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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21 21:10:28

조식(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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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림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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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75 ~ 15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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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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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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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이세보
8월
박제가
9월
박진
10월
장지영
11월
왕인
12월
송진우
※ 선정 당시 기관명은 문화부(1990~1993) → 문화체육부(1993~1998) → 문화관광부(1998~2005)였다.
이달의 문화인물(1998-2005) }}}}}}}}}
파일:external/cyw.pe.kr/nmjohsik_abcsohn.jpg
<colbgcolor=#2e8b57> 이름 <colbgcolor=#fff,#191919>조식(曺植)[1]
건중(楗仲)
남명(南冥)[2], 방장노자(方丈老子)
방장산인(方丈山人), 산해선생(山海先生)
시호 문정(文貞)
출생 1501년(연산군 7년) 7월 10일 (음력 6월 26일)
조선 경상도 삼가현 토동[3]
사망 1572년(선조 5년) 2월 21일 (음력 2월 8일) (향년 71세)
조선 경상도 산음현 사륜동 산천재[4]
본관 창녕 조씨[5]
부모 부친 - 조언형(1469 ~ 1526)[6]
모친 - 인천 이씨(1476 ~ 1545)[7] - 이국(李菊)의 딸
부인 본처 - 남평 조씨(1500 ~ 1568) - 조수(曺琇)의 딸
측실 - 은진 송씨(1532 ~ 1610) - 송린(宋璘)의 딸
자녀 장남 - 조차산(曺次山, 요절) 남평 조씨 소생
장녀 - 상산 김씨 김행(金行)의 처 남평 조씨 소생
차남(서자) - 조차석(曺次石) 은진 송씨 소생
3남(서자) - 조차마(曺次磨) 은진 송씨 소생
4남(서자) - 조차정(曺次矴) 은진 송씨 소생
차녀(서녀) - 함안 조씨 조신도(趙信道)의 처 은진 송씨 소생
1. 개요2. 생애3. 남명학파의 흥망성쇠4. 퇴계 이황과의 관계5. 기타6. 야사야담7. 대중매체에서8. 관련 자료
8.1. 사이트8.2. 비문8.3. 동영상
9.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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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ruby(內明者敬 外斷者義, ruby=내 명 자 경 외 단 자 의)]
안으로 마음을 밝히는 것은 경()이요, 밖으로 행동을 결단하는 것은 의()이다.
조식이 경의검(敬義劍)에 새긴 검명

조선 중기의 유학자.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건중(楗仲). 호는 남명(南冥), 방장노자(方丈老子), 방장산인(方丈山人), 산해선생(山海先生)이고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사림의 계보와 붕당을 설명할 때 서경덕과 함께 북인의 시조 중 한 사람으로 빠지지 않고 거론되는 조선 성리학의 거두로, 의(義)를 철저히 중시하고 현실정치를 강하게 비판하여 파장을 일으킨 인물이다. 당대에는 퇴계 이황율곡 이이에 비견되는 명성을 떨쳤으며, 현대에도 경상남도 권역에서는 이들에게 밀리지 않는 위상을 가지고 있다.[8]

2. 생애

연산군 7년(1501) 음력 6월 26일 진시[9] 삼가현 토동에 있는 외조부 이국(李菊)의 집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조언형이고 모친은 인천 이씨이다.

어릴 때에는 벼슬하던 부친의 영향으로 한양단천 등을 오가며 생활했는데, 이 시기 유교 경서 이외에도 스스로 제자백가, 불교, 노장사상, 천문, 지리, 의학, 병법, 등 다양한 분야를 섭렵했다. 25세 때 『성리대전』에서 원나라의 유학자 노재 허형의 글[10]을 읽고 학문의 방향과 출처[11]을 정한 후부터 성리학을 집중적으로 공부하였고, 성성자(惺惺子)라는 방울 1쌍과 경의검(敬義劍)이라는 을 차고 다니며 늘 자신의 행동을 단속하였다. 이러한 내외의 공부를 통해 그는 내면의 수양(敬)과 수양한 바의 실천(義)을 함께 중시하는 학풍을 함양해 나갔다.

부친이 사망하고 삼년상을 치른 후, 의령자굴산에 머무르다가[12] 30세 때 처가가 있는 김해로 거처를 옮겼다.[13] 이 시기인 37세 때 낙방한 것을 마지막으로 과거시험을 완전히 단념하고 스스로의 학문에 힘쓰기로 결심한다.[14] 그러다 모친상을 치른 후인 48세 때 고향인 합천으로 거처를 옮겨 61세 때까지 머물렀다.[15] 그 사이에 높은 학문으로 여러 번 벼슬길에 오를 것을 권유받았으나, 자신의 출처관에 따라 평생 한 번도 출사하지 않고 재야에서 산림처사로 일관하며 학문을 닦고 제자들을 양성했다.

출사하지는 않았지만 시사에 관심을 거두지 않았던 그는 현실정치에 많은 비판을 가했는데, 대표적인 글이 55세 때 명종에게 올린 「단성소」이다.[16] 조식은 상소문에서 명종을 "선왕외로운 후사(孤嗣)", 문정왕후를 "깊숙한 궁궐의 한 과부"라고 공개 비판하였는데, 친구인 성수침조차 아직 학문이 원숙하지 못해 이런 과격한 글을 올렸다고 평을 할 정도였다.[17] 당시 서슬시퍼런 문정왕후의 권세와 전횡을 보면 이러한 일침은 용감한 것을 넘어 "죽여달라" 는 말을 한거나 마찬가지다.[18]

명종이 하도 기가 차서 "아무리 임금이 어질지 못하기로서니 욕을 퍼부어서야 되냐?"며 분개해 조식을 죽이려 들었지만, "시골무식한 선비를 함부로 죽이면 언로가 막힌다" 하여 결국 뜻을 이루지 못했다. 오히려 『명종실록』에 기록된 조식은 찬양 일색인데, 「단성소」가 올라갔을 때 사관이 논한 내용을 보면 당시 관직도 마다했던 조식의 평판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엿볼 수 있다.
당시 유일(遺逸: 재야에 은거하면서도 명망이 높은 사람)이란 명성에 기대면서 공로와 명성을 도둑질하는 자가 많았다. 어질도다, 조식이여! 몸가짐을 조심스럽게 하고 절개를 지키면서 초야에 묻혀 있었으나, 난초의 향기가 저절로 퍼지듯 그 명망이 조정에 전달되어 이미 참봉에 임명되고[19]주부에 임명된 것이 두 번 세 번에 이르렀지만[20] 이미 모두 머리를 저으며 거절하였다. 지금 오마(五馬)의 직위[21]에 임명된 것은 영광스러울 뿐만 아니라 이를 제수한 (임금의) 은혜가 특별하다고 말할 만한데도 안빈함을 스스로 즐기며 끝내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으니 그 뜻이 가상하다. 그럼에도 조식은 과감하게 세상을 잊어버리지 못하였기에 상소문을 올려 절개를 가지고 항의하며 당시의 폐단을 극력 논하였다. 글이 매우 간절하면서도 뜻이 곧았을 뿐만 아니라 시대와 변란을 근심하여 우리 임금의 덕을 밝히고 백성들을 새롭게 하고자 하였고[22], 풍속과 교화가 왕도정치에 이르기를 바랐으니, 나라를 걱정하는 그 정성이 지극하다 하겠다.
『명종실록』 19권, 명종 10년(1555) 11월 19일 경술 첫번째 기사

이같은 대범한 행동으로 조식의 명성은 갈수록 높아졌고, 할 말 못하고 숨죽이던 선비들에게 큰 반향을 얻었다. 그리하여 재야에 있던 그에게 더 많은 인재들이 찾아와 배움을 청했고, 마침내 경상우도 일대에는 퇴계학파와 더불어 영남의 학풍을 양분한 남명학파가 형성되기에 이른다.

환갑이 되던 해에 덕산의 사륜동으로 이주하여 산천재를 짓고 10년 동안 강학에 힘썼다.[23] 이 기간 중인 명종 21년(1566), 문정왕후윤원형이 죽은 후 친정을 하던 임금의 부름을 받고 임훈, 이항, 남언경, 한수(韓修) 등과 함께 상경하여 학문과 정치의 도를 논하였으나[24], 상서원판관의 벼슬을 사양하고 7일 만에 지리산으로 돌아왔다. 명종의 뒤를 이은 선조도 즉위 직후부터 조식을 초빙하였으나[25], 그는 그때마다 벼슬을 거절하고 상소로 일관하였다. 이 시기에 적은 상소문 중 선조 1년(1568)에 올린 「무진봉사(戊辰封事)」는 서리들의 폐해를 논한 서리망국론(胥吏亡國論)으로 유명한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군민의 정치와 나라의 여러 사무가 모두 도필리(刀筆吏)의 손에서 나옵니다. 이들은 대가를 주지 않으면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안으로 재물을 모으면서 밖으로는 백성들을 흩뜨려 열에 하나도 남지 않게 만듭니다. 심지어 이들은 각자 주와 현을 나누어 사유물로 삼고 이를 문권(文券)으로 만들어서 자기 자손들에게 전하기까지 합니다. 뿐만 아니라 백성들이 공납으로 바치는 토산물들도 모두 물리쳐서 납부하지 못하게 합니다. 그러면 공납품을 바치는 사람들은 구족의 것을 모으고 가업을 모두 팔아넘겨 관아가 아닌 (아전들의) 사삿집에 내는데, 이때 본래 값의 100배가 아니면 받지도 않습니다. 그 뒤로도 계속 이렇게 납부할 수 없게 되니 빚을 지고 도망가는 사람이 줄을 잇습니다.

조종(祖宗)의 주현 백성들이 바치는 공납을 날다람쥐 같은 놈들이 나누어가질 줄 어찌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전하께서 누리시는 온 나라의 부(富)가 이들방납한 물자에 의지한 것일 줄 어찌 상상이나 하셨겠습니까? 왕망이나 동탁처럼 간악한 놈들도 이러지는 않았고, 망할 나라의 세상이라도 이런 적은 없었습니다. 이들은 이러고도 만족하지 못해서 국고의 물건까지 다 훔쳐내니 비축된 것은 아무것도 없고 나라꼴은 말이 아니게 되었으며 도성에는 도적들이 가득합니다.

나라가 한갓 텅 빈 그릇처럼 앙상하게 서 있습니다. 온 조정의 사람들은 목욕재계하고 마음을 가다듬어 이들을 쳐야 할 것이며, 힘이 모자라다면 사방에 명령을 내리시어 사람들을 불러모아 침식의 겨를도 없이 분주하게 임금님을 돕게 하시옵소서.
『선조실록』 2권, 선조 1년(1568) 5월 26일자 기사, 『남명집』 권 2, 「무진봉사(戊辰封事)」

「무진봉사」를 올린 해에 남명은 진주에서 일어난 옥사에 휘말려 곤욕을 치렀다.[26] 이 사건은 이정이 죽은 친구 이희안의 첩을 음행죄로 고발한 것에서 시작되었는데, 남명은 사건을 증언하는 과정에서 문제에 휘말렸고[27] 친구였던 이정과 절교하였다.[28] 이 일은 이후 1569년 남명의 제자 각재 하항 등이 사건과 관계된 함안 이씨의 집을 헐어 그들을 쫓아내는 훼가출향을 저지르면서 전국적으로 공론화되었다. 남명 또한 사람들의 구설에 올랐고[29] 자신을 옥사의 배후라 여기는 사건 관련자들로부터의 흉사를 피하기 위해 덕산과 김해를 오가며 지냈다. 이 사건은 남명의 사후 그의 학파가 분열하는 동시에 퇴계학파와의 갈등이 높아지는 계기가 되었고[30] 훗날 허목이 쓴 남명의 신도비덕산비의 철거 문제와도 연관되는 등 오래도록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31]

선조 5년(1572) 음력 2월 8일, 덕산의 산천재에서 72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사망으로부터 약 2개월 전에 발병한 등창이 직접적인 사인이었다. 죽음에 임하여 제자들에게 자신의 사후 칭호를 평생 벼슬길에 오르지 않고 초야에 묻혀 산 선비라는 뜻의 처사(處士)라고 할 것을 당부하였으며[32], 방의 벽에 붙여두었던 경(敬)과 의(義) 두 글자를 가리키며 그 중요성을 강조하였다.[33] 사망으로부터 두달 뒤인 음력 4월 6일 산천재 뒷산에 장사지냈다.

남명이 죽은 직후 선조는 그에게 제문을 내리면서 사간원 대사간에 추증하였고, 광해군은 1615년에 남명을 영의정에 추증하면서 시호인 문정(文貞)을 내렸다. 후학들은 덕천서원[34], 회산서원[35], 신산서원[36], 백운서원[37]을 건립해 스승의 업적을 기렸다. 이후 남명을 문묘에 종사하자는 건의도 몇차례 올라왔지만[38] 끝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의 제자들이 다수 참여한 북인의 주도로 지은 『선조실록』에 실린 조식의 졸기는 다음과 같다.
처사 조식이 죽었다. 조식의 자는 건중으로, 승문원판교 조언형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용모가 단정하여 어른처럼 정중하였고 장성하여서는 통달하지 않은 책이 없었는데, 특히 『좌전』과 유종원의 글을 더욱 좋아하였다. 저술에서는 기발하면서 고상한 것을 좋아하고 형식에 구애되지 않았다. 국학에서 선비들에게 시무책을 주문하였을 때 담당 관리에게 올린 글이 여러 번 높은 성적으로 뽑혀 명성이 사림들 간에 크게 알려졌다.

하루는 글을 읽다가 노재 허형의 '이윤이 뜻했던 바를 뜻하며 안연이 배웠던 바를 배운다'라는 말을 보고 비로소 자기가 전에 배운 것이 잘못되었음을 깨달아 성현의 학문에 뜻을 두고 과감하게 실천하여 다시는 세속의 학문에 동요되지 않았다. '경의(敬義)' 두 자를 벽 위에 크게 써 붙여놓고 '우리 집에 이 두 자가 있으니, 하늘의 해와 달이 만고를 밝히며 변하지 않는 것과 같다. 성현의 천만 가지 말이 귀납되는 취지를 요약하면 이 두 자 밖을 벗어나지 않는다'라 말하였다.

일찍이 문인들에게 '학문을 함은 어버이를 섬기고 형을 공경하는 예(禮)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여기에 힘쓰지 않고 갑자기 성리의 오묘함을 궁리하려 한다면, 이는 사람의 일에서 하늘의 이치를 구하는 것이 아니므로 결국 마음에는 아무런 실지 소득이 없을 것이니 깊이 경계하여야 한다'라 하였다. 천성이 효도함과 우애에 돈독하여 부모의 상을 당하여서는 상복을 벗지 않고 여막을 떠나지 않으면서 아우 조환(曺桓)과 숙식을 같이하며 따로 거처하지 않았다. 지식이 고명하고 출처진퇴의 도리에 밝아서, 세상의 도의가 쇠퇴하여 현자의 행로가 기구해지자 도를 만회해 보려는 뜻을 두었으나 끝내 때를 못 만났음을 알고 시골로 돌아갈 생각을 품었다. 만년에는 두류산 아래에 터전을 닦고 별도로 정사를 지어 산천재라 이름하고 그곳에서 여생을 보냈다.

