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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우(태조 왕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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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 중 최승우의 모습[1]

1. 개요2. 극중 행적
2.1. 견훤의 등용과 출사2.2. 활약2.3. 후백제의 후계쟁탈전과 최후
3. 인물들과의 관계
3.1. 견훤의 절대적 신임
4. 평가

1. 개요

최승우, 본관은 경주다. 당시 신라의 신동 최치원과 더불어 3최라 불리었던 사람 중 하나다.
즉 세 사람의 천재 중 하나였다는 말이다. 그 당시 세 사람의 최씨는 최치원, 최승우, 최언위를 일컫는 말이였는데 이 작품에서 최언위는 나중에 등장을 한다.[2] 최승우는 서기 890년인 진성여왕 4년, 당나라에 건너가 유학 중 빈공과에 급제한 이후 예부시랑인 양서발에서 관직에 있었던 인물이다. 이때에 귀국을 하니. 893년, 진성여왕 7년이 된다.
-태조 왕건 16화 최승우의 첫 등장시의 나레이션
KBS 대하드라마 <태조 왕건>의 등장인물. 실존 인물 최승우를 바탕으로 한다. 배우는 전무송.

견훤책사이며 <태조 왕건>의 견훤을 초한지항우로 비교한다면 최승우는 항우의 모사인 범증 포지션이다. 비슷하게는 삼국지제갈량 포지션이기도 하는데 견훤이 최승우를 초빙할 때도 삼고초려와 비슷한 방식으로 모셔왔고 조물성 전투에서 수세에 몰린 왕건에게 항복을 권유하는 사자로 파견되었을 때 수레를 타고 학창의를 입고 손에는 백우선을 들고서 고려군의 진중으로 들어가는 장면은 영락없는 제갈량의 모습이다. 자신이 보좌한 나라(후백제, 촉한)가 결국에는 다른 나라(고려, )에 패배했다는 점도 공통점. 또한 나레이션의 인물 설명이 무려 3번이나 나오는데 첫 등장시, 2번째는 견훤에게 등용될 때, 마지막으로 사망할 때이다. 이는 다른 인물들과는 달리 이례적이다.

덧붙이자면 드라마 정도전정도전과도 유사한 측면이 있는데 이성계가 정도전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의지했던 것처럼 견훤 역시 최승우를 크게 신임했고 단순히 신하가 아니라 공동 창업주 정도로 여겼다.[3] 1차 왕자의 난으로 이성계와 정도전이 몰락했던 것처럼 견훤과 최승우 역시 왕자들의 난으로 몰락한 점도 닮았다. 요약하자면 제갈량, 범증, 정도전을 합쳐 놓은 캐릭터라고 볼 수 있다.

이 드라마가 대부분 삼국지의 영향을 받은 것처럼 최승우 역시 삼국지연의에서 제갈량에 대한 오마주가 많이 보인다. 미리 요약한다면 등용 과정은 삼고초려의 압축판이고 능력에 대한 작중 행적과 묘사는 제갈량을 연상하게 하며 도선예언사마휘가 제갈량에게 때를 만나지 못했다고 한 운명에 대한 평을 살짝 바꾼 것이다.

2. 극중 행적

2.1. 견훤의 등용과 출사

견훤 : 실례하겠소이다. 나는 무진주의 견훤이라는 사람이올시다.
능환 : 최 학사이시지요? 나는 대왕 폐하를 뫼시는 능환이라는 사람이올시다. 그대를 뵙고저 폐하께서 먼 길을 오셨사옵니다. 예로써 맞으시지요!
최승우 : 대왕이라, 지금 대왕이라 하셨소이까?
(견훤과 능환, 추허조를 차례로 비춘다)
최승우 : 대왕이라, 작은 고을 몇 개를 차지했다고 해서 대왕이라.
추허조 : (작게 성을 내며) 저런 저! 저!
견훤 : (추허조를 제지시키며) 음.
최승우 : 적어도 왕을 칭하려면 옛 삼한의 하나는 온전히 열어야 합당한 이름이 되지 않겠소이까?
견훤 : (옳은 말인듯 끄덕이며) 음!
(추허조가 나서려 하지만 능환이 추허조를 제지한다)
견훤 : 허허허, 최 학사의 대명을 오래 전부터 흠모해 왔소이다. 이렇게 뵙게 되어 참으로 반갑소.
최승우 : 소생도 견 장군의 존명을 익히 들어 알고 있었소이다. 용맹이 뛰어나고 지략 또한 갖춘 분이라고 들었는데 어찌 도적들의 괴수 노릇을 하고 계시오니까?
추허조 : 도저히 아니되겠구먼! 내 저놈을!
견훤 : (다그치며) 허조야! 음. 허허허, 그렇소이다. 이 시대에 도적이 아닌 자가 세상에 어디 있겠소.
최승우 : 마음을 열어 보이시니 그래도 속을 감추는 살쾡이보단 나아보이십니다.
견훤 : 도적은 도적이되, 나라를 훔치려 하는 도적이올시다. 그것을 훔쳐서 옳게 쓰고 아니 쓰고는 바로 그대들 같은 대 학인들이 할 일일 것이외다. 나를 좀 도와주시구려. 내 이렇게 진심으로 청하는 말이오.
최승우 : 글줄이나 읽는 재주밖에 없는 소생에게 도움을 달라시니 안타까운 말씀이십니다. (고개를 옆으로 돌리며) 하하하하하!
견훤 : (무릎을 꿇으며) 최 학사!
(모두가 당황한다. 최승우 또한 고개를 돌려 견훤의 모습을 보고 놀란다.)
견훤 : 이렇게 간절히 청하오. 부디 이 사람에게 가르침을 주시오! 최 학사!
최승우 : (마주보며 무릎을 꿇는다) 대왕 폐하, 어서 일어나시오소서. 소생, 잠시 참 주인인지 아닌지 알아보기 위해서 씻기 어려운 대죄를 범했사옵니다. 어서 일어나시오소서, 폐하.
견훤 : (최승우의 손을 꼭 잡으며) 고맙소, 최 학사!
최승우 : 미천한 이 몸. 이렇게 대해 주시니 어찌 견마지로를 다하지 않겠사옵니까. 이 목숨, 폐하께 바치오리다.
견훤 : 고맙소. 참으로 고맙소, 최 학사! (어깨를 치며 고마움을 표시한다)
최승우 : 폐하. 절 받으시오소서.
최승우, 일찍이 소개했던 것처럼 그는 신라 말 최씨로 이루어진 세 천재 중의 하나다.
신라의 귀족으로써 당나라에 유학하여 벼슬을 했고 당나라의 관료로써 혼란과 전쟁의 소용돌이에 휩쓸렸던 중국 대륙을 누구보다도 정통하게 꿰뚫어 보았고 경험했던 사람, 그가 이제 견훤의 오른팔이 된 것이다. 견훤으로써는 어찌 무릎을 꿇고서라도 그를 원하지 않았으랴.
-태조 왕건 최승우를 맞이하러간 견훤과 최승우의 대화와 나레이션(18화)

역사에서 최승우가 맡은 포지션을 생각해 보면 실제로는 전장에서 책략을 입안하는 책사였다기보다는 행정 업무와 외교 문서 작성을 담당하는 문신 관료였을 가능성이 높아 보이지만 태조 왕건에서는 후백제의 대표적인 책사로 등장하는데 사극에서 행정 업무 보는 일을 묘사하기가 쉽지 않았다.[4] 견훤이 전형적인 저돌형 맹장으로 등장하는 바람에 누군가가 전장에서 냉철하게 바라보고 견훤을 통제하고 돕는 책사의 역할을 해야 했는데 최승우를 견훤의 책사로 배정한 것으로 보인다. 관등이 파진찬[5]이라서 본명보다 파진찬으로 자주 불린다. 당장 견훤부터가 '이보게, 파진찬.' 이런 식으로 말한다.

