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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30 22:46:13

박윤웅


후삼국고려호족과 군벌세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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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允雄
생몰년도 미상
1. 개요2. 생애3. 여담

1. 개요

후삼국시대의 인물. 오늘날 울산광역시인 계변성의 호족이었다.

2. 생애

고려사에서 그의 기록이 나오는데, 신라의 수도 서라벌에서 가까운 울산 지방의 호족이었다. 경주에서 중국으로 사신을 보내거나 더 멀리 있는 소율희, 왕봉규 등 다른 호족과 교류하기 위해선 울산을 지나가야 하기 때문에 그는 신라 조정에 상당히 협조적이었던 호족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927년 견훤의 서라벌 침공으로 신라 중앙정부의 위신이 크게 꺾였고, 930년 고창 전투에서 고려가 승리하자 그 역시 대세가 고려에 있다고 판단해 부하 최환(崔奐)을 보내 고려에 항복하기를 청했다. 그리고 박윤웅이 울산 일대 여러 호족의 귀부에 공을 세웠으므로 울산의 행정구역 격을 올려 흥례부(興禮府)로 삼았다. 이후 박윤웅은 울산 박씨의 시조가 되었다.

그와 미질부(포항시)의 호족 훤달이 고려에 투항하면서 경주시의 신라 조정은 멸망 직전의 동로마 제국이나 무굴 제국처럼 수도 인근밖에 지배하지 못하는 상태가 되었고 결국 5년 후 경순왕이 고려에 투항하면서 신라는 천 년에 근접한 역사를 마무리짓게 된다.

3. 여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