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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2-14 22:45:10

공 사상

1. 의미2. 오해와 교정

1. 의미

공 사상( )은 인간을 포함한 일체 만물은 직접적 원인인 인(因)과 간접적 원인은 연(緣), 즉 인연에 의하여 생겨났고, 인연에 의하여 변할 뿐, 고정불변하는 실체가 없다는 불교의 근본 교리이다.[1][2] 도교의 일부에서도 채용되며[3] 달리 말하면 우주만물은 항상 시공간의 인연에 따라 변하고 변하는 의미로 볼 수가 있다.[4] 스님들끼리는 구어적으로 '공도리'라고도 한다.

그러면서 이 공(空)은 만물을 만들어내고 만상을 나타내는 근원격에 해당되며, 만물 가운데의 하나조차 아니며 만상 가운데의 하나도 아니며, 위에 서술한 것처럼 공(空) 그 자체가 인연(因緣)에 의하여 만물이라고 하는 본질의 온갖 것들이 되고, 만물을 필요조건으로 하여 만상이라고 하는 현상의 여려 가지가 되는 것이며, 그렇기에 공(空)은 실상(實相)이기는 하되, 그 자체는 물질도, 현상조차 아니며 제로가 아닌 실재(實在)한다고 할 수 있는 그 '무엇'이며, 그 '무엇'이라고 하는 것이 어떠한 것인가를 밝히는 것이야말로 공(空)의 본성을 나타내는데 매우 중요한 것이라고 한다.

또한, 우주 삼라만상은 전부 이 공으로 돌아가지 않는 것이 없고 우주 삼라만상 모든 것이 이 공에 해당되며, 비어 있으나 둘이고 전체이며 곧 삼라만상을 아우른다고 한다.

그러면서 이 공 사상은 초기 불교에의 무아(無我)와 무상(無常)과 연기설(緣起說)을 확장 및 재해석하는 것으로써 부처의 기본입장을 보다 명확하게 밝힌 대승불교의 핵심사상이라고 한다. 대승불교에게 있어서 이 공 사상은 사상적으로 지탱하고 있는 철학사상이라고 할 수가 있느 것은, 아주 중요한 위치에 속해있는 것이라고 한다. 이 공 사상은 맨 위에서도 설명한 것처럼 '인간을 포함한 일체만물에 고정불변하는 실체가 존재한다'라는 것 자체를 부정하고 인연에 대한 해석이라고 할 수가 있는 것이라고 한다.

일체 만물, 이 세계의 모든 것, 우주 삼라만상, 그리고 이 우주만물은 단지 인연에 따라 일시적으로 생겨났다가 얼마 안가 소멸되어버리는 것에 지나지 않기에 실체가 없으며, 그렇기에 존재론적으로나 가치론적으로나 모든 고정된 속성을 부정한다고 한다. 그리고 이 부정은 단순히 소극적인 허무가 아닌 모든 속성으로부터 자유롭게 되는 절대적으로 자유롭게 존재하는 방식을 시사한다고 한다. 그러면서 유(有)라고 하는 개념에 대한비유(非有)로 존재를 부정한 뜻도 있는데, 여기에서 말하는 '존재의 부정'은 문자 그대로 존재 그 자체의 부정이 아닌 '존재하는 모든 것은 자체(自體), 실체, 아(我)가 없다'라는 것을 뜻한다고 한다. 무(無) 또는 허무와는 그 의미가 다른 실상의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

이러한 공 사상은 서방에서 나타난 허무주의와는 다르며 모든 것의 덧없음을 뜻하지만, 모든 것을 포기하거나 모든 것이 필요 없음을 나타내는 게 아니라 모든 물질과 관념을 뛰어넘어 해탈함을 나타내는 사상이라고 볼 수 있으며, 비로자나불은 이러한 공(空)의 인격화에 해당된다고 한다.[5]