본래 초탈한 신선 같은 풍모를 지니고 있고 도량 또한 높은 인물로 나온다. 일찍이 당나라유학하여 학업을 쌓았고 명성이 이미 신라에서도 드높았다. 하지만 신라와 마찬가지로 당나라 또한 혼란스럽기는 매한가지였고 기왕이면 고국 땅에서 묻히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으로 당나라에서 신라로 돌아온다. 하지만 신라 역시도 쇠락해질대로 쇠락해진 것을 알고 있기에 고향서라벌로 가지 아니한다. 아마도 썩어 빠진 신라 조정에 들어간들 최치원처럼 자신의 뜻을 펼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고 6두품이라는 신분제적 한계도 있어 자신이 크게 쓰이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이후 최승우는 백계산 옥룡사에 잠시 은거한다.

작중에서는 당나라에서 고국으로 돌아와 견훤의 수중에 있는 금성(현 전라남도 나주시)에서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낸다.(16화)[6] 그리고 백계산 옥룡사에 주석하던 도선대사를 찾아가 삼한미래와 자신의 앞날을 묻는 장면에서 도선은 최승우에게 “그대가 모시게 될 주인에게는 주인의 의자가 없다”라고 하며 어두운 앞날이 예정되어 있음을 넌지시 알려주었다. 도선은 최승우를 만나기 전에는 자신의 제자경보스님에게 “현자가 땅을 잘못 찾아왔다”라고 매우 안타까워했다.

그러나 도선에게서 예언을 들은 시점은 물론 이후를 감안해도 당시의 최승우가 갈 곳은 사실상 견훤의 후백제 밖에 없었다. 벼슬살이를 했던 당나라는 멸망 직전이었으며 조국 신라는 이미 망조에 들어선지 오래되었다. 결국 삼한을 통일할 왕건은 당시만 해도 일개 지방 호족의 아들이었을 뿐이었다. 궁예 역시 양길의 부하일 뿐이었고 어떤 인물인지 헤아릴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궁예의 주인인 양길조차 견훤에 비하면 "비장의 벼슬을 줄테니 내게 귀부하라"는 모욕을 받고도 손을 쓰지 못할 정도로 세력이 미약했으며 최승우 같은 인재를 받아들일 그릇도 아니었다. 이런 상황에서 견훤이 인재를 수용할 큰 그릇임을 보여주었으니 최승우가 후백제에 뼈를 묻을 수밖에 없었다.

이후 견훤이 최승우의 인물됨을 알고 직접 찾아가 무릎까지 꿇으며 책사로 등용했고 죽을 때까지 견훤과 함께 한다. 처음에는 능환이 최승우가 어떤 인물인가를 알아보기 위해 일부러 성미가 급한 추허조를 보내 데려오도록 한다.[7] 추허조는 직접 찾아가 최승우를 데려오려고 했는데 최승우가 불손한 태도를 보인다고 생각하여 분노했고 불을 지르겠다고 협박하기도 했다.[8] 최승우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고 응하지 않는다. 이 소식을 전해 들은 견훤은 직접 최승우를 찾아가겠다는 마음을 먹게 된다. 그러나 견훤이 직접 왔음에도 최승우는 견훤을 대왕이라 참칭하고 있다며 조소했고 도적이라 지칭하는 등 추허조를 맞이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무례한 태도로 일관했다. 기어이 견훤이 무릎을 꿇고[9] 자신의 책사가 되어 달라고 간청하자 최승우는 태도를 돌변하여 버선발로 뛰어나와서는 주군께 대죄를 지었다고 사죄하면서 충성을 맹세한다. 이는 최승우가 견훤이 어떤 인물인가 시험해 본 것이며, 견훤이 영웅이자 황제로서의 포부와 그릇이 크다는 걸 알자 따르기로 했기 때문이다.

2.2. 활약

재주가 비범하고 성품 또한 부드러운 뛰어난 책사였으며 태봉고려에 타격을 주는 계책을 내놓아 상당한 성공을 거두는데 기여를 하였다. 궁예를 제거하기 위해서 옛 양길의 부하들을 자객으로 보냈고, 이 공작으로 궁예는 깊은 상처를 입게 된다. 그 결과 궁예는 심각한 병을 앓게 되고, 결국 궁예가 초심을 잃고 정신이상자가 되어 폭주함으로써 궁예 정권이 몰락하게 되는 직접적인 계기를 마련하게 된다. 실제로 아지태 때문에 조금씩 타락의 기미를 보이던 궁예는 이 자객들[10]의 공격을 받은 이후로 정신 질환이 더욱 악화되면서 자신이 세운 나라를 그야말로 막장으로 몰아넣는다.[11] 그리고 나주 공방전 때 태봉 수군에게 아우들을 잃은 '도우'라는 승려를 첩자로 파견하여 태봉 조정을 교란시키면서 왕건을 제거 직전까지 몰아넣은 것, 그리고 극중 후반부에서는 왕건이 고려의 북방을 시찰하는 틈을 타 송악을 기습 공격해 고려의 수군을 전멸시키다시피 한 계책을 내는 등 지략에 매우 능한 모습을 보여준다.

그리고 훗날 고려를 건국한 왕건이 신라에게는 유화책을 쓰고 후백제와는 격전을 벌이는 대외정책을 채택했던 것처럼 최승우 역시도 처음에는 신라와 연대하여 고려를 공격해야 한다는 전략을 내세운다. 하지만 이찬 능환 등 후백제 신료들과 장수들이 이미 쇠락해질대로 쇠락해진 신라를 먼저 취하고 고려와 싸워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최승우와 대립한 적이 있었다. 이 때 최승우는 신라가 망국의 징조가 뚜렷하긴 하지만 그래도 천년의 사직을 지켜온 나라이며 아직까지는 신라에 출중한 인재들이 남아있기 때문에 그리 호락호락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능환은 최승우에게 “한 때 신라의 왕경인 서라벌 출신이라서 그런 것 아니냐”면서 지역 감정까지 놓는다.그렇게 따지면 본인의 주군인 견훤부터가 능환이 워낙 비논리적인 음해성 발언을 했기 때문에, 최승우는 이 때 몹시 당황스러워 하기도 했다. 견훤은 양측의 주장이 일리가 있다고 판단하고, 고심 끝에 신라를 먼저 취하자는 노선에 손을 들어주게 된다.

비록 그의 진언을 받아들이지는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승우는 견훤의 신라 공격을 적극 돕고 또 전략을 기획한다. 견훤이 왕건을 위기로 몰아 넣었던 조물성 전투, 공산 전투, 송악 기습작전 등의 계책들도 모두 최승우의 머리에서 나온 것이다. 그렇게 무섭다던 유금필도 최승우의 계략에 말려 사로잡힐 뻔 했다. 특히 작중에서 궁예가 미쳐가는 계기가 암살자의 독화살에 맞은 탓으로 설정되어 있고, 그 암살 계획을 최승우가 주도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태봉의 멸망에 회심의 일격을 날린 숨은 공로자라고도 볼 수 있다. 다만 최승우의 복안은 국력이 쇠약해진 태봉을 백제가 도모하려는 것이었으나, 그 전에 왕건이 선수를 쳐서[12] 고려를 세우자 당황하기도 한다.

하지만 내놓은 계책들이 모두 성공한 것은 아니라 간혹 실패하는 모습도 나오는 편이며 견훤이 놀랄 때 같이 놀라는 역할 또한 담당하기도 했다. 대표적인 경우가 나주 해전에서 동남풍이 불 것을 예측하지 못해 전투 직전에서야 속았다며 후퇴할 것을 진언하지만 이미 때가 늦어 대패한 경우.[13] 이 때만큼은 최승우조차 "아군의 군세가 압도적이니 적도 어쩔 수 없을 것"이라고 전투 전부터 자신만만했기에 변명의 여지가 없다. 다만 이 경우에는 왕건 측의 태평제사를 지내서 바람의 방향을 바꾼 아주 기상천외한 일이었기 때문에 합리적인 인간이라면 예상하지 못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고 볼 수 있다. 최승우의 잘못이라기보다는 왕건 측이 초인적인 방법을 썼다고 봐야할 것이다.

