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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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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밀어 பௌத்த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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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핵심 교리
2.1. 무아(無我)2.2. 변(變)2.3. 탐진치(貪瞋癡)2.4. 명상(冥想)2.5. 명색(名色)2.6. 오온(五蘊)과 행위(카르마)2.7. 연기(緣起)2.8. 공(空)2.9. 유식(唯識)2.10. 이타심2.11. 상징과 (神)2.12. 결단2.13. 현실2.14. 종합
3. 주요 특징4. 각종 오해와 통념들5. 분파6. 역사
6.1. 전파6.2. 분포 관련 역사6.3. 동아시아 불교 전파와 발전
7. 불경
7.1. 근본 불교7.2. 부파 불교7.3. 대승 불교
8. 성지9. 붓다10. 대한민국에서의 불교11. 대한민국 불교 유튜브 채널12. 관련 용어
12.1. 붓다, 승려 등을 뜻하는 용어12.2. 교리 관련12.3. 수행 관련
13. 관련 인물
13.1. 석가모니와 불제자13.2. 고승 및 불교 사상가
13.2.1. 인도13.2.2. 중앙아시아13.2.3. 중국13.2.4. 한국
13.2.4.1. 근현대
13.2.5. 일본13.2.6. 베트남13.2.7. 유럽13.2.8. 아메리카 대륙
14. 부처들과 보살들, 그 외의 신들15. 불교에 영향을 받은 종교와 사상(가)
15.1. 종교15.2. 사상(가)
16. 불교 신자17. 타 종교 간의 관계18. 기타19. 관련 문서

[clearfix]

1. 개요

불교(佛敎)석가모니의 가르침을 따르는 종교[4]이다.

종교라는 한자어를 맨 처음 만들어낸 종교이기도 하다. 이는 '유교, 도교, 경교' 등은 모두 부차적인 가르침이고 불교가 으뜸 가는(宗) 가르침(敎)'이란 뜻으로 표현한 데서 시작되었다. 흔히 그리스도교, 이슬람교, 힌두교와 함께 세계 4대 주요 종교로 묶이나 4대 종교 중에서는 교세가 약하다.[5]

2. 핵심 교리

[ruby(自,ruby=자)][ruby(歸,ruby=귀)][ruby(依,ruby=의)] [ruby(法,ruby=법)][ruby(歸,ruby=귀)][ruby(依,ruby=의)] [ruby(自,ruby=자)][ruby(燈,ruby=등)][ruby(明,ruby=명)] [ruby(法,ruby=법)][ruby(燈,ruby=등)][ruby(明,ruby=명)]
"스스로에게 귀의하고 법에 귀의하라. 스스로를 진리의 등불로 삼아, 그 진리에 의지해 살아가라.”
대반열반경에 실린 석가여래의 마지막 설법(상세내용)[6][7]

2.1. 무아(無我)

'아트만'이 없다는 의미의 산스크리트어 an-atman 의 번역어로 불교에서 가장 오래된 교리이다.[8] 불교의 가르침의 시작이자 모든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숫타니파타에서 가장 오래되었다는 4장에도 언급된다.
‘이것은 내 것이다.’ 또는 ‘이것은 어떤 다른 자의 것이다.’ 하는 생각이 없다면,
내 것이라는 것이 없으므로, 그는
‘나에게 없다.’고 해서 슬퍼하지 않습니다.
숫타니파타 4장의 15. 폭력을 휘두르는 자에 대한 경(attadanda sutta)

'내 것'이라고 생각한 것을, 우연한 사고나 세월이 변함에 따라 "내 마음대로 할 수 없을 때" 괴로움이 생긴다.

우리는 내 몸을 항상 '내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사람은 언젠가는 죽으며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다. 건강뿐만 아니라 가족, 친구, 재산, 사회 등의 모든 것이 마찬가지이다. 내 마음대로 되길 원하지만, 현실은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들이 대다수이다. 한때는 '내 것' 이었던 것들도 언젠가는 '내 것'이 아니게 된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된다.

언젠가 상황이 변해, 보내 주어야 할 때가 오면, 붙잡지 않고 보내 줄 수도 있어야 한다는 것.

2.2. 변(變)

시간이 가면 모든 것은 변한다. 모든 것이 변하기 때문에 '내 것' 또한 변해가며, 변해가는 '내 것'에 괴로워한다. 삼법인에서 제행무상, 아함경의 '무상-고-무아' 등이 여기에 해당. 근본 불교에서도 무아와 연결하여 기본적으로 설명하였다. 이후 연기에 적용되어 여러 변화의 기본이 된다.

2.3. 탐진치(貪瞋癡)

괴로움에 빠지지 않기 위해 경계해야 될 3가지 악덕인 '탐욕', '성냄', '어리석음'을 말한다. 이 역시 가장 오래된 가르침 중 하나이다. 숫타니파타에서 그 원형을 알아 볼 수 있는데 요약하자면
차례대로, '가진 것'에 대한 집착, '견해'에 대한 집착, '결점(완벽)'에 대한 집착, '더 좋은 것'에 대한 집착이다.[18] 여기서 앞의 3가지가 탐진치(탐욕, 성냄, 어리석음)에 해당한다.

2.4. 명상(冥想)

숫타니파타에서, 괴로움을 벗어나기 위해 할 수 있는 궁극적인 방법이며 사성제의 결론이다.[19] 지각[20]에 대한 지각도 여의고, 지각에 대한 잘못된 지각도 여의고, 지각이 없는 것도 아니고 지각이 소멸된 것도 아닌, 이러한 상태에 도달하는 것. 이로 인해 지각된 물질적 형상이 소멸한 상태를 '적멸'이라고 부른다.

사람들은 어떤 평범한 사건이 발생하면 연상작용을 통하여 이에 대한 생각을 확대 재생산한다. 근본 불교에서는 이렇게 '왜곡된 방식으로 생각이 계속 확장되어 나가는 것'을 희론[21](Papañca)이라고 한다.[22] 종종 사람들은 희론에 필요 이상의 의미를 부여하며, 이는 실제 입은 피해보다 사람들을 더 과도하게 걱정하고 괴로워하게 만든다. 쓸데없는 잡생각이라고도 볼 수 있는 이러한 희론을 경계하는 연습이 명상이라 할 수 있다.

숫타니파타 5장에 따르면, 어떤 것을 느낄 때 '좋아하는 것'을 두지 말며, 내가 좋아하는 것만 '하고 싶다'고 '매달리지' 마라. 내 마음이 무엇을 하는지 감정의 흐름을 끊임없이 경계해서, 이윽고 어떠한 것을 보더라도 '좋다'거나 '나쁘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을 '깨달았다' 고 말한다.

다만 '호불호를 두지 않는 평정심'에 대해서 강조하는 이러한 명상은 '이래도 되고 저래도 되니 아무렇게나 하자'는 상대주의적 결론으로 나아가서는 안 되며,[23] 삶이 괴롭다고 여겨질 때 이 감정을 극복하기 위한 방편으로써의 명상이 되어야 한다. 이렇기에, '호불호'를 버리고 나면은, '호불호를 버리고자 하는 마음'마저 버려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2.5. 명색(名色)

'명색'은 팔리어로 nāma-rūpa. '정신과 형체'. 즉, 형체에 대한 정신적인 작용을 말한다. 한자로는 '형체에 이름짓다'는 뜻. 물질에 뜻을 부여하는 것을 말한다. 넓은 의미에서 '물체에 주의를 기울이다', '물체에 관심을 가지다' 정도로 해석된다.

숫타니파타 4장 투쟁과 논쟁의 경에서 원시적인 연기[24]와 사성제를 설명하는데 이 때 괴로움(부정적 감정)의 가장 근본 원인이 바로 명색(名色) 이다.

즉, 어떤 물질에 우리가 의미(또는 이름)를 부여하면 그 때부터 그것에 대한 '감정'이 생긴다는 것. 행복에 의미를 부여하면 행복해지고, 불행에 의미를 부여하면 불행해진다. 우리가 감정적으로 지나치게 괴로울 때, 스스로가 '불행'에 의미를 부여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되돌아 볼 필요가 있다.

2.6. 오온(五蘊)과 행위(카르마)

우파니샤드에서 전래된 오래된 가르침[25]이 상좌부 불교에 흡수되어 전승. 근본 불교에서 우파니샤드의 아트만(자아)을 부정하므로써 나온 개념이 안-아트만[26]. 즉, '무아'이다. 무아를 강조한 근본 불교에는 '아트만'의 개념이 잠시 사라졌다가, 근본 불교의 뜻이 희석되자 상좌부 불교에서 다시 '오온'과 '카르마'라는 개념으로 부활하였다. 여기서 아트만이란, '절대 변하지 않는 자신만의 영혼'이 있다는 것을 말한다. 영혼(아트만)의 특징은 '자신이 쌓아온 경험을 기억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영혼(아트만)은 '끊임없이 생성 소멸하는 몸'을 빌려서 윤회를 하며 천당과 지옥을 넘나들게 되는데, 이는 '자신의 행위(카르마)'에 따라 정해지게 된다.

윤회, 업보, 의 유무, 지옥천당의 존재는 아트만(영혼)의 개념이 있어야 성립하는 것이며, 아트만은 본디 무아(안-아트만[27])의 개념과 공존할 수 없는 것이지만, 상좌부 불교 시대에 이르러 두 개념은 공존하여 모순을 만든다. 이렇기 때문에 상좌부 불교에서는 아트만이 있어야 개념이 성립하는 윤회를 받아들이면서도, '안-아트만'을 깨달아서 해탈하면 윤회에서 벗어난다는 모순된 해석을 하게 되는 것이다. [28][29]
atman [ruby(an,ruby=없다.)]-[ruby(atman,ruby=아트만)]
영혼, 나, 아트만 무아 (안아트만)
상좌부 불교에서의 '나[30]'는 어떻게 정의되고 응용되는지 살펴보면,

상좌부 불교에서 '나'라는 것은 나의 몸(색), 나의 느낌(수), 나의 기억(상), 내가 했던 것들(행), 나의 생각(식)들로 이루어 지는 것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핵심은 경험과 기억과 행위와 사고 들이 "쌓여서(蘊)", '나'라는 인격과 정체성을 만들어 나간다는 것이다. 이러한 색수상행식을 "다섯가지 쌓임, 즉 오온(五)"이라 하는데, 오온 = 아트만(영혼: 수,상,행,식) + 육체(색) 라고 볼 수 있다. 물론 상좌부 불교에서도, 이런 오온으로 이루어진 '나(아트만)'는 가상이며 이런 오온이 실체가 없는 것을 알아 '무아'를 깨달으라고 말을 하지만, 사실 상좌부 불교의 가르침에 해당하는 고집멸도의 사성제팔정도에는 도리어 '나'라는 아트만의 개념이 있어야만 성립되는 '업보' 개념을 포함하고 있다는 데서 모순이 생긴다.

우선 카르마에 따른 업보를 살펴보자. 업보란, 오온으로 이루어진 '내'가 지금 '올바른 행동(카르마)'들을 행한다면, 이 '올바른 행동'들이 쌓여 미래의 '나(자아)'를 만들게 되고, 이렇게 '올바른 행동'들로 만들어진 '나(자아)'라는 인격은, 올바른(좋은) 생각을 하여 괴로움을 쉽게 이겨낸다는 것. 반대로 지금 '내'가 괴로운 것은 과거의 내가 올바르지 못한 행동들을 했기 때문이다.[31]

'현재의 (어떤) 행위가 쌓여서, 이것이 미래에 영향을 미친다'는 업보(카르마)의 개념은 사성제팔정도에서 찾아볼 수 있다. 사성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괴로움의 원인'이 무엇인가인데, 고집멸도에서 '집'이 바로 그것이다. 여기서 '집'은 집착의 '집'이 아니라, 모을 집(集)이다. 팔리어로는 'samudaya': sam- 쌓이다. udaya 일어나다. 합쳐서 해석하면, '쌓여서 일어나다.' 즉, 괴로움의 원인은 (행위karma가) 쌓여서 일어나는 것을 말한다. '' 이는 당연히 오온과 업보의 개념에 해당된다. 그렇다면 상좌부 불교에서 오온과 업보의 문제(괴로움)를 풀어주는 방법인 팔정도는 어떠한가. 팔정도의 정언, 정견 등에 보이는 正은 팔리어로 접두사 sam-, samma- 에 해당되며 sam-의 뜻은 '쌓는다'이다. 따라서 팔정도의 정언, 정견 등은 올바른 말을 쌓고, 올바른 것을 보는 것을 쌓아라는 것. 이는 마찬가지로 '(어떤) 행위가 쌓인다'는 오온과 업보(카르마)의 개념이다. 이 둘을 종합하면, 행위(경험의 축적)를 통해 '내(아트만-괴로움)'가 만들어지고, 이러한 '나'는 '올바른 행위'를 쌓음으로써(팔정도), 해결된다는 것. 즉, 올바른 말과 생각, 올바른 생활과 노력 등 팔정도에서 말하는 대상은 '나'일 수 밖에 없고, '나'는 아트만을 의미하므로, 아트만이 없어야 되는 '무아' 개념과 모순을 이룬다는 것이다.[32] [33]

이 모순된 관점('무아를 말하면서 올바른 나를 또한 강조')은 상좌부 불교 이후의 대승 불교밀교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물론 "팔정도에서의 '올바름'이란 '선악'을 말하는 것이 아니며, 여기서 '올바름'은 해탈(무아)을 이루려는 방향을 의미하기 때문에, 무아와 모순되지 않는다" 또는 "그것은 오해이고 사실 단견[34]과 상견[35]을 부정하며 연기의 원리로 현상을 이해하는 것이다"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불교에서는 윤회를 말하고 있고 그 윤회가 '전생'과 '내생'을 인정하는 한, 이러한 윤회를 하기 위해서는 그 '윤회의 대상'인 아트만(영혼)의 존재를 인정해야 하기 때문에, 아트만이 없다는 무아의 정의와 논리학적으로 모순되는 지점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36] 하지만 이러한 모순에도, 과거의 행위들이 쌓여 현재 '나'의 상태를 만든다는 카르마(업보)의 개념은, 사람은 괴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올바른 행위'를 쌓아 '올바른 나'를 쉬지 않고 만들어야하며, '나쁜 행위'를 쌓으면 '나쁜 나'가 만들어져 괴로움에 빠지기 때문에 경계해야 한다는 '인과응보'의 개념으로 가치를 지니며 지금까지 불교에 이어져 오고 있다.

2.7. 연기(緣起)

결과에 따른 원인. 불교에서는 '괴로움'의 원인을 잇따라 추측해보는 과정. 따라서 연기는 괴로움의 원인을 알고자 하는 모든 승려들의 연구처이기도 하다. 공(空)개념도 여기에서 나왔다.

