의 상세한 역사가 모두 불명이다.
- 목만치와 관련된 미스터리
- 목만치의 정체: 일본서기에 따르면 목만치는 권력을 잡고 구이신왕의 어머니와 정을 통하여 권세를 휘둘렀다고 간략하게 서술되어 있지만, 국내 사서에서는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22] 그렇기에 그의 정체를 현재로서는 알 수 없다.
- 목협만치(木劦滿致)와의 관계: 목협만치는 개로왕 대의 귀족으로 삼국사기에 등장한다. 그러나 목만치와 이름이 완벽하게 같기 때문에[23] 동일인물로 추정되지만, 목만치는 구이신왕 대의 인물이며 목협만치는 개로왕 대의 인물로 시대 차이가 나기 때문에 현재는 가설 단계에만 있다.
- 키노 오이와노스쿠네[24]와의 관계: 키노 오이와노스쿠네는 가야에서 반란을 일으켰던 인물로, 그 정체는 일본인 내지는 가야인이나 백제인으로 추정된다.[25] 특히 한일 사학계에서는 목만치와 동일인물이라는 가설이 제기되고 있다. 하지만 그가 근대적인 민족주의 관념이 전무했던 고대인이라서 그의 국적이 무엇인지를 제끼고 생각해도, 그가 가야를 상대로 반기를 든 동기도 의문이고,[26] 이 반란은 그 대상인 백제와 가야의 여러 구성국들은 물론 고구려까지 키노 오이와노스쿠네의 동맹 자격으로 참가한 대규모 전쟁임에도 불구하고, 사료의 부족으로 인해 반란의 진행 과정이 전혀 알려져 있지 않아서 역사학자들의 의문을 낳고 있다.[27]
- 백제 무왕과 관련된 미스터리
- 무왕의 출생 성분: 여러 가설이 있지만 어느 하나 제대로 입증된 것이 없다.
- 서동요의 실체: 서동과 선화공주의 연애담은 한국사에서 매우 유명하며, 서동은 백제 무왕이라는 것이 정설이지만, 무왕과 진평왕 시기에 백제와 신라는 앙숙 사이었기에[28] 무왕이 실제로 신라의 왕족과 결혼할 수 있었는지 알 수 없으며,[29] 더 나아가 선화공주라는 인물이 실존인물인지조차 불분명하다. 여기에 미륵사지 석탑에서 발견된 금제사리봉영기에서 무왕의 왕비가 좌평 사택적덕의 딸 사택씨라는 기록도 등장하면서 선화공주의 정체는 더욱 미궁 속으로 빠지게 되었다.
- 익산쌍릉의 피장자: 쌍릉은 무왕과 왕후의 무덤으로 여겨지고 있었는데, 2018년 7월 17일 고고학계와 전문가들의 발굴조사 결과 대왕릉에서 발굴된 유골은 무왕의 것이 맞다는 판정을 내렸다. 소왕릉에 대해서는 2019년 재발굴 및 조사가 진행되었지만, 문자 그대로 티끌 하나도 남지 않고 전부 도굴되었기에 무덤 어디에도 피장자가 선화공주임을 알려주는 증거가 나오지 않았으며, 피장자가 선화공주가 아님을 알려주는 증거 또한 나오지 않았다.
- 미륵사의 몰락 과정: 미륵사는 백제 무왕 대에 완성된 것으로 보이나 발굴 조사 결과 드러난 그 규모에 어울리지 않게 무왕 사후의 미륵사에 대한 기록이 빈약하다. 그래서 이 거대한 규모의 사찰이 언제부터, 어떠한 과정을 거쳐 몰락해 갔는지가 미스터리다. 그간의 발굴 조사에 따르면 적어도 여말선초 시기까지는 비록 초창기에 비해 그 규모가 축소되었거나 혹은 파괴와 재건을 반복해 가면서 어떻게든 사찰로서 명맥을 이어가다가 조선 시대에 이르러 최종 폐사된 것으로 보인다.
- 금마저 천도설: 무왕시기 금마저[30]를 새로운 수도로 정하려고 했다는 가설로, 익산시에 지어진 제석사와 미륵사 같은 거대사찰과 왕궁리 유적같은 왕궁 유적을 그 근거로 여기지만 문제는 왕궁리 유적 주변에 대로나 관청, 관방시설과 같은 수도로서 갖춰야한 필수적인 유적이 아직까지 발굴된 적이 없고, 관세응험기에 기록된 제석정사가 익산에 있는 제석사가 맞는지에 대한 의문, 왕궁리 유적에 조성된 석탑과 사찰의 조성연도 문제등 풀어야할 의문들이 여럿 남아있어서 결론이 나지않는 상황이다.
- 백제 의자왕과 관련된 미스터리
- 모계의 의문: 백제의 마지막 왕인 의자왕이 무왕의 아들이라는 것은 명확하지만, 그의 어머니가 누구인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만약 서동 설화가 사실이라면 의자왕의 어머니는 선화공주이며, 모계 가문은 신라의 왕실이 된다. 또는 기록에 남아있는 무왕의 왕후인 사택 왕후의 아들일 가능성이 있으나, 사택 왕후는 의자왕의 친모가 아니라는 가설이 우세하다.
- 말년의 사치: 의자왕이 말년의 사치로 인해 몰락해서 나당 연합군에 패배했다는 이야기는 모두가 알고 있다. 그러나 의자왕이 일으켰던 친위 쿠데타와 성충이 옥에서 죽기 전에 보냈던 상소문[31], 멸망 직전까지 국가 체계가 정상적으로 돌아갔음을 암시하는 사료 등을 근거로 의자왕이 사치를 부렸다는 기록은 신라와 당이 왜곡한 것이라는 가설이 있다.[32] 자세한 것은 의자왕, 예식진 문서 참조.[33]
- 은고부인: 일본서기,[34] 정림사지 오층석탑의 <대당평백제국비문>[35] 등의 사료에 따르면 백제 멸망에는 하시카시(大夫人)[36]의 만횡이 원인이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실제 은고부인이 요녀였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 북명: 고구려와 신라를 다룬 사서에 언급되는 나라. 위치 등 너무나 많은 것이 베일에 가려져 있다. 일단 학계에서는 고구려에 대한 기록에 나오는 북명과 신라에 대한 기록에서의 북명은 동일한 장소가 아니라, 이름만 같은 곳일 가능성이 매우 크다고 보고있다[37]. 북명이라는 이름의 한자를 뜻풀이하면 '북쪽 바다'라는 뜻이므로 단순히 북쪽에 있는 나라나 부족들을 가리키는 일반명사라는 설도 있지만, 신라 관련 기록에 나오는 북명이면 몰라도, 고구려 관련 기록에서 언급되는 북명은 일반명사가 아니라 어느 특정한 지역이나 부족을 가리킬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게 현재의 정설이다. 일단 신라 관련 기록의 북명은 함경도 일대로 비정되고 있으며[38], 고구려 관런 기록의 북명은 만주 북부나 연해주 일대로 추정될 뿐, 어느 장소인지에 대한 의견이 분분하다.
- 석탈해의 출신지: 석탈해의 출신 성분에 대하여 삼국사기에서는 왜국의 동북쪽 1천리에 위치한 다파나국[39]의 왕자였노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현재 주류 역사학계에서는 이 다파나국의 위치에 대한 논쟁이 일컬어지고 있다. 일단 석탈해 관련 설화에서 그가 가야의 왕위를 두고 수로왕과 대결을 벌이다가 패했다는 얘기가 등장한다는 점에서 석탈해가 어느 지역의 유력자 출신임은 분명하다고 보고있다. 석탈해에 정체에 대해서는 종래에는 인도 출신이었다는 주장이 제기된 바 있고[40], 그 이외에 현재 유력시되는 가설로 캄차카 반도 출신설[41]과 사할린 및 일본의 도호쿠 지방, 홋카이도 출신설[42], 한반도 동북부에서 이주한 옥저계나, 동예계 유이민 설, 현재의 강원도 지방에서 이주한 토착 부족 출신설 등이 제기되고 있다.
- 성한왕: 신라의 태조라고 일컬어지는 사람이지만[43], 이 사람이 누구인지가 밝혀지지 않았다. 일단 주류 학계는 기존에 알려진 왕들 중의 한명에게 올려진 왕호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 신라 미추 이사금과 관련된 미스터리
- 미추 이사금의 능(陵): 현재 미추왕릉이 있기는 하지만, 이 무덤이 진짜 미추 이사금의 능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 가공인물설: 국내 사학계에서는 미추 이사금이 실존인물이 아니라 내물 마립간과 법흥왕의 업적을 따와 후대 경주 김씨 왕가에서 만들어낸 가공인물이라는 가설이 제기되고 있다.
- 안시성주의 정체: 흔히 그의 이름이 '양만춘'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근거가 없다. 사실 안시성주의 본명은 물론, 고구려-당 전쟁 전후에 그에 대한 기록조차도 남지않아서 그 정체를 추정하기가 어려운 상황이다.
- 북위의 백제 침공:《삼국사기》뿐 아니라 당대의 기록인《남제서》에서도 언급되는 사건으로 북위와 백제가 총 3차례 전투를 벌였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하지만 북위가 어떻게 고구려와 바다를 지나 백제에 도달한 건지, 또한 왜 침공한 것인지 고대 기록의 부재로 정확히 밝혀진 것이 없다. 북위가 백제를 침공하려면 바다를 건너거나 육상으로 왔다면 고구려의 영토를 통과해야하는데, 어느 부분이든 미스테리 하다. 자세한 것은 동성왕 항목 참조.
- 을지문덕의 출신 성분과 최후: 당대 아시아의 최강대국이던 수나라를 상대로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는[44] 엄청난 전과를 거뒀음에도 그의 출신 성분이나 최후에 대한 기록이 전혀 등장하지 않는 것이 의문이다. 그래서 주류 역사학계에서는 당나라에 이름이 비슷한 울지경덕이라는 인물이 있다는 점과 을지문덕의 성 또는 직위명이라고 추정되는 '을지'가 퉁구스제어로 사신을 뜻한다는 점[45]에서 외국계 귀화인이거나,[46] 고구려 후기에 신진 권력층으로 성장한 하급 귀족 출신이라고 추정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최후에 대한 기록이 전무하여 고구려-수 전쟁 이후에 그가 어찌되었는지는 불명이다.
- 살수대첩 미스터리 : 수나라 육군이 살수를 건널때 상류를 막은 보를 터끄려 물에 빠트려 수장시켰다는 것이 살수대첩의 개요인데, 정작 아직까지 살수가 정확히 어디인지도 밝혀지지 않았으며 가장 유력한 후보인 청천강의 경우, 상류의 물이 하류지 내려오는데 2~3일이 소요된다. 또한 강에서 흐르는 억톤의 물을 그당시 기술로 어찌 막았는지도 의문이다.
- 임나일본부설: 현재 일본의 극우들이 오늘날의 가야 일대를 왜국이 정복하고 다스렸다는 주장하는 것은 당연히도 근거가 없는 설이므로 학계의 인정을 전혀 받지 못한다. 하지만, 실제로 임나일본부라고 할 수 있는 정체불명의 기관에 대해 일본서기에 기록이 된 부분의 실체에 대해서는 아직도 확실히 답을 하기가 어려운 상황이다. 가야의 여러 소국들과 일본 간의 외교를 위해 설립한 외교공관이라는 설과, 이 설의 축소판으로 가야에 상주하며 외교 창구 역할을 하던 일본 사신의 직함이라는 설[47], 가야 영토 내의 일본인 거주지를 정복 활동의 결과로 왜곡했다는 설이 있다. 다른 설로는 백제의 가야 침공에 대한 기록을 일본 측에서 자신들의 활동으로 왜곡했다는 설과, 자연재해를 피해서 가야로 피난한 일본인 난민들의 일시적인 거주지라는 설, 일본어족이 성립한 후에 한반도에 잔존한 일본계 소수민족에 대한 기록이 남았다는 설도 있지만,[48] 한국과 일본 양국의 학자들도 어느 쪽으로도 자신있게 비정하지 못하고 있다.
- 태조대왕 시기에서부터 신대왕까지 삼국사기의 초기 기록: 태조왕에서부터 차대왕, 신대왕까지의 기록은 상당히 불분명한 점이 많다. 우선, 태조왕과 차대왕, 신대왕 본인들부터 명림답부와 같은 그들의 신하들까지도 생몰 기간이 터무니없이 길게 기록되어 있는 점이나, 태조왕이 국가의 시조에게나 붙여지는 태조(太祖)라는 왕명이 붙여진 이유가 역사학계의 오랜 떡밥으로 남아있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김부식이 견강부회식으로 왕과 그 대신들의 수명을 어거지로 끼워 맞추었거나[49], 당대의 기록이 조작되었다는 설만 난무할 뿐, 그 어떤 것도 명확히 밝혀지지 않은 상태이다. 이 때문에 삼국사기의 초기 기록 자체를 신뢰하기 힘들다는 삼국사기 초기 불신론도 나온 적이 있으나, 고고학 연구를 통해 삼국사기와의 교차 검증이 가능해져서 불신론 자체는 폐기되었다. 하지만 그렇다면 삼국사기의 초기 기록을 어디까지 신뢰할 수 있는지는 아직 명확한 답이 나오지 않았다.
- 해씨 고구려설: 한때 고구려 왕실의 성씨가 초창기에는 해씨였다가 고씨로 바뀌었다는 설이 제기된 바 있다. 그 근거로 고구려의 건국자인 주몽의 아버지인 해모수가 해씨인 것과 왕실의 출신 부족이 소노부에서 계루부로 바뀌었다는 것이 제기되었지만[50], 현재 주류 역사학계는 해씨=고씨이고[51], 원래부터 고구려 왕실은 고씨였다고 보고있다.
- 요서경략설 : 백제가 요서 지역을 점령했다는 기록이 중국 남북조시대 남조 계통의 문헌에서 기록이 나오고 있지만, 정작 동시기 북조 측과 한반도의 사서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위에 언급한 백제-북위 전쟁 논란도 이와 연관된다. 삼국사기 《최치원전》에는 최치원이 당나라의 대사시중(大師侍中)에게 보내는 편지인 〈상대사시중장(上大師侍中狀)〉에서 “고구려와 백제가 강성할 때에 강병 100만을 거느리고 남으로 오(吳), 월(越)을 침범하고 북으로 유(幽), 연(燕), 제(齊), 노(魯)를 흔들어 중국의 큰 좀이 되었다.(高麗百濟全盛之時强兵百萬南侵吳越北撓幽燕齊魯爲中國巨蠹)”라고 적었다고 기록했다. 여기서 오와 월은 각각 지금의 중국 장쑤성과 절강성을 말하고 유, 연은 중국 허베이성을 뜻한다. 그리고 제, 노는 오늘날 중국 산둥성을 말한다. 중국의 '중국고금지명사전'에서도 허베이성이 신라를 넘어 근대 조선의 강역에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최치원은 신라 사람으로, 자신들이 멸망시킨 백제와 고구려를 띄워서 강하게 표현해줄 필요가 없었을 것이기에 최소한 대륙의 일부를 잠시라도 백제 또는 고구려가 지배하지 않았겠냐는 설이 있다. 특히 백제와의 두 차례 전쟁이 끝난 후 북위는 평성에서 낙양으로 천도하게 되는데 낙양은 허난성에 위치한 황하 중류의 내륙 지역이다. 오늘날 북경~상하이 지역이자 백제의 영토라고 추정되는 동부 지역은 가장 비옥한 땅으로, 만일 중국 동부 지방이 북위의 소유였다면 북위가 굳이 내륙 지역에서 내륙 지역으로 천도할 이유는 없었을 것이다. 또한 백제 온조왕 13년 5월에 왕이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우리나라의 동편에는 낙랑이 있고 북에는 말갈이 있어 영토를 침노하여 오므로 편안한 날이 적다."고 하였다. 지금 국사에서 배우는 상식으로는 백제 북쪽은 고구려로 막혀 있어야한다. 물론 백제 또는 고구려가 대륙을 완벽히 점령하고 지배했다는 무지성 환빠들의 주장은 들을 가치도 없고 학계에선 아예 기록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부정론이 강하지만 일시적, 단기적으로 상업/군사 거점을 확보했다는 긍정론/절충론도 적지 않은 편이다.
- 전남 영산강 유역의 고분군들: 영산강 유역 지역에서 나주 반남고분군, 전방후원분 등 독특한 양식의 고분들이 발굴되고 있다. 한때 이를 임나일본부설의 근거로 삼기도 했으나 무덤의 시기 및 양식 면에서 임나일본부설의 근거가 되기엔 매우 부족하다. 하지만 그렇다면 이 고분군을 만든 세력의 실체가 뭔지에 대해서는 마한 등 기존의 토착 세력이다, 일본에서 백제에 귀화한 왜계 세력이다 등의 해석이 나오고 있으나 명확한 결론이 나오지 않고 있다.
- 김유신의 가족:김유신과 공식 결혼한 아내는 기록상으로는 지소부인 뿐이다. 그러나 자녀 중 장남인 김삼광의 경우 나이를 볼 때 지소부인의 친아들일 가능성이 애매하다. 또한 김유신에겐 서자인 김군승(金軍勝)이 있는데 이 김군승의 친모가 누구인지는 기록에 남아 있지 않다.
5. 발해 (남북국시대)
- 발해의 멸망 과정: 갑작스러운 멸망 과정이 의문이며, 한때 주류 역사학계 내에서 백두산 폭발로 인한 멸망설이 떠돌았었다. 다만 최근에는 발해 멸망보다 백두산 분화가 나중의 일임이 밝혀져서, 거란에 의해 수도가 예상보다 빠르게 함락됐다는 게 어느 정도 정설로 굳혀지는 상황이지만, 대폭발 전에 지진이나 이상기후 등의 전조 증상으로 민심 혼란이나 왕권 약화 등의 문제를 유발해 멸망에 간접적인 영향을 줬을 수도 있고 한국지질자원연구원에서 백두산은 1000년 단위의 대분출 주기와 100년 단위의 소규모 분출 주기가 공존해서 한치의 오차도 없는 정확한 분출 시기를 알 수가 없으므로 멸망에 직접적인 영향을 줬을 가능성이 아주 없는 것도 아니라고 주장해서 백두산 폭발 멸망설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 발해의 문화인류학적 구성: 발해의 언어가 어느 쪽 계통인지, 그리고 '발해인'들이 어느 민족에 가까운 이들인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학계에서 의견이 분분하다. 아직까지는 주류 학계내에서 말갈계 주민들과 고구려계 주민들이 발해 전체의 인구 수 내에서 비슷한 비율을 차지하였다는 설에 무게를 두고 있지만, 말갈계가 더 많았다는 주장과 고구려계가 더 많았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고, 소수 의견이지만, 고구려계와 말갈계가 융합하여 독자적인 민족인 '발해인'으로 거듭났다는 설도 있다.[53] 이는 발해어로 된 기록을 해독해보면 확실히 알 수 있겠으나, 유감스럽게도 아직 발해 문자로 된 기록들이 완전히 해독되지 못한 상황이다. 다만, 어느 쪽으로 보더라도 발해사를 중국사로 볼 수는 없다는 점에는 학자들의 절대다수가 동의하는 상황이다.[54]
- 발해유민 - 발해 멸망 및 발해부흥운동 실패 이후에도 몇 년동안 발해계 인물들이 있었다고 기록되어있으며 금나라가 몽골에 의해 멸망한 후에도 발해인들의 후손이 있었다고 전해지나 확실하지 못한 상황이다. 또한 고려사에 따르면 발해인 100만명 가운데 10만이 고려로 망명했으며, 50만이 거란에 의해 강제이주 당했다고 쓰여있다. 하지만 나머지 40만명에 대해서는 설명이 없다.
- 발해의 왕계: 문왕 사후, 아들인 대숭린과 장손자인 대화여가 있었음에도 왕위 계승에서 먼 족제 대원의가 승계받았으며 대원의가 누구의 후손인지도 모르며 대원의가 죽고 문왕의 손자 대화여가 즉위하였으나 곧 죽고 '삼촌'인 대숭린이 즉위, 15년을 통치한 후, 아들인 대원유가 승계하였다. 그러나, 정왕에게 대연진이라는 아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동생인 대언의가 전례에 따라 즉위하였으며 마찬가지로 대언의에게도 대연준(혹은 대정준)이라는 아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동생인 대명충이 즉위한다. 이러한 혼란스러운 왕위계승은 다시 9촌 아저씨이자 대야발의 증손자인 대인수의 즉위, 대이진 사후 아우 대건황의 계승, 대현석의 죽음과 대위해-대인선과의 관계로 이어지며 끝을 맺는데 230년에 가까운 세월동안 부자/조손간 계승은 고왕-무왕-문왕, 강왕-정왕, 선왕-대이진, 대건황-대현석만 있으며 형제 간 계승, 3촌, 9촌 역계승에 심지어 배경도 모르는 족제가 계승하는 등 여러모로 혼란스러운 상황을 보여주며 심지어 기록이 부재하여 알 순 없지만 대위해, 대인선은 또 다른 계통의 왕족으로까지 추정되는 마당이다.
6. 후삼국시대
- 신검의 최후 : 후백제 왕실과 마찬가지로 왕건에게 항복하여 나라를 바친 신라의 마지막 군주인 경순왕이 경순왕릉이라는 왕릉이 만들어진 것에 비해 견신검은 왕릉이 만들어지기는커녕 아예 무덤의 위치가 기록되어 있지 않아 그의 시체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다.
