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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고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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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0~673 한성고구려국 검모잠 / 고연무 / 안승 실패
681 안동도호부에서의 보장왕의 모반 보장왕 무산
684 금마저에서의 보덕국의 반란 대문 실패
696~698 요동 일대의 반당전쟁 걸걸중상 / 걸사비우 / 대조영 발해
897~901 송악의 궁예 정권 궁예 후고구려
918 왕건의 역성혁명 왕건 고려
1217 최광수의 난 최광수 실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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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9d537><colcolor=#670000>
고려 초대 대왕
태조 | 太祖
파일:external/pds.joins.com/htm_2012032304247a010a011.jpg
현릉 봉분 외곽에서 출토된 왕건 청동상
출생 877년 2월 4일[1]
(음력 헌강왕 3년 1월 14일)
신라 패강진 송악군 사찬 용건의 사저
(現 경기도 개성시 수창동)
즉위 918년 7월 30일[A]
(음력 태조 즉위년 6월 15일)
태봉 철원성 포정전
(現 강원특별자치도 철원군 철원읍 홍원리)
사망 943년 7월 9일[B] (향년 66세)
(음력 태조 26년 5월 29일)
고려 개경 개주 정궁 신덕전
(現 경기도 개성시 수창동)
능묘 현릉(顯陵)
재위기간 고려 초대 대왕
918년 7월 30일[A] ~ 943년 7월 9일[B]
(음력 태조 즉위년 6월 15일 ~ 태조 26년 5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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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9d537><colcolor=#670000> 본관 개성 왕씨
건(建)
부모 부왕 세조
모후 위숙왕후
형제자매 외아들
왕후 신혜왕후, 장화왕후, 신명왕후
신정왕후, 신성왕후, 정덕왕후
자녀 25남 10녀[6]
종교 불교
신체 84.7cm(앉은 키)[7]
약천(若天)
묘호 태조(太祖)
별호 성조(聖祖) / 열조(烈祖) / 용조(龍祖) / 황조(皇祖)
태왕(太王) / 조왕(祖王)[8]
시호
고려사 태조 세가 총서 [ 펼치기 · 접기 ]
응운원명광렬대정예덕장효위목신성대왕
(應運元明光烈大定睿德章孝威穆神聖大王)
고려사 태조 세가 마지막 조 [ 펼치기 · 접기 ]
용열인용장효대정광열원명신성대왕
(勇烈仁勇章孝大定光烈元明神聖大王)
연호 천수(天授, 918년 ~ 933년) }}}}}}}}}
파일:고려 태조 친필.jpg
태조의 추정 친필 글씨[9]

1. 개요2. 생애3. 묘호 및 시호4. 어진5. 능력6. 가족관계7. 평가8. 기타9. 대중매체10. 둘러보기

[clearfix]

1. 개요

"태조 신성대왕(太祖神聖大王)께서... 요하(遼河)와 패수(浿水)의 놀란 파도를 진정시키고, 진한(秦韓)의 옛 땅을 얻어 열아홉 해 만에 천하[寰瀛]를 통일하셨으니, 공적은 더없이 높고 덕망은 한없이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고려사 열전, 최승로
짐도 역시 단지 평범한 데서 시작하여 착오가 있었는지 추대를 받아, 여름에는 더위를 두려워하지 않고 겨울에는 추위를 피하지 않으면서 근심으로 몸을 애태운 지 19년[10] 만에 삼한을 통일했다. 외람되게도 큰 보물을 차지한 지 25년이 되니 몸은 이미 늙었도다. 다만 후손들이 마음내키는 대로 욕심을 부려 기강을 어지럽히고 무너뜨릴까 두렵구나. 이에 「훈요」를 지어 후대에 전하노니 아침에 펼쳐서 저녁까지 두루 보아 길이 귀감으로 삼기를 바라노라.
<훈요 10조> 머리말

고려를 건국한 고려왕조창업군주이며 수많은 호족들이 난립하던 신라 말의 난세를 평정하고 후삼국의 통일을 이룩한 고려의 초대 대왕이자 해동천자이다.

고구려 유민 출신으로[11], 준수한 용병술[12]과 뛰어난 용인술을 바탕으로 좌우 신하들과 사방의 세력가들을 노련하게 휘어잡은 군주이며 숙명의 라이벌이자 당대의 명장으로 이름났던 견훤[13]을 제압하고 삼한일통을 이룩한 최후의 승자다. 또 알고보면 한국사 군주들 중 손에 꼽을 만한 너그러운 임금이었다.[14]