숫타니파타에서 가장 오래되었다고 추측되는 4장과 5장인 원시 숫타니파타에서의 연기는 명색 - 접촉 - 쾌불쾌 - 욕망 - 좋아하는 대상(집착) - 투쟁과 논쟁 순이며, 근본 원인은 명색에 있다. 명색은 '물질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을 뜻하며, 물질에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괴로움이 시작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즉, 어떤 것에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싸움과 슬픔이 생기고, 자만하거나 남을 헐뜯게 되어 괴로움에 빠진다.

반면, 상좌부 불교의 12연기[37]에서는 그 근본 원인이 '무명과 행'이 된다. 어리석은 생각(무명)과 행동(행)으로 인해서 '올바른 생각과 행동'을 쌓지 못하게 되므로 괴로워진다.

2.8. 공(空)

모든 개념은 '서로가 서로에게 인과[38]에 의해서 의존적'이므로[39], 한 극단은 혼자 존재할 수 없으며 다른 극단과 함께 존재한다. 즉, "양극단은 공존한다"라는 것이 '공(空)'이다. 여기서 '공'은 양극단을 부정하자는 것이 아니다. 양극단 각각의 존재를 인정하되, 양극단은 공존하므로 "양극단을 하나로 이해해보자"라는 것이다. (나누어서 봐야 되는 것이 아니라 합쳐서 보자는 것)[40][41][42]

또한 공(空)은, 모든 가치적 판단이 상대적 기준에 의해 달라지므로 '모든 게 의미가 없다'라는 뜻이 아니라, 상대적 기준에 따라 다르게 볼 수 있으므로 '그 어떤 것도 다 될 수 있다'라는 의미를 지닌다. 어떤 가치적 판단이나 개념이든 간에, '정해져 변하지 않는 것'으로 보지 말고, '무엇이든지 될 수 있는 가능성'으로 봐야 된다는 것. 불교를 허무주의로 보는 것은 공(空)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공(空)은 산스크리트어로는 '순야타(Śūnyatā)'라고 하며 "부풀어 속이 비어 있다"는 뜻이다. 비어 있기 때문에 물을 담을 수 있고, 주스를 담을 수 있으며, 우유를 담을 수 있고, 술을 담을 수 있다. 우리는 그릇이 비어 있다고 '이 그릇은 의미 없어'라고 말하지 않는다. 비어 있기 때문에 '의미가 없는 것'이 아니라, 비어 있기 때문에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라는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43]

삶이 괴로울 때, 사소한 행복도 공존해 있다는 것을 안다. 그리고 이 행복은 지금보다 커질 것이라는 것도 안다. 곧, 희망이다. 반대로 삶이 행복할 때, 괴로움도 공존해 있음을 알고, 언젠가 커질 이 괴로움을 통해 거만해지지 않고 앞선 미래를 준비하는 자세를 가진다. 우리 삶에서 괴로움만 남아 있다면 그 삶은 얼마나 힘든 것인가. 단편적 극단에서 괴로워하거나 그저 즐거워하는 것에서 벗어나, 괴로움의 이면에 행복이 공존해 있다는 것을 안다면, 삶을 이해하게 되고 또한 그 자체로써 위로가 되는 것이다.

물론 이 개념은 삶이 괴로울 때 '혹시 내 생각이 극단에 놓여 있는 것은 아닌가?' 하며 다른 생각을 살펴보는 데서 그 뜻이 있는 것이지, 이래도 되고 저래도 되니까 내 마음대로 할 것이라며 극단적인 행동하는 것을 합리화하기 위해서 사용되어서는 안된다. 우리가 우리의 감정을 컨트롤할 수 없이 너무나 괴로울 때, 생각의 지평을 넓혀서 여러가지 대안들을 살펴보자는 취지이며, 따라서 '포기'나 '체념'을 뜻하는 것도 아니라는 것에 유의해야 된다.

'반야'도 '공(空)'과 비슷한 개념이다. 산스크리트어를 그대로 직역하자면, '분별하지 않는 지혜'(나누어 보지 않는 지혜)를 뜻한다.

2.9. 유식(唯識)

오직 생각의 문제라는 것. '모든 것은 생각하기 나름이다.' 일체유심조를 말한다. 모든 것은 마음 먹기에 달려 있다.

우리가 정보를 받아들일 때 눈, 코, 귀, 입, 피부 등을 통해 시각, 촉각, 후각, 청각, 미각 등을 느끼고 생각하게 된다. 이러한 정보들은 왜곡 될 수 있다는 것이 '유식'의 핵심이다.

예를 들면, 길가던 나그네가 순간 뱀을 보고 깜짝 놀라고 무서웠는데, 다시 보니 노끈이었다는 얘기가 있다. 무서운 감정은 '잘못된 정보'가 들어왔기 때문이며, 마찬가지로 부정적 감정들의 대부분은 왜곡되고 확대-재생산되어 우리들을 괴롭힌다. 이러한 '왜곡된 정보'가 괴로움의 원인이 되며, 왜곡된 정보로 인해 무서운 감정이 들었다는 것을 '아는 것'이, 괴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한 해결책이다.

이렇게 내가 보고 느끼고 생각하는 것이 내 마음을 바꾸기도 하고, 또한 내 마음이 내가 보고 생각하고 느끼는 것을 바꾸기도 하므로, '모든 것은 마음의 문제'라고 말하였다.

2.10. 이타심

이타심은, '나'와 '남'이라는 양극단을 하나로 이해하는 공(空) 개념에서 비롯되었다. 서로가 서로에게 인과로 의존하므로 '나의 이익은 남을 이롭게 하는 데서 나오게 된다'는 자리이타(自利利他)의 개념이 만들어졌고, 여기에서 다시 자비(慈悲)라는 개념이 생겼다.

이타심을 강조하는 것은 상좌부불교와는 차별되는 대승불교의 특징인데, 물론 상좌부불교 내에서도 이타심을 강조하는 부분이 많지만, 대승불교는 유독 이 이타심을 상좌부불교와는 다른 차별점이라고 특정지었다. 비교하자면, 상좌부불교에서는 '개인'의 올바른 수행을 강조하는 팔정도가 주된 가르침이지만, 대승불교에서는 '나'의 깨달음을 추구하면서도 '남'을 적극적으로 이해하고 공감하려는 수행을 하자는 '자비'가 주된 가르침이 된다.[44]

이러한 이타심의 수행 방법은 대체로, '남이 나를 어떻게 대하고 있는가'에 집중하지 않고 '내가 남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에만 집중한다. 왜냐하면 '남이 나를 어떻게 대하고 있는가'에 집중하는 순간, '남의 반응'에 맞춰서 대응하는 '나'를 생각할 수밖에 없고, 이는 '나'와 '남'을 구별하게 하는 '분별심'을 유발하기 때문이다. 이것을 더 쉽게 말하자면, 남이 나를 싫어하면 나는 그러한 남을 싫어하고, 남이 나를 좋아하면 나는 그러한 남을 좋아하게 된다면, 이것은 '너는 너, 나는 나'를 더 명확하게 구분 짓는 사고방식에 지나지 않으므로, 이는 서로 다른 양극단을 하나로 이해하는 '공(空) 개념'과 일치하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대승불교에서는 앞서 말했던 '내가 남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에 대해서만 초점을 맞춰야 된다고 강조한다.[45]

이러한 점은 대승불교의 대표적인 수행법인 '바라밀'과 '사무량심'에서도 나타난다. 바라밀에서는, '남을 아무런 조건 없이 도와주는 보시'와 '남의 모욕적인 반응에도 평정심을 가지는 인욕'을 통해, '남의 반응과 상관없이 남을 대하는 나의 자세'를 강조하고 있는 '이타심'의 특징을 확인할 수 있다.[46]

또한 '4가지 측정할 수 없이 큰 마음가짐'을 뜻하는 사무량심은 자(慈), 비(悲), 희(喜), 사(捨)의 4가지 수행법이 있다. 자(慈)는 친절한 얼굴로 상대방에게 즐거움을 주고자 하는 마음을 뜻하고, 비(悲)는 상대방의 불행에 같이 슬퍼하는 마음을 뜻하며, 희(喜)는 상대방의 성공에 같이 기뻐하는 마음을 뜻하고[47], 사(捨)는 상대에게 이러한 마음을 되돌려받지 못하거나 이러한 나를 남들이 어리석다고 비난해도 평정심을 가지는 것을 말한다. 즉 상대방에게 열린 마음으로 다가서서, 상대의 아픔에 같이 슬퍼하고, 상대의 성공을 같이 기뻐하며, 내가 준 마음을 남이 나에게 되돌려주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평정심을 가지는, '공감'의 이타심을 말하는 것이다. 여기서도 '남의 반응과 상관없이 남을 대하는 나의 자세'를 강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 이것이야말로 '자비'로운 마음이라 할 수 있으며, 이러한 마음을 가지는 것은 대승불교의 '공(空)사상'을 몸으로 직접 실천하는 것이 된다. 이를 통해 '나'의 괴로움을 잊는 것뿐만 아니라 나에게 영향을 주는 '사회'의 괴로움마저 돌보아, 이 공통의 괴로움을 아우르고 거기서 평정심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또한 이 개념에서 발전하여 세상 모든 것은 그물처럼 얽혀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화엄' 사상이 생겨났다.

2.11. 상징과 (神)

사람은 언젠가는 잊어버린다. 오랜 수련으로 '깨달은 바'를 항상 염두에 둘 수야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순간순간 잊어버리는 것"까지 완전히 없앨 순 없다. 사람이란 원래 그런 존재이기 때문이다.

지나친 모욕을 당해 순간적으로 화가 치밀어 올라 감정을 주체 못할 때가 있다. 또는 생활에 바빠서 '깨달음'에 대해 잊고 사는 경우도 있다. 또는 '깨달음'에 대해 이해하면서도 막상 자신의 감정 앞에서는 무기력해지는 경우도 있다.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될까?

이렇게 사는 게 바빠 순간순간 깨달음을 잊어버리고 괴로움과 무기력의 감정에 빠지게 된다면, 상징을 통해 계속해서 깨달음을 상기시키는 것이, 감정을 컨트롤하는 데 있어서 많은 도움을 줄 것이다. 대표적으로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을 외치는 것(진언[48]), 손가락 동작으로 '깨달음'을 상기시키는 것(수인[49]), 반야심경 등을 노래로 만들어 끊임없이 상기시키는 것, 눈에 띄는 곳에 불상을 두어 볼 때마다 '깨달음'에 대한 생각을 하는 것, 깨달음을 추구하는 사람들과 가깝게 지내서 서로 선한 영향을 주고받는 것 등이 있다.

진언이나 수인, 노래나 문양 등의 상징을 통해 끊임없이 자신의 상태를 자각하는 계기를 만들자는 것이다. 이는 괴로움을 벗어나게 해주는 유용한 도구가 된다.

또한 불교에서 말하는 여러 신의 존재도, 절대자로서의 신이 아니라, 교훈이나 깨달음을 상기시켜 주는 일종의 "상징"의 역할을 한다.[50]

2.12. 결단

불교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주제이다.

불교에서는 집착을 끊으라고 말하면서, 집착에서 벗어나는 것을 매우 중요시한다. 집착에서 벗어나면 해탈이라는 마음의 평온함에 이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과연 집착이란 무엇일까? 그건 생각(또는 행동)을 반복하는 것이다. 한번 했던 생각을 다시 떠올리고, 머릿속에 떠오르기 때문에 그것을 하고 싶고, 하고 싶기 때문에 행동으로 나타난다. 사람들은 그 대상에 대한 집착을 버려야 된다는 것을 알고는 있어도, 그 대상을 계속해서 머릿속에 다시 떠올리기 때문에 집착하게 되는 것이다. 그 생각을 거듭 떠올리는 데서 집착이 만들어지므로, 이러한 '생각의 반복'을 하지 않겠다고 단호하게 마음을 먹는 것이, '결단'인 셈.

따라서 불교에서 '깨달음'이란, '반복된 생각을 하지 않겠다는 결심', 또는 '틀에 박힌 생각이나 고정관념에 사로잡히지 않고 창조적이고 자신만의 해석으로 세상을 바라보겠다는 결심', '삶의 관점을 항상 새롭게 만들겠다는 다짐'이라고 봐도 무방하다.[51] [52] [53]

그렇기 때문에 '결단'은 불교의 시작에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매우 중요한 부분으로 취급되어 왔다. 숫타니파타에서는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며 '결단'을 촉구했으며, 선종에서는 돈오(頓悟)가 '결단'에 해당되어 이 이론으로 선종교종에서 벗어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54]

2.13. 현실

모든 것을 하나로 보는 것이 공(空)이고, 하나에서 모든 것이 될 수 있다는 것이 유식(唯識)이다.[55] 사람들은 지엽적이고 의미 없는 것에 목숨 걸어가며 산다는 깨달음은 공(空)을 말하는 것이고, 그렇다고 모든 것이 의미 없는 것이 아니라 비어있기 때문에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가능성으로 보는 깨달음은 유식(唯識)을 말하는 것이다. 공으로 집착을 버리고, 유식으로 희망을 찾는 것은 하나의 일관된 과정이라고 볼 수 있으므로, 원효는 공과 유식을 하나로 보아 일심(一心)사상을 주장하였는데, 이후 한국불교에 큰 영향을 미쳤다. 원효는 세상을 등져서 벗어나려 하지 않고, 춤추고 노래하면서까지 일반 백성들과 함께하였는데, 여기서 그가 얼마나 현실을 중요시했는지를 잘 알 수 있다.

지눌은 교종의 이론과 선종의 수련을 합쳐서, 배워서 깨닫고 그것을 수련한다는 정혜쌍수[56]를 주장하였는데, 앞의 원효와 마찬가지로 하나의 큰 통일된 이론을 만들고자 하는 시도였다. 깨달음(이론)과 수행(참선)을 하나로 합치려는 정혜쌍수 역시 한국불교에 큰 영향을 미쳤는데, 이는 중국의 교종과도 다르고 중국의 선불교[57]와도 다른, 새로운 사상이라 볼 수 있겠다.[58] ("중국은 사상을 받아들여서 수많은 각론을 만들고, 한국은 중국의 각론을 받아들여서 종합하여 결론을 내며, 일본은 한국의 결론을 받아들여서 그대로 유지하고 이어 나간다"고 이야기된다.)

한국의 불교는 원효와 지눌의 영향 아래서 이렇게 하나로 통합되기도 했었고, 현실을 극도로 중요시하는 유교의 영향도 컸었기 때문에, '속세'마저도 '속세를 벗어난 세상'과 하나로 보아, 현실의 삶에서도 불교의 가르침을 어떻게 적용하고 유용하게 쓸 수 있는지를 끊임없이 궁리하였다. 승려가 따로 있고 일반인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그마저도 하나이고, 현실에서 벗어난 청정한 깨달음의 세계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깨달음의 세계는 현실과 하나의 세상이다.

