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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4-07 12:32:48

불교/타 종교 간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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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론

삼명(三明)을 갖춘 바라문으로서 일찍이 한 사람이라도 하느님[1]을 본 자가 있는가?
만일 본 일도 없고 볼 수도 없는 하느님을 믿고 받든다면,
마치 어떤 사람이 한 여인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그의 얼굴을 본 일도 없고 이름도 거처도 모른다는 것과 무엇이 다르리요.
- 잡아함 권16 삼명경
비구들이여, 참으로 긴 세월이 지난 그 어느 때, 어느 곳에서 이 세상은 무너지는 때가 있다. 세상에서 대부분의 중생들은 광음천에서 태어나게 된다. 마음으로 이루어진 그들은, 희열(喜,기쁨)을 음식으로 삼고, 스스로 빛나고, 허공을 다니고, 깨끗한 존재로 오랫동안 긴 시간을 머문다."

2.3 "비구들이여, 참으로 긴 세월이 지난 그 어느 때, 어느 곳에서 이 세상은 다시 이루어진다. 이루어 지는 세상에 비어 있는 범천의 하늘 궁전이 나타난다. 그때 어떤 중생이 수명이 다하고 공덕이 다하여 광음천의 무리에서 떨어져서 비어 있는 범천의 하늘 궁전에 태어난다. 그는 거기서 마음으로 이루어지고, 희열을 음식으로 삼고, 스스로 빛나고, 허공을 다니고, 깨끗한 존재로 오랫동안 긴 시간을 머문다."

2.4 "그는 그곳에서 오랜 세월 홀로 살았기 때문에 싫증과 동요가 생긴다. '다른 중생이 여기에 왔으면!'이라고. 그때 중생들도 수명이 다하고 공덕이 다해서 광음천의 무리에서 떨어져 범천의 하늘 궁전에 태어나 그 중생의 동료가 되었다. 그들도 역시 거기서 마음으로 이루어지고, 희열을 음식으로 삼고, 스스로 빛나고, 허공을 다니고, 깨끗한 존재로 오랫동안 긴 시간을 머문다."

2.5 "비구들이여, 그때 첫 번째로 태어난 중생에게 이와같은 생각이 든다.
'나는 범천이요, 대범천이고, 정복자요, 정복되지 않는 자요, 모든 것을 보는 자, 지배자, 권능을 가진 자, 창시자, 창조자, 으뜸이 된 자, 신분을 부부여하는 자, 주인, 과거와 미래의 것들의 아버지다. 나야말로 이 중생들의 창조자이다. 나에 의해 이 중생들은 창조되었다. 무슨 이유 때문인가? 전에 내게 '다른 중생이 여기에 왔으면!'이라고 는 생각이 일어났고, 그러한 내 마음의 바램 때문에 이 중생들이 여기에서 생겨났기 때문이다.'라고.

나중에 그곳에 태어난 중생들에게도 이런 생각이 들었다.
'범천인 이 존자는 대범천이고, 정복자요, 정복되지 않는 자요, 모든 것을 보는 자, 지배자, 권능을 가진 자, 창시자, 창조자, 으뜸이 된 자, 신분을 부부여하는 자, 주인, 과거와 미래의 것들의 아버지다. 범천인 이 존자에 의해 우리는 창조되었다. 무슨 이유 때문인가? 우리는 이분이 여기에 먼저 계신 것을 보았고, 우리는 나중에 태어났기 때문이다.'라고."

