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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터리 관련 정보/역사 관련 정보/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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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역사 이전3. 상고 시대 (고조선과 진국)4. 삼국 시대5. 발해 (남북국시대)6. 후삼국시대7. 고려 시대8. 조선 시대
8.1. 구한말
9. 일제강점기 (1910-1945)10. 해방 이후
10.1. 미군정10.2. 제1공화국
10.2.1. 6.25 전쟁 (1950-1953)
10.3. 제3공화국10.4. 제4공화국10.5. 제5공화국10.6. 제6공화국10.7. 북한
10.7.1. 대남 도발 관련10.7.2. 체제 관련

1. 개요

미스터리 관련 정보 중 한국사에 관한 정보를 서술한 문서다.

2. 역사 이전

3. 상고 시대 (고조선과 진국)

4. 삼국 시대


* 신라 미추 이사금과 관련된 미스터리

5. 발해 (남북국시대)

6. 후삼국시대

7. 고려 시대

8. 조선 시대

8.1. 구한말

9. 일제강점기 (1910-1945)

10. 해방 이후

10.1. 미군정

10.2. 제1공화국

10.2.1. 6.25 전쟁 (1950-1953)

10.3. 제3공화국

10.4. 제4공화국

제4공화국은 유신 체제라는 박정희의 기나긴 독재 시기였던데다, 박정희 대통령 사후에 제5공화국이 들어서면서 금기의 사안으로 여겨졌고, 친박 등 해당 정권 시기의 부역자들과 그 후계 세력으로 구성된 다양한 정치 세력이 남아 있어서, 대부분이 끝내 진상이 밝혀지지 않은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10.5. 제5공화국