교토학파의 일원인 하사마스 신이치라고 하는 사람이 지은 저서인 <동양적 무의 성격>에 따르면 공(空)은 "무일물성",허공성 , 즉심성, 자기성, 자재성, 능조성 총 6가지 특성을 지니고 있다고 하는데, 맨 먼저 무일물성은 어떠한 집착의 흔적조차 없고 내외의 대상을 전부 끊어버리고 어떠한 것에서도 흔들리는 경지를 말하며, 허공성은 총 10가지 의미를 내포하는데, 이 10가지의 의미들은 '그 어떠한 장애도 받지 않고 모든 것에 널리 퍼져 있고[6] 취하고 버리거나, 귀하고 천하거나, 이거니 이거니 관계없이 모든 것을 평등히 받아들이고 타자로부터 한정되지 않으므로 한계가 없이 광대무변하고 외형상으로나 내면상으로는 어떠한 모습이 존재하지 않고 맑고 깨끗하며, 그렇기에 마음이 명경지수에 이르러있고 시작이 존재치 않고 불생불멸이고[7] 자로 재거나 기하학적으로 측량할 수가 없고, 참이라던가 미 등으로 헤아릴 수가 없고 공이라고 해도 단순한 무(無)가 아닌 유무(有無) 자체를 초월하여 유(有)도 무(無)도 아닌 무적 주체이고 공에 대한 머무르는 것마저도 집착이므로 그러한 공마저 끊어버리는 대자유이고 어떠한 소득도 없는, 다른 것은 물론 자기자신에 대한 소득이 전혀 없으며, 그렇기에 불가득이며 무탐이며 적빈'이라고 한다.

즉심성은 허공 자체에는 생명이 존재치 않으나, 공에는 마음이라는 포근한 생명을 지니며, 그러나 그것은 단순히 생명 혹은 마음이 아니며, 허공과 같은, 그렇지만 생명이 있는 진짜 마음으로 진정한 생명과 자각이 흘러 넘치며, 그것이야말로 무념무심의 마음이자 무각의 각이 공에는 서려있음을 뜻한다고 한다. 자기성은 주체적인 마음으로, 이것은 대상적으로 보이는 마음이 아니며, 나아가 주객으로 나누어진 이후의 이분법적인 자기가 아닌 주객으로써 나누어지기 이전의 주체적 자기를 가리키는 뜻이라고 한다.

자재성은 '공이 주체적인 주체일 뿐만 아니라, 완전한 자재한 주체'를 뜻하는 것인데, 어떠한 대상, 심지어 부처님에게도 속박되지 않는 진실로 자유로운 경계로, 불교에서 말하는진정한 해탈은 이렇나 자재성이 철저하게 되는 것을 말하는데, 어디에 집착하거나 걸림이 없이 즉각적으로 상황에 응해 자유로이 행동하는 유희삼매의 경지라고 한다. 이를 인격적으로 가리켜 무위진인 내지 무의도인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능조성은, 흔히 말하는 창조성과 같은 것으로, 인간은 도구를 만들어내기 시작하면서 찬란하 인류문명을 형성해내었는데, 그러나 아무리 인간이 인간에게 유용한 물건들을 만들어내었다고 한들, 생명만을 창조할 수 없는 등 엄연히 한계가 존재한다.

그러한 의미에서 보자면 신은 모든 생명조차 만들어내는 것이 가능한 전지전능창조자라고 할 수가 있으나, 이것은 실증되지 않은 신화에 지나지 않으며, 단지 그렇게 믿어질 뿐이라고 한다. 흔히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는 말이 있는데, 이것은 단순한 신앙이 아닌 유심의 실증으로, 이러한 마음은 물과 같아 거기에서 물결이 수시로 일어나고 이윽고 사라지되 물 자체는 불기불멸하는 모습을 보인다. 물을 바탕으로 무수한 물결이 생겨났다 사라지듯, 공으로부터 숫한 사물들이 창조되고 사라진다고 한다. 그렇기에 공은 광대무변하면서도 못 미치는 데가 없으며, 모든 생명의 바탕이자 창조자라고 할 수가 있는 것이라고 한다. 이러한 점에서, 공이라고 하는 개념 자체를 인격화한 비로자나불이 '변일제처요 광명변조'라고 불리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면서 이 공은 흔히 말하는 '아무것도 없는 허공, 즉 무(無)'로써의 의미가 아닌 깨달음의 세계에서 말하는 모든 가능성(전지전능)을 지니고 있으며, 우주를 운영하는 항상(恒常)한 것인 진여(眞如 = 참나)[8]의 작용(성품)을 이르는 말이며, 그렇기에 진여와 공은 같은 의미가 된다고 한다. 진공(眞空)은 묘유(妙有)라 불리는 것이며, 우주만물에 내재해 있으면서도 초월해있는 힘이라고 한다.