'모든 관념에서 벗어나라'는 것이 불교의 가르침이지만, 정작 지금 이 말 자체는 매우 관념적이다. 따라서 「'관념에서 벗어나라'는 관념」에서 다시 벗어나 현실로 돌아와야 하는데,[59] 세상을 버린 뒤에 다시 세상으로 돌아와야 하는 이치인 것이다. 성철스님은 이를 두고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라고 말했다.

지금 '산은 산이 아니고, 물은 물이 아니다'는 것은 공(空)이고, '산은 물이고 물은 산이며, 다른 어떤 것도 될 수 있다'라는 것은 유식(唯識)의 입장이다. 반면 성철 스님은 저 둘은 단지 탈속의 세상이고 거기서 얻어지는 깨달음은 또 다른 관념이라는 허상이기 때문에, 결국 현실로 돌아와야만 그 깨달음이 '끝'이 나므로, 깨달음을 얻고 나면 그 깨달음을 잊기 위해 살아야 한다(현실을 살아야 한다)[60]는 의미에서, 옛 고승의 말을 빌려와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를 강조한 것이다.[61]

괴로움이란 삶의 현실 속에서 만들어진다. 모든 욕망에서 벗어난 깨끗한 경지가 절에 들어갈 때만 생긴다면, 절에서 나오고 나면 그게 무슨 소용이랴. 괴로움 속에서도 그 괴로운 감정에 최대한 휘둘리지 않으며, 그러한 괴로운 감정을 삶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이고 이해하며 살아가자는 것이 불교의 가르침이다.

2.14. 종합

근본 불교에서는 무아, 명색을 강조하여 '내 것'이나 물질에 의미 부여하는 언어적 활동 자체가 괴로움을 일으킨다고 보았다. 따라서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언어마저 잊어버린 경지, 즉 희론(Papañca≒망상)을 없애는 명상을 통해 괴로움에서 벗어나기를 강조하였다.

상좌부 불교에서는 '자아(오온)'는 나의 행위들이 쌓여서 만들어진 것이어서, 선한(올바른) 행위들을 쌓아가면 선한(올바른) 자아가 만들어지고, 악한 행위들을 쌓아가면 악한 자아가 만들어지므로, 괴로움에서 벗어나려면 올바른 행위[62]를 통해 '올바른 자아'를 만들어야 됨을 강조하였다. 즉 '언어적 잊힘'보다 '행위'를 강조한 것. 부처 사후, 제자들은 무리를 이끌고 승단을 만들어 장로가 되었다. 이렇게 승단이라는 '사회'가 만들어졌기 때문에 '선한 행위'를 강조함으로써 사회적 질서를 세우고자 했던 것이다.

대승불교(나가르주나)는 상좌부 불교의 모순을 해결하고자 했다. 근본 불교는 '내 것이 없음(무아)'를 강조하는데 상좌부 불교는 반대로 '좋은 나를 만들기(오온, 카르마)'를 강조하는 모순이 생겼기 때문이다. 이에 모순을 제대로 설명할 수 있으면서도 사회를 유지하는 질서까지 생각하는 개념을 탄생시켰으니 그것이 '공'이다.[63] '공'이라는 것은 모든 개념은 서로가 서로에게 의존하므로, 한 극단은 혼자 존재할 수 없으며 다른 극단과 함께 존재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양극단은 공존하기에 하나로 봐야 된다'는 것. 또한 모든 가치적 판단은 상대적 기준에 의해 달라지므로 '어떤 것도 될 수 있다'라는 가능성을 지닌다. 이러한 공개념은 나와 남을 하나로 보아서 '나의 이익은 남을 이롭게 하는 데서 나온다'는 자리이타와 자비의 개념으로 발전하였고, 이를 통해 '남을 도움으로써 사회가 무너지지 않게 하는' 사회적 질서 역시 설명할 수 있었다.

이후 유식학파에서는 용수의 공사상이 모든 것을 하나로 인식하는 데서 문제가 있음을 깨달았다. 현실은 하나가 아니라 수만 가지로 다양한데, 용수의 말처럼 모든 개념이 하나로 귀결된다면 이러한 현실의 다양성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문제였다. 또한 세상의 다양한 물질들은 우리의 눈, 귀, 코, 입, 피부를 통해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 생각 등으로 분별되어 각각 다른 물질들로 받아들여지지만, 이러한 정보는 쉽게 왜곡, 확대 재생산되어서 괴로움이 된다는 것을 깨달았기에, 이러한 왜곡된 정보들에 벗어나서 바르게 생각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불행'이라는 정보를 내가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내가 괴로워지기도 하고 괴로움에서 벗어나기도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모든 것은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달린 문제, 모든 것은 자신의 마음에 달린 문제라는 것을 강조했다.

괴로움이 '주어진 정보를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달렸다는 것은, 역으로 '처음부터 의도적으로 좋게 가공된 정보'를 통해 괴로움을 피해 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가상의 신이나 상징을 믿어 의지하는 것도 괴로움을 잊는 하나의 방편이 될 수 있다는 것. 이에 밀교에서는 여러 신들을 믿는 것뿐만 아니라 진언(주문)이나 수인(손동작) 등의 상징마저도 괴로움을 잊는 도구로 사용되었다.

이렇게 삶의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나의 것'이라 생각하지 않는 방법(무아), 물질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방법(명색), 삶은 쌓아가는 것이며 결과는 나중에 나타난다는 것을 깨닫고 옳음을 꾸준히 행하는 방법(오온 또는 카르마), 양극단이 공존하는 것을 알아서 괴로움과 즐거움을 하나로 합쳐 보아 삶을 이해하는 방법(공), 내가 받아들인 정보는 왜곡됨을 알아내 생각을 왜곡된 정보에 휘둘리지 않게 하여 내 마음의 주인이 되는 방법(유식), 의도적으로 가공된 정보를 이용하여 마음의 평안을 유도하는 방법(신이나 상징을 믿음) 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방법들을 종합하자면... 불교가 말하는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방법이란,

3. 주요 특징

다른 여러 종교와 비교해 불교가 지니는 중요한 특징은 다음과 같다.
현실의 삶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실존주의와 비슷하다고 볼 수 있지만, 엄밀히 말하면 '현실의 삶'에 집중한 불교의 개념은 실존주의 보다 훨씬 이전부터 만들어져 왔으며 실존주의와는 다른 미묘하고도 독특한 차이가 있다. 실존주의에서 인간의 실존은 고독하기 때문에 스스로를 긍정하거나, 또는 이러한 인간 삶을 방해하는 권위에 대해 반항을 해야만 하는 존재로 묘사되지만, 불교에서 인간은 자신의 감정에 휘둘려 자신의 제대로된 삶을 살지 못한다고 보아 긍정과 부정을 포함한 '감정'에 집착하지 말고 자신의 삶을 살아라는 점, 그리고 '자아'마저도 또다른 권위가 될 수 있다고 보아 '내 것'에 집착하지 말라는 점에서 다르다고 볼 수 있다.

4. 각종 오해와 통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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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 - 합의사항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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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asmātihānanda, attadīpā(스스로 섬이되고) viharatha attasaranā(스스로귀의하고) anaññasaranā, dhammadīpā(법을섬으로 하고) dhammasaranā(법에귀의하고) anaññasaranā.
Kathañcānanda, bhikkhu attadīpo viharati attasarano anaññasarano, dhammadīpo dhammasarano anaññasarano?
어떻게 스스로 섬이되고.... 법에귀의하는가?
Idhānanda, bhikkhu kāye kāyānupassī(몸에대한 마음챙김) viharati atāpī sampajāno satimā, vineyya loke abhijjhādomanassam.
Vedanāsu(느낌)…pe… citte(마음)…pe… dhammesu dhammānupassī(법에대한 마음챙김) viharati ātāpī sampajāno satimā, vineyya loke abhijjhādomanassam.
Evam kho, ānanda, bhikkhu attadīpo viharati attasarano anaññasarano, dhammadīpo dhammasarano anaññasarano Ye hi keci, ānanda, etarahi vā mama vā accayena attadīpā viharissanti attasaranā anaññasaranā, dhammadīpā dhammasaranā anaññasaranā,
스스로 섬이되고... 법에귀의한다는것은 이렇게 사념처를 의미한다...
tamatagge me te, ānanda, bhikkhū bhavissanti ye keci sikkhākāmā”ti.
아난다 비구들은 이렇게 수행하고 공부지어라...
- 디가니까야 대반열반경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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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분파

파일:불교 종교표지(흰색).svg
현대 불교의 종파
부파 불교 상좌부 불교
대승 불교 교종선종정토교
밀교 티베트 불교

파일:불교 종교표지(흰색).svg
근본 불교와
파일:불교 종교표지(검은색).svg
부파 불교
{{{#!wiki style="margin:0 -10px -5px"
{{{#FEA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근본 불교 <colbgcolor=#DDD,#383B40> 부파 불교 상좌부 불교
(스타비라바다)
분별설부 상좌부 불교(테라와다)
[math(\}\!\!\!\Rightarrow)] 음광부
설일체유부 화지부 법장부
경량부 근본설일체유부 비바사사
보특가라론자 독자부 정량부 법상부 현주부 밀림산주부
[math(\}\!\!\!\Rightarrow)] 설산부
대중부 불교
일설부 설출세부
계윤부 다문부 설가부
제다산부 서산주부 북산주부 }}}}}}}}}}}}


현재의 불교는 크게 대승 불교(마하야나)와 상좌부 불교(테라와다), 티베트 불교로 구분된다. 자기인생을 자기가 살지 못하고 남에게 얹혀서 살려는 사람이 중생이고, '남의 인생을 살지 않고 자기 인생을 살며, 과거에 살지 않고 현재를 살아라'는 것이 본디 불교의 가르침인데, 여기서 '바른 말과 행동들을 쌓아서 올바른 삶을 살자'는 것이 상좌부(테라와다)이며, 여기서 '남을 조금이라도 도와줘야 되지 않겠냐?'며 자비를 강조하는 것이 대승이다. 사람들은 '좋아하던 것'이 다르게 변해간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괴로워하는데, 이 생각에서 벗어나서 보고 느낄 때 '좋아하는 것'을 따로 두지 않아 호불호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이 불교의 가르침이다. 보통 괴로움에 빠진 사람들은 자신의 삶을 살지 않고 다른 것에 의미를 두며, 과거에 얽매여서 현재를 괴롭힌다.

대승 불교한자문화권에 주로 분포하고 있으며, 과거에는 인도 서북부, 중앙아시아, 동남아시아에서도 흥했으나 현재는 소멸하였다. 상좌부 불교(테라와다)는 스리랑카와 태국, 미얀마를 비롯해 베트남을 제외한 동남아에 주로 분포한다. 티베트 불교는 티베트와 몽골에 주로 분포한다. 티베트의 불교는 상좌부 불교, 대승 불교, 밀교를 시대별로 차례차례 받아들인 북전 불교와는 달리 인도 반도를 통해 모든 사상을 한꺼번에 받아들였으며 독자적인 체계를 갖추게 되었다.

이외에도 불교는 북미유럽에 전해져 여러 지역에서 다양하게 분포한다. 그 중 티베트 불교가 북미/유럽에서 가장 대중화된 불교 종파가 되었다. 프랑스 같은 경우는 일본선불교와 함께 가장 인기 있는 불교 종파이기도 하다. 게다가 티베트를 탄압하는 중국조차도 화북지역 한족이 티베트 불교를 열렬히 신봉하는 아이러니한 모습을 보이고 있는데, 청나라가 티베트 불교를 받아들인 것이 지금까지도 큰 영향을 미쳤다. 중국에서도 세가 상당히 크며, 티베트인 뿐만 아니라 한족[85]도 상당히 많이 믿고 있기 때문에, 달라이 라마 14세가 망명 중임에도 불구하고 신앙 자체에 대한 탄압은 받지 않는다. 물론 티베트 독립운동은 중국에서 국가분열죄로 다스린다. 북미/유럽의 유명인 중에 티베트 불교 신자가 의외로 많다. 리처드 기어, 스티븐 시걸 등. 티베트 불교 이외에는 일본 선불교가 있다. 일본 선불교 신자로 대표적인 이는 스티브 잡스.

대승 불교(Mahayana)가 발전되었을 시기에는 대승 불경을 읽지 않는 부파 불교를 대승 측에서는 소승 불교(Hinayana)라고 칭하였다. 그러나 대승 불교의 관점에서 붙인 비하적 명칭이라는 성격 때문에 1950년 열린 세계불교도우의회에선 소승 불교라는 표현은 어떠한 불교 종파에 대해서도 써선 안된다고 결정하였다.

6. 역사

근본 불교는 원시 불교라고도 불리며, 석가모니가 살아 있을 때부터 제2차 결집으로 교단에 분열이 일어나기 전까지, 즉 그의 입멸 후 약 100년까지의 불교를 말한다. 분열이 일어난 후에는 부파 불교라고 부른다.
파일:SectarianBuddhistschools(2).png
남아시아부파 불교
법장부
설일체유부(보특가라론 제외)
보특가라론자
대중부
분별설부(현대 테라와다의 기원, 법장부 제외)

부파 불교는 보통은 상좌부(Sthaviravada)와 대중부로 나뉜다. 근본 불교가 끝나고 제자들 사이에서 사상적인 분열이 일어나는 시기이다. 상좌부(Sthaviravada)에 속하는 분별설부로부터 테라와다가 나왔으며, 오늘날에 흔히 일컬어지는 상좌부 불교는 이 테라와다이다.

대승 불교는 부파 불교의 한 종파인 대중부에서 발전하여, 3세기 용수가 공(空)사상을 주장함으로써 시작된 불교를 말한다. 크게 중관학파유식학파로 나뉜다. 중관학파는 '양 극단을 하나로 보아야 하며, 분별해서 말해선 안된다'는 반야를 주장하였고, 유식학파는 내가 보고 느끼고 생각하는 것이 내 마음을 바꾸기도 하고, 또한 내 마음이 내가 보고 생각하고 느끼는 것을 바꾸기도 하므로, '모든 것은 마음의 문제(일체유심조)' 라고 주장하였다.

6.1. 전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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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의 전파 경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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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부파 불교
대승 불교
상좌부 불교
밀교 · 티베트 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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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후 1세기 무역길과 불교의 영역



불교는 석가모니 생전에 이미 교단(敎團)이 조직되어 포교가 시작되었으나 석가모니에 의해 교의가 전해져 내려왔다.

대승 불교는 북방 경로를 통해서 중앙아시아에 전해졌는데 이는 도시 상인 계급의 불교 선호 및 브라만교,카스트 제도에 대한 유목민들의 반발과 거부감에서 비롯되었다.[89] 상인들의 호응을 받는 종교였던 불교는 이후 중앙아시아에서 동북아시아로 전파되었다. 서역(西域)을 거쳐 중국으로 유입되는 과정에서 여러 인도인, 토하라인, 중국인들의 노력을 통해 불교 경전이 한어로 번역되었다. 이후 중국에서 한국으로, 한국에서 일본으로 전래가 이루어져 세계적 종교로서 자리를 굳혔다. 베트남 역시 한자문화권으로 중국을 통해 대승 불교가 전파되어 주류가 되었다. 이 밖에도 대승 불교는 남방 경로를 통해 동남아시아에도 전해져 성행하였다. 스리위자야는 대승 불교를 국교로 삼았으며, 크메르 제국도 대승 불교를 받아들였다. 하지만 베트남을 제외한 동남아시아의 대승 불교는 이슬람상좌부 불교의 팽창으로 소멸하였다. 현재 대승 불교는 한자문화권이나 동북아시아 이주민들이 많은 지역에서만 강세이다.