10.6. 제6공화국

10.7. 북한

10.7.1. 대남 도발 관련

10.7.2. 체제 관련

여기에는 북한 내부 상황이나 체제의 미스터리만 기재하며, 대남 도발이나 월북 등등의 미스터리는 따로 기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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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수치는 기록마다 왔다갔다 하는데 약 70~90%의 고인돌이 한반도에 몰려있다.[2] 1. 사람을 죽인 자사형에 처한다. / 2. 사람을 다치게 한 자곡물로 갚게 한다. / 3. 도둑질을 한 자는 노비로 삼되, 용서를 구하려면 50전을 내야 한다.[3] 고조선은 국가의 실존 가능성을 제외한 많은 부분이 불분명했었다. 그러나 저 3개의 조항 덕분에 사람의 목숨은 몰라도 적어도 인력을 중시했다는 것과 사유 재산을 인정했다는 점, 그리고 고조선 시대에도 노비제도 자체가 존재했음을 알아 낼 수 있었다.[4] 양웅이 살았던 시대에는 이미 고조선이 멸망하여 한나라의 행정구역인 한사군이 설치되어있었다.[5] 참고로 여기서 말하는 동이는 순전히 중국 동부에 사는 비(非) 한족계 민족들을 뭉뚱그려서 가리키는 말이며, 환빠들의 주장과는 달리 모든 동이족이 한민족인 건 아니다.[6] 현대 일본인류큐인의 공통조상으로 추정되는 민족이다.[7] 다만, 트랜스유라시아어족 가설은 억지춘향으로 끼워맞춘 결과에 가까워서, 주류 언어학계로부터 철저히 무시받았다. 이 가설은 상술한 고고학적 성과를 바탕으로, 한국어일본어족, 퉁구스어족, 몽골어족, 튀르크어족이 모두 하나의 어족으로 묶는 설이고, 기존의 알타이 제어 가설을 더욱 확장한 것이지만, 기초어휘 수준에서 차이가 크게 나는데다, 어원 상 서로 무관한 어휘를 억지로 끼워맞추는 식으로 동원어라고 주장하는 등의 문제가 많았다.[8] 현대의 기술력으로 정문경을 만들자면 대량생산하고도 남는다.[9] 물론 그 북한이라고 해서 이런 고고학, 역사학 연구를 아예 안 하고 있는 건 아니다. 그러나 북한 학계가 주류에서 신용이 높지 않은 것도 있고 낙랑군 시기 유물로 정설 잡히는 유물들을 억지로 위만 시기의 유물이라고 주장하니 영 신뢰를 받지 못하는 것이다.[10] 이마저도 진국이 실제로 한반도 이남에 존재자체는 했던 국가라는 확증되진 않은 설을 전제로 깔고 들어간 것이다. 진국은 어떤 형태이든 실존했는지 조차 확증된 건 아니라서 역사적인 실체가 있는 고유한 국가인지, 아니면 한반도 이남에 존재했던 여러가지 국가를 일반적으로 지칭하는 단순 명칭이었는지 조차 완벽하게 입증된 것이 없다.[11] 정확히는 가야고대 한국인과 잔존한 선주민들이 공존하는 상태로 파악하고 있다. 이에 따라 가야의 언어 환경도 선주민들의 언어가 조금씩 고대 한국어에 동화되던 과도기로 보거나, 최소한 지배층에서나마 고대 한국어가 링구아 프랑카로 널리 쓰이던 양층 언어 상태로 파악하는 여론이 우세해졌다.[12] 흔히 아라가야라고 불리는 나라다.[13] 여덟 개의 소국들 중 이름이 확실하게 확인되는 나라는 골포국(마산), 칠포국(함안군 칠원읍 지역), 고차국(고성군), 사물국(사천시)정도이다.[14] 미토콘드리아DNA는 모계로만 유전이 되므로, 이를 이용해 특정인이나 특정 인족 집단을 모계 혈통에 따른 일정한 하플로그룹으로 분류할 수 있다.[15] 이 경우는 상술한 반도 일본어설의 강력한 근거 중 하나로 쓰일 수 있지만, 현대 야마토 민족의 직계 조상인 야요이인과는 달리 조몬인아이누족의 직계 조상이라서, 조몬인과 야요이인, 한국인, 야마토 민족 간의 연관 관계를 설명하기가 더 까다로워지는 문제가 있다.[16] 금나라에서 자기들 역사를 기록한 책인 금사에 나와있는 내용이다.[17] 또는 고려인. 대충 신라에서 고려로 넘어가는 시기에 여진족의 땅으로 넘어간 듯하다.[18] 이런 고귀한 혈통의 이방인 후예는 창업군주의 출신과 관련된 전설에 흔히 나오는 부류다. 즉 주몽이 용의 아들이라거나 박혁거세가 알에서 태어났다는 설화와 유사한 형태다.[19] 한사군 중에서 가장 오랫동안 살아남은 군현은 현도군, 그리고 대방군인데, 낙랑군과는 다르게 현도군은 정확한 위치에 대해 논쟁이 벌어지는 것만 빼면, 딱히 논란이 되는 건 없다.[20] 일단 낙랑군은 미천왕 집권 시기에 고구려에 완전히 복속되었다.[21] 사실 최씨낙랑국이 독립국인지도 논란이 많다.[22] 다만 후술한 목협만치가 목만치와 동일인물이라면 전혀 등장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23] 목(木)씨는 대성팔족 중 하나인 목리(木刕)씨의 축약형으로, 목협(木劦)씨는 목리(木刕)씨의 오기로 추정된다. 즉 두 인물의 가문과 이름은 완벽히 일치하는 것.[24] 한국어 독음은 기생반숙녜이다.[25] 혹은 이들의 혼혈인이라는 설도 있는데, 어느 쪽이건간에 한반도 통일을 외쳤던 것으로 미루어서, 출신 성분이 무엇이든지간에 일단은 한국인에 좀더 가까운 정체성을 가졌다는 점은 분명하다.[26] 일단 그는 삼국통일을 명분으로 내세우고 고구려와 동맹을 맺긴 했다.[27] 현존하는 한국 쪽의 사료에서 이 반란을 언급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삼국사기인데, 여기서도 대수롭지 않은 사건인양 간단히 언급할 만큼, 당대에도 관련 기록들이 이미 대거 소실된 상태였다.[28] 백제는 관산성 전투에서 신라와 싸우다 국왕인 성왕이 전사한지 얼마 안 된 상태였다. 무왕 또한 심심할 만하면(...) 신라를 침공하였다.[29] 그러나 선화공주가 신라 내부의 권력 다툼에서 패해서 백제로 온 것이라면, 선화공주가 신라에 적개심을 가지고 있었기에 무왕과 함께 신라를 맹공격했다는 추론이 충분히 가능하다. 당장 정사에서도 신라의 왕자였지만 왕실에서 쫓겨난 탓에 신라에 엄청난 적대감을 가져 신라를 맹공격한 인물이 존재한다. 이 추측을 따르면 서동 설화에서 선화공주가 가짜 뉴스로 인해 궁궐에서 쫓겨났다는 부분은 선화공주가 권력 다툼에서 패하여 유배를 갔다는 사실을 설화적으로 표현한 것일 가능성이 있다.[30] 현재의 익산시[31] 조만간 나당 연합군이 반드시 침공할테니, 이들을 막으려면 적군이 탄현과 기벌포를 넘게 하면 안 된다는 내용의 전쟁 전략을 서술한 상소이다. 그러나 간신과 요사스러운 대부인을 멀리 하라거나 사치와 향락을 줄이라는 내용은 없다. 일부 사학자들은 의자왕이 실제로 간신과 대부인의 손에 놀아나 사치를 즐겼다면, 이를 지적하여 귀양을 갔다고 기록되어 있는 성충이 마지막 상소문에서 다시 한 번 사치에 대해 언급했을 것임을 지적한다.[32] 의자왕은 마지막에 성충의 말을 듣지 않아 이렇게 된 것을 후회한다(悔不用成忠之言 以至於此)고 했으나, 성충의 전략을 듣지 않았던 것을 후회했는지, 삼국사기의 기록처럼 간언을 듣지 않았던 것을 후회했는지는 알 수 없다.[33] 한 가지 염두에 둘 점은, 이 가설은 말년의 의자왕을 옹호하는 가설이 아니라, 의자왕의 패착은 왕권 강화의 시기를 잘못 잡았다는 것임을 주장하는 가설이다. 