- 견훤의 능(陵): 현재 충청남도 논산시 연무읍 금곡리에 있는 무덤이 견훤의 능으로 알려져 있으나 이 무덤이 진짜 견훤의 능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때문에 이 능의 공식 명칭도 앞에 전(傳)을 붙여 전견훤묘(傳甄萱墓), 말 그대로 "견훤의 능으로 전해지는 무덤"이다.
- 경애왕의 최후: 경애왕은 포석정에서 술판을 하고 놀다가 견훤의 침략으로 자살당한 걸로 알려졌으나 최후 행적에서와는 달리 은근 유능한 임금이었다는 점, 안압지나 임해전 같은 다른 가까운 곳도 많은데 굳이 거리가 멀고 당시의 기후에서도 놀기에는 적합하지 않은[55] 굳이 포석정으로 갔다는 점때문에, 현재 주류 역사학계는 경애왕이 놀다가 변을 당했다고 보는 것은 신빙성이 없다고 보고 있으며[56] 포석정 인근에 성지와 성물이 많았다는 점[57]을 근거로 경애왕이 견훤의 진군 상황을 알지 못한 채 제사를 지내다가 변을 당했을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하지만 이쪽도 가설이라서 아직까지 검증은 못한다는 문제가 있다.
- 애초에 문자 해석을 잘못해서 일어난 것이다? : 문제의 삼국사기 신라본기의 해당 내용은 "_遊_鮑石亭宴娛(포석정에서 연회를 벌이고 놀았다.)"라고 나와 있는데, 문제는 遊가 '놀다'라는 뜻도 있지만 '방문하다'라는 뜻도 있다. 따라서 애초에 기록의 목적 자체가 '놀다'가 아니라 '방문하다'라는 목적으로 적은 것이고, 해석에서 오류가 일어난게 아니었냐는 의문도 나오고 있다.
- 소고구려의 존재 : 고구려 유민들이 요동~서북한 지역에 남아서 고구려를 잇는 나라를 세웠을거라는 주장인데, 독립국으로 있었다고 보기에 인정할 수 있을 법한 기록도, 부정적으로 보이는 기록도 모두 존재하고 이게 서로 모순되는 부분도 많아서 아직 존재가 확실치 않다.
- 마의태자의 마지막 : 935년, 신라가 고려에 점령당할때 고려에게 항복하는것에 반대하고 개골산(겨울의 금강산)에 들어가 마로 된 옷을 입고 풀잎을 먹으며 살다가 생을 마감했다고 한다. 하지만 설악산의 한계산성을 마의태자가 쌓았다는 전설이나, 신라가 무너질 당시 애초에 금강산과 설악산 모두 신라의 영토가 아니었다는 점에서 무장산이나 토함산으로 들어간 것일수도 있다는 주장이 있다. 또한 동생 덕지(德摯) 또는 덕주공주[58]와 월악산에서 머무르다가 혼자 개골산으로 갔다는 전승 및 인제군 지역에서 신라부흥운동을 일으켰다는 설도 존재한다. 한술 더떠서 마의태자가 사실은 살아있었고 그 후손이 금 태조라는 황당한 주장도 존재한다. 당연히 금 태조의 조상이 마의태자는 아니겠지만, 마의태자가 정확히 어디로 향했는지는 아직 미스터리이다.
- 궁예의 출신 성분: 본인이 정말로 신라 왕자였는지 불분명하다. 일단은 삼국사기에 따르면 헌안왕의 아들이며, 어릴 때 왕실에서 쫓겨나 유모가 대신 양육했고, 후에 성씨를 김씨에서 궁씨로 바꿨다고 한다[59]. 그런데 신라 서적인 국왕경응조무구정탑원기에는 문성왕의 사촌동생인 김예라는 인물이 등장한다.[60] 그러나 김예가 궁예와 동일인물인지는 사료 부족으로 불분명하다. 여담으로 궁예가 폭군이었다는 기록이 후대의 왜곡이라는 주장도 있는데, 주류 역사학계는 이 주장을 부정적으로 보고 있으며, 오히려 궁예가 알려진 그대로 폭군이 맞는 것으로 보고 있다. 궁예가 태봉의 수도로 삼았던 철원에서만 그에게 온정적으로 평가하는 설화가 전래되고 있고, 다른 지역에서는 그의 악평을 담은 설화가 전래되기 때문이다.
- 신라구 : 우리가 흔히 약탈 목적으로 한반도에 쳐들어 오는 일본 해적을 왜구라고 하듯이 신라 말기에도 혼란을 틈타 일본을 약탈했던 '신라구'가 있었다. 그런데 침략국인 일본에도 기록이 세세히 남아 활동 내역이 비교적 구체적인 왜구와는 달리 신라구는 한국 측의 기록이 "견훤과 왕건이 당대에 날뛰던 한반도 서해와 남해의 해적을 소탕했다" 수준으로 그렇게 많지 않아서 그냥 해적이었는지 신라의 정규군이었는지 같은 실체에 대한 의문점이 많다. 대표적으로 일본 측 기록에는 진성여왕 시대에 일본에서 해적질하다 잡혔다는 현춘이라는 자는 자신의 진영이 신라 왕의 명을 받고 왔다고 주장했다고 서술된 내용이 있지만 삼국사기에는 그런 내용이 없다. 만약에 이 내용이 사실이라면 당시 진성여왕이 정규군을 보내 일본 정벌을 시도했거나[61] 적어도 국가 공인 해적선을 보내 약탈 지원을 했을 가능성도 있고 반대로 그냥 현춘이 왕명을 사칭했을 가능성도 있지만 정확한 내막은 불명이다.[62]
7. 고려 시대
- 여말선초 시기와 관련된 미스터리
- 우왕, 창왕 혈통 논란: 우왕과 창왕이 공민왕의 혈통이냐 신돈의 혈통이냐는 논란이 있는데, 공민왕의 혈통이라는 의견이 유력하며, 신돈의 혈통으로 남아있다는 기록은 조선 개국공신이 조선 건국의 정당성을 강조하기 위해 왜곡한 것이라는 가설이 있다.
- 공양왕릉 진짜 소재지: 진짜 공양왕릉이 고양에 있는지 삼척에 있는지를 두고 다투고 있는데, 진짜 공양왕릉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다. 일단 공식적으로 시신이 안장된 것으로 인정된 공양왕릉은 고양 소재 무덤이다.
- 2차 여요전쟁 및 이전의 강감찬의 행적: 아버지인 강궁진이 고려의 개국공신인 명문가 출신이고 강감찬 본인도 과거시험에 장원 급제한 인재이지만, 정작 언제 어디서 어떤 활동을 했는지에 대한 기록이 2차 여요전쟁 이전에는 사료에 남아 있지 않다. 게다가 2차 여요전쟁 때도 현종에게 항복을 반대하고 몽진을 주장한 것 외에는 기록이 없다.
- 저고여 피살 사건: 여몽전쟁의 단초가 된 사건이지만, 당시 고려를 방문했던 몽골 사신인 저고여를 살해한 자가 누구인지가 아직도 밝혀지지 않았다. 한나라가 자국의 사신이 고조선을 방문했다가 살해당했을때 지체 하지않고 바로 침략을 했다는 사례에서 보듯, 저고여를 죽인 범인이 고려 사람이였다면 몽골 측에서도 곧바로 고려를 침략해서 정복 하려고 했을텐데, 몽골은 사건이 발발한 1225년이나 이듬해 1226년에 침공하지 않고 시간이 어느정도 지나서 잊혀질 법도 한 1231년에 침공했다. 그리고 고려는 저고여가 피살 당한 장소가 자신들의 관할 영토가 아니라는 점을 들어 자신들의 범행을 부정했고 금나라를 지목했다.
- 동북 9성의 위치: 윤관이 여진 정벌을 단행한 뒤 동북 9성을 축조했다가 이후 여진 측에 반환하였다. 이 동북 9성의 위치에 대한 해석이 매우 분분하다. 한 때 함흥 평야설이 주류였으나 이는 폐기되었다. 함경남도설, 함경도 전역설, 만주 일대설 등의 주장이 있으나 아직 고고학적으로 실증된 학설은 없다.
- 운주사와 천불천탑: 창건 연대와 창건 배경, 주체 등 어느 하나 확실하게 밝혀진 부분이 없다. 발굴 조사 결과 고려 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유물들이 나와서 고려 때 창건된 것으로 추정되나 이 또한 확실하지 않다. 이른바 천불천탑으로 불리는 불상 및 탑들의 양식 또한 다른 지역의 것과는 아예 다르다. 이름 없는 민중들과 석공들이 오랜 세월에 걸쳐 하나둘씩 축조한 형태라서 처음부터 양식과 배치 구조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주장까지 있다.
8. 조선 시대
- 김정호의 자세한 생애 행적: 김정호에 대해 체계적으로 남아 있는 기록이 매우 부족하며 대동여지도 등 지도를 편찬하는데 관련이 있는 신헌, 최성환 등의 개인 글에서 단편적으로 기록이 남아 있을 뿐이다. '한반도를 3번 돌고 백두산을 8번이나 오르며 정확하게 실측 하여 대동여지도를 제작했다', '흥선대원군에게 물고를 당해 본인은 사망하고 지도는 불태워졌다' 등의 야사가 있지만 모두 일제강점기 때 만들어진 가짜 이야기이다.
- 김홍도의 말년 행적과 사망 연도: 김홍도가 언제 죽었는지는 현재까지도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이며, 일단 1810년까지는 김홍도에 대한 기록이 나오므로 그 이후에 사망했음은 확실하다. 아래의 도슈사이 샤라쿠 미스터리와 관련하여, 김홍도가 도슈사이 샤라쿠의 정체라는 설이 제기되었으나, 도슈사이 샤라쿠의 활동 시기에 김홍도는 조선에 있었음이 확인되었으며 화풍도 김홍도의 것과는 차이가 상당하는 것도 밝혀져서 가설이 틀린 것으로 판명났다[63].
- 단종의 사인 : 정황 자체는 세조에 의해 죽음을 맞이한 것은 맞지만, 구체적인 사인이 무엇이었는지는 기록이 엇갈린다. 세조실록에는 금성대군의 사망소식을 듣고 슬픔에 못 이겨 자살한 거라고 기록했으나 세조실록 자체가 검증이 되지 않은 부분이 많아서 현재는 사실상 거짓이라 여겨지고 있고, 후대의 왕들의 기록을 보면 사약을 권유받았다가 이후 참살 또는 교살되었을 가능성이 높지만 단종이 사약 발이 듣지 않아서[64] 보다 못한 관리가 직접 죽인 것인지, 아니면 사약을 거부하다가 변을 당한 것인지가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 독립문 편액의 필체: 매국노 이완용의 필체로 알려져 있으나[65] 독립운동가 김가진의 필체라는 주장도 있다.
- 민승호 암살 사건: 고종 11년, 당대의 실권자 중 한 명이었던 민승호가 폭탄 테러로 인해 본인, 어머니, 아들까지 3대가 한꺼번에 사망한 암살 사건. 조선 역사를 통틀어 고관대작이, 그것도 가족과 함께 테러로 암살당했다는 건 비교할 만한 사건조차 꼽기 힘들 만큼 엄청난 일로, 현대 한국으로 치면 기획재정부장관이 암살당한 것[66]과 비슷한 대형 사건인데, 사건의 진상은 끝내 밝혀지지 않았다. 죽어가던 그가 말도 못한채로 손가락으로 운현궁을 가리켰다는 점[67]에서 용의자로 흥선 대원군 혹은 그의 일파가 꼽히지만 그쪽에서 범행을 했다는 뚜렷한 증거가 없다.
- 예종독살설 : 공식적인 이야기는 아니다. 사망 직전 병을 앓고 있었다고는 하지만 19살의 어린 나이였던 데다 대비 정희왕후도 심각성을 느끼지 못할정도로 심한 수준은 아니었기에 의혹이 생겼다. 예종이 죽기 전 자을산군(훗날 성종)을 불러 같이 수라를 들었는데 갑자기 죽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며 에종의 형수인 수빈 한씨가 손을 써 독살시켰다는 주장과 예종에 의한 몇차례의 옥사로 수십명의 신하들이 죽자 불만을 품은 수구파(훈구파)가 독살했다는 설 등이 있다. 두 설 모두 신빙성이 상당히 낮고 받아들여지지는 않는 가설이지만 진실은 아무도 모른다.
- 박연의 조선인 후손들: 1622년에 조선의 제주도에 표류했던 네덜란드인 선원인 얀 야너스 벨테브레가 조선 땅에 영구히 정착한 후에 이름을 박연으로 바꾸고 조선인과 혼인하여 가정을 이루며 살다가 조선 땅에서 천수를 누리다 자연사했다는 이야기는 매우 유명하다[68]. 하지만, 개개인마다 성씨와 본관이 있을 정도로 혈통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어서 가문마다 반드시 족보를 보유하고 있는 한국 사회에서 박연의 후손들이 어찌되었는지, 그들의 혈통이 단절되었다면 언제 단절되었는지가 알려지지 않은 건 상당한 의문을 낳고 있다.[69] 때문에 2000년대에 대한민국 정부와 네덜란드 정부가 합동으로 박연의 후손을 찾는 작업에 돌입했으나, 끝내 성공하지 못했다.[70]
- 사육신과 관련된 미스터리
- 사육신 역사성 논란: 사람들이 사육신에 대해 알고 있지만, 사육신 구성원에 대한 학계의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 김문기 포함 논란: 김문기가 사육신에 해당된다는 주장에 따라 새롭게 헌창되었으며, 사육신묘에 추가되었다. 하지만 김재규가 학계에 김문기를 사육신에 포함하라는 압력을 넣었다는 의혹이 있으며, 사육신 문중과 금녕 김씨 문중 간의 지속적인 갈등을 빚고 있다. 하지만 학계에서는 여전히 사칠신이라 하지 않고 사육신이라 하고 있으며 김문기를 포함하지 않고 있으나 위에서 언급했듯이 사육신 구성원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어 김문기가 진짜 사육신 구성원인지 알 수 없다.
- 설공찬전의 결말: 설공찬전은 조선 중종 대의 유학자인 채수가 집필한 소설인데, 문제는 소설 내용에 중종반정의 공신들의 부정부패를 비판하는 내용이 있다는 점과, 왕도 죄를 지으면 저승에서 처벌을 면할 수 없다는 파격적인 내용이 문제가 되어서, 대부분의 판본이 압수되어 불태워졌다. 남아있는 판본은 채수와 동시대 인물인 이문건이 몰래 필사한 부분이 유일한데, 이마저도 뒷부분이 잘린 판본이라서 설공찬전의 전체 내용은 영영 알 길이 없어졌다.
- 소현세자의 사인(死因):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한국 전근대사의 대표적인 의문사 사례로 꼽힌다. 다만 인조가 독살했다고 여겨졌던 기존의 학설은 사실상 폐기되었으며, 현재는 당시에는 치료가 불가능했던 소현세자 본인의 지병이 악화되어 사망했다는 설이 유력해졌지만[71] 그 질병이 정확히 무슨 병인지, 또 무엇을 계기로 갑자기 급사하게 된 것인지가 현재까지도 의문이다. 또 단순히 병사했다는 설도 여러 한계와 반론이 존재해서 현재까지도 소현세자가 독살 등등의 방식으로 암살되었다는 설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72]
- 영조, 정조의 치세와 관련된 미스터리: 영조와 정조의 치세에 대해서 이해하려면, 우선 몇 가지 사실을 인지하고 있을 필요가 있다. 첫째로, 영조와 정조는 조선 역사상 가장 강력한 왕권을 행사한 왕들 중의 한 명이었다는 것이다. 즉, 이들의 권력을 견제할 세력이 전혀 없었다는 것에 주목해야한다. 둘째로, 노론은 이들은 물론, 그 가족들에게도 어떠한 해코지도 한 적이 없다는 것을 알아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전술했듯이, 영조와 정조의 권력은 매우 강력해서, 노론 측에서 이들의 권력에 발목을 잡는 것은 고사하고, 이들의 생전에 왕권을 견제하려는 그 어떤 시도도 하지 못했고, 그럴 의도도 갖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73]. 애초에 영조와 정조, 사도세자가 모두 노론과 한패였던 만큼[74], 구태여 목숨걸고 같은 편을 팀킬할 이유가 없다. 무엇보다도 당시의 노론은 이미 각각 뒷날의 시파와 벽파로 이어진 남한당과 북한당으로 분열되어 있어서, 왕권을 견제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75][76]. 심지어 노론 음모론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정조와 사도세자의 적으로 지목한 정순왕후 김씨와 그녀의 친정인 경주 김씨 가문, 그리고 화완옹주[77]마저, 실제로는 두 부자의 열렬한 지지자였다[78]. 마지막으로, 사도세자는 노론이 아닌 아버지 영조에 의해 직접 죽임을 당했다는 것과 정조가 암살당한 게 아니라 자연사했다는 것을 알아두어야 한다. 그가 48살에 죽었다는 점에서 요절했다고 보기도 하지만, 전근대 시대 군주들은 워낙 격무에 시달리다보니, 평균 수명이 4, 50대 정도 밖에 되지 않았다. 정조의 아들인 순조 역시 정조와 비슷한 44살의 나이로 병사했으며, 세종대왕 역시 50대의 나이로 과로사했다. 되려 정조의 할아버지인 영조가 당대 군주들치고는 상당히 장수한 케이스다. 게다가 딱히 군주가 아니더라도 전근대 시절까지는 평민들조차도 4, 50대에 죽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정조는 조선의 역대 왕들 중에선 가장 평범한 인생을 살았고[79][80], 일국의 군주라서 격무에 시달리던 그의 삶을 돌아보면, 언제 질병이나 과로로 사망해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었음을 알 수 있다[81].
- 나경언 고변 사건의 동기: 임오화변의 1차적인 원인이 된 사건으로, 나경언이라는 인물이 사도세자가 저지른 많은 비행에 대해 영조에게 폭로하여, 조정을 발칵 뒤집어놓았다. 하지만, 노론 음모론에서 노론의 사주로 이런 비행을 폭로했다고 주장하는 것과는 달리, 역사학자들이 당대의 기록들을 대조해 연구한 결과에 의하면 나경언이 그 어떤 배후도 없이 단독으로 이런 일을 벌인 것으로 밝혀졌다. 심지어 노론 측에선 사도세자의 비행을 고변한 것에 대해 되려 대노하여 나경언의 목을 벨 것을 청하는 한편, 세자에게 선처를 해줄 것을 요청했다는 기록 또한 발견되며, 이 역시 당대의 여러 기록에서 교차검증이 된다. 그래서 이 사건은 그가 단독으로 일으킨 일임은 분명하다고 보여지지만, 대신들조차 영조의 편집증적인 성격을 알아서 세자의 악행에 대해 쉬쉬하던 것을, 나경언이 무엇하여 죽음을 불사하고[82] 사실을 밝힌 것인지가 의문이다[83].
- 임오화변의 내막: 사도세자의 죽음의 과정을 담은 기록이 정조에 의해 사라지면서 역사학자들의 골을 부여잡게 하고 있다. 관련 기록을 파기할 것을 지시한 사람이 영조라는 설도 있는데, 기록을 삭제한 사람이 누구든지 간에 영조에서 정조의 치세 기간 동안에 임오화변과 관련된 기록이 대거 삭제되었으므로, 현재로서는 이 참극을 눈 앞에서 직접 목격한 혜경궁 홍씨나 화완옹주, 또는 당대의 여러 대신들이 남긴 기록을 토대로 상황을 재구하는 수 밖에 없다. 영조가 앓고있던 정신질환[84]이나, 이복형인 경종의 죽음의 원흉이라고 의심받던 과거에 대한 트라우마[85]에 심하게 시달렸다는 점 때문에, 학계에서는 임오화변의 원인은 정치적인 원인이 아닌 왕실 내부의 가정사 문제에 있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고 보고 있다.[86] 하지만, 그것만 논하기에는 아들 사도세자에게 가한 학대가 당대의 대신들도 이해하지 못할 만큼 너무나도 비상식적이었기 때문에, 꼭 그것만으로 아들을 죽여야했는지가 의문점으로 남아있다.
- 정조의 암살을 기도한 자: 정조에 대한 암살기도에 대해 논하기 전에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다. 첫째로 정조는 절대로 암살로 죽은 게 아니라 자연사했다는 것이며, 둘째로 그에 대한 암살을 기도한 자가 누구든지 간에 노론은 절대로 정조의 암살을 기도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노론 세력 중의 극히 일부인 홍인한과 정후겸은 실제로 정조를 암살하려고 시도한 적이 있다. 하지만, 이들은 노론 내에서 주류도 아니거니와, 정조에 의해 사도세자의 죽음을 방조했다고 지목되어 미움을 산 탓에, 그에 대한 보복을 당하기 전에 최후의 발악을 한 것에 불과하다[87]. 상술했듯이, 임오화변의 원흉은 영조 혼자 뿐이므로, 차마 자기 할아버지에게 책임을 묻기 어려웠던 정조가, 만만한 신하들을 분풀이삼아 보복하려한 것이고, 노론 측은 이에 전혀 저항하지 못했다. 사실상 소속 붕당으로부터도 버림받은 이들이 이판사판으로 벌인 짓이었다[88]. 게다가 의문인 것은 이들이 결국 계획이 발각되어 죽임을 당한 뒤에도, 암살 위협에 대한 기록이 나온다는 것이다. 애초에 노론은 임오화변[89]을 계기로 시파와 벽파로 분열되었으며, 정조 본인은 이들 중에서 어디에 속해있던지 간에 일단은 명백히 노론에 속해있었다. 그래서 딱히 정조를 죽일 필요도 없고, 그럴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던 당시에, 과연 누가 그를 암살하고자 했는지가 의문이다. 세손 시절부터 암살 위협을 받았다는 기록으로 미루어보아, 개인적인 원한이 동기였거나, 단순한 히스테리 증세 내지는, 암살 위협 자체가 정조가 왕권 강화의 명분을 만들고자 날조한 것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지만[90], 이런 기록이 나온 이유에 대해서 합당한 해석이 나오지 않고 있다.
