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13세기를 전후하여 송나라에서 유래한 도교 경전이다.현대 중국과 대만의 도교에도 옥추경에 기반한 도교제례나 호신부적들이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조선시대부터 현대까지 '귀신을 뼈까지 녹여버리는' 삭사(鑠邪)의 영험한 경문이라 하여 무속인이나 주술 수행자들이 대단히 중요하게 여긴다.
옥추경의 중심신격은 구천응원뇌성보화천존(九天應元雷聲普化天尊)이라는 뇌신(雷神)이다. 호칭이 길어서 중국이나 대만에서도 뇌성보화천존(雷聲普化天尊), 또는 보화천존(普化天尊)으로 줄여서 부른다. 본 항목에서는 '보화천존'이라고 통일하였다.
2. 내용
옥추경은 크게 전반부와 후반부로 나뉘는데 전반부의 내용은 이러하다.천상에서 보화천존과 부하 뇌신(雷神)들이 모였는데, 뇌사호옹(雷師晧翁)이 무릎을 꿇고 절을 하며 가르침을 내려달라고 청한다. 그러자 보화천존은 자신이 1500겁 전에 득도하여 원시천존 앞에서 서원을 세웠다고 하면서 간단하게 도(道)를 설명하고, 자신의 명호(구천응원뇌성보화천존)를 소리 내어 부르면 자신이 나타나서 사람이 뜻한 바를 얻게 하리라 천명한다. 그러면서 곧 이어 옥추보경을 설하겠다고 말한다.
후반부에서는 보화천존이 인간세상에서 유용한 여러 가지 술법과 부적을 설명한다. 판본에 따라 구체적인 숫자는 다르지만 보화천존의 부하 신격이라는 여러 신장(神將)들의 그림과 이름도 수록하였다. 전반부의 마지막 부분에서 보화천존이 '곧 옥추보경을 설하리라.' 말하므로 후반부의 술법 부분이 옥추보경의 핵심임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 무속에서는 옥추경의 전반부를 천경(天經), 후반부를 지경(地經)이라 부른다. 우리나라에서 유통된 옥추경에는 조선 후기에 중국 옥추경에는 없는 부분이 합본되었는데 이 부분을 인경(人經)이라고 부른다. 인경은 보화천존에게 예배 드릴 때 사용하는 예참문(禮懺文)인데, 도교나 불교 의례의 형식을 많이 따왔다.
2.1. 옥추경의 기원과 신격
12세기 북송에서 시작한 도교 신소파(神霄派)는 옥추경을 뇌법(雷法)의 중요경전으로 삼았다. 하지만 이 경전이 정확히 언제 나왔는지는 모른다. 대략 12-13세기, 북송 말이나 남송 시기에 성립했다고 보는 설이 중국에서 주류이다. 1333년 원나라 시절 정일교(正一敎)의 39대 천사 장사성(張嗣成)이 <옥추경집주玉樞經集註>를 집필하여 옥추경을 대중에게 퍼트렸다. 정일교는 매일 기도의례에서 옥추경을 낭송하였다.옥추경의 저자가 누구인지도 알 수 없지만, 남송의 도사 백옥섬(白玉蟾 1134?-1229?)[2]과 관계가 깊다고 추측한다. 하와이대 종교학 부교수 포울 안데르센(Poul Andersen)은 아예 백옥섬 자신, 또는 그와 가까운 관계자가 옥추경을 썼다고 주장하였다.[3]
우리나라 학자 구중회는 2006년 저서 <옥추경 연구>에서 장사성이 1333년 또는 그 직전에 집필했다는 설을 주장하였다. 자신이 지어놓고도 마치 영험한 경전이 스스로 장사성에게 다가온 듯이 위장하여 배포한 위경이라는 것이다. 만약 옥추경을 1333년 장사성이 집필하였다면 옥추경은 신소파가 아니라 정일교의 경전이라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에도 구중회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 학자들이 있으므로 확언할 수는 없다.
중국에서는 옥추경의 경문에 정일도사(正一道士)란 말이 있으므로 정일교와도 관련이 있음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저자가 누구라고 콕 찝어 말하지는 않는다. 아무튼 12-13세기, 늦어도 14세기 초에는 옥추경이 나왔고 신소파/정일교와 관계가 있다고 말하면 틀리지 않는다. 게다가 신소파는 정일교에서 갈라진 파이기 때문에 비슷한 부분이 많다.