즉 신라, 당과 대립하는 상황에서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고위 권신들을 대거 숙청했던 것이 패착이라는 것.[34] 일본서기에 기록되어 있지만, 기록 자체는 일본세기에서 인용했다.[35] 당이 백제를 정복한 후 정림사지 오층석탑에 새긴 것이다.[36] 그대로 읽으면 ‘대부인’으로, 여기서는 의자왕의 왕후를 의미한다. 하시카시는 일본어가 아닌 고대 한국어(백제어)로, 백제에서 왕후 혹은 부인을 가리키는 대명사로 추측된다.[37] 고구려 관련 기록에서는 고구려보다 북쪽에 있는 부여를 정복하려고 하는 대목에서 북명을 언급하고 있으며, 부여보다 북쪽에 있다고 서술하고 있다. 그래서 고구려 관련 기록에서 말하는 북명은 함경도가 아니라고 여겨진다.[38] 그 위치 때문에 신라 관련 기록에서 언급되는 북명동예를 가리키는 다른 이름으로 본다.[39] 다른 기록에서는 용성국 또는 화하국이라고 나오기도 한다.[40] 다만 주류 역사학계에서는 이 주장에 대하여 신라불교가 유입된 후에 불교적인 윤색이 더해진 결과물이라고 보고있다. 한때 일본언어학자오노 스스무가 주장한 일본어타밀어에서 기원했다는 학설과 연계되어 석탈해일본으로 이주한 타밀인의 후손이었다는 설이 제기된 바 있었으나, 일본 어디에서도 타밀계 유이민이 있었다는 고고학적 근거를 찾을 수 없어서 석탈해 타밀인 설과 일본어 타밀어 기원설이 같이 타격을 입었다.[41] 석탈해 관련 설화에 나오는 까치와 관련된 이야기와 연관된 것으로 보이는 설화가 캄차카 반도의 원주민들인 축치인들의 설화에서 발견되었다.[42] 도호쿠 지방과 홋카이도는 지금이야 일본의 주류 민족인 야마토 민족이 다수를 차지하지만, 고대에는 아이누족이 절대다수를 차지하던 지역이다. 이 설에 따르면, 석탈해한반도 동남부로 이주해온 아이누계 이주민이다.[43] 신라의 건국자라는 의미는 아니다. 하지만 고구려태조왕이 건국자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태조'라는 시호를 받은 것처럼, 건국자에 준하는 중시조라는 의미에서 이런 칭호가 올려진 것으로 보인다. 주류 역사학계는 알려진 그대로 박혁거세신라의 건국자라고 보고 있다.[44] 무려 회전에서 100만 명 이상의 대군을 전멸시켰다.[45] '을지'의 '지'는 고대 한국어로 오늘날의 '님'에 해당하는 존칭접미사다.[46] 이 설에 의하면, 을지문덕선비계 고구려인이라고 한다. 이는 울지경덕이 을지문덕과 친족이거나, 비슷한 출신 성분을 가졌으리라는 가정에서 나온 가설이다.[47] 즉, 오늘날 방식대로 하면 가야 주재 일본 대사인 셈이다.[48] 현재의 유력한 가설에 의하면, 일본어족의 원향은 한반도 남부라고 한다.[49] 김부식 본인도 이런 기록에 의구심을 품긴 했으나, 전근대 시대의 기술력으로는 고고학 연구를 통한 고증을 하는게 불가능했던 터라, 나름대로 합리적인 추측을 한 것으로 보인다. 이런 문제는 헤로도토스히스토리아를 저술했을 때나, 사마천사기를 집필했을 때에도 맞닥뜨렸던 것이다. 따라서 이때 당대의 역사가들도 밝혀내지 못한 부분은 현대의 고고학자들이 관련 유물과 유적, 기록물들을 첨단 과학기술을 동원해서 연구하고 있는 상황이다.[50] 참고로 해씨라는 성은 우리가 아는 태양에서 온 것이 맞다.[51] 고주몽고씨나, 고구려의 '고'가 모두 한자로는 높을 고이고, 옛날 사람의 관념에서 높이 떠있는 건 태양이기 때문에 '해'와 '고' 모두 고구려어에서 동의어로 통했으리라고 보여진다.[52] 다만 대조영이 고구려의 계승을 표방한 것으로 보아 그 정체는 고구려 유민 혹은 말갈계 고구려인으로 추측된다.[53] 세계사적으로 보면 서로 다른 민족들끼리 융화하여 새로운 민족이 되는 경우는 많다. 멀리 갈 것도 없이, 한국사에서도 부여계와 예맥계, 고조선계 부족들끼리 융화하여 생겨난 고구려의 사례가 있으며, 세계사적으로는 이탈리아 반도에서 유래한 라틴족과 토착민인 켈트인, 그리고 독일에서 건너온 게르만족이 합쳐져서 오늘날의 프랑스인이 된 사례가 있다.[54] 발해의 역사를 중국사로 편입시키려던 중국공산당동북공정 정책에 최초로 헤드샷을 날린 이들이 다름아닌 중국역사학자고고학자들이다. 사실 어느 국가를 막론하고 역사왜곡을 주도하고 조장하는 집단은 역사학자 및 고고학자, 과학자들이 아니라, 국가의 지도/지배 계층+기득권자들 및 그들과 결탁한 어용학자들이다.[55] 기록이 맞다면, 당시에는 양력 12~1월이었을 가능성이 큰데, 제사였다면 몰라도 술 마시다가 동사하려는 게 아닌 한 놀려고 그런 곳에 간다는 게 말이 안 맞는다.[56] 즉, 기록이 잘못되었거나 견훤 측이 왜곡했다는 것이다. 번외로 애초에 이 사단이 문자 해석을 잘못해서 일어난 거란 이론도 있는데 하단 참조.[57] 알영부인의 출신지인 알영정과 박혁거세의 무덤인 오릉이 포석정 주위에 있었다.[58] 충북 제천의 덕주사에서 내려오는 전승에만 나오는 인물로 경순왕의 후손과 관련된 기록에서는 일절 등장하지 않는다. 그 때문에 진짜 경순왕의 딸인지 아닌지 알 수 없다.[59] 물론, 이 시기는 왕족 및 중앙 귀족들이나 성씨를 썼지, 따로 봉기해서 칭왕하지 않은 이상에야 지방 호족들조차 성씨를 쓰지 않았던 때라서, 실제 궁예가 궁씨를 자칭했는지는 의문이다.[60] 헌안왕은 문성왕의 숙부로, 궁예가 정말 헌안왕의 아들이라면 궁예는 문성왕과 사촌 사이가 된다.[61] 대체적으로 신라-왜 하면 일본 측이 신라를 자주 정벌하고 어떤 때는 아예 국가 멸망까지 갈 뻔했다는 것 정도로 알고 있으나 사실 신라도 심심하면 일본을 침략했었다. 신라의 일본 침공 사례 참조.[62] 다만 저 일본측 기록에도 반론은 있는데 바로 일본에 쳐들어왔던 신라를 기록할 때 신라구랑 신라의 정규군을 가리지 않고 그냥 '신라'라고 한 점이 있다. 이 때문에 구체적인 정체 및 구조를 알 수 없어 애초에 이 둘을 가르는게 무리라는 의견도 있다.[63] 김홍도일본에 간 적이 있기는 하나, 그때가 1788년의 일이라서 1794년부터 시작해서 단 1년 남짓만 활동한 도슈사이 샤라쿠와 동일인일 가능성은 없다. 당시의 에도 막부의 폐쇄적인 외교 정책으로 미루어보면, 외국인이 잠깐동안 슬쩍 활동하고 사라질 만한 정황도 존재하지 않았다.[64] 흔히 드라마나 영화에서 나오는 거랑은 달리 사약은 먹자마자 피를 토하면서 고꾸라지는 즉효약이 아니다. 학계에서도 성분이 의문인지라 무슨 재료로 만들어지는 건지를 알 수 없을 뿐 방사능 홍차도 죽이는 데 2주가 걸리는 마당에 적어도 전근대에 저런 즉효성 독약을 만드는 게 가능할 리는 없다고 보고 있다. 또한 역사 내에서도 사람마다 케바케라 몇 그릇을 마시고도 죽지 않았다는 기록이 분명히 있고 몇 그릇을 먹였든 이거만 먹인다고 사형 집행이 끝나지 않는다. 사약 문서 참조.[65] 참고로 이완용은 그 행적과는 별개로 당대 뛰어난 명필이기도 했다.[66] 당시 호조 판서가 기획재정부장관과 비슷한 업무를 했다.[67] 고종이 수렴청정받던 시절에 흥선대원군이 주로 거주하던 곳이었다.