- 효장세자의 죽음: 영조의 서장자로 1728년 10세의 어린 나이에 병으로 단명하였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요절에 대하여 영조가 직접 친국한 기록이 있고 매흉에 대한 기록과 독살에 대해 의심스러운 정황이 있으며 관련이 있으리라 추측되는 선의왕후의 죽음도 석연치 않다. 하지만, 절대왕권을 행사한 영조의 치세 하에서, 대체 누가 효장세자나 선의왕후, 정조에 대한 암살을 기도하느냐가 의문이다.
- 을미사변 관련 미스터리 : 1895년 10월 8일에 일본이 조선 침탈에 유리한 고지를 세우기 위해 친러파였던 명성황후를 시해한 사건이다. 일단 이 사건의 대략적인 내용은 역사학계가 사실 상의 정설을 잡기는 했으나 일부 기록의 부재와 일본 측의[91] 방해 공작으로 인해 아직까지 의문으로 남은 것이 있다.
- 흥선대원군의 참여 여부 :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은 대표적인 의혹으로, 흥선 대원군이 이 사건에 직접적으로 개입을 했는가에 대한 것이 있다. 일단 배경을 놓고 보면 당시 고종과의 부자관계가 파탄이 났었고[92] 대원군이 민씨 일가를 축출하기 위해 일본과 손을 잡았다는 정황이 존재해서 명분 자체가 충분했고, 전개 당시 일본이 사건을 벌이기 전 다른 사람도 아닌 흥선대원군을 통해 자기들을 거취를 먼저 알렸다는 점과[93] 대원군이 사실상 궁내의 경비를 마비시켜 일본군이 황후가 있는 곳까지 직행할 수 있도록 했다는 점에서 이에 대한 논란이 가중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는 대원군이 이 사건을 일으킴으로써 고종 겁박은 둘째치더라도[94] 정말로 황후의 사망을 원했냐는 것이다. 물론 결과만 놓고 보면 황후가 사망하게 되면 친러파 같은 자신에게 대항하는 세력이 무너지게 되고 고종과의 다툼에서도 유리한 상황이 되므로 본인에게도 이익이 될 가능성은 높겠지만 문제는 거시적으로 보면 흥선대원군이 러시아를 몰아내겠답시고 일본을 끌어들였을 뿐 정말로 일본을 좋아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어서 다른 선택지도 충분히 고려했다는 것도 있고,[95] 미시적으로 보면 유교 질서가 다소 약화된 조선 말기였다지만 시아버지가 며느리를 살해한다는, 현대에도 어지간한 살인보다 무거운 죄로 취급하는 패륜 행위를 무턱대고 했을지가 의문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반박점으로 인해 분명 을미사변에 일어나게 된 데에는 분명 흥선대원군의 일종의 '과실'이 존재한다는 데에는 이견이 없지만, 정말로 황후를 살해할 의도를 가지고 이 사건에 개입했는지는 현재까지도 의문으로 남았다.
- 황후에 대한 강간, 시체능욕 여부 : 엄밀히 말하면 사변 당시가 아닌 20세기 중후반에 제기된 의문으로 1966년[96]에 일본의 야마베 겐타로가 발간한 일한병합소사(日韓倂合小史)에서 황후의 시체를 능욕했다는 이야기가 서술되어 촉발된 논란이다. 여기서 이 도서에서 쓰여진 을미사변에 관한 내용은 사실상 '에이조 보고서'라는 문서를 통해 저술되었는데, 에이조 보고서에 황후의 시신에 '국부 검사'라는 행위를 했고[97] 이것이 시체 능욕이라고 판단하고 이렇게 저술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런데 이후에 일본에서 국부라는 것이 우리가 현재 흔히 생각하는 여성의 생식기라는 의미로 정착한게 1930년대 일이었다는 점이 확인되어 이에 대한 반론이 제기되었다. 반론 측의 주장으론 상술한 에이조 보고서에 쓰여있었던 해당 행위가 신원확인을 위한 부검을 목적으로 한 것이며 나체로 만들고 '국부'를 검사했다는 것은 부검의 일부였다는 것이 요지이다. 하지만 그 보고서는 을미사변 직후에 쓰인 글인데도 황후의 국부를 훼손했다는 것에 대해 죄책감을 느꼈다는 투의 내용이 있었고 그게 정말 부검이었는지에 대해서도 확실한 서술이 없어서 이쪽 주장도 확실하지는 않은지라 이 '국부'훼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가 의문으로 남아서 현재까지도 논란거리로 남아있다.
- 황후의 신원확인 방법 : 왕후의 신원을 어떻게 확인했는지에 대해서도 기록들의 설명이 제각각 엇갈린다. 매천야록은 왕후의 양녀가 된 고무라의 딸이 그 얼굴을 확인해 주었다고 기록하고 있고, 처음부터 초상화 혹은 사진을 들고 와서 궁녀들의 얼굴과 대조했을 것이라는 설, 혹은 마마 자국을 보고 확인했다는 설도 있다. 을미사변에 가담한 우범선의 진술을 기록한 《우범선 최후사》에서는, 낭인들이 우범선을 데려와서 왕후의 얼굴을 확인하게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 다른 일설에는 왕후와 주위에 있던 왕후로 의심되는 궁녀들을 전부 발가벗겨서 임신했던 흔적을 찾아 확인했다고 한다.
- 인조때의 훼훼귀신 소동 : 병자호란이 끝난 직후, 조선 각지에서 벌어진 귀신 소동. 한양에 훼훼(喙喙)라고 기분 나쁜 울음소리를 내는 귀신이 밤마다 나타나 사람들이 가위에 눌려 죽는 사건이 일어난다. 또한 전주에서 무언가가 사람을 붙잡아 가니 활로 쏴 죽였는데, 그 정체가 까치였다. 뒤이어 뒤웅박같이 생긴 물건이 떨어져 사람들이 도끼로 내려치니 그 안에서 수많은 까치들이 나와 날아갔다. 남원부사가 한양에서 일을 본 후에 내려오던 중 공주에서 훼훼귀신을 만나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이렇게 조선 각지에서 훼훼귀신 소동이 벌어지자, 인조는 남한산성에서 백제 온조왕에 대한 제사를 지냈고 이후 사건이 진정되었다고 한다. 조경남의 속잡록에 나와있는 이 귀신 소동은 병자호란으로 인한 사회적 혼란때문에 일어난 집단 히스테리로 여겨지고 있으나 확실한 것은 알수 없다.
- 임오군란 관련 미스터리
- 흥선대원군의 개입에 관한 논란 : 임오군란의 사태 수습을 위해 고종이 대원군을 구원투수 등판시키듯 다시 입궐시켰는데, 여기서 흥선대원군의 행보에 대해 여러가지 논란이 있다. 우선 단순한 군의 처우 문제와 조정의 잘못된 일 처리로 일어났던 민란에 이미 정계에서 나가있던 대원군이 개입한 동기가 불명이며 또 대원군이 개입하기 시작한 시점이 구식 군인이 대원군을 찾아갔을 때인지, 아니면 대원군이 이전부터 기회를 잡고 수를 썼는지가 기록이 남아있지 않아 여러모로 의문으로 남아있다.
- 청나라에 원군을 요청한 자 : 조선이 청에게 원군을 요청하려면 조선 조정이 영선사로 청에 가있던 김윤식 등을 접촉해야 가능했는데, 그들을 접촉하라고 지시한 자가 누구인지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았다. 과거에는 윤태준이란 자가 중전 민씨의 명을 받고 고종에게 밀서를 전달하는 방식으로 청에게 원군을 요청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이후 당시 민씨가 누구에게 뭘 지시하기도 어려울 만큼 바쁘게 이동했고 결정적으로 지시한 것으로 추정되는 시기에 말라리아에 감염돼 투병 중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져 틀린 가설이 되었다. 그렇게 하면 유력한 인물로는 군 통수권을 갖고 있는 고종밖에 남지 않지만 고종 이외의 다른 인물일 가능성이 없고, 그나마 신빙성이 있다는 것일 뿐 고종이 했다는 주장도 물증이 존재하지 않아서 현재까지도 밝혀지지 않은 사항으로 남았다.
- 임진왜란과 관련된 미스터리
- 율곡 이이의 십만양병설: 율곡이 십만양병설을 주장했다는 사실은 선조수정실록에 나올 뿐, 인조반정 이전에 편찬된 선조실록은 물론 율곡집 등 율곡 관련 문헌에서도 보이지 않는다.
- 거북선: 흔히 '세계 최초의 철갑선'이라고 알려진 것과는 달리, 실제로 철갑선이었는지의 여부와 더불어, 전반적인 내·외부의 구조가 어떠했는지가 불분명하다. 심지어 거북선은 태종에서 고종때까지 400년을 운용한 군선이었는데 제대로 된 설계기록이 남아있질 않아 복원도가 제각각이다.
- 김충선의 본명: 임진왜란당시 일본군의 선봉에 섰었음에도 불구하고 이후 조선에 귀화해서 일본군을 상대로 큰 공을 세우고, 이후 조선의 무장으로서 병자호란에서도 공을 세운 드라마틱한 삶을 살다간 인물이지만 그의 정체, 본명과 일본에서의 행적이 밝혀지지 않았다. 심지어 일제강점기 당시에는 '가공의 인물' 드립까지 나오기도 했다. 물론 이건 일본군 장수가 조선에 감화되어 자진 투항했다는 사실이 아니꼬웠던 조선총독부의 날조였다.
- 이순신의 최후와 관련된 미스터리 : 흔히 노량 해전에서 왜구의 눈 먼 총에 맞아 사망했다고 알려져 있으나, 여러가지 석연치 않은 점이 남아있다. 워낙 최후가 극적이었기에 맨날 당하기만 하던 일본군에게 총 맞아 죽었다는 것을 믿지 못했던 당대의 인식도 한 몫한다.
- 자살설? : 이순신이 임진왜란 도중에 죽은 백성과 군인들에 대한 죄책감으로 사실상 자살을 의도하고 사실상 마지막이나 다름없던 전투 도중 본인에 있어서는 자살 행위나 다름없는 전술 접근을 했다는 설이다. 이를 반론하는 측은 이순신의 평소 행보로 봤을 때 "항상 죽을 각오로 전투에 임한다."라는 취지의 내용을 오해한 것이라는 주장을 제기한다.
- 사망 정황에 대한 논란 : 위의 자살설과 반론은 그렇다 치더라도 사실 눈 먼 총에 맞았다는 것 자체도 석연치 않다는 점이 자주 제기된다. 바로 조총과 함선 간 거리의 문제인데, 조총이 그 시대에 뛰어난 무기라 해도 사정거리가 겨우 50m 남짓하지만 선박간의 거리가 이를 훨씬 넘었기에 과연 이순신을 저격하는 것이 가능했겠냐는 것이다. 한편 이를 반론하는 측은 당시 규격화라는게 없었던 조총들의 성능이 제각각이었던데다 이순신이 이전에 사천 해전에서 부상을 당했던 적이 있었던 것을 근거로, 말 그대로 "저격이 아닌" 눈 먼 총알에 맞았다는 것 자체는 신빙성이 없진 않다는 의견을 제시한다.
- 임진왜란 당시 궁궐의 방화범: 선조수정실록에는 간민과 난민이 불태웠다는 기록이 있지만 선조실록에는 이러한 내용이 존재하지 않는다.[98]
- 원균의 최후 행적: 칠천량 해전 당시 전사했다고 전해지나 이는 선전관 김식의 장계를 통해 알려진 사실일 뿐, 그가 전사하지 않고 살아서 전장을 빠져나왔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는 기록들이 남아 있다.
- 엉규이 무덤 : 목 없는 장군묘라고도 불리는 경남 통영에 위치한 무덤으로 현재는 흔적만 겨우 남은 수준이지만 각종 역사적 자료와 기록을 통해 이 무덤에 묻혀있는 유골이 원균일 가능성이 높다는 의견이 제기되고 있다. 그러나 원주 원씨 대종회와 학계 간의 여러가지 갈등으로 인해 발굴 조사 및 DNA 감식이 진행되지 않으면서 현재까지도 해당 묘 주인의 신원이 파악되지 않고 있다.[99][100]
- 탄금대 전투: 왜 신립 장군이 일본군을 방어하는 데 최적인 지형인 문경새재를 두고 굳이 탄금대에서 전투를 벌였는지 의견이 분분하다.
- 장영실과 관련된 미스터리
- 장영실의 몰락 원인과 최후: 황희나 조말생은 뇌물이나 비리로 사형당할 뻔 했다가 겨우 사면 받았는데에 비해, 조선시대의 과학에 큰 업적을 남겼던 장영실은 가마 사고의 문제로 곤장 80대형을 받았다. 이런 세종대왕의 다른 모습 때문에 많은 학자들은 의구심을 들게 했다. 이렇게 과학에 대한 호기심때문에 그를 중용하고도, 왜 사소한 실수 하나로 그를 완전히 실각시켰는지에 대해 확실한 설명을 하는 학설은 없으며, 실각 이후에 장영실이 어떤 최후를 맞았는지도 알려지지 않았다[101]. 다만 온수역 항목을 보면 알 수 있듯 건강이 좋지 않던 세종은 온천 같이 자기 건강과 관련된 사안에서는 여느 전제군주와 다를 바 없는 모습을 보였으므로 장영실의 몰락도 아예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은 아니다. 장영실이 만든 문제의 가마는 세종이 온천여행을 할 때 타고 다니려고 만든 가마였는데 만약 그게 실제로 사용되다 부서져버렸다면 탑승자(세종)가 크게 다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더구나 세종실록에 의하면 장영실 본인이 '이 가마는 부서지지 않을 겁니다'라고 호언장담했으니 왕에게 거짓말을 했다는 죄도 추가되고... 그나마 세종이 성품이 어진 임금이었으니 장영실이 한 번의 잘못으로 비참한 말년을 보냈을 가능성이 낮은 것이다. 만일 장영실이 모셨던 임금이 인조나 연산군 같은 영 좋지 못한 성격의 소유자였더라면...
- 장영실의 출생 배경: 장영실이 본래 동래부 소속의 관노였던 사실은 매우 유명하지만, 그가 노비의 삶을 살게 된 원인은 수상쩍은 부분이 많다. 우선 그의 본관인 아산 장씨의 족보에는 그의 이름은 기록되어 있으나, 그의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이름은 등재되어 있지않다. 특히 중간에 면천되었다고는 하나, 당시까지는 일부 상류층들만 족보를 따지던 조선 초기에 노비가 본관이 있었다는 점, 아산 장씨 문중들이 족보에 이런저런 윤색을 가했을 가능성을 고려해도[102] 장영실의 증조부는 족보에도 기록되어 있으며 당대의 역사 기록으로도 교차검증되는 사람이라서, 그가 본래는 꽤 이름있는 집안 출신이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때문에 장영실이 노비로 태어나게 만들었던, 집안의 몰락의 원인에 대해서 상당한 논란이 일고 있다. 이에 대해 아산 장씨 가계가 원나라 말기의 혼란을 피해 한반도로 이주한 중국인 가문이라서 외국 출신이라는 이유로 조선의 조정이 이들을 배척하고 노비로 강등했다는 설이나[103], 장영실의 조부가 고려의 충신이어서 조선 왕조에 대한 충성을 거부하다가 노비로 굴러떨어졌다는 설이 있지만[104], 여말선초의 혼란으로 인해 소실된 기록이 많아서 자세한 사정이 알려져 있지 않다.
- 정약용의 가톨릭 원복 여부: 일반적으로 주류 역사학계에서는 1791년에 있었던 조선 조정의 가톨릭 박해 사건인 신해옥사 이후로, 정약용은 다른 형제들과는 다르게 가톨릭 신앙을 버렸다는 것을 정설로 여긴다. 하지만 마지막까지 그 상태로 살다가 죽었는지, 말년에 다시금 가톨릭으로 원복했는지는 불분명하다. 프랑스의 가톨릭 신부인 샤를 달레는 저서인 《조선천주교회사》에서 정약용이 말년에 배교한 사실을 후회하고 자주 몸에 고통을 가하는 보속 행위를 하였고, 사망 직전에 중국인 신부인 유방제 파치피코에게서 병자성사를 받았다고 기록하였다. 문제는 이 기록의 신빙성 여부인데, 달레 신부가 이 책을 집필할 때 참고하였다는 《조선복음전래사》의 실존 여부가 불분명하여 신빙성을 입증하기가 어려운 상황이다. 정약용 본인이 스스로 남긴 묘지명에는 가톨릭과 관련된 그 어떤 언급도 없으나, 일제 강점기에 공개된 그의 미출간된 글에서는 선술한 묘지명과 함께 1801년에 있었던 신유박해 당시에 희생된 친지들의 묘지명이 기록되어있어서, 달레 신부가 언급한 책의 정체가 이 묘지명이라는 설도 제안되어 있다. 하지만, 1836년에 사망했던 것과 그 이전까지 목민심서 등의 여러 실학 관련 저서들을 집필한 것을 제외하면, 그의 말년에 대해 알 수 있는 기록이 전무하여, 설령 정말로 가톨릭으로 원복했더라도 이를 입증할 방법이 별로 없다. 가톨릭으로의 원복 여부는 정약용의 사상이 무엇을 근거로 성립된 것인지에 대해 기존과 전혀 다른 설명을 할 수 있는 가능성으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게 여겨진다[105].
- 정여립 모반 사건: 날조라는 주장에 무게가 실린다. 그러나 모반인지 모함인지를 입증할 증거들이 3년 후에 일어난 미증유의 국난 이후 소실되는 바람에 남아 있지 않아 아직도 진실은 저 너머에 있다. 개수 실록에서도 설명을 잘 못해주는 것은 마찬가지. 정여립 문서도 참고하기 바람.
- 중종 시기의 괴수 출현 소동: 아래의 제보당의 괴수 사건과 더불어 역사학자들과 동물학자들을 당혹스럽게 하는 역사적 기록이며, 현재는 중종반정 직후 불안한 정세를 반영하고 있는 집단 히스테리 내지는 실존하는 맹수인 호랑이나 곰, 표범 따위를 착각한 것이 아닌가 하고 있다. 영화 물괴의 주요 소재로도 쓰일 정도로 저명한 사건이지만, 이 사건의 실체를 설명할 수 있는 유력한 학설은 아직 없는 상황이다.
- 함흥차사: 아버지 태조가 아들 태종이 미워서 함흥에 갔으며, 이에 태종은 아버지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차사를 함흥에 보냈으나 태조가 그들을 죽였기 때문에 돌아오지 못했다는 이야기가 있으나 아들 태종이 태조를 지지하는 인사들이 태조와 접촉하지 못 하도록 그들을 죽였다는 이야기도 있다.
- 홍길동의 최후: 체포된 이후의 행적이 불분명하다. 체포된 이후에 탈옥해 오키나와로 가 활약했다는 설이 있으며, 류큐 섬의 호족인 오야케아카하치(オヤケアカハチ)와 홍길동이 동일 인물이라는 주장도 있었다. 다만, '홍길동=오야케아카하치' 설은 이미 주류 학계에서 부정되었다.
- 훈민정음 상주본의 행방: 현재 훈민정음 상주본을 배익기가 소장하고 있으나, 그가 훈민정음 상주본 행방에 대해 밝히지 않는 이상 알 수 없다. 만일 그가 죽으면 진짜 미스터리로 남겨질지 모른다.
8.1. 구한말
- 안중근과 관련된 미스터리
- 김두성: 안중근이 자신의 상관으로 밝힌 인물로 안중근뿐만 아니라 독립운동사 연구에서 정말 중요한 인물이다. 문제는 실존했는지조차 불분명하다는 점이다. 일단은 김두성이 실존 인물이라면, 이 이름이 본명일 가능성은 거의 없다는 게 중론이다. 당시에 독립운동가들이 정체를 숨기기 위해 일부러 가명을 쓴 것도 있고, 역사학계의 숱한 조사에도 불구하고 김두성이라는 이름의 독립운동가는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당시에는 독립운동가들이 가명을 쓰는 이들이 많았는데, 백범 김구 선생만 해도 백정선이라는 이름으로 활약했고, 유명한 공산주의 계열 독립운동가인 김산의 이름도 가명이었다. 허구의 인물이라는 주장에선 안중근이 일제를 속이기 위해 가공의 인물을 만들어냈다는 해석이 있으나 이 역시 확실치 않다.
- 안중근 유해 행방: 만주와 연해주를 제외한 다른 지역의 독립운동가들의 유해는 행방이 밝혀져 국내로 들어와 안장되고 있지만 안중근의 경우 몇몇 만주와 연해주의 독립운동가와 마찬가지로 사형 집행 후 유해가 어디에 묻혀 있는지 알 수 없다.
- 제국익문사: 대한제국 시기에 고종의 주도로 설립된 관영 언론사이자, 첩보기관으로 고종의 밀서를 외국 정부에 전달하는 역할을 하면서 한국의 독립운동에 막대한 영향을 준 단체다. 문제는 그만큼 독립운동사를 연구할 때 매우 중요한 단체임에도 불구하고 당대에도 매우 철저하게 비밀을 유지하며 활동했던지라, 여기에 속해있던 인물들이 누가 있었는지 전혀 밝혀져 있지 않다는 점이다.
