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사고 南師古 | |
<colbgcolor=#000><colcolor=#ffffff> 자 | 경원(景元) 또는 복초(復初) |
호 | 격암(格庵) |
본관 | 영양 남씨[1] |
출생 | 1509년(중종 4) |
강원도 울진현 근남면 비월전동 (현 경상북도 울진군 근남면 수곡1리 누금마을) | |
국적 | 조선 |
사망 | 1571년(선조 4) 음력 12월 3일[2] |
직업 | 학자, 위서 격암유록의 주인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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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 중기의 학자, 도사.2. 생애
1509년 강원도 울진현 근남면 비월전동(현 경상북도 울진군 근남면 수곡리)에서 정6품 이조 좌랑의 남희백(南希伯)의 아들로 태어났다. 증보문헌비고에 의하면 영양 남씨 시조 남홍보(南洪甫)의 12대손이라고 하며, 만호공파 파조 남호(南顥)의 증손자이다. 이후 강릉 최씨 최침(崔琛)의 딸과 혼인하여 아들 남응진(南應震)과 딸 남백년(南栢年)을 두었으나, 아들 남응진이 요절하면서 후손이 끊겼다.이른바 한국의 노스트라다무스(...). 실제 노스트라다무스와 생몰연도마저 비슷하다.
그의 득도에 대해서는 여러 이야기가 전한다. 소년 시절 고향 울진의 불영사에서 '운학도인'이라는 도사를 만나 천문과 역학을 다룬 비서(秘書)를 얻기도 했고, 금강산에서 신승을 만나 세권의 비기(秘記)를 얻었다고도 하며, 그렇게 전국 각처의 명산을 돌아다니며 수련한 끝에 천문·역학·관상·복서 등 비결에 달통했다고 전한다. 민간에서는 그가 천기를 누설하여 자손의 대가 끊어지는 화를 당했다고도 한다.
과거를 몇 번 봤으나 떨어지자 자기 앞일만큼은 욕심이 끼어서 잘 볼 수 없었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는 당시 강원도 관찰사에게 자신의 처지와 심정을 담은 편지를 보냈다. 강원도 관찰사는 남사고에 대해 알아보고는 재질이 있다고 여겼는지, 그를 천거하였다. 그의 나이 55세에 종9품 사직참봉(社稷參奉)직을 제수받았고,[3] 이후 실력을 인정받아 관상감 천문 교수(종6품)가 되었다.
젊어서 장차 전란을 일으킬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탄생을 천기로 보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래서 전란을 두려워하여 율곡 이이와 십만양병설을 만들었다고 비약하는 이야기도 있다.
명종 대에 이미 선조대에 일어날 동서분당(붕당정치)를 예언했고, 지봉유설과 연려실기술에는 남사고가 임진왜란을 예언했다고 적혀있다. 지봉유설에는 남사고가 임진왜란에 대해서 "백마를 탄 자가 임진년에 남쪽에서부터 침략해 오리라."라고 예언했는데, 실제 가토 기요마사가 선봉장으로 백마를 타고 쳐들어왔다. 그러면서 전쟁이 용의 해인 임진년(1592년)에 일어나면 나라가 망하지 않겠지만 다음 해인 뱀의 해 계사년(1593년)에 일어나면 나라가 망할 것이라고 예언했다고도 한다.
풍수지리에도 능하여 조선의 수도인 한성의 한산과 한수가 다골다탄(多骨多灘)의 지세이므로 골육상쟁의 화가 잦을 것이라고 했다는 이야기가 전하며, 명종에게 "내년에는 태산을 봉하게 될 것입니다"라고 예언했는데 정말로 이듬해 한강에서 크고 괴상한 물고기가 잡히는 해괴한 사건이 터지고(윤원형 항목 참고) 3일 있다가 문정왕후가 죽어 태릉에 장사 지내 그의 예언이 적중했다고 한다.