2. 생애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태조(고려)/생애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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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7년 송악군[15]에서 고구려 계통(원 백제계이기도 함)의 패서 호족 가운데 하나로서 예성강 유역의 해상 무역 활동으로 성장했던 왕륭의 아들로 태어났다.[16] 896년에 왕륭이 궁예에게 귀부했을 때 함께 들어오고 후고구려 즉 태봉을 세운 궁예의 장수로서 후백제의 해상 요충지였던 나주를 점령하고 나주 호족들을 모두 복속시켰다. 후백제는 이후 전략적으로 상당한 제약을 받게 되었고, 태봉의 영토는 대폭 넓어졌으며, 왕건은 수많은 전장에서 눈부신 공로를 세웠다. 궁예와 호형호제를 허락받았으며 913년, 37세의 나이에 2인자로서 시중 자리까지 오르는 등 궁예의 총애를 받았으나 918년 궁예가 폭정으로 인심을 잃자, 여러 장수들과 대신들이 왕건을 임금으로 추대한다. 왕건은 역성혁명으로 궁예를 축출하여 태봉을 멸망시키고 제위에 올라 새로운 나라 고려(高麗)를 건국하게 되며, 연호를 천수(天授)로 정한다. 이듬해 철원에서 가문의 텃밭이었던 송악(개경)으로 천도했다. 조세율을 감면하고 흑창을 설치하거나 신라에 우호적 제스처를 취하는 등 취민유도(取民有度), 중폐비사(重幣卑辭)라는 키워드로 일컬어지는 유화 정책으로 민심을 얻으려 했으며 후백제를 세운 견훤과 자웅을 계속 겨뤘고 견훤이 서라벌을 함락시키자 직접 신라를 지원하려 하다 공산 전투에서 대패, 신숭겸의 희생으로 구사일생하기도 했으나, 고창 전투에서 승기를 잡은 뒤 장남 견신검의 반란으로 쫓겨난 견훤이 고려로 귀순하고 신라에서는 경순왕이 고려에 투항하자 통일 대업은 막바지에 이르렀다.

936년 견훤과 함께 후삼국 마지막 전투인 일리천 전투에서 승리해 후백제를 병탄함으로써 후삼국을 통일한다. 같은 해 예절에 대해 저술한 <정계> 1권과 백관을 대상으로 한 교훈서 <계백료서> 8편을 반포했다고 하나 현존하지 않는다. 신라는 경주 중심의 골품제를 유지하며 고구려백제의 지배층을 동화하는 데 한계가 있었기 때문에 왕건은 신라의 골품제를 혁파하고 이들을 결속했다. 고구려 계승을 천명했기에 발해 멸망 후 내려온 발해유민들도 받아준다. 재위기간 불교유교, 풍수지리 등을 국시로 고루 숭상했고 지방 호족을 포섭하거나 견제하기 위한 정책을 폈으며 수도는 개경이었으나 고구려 수도였던 서경(평양)을 중시하고 서쪽으로 안주에서 동쪽으로 영흥까지 약간의 북진을 성사시키기도 했다. 통일을 이룩한 지 7년 만인 943년 재위 25년 만에 훈요 10조를 남기고 신덕전에서 66세로 붕어했다.

3. 묘호 및 시호

공식 묘호태조(太祖)[17]이며 존경의 의미로 '성조'(聖祖), '열조'(烈祖)라는 별칭으로도 불렸다.[18] 이외에도 고종 재위 42년에 몽골을 막아달라고 신령들에게 제사를 지내면서 태조 왕건을 '용조'(龍祖)라 칭했으며 공민왕 재위 20년에 성균관의 학도들이 송가를 바쳤는데 여기선 태조를 '황조'(皇祖)라 했다.

시호는:

보다시피 《고려사》 <태조 세가> -총서-와 마지막 조에 차이가 있다. 고려 역대 군주들은 시호의 기록이 <세가> -총서-와 <세가> 마지막 조가 조금씩 다르다. 단 시호에서 가장 중요한 건 후계자가 처음 올릴 때 쓴 두 글자라서 나중에 추가된 뒤 글자들이 조금씩 달라도 큰 영향은 없다.

《고려사》가 인용한 《편년통록》은 승려 도선이 태어나기 전 태조를 '성자'(聖子)라고 부르고 '미래통합삼한지주 대원군자(未來統合三韓之主 大原君子) 족하(足下)'라 칭했다. 태조는 천자를 자처하여 연호를 '천수'(天授: '하늘에게서 천명을 받다'란 뜻.)라 했으며 고려시대 저서인 《보한집》 <권상>에는 경순왕이 태조 왕건을 '천자'(天子)로 표현하고 있다. 태조의 자는 '약천'(若天)으로 '하늘과 같다.'란 뜻이며 그가 태자(정윤) 왕무에게 지어준 자도 '승건'(承乾), 즉 '하늘을 잇다.'란 뜻이다. 태조가 지은 만월대의 정전 이름도 '하늘의 덕'이란 뜻의 '천덕전'(天德殿)이다. 발굴된 태조의 청동상도 천자가 쓰는 금색 통천관(通天冠)을 쓰고 있다.[19] 태조가 일리천 전투에서 조직한 부대 이름 또한 지천군(支天軍), 천무군(天武軍), 우천군(佑天軍), 간천군(杆天軍), 보천군(補天軍)이다.

