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ddd,#000><colcolor=#000,#ddd> 도나토 브라만테 Donato Bramante | |
본명 | 도나토 디 파스쿠초 단토니오 Donato di Pascuccio d'Antonio |
출생 | 1444년 9월 8일 우르비노 공국, 페르미냐노(Fermignano) |
사망 | 1514년 3월 11일 로마 |
직업 | 건축가 |
국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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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탈리아의 건축가, 화가. 고전적 원칙에 기반한 건축 스타일로 후대에 큰 영향을 미쳤다. 대표작은 템피에토, 코르틸레 델 벨베데레가 있으며, 성 베드로 대성당의 초기 설계자이기도 하다.2. 생애
1444년 이탈리아 마르케의 페르미냐노(Fermignano)에서 태어났으며 가난한 농부 가정 출신이었다. 20km 거리에 있는 우르비노에서 화가 바르톨로메오 디 조반니 코라디니(일명 프라 카르네발레) 문하에서 훈련받았다. 당시 우르비노는 페데리코 다 몬테펠트로의 후원 아래 문화의 중심지 중 하나였으며, 브라만테는 만테냐,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 루카 시뇨렐리, 멜로초 다 포리, 레온 바티스타 알베르티 등의 작가들과 교류했다.1476년경 만토바를 거쳐 1477년에 밀라노 공국에 정착한다. 밀라노에서 그는 루도비코 스포르차 공작(일명 '일 모로')의 궁정 화가이자 건축가로 활동하게 되었는데, 특히 말년의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도 교류하며 영향을 주고 받았다. 이 시기부터 건축 경력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산타 마리아 프레소 산 사티로(Santa Maria presso San Satiro, 1482-1486)의 건축 및 레오나르도의 최후의 만찬이 있는 산타 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교회(Santa Maria delle Grazie, 1492-99)의 앱스(apse)[1]도 작업했다. 파비아 대성당(Pavia Cathedral)의 크립트(crypt)[2], 스포르차 성의 탑도 브라만테의 작품이다.
1499년 체사레 보르자가 이끄는 프랑스군이 밀라노를 침략하며 일 모로가 몰락하자 로마로 갔다. 교황 율리오 2세의 신임을 바탕으로 주요 건축 프로젝트에 착수한다. 템피에토를 시작으로 한 로마에서의 활동은 경력의 정점이 되었고, 특히 성 베드로 대성당의 재건 프로젝트의 수석 건축가가 되어 초기 설계를 맡았으며, 그의 건축적 비전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남았다. 1514년에 로마에서 사망했다.
3. 대표작
템피에토 (Tempietto, 1502)성 베드로 대성당
코르틸레 델 벨베데레 (Cortile del Belvedere = Belvedere Courtyard, 벨베데레 정원, 1505-1514)
4. 레오나르도, 미켈란젤로, 라파엘로와의 관계
브라만테는 르네상스를 넘어서 미술사 전체에서도 거장으로 추앙 받는 3명의 예술가와도 밀접하게 얽혀 있는 인물이다.먼저 브라만테와 레오나르도는 밀라노에서 같은 시기에 활동하며 특히 산타 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교회 프로젝트에서 협력했다. 레오나르도는 '최후의 만찬'을 그렸고, 브라만테는 교회의 제단부의 설계를 담당했다. 두 사람은 공간 구성에 대한 공통된 관심을 공유했으며 레오나르도의 스케치북에서 브라만테의 건축 아이디어도 보인다.
율리오 2세는 미켈란젤로와 라파엘로도 함께 후원했다. 브라만테는 고향 후배이기도 한 라파엘로와 사이가 가까웠는데, 미켈란젤로는 이들이 자신을 시기, 질투하며 기존의 영묘 작업을 중단시키고 힘든 작업(시스티나 예배당 천장화)을 하게 만들었다고 생각했다. 아마 율리오 2세는 능수능란하게 이들을 경쟁시키며 최대한의 결과치를 얻어내려고 했을 것이다. 장수한 미켈란젤로는 브라만테와 라파엘로가 모두 사망하고도 26년이 더 지난 1546년에 성 베드로 대성당의 수석 건축가가 되어 이들의 작업을 상당 부분 수정하며 마무리짓는다. 이 때까지도 라파엘로에 대한 뒤끝이 남은 미켈란젤로는 라파엘로가 브라만테의 도움으로 자신의 작업을 훔쳐보고 베꼈다고 언급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