거기에, 이 세계 우주 삼라만상의 본체라고 할 수가 있고 업력(業力)처럼 우주를 창조해낸 원동력과 같다고 한다.[9] 이 공(空) 안에는 우주 삼라만상의 모든 종자를 지니고 있으며, 우주의 진리이자 연기 법칙의 근원과도 같다고 한다. 해당 사이트에 따르면은, 이 공(空)이라고 하는 개념은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오는 카오스((χαος))를 떠오르게 한다고 한다.

또한, 채사장의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제로 편>이라는 저서에 따르면은 우파니샤드에서 말하는 브라흐만, 그리고 도가에서 말하는 , 그리고 같은 종교에 속하는 개념인 열반처럼 '특정한 존재나 인격적 주체가 아니라 우주 전체, 혹은 우주의 근본원리이자 거대한 법칙으로써의 신격'이라는 유형에 해당이 된다고 한다. 그러면서 추상화 과정의 끝이자 궁극의 전체를 상징한다고 한다.

반야심경에서는 물질적인 현상과 공(空)은 서로 다른 것이 아닌 서로 떠날 수가 없는 상관관게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렇기에 흔히 쓰일 정도로 유명한 구절인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라는 말로 표현한다고 한다. 사물의 본질이 공으로 파악될 뿐만 아니라, 공은 그 파악되는 사물을 떠나서는 성립될 수가 업음을 의미하는 것이다.[10]

불교에서 공에 대한 언급은 초기경전에 해당하는 숫타니파타에서부터 등장한다. 또한 《맛지마 니까야》의 "소공경"에서도 공의 개념을 설명하고 있다.[11] 대승 불교의 공관은 이 초기의 공 사상을 받아들여 발전시킨 것이다.
"모가라자(Mogharaja)여, 항상 마음을 가다듬어 아견을 버리고, 세간을 비었다(sunnata)고 관하라. 이렇게 하면 죽음을 뛰어넘는다. 이와 같이 세간을 관찰하는 자를 죽음의 왕은 보지 못한다."
숫타니파타 5:15

중국에서 포교 목적의 요약본으로 최초로 전래된 경전으로 지목되는 《사십이장경》에서도 공에 대한 언급이 등장한다. 이는 중국에 처음으로 전래된 불교가 대승 불교였기 때문이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도는 형상이 없으므로 그것을 알려고 해도 이익이 없으니, 오로지 뜻을 지켜 행하여야 한다. 마치 거울을 닦아 때가 없어지면 밝음이 나타나 곧 스스로 형상을 보게 되듯이, 욕심을 끊고 공(空)을 지키면 곧 도의 진리를 보게 되고 숙명을 알게 된다.”

불교에서 공(空)은 반야심경을 비롯하여 대승 불교 계통에서 특히나 강조된다.[12][13] 이는 존재가 자성(自性)[14]을 가지고 있지 않음을 뜻하는데, 모든 것은 다른 것들에 의존하여만 존재할 수 있기 때문에 자성을 가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무아[15]는 자아가 자성을 가지지 않고 공함을 말한다. 설일체유부 등 일부 상좌부 학파에선 이와 달리 만은 실제로 존재함, 즉 공하지 않음을 말했다.[16] 그런데 용수의 중관학파[17]는 이에 반대하여 모든 것이 공하다고 주장한 것이다. 설일체유부에서 실제로 존재한다고 말한 '법(다르마)'들도 전부 다른 것들에 의존하여 존재하는 공한 것이라는 것이다. 심지어는 공함도 공하다.

