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삼국통일전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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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성강 전투 禮成江 戰鬪 | ||
<colbgcolor=#fedc89,#444444><colcolor=#670000,#FFCECE> 시기 | 932년 (태조 15년) 9월 ~ 10월 | |
장소 | 예성강 | |
교전국 | <rowcolor=black> 후백제 (공격) 승 | 고려-신라 연합 (수비) 패 |
주요 인물 | 지휘관 견훤 (후백제 국왕) 상귀 상애 | 지휘관 왕건 (고려 태조) 유금필 (2차) 왕만세 경순왕 (신라 국왕) |
병력 | 병력 규모 불명 | 병력 규모 불명 |
피해 | 피해 규모 불명 | 피해 규모 불명 |
결과 | 후백제의 승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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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후삼국시대의 전투.서기 932년 고려의 왕건과 후백제의 견훤이 예성강에서 맞붙은 전투. 비록 고려가 패배했지만 전세 역전 없이 후백제가 몰락했다.
2. 배경
고창 전투에서 역전승한 고려가 주도권을 잡고 지방호족 포섭이 큰 성과를 거두어 갈수록 고려의 손을 들어주는 지역이 늘었다. 931년에는 경순왕이 왕건에게 순(順)하면서 신라 왕이 고려 왕의 신하가 되는 큰 사건이 벌어짐에 따라 대세는 확실히 기운 듯 했다. 반면 백제는 몰락이 가속화되는 과정이었다.후백제는 고창 전투에서 대패한 후 왕건이 해로를 통해 나주를 차지했던 것처럼 해상전을 시도한다.
932년 고려는 서경을 건설하고, 왕무를 보내 북방을 순수하는 등 국가 정비 및 북방 평정에 힘을 쓰고 있었다. 당시 충청도의 대호족인 공직이 백제를 배신하고 고려에 항복했으며, 왕건은 그의 아들을 자신 친척의 딸과 결혼시킨 뒤 품계와 봉토를 주며 크게 환대했다. 또한 공직의 조력을 받아 백제 일모산성을 공격했다.
이뿐만 아니라 많은 호족들이 견훤을 피해 왕건에게 투항하자 견훤이 분노하여 공직의 아들과 딸의 발목을 끊어 걸을 수 없게 만들었다.
3. 전개
3.1. 1차 침입
견훤은 상귀를 지휘관으로 임명하여 해군을 보내 예성강으로 진입시켰고, 상귀는 3일동안 염주, 백주, 정주[1]를 공격하여 고려의 선박 100척[2]을 불태웠다. 또한 저산도를 습격해 섬에 있던 목장을 뺏어 말 300마리를 강탈했다. 무엇보다 고려를 놀라게 한 것은 수도 개경이 공격을 받았다는 것이다.고려사 박수경 열전에는 "발성(勃城)전투에서 태조가 포위를 당하였으나 박수경이 힘써 싸운 덕분에 탈출할 수 있었다" 라는 대목이 있는데, 발성(勃城)이 어디인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개경에 있는 성곽인 발어참성(勃禦塹城)이 유력하며 개경에서 후백제군과 전투를 벌였던 적은 예성강 전투 외에 딱히 없기 때문에 발성이 정말로 발어참성이었다면 태조에게 큰 위기였다고 할 수 있다.
3.2. 2차 침입
932년 10월 견훤은 상애를 지휘관으로 삼아 대우도까지 침입하였다. 또 다시 수도가 공격받자 왕건은 대광 왕만세를 파견해 막게 하였으나 왕만세는 상애를 이기지 못하고 밀리기 시작했다.두 번의 수도 공격을 받은 왕건은 위신에 금이 갔다. 고려사 유금필 열전에 따르면 왕건이 왕만세가 졌다는 전보를 듣자 걱정스러워했다고 한다.
상애의 공격을 막기 위해 개경 부근의 호족들이 사병을 모아 막았으며, 곡도[3]에 유배가 있던 유금필은 이 사태를 보고받자 곧바로 해군을 꾸려 혹시 모를 후백제의 곡도로의 침공을 방어한다.
4. 결과
후백제는 예성강을 두 차례에 걸쳐 침입하였으나, 눌려있던 기세를 일시적으로 회복시킨 이상의 의미는 없다.반면 고려는 후백제의 해군 공격으로 분노하여, 귀부한 공직을 앞세워 일모산성을 공격해 함락시킨다.