부파 불교의 한 부류인 상좌부 불교스리랑카타밀족촐라 왕조의 영향을 받은 곳에서만 유력하였다. 그러다가 11세기 이슬람의 인도 정복 이후 동남아시아로 전파되어 성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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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 분포 관련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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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교 · 티베트 불교
대승 불교
상좌부 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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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토인 인도 반도에서는 석가모니 사후 마우리아 왕조 시대 아소카 대왕의 보호와 포교로 크게 교세를 확장하여 6세기경까지 전성기를 이루었으나, 원시적인 브라만교가 불교교리를 대거 빋아들이고 재탄생한 힌두교에 점점 밀려 교세가 약해졌다. 그러나 힌두교 부흥의 원인인 굽타 제국도 국가의 운영을 위해서 관료이지 학자 대부분을 차지하는 불교를 견제하고 억제할지언정 아예 파괴할 순 없었다. 초중기 굽타왕조에서는 불교 대학과 사원을 폐쇄하고 파괴하는 반달행위를 했으나, 후기로 갈수록 점차 유해지고,불교가 재흥하기 시작한다. 심지어 후기 굽타황제인 나라심하굽타는 불교신자이자 말년에 출가까지 감행했다. 이 시기 인도에선 농촌과 시골에서는 기복주의 신비주의적 성향이 강한 힌두교가 압도적였으나, 상공업자와 학자 등을 위시한 도시민들 대다수는 불교신자였다.

흔히 일려진 것처럼 힌두교의 탄생과 이슬람의 유입으로 인한 불교 쇠퇴는 크게 과장되어있다. 원래 불교 전성기에서도 인도 시골은 불교세가 약했고, 기성 다신교 신앙에 지배당했다. 브라만신들을 불교교리에 끼워맞추는 형태로 농촌에 영향력을 행사했을 뿐이다. 굽타시기에 브라만교가 힌두교로 재편된 이후엔 시골에 미치는 영향력이 차단된 것에 그치지 않는다.

그리고 이슬람의 유입으로 인도불교가 쇠퇴했다는 것도, 당시 불교가 이미 도시에서조차 헤게모니를 잃어가는 심각한 쇠락 중이었기에 사라진 것이지, 이슬람이라고 만능도 아니고 대부분이 이교도인 인도 민중에 이슬람을 강요할 능력이 절대 없었다.

불교 쇠퇴의 핵심적인 사건은 알촌 훈(alchon huns)족의 북인도 초토화이다. 당시 북인도의 훈족침공은 매우 심각했다. 알촌 훈족은 이때까지 남아있던 간다라의 인도-그리스 문화를 완전히 파괴하고, 펀자브와 말와지역과 갠지스강 중상류의 도시들을 초토화시켰으며, 이는 굽타제국의 급격한 쇠락과 멸망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보통 인도에 정착하는 외부세력은 외지인을 비인간화하는 브라만-힌두사상에 대항하여 불교를 믿거나, 최소한 힌두교를 꺼리는데 비해, 알촌 훈족은 아프가니스탄에서도 퍼진 파괴신 시바신앙을 수용했고, 모든 기록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기를 불교를 매우 증오했다.

이들은 자기네 본거지인 간다라 지방이 인도불교의 중심지라는 이유로, 지방의 중심도시인 탁실라를, 인도 내에서도 나란다 외엔 비교대상이 없던 탁실라 불교대학과 천개가 넘은 사찰과 함께 아예 지도에서 지워버렸다. 이 이후 펀자브 지역 최대도시였던 탁실라는 유적만 남은채 버려진 도시가 된다. 쿠샨이나 에프탈[90]이 본거지만큼은 개발에 치중했던 것과 비교하면 매우 이질적이다.

그 외에도 보통 외부 침투세력들이 불교를 국시로 삼기에 침략과 약탈에도 무사하고 번성하던 불교대학과 불교사찰과 스투파 등 종교시설과 승려들을 집중적으로 타겟팅해서 다른 무엇보다 우선 순위로 철저한 파괴와 학살을 감행했다. 약탈이나 공물을 얻는 것보다 펀자브와 말와, 갠지스강 중상류의 힌두스탄 지방의 불교대학과 사원, 종교시설과 승려들과 주요 신자들을 학살하는데 열중했고, 이는 5~6세기경 북인도 도시와 학문과 무역과 공업의 급격한 쇠락과 연결된다. 인도 불교의 기반인 북인도 도시가 뿌리채 흔들리고, 오직 나란다대학을 위시한 벵골지방만 안전할 수 있었다. 괜히 팔라왕조로 대변되는 벵골지방이 인도불교의 마지막 보루로 남는게 아니다.

이 시기부터 불교는 인도보다 인도로부터 선교를 받은 박트리아 등지의 중앙아시아에서 강세였다. 하지만 이슬람의 유행으로 중앙아시아의 불교세도 점차 사그라들었고, 이 연장선으로 14세기 이후 인도까지 이슬람에 정복당하여 크게 세력이 약화되었으며, 동력인 하위카스트-불가촉천민도 이슬람교로 대거 개종되었다. 알촌 훈족에게 겨우 살아남았던 인도 북동부의 불교 사원과 유적이 파괴됨으로써 막타를 받고 인도 본토의 불교는 절멸하였다. 예수의 고향인 팔레스타인이스라엘에서는 지금도 아랍계 그리스도인들이 상당수 거주하고, 그리스도교 교파 여럿이 모여서 성지 관리를 하는 등 현재까지도 그리스도교의 명맥을 이어나가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인도 영토 내의 티베트계 지역 주민들은 티베트 불교를 믿고 있다. 인도에 병합된 시킴은 원래부터 불교 왕국이었고, 아루나찰프라데시미얀마, 티베트와 접경 지역인 인도 동북부 지역에도 토착 불교 신자가 꽤 있다. 티베트에서 망명해온 티베트 불교 승려들의 포교도 인도 불교 신자 수 증가의 원인으로 꼽히고 있다.

현대에는 빔라오 람지 암베드카르의 불교로의 개종을 시발점으로 하여서 마하라슈트라 지역을 중심으로 나바야나(Navayana)라는 불교 종파가 인도에 발생하였다. 하지만 이는 옛부터 이어져온 것이 아니라 새로이 만들어진 신흥 종파이다. 일부 카스트 제도에 반대하는 사람들과 하층 계급, 일부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나바야나 신도가 유지되고 있다. 마하라슈트라주에는 나바야나 불교 정당이 있을 정도. 물론 그래봤자 인도 전체 인구의 1%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원나라티베트 불교[91] 국교였으며, 한국의 경우에는 삼국시대 때부터 불교가 성행하여 삼국 및 고려 시대에는 국가와 협력-공생 관계였으나, 조선 시대에 들어서면서 유교에 밀려 차별당하고 박해[92] 받기도 했다.[93]

20세기 들어 태국대만을 제외한 중국동남아시아 등지 상당수 불교권 국가들에서(몽골, 중국, 캄보디아, 베트남, 라오스 등) 공산주의 정권이 들어선 이후로는 공산당에 의해 탄압받기도 했다. 몽골의 경우에는 대다수의 사원이 강제로 폐쇄당하기도 했고, 중국도 문화대혁명의 광풍 속에서 상당수의 사찰과 불교 문화재들이 홍위병들에 의해 훼손되기도 했다. 물론 공산권이라고 해도 나라에 따라 사정이 은근히 다르기는 했지만 말이다. 스리랑카에서는 힌두교 세력과 내전을 치르기도 했고, 미얀마 등지에서는 군부정권이 버마족의 민족적, 국가 정체성으로 불교를 밀어, 21세기 들어서 불교 근본주의가 대두되고, 이로 인해 로힝야족 탄압 등을 초래하기도 했다.

인구 대비 불자 수가 많은 나라들은 스리랑카를 제외하면 동아시아동남아시아에 있다. 전통적으로 태국과 미얀마에 많은 신도들이 있으며, 절대적인 수로는 불자 인구가 세계 1위인 중국을 비롯해 티베트, 몽골, 등도 불교 인구 다수 지역이다. 세계구 급으로 골고루 퍼진 그리스도교이슬람과는 달리 불교는 중국과 불교권 동남아시아를 중심으로 집중되어 있으며, 서구 일부 지역을 제외한 동유럽, 중동, 중남미 등 나머지 지역에서는 거의 교세가 없다시피 하다. 본고장 인도에서도 교세가 매우 약해서, 1% 수준으로 시크교그리스도교 인구보다도 적다. 또 특이하게 이슬람권인 오만, 카타르, 쿠웨이트 등지에도 신자가 조금 있는데, 이는 아시아계 외국인 노동자의 영향이다.[94]

20세기 후반 이후로 일부 유럽, 미국 등지에서 소수종교로서 점차 교세가 커지고 있다. 현재도 증가 중. 예전에는 티베트 불교나 일본 불교(젠 부디즘)이 중심이었는데,[95] 근래에 들어서는 한국에서 출가한 북미/유럽인 승려들이나 불자 교민들의 불사와 노력을 통해 한국 불교도 점차 퍼져나가는 중이다. 게다가 최근 서구 백인들 중에선 절에 다니는 비율이 증가한 추세이며, 빌 클린턴과 같은 유명 인사들도 명상이나 불교를 공부하는 모습이 언론에 노출되어 영향을 미치고 있다.

만약 “이 가장 많은 도시가 어디인가?”라는 질문을 받게 되면 대다수 사람들은 아시아의 어느 나라라고 응답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세계에서 가장 많은 절이 있는 도시는 2016년 기준, 놀랍게도 미국의 LA(로스앤젤레스)이다. 현재 LA에는 무려 300개의 사찰이 있으며 75개의 불교협회, 2,500여 개의 명상센터가 있다고 한다. 아놀드 토인비는 불교가 북미/유럽에서 주류 종교가 될 것이란 말을 했는데, 물론 과장된 점이 없지는 않지만, 의미심장한 발언이다. 다만, 2016년 갤럽 기준 미국의 불교 신자 수는 1% 남짓하며, 이는 0.8%인 이슬람교와 거의 비슷하다. 그리스도교는 73.7%. 아직도 미국 내에서 불교 신자의 비중은 실제로는 매우 낮은 편이다.

아프리카에는 불교 신자가 거의 없다. 위키백과세계의 불교(영어) 내용에 따르면, 10억여 명의 인구가 있는 아프리카에서, 불자의 수는 10만여 명에 불과하고 인구에서 불자가 차지하는 비율도 0.012%로 가장 낮단다.

유럽에서는 칼미크 공화국(러시아의 자치 공화국)이 유일한 불교 국가다. 이유는 칼미크 공화국은 몽골계 민족 칼미크인이 중심이 되는 나라이기 때문이다. 과거 약 5만명의 오이라트인이 이 지역으로 이주한 것이 칼미크 족의 기원으로, 이들이 불교를 믿고 있어 불교를 국교로 삼게 되었다. 칼미크 남쪽은 다게스탄 공화국, 체첸 공화국 등 무슬림이 많고, 칼미크 북쪽은 정교회가 지배적이라, 이슬람정교회 사이에 불교가 끼어있는 오묘한 상태다.[96] 일찍이 러시아옐리자베타 페트로브나 시절에 불교를 러시아 제국의 종교들 중 하나로 인정하였고, 칼미크 뿐 아니라 동시베리아의 투바부랴티아에서도 불교세가 강하다.

오스트레일리아크리스마스 섬에도 불자가 많다. 아마도 이 섬의 인구 중 약 70% 정도가 중국계이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같은 이유로 싱가포르 역시 불교 강세 국가이다.

6.3. 동아시아 불교 전파와 발전

중국에 불교가 전래된 것은 1세기경 한나라 때라고 추정되지만 본격적으로 융성한 건 위진남북조시대로 특히 서진 멸망 이후부터 명나라 시절까지 중국 불교는 크게 번창하였다. 인도로부터 중국으로 불교가 전래된 시기는 전한 시대였으며 불교 경전이 본격적으로 번역된 것은 후한 시대에 들어와서였다. 그러나 불교의 전래 당시, 불교의 교의는 당시의 중국의 현세주의적 사상풍토와는 맞지 않아 쉽게 수용되지 못하였다. 따라서 처음에 불교는 도교적 신앙과 결부되어 신선방술의 하나로 수용되었다. 이와 같은 불교의 초기 수용기는 대체로 전한말에서 4세기 말까지 약 400년간이라 여겨지고 있다. 이후 남북조시대가 열린 5세기 초에서 6세기 말까지의 200년간 불교는 중국에서 착실히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중국의 불교는 불도징(佛圖澄, 233~348)과 그의 제자인 도안(道安, 312~385)의 활동에 의해 교단 체계를 갖추게 되었다. 불도징은 구자국(龜玆國) 출신의 서역의 승려로 310년에 낙양으로 와서 후조 시대에 활약하였다. 이 시기 동안 불교 경전의 전래가 격증되고 많은 인도 승려들이 중국으로 들어왔다. 이 시기 구마라습이 번역한 불경이 크게 유행해 중국 불교의 흥성을 주도했으며 보리달마 같은 서역승려들이 남조에서 불교를 크게 전파했다. 북조에서는 삼무일종법난으로 대표되는 폐불 사례도 있었으나 남조에서는 폐불 사례 없이 꾸준히 불교가 발전했다.

특히 중국에 전래된 불교는 세계불교사에서 중요한 전기 하나를 마련하는데, 불경에 대한 정리나 그에 맞추어 석가모니 부처의 생애에 대한 체계적인 구성에 대한 한 가지 시도가 중국에서 등장하였다는 것이다. 중국은 후한 명제 때에 불교가 전래되어, 67년에 중인도 사문 가섭마등과 축법란이 최초로 인도의 경전을 사십이장경이라는 이름으로 한역한 이래, 8세기에 이르는 동안 여러 루트를 거쳐서 중국으로 불경이 전래되었고, 번역이 이루어졌으며, 개인에 의해서 또는 국가의 지원으로 이루어지는 경우도 많았다.

다만 그렇게 해서 경전을 번역하고 보니 경전들마다 조금씩 가르치는 문장이 다른 경우가 생기기도 하고, 어디에서는 이렇게 설명을 했는데 어디에서는 또 이렇게 설명을 하는 등 경전의 자구나 중시하는 가르침이 조금씩 달라지는 일도 많았다. 동시에 석가모니 부처의 친설과는 거리가 먼데도 마치 석가모니 부처의 친설인 것마냥 꾸며낸 위경도 생겨나게 되었다.