- 헤이그 특사와 관련된 미스터리
- 이준의 사인(死因): 황성신문의 장지연이 이준의 사인에 대해 할복 자살설을 제기했으며, 한편 뉴욕 타임즈에서는 자살설을 제기했다. 한편 현지의 한 언론은 이준이 뺨 종기를 앓았으며, 종기 처치 도중 상태가 악화되어 사망한 것으로 보도했다고 한다는데 출처는 확실하지 않다. 또 하나의 유력한 설은 감기로 인한 사망이다. 이준을 포함한 특사 3인이 회의장 앞에서 입장을 요구할 때 헤이그에 큰 비가 내렸는데, 이때 이준이 고뿔이 걸려 건강이 악화되어 사망했다는 것. 이런 설들을 종합한다면 이준이 감기에 걸린 가운데 몸을 돌보지 않고 외교전을 펼쳤고 면역력이 약해진 가운데 세균에 감염되어 단독에 걸렸고 사망했을 것이란 추정이 가능할 수도 있다. 또 다른 설은 이준이 헐버트의 미국외교의 성과와 이위종의 복귀를 기다리다가 병세가 악화되었을 거란 추측을 하고 있다. 또, 일각에서는 일본 독살설이 제기되고 있으나 정확한 사인을 밝히지 못 하고 있다.
- 이위종의 말년 행적과 최후: 헤이그 특사 사건의 주인공 3명 중 한 명이다.[106] 헤이그 사건 이후에 러시아로 망명하여 러시아 귀족 여성과 혼인했다는 것과 소련 건국 이후에 소련 공산당에 가입하여 소련 육군의 장교가 되었다는 것이 알려져 있다. 1924년에 이때까지 자신의 행적을 자서전 형식으로 작성해 당에 올린 이후의 행적이 일절 알려져 있지 않다.
9. 일제강점기 (1910-1945)
- 고종의 사인(死因): 1919년 식혜를 마시고 잠에 들었다 일어나서 차를 마신 후 사망하였다. 당시부터 의심스러운 정황이 있어서 독살설이 꽤 설득력이 있었으며, 이에 따라서 일본 개입설이 제기되었다. 이는 3.1 운동의 원인이 되었으나 실제로 독살당한건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으며, 일본 개입설과 관련된 증거는 나오지 않았다. 일단, 유사역사학에 근거한 단순 음모론에 지나지 않는 다른 왕들에 대한 암살 의혹과는 달리[107], 고종에 대한 독살 의혹은 주류 학계부터가 일본이 저질렀을 가능성이 있다고 의심하고 있다.[108]
- 김익상의 최후: 1923년에 징역 20년을 선고받은 이후의 행적이 매우 불분명하다. 그의 사망 연대도 책에 따라 1925년이라고 하기도 하고 1943년이라 하기도 한다.
- 김좌진 암살의 전말: 김좌진이 암살을 당한 원인에 대해서 명확한 결론이 나지않고 있다. 이 시기에 그가 속해있던 신민부가 독립운동에 쓰일 자금 마련을 위해 현지의 농민들을 착취한 것 때문에 민심을 많이 잃었고, 특히 김좌진 본인도 당시 만주로 이주한 한국인 이주민들에게 '폭군'이라는 멸칭으로 불릴 만큼, 증오도 많이 받았던 사실이 밝혀지면서, 이주민들이 그의 암살을 사주했을 가능성이 제기된 바 있다. 하지만, 직접 김좌진의 암살을 사주했던 김봉환이 현지인들의 의뢰를 받았던 정황이 명확히 드러나지 않으면서, 이것이 그가 살해당한 근본적인 원인인지는 불분명하다. 오히려 김봉환은 주민들의 의견과는 무관하게, 아나키스트였던 김좌진이 공산주의 계열과 불화를 일으킨 것때문에 암살을 사주한 것으로 의심되는 정황이 있는데다, 한국의 역사학계에서 그가 일본에게 포섭되었을 가능성을 제기하면서 논란이 가중되는 상황이다.[109] 하지만, 공개된 일본 측과 중국 측의 기밀문서에서는 김봉환의 이름이 전혀 언급되지 않는데다, 이 문서들말고는 당시 상황을 알 수 있는 사료도 부족한 편이라서, 무엇이 원인이라고 단정하기가 어렵다.
- 서울역 구 역사(1925~2003)를 설계한 인물: 우리가 서울역 하면 흔히 떠오르는 2003년까지 사용된 네오 르네상스 양식의 구 역사는[110] 현재에도 회자되고 있을 정도로 유명하지만, 막상 이 역사를 설계한 사람이 누구인지 구체적으로 밝혀지지 않았다. 당대에는 츠카모토 야스시(塚本靖)라는 건축가가 설계자라고 알려졌으나 이는 그가 단순히 서울역 건설에 참여했던 사람이었기에 서울역 설계입면도에 그의 이름이 적혀있었던 것일 뿐, 실질적으로 구 서울역 건축을 "총괄한" 건축가가 누구인지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 손기정의 참나무: 손기정이 우승 기념으로 받은 것은 분명 유럽참나무이다. 하지만 손기정 공원에 남아있는 것은 북미산 대왕참나무이다. 오랫동안 귀국하는 비행기를 타면서 바뀌었던지, 아니면 유럽참나무가 기후조건이 맞지 않아 일찍 죽어서 바꾸었던지 지금에 와서는 알 수 없는 상황이다.
- 윤동주, 송몽규 생체실험 피해 논란: 이른바 '마루타'로 불리는 생체실험의 피해자들 중에 윤동주와 그 사촌 형인 송몽규가 있다는 주장은 예전부터 끊임없이 제기되어 왔지만, 거의 음모론에 가까운 수준이어서 상당한 기간동안 학계에서는 무시되었다. 하지만, 당시의 기록에서 생체실험의 정황이라고 추정되는 서술이 발견되면서, 주류 학계에서 실제로 이 둘이 생체실험의 희생자였는지에 대한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 윤심덕, 김우진의 자살: 대중적으로는 김우진이 당대 조선 최고의 가수인 윤심덕과 불륜을 저질렀고, 이로 인한 세간의 비난을 견디지 못해 동반자살했다는 이야기가 널리 알려져있다. 허나 실제로 두 사람이 불륜 관계였다는 근거는 전무하며, 시인이자 김우진의 친구였던 조명희는 두 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세간의 풍문일 뿐이라고 일축하기도 했다. 때문에 두 사람이 불륜 관계였다는 설은 거의 부정되고 있다. 윤심덕과 김우진이 동반자살했다는 설도 사실이 아닌데, 우연히 김우진이 자살한 날에 윤심덕이 자살로 추정되는 실종을 당한 것이 와전되었을 뿐이다[111]. 물론 윤심덕은 여성의 자유연애에 대해 극도로 부정적이었던 일제 강점기 조선 사회의 분위기때문에, 자신과 관련하여 돌아다니는 추문을 비관하여 자살했다고 볼 여지가 많지만, 김우진은 당대에 이미 이혼이라는 제도도 있었을 뿐더러 아들 김방한[112]을 무척 아꼈다는 증언이 많아서, 그가 자살을 택할 이유가 없었다. 때문에 김우진의 자살 동기와 더불어, 윤심덕이 실종된 후에 어디서 자살을 했는지는 현재까지도 의문에 싸여있다.
- 의열단의 정체불명의 조력자: 김원봉을 포함한 의열단 소속 독립운동가들의 증언에 의하면, 이들이 의거에 사용하기 위한 폭탄 등의 무기를 지원해준 지속적으로 사람이 있었다고 한다. 물론, 당시에 최재형과 신용호[113]같이 독립운동 단체를 지원해준 민간 사업가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의열단 단원들이 언급하는 이 조력자는 한국인이 아닌 헝가리인이며, 때문에 출신 국적에서 따온 가명인 마자르[114]라고 불렀다고 한다. 하지만, 이 사람의 정체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밝혀진 것이 없다. 사실 앞서 헝가리인이라고 한 것도 조력자 본인의 주장일 뿐이며, 실제 그의 국적이 어디인지는 의열단 단원들도 모른다고 한다. 광복 이후에 어떻게 되었는지도 알려지지 않았다.
- 일제 강점기 조직폭력배 두목들 대다수의 생애 : 김두한이나 하야시가 공식 기록에서 확인되는 행적이 많아, 일제 강점기 당시와 광복 이후에도 생애가 잘 알려져 있는 것과는 다르게, 다른 경성에서 활동한 유명 조폭의 두목은 전반적인 생애가 대부분 베일에 싸여 있다. 개인마다 다르긴 하지만 대개 조폭으로서 활동하던 시기의 행적만 구전으로 전해지고, 조폭 활동 이전이나 해산이나 세력을 잃은 이후의 행적 및 사망 정황은 아예 없다시피 하거나 소문과 추측만 무성할 뿐, 명확하게 밝혀진 것이 없다시피하다.
- 장지연의 말년 행적: 을사조약 체결 당시에 시일야방성대곡을 발표하여 항일 의식을 촉구했던 개화 사상가이자 독립운동가였는데, 1914년에 갑자기 조선총독부 산하의 어용 신문사인 매일신보에 700여 편에 달하는 사설과 한시를 기고하면서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변절했다[116]. 열성적으로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던 그가 갑자기 변절한 경위도 수상쩍지만, 더욱 논란이 되는 부분은 변절한 이후에 일본 외무성이 작성했던 기밀 서류에서 장지연이 다른 독립운동가인 김경천의 요청을 받고 시베리아에서 의병을 지휘했다는 내용이 실려있는 것이다.기사[117] 이 부분은 동 시기에 그가 자신의 변절에 대한 죄책감으로 인한 알코올 의존증에 시달리다가 사망했다는 지인들의 증언과 반대되는 기록이라서 장지연의 말년 행적에 대한 맹렬한 논란을 일으키고 있다. 장지연의 친일행적이 드러나면서 장지연에게 수여된 건국훈장이 취소되고, 이로 인해 장지연의 유족이 국가보훈처를 상대로 소송을 걸어 대법원까지 갔으나 패소했다(2013두2518). 이유는 장지연 항목 참조.
- 지석영의 말년 행적: 한국 역사상 종두법의 대중화를 최초로 성공시켰던 인물인 지석영은 1909년에 이토 히로부미의 사망과 관련하여 추도사를 읽은 바 있어서 친일반민족행위자 여부에 대한 논란이 일고 있다. 불과 4년 전에는 을사조약의 체결에 충격을 받아서 자결한 민영환의 추도사를 읽은 것과 대비되는 행적인데, 현대 주류 역사학계가 지석영을 자신있게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분류하지 못하는 데는 그 직후에 그가 이재명[118]의 이완용 암살 기도에 연루된 혐의로 체포되어 조사를 받은 기록이 있다는 점이 크게 작용한다. 이렇게 모순되어 보이는 행적을 보여준 이후로는, 속세와 연을 끊고 은둔 생활을 하면서 대외 활동을 전혀 하지 않았으므로, 이 시기에 대한 행적에 대해 알 수 있는 사료가 거의 없다. 이 시기에 대한 사료의 대부분은 그의 손자인 지흥창[119]과 형인 지운영의 증언인데, 이 시기에는 지운영도 동생처럼 은둔 생활을 하던 중이었고[120], 지흥창은 아직 어린이였을 때라서 이들의 증언만으로는 불분명한 부분이 많다.
- 황옥: 영화 밀정의 등장인물인 이정출[121]의 모델이 된 사람이다. 현재까지도 주류 역사학계 내에서 친일반민족행위자인지 독립운동가인지에 대한 논란을 일으키고 있는 인물인데, 그와 함께 의열단에서 활동했던 약산 김원봉이 그를 끝까지 의열단의 일원으로 생각했다는 점에서 본래 친일 성향의 인물로서 의열단에 잠입한 스파이였다가 의열단 단장이던 김원봉에게 감화되어 진짜로 독립운동가로 돌변한 인물이라는 설이 유력하다.[122]
10. 해방 이후
10.1. 미군정
- 우키시마호 사건 : 일본에서 고의로 격침시켰다는 주장과 미군이 부설했던 기뢰에 접촉해서 침몰했다는 주장이 대립하고 있다.
10.2. 제1공화국
- 백범 김구 암살 사건의 전말: 위의 김좌진 암살 사건과 비슷한 상황인데, 현재 한국의 역사학계는 암살범인 안두희가 단독으로 범행을 벌이지는 않았을 것이라 보고 이의 배후 세력을 밝혀내는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당시 이승만이 이상하리만치 처리에 급급했다는 점과 안두희의 살해 이후의 행적과 당시 군부들의 조치들을 보면 군부가 적어도 최소한 사전에 알고 묵인을 했어야 성립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이승만 정부와 군부가 이 사건과 연관이 있을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으나, 증거가 없는데다가 당사자인 안두희도 1996년에 피살당함으로서[123] 이 사건이 단독범인지 계획된 암살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으로 남게 되었다. 다만 향후 2001년에 미국의 기밀 문서 공개로 안두희가 미국이 보낸 정보요원이었다는 사실은 밝혀졌다.
10.2.1. 6.25 전쟁 (1950-1953)
- 한강 인도교 폭파의 지시자 : 6.25 전쟁 당시 한국 국군이 한강의 인도교를 폭파해 버린 사건으로 귀띔으로 들어봤다면 흔히 이승만이나 군부의 실책으로 알려진 사건이다.[124] 당시 군사재판에서는 채병덕 참모총장의 지시로 알려져 있었으나 그때에도 반론이 쏟아져 나왔었고 후에 폭파 당시에 채병덕이 의식불명 상태였던 것으로 밝혀져 폐기된 가설이 되었다. 그런데 이후 미 군사고문단에 자료에서 지시자가 김백일 대령이 장경근 차관의 지시로 한 짓이라는 어느정도 생뚱맞은 정보가 나왔다는 점을 근거로[125] 계획 자체는 채병덕과 (사실상) 미군의 보조가 있었으며 폭파시점을 이렇다 하게 정해놓지는 않았다는 것이 밝혀졌다. 즉 계획자와는 별개로 지시자가 따로 존재했다는 것인데, 각종 기록을 찾아봐도 실제로 폭파를 지시했던 사람이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으면서 현재까지도 이 6.25 전쟁의 대표적인 폭파명령을 내린 사람이 누군지는 결론 내리지는 못했지만[126] 지금까지 발견된 각종 기록을 종합해 봤을 때 신성모나 장경근이 단독으로 지시했거나 서로 합의 내지 묵인으로 내린 결정이라는 설이 그나마 가장 신빙성 있게 제시되고 있다. 여담으로 순전히 오해나 오판을 했거나 조사의 부실로 생긴 오해(?)인 6.25 전쟁 10대 미스터리 중 유일하게 진짜로 미스터리인 사례이다.
- 허가이의 최후: 북한으로 귀국한 고려인들이 주축이 된 조선로동당 내 세력인 소련파의 수장이던 허가이는 6.25 전쟁의 종전을 앞둔 1953년에 평양 시내의 방공호 안에서 의문의 죽음을 맞았는데, 통상적으로는 권총으로 자살했다고 알려져있다. 하지만 이에 대한 근거는 없고, 오히려 그 이후로 소련으로 망명한 허가이의 딸은 아버지가 김일성이 보낸 자객에게 암살되었음을 호소했고, 반대로 허가이 스스로가 정치적으로 궁지에 몰린 탓에 알려진대로 자살을 했을 것이란 설이 있으나, 단편적인 증언 이외에는 그의 죽음의 과정을 알 수 있는 사료가 전혀 없어서 허가이의 최후에 대해 역사학자들 중 그 누구도 자신있는 설명을 하지못하고 있다.
- 북한군 서울 3일 지체 : 북한군은 남침 3일만에 서울을 점령했지만, 이후 3일 동안 공세를 펼치지 않고 서울에서 3일간 지체했다. 이 때문에 한국군은 병력을 수습하고 한강 방어선을 구축할 시간을 벌 수 있었다. 북한군이 3일간 지체한 이유로는 춘천-홍천 전투로 인한 중동부 전선의 지지부진한 전황과 도하 장비 및 역량의 부족, 미처 피난하지 못한 국회의원 등 사회 지도층 인사들을 확보하는 과정에서 시간을 지체했다는 설 등이 있으나 확실한 정론은 아직 없다. 어쩌면 정론이란 것이 없고 모든 상황이 복합적으로 얽힌 것일 수도 있다.
한국 전쟁 10대 미스테리: 이형근이 자신의 회고록인 '군번 1번의 외길'에서 주장한 한국군에서 발생한 석연치 않은 사건 10개를 말한다. 한 때는 이 또한 원인이 밝혀지지 않은 미스터리로 꼽혔으나, 후대 학자들이 연구한 결과 대부분 한국 정부 및 한국군의 미숙한 역량과 불운이 겹쳤거나 이형근이 사실 관계 자체를 잘못 파악한 것으로 밝혀져서 의혹은 그다지 남아있지 않다.
10.3. 제4공화국
제4공화국은 유신 체제라는 박정희의 기나긴 독재 시기였던데다, 박정희 대통령 사후에 제5공화국이 들어서면서 금기의 사안으로 여겨졌고, 친박 등 해당 정권 시기의 부역자들과 그 후계 세력으로 구성된 다양한 정치 세력이 남아 있어서, 대부분이 끝내 진상이 밝혀지지 않은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김대중 납치 사건: 납치 자체는 당시 박정희 정권에서 계획한 것이 확실하지만, 이게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의 독단적인 행동인지 아니면 박정희의 지시가 있었는지 불확실하다. 또한 김대중이 생존할 수 있던 요인에는 미국 측에서 정보를 입수하고 한국 정부에 압박을 가한 것이 작용했는데, 이게 어디서 어떻게 정보를 입수했는지에 대해선 내용이 불확실하다. 한 예로 김대중을 납치해서 태운 선박인 용금호를 어느 항공기가 추적했다고 하는데, 이 항공기가 어디 소속인지도 추측이 난무한다.
- 전태일의 분신 사건: 전태일의 몸에 불을 붙인 김개남(가명)[127]이 누구인지 아직도 밝혀진 것이 없다. 그나마 알려진 정보는 전태일 평전에서는 그가 전태일과 친했으며 함께 노동 인권 운동을 한 자라는 묘사가 있다.[128] 사건의 여파를 생각하면 당시 경찰이나 정보 기관 등에서 찾지 않았을 리가 없는데, 어째 언급되는 경우가 없다.[129] 정황상 주위 사람들은 누구인지 알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지만, 결과적으로 자살을 도와준 것이 되기에 전태일의 가족들과 친구들이 끝내 그의 정체를 밝히지 않아 미스터리로 남았다.[130]
- 10.26 사건: 김재규가 박정희와 차지철을 총살한 사건이다. 하지만 김재규가 정확히 무슨 이유로 박정희를 죽인 원인은 밝혀지지 않고 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유력한 2가지의 원인로 나뉠 수 있는데, 차지철과 김재규 간의 충성 및 2인자 권력 경쟁설, 부마항쟁설로 나뉠 수 있으나, 원인이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또, 김재규가 박정희와 차지철을 암살하고 중앙정보부가 아닌 육군본부로 갔는데, 마찬가지로 왜 그 쪽으로 갔는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131]한편 미국 개입설과 북한 개입설[132]도 제기되고 있지만 아직 뚜렷한 증거는 나오지 않았다. 그러다가 2016년 하반기 때에 최순실 게이트가 터지자 최태민과 관련된 갈등의 원인으로 암살했다는 주장이 가장 유력하게 떠오르고 있는 중이다.
- 김형욱의 실종: 한때 박정희 정권 하에서 중앙정보부장을 지낼 정도로 그의 오른팔 역할을 했던 김형욱은, 이후에 이후락과의 대립으로 인해 모든 권력을 잃고 프랑스로 망명했는데, 그 이후에 영영 실종되어버리고 1979년에 대한민국 법원에 의해 공식적으로 사망처리되었다. 일단 그의 나이로 보아서는 천수를 누렸다고 해도 이미 죽었을 가능성이 매우 크며, 사실 천수를 누리지 못하고 죽었을 가능성이 더 큰데 프랑스 파리 근교의 양계장에서 분쇄기에 갈려 죽어 닭모이가 되었다는 야사가 있다. 공식적으로 김형욱의 죽음이 확인된 것은 아니지만, 만일 누군가에게 죽임을 당한 게 사실이라면, 그 범인은 박정희의 지령을 받고 파견된 마피아들이나 대한민국의 첩보원들일 가능성이 높지만, 그들이 그의 실종에 관여했다는 증거는 아직 나오지 않았다.[133]
- 박정희 저격 미수 사건: 사람들은 문세광이 박정희를 저격하는 과정에서 육영수가 저격당했다고 알고 있다. 하지만 발견된 탄두가 없다는 점, 그의 허벅지가 멀쩡한 점, 총알 하나가 권총에 남아 있다는 점, 그가 탔던 차량이 위장 번호판으로 달려 있었다는 점을 들어 그가 범인이 아니라는 의혹이 나오고 있다. 이에 따라, 박정희의 경호원들 중 하나가 문세광에게 반격하려다가 실수로 육영수를 쏴버렸다는 설이 제기되기도 하지만[134], 선술했듯이 발견된 탄두가 없어서 확실하게 입증된 설은 아니다.
