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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29 09:09:17

김하재


1. 개요2. 김하재의 변3. 분석4. 사후5. 여담6. 같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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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金夏材(1745∼1784)

조선 후기의 문신. 조선 왕조 사상 가장 어이없는 사건 중 하나인 김하재의 변(김하재 투서 사건)의 주인공이다.

2. 김하재의 변

김하재는 서인의 학통을 이었다고 할 수 있는 김장생의 후예이자 전 영의정인 김양택의 아들로, 그의 아버지 김양택은 숙종의 장인인 김만기의 5대손이고 노론으로 정조를 보호한 중신이었으며 최측근 대신으로서 정조와 홍국영의 고평가를 받으며 승승장구 관료 생활을 영위했었던 명가의 자제였다.

1784년(정조 8) 음력 6월 20일 이조 참판을 지내던 중, 남인 채제공탄핵했다 유배당한 윤득부를 옹호하다 파직되었다. 그런데 얼마 후 음력 7월 28일, 영희전에서 열린 고유제에서 김하재는 예방 승지 이재학에게 쪽지를 건냈는데, 그 쪽지가 을 욕하는 내용으로 가득했다고 한다.[1]

조정충격과 공포로 발칵 뒤집혔으며 정조는 쪽지를 보고 "천지에 백성이 생긴 이래로 이렇듯 흉악한 글은 일찍이 없었다.……나라에서 그에게 무엇을 잘못하였기에 이런 때를 마침 맞아서 차마 이렇듯 천고에 없는 변고를 저지르는가?"하고 격노했다. 정조는 "과거에 김하재는 미치광이 증세가 있었는데 그게 도져서 이런 비정상적인 행동을 했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라고 말할 정도로 어지간히 충격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

김하재의 글이 얼마나 흉악스러웠는지는 김하재를 국문했을 때 정조 본인의 발언[2]을 통해서 잘 알 수 있듯이, 영조 즉위년에 영조에게 대놓고 경종한테 게장 먹여서 독살한 살인마라고 비난했다가 처형당한 이천해, 이도현의 발언을 초월할 정도로 글의 정도가 심하다고 정조가 언급할 지경이었으니 당시 김하재의 글이 얼마나 극악무도했었는지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대신들이 흉서를 보여 주어서 신민들로 하여금 모두 그의 지극히 흉악한 진상을 알도록 하기를 청하였음에도 정조는 "흉악한 글은 사람들로 하여금 마음이 아프고 뼈가 저리게 할 지경인데, 어찌 차마 보여 주겠는가?"고 불태워버렸다.

정조는 즉시 김하재를 국문하여 어째서 이런 투서를 지었는지 문초했는데 잡혀온 김하재의 대답은 "김일경[3]이 갑진년에 죽었는데, 올해가 바로 갑진년입니다. 신은 나쁜 이름을 만대에 남기려고 하며, 김일경과 같은 심장(心腸)인 까닭에 이런 일을 벌였습니다."라는 황당한 답변을 내놓았다.

정조는 황당해하면서 어째서 김일경과 같은 역적의 행보를 따르려 하냐고 물었다.[4] 이에 답하기를 김하재는 높은 자리에 있었을 때는 이런 불순한 마음이 없었지만 좌천된 후 더 이상 벼슬길을 행할 수 없을 것 같아서 불순한 의도를 품었다고 대답하였다.

정조는 26차례나 김하재에게 형문을 가하면서 공초했지만 김하재는 도리어 "신은 스스로 난신적자가 될 줄 알면서도 김일경을 본받아 만대에 악명을 떨치고 비명에 죽고 싶어서 이런 일을 저지른 것입니다."라고 되받아쳤다.

결국 김하재는 물론 참수형되고 그의 부인교수형에 처해졌으며[5] 그의 친족들까지 죄다 노비로 전락되고 그의 집터는 파헤쳐져서 연못이 된다.

3. 분석

탄탄대로의 출세길이 보장된 노론 명문가의 자제가 황당하게도 소론 출신으로 노론이 지지했던 영조에게 처형당한 역적인 김일경을 본받아 역적으로 죽고 싶어 왕을 욕하는 미친 짓을 저지른 끝에 멸문지화를 당한 어이없는 사건이다.[6]

김하재 본인의 공초에 의하면 벼슬길이 막혀서 저질렀다고 하지만 정작 탄핵 요구 반려로 인해, 의례적으로 체직되면 몇 달 후에는 다른 직책에 제수되는 것이 당시 관행이었기 때문에 단순 핑계일 것으로 보인다.