중종 임금 때 천거로 헌릉참봉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고, 명종 임금 때 초야에서 은거하는 선비들을 등용하고자 할 때 천거되어 여러 번 6품관에 올랐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다시 상서원판관으로 불러들여져 대전에서 임금을 대하였는데, 임금이 치란의 도와 학문하는 방법을 묻자 '군신 간의 인정과 의리가 서로 믿게 된 연후라야 잘 다스릴 수 있고, 임금의 학문은 반드시 자득해야 하는 것이므로 남의 말만 들으면 무익합니다' 말하고 끝내 고향으로 돌아갔다. 지금의 임금께서 보위를 이으신 후 교서로 불렀으나 늙고 병들었다는 이유로 사양하였고, 계속하여 부르는 명이 내리자 상소를 올려 사양하면서 '구급(救急)'이라는 두 글자를 올려 자기의 몸을 대신할 것을 청하고 인하여 당시의 폐단 열 가지를 낱낱이 열거하였다. 그 뒤 또 교지를 내려 불렀으나 사양하고 상소문을 올렸으며, 다시 종친부전첨에 제수하였으나 끝내 나아가지 않았다. 신미년에 흉년이 크게 들어 임금께서 곡식을 하사하자 사례하고 상소를 올렸는데 언사가 매우 간절하였다.

임신년에 병이 심해지자 임금께서 전의를 보내어 치료하도록 하였으나 도착하기도 전에 죽으니 향년 72세였다. 부음이 알려지자 임금께서는 크게 슬퍼하여 신하를 보내 제사를 내려주고 곡식을 내려 부의하였으며, 사간원 대사간으로 추증하였다. 친구들과 제자 수백 명이 사방에서 찾아와 조상하고 우리 학문을 위하여 애통해 하였다.

조식은 도량이 맑고 고결했으며 두 눈에서는 빛이 나 바라보면 세속 사람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말과 글은 재기가 번뜩여 마치 우레와 번개가 일어나듯 하여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도 모르게 이욕의 마음이 사라지도록 하였다. 평상시에는 종일토록 단정히 앉아 게으른 용모를 하지 않았는데 나이가 칠십이 넘도록 언제나 한결같았다. 배우는 이들이 남명선생이라 불렀고, 문집 3권을 세상에 남겼다.

그리고 인조반정으로 북인 세력이 몰락한 후, 서인남인이 주축이 되어 지은 『선조수정실록』에 실린 조식의 졸기는 다음과 같다.
처사 조식이 죽었다. 조식의 자는 건중이며, 그 선대는 창녕 사람으로 합천의 삼가현에서 자랐다. 어릴 적에 호방하고 용감하여 잗단 예법에 구애받지 않아 스스로 그 재주를 과시하는가 하면 문장은 기이하면서도 예스럽고 고아함을 지향했는데, 내심 과거 급제나 공명(功名)은 손쉽게 이룰 것으로 여겼다. 그러던 중 일찍이 친구와 『성리대전』을 읽다가 노재 허형이 말한 '이윤이 뜻한 바를 뜻하고, 안자가 배운 바를 배우며, 세상에 나가면 공을 세우고 들어앉으면 절조를 지킨다'는 대목에 이르러, 장부는 마땅히 이와 같이 해야 한다고 여겨 크게 마음을 가다듬고 실학에 뜻을 독실히 하였으며 아울러 과거시험을 위한 공부를 그만두었다.

일찍이 서울에 갔다가 성수침을 방문했는데 그가 백악산 밑에 집을 짓고 세상사와 인연을 끊은 것을 보고는 마침내 그와 벗이 되었으며, 고향으로 돌아와 벼슬하지 않고 지리산 아래에서 살았다. 취사(取捨)를 함부로 하지 않아 남을 인정해 주는 일이 적었고, 항상 조용한 방에 단정히 앉아 칼로 턱을 고이는가 하면 허리춤에 방울을 차고 스스로 행동을 조심하여 밤에도 정신을 흐트러뜨린 적이 없었다. 한가로이 지낸 세월이 오래되자 사욕과 잡념이 깨끗이 씻겨져 천 길 높이 우뚝 선 기상이 있었고, 꼿꼿한 절개로 악을 미워하여 선량하지 않은 사람들을 마치 자기를 더럽히는 것처럼 봤기 때문에 그들이 감히 접근하지 못하고 오직 학도들만이 종유하였는데 모두 마음으로 복종하였다.

명종 때 이항과 함께 임금의 부름을 받고 입대하여 임금이 나라를 다스리는 도리를 묻자 매우 소략하게 대답하였다. 물러나 이항과 술을 마시고 취하여 "그대는 가장 우두머리 도적이고 나는 다음가는 도적이다. 우리같은 도적은 남의 집 담장을 뚫는 부류가 아니겠는가"라 농담하였다. 그리고 그 길로 하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가자 청백한 이름이 더 한층 소문이 났다.

임금께서 여러 번 벼슬을 제수하였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이때에 이르러 병이 나자 임금께서 의원을 보내 병을 치료하게 하였는데 의원이 도착하기 전에 졸하였다. 나이는 72세였다. 조정 대신이 시호를 내려 칭찬하고 장려하는 뜻을 보일 것을 청하니 임금께서 전례가 없다는 이유로 윤허하지 않은 대신, 대사헌에 추증하고 부의로 쓸 물품들을 하사하여 장사지내게 하였다.

조식의 학문은 마음으로 도를 깨닫는 것을 중시하고 치용(致用)과 실천을 앞세웠다. 시비를 강론하거나 변론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 학도를 위하여 경서를 풀이해 준 것은 없고, 다만 자신에게서 돌이켜 구하여 스스로 터득하게 하였다. 그 정신과 기풍이 사람을 격려하고 움직이는 점이 있기 때문에 그를 따라 배우는 이들의 공부가 열리는 일이 많았다. 『참동계』를 자못 즐겨 보면서 좋은 곳이 매우 많아 학문을 하는 데 도움이 있다고 했고, 또 석씨의 최고 경지는 우리 유가와 일반이라고도 하였다.

일찍이 '경의(敬義)'라는 두 글자를 벽에 써 두고 학인들에게 보였는데, 임종할 때 문인에게 "이 두 글자는 해와 달처럼 폐할 수 없다"라 하였다. 조식의 저서는 없고 약간의 시와 글들만 세상에 나돌 뿐인데, 학자들이 남명선생이라 불렀다.

3. 남명학파의 흥망성쇠

경상우도를 중심으로 형성된 남명학파는 경상좌도의 퇴계학파와 함께 영남의 학풍을 양분하였다.[39] 성리학의 이론적 심화를 중시했던 퇴계학파와 달리, 남명학파는 성리학의 실천과 의(義)를 중시하는 학풍으로 유명했다. 그런 남명학파의 주요 인물로는 오건[40], 정인홍, 최영경[41], 김우옹[42], 곽재우[43], 정구[44], 김우굉[45], 정탁[46], 김면, 이산해, 김효원 등이 있는데, 이들 가운데 수제자인 '남명오현(南冥五賢)'으로는 오건, 정인홍, 김우옹, 최영경, 정구가 꼽힌다. 그리고 남명과 퇴계의 문하에서 함께 공부한 인물들도 있었으니[47] 오건, 정구, 김우옹, 김우굉, 정탁, 김면, 이산해, 김효원, 이광우[48], 오운[49], 문익성 등이 그러했다.

조식이 죽고 3년 후 동서 분당이 일어났을 때 그의 제자들은 서경덕, 이황의 학맥과 함께 동인으로 모여 서인과 대립했다. 하지만 조식 학맥과 이황 학맥 간에는 스승들의 라이벌 관계로 인한 잠재적인 갈등 요소들이 몇 있는 상태였다. 이후 동인들은 정여립의 난으로 촉발된 기축옥사로 큰 타격을 받았는데, 특히 피해를 많이 입은 조식과 서경덕의 문인들[50]은 옥사 당시 서인의 공세를 막아주지 않았다는 이유로 이황의 문인들에게 불만이 높았다. 이러한 갈등들이 누적된 상태에서 2년이 흐르고, 옥사를 지휘한 정철건저문제로 실각하자 동인 세력은 그의 처리 문제를 놓고 분열했다. 이때 정철에 대한 강경한 처벌을 주장했던 조식의 문인들과 서경덕의 일부 문인들은 북인, 온건한 처벌을 주장했던 이황의 문인들은 남인에 다수 참여했다.

1년 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정인홍[51], 곽재우, 김면[52] 등 남명의 제자 50여명과 손제자들, 그리고 남명의 영향을 받아 그를 사숙하던 사람들은 근거지인 경상우도 지역에서 의병을 크게 일으켜 명성을 떨쳤다.[53] 이는 생전에 일본을 매우 경계하였던 스승 남명의 영향이 컸다. 남명학파가 주축을 이룬 경상우도의 의병들은 보급로의 차단 및 후방 교란 등의 활동으로 일본군의 전략에 차질을 주었고, 진주대첩에서도 혁혁한 공을 세우며 일본군의 전라도 진격을 저지하는 등 나라를 구하는데 일익을 담당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며 남명의 제자들이 많이 소속된 북인 세력은 조정에서 세력을 넓혀갔고 마침내 조식의 수제자 정인홍이 류성룡을 실각시키면서 집권당이 되었다. 그리고 북인이 영창대군의 계승 문제를 놓고 대북소북으로 분열하였을 때 정인홍은 대북의 영수가 되었다.

선조 말엽에서 광해군 즉위 초, 정인홍은 스승인 조식을 추존하면서 스승의 학문을 비판하고 이단시한 퇴계학파에 대응하는 모습을 보이기 시작하였다.[54] 그에 따라 조식의 문집인 『남명집』이 1604년에 처음 간행되었고, 정인홍은 「발남명집설」[55]과 「정맥고풍변」[56] 및 「변척소」[57] 등의 글을 지어 이황을 맹비난하였다. 이는 남명학파와 퇴계학파 간의 인식 차이와 라이벌 의식, 퇴계가 스승 남명을 학문적으로 이단시하고 비판한 것에 대한 분노, 그런 내용이 실린 퇴계의 문집과 퇴계학파의 인식에 대응하여 스승과 학파의 명예를 지키기 위한 태도 등이 복합된 결과였다.

스승을 추존하고 학파의 명예를 지키려 한 정인홍의 의도는 좋았지만 이황을 비판한 글의 내용이 과격했던 탓에 문제가 발생했다. 먼저 「발남명집설」로 인해 동문이었던 정인홍과 정구가 절교하면서 남명학파에 분열이 일어났다. 애초에 남명학파는 실천을 중시하고 저술을 많이 남기지 않는 학풍으로 인해 퇴계학파나 율곡학파에 비해 학술적인 구심점이 미약했고, 정구와 같이 남명학파이면서 퇴계학파인 사람들도 꽤 많았기에 이러한 분열은 남명학파에 뼈아픈 일이었다. 뒤이어 이언적과 이황이 문묘에 종사된 이듬해에 올라간 「회퇴변척소」는 정인홍의 이름이 『청금록』에서 삭제되고 대북 세력이 정치적으로 고립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설상가상으로 대북 세력은 영창대군과 인목대비의 문제를 놓고 다시 골북, 중북, 육북으로 분열되는 사태까지 맞이한다.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남명학파는 대북세력의 사상적 기반이라는 이유로 큰 탄압을 받았다. 이때 아흔에 가까웠던 정인홍이 참형에 처해지면서 정인홍 계열의 남명학파는 사실상 몰락하였고[58] 정구 계열은 죽은 스승이 오래 전에 정인홍과 절교한 후였기에 정치적 박해는 피했으나 점차 자신들의 사승연원에서 남명을 배제하고 퇴계만을 강조하였다.[59] 그래도 정구 계열을 통해 전승된 남명의 박람한 학풍은 성호 이익 등과 같은 근기남인의 사상이 형성되는데 영향을 주었다.

경상우도 지역에 대한 남명학파의 영향력 또한 인조반정 이후로 크게 축소되었다. 낙동강 하류 지역에서는 중북정온 등을 중심으로 남명학이 보존되었지만, 낙동강 중류 지역에서는 퇴계학과 타협한 정구의 한강학파와 장현광의 여헌학파가 득세하였고[60] 그 반동으로 조식의 종친들과 일부 남명학파의 인물들이 서인-노론화되면서[61] 남명학파의 세력은 위축되어갔다. 이로 인해 경상우도에는 다른 지역의 여러 학맥들이 들어와 남명학파의 공백을 채우게 된다. 19세기를 기준으로 영남남인한주 이진상[62]의 한주학파와 전라도노사 기정진을 중심으로 한 노사학파, 근기남인성재 허전[63]의 학파 등이 대표적이었다.

그런 상황에서도 경상우도 지역에 잔존한 남명학파의 명맥은 면면히 이어졌다. 17~18세기에는 서계 박태무가 남명학파를 계승하여 학문적으로 일가를 이루었고, 19세기에는 조식-하항-하수일-하홍도로 이어지는 학맥을 계승한 월촌 하달홍기정진 등과 학문을 주고받으며 남명학파를 이어갔다. 하지만 다른 학파들과는 달리 이것이 지속되지 못하고 남명학파는 사실상 명맥만 이어지는 것이나 다름없는 상태로 남는다.

이러한 풍파를 겪으며, 민중들에게도 이름이 널리 알려진 퇴계나 율곡과는 달리 남명에 대한 사람들의 인지도는 학자들과 현재의 경상남도 일대를 제외하면 크게 낮아졌다. 그러다 1970년대에 동양철학자 김충렬을 통해 남명과 그의 사상이 재조명되었고, 이후 그에 대한 연구가 활발히 이루어지면서 현재에 이르고 있다.

4. 퇴계 이황과의 관계

남명과 퇴계는 동갑내기에 같은 경상도 출신으로, 사망한 시기도 1년 정도의 차이 밖에 나지 않았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은 이 둘을 두고 동도동경(同道同庚)의 인연이라 불렀다. 하지만 두 사람은 생전에 서로 한 번도 만나는 일 없이[64] 서신만 주고받으면서 일종의 라이벌 관계를 형성하였다. 그도 그럴 것이 두 사람은 기질과 문체, 출처관, 학문관 등 여러 측면에서 서로 달랐기 때문이었다.

기질 면에서 퇴계가 온후한 문사였다면, 별명이 '선비'였던 남명은 상무적인 호걸풍이었다. 그래서 퇴계의 행동거지가 조심스럽거나 신중한 경우가 많은데 비해 남명의 행동은 분명하고 단호하였다.[65] 이는 문체에서도 반영되었다. 퇴계가 이후의 순후한 문체를 즐겨 쓴 데 비해, 남명은 『춘추좌씨전』이나 유종원의 글과 같은 남성적 문체인 고문을 좋아하였다.[66]

이러한 기질의 차이는 대외 관계를 보는 시각과 대처에도 반영되었는데, 특히 일본에 대한 태도의 차이가 컸다. 사량진 왜변 이후 대마도 측에서 다시 교류를 요청해왔을 때 퇴계는 이에 찬성하는 상소[67]를 올렸고, 조정의 명으로 무로마치 막부쇼군과 대마도주에게 보내는 답서들[68]을 쓰기도 하였다. 반면 대일강경론자였던 남명은 「단성소」에서 일본에 단호히 대응할 것을 주장하였고, 군대군량을 넉넉히 하여 국방을 강화할 것을 역설[69]했으며, 제자들에게는 왜구를 방비할 대책을 내도록 하는 문제를 출제하기도 했다.