[68] 당시에 박연조선에서 탈출하여 네덜란드로 귀국하려는 생각을 몇번 한 적이 있었으나, 그때마다 모조리 실패한 후에 자포자기로 영구 정착을 결심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박연 입장에서는 이것도 나쁜 선택은 아니었던 것이, 당시 조선 조정에서 서양인을 신기하게 여겼기 때문에 박연에게 할 수 있는 한 최고의 대우를 해주었고, 과거에 응시할 자격을 주어 무관이 되게 한 후에 유럽식 대포를 제작하는 기술직에 특채하였을 뿐만 아니라, 조선인 여성과 혼인을 시키고 생계를 지원해주어서 편안히 정착할 수 있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현대 역사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박연은 본래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 소속의 사략선 선장, 즉, 네덜란드 정부의 공인을 받은 해적이었다고 한다. 상식적으로 해적선 선장이 안정된 삶을 누릴 수 있을리가 만무하므로, 그의 입장에서는 자신에게 인간적인 대우를 해주고 안정된 지위를 제공한 조선에게 마음이 끌릴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69] 물론 한국의 성씨의 상당수는 개화기 이후에나 수가 급격히 늘어나서 오늘날과 비슷한 인구 비율을 이루었다고 하지만, 한국인들의 뿌리에 대한 집착은 이미 조선 시대부터 굉장히 남다른 수준이었다. 당대의 법률로 현직 관료가 아닌 사람도 4대째까지 제사를 지내는 것을 허용했는데, 뒤집어말하면, 이는 보통의 사람들도 자기 증조부모까지는 이름을 정확히 기억할 만큼, 조상이 누구고 자기 뿌리가 어떻다는 것에 대한 인식이 확고했다는 뜻이다.[70] 박연한국 땅에 정착한 지가 근 400년이 다 되가므로, 그의 후손이 현존한다고 한들 오랫동안 지속된 혼혈로 인해 외양 상으로는 보통의 한국인과 구분하긴 불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이걸 감안해도 그의 후손들이나 가계도에 대한 기록이 일절 남아있지 않다는 건 여전히 의문이다. 참고로 박연은 이미 네덜란드에서 결혼해서 처자식을 둔 상태였으므로, 네덜란드에는 그의 후손들이 현존하고 있다.[71] 다만 이쪽 설도 인조랑 아예 연관이 없다는 것은 아니다. 요약하자면 이 설의 입장은 인조가 철저히 이런 소현세자의 투병 상황을 이용했다고 보는 입장이다.[72] 인조가 아닌 다른 인물이나 세력이 암살했다는 주장 측은 서인이 그 배후일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73] 당시 왕위를 노릴 직계왕손이 사도세자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세손도 있었다지만, 상식적으로 멀쩡히 살아있는 세자를 냅두고, 그 아들인 세손을 추대하는 짓을 벌일 리가 없다.[74] 이후에 노론이 정치 성향이나, 사도세자를 구하지 못한 것에 대한 책임 문제 등으로 인해 시파와 벽파로 나뉘었으므로, 노론이라고 해서 꼭 보수 성향인 건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영조는 분명히 보수 성향이 짙은 왕이었고, 이것때문에 사도세자와 그를 중심으로 한 노론의 주류 세력들이 진보적 성향을 드러낸 것에 대해, 영조가 이를 아니꼬와해서 아들을 미워하기 시작했다는 설이 학계에서 제기된 바 있다. 이 설에서도 물론 임오화변은 영조가 독단적으로 저지른 짓이고, 노론 전체가 세자를 보호하는 입장이었다는 전제는 분명히 깔려있다. 이 설의 문제점은 사도세자의 대리청정 기간이 너무 짧아서, 그의 실제 정치 성향이 어땠는지가 분명치 않다는 것이다.[75] 조폭이나 일진 패거리를 일컫는 단어인 불한당이 여기서 유래했다. 당시에는 노론의 분파들 중에서 그 어디에도 끼지 않은 중립파를 멸칭으로 불한당(不漢黨)이라 부른 데서 유래했다. 물론 지금에 와서 쓰는 단어는 '땀도 안 흘릴 정도의 냉혈한'이라는 뜻의 한자(不汗黨)를 쓰는 것으로 바뀌긴 했으나, 이쯤부터 이런 말이 쓰인 건 사실이다. 자세한 건 정병설 항목 참고.[76] 사실 사도세자가 살아있을 적부터 숙의 문씨와 그녀의 가문이 지속적으로 그를 모함한 바는 있다. 이들은 사도세자의 어머니인 영빈 이씨와 아내인 혜경궁 홍씨까지 업신여기긴 했는데, 이들은 누가 배후에 있어서 그런 게 아니라, 그냥 지들이 문숙의에 대한 영조의 총애만 믿고 나댄 것에 불과했고, 그 이외의 권력 기반이 전무한 탓에 단 한 번도 집권 세력이 되어보지를 못했다. 막상 진짜 집권 세력이었던 노론 측은 이런 문숙의 가문의 행보에 대해 이뭐병한 반응을 보인 걸 넘어서, 감히 세자를 모욕한 것때문에 이들을 엄청나게 증오하고 있었다. 당연히 세자의 아들인 정조도 자기 아버지를 모욕한 이들을 좋게 볼 리가 없어서, 즉위하자마자 숙의 문씨 본인은 사약을 내려서 죽여버리고, 그녀의 친정 식구들의 신분을 노비로 격하시켜서 개발살냈다. 사실은 이미 사도세자가 살아있을 당시에도 일개 후궁이던 문숙의가 영조의 아이를 임신한 것을 무기삼아서 세자의 생모인 영빈 이씨에게 개기는 하극상을 벌이자, 당시 왕대비였던 인원왕후가 대노하여 그녀를 회초리로 두들겨 팼음은 물론, 이에 빡쳐서 대드는 영조와도 대판 싸운 바 있다. 이러니, 그녀가 임오화변의 직접적인 원인은 아니라고 보여진다.[77] 화완옹주영조가 개인적으로 가장 사랑한 자식이었다. 이쪽도 노론 음모론때문에 자기 오빠인 사도세자를 죽게 한 악녀라는 오해를 받은 것과는 달리, 오히려 당대인들조차 극도의 브라콘이라고 봤을 만큼 자기 오빠를 끔찍이도 아꼈던 사람이다. 뒷날에는 노론 음모론에서 그랬듯이 조카인 정조와 적대하는 사이가 되었으나, 음모론에서와는 달리 정치적인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순전히 그녀가 정조가 아끼는 사람들에게 극심한 투기를 부려댄 탓에 정조 본인에게 불만을 샀기 때문이었다. 한중록에 의하면, 화완옹주가 오빠인 사도세자아버지의 손에 잔혹하게 살해당하자 세손(정조)을 지키겠다며 그를 강제로 올케인 혜경궁 홍씨(한중록의 저자)에게서 떼어놓으려하거나, 세손 시절의 정조가 송나라의 역사를 다룬 책인 송사의 편찬에 참여하자 이것에다가도 질투를 하는 기행을 보이기도 했다. 당연히 정조 입장에서는 자신에게 이렇게 심한 집착을 해대는 고모가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었다.[78] 정조가 죽어가면서 어린 순조정순왕후 김씨에게 맡겼고, 뒷날 황사영 백서 사건으로 정순왕후를 포함한 경주 김씨 세력이 실각할 때까지 그녀는 의붓손자이기도 한 선왕의 유훈을 충실히 지켰다.[79] 조선시대 왕들의 일상은 이랬다. 새벽 4시 경에 일어나서 아침 식사가 준비되는 동안에 공부를 하다가, 그 뒤에 식사를 하고 곧바로 어전 회의에 참석해서 신하들과 정책에 대해 논하거나, 올라온 상소문을 읽고 대책을 논의하였다. 그 다음에는 경연이라 하여 홍문관에서 열리는 강의에 참석해서 국정에 필요한 내용을 학습하였고, 이후에 저녁식사를 먹은 후에 다시 공부를 하고 일성록이라는 이름의 일기장을 작성한 뒤에 겨우 잠에 들었다. 이때의 시간이 오후 10시였다. 