불경을 번역한 중국의 승려들은 이러한 경전의 내용상 차이점들을 규합하고 정리하여 석가모니 부처의 친설이란 무엇인지를 규명하려는 시도를 아끼지 않았다. 천태종에서는 자국에 전래 및 번역된 불교 경전들을 향해 교상판석(敎相判釋)이라는 일종의 불경 비평을 행했다. 이것이 중국에 전래된 불교가 맞은 하나의 전기이자, 세계 불교사에서도 손꼽힐 만한 사건이었다.

인도에서도 논사(論師)들에 의한 원시적인 형태의 교판이 있었기는 하지만[97] 불교의 교리가 자연스럽게 발달한 인도에서는 그 교리를 체계적으로 정리하려는 새로운 노력이 그다지 필요하지 않았고, 상대적으로 불교가 전파된 지역인[98] 중국 및 티베트에서 불경들에 대한 교차검증 및 비평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게 되었다.

일종의 성서비평학의 불교 버전이라고 할 교상판석은 후대로 갈수록 각 종파가 자신들이 중시하는 소의경전의 가치를 띄우기 위한 목적으로[99] 변질되기도 하지만, 근대적인 연구방법에 비춰 보면 정밀함은 떨어진다 해도 석가모니 부처의 교리가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를 체계적으로 분석하고 경전들 사이의 상이점이 발생한 원인을 규명하려 했다는 점에서는 그 의의를 무시할 수가 없다. 참고로 한국에서도 이러한 교상판석에 관한 이론이 신라의 승려 원효에 의해 사교판(四敎判)[100]이라고 해서 제시되었던 것이 그나마 유일하다.

티베트를 제외하고[101] 동북아시아 불교권에서 널리 통용된 것은 천태종의 교상판석이었다. 석가모니 부처의 설법 시기를 다섯 단계로 나누어 '오시설법'이라고 불렀는데, 이는 석가모니 부처의 설법을 다섯 시기로 나누고 다시 중생을 가르치는 형식에 따른 네 가지, 교리 내용의 깊이에 따른 네 가지로 분류를 한 것이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석가모니가 하고자 했던 진정한 설법은 바로 묘법연화경이었다, 라는 결론으로 귀결시킨다.
화엄최초삼칠일(華嚴最初三七日)
아함십이방등팔(阿含十二方等八)
이십일재담반야(二十一載談般若)
법화열반우팔년(法華涅槃又八年)

천태종의 교상판석은 석가모니 부처의 가르침은 분기별로 다섯 시기가 있었고 앞의 칠언절구는 그 다섯 분기의 가르침을 네 줄의 문장으로 저리한 것인데, 해석하면 다음과 같다.[102]
1) 처음(1기) 석가모니 부처가 막 깨달음을 얻고 21일 동안 자신이 깨달은 가르침을 있는 그대로 토해낸 것이 화엄경이었는데, 이 화엄경의 가르침은 너무 수준이 높아서 중생들이 제대로 이해할 수가 없었다.
2) 이에 석가모니 부처가 다시 중생의 근기에 맞추어[103] 기초학습으로 아함경을 12년 동안 설법을 했고(2기),
3) 다음으로(3기) 대승경전인 방등부 불경[104]을 8년 동안 설법했고,
4) 다음으로(4기) 600권에 이르는 대반야경을 21년 동안 설법했는데,
5) 반야를 일깨우려는 공 사상의 본의와는 달리 중생들이 자칫 허무주의에 빠질 우려가 있었기 때문에[105] 생애 마지막(제5기)에 이르러 8년 동안에 걸쳐 법화경 그리고 석가모니 부처가 열반에 들기 직전 하룻 동안 열반경을 8년 동안 설법했다.

아함경의 경우 근본 불교의 중심사상인 사성제, 팔정도, 십이연기 등의 내용으로 석가모니 부처의 법문에 가장 가까우면서도 일상생활의 실제적인 교훈을 담고 있는 경전으로 평가받고 있다. 오늘날 아함으로 불리는 문헌으로 한역 대장경 안에 장아함경(22권), 중아함경(60권), 잡아함경(50권), 증일아함경(51권)이 있는데, 이들은 각기 팔리어 경장의 디가 니까야(장부), 맛지마 니까야(중부), 상윳따 니까야(상응부), 앙굿따라 니까야(증지부)에 대응되는 경전이다. 그리고 이들 팔리어 경장 가운데 가장 앞선 시기에 편찬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경전이 바로 숫타니파타이다.

그리스도교도 마찬가지지만 불교에서도 마냥 석가모니 부처의 친설을 담은 것만이 진정한 불경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사람들이 흔히 불경이라고 부르는 것은 석가모니 부처의 설법 자체를 적은 경장(經藏)이고, 경장은 불경의 일부에 불과하다. 불경에는 석가모니 부처의 설법 자체뿐 아니라 석가모니 부처와 그 제자들, 나아가 재가제자들이 신행(信行) 또는 일상에서 겪은 여러 가지 사건들과 그에 대해 석가모니 부처가 어떤 것이 맞고 어떤 것이 맞지 않다고 판결하고 이를 계기로 제정한 계율들을 모은 '판례집' 율장(律藏), 그리고 석가모니 부처 사후 불교 교단 안에서 경장 및 율장의 가르침에 어떤 의미가 있고 어떻게 적용시킬 수 있는지, 현대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나아가 불교의 교리에 대한 이교도들의 비난에 대해 불교의 교리를 설명하고 이교도들의 비난을 반박하기 위해 승려들과 재가자들이 쓴 '교리해설서' 논장(論藏)이 포함된다.[106] 이는 그리스도교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행적이나 공생애 기간 동안 예수 본인이 직접 한 설교만이 아니라 예수의 12사도, 나아가 사도 파울로스성 아우구스티노, 요한 크리소스토모 등의 교부들의 저술 역시 성경과 같은 반열에 올려 우대하는 것과 같다.

이 경장, 율장, 논장을 모두 합쳐서 삼장(三藏)이라고 하며, 승려 가운데 경장뿐 아니라 율장과 논장 모두에 두루 통달한 달인이 비로소 '삼장'이라 불릴 자격이 있었다. 한국이 포함된 동북아시아 불교권에서 불경 한역의 양대 산맥으로 꼽히는 쿠마라지바도, 현장도 모두 '삼장'이라 불린다. 때문에 불교 교리를 공부하려면 아함경이나 화엄경, 법화경 같은 경장만 읽어서는 안 되고 사분율, 십송율 및 쭐라박까, 비나야삔디까[107] 같은 율장, 대지도론, 구사론, 성실론 등의 논장도 모두 읽어야만 하는데, 안타깝게도 한국 불교는 그런 쪽이 많이 미진하다.[108]

수당 시기에는 천태종화엄종이 수당불교의 사상적 절정을 이루었다면, 선종정토교는 이들이 미친 영향으로 보면 불교의 중국화와 민중화에 커다란 역할을 하였다. 송나라 시기에 선종은 정토교와 함께 송나라 시대 이후의 중국 불교의 주류를 이루었으며 밀교 교리도 성행했다. 이렇게 번성하던 중국 불교는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이후 종교 통제에 직면했으며 문화대혁명때 법난의 절정에 달해 중국 불교계는 일대 타격을 입었다. 이후 덩샤오핑의 개혁개방, 중일 수교 이후 일본 불교계와의 교류가 늘어나 중국 불교계는 조금씩 회복되는 추세이지만 관제불교의 오명을 벗지는 못하고 있다.

중국 불교의 경우 문화대혁명의 여파가 가신 이후로 중국 정부의 암묵적인 지원으로 현재 중국 내 불교 신자는 최소 2억 명이 넘는 것으로 조사되고 있으며, 최근 몇 년간의 증가세를 감안하면 최소 몇 년 내에 4억 명을 돌파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현재 중국을 제외한 세계 불교 신자가 3~4억 명 내외인 것을 감안하면 향후 국제 사회에서 중국 불교의 위상은 더 커질 것으로 전망된다. 중국 불교는 중국불교협회를 중심으로 문화대혁명 시기에 잃어버린 옛 영광을 재현하는데 성공하면서 동남아는 물론 세계 불교계에서의 주도권 쟁취에 적극 나서고 있다. 특히 세계불교포럼을 주최하면서 중국 불교의 영향력 확대를 꾀하고 있는 중. 자세한 사항은 중국/문화 참조.

한국의 불교는 기원후 4세기와 5세기경 삼국시대동진남북조 시대의 중국을 거쳐 들어왔고 토착화되면서 한국인에 맞는 한국적 특성을 지닌 종교 사상이 되었다. 기록 상 최초의 불교 전래는 고구려 소수림왕 때인 372년으로 알려져 있으나, 실제로는 소수림왕 전 시기에 불교가 상당 부분 고구려 각처에 퍼져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백제, 신라도 각각 뒤이어 불교를 수용하였으며 삼국시대의 나라들이 불교를 받아들인 것은 율령 체제 정비와 그 궤를 같이한다. 고려시대까지 불교는 한국의 정신사상에 큰 영향을 미쳤으나 조선시대의 숭유억불 기조로 쇠퇴하기도 하였다. 근대 이후엔 다시 불교의 진흥이 이루어졌으며 현대 한국 불교의 주류는 선종이다. 해방이후 비구승-대처승 분쟁이후 비구 종단은 대한불교조계종을 중심으로 정립되었고, 조계종은 현재까지 한국 불교의 대표 종단이다.

일본의 경우 6세기에 백제로부터 전래되었는데 나라에서 대불개안을 시작하고 삼론종, 화엄종 등 6개 종파가 형성되었다. 쇼무 천황 때에 당나라 승려 감진이 일본에 들어와 일본 불교의 초석을 쌓는데 많은 공헌을 했다. 794년 간무 천황교토 천도에 이어 견당사로 당나라에 유학을 다녀온 구카이사이초가 각각 진언종, 천태종을 창시하여 일본 불교에서 고야산, 히에이산 등의 비중이 커졌다. 그리고 정토신앙의 유행으로 아미타불 신앙이 보편화되었다. 가마쿠라 시대에는 무사가 귀족에서 권력을 빼앗고 힘을 순조롭게 기르던 시대이기도 했다. 이 시대에는 임제종과 조동종이라는 두 선종이 잇따라 중국에서 소개되었다. 힘을 길러 가고 있었던 사무라이 집단이 선호한 것에 기반해 가마쿠라 등 많은 선사가 지어져 매우 번창했고 전국시대에는 정토진종 혼간지 교단 등 세속적인 권력을 가진 거대 불교교단들이 잇키를 일으키기도 했다. 오다 노부나가의 히에이산 초토화는 전설이 되었다. 1603년 에도에 막부를 연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불교와 관련하여 사사제법도를 정하였다. 또한 1654년 명나라에서 건너온 승려 은원이 황벽종을 창시하였다. 에도 시대 일본에서의 최대 불교 종파는 정토진종이었다. 1868년에 일어난 메이지 유신으로 새로 세워진 일본 정부는 국가신토를 숭상하고 불교를 억제하는 숭신억불(崇神抑佛) 정책을 펴 일본 불교계는 초유의 난관을 겪었다. 전국 각지의 사찰은 폐쇄되기도 하고 철거되기도 하고 매각되기도 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일본 불교계는 이런 탄압에서 벗어났으며 1951년에는 종교법인법이 제정되어 이후 각계에서 활발한 활동을 해오고 있다.

중국에서 불교가 유행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위진남북조 시절 한족 지식인들의 염세주의, 유목 정복왕조의 중화주의 견제를 위한 불교 장려 정책이었으며, 이와는 별 관련이 없던 한국과 일본에서 불교가 받아들여진 계기는 왕즉불 사상 때문이었다. 이는 중앙집권을 강화할 명분을 만들어주어 지배계층의 수요를 만족시켜 주기 위한 일종의 정치적인 프로파간다에 가까웠지만 말이다. 사실 왕즉불 사상은 정치적 프로파간다 정도가 아니라 석가모니의 사상에 완전히 배치(背馳)되는 것이다. 하지만 종교와 정치의 결탁은 언제나 있어 왔으니.[109] 백제성왕(이름 자체가 전륜성왕에서 따옴), 신라의 경우엔 법흥왕부터 진덕여왕까지 왕권 강화 차원에서 불교식 왕호를 사용했고, 진흥왕의 경우엔 전륜성왕을 자처하기도 했다. 고려시대에도 태조 왕건의 청동상을 불상처럼 만들거나, 고려사 악지에 임금을 '제왕 부처'(海東天子當今帝佛)라고 칭하기도 했다. 발해의 문왕도 전륜성왕을 표방했는데, 그 증거가 정효공주 묘비에 있는 '대흥보력효감금륜성법대왕'이라는 칭호다.

7. 불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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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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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 근본 불교

7.2. 부파 불교

상좌부 불교에서는 석가모니의 가르침이 부파 불교 시대의 '5부 니까야'라고 하는 팔리어 경전으로 전승되었다고 생각한다. 이런 붓다의 가르침은 인도의 전통에 따라 구전으로 전승되다가 기원전 1세기에 문자로 기록되어 수많은 경전들이 흩어져서 존재하였고, 5세기 부터 합쳐진 니까야를 붓다고사가 인도 남쪽으로 전했다는 것이 학자들의 소견이다. 니까야는 5부 니까야로 구성되어 있는데 5부 니까야란 디가니까야, 맛지마니까야, 쌍윳따니까야, 앙굿따라니까야, 쿳다까니까야를 말한다. 니까야는 다양한 나라의 문자로 번역되었는데 한국빠알리성전협회, 초기불전연구원 등에서 한국어로도 번역하고 있으며 다양한 번역자들의 개별 번역본도 존재한다. 인터넷 서점에 '니까야'를 쳐보면 나온다. 한국빠알리성전협회 기준 5부 니까야 중 4부 니까야는 번역이 완역 되었고 쿳다까니까야는 《숫타니파타》, 《법구경-담마파다》가 번역이 완역 되었다. 초기불전연구원에서는 디가, 맛지마, 상윳따, 앙굿따라 4부 니까야가 번역이 완료되었다. 참고로 한국빠알리성전협회의 전재성 박사의 번역으로 예전부터 한국에 널리 알려진 《숫타니파타》의 4장과 5장은 5부 니까야 중에서도 초기의 불경에 속한다.

7.3. 대승 불교

8. 성지

모두 석가모니의 인생에 주요한 분기점이 되는 장소들이다. 룸비니(Lumbini), 부다가야(Bodhgaya), 사르나트(Sarnath), 쿠시나가라(Kushinagar)를 불교의 4대 성지라고 하고, 여기에 슈라바스티(사헤트마헤트), 산카샤, 라지기르, 바이살리를 더하여 불교의 8대 성지라고 한다.