- 실미도 사건과 관련된 미스터리
- 684 부대의 구성 인원: 684 부대는 일종의 북파공작원 부대로서, 부대원들 각각은 공식적으로 장교후보생으로 분류되어 모집되었다. 실미도 사건을 다룬 영화 실미도때문에 부대원들이 사형수 출신이었다고 잘못 아는 사람이 많은데, 그건 대한민국 육군 소속의 자매 부대인 선갑도 부대의 이야기고[135], 실제로는 일반인들 중에서 모집이 되었다. 문제는 이들 부대원들의 신상이 거의 밝혀지지않았다는 점이다. 이는 실미도 사건이 발발한 것때문에 군사기밀로 지정되어있던 이들의 존재를 숨기는 데 급급했던 박정희 정권이, 이들에 대한 정보를 모조리 말소했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다. 더욱 답답한 부분은, 이미 모집 직후에 이들의 주민등록이 완전히 말소되었다는 것과, 실미도 사건 직후 체포된 부대원들도 무장공비로 위장되어 약식 재판을 받은 후에 처형되어서, 이들의 정체를 알 방도가 없어졌다는 것이다[136]. 아래에서 언급하는 백동호의 증언 때문에, 극소수나마 진짜로 범죄자 출신이 모집되었을 가능성이 제기되기도 한다.
- 생존자의 존재 여부: 실미도 사건이 일어난 직후에 기간병과 훈련을 담당했던 부사관들 중 생존한 이들이 증언한 것을 토대로 참여정부가 조사한 결과로는, 부대원들 중에서는 생존자가 없었다고 발표된 바 있다. 하지만 정황 상, 극소수의 인원이 살아서 현장을 빠져나갔을 가능성은 꾸준히 제기되고 있으며, 아직까지는 정부의 발표대로 생존자가 전혀 없었을 가능성에 대한 근거는 없는 상황이다. 소설가인 백동호는 이 생존자들 중 한 명을 실제로 만났다고 주장하는데, 자신의 감옥 시절의 동기이기도 했고, 현재 그는 미국으로 이민한 뒤에 소식이 끊겼다고 얘기한 바 있다. 하지만, 주류 역사학계와 정부 관계자의 조사 결과로는 684 부대는 일반인들만 부대원으로 모집한 것으로 알려져있는데, 백동호는 문제의 생존 부대원이 범죄자 출신이라고 얘기했으므로, 그의 주장이 얼마나 신빙성있는 이야기인지는 알기가 어렵다. 일단, 실미도 사건을 다룬 영화가 개봉했을 당시에 684 부대 창설 멤버 중에서는 유일하게 살아있던 김방일 소대장[137]은 장병들의 생존 가능성을 부정하고 전원이 사망했다고 밝힌 바 있다. 김 소대장은 사건 당시에도 장병들에게 큰 존경을 받던 사람이었고[138], 사망 직전까지 부대원들의 명예 회복에 평생을 바쳤던 사람인데다, 무엇보다도 직접 부대원의 훈련을 담당하면서 이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가까이서 직접 봤던 사람이라서, 그의 주장이 백동호의 것보다 훨씬 신빙성이 있다.
- 최태민의 실체: 제4공화국 체제가 종결되고 제6공화국[139] 시기에 이르러서 전대미문의 국정농단 사태가 벌어진 배경에는 최태민이라는 인물이 크게 관여하고 있다. 제4공화국 체제를 이끌던 박정희의 총애와 비호를 받으면서 그의 집안의 일에 깊숙히 개입을 했으며, 이를 통해 박정희의 딸인 박근혜를 자신의 딸인 최순실과 의자매를 맺게 하는 식으로 박정희, 박근혜 부녀의 일거수일투족을 관리하면서 그들의 재산을 관리하는 수족으로 활약했었다는 사실은 매우 유명하다. 하지만, 정작 최태민은 수시로 자신의 이름을 개명하는 식으로 스스로의 정체를 숨겨왔고, 그가 언급한 출생 배경이나 생년월일, 생애 전반이 베일에 싸여있는 관계로, 이 사람의 실체를 제대로 파악하긴 어렵다. 우선 그의 아버지는 독립운동가였던 최윤성이라고 알려져있지만, 막상 최태민은 그의 호적에는 올라있지 않았고, 그 스스로 나이를 조작한 사실도 밝혀졌기 때문에, 출생 성분도 불분명하다. 한때는 일제강점기 시절에 순사로 활동했다는 주장도 스스로 제기한 바 있는데, 이 또한 사실 여부를 판단하기가 어렵다. 심지어 익히 알려진 최태민이란 이름도 본명이 아니라, 7번에 걸쳐 바꾼 가명들 중의 하나라서 무엇 하나 섣불리 믿을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이런 사실때문에, 주류 역사학계와 정치학계에서 제4공화국에 대해 연구하는데 굉장히 애로사항이 꽃피는 상황이다.
10.4. 제5공화국
- 5.18 민주화운동 발포 명령자: 5.18 민주화운동의 왜곡 공작도 있는데다가 국방부가 자료를 인멸해서 자세히 알려지지 않았다. 현재로서는 신군부의 우두머리인 전두환이 최종명령자일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있지만, 전두환을 비롯한 신군부 관계자들이 2023년, 세상을 떠난 상태이거나 생존해있어도 진상을 이야기하는 걸 꺼리고 있어서 규명하기가 어려운 상태이다.
- 5.18 민주화운동 신원불명 희생자 2인: 2000년대 초 망월동을 비롯한 광주시 각지에 산재해 있던 사상자 시신들을 국립 5.18 민주묘지(신묘역)으로 이장하면서 대대적으로 DNA대조 작업을 벌였음에도 불구하고 끝내 신원이 밝혀지지 않은 시신들이다. 본래는 5구였으나, 2020년대 들어 과학기술의 발달로 유해와 실종자 가족간의 DNA 대조가 이루어지면서 3명의 신원이 확인되었다.
묘역 번호 4-90故 신동남(1950.06.30~1980.05.20) - 건설노동자(미장이), 광주역 앞에서 제3공수특전여단에 의해 사살. 2021년 신원 확인.[140]- 묘역번호 4-92 - 신원 불명, 남성, 신장 167.8cm, 50대 추정. 프랑스제 엘리다 손목시계 착용.
묘역번호 4-93故 김재영(1963.03~1980.05.21) - 구두닦이, 화순군 출신으로 일찍히 금남로에서 손님들의 구두를 닦으며 생계를 유지하던 중 5월 21일 시위에 합류하였고, 이후 연락이 끊겨 실종자가 됐다. 2022년 5월 신원 확인.묘역번호 4-96故 양창근(1964.12.10~1980.5.22) - 광주 숭의실업고등학교 학생, 휴교령이 내려진 후 시위를 구경하러 갔다가 실종되었다. 故 김광복[141] 씨 유해와 뒤바뀌어 김광복 씨의 시신이 묘역에 매장되는 바람에 무연고 변사자로 분류되었다. 2022년 1월 신원 확인 후 이장.- 묘역번호 4-97 - 신원 불명, 4~5세 추정 남자[주의] 어린이. 정부미 포대에 담겨 남구 효덕동 야산에서 발견되었다. 유류품은 분홍색 상의, 회색 바지, 천원권 지폐 1장.
- 조준희 일병 월북 사건의 내막 : 흔히 한국 군대 내부의 대형 사건사고라고 언급되는 윤 일병 사건, 임 병장 사건, 강화도 해병대 동료 총격 사건보다 훨씬 더 심각한 사안인데도 1994년 이전의 군 비밀 보호 관련 법률로 인해 명확한 진상이 밝혀지지 않은 사건이다.[143][144] 그나마 이 사건이 일반 군내 사건으로 처리가 되었기에 전개 자체는 대강 밝혀지기는 했으나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은 부분이 많다. 후술할 내용 참조.
- 조준희의 범행 동기 : 조준희 일병이 총기 난사를 벌이고 월북을 한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뉠 수 있는데, 정말 종북이나 NLPDR, 주체사상파같은 자생 좌파였다는 설과 여타 다른 사건들 처럼 군 내의 병영부조리가 원인이었다는 설이다. 하지만 두 설다 반박점이 존재하는데, 전자의 경우는 이런 방식의 종북 및 간첩행위가 당시의 기점으로 봐도 특이했다는 것이며, 후자의 경우에는 난동을 부린 건 둘째치고 자살이나 자진 체포가 아닌 북한으로 도피한다는 것이 납득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월북 직전에 나온 휴가에서 잘 지내던 여자친구와 갑자기 헤어졌다는 점과 대남 방송에서 본인이 똥군기에 시달렸다고 말했다는 점, 그리고 5공 당시 운동권 학생들을 울며 겨자먹기 식으로 군에 넣었던 당시의 사회 상황을 통해 두 가지가 모두 원인이었다는 설이 유력하게 제기되고 있다. 즉, 그의 동기는 두 설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는 것이다.
- 조준희의 행방 : 조준희는 월북 후 대남방송을 통해 22사단에 자신의 존재를 알렸는데, 2000년대 초반까지 북한 방송에 출연했다는 것을 빼면 이렇다 할 소식이 없어서 이 사람의 행방이 여전히 미스터리로 남았다. 북한이 월북자를 대하는 특성상 선전에 다 써버린 뒤 몰래 처형 내지 수용소에 넣었다는 설이나, 조선로동당의 간부로 잘 살고 있다는 설도 있지만 추측에 지나지 않고 명확한 근거는 없는 상황이다.
- 최규하 대통령 하야: 최규하 전 대통령의 하야가 본인의 의사였는지, 신군부의 압력에 의해서였는지 밝혀지지 않았다. 또 그가 하야한 이후 자서전이나 회고록을 출간하지 않았기 때문에 알 수 없다.
- 1983년 전두환의 서남아-대양주 순방 계획에서 버마가 추가된 이유 : 당초 외무부에서 전두환의 서남아-대양주 순방 계획을 편성할 때, 버마는 방문 상대국으로 거론조차 되지 않았다가, 돌연 전두환의 지시로 첫 번째 방문국으로 결정되었다. 당시 외교가에서는 전두환의 이러한 결정에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고, 노신영 안기부장 및 이범석 외무부장관도 전두환의 버마 방문을 만류했으나, 전두환의 결정을 바꾸지 못했다. 결국 전두환의 서남아-대양주 순방은 아웅산 묘소 폭탄 테러가 일어나면서 중단되고 마는데, 전두환이 외교 당국자들의 만류를 무릅쓰고 버마 방문을 무리하게 추진한 이유로는 표면적으로는 당시 비동맹 국가들을 대상으로 한 남북간 외교전의 일환이었다는 시각도 있지만, 그 이면에는 퇴임 후 네 윈처럼 막후 실권자로 군림하기 위한 노하우를 벤치마킹하기 위해서라는 의혹이 있다. 한편 전두환의 버마 방문 결정이 전두환 독단으로 내린 건지 누군가의 건의로 이루어진 것인지도 불분명하다.
- 87년 6월 항쟁을 상징하는 사진 〈아! 나의 조국〉의 주인공 : 1987년 6월 26일 부산 남구 문현교차로에서 시위대와 전경대가 대치하던 도중 한 남성이 웃옷을 벗고 앞으로 뛰어나가 전경대를 향해 "(최루탄을) 쏘지 마라!"고 외치는 광경이 한국일보 고명진 기자의 카메라에 포착되었고, 그렇게 촬영된 사진 〈아! 나의 조국〉은 6월 항쟁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사진으로 남게 되는데, 이 사진의 주인공인 해당 남성의 신원이 현재까지도 밝혀지지 않았다. 각 언론사에서 6월 항쟁 20주년인 2007년과 30주년이 된 2017년에 해당 남성을 수소문지만 결국 아무 것도 알아내지 못했다.
10.5. 제6공화국
- 박근혜 5촌 살인사건: 2011년 당시 한나라당 소속 국회의원이던 박근혜[145]의 두 5촌 조카들이 북한산에서 살해된 채로 발견되었던 사건으로, 당시 경찰은 이 사건을 자살 사건으로 단정짓고 수사를 종결하였으나, 정황 상 살해 후 자살 사건으로 보기에는 의문점이 많아서 현재는 이 사건이 계획적인 살인사건이라고 보는 게 중론이다. 그리고 이 사건과 관련된 증인들 대부분이 살해당했을 뿐아니라, 이 사건을 조사하던 언론인인 김어준[146]과 주진우에게 신변에 위협이 가해지기도 했을 정도로[147], 미스터리한 부분이 많은 사건이었다. 결국 박근혜가 정치적으로 몰락한 2017년에 문재인 대통령에 의해 전면적인 재조사가 시작되어, 2024년에도 대한민국 경찰청에서 수사가 진행 중이다. 단순한 미제사건이라고 보기에는 2016년 당시의 대한민국 정치사에 매우 큰 영향을 준 사건들 중 하나이므로, 여기에도 기재한다.
- 상하이 한국 영사 섹스 스캔들 : 사건 자체는 2010년에 일어났지만 문제의 중국인 여성의 덩신밍(鄧新明)[148] 정체가 현재까지도 파악되지 않았다. 이 사람의 남편과 주변 사람들도 이 사람의 친정 집안에 대한 정보를 거의 몰랐으며 실제 본명과 나이조차 제대로 몰랐다고 한다.[149] 또 덩씨의 상하이 영사와의 관계는 둘째치고 평범한 중국인이 어떻게 한나라당 서울지역 당원협의회 연락망과 2007년 이명박 캠프 연락망을 보유하고 있던 건지도 의문이고 사건 이후에 진씨가 덩이 도청할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로 취재나 조사 관련 통화를 거절해 현재까지도 덩씨에 대한 명확한 정보가 밝혀지지 않고 있다.
- 세월호 침몰 관련 미스터리: 현대에 일어난 것이기에 어찌보면 미제 사건이라고도 볼 수 있지만, 2016년 이후의 한국 정치사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으므로 여기에 기술한다. 해당 문서에도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 세월호의 실소유주 논란: 황당하게도 세월호의 운영 및 관리에 국정원이 개입했다는 정황을 보여주는 자료가 발견되어서 한국 사회에 경악을 빠뜨린바가 있었다. 하지만 이쪽은 다른 점과는 달리 반박할 여지가 많아서[150] 확증은 못하는 상황이고 여전히 논란거리로 남아있다.
- 유병언 사망 관련 미스터리: 유병언은 이번 사고에 책임이 있든 없는 세월호의 진상을 조사하는데 핵심적인 인물인데, 검찰이 유병언을 영장발부 및 구속영장 신청을 발표한 뒤 그가 행방불명되어 수배를 내리고[151] 이후 10여일뒤 시신으로 발견되었는데, 훼손상태가 너무 심해서 그 시신이 유병언이라는 것이 국과수가 죽으라고 확인해서 겨우 도출해냈다는 점과 검경이 상식적으로 납득이 가지 않는 실책과 삽질을 연속으로 한 점 때문에 사망 원인을 명확하게 밝혀내지를 못했다. 일단 정황을 보면 검경의 수사망이 좁혀오자 유병언의 측근이나 비서들이 검경을 따돌리든지 시간을 끌든지 하기 위해 그에게 며칠간 버틸 식량을 주고 나름대로 행동했으나 고령인데다 건강이 안 좋았던 유병언이 그대로 객사했다는 설이 좀 잡히기는 했으나 문제는 앞서 말했듯이 사망원인을 모르기에 그가 정말 객사한건지 자살한 건지는 알 수 없다.
- 침몰 당시 박근혜 대통령의 행적: 이른바 세월호 7시간이라 불리는 의제로 해당 사건 중 정부에 대처에 관련된 진상을 가려낼 가장 중요한 사료임에도 정부의 침묵과 증거인멸로 인해 미제로 남았다. 당시에는 참모진들의 무능 등으로 보고가 늦었거나[152] 보고와는 별개로 박근혜가 아무런 대응도 하지 않았다는 의견이 피력했으나 현재는 참모진은 나름대로 대처 내지 보고를 했으나 박근혜가 그냥 자다가 보고를 못 받았다는 설도 제기되고 있다. 세월호 7시간 참조.
- 세월호의 좌초 원인: 현대에 찌라시 언론이나 SEWOLX 등이 얘기하는 북한 격침[153]이나 잠수함 설[154] 등의 외부 요인설은 전혀 신빙성 없는 가짜뉴스이지만, 실제로 세월호가 왜 저렇게 빠른 속도로 침몰하게 된 것인지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명확한 설명이 나오지 않았다. 일단 수사 기관인 중앙해양안전심판원에서는 일단 우리가 쉽게 접할 수 있는 외부적인 침몰 상황은 급변침이 전복 원인이라고는 했으나 왜 급변침을 할 수밖에 없었냐에 대해서는 확실한 해설을 못해서 다수의 음모론이 나오고 세월호 사건이 학계에서 시끄러워지는 원인이 되었다.
- 침몰 당시 평형수 탱크가 비워진 이유 : 세월호의 수평을 맞추기 위해 들어 있어야 하는 평형수 4번 탱크가 비어있었던 것으로 확인되었는데, 그 이유를 알 수 없다. 평형수는 고의로 빼지 않는 한 그대로 있어야 하는데 없었다는 점 때문에 화물의 양 때문에 뺀 것이 아니냐는 질문에 관련자는 평형수를 빼지 않아도 충분히 유지할 수 있는 정도이기 때문에 조정할 일은 없다고 한다.[155]
- 응암순환선 : 서울 지하철 6호선의 응암순환선은 그 특이한 노선 구조를 설계한 배경이 명확하게 밝혀져 있지 않은데 차량기지의 문제로 인해 복선으로 만들 수 없었다는 설과[156] 당시의 철도 환경 문제로 인한 은평구 등의 지역 간 유치 경쟁의 산물이라는 설이 제기되고 있다.[157]
10.6. 북한
10.6.1. 대남 도발 관련
- 2013년 북한의 전쟁 위협의 동기 : 2013년은 박근혜 정부 출범 시기로, 이 시기에 북한은 그 해 3월 정전협정 백지화 및 판문점 대화 단절 등을 시작으로 개성공단 폐쇄, 미사일 발사, 대화 거부, 전투근무태세 등 별의 별 도발을 다했던 시기로 유명했던 때였는데, 북한 정권이 왜 굳이 2013년에 이런 일을 벌인 것인지에 대해 합당한 해석이 나오지 않았다.[158] 다른 미스터리처럼 북한의 폐쇄성이 규명이 안되는 원인인데, 각종 전문가들은 상술할 2013년 당시 박근혜 정부 출범 시기와의 연관성과 김정은의 체제 강화설 또는 군부 강경파의 권력 장악설 등등이 제기하고 있지만, 추측만 무성할 뿐 이렇다 할 결론은 없는 실정이다.
- 연평도 포격전 : 아래의 천안함 피격 사건 이후 7개월 만에 일어난 일로 미스터리가 된 이유도 동일하다. 다만 아예 추측만 무성한 천안함 피격과는 달리 이쪽은 김정은의 후계 승계를 위한 일종의 무력시위라는 설이 가장 유력하게 제기되고 있다. 자세한 건 연평도 포격전 참조.
- 천안함 피격 사건 : 사건이 발생한지 12년이 더 지났지만 아직까지도 북한이 천안함을 기습 공격한 동기가 밝혀지지 않았다. 여러가지 추측이 나오고 있지만 북한이 이에 대해 입장을 밝히지 않으면서 현재도 이 이유는 미스터리이다. 자세한 건 해당 문서 참조.
10.6.2. 체제 관련
여기에는 북한 내부 상황이나 체제의 미스터리만 기재하며, 대남 도발이나 월북 등등의 미스터리는 따로 기재한다.- 고난의 행군: 북한을 완전한 최빈국으로 전락시켜버린 재앙으로 사실 이미 1980년대부터 식량난의 기미가 보였고 체제 문제도 자주 제기되어오기는 했지만, 그럭저럭 돌아가던 북한이 다른 때도 아니고 왜 하필 1995년에 갑자기 무너진 이유와 딱히 이렇다할 체제 변화가 없는 상황에서 어떻게 식량기근만으로 국가 체제가 반신불수가 될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남북측 다 이렇다 할 설명을 하지 못하고 있다. 다만 1994-1995년 사이가 김일성이 사망하고 김정일로 넘어가던 일종의 과도기였던 측면도 있어서 이에 관한 연관성이 종종 제기되고 있으나 김일성이 사망할 즈음에는 자기는 사실상 실권 없는 국가 상징으로 바뀌었고 이미 권력이 다 김정일로 넘어갔었다는 반론이 존재해서 아직까지 확실한 해석은 없다.
- 김일성 암살설: 김일성 가짜설이 반공 목적으로 유포된 것인데 반해,[159] 김일성 암살설은 북한의 폐쇄성으로 인해 진지하게 제기되고 있는 설이다. 일단 이것을 음모론으로 보더라도 김일성 사망 전후에 설명할 수 없는 의문점이 여럿 남아있으며[160] 생전에 김일성과 김정일의 충돌이 적어도 어느정도 있었다는 점과[161] 김정일이 김일성과 노선이 자세히 보면 미묘히 달랐다는 점에서[162] 김정일이 개방이나 남북관계 같은 정책과는 별개로 권력에 충분히 눈엣가시가 될 수 있는 김일성을 적어도 의료진 철수 등으로 간접 살해를 했을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 반디(작가): 실존하는 북한의 반체제 작가로 이 사람이 누구인지 본국인 북한도 모르니만큼 한국에서도 당연히 정체를 모른다.[163] 현재에도 생존 여부는 알 수 없어서 앞으로도 정체가 밝혀질 가능성은 없을 듯 하다.