이 정도면, 훨씬 복잡한 행정 처리를 해야하는 현대의 대통령들조차도 격무에 시달린다는 소리가 나올 지경이다. 정조의 삶은 이런 일이 매일 반복되는 피곤한 인생이었다.[80] 여기서 한가지 함정이 있는데, 정조는 다른 왕들과는 달리 홍문관의 경연관들의 학문 수준이 자기보다 낮아서 불만을 품다가, 아예 자기가 직접 경연관들과 신하들을 불러서 강의를 했고, 세손 시절부터 송나라의 역사를 연구해서 송사를 직접 편찬하는 등, 선왕들과 비교해도 사서 고생하는 수준으로 알아서 업무에 파묻혀 사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모든 직무가 끝나면 대신들의 퇴근을 막고 밤새도록 술판을 벌이거나, 그 와중에 정약용같은 총신이나 당대의 권세가인 심환지 등에게 술 강요를 일삼고는 이들이 취해서 헤롱대는 모습을 보고 놀려대기도 하고, 어전 회의 중에도 시도때도 없이 담배를 뻑뻑 태워대는 등 건강에 악영향을 줄 행동을 마구하던 사람이니, 당시의 의학 수준을 생각하면 44세까지 산 게 도리어 기적이었다.[81] 노론 음모론때문에 착각하는 사람이 많은데, 정조조선의 역대 왕들 중에서 가장 권력이 센 군주들 중의 한 사람이다. 이미 절대권력을 휘두르는 상황에서 자기 최측근을 임명했다가 마음대로 숙청해버리는가 하면, 왕궁 경호를 핑계로 왕실 친위대인 장용영까지 설치했기 때문에, 암살 기도는 고사하고 정조와 정치적으로 대적하는 것 자체가 자살 행위나 다를 바 없었다. 그의 아들인 순조가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그를 바지사장 삼아서 권력을 농단하려고 암살 기도를 하는 자가 없었을까하는 주장도 있지만, 그럴 가능성때문에 미리 자신과 친밀한 사이였던 대비 정순왕후 김씨에게 뒷일을 부탁했고, 실제로 정조가 사망하자 곧바로 정순왕후의 수렴청정 체제로 이어졌기 때문에, 그를 암살해봤자 아무런 정치적 이득도 얻을 수가 없었다.[82] 실제로 나경언은 급작스런 고변을 하여 임금을 놀라게 했다는 죄로 처형되었다.[83] 이 사건 전에 사도세자가 정신병을 앓는 와중에 내시 한 명을 베어죽인 일이 있었다는 점에서 착안하여, 영화 사도에서는 그 살해된 내시가 나경언의 동생이었기 때문에, 복수심에 불타서 그의 행적에 대해 고변했다고 묘사했다. 하지만, 이건 창작물의 설정이고, 실제 기록에는 나경언과 문제의 내시 사이의 관계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도 하지않고 있다.[84] 편집증으로 추정된다. 실제로 현대의 정신과 의사가 당대의 기록을 보고 영조에게 편집증이 있었다고 진단했다.[85] 당대에도 세자 시절의 영조경종을 죽였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져있었고, 그래서 이인좌의 난의 주모자들은 국문을 당하는 와중에 영조에게 라고 부르면서 "네가 전하를 죽였느냐!"며 악을 쓰는 하극상까지 벌일 정도였다. 그러나 경종 본인이 영조가 자신을 독살하려고 했다는 의혹을 전면 부정했으며, 무엇보다도 이미 그의 건강이 좋지 않았다는 점, 마지막으로 영조가 형이 위독해진 것에 대해 심하게 자책했다는 기록을 근거로, 주류 학계에서는 단순한 음모론으로 치부하고 있다. 설령 영조가 경종의 죽음에 일조했다고 해도, 의도적인 게 아니라 모르고 그랬을 것으로 보는 게 정설이다.[86] 이런 학계의 분석을 바탕으로 만든 영화가 바로 사도다. 기존의 영조정조 관련 창작물들이 정치 투쟁을 다룬 것인데 반해, 사도에서는 학계의 추정대로 영조 개인의 인간성 문제와 사도세자의 정신의학적인 문제, 기타 주변 왕실 인물들과의 관계에 포커스를 맞추고 있다.[87] 일단 정후겸노론이 아니라, 소론 소속인 것으로 추정된다. 그래서, 그가 정조에 대한 암살을 기도한 것은 소속 붕당의 이익을 위해서는 아닌 것으로 보여지며, 정후겸 본인이 화완옹주의 양자라는 점때문에 자신의 양어머니와 대적하게 된 정조에게 원한을 품었을 가능성은 있다. 하지만, 화완옹주는 조카인 정조와 관련된 인물들을 남녀 가리지 않고 시샘했을 만큼, 조카를 끔찍이도 사랑하고 집착한 사람이었기에 아들의 이런 행보에 동조했을리가 없어서 논란이 있는 편이다. MBC의 드라마인 옷소매 붉은 끝동에서는 진짜로 저런 이유로 정후겸정조에게 적대감을 품은 것으로 나오지만, 이는 드라마 상의 설정일 뿐이다.[88] 물론, 정후겸화완옹주의 양아들이고, 홍인한사도세자의 장인인 홍봉한의 남동생이자 노론 벽파의 실세였으니, 이들에게 권력이 없는 건 아니었다. 그러나 노론 음모론마냥 이들의 권력이 왕실을 압도했다는 건 절대 아니다. 그나마도 벽파의 명목상 영수였던 홍인한의 형 홍봉한은 정조의 왕위 계승을 방해하는데 전혀 가담하지않았고, 그의 즉위를 방해하고 암살을 기도한 혐의로 처벌받은 이들도 홍인한, 정후겸 둘 뿐이었던 것으로 미루어보면, 막상 벽파 내부에서는 실세의 행동에 동조하지않는 여론이 대세였던 것으로 보인다. 임오화변 건으로 인해 화풀이 대상으로 몰린 것에 대한 두려움에 더해, 당시에 정순왕후의 후광을 등에 업고 자라나던 경주 김씨 세력에 대한 증오와 경계심도 있어서 자기들 딴에는 생존을 위한 계책을 나름대로 세웠지만, 이미 왕위 승계가 확정된 세손의 즉위를 방해하는 것이 얼마나 무모하고 위험한지를 모를 리 없던 벽파 측에서 실세고 뭐고 막나가는 홍인한을 버리기로 한 것이다.[89] 이 사건도 노론이 일으킨게 아니라, 영조가 독단적으로 벌인 짓이다. 정작 노론은 사도세자의 죽음을 막으려고 애썼는데, 외려 이 때문에 영조의 미움을 사는 바람에, 주요 인사들이 대거 파직되면서 뿔뿔이 분열되어 버렸다.[90] 왕권 강화를 하려했다고 해서, 원래 정조의 권력이 약했다는 게 절대로 아니다. 오히려 정조는 권력을 강화하려고 시도하기 전에도 이미 절대권력을 휘두르고 있었고, 신하들은 이를 견제할 엄두조차 못 내던 상황이었다. 즉, 이런 상황에서 왕권을 강화한다는 얘기는, 순전히 신하들을 완전히 기를 죽이고 자기 마음대로 통치하겠다는 것에 불과하다.[91] 현재의 일본국을 말하는 게 아니라 당시 일본 제국을 말하는 것이다.[92] 어느 정도였냐면 사건 전후로 고종의 폐위 시도도 했었다. 그래서 그런지 고종이 대원군의 임종은 커녕 장례식에도 오지 않았었다.[93] 일본은 흥선대원군을 이용해서 이 사건을 최대한 조선 왕실의 내부 다툼으로 몰아가려 했었다. 이에 폐위시도도 할 만큼 막나가던 흥선대원군은 일본에게 있어서 훌륭한 카드였다.[94] 상술했듯이 대원군은 사건 전후로 별세하기 전까지 고종에게 압박을 넣었었다.[95] 당시 한반도의 열강 침탈이 이루어 질 때 청나라, 러시아, 일본에 중점이 맞춰졌지만, 이 외에도 프랑스, 미국, 영국같은 선지도 존재했다. 실제로 을미사변 이후 고종은 차라리 미국, 영국의 선교사에게 도움을 받는 것이 자신의 신변에 더욱 안전할 것이라고 여겼던 바가 있다.[96] 한국에 번역되어 출간한 건 1982년이다.[97] 구체적으로 서술하자면 시체를 나체로 벗긴 뒤 '국부'에 칼집을 여러군데 낸 뒤 시신을 불태워버렸다고 한다.[98] 여기서는 그냥 이날 궁궐이 탔다고만 서술되어 있으며 왜 탔는지는 서술하고 있지 않다. 