5. 의의
예성강 전투는 고창 전투 이후 고려의 승승장구하던 기세에 제대로 브레이크를 걸었다는 의의가 있다. 공직의 투항으로 사기가 크게 올랐던 고려에게는 뜻밖의 일격이었다.이 뒤에 큰 전투가 없는데, 고려의 경우 후백제의 과감한 수도 공격에 놀라 조심스러운 행보를 이어갔으며, 공직의 배신으로 충북 세력이 축소된 백제는 고창 전투의 악몽을 막기 위해 군사 행동에 신중을 가했다.
후백제는 잠시나마 시간을 벌었지만, 이미 뒤엎어진 전세를 되돌리기에는 너무 짧은 시간이었고 2년 후 벌어진 운주성 전투에서는 꼼짝없이 참패해 더 이상 기세를 회복하지 못한 채 나라가 분열된다.
6. 대중매체에서
현재 대한민국의 사극물 중 유일하게 '후삼국시대'를 다룬 드라마 태조 왕건의 174회에서 179회까지 해당 전투가 나오는데, 실제 역사와는 다르게 한 차례 침공을 한 것으로 묘사되었다.고창 전투 이후 사기가 떨어진 후백제의 위기[4]를 극복할 방법을 고심하던 견훤을 비롯한 후백제의 수뇌부 중 이찬 능환의 부탁을 받은 파진찬 최승우의 건의로 예성강 전투가 계획되었다. 이 때 최승우의 전략은 고려의 예성강을 통해 개경을 침입해서 운이 좋으면 왕건을 죽이고, 막강했던 고려의 전함들을 박살내 고려 수군 전력도 무력화시키는 것이었다.
이 전략에 견훤은 흔쾌히 응했지만, 최승우가 그 총사를 견신검에게 맡겨달라 건의하자, 지난 고창 전투 당시 신검이 견훤이 죽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적행위를 했었기에 견훤은 당연히 반대했다.[5] 하지만, 최승우의 마지막 청이란 각오와 강력한 요청으로 결국 수락하고 마지막으로 기회를 주며 황위를 물려준다는 약속을 신검에게 하면서 견훤은 그를 예성강 전투의 최고 지휘관으로 임명한 뒤 양검, 용검과 파진찬 최승우, 군사 종훈을 비롯해 신덕, 상귀, 파달 등 여러 장수들과 함께 출전시키게 했다. 후백제군은 최승우의 계획대로 당나라(후당) 무역선으로 위장한 후 고려 잠입에 성공해 정주와 염주 일대의 고려 수군에게 큰 타격을 주었고, 뒤이어 고려의 황도인 개경을 공격, 황궁을 점령했다.
이때의 고려는 고창 전투 이후 왕건이 서라벌과 북방을 다녀오는 등 승승장구 했으나 유금필이 홍유와 배현경, 왕식렴의 견제를 받고 곡도로 귀양갔으며, 병부령 최응이 병이 깊어 잠시 내봉경으로 물려나 공석이었다. 그리고 왕건은 정윤 무와 시중 김행선과 함께 다시 서경에 행차하는데, 이 때 정주와 염주를 지키던 수군들이 백제의 기습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자만심에 빠졌다가 크게 당했다. 후백제군이 수군들을 사실상 궤멸시키고 황도로 다가오자, 황도에 남아있던 장수들은 적은 병력[6]결사항전을 준비했으나, 병이 깊은 와중에서도 입궐한 최응의 계책으로 잠시 시간을 벌면서 퇴각하였다. 다행히 황궁에 있던 장화왕후(오도영)와 충주부인(유수인)을 비롯한 황실 가족들은 내군장군 복지겸 덕분에 일부 궁인들을 제외하고는 무사히 살아남았다. 서경에서 왕건은 죽은 능산 아우와 견훤이 다가오는 악몽을 꾸다가 깼는데, 이후 그 급보를 받고 일행들과 사촌 왕식렴과 함께 황급히 돌아왔지만, 그 때는 이미 후백제군에 의해 황도 대부분이 다 타버린 뒤였다.
이 때 병이 깊었던 최응은 최지몽과 함께 일찍 퇴궐하다가 최승우의 서신을 받고 적진[7]으로 가 그와 마지막 독대를 하는데, 그 만남을 통해 간접적으로나마 후백제가 곧 무너질 것이라고 예상하게 되었다[8].