더욱이 최승우의 계책이 실패하는 장면의 대부분이 견훤이나 후백제의 장수 및 신료들이 최승우의 조언을 제대로 듣지 않거나, 충실히 이행하지 않아서 발생한 것이라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전장에 나선 태자들이나 장수들이 원래 최승우가 구상한대로 계획을 실행에 옮기지 않고, 상황을 지나치게 낙관하고 자신을 과신한 나머지 계획에 없던 돌발 행동을 드러낼 때 종종 일을 그르치는 경우가 나타난다.
실제로 작중 견훤과 장수들이 전투에 실패한 뒤 "파진찬의 말을 들을 걸..."이라고 후회하는 장면이 종종 나온다. 어찌 되었든 최승우는 후백제의 앞날이 어둡다는 것을 직감하는 가운데서도 신하의 도리를 다해서 견훤을 충성스럽게 보필하였는데, 견훤이 늙어가면서 슬슬 자신의 진언도 잘 듣지 않는데다 이 후의 전투에서 고려에게 점점 밀리게 되는 상황이 전개 된다. 등창까지 앓고 있는 노구를 이끌고 견훤이 열심히 도망만 치던 와중에도, 최승우는 군졸복으로 갈아 입고 이 곳, 저 곳을 뛰어 다니면서 최선을 다해 견훤을 끝까지 보필하였다. 여러모로 능력은 출중한데, 운이 없는 케이스라 할 만하다. 애초에 견훤이 최승우의 비범한 인물됨을 알고 직접 찾아가서 무릎까지 꿇는 정성을 다해 데려온 인물이었건만 후반부로 갈수록 "파진찬도 늙었구만..."이라며 최승우의 진언을 잘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래도 견훤은 최승우의 의견에 대해서는 늘 귀를 기울이려고 하고 관심을 가지며 절대적인 신뢰와 신임은 변함이 없었다. 이찬 능환이 후반부엔 매사 무시당하는 것과는 대조적이며[14], 견훤이 최승우의 간언대로 시행하지는 않더라도, 경청하거나 혹은 견훤 자신이 먼저 의견을 구하기도 했다.

딱 한 번, 최승우의 계책이 실패한 건 바로 왕건이 고려의 왕으로 등극한 것. 분명 자신이 세운 이간책대로 왕건이 궁예에 의해 죽고, 궁예는 더욱 민심을 잃으며 태봉이 점점 하락세를 걷는 것이 최승우가 꿈 꾸었던 최고의 청사진이었다. 그러나 역모 사건에 휘말렸던 왕건은 최응의 도움으로 위기에서 간신히 벗어나고 혁명을 일으켜 왕좌에 오르게 되었다. 이러한 결과에 최승우는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한다. 더군다나 최승우는 견훤과 대화를 할 때 다 잘 될 것이라 100% 확신하며 미소까지 지었으니 당혹스럽기도 할 것이다. 그리고 놀랍게도 견훤은 최승우의 미소에도 불구하고 "과연 우리 뜻대로 잘 돌아갈까. 글쎄..." 하고 내심 불안해하는 눈치를 보였다. 그리고 결과는 견훤의 불길한 예감이 맞았고 최승우가 틀린 것이었다. 최승우가 최응의 역할을 예상치 못한 것이 결정적이었다. 다만 이러한 최승우의 구상은 그의 능력 부족 때문이라기 보다는, 왕건에게 그야말로 천운이 따른 것이기도 했고 무엇보다 극중에서 주인공 버프가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왕건과 그를 보필하는 최응, 태평 등과 같은 인물들 역시도 최승우처럼 뛰어나기도 했기 때문이다.

2.3. 후백제의 후계쟁탈전과 최후

후백제의 몰락을 가져온 견훤의 후계 구도 문제에 있어서는 사실 중립적인 입장을 고수했다. 최승우는 금강신검보다 왕의 재목에 가깝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이 때문에 금강을 후계자로 삼고 싶어하는 견훤의 심정도 잘 이해하고 있었으나, 국가 내부의 갈등과 혼란을 피하려면 역시 적장자인 신검이 후계자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비록 최승우 역시 신검이 한 나라를 경영할 만한 능력이 다소 부족하고 왕건과 대적하기에도 모자란 점이 많다고 여기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옥좌에 오르지 못할 만큼 치명적인 결함이 있는 인물로 보지는 않았다. 그래서 신검에게 권력이 승계되는 것도 백제의 미래를 위해서는 무탈한 길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스스로 생각했다. [15]

하지만 견훤이 이미 신검에게 여러 번의 기회를 주었지만 매번 그 기대를 걷어차면서 견훤은 계속 실망했고 이에 신검이 아닌 금강에게 왕위를 물려주기로 마음을 굳히게 된다. 견훤의 심중을 이미 파악하고 있었던 최승우는 견훤의 마음을 돌리기는 어렵다고 판단하게 된다. 그래서 최승우는 견훤에게 "기왕 금강을 세우겠다고 결정하셨다면, 혼란을 피하기 위해서는 가슴 아픈 일이지만 신검과 그 형제들을 제거해야만 한다."라고 간언을 올린다. 이러한 최승우의 진언은 태조 왕건 내에서 묘사된 그의 행보 및 성향과는 다소 반대되는 것인데, 이전에 아자개 귀부 사건이 발생했을 때 능환은 빨리 아자개를 쳐야 한다고 주장했던 반면 최승우는 아무리 급해도 어버이를 치는 자식은 없다며 반대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서라벌에 쳐들어갔을 때도 그 곳을 짓밟으면 안된다고 계속 간했고 그럼에도 견훤이 자신의 충언을 쿨하게 씹고 계속 무자비한 태도를 취하자 우려하는 모습도 보였다. 앞선 행적에서 볼 수 있듯 그렇게나 도덕과 인륜을 중요시하는 모습을 보여왔던 최승우가 이렇게 자식을 죽이라는 계책을 올릴 만큼 후백제의 상황이 매우 급박했던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최승우는 견훤에게 만약 신검을 비롯한 양검, 용검을 없애지 않는다면 나라의 후환이 될 것이며, 나라도 잃고 자식 모두를 잃게 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될 것이라고 이야기한다.[16]

하지만 견훤은 아무리 미운 자식들이라도 차마 아버지로서 자식들의 목숨을 거둘 수는 없다며, 남아있던 부자의 정 때문에 최승우의 진언을 한사코 거부했다. 최승우는 견훤이 자신의 제안을 거부하자, 차선책으로써 최대한 빨리 신검과 그 형제들을 아주 먼 지역으로 내려보낼 것을 제안했고, 견훤도 이 제안에 대해서는 적극 받아들였다. 그래서 견훤은 신검에게는 3년 동안 후백제 전역을 순행하면서 왕도인 완산주에는 오지 말 것을 명령하는 한편 양검용검의 도독직은 거두고 그들을 멀리 지방으로 위리안치할 것과, 이찬 능환을 비롯해 여러 대신들도 삭탈관직하여 지방으로 내려보내고, 신덕은 그 목숨을 거두도록 할 것을 지시하는 밀서를 작성하도록 한다. 금강으로의 권력 승계를 순조롭게 하기 위한 이러한 계획안은 밀서 형태로 작성되어, 자신의 사위이자 금강의 후견인인 박영규에게 전달될 예정이었다.

그런데 이와 같은 구상을 견훤이 최승우에게 은밀히 밝히자, 최승우는 신검과 용검, 양검 형제들은 제거해야 하지만 신검 측 대신들에 대해서는 별도의 접근 방식을 취했다. 아마도 최승우는 신검 형제들이 조정에서 모습을 감추면 신검을 따르는 세력들도 달리 역심을 품지 못할 것이기 때문에 굳이 이들을 정계에서 축출할 필요는 없다고 판단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견훤의 과도한 조급증과 무모한 방식 때문에 도리어 신검 측 인물들이 다른 마음을 품고 행동으로 옮길 공산이 있다고도 생각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최승우는 견훤이 지나치게 서두르고 있다며 힘으로 신검 측 대신들을 억누르기 보다는, 한 사람씩 만나서 달래고 어루만져 주면서 정치적으로 이를 풀어내야 한다고 충고한다. 하지만 견훤왕건이 언제 백제로 쳐들어 올 지 모르는데 자신은 등창이 나서 병약해졌고 늙을대로 늙었다며, 속히 금강으로의 권력 승계를 마무리 짓고 왕건과 자웅을 겨룰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야 주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렇기 때문에 무력을 동원해서 신검파 대신들을 제압해야 한다는 것의 당위성을 주장하면서 조급한 모습을 여과없이 드러낸다.