이에 대하여는 나가르주나가 니야야학파[18]의 반론에 대해서 직접 공성 개념을 확실히 한 "회쟁론" 본문이 도움 될 것이다. 니야야학파가 흔히 착각될 수 있듯 '모든 것'에 초점을 두고
만일 그대가 "모든 것의 자성은 그 어디든 존재치 않는다."라고 말한다면, 자성을 갖지 않는다는 그대의 바로 그 말은 결코 자성을 부정할 수 없다. 그렇다고 해서 만일 "모든 것은 자성이 없다."라는 바로 그 말만은 자성을 갖고 있다고 말한다면, "모든 것은 자성이 없다."라는 그대의 주장은 파괴될 것이다.
"회쟁론" 1ㆍ2

위와 같이 러셀의 역설로 불리는 모순을 이용해 공성 개념이 성립지 않음을 보이려 하자 나가르주나는
사물들이 다른 것에 의존하여 존재하는 것을 공성이라고 부른다. 왜냐하면 다른 것에 의존하여 존재하는 것은 자성이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 '모든 것에는 자성이 없다'라는 나의 말은 자성을 갖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나의 논의는 파괴되지 않는다.
"회쟁론" 22ㆍ24

위와 같이 친절한 개념 재제시만으로써 논박하고 만다. 즉 '공'이란 모든 현상ㆍ사물이 그 효능이나 존재 면에서 허무하다는 개념이 아니라 다른 것에 의존한다는 개념일 뿐이라는 것이다.

용수의 해석, 곧 대승 불교 일반에서는 이처럼 공성이 연기를 설명하는 개념, 연기성 그 자체가 된다. 여기서 모든 것이 공하다는 것은 곧 집착할 대상 자체가 없음을 말하고 이것이 불교의 근본 사상을 이룬다.

2. 오해와 교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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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즘은 공(空)을 이러한 태양계형 원자 모형에 대입하여 설명하기도 한다. 공의 개념을 직관적으로 보여줄 수 있다고 인용되곤 하지만, 내용은 잘못된 것이다.

저것보단 파이만 다이어그램이나 m이론이 공사상이 좀더 적합하다 할 수 있다. 파이만 다이어그램은 진공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쌍생성이 일어나고 쌍소멸해서 다시 진공이 되는 과정을 설명할 수 있으며, m이론은 우주 전체에 작용하는 거대 막을 포함하는 이론으로 우주 전체의 상호작용을 설명한다. 좀더 쉬운 예로는 EPR 패러독스가 있다.

현대 철학적으로 보면 공은 존재들이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개념적으로 구성한 것에 지나지 않음을 말한다고 볼 수 있다. 우리는 평소에 내가 있다고 믿지만 이것은 나에 해당하는 영혼이 존재해서가 아니라 나라고 부를 것을 우리가 구성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간혹 현대과학에서 원자의 대부분이 실제로 비어있다는 것을 공과 연결시키는 사람도 있는데 이는 아주 잘못된 접근이다. 불교에서 공은 실제로 사물이 비어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성(自性)이 결여되어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19]. 일부 과학사회학이나 반실재론에서 말하듯이 원자를 비롯한 과학적 개념이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렇게, 즉 이해하기 쉽도록 구성한 것이라고 보는 게 그나마 올바른 접근 방식이다[20]. 그래도 옛날과 달리 원자의 구성을 통해 설명하는 것이 그나마 공 사상의 내용을 가장 직관적으로 보여줄 수 있어서 위와 같은 태양계형 원자모형 그림은 비록 나중에 잘못된 것임이 밝혀지긴 했어도 종종 인용된다.

'개념적으로 구성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라는 논점에 대해 용수의 대표저작인 [중론]을 인용해보자면 대강 이런 식이다.

"누군가 근원적으로 실재하는(intrinsically real) 번뇌[21]를 지녔다면, 어떻게 번뇌를 없애겠는가? 누가 근원적인 본질(intrinsic essence)을 없앨 수 있는가?