옥추경의 핵심 신격이 구천응원뇌성보화천존(九天應元雷聲普化天尊)인데 약칭하여 '뇌성보화천존(雷聲普化天尊)', '보화천존(普化天尊)이라고 부른다. 경문과 주석에서는 보화천존이 1500겁 전에 득도한 존재로 신소옥청진왕(神霄玉淸眞王)의 화신이고, 옥청진왕은 원시천존의 동생이라 설명하였다. 이렇듯 보화천존은 비록 신소파에서 생각하는 최고신은 아니지만, 뇌부(雷府)를 주관하는 존재로 대단한 고위신격이었다.
옥추경에는 보화천존이 자신의 명호를 부르면 온갖 도움을 받으리라고 설명하는 구절이 있다. 12세기 남송에는 '구천응원뇌성보화천존'이라는 명호 열 글자를 십자경(十字經)이라 하고 열심히 낭송하면 환난과 재앙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이야기가 돌았다. 바보라도 십자경은 외울 수 있으므로 관련 신앙이 송나라 민중 사이에서 크게 유행하였다.
보화천존이라는 신격이 어디서 유래했는지는 말이 다르다. 명말청초에 씐 서적 <역대신선통감曆代神仙通鑒>은 황제(黃帝) 헌원씨가 득도하여 하늘로 올라가 보화천존으로 봉해졌다고 하였고, 명나라 때 나온 소설 <봉신연의>에서는 강태공이 문중을 보화천존으로 봉했다고 서술했다. 이런 옛날 설을 치워두고 현대적인 설을 이야기하자면, 중국 광동성 레이저우(雷州) 반도, 또는 감숙성의 토착 뇌신이 흡수되어 옥추경의 주신이 되었다고도 한다.
보화천존의 생일이 음력 6월 24일이라 하여 명나라 초까지만 해도 이날 성대하게 제사를 올리곤 하였다. 또한 명나라 정통正統 10년(1445)에 나온 도교경전 모음집 <정통도장正統道藏>에도 옥추경을 수록하였다.
<명사> 志 26, <청계만고(青谿漫稿)> 卷 11에 따르면 홍치 원년(1488) 예과급사중(禮科給事中) 장구공(張九功)이 이렇게 주장하였다. 나라의 큰 일에는 제사와 군사가 있는데, 명나라가 국가제례로 (유교적인) 제사 외에도 석가모니나 보화천존 같은 올바르지 못한 신격에게도 제사를 올리니 이는 큰 잘못이라는 것이다. 장구공은 특히 보화천존을 강경하게 의식하였다. 그리하여 명 조정은 당시 명나라가 국가제례를 올리던 여러 신격들을 검토하여 보화천존을 비롯해 여러 신령들을 국가제사에서 배제하였다.
명나라 왕세정(王世貞 1526-1590)은 옥추경이 당나라 말기의 도사 두광정(杜光庭 850-933)이 지은 위경(僞經)이라 주장하였고, 조선의 유학자들 중에서 옥추경에 비판적인 이들 역시 왕세정의 견해를 따랐다. 현대로 들어와 중국 학자 마수톈(马书田)은 저서 <중국도교제신中国道教诸神>(1996)에서 보화천존을 '호법신장' 챕터에서 설명하였다. 아마도 이 신앙이 사람에게 이득이 되는 기복성이 강하기 때문인 듯하다.
하지만 현대 중국/대만의 도교 신앙에서 옥추경이나 보화천존의 위상은 전성기만은 못할지언정 여전히 상당히 높은 듯하다. '구천응원뇌성보화천존'이라는 열 글자를 십자천경(十字天經)이라고 부르며 패에 전서로 새겨 호신부(護身符)라고 판매하기도 하고, 유튜브로 옥추경을 낭송하거나 설명하는 영상을 올리기도 한다. 보화천존을 뇌조(雷祖)라고 부르며[4] 신상을 만들고 도관 안에 뇌조전(雷祖殿)이란 건물을 세워 안치하기도 한다. 구천뇌조대제(九天雷祖大帝)는 본디 다른 신격이지만, 오늘날 중국이나 대만의 도교 신자들 중 많은 이들이 보화천존과 뇌조대제를 같은 신격의 다른 명칭으로 여긴다.