그러나 애초에 신검 형제들이 살아있는 상황에서 금강에게 보위를 넘겨준다는 것 자체가 무리수로 작용할 수 밖에 없는 일이었기에 최승우는 나라의 앞날이 어두워지고 있다는 것을 직감하게 된다. 이에 최승우는 지금 자식들의 목숨을 거둔다면 자식들만 잃지만 지금 그리하지 않는다면 자식들과 나라 둘 다 잃는다며 다시 한 번 견훤에게 자식들을 지방으로 보내는 즉시 목숨을 거둘 것을 청하지만 견훤은 차마 그렇게 하지 못했고, 결국 최승우는 답이 없다며 좌절하고 만다. 이 때 견훤에게 "훗날 신의 말이 생각날 때가 있으실 것이옵니다." 라는 말을 남긴다. 그리고 그것은 그대로 현실이 되었다.

그래도 어떻게든 나라를 살리기 위해 직접 금강을 찾아가 나라의 앞날을 위해 욕심을 버리고 신검에게 후계자 자리를 양보해줄 것을 간청하지만, 이미 왕위 계승 여부가 자신의 목숨과 직결된 문제라고 스스로 판단한 금강은 이를 완강히 거부한다. 물론 금강의 입장에서는 살기 위해서도 그렇지만, 금강이 스스로 말했던 것처럼 자신이 왕위 계승에 있어서 유리한 위치를 점하고 있는데 이를 포기하기도 여간해서 쉽지 않았을 것이다. 당연히 금강이 바보가 아니라 이복 형제들이 자신을 그렇게 증오하고 꺼린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으니 왕위를 포기한다고 해도 살아남지 못하리라 생각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또한 이 시점에서 금강은 왕위에 도전하여 승리 직전까지 간 상황이었기에 설령 본인 스스로 왕위를 포기해도 평생 숙청의 공포 속에서 떨며 살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다른 한편에서 생각해본다면 금강이 왕위를 양보하는 게 오히려 살아남는 길일 수도 있었을 것이다. 자신이 이복 형들에게 미움 받는 주 원인이 후계 문제와 얽혀있는 것 때문인데, 애초에 본인은 우선순위가 밀리는 입장이니 신검[17]에게 왕위 승계권을 무탈히 넘겨버리면 굳이 죽일 이유가 사라진다. 양검과 용검이 "내 손으로 금강의 목을 베고 싶다."라고는 했지만 이 발언 역시도 신검의 쿠데타가 일어나는 와중에 나왔던 것이다. 이 때문에 최승우가 금강에게 왕위 승계를 포기하라고 권유했을 때, 금강 본인은 왕위 계승을 포기하는 것이 곧 자신이 죽는 길이라고 확신하였고, 최승우는 "절대로 그런 불행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이 최후의 설득이 실패로 돌아가자 죽음을 직감한 최승우는 하인을 시켜 자신이 쓴 글들을 태우게 하고 일부 족자 등은 선물로 주며 자신을 섬기던 사람들을 내보내는 등 삶을 정리하고 자신의 최후를 준비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후계 문제로 인해 후백제는 내란의 위기에 처하게 되고, 자신 역시도 그 소용돌이에서 최후를 맞이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내다본 것이다.

결국 신검 세력이 쿠데타를 일으키면서 최승우의 불길한 예감은 현실로 나타나게 된다. 금강 세력으로 간주된 최승우를 처단하기 위해서 능환과 상귀 등이 군사들을 이끌고 최승우의 자택을 찾았을 때, 최승우는 이미 후백제에 출사할 때부터 자신의 운명을 알고 있었다며 담담히 능환의 앞에서 독이 들어있는 차를 마셔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여기서 죽음을 맞이할 때 삶에 대해 굉장히 초연한 모습을 보여주는 최승우와[18] 이런 모습을 보고 착잡함을 금치 못한채, 그를 끌어내 참형하려던 상귀를 제지하며 독차를 마셔 편히 자결하도록 배려하면서 마지막 가는 길을 눈물로 배웅하는 능환의 대담은 그야말로 명장면이 아닐 수 없다.
최승우: 이찬 어른께서 오셨사옵니다, 그려. 벌써 이 사람은 며칠 전부터 기다리고 있었사옵니다. 어떻사옵니까. 차 한 잔 하시겠사옵니까?
능환: 지금 국사가 바쁘게 돌아가고 있네. 그럴 만한 여유는 없는 것 같네 그려. 이렇게 만나게 돼서 참으로 유감일세.
최승우: 별말씀을. 언제 어떻게 가던 간에 사람이 세상에 한 번 왔으면 가는 것이 아니겠사옵니까? 헌데 신검 태자께서는 지금쯤 일을 끝을 내셨는지요?
능환: 지금 궁궐에 계시네. 다 끝나갈 것이야.
상귀: 이찬 어른! 그만 목을 베어야 하지 않겠사옵니까!
능환: 자네를 이 백제국에 데려오고 초청한 건 나일세. 결국 이렇게 되다니.
최승우: 어차피 처음 봤을 때부터 이 사람은 가야 할 길을 알고 있었사옵니다. 백제는 그리 오래 못 갈 것이옵니다.
상귀: 닥치지 못할까!
최승우: 모든 이치와 섭리가 그렇게 돌아가고 있사옵니다. 자, 한 잔 하지 않으시겠다면 혼자 마실 수밖에 없겠사옵니다그려. 이제 이 피곤한 몸을 쉬어야겠사옵니다. (잔을 들어 올리려 한다)
상귀: 그만두지 못할까! 이찬 어른, 이 자가 약을 마시려 하고 있사옵니다! 마땅히 참하여 목을 베어야 하지 않겠사옵니까!
최승우: 허면... 그리 할까요?
(최승우와 이찬의 시선이 오간다)
상귀: 이찬 어른!
능환: 상귀 장군, 그만 놔두시게. 편히 가시게 하세나.
최승우: (호탕하게 웃으며) 고맙사옵니다, 이찬 어른. 날씨가 차서 장졸들이 고생이 많을 것이옵니다. 이 사람 때문에 이곳까지 왔으니 술이라도 한 잔씩 하고 가라고 술 몇 동이를 담아 놨사옵니다. 내 초상날인데 그래도 술은 있어야 하지 않겠사옵니까? 허허허허...
(약을 들이킨다)
최승우: 머지않아 또 만날 것이옵니다. 저승에서 말이옵니다. 아아, 무거운 세상 짐을 내려놓으니 이렇게 편안한 것을... 하하하하...
능환: 파진찬... 잘 가시게. (이후 최승우는 눈을 감는다.)
-태조 왕건 190화에서 최승우와 능환의 마지막 대화

이후 최승우의 목은 상귀의 군사들이 베어 금강의 수급과 함께 저잣거리에 내걸었다.

이처럼 드라마 태조 왕건에서는 신검의 쿠테타 이후 죽는 것으로 묘사되었지만 실제 역사에서는 그의 죽음에 대해선 정확하게 나와 있지 않다. 고려군에게 죽었다는 이야기도 있으며 후백제가 멸망한 뒤 왕건의 등용 요청을 거절하고 초야로 들어가 여생을 보냈다는 설도 있다.