4. 어진

태조의 어진
파일:external/www.minjog21.com/3341_9670_418.jpg
개성의 왕건 능인 현릉에 있는 어진. 현대의 상상이다.
파일:왕건 어진.png
연천 숭의전지(사적 제233호)에 봉안된 어진. 조선 시대에 그려진 것을 20세기에 모사한 것으로, 태조의 모습을 그린 근대 이전의 어진 중에는 유일하다. 그래서인지 대한제국 시대 교과서인 《초등대한역사》에 제시된 고려 태조의 상과도 흡사한 면이 있다. 다만 원본이 소실되었고 당시 복식과도 좀 안 맞는 부분이 있어 학계에서도 실제 모습인지는 긴가민가한 모양.
파일:external/thimg.todayhumor.co.kr/1435395292eHp8cW6wnz5KLp32R6nQthDlD.jpg
《왕씨 족보》에 그려진 왕건. 숭의전지의 영정 및 대한제국 시대 《초등대한역사》 교과서의 모습과 많이 닮아 실제 모습일 가능성도 있으나, 문제는 이 족보 자체가 북한 주민이 개인적으로 보관하고 있다가 조선로동당 위원회에 "우리 (왕씨) 가문의 하늘이신 김일성 주석께 바친다" 운운하며 제출하여, 북한 측에서 대대적으로 선전할 목적으로 공개한 유물이라 실제로 검증하기 전까지는 진위 여부가 확실하지 않다. 혹은 상술한 숭의전지 또는 교과서의 어진을 그대로 모사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파일:external/thimg.todayhumor.co.kr/1435394936Fk52pNzzGdsCU5Ig2eVV81m4N3KXiR.jpg
왕건 청동상. 북한 평양 조선중앙역사박물관 소재. 951년(광종 2)경에 제작되어 봉은사(奉恩寺) 진전(眞殿)의 어좌(御座)에 안치되어 있었다고 한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참조). 왕건을 상징하는 것으로는 가장 오래되었으며 유일한 유물이다.
파일:external/www.daejonilbo.com/20140409010004922000000102.jpg
개태사가 별도로 그려 봉안한 어진.
파일:external/sunday.joins.com/20225216.jpg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고려 태조 어진. 표준영정 66호로 지정되었다. 이길범 화백의 작품으로 상상도이다. 어진의 복식이 신하가 쓰던 복두건이며 같은 작가의 작품인 조선 정조 표준영정의 외모와 너무 닮았다는 비판이 있다.

5. 능력

송악 호족 왕륭의 아들로서 당시 대당무역의 거점이었던 예성강 주변(패서)이 가문의 근거지였다. 따라서 장보고가 죽고 청해진이 폐쇄된 지 40여 년이 지나 농업 위주의 영지가 되어버린 백제 지역[20]이나 지정학적으로 외국과 직접 교역이 불가능한 영동/영남 지역의 호족들에 비해 상업적인 능력과 국제 정세 이해, 중국 문물 수용 및 정보력에 있어 우위에 있었다.

군사적으로는 특히 패서 호족이었던 만큼 수군을 잘 다루었던 것으로 보이며 이는 궁예가 직접 한찬 해군대장군으로 임명하여 후백제의 후방인 나주 지방을 상륙전으로 빼앗게 한 것에서 잘 드러난다. 나주를 빼앗긴 견훤은 그야말로 언제 뒤쪽을 가격 당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수십 년 동안 시달렸는데 궁예 휘하에서 젊은 나이에 시중 자리에까지 오를 수 있었던 것은 그러한 전공들 덕이었다. 반면 육전 지휘력은 다소 애매한데 초반에는 궁예 휘하의 무장으로서 한주, 청주, 패서 일대의 도적들을 토벌하고 사화진에서 후백제 군대를 격파하고, 호족 세력을 포섭하는 다수의 전공들을 세웠다. 그러나 대규모 육군을 지휘할 때는 가끔씩 약한 모습을 보인다.