- 백두혈통 및 김씨조선의 가계도 : 우리가 흔히 백두혈통이네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의 혈통이네 라고 알려진 정보는 사실 엄밀히 말하면 한국의 국정원을 비롯해 세계 각국의 정보기관이 북한의 행사 기념사진에 나오는 인물을 한 명 한 명 분석해 보는 등[164] 오랜 시간동안 조사해서 얻어낸 추론에 가깝다. 북한이 대내외적으로 선전하는 가계도는 조선시대의 족보 윤색처럼 조작되었을 가능성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외부에서 조사한 거니 만큼 불확실하거나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은 정보도 많은데 대표적으로 김씨 3대의 직계 자손 중에서도 후술할 김설송처럼 김정일의 차녀임에도 아직까지도 실존하는지조차 불분명한 인물도 있으며 현 지도자인 김정은의 자식들은 장녀 김주애를 제외하면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았고, 대남도발 관련해서 뉴스에 자주 언급되는 김정은의 동생 김정철과 김여정도 결혼해서 자식이 있다는 것 빼면 이렇다할 정보가 없다.[165] 그래서 현재에도 이에 관해서 학자들과 정보기관이 조사는 하고 있지만, 북한체제가 무너져서 가계 인물들의 생물학적 조사를 하지 않는 한 문헌 조사만으로는 명백하게 밝혀질 가능성은 낮다고 보고 있다. 아래의 내용은 그 중에서도 대표적인 의문점만 작성하였다.
- 김설송의 실존여부 : 북한 김정일의 차녀로 알려진 인물인데, 문제는 북한 행사 기념 단체사진 같은거라도 통해서 실존이라도 확인된 다른 자녀와는 달리 이 사람은 사진조차 존재하지 않아서 실존하는지 조차 불분명하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탈북자의 진술을 믿고 추측해봐야하는 처지인데 이마저도 탈북한 조선로동당 간부들에게 김씨 일가를 물어봐도 이 사람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고 답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166] 확실히 존재하고 어디로 갔는지 얘기한 사례도 존재해[167] 진술이 엇갈리는 터라 이 사람의 존재여부는 오리무중이다. 만약에 실존하지 않는다면 김정일의 프로파간다 중 하나라고 볼 수 있겠지만, 실존한다면 김성애의 사례처럼 권력투쟁으로부터 자기 안전을 보장받기 위해 공개석상에서 안 나오고 잠적해서 정보가 없다는 추측도 고려되고 있다.
- 김한솔의 행방 : 2017년 2월에 김정남이 암살당한 뒤로 김정남의 장남이자 김일성의 장증손자인 김한솔의 행방이 신변 문제로 전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는, 이 사람도 2017년 3월에 유튜브에 본인의 거취를 설명하는 영상을 올리기 전까지는 위의 사례처럼 존재나 사진 몇장 빼고는 일생에 대해 알려진게 별로 없었으며[168] 이 영상이 올라온 뒤 어디로 사라졌는지도 의문이라는 점이다.[169] 이 영상 이후에도 2020년 에이드리언 홍 창과의 인터뷰를 제외하면 알려진 게 부족하며 현재 이 사람의 거취에 대한 여러가지 설이 제기되고 있다[170]. 자세한 건 김한솔/망명 참조.
- 김정은의 다른 자녀들 : 장녀 김주애를 제외하고 자녀들에 대해 밝혀진 바가 없으며 김주애의 위로 아들이 존재할것이라는 추측은 있지만 아직 공개되지 않았다. 아들이 어떠한 질환 또는 장애가 있어서 공개하지 않는 것 아니냐는 가설이 있으며 국정원이 2023년에 아들의 존재에 대해 다시 판단 유보 결정을 내리면서 미스터리로 남고 있다. 셋재 자녀 출산 소식은 확인되지만[171] 성별조차 밝혀지지 않았으며 류현우 전 쿠웨이트 주재 북한 대사 조차 아들에 대한 얘기를 들어본적이 없다고 말하면서 정말로 아들이 없고 김주애가 첫째 혹은 유일한 자녀일수도 있는 상황이 되었다.
- 장성택 숙청의 내막 : 흔히 2013년에 김정은이 대규모 숙청을 행했을 때 별의 별 누명을 씌웠었고 장성택도 그에 따른 것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장성택이 북한 체제와 남북관계에 미친 영향을 생각하면 이를 감안하더라도 현재까지도 석연치 않은 구석이 많다. 김정일 시기만 해도 사실상 2~3인자 쯤 되던 사람이 김정일이 죽은 뒤 맥도 못 쓰다가 돌연 처형 당하게 된 원인도 불명이고, 처형 이후 숙청 사유도 북한이 공식적으로 밝힌 것인데도 매체 보도나 판결문마다 말이 앞뒤가 안 맞는 등[172] 전후 상황을 알 수가 없는지라 다른 자들은 몰라도 이 인물의 숙청 만큼은 현재도 의구심을 들게 하고 있다. 당시에도 꽤나 논란이 되었으나 명확하게 밝혀지지는 않았지고 당시에 제기되었던 반역설이나 예정설, 또는 이후에 일어난 김정남 피살 사건과 연관지어 김정남과 연관이 있을 거라는 설도 나오고 있지만, 북한 내부의 실체가 드러나지 않는 한 밝혀지기가 쉽지 않다.
- 6.25 전쟁 전후 구 소련 및 동구권으로 송출된 북한의 전쟁 고아들 : 이들의 규모, 실태, 행적에 관해서는 냉전 종식 후 30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구체적으로 파악되지 않고 있다.
- 박헌영의 북한 내 가족들의 생사 여부: 박헌영은 처형당하기 직전 아내 윤레나와 두 자녀를 외국으로 보내달라고 요청했으나 김일성은 이를 따르지 않았다. 이들은 지금까지 생사불명이다. 박헌영이 처형당할 때 이들 또한 살해당했을 가능성이 있지만 확실한 물증이 없다. 북한 외부에 있던 박헌영의 다른 가족들 중 박헌영의 전처인 주세죽과 친딸인 박비비안나는 소련에 있었고 다른 친아들인 박병삼은 남한에서 지내고 있었다.
- 김성애의 말년에 관한 미스터리 : 나름 김일성의 부인이던 김성애는 1998년 4월 24일 녀맹 중앙위원장에서 해임되며 석상에서 이름을 찾아볼수 없게 되었으며 1990년대 초부터 실성하여 알아듣지 못할 욕설을 내뱉으며 초대소 근처를 돌아다녔다는 증언 외에 말년을 어떻게 보냈는지가 의문이다. 정부는 2018년에 공식적으로 김성애가 2014년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했는데, 이마저도 확실하지 않고 이 이전에 사망했을 가능성도 있다. 사실 언제 어떻게 죽었든 아주 쓸쓸하고 비참하게 죽었을 것으로 보인다.
[1] 수치는 기록마다 왔다갔다 하는데 약 70~90%의 고인돌이 한반도에 몰려있다.[2] 1. 사람을 죽인 자는 사형에 처한다. / 2. 사람을 다치게 한 자는 곡물로 갚게 한다. / 3. 도둑질을 한 자는 노비로 삼되, 용서를 구하려면 50전을 내야 한다.[3] 고조선은 국가의 실존 가능성을 제외한 많은 부분이 불분명했었다. 그러나 저 3개의 조항 덕분에 사람의 목숨은 몰라도 적어도 인력을 중시했다는 것과 사유 재산을 인정했다는 점, 그리고 고조선 시대에도 노비제도 자체가 존재했음을 알아 낼 수 있었다.[4] 양웅이 살았던 시대에는 이미 고조선이 멸망하여 한나라의 행정구역인 한사군이 설치되어있었다.[5] 참고로 여기서 말하는 동이는 순전히 중국 동부에 사는 비(非) 한족계 민족들을 뭉뚱그려서 가리키는 말이며, 환빠들의 주장과는 달리 모든 동이족이 한민족인 건 아니다.[6] 현대 일본인과 류큐인의 공통조상으로 추정되는 민족이다.[7] 다만, 트랜스유라시아어족 가설은 억지춘향으로 끼워맞춘 결과에 가까워서, 주류 언어학계로부터 철저히 무시받았다. 이 가설은 상술한 고고학적 성과를 바탕으로, 한국어와 일본어족, 퉁구스어족, 몽골어족, 튀르크어족이 모두 하나의 어족으로 묶는 설이고, 기존의 알타이 제어 가설을 더욱 확장한 것이지만, 기초어휘 수준에서 차이가 크게 나는데다, 어원 상 서로 무관한 어휘를 억지로 끼워맞추는 식으로 동원어라고 주장하는 등의 문제가 많았다.[8] 현대의 기술력으로 정문경을 만들자면 대량생산하고도 남는다.[9] 물론 그 북한이라고 해서 이런 고고학, 역사학 연구를 아예 안 하고 있는 건 아니다. 그러나 북한 학계가 주류에서 신용이 높지 않은 것도 있고 낙랑군 시기 유물로 정설 잡히는 유물들을 억지로 위만 시기의 유물이라고 주장하니 영 신뢰를 받지 못하는 것이다.[10] 이마저도 진국이 실제로 한반도 이남에 존재자체는 했던 국가라는 확증되진 않은 설을 전제로 깔고 들어간 것이다. 진국은 어떤 형태이든 실존했는지 조차 확증된 건 아니라서 역사적인 실체가 있는 고유한 국가인지, 아니면 한반도 이남에 존재했던 여러가지 국가를 일반적으로 지칭하는 단순 명칭이었는지 조차 완벽하게 입증된 것이 없다.[11] 정확히는 가야를 고대 한국인과 잔존한 선주민들이 공존하는 상태로 파악하고 있다. 이에 따라 가야의 언어 환경도 선주민들의 언어가 조금씩 고대 한국어에 동화되던 과도기로 보거나, 최소한 지배층에서나마 고대 한국어가 링구아 프랑카로 널리 쓰이던 양층 언어 상태로 파악하는 여론이 우세해졌다.[12] 흔히 아라가야라고 불리는 나라다.[13] 여덟 개의 소국들 중 이름이 확실하게 확인되는 나라는 골포국(마산), 칠포국(함안군 칠원읍 지역), 고차국(고성군), 사물국(사천시)정도이다.[14] 미토콘드리아의 DNA는 모계로만 유전이 되므로, 이를 이용해 특정인이나 특정 인족 집단을 모계 혈통에 따른 일정한 하플로그룹으로 분류할 수 있다.[15] 이 경우는 상술한 반도 일본어설의 강력한 근거 중 하나로 쓰일 수 있지만, 현대 야마토 민족의 직계 조상인 야요이인과는 달리 조몬인은 아이누족의 직계 조상이라서, 조몬인과 야요이인, 한국인, 야마토 민족 간의 연관 관계를 설명하기가 더 까다로워지는 문제가 있다.[16] 금나라에서 자기들 역사를 기록한 책인 금사에 나와있는 내용이다.[17] 또는 고려인. 대충 신라에서 고려로 넘어가는 시기에 여진족의 땅으로 넘어간 듯하다.[18] 이런 고귀한 혈통의 이방인 후예는 창업군주의 출신과 관련된 전설에 흔히 나오는 부류다. 즉 주몽이 용의 아들이라거나 박혁거세가 알에서 태어났다는 설화와 유사한 형태다.[19] 한사군 중에서 가장 오랫동안 살아남은 군현은 현도군, 그리고 대방군인데, 낙랑군과는 다르게 현도군은 정확한 위치에 대해 논쟁이 벌어지는 것만 빼면, 딱히 논란이 되는 건 없다.[20] 일단 낙랑군은 미천왕 집권 시기에 고구려에 완전히 복속되었다.[21] 사실 최씨낙랑국이 독립국인지도 논란이 많다.[22] 다만 후술한 목협만치가 목만치와 동일인물이라면 전혀 등장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23] 목(木)씨는 대성팔족 중 하나인 목리(木刕)씨의 축약형으로, 목협(木劦)씨는 목리(木刕)씨의 오기로 추정된다. 즉 두 인물의 가문과 이름은 완벽히 일치하는 것.[24] 한국어 독음은 기생반숙녜이다.[25] 혹은 이들의 혼혈인이라는 설도 있는데, 어느 쪽이건간에 한반도 통일을 외쳤던 것으로 미루어서, 출신 성분이 무엇이든지간에 일단은 한국인에 좀더 가까운 정체성을 가졌다는 점은 분명하다.[26] 일단 그는 삼국통일을 명분으로 내세우고 고구려와 동맹을 맺긴 했다.[27] 현존하는 한국 쪽의 사료에서 이 반란을 언급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삼국사기인데, 여기서도 대수롭지 않은 사건인양 간단히 언급할 만큼, 당대에도 관련 기록들이 이미 대거 소실된 상태였다.[28] 백제는 관산성 전투에서 신라와 싸우다 국왕인 성왕이 전사한지 얼마 안 된 상태였다. 무왕 또한 심심할 만하면(...) 신라를 침공하였다.[29] 그러나 선화공주가 신라 내부의 권력 다툼에서 패해서 백제로 온 것이라면, 선화공주가 신라에 적개심을 가지고 있었기에 무왕과 함께 신라를 맹공격했다는 추론이 충분히 가능하다. 당장 정사에서도 신라의 왕자였지만 왕실에서 쫓겨난 탓에 신라에 엄청난 적대감을 가져 신라를 맹공격한 인물이 존재한다. 이 추측을 따르면 서동 설화에서 선화공주가 가짜 뉴스로 인해 궁궐에서 쫓겨났다는 부분은 선화공주가 권력 다툼에서 패하여 유배를 갔다는 사실을 설화적으로 표현한 것일 가능성이 있다.[30] 현재의 익산시[31] 조만간 나당 연합군이 반드시 침공할테니, 이들을 막으려면 적군이 탄현과 기벌포를 넘게 하면 안 된다는 내용의 전쟁 전략을 서술한 상소이다. 그러나 간신과 요사스러운 대부인을 멀리 하라거나 사치와 향락을 줄이라는 내용은 없다. 일부 사학자들은 의자왕이 실제로 간신과 대부인의 손에 놀아나 사치를 즐겼다면, 이를 지적하여 귀양을 갔다고 기록되어 있는 성충이 마지막 상소문에서 다시 한 번 사치에 대해 언급했을 것임을 지적한다.[32] 의자왕은 마지막에 성충의 말을 듣지 않아 이렇게 된 것을 후회한다(悔不用成忠之言 以至於此)고 했으나, 성충의 전략을 듣지 않았던 것을 후회했는지, 삼국사기의 기록처럼 간언을 듣지 않았던 것을 후회했는지는 알 수 없다.[33] 한 가지 염두에 둘 점은, 이 가설은 말년의 의자왕을 옹호하는 가설이 아니라, 의자왕의 패착은 왕권 강화의 시기를 잘못 잡았다는 것임을 주장하는 가설이다. 즉 신라, 당과 대립하는 상황에서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고위 권신들을 대거 숙청했던 것이 패착이라는 것.[34] 일본서기에 기록되어 있지만, 기록 자체는 일본세기에서 인용했다.[35] 당이 백제를 정복한 후 정림사지 오층석탑에 새긴 것이다.[36] 그대로 읽으면 ‘대부인’으로, 여기서는 의자왕의 왕후를 의미한다. 하시카시는 일본어가 아닌 고대 한국어(백제어)로, 백제에서 왕후 혹은 부인을 가리키는 대명사로 추측된다.[37] 고구려 관련 기록에서는 고구려보다 북쪽에 있는 부여를 정복하려고 하는 대목에서 북명을 언급하고 있으며, 부여보다 북쪽에 있다고 서술하고 있다. 그래서 고구려 관련 기록에서 말하는 북명은 함경도가 아니라고 여겨진다.[38] 그 위치 때문에 신라 관련 기록에서 언급되는 북명은 동예를 가리키는 다른 이름으로 본다.[39] 다른 기록에서는 용성국 또는 화하국이라고 나오기도 한다.[40] 다만 주류 역사학계에서는 이 주장에 대하여 신라에 불교가 유입된 후에 불교적인 윤색이 더해진 결과물이라고 보고있다. 한때 일본의 언어학자인 오노 스스무가 주장한 일본어가 타밀어에서 기원했다는 학설과 연계되어 석탈해가 일본으로 이주한 타밀인의 후손이었다는 설이 제기된 바 있었으나, 일본 어디에서도 타밀계 유이민이 있었다는 고고학적 근거를 찾을 수 없어서 석탈해 타밀인 설과 일본어 타밀어 기원설이 같이 타격을 입었다.[41] 석탈해 관련 설화에 나오는 까치와 관련된 이야기와 연관된 것으로 보이는 설화가 캄차카 반도의 원주민들인 축치인들의 설화에서 발견되었다.[42] 도호쿠 지방과 홋카이도는 지금이야 일본의 주류 민족인 야마토 민족이 다수를 차지하지만, 고대에는 아이누족이 절대다수를 차지하던 지역이다. 이 설에 따르면, 석탈해는 한반도 동남부로 이주해온 아이누계 이주민이다.[43] 신라의 건국자라는 의미는 아니다. 하지만 고구려의 태조왕이 건국자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태조'라는 시호를 받은 것처럼, 건국자에 준하는 중시조라는 의미에서 이런 칭호가 올려진 것으로 보인다. 주류 역사학계는 알려진 그대로 박혁거세가 신라의 건국자라고 보고 있다.[44] 무려 회전에서 100만 명 이상의 대군을 전멸시켰다.[45] '을지'의 '지'는 고대 한국어로 오늘날의 '님'에 해당하는 존칭접미사다.[46] 이 설에 의하면, 을지문덕은 선비계 고구려인이라고 한다. 이는 울지경덕이 을지문덕과 친족이거나, 비슷한 출신 성분을 가졌으리라는 가정에서 나온 가설이다.[47] 즉, 오늘날 방식대로 하면 가야 주재 일본 대사인 셈이다.[48] 현재의 유력한 가설에 의하면, 일본어족의 원향은 한반도 남부라고 한다.[49] 김부식 본인도 이런 기록에 의구심을 품긴 했으나, 전근대 시대의 기술력으로는 고고학 연구를 통한 고증을 하는게 불가능했던 터라, 나름대로 합리적인 추측을 한 것으로 보인다. 이런 문제는 헤로도토스가 히스토리아를 저술했을 때나, 사마천이 사기를 집필했을 때에도 맞닥뜨렸던 것이다. 따라서 이때 당대의 역사가들도 밝혀내지 못한 부분은 현대의 고고학자들이 관련 유물과 유적, 기록물들을 첨단 과학기술을 동원해서 연구하고 있는 상황이다.[50] 참고로 해씨라는 성은 우리가 아는 태양에서 온 것이 맞다.[51] 고주몽의 고씨나, 고구려의 '고'가 모두 한자로는 높을 고이고, 옛날 사람의 관념에서 높이 떠있는 건 태양이기 때문에 '해'와 '고' 모두 고구려어에서 동의어로 통했으리라고 보여진다.[52] 다만 대조영이 고구려의 계승을 표방한 것으로 보아 그 정체는 고구려 유민 혹은 말갈계 고구려인으로 추측된다.[53] 세계사적으로 보면 서로 다른 민족들끼리 융화하여 새로운 민족이 되는 경우는 많다. 멀리 갈 것도 없이, 한국사에서도 부여계와 예맥계, 고조선계 부족들끼리 융화하여 생겨난 고구려의 사례가 있으며, 세계사적으로는 이탈리아 반도에서 유래한 라틴족과 토착민인 켈트인, 그리고 독일에서 건너온 게르만족이 합쳐져서 오늘날의 프랑스인이 된 사례가 있다.[54] 발해의 역사를 중국사로 편입시키려던 중국공산당의 동북공정 정책에 최초로 헤드샷을 날린 이들이 다름아닌 중국의 역사학자와 고고학자들이다. 사실 어느 국가를 막론하고 역사왜곡을 주도하고 조장하는 집단은 역사학자 및 고고학자, 과학자들이 아니라, 국가의 지도/지배 계층+기득권자들 및 그들과 결탁한 어용학자들이다.[55] 기록이 맞다면, 당시에는 양력 12~1월이었을 가능성이 큰데, 제사였다면 몰라도 술 마시다가 동사하려는 게 아닌 한 놀려고 그런 곳에 간다는 게 말이 안 맞는다.[56] 즉, 기록이 잘못되었거나 견훤 측이 왜곡했다는 것이다. 번외로 애초에 이 사단이 문자 해석을 잘못해서 일어난 거란 이론도 있는데 하단 참조.[57] 알영부인의 출신지인 알영정과 박혁거세의 무덤인 오릉이 포석정 주위에 있었다.[58] 충북 제천의 덕주사에서 내려오는 전승에만 나오는 인물로 경순왕의 후손과 관련된 기록에서는 일절 등장하지 않는다. 그 때문에 진짜 경순왕의 딸인지 아닌지 알 수 없다.[59] 물론, 이 시기는 왕족 및 중앙 귀족들이나 성씨를 썼지, 따로 봉기해서 칭왕하지 않은 이상에야 지방 호족들조차 성씨를 쓰지 않았던 때라서, 실제 궁예가 궁씨를 자칭했는지는 의문이다.[60] 헌안왕은 문성왕의 숙부로, 궁예가 정말 헌안왕의 아들이라면 궁예는 문성왕과 사촌 사이가 된다.[61] 대체적으로 신라-왜 하면 일본 측이 신라를 자주 정벌하고 어떤 때는 아예 국가 멸망까지 갈 뻔했다는 것 정도로 알고 있으나 사실 신라도 심심하면 일본을 침략했었다. 신라의 일본 침공 사례 참조.[62] 다만 저 일본측 기록에도 반론은 있는데 바로 일본에 쳐들어왔던 신라를 기록할 때 신라구랑 신라의 정규군을 가리지 않고 그냥 '신라'라고 한 점이 있다. 