여담으로 견훤의 책사라서 일부러 그렇게 설정한 것인지 마찬가지로 궁예의 책사였던 종간의 최후와 비슷한 점이 많다. 죽기 전 주변을 정리한다던가, 음독자살을 하는 것도 그렇고, 죽은 후에 목이 잘려 저잣거리에 걸리는 것도 같다.
최승우, 본관은 경주다. 당나라에 유학하여 국학에서 3년간 공부하였고 빈공과에 급제한 뒤에 당나라 관직에 있다가 귀국하였다. 그는 신라 말 대표적인 지식인으로 대두 됐던 6두품 출신중 최치원, 최원위와 함께 3최로 불렸으며, 귀국일에 후백제의 견훤을 만나 그를 섬겨 후백제의 번성기에 크게 일조 하였다. 특히나 그는 고려 태조에게 보내는 대 견훤기 고려 왕서를 지은 사람이기도 하다. 문장이 탁월하여 호본집 5권을 저술 하였다 하나 전하지는 않는다.
-태조 왕건 최승우 사후 나레이션

3. 인물들과의 관계

능환은 최승우와 극중 내내 의견차를 보여주고 라이벌 구도를 세우긴 했으나, 능환 역시 최승우의 능력을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 공적인 일로 대립하며 섭섭함과 원망을 토로하는 장면이 있긴 했으나 그렇다고 해서 죽일 정도로 증오심을 품지는 않았다. 무엇보다도 애초에 최승우를 견훤에게 소개하고 등용을 권유했던 사람이 능환 자신이었다. 같은 주인 옆을 가장 함께 오래 지킨 최측근으로서, 결국 입장 차이, 특히 후계 문제로 인하여 최승우를 죽일 수밖에 없는 안타까운 상황을 맞이 했다는 사실에, 능환은 눈물을 흘렸다.

하지만 후백제 내 다른 인물들과는 크게 관계를 맺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신덕, 능애 등 정치적 동료들을 둔 능환과 달리 최승우는 당여를 모으기는 커녕 제자 하나 두지도 않았다. 문제는 이런 최승우에게 견훤이 후계자 금강의 안위를 맡겼다는 것이다. 최승우가 후백제 최고의 책사라고 하지만 우군이 전혀 없다보니 금강에게 힘을 실어줄 수 없었다. 그나마 우군이라고 할 수 있는 인물은 견훤이 최승우와 함께 금강의 후견인으로 임명한 사위 박영규 정도다.

사실 최승우도 자신의 파벌을 만들려 하면 얼마든지 만들 수 있었을 것이다. 능력은 후백제 최고고 인품도 흠잡을 데 없는데다가 그와 말이 잘 통하는 사람도 여럿 있었기 때문이다. 능환과 신검의 파벌에 서는 신덕과 영순만 해도, 후백제 후계자 쟁탈전이 불거지기 전까지는 최승우와 꽤 가까웠다. 능환이 과격한 의견을 내면 최승우와 신덕, 영순이 반대로 신중한 의견을 내거나, 세 명이 함께 '좀 더 신중하게 움직여야 하는데' 라며 우려를 표하는 장면도 있었다. 그럼에도 마지막까지 최승우 파벌이라서 부를 사람이 거의 없었다는 건 파벌을 못 만든 게 아니라 안 만든 거다.

한편 190회에서 양검의 "아까운 사람인데 하필 금강이 편에 서가지고..."라는 대사나 참했다는 말을 들은 신검의 표정 등을 볼 때 신검파에게도 능력만은 인정받고 있었다는 걸 알 수 있다.

극 중에서 최승우는 최응과 라이벌 구도를 세우고 있는 것으로 나온다. 실제로 극 중에서 조물성 전투, 백제 수군의 송악 기습전 등에서 최응이나 최승우의 말대로 "우리 같은 책사들은 멀리 있어도 서로 잘 알 수 있고 그 인연이 있다."는 말이 나온다. 특히 최응이 불치병에 걸려 사망하기 얼마 전(178회), 송악 기습전을 통해 예성강 근처에 진을 쳤을 때 최승우는 편지를 보내 최응을 초대했고 최응도 이에 응하여 병든 몸을 이끌고 최지몽을 대동하여 직접 적진으로 가 최승우와 대담을 갖게 된다. 이 때 최승우도 본의 아니게 백제 내부의 후계자 구도에 휩쓸려 슬슬 자신의 최후를 예상하고 있던 상황이라 최응과 대화하며 그 스스로도 어디에 뼈를 묻어야 할 것인지를 쓸쓸하고 담담하게 이야기 하는 장면은 그 두 사람 간의 사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비록 서로의 입장이 입장이다 보니 라이벌이었을 뿐 인간적으로는 최응에게 상당한 호감을 갖고 있다. 조물성 전투에서도 돌림병에 걸린 최응에게 약차를 주어 병을 낫게 도와주거나 하는 등 배려할 수 있는 건 배려해준다.[19]

3.1. 견훤의 절대적 신임

견훤은 최승우를 끝까지 절대적으로 신뢰하며 매우 아꼈는데, 똑같은 주장을 해도 다른 신료들이 하면 흘려 듣거나 심하면 역정을 낸 것에 반해서 최승우가 진언 하면 귀담아 듣는 모습을 보인다. 일례로 다음 보위에 관한 논의를 능환, 능애 등이 꺼내는 족족 견훤에게 무안을 당하거나 때로는 격노를 샀던 것에 반해 최승우가 나중에 조용히 간하면 한층 누그러진 태도로 "그래, 그 친구들 말도 일리가 있긴 한데..."라는 식의 반응을 보인 것을 들 수 있다. 이런 태도가 절정에 달한 것은 맏아들 신검의 탓으로 고창 전투에서 대패를 하고 돌아온 이후인데, 조정에서 "다시는 내 허락없이 후사를 논하지 마라. 명을 어기고 이 이야기를 꺼내는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군율로 다스릴 것이다"라고 엄포를 늘어놓고는, 그 바로 다음 장면에서 최승우와 둘만 남게 되자 견훤 스스로가 먼저 그 이야기를 꺼낸다(...)

뿐만 아니라 최승우가 견훤에게 출사한 이래, 견훤은 평생토록 극 중에서 최승우에게 언성을 높이거나 모욕을 주는 행위를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다. 굳이 따지자면 아자개가 고려로 간다는 소식을 듣고 출병을 할 것인지 말 것인지에 대해 조회에서 논하는데, 최승우가 군사를 일으키는 것에 대해 "실리가 적으며 자식이 부모를 군사로 치는 것은 옳지 않다."며 계속해서 만류하자 견훤이 "그만하게 파진찬! 이미 군대를 보내기로 하였어!"라며 매우 화를 내며 말을 끊은 게 있기는 한데, 결론적으로 일단 출병시켰음에도 결국 최승우의 만류대로 공격 명령은 내리지 않았고 견훤도 "파진찬의 말이 맞다."며 쓴 눈물을 삼켰다. 어쨌든 견훤이 격노한 상황에서도 최승우가 일단 말을 하면 일단 듣고 화를 누그러뜨리거나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물론 최승우가 내놓은 안들이 대체로 적절한 것들이기도 했고, 최승우가 갖고 있는 캐릭터가 워낙 사심없이 항상 담백하고 차분한 태도로 처신을 잘한 것도 한 몫하기도 했다.

게다가 견훤은 말년에는 금강을 후계자로 세우면서 "날 도와줬던 것처럼 금강이를 도와주게. 난 그저 자네만 있으면 든든하이.", "자네하고 내가 세운 나라일세."라 말했을 정도. 이러한 견훤과 최승우의 관계는 드라마 정도전에서 이성계정도전의 관계와 비슷하다. 이성계 역시도 정도전을 단순히 자신의 신하가 아니라, 조선을 함께 세운 공동 창업주로 인식했었고, 정도전에 대한 절대적인 신임을 보여준다. 이성계가 전형적인 무장인 것처럼 견훤 역시도 군관 출신이고 무력이 출중한 군인의 풍모를 갖고 있고, 최승우 역시도 정도전처럼 지략이 뛰어난 책사이다. 게다가 이성계정도전1차 왕자의 난으로 권력을 잃고 정도전은 목숨을 잃었던 것처럼, 견훤도 왕자들의 난으로 왕권을 상실하고 최승우 역시도 최후를 맞이하는 점도 너무나도 닮아 있다.