나주 공략에 성공하자 그 기세를 몰아 무진주까지 쳐들어갔는데 성주였던 지훤에게 패해 군사를 물리고 만다. 또 쿠데타로 고려를 건국한 직후 반기를 든 세력들이 많았다고는 하나 태봉 시절 확보했던 운주, 청주의 호족들을 쉽게 제압하지 못하고 일진일퇴의 공방 끝에 결국 해당 지역에 대한 영향력이 줄어들었다.[21] 그리고 고려군 병력이 우세했던 925년 상주 조물성 전투에서는 두 왕들이 맞붙었다가 견훤이 친히 지휘하던 후백제군에 3부대 중 2부대가 털렸는데, 그 사이 청주 전선의 유금필이 연산진과 임존성에서 승리한 틈을 타 인질을 교환하며 화친하는데 그쳤다. 왕건이 친정에 나섰던 928년 삼년산성 전투에서도 패배하여 결국 통일 전까지 삼년산성을 점령하지 못했다. 공산 전투에서는 신속한 기동으로 서라벌을 함락해버린 견훤을 무리하게 추격하다 매복에 걸리는 바람에 신숭겸, 김락 등의 희생이 아니었다면 죽을뻔했다. 다만, 고창 전투와 그 이후의 결정적인 육전들에서는 확실히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왕건의 진정한 장점은 명철한 결단력과 빠른 행동력, 상인 가문 특유의 외교력과 궁극의 화친 능력을 들 수 있다. 그의 결단력과 행동력을 보여주는 사례로 관심법을 썼다며 역모를 자백하라 억지 부리는 궁예 앞에서 쿨하게 꾸미지도 않았던 반란을 모의했노라고 인정하는 모습, 말년의 궁예가 폭정을 휘두르자 부하들에 의해 역성혁명의 주역으로 추대되어 실행에 옮기는 모습, 태봉을 멸하고 고려를 건국한 후 항거하던 궁예의 봉신들을 화전양면책으로 재빨리 수습한 데서 그 능력을 엿볼 수 있다.[22]

협상가로서 호족들을 포섭하는 외교력과 친화력도 탁월하다. 쿠데타 직후 친 궁예 세력과의 싸움으로 인한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견훤의 아버지인 아자개를 회유하여 상주 지방을 획득했고, 궁예를 따르다가 왕건이 쿠데타로 고려를 건국한 직후 독립을 선언했던 명주의 신라 왕족 김순식도 4년 뒤 왕건에게 복속했다. 또한 견훤이 서라벌 정벌 후 직접 옹립한 경순왕 김부도 고려에 귀순시켜 영동/영남 지방을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획득한다. 공산 전투 패배 이후 후백제보다 군사적, 정치적 입지가 불리해졌던 상황에서도 '삼태사'라 불리운 토착 호족 세력(김선평, 권행, 장길)을 끌어들여 한창 수세에 몰려 있던 전세를 역전시켜 고창 전투에서 대승했다. 후삼국 내의 호족들 외에 발해대광현발해유민들, 그리고 일생일대의 라이벌이었던 후백제견훤까지 포용하는 포용력을 보여주기도 했다. 놀라운 포용력으로 호족 세력을 계속 끌어모으니 결국 견훤은 궁지에 몰렸고, 마침내는 최대의 적이었던 견훤마저 아군으로 삼아 외교적으로 후백제의 호족 세력들을 동요시켜 후삼국을 통일한다.

이런 결과는 생전에 호족들, 심지어는 가족들 간에도 화애롭지 못하여 몰락의 길을 걸었던 견훤과 비교하자면 서초패왕 항우유방과 같은 모습이다. 물론 사료에서는 승리자를 예찬하고자 왕건의 이런 능력이 '천명', '인덕' 같은 단어로 포장되었으나 이러한 단어들만으로는 전란의 시대, 배반과 이합집산을 밥 먹듯이 하며 신라 왕실의 권위에도 반항하던 수많은 호족 세력들이 왜 왕건에게 포섭되었는가를 설명하기에는 충분치 않다. 때문에 상인 가문의 후계자로서 왕건은 서로 간의 이권이 첨예하게 얽혀있던 지역 호족들의 각기 다른 목적을 이해하고 있었고, 그에 걸맞은 현실적인 대안(부/명예/권력)을 제시할 수 있는 정보력과 외교력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강원도 일대에서 잘 나가기는 했지만 당시에는 고작 양길 휘하 일개 무장이던 궁예에게서 야심을 읽고 본거지인 송악을 통째로 바쳐 송악을 태봉의 첫 수도로 만들어 낸 왕륭이나 그렇게 얻어낸 궁예의 무력을 이용하여 이전에는 압도하지 못했던 패서 일대 호족을 단번에 태봉으로 복속시킨 왕건의 행동을 보면 당시 송악 왕씨 가문의 정보력과 교섭력은 상당한 수준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후 궁예 휘하에서 자기 세력을 확보해나가는 왕건의 행보와 쿠데타로 고려를 건국한 이후, 전국구 네임드 호족에 대한 포섭 과정을 보면 왕건 스스로도 대세를 읽고 상대가 원하는 바를 제시할 수 있는 상인 가문의 기질을 상당 부분 섭렵했으리라고 추정할 수 있다.