2.6 "비구들이여, 거기서 먼저 태어난 그 중생은 수명이 더 길고, 더 아름답고, 더 큰 위력을 가졌다. 그리고 나중에 태어난 중생들은 수명이 더 짧았고, 더 못 생겼으며, 더 작은 위력을 가졌다.
비구들이여, 그런데 그 중 어떤 중생이 그 무리로부터 죽어서 지금 상태(今生,금생)로 오는 경우가 있다. 지금 상태로 온 자가 집으로부터 집없는 곳으로 출가한다. 집으로부터 집없는 곳으로 출가한 자는 노력의 결과로, 정진의 결과로, 실천의 결과로, 불방일의 결과로, 바른 마음의 기울임의 결과로 마음이 삼매를 닦을 때 전생을 기억하는 마음의 삼매를 얻는다. 하지만 그는 바로 그 전생의 삶은 기억하지만 그 이상은 기억하지 못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범천인 그 존자는 대범천이고, 정복자요, 정복되지 않는 자요, 모든 것을 보는 자, 지배자, 권능을 가진 자, 창시자, 창조자, 으뜸이 된 자, 신분을 부부여하는 자, 주인, 과거와 미래의 것들의 아버지다. 범천인 그 존자에 의해 우리는 창조되었다. 그는 항상하고, 견고하고, 영원하며, 변하지 않는 존재인 그는 영원히 그렇게 계신다. 그러나 범천인 그 존자에 의해 창조된 우리는 무상하고 견고하지 않으며, 수명이 짧고 죽기 마련이며, 지금의 상태로 왔다(이곳에 태어났다.)' 라고

비구들이여, 그것 때문에, 그것과 관련하여 일부 영속 일부 비영속론자인 그 사문·바라문 존자들이 일부는 영원하고 일부는 영원하지 않은 자아와 세상을 선언하는 첫 번째 경우이다."
- 디가니까야 1, 범망경 中
법계(法界)와 그것에 속한 것들이 모두 마음이 지어낸 것들임을 알아야 하리라 (應觀法界性 一切唯心造)
- 화엄경, 야마천궁 게찬품

불교는 타 종교의 신에게 무척 관대한 편이라고 알려져 있다. 일단 기독교, 이슬람 같은 절대자를 믿는 유일신교에 비하면, 다른 종교와 공존할 여지가 교리상 더 폭넓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실제 석가모니는 그의 가르침에서 당시 인도 반도의 다양한 종교들과 철학 학파들을 모두 외도라 하며 철학적으로 조목조목 비판하고 있다. 또한 서구적 관념에서는 절대 신(神) 혹은 인도적 관점에서는 브라흐마 중심의 종교에 대해서도 (위에 나와있는 범망경의 사례와 같이) 그런 종교의 기원이 되는 '존재와 세계가 일부는 영속하고 일부는 영속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사문들'의 예를 들어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

불교가 타종교의 교리에 대해 관대한 것이라고 보기보다는 불교의 가르침의 핵심이 지혜와 자비를 바탕으로 하기 때문에 이 자비로 타 종교는 물론 모든 중생들에게 자비로운 것이라고 봐야 한다.

위에서도 알 수 있듯이 불교는 이미 처음부터 그리고 발전하는 과정에서도 철학적으로 탄탄한 바탕을 자생적으로 갖추었다. 태생적으로 인도 반도의 여러 사유들과 교류했으며, 대승 불교의 경우 중국 철학과도 교류하며 발전했다.[2][3] 이러한 철학적 이미지 때문에 불교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고 절대자를 믿는 아브라함 계통의 종교들에 너무나 익숙한 서양인들은 불교를 종교가 아닌 하나의 철학으로 분류하기도 한다.[4]