이후 쿠데타를 일으킨 신검 세력들이 금강과 최승우를 죽였다는 말을 듣고는 견훤은 불같이 화를 냈다. 견훤이 최승우를 자신이 아끼던 아들과 같은 급으로 생각했다는 이야기다. 금산사에 유폐된 뒤에 경보대사의 조언으로 금강과 최승우의 천도제를 지내던 견훤은 원통하다는 금강과 최승우의 절규를 환청으로 들을 정도. 다만 금강이라면 모를까, 최승우에 대해선 100% 견훤 혼자 만의 생각일 가능성이 높다. 최승우는 일찍 자신의 최후를 예상했고 그에 대한 준비를 했고, 마지막 순간에도 의연함을 잃지 않았던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최승우로서는 억울한 점이 없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절규를 지를 정도는 아닐 것이다. 견훤은 최승우와 금강이 매우 끔찍하고 고통스러운 최후를 맞이했으리라고 짐작하고 있었기에 그런 심리가 반영된 환청일 가능성이 크다. 다만, 최승우는 능환의 마지막 배려로 독약을 먹어 자살했으며, 금강은 신검이 단칼에 베어 비교적 덜 고통스럽게 죽게 해줬다.

4. 평가

최승우는 극중에서, 후백제 뿐만이 아니라, 궁예의 태봉, 왕건의 고려, 멸망으로 치닫고 있는 신라를 포함하더라도 드라마 상 내 이만한 책사는 없다고 할 수 있을 정도다.[20] 즉, 본 드라마에서 가장 뛰어난 책사 이미지를 만들 정도로 활약하고 보여주었다. 사실 그와 견줄만한 인물로는 최응태평 정도가 있고, 태평의 경우, 나주 공방전에서는 최승우가 말하길 자기보다 뛰어난 책사가 있는 것 같다고 할 정도로 지모를 보였지만, 종합적인 활약 면에서 최응과 태평은 최승우만큼의 성과를 거두거나 영향력을 끼치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주인공 버프왕건부터가 지략과 운이 매우 뛰어나기 때문에 최응과 태평이 왕건 진영에서 차지하는 역할과 기여도의 비중이 후백제에서 최승우의 비중과는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21]

최승우가 계획하고 주장했던 것들은 대부분 들어 맞았고 그가 우려하고 경계했던 것들은 모두 현실이 된다. 후백제의 장수들이나 견훤이 최승우의 말대로 행동에 옮기면 어김없이 그것은 성과를 거두었고 그렇지 않은 경우는 어김없이 실책을 범하게 되는 장면이 종종 연출된다. 이처럼 견훤의 후백제 건국 때부터 거의 모든 주요 전략들이 최승우에 의해서 입안되는 연출이 잦다보니 고려 측에서는 태평과 최응이라는 걸출한 참모들이 중반까지 후백제를 이리 저리 뒤흔드는데 반해서 후백제 측에서는 최승우 혼자 머리 굴리는데 바쁘다는 느낌까지 줄 정도다. 더군다나 태평과 최응의 제안이나 전략에 대해 고려의 장수들과 중신들이 대부분 수용하고 잘 따르는데 비하여 최승우의 제안은 상대적으로 호전적이고 성미급한 장수들과 중신들의 반발에 부딪히는 경우가 많은 편인데 후반부로 갈수록 그 정도가 심해지면서 더 처지가 나쁜 편이다.

특히 작중에서 최승우가 제안하는 전략은 무력 사용에 신중하거나 현재 상황이 불리하여 후일을 기약하자고 진언하는 경우가 자주 나타난다. 그래서인지 수달, 추허조, 애술과 같은 호전적인 강골 성향의 무장들은 즉시 공격해야 한다며 반발하는 장면이 자주 나왔다. 기본적으로 호전적인 견훤의 성격으로 인하여 그의 건의가 수용되지 않는 경우도 많았는데 그로 인하여 후백제가 본래 입었을 피해보다 더 큰 피해를 입곤 했다. 대표적인 예로 김효종이 지키고 있는 대야성을 처음으로 공략할 때 최승우는 공략 자체를 반대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출진한 후에도 신중한 전투를 주장했으나 또다시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여기서 이 반대만으로도 많은 장수들의 반발을 샀다.[22] 후에 나주 전투에서 수달이 포로로 끌려가 처형당하면서 복수전을 하려는 견훤을 말리지만 견훤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공격을 밀어붙이다가 오히려 여러 차례 패배하였던 것이 있다. 후반부의 운주성 전투에서도 다음 기회를 노리자는 제안을 하지만 견훤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갔다가 견훤 자신의 병, 추위, 고려군의 기습 등으로 또다시 패전하는 모습이 나온다. 견훤이 거병할 때부터 보좌했던 능환은 나이가 들면서부터는 입안하는 전략들이 시원찮아 신검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느낌마저 들게해 더 이상 신임받는 제1책사가 아니라는 사실에 대한 분노와 질투감의 발로로 인해 최승우의 의견을 어떻게든 묵살하려는 모습도 자주 보여서 답답한 느낌을 들게 한다. 또다른 참모인 종훈[23]은 능환보다는 나은 편이지만 아무래도 최승우나 최응보다는 뒤떨어지는 인물로 묘사되는데 극 후반부의 운주성 전투에서 등에 화살을 맞고 사로잡히면서 퇴장한다. 운주성 전투 이후 인재들이 바닥나고 극 중에서 최승우는 "어찌해 볼 방책이 없구나. 먹이를 찾는 이리떼만 들끓고 조정에는 사람이 보이질 않으니... 오오... 이를 어이할꼬?" 하며 독백하는 모습을 보면 이렇다.
도선 : 먼 곳에서 길손이 드는구나.. 오호 귀인이 길을 잘 못들었구나. 쯧쯧쯧.
최승우 : 안에 계시옵니까? 계시옵니까?
(경보가 문을 열어준다)
최승우 : 길손 문안이옵니다. 대사님을 뵈러 온 최승우이옵니다. (고개를 들어 대사를 바라보니 가히 살아있는 부처의 모습이라 감탄한 뒤 다시 고개를 숙여 예를 갖춘다)대사님! 소생 최승우이옵니다!
도선 : (웃으며 반갑게) 어서 오시게.
최승우 : (예를 갖추며) 예! 먼 풍문에 소식 접하고 있었사옵니다. 이곳에 계신다기에 금성 포구에서 내려서 스님을 뵈러 왔사옵니다.
도선 : 어찌하여 서라벌로 가지 않고 이곳 금성에서 내리셨는고?
최승우 : 이미 서라벌은 그 운명이 다 되었다고 들었습니다. 간들 뭘 하겠사옵니까.
도선 : 그렇다면 이 땅에는 무엇하러 오셨는고?
최승우 : 당나라에 벼슬을 하고 있었사옵니다. 그곳도 어수선하기는 신라와 마찬가지이옵니다. 어차피 머리 둘 곳이 없는 운명인지라, 기왕 뼈를 묻을 양이면은 내 땅에 묻히고 싶어 왔사옵니다.
도선 : 오. 그대 같은 현자가 어쩌자고 여기로 왔는고.
최승우 : 어인 말씀이신지요.
도선 : 으음? 아닐세. 그저 해 본 소리야.
최승우 : 대사님! 소인이 대사님을 뵈러 온 것은 이 나라와 소인이 갈 길을 여쭙고자 함이옵니다. 일러 주시옵소서.
도선 : 이를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그대가 다 알고 있는 것을. 이 신라는 이제 옛날 삼한 시대로 돌아가고 있네. 새로운 주인이 다시 자리를 잡으려면 오랜 세월 피를 흘려야겠지.
최승우 : 그 세월이 얼마나 되오리까?
도선 : 족히 한 세월이니 아마도 반 백 년은 되겠구먼.
최승우 : 누가 천하의 주인이 되오리까?
도선 : 천기를 어찌 누설할 수 있겠는가? 내가 말해 줄 수 있는 것은 그대가 머무는 곳에는 주인의 의자가 없다는 것이야.
최승우 : 그렇사옵니까.... 하오면 소생은 어디로 가야 하오리까?
도선 : 그대는 아마도 이 땅을 벗어나지 못할 것일세.
최승우 : 예?! 이 땅이라면? 견훤 왕을 이르는 것이옵니까?
도선 : 어서 드시게. 우리도 이제 먼 길을 떠나야 하네.
최승우 : 예.