누군가 근원적으로 실재하지 않는(intrinsically unreal) 번뇌를 지녔다면, 어떻게 번뇌를 없애겠는가? 누가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을 없앨 수 있는가?"[22]

'개념적으로 구성된 것에 지나지 않아 세상 모든 것은 이슬과 같고 눈의 티끌과 같고 벼락과 같고 신기루와 같다'라는 부분을 읽고나서 '실존한다'에서 '실존하지 않는다'의 반대 극단으로 빠지기 쉬운데, 여기서 용수는 깔끔하게 반대 극단 또한 '존재하지 않는 것을 없앨 수 있는가'라는 말로 논파한다. 다시 말하자면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개념적으로 구성된 것에 지나지 않고, '존재하지 않음'을 자성으로 지닌다면 그 또한 다른 것을 자성으로 지니는 것만큼이나 모순으로 귀결될 수 밖에 없다는 논점이다. 사실 이런 '양 극단을 모두 거부한다'라는 전통은 원시불교 때부터 존재해왔던 것으로, 석가모니 또한 '사람은 죽은 이후에 존재합니까, 아니면 존재하지 않습니까?'라는 질문에 대해 '존재한다고 하면 상견(eternalist)이고,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면 단견(annihilist)이다. 둘 다 바른 견해가 될 수 없다'라고 주장했다.

용수의 주장을 요약하자면, 상술된 대로 '자성이 없어 공하다'라는 주장은 즉 모든 것의 '성질'은 다른 것들과의 연기적인 관계성에서만 찾을 수 있으며, 그 스스로만으로서는 성질을 성립시키지 못한다는 의미를 가진다.[23]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사고를 형성하는데 필요불가결한 요소인 '언어'는 그 성질 상[24] 지칭하는 대상에 '자성'처럼 느껴지는 성질을 부여한다. 이 언어를 잘 분석해보면 자성이 있다는 생각은 결국 어떤 경우에든 모순으로 귀결되고, 따라서 편리한 도구에 불과한 언어에 지나치게 얽메이는 것은 어리석으며, 이런 잘못된 견해가 뭇 중생을 고통으로 이끈다는 주장.[25]

언어의 사용은 심리적인 현상이기에, 마음을 아뢰아식을 포함한 팔식으로 나누어 그 작용을 연구한 유가유식행파는 종종 중관학파와 대치되는 주장을 했지만, 사실 서로의 논서에 열심히 해설본을 적어가며 공부하는 상호보완적인 부분도 많았다고 한다. 유가유식행파가 해석하는 공사상은 '모두 마음에 비친 그림자(projection)일 뿐, 마음을 떠나면 생하지도 멸하지도 않는다'라는 입장이다. 이것은 극단적인 유심론으로 해석될 가능성이 있고, 또한 모든 장식이 아뢰아식에 이미 내재되어있다는 주장을 따르자면 확실히 그렇게 해석되어야 할 당위가 커지지만, 단지 마음이 경험을 어떻게 처리하는가에 대한 주장인 현상학적인 해석 또한 가능하다. '모두 마음 속에 있다'는 주장을 철두철미하게 믿어서 절벽에서 뛰어내리거나 달리는 버스 앞에 망설임없이 뛰어들고 싶은 사람은 없지 않겠는가.

이런 '언어로는 진리를 표현하지 못한다'라는 주장은 중국의 도가사상과도 궤를 같이하고, 그 영향을 받은 선불교가 이어받아 '교외별전, 불립문자'와 좌선수행을 교학수행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는 풍조를 낳았지만, 오히려 수많은 화두와 그에 대한 해설집, 그리고 해설집에 대한 해설집 등을 낳았다는 것 또한 아이러니다. 또한 전부 다는 아니라도 적지않은 경우 선불교의 조사들이 선불교적인 깨달음을 얻기 전 교학에 이해가 깊었다는 부분 또한 아이러니. 하지만 상기한 공사상은 부파불교에서의 논장의 발달과정처럼 복잡다단하게 전개되어 초기불교의 소박하고 단순한 힘을 점점 잃게 되었기 때문에, 선불교의 불립문자는 사실 이런 실용적이지 못한 부분에 대한 자정운동이었다고도 볼 수 있겠다.