* 룸비니: 석가모니가 태어난 곳으로 마야데비 사원이 있다. 샤카족의 도읍 카필라성이 있다.[112]
* 부다가야: 석가모니가 깨달음을 얻은 곳으로 마하보디 사원이 있다. 사원에는 그 자리로 알려진 거대한 보리수가 있다.
* 사르나트: 석가모니가 최초로 설법한 곳. 오비구에게 사성제와 무상고무아를 가르쳤다. 사슴동산을 뜻하는 녹야원이 위치한다.
* 쿠시나가르: 석가모니가 열반한 곳. 히란냐바티강에 석가모니를 화장하였다.

9. 붓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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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 불(佛), 혹은 '붓다(Buddha)'는 '깨달은 자', '눈을 뜬 자'라는 뜻이다. 한자 佛은 이 개념을 표현하기 위해 만들어진 한자다. 붓다에 가까운 발음인 弗에 '사람 인' 변을 더했다. 원래의 한국 한자음은 '붇'이었지만 시대가 흐르면서 '불'로 음운 변화했다.

보통 부처님이라고 하면 석가모니(釋迦牟尼, Shakyamuni)를 가리키지만, 그 외에도 불교에는 수많은 붓다가 존재한다.

10. 대한민국에서의 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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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 종단 목록

10.2. 한국 불교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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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대한민국 불교 유튜브 채널

대한민국에서 불교를 전법하는 유튜브 채널은 다음과 같다.
유튜브 채널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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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방송/라디오 파일:유튜브 아이콘.svg
법륜(승려) 파일:유튜브 아이콘.svg
자현 파일:유튜브 아이콘.svg
무량수여래회 파일:유튜브 아이콘.svg
광우(승려) 파일:유튜브 아이콘.svg
명상시티 파일:유튜브 아이콘.svg
월호 파일:유튜브 아이콘.svg

12. 관련 용어

12.1. 붓다, 승려 등을 뜻하는 용어

12.2. 교리 관련

12.3. 수행 관련

13. 관련 인물

13.1. 석가모니와 불제자

13.2. 고승 및 불교 사상가

13.2.1. 인도

13.2.2. 중앙아시아

13.2.3. 중국

13.2.4. 한국

13.2.4.1. 근현대

13.2.5. 일본

13.2.6. 베트남

13.2.7. 유럽

13.2.8. 아메리카 대륙

14. 부처들과 보살들, 그 외의 신들

14.1. (여래

14.2. 보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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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3. 명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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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4. 그 외

15. 불교에 영향을 받은 종교와 사상(가)

15.1. 종교

사실상 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의 종교들은 규모에 상관없이 다 불교의 영향권에서 벗어날 수 없다.

15.2. 사상(가)

16. 불교 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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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타 종교 간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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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기타