정훈이 만화: 《왕건, 통일의 기술》

한편, 신라 제30대 문무왕에 이어 두 번째로 한국사의 통일국가를 이룩한 지도자이다.[23] 일각에서는 신라 통일의 불완전성을 문제 삼아 고려가 한반도의 첫 통일 왕조라고 주장하기도 하는데 고려 역시 신라가 놓쳤던 당시 발해의 전 영역을 완전하게 통합하지는 못하였다. 기본적으로 고려의 후삼국 통일은 신라가 통일한 영역 안에서 나뉘었던 땅을 재통일한 후 북방의 영역을 확장한 것으로, '삼국'의 통일에 대해서는 논의의 여지가 있지만 만약 통일의 개념을 '한반도'의 통일로 상정한다면 신라의 통일론을 부정하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 관련하여서는 신라와 고려 양국의 통일 의식이 그 통합의 대상을 두고 뚜렷한 차이가 있었다는 것부터 확실히 유념할 필요가 있다.[24]
"고려의 왕건(王建)이 신라와 백제를 격파하니, 왜(倭)ㆍ탐부(耽浮)ㆍ환어라(驩於羅)ㆍ철륵(鐵勒) 등 동이(東夷)의 여러 나라[諸國]​가 모두 두려워하여 고려의 속국이 되었다."
《남당서 권18, 고려》
고구려 유민 계열(패서 호족)이 주축이 되어 삼한은 물론 발해 및 여진과 탐라까지 적극적으로 포용했던 고려와 달리, 신라는 백제고구려의 국가 정체성조차 완전히 녹여내지는 못했으므로 지리적 통일은 성공했을지라도 민족적 융화에 실패했다. 따라서 고려 태조의 후삼국 통일은 발해 지배 계층과 유민들을 대거 받아들임으로써 한민족 정체성을 확립하고, 나아가 여진·탐라 등 다양한 종족을 흡수하여 개방적인 세계관을 지향했다는 사실에 의의가 있다고 할 수 있다.

고구려인의 후손이란 집단 정체성을 공유하고 있던 초기 고려인들은 북진 정책을 활발히 추진하는 과정에서 당대의 대제국 거란과의 26년에 걸친 치열한 전쟁까지 감수하는가 하면, 대규모의 원정군을 일으켜 여진이 부분적으로 점유하던 고구려의 옛 고토를 회복하려는 실질적 노력을 상당히 기울였다. 말기에 이르기까지도 고려의 고토 회복 시도는 이어졌다. 따라서 고구려 시대와 달리 중세시대에 들어 유례없이 강대해진 북방 민족들을 상대로 군사적 우위를 밀어붙일 수 없었던 당시의 상황을 고려한다면[25] 고려가 신라와 같이 한반도 남부에 국한된 삼한통일을 꾀했다는 식의 해석은 오류이다. 고려의 삼한통일은 신라의 삼한통일과 달리 고구려 시절의 판도를 회복하려는 의지가 확고했음에도 여건상 한계에 봉착한 것에 가깝다.[26] 즉, 한반도 남부의 해양무역 루트 지배에 주력하던 신라 왕조의 성향과 달리 만주와 요동을 고토로 여기는 성향은 고려의 차별점이라고 할 수 있다.

6. 가족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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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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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기타

고려 태묘 백세불천위
성종 ~ 인종
태조 신성대왕
의종 ~ 공양왕
태조 신성대왕 혜종 의공대왕 현종 원문대왕
고려 경령전 백세불천위
태조 신성대왕
발해국 세자인 대광현(大光顯)이 수만의 무리를 거느리고 투항해오자 '왕계'(王繼)라는 이름을 내려주고 종실의 족보에 올렸다. 또 특별히 원보(元甫) 벼슬을 주어 백주(白洲, 현 황해남도 배천군)를 지키면서 집안 제사를 지내게 했다. 따라온 막료들에게는 벼슬을 주고 군사들에게는 토지와 집을 차등있게 내려주었다.
《고려사》 934년 7월 기사 中

9. 대중매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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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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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사추 · 김인존 · 윤관 윤언순 (윤언식 윤언민 윤언이) 윤인첨 윤세유 윤상계 · 오연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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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부일 김부의 · 고령신 · 김황원 이궤 · 곽상 곽여 · 유재 호종단 신안지 · 김경용 (김인규) · 최홍사 · 한안인 · 이영 · 한충 · 임개 유녹숭 · 김준 · 류인저 · 강증 · 허경 · 문관 · 정항 정서 · 김극검 · 김약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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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670000,#fedc89> 130권 「반역4(叛逆四)」 131권 「반역5(叛逆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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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2권 「반역6(叛逆六)」
신돈
133·134·135·136·137권
신우(우왕) (신창(창왕)) }}}}}}}}}}}}


