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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8-26 23:56:32

비뇌성 전투


후삼국통일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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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뇌성 전투
非惱城 戰鬪
<colbgcolor=#fedc89,#444444><colcolor=#670000,#FFCECE> 시기 899년 (효공왕 3년) 음력 7월
장소

신라 비뇌성
(현 경기도 안성시 죽산면)[1][2]
원인 통일 신라 말기, 독립 호족 세력간의 충돌.
교전 세력 <rowcolor=black> 궁예군
(공격)
양길군
(수비)
주요 인물
지휘관

[[후고구려|
]] 궁예
지휘관

[[양길|
梁吉
]] 양길
참가자

[[후고구려|
]] 참가자 불명
참가자

[[양길|
梁吉
]] 참가자 불명
병력 병력 규모 불명 병력 규모 불명
피해 피해 규모 불명 피해 규모 불명
결과 궁예의 승리
- 한반도 중부 지역 장악
영향 궁예의 후고구려 건국 및 후삼국시대의 도래.

1. 개요2. 발단3. 전면전, 그리고 궁예의 승리4. 후폭풍5. 그 외6. 관련 연구7. 대중매체의 등장8. 관련 문서

[clearfix]

1. 개요

899년에 벌어진 후삼국시대의 전투. 궁예양길이 한반도 중부 지역의 패권을 놓고 벌인 일전으로, 후삼국판 관도대전으로 비유되기도 한다.

2. 발단

북원에서 거병한 양길은 후삼국 시대 초기에 일어난 호족 중 상당한 세력을 쌓았다. 그 과정에서 기훤에게서 벗어난 궁예를 받아들이는데 이것이 모든 재앙의 시작이었다.

궁예는 동진하여 명주를 접수하고 서진하여 철원과 패서 지역까지 땅을 넓히고 왕을 칭하기에 이르렀다.[3]

실제로 홀대했는지는 몰라도(딸을 준 것은 드라마에서의 창작.) 궁예의 원래 병력이 600명이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애매하다. 나중에는 5,000명을 넘어서 만 단위까지 등장하지만 각종 호족들이 활개치던 초기에 이게 많은 병력인지 적은지 판단하기 힘들기 때문. 다만 고려 후기 한 지방을 석권한 원수들의 사병이 500수준에, 고려 중앙정부를 흡수한 최씨정권은 3,000명, 동북 정규군 세력에 여진족 병력까지 흡수한 이성계의 가별초가 3,000명이었음을 고려하면 일개 지방 군벌 입장에서 500-600은 절대 적은 숫자는 아니다.

아무튼 궁예가 커지자 양길은 주변 호족들을 규합하여 비뇌성에서 궁예와 전면전을 벌이는데….

3. 전면전, 그리고 궁예의 승리

당시 궁예의 영토는 명주 대부분 + 삭주[4] 북부 + 한주[5] 북부였고, 양길의 영토는 삭주 남부 + 한주 남부 + 명주 남부였다. 궁예가 명주 북부를 장악한 후 약 4,000명의 병사를 모았다는 대목이 나오고, 이후 서진해서 영토는 3배 이상이 되었으므로 1만명 이상은 동원할 수 있었을 것이다. 양길 역시 본인의 전 병력을 동원했기에 병력 면에서 궁예보다 압도적인 우위를 가져간 것으로 보인다.

비뇌성 전투는 궁예의 대승으로 끝났다. 이후 청길, 신훤 등이 궁예에게 항복하면서 궁예는 남한강 유역(한주 남부와 삭주 남부)를 장악했으며, 904년에 웅주까지 석권하며 세력을 한반도의 절반까지 키웠다.

4. 후폭풍

이후 초적에서 출발한 호족들은 사실상 자취를 감추고, 남은 호족들도 후백제의 견훤 이외에는 자기 영토 보존이나 잘해야 옆 호족을 공격하는 정도만이 남았다.[6] 한반도의 패권을 노리는 호족은 왕을 칭한 궁예와 견훤만 남게 되어, 후삼국이 정립되었다.

궁예는 약 20년 뒤, 자신의 수하였던 왕건의 쿠데타로 양길이 그러했듯이 권좌에서 쫓겨나 죽음을 맞는다.

5. 그 외

6. 관련 연구

7. 대중매체의 등장

드라마 태조 왕건 33회에 등장한다. 그 이전 양길은 스스로 죽주를 바치며 투항해 온 궁예를 높이 사서 애지중지하던 막내딸 미향을 주어 사위로 삼고 잘 대우했다. 그러다가 이미 궁예의 사람이 된 은부의 계략에 넘어가 환선길, 이흔암, 복지겸 같은 핵심 장수들을 전부 내주어 명주(현 강원도 강릉시)를 치게 했는데 궁예는 명주의 김순식에게 항복을 받아낸 다음 함께 간 장수들을 모두 포섭해 독립해 이후 철원과 송악(지금의 개성시)을 비롯한 패서지역 전체를 차지해버렸다.