2.2. 한국에서 옥추경의 역할과 변화
이 땅에 옥추경이 언제 전래되었는지는 모르지만 아무리 늦어도 14세기 고려 말에는 전해졌을 것이다. 조선 시대에는 소격서에서 도교의례를 맡았다.[5] 16세기에 소격서가 혁파된 이후 민간으로 퍼졌다고 추정한다. 그러나 옥추경의 경문만 퍼지고 소격서에서 사용하던 의례의 법식은 잊힌 모양이다.소격서가 사라진 뒤에도 사대부나 왕실 사람들 사이에서 옥추경은 도가의 영험한 책으로 통하였다. 성리학이야말로 가장 올바른 정도라고 교육받으면서도 옥추경의 위명에 귀가 솔깃했던 것이다. 16세기 허균이 지은 소설 <장산인전張山人傳>에서 주인공 장산인은 <옥추경>과 <운화현추運化玄樞>란 책을 수만 번 읽은 끝에 귀신을 부리고 요괴를 내쫓는 신통력을 얻었다. 한중록에 따르면 영조 28년(1752) 겨울에 사도세자는 옥추경을 공부하겠다고 읽어보고는 정신이상이 생겨서 보화천존이 눈 앞에 보인다고 환각을 호소했고 '옥추'라는 단어만 보아도 겁에 질려 몸을 떨었다고 떨었다고 한다. 혜경궁 홍씨는 한중록에서 옥추경을 두고 '원수'라고 표현하였다. 옥추경을 비롯한 도가의 경문들은 경국대전주해부터 전록통고, 대전통편까지 확인된다.[6]
사대부나 왕실에서도 이러한데 민간에서는 오죽했을까? 근대화 이전에는 이른바 '경쟁이'들을 불러 옥추경을 낭송케 함으로써 집안에 깃든 잡귀를 물리치고 우환을 없애려는 의례가 대중 사이에서 흔했다. 경쟁이들은 <천지팔양신주경天地八陽神呪經>[7]이나 <천수경千手經> 같은 여러 경문을 외웠지만, 가장 기본이자 가장 주력으로 삼는 것은 옥추경 하나였다.
19세기 초에 실학자 이규경(李圭景)은 명나라 왕세정이 옥추경을 두광정이 지은 위경이라 주장했음을 그의 역작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 인용하였다. <오주연문장전산고> 경사편2 도장잡설 편에서 옥추경의 이본들이 있음을 기록하였다. 누군가가 주장하기를 시중에 돌아다니는 옥추경은 '소옥추경'이요, 따로 '대옥추경'이 있다고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규경도 대옥추경 실물을 보지는 못하였는데, 대옥추경을 이야기하는 자가 입으로만 허풍을 떨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규경은 자신이 할 수 있는 만큼 옥추경의 판본들을 구하여 비교해보았던 모양이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도교 문서에 포함된 옥추경과 불교 문서에 포함된 옥추경이 따로 있는데, 두 판본이 서로 내용이 달라 어느 쪽이 진짜인지 판별하기가 어려웠다. 이규경 시절까지만 해도 조선에서 옥추경의 판본들이 지금보다 더 다양하게 유통되었고 내용도 상당히 차이가 컸던 듯하다.
우리나라에서 통용된 옥추경의 옛 판본들은 대개 사찰에서 목판인쇄로 찍어낸 것이다. 명백한 도교경전을 절에서 인쇄했을 정도니 수요를 알 만하다. 이규경이 저서에서 불교 문서에 포함된 옥추경이 있다고 언급했으니, 그 또한 사찰에서 목판인쇄로 찍어낸 옥추경을 접해보지 않았을까.
<옥추경 연구>(2006)에 따르면 옥추경은 민간에 전승되면서 판본이 여러 형태로 변화하였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전해지는 옥추경의 판본들 중 대표적인 것은 무등산 안심사본(安心寺本, 1570), 진안 반룡사본(盤龍寺本, 1612), 묘향산 보현사본(普賢寺本, 1733), 그리고 계룡산본(鷄龍山本, 1888) 등이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 퍼진 옥추경은 중국 판본과 비교하면 일부 장이 빠진 파본이고, 아마도 구한말 무렵에 누군가가 내용을 덧붙였다. 일제강점기에는 누군가가 옥추경에 기존에 없던 옥추령부(玉樞靈符)라는 부적 도안을 추가했는데, 여기에는 일본 연호 다이쇼(大正)가 들어가서 헛웃음이 나온다.
원불교의 창시자 소태산 또한 1920년대에 교도들에게 옥추경을 읽게 하였다. 비슷한 시기에 크게 일어난 증산계 종교와 비교해도 독특했지만, 조선시대부터 내려온 '도꾼'들의 방식을 변형한 것이라 한다.