출처관에서도 서로 차이가 있었다. 퇴계가 벼슬을 여럿 지냈음에도 학문 이론을 중시하고 현실정치의 비판에는 가급적 거리를 뒀다면, 남명은 자신의 출처관에 따라 벼슬은 멀리 해도 현실정치의 비판에는 앞장서는 태도를 보였다. 이 과정에서 서로 간에 출처관의 차이를 드러내는 서신들[70]이 오고간 적이 있었고, 인물에 대한 평가를 달리하기도 하였다.[71]

학문 면에서는 더욱 그 차이가 드러난다. 퇴계가 상대적으로 성리학의 이론적 심화를 중시했다면, 남명은 성리학의 이론이 이미 염락제현(濂洛諸賢)[72]을 통해 다 갖추어졌으므로 남은 것은 하학이상달(下學而上達)[73]을 통한 학문적 실천이라고 보았다. 이는 성격이나 현실인식 외에도 서로가 계승한 학풍의 세대 차이에서 비롯된 것으로, 남명이 김종직, 정여창, 김굉필, 조광조의 학풍을 계승한 반면 퇴계는 이들보다 한 세대 뒤의 인물인 이언적의 학풍을 계승하였기 때문이었다.[74]

두 사람의 이러한 인식 차이가 극명하게 드러난 사건이 바로 퇴계와 기대승 간에 벌어진 사단칠정논변이었다. 사람들이 이 논쟁의 내용에 주목했다면 남명은 이 논쟁 자체를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래서 1561년에 퇴계의 제자 성재 금난수가 자신을 찾아왔을 때 퇴계에게 자신의 당부를 대신 전해줄 것을 부탁하였다.
퇴계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네. 그대는 호남의 여러 유생들퇴계성리를 논변한 내용을 보았는가. 옛 현인들이 (성리를) 논하여 분석하신 것들이 지극하고 뒷사람들은 그에 훨씬 못 미쳐서 그 분들의 말씀을 깊이 탐구는 하는데, 그 말씀을 실천하는 것은 부족하네. 옛 현인들의 말씀을 실천하지 않으면서 성리의 학문을 고담준론하며 탐구하는게 나는 옳은 것인지 모르겠네.
비록 사람들이 (성리학의 이론을) 묻더라도 퇴계가 제지하는 것이 옳네. 퇴계가 그리 한다고 해서 나는 그러지 않을 것이네. 누군가 나에게도 (퇴계처럼) 그리하라고 말하지만, 옛 현인의 말씀에 착수하지도 못한 내가 어느 겨를에 성리를 논하겠는가. 그대는 이 말을 퇴계에게 고하게.[75]
『성재일기』, 「신유년」 4월 18일

하지만 사단칠정논변이 그 이후에도 몇 년에 걸쳐 계속되자, 1564년 남명은 퇴계에게 직접 편지를 보내기에 이른다.
요즘 공부하는 사람들을 보니 손으로 물뿌리고 비질하는 절도도 모르면서 입으로는 천리를 담론하여 헛된 이름이나 훔쳐서 남들을 속이려 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도리어 남에게서 사기나 당하고 그 피해가 다른 사람에게까지 미치니 아마 선생 같은 어른이 꾸짖어 그만두게 하시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같은 사람은 마음을 보존한 것이 황폐하여 배우러 찾아오는 사람이 드물지만, 선생 같은 분은 몸소 상등의 경지에 도달하여 우러르는 사람이 참으로 많으니 십분 억제하고 타이르심이 어떻겠습니까? 삼가 헤아려 주십시오.
『남명집』 권 4, 「퇴계에게 드리는 편지(與退溪書)」

기본도 서있지 않은 당시 유생들이 사단칠정논쟁으로 아는 척만 하며 헛바람이 든 모습을 비판하는 내용이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퇴계의 책임을 거론하는 편지를 제자 오건에게 보내기도 하였다.
요즘 세상에서 숭상하는 것을 자세히 보니, 당나귀 가죽에 기린의 모형을 뒤집어 씌운 것 같은 모습이 고질이 되었네. 온 세상이 그러하여서 혹세무민하는데 급급하니 비록 큰 현인이 있다고 하더라도 이미 구제할 수 없을 지경일세. 이는 실로 우리 학문종장인 분이 상달(上達)만을 주장하고 하학(下學)을 궁구하지 않아서 구제하기 어려운 습속이 되었기 때문이네. 내 일찍이 서신을 통해 논란을 주고받았지만 돌아보려 하지 않았네. 공은 지금 이 폐단이 수습하기 어려운 것임을 몰라서는 아니되네.
『남명집』 권 2, 「오건에게 보내는 편지(與吳子强書)」

남명이 성리학의 실천이란 측면에서 퇴계를 비판하였다면, 퇴계는 주로 성리학의 순수성이라는 입장에서 남명을 비판하였다. 퇴계가 이단이라 생각되는 을 배척한 반면 남명은 노장사상을 비롯한 제자백가와 불교, 도교의 내단학, 병법 등 여러 학문에 개방적인 태도를 취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남명에 대한 퇴계의 비판은 주로 그가 노장사상을 좋아했던 것에 집중되었다. "우리 학문에 의리가 투철하지 못하고 의 빌미(老莊爲祟)가 있다"[76], "그 논설의 광탕현막(曠蕩玄邈)함은 노장의 책에서도 보지 못했다"[77], "장주의 견해에서 한층 더 나아갔다, 남화의 학문을 주창한다"[78]라는 내용이 바로 그것이다.

또한 퇴계는 남명의 성정이나 호방한 태도에 대해서도 비판을 가했다. 남명의 사람됨을 두고 "고상하고 뻣뻣한 사람(高抗之士)"[79]이라고 평한 일, 다른 사람의 조식에 대한 평을 빌려 "기이한 것을 숭상하고 좋아하여 중도를 지키기 어렵다"[80]라고 쓴 일, 남명이 자신의 출사 권유를 거절하자 "학문에 공을 들인 것이 아니므로 일에서 진취한 것이 없다"[81]라며 폄하한 일, 「단성소」를 두고 "남명이 비록 스스로 성리학으로 자부하지만 사실은 기이한 선비일 뿐이라. 그 논의와 식견은 매양 새롭고 기이한 것을 높이 여기고 세상을 놀라게 하는 논의에만 힘쓰니 이 어찌 도리를 아는 사람이겠는가?"[82]라고 논한 일, 진주에서 옥사가 일어나자 이정에게 "친구 사이에 그만한 일을 가지고 절교하는 것이 이해하기 어렵다"는 내용이 담긴 편지[83]를 보내며 남명을 간접적으로 비판했던 일 등이 이 범주에 속한다.[84]

학문에서의 차이는 독서와 저술의 차이로도 연결된다. 퇴계는 독서를 할 때 경전의 구절 하나하나를 이해하는 데 신경을 썼지만, 남명은 경전의 큰 줄기를 파악하면서 자신에게 절실한 부분을 받아들일 뿐 난해하거나 덜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부분은 대강 지나가는 타입이었다.[85] 성리학의 이론적 심화에 중점을 둔 퇴계가 경전에 자세한 주석을 달면서 활발한 저술활동을 하였다면, 성리학의 학문적 실천에 중점을 둔 남명은 경전에서 긴요하다고 느끼는 부분을 뽑아 독서노트인 『학기유편(學記類篇)』을 만들었고, 굳이 저술을 하더라도 퇴계의 『성학십도』에 비해 간결하고 전투적인 수양방식을 제시한 『신명사도(神明舍圖)』[86]를 짓는 정도에 그칠 뿐 기록을 많이 남기지 않았다.

제자들을 교육하는 방법도 서로 달랐다. 퇴계가 제자들에게 경전의 세세한 내용들을 빠짐없이 강론하는데 힘쓴 반면 남명은 제자들이 스스로 경전의 내용을 이해하고 체득하는 것을 중시하였다. 그랬기에 남명과 퇴계를 모두 스승으로 모시고 공부하였던 정구는 선조의 앞에서 두 사람의 학문하는 모습을 아래와 같이 비교하였다.
이황은 도량이 너그럽고 실천함에 독실하며 공부는 순수하면서도 깊이가 있고, 그 순서가 분명하니 배우는 사람이 쉽게 들어갈 수 있습니다.
조식은 도량이 엄정하고 재기는 호매하며 초연히 자득하여 우뚝 서 자기 갈 길을 가니, 배우는 사람이 요령을 잡기 어렵습니다.
『여헌집』 권 13, 「한강선생행장」, 『공백당집』 권 5, 「성현기상집설」

훗날 퇴계가 죽었을 때, 남명은 "이 사람이 세상을 버렸다 하니, 나 또한 세상에 살아 있을 날이 오래지 않겠구나!"[87]라고 하면서도, 퇴계가 무덤에 비석을 세우는 대신 작은 돌에 퇴도만은진성이공지묘(退陶晩隱眞城李公之墓)[88]라 쓰게 했다는 말을 듣자, "퇴계는 이 묘호를 감당하기에 부족하다. 평생동안 벼슬하지 않은 우리같은 사람도 은자라고 하기에 부끄럽거늘"이라 하였다고.[89] 어찌보면 대학자들의 인간적(?)인 면모랄까.

성호 이익은 『성호사설』에서 남명과 퇴계 두 사람을 나란히 두고 이렇게 평가하였다.
중세 이후 퇴계가 소백산 아래에서 태어나고, 남명이 두류산 동쪽에서 태어났다. 이곳은 모두 영남 땅으로, 상도(上道: 경상좌도)에서는 인(仁)을 숭상하고 하도(下道: 경상우도)에서는 의(義)를 주장하여 유학의 교화와 기개 그리고 절조가 넓은 바다와 높은 산과 같았다. 우리 문화의 빛은 여기서 극에 달하였다.
『성호사설』 권 1, 「천지문(天地門)」

이성무 前 국사편찬위원장이 남명과 퇴계의 관계를 정리한 논문도 있으니 참고해보자.

5. 기타

全身四十年前累
온 몸에 쌓인 사십년 허물[91]

千斛淸淵洗盡休
천섬들이 맑은 물에 씻어 없애리

塵土倘能生五內
그래도 오장에 티끌이 생기면

直今刳腹付歸流
곧장 배를 갈라 흐르는 물에 부치리
『남명집』 권 1, 「욕천(浴川)」[92]
离宮抽太白
불 속에서 허연 칼날 뽑아내니

霜拍廣寒流
서리같은 그 칼빛 광한전까지 닿아 흐르네.

牛斗恢恢地
견우성 북두성이 뜬 넓디 넓은 곳에서

神游刃不游
정신은 놀아도 칼날은 놀지 않네.
『남명집』 권 1, 「칼자루에 씀(書釼柄)」[93]