작중 최고의 고승인 도선대사[24]와도 대화를 나눈 적이 있는데 그 전에 관할 지역 태수가 희대의 대 학자를 알아보지 못하고 놓친 것을 크게 한탄하는 장면부터 나온다. 견훤의 신하가 된 후 아자개를 찾아갔을 때 "자네 같은 인물이 어쩌다 견훤 그놈을 따르게 됐냐."며 아자개가 혀를 차는 모습도 나왔고 도선조차도 현자라고 인정하는 것을 보면 분명 극 중에서는 거의 작가 공인 최고의 책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도선은 물론 제자 경보 또한 각각 능환과 최응 등을 보고도 현자라고까지 하지는 않았다. 그의 최후 대사에 "어차피 처음 왔을 때부터 가야 할 길을 알고 있었다"라고 말을 하는데 그것이 이 부분이었으며 이미 도선에게 앞날을 예지받았고 어떻게든 그것을 바꿔보고자 고군분투하지만 결국 운명을 거스르지는 못했다.

극 중 왕건에게는 가장 위협적인 존재라고 볼 수 있는데 왕건의 최대 라이벌인 견훤의 책사들 가운데 가장 지략이 뛰어날 뿐만 아니라 판세를 보는 안목과 식견, 인덕이 가장 출중한 인물이다. 후백제가 고려의 왕건에게 타격을 준 것도 모두 최승우가 입안한 계책에 따른 것이었으며 양길의 잔여 세력을 움직여 궁예를 암살하도록 사주한 것도 최승우의 구상에 따른 것이었다. 궁예 암살 미수 사건으로 독화살로 상처를 입은 궁예는 이후 심통이 겹치며 점점 의심증이 심해지고 정신적인 문제를 일으키기 시작함으로써 태봉의 몰락을 가져오게 한 계기가 되었다. 궁예가 점점 초심을 잃고 광인이 되어가는 과정에서 왕건에 대한 의심과 견제도 점점 높아짐에 따라서 왕건이 권력 분쟁에 휘말려 죽을 뻔한 적도 있었다. 후백제의 조물성 전투 승리, 후백제군의 서라벌 함락과 공산 전투에서의 왕건군 격파 등에 결정적으로 기여하여 왕건에게 엄청난 타격과 시련을 안겨주기도 했다. 조물성 전투에서 패배한 왕건은 견훤에게 상부(尙父)라고 칭하고 고개를 숙였고 서라벌을 함락시키고 경순왕을 보위에 올려 일시적으로 신라를 후백제의 종속국으로 만들어 버렸다. 무엇보다 공산 전투에서 고려의 왕건군을 대파하여 왕건이 신임하는 신숭겸, 김락 등을 전사하게 하였고 왕건도 가까스로 목숨을 건지게 되는데 왕건 일생의 최대 위기를 안겨 준 것이다. 고창 전투에서 후백제군이 대패함으로써 다시 왕건이 주도권을 쥐게 되지만 신검과 함께 후백제 수군을 이끌고 예성강을 습격하고 고려의 수도 송악을 일시 점령함으로써 마지막까지 왕건을 압박한 인물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왕건을 끊임없이 견제하고 제거하고자 했던 종간이나 아지태보다 더 무섭게 왕건에게 위협적인 인물은 바로 최승우였다고 볼 수 있다.

자신의 운명을 일찌감치 알고 있었던 비운의 책사이기도 했다. 후백제에 출사하기 이전에 당나라에서 고국으로 돌아온 최승우는 도선과 만난 자리에서 자신의 운명과 삼한의 미래를 물은 적이 있는데 이 때 도선은 최승우에게 “그대가 모시게 될 주인에게는 주인의 의자가 없다”고 하고 결국 후백제 땅을 벗어나지 못할 것이라고 예언하였다.[25] 최승우는 도선으로부터 자신의 운명에 관한 예언을 들었지만 견훤이 무릎까지 꿇어가며 간청하며 삼고초려하자 견훤의 간청을 받아들여 그의 신하가 된다. 이후 최승우는 자신의 비극적인 운명을 어느 정도 예감하면서도 모든 힘을 다해서 견훤을 돕는다. 물론 신라가 쇠락하고 삼한은 물론 당나라까지 혼란해진 상황에서 누군가에 의해서 삼한이 통일되어야 한다는 대의명분을 위해서였다. 전란의 시대를 끝내고 고단한 백성들의 삶을 안정시켜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견훤을 돕는다. 특히 극 중에서 양길의 잔여 세력으로 하여금 궁예를 암살하려는 공작을 펼쳤고 비록 궁예를 제거하는 데에는 실패했지만 암살 미수 사건 과정에서 궁예는 심각한 상처를 입게 됨으로써 궁예 정권을 붕괴시키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하게 된다.

이 때 궁예가 미치광이가 되어 사람들을 무참히 살해하고 반인륜적인 모습을 보이는 등 막장으로 국가를 운영하는 과정을 보면서 최승우는 자신을 아껴주고 전폭적으로 지지하고 밀어주는 견훤에게 출사한 자신의 선택이 옳았고 도선의 예언은 틀렸다라고 잠시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후 왕건의 역성혁명으로 궁예가 축출되고 왕건이 빠른 시간 내에 정권을 안정화시키는 것을 보고 최승우는 무척 당황스러워 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최승우가 당황한 이유는 왕건의 신정권이 후백제에게 대단히 위협적인 존재라고 보았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왕건이라고 하는 정상적인 사고를 가지고 매우 출중한 능력을 가진 인물이 보위에 올라 자신이 모시고 있는 견훤과 자웅을 겨루게 되는 상황을 목도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아마도 이 때 최승우는 지난 날 도선의 예언이 다시 한 번 떠올렸을 것이다. 특히 최승우가 견훤에게 출사할 무렵 삼한에는 궁예와 양길 등과 같은 여러 군웅들이 할거하고 있었고 왕건이라고 하는 인물은 아직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던 시절이었다. 최승우가 도선으로부터 예언을 들었던 시점에서 본다면 왕건이 정권을 장악하고 고려를 건국한 것은 예상 밖의 일이었을 것이다. 본래 최승우가 의도했던 것은 궁예가 판단력이 흐려지는 상황 속에서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왕건을 제거하고 궁예 역시도 날이 갈수록 막장에 치닫게 됨으로써 천하의 민심은 결국 후백제에게 오게 될 것이라는 기대를 갖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극 중에서 궁예의 책사 종간이 지략과 관상술에 뛰어나 사람의 앞날을 예측했던 것처럼 최승우 역시도 판세를 꿰뚫어 보는 안목이 있고 점성술이 뛰어나 미래를 내다보는 능력을 소유하고 있었다. 고창 전투의 패배 이후 갈수록 백제의 국운이 쇠하고 후계 문제로 후백제 전체가 분열하고 내란의 가능성마저 엿보이자 최승우는 자신이 비극적인 운명을 맞이하게 될 것이라는 예감을 점점 확신으로 굳혀 나가게 된다. 그래서인지 극 중 후반부 왕건에게 최후의 타격을 준 예성강 기습 작전을 성공시켰음에도 불구하고 최응과의 마지막 대담에서 비관적인 전망을 한다.

