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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30 23:56:57

왕들의 취미

1. 개요

뭔가 색다른 취미를 가진 군주들의 취미 일람. 다만 이는 정말 색다른 것일 수도 있고 왕답지 않은 것일 수도 있다.

2. 아시아

2.1. 한국

2.1.1. 고구려

2.1.2. 백제

2.1.3. 신라

2.1.4. 고려

2.1.5. 조선 ~ 대한제국

2.2. 중국

2.2.1. 상나라

2.2.2. 주나라

2.2.3. 춘추전국시대

2.2.4. 진나라

2.2.5. 한나라

2.2.6. 삼국

2.2.7. 서진

2.2.8. 남북조시대

2.2.8.1. 북조
2.2.8.2. 남조

2.2.9. 수나라

2.2.10. 당나라

2.2.11. 오대십국시대

2.2.12. 송나라

2.2.13. 금나라

2.2.14. 명나라

이 분야의 끝판왕. 특히 명 4대 암군의 취미는 취미를 넘어 나라를 망하는데 큰 일조를 했다. 명 4대 암군 참조.

2.2.15. 청나라

2.3. 일본[16]

2.3.1. 헤이안 시대

2.3.2. 가마쿠라 시대

2.3.3. 무로마치 시대

2.3.4. 센고쿠 시대

2.3.5. 아즈치 모모야마 시대

2.3.6. 에도 시대

2.3.7. 근현대

2.4. 몽골

2.4.1. 몽골 제국

2.5. 우즈베키스탄

2.5.1. 티무르 제국

2.6. 티베트

2.7. 브루나이

3. 유럽

3.1. 네덜란드

3.2. 덴마크

3.3. 독일

3.3.1. 신성 로마 제국

3.3.2. 프로이센 왕국

3.3.3. 바이에른 왕국

3.4. 스웨덴

3.5. 벨기에

3.6. 영국

3.7. 오스트리아

3.8. 프랑스

3.9. 스페인

3.10. 포르투갈

3.11. 이탈리아

3.12. 그리스

3.12.1. 헬레니즘 제국

3.12.2. 근현대

3.13. 러시아

3.14. 불가리아

3.15. 헝가리

3.16. 보헤미아

3.17. 로마

3.17.1. 로마 제국

3.17.2. 바티칸(교황)

3.18. 튀르키예

3.18.1. 오스만 제국

전 세계 역대 군주들 중에서 취미가 가장 화려하기로 유명하다.