또한 불탔다는 날짜 또한 수정실록에는 서기 1592년 음력 4월 14일,선조실록은 서기 1592년 음력 5월 3일(혹은 서기 1592년 음력 5월 3일 이전)로 기록하고 있다.이날 궁궐이 모두 불탔으므로라는 말을 어찌 해석할 지가 관건일 듯하다.[99] 이는 평택에 위치한 원균의 가묘 때문이다. 이 가묘는 평택시와 원주 원씨 대종회가 많은 돈을 들이고 원균 기념관까지 세우는 등 많은 공을 들인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통영의 묘가 진짜 원균의 무덤으로 밝혀진다면 이 가묘의 입지와 존재 의의가 사라지기 때문이다. 물론 원주 원씨 내에서도 DNA 대조에 찬성하는 목소리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내부에서도 이견이 심하게 갈리는 건 맞아서 현재까지도 찬반에 대해 결론 내리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100] 번외로 이 무덤은 국도 77호선 확장 공사로 아예 사라질 뻔한 적도 있었다고 한다. 그나마 이쪽은 다행히도 주민들의 관심으로 해당 구간을 확장 구간에서 제외하도록 설계가 변경되어서 해결되었다고 한다.[101] 장영실의 최후에 대해서는 실각 이후에 즉각 유배를 가서 그곳에서 죽었다는 설과, 이후에 기존보다 다소 낮은 직책으로나마 간신히 복권되었다는 설, 고향으로 내려가서 은퇴했다는 설 등이 있다. 이 중 확실한 설은 아직 없지만, 급작스러운 몰락과는 별개로 그의 말년은 그렇게 비참하지는 않았으리라는 점은 분명하다고 보여진다. 장영실과 함께 파직되었던 동료 과학자들이 복권된 후에 본래의 업무로 되돌아왔으나 그만은 이런 기록이 없다는 점과, 이 시기의 장영실이 이미 고령의 나이였다는 점으로 미루어보아, 법적으로 복권은 되었으나 업무 복귀가 불가능한 나이라서 복직되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이다. 자세한 정황은 모르지만, 그의 최후는 의외로 새드엔딩이 아니었던 것이다.[102] 실제로 이런 문제때문에 일반적으로 족보는 사료로 쓰이지 않는다.[103] 실제로 고려에 비해 조선은 다소 폐쇄적인 경향이 있어서, 원나라 시기의 혼란을 피해 망명한 수많은 외국계 민족들에게 강력한 동화 정책을 실행한 바 있었다. 가령 세종대왕의 치세까지만 해도 조선으로 이주한 위구르족들을 중심으로 하여 존속해오던 이슬람 신자들의 커뮤니티가 조정에서 이들을 유교로 강제 개종시키면서 와해된 바 있으며, 한족이나 목호의 난 이후에도 잔존한 몽골인도 조선식 상투를 틀게 하고 한국어의 사용을 강요하면서 억지로 동화시켜 버린 바 있다. 이 때문에 장영실의 조상들이 이런 동화정책에 저항하다가 역적으로 몰려서 노비로 전락했다는 설이 있다.[104] 이와는 별개로 장영실의 조상은 조선과 별 인연이 없고 잠시동안만 조선을 방문했는데, 그동안에 조선인과의 사이에서 얻은 사생아가 장영실 본인이나 그의 아버지라는 설도 있다. 이는 조상이 꽤나 명망있는 사람인데 반해, 장영실은 노비 신분으로 태어난 사실과 부합하는 면이 있다. 하지만, 문제는 장영실의 어머니가 개인이 소유한 노비가 아닌 관청 소유의 노비, 즉, 관노인데 장영실의 조상이 무슨 수로 국가 재산인 관노와의 사이에서 사생아를 만드냐는 것이 있다.[105] 가령, 정약용이 정말로 말년에 가톨릭으로 원복했다면, 그의 가장 대표적인 저서인 목민심서를 포함한 여러 저서들이 가톨릭 교리에 따른 도덕관에 기초해서 쓰여졌을 가능성을 고려해봐야 한다.[106] 나머지는 이준, 이상설이다.[107] 대표적인 예로 정조 독살설.[108] 부정하는 측의 경우 조선의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의 저자 김을한이 대표적으로, 당시 구 한국 황실의 흡수를 바라고 있었던 일본측이 굳이 여기에 초를 치는 고종의 암살이라는 무리수를 저지를 이유가 없으며 시기적으로도 부적절하다고 보고 있다. 실제로 고종의 급작으러운 사망으로 영친왕은 급히 조선으로 떠났고 이방자와의 결혼도 그만큼 뒤로 늦춰졌다.[109] 실제로 김봉환일본과 접촉한 것으로 보이는 정황이 당대의 기록에서 보이고 있다. 당시 공산주의 세력에서는 '김좌진일본과 내통하고 있어서, 공산주의자들을 하얼빈의 일본 총영사관에 연락해서 팔아넘겼다'고 보고 있었는데, 정작 일본 측의 내부 기밀 문서에서는 김좌진을 포섭할 수 있는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 기술하고 있어서, 실제로는 암살을 사주한 김봉환이 그 자신이 일본의 밀정으로 일하는 것을 숨기려고 퍼뜨린 거짓 소문이라는 추정이 있다.[110] 정확히는 무궁화호, 새마을호, KTX, 수도권 전철 대다수 등 대부분의 열차가 다니는 주력 역사로서 구 역사라는 뜻이다. 현재도 구 역사는 경의중앙선 승강장으로 쓰이고 있어 역으로서의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다만 신 역사 이전 이후부터 계속 그랬던 건 아니고 2017년에 경의중앙선이 이설된 뒤부터 해당 기능을 수행했다. 번외로 2003년에 지어진 현 역사의 설계자는 당연히 한국철도공사(당시 대한민국 철도청)이지만, 민자역사까지 포함하면 한화그룹도 설계자라 할 수 있다.[111] 하필 김우진이 자살 직전에 탑승해있던 배에, 윤심덕도 탑승해있었고 그녀가 이 배에서 실종된 탓에 이런 오해에 더욱 불이 붙었다.[112] 서울대학교 언어학과 교수를 지냈던, 한국 언어학계의 원로 학자였다. 아버지 김우진이 사망했을 당시에는 2살 밖에 안 된 갓난아기였다.[113] 참고로 이 두 사람도 독립운동가 출신이다. 특히 신용호는 교보생명의 창립자이기도 하다.[114] 헝가리어헝가리를 부르는 이름이다.[115] 김두한이 뒷세계에 입문하게 된 계기가 이 시기에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116] 이 때문에, 이후에 민족문제연구소에서 발간하는 친일인명사전장지연이 부일 협력자로서 등재되었다.[117] 정확한 문서의 내용은 이렇다. 블라디보스토크 주재 일본 총영사가 1921년 5월 5일 일본 외무대신에게 보낸 '불령단관계잡건 시베리아' 편에 의하면, 장지연이 '경성 매일신보 기자였던 자이지만, 김경천의 초청에 응해 도래했다. 주우찌하에 있으면서 의병을 지휘하고 있다고 한다'고 기록했다.[118] 정치인 이재명과는 동명이인이다.[119] 할아버지의 뒤를 이어서 의사의 길을 걸었고, 해방 이후에는 박정희 대통령의 주치의로 활동하기도 했다.[120] 다만, 이 사람은 대외 활동을 아예 끊은 건 아니라서, 일제 강점기 중에 사진가로 활동했다.[121] 극중에서 송강호가 이정출 역으로 분했다.[122] 물론 절대 다수의 친일반민족행위자들이 기회주의적인 성향을 보였던 만큼, 황옥 역시 어쩌다보니 상황에 따라 독립 운동 노선으로 슬그머니 갈아탄 기회주의자였을 가능성도 없지는 않다.[123] 생전에도 사건에 대한 이승만 정부와의 관계에 대해서는 일체 증언하지 않았다. 참고로 이 안두희 피살 사건은 단순 사적제재로 이 사건의 전말과는 연관이 없다고 보고 있다.