이 때문에 구체적인 정체 및 구조를 알 수 없어 애초에 이 둘을 가르는게 무리라는 의견도 있다.[63] 김홍도가 일본에 간 적이 있기는 하나, 그때가 1788년의 일이라서 1794년부터 시작해서 단 1년 남짓만 활동한 도슈사이 샤라쿠와 동일인일 가능성은 없다. 당시의 에도 막부의 폐쇄적인 외교 정책으로 미루어보면, 외국인이 잠깐동안 슬쩍 활동하고 사라질 만한 정황도 존재하지 않았다.[64] 흔히 드라마나 영화에서 나오는 거랑은 달리 사약은 먹자마자 피를 토하면서 고꾸라지는 즉효약이 아니다. 학계에서도 성분이 의문인지라 무슨 재료로 만들어지는 건지를 알 수 없을 뿐 방사능 홍차도 죽이는 데 2주가 걸리는 마당에 적어도 전근대에 저런 즉효성 독약을 만드는 게 가능할 리는 없다고 보고 있다. 또한 역사 내에서도 사람마다 케바케라 몇 그릇을 마시고도 죽지 않았다는 기록이 분명히 있고 몇 그릇을 먹였든 이거만 먹인다고 사형 집행이 끝나지 않는다. 사약 문서 참조.[65] 참고로 이완용은 그 행적과는 별개로 당대 뛰어난 명필이기도 했다.[66] 당시 호조 판서가 기획재정부장관과 비슷한 업무를 했다.[67] 고종이 수렴청정받던 시절에 흥선대원군이 주로 거주하던 곳이었다.[68] 당시에 박연은 조선에서 탈출하여 네덜란드로 귀국하려는 생각을 몇번 한 적이 있었으나, 그때마다 모조리 실패한 후에 자포자기로 영구 정착을 결심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박연 입장에서는 이것도 나쁜 선택은 아니었던 것이, 당시 조선 조정에서 서양인을 신기하게 여겼기 때문에 박연에게 할 수 있는 한 최고의 대우를 해주었고, 과거에 응시할 자격을 주어 무관이 되게 한 후에 유럽식 대포를 제작하는 기술직에 특채하였을 뿐만 아니라, 조선인 여성과 혼인을 시키고 생계를 지원해주어서 편안히 정착할 수 있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현대 역사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박연은 본래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 소속의 사략선 선장, 즉, 네덜란드 정부의 공인을 받은 해적이었다고 한다. 상식적으로 해적선 선장이 안정된 삶을 누릴 수 있을리가 만무하므로, 그의 입장에서는 자신에게 인간적인 대우를 해주고 안정된 지위를 제공한 조선에게 마음이 끌릴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69] 물론 한국의 성씨의 상당수는 개화기 이후에나 수가 급격히 늘어나서 오늘날과 비슷한 인구 비율을 이루었다고 하지만, 한국인들의 뿌리에 대한 집착은 이미 조선 시대부터 굉장히 남다른 수준이었다. 당대의 법률로 현직 관료가 아닌 사람도 4대째까지 제사를 지내는 것을 허용했는데, 뒤집어말하면, 이는 보통의 사람들도 자기 증조부모까지는 이름을 정확히 기억할 만큼, 조상이 누구고 자기 뿌리가 어떻다는 것에 대한 인식이 확고했다는 뜻이다.[70] 박연이 한국 땅에 정착한 지가 근 400년이 다 되가므로, 그의 후손이 현존한다고 한들 오랫동안 지속된 혼혈로 인해 외양 상으로는 보통의 한국인과 구분하긴 불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이걸 감안해도 그의 후손들이나 가계도에 대한 기록이 일절 남아있지 않다는 건 여전히 의문이다. 참고로 박연은 이미 네덜란드에서 결혼해서 처자식을 둔 상태였으므로, 네덜란드에는 그의 후손들이 현존하고 있다.[71] 다만 이쪽 설도 인조랑 아예 연관이 없다는 것은 아니다. 요약하자면 이 설의 입장은 인조가 철저히 이런 소현세자의 투병 상황을 이용했다고 보는 입장이다.[72] 인조가 아닌 다른 인물이나 세력이 암살했다는 주장 측은 서인이 그 배후일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73] 당시 왕위를 노릴 직계왕손이 사도세자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세손도 있었다지만, 상식적으로 멀쩡히 살아있는 세자를 냅두고, 그 아들인 세손을 추대하는 짓을 벌일 리가 없다.[74] 이후에 노론이 정치 성향이나, 사도세자를 구하지 못한 것에 대한 책임 문제 등으로 인해 시파와 벽파로 나뉘었으므로, 노론이라고 해서 꼭 보수 성향인 건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영조는 분명히 보수 성향이 짙은 왕이었고, 이것때문에 사도세자와 그를 중심으로 한 노론의 주류 세력들이 진보적 성향을 드러낸 것에 대해, 영조가 이를 아니꼬와해서 아들을 미워하기 시작했다는 설이 학계에서 제기된 바 있다. 이 설에서도 물론 임오화변은 영조가 독단적으로 저지른 짓이고, 노론 전체가 세자를 보호하는 입장이었다는 전제는 분명히 깔려있다. 이 설의 문제점은 사도세자의 대리청정 기간이 너무 짧아서, 그의 실제 정치 성향이 어땠는지가 분명치 않다는 것이다.[75] 조폭이나 일진 패거리를 일컫는 단어인 불한당이 여기서 유래했다. 당시에는 노론의 분파들 중에서 그 어디에도 끼지 않은 중립파를 멸칭으로 불한당(不漢黨)이라 부른 데서 유래했다. 물론 지금에 와서 쓰는 단어는 '땀도 안 흘릴 정도의 냉혈한'이라는 뜻의 한자(不汗黨)를 쓰는 것으로 바뀌긴 했으나, 이쯤부터 이런 말이 쓰인 건 사실이다. 자세한 건 정병설 항목 참고.[76] 사실 사도세자가 살아있을 적부터 숙의 문씨와 그녀의 가문이 지속적으로 그를 모함한 바는 있다. 이들은 사도세자의 어머니인 영빈 이씨와 아내인 혜경궁 홍씨까지 업신여기긴 했는데, 이들은 누가 배후에 있어서 그런 게 아니라, 그냥 지들이 문숙의에 대한 영조의 총애만 믿고 나댄 것에 불과했고, 그 이외의 권력 기반이 전무한 탓에 단 한 번도 집권 세력이 되어보지를 못했다. 막상 진짜 집권 세력이었던 노론 측은 이런 문숙의 가문의 행보에 대해 이뭐병한 반응을 보인 걸 넘어서, 감히 세자를 모욕한 것때문에 이들을 엄청나게 증오하고 있었다. 당연히 세자의 아들인 정조도 자기 아버지를 모욕한 이들을 좋게 볼 리가 없어서, 즉위하자마자 숙의 문씨 본인은 사약을 내려서 죽여버리고, 그녀의 친정 식구들의 신분을 노비로 격하시켜서 개발살냈다. 사실은 이미 사도세자가 살아있을 당시에도 일개 후궁이던 문숙의가 영조의 아이를 임신한 것을 무기삼아서 세자의 생모인 영빈 이씨에게 개기는 하극상을 벌이자, 당시 왕대비였던 인원왕후가 대노하여 그녀를 회초리로 두들겨 팼음은 물론, 이에 빡쳐서 대드는 영조와도 대판 싸운 바 있다. 이러니, 그녀가 임오화변의 직접적인 원인은 아니라고 보여진다.[77] 화완옹주는 영조가 개인적으로 가장 사랑한 자식이었다. 이쪽도 노론 음모론때문에 자기 오빠인 사도세자를 죽게 한 악녀라는 오해를 받은 것과는 달리, 오히려 당대인들조차 극도의 브라콘이라고 봤을 만큼 자기 오빠를 끔찍이도 아꼈던 사람이다. 뒷날에는 노론 음모론에서 그랬듯이 조카인 정조와 적대하는 사이가 되었으나, 음모론에서와는 달리 정치적인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순전히 그녀가 정조가 아끼는 사람들에게 극심한 투기를 부려댄 탓에 정조 본인에게 불만을 샀기 때문이었다. 한중록에 의하면, 화완옹주가 오빠인 사도세자가 아버지의 손에 잔혹하게 살해당하자 세손(정조)을 지키겠다며 그를 강제로 올케인 혜경궁 홍씨(한중록의 저자)에게서 떼어놓으려하거나, 세손 시절의 정조가 송나라의 역사를 다룬 책인 송사의 편찬에 참여하자 이것에다가도 질투를 하는 기행을 보이기도 했다. 당연히 정조 입장에서는 자신에게 이렇게 심한 집착을 해대는 고모가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었다.[78] 정조가 죽어가면서 어린 순조를 정순왕후 김씨에게 맡겼고, 뒷날 황사영 백서 사건으로 정순왕후를 포함한 경주 김씨 세력이 실각할 때까지 그녀는 의붓손자이기도 한 선왕의 유훈을 충실히 지켰다.[79] 조선시대 왕들의 일상은 이랬다. 새벽 4시 경에 일어나서 아침 식사가 준비되는 동안에 공부를 하다가, 그 뒤에 식사를 하고 곧바로 어전 회의에 참석해서 신하들과 정책에 대해 논하거나, 올라온 상소문을 읽고 대책을 논의하였다. 그 다음에는 경연이라 하여 홍문관에서 열리는 강의에 참석해서 국정에 필요한 내용을 학습하였고, 이후에 저녁식사를 먹은 후에 다시 공부를 하고 일성록이라는 이름의 일기장을 작성한 뒤에 겨우 잠에 들었다. 이때의 시간이 오후 10시였다. 이 정도면, 훨씬 복잡한 행정 처리를 해야하는 현대의 대통령들조차도 격무에 시달린다는 소리가 나올 지경이다. 정조의 삶은 이런 일이 매일 반복되는 피곤한 인생이었다.[80] 여기서 한가지 함정이 있는데, 정조는 다른 왕들과는 달리 홍문관의 경연관들의 학문 수준이 자기보다 낮아서 불만을 품다가, 아예 자기가 직접 경연관들과 신하들을 불러서 강의를 했고, 세손 시절부터 송나라의 역사를 연구해서 송사를 직접 편찬하는 등, 선왕들과 비교해도 사서 고생하는 수준으로 알아서 업무에 파묻혀 사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모든 직무가 끝나면 대신들의 퇴근을 막고 밤새도록 술판을 벌이거나, 그 와중에 정약용같은 총신이나 당대의 권세가인 심환지 등에게 술 강요를 일삼고는 이들이 취해서 헤롱대는 모습을 보고 놀려대기도 하고, 어전 회의 중에도 시도때도 없이 담배를 뻑뻑 태워대는 등 건강에 악영향을 줄 행동을 마구하던 사람이니, 당시의 의학 수준을 생각하면 44세까지 산 게 도리어 기적이었다.[81] 노론 음모론때문에 착각하는 사람이 많은데, 정조는 조선의 역대 왕들 중에서 가장 권력이 센 군주들 중의 한 사람이다. 이미 절대권력을 휘두르는 상황에서 자기 최측근을 임명했다가 마음대로 숙청해버리는가 하면, 왕궁 경호를 핑계로 왕실 친위대인 장용영까지 설치했기 때문에, 암살 기도는 고사하고 정조와 정치적으로 대적하는 것 자체가 자살 행위나 다를 바 없었다. 그의 아들인 순조가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그를 바지사장 삼아서 권력을 농단하려고 암살 기도를 하는 자가 없었을까하는 주장도 있지만, 그럴 가능성때문에 미리 자신과 친밀한 사이였던 대비 정순왕후 김씨에게 뒷일을 부탁했고, 실제로 정조가 사망하자 곧바로 정순왕후의 수렴청정 체제로 이어졌기 때문에, 그를 암살해봤자 아무런 정치적 이득도 얻을 수가 없었다.[82] 실제로 나경언은 급작스런 고변을 하여 임금을 놀라게 했다는 죄로 처형되었다.[83] 이 사건 전에 사도세자가 정신병을 앓는 와중에 내시 한 명을 베어죽인 일이 있었다는 점에서 착안하여, 영화 사도에서는 그 살해된 내시가 나경언의 동생이었기 때문에, 복수심에 불타서 그의 행적에 대해 고변했다고 묘사했다. 하지만, 이건 창작물의 설정이고, 실제 기록에는 나경언과 문제의 내시 사이의 관계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도 하지않고 있다.[84] 편집증으로 추정된다. 실제로 현대의 정신과 의사가 당대의 기록을 보고 영조에게 편집증이 있었다고 진단했다.[85] 당대에도 세자 시절의 영조가 경종을 죽였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져있었고, 그래서 이인좌의 난의 주모자들은 국문을 당하는 와중에 영조에게 너라고 부르면서 "네가 전하를 죽였느냐!"며 악을 쓰는 하극상까지 벌일 정도였다. 그러나 경종 본인이 영조가 자신을 독살하려고 했다는 의혹을 전면 부정했으며, 무엇보다도 이미 그의 건강이 좋지 않았다는 점, 마지막으로 영조가 형이 위독해진 것에 대해 심하게 자책했다는 기록을 근거로, 주류 학계에서는 단순한 음모론으로 치부하고 있다. 설령 영조가 경종의 죽음에 일조했다고 해도, 의도적인 게 아니라 모르고 그랬을 것으로 보는 게 정설이다.[86] 이런 학계의 분석을 바탕으로 만든 영화가 바로 사도다. 기존의 영조나 정조 관련 창작물들이 정치 투쟁을 다룬 것인데 반해, 사도에서는 학계의 추정대로 영조 개인의 인간성 문제와 사도세자의 정신의학적인 문제, 기타 주변 왕실 인물들과의 관계에 포커스를 맞추고 있다.[87] 일단 정후겸은 노론이 아니라, 소론 소속인 것으로 추정된다. 그래서, 그가 정조에 대한 암살을 기도한 것은 소속 붕당의 이익을 위해서는 아닌 것으로 보여지며, 정후겸 본인이 화완옹주의 양자라는 점때문에 자신의 양어머니와 대적하게 된 정조에게 원한을 품었을 가능성은 있다. 하지만, 화완옹주는 조카인 정조와 관련된 인물들을 남녀 가리지 않고 시샘했을 만큼, 조카를 끔찍이도 사랑하고 집착한 사람이었기에 아들의 이런 행보에 동조했을리가 없어서 논란이 있는 편이다. MBC의 드라마인 옷소매 붉은 끝동에서는 진짜로 저런 이유로 정후겸이 정조에게 적대감을 품은 것으로 나오지만, 이는 드라마 상의 설정일 뿐이다.[88] 물론, 정후겸은 화완옹주의 양아들이고, 홍인한은 사도세자의 장인인 홍봉한의 남동생이자 노론 벽파의 실세였으니, 이들에게 권력이 없는 건 아니었다. 그러나 노론 음모론마냥 이들의 권력이 왕실을 압도했다는 건 절대 아니다. 그나마도 벽파의 명목상 영수였던 홍인한의 형 홍봉한은 정조의 왕위 계승을 방해하는데 전혀 가담하지않았고, 그의 즉위를 방해하고 암살을 기도한 혐의로 처벌받은 이들도 홍인한, 정후겸 둘 뿐이었던 것으로 미루어보면, 막상 벽파 내부에서는 실세의 행동에 동조하지않는 여론이 대세였던 것으로 보인다. 임오화변 건으로 인해 화풀이 대상으로 몰린 것에 대한 두려움에 더해, 당시에 정순왕후의 후광을 등에 업고 자라나던 경주 김씨 세력에 대한 증오와 경계심도 있어서 자기들 딴에는 생존을 위한 계책을 나름대로 세웠지만, 이미 왕위 승계가 확정된 세손의 즉위를 방해하는 것이 얼마나 무모하고 위험한지를 모를 리 없던 벽파 측에서 실세고 뭐고 막나가는 홍인한을 버리기로 한 것이다.[89] 이 사건도 노론이 일으킨게 아니라, 영조가 독단적으로 벌인 짓이다. 정작 노론은 사도세자의 죽음을 막으려고 애썼는데, 외려 이 때문에 영조의 미움을 사는 바람에, 주요 인사들이 대거 파직되면서 뿔뿔이 분열되어 버렸다.[90] 왕권 강화를 하려했다고 해서, 원래 정조의 권력이 약했다는 게 절대로 아니다. 오히려 정조는 권력을 강화하려고 시도하기 전에도 이미 절대권력을 휘두르고 있었고, 신하들은 이를 견제할 엄두조차 못 내던 상황이었다. 즉, 이런 상황에서 왕권을 강화한다는 얘기는, 순전히 신하들을 완전히 기를 죽이고 자기 마음대로 통치하겠다는 것에 불과하다.[91] 현재의 일본국을 말하는 게 아니라 당시 일본 제국을 말하는 것이다.[92] 어느 정도였냐면 사건 전후로 고종의 폐위 시도도 했었다. 그래서 그런지 고종이 대원군의 임종은 커녕 장례식에도 오지 않았었다.[93] 일본은 흥선대원군을 이용해서 이 사건을 최대한 조선 왕실의 내부 다툼으로 몰아가려 했었다. 이에 폐위시도도 할 만큼 막나가던 흥선대원군은 일본에게 있어서 훌륭한 카드였다.[94] 상술했듯이 대원군은 사건 전후로 별세하기 전까지 고종에게 압박을 넣었었다.[95] 당시 한반도의 열강 침탈이 이루어 질 때 청나라, 러시아, 일본에 중점이 맞춰졌지만, 이 외에도 프랑스, 미국, 영국같은 선지도 존재했다. 실제로 을미사변 이후 고종은 차라리 미국, 영국의 선교사에게 도움을 받는 것이 자신의 신변에 더욱 안전할 것이라고 여겼던 바가 있다.[96] 한국에 번역되어 출간한 건 1982년이다.[97] 구체적으로 서술하자면 시체를 나체로 벗긴 뒤 '국부'에 칼집을 여러군데 낸 뒤 시신을 불태워버렸다고 한다.[98] 여기서는 그냥 이날 궁궐이 탔다고만 서술되어 있으며 왜 탔는지는 서술하고 있지 않다. 또한 불탔다는 날짜 또한 수정실록에는 서기 1592년 음력 4월 14일,선조실록은 서기 1592년 음력 5월 3일(혹은 서기 1592년 음력 5월 3일 이전)로 기록하고 있다.이날 궁궐이 모두 불탔으므로라는 말을 어찌 해석할 지가 관건일 듯하다.[99] 이는 평택에 위치한 원균의 가묘 때문이다. 이 가묘는 평택시와 원주 원씨 대종회가 많은 돈을 들이고 원균 기념관까지 세우는 등 많은 공을 들인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통영의 묘가 진짜 원균의 무덤으로 밝혀진다면 이 가묘의 입지와 존재 의의가 사라지기 때문이다. 물론 원주 원씨 내에서도 DNA 대조에 찬성하는 목소리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내부에서도 이견이 심하게 갈리는 건 맞아서 현재까지도 찬반에 대해 결론 내리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100] 번외로 이 무덤은 국도 77호선 확장 공사로 아예 사라질 뻔한 적도 있었다고 한다. 그나마 이쪽은 다행히도 주민들의 관심으로 해당 구간을 확장 구간에서 제외하도록 설계가 변경되어서 해결되었다고 한다.[101] 장영실의 최후에 대해서는 실각 이후에 즉각 유배를 가서 그곳에서 죽었다는 설과, 이후에 기존보다 다소 낮은 직책으로나마 간신히 복권되었다는 설, 고향으로 내려가서 은퇴했다는 설 등이 있다. 이 중 확실한 설은 아직 없지만, 급작스러운 몰락과는 별개로 그의 말년은 그렇게 비참하지는 않았으리라는 점은 분명하다고 보여진다. 장영실과 함께 파직되었던 동료 과학자들이 복권된 후에 본래의 업무로 되돌아왔으나 그만은 이런 기록이 없다는 점과, 이 시기의 장영실이 이미 고령의 나이였다는 점으로 미루어보아, 법적으로 복권은 되었으나 업무 복귀가 불가능한 나이라서 복직되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이다. 자세한 정황은 모르지만, 그의 최후는 의외로 새드엔딩이 아니었던 것이다.[102] 실제로 이런 문제때문에 일반적으로 족보는 사료로 쓰이지 않는다.[103] 실제로 고려에 비해 조선은 다소 폐쇄적인 경향이 있어서, 원나라 시기의 혼란을 피해 망명한 수많은 외국계 민족들에게 강력한 동화 정책을 실행한 바 있었다. 가령 세종대왕의 치세까지만 해도 조선으로 이주한 위구르족들을 중심으로 하여 존속해오던 이슬람 신자들의 커뮤니티가 조정에서 이들을 유교로 강제 개종시키면서 와해된 바 있으며, 한족이나 목호의 난 이후에도 잔존한 몽골인도 조선식 상투를 틀게 하고 한국어의 사용을 강요하면서 억지로 동화시켜 버린 바 있다. 이 때문에 장영실의 조상들이 이런 동화정책에 저항하다가 역적으로 몰려서 노비로 전락했다는 설이 있다.[104] 이와는 별개로 장영실의 조상은 조선과 별 인연이 없고 잠시동안만 조선을 방문했는데, 그동안에 조선인과의 사이에서 얻은 사생아가 장영실 본인이나 그의 아버지라는 설도 있다. 