4. 중동

4.1. 이집트

4.1.1. 고대 4왕조

4.2. 이슬람 제국

4.2.1. 압바스 왕조

4.3. 이집트 왕국

4.3.1. 무함마드 알리 왕조

4.4. 이란


[1] 고대 한국에서는 매사냥이 상당히 유행했다. 《일본서기》에서도 왜국에 처음으로 매사냥하는 법을 전파한 백제의 왕족인 주군의 기록을 찾아볼 수 있다. 사실 매사냥은 한국 뿐만 아니라 매가 서식하는 곳이라면 거의 다 고위층들의 취미로 각광받아왔다. 대륙으로만 따져도 유라시아와 아프리카, 아메리카 등 남극과 호주를 제외하면 그 흔적이 항상 존재했다. 한반도에서도 비단 앞서 언급된 고대시대 뿐만 아니라 이후로도 계속 전통이 이어져서 가까이에는 조선시대에 응방을 운영한 기록이 있으며, 현대에도 사냥 그 자체가 목적은 아니고 전통과 문화 보존이 목적으로 여전히 계승되고 있다.[2] 물론 한 사람이 음식을 이렇게 많이 먹기는 힘들기 때문에 무열왕의 치세가 그만큼 풍요로웠음을 암시하기 위한 기록일 가능성이 크다.[3] 다만 한양천도 후에는 화원에 간 기록이 없다.[4] 훈민정음의 그 유명한 첫 구절인 '나랏말싸미 듕귁에 달아'에서의 '듕귁'이 바로 동국정운식 표기법이다.[5] 즉위 후 제일 먼저 죽인 생물이 선왕 성종이 키우던 사슴이었다.[6] 조선시대의 잡채는 다양한 종류의 채소와 고기를 정갈한 모양으로 다듬고 채썬 후 삶거나 볶아서 만든 고급 요리였다. 이충은 직접 땅을 파서 온실을 만들어 한겨울에도 신선한 채소를 재배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그가 만든 잡채 맛의 비결이었다고 한다.[7] 도리어 개혁군주로 손꼽히는 영조의 손자 정조야말로 성리학 원리주의와 복고주의를 신봉하여 문체반정을 통해 옛날의 글쓰기 방식과 다른 소설류 등을 탄압하였다.[8] 당장 일본만 해도 자동차를 탄 최초의 군주는 다이쇼 덴노이다.[9] 먼 훗날의 제위왕도 비슷한 일화가 있다.[10] 그 자신부터가 호복기사 개혁을 추진할 정도로 군사적 안목이 출중했다.[11] 이에 분노한 혜문앙의 측근 인상여가 그 자리에서 소양왕을 협박하여 분부를 연주할 것을 요구하여 복수한 일화도 유명하다.[12] 진나라의 수도 함양을 점령했을 당시에도 범증항우에게 "유방처럼 여색을 즐기는 놈이 관중에 들어가서도 여자를 밝히지 않으니 이는 분명 야심을 감추고 있는 것이다."라고 주장할 정도였다.[13] 영제가 특히 돈에 대한 집착이 심했던 것은 어린 시절에 무늬만 황족일 뿐 매우 가난하게 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환제가 후사를 남기지 못한 상태에서 요절하는 바람에 5촌 조카뻘인 영제가 즉위하게 된 것이다.[14] 조조의 손자병법 주석본은 이른바 《위무주손자》라고도 불리는데, 현대인들이 읽고 있는 손자병법의 기본 판본이기도 하다.[15] 다행히 유욱은 죽임당하지 않고 살아남았는데 전폐제의 막장행각이 너무 심하다 보니 즉위한 지 1년밖에 안 되어 유욱보다 먼저 죽임당했기 때문.[16] 일본의 사실상 군주였던 쇼군, 관백, 태합도 포함. 허나 쇼군들도 무사이기 때문에 검술과 도검 수집 등의 취미는 대부분 있었으므로 본 항목에서는 생략.[17] 그것도 있지만 당시 사무라이들은 체면 상의 이유로 자기보다 낮은 신분의 사람들과 시비가 붙으면, 결투를 벌여서 시비털은 상대를 베는 기리스테고멘을 해야했다. 당연히 그런 귀찮은 일을 만들기 싫어했던 부하들은 덴뿌라를 사러가는 것에 대해 난색을 표한 바 있었다. 결국 해결책이라고 내놓은 게 인적이 드문 오밤중에 복면을 쓰고 변장해서 덴뿌라를 사가는 것이었다.[18] 몽골 제국 이전 인물이지만 카마그 몽골과 몽골 제국은 주류민족은 같으니 서술[19] 칭기즈 칸 조차도 술을 적게 먹는 사람은 봤어도 아예 먹지 않는 사람은 본 적이 없으며, 그런 사람이 있다면 크게 중용해야 한다고 말할 정도였다.[20] 오고타이의 동생인 톨루이도 형 못잖은 주당으로 그 역시 알콜 중독으로 사망했다.[21] 고려가 투항했을 당시에 당 태종도 꺾지 못했던 고려가 항복했다며 기뻐했고, 훗날 손자인 충선왕이 한 고조와 당 태종을 존경한다는 말을 듣자 그들과 자신을 비교하면 어떻냐는 질문을 하기도 했다.