6. 야사야담

7. 대중매체에서

7.1. 교과서

7.2. 소설

7.3. 만화

8. 관련 자료

8.1. 사이트

8.2. 비문

8.3. 동영상

9. 관련 문서



[1] 현재는 중국 삼국시대조식(曹植)과 성씨의 획 수를 구분해서(曹와 曺 → 세로획의 개수가 다름) 표기되고 있으나, 사실 曹와 曺는 같은 글자의 이체자라 통용됐었다. 사실 과거 문헌에도 두 글자는 통용되는 걸 볼 수 있다. 오늘날 曺씨로 알려진 수많은 인물들이 조선시대 문헌에 曹로 적혀 있거나 반대로 중국의 曹씨들이 중국 옛 문헌에 曺로 돼 있는 일이 허다했다. 과거에는 같은 한자에 모양이 다른 여러 이체자가 통용됐고, 지금보다 그런 글자들의 사용이 자유로웠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실상 중국 삼국시대의 조식과 조선시대의 조식은 한자까지 같은 동명이인으로 볼 수 있다. 물론 오늘날 한국에서는 曺-한국의 성씨에 사용, 曹-중국의 성씨 또는 기타 어휘에 사용한다는 표기 원칙이 세워졌으니, 적어도 한국어에서 한자를 표기할 때는 여기에 따라 구분을 지어주는 게 좋긴 하다. 참고로 현재의 중국어일본어에서는 曺 자가 사용 가능한 한자로 채택되지 않았기 때문에 한국의 조씨들도 전부 曹로 표기하는 경우가 많다.[2] 기록에 따라서는 남명(南溟)이라 적혀있기도 하다. 여러 호 가운데 대중에게 가장 잘 알려진 이 명칭의 출처는 『장자(莊子)』 「소요유(逍遙遊)」편으로, 대붕이 날아가는 곳이다. 조식은 젊어서부터 노장사상의 글을 좋아하여 학생들을 가르치는 공간의 이름을 『장자』에서 따오기도 하였는데, 이는 후에 퇴계 이황으로부터 "노장의 빌미가 있다"라는 비판을 받는 계기가 된다.[3] 현재의 경상남도 합천군 삼가면 외토리 487. 외조부 이국(李菊)의 고향으로, 남명조식선생생가지라는 이름으로 복원되어 있다. 이 마을은 지금도 인천 이씨 집성촌이다.[4] 현재의 경상남도 산청군 시천면 사리 394. 그의 묘소도 이곳 뒷산에 있다. 이 마을은 지금도 창녕 조씨 집성촌이다.[5] 문정공파 파조다.[6] 조언형의 모친은 임천 조씨이고, 그녀의 남동생이자 조언형의 외삼촌은 갑자사화 때 연산군에게 죽은 조지서이다.[7] 인천 이씨의 외조부인 최경손은 조선 전기 4군을 개척한 최윤덕의 둘째 아들이다. 이는 남명의 벗 송인수가 쓴 남명 어머니의 묘갈문에 나온 "충무위 이국은 부인(남명 어머니)의 아버지이고 …… (부인의) 어머니(남명의 외할머니)는 최씨로 소윤 최경손의 딸이다. 최경손의 부친은 좌의정 최윤덕이다(忠武衛諱菊。寔夫人之考。王父。義城縣令怞。曾王父。蔚州事穰。妣曰崔氏。少尹敬孫之女。少尹考。左議政崔潤德。)"라는 기록에서도 확인된다. 따라서 남명의 외조부인 이국은 최윤덕의 손녀 사위가 된다. 이국은 처가인 통천 최씨 가문이 단종 복위운동에 연루되어 멸문지화를 입자 가족들을 데리고 낙향하였다.[8] 진주를 비롯한 서부 경남지역에서 이런 경향이 더 짙다. 진주에 자리잡은 경상국립대학교는 주기적으로 학회도 열고 남명학관이라는 건물도 지어놓는 등 남명 사상의 연구에 많은 투자를 하고 있으며, 경상남도에서도 2020년 『경상남도사』를 편찬할 때 문화사를 다룬 제 8권에서 경남의 시대별 선비문화와는 별도로 남명과 그의 사상에 대해 집중적으로 다루거나 『남명집』의 정본화 작업에 예산을 지원하는 등 적극적으로 밀어주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9] 육십갑자로 환산하면 신유을미임인갑진시(辛酉年 乙未月 壬寅日 甲辰時)이다. 그가 태어난 날이 임인일임은 제자 정인홍이 쓴 남명의 행장신도비문에 기록되어 있으며, 이는 그가 태어난 날의 『조선왕조실록』 기사한국천문연구원천문우주지식정보 음양력변환계산을 통해서도 교차검증된다. 또한 그가 태어난 시간은 제자 김우옹이 쓴 남명의 행장에 나온 "선생은 홍치 신유년 6월 26일 진시생(先生以弘治辛酉六月二十六日辰時生)"이란 기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10] 해당 부분은 "이윤의 뜻을 뜻으로 삼고 안연의 학문을 배움으로 삼아서 출사하면 경륜을 펴야 하고 재야에 있으면 지조있게 지켜야 한다. 대장부는 마땅히 이렇게 해야 하나니 출사해서 한 것도 없고 재야에 있으면서 지조가 없으면 뜻하고 배운들 장차 무엇에 쓰겠는가!(志伊尹之志。學顔淵之學。出則有爲。處則有守。大丈夫當如此。出無所爲。處無所守則。所志所學將何爲)"이다.[11] 여기서의 출처란, 벼슬에 나아가는 출(出)과 정치에 나아가지 않고 퇴처하는 처(處)를 합친 것으로, 달리 출처진퇴(出處進退)라고도 한다. 남명의 출처관은 앞서 인용한 노재 허형의 글 중 "출사하면 경륜을 펴야 하고 재야에 있으면 지조있게 지켜야 한다(出則有爲 處則有守)"로 요약된다. 남명은 허형의 글에서 깨달음을 얻어 학문관과 출처관을 확립했으나, 역설적이게도 허형에 대해서는 스스로가 말한 출처관에서 벗어났다 하여 못마땅하게 여겼다.[12] 자굴산의 명경대에 있는 절에서 공부하였는데, 이때 남명은 명경대를 예찬한 를 남긴 적도 있다. 하지만 현재는 명경대의 위치가 잊혀졌기 때문에 남명이 머무른 곳도 정확히 어디인지 알 수 없는 상태다. 그러나 그가 자굴산에 머물렀던 것 자체는 확실하므로, 현재 의령군에서는 이곳에 남명숨길을 지정하였다.[13] 관련 유적으로는 경상남도 김해시 대동면 주동리에 위치한 산해정(山海亭)이 있다. 이외에 유적은 아니지만 같은 도시의 삼정동에는 2008년에 설치한 조식의 동상이 있다.[14] 『남명집』 권 4, 「행장(行狀)」, "가정 정유년, 선생의 나이 37세 때 비로소 과거시험을 위한 공부를 버리고 우리 학문에 한 뜻을 두었다(嘉靖丁酉。先生年三十七。始斷棄擧業。一意吾學。)"[15] 관련 유적으로는 학생들을 가르쳤던 뇌룡정(雷龍亭)이 있는데, 이름의 유래는 『장자』에 나오는 '시동처럼 가만히 있다가 용처럼 나타나고, 깊은 연못처럼 고요하다가 우레처럼 소리친다(尸居而龍見 淵默而雷聲)'라는 구절이다. 인근에 계부당(鷄伏堂)이란 거처용 건물도 지었지만 현재는 터만 남아있다. 이곳 외에도 합천군에서는 삼가면에 남명 조식과 연고가 있는 장소들을 중심으로 '남명 조식 선비길'을 조성해놓았는데, 관련된 곳들은 해당 동영상 참고.[16] 본래 이름은 '단성 현감의 벼슬을 거절하면서 올린 상소문'이란 뜻인 「단성현감사직소(丹城縣監辭職疏)」인데, 이 상소문을 쓴 해가 을묘년(1555)이었으므로 「을묘사직소(乙卯辭職疏)」라고도 부른다. 상소 자체는 대단한 명문으로 그 날선 비판은 요즘 정치판에 대입해도 싱크로율이 잘 맞아서 선거철이 되면 회자되기도 한다. 자세한 것은 해당 문서 참고.[17] 『연려실기술』 권 11, 「명종조고사본말」, 성수침 또한 과 뜻이 같아 서로 사이가 좋았다. 청강 이제신이 두 선생께서 서로 존중하는 뜻을 (성수침의 아들인) 우계 성혼에게 물으니, 성혼은 "아버지께서 「단성소」를 보시고는 '(글의) 날카로움이 크게 드러났다' 하시며 '오래도록 건중과 떨어져 사는 동안 (사람들이) 그가 크게 진보하여 큰 성과를 얻었다고 이야기하던데, 의 기세가 이와 같다면 (학문이) 오히려 미진한 것이 아니겠는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라 하였다(成守琛亦與公同志相善。李濟臣問兩先生相推重之意於成渾。渾曰。家公見南溟丹城疏則。鋒銳太發露。乃曰久與楗中違離。謂其大進已混成果。如此辭氣則猶未盡耶。)[18] 요즘으로 치면 명예훼손죄, 모욕죄, 정통법 위반에 해당된다. 즉 걸고 넘어지면 처벌을 피할 수가 없다.[19] 중종 34년(1539) 이언적의 추천으로 헌릉참봉에 임명되었던 일을 말한다.[20] 명종 3년(1548)과 명종 6년(1551), 명종 8년(1553)에 각각 전생서 주부와 종부시 주부, 사도시와 예빈시의 주부에 임명된 일을 말한다.[21] 태수의 이칭으로, 태수의 수레에는 사두마차(駟馬)에 말 1필을 더하였기에 오마(五馬)라고 한 것에서 유래되었다. 조선에서는 수령의 이칭으로 쓰였으며, 본문에서는 조식이 「단성소」를 쓴 계기가 된 단성현감의 직위가 내려진 것을 뜻한다.[22] 원문에서는 明新之地라 하였는데, 이는 『대학』 첫 머리에 나오는 "대학의 도는 명덕을 밝히고 백성을 새롭게 하며 지극한 선에 머물게 함에 있다(大學之道 在明明德 在親民 在止於至善)"는 구절을 이야기한 것이다.[23] 현재의 경상남도 산청군 시천면. 61세부터 남명이 별세하는 72세까지 머물렀다. 관련 유적으로는 사리의 산천재(山天齋)와 남명의 무덤 등이 있고, 인근의 원리에는 덕천서원(德川書院) 등이 있다. 이 시천면 일대에 있는 조식 관련 유적지들은 통칭 산청 조식 유적으로 지정되어 있다.[24] 『명종실록』 33권, 명종 21년(1566) 10월 7일 갑자 첫번째 기사[25] 즉위한 1567년만 해도 11월과 12월 2차례에 걸쳐 그를 부르는 교서를 내렸고, 그 후 1570년까지 매년 한 차례씩 벼슬을 내렸다.[26] 이 옥사를 다룬 논문 01, 02, 03, 04[27] 당시 경상도 관찰사였던 박계현은 이 사건을 김해 부사 양희에게 인계하였고, 양희는 사위 정인홍을 통해 남명에게 자문을 얻고자 했다. 남명은 이정과 이희안 두 사람 모두와 친구였으므로 이 사건에 대해 잘 알것이라 여겼기 때문이었다. 이때 남명은 "이정이 이희안 집안의 일을 고발한 것은 하종악의 후처이자 자신의 인척인 함안 이씨의 음행을 감추기 위함이다"라고 증언하였다(여담으로 하종악의 전처는 남명의 형의 딸이었는데, 이를 두고 남명이 조카를 위해 의도적으로 함안 이씨를 모함한 것이 아니냐는 풍설도 함께 떠돌았다. 이러한 인식을 바탕으로 기록된 저술이 유희춘의 『미암일기초』이다. 참고로 유희춘의 부인은 하종악의 후처 함안 이씨와는 사촌지간이었다). 이로 인해 수사는 이희안의 첩에서 함안 이씨에게로 전환되었으나, 증거불충분으로 인해 무혐의로 끝났다.[28] 제자 정탁과 오건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남명은 "이정이 이 문제에 대해 3차례나 말을 번복하였다"고 주장하였다. 이정 측은 이를 부인하였고, 이 문제에 대한 논쟁은 이후 조식과 이정 두 사람의 자손 간에도 계속되었다. 다만 누구의 주장이 맞는지에 대해서는 현재까지도 알 수 없는 상태이다.[29] 퇴계의 제자인 기대승이 "함안 이씨 사건과 훼가출향 사건 모두 조식이 떠들어서 생긴 일"이라고 언급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30] 진주에서의 옥사와 관련하여 퇴계가 이정에게 편지를 보낸 일이 있었다. 이 편지에는 이황이 조식을 폄하하는 내용이 실렸고, 이러한 이황의 조식에 대한 인식은 퇴계학파를 통해 사림의 여론에 어느 정도 영향을 주었다. 1600년에 『퇴계집』을 간행하는 과정에서 이 편지가 세상에 알려지자, 정인홍은 1604년 『남명집』을 간행할 때 이황을 비난하는 「발남명집설」이라는 글을 짓고 이를 『남명집』의 발문으로 삼으며 대응하였다. 이 과정에서 정인홍은 동문인 정구와 갈등을 빚는다. 남명과 퇴계 두 사람 모두에게서 수학한 정구가 「발남명집설」을 『남명집』의 발문으로 삼는 것에 반대했기 때문이다. 결국 두 사람이 의견을 좁히지 못하고 감정싸움 끝에 절교하면서 남명학파는 분열에 이른다.[31] 인조반정 이후 남명의 후손들은 정인홍이 비문을 쓴 남명의 신도비를 철거하면서 서인과 남인의 명망가들에게 새로 세울 신도비의 비문을 부탁하였다. 이때 남인 측에서 비문을 부탁받은 사람 중 하나가 남명의 제자 한강 정구의 학맥을 이은 미수 허목이었다.
그러나 허목은 남명보다는 이정에 대해 각별한 감정을 가지고 있었는데, 동생 허의는 이정의 손자 이곤변의 손녀사위라는 인척관계로 맺어져 있었고 허목 그 자신도 구암의 문집을 편집하는 역할을 맡기도 하였다. 따라서 허목은 위 사건과 관련하여 남명과 이정의 후손 사이에 일어난 논쟁에서도 이정의 편을 들었고, 이런 심리가 반영된 탓에 그가 쓴 조식의 신도비문도 송시열이 쓴 조식의 신도비문에 비해 그 내용이 조금 상세하지 않았다. 이에 대해 남명의 후손들은 내심 불만을 갖고 있었다.
그러다가 미수의 저작인 『미수기언(眉叟記言)』이 간행될 때 그 안에 수록된 「답학자서(答學者書)」라는 글에서 허목이 남명과 정인홍을 비판한 내용이 발견되었다. 이에 19세기 말부터 남명의 후손들과 노론계 학자들이 덕산비의 내용에 문제를 제기하기 시작하였고, 1926년에 이르러 남명의 후손들은 덕산비를 철거하여 땅에 묻었다. 남인계열의 후손들은 조식의 후손들을 성토하면서 소송을 제기했지만 3심에서 법원이 조식 후손들의 손을 들어줌으로써 덕산비는 다시 서지 못했다. 현재 남명의 신도비는 송시열이 비문을 쓴 것만 세워져있고, 덕산비는 행방이 묘연한 채 비석받침인 귀부만 남아있다. 관련된 내용을 다룬 논문
[32] 『남명집』 권 4, 「행록(行錄)」, 김우옹이 "만약에 돌아가신다면 스승님을 무엇이라 칭해야 마땅할까요?"라고 묻자, 남명이 말했다. "처사라고 하는 것이 옳다. 이것이 나의 평생 뜻이다. 만약 처사라고 하지 않고 관직으로 나를 칭한다면 이는 나를 버리는 것이다(宇顒請曰。萬一不諱。當以何號稱先生乎。曰。用處士。可也。此吾平生之志。若不用此而稱爵。是棄我也。)"[33] 『남명집』 권 4, 「행록(行錄)」, "벽에 써놓은 경의(敬義) 두 글자는 지극히 중요한 것이니 배우는 사람은 여기에 숙달되도록 힘써야 한다. 그리 되면 마음 속에 무엇 하나 걸림 없게 될 것이다. 나는 그러한 경지에 이르지 못하고 죽는다(書壁敬義二字。極切要云云。學者要在用工熟。熟則無一物在胸中。吾未到這境界以死矣。)"[34] 조식이 말년에 은거한 산청군 시천면에 있으며, 1576년에 세워지고 1609년에 사액되었다. 정조 때에는 번암 채제공이 이곳의 원장을 지내기도 하였다. 이후 흥선대원군서원 철폐 때 없어졌다가 1926년에 다시 복원되었다.[35] 본래는 1576년 조식의 고향인 합천군 삼가현에 세워진 서원으로, 회현(晦峴) 아래 세워져서 회현서원이라고도 하였다. 회산서원은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이후 장소가 협소하다 하여서 1601년에 인근의 황강에 있는 향천서원으로 옮겨졌고, 이곳이 1609년에 용암서원(龍巖書院)이란 이름으로 사액되었다. 용암서원도 덕천서원과 마찬가지로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되었고, 이후 서원이 있던 터가 1987년 합천댐 공사로 수몰되자 2007년 뇌룡정 옆의 현재의 위치에 복원되었다.[36] 김해시 대동면 주동리 소재. 본래 이곳은 산해정이라 하였는데, 조식은 김해에 머무르던 48세 때까지 여기서 제자들을 가르쳤다. 1588년 서원으로 착공되었다가 전쟁으로 중지되었고, 1609년 완공되면서 신산서원이란 이름으로 사액되었다. 덕천서원, 용암서원과 마찬가지로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 때 훼철되었다가 이후 일부가 복원되었고, 1999년에 이르러 전체가 복원되었다.[37] 북한산 백운봉 아래에 있었다고 전해지며, 1616년에 건립되어 같은 해에 사액되었다. 인조반정 이후 서인들이 철거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정확히 언제 사라졌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다.[38] 1616년 진주의 생원 하인상을 시작으로 영남에서 7번, 충청에서 8번, 호남에서 4번, 성균관의 사부학당에서 12번, 개성홍문관, 사간원사헌부에서 각각 한 번씩 조식의 문묘종사를 건의하였다.[39] 그래서 남명학파를 달리 일컬을 때에는 낙동강을 기준으로 서쪽 경상우도를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하여 강우학파(江右學派)라고도 했고, 퇴계학파는 낙동강 동쪽 경상좌도를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하여 강좌학파(江左學派)라고도 불렀다. 여기서 좌우의 기준은 한양에 있는 국왕의 시선을 기준으로 한 것이다.[40] 조식 이외에 퇴계 이황과 하서 김인후의 문하에서도 공부하였다. 오건이 쓴 남명의 제문[41] 1589년에 기축옥사가 일어났을 때 정여립과 친밀하다고 알려진 정체가 불분명한 인물 길삼봉으로 무고되어 옥사하였다.[42] 호는 동강(東岡)으로, 한강 정구와 더불어 남명 문하에서 양강(兩岡)이라 부른 인물이다. 본래 조식의 수제자인 덕계 오건의 제자로 24세 때 조식의 문하에 나아가 수학하였고, 이후 그로부터 방울인 성성자를 물려받았다. 27세 때 이황에게 나아가 그의 문하에서도 공부하였지만, 조식의 문하에 출입한 세월이 더 길었기에 그 자신도 임금 앞에서 조식의 문인으로 자처하였다. 그는 조식의 큰외손녀 사위이기도 한데, 이 혼인은 그의 부친인 칠봉 김희삼과 친구였던 조식의 주선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43] 조식의 둘째 외손녀 사위이다. 즉 김우옹과는 동서지간. 16세(1567년) 때 남명의 제자가 되어 『논어』를 배웠다.[44] 13세(1555년) 때 종이모부인 덕계 오건에게서 학문을 배웠고, 21세(1563년)에 퇴계 이황의 제자가 되었으며, 24세(1566년) 때 남명을 찾아가 그의 제자가 되었다. 호가 한강(寒岡)이라서 동강 김우옹과 함께 남명 문하에서는 양강(兩岡)으로 알려졌다.[45] 동강 김우옹의 형으로 호는 개암(開巖)이다.[46] 17세(1542년) 때 퇴계의 문하에 나아가 공부하였고, 36세(1561년)에 진주향교의 교수로 부임했을 때 인근의 덕산으로 거처를 옮긴 남명을 찾아가 그의 제자가 되었다.[47] 개성은 판이했지만 남명과 퇴계가 학자로서 워낙 이름이 높다보니 당시 영남지역에서는 두 사람을 공동 스승으로 모시고 학문을 배우는 사람들도 많았다. 두 사람 모두 생전에 만나본 일도 없고 서로를 비판한 적도 있었으나 문하생이 오가는 것에 대해서는 개방적이었다.[48] 호는 죽각(竹閣). 승려 성철의 10대조이다. 백부인 청향당 이원에게서 글을 배웠고, 이후 백부의 친구인 조식의 제자가 되었다. 참고로 이원의 아들, 즉 이광우에게는 사촌형이 되는 이광곤 또한 조식의 문하에서 공부하였다. 산청에는 이원과 이광우, 조식, 이황을 모시는 배산서원이 있는데, 이곳은 본디 이원과 이광우를 모시기 위해 세워졌다가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된 후 면우 곽종석의 제자 진암 이병헌의 노력으로 다시 세워진다. 참고로 복설된 배산서원은 한때 캉유웨이가 주창한 공자교 운동의 지부였는데, 이는 이병헌이 공자교 운동을 공부하여 국내에 도입하려던 영향 때문이었다. 그런 까닭에 현재 이곳에는 캉유웨이의 친필을 새긴 배산서당 현판이 걸려있다.[49] 19세에 남명의 제자가 되었고, 25세 때 퇴계의 문하로 들어갔다. 또한 오운은 퇴계와 인척지간인데, 조부 오언의(吳彦毅)의 아내가 퇴계의 사촌누이이고 장인 허사렴(許士廉)은 퇴계의 처남이기 때문이다.[50] 이 옥사의 희생자 중 이발은 서경덕의 학맥인 민순의 문인이었고 길삼봉으로 무고되어 희생된 최영경은 남명 조식의 수제자 중 1명이었다. 이들은 지역적으로 호남과 서부 영남의 인물들로 분류되는데 실제로 이 두 지역의 동인들이 기축옥사 당시 많이 희생되었다.[51] 동아일보 1986년 5월 17일 참고. 당시 정인홍의 나이는 60살이 넘은 상태였다. 환갑이면 묫자리 알아보러 다니던 그 시대에 그것도 왜군의 초입 루트였던 영남에서 의병을 지휘했으니 그 불같은 성품을 짐작할수 있다.[52] 임진왜란 시기 고령 지역의 의병운동과 의미, 임진왜란(디지털 고령 문화대전)[53] 상기된 정인홍, 곽재우, 김면 외에 남명의 제자 및 그 계열로서 의병장으로 활동한 인물은 전치원, 이대기, 변옥희, 박경신, 오장, 문경호, 이로, 조종도, 여대로, 노순, 노흠, 문위, 하락, 이정, 오운, 전유룡, 배기수, 정대방, 강희, 배명원, 배형원, 박인량, 진극원, 박이현, 박이장, 정인함, 조의민, 하혼, 권제, 이승, 이현우, 최여설, 김신옥, 전팔급, 전팔고, 강렴, 이칭, 문덕수, 곽율, 정유명, 이욱, 김경근, 정경운, 김대명, 유중룡, 박경인, 곽준, 유명개(劉名蓋, 1548~1597) 등이 있다. 이들이 일으킨 의병의 숫자가 모두 얼마나 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의병 활동이 조금 줄어든 1593년 1월 11일의 기록에 따르면 정인홍, 곽재우, 김면 세 사람이 이끄는 의병의 숫자는 각각 3000명, 2000명, 5000명으로 도합 1만에 이르렀다.[54] 이 시기는 퇴계의 문집인 『퇴계집』의 초간이 간행된 때와 겹친다. 그리고 이 문집을 통해 퇴계가 남명을 비판한 글들(그 내용은 하단의 퇴계 이황과의 관계 문단에서 서술하였다)이 알려졌는데, 정인홍은 남명의 제자로서 이에 맞대응하고자 했다.[55] 원문. 1603~1604년 즈음에 쓰인 이 글은 달리 「남명선생과 구암 이정의 절교사(南冥先生與李龜巖絶交事)」라고도 한다. 진주에서 옥사가 일어났을 때 이황이 이정에게 보낸 편지의 내용에 대응하기 위한 차원에서 지어진 글이다.[56] 원문 01, 원문 02, 번역 01, 번역 02, 관련 기사. 1606년에 쓰인 글이다.[57] 『광해군일기(정초본)』 39권, 광해 3년 3월 26일 병인 5번째 기사. 1611년에 쓰였다.[58] 원래 남명학파 자체가 조식의 영향으로 조정에 출사하지 않는 경향이 있었는데 정인홍이 처형된 후 이러한 태도가 더욱 강해진 것도 여기에 영향을 주었다. 그리고 이들의 후손들은 집권 세력의 정치적 탄압 등을 방지하기 위해 조상의 문집에서 정인홍과 관련된 기록을 지우거나 왜곡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59] 정구 본인은 정인홍과 절교한 후에도 자신이 남명의 제자임을 강조했으나 미수 허목 이후로부터 이러한 경향성을 보였다. 참조논문[60] 정구 본인은 남명의 제자였고, 조카사위이자 제자인 장현광도 그 인연으로 남명학파의 문인들과 두루 교유하였다. 인조반정 이후 큰 타격을 입은 남명학파의 문인 중 이러한 학연을 통하여 한강학파와 여헌학파에 학맥을 옮긴 사람도 많았다.[61] 일부 남명학파가 서인-노론이 된 것은, 서인에게 접근하여 남명의 위상을 높이려는 의도와 남명의 학문을 이단시했던 퇴계에 대한 반발심리 때문이었다. 집권 서인들도 상황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이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많은 공을 들였다. 우암 송시열이 남명의 신도비문을 지은 것도 그 연장선상이었다. 그 결과 조선 후기에 이르러 경상우도 지역에는 노론 계열의 가문들도 상당히 많아졌다.[62] 경상북도 성주 출신의 유학자. 퇴계 이황의 주리론을 연구하여 44세 때에 '심즉리설'을 주장하면서 일대 파란을 일으켰는데 이는 왕수인이 주장한 심즉리와는 다른 이발일로(理發一路)의 사상이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허나 '심즉리설'이라는 이름으로 인해 그의 사상은 당시 퇴계 학맥에게 이단으로 취급받았고 사망 이후에 발행되어 각지에 보내진 그의 문집은 반환되거나 심지어 상주 지방처럼 문집이 태워진 일도 있었다.
그의 제자들 중 가장 뛰어난 8명을 주문팔현(洲門八賢)이라 불렀는데 이들 가운데 대계 이승희면우 곽종석이 유명하다. 이진상의 아들인 이승희는 고종의 강제 퇴위를 계기로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하여 러시아중국을 오가면서 항일 운동을 하다가 병사했고, 곽종석은 스승의 심즉리설에 쏟아지는 비판을 반박하는 한편 제자인 심산 김창숙과 함께 파리 강화 회의에 국내 유림들의 독립청원서를 보내는 파리 장서 사건을 일으켰다가 일제에 체포되어 옥고의 후유증으로 병사하였다. 두 사람 모두 독립유공자로 추서되었다.
[63] 다만 남명학파의 학문도 계승하기는 했고, 본인은 자신의 학문을 남명학파의 계승이라 보았다.[64] 다만 1569년 서울의 장의동에서 열린 박태수라는 사람의 회갑연에 두 사람 모두 공식 초청되어 수연첩(壽宴帖)에 그 이름이 올라와 있는데, 이때 두 사람이 만났을 것이라고 추측하는 견해도 있다.[65] 이를 잘 나타내는 일화가 하나 있다. 퇴계가 학생들을 가르쳤던 도산서당 앞강에서는 진상품인 은어가 많이 잡혔다. 관에서 은어잡이를 하는 기간이 되면 퇴계는 도산서당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을 중단하고 상계(上溪)에 있는 자택으로 철수하곤 하였다. 혹여나 왕에게 진상할 물고기에 손을 댄다고 의심을 사지 않도록 사소한 것에서부터 조심하기 위한 태도였다. 퇴계의 이러한 이야기를 들은 남명은 웃으며 "어찌 그리 자질구레한 일에 신경을 쓰는가? 자신이 하지 않으면 그만인 것을. 관청에서 은어 잡는 통발을 놓았든 말든 무엇을 꺼리고 피한단 말인가?"라 이야기하였다고 전해진다. 출전은 『학봉선생문집속집』 권 5, 「퇴계선생언행록(退溪先生言行錄)」[66] 이러한 문체의 차이에 대해 남명은 말년에 "퇴계의 문장은 오늘날의 문체이나 성취된 것이다. 비유컨대 나(의 문체)는 비단을 짜다가 한 필을 다 못 짠 것이므로 세상에 쓰이기 곤란하고, 퇴계(의 문체)는 명주를 짜서 한 필을 이루었으므로 세상에 쓰일 만하다."라고 평했다.(출처: 『남명집』 권 4, 「행록(行錄)」)
퇴계 또한 남명의 문체를 성품과 연결지어 평가한 일이 있었다. 한번은 친구 구암 이정이 남명에게는 부친의 묘비문을 부탁하고 퇴계에게는 묘비에 새길 글자를 써달라고 요청하였는데, 이때 묘비문의 글자를 쓰기 위해 남명이 쓴 비문을 읽은 퇴계는 '예스럽고 기개가 높으나 격식을 따르지 않는 부분이 있다.'는 요지로 평하면서 이를 "산림이 세상을 피해 은거하는 것을 좋아하는 뜻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말했다. 즉 남명의 세상을 꺼리는 성품이 그의 고문 문체에 영향을 주었다고 여긴 것이다.(출처: 『퇴계집』 권 21, 「답이강이(答李剛而)」)
[67] 『퇴계집』 권 5, 「걸물절왜사소(乞勿絶倭使疏)」. 조선이 여진족들과 틈이 벌어지고 있는 상황이라 남북으로 적을 만들 수 없고, 왜구가 침공하는 동남 지방은 공물이 나오는 곳이니, 대마도와 강화하고 그들을 왕도 정치로 포용하면서 피해를 줄이자는 내용으로 요약할 수 있다.[68] 『퇴계집』 권 8, 「예조답대마도주종성장(禮曹答對馬島主宗盛長)」, 『퇴계집』 권 8, 「예조답일본국좌무위대장군원의청(禮曹答日本國左武衛將軍源義淸)」[69] 『남명집(정유본)』 권 3, 「오건과 정탁에게 답함(答吳子强鄭子精)」. "나라의 큰일은 군대와 군량을 넉넉히 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國之大事 不過兵食)"라는 대목이 그것이다.[70] 명종 3년(1548)과 명종 6년(1551), 명종 8년(1553)에 조식이 종부시와 전생서, 사도시와 예빈시의 주부(정 6품) 벼슬을 거절한 일이 있었다. 당시 성균관 대사성에 취임했던 이황은 명종 8년(1553) 조식에게 벼슬하러 나올 것을 권하는 편지를 보냈다. "사람들이 그대를 몰라주는 것도 아니요, 임금이 어진 인재를 기다리니 벼슬할 때가 아닌 것도 아니며, 그대의 출처에 대해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라는 내용이었다.
이에 조식은 "나는 매우 몽매함에도 헛된 이름을 얻은 사람이라 벼슬에 나갈 수 없고, 눈병을 얻어 사물을 볼 수 없으니, 발운산(撥雲散: 안약의 일종)이 있으면 좀 보내달라"는 답장을 보냈다. 발운산이라는 비유법과 반어법으로 '지금이 벼슬을 할 시국이라고 생각하느냐?'고 반문하면서 퇴계의 처신과 시국을 보는 안목을 은근히 비판하는 뜻이었다.
그러자 퇴계는 "나도 당귀를 구하지 못하고 있는데 어떻게 그대에게 발운산을 구해 줄 수 있겠느냐"는 답장을 보냈다. 이황 자신도 지금은 벼슬을 할 시국이 아니라고 여겨서 향리로 물러나려 하는데 그러지 못하고 있으니, 조식 당신의 처신을 어떻게 충고할 수 있겠느냐는 의미이다. 참고자료
[71] 남명이 주로 출처관으로 인물의 평을 하였다면, 퇴계는 출처관 외에도 다른 여러 종합적인 측면을 같이 봐야 한다는 입장을 보였다. 때문에 두 사람의 평이 갈린 대표적인 인물로 포은 정몽주점필재 김종직, 회재 이언적이 있었다.[72] 북송-남송 시대에 성리학의 발전에 큰 영향을 준 인물들을 나타낼 때 쓰는 말로, 대개 북송시대의 주돈이, 정호(명도), 정이(이천), 장재(횡거), 소옹(강절)(이상의 5명을 '북송오자'라 칭함)과 남송의 주희가 여기에 포함된다. 염(濂)은 주돈이의 호가 염계(濂溪)인 동시에 말년의 거처가 여산 연화동의 염계서원(濂溪書院)이었던 데서 유래되었고, 락(洛)은 주돈이의 제자인 정명도와 정이천 형제를 지칭하는 말로 그들이 강학하던 곳이 낙양이었기에 그리 불렀다. 이들 염락제현은 달리 염락관민(濂洛關閩)이라고도 하는데, 관(關)은 관중지역에서 학맥을 형성하던 장횡거를, 민(閩)은 복건성에서 제자를 길러냈던 주희를 지칭한다.[73] 하학상달(下學上達)이라고도 한다. 출전은 『논어』 「헌문편」. 직역하면 아래로부터 배워서 위로 올라간다는 뜻으로, 좀 더 구체적으로는 일상생활의 일들로부터 배워나가면서 마침내는 궁극적인 이치를 깨우치는 것을 의미한다. 이처럼 일상생활로부터 학문을 시작하기 위해 조식이 중시한 책은 『소학』이었는데, 이는 조식만의 특징이 아니라 그의 선배학자들인 김굉필조광조 등의 학풍이기도 하였다.[74] 공교롭게도 이언적에 대한 남명과 퇴계 두 사람의 시각은 정반대였다. 남명이 출처관에 따라 이언적을 못마땅하게 여긴 반면 퇴계는 성리학의 학문적 심화라는 요인 때문에 그를 높이 받들었던 것이다. 이러한 인식 차이는 그들의 사후 생전의 소소한 갈등들과 함께 엮여서 정인홍의 「회퇴변척소」로까지 이어졌다.[75] 又曰有欲告退溪者矣。君見湖南諸生與退溪辨論性理之說乎。前賢論釋至矣盡矣。後生不及於前賢遠矣。尋究前賢之言。而行之力不足焉。不求行前賢之言。而尋高論性理之學。吾不知其可也。問者雖問。退溪則止之可也。退溪亦爲之。吾所不取。或請余亦爲之。吾於前賢之言。未得着手。何暇更論性理乎。君以是告退溪。[76] 『퇴계집』 권 19, 「답황중거(答黃仲擧)」 中, "조건중의 사람됨을 논하건대 그 또한 핵심으로 들어가면 의리에 투철하지 못하네. (성운과 조식과 같은) 이런 사람들은 노장의 빌미가 있기에 우리 학문에 힘을 씀에 깊이 천착하지 못하니 하물며 투철하지 못한 것이 어찌 괴이하겠는가. 요점은 그 장점을 취하면 될 뿐이네(其所論曹楗仲之爲人。亦正中其實矣。其於義理未透。此等人多是老莊爲祟。用工於吾學。例不深邃。何怪其未透耶。要當取所長耳。)"