[1] (네이버 지식백과) 공 사상(空思想) (문화콘텐츠닷컴 (문화 원형 용어 사전), 2012., 한국콘텐츠진흥원). 그렇기에 현상계에 나타나는 모든 사물들은 다른 것과의 관계 속에서 생멸하며, 고정 불변하는 자성이 없고 오로지 사물은 원인과 결과로 얽힌 상호의존적인 것이기에 무아이며 곧 무아이기에 공이 된다고 한다.[2] 불교에서 나타난 교리이지만 원불교에서도 받아들였다.[3] 공 사상은 노자의 도 사상과 유사하다.[4] 그렇기에 인간을 비롯한 우주만물은 서로 연결되어 의존하고 인연에 의하여 생멸하며 늘 변화한다고 한다.[5] 그러면서 청정법신 비로자나불은 불교의 최정점에 서 있는 불교의 전부라고 할만큼 매우 중요한 존재이며, 석가세존의 법신불이자 진불일 뿐만 아닌 삼천대천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부처들의 법신체이기도 하며, 현상계와 본체계 및 해탈적멸계를 포함한 대우주의 본체를 자신의 것으로 한, 실로 대우주 그 자체이자 대우주의 주인이라고 할 수가 있고 불교의 궁극적이고 완결판이라고 할 수가 있는 존재라고 한다. 그러면서, 태양처럼 온 우주법계를 비추고 있으며, 태양이 미치지 못하는 곳들, 즉 깊은 물속이나 땅속,동굴속은 물론 사람의 마음속마저 비추어해내고, 우주본체와 하나가 된 무량한 광빛으로 우주만물을 정화 및 길러낸다고 한다.[6] 이 '모든 것'에는 심적인 곳까지 미치며, 그렇기에 실질적으로는 허공보다도 더 넒은 범위를 가진다고 한다.[7] 물론 그렇다고 해서 전혀 움직이지 않는 고정체를 의미하는 것은 아닌데, 이는 동에 의한 상대적인 개념으로써의 부동이 아님을 뜻한다고 한다.[8] 우주만유의 실체로, 현실적이며 평등 무차별한 절대의 진리이자 진성(眞性)이자,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는 참되면서도 한결같은 마음을 가리킨다. 그러면서, 모든 존재들의 토대이자 무시간과 무공간으로 영속하는 절대자라고 한다. 그러면서, 궁극적 실재는 모든 존재에 편재해 있기에 개개의 모든 존재는 잠재적으로 전체이며, 종교적인 언어로 말해 모든 개인은 잠재적 부처와 같다고 한하며, 종종무진연기 속에 펼쳐지는 삼라만상은 이 진여가 드러남에 해당되는 것이라고 한다.[9] 인간과 우주 만물은 우주의 본체로부터 나온 것이며, 우주본체가 지닌 힘과 중생이 지은 공업(共業)에 의하여 이 우주만물이 생성이 되었으며, 그 자체로 우주의 본체는 우주만물을 생성(창조), 유지, 파괴를 하는 것은 물론, 거두어들이며, 공(空)으로 되돌릴 수가 있는 힘과 정보를 내함하고 있으며(그러면서 이를 반복한다고 한다), 자연법칙이 나오는 근원과도 같다고 한다. 어떠한 인격체가 우주의 본체와 완전히 합일이 된다면, 우주 본체가 지닌 무한한 힘을 활용할 수가 있게 되어 자연법칙과 같은 차원에서 업장을 소멸시킬 수가 있는 능력과 자격을 얻게 된다고 한다. 업장을 소멸할만한 자격을 가진 것은 두가지 의미가 존재하는데, 첫번째로 우주본체가 지닌 무한한 힘과 지혜를 활용하는 것이고, 두번째는 우주본체와 같은 무아(無我)의 입장에서 온전히 무사공평하게 그 힘을 사용이 가능한 완전한 인품의 경지에 있음을 뜻한다고 한다.(다만, 업장을 소멸시키기 위해서는 광대무변하기 이를데 없는 우주생성해낼 수가 이을 정도로 초천문학적인 에너지를 실제로 낼만한 능력이 있어야 할 뿐더러, 다겁생의 업장과 이에 상응하는 공덕을 정밀교량하여 인과법에 맞추어 한 치의 빈틈도 없이 해야 하는 매우 정밀하고도 까도로우며 고차원적인 구원 작업이라고 한다.)