그런 이유로 현대적인 관점에서 볼 때 다른 종교에 비해서 상당히 유화적인 게 특징이다. 그러나 평신도들이 하는 행태를 보면 이들이 불교를 제대로 이해하는 것인지 아니면 석가모니 중심의 다신교를 믿고 있는 것은 아닐지 의심되는 면이 없지는 않다. 냉정히 말해 평신도들의 기복적인 신앙 모습은, 불교에 대한 이해가 깊은 불자가 아니면 다신교와 크게 다를 바가 없다. 이럴 때는 이 부처/보살에게 빌고, 저럴 때는 저 부처/보살에게 빌고. 다만 이를 크게 탓하기도 뭐한 것이, 불교의 기본은 자력으로 스스로를 구제하는 자력 구원이 중심이긴 하지만 초기부터 이미 부처/보살의 가피력으로 구원받는 타력 구원관이 존재했기 때문이다.[5] 또한 부처에게 개인적인 복을 빌다가 불경을 읽고 공부하면서 제대로 된 교리를 알게 되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자비를 모토로 삼는 종교라고는 하나, 역사적으로 다른 종교를 배척하는 일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타 종교에게 무척 관대한 편이라곤 하지만 실은 본지수적. 즉, '부처가 중생을 교화하기 위하여 다른 종교의 창시자나 성인으로 환생하거나 나타나는 것'이라고 하여 불교 외의 모든 종교를 불교의 열화상태, 혹은 하위호환으로 보기 때문이다. 지금의 힌두교를 보면 알겠지만 다신교라고 타 종교나 외국 선진 문물에 융화적일 줄 생각하면 경솔하다. 다만 그렇다고 해도 타문화와의 적응은 굉장한 수준. 이런 면은 현대 문명과 실시간으로 치고 박으면서 가장 잘 적응한 모습을 보여준 그리스도교를 능가할 정도. 메이저 종교 중 폭력으로 성장하는 사례가 적은, 몇 되지 않는 경우 중의 하나다.

물론 역사적으로 불교의 이름으로 자행되었던 폭력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인도 반도마우리아 왕조쿠샨 왕조 같은 경우엔, 불교를 전파하기 위하여 주변국들은 정벌하고 먼 나라에서는 고승들을 파견해 전도하는 방법을 썼다. 한반도의 경우, 고려 시대 무신정권 시절 교종 계열 종파 승려들이 무신 정권에 대항해 난을 일으키기도 했고, 조선이 건국된 후 일부 고위 승려들이 하급 승려들을 모아서 조선 정부를 타도하고 불교국가의 부흥을 꾀하고자 당취(黨聚)라는 조직을 만들어, 계율을 어겨 타락한 승려를 응징함과 동시에, 주변 절들과 마을에 약탈과 방화, 살인을 벌이기도 했다(여기에서는 땡초를 참고)[6].

일본의 경우, 센코쿠 시대엔 말이 승병이지 무사들이 승려인 척했던 게 태반인 소헤이처럼 전쟁의 도구로 쓰였다. 그리고 도쿠가와 막부 시기에 불교 측에서 "부처극락 야소지옥"을 외치며 일본 내 가톨릭 신자들을 박해한 기록도 있고(...) 한편 동남아 상좌부 불교에서는 극단주의가 만연해지고 있는 실상이다. 참고

동아시아 불교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몇 가지 특징이 있다. 첫 번째는 처음 불교가 동아시아 여러 나라들에 도입될 당시 부처님=신이라는 관념하에 도입되었다는 것이다. 토속신앙에서 신과 부처를 혼용/동일시하거나, 삼국유사의 불교 도입 당시 신라 귀족들이나 일본 사서에서 모노노베 씨의 불보살들을 외국의 신으로 부르고, 불교 도입에 찬성한 소가 씨 역시 외국의 신이라는 주장 자체에는 반발하지 않는 모습이 보였다. 심지어는 조선에 서학이 들어왔을 때, 서학을 불교의 한 분파로 여기기도 했다.

다만 이는 동아시아에서 유달리 두드려져서 그렇지, 동남아권 남방 불교나 인도 본토에서도 어느 정도 나타난 현상인 것은 사실이다. 미얀마 같은 경우에도 토속신앙인 낫(정령)이 불교적으로 표현되기도 하고, 인도 본토에서도 인도의 토속신앙의 신들을 부처/보살, 명왕, 신중, 천인 등의 표현을 붙여서 흡수하기도 했다. 지모신 숭배가 모태가 된 지장보살이나 바라문교의 천신이었던 제석천, 태양신 신앙과 관련있으며 특히 밀교에서 중시하는 대일여래 등이 대표적인 경우.

