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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6-30 22:50:13

능문


후삼국고려호족과 군벌 세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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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


能文
생몰년도 미상

1. 개요

후삼국시대의 인물. 오늘날의 경상북도 영천시인 고울부(高鬱府)를 맡은 장군이었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이 주관하는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에서는 능문을 이능일로 기재하고 있다.

더불어 영천 황보씨 시조인 황보능장(皇甫能長)과 동일인이라는 주장도 존재한다. 이는 과거 70년대에 하타다 다카시가 쓴 「고려 왕조 성립기의 부(府)와 호족」에서 비롯된다.[1] 이 글에 능문(能文)이 능장(能丈)의 오기일 것이란 추측이 나오는데, 즉 이 시기 영주(永州) 지역의 장군으로 금강성장군(金剛城將軍) 황보능장(皇甫能長)이 나타나는 바,[2] 여기서 나아가 능장(能丈)이라는 이름도 능장(能長)을 동일한 발음 다른 글자로 음차한 것이리란 생각이다.[3] 별개로 영천에 황보능장묘가 존재해[4] 또한 근거가 된다.

황보능장을 다룬 디지털영천문화대전의 영천 황보씨 문서에서는 이를 따르지 않아 관련 서술이 없다. 반대로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의 디지털성주문화대전에서 능문은 이능일의 이칭으로 나오며, 이능일 문서에서도 동일하게 서술한다.

2. 생애

삼국사기고려사에서 그의 기록이 나오는데, 신라의 수도 서라벌에서 가까운 영천 지방을 맡은 장군이었다. 경애왕은 신라군을 보내 고려군과 함께 연합해 후백제와 싸우게 했는데, 경주에서 서부 전선으로 신라군을 보내려면 영천을 반드시 지나가야 하는 만큼, 그는 신라 조정에 상당히 협조적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결국 대세가 고려에 있다고 판단했는지 925년 겨울 10월, 능문은 고려 태조에게 투항할 뜻을 밝혔으나, 신라 조정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고 싶었던 왕건은 고울부가 신라 왕도와 너무 가깝다는 이유로 거절하고 타일러 돌려보냈다. 대신 능문의 부하인 시랑(侍郞) 관직의 배근(盃近)이란 자와 대감(大監) 관직의 명재(明才), 상술(相術), 궁식(弓式) 등만 고려에 머물게 했다.

2년 뒤 견훤이 서라벌을 기습할 때 지나가는 길에 있는 고울부를 습격했는데, 능문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기록이 없다. 다만 견훤의 목적이 서라벌 기습에 있었으므로 고울부는 빠르게 지나쳤을 가능성이 높다. 경애왕은 고울부가 공격당했다는 속보를 듣고 뒤늦게 고려에 지원군을 요청했지만 막아내지 못하고 피살당했다.

능문이 이능일의 이칭이라는[5] 추정이 옳다면 이후 부마도위에 오른 후 사공(司空) 직을 수행한 것이 된다. 황보능장의 오기라는 주장을 따른다면 고려 정부에서 좌승(左丞) 관직을 내렸을 것이다.[6]
[1] 旗田巍, 1972, 「高麗王朝成立期の府と豪族」, 『朝鮮中世社會史の硏究』, 法政大學出版局.[2] 『경상도지리지(慶尙道地理志)』 安東道 永川郡條.[3] 즉 반대로 말하면, 본래 인물은 능장(能長)이 맞으나, 능장(能長)을 소리나는 대로 다르게 쓴 것이 능장(能丈)인데, 이것을 사료에서 적을 때마다 능장(能長)이 아니라 능장(能丈)으로 적으려 했고, 그럴 때마다 능문(能文)으로 잘못 알고 계속해서 오기했으리라는 것이다.[4] 황보능장묘는 육군3사관학교 안에 있다. #[5] 李能一의 일(一)은 통일 이후 왕건이 삼한일통의 일(一)을 하사한 것으로, 초명은 이능일이 아니다.[6] 고울부가 위치해 있던 영천 고경면에는 전래 설화 중 '황보능장과 용마바위'라는 설화가 있고, 통일 후 영천부원군에 봉해진 황보능장의 묘가 존재한다. 동시에 영천은 성주 다음으로 성산이씨 선산과 집성촌이 많이 모여 있는 지역으로, 고경면의 용전리와 대의리에 집성촌이 존재해 관계가 깊다. 능문을 능장과 능일 둘 중 한명으로 비정하기 어려운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