[124] 물론 당시에는 서울 시민이 피난을 못 가고 고립되는 상황을 초래했기에 그런 평가를 받았지만 시간이 지나고 어느 정도 재평가가 이루어져서 확실히 전략적 가치는 분명 있었다는 시각이 우세하게 드러나고 있다. 다만 너무 급급하게 끊어버렸다는 비판은 아직도 건재한다.[125] 이게 사실이라면 장경근 차관은 월권행위를 한 것이기 때문이다. 후술할 얘기처럼 신성모 장관이 폭파하도록 사주했거나 서로 합의 또는 묵인을 하고 벌였다는 것이 더 신빙성이 있다.[126] 다만 미군과 국방부가 지시의 핵심이었다는 점에는 이견이 없다고 보고 있다.[127] 동학 농민 운동의 주요 인물인 김개남에서 따왔다.[128] 바보회를 설립하던 때부터 함께 하였으며 사람의 희생을 강조하는 다소 과격한 성향을 가진 인물로 묘사 된다. 이 후 바보회를 이어가는 단체인 삼동회에서도 다시 언급된다.[129] 다만 전태일 평전이 나오기 전까지는 전태일이 스스로 몸에 불을 붙인 것으로 알려져 있었기 때문도 있긴 했다. 확실한 점은 전태일재단에서 나온 전태일 관련 글에서 종종 언급이 되고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이를 의식하였는지 전태일 평전 2판부터는 김개남에 대한 부분을 지웠으나 읽다보면 김개남이라는 인물에 대해서와 행동에 대해 드문드문 등장하고 있기에 아직도 종종 언급이 되는 편이다.[130] 현재까지 추려진 후보로는 전태일이 죽기 직전 담배가게에서 만났으며 분신 직전 제일 가까이 있었던 김영문이 후보라는 말이 있었으나 비흡연자이며 라이터를 소지하지 않았다고 반문을 한 상황이다. 그 외에 추려진 후보로는 평전 1판에 언급된 함께 노동 운동을 하던 연세대 기독학생회(SCA) 중 사울 알린스키의 사상을 지지하는 급진파 대학생이라는 주장도 존재한다.[131] 684 부대대한민국 공군 소속 부대였다.[132] 다행스러운 점은, 2021년 현재 부대원들 중 7명의 정체는 이미 밝혀졌다는 점이다. 당시 충청북도 옥천군에서 마을 남성 7명이 실종되었다는 신고가 들어온 기록이 있는데, 확인된 결과로는 실종된 이들이 전부 684 부대에서 복무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133] 최종계급은 준위로, 2005년에 작고했다. 영화 실미도의 등장인물들 중 하나인 조돈일 중사의 모티브가 된 인물이다.[134] 그래서 부대원들이 반란을 일으키려 했을 때, 일부러 김방일 소대장이 출장을 간 이후로 반란 시기를 잡았다.[135] 국가 원수를 죽였다면 암살자 입장에선 어떻게든 숨기는게 일반적인데, 육군본부로 갔다는 건 "내가 박정희 쏴 죽였소"하는 것 밖에 안되기 때문이다, 만약 살해 직후 바로 중정으로 갔다면 다른 사람에게 누명씌우거나 증거 인멸에 성공해 현재 이 문서에는 박정희가 누구한테 죽었는지도 미스터리로 남아있다고 서술되었을지도 모른다.[136] 이쪽은 부마항쟁, 5.18 민주화운동과 연계하여 나오고 있는 중이다.[137] 영화감독인 신상옥이 전처인 최은희와 함께 납북되었다가 둘이 함께 탈북한 후에 프랑스를 방문한 일이 있었다. 그때 김형욱과도 만난 바 있었는데, 당시 그는 신상옥에게 자기가 저술하고 있는 책의 원고들을 보여주면서 "이게 출판되면 나는 큰 부자가 될 수 있다."면서 희희낙락했는데, 이 만남이 있은 후에 오래지 않아서 김형욱이 돌연히 실종되었다. 그가 쓰던 책의 내용과 실종 사건이 관련이 깊다면 이 책은 박정희부정부패와 각종 치부를 폭로하는 책으로 추정되며, 아마도 이것이 그가 실종되는 원인이 되었으리라고 보여진다.[138] 일부 음모론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박정희자작극을 벌인 것은 아니다.[139] 2023년 현재 대한민국의 헌정 체제다.[140] 발굴 당시 유해 척추 부분에 스테인리스제 와이어가 감겨있어 척추 질환자로 추정되었다.[141] 1960~1980.05.21 실종. 그동안은 실종자로 분류되어 있었다.[주의] 실제 시신이 찍힌 사진이므로 주의.[143] 이 사건이 심각한 이유는 사건에서 조준희 일병에 의해 사망한 사람만 12명으로, 이는 임 병장 사건 당시의 5명, 일명 강화도 해병대 사건 당시의 4명을 가뿐히 뛰어넘는 피해 규모이고, 다른 사건은 구타나 총격으로만 이루어졌지만, 이 사건은 수류탄도 사용했다는 점에서 죄질이 심각하며, 결정적으로 위의 언급된 세 사건은 당사자들이 체포돼서 재판까지 받았지만, 이 사건은 후술하듯이 범인이 잡히기는 커녕 월북 후의 근황이 전혀 알려지지 않고 있다.[144] 이전에도 사건 부대인 제22보병사단에서 근무하던 사람들을 빼면 이 사건을 알던 사람이 없었으며, 2000년대 초에 진상 조사도 이루어지기는 했으나 별다른 진전이 없었다. 어느 정도냐면 제주 4.3 사건, 5.18 민주화운동 진상 규명에 힘쓰고 유의미한 성과를 거뒀던 참여정부마저도 이 사건 만큼은 명확하게 밝혀내지 못했을 정도였다. 따라서 사건이 있던지 어느덧 40년이 다되어 가지만 이 사건의 피해자의 유족은 아직도 국가배상을 못받고 있다.[145] 이마저도 서울신문이 2011년 3월 9일날 기사에서 밝힌 이름으로 확실히 밝혀진 본명은 아니다. 다만 덩(鄧)씨인 것은 확실하다고 보고 있다.[146] 이같은 자기 배우자에 대한 정보도 잘 몰랐다는 진술로 인해 남편 진씨에 대해서 의심하는 목소리도 꽤 있었다. 다만 국가 정보기관 직원의 배우자는 그 사람이 무슨 일을 하는지를 은퇴할 때까지, 심하게는 죽고 나서야 아는 경우도 많았기에 아예 불가능하지만은 않다.[147] 국정원의 임무 중 하나가 산업 스파이 색출이니만큼 선박 직원의 의심 사항 확인이나 항로 행적 조사 등 굳이 세월호가 아닌 다른 선박이었어도 거쳤을 당연한 절차가 와전되었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다르게 생각해봐도 국정원이 다른 선박이 아니고 세월호만 특정해서 운영에 개입할 필요는 없다.[148] 검찰이 너무 노골적으로 영장에 집착한다는 것도 음모론 내지 의혹으로 제기했는데, 이와 관련해서는 유병언이 실질적인 책임자로 적어도 연대책임은 져야한다는 것도 있지만, 더 큰 이유는 사실상 유병언이 검찰이 그에 대해 뭘 한다고만 한다면 도피할 것임이 확실해서라고 잠정 결론이 난 상황이다. 과거 유병언은 오대양 집단 자살사건 당시 해명서만 쓰면 된다는 검찰의 말만 믿고 무방비로 갔다가 얄짤없이 구속된 뒤 징역 4년을 살고 왔다. 이렇게 거대한 배신을 경험해 봤던 그를 검찰이 조사한다고 나섰을 때, 유병언이 바로 무슨 짓을 했을지는 뻔했다.[149] 인사혁신처가 이래서 설립되었었다. 물론 이것과는 별개로 박근혜 정부의 인사 실패도 한몫하긴 했다.[150] 천안함 격침을 자기가 시인한 적도 있을 정도로 악랄한 북한이었다지만, 그 사건은 백령도 즉, 북한과 가까운 곳이라 도발하려고 맘만 먹는다면 충분히 발생 가능했던 일이고, 세월호 사건은 제주도 인근에서 발생했다. 즉, 상식적으로 북한이 세월호를 격침시키려했다면 다른 건 제쳐두고 북에서 넘어온 뒤 대한민국 해군에 걸리지 않고 남해까지 왔어야 한다는 것인데, 이게 가능했을까? 