철학적인 관점에서 바라본 불교에 대한 KBS 다큐멘터리

19. 관련 문서



[1] 산스크리트어로는 다르마차크라(Dharmachakra)라고 한다. 조화와 화해의 이미지를 담고 있으며 깨달음에 이르는 8가지 길, 팔정도를 보여준다. 법륜을 간단히 말하면, '진리의 수레바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진리(법, 다르마)란, "'아트만'이라고 불리는 '나'와 '내 것'이라는 것은 사실 없다"는 것. 즉, 제법무아. 무상, 고, 무아의 핵심은 '무아'에 있다. 일체개고(제행개고)와 제행무상은 '제법(모든 법)'이 '무아(아트만이 아니다)'라는 것을 나타내기 위한 설명이다. 여기서 아트만은 '자아'나 '영혼'을 말한다.[2] 중국의 불자 수 집계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데 이 통계에 따르면 중국의 불자 수는 대략 인구 13억 중 2억 5000만 이상으로써 있다. 일단 공식적인 통계에서의 세계 불자 수는 약 5 ~ 6억 명 정도라고 본다.[3] +러시아, 칼미크어[4] 석가모니 및 부처는 불교를 잘 모르는 사람에겐 그저 '불교에서 믿는 신'으로도 알려져 있지만, 불교 교리상 믿음의 대상이 아니라 최종목표 해탈까지의 과정을 안내하는 일종의 선배멘토에 가까운 존재다.[5] 불교의 신자 수는 약 5억으로 기독교와 이슬람의 약 1/4, 힌두교의 절반 정도 수준이지만 5위인 시크교 신자 수가 약 3000만명으로 그 아래 순위의 종교보다는 훨씬 교세가 강하기에 4대 주요 종교로 묶이기에는 손색이 없다. 역사적으로는 중앙아시아와 일부 남아시아,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가 이슬람화되고 인도가 힌두화되거나 동아시아가 세속화되는 등 4대 종교 중 유난히 신자를 잃은 지역이 많다.[6] 전통적으로 '등불'로 번역된 dīpā는 팔리어에선 보통 '섬'을 뜻하기 때문에, 전통과 차별하더라도 원어를 그대로 옮기고자 하는 움직임에서는 이를 '섬'으로 번역하는 경우가 많다.[7] dīpā를 '섬'으로 번역하는 것을 선호하는 측에서는 그 근거를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dīpā의 번역어인 '섬'은 강물 사이에 있는 작은 섬을 의미한다. 불교에서는 감정을 강물에 비유하여 감정에 휘둘리고 괴로워하는 것을 '거센 흐름'이라 하였다. 또한 깨달음을 '감정이라는 강물을 건너는 것'에 비유하여, 감정이 격해지면 이 언덕에서 강을 건너 저 언덕으로 갈 때 감정이라는 강물에 휩쓸리지 말고 섬에 의지하여 건너라는 것이다. 결국 깨달음이란 감정이 격해졌을 때 스스로에 의지해서 평정심을 가질 수 있는 것을 말한다. 여기서 진리, 법(dhamma)은 '모든 법에 내 것이 없다'(sabbe dhammā anattā)는 것을 아는 것. 즉, 제법무아를 아는 것이다.[8] 없다를 의미하는 an- 이 무(無)로 번역되었고 atman은 我로 번역된 것이다. 아트만은 '변하지 않는 나', 즉 '영혼'을 의미하므로, 안아트만인 무아는 '변하지 않는 나라는 것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반의어는 아트만, 진아(眞我)다.[9] 탐진치에서 말하는 "탐욕"의 원형이라 볼 수 있다.[10] 집착의 뜻과 같다. 집착은 한자로 '잡을 집', '붙을 착'. 즉, 딱 잡고 붙어 있다는 뜻. 따라서 동굴에서 떠나라는 말은 '집착을 버려라'는 말과 같다. 잡지 말고 놓아버리고 붙어 있지 말고 거리를 두라는 것. 도망칠까봐 개에 목줄 걸고는 죽을 때까지 줄만 잡고 있을 것인가? 아니면 목줄을 풀고 개가 스스로 다가오는지 아닌지를 시도해 볼 것인가? 놓는다고 다 도망치는 것도 아니고, 거리를 둔다고 개가 도망을 칠거라곤 볼 순 없다. 도망치느냐 아니냐는 내가 개한테 어떻게 했느냐에 달려있는 것이지, 개는 다 죽어가는데 개 목줄만 잡고 있을 것인가? 삶 역시 '절대로 이것만은 놓칠 수 없다'며 붙잡고 있지만, 놓아버려야 비로소 '괴로움'에 변화가 시작된다.[11] 괴로움이 심해지면 놓아야 될 때인 걸 알고 놓을 줄 알아야 되는데, 해온 게 아까워서 놓을 줄 모르는 것이 '집착'이다. 즉, 과거에 좋아했던 것들이 점점 변해서 이젠 내가 원하는 것이랑 다른데도 불구하고 보내주지 못하는 것을 말한다.[12] 여기서 옳음은 자기만의 옳음을 뜻한다. '자기만의 옳음'으로 다른 사람을 비하하지 말라는 것. 하지만, 사회적으로 합의된 옳음으로 다른 사람을 비평하는 것까지 하지마라는 것은 아니다. 불교에서는 무엇이 올바른 것인지 논하는 것들이 많다.[13] 탐진치에서 말하는 "성냄"의 원형이다.[14] 일체개고(一切皆苦): 모든 것은 괴로움이다.[15] 탐진치에서 말하는 "어리석음"의 원형이다.[16] 이는 알베르 카뮈의 말을 떠올리게 한다. "행복이 무엇인지 계속 묻는다면 결코 행복할 수 없다. 인생의 의미를 찾아 헤맨다면 결코 인생을 살아갈 수 없다."[17] 탐진치에는 해당사항이 없으나, 숫타니파타에서는 언급된다. 원래 탐진치는 4개였는데 후대에 전해지면서 가르침도 미묘하게 변하고 그중 하나는 빠져버리게 된다.[18] 이는 최근에 팔리삼장(니까야) 보다 더 오래된 원본이 발견된 『현겁경』에서 "마음에는 네 가지 병이 있다. 첫째는 탐내는 마음과 음욕이고, 둘째는 성내고 미워하는 것이며, 셋째는 어리석음이고, 넷째는 아만심이다."라고 말한 것과 비슷하며 첫째, 둘째, 셋째는 탐진치에 해당된다. 또한 12연기 중 4취(욕취(欲取) · 견취(見取) · 계취(戒取) · 아취(我取))와도 비슷하다.[19] 보통은 사성제의 결론은 팔정도로 생각하지만, 이는 상좌부 불교에서 말하는 결론일 뿐, 숫타니파타에서는 다르다. 숫타니파타에서 사성제에 해당되는 부분을 찾아보면, "지각을 한다는 것을 잊어버리고, '지각을 잊어버리려고 하는 마음' 마저 잊어버리라"고 한다. 즉, 명상을 말하는 것.[20] 감각 기관을 통하여 대상을 인식하는 것.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하는 것을 말함.[21] Conceptual proliferation (팔리어: papañca, 한자: 戲論)[22] 불교에서는 언어학의 중에서 처격, 탈격, 소유격을 왜곡된 사유, 즉 희론의 산물이라고 풀이한다. 일반적인 사람은 무언가를 대격으로 경험한 후 그 지각된 바를 기억에 저장해서 사유화하는데, 이때 그 지각을 '나'처럼 여기는 단계에서 처격('지각의 가운데에서')이 나오고, 그 '나'에 대한 관심이 증폭되고 이를 기준으로 한 이런저런 생각이 덧붙는 단계에서 탈격('지각으로부터')이 나오며, 이로 인해 '나의 것'이라는 자아관념의 기초가 형성되는 단계에서 소유격('나의 지각')이 나온다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이런 희론이 인간의 언어 세계를 확장시킴과 동시에, 그만큼 자아 관념을 비롯한 망상을 고도화시킨다고 본다.[23] 이래도 되고 저래도 되니 아무렇게나 하자는 마음가짐은, 결국 허무해지기 때문이다. 허무해지고자 명상을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러한 점마저 극복해야 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24] 12연기의 원시적 형태. 투쟁과 논쟁(괴로움) - 좋아하는 대상(집착) - 욕망 - 쾌락과 불쾌 - 접촉 - 명색 순 이며, 12연기와는 다르게 6개의 구성요소로 이루어져 있다.[25] 불교의 제사 배격, 아트만, 업보, 윤회와 해탈 등은 원래 우파니샤드에서 나온 것이다. 여기서 아트만은 '나(아트만)란 무엇인가'를 정의하는 인간 내면의 근원 정신으로써, 여기에 육체를 더하면 불교의 오온에 해당한다.[26] an-: '~없다.'를 나타내는 접두사. 따라서 anatman(안-아트만)은 '무아(無我)'를 말한다.[27] an-: '~없다.'를 나타내는 접두사. 따라서 anatman(안-아트만)은 '무아(無我)'를 말한다. 즉, 영원불변의 영혼(아트만)은 없다는 것.[28] '무아'의 깨달음을 통해 아트만(자아)을 부정하면 윤회나 업보를 믿을 필요가 없고, 아트만을 긍정하면 '무아(안-아트만)'의 깨달음은 헛된 것이 된다. 아트만을 부정하여 나온 개념이 근본 불교의 안-아트만(무아)이기 때문에 두 개념은 본디 공존할 수 없는 것인데, 상좌부 불교 시대에 이르러 '우파니샤드의 아트만의 개념'과 '불교의 안-아트만의 개념'은 서로 공존하게 되어 모순을 만들게 된다.[29] 정작 붓다가 살아있을 적의 초기 불교에선 대놓고 정확히 이런 오해와 모순이 발생하는 걸 경계하고 있다. 초기 불교의 '무아' 개념은 영원불변한 자아(= 아트만)는 객관 세계에선 없다. 딱 거기서 멈추며 자아 자체를 부정하진 않는다. 여기에 더해 붓다는 경험론적이던 초기 불교답게 우리가 경험 자체를 할 수가 없는, 그래서 확인이 불가능한 오온 외의 자아가 있을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아(無記) 의외로 이쪽에선 모순이 발생하진 않는다. 업 개념 역시도 결정론의 우파니샤드&자이나교, 단멸론의 물질주의 학파들과는 다르게 업은 원인"들" 가운데 하나 라는 입장을 취해 환경, 상황, 결과, 동기등을 종합적으로 봐야 한다고 주장한다. 한데 사람들은 대부분 동일성 = 연속성이라 오해하는 경향이 있는데다 헷갈리는 단어 상의 문제까지 맞물려 이미 당대부터 신학자들까지 오해하는 경우가 허다했고 이는 현재 진행형이다. 이학사 - 데이비드 J.칼루파하나의 '불교철학 역사분석' 참고.[30] 우파니샤드에선 아트만, 상좌부에서는 오온에 해당한다.[31] '업보'(카르마)의 개념이다. 따라서 업보나 인과응보 등은 아트만이 있기 때문에 생기는 일이며 '올바른 아트만'을 만드는 일은 상좌부 불교에서 권장하는 바 이지만, 이는 '무아(안아트만)'해라는 근본 불교의 가르침과는 모순되게 된다.[32] 다시 한번 강조하자면, '올바름을 쌓아라'는 개념은 근본불교에는 없는 개념이다. 어떤 사람은 법구경의 내용이나 부처 오도경을 들고나와 근본 불교에 '윤회'의 개념이 있었다고 말하는데 이는 틀린 얘기이다. 법구경은 '올바름을 쌓아야 된다'는 개념과 승단의 개념을 서술하고 있는 상좌부 불교 영향하에 있는 저술이기 때문이다. (시기상으로도 숫타니파타 4,5장보다 훨씬 늦게 지어졌다.) 이는 근본 불교와 상좌부 불교의 차이점을 잘 모르는 셈. 숫타니파타 4,5장은 근본 불교, 숫타니파타 1,2,3장은 상좌부 불교에 해당되며, 이후 저술된 아함경과 법구경 등도 상좌부 불교의 영향하에 있다. 숫타니파타 4,5장에는 '윤회' 개념이 없다. 정리하자면, 근본 불교는 언어자체가 현실을 1대1로 반영하지 못하며 이로 인해 괴로움(탐욕, 싸움, 어리석음)을 유발한다고 보았고 사회와 가정을 떠나 무소의 뿔처럼 홀로 살면서 깨달음을 추구하였다. 반면, 상좌부 불교는 이러한 가르침을 전수 받은 장로들이 모여서 승단을 만들고, 사회를 형성하면서 생기는 문제들을, '올바른 것들을 쌓아' 계와 율을 지켜야지만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했다.[33] 또한 '행위(카르마)'를 중시하는 상좌부 불교에서는, 근본 불교의 명색(名色)보다는 무명(無明: 올바른 행위를 알지 못하는 것. 무명도 우파니샤드에서 만들어진 개념이다.)과 행(行: 행동, 행위)을 중요시 여기게 되고, 이에 따라 근본 불교의 원시연기(숫타니파타 4장 '투쟁과 논쟁의 경'에서 나오는 원시적 형태의 연기. 명색이 근본 원인으로 나오며, 여기서 무명은 아직 나타나지 않는다.)는 상좌부 불교의 12연기로 변하게 된다. 이는 사실상 과거의 우파니샤드 시대로 돌아간 것이다. 그런 와중에 모순되는 두 개념, 근본 불교의 안아트만(무아)와 우파니샤드의 아트만(나)은 상좌부 불교 하에서 공존하게 된다.[34] 윤회하지 않음[35] 영혼과 같은 실체가 항상함[36] 즉, 윤회 개념은 아트만의 개념 없이는 성립되지 않기 때문에 아트만을 인정해야 하나, '아트만이 없다'는 무아의 가르침과 서로 논리학적으로 모순된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불교계에서도 이에 대한 논쟁이 일어난 적이 있다.[37] 숫타니파타 3장에 나오는 12연기를 말함. 이는 원시 숫타니파타의 연기(4~5장에 나옴)와 시대가 다르다. 자세한 것은 숫타니파타 참조.[38] 원인과 결과. 하나가 다른 하나로 이어진다. 하나는 다른 하나의 원인이 된다. 이 인과에서 벗어나는 물질은 없다. 모든 물질과 개념은 다른 것이 원인이 되어 생긴다.[39] 상의상대[40] 여기서 '하나'로 보는 것을, 왜 '공'이라고 말하는 것인가? 라고 의문을 표할 수 있다. 쉽게 설명을 해보자면, 범주로 볼 때에 두 개의 범주로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범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고, 기준으로 볼 때에는 범주를 두 개로 나눈 그 하나의 기준이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고 보아 이 기준을 없애서 사건을 바라보아야 된다는 뜻에서의 '공'이 되는 것이다. 즉 모든 개념은 '범주'와 '기준'으로 추상화하여 정리할 수 있으며, 이 범주와 기준으로 추상화된 언어들은 절대적인 것으로 보이고 그렇게 믿어왔지만, 사실은 상대적인 것이라는 것이, '공사상'에서 말하는 주요 핵심 포인트라 할 수 있겠다.[41] 그럼 상대주의가 아니냐고 반문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공사상과 상대주의는 다르며, 엄밀히 말하자면 상대주의는 공사상의 일부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절반에 해당된다. '모든 것이 상대적이니까 어떤 것에도 특정한 의미를 두지 않는다'가 상대주의라고 본다면, 불교에서는 여기에 더해서 '모든 것은 상대적이니까 모든 것에 각각의 특정한 의미를 둘 수 있다'는 개념까지 포함하고 있다. 상대주의가 '색즉시공' 만을 말한다면, 불교에서는 '색즉시공'과 함께 '공즉시색'까지 말한다는 것이다.[42] 여기서 '하나로 합쳐서 이해해보자'는 것은, 개념을 '구별'하는 '기준'을 없애서 이해보자는 것이지, '하나가 되자'고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에 주의. '하나로 합쳐서 이해하자'는 '하나가 되자'랑 다른 것이며, '하나가 되자'는 것은 또다른 극단에 지나지 않는다.[43] 엄밀히 말하면, 어떤 것의 의미는 확정할 수 없어 비어 있다는 것까지가 공(空)이고, 그러한 빈 부분에 어떤 것이든 채워 넣을 수 있다는 것은 유식(唯識)에 해당한다. 여기서는 불교가 허무주의가 아닌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이해하기 쉽게 공과 유식을 다 말한 것이다.[44] 한때 이런 관점에서 상좌부불교를 '소승 불교'라고도 불렀지만, 이는 대승과 비교하여 비하적 단어로 여겨져서 최근에는 쓰여지고 있지 않다. 자세한 것은 상좌부 불교 참조.[45] '남'과 '나'를 구분 짓는 마음은 '나'라는 존재를 더 부각시켜서 '무아'의 가르침에 위배되고 '나'는 괴로움에 빠진다. 따라서 내가 괴로움에서 벗어나자 한다면, '남의 반응과 상관없이' 남을 도와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이를 간략하게 말하면, "무아(無我)를 하고 싶다면 이타(利他)를 해야된다"는 것.[46] 바라밀의 나머지 부분인, 지계(持戒)·정진(精進)·선정(禪定)·지혜(智慧)는 '개인의 깨달음'이나 '계율'을 강조한 팔정도와 비슷하다. 대승불교에서 유독 '보시'와 '인욕'을 강조하는 것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는 법이다.[47] 불경에서는 자비희사 중 가장 수행하기 힘든 것이 '희(喜)'라고 말하였다.[48] 범문을 번역하지 아니하고 음(音) 그대로 외는 일[49] 불교 깨달음의 내용이나 활동을 손가락 동작을 통해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표시를 말한다.[50] 절대자를 믿고 의지하는 종교로서의 의미는 희박한데, 이는 불교가 남에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를 믿으며 스스로가 깨닫는 것을 최우선으로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불교에 나오는 신과 보살들은 교훈이나 깨달음을 다시 상기시켜 주는 '선배'나 '멘토'로서의 역할이 더 크다고 볼 수 있다.[51] 그럼 창조하는 피곤한 일을 매일 해야하냐고 반문할 수 있다. 하지만 거꾸로 생각해보면,' 어제를 매일 버리면 오늘을 항상 새롭게 살 수 있다. '는 것을 알 수 있다. 창조라는 것은 바로 어제를 버릴 때, 오늘에 저절로 만들어지는 것이다. 굳이 창조를 하려고 애쓸 필요 없다. 이는 저절로 자라나는 것이다. 더럽고 엉망진창인 진흙탕에서도 고귀하고 아름다운 연꽃이 피어나듯이, 괴로움의 삶, 그 한가운데서도 저절로 그 꽃을 피워내는 것이 우리의 삶인 것이다.[52] 매번 망각하는 것에 자신이 없거나, 창조하기 힘들다는 경우에는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도움이 될 수 있다. "끊임없이 배우고, 배운 것으로 자신을 바꿔나간다."는 마음가짐을 가지는 것. 배우면 생각이 바뀌고 생각이 바뀌면 행동이 달라지며 행동이 달라지면 그 행동으로 자신만의 삶을 풀어갈 수 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이러한 깨달음이 결코 어렵거나 추상적인 것은 아니며 실제로 행동하고 실천하기 쉽다는 것을 스스로가 알아야 한다. 즉, '배우겠다'는 액션의 중요성을 깨달으라는 것. 이것이 창작의 기본이고 망각의 출발이며 행동의 시작이고 실천의 근거가 된다.[53] 오해가 가능하기 때문에 덧붙여 말하자면, '망각'이나 '창조'나 '배움'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 속에서, 우리 각자의 삶에 집중하게 만드는 핵심가치가 있음을 알고, 그것을 우리의 삶 속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을 말한다. 그것을 이해하는 도구가 '망각', '창조', '배움'이 되는 것이다.[54] 간화선에서 강조하는 것이, 기존의 생각을 버리고 자신만의 생각을 가지도록 결단내리는 것이다. 하지만 묵조선은 결단보다 명상에 가깝다. 선종은 이렇게 '명상'과 '결단'의 두 축으로 구성되어 있다. 명상은 모든 생각을 없애는 것이고, 결단은 모든 생각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명상은 '공(空)'에 해당하고, 결단은 유식에 해당한다.