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鞠問/鞫問[1]
여기서 심문은 현대의 기준처럼 그냥 물어보는 게 아니고 당연히 가혹한 혹형과 고문이 동반되었다. 옛날에는 죄인의 자백을 받아내는 걸 가장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에 죄가 있든 없든 일단 고문을 했고 거기서 진실이 나오는 경우도 있었지만 고문에 굴복하여 억지 자백을 하는 경우도 많았다. 이걸 막기 위해 고문 횟수와 형장의 규격도 일일이 정할만큼 세심했으나 결국 고통을 준다는 건 변함이 없었다.
때로는 국문을 하면서 가혹한 고문과 곤장으로 인해 심문인들이 죽거나 혹은 풀려나도 장독이 올라 후유증으로 죽는 경우도 있었다.
그렇다고 죄인을 무자비하게 두드려 패는 것은 아니었다. 취조를 거듭해서 죄가 명백함에도 자백을 하지 않는다 판단했을 때 형신을 가하기 시작하여 그 횟수를 늘리는 등 국법에 따라 국문 절차를 진행하였다. 흔히 사극에서처럼 낙형과 압슬, 주리가 남발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역모죄의 경우 국왕의 꼭지가 돌대로 돌아 국법 따위 휴지 조각이 되어 오히려 사극과도 비교를 불허하는 참혹함이 연출되기도 했는데 갑자사화나 기축옥사 등이 그 대표적 예시다.[2] 이런 경우에는 애초 진범이 누군지 중요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그저 역모를 핑계로 정적들을 줄줄이 엮어서 제거하는데 방점이 찍혀있었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예가 강상인.
물론 국문은 어디까지나 자백을 받기 위한 것이지 사람 잡으려고 하는 게 아니기 때문에 고문을 할 필요가 없다면[3] 그냥 심문만 하는 경우도 많았다. 예를 들어 태종에게 숙청당한 민씨 형제들 모두 국문을 당했지만 민무구, 민무질은 그냥 심문 후 귀양을 갔고, 민무휼과 민무회는 압슬 등 가혹한 고문을 당해야 했다. 이 시기를 다룬 사극에서 민무구, 민무질은 고문 안 당하고 바로 귀양을 가고, 민무휼, 민무회는 고문 당하는 것으로 나오는 이유다.
여담으로, 역대 조선 국왕 중 최다 친국 기록을 가진 왕은 광해군이다. 조선왕조실록 웹사이트에서 "친국하다"라고만 검색해도 광해군만 총 217건이 나온다. 또한 역모 사건이 끊이질 않아 국청을 상설로 설치했었다 하는데 마치 하나의 관청이 신설된 양상을 보였다고 하는 기록이 있을 정도. 오죽하면 1614년 장령 배대유가 왕이 지나친 양의 친국을 비판한 적이 있다.# 광해군은 옥사에서 죄인의 가족인 여자나 어린아이도 가혹하게 고문을 하는 등 잔혹한 면모를 보였다. 이러한 행태는 훗날 인조반정의 원인이 된다.
2. 國文
나라 고유의 글자. 또는 그 글자로 쓴 글. 한국에서는 보통 한글이나 한글로 쓰인 한국어 글을 의미한다.구한말 시기에는 한글 자체를 직접 지칭하는 용어이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