증산 계통의 종교인 태극도(太極道)[8]의 창교주 정산(鼎山) 조철제(趙哲濟)는 1925년 (오늘날 전북 정읍시 태인면 태흥리에서) 영대(靈臺)라는 건물을 완공하며 강증산을 구천응원뇌성보화천존강성상제(九天應元雷聲普化天尊姜聖上帝)라는 명칭으로 모셨다. 당시 조선인들에게 친숙했던 옥추경의 권위를 강증산과 연결 지은 것이다. 강증산이 1909년 음력 6월 24일에 사망했는데, 음력 6월 24일은 보화천존의 탄신일이라고 전하는 날이기에 더욱 관련 짓기가 쉬웠을 터이다. 태극도가 대순진리회의 모체 격인 종교단체이기 때문에 대순진리회 신자들도 이 내용을 받아들이는데, 호칭이 너무 길기에 흔히 '구천상제'라고 줄여 부른다.[9]
유튜브에도 옥추경을 낭송하거나 관련 의례를 설명하는 영상들이 여럿 올라왔다.
충청도 앉은굿에서는 지금도 옥추경의 보화천존과 부하 신장의 이름을 한자로 써서 내걸고 옥추경을 낭송하기를 매우 중요하게 여긴다. 현대 한국의 무속에서도 무속인 치고 옥추경을 안 접해본 사람이 없다고 할 정도로 대중적이고 또한 중요하다.
2015년 개봉작 영화 사도에서 작중 맹인박수 역을 맡은 배우 정해균이 무속인에게 옥추경 독경법을 배워서 읊었다. 역시 2015년 개봉한 영화 검은 사제들에서 제천법사가 구병시식(救病施食)을 하면서 읊은 경문 또한 바로 옥추경이다.
여담으로 주문을 한문으로 운율을 맞춰 읽으면 상당히 분위기가 있어서 선호된다고 한다.
3. 참조
- 신동아
- 교토대학 인문과학연구소 소장 만력 47년(1619) 판본 옥추경#
- 광서 4년(1878) 판본 옥추경#
- 한국학중앙연구원 소장 옥추경01 02
- 묘향산 보현사본 옥추경(1733)01[10] 02[11] 03[12]
- 도쿄대학 오구라문고 소장 옥추경(1840)#
- 계룡산본 옥추경 48신장도#
- 옥추경 신장도 관련 연구논문들01 02
[1] 설(說) 자는 들어가기도 하고 빠지기도 한다.[2] 백옥섬은 자신이 도교 남종(南宗)의 5번째 조사라고 주장했지만 사실이라고 하기엔 의심스러운 구석이 있다. 그의 생년 또한 불확실해서 1134년이라고도 하고 1194년이라고도 한다. 신소파의 가르침을 받았을 가능성이 농후하다.[3] 출처는 대만의 한학연구센터(漢學研究中心)에서 2009년 5월에 강연하며 쓴 글 <옥추경과 도교도상학(玉樞經和道教圖像學)>[4] 꼭 보화천존만이 아니라 번개와 관련된 다른 신격도 두루 뇌조(雷祖)라고 부르고 신앙한다.[5] 관리들을 뽑을 적에 옥추경을 시험과목으로 삼았을 정도였다.[6] 도류(道流) 금단(禁壇)을 암송하고, 영보경을 읽으며, 연생경, 태일경, 옥추경(玉樞經), 진무경, 용왕경 중 3경을 선택하여 의미를 설명하게 한다.[7] 중국 당나라 때 나온 불교의 위경. 도교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하는데, 우리나라 무속에서는 재앙을 없애는 경전으로 통한다.[8] 일제강점기에는 무극도(无極道)란 교명을 사용하였으나 일제에게 해산당하고, 광복 이후에 교단을 재건하며 '태극도'라고 바꾸었다.[9] 조철제가 강증산을 보화천존과 연결 지음은 옥추경의 권위를 입히려는 의도였겠지만 현대에는 오히려 관련 교단에게 문제가 되었다. 옥추경 내용에 따르면 보화천존은 고위신격이긴 하지만 최고신은 아니다. 만약 강증산이 옥추경의 보화천존이라면 원시천존 같은 도교 최고신과는 무슨 관계가 되는가? 원시천존의 하위신격이란 말인가? 이 문제가 대순진리회 교단을 괴롭혀서 교단이 옥추경의 학술연구를 지원한다.[10]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본[11] 와세다대학 도서관 소장본[12] 오사카 부립 나카노시마 도서관 소장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