일부에서는 관직의 잦은 이동과 파직이 그를 극단적인 스트레스에 시달리게 한 것이 이런 사건을 불러 일으킨 요인으로 보기도 하지만 정치적 배경에 대한 의혹도 있으며, 정조준론 탕평을 고수하면서 김하재 자신이 이에 강력히 반대하고 고깝게 보지 않던 소론 및 남인 인사들도 동등하게 대하자 이에 대한 불만 때문이었을 것으로도 추정되고 있다. 김하재는 전술했듯 남인 계열인 채제공을 탄핵하는 상소를 올리다 도리어 유배를 당하게 되었던 윤득부를 옹호하다 파직당하였다. 이것이 결정적인 점으로 작용되어 정조에게 고의로 이런 투서 사건을 일으켜서 자신이 정조의 준론 탕평을 반대하는 입장을 극단적으로 표현했다는 것이다.[7]

그러나 정조가 김하재의 투서를 불살라버린 이상 김하재가 대체 왜 이런 짓을 저질렀는지는 여전히 역사의 미스터리이다.

4. 사후

김하재는 이렇게 죽었지만 사후 몇 년 후에 이노춘이 상소를 올리면서 정조준론 탕평에 동의하는 세력을 "시의에 영합하는 자들"이라고 비난했다. 그러자 정조는 이것에 대해서 "김하재의 발언과 비슷하지 않은가"라고 꾸짖었고 이때를 즈음해서 구 청명당 계열은 '편벽한 무리'란 뜻의 '벽파'로, 정조 치세의 탕평당 계열은 '시의에 영합하는 비루한 무리'란 뜻인 '시파'로 불러 정조~순조붕당 정치의 새로운 정국을 초래하게 된다.

구한말 이완용이 추진한 대규모 신원복권 사업의 수혜를 받아 복권되었다.

5. 여담

6. 같이보기


[1] "이재학이 펼쳐보니, 전부 임금에 대한 욕설로서 역사책에 볼 수 없었던 지극히 아주 참혹하고 아주 패악하고 흉악한 말들이었다." - 정조실록.[2] "흉서(凶書)에서 말한 것은 너무나 흉악하고 너무나 극악한 말들이 아닌 것이 없는데, 병신년 이하의 한 구어(句語)는 곧 이천해(李天海) 등도 말하지 않았던 흉악한 말들이다." - 정조실록.[3] 준론 소론으로서 경종 재위기 신임사화를 일으켜 노론을 탄압했으며 영조의 정적으로써 영조 즉위 직후 처형되었다.[4] 사실 당연하다. 왕조국가에서 역적을 본받겠다는건 "나 역적 되고 싶어요"와 비슷한 수준의 반역자 인증 발언으로 오늘날로 치자면 거의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을 본받겠다 이상의 망언이다.[5] 사실 보통 여성은 처형하지 않는다. 대개는 노비로 삼을 뿐. 근데 여자까지 처형할 정도였다면 사안이 엄청나게 심각함을 보여준다. 이정도쯤 되려면 실제적으로 군사적인 반란을 일으킨 이괄의 난쯤 가야 볼 수 있는 일이다. 즉 왕에 대한 욕설 한방이 군사적 반란에 맞먹을 정도의 불충한 대역죄였다는 것. 여담으로 김하재의 부인은 남편을 잘못 만나서 팔자도 없는 교수형을 당하게 되었으니 제일 불쌍한 인물이기도 하다.[6] 다만 김일경과 같은 광산 김씨의 종씨이긴 하다.[7] 만일 그렇다면 정조가 김하재의 쪽지에 어떤 내용이 있었는지 공개하지 않은 것도 이해가 된다. 이같은 이유라면 분명히 쪽지 안에 그와 관련된 내용을 엄청난 수위의 비난과 함께 실었을텐데 이를 공개하게 되면 남인, 소론 등의 입장에서는 '어? 왕이 하자는 뜻에 안 따르고 욕설 오지게 박았다고 너희들 역적인가?' 이라는 논리로 김하재와 비슷한 의견을 가진 사람들이 의견을 내놓을 때마다 공격당할 것이고 이렇게 되면 정조가 추구한 준론 탕평이 위협을 받는다. 그러나 김하재가 뭘 썼는지 공개하지 않는다면 사건은 단지 김하재 개인의 망언 사건으로만 끝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