[1] 율리우스력 1월 31일[A] 율리우스력 7월 25일[B] 율리우스력 7월 4일[A] [B] [6] 현재까지 확인된 한국사의 군주 중 2번째로 많은 자녀를 둔 군주다. 1위는 백제의자왕.[7] 출처 왕건 상의 앉은 키가 진짜 고려 태조의 앉은 키로 제작한 경우를 가정하면 고려 태조의 앉은 키는 84.7cm가 된다. 선 키의 경우 이성계나 이순신 장군처럼 기록이 남아있지 않아 알 수 없지만 왕건에 키가 당시 평균보다 좀 더 컸다는 이야기가 있는 것으로 보아 160중반에서 후반으로 추정된다.[8] 둘 다 원 간섭기에 태조를 일컬은 용어로 당시엔 묘호의 사용이 제한되어 선왕들을 O종(宗)대신 O왕(王)으로 일컬었다. 예) 혜종 → 혜왕, 원종→원왕[9] 2013년 학계에 보고된 백원첩에 수록되어 있다. 물론 영상에서도 나오지만 학계에서도 진위 논란이 있다.[10] 이건 햇수이고, 918년 7월-936년 9월이므로 기간은 18년이다. 아래의 25년은 918년 7월-943년 7월 초이므로 햇수와 기간이 거의 일치한다.[11] 과거 낙랑군대방군 일대를 아울렀던 패서 지역은 고구려 말기의 핵심 배후지이자 수도권이었다. 고구려의 삼경(三京) 가운데 하나였던 한성(漢城, 현 황해도 재령군)이 있었으며, 멸망 직후에는 이곳을 중심으로 검모잠안승을 필두로 한 고구려부흥운동이 활발히 전개되었다. 고구려의 유력한 귀족 성씨였던 왕씨는 고구려미천왕 대에 이르러 통치하게 된 낙랑군대방군을 비롯해 관서해서 일대를 기반으로 두었던 가문이다. 북송의 사신이었던 서긍이 저술한 고려도경에 따르면 왕건의 선대고구려대족(大族)이었다고 전해진다. 김관의가 저술한 편년통록보다 더 정확하고 합리적이라 추측되는 왕대종족기를 인용한 이제현에 따르면 왕건의 선대는 이전부터 왕씨 성을 사용하였다고 전해진다.[12] 해상 호족 출신으로서 수군을 운용함이 능숙하였다. 이는 나주 공방전에서도 빛을 발한다.[13] 고대 그리스피로스 1세, 카르타고한니발과 행적이 비슷한 명장이자 국왕이었다. 대야성 전투를 기점으로 후백제서라벌로 진격함으로써 신라에 사형선고를 내리고 공산 전투에서 고려의 수뇌부 일동을 다수 전사시킴으로써 상당의 호족들을 회유시킬 수 있었던 것은 온전히 견훤 본인의 역량 덕분이었다.[14] 후백제 멸망 이후 백제인들에게 일절 해가 없도록 명했을 뿐만 아니라 쿠데타로써 견훤을 몰아냈던 신검도 용서했다. 더 나아가 세자 대광현을 비롯한 많은 발해유민들을 수용하고 나라를 들고 항복한 경순왕과 신라 지배층을 수용하였다. 이렇게 나라의 건국 이후 사후 처리에 있어서 피비린내가 뒤따르던 고대와 중세의 왕조들과는 상반되는 행보를 보여준 덕분에 고려는 발해, 후백제, 신라의 지배층을 온전히 흡수할 수 있었다. 이렇게 많은 집단을 수용했으면서도 그들의 지지를 고루 받아 재위기간을 무탈히 보낸 것을 보면 정치력 역시 뛰어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오늘날 대중들에겐 무려 29번 혼인한 왕으로도 유명하지만, 많이들 알다시피 정국 안정을 위한 정략혼이었다. 그래도 부럽..읍읍.. 조선의 태조와 비교하면 전술은 아래지만 정치는 위라고 볼 수 있다. 한편 왕건 사후 얼마 안 가 중화권을 통일했던 송태조 역시 이런 쪽으로는 대인배로 유명했다. 반대로 왕씨들을 탄압한 조선의 경우 당시 옆나라 명나라도 주원장이 미쳐날뛰며 숙청의 바람이 불던 시절이었다.[15] 오늘날 개성[16] 실제로 개성이나 평양 등 과거 낙랑군에 속했던 이 지역은 고구려 때도 왕씨가 유력 가문으로 세거하던 곳으로, 왕모중▪︎왕산악▪︎왕사례▪︎왕고덕 등 확인되는 왕씨 성의 유력한 고구려인들이 많다. 이외에도 왕건은 (같은 고구려 유민으로서의) 혈연적 친연성을 근거로 발해를 친척 국가로 인식했으며 실제로 외교적 수사에도 이를 활용하였다. 무엇보다 발해에서 확인되는 귀족 성씨 가운데 대(大), 고(高), 양(楊), 장(張), 이(李) 말고도 왕(王)씨 또한 포함되어 있다.[17] 넷째인 광종이 올림.[18] 조선에서도 건국 군주인 이성계를 '성조'라고 칭한 바 있다.[19] 도금된 흔적이 있다.[20] 장보고의 난 진압 후 851년 신라 조정은 청해진의 인력들을 김제에 강제로 이주시켰다. 