또 대남 도발 같은 목적은 제쳐두더라도 그렇게 민간 선박을 노리고 싶었다면 멀리 갈거 없이 국경 인근에 돌아다니는 어선을 노리는 게 더 안전했을 것이다.[151] 이것에 단순한 반박을 하자면 일단 침몰 지점은 주변에 섬도 안보이는 바다 한가운데라 오해할 수도 있으나 당장 침몰된 지점의 수심은 30m 안팎이어서 잠수함 같은게 다닐 수가 없었다. 반대로 타이타닉호가 침몰한지 100년이 지났는데도 침몰된 지점의 수심이 너무 깊어 선박 인양은 커녕 조사 잠수부도 투입을 못하고 있는 걸 생각하면, 세월호의 인양이 상대적으로 쉬웠던 원인이기도 했다.[152] 세월호 4번 평형수 ‘조타실 조정 불가’ 확인, 그럼 왜 비어 있었을까[153] 다만 회차의 문제나 신내차량기지 외에 차량기지를 지을 공간이 없어 일방통행선으로 고안했다는 설은 3호선과 4호선 또한 개통 당시에는 차량기지가 하나 밖에 없었다는 점에 의해 사실상 부정되고 있고, 현재에는 신내기지에 회차선을 만들만한 부지가 없어서 그랬다는 설이 상대적으로 더 신빙성이 있다고 여겨지고 있다.[154] 당시에는 경의선이 도시철도로서의 기능을 수행하지 않았고 3호선도 효과가 제한적이었다보니 은평구에게 있어서 6호선이 실질적인 첫 철도 교통이기도 했기에 이에 대해 은평구 측이 최대한 역을 많이 설치해 수요를 끌어들이려는 일종의 핌피 현상이 발생했거나 당초 6호선을 포함한 2기 지하철 계획의 목적이 철도 소외 지역의 도시철도 혜택을 누리게 하는 것이었던 만큼, 여러가지 외부적 요인이 작용한 결과물이 현재의 응암순환선이라는 것이다.[155] 물론 북한 측이 통신을 통해 목적을 밝히기는 했는데 요약하자면, "우리는 핵무기를 가졌으니 전 세계는 김씨 일가에 복종하고 조공을 바쳐라!"이다. 당연히 학계에서는 이런 개소리를 진실로 받아들이지 않고 있으며, 분명 다른 원인이 있다고 보고 있다.[156] 정확히는 해방 후 북한에 들어온 김일성이 그동안의 이미지와 달리 너무 젊어 보였기에 민중들에게 가짜설이 돌곤 했는데, 이것이 남한에서 진지한 가설처럼 유포되었다는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김일성의 이미지를 만들었던 보천보 전투는 역으로 후대에 실질적인 성과는 없었다는 것이 확인되었다.[157] 본인의 권력승계 정당성을 위해 김일성의 유언(혁명열사릉에 묻어달라)을 무시하고 엠버밍해서 금수산태양궁전에 전시한 점과 김일성 사후에 김일성이 아끼던 묘향산 특각이 갑자기 철거된 점이 대표적이다.[158] 일단 김일성이 1970년대에 김정일을 공식 후계자로 지명한 이후 권력이 다 넘어가긴 했으나 김정일 입장에선 김일성이 언제든 선동으로 재집권을 할 수 있다는 점에서 눈엣가시로 봤을 가능성이 컸을 가능성이 크고, 이후 김일성 사망하자마자 고난의 행군이 왔을 만큼 무능한 김정일 때문에 김일성이 분개했다는 증언도 여럿 나왔었다.[159] 김일성은 일찍히 김정일을 후계자로 내세웠으나 김정일은 죽을 때까지 후계자를 논하는 것을 꺼려 김정은의 집권도 불명확하는 등의 혼란이 존재했고, 김일성이 죽기직전까지 어느 방식이었을까는 무시하고 통일에 관심이 많았던 반면 김정일은 통일을 논하는 자를 반역으로 봤으며 김일성과 손자 김정은이 선당정치를 시행한 반해 김정일은 선군정치를 시행하는 등 부자라 해도 상당히 다른 점이 존재했다.[160] 오죽하면 '탈북자들이 정권을 고발하기 위해 쓴 집단노동의 산물 아니냐'는 의견까지 나오고 있는 상황일 정도.[161]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2011년 김정일이 사망했을 당시 조선중앙텔레비죤의 보도이다. 이때 보도에서 후계 서열을 알려주면서 100여명에 달하는 사람을 서열 순서대로 보도했는데, 당시 일반인에게는 김정은이 이 목록에서 처음으로 나온 고로 김정은에게 정권이 넘어가는 것 정도로만 알았지만, 학계 입장에서는 조선로동당 권력있는 당원들의 실명이 공개된 거나 마찬가지여서 조선로동당과 김씨일가 조사를 위한 훌륭한 자료가 되어주었다.[162] 번외로 김정은도 2010년에 공개 석상에 들어서기 전까지는 김정일의 무명의 후계자라 국정원 등의 정보기관도 잘 몰라서 한국 측이 당시 후지모토 겐지의 발언을 인용했을 때 'ウン'의 발음 문제로 이름이 김정'은'인지 '운'인지 조차도 불분명했으며 초기에는 아예 김정운으로 표기했었다. 이후 조선중앙통신이 한자이름을 金正으로 표기해서 김정은으로 확정이 되긴 했다.[163] 대표적으로 로동당 간부이자 현 국민의힘 국회의원인 태영호가 이런 취지의 답변을 했다.[164] 탈북 외교관이었던 김동수가 이런 취지의 진술을 했었다. 이 사람 말에 따르면, 김정일의 본처였던 김영숙이 김설송을 포함한 다른 자녀를 데리고 명절 때에 김일성에게 참배하러 가서 분명히 기억하며, 김정일이 김정은을 스위스로 유학 보냈듯이 이 사람을 스웨덴의 북한 대사관으로 보내 모셨다고 한다. 근데 문제는 김영숙이 김정일의 다른 처보다 찬밥 취급을 받고 공개석상에서도 잘 언급이 안 된터라, 이게 신빙성이 있는 지가 불분명하다는 것이다.[165] 종합하자면 2011년 김정일이 사망한 뒤 본격적으로 존재가 드러났으며 2012년 핀란드 방송 YLE에서 본인의 생에 짤막한 인터뷰를 하고 2013년 6월 즘에 국제학교인 유나이티드 월드 칼리지(UWC)의 모스타르 분교를 졸업했다는 것이었다. 참고로 이 외에도 2014년 10월 즘에 연합뉴스TV 측의 과도한 취재에 반발해 "그만하시죠"라는 말을 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다만, 존재 자체가 의문인 김설송과는 달리, 프랑스파리정치대학에서 학사 학위를 마쳤고, 북한 국민들의 인권 문제를 다루는 인권운동가를 지망한다는 점과 아버지의 사망 당시에는 가족들과 함께 마카오에서 살면서 집 인근의 호텔에서 근무했다는 점 등, 일상에 대한 정보가 꽤 알려진 편이었다. 그 이외에도 국제학교 재학 중에 김한솔을 만났던 남한 학생들의 증언도 있는 편이다.[166] 일단 2017년 3월에 올라왔던 문제의 영상은 국정원의 분석결과 김한솔이 맞다는 것이 확인되었다.[167] 2021년 현재 가장 유력한 설에 의하면, 김한솔은 현재 미국 영토에서 거주하고있으며, 미국 정부의 엄중한 보호를 받고있다고 한다. 이 가설을 따르면, 그동안 미국 정부가 자유조선에이드리언 홍 창에 대해 애매모호한 태도를 보인 이유가 명쾌하게 설명되지만, 이에 대한 분명한 근거는 없다.[168] 김주애의 위로 첫째 아들이 없다면 둘째다.[169] 조선중앙통신은 "장성택이 김정은이 집권한 뒤 경제가 무너지는 틈을 타 본인이 생각하는 개혁을 추진하기 위해 군을 이용해 실권을 장악하려 했다."라고 했지만, 이후에 "장성택이 수령님이 주신 귀한 자원들을 팔아먹고 부를 채웠다."로 말이 달라졌고 사형 판결문에서는 2009년에 행한 화폐개혁이 사실 장성택이 박남기를 시켜서 한 짓이라 그랬다고 밝혔다. 어느 쪽이든 하나의 원인을 콕 집어서 말하지는 않은 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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