주의할 점이라면 이 항목의 서술만 믿고 불교는 위선적인 불교라던가 종교 화합은 불가능하다라는 생각을 가지는것은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라는 점. 확실히 타 종교와 모순적인 점이 있거나 이로 인한 갈등이 있다곤 해도 종교의 벽을 허물고 갈등없이 지내는 종교인들은 많이 있다. 당장 법정 스님도 다양한 종교인들과 교류를 가졌으며, 개종을 고려하는 사람에게 어느 종교든 한길로 이어져 있으니 무리해서 개종하려 들지 말라며 타종교를 인정하셨던 분이다.[7]

2. 힌두교

힌두교하고도 사이가 좋지 않아 힌두 경전을 보면 불교를 비하하는 대목이 상당히 많다. 흔히 사람들에겐 힌두교에서 비슈누의 화신 중 하나가 붓다라고 알려져 있는데, 이는 사실 비슈누가 붓다로 변신해서 악마들을 타락시켜 그들의 힘을 빼앗으려던 것이라는 표현이 있을 정도다. 저 표현은 불법은 정법(正法)이 아니므로 악마들이 불법을 믿게 되면 올바른 길에서 벗어나서 힘을 잃게 된다는 논리에서 기인한다. 결국 엄청난 불교 모독이자 불교 신자들을 싸그리 악마로 치부해 버리는 광역도발인 셈이다. 로저 젤라즈니의 소설인 신들의 사회에서도 이러한 관계를 차용한 장면이 나온다.

역사적으로 불교는 브라만교가 힌두교로 진화하는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대승불교의 공세로 브라만교가 대위기를 맞이한 8세기, 인도 최대의 철학자로 일컬어지는 샹카라가 나타나 브라만교에 나가르쥬나의 공 사상을 나름대로 비판적으로 흡수 발전시켜 만든 것이 힌두교 베단타 학파이며 이로 인해 브라만교는 대변혁 힌두교로 전환되었다.[8] 그리고 힌두교는 인도 내에서 최종적으로 불교에 승리하게 되어서 인도계 지역에서 불교를 믿는 지역이 스리랑카와 시킴, 라다크, 부탄을 비롯한 티베트계 지역으로 축소되었기도 했다.

아무리 현대 힌두교가 불교의 교리에 큰 영향을 받아 둘 사이의 간극이 좁혀졌다고는 하나, 사실 교조 석가세존부터가 이미 사마나[9] 출신이다보니 교리의 내용면에서 여전히 몇가지 중요한 차이점을 보이고있다. 가장 대표적인 논쟁은 '아트만'에 관한 것으로, 즉, '고정불변하여 영속하는 자리가 있는가'의 문제에 관한 것이다. 쉽게 풀어 '나의 실체가 존재하는가' 정도의 논쟁으로 받아들이면 얼추 맞다. 힌두교는 '아트만(Atman)'을 인정하여 '나'의 실체'가 있음을 받아들이는 반면, 불교는 '안아트만(Anatman)' 혹은 '아나타(Anatta)'라고 하여 '나'의 '실체'가 있음을 인정하지 않는다. 이 '안아트만(Anatman)'을 한문으로 번역한 것이 그 유명한 '무아(無我)'라는 용어이다. 이외에도 불교는 카스트를 인정하지 않는 점이라든가, 수행의 목적이나 방법[10][11], 중도사상[12] 등에서 힌두교의 주류와 의견을 달리한다.

인도 헌법의 아버지인 빔라오 람지 암베드카르는 불합리한 카스트 제도의 근원이 힌두교에 있다고 보고 50만 명의 불가촉천민들과 합동 개종을 한 적이 있다. 빔라오 람지 암베드카르 참고.