그 후로 수달, 현춘, 순천 김씨, 순천 박씨, 낭주 최씨, 나주 오씨, 진도 김씨, 압해 정씨 가문 등 백제 지역에 기반한 해상세력은 많이 난립했으나 신라구였던 현춘을 제외하면 대외적으로 영향력을 발휘했던 대세력이 전무하다. 대체로 지역 수운, 사략질, 국내 사무역에나 종사하는 수준. 게다가 892년 전에 이미 견훤이 속했던 신라 방수군의 지속적인 해적 토벌과 894년 현춘의 규슈 침공 실패로 수달을 제외한 백제 지역 대규모 해상세력은 932년 상귀, 상애의 함대가 나오기까진 사서에서 자취를 감추게 된다[21] 태봉 시절 궁예는 비뇌성 전투 이후 양길의 잔당으로 추정되는 신훤, 청길을 흡수하며 충주, 청주를 확보했다. 또한 904년 공주장군 홍기가 투항했고, 906년 사화진 전투 기록으로 보아 충주 이남의 상주 일부에도 영향력을 행사했던 것으로 추정된다.[22] 김순식, 이흔암, 환선길, 임춘길, 공직 등 왕건의 쿠데타 직후 이에 저항한 호족 세력들은 적지 않았다. 왕건 가문의 영지인 패서와 자신이 제압한 경기 일대를 제외한 동남쪽 다수의 호족들이 왕건을 인정하지 않았다. 이에 왕건은 환선길, 이흔암 등의 반란은 무력으로 신속히 제압하고, 김순식의 아버지 허월을 포섭하는 유화적 외교 전략으로 명주를 복속시키는데 성공한다. 또한 청주에서 반란의 기미를 포착하고 홍유유금필을 진천에 주둔시켜 청주 호족들을 견제한다. 반면 매곡성(충청북도 보은군)을 통째로 후백제에 갖다 바치며 귀순한 매곡성주 공직은 후백제가 고창전투의 대패로 국력이 크게 위축되자, 932년 다시금 왕건에게 귀순하는데, 왕건은 자신을 배신한 호족에게 얹잖은 티를 내기는커녕 명마, 비단과 함께 백성군(경기도 안성시)을 영지로 하사한다.[23] 다만 신라는 직후에 발해가 다시 생겨서 남북국시대가 되긴 한다.[24] "국가 단위에 가장 근접한 집단의식인 삼한일통의식은 13세기 초까지 삼국유민의식의 분립성과 공존하였다. 또한 발해유민이나 탐라의 포함 여부를 놓고, 고려 건국을 주도한 고구려 유민 계열과 신라 유민 계열의 두 갈래 삼한일통의식이 경쟁했다··· 고려의 국가 단위 집단의식에 해당하는 삼한일통(三韓一統) 의식이 적어도 크게 두 가지 계열이 병존하며, 경쟁하고 있었던 것 역시 종래에 알려지지 않은 한국 민족 형성사의 이해에 중요한 역사상이다. 고구려 유민 계열과 신라 유민 계열의 삼한일통 의식은 그 안에 만주의 발해 유민과 남쪽의 탐라국(제주도)을 포함하거나 배제하는 큰 차이를 가졌다는 사실이 자료들을 통해 검토되고 있다." 〈고려국가와 집단의식·자위공동체·삼국유민·삼한일통·해동천자의 천하>-노명호, 출판사 서평[25] 거란의 경우 발해를 힘으로 만주에서 축출해버릴 정도였다.[26] 고려 후기에도 요동 정벌을 꾀한 바 있으나 항목에도 있듯 보급 문제나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 전쟁에 지친 백성들의 불만 등 여러 이유로 좌절된다.[27] 유일한 불천지주였다. 이후 의종이 태조, 혜종, 현종 세 명을 불천지주로 정한다.[28] 태조의 영정과 상을 모신 진전. 개경고려궁지에 있었다.[29] 서경 장락궁에 있던 태조 진전.[30] 개경 봉은사에 있던 태조 진전.[31] 하늘에 지내는 도교식 제사.[32] 같이(배配) 제사되는 황제(제帝).[33] 사실 이것조차 진짜 드라마의 재미 요소를 이끈건 궁예견훤이긴 했다.(...) 옴마니반메훔[34] 2010년대 드라마 중에선 조연급으로라도 비중있게 나온건 달의 연인 - 보보경심 려 정도 뿐이었다.[35] 남북한의 두 도시를 비교 답사하는 다큐로, 북한 지역의 영상은 재미교포이자 통일TV 대표인 진천규씨가 방북해 촬영했다. 1부는 서울과 평양 방문의 식문화, 2부는 속초-원산과 금강산, 3부는 개성-수원을 다뤘다. 해당 다큐의 개성 편에서는 개성한옥마을, 만월대, 고려 태조 왕릉, 영통사(2005년 천태종과 합작해 남북공동 복원), 선죽교, 송도사범대학, 박연폭포 등의 현지 모습을 볼 수 있다.[36] 정략결혼은 호족들이 많은지라 왕비 역시 수가 불어난 것이 문제였는데 왕후만 6명에 부인도 23명. 