[22] 사실 불교승려들도 삼정육이라 하여, 직접 죽이거나 죽어가는 것을 목격한 고기만 아니라면, 폭식이나 과식을 하지않는 이상에야 얼마든지 육식을 해도 상관없다. 실제로 달라이 라마 14세폴 매카트니의 조언을 듣고 채식주의를 시도해보긴 했는데, 금방 건강에 이상이 생겨서 때려치운 바 있다.[23] 차트를 달리는 남자 '재벌들의 괴짜 취미'에서 4위에 랭크됐다.[24] 그 이외에도 취미랄 건 아니지만, 왕의 날 기념 행사의 일환으로 DJ들의 공연이 있자, 행사에 참여한 수많은 사람들과 함께 어울려서 춤을 춘 적도 있다. 원래 네덜란드가 왕실 관련 행사에 DJ를 부를 정도로 문화적으로 개방된 면이 있지만, 빌럼알렉산더르는 이런 문화를 감안해도 대단히 소탈하고 파격적인 면모가 많다.[25]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오페라는 이탈리아어로 제작하는 것이 일반적인 관행이었는데, 요제프 2세는 이탈리아어를 알지 못하는 서민층들도 알아듣고 즐길 수 있도록 독일어 오페라를 주문한 것이다.[26] 주변국에게 비웃음을 살 정도로 지독하게 절약했고 그걸로 마련한 돈을 군대에 투자해 부국강병의 기초를 다졌다. 특히 게으른걸 싫어할 정도로 본인은 성실했다.[27] 주로 소나무참나무를 선호했다고 한다.[28] 나무 베는 게 그리 사치스러운 취미도 아닐 뿐더러, 큼지막한 도끼를 들고 아름드리 나무들을 거뜬히 베어내는 모습을 보고, 국민들이 상남자라고 좋아했기 때문이다.[29] 스웨덴의 한자 음차가 서전이다. 서전의 "서"에서 봉황의 "봉"자를 합쳐서 서봉총이다.[30] 물론, 당대의 소문이 그랬을 뿐이고, 실제의 마상창시합은 현대 영국 사회의 축구정도의 위상을 가진 당대 최고의 인기 스포츠라서, 청년왕 헨리의 사후에도 영국은 물론이요 유럽 전역에서 잘만 흥행했다. 이 때문에 아예 현대로 치면 프로 스포츠 구단인 마상창시합 전용 기사단까지 대거 생겨났던 바 있다. 요즘도 일부 입헌군주제 국가에서 왕실이 최애 축구단의 스폰서를 자처하는 것처럼, 각국의 군주들이 이런 기사단을 후원하는 일이 많아서, 사실 청년왕 헨리가 딱히 유별난 건 아니었다.[31] 아크레 공성전 당시에는 열병에 시달리던 중에도 침대에 누운 상태에서 쇠뇌를 발사해 성벽 위에 있던 살라딘의 병사를 명중시키기도 했다.[32] 4번째 부인인 클레베의 앤과 결혼하자마자 사이가 틀어진 이유가 이것이다. 원래는 미인으로 소문난 여인이라 하여 결혼을 했더니, 상상했던 것보다 못난이라서 1차로 실망했다고 한다. 그래도 그런대로 매력점은 있으리라고 생각해서 일단은 같이 살기로 했으나, 알고보니 할 줄 아는 게 뜨개질밖에 없었을 만큼 클레베의 앤이 일자무식이라서(클레베 공국은 딸들에게 신부수업 이외의 교육을 거의 안 시킬 정도로 대단히 보수적이었다고 한다) 2차로 멘붕했던 것이다. 그래서 단단히 빡친 나머지, 이 결혼을 알선한 토머스 크롬웰목을 날려버리고 이혼해버렸다.[33] 정작 상술한 그의 어머니인 빅토리아 여왕은 지독한 혐연가였다.[34] 당대 영국 평균수명보다 조금 더 적었을 뿐이고 어머니가 워낙 장수해서 재위기간이 9년밖에 안 되는 것이지만 그럼에도 상대적으로 아까운 죽음인 것은 사실이다.[35] 중세시대의 테니스는 라켓 없이 손으로 공을 쳐서 주고 받는 핸드볼과 비슷한 스포츠였다. 테니스용 라켓이 만들어진 것은 16세기 이후의 일이다.[36] 프랑스인들의 이런 면모는 현대의 유명인들에게도 플러스 요인을 만들어주거나 적어도 비난받지는 않는 역할을 하고 있다. 가령, 프랑수아 올랑드 대통령은 외간 여자와 간통한 사실이 들통났을때에도 그저 당시에 대통령 신분으로 외국산 오토바이를 탔다는 사실 구설수 거리로 취급되었고, 20세기를 풍미한 철학자 장폴 사르트르는 아예 호색한 기질 때문에 그의 극좌 성향과 엮여서 멋있는 상남자로 불리면서 당대의 젊은이들의 우상으로 꼽혔다.[37] 루이 14세발레 공연을 할 때 그리스 신화태양신아폴론으로 분장하고 나타났는데, 그의 대표적인 별명인 '태양왕'이 여기서 유래했을 정도로 왕권 강화와 왕실 권위 신장에 큰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루이 14세의 발레리노 시절을 다룬 2001년작 프랑스 영화왕의 춤에서는 그가 아폴론 분장을 한 채로 화려한 불꽃 쇼를 선보이며 등장해 아름다운 춤사위를 보이는데, 모후인 안 도트리슈가 이를 보고 "내 아들!"