1558년 퇴계가 금계 황준량에게 보낸 편지이다. 여기서 언급된 빌미 는 '귀신의 재앙을 입다'라는 뜻으로, 보기에 따라서는 퇴계가 남명의 학문을 인정하지 않는 것을 넘어 이단이라 여긴다고 해석될 수도 있었다. 이에 남명과 퇴계 두 사람 모두의 제자였던 개암 김우굉은 퇴계에게 강한 항의성 편지를 써서 보냈다.
그러자 퇴계는 김우굉에게 "떠도는 말은 그렇게 중요한 것도 아닌데 기어코 이처럼 기력을 소비하며 이야기할 일이오? 보통 사람은 다른 이에게 감히 오만한 말을 하고나면 비록 음흉한 성품을 가졌을지라도 뽐낸 연후에는 반드시 그치게 되어 있소. 로 말하자면 텅 비고 남들보다 뒤떨어진 것이 세상 사람들을 모두 살펴보아도 가장 아래임을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매우 잘 아오. 그래서 평생을 감히 상대방을 억누르고 나를 드높이며 세상을 업신여기고 사람들을 능멸하는 마음을 가지지 않았거늘, 하물며 성인의 말을 빌려 스스로 뻣뻣해하며 감히 다른 사람을 배척했겠소? 다른 사람에게도 그러지 않았거늘 하물며 남명에게 그랬겠소? 근래에 이런 말이 없었는데 좌우의 높은 의리로 또 어찌 말을 만들어서 남에게 알릴 까닭이 있겠소?"라는 장황한 내용의 답장을 써서 자신은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고 발뺌하였다. 하지만 퇴계의 사후에 간행된 그의 문집에 황준량에게 보낸 서신이 실리면서 퇴계가 김우굉에게 했던 변명은 거짓말로 확인되었고, 이는 남명의 수제자인 정인홍 등의 분노를 불러일으키는 한 원인이 되었다.
참고로 위에서 언급된 김우굉의 항의성 서신은 『성호사설』에 적혀있는데, 여기에는 '하유의 평(下惟之評)'과 '미순의 논(未醇之論)' 운운하는 위와는 전혀 다른 퇴계의 답장이 실려있다. 왜냐하면 『성호사설』에 적힌 퇴계의 그 답장은 애초에 김우굉이 아니라 황준량에게 보낸 또 다른 서신이었기 때문이다. 성호 이익이 『성호사설』을 쓰고 편집하는 과정에서 실수한 것인지, 아니면 퇴계의 거짓말과 그에 대한 논란을 확대시키지 않으려고 서로 다른 글을 의도적으로 바꿔치기해서 실은 것인지는 불명이다.
[77] 『퇴계집』 권 20, 「답황중거(答黃仲擧)」 中, "「계부당명(雞伏堂銘)」을 기록하여 보여준 것은 매우 고맙네. 다만 그 내용이 끝없이 넓고 아득한 것은 노장의 책 중에서도 본 적이 없네. 배운 적이 없으니 어찌 감히 의논하겠는가. 그의 사람됨은 본래 평범하지 않은데 그 학문 또한 배우기가 어렵군(雞伏堂銘。深荷錄示。但其說曠蕩玄邈。雖於老莊書中。亦所未見。旣未嘗學。焉敢議及。其人固非尋常。而其學又難學也。)"