[55] 참고로 색즉시공은 공을 말하는 것이고, 공즉시색은 유식을 말하는 것이다.[56] 선정(禪定)과 지혜(智慧)를 함께 수련한다는 뜻.[57] 선불교화두 특성상, 하나의 틀에 넣어지지 않아서, 수백가지의 종파로 나뉘게 된다. 결국 이러한 흐름은 관념에서 벗어나는 것 뿐만아니라 현실에서도 벗어나게 되는 단초를 제공하는데, 때문에 도교와 합쳐져서 변질되어 버리기도 했다. 반면 한국의 불교는 수백가지의 종파를 하나로 묶으려는 시도가 끊임없이 이루어져 왔다.[58] 당시 중국의 불교는 수십 개의 다른 이론을 가지고, 서로가 자신의 이론이 맞다며 이론에 따라 여러 종파를 세웠다. 하지만 한국 불교는 종파의 차이와는 상관없이 교종이든 선종이든 방법은 서로 다르지만, 둘 다 불교로 가는 길일 따름이라고 생각했다.(한국불교의 주류가 그렇다는 것)[59] 근본 불교가 비슷하긴 하지만 결론이 다르다. 근본 불교는 언어에서 벗어나라고 하는 생각마저 벗어나라며, 언어자체를 생각하지 말라는 것이고, 지금 관념에 대한 말은 관념을 벗어난 뒤에도 '관념에서 벗어나고자'하는 관념에 집착하게 되므로 현실로 돌아와 그것을 잊는다는 것이다. '언어를 버리느냐, 불교를 버리느냐'의 차이라고 할 수 있다.[60] 왜냐하면 깨달음에 집착하는 것 자체가 아직 깨닫지 못했다는 강력한 증거이기 때문이다.[61] 성철 스님이 돈오돈수를 말했던 것도 여기에 있다. 어차피 삶 자체가 현실과 떨어져 있지 않는데, 수행해서 과거의 습관을 없앤다고 한들 무슨 소용 있겠는가? 습관에게 굴복하면서도 다시 습관에 지지않겠다는 뜻을 세우는 것이, 삶인 것이다. 완벽하게 과거의 습관을 없애려고 하는 것 자체가 집착인데, 과거의 습관을 없애려고 수행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겠는가?[62] 행위에는 생각, 일 등도 포함된다. 즉, 올바른 무엇인가를 하는 것. 팔정도를 의미한다.[63] 사실 그전 초기불교 때부터 '공'개념은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구체적이지 못했다. 상좌부 불교에서 가장 중요한 교리는 사성제팔정도였다. 하지만 용수(나가르주나)가 중론을 써서 팔부중도(八不中道)를 통해 '공'을 설명하자 비로소 그 개념이 구체화되고 각 불교 종파에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64] '나'는 나와는 전혀 다른 '남'과 공존하기 때문에, '나'는 '남'과 하나로 합쳐서 이해해야 한다는 것. 우리가 남을 돕는 이유이다. '공'개념 참조[65] 물론 저런 말을 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불교는 종교가 아니라 철학같아서 좋다는 긍정적인 뉘앙스로 말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엄연히 종교로서 불교를 따르는 신도들은 자신의 믿음을 폄하하는 듯한 느낌을 받을 수 있다. 심지어 '불교는 종교 아니니, 불경 읽으시면서 교회도/성당도/etc. 나와보세요'라는 식으로 전도하는 사람도 있다.[66] 런던대학 골드스미스 칼리지 불교윤리학 명예교수. 왕립아시아학회(Royal Asiatic Society) 회원[67] "그러나 ‘불교 현대화론(Buddhist modernism)’이라고 명명된 이런 불교 독해법은 아주 이른 시기부터 있어왔고, 현대 서구의 태도와 덜 조화되는 그 종교의 몇몇 특징들을 상쇄시킨다. 기적과 만뜨라, 주송, 부적의 효용성에 대한 믿음이 그런 사례이다. 오늘날에도 티베트 망명 정부는 중요한 사안에 대한 조언을 구하기 위해 국가의 신탁을 참고하고 있다. 신과 정령들이 거주하는 초세간적 영역에 대한 믿음과 보이지 않는 업의 힘에 대한 믿음은 아주 이른 시기부터 불교의 가르침들에서 핵심적인 또하나의 교리이다."(같은 책)[68] 여기서 방편, 원, 역, 지의 4가지 바라밀을 추가한 10바라밀도 있다.[69] 단테신곡에는 천국과 지옥을 층별로 분류했으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후세에 지어진 예술적 창작물이다.[70] 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붓다의 시대에는 약초의 이름에 '돼지'와 같은 접두사를 붙이는 언어 습관이 있었다고 한다. 한국어에서도 돼지감자와 같은 사례가 있다.[71] 무술 시범승(무술 시범단) & 무술 수련단 이들은 무술을 연마하는 스님들인데, 이 둘을 합쳐서 전투승이라고 한다. 이 자격을 중국 불교계에서 취득해야 무술 시범승과 무술 수련단에 속해서 무술 연마가 가능하고 군종 승려 지원자격이 생긴다.[72] 실제로 가수 박준형이 진행하는 유튜브 채널인 와썹맨의 촬영 중에 동국대학교 불교동아리를 방문했을 때, 동아리의 자문을 맡은 스님들이 커피를 타서 대접하는 것에 놀란 적이 있었다.[73] 문제는 이것 때문에 세간의 인식과는 달리 사찰음식이 마냥 건강식은 아니라는 점이다. 흔히 고기를 안 쓰니까 사찰음식 = 채식 = 건강식으로 오해하는데, 고기와 오신채만 없으면 뭐든 먹을 수 있다보니 기름이나 고추, 치즈, 빵 같이 살찌기 쉬운 음식도 아무 문제없이 먹는다.[74] 육식을 완전히 금하는 종파에서도 유제품의 섭취까지 금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석가모니가 고행을 잠시 중단하고 우유를 공양받아 마셨다는 기록이 떡하니 남아 있기 때문이다.[75] 진짜 내용이 짧은 불경들은 글자크기 10포인트 기준으로 A4 용지 몇 장 분량 남짓한 것도 있다. 대표적으로 정토종의 소의경전 중 하나인 불설아미타경은 내용이 2천 자도 안된다.[76] 성철 스님은 억센 동남 방언으로 유명했다.[77] 저승 10왕 개념 자체가 불교와 도교가 교류하면서 생긴 것이다. 당연히 도교가 마이너한 지역의 불교에선 저승10왕 개념을 찾을 수 없다.[78] 사실 불교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종교에서는 자살을 가장 무거운 중죄 중 하나로 간주하며 엄격히 금하고 있다. 교리가 엄격하고 빡빡하기로는 둘째 가라면 서러운 종교로 유명한 이슬람조차도 자신의 생명이 위험에 처한 경우 생존을 위해서라면 규율을 위반해도 괜찮으며, 그로 인해 범하게 된 죄는 나중에 참회하면 된다는 식으로 가르친다.[79] 지옥마다 다르지만 중죄로 가는 지옥들은 겁 단위는 금방 지나간다. 참고로 한 겁은 보통 우주 하나가 태어났다 사라져 무로 돌아가는 수준의 까마득한 시간이다.[80] 죽은 사람의 영혼을 의미하는 귀신이 아니라 아귀 같은 귀신을 말한다.[81] 흥미로운점은 바로 이런 교리 때문에 동아시아 국가들이 불교를 국교로 지정했다는 점이다. 즉 주군에 대한 충성도 선행의 일종이니 주군에게 충성하면 좋게 윤회할 수 있다는 논지로 민중의 충성심을 이끌어낼 수 있기 때문.[82] 런던대학 골드스미스 칼리지의 불교윤리학 담당 명예교수. 왕립아시아학회(Royal Asiatic Society) 회원[83] 로힝야족은 무슬림이라서 차별받았다기보다는 과거에 영국미얀마를 식민지배할 때 그 앞잡이 노릇을 했기 때문에 타 민족들의 미움을 받은 탓이 크다. 하지만, 로힝야족 말고도 불교 신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탄압받는 민족이 미얀마에는 많다. 그리고 미얀마 승려들 중에서도 특히 악명높은 근본주의자였던 아신 위라투의 이교도 박해는 그를 불교 버전 오사마 빈 라덴이라고 비난받게 만들었다.[84] https://www.msn.com/ko-kr/entertainment/tv/%EB%89%B4%EC%A7%84%EC%8A%A4%EB%8B%98-%EB%89%B4%EC%8A%A4%EB%A3%B8-%EC%A0%84%EA%B2%A9-%EC%B6%9C%EC%97%B0-%EC%9C%A4%EC%84%B1%ED%98%B8-%EA%B7%B9%EB%9D%BD%EC%99%95%EC%83%9D-%EC%9D%B8%EA%B8%B0-%ED%8F%AD%EB%B0%9C/ar-BB1mcOao[85] 한족 티베트 불교 신자는 주로 북중국에 많다. 장위안도 티베트 불교 신자이다.[86] 여러 부파로 갈라지기 전까지의 불교로 근본 불교, 원시 불교라고도 한다. 다만 원시라는 표현이 단어의 원래 뜻과 달리 '미개한', '발전이 덜 된'이라는 늬앙스를 주기 때문에 보통 근본 불교라는 표현을 쓴다.[87] 남방불교의 기록에 의거함. 북방불교의 기록인 세우의 부집이론은 대중부로 분류하고 있다. (부집이론 소승20부)[88] 상좌부라는 단어는 이 Theravada와 더 윗단계 분류인 Sthaviravada를 지칭하는 말로 혼용된다. Sthavira와 Thera는 산스크리트어팔리어냐의 차이일 뿐 둘 다 장로, 상좌를 뜻하기 때문에 중국에서 처음 한자로 번역될 때 둘 다 상좌부로 번역된 것으로 보인다.[89] 쿠샨 왕조,인도-파르티아 왕국 문서 참조[90] 과거 학설은 에프탈과 알촌 훈을 동일시하였으나, 현대 학계는 부정한다.[91] 대한민국과 다르게 티베트 불교는 후기 불교다.[92] 승려는 도성 내에 출입할 수 없었고, 고려시대에 주요 도시 시가지 안에 있던 사찰들은 일부 왕실의 원찰 등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헐렸으며, 깊은 산중에 있는 일부 산사를 제외하고는 수시로 유림들의 방화와 파괴레이드에 시달려야 했다. 유림들은 수시로 몰려다니면서 불상을 훼손하고 절을 불태우기도 했는데, 심지어 고려시대 국가적인 대형 사찰이자, 태조 이성계와 무학대사에게 연고가 있어서 왕실에서 유생들의 레이드로부터 보호해주었던 양주 회암사조차 흔적만 남기고 사라지고 말았다. 또한 어떤 지방관들은 부임지의 사찰들을 훼철하고 승려들을 환속시키기도 하였으며, 승려들을 부역에 동원하고, 가혹한 공물을 수취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조선 후기가 되면, 대부분의 사찰에 사미계를 받은 사미승들만 남고, 구족계를 받은 스님들은 거의 찾아보기 힘든 사태가 벌어지기도 하였다. 구족계를 수계하려면, 구족계를 수계한 스님 열 명을 모셔야 하는데, 조선 후기가 되면 도저히 구족계를 수계한 스님 열 명을 한 번에 모을 수가 없어졌기 때문이다.[93] 다만, 태조 이성계 등 몆몆 역대 군주들은 불교를 믿기도 했다.[94] 스리랑카, 미얀마, 캄보디아, 라오스[95] 북미/유럽이 일본식 선불교를 퍼뜨린 인물로는 스즈키 순류와 데시마루 다이센이 있다. 전자는 미국에서, 후자는 유럽에서 활동했다.[96] 볼고그라드에서 남쪽으로 달리면 나오는 칼미크 공화국의 수도 옐리스타에는 이게 러시아가 맞나 싶을 정도로 불교 사원과 건축물들로 가득하다. 오히려 분위기만 보면 유럽 한복판의 몽골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수준이다.[97] 대표적으로 용수(龍樹, 나가르주나)의 『대지도론(大智度論)』의 현밀이교설(顯密二敎說), 『십주비바사론(十住毘婆沙論)』의 난행이행이도설(難行易行二道說), 계현(戒賢)의 삼시교설(三時敎說)과 지광(智光)의 삼교설(三敎說) 등이다.[98] 애초에 인도에서는 상좌부 불교나 대중부 불교 및 대승불교로 이어지는 역사적인 발전 속에서 자연스럽게 교리가 이론화됐기 때문에 굳이 따로 불교의 교리를 체계화할 필요가 없었지만, 인도와는 아예 언어를 비롯해 문화적 풍토가 완전히 다른 중국이나 티베트, 동남아시아에서는 그들과는 사고 방식도 문화도 언어도 전혀 다른 땅의 종교 및 관련 이론을 거의 백지 상태에서 도입한 상황이었다.[99] 소의경전이란 무조건 석가모니 부처의 친설인 경장이어야 할 필요가 없고, 불교의 계율인 율장이나 불교의 교리 해설서인 논장도 엄연히 소의경전의 자격이 있다. 율장을 소의경전으로 하는 계율종(율종)이나 논장을 소의경전으로 하는 삼론종처럼.[100] 원효는 법공(法空)과 보법(普法)을 기준으로 하여 석가여래의 설법 전체를 삼승(三乘)과 일승(一乘)으로 나누고, 전자를 다시 별상교(別相敎)와 통교(通敎)의 두 가지로, 후자를 수분교(隨分敎)와 원만교(圓滿敎)의 두 가지로 나누었다. 삼승별교(三乘別敎)는 사제교(四諦敎), 연기경(緣起經) 등을 말한다. 삼승통교(三乘通敎)는 반야교(般若敎)와 해심밀경 등을 말한다. 일승분교(一乘分敎)는 영락경(瓔珞經), 범망경 등을 말한다. 일승만교(一乘滿敎)는 화엄경과 보현교(普賢敎)를 말한다. 삼승이 함께 배우는 것을 삼승교라 하며, 그 중에서 아직 법공(法空)에 밝지 못한 것을 별상교라 하는 반면에, 법공을 두루 설하는 것을 통교라 한다. 그리고 이승(二乘)과 함께 하지 않는 것을 일승이라 하는데, 그 중에서 아직 보법(普法)을 다 드러내지 않은 것을 수분교라고 하는 반면에, 보법을 완전히 밝힌 것을 원만교라고 한다. 여기에서 말한 법공은 객관적 세계가 불변의 실재로서 존재하지 않는 이른바 공(空)라는 것을 의미하는 반면에, 보법은 모든 존재가 상입상시(相入相是)함을 의미한다. 원효의 사교판에서도 다른 교판들과는 달리 영락경, 범망경 등과 같은 대승보살(大乘菩薩)의 실천윤리를 설법한 경전을 반야경이나 해심밀경보다 우위에 두고 있다.[101] 티베트는 중국보다 늦게 불교를 수용한 동시에 7세기 인도 불교의 논사와 중국 불교의 화상이 티베트(토번)의 짠뽀(왕) 앞에서 벌인 대론(교리 논쟁) 결과 인도 불교쪽이 승리, 이후 인도 불교의 교학 체계를 거의 그대로 받아들여 체계화했고, 국가 지원으로 불경을 번역했다. 때문에 티베트 불교는 중국 불교와는 구별되는 교리 학습 체계를 지니며 인도 불교의 직계로 평가될 정도가 되었다.[102] 다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중국 불교, 그 중에서도 천태종의 기준에 맞춘 것으로 화엄종이나 법상종은 물론, 티베트 불교나 동남아 상좌부 불교의 설명과도 다르고 천태종의 기준이 절대적인 것은 결코 아니라는 점을 부기해 둔다.[103] 쉽게 말해 어려운 전문용어를 가지고 말했더니 대중들이 어려워해서 알아듣기 쉬운 일상용어로 다듬었다는 뜻이다.[104] 반야경, 화엄경, 법화경, 열반경 등을 제외한 대부분의 대승 불경 전체를 가리킨다.[105] 불교를 좀 겉핥기로 이해한 사람들 중에 이런 식으로 공 사상을 허무주의로 이해해 버리는 경우가 꽤 많다.[106] 논장 가운데서도 특히 훌륭한 것은 경장 즉 석가모니 부처의 친설과 같은 반열에 오르는 영예가 주어지기도 한다.[107] 둘 다 팔리어 율장이다.[108] 애초에 티베트를 제외하고 한국을 포함한 동북아시아 불교권이 대체로 선(禪)이라 불리는 명상과 '마음 수행'을 이론보다 중시하는 중국식 선불교가 대세인데, 후대로 갈수록 문자로 기록된 경론의 학습보다 '불립문자'를 내세운 선불교가 동북아시아에서 불교의 대세가 되고, 험악하게 표현하면 "이론 따위 뭐가 중요하냐 명상으로 깨달음을 얻으면 그만이지"라는 경향이 커지다 보니, 불교라고 하면 공연히 뜬구름잡는 선문답이나 하고 아무도 없는 곳에서 혼자 명상이나 하는 도를 아십니까 수준의 '겉멋만 들었지 자기들 교리에 대한 이론도 뭔가 정리되어 있지 않고 그렇다고 '중생 구제'를 뭔가 행동으로 실천해 보이거나 현실 참여도 하려 하지 않는 종교'인 것마냥 이미지가 퍼져나간 것이다. 이는 근대에 들어 그리스도교 전도 과정에서 불교가 제대로 저항을 못하고 교세가 밀리게 되는 한 원인으로 작용했으며, 현대에도 대중들 사이에 불교의 진입 장벽을 잔뜩 높여서 '뭔가 고차원적이고 대단한 내용 같기는 한데 이해하기는 어려운' 종교로 인식되어 불교가 대중 전도에 있어 그리스도교보다 신통한 성과를 거두지 못하게 되는 한 원인으로 지적되고 있다.[109] 생각해 볼 점은, 석가모니같이 사회의 급진적인 변화를 추구하는 철학자의 입장과 지배 계층의 이해관계를 어느 정도 고려해야 하는 정치가의 입장은 다르다는 것이다. 결국 필연적으로 일어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110] 한글번역본과 우측상단에 원문을 클릭하면 한자원문까지 볼 수 있다. 서버가 동국대에 있는 작은 서버라서 최초 로딩 속도가 느릴 때가 많지만 대부분의 불경이 한글로 번역되어 있어서 유용하게 사용된다.[111] 니까야는 저본이 2개가 있다. 남쪽으로 전해져 팔리어로 써진 니까야와 북쪽 중국으로 전해져 한자로 번역된 아함경[112] 4대 성지 중 유일하게 인도가 아닌 네팔에 위치해 있다.[113] 본래 한국의 종단 중 2위였으나 2015년 12월 15일부로 한국불교종단협의회 회비 미납, 폭력 사태로 인한 총무원장 구속 등으로 회원 자격이 정지되었다가, 2016년 7월 12일 자격이 회복되었다.[114] 빔라오 람지 암베드카르가 만든 맹세로 알려져 있다.[115] 1,000명 중 999명을 죽인 전승도 있다.[116] 이름에 불교가 들어가긴 하지만 불교 분파가 아닌 엄연한 민족 종교이다.[117] 구약성서, 신약성서, 금강경, 동경대전 등 여러 종교의 경전들을 열람했다.[118] 부처(석가모니)가 저술한 핵심 경전이란 뜻이다.[119] 그의 범신론은 불교 및 도교 사상과 유사하다는 설이 있지만, 정작 그가 불교를 공부했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다.[120] 불교 신자이긴 하나 그 신앙이 사상에 영향을 준 사실은 없으며, 억불 정책을 쓰라는 상소를 쓴 것으로 보아 불교도이기 이전에 성리학자로 보는게 옳다.[121] 과거 일각에선 이를 놓고 유학자의 관점에 입각한 불교 비판이라 폄하하기도 했으나, 동국역경원 역경의원을 역임한 박건주 능가선연구소장이 저술한 책 '선종사상 왜곡의 역사와 간화선'에서 전모를 밝히고 있다. 보면 간화선 제일주의와 선종 문헌에만 빠져있던 당시 선승들의 문제를 추사가 청나라 옹정제의 교서까지 인용하며(추사 본인은 옹정제의 교서라는 걸 숨겼다) 비판한 것이다.[122] 다만 도킨스의 평가에서 불교가 제외된 이유는 오리엔탈리즘적 편견이라기 보단 현대 종교를 비판하는 과정에서 현대 불교는 표면적으로는 합리성, 비배타성을 취하고 있기 때문이라고도 볼 수 있다.[123] 삼악도의 나머지 두 개인 지옥도와 아귀도. 나머지 아수라도와 인간도, 천상도는 삼선도라 부르며, 삼선도와 삼악도를 묶어서 육도라고 부른다.[124] 패리스 힐튼의 애완 돼지, 빌 클린턴의 애완 고양이, 마이클 잭슨의 애완 침팬지 등.[125] 불교에서는 이를 전생의 선업에 따른 인연의 하나라고 설명한다.[126] 유럽의 축산 관련 과학자들과 생물학자들에 의하면 스트레스를 안 받을수록 고기 육질이 부드러워져서 더욱 맛있다는 결과가 나왔다고 한다. 이 때문에 유럽의 축산업자들은 어지간하면 방목을 선호하며 심지어는 농장에 관현악 음악을 틀어서 소나 돼지들이 그걸 감상하게 해주기도 한다.[127] 튀르크인들이 이민족 농민 집단 전반을 일컫는 멸칭인데, 중앙아시아에서는 불자들 전반을 비하하는 어휘로도 사용되었다.[128] 불교의 대표 경전인 반야심경이 대중적으로 널리 전파되는 계기가 된 영상이다. 이로 인해 불교에 대한 긍정적인 인식이 쌓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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