결국 양길과 양길을 배신하고 나온 궁예의 군대가 두 차례에 걸쳐 전투를 벌였는데, 첫 번째 전투는 28회 축령산(현 경기도 가평군)에서 양길이 먼저 선제 공격을 벌여 궁예 휘하의 신훤과 원회[7]를 단칼에 베어버렸을 정도였으나 왕건의 기만 전술로 인해 사위 하나를 잃고, 아우 명길마저 다치게 되었다.

이후 나라를 선포한 궁예가 한강 유역을 얻기 위해 왕건을 시켜서 남진하려고 할 때 양길과 마주친 곳이 바로 이 비뇌성이 있던 죽주로 양길이 잔여 세력을 모으면서 끌고 오자 궁예는 왕건을 지원하려고 은부와 부장 금대와 함께 직접 내려와 두번째로 양길과 대치하게 되었다.[8] 극 초반에 궁예는 몇 차례 화해를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전투를 치렀는데, 퇴각하는 척하면서 양길의 군대를 유인해 우여곡절 끝에 격파하였고, 왕건의 장수들(유금필, 신숭겸, 박술희)에게 남은 사위와 아우 명길을 잃은 양길은 사로잡혀 참수당했다.

이 두 차례의 전투에서 비록 졌지만, 양길이 언월도를 잘 쓰는 맹장으로 등장해 제법 화려한 전투 씬을 연출했고, 그의 용맹은 초반에 화려한 전투신을 벌였던 견훤과 궁예의 결투를 넘어 여포를 떠올리게 한다. 궁예가 그 용맹에 감탄해, 잠시나마 살려줄까 생각했을 정도였으나 끝내 말을 안 듣으니 금대가 목을 베도록 해 처단했다. 금대에게 베이기 전 양길이 궁예에게 ‘뿌리는 대로 거두는 것이 세상사 이치니라. 너 또한 나와 같은 일을 당하지 말라는 법이 있겠느냐’고 저주를 퍼부으면서 죽었는데 그것이 나중엔 실제로 일어난다. 사실 복지겸이 자신을 포섭하는 궁예에게 그가 타락해 초심을 잃으면 주저없이 처단하겠다고 암시를 했었지만, 궁예는 나중에 뜻이 어긋나면 나의 목을 베라며 이를 가볍게 여긴다. 또한 양길과 궁예 간에 벌어진 이 전투들은 극 중 왕건이 군사적 역량을 드러낸 첫 무대이기도 하였다.

비뇌성 전투 이후 34화 양길의 본거지였던 북원(현 강원도 원주시)과 죽주를 비롯한 양길의 잔여 세력들은 은부와 종간의 지시로 인해 모두 잿더미가 되었고, 그 전부터 종간에 의해 신변의 위협을 받고 있던 양길의 딸 미향은 결국 충격을 받고 환청이 들릴 정도로 정신병에 걸린 상태에서 순행 중 궁예에게 광기를 부리다가 명주에서 머물 때 은부가 강경책으로 문을 막은 처소에 환청을 들으면서 스스로 불을 지르게 되고 41회 질식사 하는 바람에 중이 된 미향의 아들과 함께 궁예의 트라우마 중 하나가 되었다.

만화 태조 왕건의 경우 궁예와 결투를 벌여서 진 후 깨끗하게 자살한다.

8. 관련 문서


[1] 구체적으로 비뇌성이 어디인지는 불명확하나 현재는 이도학 교수의 의견인 안성시 죽주산성(기훤의 본거지)으로 의견이 모아지고 있다.[2] 죽산은 원래 안성이 아니라 다른 동네였는데 일제강점기 때 죽산군이 안성군에 합병돼 2023년 현재 안성시에 있는 것이다. 실제로 죽산면으로 가려면 경부고속도로 안성IC가 아니라 중부고속도로 일죽IC로 나와야 한다. 경부고속도로 안성IC로 나오면 죽산면까지 갈 방법이 없다. 경부에서 죽산면으로 가려면 안성IC에서 빠져가지고 38번 국도를 한참 타야 한다.[3] 신라에게 반기를 들고 독립 세력을 형성했다는 것을 의미하며, 진정한 의미에서 후고구려를 건국하고 왕 칭호를 사용한 것은 901년이다. 견훤도 처음 왕을 칭하고나서 몇년 후에야 비로소 후백제를 건국했는데 견훤은 궁예보다 훨씬 빠른 892년에 이미 왕을 칭했으며 900년에 후백제를 세웠다.[4] 강원도 영서 지방[5] 경기도 + 황해도[6] 일반적으로 후삼국 시대 지도에서는 후고구려 후백제 신라 3대 세력만 딱 그려놓는 경우가 많지만, 실제로 일개 지역 정도를 차지한 중소 세력은 여럿 더 있었다. 그 중 일부는 아자개왕순식처럼 3국에 예속된 반 독립 세력인 경우도 있고, 후가야 세력이나 왕봉규처럼 따로 노는 경우도 있었다.[7] 드라마에서 이 둘은 본래 기훤 휘하의 장수였으나 기훤의 야만성과 무모함에 질려 기훤을 죽이고 궁예 밑으로 온 것으로 나온다.[8] 그 사이 다른 부장이던 염상은 은부와 종간의 지시로 송악으로 돌아와 미향을 죽이려고 했지만 강비에게 들켜 실패하고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