「계부당명」, 즉 남명이 그린 『신명사도(神明舍圖)』에 붙은 해설인 「신명사명(神明舍銘)」을 본 퇴계의 소감이다.
[78] 『퇴도선생언행록』 권 5, 「숭정학(崇正學)」 中[79] 『퇴계집』 권 7, 「걸퇴차자(乞退箚子)」 中, "이 보기에 조식은 고상하고 뻣뻣한 선비라 본디 세상의 어지러운 일에 머리를 숙이려 하지 않고, 이항은 학문에 종사하는 사람이라 편벽되이 벼슬하지 않음을 높이 여기지는 않았으니 두 사람의 마음은 또한 같지 않습니다. 그래서 선왕 때 두 사람 다 명을 받고 (한양에) 왔지만, 조식은 잠시 입대하더니 달아나 산으로 돌아갔고, 이항은 명을 받아 벼슬에 나섰다가 수년 후에 돌아갔으니 두 사람의 같지 않음이 이와 같습니다(以臣觀之。曹植高抗之士。本不欲屈首風塵中。李恆。從事學問之人。非偏以不仕爲高。二人心跡。亦不同也。是以。在先王朝。雖皆嘗應命而至。植則纔入對。卽遁去還山。恆受命出守。數年而後歸。其不同如此。)"

1569년에 퇴계가 쓴 글이다. '고상하고 뻣뻣한 선비'라는 뜻의 高抗之士의 경우, 다른 기록들 중에는 高亢之士라고 표현된 경우도 있다.
[80] 『퇴계집』 권 43, 「서조남명유두류록(書曹南冥遊頭流錄後)」, 조남명의 『유두류록』을 보니 유람하며 탐구한 것 이외에도 일들마다 의미를 덧붙였고 분격하고 격앙하는 글이 많아서 사람들을 늠름하게 만드니 마치 그 사람됨을 생각하게 한다. "(곡식을 키우는데 열흘을 차게 하고) 하루만 따뜻이 해주면 아무 소용이 없다"거나 "위로 향하고 아래로 내려오는 것은 발 하나를 움직이는데 달려있다"는 말은 지극히 옳은 말이다. 이른바 명철한 사람이 다행하냐 불행하냐라는 말은 진실로 천고의 영웅도 탄식을 발하게 하고 으슥한 곳에 있는 귀신도 울게 만든다. 간혹 그가 기이함을 숭상하고 좋아하여 중도를 요구하기 어렵다고 의심하는 자도 있다. 아, 자고로 산림에 사는 선비는 이런 사람이 많았다. 그렇지 않다면 (남명은) 남명이 되지 못하였을 것이다. 그 절박기미함이 온 바를 조금 알 수 없는 곳이 있지만 이는 후세 사람들이 필히 분별할 수 있을 것이다(曹南冥遊頭流錄。觀其遊歷探討之外。隨事寓意。多感憤激昂之辭。使人凜凜猶可想見其爲人。其曰一曝之無益。曰向上趨下只在一擧足之間。皆至論也。而所謂明哲之幸不幸等語。眞可以發千古英雄之歎。而泣鬼神於冥冥中矣。或以其尙奇好異。難要以中道爲疑者。噫。自古山林之士。類多如此。不如此。不足以爲南冥矣。若其節拍氣味所從來。有些子不可知處。斯則後之人必有能辨之者。嘉靖庚申孟春。眞城後人景浩。書于溪上書舍。)[81] 『치재유고』 권 2, 「일록초(日錄鈔)」, 17일 경호 공을 만나뵈었는데 조건중이 답한 서신나(홍인우)에게 보여주셨다. 내가 "이 사람을 흠모한지 몇 년 되었는데 사람들의 말로는 학문이 진보하여 덕을 이루었다더군요. 지금 이 답서를 보니 기분대로 말하는 것을 면치 못한 듯합니다"라 하자, 경호께서 "그러하다. 사람들은 남명을 절개있고 고상한 사람들이라고 이야기하지만, 그리 학문에서 공을 들인 것이 아니므로 일에서 진취한 것이 없다"라 하셨다(十七日。往拜景浩公。以曹楗仲答書示余。余曰。此人歆慕有年。已謂學就德成。今看此文字。恐不免有氣上語。公曰。然。人多謂狷介高尙底人。非問學上恁地做工夫。故無進就事業。)[82] 『퇴도선생언행록』 권 5, 「기선생논인물(記先生論人物)」 中[83] 『퇴계집』 권 22, 「답이강이 경오(答李剛而 庚午)」, "조군은 세상에 뛰어나 높은 이름을 가진 사람으로 그 사람됨이 필시 세상으로부터 우뚝하고 깨끗이 벗어나서 천하만물이 그의 마음을 얽맬 수 없다고 생각하였소. 고을의 한 아낙네가 도의에 벗어난 행동을 했는지 안했는지의 여부는 한낱 조그만 티끌처럼 더러운 일이오. 이 사람에게 이 일을 이야기했다고 하여도 마땅히 귀를 씻고 듣지 않는 것이 마땅하거늘 이를 위해 스스로를 폄하하고 높은 절개를 손상시켜서 사람들과 시비를 다투며 심기를 소모하는 것이 몇 년이 되고도 그칠줄 모르니 진실로 이해하지 못하겠소(曹君有高世重名。意謂其人必亭亭物表。皎皎霞外。天下萬物。無足以攖其心者。彼鄕里一婦失行與否。是何等一塵穢事。使斯人而遇說此事。宜若洗耳而不聞。乃爲之自貶損高節。與人爭是非。費盡心機。至於積年。而猶不知止。誠所未曉。)"[84] 전술했듯 남명에 대한 퇴계의 이러한 비판들은 훗날 정인홍이 「발남명집설」과 「정맥고풍변」, 「회퇴변척소」 등의 글을 통해 이황을 대대적으로 비난하는 한 계기가 되었다.[85] 이러한 남명의 독서 스타일과 비슷한 방식은 제갈량 문서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다만 남명은 출처관에 있어서는 제갈량을 비판적으로 바라보았다. 『명종실록』 33권, 명종 21년(1566) 10월 7일 갑자 첫번째 기사[86] 마음의 작용과 수양방법을 신명사(神明舍)라는 집과 임금이 나라를 다스리는 태도에 비유하여 나타낸 그림이다. 『신명사도』 해설 영상『신명사도』를 간략하게 해설한 내용(pdf), 『신명사도』의 판본별 디지털 복원도[87] 『성호사설』 권 9, 「인사문(人事門)」, 경오년에 남명이 퇴계가 죽었다는 말을 듣자 눈물을 흘리며 애도하기를 "같은 해에 나고 같은 지역에 살았지만 70년을 서로 보지 못했는데 이 어찌 운명이 아니랴. 이 사람가고 없으니 하니 나도 갈 것이로다!"라 말하였다(庚午南冥聞退溪之卒。悲悼流涕曰。生同年居同道。七十年未相見。豈非命也。斯人云亾。吾其逝矣夫。).[88] 퇴도만은(退陶晩隱)이란 '도산으로 물러난 만년의 은자'라는 의미이고, 진성은 이황의 본관이다. 즉 "도산으로 물러난 만년의 은자 이황의 묘" 정도로 해석하면 되겠다.[89] 『동각잡기(東閣雜記)』 하권, 『연려실기술』 권 18, 「선조조고사본말」[90] 이는 조식만의 독창적인 수양 방법은 아니었다. 주희의 스승인 연평 이통(延平 李侗, 1093~1163)이 방울을 차고 다니며 늘 자신의 행동을 성찰했던 전례가 있다.[91] 판본에 따라서는 사십년(四十年)이 아닌 오십년(五十年)이라 기록된 문집도 있다.[92] 1549년 거창감악산에 놀러갔다가 포연(鋪淵)이란 곳에서 목욕을 하며 지은 시이다. 이곳에 이 시를 새긴 빗돌이 있다.[93] 외조카 이준민의 사위인 조원이 급제했을 때 그의 칼자루에 써준 시이다.[94] 남명이 병풍에 정호를 그려넣은 것과 관련하여서, 그가 정이보다 정호의 영향을 더 많이 받았음을 연구한 논문이 있다.[95] 『남명집』, 「서문」, 항상 시황계를 가지고 다니며 시는 사람의 뜻을 공허하게 만들어 배우는 사람의 큰 병통이 된다고 여겼다. 그래서 시를 짓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常持詩荒戒。以爲詩人意致虛曠。大爲學者之病。故旣不喜述作。)[96] 『남명집』 권 2, 「답성청송서(答成聽松書)」, "요청한 사언시는 화답해서 보내네. 일찍이 시를 읊조리는 것은 다만 어떤 곳에 집착하다가 본래 가진 뜻을 잃는데(玩物喪志) 가장 좋은 것이고, 나에게는 매번 교만해지는 죄를 더하는 것이라 여겨서 음풍농월을 그친 것이 근 수십년이 되었네. 지금 다행히도 멀리서 (시를 지어달라는) 명을 받으니 비록 간이나 허파를 나눈들 아까움이 없는데 하물며 편지에 몇 글자 쓰는 것이 무에 대수이겠는가?(所索四言詩和上。嘗以哦詩。非但玩物喪志之尤物。於植每增無限驕傲之罪。用是廢閣諷詠。近出數十載。今幸蒙有遠命。雖分肝肺。在所不惜。矧此片紙尺字乎。)"[97] 『대곡집』 下卷, 「남명선생묘갈(南溟先生墓碣)」, 책상을 닦고 책을 열면 몸과 마음을 책에 두고 묵묵히 읽으며 사색하였다. 입으로 소리내어 글을 읽지 않았기에 방 안이 사람 없는 듯 고요했다(拂床開卷。心眼具到。默觀而潛思。口不作吾伊之聲。齋房之內。寂然若無人。)[98] 『남명집』 권 4, 「행장(行狀)」, 독서를 할 때에는 문장 하나하나를 해석하지 않고, 간혹 열 줄을 읽어 내리다가 스스로에게 절실한 곳이 있으면 그 내용을 전부 파악한 후에야 지나가면서 공부를 독실히 했다(其讀書。不曾章解句釋。或十行俱下。到切己處。便領略過。其用功之篤也。)[99] 『대곡집』 下卷, 「남명선생묘갈(南溟先生墓碣)」, 독서를 하다가 긴요한 부분을 찾으면 반드시 세 번 반복한 후에 그 내용을 책에 옮겨적었으니, (그 책의) 이름을 『학기(學記)』라 하였다(每讀書。得緊要語言。必三復已。乃取筆書之。名曰學記。)[100] 참고로 남명은 정인홍이 이 노트의 편집을 완성하기 전에 사망하였다.[101] 일본국립공문서관에 소장된 『사서장도』 초간본관련 논문[102] 『남명집』 권 2, 「김효원에게 답하는 편지(答仁伯書)」, "(『소학』에 나오는) 쇄소응대하는 일은 어려서부터 익숙하여 (공부가) 6분(60%)에 달하였으니, 이제는 『대학』을 보면서 1~2년간 틈틈이 『성리대전』을 탐구하시게. 늘 『대학』 하나에만 출입하면 연나라로 가든 초나라로 가든 끝내는 본가에 돌아와 머무를 것이니, 성현이 되는 것도 모두 이 집에서 벗어나지 않네(洒掃應對。幼稚習慣事也。已向六分路頭。於今直把大學看。傍探性理大全一二年。常常出入大學一家。雖使之燕之楚。畢竟歸宿本家。作聖作賢。都不出此家內矣。)"[103] 『남명집』 권 2, 「송파자에게 보임(示松坡子)」, "고금의 학문하는 사람들은 『주역』의 공부가 매우 어렵다고 하는데, 이는 사서에 익숙하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배우는 사람은 모름지기 사서를 정독-숙독하여 참된 학문이 쌓이고 힘을 씀이 오래되면 도에 상달하는 것을 알 수 있게 되고 『주역』을 궁구하는 것도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다만 『대학』은 모든 경전들의 강령이니, 이 책을 읽고 융회관통할 수 있다면 다른 책들을 보기 쉬워질 것입니다(古今學者。窮易甚難。此不會熟四書故也。學者須精熟四書。眞積力久。則可以知道之上達。而窮易庶不難矣⋯⋯但大學。群經之綱統。須讀大學。融會貫通。則看他書便易。)"[104] 『남명집』 권 4, 「행록(行錄)」, 늘 뜻이 같은 선비들과 개탄하며 "오늘날의 공부하는 사람들은 늘 육상산의 학문이 간략한 것을 위주로 함에 병통이 있다고 여긴다. 그러면서 스스로의 공부에 있어서는 먼저 『소학』, 『대학』, 『근사록』을 읽음에 힘쓰지 않고 『주역』과 『역학계몽』을 먼저 읽으며 격물, 치지, 성의, 정심의 차례를 구하지 않고 반드시 성명의 이치를 앞장서 말하고자 한다. 이러하니 그 나쁜 풍속이 육상산 정도에서 그치지 않는 것이다" 라고 말씀하셨다(常與同志之士慨然曰。今之學者。每病陸象山之學以徑約爲主。而其爲自己之學。則不先讀小學,大學,近思而做功。先讀周易,啓蒙。不求之格致誠正之次序。而又必欲先言性命之理。則其流弊不但象山而止也。)[105] 『내암집』 권 12, 「남명조선생행장(南冥曺先生行狀)」, 늘 처음 공부하는 사람들이 성명의 이치를 고담준론하는 것을 들으시면 이를 꾸짖어 그치게 하시면서 말씀하셨다. "학문을 하는 기초는 어버이를 섬기고 형을 공경하는 것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공부를 시작하는 선비 중에 간혹 부모형제에게는 잘 하지 못하면서 천도의 오묘한 점을 탐구하려 드는 이가 있는데, 그게 무슨 학문이며 또한 무슨 습관이란 말인가?(每聞初學高談性命之理。未嘗不呵止之曰。爲學初不出事親敬兄之間。始學之士。或不能於其父母兄弟。而遽欲探天道之妙。此何等學也。何等習也。)"[106] 『남명집』 권 4, 「행장(行狀)」, 학문을 할 때에는 지엽적인 것은 버리고 마음으로 체득하는 것을 귀하게 여겼으며, 실제적이고 실천하는 것을 급선무로 삼았다. 경전의 내용을 강론하고 분석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으니 대체로 헛된 일과 빈 말은 실천궁행하는데 이롭지 않다고 여겨서였다(其爲學也。略去枝葉。要以得之於心爲貴。致用踐實爲急。而不喜爲講論辨析之言。蓋以爲徒事空言。而無益於躬行也。)[107] 『남명집』 권 2, 「여오어사서(與吳御史書)」, "입으로 하늘의 이치를 말하는 것에 (내가) 어찌 남들보다 뒤처지겠소. 그러나 (그에 대해) 기꺼워하면서 말하고 싶지가 않을 뿐이오(口欲談理。豈下於衆人乎。猶不肯屑有辭焉。)"[108] 『남명집』 권 2, 「해관서문답」, 耳目口鼻之發。雖聖人亦同。同一天理也。流於不善而後。方可謂之欲也。但有人心道心之別者。有形氣義理之間已。故不曰人欲。曰人心。[109] 1898년에 후산 허유와 함께 진주 청곡사에서 『남명집』 의 교열을 맡기도 했다.[110] 『면우집』 권 149, 「남명조선생묘지명(南冥曺先生墓誌銘)」, 如以心之未發爲性。已發爲情。而其發也四端七情。有理發氣發之分。旋曰耳目口鼻之欲。同出於天理。[다만] 곽종석의 글 중 "이목구비의 욕망은 천리에서 함께 나온 것이다" 부분의 출처는 앞서 언급된 「해관서문답」의 내용으로 보이는데, "발함에 사단과 칠정이 되는데 여기에는 이발과 기발의 분수가 있다" 부분은 출처가 어디인지 현재까지 알 수 없다.[112] 일례로 문인인 부사 성여신이 단속사에 있던 서산대사의 『삼가귀감』 목판과 사천왕상을 불태우자 행동이 과격했다며 훈계만 했을 뿐 크게 나무라지는 않았다.[113] 이 말이 불교에 대한 비판이었음에도 『명종실록』에서 「단성소」 부분의 기사를 적은 사관은 "석가모니의 학설에 위로 하늘의 이치를 통달하는 것이 있겠느냐"며 조식을 비판했다. 기록의 출처는 『명종실록』 19권, 명종 10년(1555) 11월 19일 경술 첫번째 기사, 『남명집』 권 4, 「행장(行狀)」[114] 산청군 단성면에 있던 단속사 밑을 흐르는 개울 이름[115] 단속사지 앞에 심어져 있던 매화나무. 고려 말에 강회백이 심었는데, 그의 벼슬이 정당문학인 것에서 정당매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수령이 640여 년에 이르렀지만 2014년에 완전히 고사하였고, 현재는 옆에 후계목을 심어서 관리하고 있다.[116] 『남명집』 권 4, 「행장(行狀)」, 『참동계』를 보는 것을 자못 즐겨서 "(내용 중에) 매우 좋은 곳이 있으니 학문에 도움이 될 것"이라 여겼다(頗喜看參同契。以爲極有好處。有補於爲學。).[117] 이 부분은 남송~원나라 초기의 인물 유염(兪琰)이 지은 『참동계』의 주석서 『참동계발휘(參同契發揮)』의 내용을 인용한 것이다.[118] 관련 내용을 다룬 단대신문기사[119] 이와 관련된 흔적으로는 곽재우의 문집에 실린 조식잠(調息箴)과 양생명(養生銘), 그리고 친필 유묵이 대표적이다. 이 중에서 조식잠과 양생명은 곽재우가 지은 것이고, 친필 유묵의 내용은 원나라 때의 도사 진치허가 지은 『상양자금단대요(上陽子金丹大要)』의 「금단묘용장(金丹妙用章)」 마지막 부분을 일부 발췌한 것이다. 이외에도 곽재우의 문집에는 「영회(詠懷)」를 비롯하여 그가 내단수련에 침잠한 흔적을 간접적으로 보이는 시들이 실려 있다.[120] 이러한 인식과 관련된 내용을 다룬 논문 01, 02[121] 부산포제포에 설치된 왜관 이외에도, 낙동강 수로 주변에는 한양으로 상경하던 왜인들이 묵은 소왜관(小倭館)들과 그들이 가져온 물화를 저장한 창고인 왜물고(倭物庫)라는 곳이 있었다. 김해는 소왜관이 설치된 곳 중 하나였다. 그리고 부산포왜관이 소속된 이웃 고을 동래부에서는 왜인들과의 밀무역이 성행하는 폐단이 있었고, 지척에는 왜구들이 성했던 대마도가 있었다. 조식은 대마도를 특히 의식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는데, 김해에서 합천으로 거처를 옮긴 후인 1552년 친구 성수침에게 보내는 에서 자신이 사는 남부 지방을 두고 "대마도와 가까운 바닷가요 남극노인성이 뜨는 끝자락(馬之島海 老人之角)"이라 표현하기도 했다.[122] 나라의 기강이 엉망이 된지 이미 오래되어서 진작부터 왜적들이 이 나라를 휩쓸고 다녔어도 이상하지 않다는 뜻. 「단성소」에서 을묘왜변 등의 변란이 일어난 것을 두고 "변방에 이 생겨 여러 대부들이 제 때 밥도 먹지 못하지만, 은 놀라지 않았습니다. 이 일은 20년 전에 일어날 일이었으나, 전하의 뛰어난 용맹에 힘입어 지금에야 비로소 터진 것이지 하루 저녁에 갑자기 생긴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한 것과 같은 맥락이라 볼 수 있다.[123] 『내암집』 권 12, 「남명조선생행장(南冥曺先生行狀)」, 선생은 기상이 맑으면서 드높았고 두 눈은 형형하게 빛나서 바라보면 속세의 인물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先生氣宇淸高。兩目炯燿。望之知其非塵世間人物。).[124] 『남명집』 권 4, 「행록(行錄)」, 이달 14일(1572년 음력 1월 14일), 선생의 병이 더욱 심해졌다.....(중략).....그리고 당시의 일을 논하다가 감정이 복받쳐 올라 주먹을 꽉 쥐셨는데 평상시의 모습과 같았다(是月十四日 先生病甚......又極論時事 慷慨扼腕 有如平日).