[10] 일체가 공이라고 관하는 것을 공관(空觀)이라고 하며, 공은 허무가 아닌 공을 관하는 것은 진실된 가치의 발견이기에, 진공 그대로가 묘유임을 뜻하는 것이라고 한다. 이에 반하여 공을 허무적인 것으로 이해하는 것을 가리켜 악취공이라고 칭한다고 한다.[11] 이 경은 '식과 공성만이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라는 유식학파의 사상적 근거가 되기도 했다. 중관학파에서는 소공경에 대해 크게 주목하지 않거나, 유식학파와는 다르게 해석한다.[12] 반야심경 이전에 성립한 것으로 보여지는 금강경은 공이란 단어를 쓰지 않고 공 사상을 표현했다.[13] 상좌부 불교의 주요경전인 니까야경에서도 아예 등장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대승 불교에서의 공의 표현과는 맥락이 살짝 다르고, 빈도수가 매우 적다. 무아론에 대한 비유적인 표현으로서도 쓰였지만, 명상 중의 체험에 대한 신비적인 표현으로도 쓰였다.[14] 그 자신이 아닌 것과 전혀 관계가 없는 그 자신만의 성질. 산스크리트어로 svabhāva. 초기 불교에서 반대한 아트만과 비슷한 개념이다.[15] anatman[16] 그러나 여기서도 자아와 같은 '대상'들은 실제로 존재하는 법이 아니라 법에 의해 생겨난 가법으로서 공하다.[17] 인도 대승 불교의 2대 학파의 하나. 파조인 용수의 중관론을 근본으로 하여 공(空)을 교의의 중심으로 한다. 중국 등지에 전하여져 삼론종의 바탕이 되었다.[18] 나가르주나가 활동했던 당시 인도에서 번성했던 베다계의 여섯 학파, 즉 상키야학파, 요가학파, 바이쉐시카학파, 니야야학파, 미망사학파, 베단타학파 중 논리학과 인식론이 가장 발달했던 학파[19] 공을 단순히 '비어있음'으로만 보게 되면 공 사상에 대해 오히려 이해하기 어려워진다. 어원적으로 쑨야(sunya)는 산스크리트에서 0이나 '텅 빔'을 뜻하긴 하나, '(있을 것 같았던 것이) 결여됨'을 뜻하는 말이기도 하다.[20] 보다 직접적인 예를 들어보자. 글루온은 3가지의 전하(색전하)로 이루어져 있다. 이를 표현하기 위해 RGB 색상 개념을 도입했지만, 각각의 색전하가 빨강 초록 파랑의 색을 띠고 있다는 뜻이 아님을 간파하기란 여간 어렵지 않다.[21] 공하지 않고, 상대적이지 않고, 개념적으로 조립되어 구성되지 않아서 영원히 고정불변한 자성이 있는[22] p 265, Nagarjuna's Middle Way, M. Siderits and S. Katsura[23] 눈은 볼 대상 없이는 그 자신을 볼 수 없고, 본다는 성질을 획득할 수 없다. 길다는 개념은 짧다는 개념 없이는 성립할 수 없다. 원인이 있어서 결과가 생긴다고 생각하지만, 결과가 없다면 원인은 원인으로 불릴 수 없다. 이는 유명론적으로도 그러하고 실존적으로도 그러하다.[24] 자성이 없다고 했음에도 성질을 따진다는 것이 아이러니지만, 이런 파라독스는 중관학파와 선불교에는 널리고 널렸다! 일부는 자성이 없는 것 자체를 자성으로 칭하기도 한다.[25] 하지만 일상적인 언어를 통하지 않으면 불도는 이룰 수 없다고도 또한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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