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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4-07 15:33:17

홍기(후삼국시대)

후삼국고려호족과 군벌세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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弘奇
생몰년도 미상

1. 소개2. 생애

1. 소개

후삼국시대의 인물. 공주장군(公州将軍)으로 기록된 것으로 보아 현재 공주시 일대를 거점으로 한 지방세력가로 추정된다.

2. 생애

삼국사기 궁예전에 따르면 904년 후고구려에 투항했다는 기록이 전부다. 고려사 이흔암 열전에 의하면 이흔암이 웅주를 공략해 점거했다는 기록이 나오기에 이때 이흔암의 공격을 받아 견디지 못하고 항복했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웅주가 공주로 이름이 바뀐 시기는 946년 고려시대였기 때문에, 당대에는 웅천주 또는 웅주로 불렸을 가능성이 크다.[1]

이후 918년도에 왕건이 삼국 정체성을 초월하고자 마진, 태봉이란 국호를 내세우던 궁예를 타도하고 집권하면서 국호를 원래 국호인 고려로 되돌렸다. 그 과정에서 그간 백제계 호족들에게 호되게 당한 바 있던 패서계 호족들이 상대적으로 친궁예적이었던 백제계 호족들에 대한 참소를 끊이지 않게 하자 공주 일대는 동년 8월 23일 후백제에게 귀부하게 되는데[2] 그 과정에서 이 지방 세력가가 어떤 태도를 취했는지는 알려지지 않는다. 후백제 패망이 가시화되는 934년에 공주는 다시 고려의 영역이 되는데, 그 과정에서도 역시 나오지는 않는다.

살아남아 세력을 보존했다면,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 15세기 공주 유력 토성(土姓)으로 열거되고 있는 이(李)·정(鄭)·송(宋)·박(朴)·황(黃)·고(高)·임(任) 등 7개 성 중 한 토성의 선조가 되었을 것이다.


[1] 표기는 한자로 했더라도 당대인들에게 이게 손쉽게 정착된 건 아니었다. 현대와 달리 공교육이 일반화된 시대도 아니었기에 문맹률이 매우 높았고 중앙에서 표기를 어떻게 바꾸든 현지인들은 관습적으로 쓰던 지명을 그대로 사용했다. 웅천, 웅, 공 모두 '곰'을 가리키는 단어를 훈차, 음차한 것이기에 현지인들은 예로부터 내려오던 비슷한 이름을 계속 썼다는 걸 알 수 있다. 게다가 신라 중앙정부에서 행정용으로 정리해놓고 쓰던 지명이 있긴 있었지만 고려 정부는 후삼국을 통일한 뒤 행정구획을 정비할 때 일부만 참조하면서 현지인과 호족들에 의해 관습적으로 더 많이 사용되던 지명을 반영하는 등 독자적으로 새로 정비하였다. 후삼국시대의 기록은 고려 중앙정부에서 정리한 것이고 그래서 사용한 지명도 보통 고려 지배층들이 알아보기 쉬운 고려의 지명으로 정리되어 있는 게 보통이다.[2] http://db.history.go.kr/KOREA/item/level.do?itemId=kr&types=r#detail-kingYear/kr_001r_0020_0030_0070/1/0918/08 (918년 8월 23일 웅주(熊州)·운주(運州) 등 10여 개의 주현(州縣)이 모반하여 백제(百濟, 후백제)에 붙자 전 시중(侍中) 김행도(金行濤)에게 명하여 동남도초토사 지아주제군사(東南道招討使 知牙州諸軍事)로 임명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