사망하기 한달 전, 병석에 있었을 때인 1572년 음력 1월 14일의 모습을 기록한 글이다. 이 기록을 바꾸어서 이야기하자면, 남명은 평상시에 시사를 논하다가 자주 비분강개하였다는 뜻이 된다.
[125] 『남명집』 권 4, 「행록(行錄)」, (김)우옹에게 이르기를, "내 평생에 장점이 하나 있으니, 죽음을 각오하며 저항하고 구차하게 복종하지 않은 것이다. 그대도 잘 알고 있겠지?(謂宇顒曰。吾平生有一長處。抵死不肯苟從。汝尙識之。)"[126] 『남명집』 권 4, 「행록(行錄)」, "비유를 잘 하여 사물에 끌어다 연결시킴이 명쾌하고 평범하지 않았다. 또한 뛰어난 기상이 크게 드러난 곳이 있어 해학적이고 조롱하며 풍자하는 말을 섞기도 했다(長於譬諭。引物連類。明爽不凡。亦有英氣太露處。雜以諧謔嘲諷之言。)"[127] 퇴계의 제자인 성재 금난수는 남명이 친구 청향당 이원과 서로 농담하며 놀리는 모습을 보고 일기에 기록으로 남기기도 했다.[128] 이 묘갈문을 본 남곤은 남명의 문장이 고문의 법도에 맞고 정자(程子) 집안 조상들이 전기를 쓰는 방식이라고 평하였다고 하는데, 이는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묘갈문이 쓰여진 가정 7년은 1528년인데 남곤은 그보다 1년 전인 1527년에 사망하였기 때문이다.[129] 『연려실기술』 권 9, 「중종조고사본말」[130] 『무민당선생문집』 권 5, 「남명선생연보」, (차산은) 9년을 살았다. 과거에 기르는 개가 먹을 것으로 다투자 한탄하면서 "진씨 집안에서는 많은 개들을 같은 우리에 두어도 그러지 않았는데 우리집 개는 그렇지 못하니 참으로 마음에 부끄럽다!"라고 말하였다. 여러 아이들과 산해정에서 공부하고 있을 때 하루는 가마를 탄 벼슬아치가 그 앞을 지나갔다. 그 위세가 심히 성대하여 같이 공부하던 아이들은 다투어서 (그 풍경을) 보면서 감탄하였지만 차산은 홀로 이를 가벼이 보며 "장부의 일이 어찌 벼슬에 있으랴" 하였다. 선생은 차산을 아끼고 사랑하였지만 그가 요절하자 애통해하였다. 선생이 (차산의 요절에 대해) 지은 시가 있으니 "매년 길게 통곡하는 날은 6월 11일"이라 하였다(生九歲。嘗畜犬爭食狺然。忽悵然曰陳氏百犬共牢。吾犬則不然。於心實有愧焉。又嘗與羣兒同學於山海亭。一日有乘軺者過前。威儀甚盛。羣兒爭觀歎羡。次山獨藐視之曰丈夫事業。豈在此也。先生奇愛之。及其夭也。先生痛惜之。嘗有詩曰每年長痛哭。六月十一日。).[131] 『남명집』 권 1, 「아들을 잃고(喪子)」, 집도 아들도 없는 모습이 중과 같고, 뿌리도 꼭지도 없는 구름이 내 모습과 같네. 어쩔 수 없이 보낸 한 평생, 남은 삶을 돌아보니 머리엔 어지러이 흰 눈이 내렸네(靡室靡兒僧似我。無根無蔕我如雲。送了一生無可柰。餘年回首雪紛紛。).[132] 여류 시인으로 유명한 이옥봉의 남편이기도 하다.[133] 우계 성혼의 부친인 청송 성수침의 사촌동생으로, 을사사화 때 친형인 성우(成遇)가 연루되어 죽자 평생을 충청도 보은 속리산에서 은거하며 살았다. 문인으로는 미수 허목의 외조부이자 유명한 시인이요 호걸이었던 백호 임제가 있다.[134] 성운과는 친척지간이다. 성운을 만나러 속리산에 온 남명과 대면하였고, 헤어지면서 보은현감 벼슬을 그만두고 다음 해에 남명과 다시 만날 것을 약조하였다. 약속대로 성제원은 벼슬을 그만둔 후 1558년 8월 해인사에서 남명과 재회하였고, 이듬해인 1559년에 별세했다.[135] 밀양의 선비로 호는 송계(松溪). 동고 이준경과는 6촌지간으로, 사람들은 그를 남명 조식, 황강 이희안과 더불어 영중삼고(嶺中三高) 또는 영남삼고(嶺南三高)라고 불렀다. 친구인 남명을 두고 '눈 내린 하늘의 차가운 달과 같은 기상(雪天寒月底氣像)'이라 평한 바 있고, 사후에는 남명이 그의 묘비문을 지어주었다. 밀양의 예림서원과 김해의 신산서원에 제향되었다.[136] 김일손의 조카로 호는 삼족당(三足堂)이다. 남명은 청도의 수령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김대유를 두고 "경세제민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었고 평생 한 점의 흠결이 없었다"라 평하며, 김일손과 비교하여 "평범하게 살다 죽었기에 사람들을 견문으로 놀래킨 것은 간혹 그의 숙부보다 못하다. 하지만 요즘 선비들의 논의로 기준을 삼으면 조카(김대유)가 숙부보다 낫다"고 썼다.[137] 조식의 어머니인 인천 이씨의 묘갈문을 지어줄 정도로 서로 절친한 사이였다. 참고로 송인수의 형인 송구수의 증손자가 바로 우암 송시열이다. 즉 송시열에게 규암 송인수는 종증조부인 셈. 이런 까닭에 송시열은 송인수의 시장(諡狀: 어떤 인물의 시호를 청하기 위하여 그의 생전 행적을 기록한 글)과 신도비문을 작성하기도 했다.[138] 成遇, 1495~1546. 대곡 성운의 둘째 형으로 자는 중려(仲慮)이다. 제릉참봉을 역임하던 중 진복창의 모함으로 을사사화에 연루되어 고문치사하였다. 그의 죽음은 성운이 속리산에 은거하는 계기가 되었다.[139] 『토정유고(土亭遺稿)』 하권, 선생(토정)이 패랭이에 거친 베옷을 입고 걸어서 남명을 뵙고자 했다. 모시는 사람이 들어가 이를 알리자, 남명이 계단 아래로 내려와 선생(토정)을 맞이하여 들이고 극진히 대우했다. (토정)선생이 "어찌 (저 이지함이) 야인이나 나무꾼이 아님을 아시고서 이리 지극히 대하십니까?" 라 하자, 남명은 "그대의 풍골을 내 어찌 모르리오" 라 하였다. (토정)선생께서 "저는 추위와 굶주림을 잘 버티고, 바위틈 같은 험한 곳에 머물며 수일간 먹지 않아도 별 탈이 없습니다" 라 하시자, 남명이 "그대의 타고난 품성이 이와 같은데 어찌 신선의 학문을 배우려 하지 않소?"라 장난스레 말했더니 (토정)선생이 몸가짐을 바로하며 "(남명)선생께선 어찌 이리 사람을 가볍게 보십니까?" 라 대꾸했다. 이에 남명이 웃으며 그에게 사과했다. 천문을 잘 보는 어떤 사람이 있었는데, 어느 새벽 (토정)선생의 집을 찾아와 "점차 희미해져가던 소미성의 정기가 지난 밤에 홀연히 사라져서 그대에게 재앙이 있을 것 같았기에 특별히 문안을 여쭈오"라 하자, (토정)선생은 "아, 내가 어찌 소미성을 감당하겠소. 필시 남명 조처사에게 재앙이 있을 것이오"라 말씀하셨다. 오래지 않아 남명께서 돌아가셨다(先生着蔽陽子。服麤布衣。徒步而求見曹南溟。侍者入告。南溟卽下階迎入。待之甚敬。先生曰。何知非野人樵夫。而迎接至此耶。南溟曰。子之風骨。吾豈不知乎。先生自言性能耐寒耐飢。或寄宿巖石之間。數日不食。別無他恙。南溟戱之曰。稟氣如此。何不學仙。先生斂容曰。先生何輕人若是。南溟笑而謝之。有一善觀象者。一日晨叩先生之門曰。邇來少微星精薄已久。去夜星忽沈精。於君有災。故特來爲問耳。先生曰。噫。吾何敢當是應。必於南溟曹處士有災也。未幾。南溟亦卒。)[140] 『고청선생유고』, 「행장(行狀)」, 토정과 함께 남명 조선생의 집을 방문했는데, 이때 남명은 외출 중이었다. (남명의) 서재와 방석이며 깔개 등이 화려한 것을 보고는 마음에 꺼려서 진흙이 묻은 신발로 밟아 조롱하며 책망하는 뜻을 보였다. 남명이 (외출하고) 돌아와 (방이 어지럽혀진 광경을) 보고 웃으며 말하기를, "필시 이지함과 서기 두 사람이 이곳을 지나갔으리라"고 하였다(又與土亭訪南冥曹先生於家。時南冥小出。見其齋居几席宏麗華睆。心惡之。以泥鞋蹋之。示嘲責之意。南冥歸而見之。笑曰。必李,徐二子過此也。)[141] 『덕천사우연원록』 권 3, 「문인」, 선생이 (정탁에게) 소 한 마리를 주어 타고 가게 했다. 이 그 뜻을 깨닫지 못하자, 선생은 "그대의 말과 성격이 너무 급하니, 이는 굼뜨게 행동하여 (앞날을) 멀리 기약하는 것만 못한 것이라네" 라고 말씀하셨다. 선생께서 (임금의) 부름을 받고 (서울로) 올라오셨을 때, 공이 강가에 나와 선생을 맞이하며 제자의 예를 깊이 지켰다(先生贈一牛以騎去。公未解其意。先生曰。君辭氣太敏。不如用遲鈍而致遠。先生赴召時。公出迎江上甚執弟子之禮。)[142] 이언적이 남명을 헌릉참봉에 천거한 적이 있었으나 남명은 이를 거절하였고, 또 이언적이 경상감사가 되어 남명과 만나고자 하였을 때에도 "상공(相公)이 벼슬에서 물러나 귀향하였을 때 내가 안강을 찾아도 늦지 않을 것"이라고 답하는 편지를 보내며 거절하였다.[143] 남명과 같은 이유로 이언적을 비판한 대표적인 인물로는 율곡 이이가 있다. 다만 이언적은 추관이 되어 어쩔 수 없이 사림을 심문하기는 하였으나 연루된 이들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나름 노력한 편이었다.[144] 「관서문답」 원문 01, 02(영인본)[145] 「해관서문답」 관련 참고자료, 「관서문답」과 「해관서문답」 관련 논문[146] 『선조실록』 1권, 선조 즉위년(1567) 11월 17일 무진 첫번째 기사[147] 『석담일기』 상권, 「융경 6년 임신(1572)」, 젊었을 적에 조식이 를 보고 "이 사람이 뜻을 얻으면 반드시 시사(時事)를 그르치리라" 말하였고, 대승 또한 조식을 유자(儒者)로 여기지 않으며 서로를 용납하지 않았다. 대승이 조식의 과실을 말한 까닭에 조식의 학도들은 대승을 미워하였다(少時曺植見之曰。此人得志。必誤時事。大升亦以植爲非儒者。兩不相許。大升言植過失。故植之學徒惡之。)"[148] 『송강별집(松江別集)』 권 4, 「행록(行錄)」, (남명은) 또 "기대승의 예전 언행이 지극히 흉악하여 나는 항상 반드시 그가 나랏일을 그르치리라고 생각했는데, 훗날 과연 생각한 대로였다"라고 이야기했다(且言奇大升從前言行極凶悖。吾常以爲必誤國事。後來果然矣。)