이라 외치며 감격해하자 옆에 있던 재상 리슐리외"이젠 마마의 아드님이 아닙니다. 이 나라의 왕이십니다."라고 말을 덧붙이고, 그 와중에 왕의 최대 정적들이 그에게 직접 왕관을 바치는 역할을 맡는 굴욕을 당하는 장면이 나온다.[38] 사실 부르봉 왕조의 역대 왕들이 식신들이 많은 편이어서 루이 16세만 해도 처형 당일날 대량의 닭고기커틀릿, 삶은 계란을 먹어치우고는 단두대로 걸어올랐다고 하지만, 이런 먹보 기질을 왕권 강화를 위한 쇼맨십으로 이용한 군주는 루이 14세가 유일했다. 사실 그는 오늘날의 블라디미르 푸틴 못지않게 쇼맨십을 중시했던지라, 현대의 주류 역사학계로부터는 잦은 전쟁과 사치로 민생을 악화시킨 암군으로 평가받음에도 불구하고, 당대에는 국민들에게 멋진 모습으로 각인되어서 성군으로 대접받은 바 있다.[39] 이 점은 아돌프 히틀러와 비슷하다. 그래도 히틀러는 근대 시대 이후 본인이 세계 최초로 동물보호법을 창시한 사람답게 비록 고양이를 싫어했어도 루이 14세처럼 고양이들을 불태워 죽이거나 하진 않았다.[40] 철학자 디오게네스는 대놓고 알렉산드로스가 헤파이스티온의 허벅지에 지배당하고 있다고 말했다. 바고아스는 본래 페르시아의 대왕 다리우스 3세의 캐터마이트였던 이력이 있으며 게드로시안 사막을 횡단하던 중 춤 경연대회에서 바고아스가 우승하자 알렉산드로스가 그에게 키스를 해주었다는 기록이 전한다.[41] 아버지 표트르 3세의 프로이센 사랑이 영향을 준 듯 하다. 실제로 파벨 1세는 아버지 표트르 3세를 불과 8세에 잃어서 그렇게 기억이 많지는 않았지만 아버지 사후 즉위한 어머니 예카테리나 2세에 대한 증오로 아버지를 그리워했다.[42] 문제는 그가 후사를 남겨야 하는 황제인데도 이랬다는 것. 그의 딸 2명은 모두 어린 시절 요절했고 그 이상의 자녀는 없었기에 그의 사후 황위는 동생인 니콜라이 1세에게 넘어갔다.[43]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오페라는 이탈리아어로 제작하는 것이 일반적인 관행이었는데, 요제프 2세는 이탈리아어를 알지 못하는 서민층들도 알아듣고 즐길 수 있도록 독일어 오페라를 주문한 것이다.[44]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오페라는 이탈리아어로 제작하는 것이 일반적인 관행이었는데, 요제프 2세는 이탈리아어를 알지 못하는 서민층들도 알아듣고 즐길 수 있도록 독일어 오페라를 주문한 것이다.[45] 엄밀히 말하자면 이 사람은 생전에 제위에 오르지는 못했다.[46] 재료 중 하나로 송로버섯이 들어갈 정도였다.[47] 다만 르네상스 시대에는 가톨릭 성직자들이 대체로 타락하여 교리를 어기고 아이를 가진 경우가 많았다. 그나마 공식적으로는 이 사생아들을 "조카"라고 소개했으며 중세 시대에는 교황이 대놓고 자식을 낳고도 눈치도 안 보던 시절에 비하면 그나마 나은 것일지도.[48] 사제 서품을 받기 전인 어린시절에는 축구선수를 장래희망으로 삼았을 정도였다.[49] 말타고 멧돼지를 쫓다가 낙마를 하면서 죽었다는 설도 있다.[50] 정확히는 포도주가 악마의 것으로 지정되어 금지되었고 일부 허용되는 술도 있었는데, 셀림이 즐겼던 건 포도주다. 레판토 해전으로 이어지는 키프로스 침공도 이 섬이 질 좋은 포도주 산지라는 이유였다고도 전해질 정도.[51] 그나마 1656년부터 2차 빈 공방전 이전까지 대재상을 역임한 3명의 쾨프륄뤼 가문 출신들이 유능한 덕분에 제국의 사건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황제자릴 지킬 수 있었다. 그러나 3번째 쾨프륄뤼 가문 출신인 카라 무스타파 파사를 본인이 처형한 이후 헝가리를 내주는 참사를 내며 황제 자리에서 내려와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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