호족이 반란을 일으키면 딸은 폐서인 후 처형되기 때문에 호족들이 딴 생각을 품는 것을 막고자 하는 것이었으나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었고 이를 보완하고자 마련한 것이 사성정책이었다. 정략결혼은 그의 치세 중에는 지방 성주들과 화합을 도모하며 고려의 기반을 다지기에 필요불가결한 정책이었으나 왕건이 후계자로 지목한 왕무는 나주 오씨 소생으로서 패서 호족이 좌우하던 개경에서 한미한 가문 취급이었고 임종 직전 태자의 보필을 부탁하며 유훈을 맡긴 박술희는 궁예 휘하 일개 무관으로 시작해서 왕건의 최측근까지 올라선 입지전적인 인물이지만 가문의 기반은 미약했다. 통일 후 지방 성주와 호족들을 아우르는데 그쳐서 강력한 중앙 집권화를 이루지 못하고 왕위 쟁탈전의 불씨를 남기고 떠나게 된 건 결과론적으로 왕건 생전의 명철한 판단력과 기민한 행동력을 생각해 보면 분명 아쉬운 부분.[37] '사성'(賜姓)이란 '성을 주다'라는 뜻으로 공을 세운 호족들에게 왕씨 성을 내려 그들의 충성을 얻어내는 것이다.[38] 지방 호족들에게 땅을 지급하는 것.[39] 신라의 상수리 제도를 배경으로 만들어졌고 호족의 자제들을 개경에 머물게 하며 사실상 인질로 삼아 반란을 막는 정책이었다. 자식들의 목숨이 왕건 손바닥 안에 있었으니 호족들은 반기를 들 생각을 할 수 없었고 기인 제도 때문에 스스로 목숨을 끊은 호족의 자녀들도 있었다고 한다.[40] 중앙 정부에서 지방마다 지방관을 보내지 않고 호족들의 자치권을 인정해주는 만큼 자신의 지방에서 반란이 일어나거나 지방민들에게 가혹한 정치를 펼처서 중앙 정부에까지 그 소식이 들리는 경우에 연대책임을 지도록 했다.[41]요사》 <이외국기> -고려-편에 보면 915년 10월에 사신을 보내 보검을 진상한 기록이 있으며 918년에도 2차례나 사신을 보내는데 이 때는 태봉 시기였다.[42] 발해 태자 대광현이 수만명의 발해 사람들을 데리고 태조에게 투항한 시점은 《고려사》, 《고려사절요》, 《동국통감》의 기록들이 서로 다른데 《고려사》는 934년 7월, 《고려사절요》는 925년 12월, 《동국통감》은 926년 1월의 일로 기록하고 있다. 공식적인 발해 멸망은 926년 1월로 이에 따라서 대다수의 한국 역사학자들은 대광현이 수만 명 혹은 수만 가구의 발해 사람들을 데리고 고려로 투항한 년도는 926년 1월 이후로 보고 있어 《동국통감》의 기록이 가장 사실에 근접했다고 볼 수 있다.[43] 다만 공민왕 시기 몽골 제국의 혼란을 틈타 잠시나마 요동 진출에 성공하기도 했다.[44] 위치는 서경 장락궁 황성 근처에 있던 중흥사.[45] 고려 말기 최고의 대유학자였던 이제현은 고려 태조의 일생에 대한 논평에서 북진 정책 부분에 대해 결과적으로는 거란을 적대시함으로써 길고 긴 전쟁의 불씨가 되었다고 말했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 이익도 《성호사설》에서 태조의 선택을 비판하고 이에 반해 금나라에 사대정책을 취한 인종을 높이 평가하기도 했다. 단, 이는 성리학적 사관이 팽배한 조선 후기의 의견이라는 것은 감안할 필요가 있다.[46] 이를 보면 어떤 대책없이 무조건 주장한건 아니고 중국과의 협공 등을 활용해 거란 공격의 성공 가능성을 최대한 높여보려고 한 듯하다. 다만 태조가 삼국을 통일한 직후의 고려가 강대해졌다는 중국의 기술을 보면 고구려의 영광을 되찾으려고 하는 태조의 야심을 보고 경계심을 가졌을 가능성도 어느 정도는 있다. 고구려와 중국의 역사적인 갈등을 생각한다면 고구려의 이름을 자칭하는 태조의 세력이 강해지는건 중국 입장에서 마냥 달갑지는 않았을 것이다.[47] 영험한 부적. 천명(天命)의 다른 말이다.[48] 제사에 관한 일. 제삿일.[49] 회사 기업 말고 국가의 기틀을 이른다.[50] '태조황제'(太祖皇帝)란 뜻이다. 고려가 황제를 칭제하였다는 증거이다. 한데 후대 조선 때 기록에선 고려의 황제 칭호 기록에 대해 소극적으로 표현하였다.[51] 커다란 사명. 천명(天命)의 다른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