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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거왕 | 태자 | 장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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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거왕의 태자 태자 | 太子 | |
<colbgcolor=#820000><colcolor=#ffd400> 출생 | 기원전 2세기 추정 |
고조선(?) | |
사망 | 기원전 108년(?) |
고조선(?) | |
성 | 위(衛)[1] |
휘 | 불명[2] |
부왕 | 우거왕 |
모후 | 불명 |
형제자매 | 장항(?)[3] |
[clearfix]
1. 개요
위만조선의 마지막 왕인 우거왕의 태자. 이름을 알 수 없어서 태자로만 불린다.한나라에 항복한 우거왕의 아들인 장항과는 같은 인물인지 별개의 인물인지 알 수 없다.
2. 생애
위만조선과 한나라 사이에 전쟁이 발발한 뒤 위만조선이 예상외로 선전하자 한무제가 우거왕에게 강화 협상을 제의하였고 우거왕도 이에 응해 자신의 태자를 한나라측에 보내 협상을 진행하게 했다.천자(天子)는 두 장군의 전세가 유리하지 않다고 여기고, 위산(衛山)으로 하여금 군사의 위엄을 갖추고 가서 우거(右渠)를 달래게 하였다. 우거는 사자(使者)를 보고 머리를 숙이며 사과하기를, "항복하기를 원하였으나 장군이 신(臣)을 속여서 죽일까 두려워했는데 이제 신절(信節)을 보았으니 항복을 받아주길 청합니다."하면서 태자를 보내 들어가 사죄하게 하고 말 5천 필을 바침과 아울러 군량(軍糧)을 내어 주었다.
사람들 만여 명이 병기를 지니고 막 패수(浿水)를 건너려 할 때 사자와 좌 장군은 그들이 변을 일으킬까 두려워 태자에게 "이미 항복했으니 사람들에게 병기를 지니지 말라고 명하시오."라고 말하였다. 태자도 역시 사자와 좌장군이 속임수를 쓰는 것인 아닌가 의심하여 끝내 패수를 건너지 않고 사람들을 이끌고 돌아가 버렸다.
《사기》 권 115, 조선 열전
사람들 만여 명이 병기를 지니고 막 패수(浿水)를 건너려 할 때 사자와 좌 장군은 그들이 변을 일으킬까 두려워 태자에게 "이미 항복했으니 사람들에게 병기를 지니지 말라고 명하시오."라고 말하였다. 태자도 역시 사자와 좌장군이 속임수를 쓰는 것인 아닌가 의심하여 끝내 패수를 건너지 않고 사람들을 이끌고 돌아가 버렸다.
《사기》 권 115, 조선 열전
태자는 협상을 하기 위해 1만의 병력을 이끌고 패수를 건너 한나라측으로 가려 했으나 한나라측에서 병사들의 무장해제를 요구하였고, 태자는 이를 의심하여 무장해제를 거부하고 돌아가면서 전쟁은 재개되었다.
3. 여담
- 이후 태자에 대한 행적은 기록에 언급되지 않는다. 나중에 우거왕 암살 이후 전쟁을 지휘한 성기가 태자를 다음 왕으로 옹립했다는 기록도 없으며, 나중에 성기를 암살한 장항의 행적은 기록에 남았지만 장항이 태자인지 아닌지는 기록 부족으로 알 수 없다. 만약 장항이 태자가 아니라면 태자는 전쟁 중 전사 또는 병사했거나 우거왕 암살 때 같이 시해당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