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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자 | 조선왕 2세 | ||
시호 | 불명 | ||
왕호 | 단군(檀君)/조선후(朝鮮侯) → 조선왕(朝鮮王)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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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기원전 4세기에 재위했던 고조선의 단군이며 한국 역사상 최초로 왕(王)의 칭호를 쓴 군주이다. 또한 기원전 7세기의 조선후를 제외하고 한국사상 처음으로 실존이 인정되는 군주이기도 하다. 다만 왕호(王號)가 전해지지 않으며 후대의 국왕인 부왕과의 관계도 알 수 없다.참고로 이 문서의 이름인 '조선왕 1세'라는 명칭은 이름을 알 수 없는 다른 고조선 왕들과 구분하기 위해 붙인 이름이지, 실제로 '조선왕 1세'라고 기록되어 있는 건 아니다.
2. 생애
昔箕子之後朝鮮侯 見周衰 燕自尊爲王 欲東略地 朝鮮侯亦自稱爲王 欲興兵逆擊燕以尊周室. 其大夫禮諫之 乃止. 使禮西說燕 燕止之 不攻.
옛 기자의 후예 조선후가 주나라가 쇠약해진 것을 보고, 연나라가 스스로 왕이 되어 높이고 동쪽의 땅을 공략하려 하자, 조선후도 스스로 왕을 칭하고 병력을 일으켜 거꾸로 연나라를 치고 (동)주 (희성) 왕실을 받들려 하였다. (그러나) 그 대부 예(禮)가 간언하여 멈추었다. 예를 보내 서쪽으로 연나라를 설득하게 하여, 연나라도 그만두고 공격하지 않았다.
《위략》
기원전 323년 연나라의 왕 역왕 희퇴가 칭왕하고 동쪽으로 진출하자 조선왕 1세는 주나라 왕실을 받든다는 명분으로 칭왕하고 연을 치려 하였다. 옛 기자의 후예 조선후가 주나라가 쇠약해진 것을 보고, 연나라가 스스로 왕이 되어 높이고 동쪽의 땅을 공략하려 하자, 조선후도 스스로 왕을 칭하고 병력을 일으켜 거꾸로 연나라를 치고 (동)주 (희성) 왕실을 받들려 하였다. (그러나) 그 대부 예(禮)가 간언하여 멈추었다. 예를 보내 서쪽으로 연나라를 설득하게 하여, 연나라도 그만두고 공격하지 않았다.
《위략》
그러나 대신 대부례[2]가 조선왕 1세에게 간언하여 조선왕은 전투태세를 중지하였고, 대부례는 연나라로가 연나라 역왕을 설득하여 연나라의 고조선을 향한 공격을 중지시켰다.
그러나 후대 왕 때에 연나라와의 관계가 다시 틀어지고 결국 전쟁이 나게 된다. (고조선-연 전쟁)
3. 기타
기자조선의 족보에 따르면 조선왕 1세는 가덕왕(嘉德王)에 대응한다. 그의 이름은 후(詡)이며, 재위기간은 기원전 342년 ~ 기원전 315년이라 하지만 현재는 학계에서 기자조선 자체가 부정되며, 족보는 조작이라는 것이 정설이므로 21세기 기준 이 기록은 인정되지 않는다.21세기 고고학 연구에 따르면 기원전 4세기 고조선은 객라심좌익몽고족자치현을 중심으로 한 십이대영자 문화 남동구 유형(南洞溝類型)과 선양시 일대를 중심으로 한 십이대영자 문화 정가와자 유형(鄭家窪子類型)으로 양분되어 있었는데, 요서에 위치한 남동구 유형은 중국과의 거리 때문에 빠르게 영향을 받기 시작했지만 요동의 정가와자 유형은 전통을 고수하는 편이었다. 그러다 연나라가 기원전 4세기 갈등을 빚은 남동구 유형을 멸망시키고, 하는 김에 요동의 정가와자 유형까지 몰락시켜 정가와자 유형은 평양 일대로 도망쳐 십이대영자 문화 고산리 유형을 이루게 된다. 따라서 학자들은 조선왕의 조선은 남동구 유형이고, 준왕의 조선을 정가와자 유형 계통으로 추정하고 있다. 정가와자 유형은 물리적 거리로 인해 공백이 있던 반면[3] 요서의 십이대영자 문화는 연나라 문화에 완전히 동화된다.
4. 참고
[1] 다만 당시에 성씨가 존재했을 가능성 자체가 없다. 기씨나 한씨로 표현하는 것은 대개 후대에 족보를 만들거나 유교적 관점에서 제사를 지내기 위해 가져다 붙였을 것이다. 특히 기자조선의 존재 자체가 부정되기도 하는 마당에 기씨를 쓰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생각할 수 있으나, 다양한 의견을 존중하기로 한다.[2] 대부는 관직명이고 이름이 례(禮)이다.[3] 고구려의 고조선인이 부여 이민자인 추모를 왕으로 받아들여 고구려를 세운 것도 이런 공백을 이용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