사실 여러가지면에서 유대교기독교의 관계와 비슷한 면이 많다. 불교는 힌두교(당시의 브라만교)를 원류로 하고 있으나, 그 원류에 반발하여 갈라져 나온 세력이고 기독교 역시 유대교를 원류로 하나 당시 유대교의 주류인 바리사이파에 반발하여 갈라져 나온 세력이다. 현재의 유대교가 예수를 인정하지 않듯이 현재의 힌두교 역시 석가모니를 인정하지 않는다. 위에 말했듯이 석가모니는 잘못된 방법을 가르쳐서 악마들을 몰락시키려는 의도였다고 깐다.

3. 자이나교

한역된 불교 경전에서는 이들을 육사외도의 일파로 간략하게 설명하는 편이지만, 남방 불교 경전에서는 자이나교 교리 및 신도들을 비판하는 내용이 상당히 많이 등장한다. 남방 불교의 자타카에서는 승리자라는 뜻의 자이나라는 이름 대신에 창시자 이름을 자이나교 교주의 본명인 '니간타 나라뿟다'라는 이름으로 이들을 소개한다.

불경이 중국에서 한역되는 당시에는 중국에 자이나교 신자들이 없는데다가 도교의 영향으로 채식을 강조하면서 자이나교를 비판하는 내용을 굳이 번역할 필요가 없던 반면, 스리랑카 등에서는 한동안 자이나교와 불교가 서로 경쟁하는 관계였기 때문에 이런 차이가 생긴 것으로 추정된다.

데바닷타 종파의 계율과 자이나교 계율이 상당부분 비슷하다.

4. 도교

동아시아의 전통 삼교 (三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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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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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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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교


도교와의 관계는 지금이야 별다른 마찰이 없지만 한때 잘 나갔을 때는 역사상으로 엄청나게 치고 받았다.[13] 중국 당나라 시절 도교, 경교와 함께 타 종교 배척, 숙청전이 꽤 화려했다. 당송 시기의 도교가 국가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 어느 정도 불교를 압도하던 시기가 있지만 그 이후엔 이렇다 할 국가의 지원을 기대할 수 없으니 유일하게 비빌 언덕이 민간이라 철저하게 민간신앙으로 파고들어 민간 도교 시대로 접어든다. 지금 와서는 민간 신앙과 도교와 불교가 사이좋게 이리저리 뒤섞여서 구분하기도 힘든 상태다.

노자의 사망이 불분명한 것을 양측에서 이용했는데 이른바 노자화호설이 화두가 되었다. 불교에선 청정법행경이란 위경까지 쓰면서 노자를 가섭존자의 환생이라 주장했고, 도교측에선 불경을 서쪽으로 떠난 노자의 이론이 되돌아온 것이라 주장했다. 그러나 노자화호설이 불교에서 창작한 것이란 설도 있어서 미묘. 참고로 <불교의 중국 정복>(에릭 쥐르허 저)이란 연구서에서는 노자화호설의 문헌 등장이 불교에서 먼저 나왔다는 점을 들어 불교 측의 창작이라는 주장을 지지하고 있다.

아무튼 이 설은 불교가 처음 중국에 전래될 당시[14] 중국인들의 중화사상에 호응해 불교에 대한 반감을 낮추는 데 나름대로 기여했고, 이후 양측에서 계속 잘 써먹다가 결국에는 원나라 당시 도교티베트 불교와의 교리논쟁에서 비판받기도 했었다. 지금도 노자화호설은 중국에서는 널리 퍼져있는 이론이다.