아버지 묘지 자리를 잘못 보았다는 이야기가 있다. 구룡쟁주(九龍爭珠, 아홉 마리 용이 여의주를 놓고 다툼)의 명당인 줄 잡았더니 구사쟁와(九蛇爭蛙, 아홉 마리 뱀이 개구리 한 마리를 놓고 다툼)의 자리였다는 것. 부정적 설화로는 산신을 섬기지 않아 산신이 아홉 번 옮기는 묫자리를 모두 망쳐버렸다는 이야기도 있다. 혹은 원래 있었던 묫자리들이 모두 명당자리였으나 볼 때마다 욕심을 내어 더욱 좋은 자리로 옮기려다가 심한 욕심에 노한 산신이 마지막 아홉 번째 이장에서 남사고의 눈을 가려 묫자리를 잘못 보게 만들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 이전에 그의 아버지를 모셨던 묫자리들이 모두 하나같이 명당자리였다는 것이다.[4] 자신을 위해 본 묫자리도 흉당이라서 아들 대에 대가 끊겨 천기누설의 화를 당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일설에 의하면 자신의 묫자리는 자기 아버지 묫자리에 욕심을 지나치게 부리다 당한 화를 떠올려 그리 큰 욕심을 내지 않고 그저 평범한 명당 자리로 골라두었으나, 가난한 집안으로 시집간 딸이 그 자리를 탐내어 몰래 밤중에 자기 아버지가 묻힐 자리에 물을 가득 부어 두었다고 한다. 다음날 자기 아버지 묘를 파기 위해 남사고가 알려준 자리로 가 본 아들이 묫자리에 물이 가득 차 있자 '이건 아버지께서 잘못 보신 것이 아닐까?' 하며 이 자리를 쓰지 못하겠다고 하자 남사고의 딸이 '못 쓸 땅이면 자기나 달라.'고 하여 나중에 그 자리에 시아버지를 모셨다고 한다. 그 딸이 시집간 자리가 윤씨 집안으로, 이후 그 마을의 윤씨 집안에서는 큰 출세는 하지 못하였지만 고을 원님 정도 자리에 오른 사람들이 꾸준히 나와 가세가 번창하였다고 한다. 이 때문에 남사고의 고향에서 남씨 집안과 윤씨 집안은 원수 사이가 되어 얼굴조차 마주치려 하지 않았으며, 따로 '남가 다리'와 '윤가 다리'를 놓아 개천을 건너다닐 정도였다고 한다.
정감록에는 난리를 피할 수 있는 열 곳을 지적한 소위 십승지가 있는데, 정감록에는 두루뭉실하게 표현해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없지만 남사고가 말했다는 십승지가 있다. 공주(公州)의 유구(維鳩)와 마곡(麻谷), 무주(茂州)의 무풍(茂豊), 보은(報恩)의 속리산(俗離山), 부안(扶安)의 변산(邊山), 성주(星州)의 만수동(萬壽洞), 봉화(奉化)의 춘양(春陽), 예천(醴川)의 금당곡(金唐谷), 영월(寧越)의 정동상류(正東上流), 남원(南原) 운봉(雲峰)의 두류산(頭流山), 풍기(豊基)의 금계촌(金鷄村) 등이다. 다만 남사고는 "왜 십승지를 찾으려 하는가? 십승을 산 속에서 찾지 말고, 마음 가운데서 찾아보라"는 글도 남겼다. 그러면서 십승지를 말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 시기(?)가 오면 산이 춤추고 독한 안개가 자욱하여 많은 사람들이 죽을 것이라며 산 가까이 가지 말라는 예언도 했다. 그렇지만 이를 현대 도시의 높은 빌딩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그의 마지막에 관한 이야기가 있다. 관상감에서 '태사성(太史星)'의 빛이 희미해졌다는 보고를 올리자, 남사고는 "그 별이 나의 운명이다." 했다. 그 1년 후인 1571년 세상을 떠났다.
생가는 울진군 근남면 수곡1리 누금마을에 있다. 성류굴에서 왕피천을 따라 약 2km 올라가면 있다. 울진군에서는 남사고 생가 터를 발굴하고 격암남사고유적지를 조성해 놓았다.
외아들 남응진이 요절하였기에 후손이 끊겼는데 이 때문에 외손자 기생(起生)이 봉사하였다고 한다.# 이후 남사고의 방계 후손들이 북평(근남면 구산1리 뒷들마을)에 별묘를 세워 제사를 지내다가 만호공파 21세손 남명옥(南命玉)이 그의 봉사손으로 입적되면서 후대를 이어 나가게 된다. 1965년에는 남명옥의 5대손 남우현(南禹鉉)이 그의 묘를 근남면 행곡리 구미마을 율곡에 옮겨 세웠다.#
3. 격암유록 위서설
저서로는 <남사고비결>과 <남격암십승지론>이 <정감록>에 수록되어 전한다. 그가 저술했다는 예언서 <격암유록>도 있는데 여기서는 일제강점기, 6.25 전쟁까지 예언되어 있다고 하며 대한민국의 많은 사이비 종교들, 특히 천부교 계통이 격암유록을 추종한다. 그러나 현대 한국인들이 접할 수 있는 격암유록은 현대에 남사고의 이름을 빌어 창작된 것이고 조선시대 인물인 남사고와는 무관하다는 것이 일반적인 정설이다.1995년에 출판된 <위대한 가짜 예언서: 격암유록>(김하원 씀, 도서출판 만다라)이란 책에서는 우리가 볼 수 있는 격암유록이 1970년대 중반에 어느 천부교 신자가 창작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 책의 주장을 대략적으로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 <격암유록>에 일제강점기에 들어와서야 나온 어휘들이 나오므로 조선시대 문서일 수가 없음.