한편 백제군은 돌아오는 길에 유금필을 잡자는 애술의 의견을 받아들인 신검의 뜻으로 무리하게 곡도를 공격하다가 유금필의 계략에 걸려 몇 척 안 되는 어선을 개조한 군선과 여진족들로 이루어진 병사들에 의해 빛나는 전과가 물거품이 된 채 병력의 태반을 잃고 그대로 백제로 돌아갔다. 이때 유금필은 곤란한 상황에 휘말리는데 후백제군을 무찌르고 나서 여진족들을 치하하자 이들이 또 '만세'를 외친 것이다. 이들이 이전 왕건의 북방 행차 당시 왕건뿐만 아니라 '대추장'이라 불리던 유금필에게도 '만세(萬歲)'를 외치다가 유금필이 곡도로 귀양을 가는 계기를 만든만큼 유금필은 만세의 정확한 의미를 짚어주며 이는 황제에게만 하는 것이라며 엄히 꾸짓었으나, 이들은 무식해도 좋으니 자신들은 대추장 유금필만이 있을 뿐이고 대추장 역시 만년을 살아야 한다는 논리로 만세를 계속 외치는 탓에 답답한 나머지 울화통을 터뜨린다. 시종일관 진지한 모습을 보여주던 유금필이 보여준 몇 안되는 개그신. 여담으로 이들의 대장 격인 인물을 향해 유튜브 스트리밍 댓글창에서는 '유금필 사생팬'이라는 별명을 붙였다.
어찌됬든 유금필의 활약으로 한숨 돌린 왕건은 경계를 소홀히 한 몇몇 장수들을 곡도로 유배보냈고 곡도에 귀양 갔던 유금필을 다시 불러들인다. 그러나 이내 지금껏 늘 왕건 곁을 지켜오던 전 병부령 최응이 병사하는 비극을 격는다.
한편 후백제에서는 견훤이 신검의 군대가 이겼음에도 만용을 부린 나머지 곡도에서 유금필의 기습으로 타격을 입었다는 사실에 실망했지만, 주변 노대신들과 금강의 과보다 공이 컷다는 말에 마지못해 공을 인정하는 한편, 삼한의 주도권을 확질히 되찾기 위해 운주 전투를 준비하는데, 이 때부터 그의 악성 등창이 발생해 이후 전투와 후백제의 정세를 어렵게 만든 결과가 서서히 찾아온다.
[1] 염주 백주는 현재의 황해도, 정주는 개성이다.[2] 사극 태조 왕건을 비롯해서 전함 100척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기도 하는데, 실제로는 애매하다. 고려사와 고려사절요 모두 "船一百艘" 이라고 되어 있기 때문인데, 물론 군선이라는 말도 쓰지만 船이라는 게 장삿배나 고깃배를 가리킬 때도 상선, 어선 하는 식으로 쓰기 때문이다. 즉 전함이 아주 없지도 않았겠지만 100척이 모조리 전함이라고 볼 근거도 없다. 아래 문단의, 상애가 다시 침공해 왔을 때 유금필이 올린 상소에는 "또한 전함을 수리하여 방어하고자 하나이다(又修戰艦以禦之(고려사) / 修戰艦欲禦之(고려사절요))" 라는 구절이 있는데, 戰艦이라고 분명히 되어 있는 것과 비교된다.[3] 현 인천광역시[4] 고창 전투 이후에 왕건이 서라벌을 방문하고 공직과 염흔이 고려로 귀부하기까지 했다. 다만, 실제로는 공직이 이 무렵 귀부한 것인데, 극 중에서는 배우의 건강문제로 일찍 하차 시키고 대신 염흔만 귀부하는 것으로 처리.[5] 고창 전투 문서, 신검(태조 왕건) 문서 참고[6] 당시 외곽을 지키고 있던 군사들은 대부분 전멸당했고, 그나마 황도 외곽에 염상이 이끌던 군사들이 있었지만, 이들도 후백제군이 한번 쓸고 난 후에야 돌아올 수 있었다.[7] 신검이 이끌던 후백제군은 황도를 쓸고 난 뒤 바로 떠나지 않고 예성강 하구에 며칠 머물렸다.[8] 최승우와 함께 별다를 것 없는 대화를 나누었는데, 이 때 최승우가 승자와 패자 이야기를 하더니 "승리자는 자신의 행적을 역사로라도 남길 수 있지만 패배자는 그런 것도 허락되지 않는다. 내가 한 때 천재로 불린 몸이지만, 삶이 언제 어디에서 끝났는지도 모르게 될 수 있다." 라는 말을 남긴다. 이 말을 들은 최응은 최승우가 자기 자신이 그렇게 되리라고 예견하는 것으로 이해했으며, 실제로도 역사 인물로서의 최승우는 언제 세상을 떠났는지 알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