이 부분은 김장생이 쓴 신경진과 이귀에게 보내는 편지에서도 똑같이 쓰여져 있다.
[149] 신경진과 이귀에게 보내는 편지에서는 '행장(行狀)'이라 쓰여 있고(此說見於成大谷所製南冥行狀), 편지와 같은 내용이 일부 실린 정철의 행록에는 행장 대신 '묘비문(碣文)'이라 쓰여 있으므로(此說見於成大谷所製南溟碣文) 이와 같이 쓴다.[150] 『대곡집』 下卷, 「남명선생묘갈(南溟先生墓碣)」, 글재주는 있으나 과거에 급제하지 못한 선비가 있었는데, 사람됨이 음험하고 (타인을) 시기질투하며 어진 이를 원수보듯 하였다. 여러 사람이 모인 자리에서 공(조식)이 이 사람(선비)을 만났는데 (모임에서) 물러나온 후 벗들에게 이야기했다. "내가 그의 얼굴을 살펴보니 사람됨을 알겠더군. 외모는 당당하고 듬직해보이나 속으로는 남을 해칠 마음을 품고 있어. 이 사람이 벼슬을 얻어 자신의 뜻을 펼치면 착한 사람들이 위태로울 것일세!(又有士子。有文才未第。其人陰猜媢嫉。仇視賢人。公偶見於群會中。退而語友人曰。吾察於眉宇之間。而得其爲人。貌若坦蕩。中藏禍心。如使得位逞志。善人其殆乎。)"[151] 『기암집』 권 12, 「만술(漫述)」, 성대곡이 지은 「남명행록」에 이르길, 공(조식)이 두류산을 유람할 때 어느 소년을 만나고 다른 사람에게 "(그 소년은) 음험하고 남을 시기질투하며 착한 사람을 마치 원수 보듯 하는 것이 뒷날 뜻을 얻으면 선한 사람들이 화를 입을 것이다" 라 말하였다고 한다. 후인들이 간혹 기고봉을 (남명이 언급한 어느 소년이라고) 지목하며 의심하는데, (지목된 대상이 기대승이라고 의심하는) 그 근거가 뭔지 모르겠으니 참으로 괴이하다!(成大谷作南冥行錄。有云公遊頭流時。遇一少年。語人曰。陰猜猖嫉。仇視善人。後日若使得志。善類赤矣。後人或疑其指奇高峯。而不知何所據也。可怪。)

여기서 정홍명이 언급한 「남명행록」은 앞서 김장생이 신경진이귀에게 보낸 편지에서 언급한 남명의 행장과 마찬가지로 성운의 문집에 없는 글이다. 이 행록이 『대곡집』에 수록된 남명의 묘갈문을 이르는 것인지, 아니면 묘갈문과 약간 내용이 다른 행록이 따로 있었으나 현재 전해지지 않는 것인지는 불명.
[152] 『사계유고』 권 3, 「신경진과 이귀에게 보냄(與辛用錫慶晉李玉汝)」, 南冥以不能明白痛治。不平於心。使其門徒。毁撤宗萼之家。逐其妻于他邑。

같은 사람이 지은 정철의 행록에는 남명의 冥을 溟으로, 하종악의 악(蕚)을 이체자인 萼이라 표현한 것 외엔 위의 글과 똑같이 적혀있다.
[153] 『사계유고』 권 3, 「신경진과 이귀에게 보냄(與辛用錫慶晉李玉汝)」, 又與李楨交契深厚。曾約同居德山洞。李公造瓦屋于洞裏。南冥以李於河家獄事。所見不同。疑李受河家賂。而緩其獄於差官。卽毁撤李家。

같은 사람이 지은 정철의 행록에는 남명의 冥을 溟으로, 위의 편지글 가운데 疑李受河家賂에서 '하씨 집안(河家)'이란 부분이 빠진 것을 제외하면 위의 글과 똑같이 적혀 있다.
[154] 원문번역문[155] 다른 좋은 곳들도 많았지만 드높은 천왕봉이 보이는 곳이라서 덕산에 들어와 산다는 의미이다.[156] 동양학자 조용헌은 남명의 이 시를 번개, 『옥추경』 등과 연결지어 도교적 관점에서 해석하기도 했다. 관련 칼럼 01, 02, 03[157] 鄭師賢. 초명은 '鄭思賢'. 조식의 매부이자 그 문하에 출입하기도 하였다. 그가 1555년에 죽었을 때 조식은 "젊었을 때 문장의 성취는 미진하였으나, 그 부친의 업은 넉넉히 할 수 있었다"라는 묘갈문을 썼다. 정사현의 부인 즉 조식의 여동생도 죽은 남편을 정성껏 애도하다가 세상을 떴고, 이후 나라에서 정려비를 내렸다.[158] 寸이 番으로 기록되어 있는 곳도 있다.[159] 문익점의 동생인 문익하(文益夏)의 아들이 문가용(文可容)이고, 문가용의 딸은 남명의 증조부 조안습(曺安習)과 결혼하여 남명의 조부 조영(曺永)을 낳았다. 따라서 문익점은 남명의 증조모에겐 종조부가 된다. 참고로 문익하의 또 다른 아들인 문가학(文可學)은 조선시대 때 도사로 활동하다가 역모제에 휘말려 거열되었다.[160] 이 중 「목면화기」는 20세기에 편찬된 『강성록(江城錄)』이란 책에 실려있다. 참고로 『삼우당실기』에도 제목이 같은 「목면화기」가 실려 있는데, 이것은 생육신의 한 사람인 추강 남효온이 지었다고 한다. 『삼우당실기』와 『강성록』에 수록된 두 「목면화기」의 내용을 비교해보면, 처음과 끝 부분은 문장까지 복붙한 내용이 있을 정도로 거의 비슷하나 목화의 도입과 문익점의 공로에 대해 서술한 중간 부분에서 차이가 있다. 예를 들어 남효온은 문익점이 목화씨를 두껍에 담아왔다고 소개했는데, 조식은 씨앗을 주머니(囊橐)에 숨겨왔다고 기록하면서 남효온의 글에는 보이지 않는 중국인 노파나 승려에 대한 이야기를 덧붙였다.[161] 이야기에 따라서는 조식의 방이 지나치게 화려한 것을 본 토정 이지함과 고청 서기가 흙이 잔뜩 묻은 신발로 방석을 짓밟고 돌아갔다거나 방에 똥을 누고 이부자리에 발라버렸다는 버전도 있다.[162] 제자 겸 큰외손녀 사위인 김우옹이 기록한 남명의 「행록」을 보면 실제로도 이와 비슷한 면모가 있었던 듯하다. 남명은 말년에 거처하던 산천재에 사치품이었던 단청을 칠했는데, 김우옹이 이를 보고 "벼슬하지 않는 가난한 선비에게 단청은 마땅치 않은 것 같습니다"라 하자, 웃으며 "나는 본디 부귀의 상을 타고나서 그대들처럼 담박하지는 않을걸세"라 답했다고 한다.[163] 위 야담의 출처 01, 02.[164] 추야련당 제 4수에 달린 주석은 다음과 같다. "오랜 친구가 주색을 이야기하는 것을 두고 은근히 경계하여 말한 것이다(謂微戒故人以酒色云)"[165] 참고로 이 야담의 원형은 남명이 제자 김우옹과 정구에게 남긴 말에서 비롯된 듯한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제자 김우옹과 정구에게 이르시길, "세상에서 가장 굳센 관문(鐵門關)이 바로 화류관문(花柳關)이라네. 그대들은 이 관문을 넘었는가 그러지 못했는가? 이 관문은 금석(金石)도 녹여버리지. 그대들이 평상시에 절조를 가지고 있다해도, 여기에 이르면 남김없이 녹아 흩어지고 말걸세!" 라 하셨다(謂宇顒,逑曰。天下第一鐵門關。是花柳關也。汝等能透此關否。因戱言此關能銷鑠金石。汝軰平日所操。到此想應消散無餘矣。)" 출처는 『남명집』 권 4, 「행록(行錄)」.[166] 원문번역문[167] 참고로 이 관비는 남명과 같은 1501년생이었다고 하는데, 그녀가 윤국형과 만났을 시점의 정해년이면 1587년이니 대략 85~6세 즈음의 고령이었을 것이다.[168] 작은사자자리에 해당되는 별자리로, 동양 고천문학에서는 달리 소미성(少微星)이라고도 부른다. 삼원(三垣) 중 태미원(太微垣)에 소속된 이 별자리에 대한 『천문유초』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소미성은 사대부의 별자리로 달리 처사라고도 부르며, 별들의 이름은 맨 아래로부터 처사, 의사, 박사, 대부이다(少微。士大夫之位也。一名處士。一曰南。第一星處士。第二星議士。第三星博士。第四星大夫。)"[169] 『석담일기』 상권, 「융경 6년 임신(1572)」, 『연려실기술』 권 11, 「명종조고사본말」[170] 『시암집』 권 14, 「격암남선생묘갈명(格庵南先生墓碣銘)」, 선조 초기 관상감 천문교수로 임명되어 벼슬에 나아갔다가 병이 들어 사망했으니, 이 때가 융경 신미년(1571) 12월 3일이요 향년 63세였다.(穆陵初除天文學敎授。就職尋病卒。卽隆慶辛未十二月三日。而壽六十三。)[171] 『남명집』 권 4, 「부기(附記)」, 융경 4년(1571)에 허봉이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입조했을 때, 명나라 사람이 그에게 "그대 나라의 고결한 은일지사께 장차 재난이 있겠소. 내가 (천문에서) 자미원을 보니 알겠더이다." 라 하였다. 허봉이 돌아와 이를 이야기하자 덕계 오건이 "우리나라의 남사고가 천상을 잘 보는데, 그도 올 겨울에 그런 이야길 하더이다. 소미성의 빛이 점점 흐려지고 있으니 필히 처사에게 재앙이 있을 것이라고요." 라 말했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선생의 병이 깊어졌다. 임금께서 이를 들으시고 한양에서 의원을 보내 선생의 병세를 살피게 하셨으나 선생께서는 다음해 2월 8일 돌아가셨다. 선생의 부음이 서울에 닿지 않았을 때 남사고가 "소미성의 정기가 모두 사라졌으니 필시 처사께 이미 흉한 일이 일어났을 것" 이라 하였는데, 잠시 후에 부음이 도착했다. 아, 선생이 돌아가심에 하늘이 동요하였고, 철인이 시들어가매 진실로 기이한 일이 생긴 것이로다. 문인 진극경이 기록하다.(隆慶四年辛未。許篈以書狀官入皇朝。華人言汝國高遯之士。將有身災。余觀紫微垣知之。許篈歸言吳德溪云。我國南師古善觀象。是冬。亦曰。小微精薄。必於處士有災。未幾。先生病亟。上聞。自上遣醫馳視。越明年二月初八日。終。訃未入京。南師古又曰。小微全無精。處士必已凶。俄而訃至。嗚呼。先生之歿。天象爲動。哲人之萎。固有異矣。門人陳克敬。記。)[172] 이를 두고 김시양이라는 사람은 자신의 저술인 『부계기문』에서 진극경을 비판하는 동시에 "우리나라와 같은 변방의 절개있는 선비에게까지 별자리가 응하여 움직인다면 하늘이 참으로 수고가 많겠다"라는 기록을 남겼다.[173] 출처: 허권수, 『절망의 시대, 선비는 무엇을 하는가』, 한길사[174] 이 녹음에서 이후의 줄거리는 맨 아래에 서술된 구렁이가 정인홍의 조카로 환생하는 이야기로 연결된다.[175] 이때 정인홍이 숙모(또는 제수)에게 아들을 갖다 버리라고 하고 했다는 버전도 있다. 이 버전에 따르면 숙모(또는 제수)는 처음에는 정인홍의 말을 따랐으나, 다시 아들을 낳은 후에는 육친의 정에 이끌려 정인홍의 부탁을 거절하고 아이를 계속해서 길렀다고 한다.[176] 해당 영상의 31:32~35:30 사이에 간략하게 남명과 퇴계를 설명하는 내용이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