이때 최승우는 최응에게 "허망한 것은, 이긴 자는 자신의 행실을 기록에 남겨 역사라고 하지만, 진 자는 그것마저 다 사라지고 변명의 여지 조차도 없다. 도적이나 화적떼의 이름으로 분류되어 오명으로 남을 뿐이다", "훗날 언제 어디서 어떻게 이 구차한 삶이 끝났는지 모를 수 있다"며 그것이 두렵다고 말하는 장면이 나온다. 실제로 극 중에서 그가 한 말처럼 최승우는 생몰연대조차 기록되어 있지 않고 그의 생애와 행적에 대한 기록은 대단히 소략하다. 다른 신라삼최최치원최언위와 비교해보더라도 그의 기록은 거의 전하지 않고 소실되다시피 했다. 최치원은 죽어서도 고려 왕조조선 왕조에서 문묘에 배향되는 영광을 누렸고 최언위 역시도 고려에 귀부한 뒤로 고려 조정에 출사하여 평안한 말년을 보내고 자신의 학문을 보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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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위 오른쪽 오프닝에서의 능환과 최승우. 오른쪽 인물이 배우 전무송이 맡은 파진찬 최승우이다. 여담으로 123회부터 오프닝 때는 두 사람의 위치를 반전해 보여주었다.[2] 다만 실제로 최언위는 드라마에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3] 견훤이 말년에 견금강후계자로 세우면서 최승우에게 견금강을 부탁할 때 "자네하고 내가 세운 국가일세."라 말하기도 했다. 최승우와 대립했던 능환 역시 최승우를 후백제를 세운 주역이라고 추켜 세운 적이 있다.[4] 비슷한 사례로 종간과 최응이 있다. 또한 한나라 고제 유방의 1등 공신인 소하가 그 활약에 비해 중국 사극에서 비중이 높지 않은 것 역시 그가 행정가이자 문관 포지션에 있었기 때문이다.[5] 신라 관위 17등급 중 4등급에 해당하는 관위다. 후백제는 신라의 관위 체계를 가져왔으나 개량했기 때문에 극 중에서는 이찬이 1번째 관등, 파진찬이 2번째 관등으로 언급된다.[6] 여담으로 최승우가 금성 포구에서 백계산 옥룡사로 가던 장면은 나중에 당나라로 유학을 간 경보가 돌아왔을 때 오마주되었다. 다른 점이라면 최승우 때는 신라에서 후백제로 가던 무렵이었고, 경보 때는 금성, 즉 나주 일대가 후백제가 아닌 고려의 영토라는 점이었다.[7] 물론 능환이 일부러 추허조를 보냈다는 사실을 모르는 견훤은 추허조가 최승우에게 한 일을 알고 추허조를 갈군다.[8] 동행한 금성(錦城, 현 나주시)태수 종례가 말리지 않았다면 정말 불을 질렀을 판이었다. 이 에피소드도 따지고 보면 삼국지연의의 삼고초려를 오마주한 것으로 삼국지연의에서 장비가 제갈량이 유비를 무시하고 잠이나 잔다고 여겨 깨우겠다며 불을 지르려다가 관우에게 만류당한 구도와 흡사하다. 차이점은 무관인 관우와 달리 능환은 군인 출신이지만 백제 건국 후에는 참모이자 조정 원로라는 점이었다.[9] 이때 같이 온 능환, 능창, 추허조 등은 말할 것도 없고 최승우조차도 놀라는 눈치였다.[10] 이들 중 한명은 사실대로 말해 살아 돌아갈 수 있었다.[11] 실제로 최승우는 도우를 고려로 파견하기 이전에 도우에게 "비록 태봉국의 황제를 죽이지는 못했으나 지금까지도 그 일로 어마어마한 성과를 보고 있다."라고 말했다.[12] 실제로는 신숭겸, 복지겸, 홍유, 배현경이 '이대로는 안 되겠다.'라면서 혁명 준비를 일찌감치 했으며, 왕건은 처음에 반대했으나 거듭된 간청에 승낙한 것이다.절대 왕건이나 '4기장'이 최승우의 복안을 눈치챈 것이 아니다.[13] 견훤이 이 때 "적이 코앞에 있는데 어떻게 후퇴를 한단 말인가"라며 반대하는데 이 부분은 분명 합당한 판단이다. 적이 코앞에 있는데 후퇴를 할 경우 오히려 싸울 때보다 더 큰 피해를 입을 수 있다.[14] 능환의 경우 능력 면에서 점점 후달리는 면을 보여주는데다가 능애와 더불어 신검을 옹호하기 때문에 견훤 자신에게 밉보이니 아무래도 정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실제로 1차 대야성 공격 이후 견훤은 군사적 업무를 능황에서 최승우로 넘기게 되었다.[15] 실제 역사에서도 전쟁에는 무능했어도 정치나 내정 면에서 유능한 군주들이 많았다.[16] 차이가 큰 것이 저 때 아자개를 치지 않아 큰 손실을 보긴 했지만 나라가 멸망하진 않았다. 그러나 신검과 그 형제들을 죽이지 않았을 때는 나라가 멸망하고 결과적으로 아들들도 비참하게 죽었다. 실제로 아자개는 한 지방의 대호족 정도의 위치라 넘어가더라도 후백제 자체를 어찌할 정도는 안 된 반면, 신검은 적장자라는 적통성과 나라 내의 기반도 있어 충분히 반란을 일으킬 수 있고, 이 경우 내분이 일어나 나라가 망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17] 작중 적장자로 설정된 지라 혈통으로 따지면 가장 정통성이 있다.[18] 여기서 그는 그동안 이승에서의 삶이 너무 고단하였기에 무거운 짐을 내려놓을 수 있어 오히려 편안하다고 말한다. 그동안 그의 고뇌가 얼마나 컸는가를 알 수 있게 하는 대목이다.[19] 작가의 삼국지빠적 경향을 감안할 때, 이 일화는 육항양호를 참고했다.[20] KBS Drama Classic 연속 무료 스트리밍태조 왕건/유튜브 스트리밍때는 시청자들이 댓글로 말하길, "최승우가 하라는대로만 잘 했어도 견훤이 후삼국시대 통일했을 것이다. '태조 견훤'이 됐을 것." 이라고까지 평가할 정도였다.[21] 심지어 완전한 지략전이라고는 하기 힘들지만 조물성 전투에서 전염병 때문에 골골 대는 고려 군과 달리 해결책을 찾은 후백제 군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외교 노선을 보인 것에서 다른 둘보다 뛰어난 포스를 만들어냈다.[22] 특히 처음 최승우를 데리러 갔다가 악감정을 품은 추허조는 전투에서 패하고 나서도 그 식견을 인정하기는커녕 "파진찬은 우리가 지기를 얼마나 바랐겠는가" 하고 도리어 불평했으며 오랜 고생 끝에 피해만 보고 철군한 뒤에 견훤이 책임을 자신에게 돌릴 때에도 최승우를 끝까지 물고 늘어졌다.[23] 사서에 기록이 적어서 그렇지, 실존 인물이다. 술사(術士)라고 하는데 술사라고 하면 점쟁이라는 뜻도 있지만 술책(術策). 그러니까 책략을 꾸미는 사람이라는 뜻도 있다. 즉, 실제 역사에서는 책사가 아니었던 최승우와는 달리 정말로 책사일 가능성도 있다는 소리. 다만 사서의 기록이라는 것이 운주성 전투유금필에게 사로잡혀 항복했다는 것밖에 없다. 극 중에서는 살해, 전사당하는 것으로 각각 묘사된 백제의 군의(軍醫) 훈겸과 장군 최필도 이 때 같이 사로잡혀 항복했다.[24] 거의 데우스 엑스 마키나 혹은 작가를 대입했다고 해도 좋을만큼 태조 왕건 세계관의 최강자이다. 날씨를 조종하고 미래를 예지하는 살아있는 부처이자 신선과도 같은 존재. 그와 견줄만한 사람은 극중 또다른 도인인 왕거인정도 밖에 없다. 그 제자인 경보대사도 자신은 스승에 비하면 발끝에도 한참 모자라다고 말한 바 있다.[25] 훗날 당나라에서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경보는 아예 "스승님께서 예전에 말씀해주셨잖습니까."로 확인사살까지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