이는 조상이 꽤나 명망있는 사람인데 반해, 장영실은 노비 신분으로 태어난 사실과 부합하는 면이 있다. 하지만, 문제는 장영실의 어머니가 개인이 소유한 노비가 아닌 관청 소유의 노비, 즉, 관노인데 장영실의 조상이 무슨 수로 국가 재산인 관노와의 사이에서 사생아를 만드냐는 것이 있다.[105] 가령, 정약용이 정말로 말년에 가톨릭으로 원복했다면, 그의 가장 대표적인 저서인 목민심서를 포함한 여러 저서들이 가톨릭 교리에 따른 도덕관에 기초해서 쓰여졌을 가능성을 고려해봐야 한다.[106] 나머지는 이준, 이상설이다.[107] 대표적인 예로 정조 독살설.[108] 부정하는 측의 경우 조선의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의 저자 김을한이 대표적으로, 당시 구 한국 황실의 흡수를 바라고 있었던 일본측이 굳이 여기에 초를 치는 고종의 암살이라는 무리수를 저지를 이유가 없으며 시기적으로도 부적절하다고 보고 있다. 실제로 고종의 급작으러운 사망으로 영친왕은 급히 조선으로 떠났고 이방자와의 결혼도 그만큼 뒤로 늦춰졌다.[109] 실제로 김봉환이 일본과 접촉한 것으로 보이는 정황이 당대의 기록에서 보이고 있다. 당시 공산주의 세력에서는 '김좌진이 일본과 내통하고 있어서, 공산주의자들을 하얼빈의 일본 총영사관에 연락해서 팔아넘겼다'고 보고 있었는데, 정작 일본 측의 내부 기밀 문서에서는 김좌진을 포섭할 수 있는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 기술하고 있어서, 실제로는 암살을 사주한 김봉환이 그 자신이 일본의 밀정으로 일하는 것을 숨기려고 퍼뜨린 거짓 소문이라는 추정이 있다.[110] 정확히는 무궁화호, 새마을호, KTX, 수도권 전철 대다수 등 대부분의 열차가 다니는 주력 역사로서 구 역사라는 뜻이다. 현재도 구 역사는 경의중앙선 승강장으로 쓰이고 있어 역으로서의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다만 신 역사 이전 이후부터 계속 그랬던 건 아니고 2017년에 경의중앙선이 이설된 뒤부터 해당 기능을 수행했다. 번외로 2003년에 지어진 현 역사의 설계자는 당연히 한국철도공사(당시 대한민국 철도청)이지만, 민자역사까지 포함하면 한화그룹도 설계자라 할 수 있다.[111] 하필 김우진이 자살 직전에 탑승해있던 배에, 윤심덕도 탑승해있었고 그녀가 이 배에서 실종된 탓에 이런 오해에 더욱 불이 붙었다.[112] 서울대학교 언어학과 교수를 지냈던, 한국 언어학계의 원로 학자였다. 아버지 김우진이 사망했을 당시에는 2살 밖에 안 된 갓난아기였다.[113] 참고로 이 두 사람도 독립운동가 출신이다. 특히 신용호는 교보생명의 창립자이기도 하다.[114] 헝가리어로 헝가리를 부르는 이름이다.[115] 김두한이 뒷세계에 입문하게 된 계기가 이 시기에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116] 이 때문에, 이후에 민족문제연구소에서 발간하는 친일인명사전에 장지연이 부일 협력자로서 등재되었다.[117] 정확한 문서의 내용은 이렇다. 블라디보스토크 주재 일본 총영사가 1921년 5월 5일 일본 외무대신에게 보낸 '불령단관계잡건 시베리아' 편에 의하면, 장지연이 '경성 매일신보 기자였던 자이지만, 김경천의 초청에 응해 도래했다. 주우찌하에 있으면서 의병을 지휘하고 있다고 한다'고 기록했다.[118] 정치인 이재명과는 동명이인이다.[119] 할아버지의 뒤를 이어서 의사의 길을 걸었고, 해방 이후에는 박정희 대통령의 주치의로 활동하기도 했다.[120] 다만, 이 사람은 대외 활동을 아예 끊은 건 아니라서, 일제 강점기 중에 사진가로 활동했다.[121] 극중에서 송강호가 이정출 역으로 분했다.[122] 물론 절대 다수의 친일반민족행위자들이 기회주의적인 성향을 보였던 만큼, 황옥 역시 어쩌다보니 상황에 따라 독립 운동 노선으로 슬그머니 갈아탄 기회주의자였을 가능성도 없지는 않다.[123] 생전에도 사건에 대한 이승만 정부와의 관계에 대해서는 일체 증언하지 않았다. 참고로 이 안두희 피살 사건은 단순 사적제재로 이 사건의 전말과는 연관이 없다고 보고 있다.[124] 물론 당시에는 서울 시민이 피난을 못 가고 고립되는 상황을 초래했기에 그런 평가를 받았지만 시간이 지나고 어느 정도 재평가가 이루어져서 확실히 전략적 가치는 분명 있었다는 시각이 우세하게 드러나고 있다. 다만 너무 급급하게 끊어버렸다는 비판은 아직도 건재한다.[125] 이게 사실이라면 장경근 차관은 월권행위를 한 것이기 때문이다. 후술할 얘기처럼 신성모 장관이 폭파하도록 사주했거나 서로 합의 또는 묵인을 하고 벌였다는 것이 더 신빙성이 있다.[126] 다만 미군과 국방부가 지시의 핵심이었다는 점에는 이견이 없다고 보고 있다.[127] 동학 농민 운동의 주요 인물인 김개남에서 따왔다.[128] 바보회를 설립하던 때부터 함께 하였으며 사람의 희생을 강조하는 다소 과격한 성향을 가진 인물로 묘사 된다. 이 후 바보회를 이어가는 단체인 삼동회에서도 다시 언급된다.[129] 다만 전태일 평전이 나오기 전까지는 전태일이 스스로 몸에 불을 붙인 것으로 알려져 있었기 때문도 있긴 했다. 확실한 점은 전태일재단에서 나온 전태일 관련 글에서 종종 언급이 되고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이를 의식하였는지 전태일 평전 2판부터는 김개남에 대한 부분을 지웠으나 읽다보면 김개남이라는 인물에 대해서와 행동에 대해 드문드문 등장하고 있기에 아직도 종종 언급이 되는 편이다.[130] 현재까지 추려진 후보로는 전태일이 죽기 직전 담배가게에서 만났으며 분신 직전 제일 가까이 있었던 김영문이 후보라는 말이 있었으나 비흡연자이며 라이터를 소지하지 않았다고 반문을 한 상황이다. 그 외에 추려진 후보로는 평전 1판에 언급된 함께 노동 운동을 하던 연세대 기독학생회(SCA) 중 사울 알린스키의 사상을 지지하는 급진파 대학생이라는 주장도 존재한다.[131] 국가 원수를 죽였다면 암살자 입장에선 어떻게든 숨기는게 일반적인데, 육군본부로 갔다는 건 "내가 박정희 쏴 죽였소"하는 것 밖에 안되기 때문이다, 만약 살해 직후 바로 중정으로 갔다면 다른 사람에게 누명씌우거나 증거 인멸에 성공해 현재 이 문서에는 박정희가 누구한테 죽었는지도 미스터리로 남아있다고 서술되었을지도 모른다.[132] 이쪽은 부마항쟁, 5.18 민주화운동과 연계하여 나오고 있는 중이다.[133] 영화감독인 신상옥이 전처인 최은희와 함께 납북되었다가 둘이 함께 탈북한 후에 프랑스를 방문한 일이 있었다. 그때 김형욱과도 만난 바 있었는데, 당시 그는 신상옥에게 자기가 저술하고 있는 책의 원고들을 보여주면서 "이게 출판되면 나는 큰 부자가 될 수 있다."면서 희희낙락했는데, 이 만남이 있은 후에 오래지 않아서 김형욱이 돌연히 실종되었다. 그가 쓰던 책의 내용과 실종 사건이 관련이 깊다면 이 책은 박정희의 부정부패와 각종 치부를 폭로하는 책으로 추정되며, 아마도 이것이 그가 실종되는 원인이 되었으리라고 보여진다.[134] 일부 음모론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박정희가 자작극을 벌인 것은 아니다.[135] 684 부대는 대한민국 공군 소속 부대였다.[136] 다행스러운 점은, 2021년 현재 부대원들 중 7명의 정체는 이미 밝혀졌다는 점이다. 당시 충청북도 옥천군에서 마을 남성 7명이 실종되었다는 신고가 들어온 기록이 있는데, 확인된 결과로는 실종된 이들이 전부 684 부대에서 복무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137] 최종계급은 준위로, 2005년에 작고했다. 영화 실미도의 등장인물들 중 하나인 조돈일 중사의 모티브가 된 인물이다.[138] 그래서 부대원들이 반란을 일으키려 했을 때, 일부러 김방일 소대장이 출장을 간 이후로 반란 시기를 잡았다.[139] 2023년 현재 대한민국의 헌정 체제다.[140] 발굴 당시 유해 척추 부분에 스테인리스제 와이어가 감겨있어 척추 질환자로 추정되었다.[141] 1960~1980.05.21 실종. 그동안은 실종자로 분류되어 있었다.[주의] 실제 시신이 찍힌 사진이므로 주의.[143] 이 사건이 심각한 이유는 사건에서 조준희 일병에 의해 사망한 사람만 12명으로, 이는 임 병장 사건 당시의 5명, 일명 강화도 해병대 사건 당시의 4명을 가뿐히 뛰어넘는 피해 규모이고, 다른 사건은 구타나 총격으로만 이루어졌지만, 이 사건은 수류탄도 사용했다는 점에서 죄질이 심각하며, 결정적으로 위의 언급된 세 사건은 당사자들이 체포돼서 재판까지 받았지만, 이 사건은 후술하듯이 범인이 잡히기는 커녕 월북 후의 근황이 전혀 알려지지 않고 있다.[144] 이전에도 사건 부대인 제22보병사단에서 근무하던 사람들을 빼면 이 사건을 알던 사람이 없었으며, 2000년대 초에 진상 조사도 이루어지기는 했으나 별다른 진전이 없었다. 어느 정도냐면 제주 4.3 사건, 5.18 민주화운동 진상 규명에 힘쓰고 유의미한 성과를 거뒀던 참여정부마저도 이 사건 만큼은 명확하게 밝혀내지 못했을 정도였다. 따라서 사건이 있던지 어느덧 40년이 다되어 가지만 이 사건의 피해자의 유족은 아직도 국가배상을 못받고 있다.[145] 이후 제18대 대한민국 대통령을 지냈다.[146] 딴지일보의 창립자이자 여론조사기관인 여론조사꽃의 사장, 김어준의 뉴스공장의 진행자로 유명한 언론인 겸 작가다.[147] 증인들 중의 한 사람이 주진우에게 "당신을 노리는 조직폭력배들이 있다."며 흉기로 무장을 하고 다닐 것을 진지하게 권유할 정도로 상황이 심각했기 때문에, 결국 이후로 증인들을 만나서 취재할 때는 주진우 본인과 김어준 두 사람과 친분이 있던 국회의원들을 대동해서 신변보장을 받아야했다.[148] 이마저도 서울신문이 2011년 3월 9일날 기사에서 밝힌 이름으로 확실히 밝혀진 본명은 아니다. 다만 덩(鄧)씨인 것은 확실하다고 보고 있다.[149] 이같은 자기 배우자에 대한 정보도 잘 몰랐다는 진술로 인해 남편 진씨에 대해서 의심하는 목소리도 꽤 있었다. 다만 국가 정보기관 직원의 배우자는 그 사람이 무슨 일을 하는지를 은퇴할 때까지, 심하게는 죽고 나서야 아는 경우도 많았기에 아예 불가능하지만은 않다.[150] 국정원의 임무 중 하나가 산업 스파이 색출이니만큼 선박 직원의 의심 사항 확인이나 항로 행적 조사 등 굳이 세월호가 아닌 다른 선박이었어도 거쳤을 당연한 절차가 와전되었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다르게 생각해봐도 국정원이 다른 선박이 아니고 세월호만 특정해서 운영에 개입할 필요는 없다.[151] 검찰이 너무 노골적으로 영장에 집착한다는 것도 음모론 내지 의혹으로 제기했는데, 이와 관련해서는 유병언이 실질적인 책임자로 적어도 연대책임은 져야한다는 것도 있지만, 더 큰 이유는 사실상 유병언이 검찰이 그에 대해 뭘 한다고만 한다면 도피할 것임이 확실해서라고 잠정 결론이 난 상황이다. 과거 유병언은 오대양 집단 자살사건 당시 해명서만 쓰면 된다는 검찰의 말만 믿고 무방비로 갔다가 얄짤없이 구속된 뒤 징역 4년을 살고 왔다. 이렇게 거대한 배신을 경험해 봤던 그를 검찰이 조사한다고 나섰을 때, 유병언이 바로 무슨 짓을 했을지는 뻔했다.[152] 인사혁신처가 이래서 설립되었었다. 물론 이것과는 별개로 박근혜 정부의 인사 실패도 한몫하긴 했다.[153] 천안함 격침을 자기가 시인한 적도 있을 정도로 악랄한 북한이었다지만, 그 사건은 백령도 즉, 북한과 가까운 곳이라 도발하려고 맘만 먹는다면 충분히 발생 가능했던 일이고, 세월호 사건은 제주도 인근에서 발생했다. 즉, 상식적으로 북한이 세월호를 격침시키려했다면 다른 건 제쳐두고 북에서 넘어온 뒤 대한민국 해군에 걸리지 않고 남해까지 왔어야 한다는 것인데, 이게 가능했을까? 또 대남 도발 같은 목적은 제쳐두더라도 그렇게 민간 선박을 노리고 싶었다면 멀리 갈거 없이 국경 인근에 돌아다니는 어선을 노리는 게 더 안전했을 것이다.[154] 이것에 단순한 반박을 하자면 일단 침몰 지점은 주변에 섬도 안보이는 바다 한가운데라 오해할 수도 있으나 당장 침몰된 지점의 수심은 30m 안팎이어서 잠수함 같은게 다닐 수가 없었다. 반대로 타이타닉호가 침몰한지 100년이 지났는데도 침몰된 지점의 수심이 너무 깊어 선박 인양은 커녕 조사 잠수부도 투입을 못하고 있는 걸 생각하면, 세월호의 인양이 상대적으로 쉬웠던 원인이기도 했다.[155] 세월호 4번 평형수 ‘조타실 조정 불가’ 확인, 그럼 왜 비어 있었을까[156] 다만 회차의 문제나 신내차량기지 외에 차량기지를 지을 공간이 없어 일방통행선으로 고안했다는 설은 3호선과 4호선 또한 개통 당시에는 차량기지가 하나 밖에 없었다는 점에 의해 사실상 부정되고 있고, 현재에는 신내기지에 회차선을 만들만한 부지가 없어서 그랬다는 설이 상대적으로 더 신빙성이 있다고 여겨지고 있다.[157] 당시에는 경의선이 도시철도로서의 기능을 수행하지 않았고 3호선도 효과가 제한적이었다보니 은평구에게 있어서 6호선이 실질적인 첫 철도 교통이기도 했기에 이에 대해 은평구 측이 최대한 역을 많이 설치해 수요를 끌어들이려는 일종의 핌피 현상이 발생했거나 당초 6호선을 포함한 2기 지하철 계획의 목적이 철도 소외 지역의 도시철도 혜택을 누리게 하는 것이었던 만큼, 여러가지 외부적 요인이 작용한 결과물이 현재의 응암순환선이라는 것이다.[158] 물론 북한 측이 통신을 통해 목적을 밝히기는 했는데 요약하자면, "우리는 핵무기를 가졌으니 전 세계는 김씨 일가에 복종하고 조공을 바쳐라!"이다. 당연히 학계에서는 이런 개소리를 진실로 받아들이지 않고 있으며, 분명 다른 원인이 있다고 보고 있다.[159] 정확히는 해방 후 북한에 들어온 김일성이 그동안의 이미지와 달리 너무 젊어 보였기에 민중들에게 가짜설이 돌곤 했는데, 이것이 남한에서 진지한 가설처럼 유포되었다는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김일성의 이미지를 만들었던 보천보 전투는 역으로 후대에 실질적인 성과는 없었다는 것이 확인되었다.[160] 본인의 권력승계 정당성을 위해 김일성의 유언(혁명열사릉에 묻어달라)을 무시하고 엠버밍해서 금수산태양궁전에 전시한 점과 김일성 사후에 김일성이 아끼던 묘향산 특각이 갑자기 철거된 점이 대표적이다.[161] 일단 김일성이 1970년대에 김정일을 공식 후계자로 지명한 이후 권력이 다 넘어가긴 했으나 김정일 입장에선 김일성이 언제든 선동으로 재집권을 할 수 있다는 점에서 눈엣가시로 봤을 가능성이 컸을 가능성이 크고, 이후 김일성 사망하자마자 고난의 행군이 왔을 만큼 무능한 김정일 때문에 김일성이 분개했다는 증언도 여럿 나왔었다.[162] 김일성은 일찍히 김정일을 후계자로 내세웠으나 김정일은 죽을 때까지 후계자를 논하는 것을 꺼려 김정은의 집권도 불명확하는 등의 혼란이 존재했고, 김일성이 죽기직전까지 어느 방식이었을까는 무시하고 통일에 관심이 많았던 반면 김정일은 통일을 논하는 자를 반역으로 봤으며 김일성과 손자 김정은이 선당정치를 시행한 반해 김정일은 선군정치를 시행하는 등 부자라 해도 상당히 다른 점이 존재했다.[163] 오죽하면 '탈북자들이 정권을 고발하기 위해 쓴 집단노동의 산물 아니냐'는 의견까지 나오고 있는 상황일 정도.[164]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2011년 김정일이 사망했을 당시 조선중앙텔레비죤의 보도이다. 이때 보도에서 후계 서열을 알려주면서 100여명에 달하는 사람을 서열 순서대로 보도했는데, 당시 일반인에게는 김정은이 이 목록에서 처음으로 나온 고로 김정은에게 정권이 넘어가는 것 정도로만 알았지만, 학계 입장에서는 조선로동당 권력있는 당원들의 실명이 공개된 거나 마찬가지여서 조선로동당과 김씨일가 조사를 위한 훌륭한 자료가 되어주었다.[165] 번외로 김정은도 2010년에 공개 석상에 들어서기 전까지는 김정일의 무명의 후계자라 국정원 등의 정보기관도 잘 몰라서 한국 측이 당시 후지모토 겐지의 발언을 인용했을 때 'ウン'의 발음 문제로 이름이 김정'은'인지 '운'인지 조차도 불분명했으며 초기에는 아예 김정운으로 표기했었다. 이후 조선중앙통신이 한자이름을 金正恩으로 표기해서 김정은으로 확정이 되긴 했다.[166] 대표적으로 로동당 간부이자 현 국민의힘 국회의원인 태영호가 이런 취지의 답변을 했다.[167] 탈북 외교관이었던 김동수가 이런 취지의 진술을 했었다. 이 사람 말에 따르면, 김정일의 본처였던 김영숙이 김설송을 포함한 다른 자녀를 데리고 명절 때에 김일성에게 참배하러 가서 분명히 기억하며, 김정일이 김정은을 스위스로 유학 보냈듯이 이 사람을 스웨덴의 북한 대사관으로 보내 모셨다고 한다. 근데 문제는 김영숙이 김정일의 다른 처보다 찬밥 취급을 받고 공개석상에서도 잘 언급이 안 된터라, 이게 신빙성이 있는 지가 불분명하다는 것이다.[168] 종합하자면 2011년 김정일이 사망한 뒤 본격적으로 존재가 드러났으며 2012년 핀란드 방송 YLE에서 본인의 생에 짤막한 인터뷰를 하고 2013년 6월 즘에 국제학교인 유나이티드 월드 칼리지(UWC)의 모스타르 분교를 졸업했다는 것이었다. 참고로 이 외에도 2014년 10월 즘에 연합뉴스TV 측의 과도한 취재에 반발해 "그만하시죠"라는 말을 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다만, 존재 자체가 의문인 김설송과는 달리, 프랑스의 파리정치대학에서 학사 학위를 마쳤고, 북한 국민들의 인권 문제를 다루는 인권운동가를 지망한다는 점과 아버지의 사망 당시에는 가족들과 함께 마카오에서 살면서 집 인근의 호텔에서 근무했다는 점 등, 일상에 대한 정보가 꽤 알려진 편이었다. 그 이외에도 국제학교 재학 중에 김한솔을 만났던 남한 학생들의 증언도 있는 편이다.[169] 일단 2017년 3월에 올라왔던 문제의 영상은 국정원의 분석결과 김한솔이 맞다는 것이 확인되었다.[170] 2021년 현재 가장 유력한 설에 의하면, 김한솔은 현재 미국 영토에서 거주하고있으며, 미국 정부의 엄중한 보호를 받고있다고 한다. 이 가설을 따르면, 그동안 미국 정부가 자유조선과 에이드리언 홍 창에 대해 애매모호한 태도를 보인 이유가 명쾌하게 설명되지만, 이에 대한 분명한 근거는 없다.[171] 김주애의 위로 첫째 아들이 없다면 둘째다.[172] 조선중앙통신은 "장성택이 김정은이 집권한 뒤 경제가 무너지는 틈을 타 본인이 생각하는 개혁을 추진하기 위해 군을 이용해 실권을 장악하려 했다."라고 했지만, 이후에 "장성택이 수령님이 주신 귀한 자원들을 팔아먹고 부를 채웠다."로 말이 달라졌고 사형 판결문에서는 2009년에 행한 화폐개혁이 사실 장성택이 박남기를 시켜서 한 짓이라 그랬다고 밝혔다. 어느 쪽이든 하나의 원인을 콕 집어서 말하지는 않은 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