- 중국에서 발행된 한문 성경의 구절을 그대로 따라 쓴 흔적이 보이므로 그리스도교계 인사가 관여함.
- 천부교 교리, 신앙촌 주변 지명을 표현하므로 천부교 인사가 지어냈음이 분명함.
- '성인이라고 불초자식이 없었는가'라는 구절을 보아, 천부교주 박태선의 장남 박동명의 여성 관련 추문이 알려진 1975년 이후에 완성됨.
- 국립중앙도서관에 77년, 천부교 신자인 이도은이란 사람이 격암유록을 기증했으므로 완성시기는 그 이전. (나무위키 천부교 항목 r106에서 일부 문장을 가져옴)
저자는 기증자인 '이도은'이라는 노인이 격암유록을 지어냈거나 최소한 그에 깊이 관여했다고 주장했다. 현대에 격암유록 해설서라며 출판되는 책들은 전부 이도은이 국립중앙도서관에 기증한 필사본을 대본으로 한다.
도은은 아호이고, 이도은의 본명은 이용세다. 이용세는 충남 서산에서 염전을 하면서 일종의 민박업도 했는데 그러다 보니 전국에 여러 사람들이 숙식을 했고 그들이 가진 다양한 책자와 자료들이 쌓였다. 개중에 김길환이라는 한학에 능한 이가 모인 자료들을 토대로 초고를 완성 후 이용세와 그의 아들 이종찬이 최종적으로 필사, 편집을 했다. 우습게도 한 천부교 신도는 이 위서를 가지고 박사학위를 따기도 했다. 이용세가 국립중앙도서관에 기증한 판본이 격암유록 창작 작업의 최종 결과물이다.출처
PD수첩에서도 1995년 9월 26일에 위 서적의 내용 및 여러 취재를 토대로 격암유록에 관해 보도한 적이 있는데 격암유록을 종교적 근거로 쓰던 여러 신흥종교 단체에서 난리가 났다는 후문이 있다. 자체적으로 PD수첩 내용을 반박하는 교육자료를 만들기도 했다는데 막상 <위대한 가짜 예언서>라는 서책 자체는 별로 알려지지 않았다.
<위대한 가짜 예언서>는 이미 오래 전에 절판되어 구하기 어렵다. 저자 김하원은 2004년에는 인언 출판사, 2008년에는 민중 출판사를 통해서 <격암유록은 가짜 정감록은 엉터리 송하비결은?>이라는 증보판 서적을 출판하였으나 이것도 지금은 절판되어 도서관이나 중고책방에서나 볼 수 있다. 참고로 송하비결은 계속 개정판(?)이 나오는 해괴한 예언서다. 즉 누군가가 만들어낸 위서, 그것도 역사가 불과 수십 년도 안 되는 명백한 현대의 물건이다.
참조: 격암유록의 실체를 밝힌다
다만 동서양을 통틀어 어떤 유서깊은 종교의 경전이든 어떤 유명한 예언서든 위경설, 위서설에 휘말리지 않는 경우가 없고, 그대로 전승되어 내려온 내용인지 아니면 후대에 첨언된 내용인지 의외로 논란에 휘말리지 않는 경우는 거의 보기 힘들다. 이슬람 코란의 경우도, 세기말 종말론으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노스트라다무스의 앙골모아 대왕도 그렇다. 현재 국립중앙도서관에 보관 중인 격암유록이 원본이 아니라는 증거는 많지만 어차피 후대에 관심을 가지고 이리저리 수집해온 내용들이라면 허점투성이겠고, 거기에 자기 의견까지 더해졌으면 뒤죽박죽이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위 여부를 가리려는 노력은 나름 가치가 있을 것이다.
조선시대에도 현재와 같은 논란이 있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영조가 "남사고라는 자는 어떤 사람인가?" 신하들에게 묻자, 윤순이 답하길 " 명종 대의 사람으로 천문지리에 모두 통달했다고 고금에 이름이 났습니다." 하였다. 서명균이 말하기를 "남사고의 비기가 세상에 전해지자 세상 사람들이 말을 덧붙이고 부회하여 와전된 것이 많습니다."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