한국에서도 역사적으로 도교와 충돌이 있었다. 고구려연개소문이 옛 귀족세력과 연결된 불교를 억제하기 위해 도교중국에서 수입하다가, 이것이 상당히 갈등을 일으켜서 고구려 멸망의 원인의 되었다는 설도 있다. 다만 이건 도교와 불교의 충돌이라고 보기에는 상당히 정치적인 사건이다. 연개소문영류왕을 쿠데타로 시해한 것은 당시 불교의 왕즉불 사상에 위배되는 행위였기 때문에 수많은 불교도들의 반발이 있어왔다. 그래서 연개소문이 선택한 일종의 사상통제책이 바로 도교의 수입이라는 것. 더욱이 연개소문과 사이가 좋을 리 없는 기존 정치세력들의 종교는 불교와, 불교랑 결합한 상태인 토착신앙이었다. 그런데 도교와의 충돌에 대해서는 고구려 후기부터 고분벽화에서 불교적인 요소가 점차 사라져가는 모습을 보이기에, 이에 대해서는 설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아도 다소 비판적인 주장도 있다.

당나라를 배경으로 한 명나라 때의 서유기에서는 불교와 도교가 중심적 위치를 반반씩 갖고 있다. 당장 손오공의 스승인 수보리 조사가 불교+도교적인 인물로 나온다. 손오공이 요괴에 홀렸던 왕에게 "삼교(유교까지 합쳐서)를 골고루 신봉하여 도사도 공경하고 스님도 존경하며 유능한 인재를 많이 기르시라"고 훈계하는 장면도 2번 정도 나온다. 이는 동북아시아의 전통적인 삼교론에서 나온 것으로, 당시에는 특별히 이상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삼장법사와 함께 서역으로 가는 과정에서 나오는 도인들은 당나라 시기 도교VS불교의 극한 대립을 반영해서인지 도인이 활개치는 나라에서는 승려들은 부려먹히는 신세인데 사실 그렇게 된 게 요괴들이 도인 행세해서인 경우가 많다.

5. 유교

중국 성리학의 성립이 불교 사상과 중국에서의 선(禪)을 유학적으로 정리하며 탄생한 것이었기 때문에 유교와 불교는 동양문화권에서 함께 발전해 왔다고 볼 수 있다. 위의 도교와의 관계 문단에서도 설명했듯, 그다지 큰 반목없이 공존하기도 한 관계다.

이는 불교유교, 게다가 도교까지 모두 절대자인 신(神)을 가운데 두는 종교가 아니었으며 심신의 수양을 통해 자아발전을 이루는 면에서 공통점을 가졌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서양의 기독교랑 다른 종교가 서로 대립하거나 유대교가 박해받거나 한 걸 보면 확실히 차이가 보인다. 현대의 한학자들은 대개 역사 연구를 통해 불교사와 핵심 사상을 잘 알고 있거나 불교학자들이 유교 및 도교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다. 역사적으로도 추사 김정희가 유교는 물론 불교에 대해 해박했고 말년에 승려가 되었다든지 혹은 구한말경허 선사가 말년에 머리를 기르고 서당을 열어 아이들에게 유학을 가르쳤다고 하는 등 사상적 교류는 늘 있어 왔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조선의 숭유억불 정책으로 인해 유교와는 역사적으로 사이가 나쁜 편이었다. 특히 고려 왕조 때 국교 격까지 갔었던 것이 유교조선왕조에 들어서 불교를 밀어내고 국교로 지정되면서, 조선왕조 시절 양반들과 호걸 및 관료들이 불교와 승려를 탄압하고 천시하는 등 이래저래 유교 때문에 수모를 겪었다. 게다가 신분제도에 있어서도 승려는 하층민 계통인 천민에 속하기 때문에 조선왕조 시절에는 유림과 양반들로부터 천대와 멸시를 당해왔고 일부 승려들은 노비, 백정, 평민들과 함께 궁궐 복원공사 등에도 동원되는 등 우여곡절이 많았다.

얼마나 숭유억불 사상이 조선을 지배했냐면, 이런 일도 있었다. 박지원열하일기에, 청나라에 방문했다가 건륭제로부터 불상을 선물로 받은 기록이 나온다. 박지원은 유학자였기에 청나라 저잣거리에다 그 불상을 비싼 가격에 팔아 불상을 판 돈이라고 자신이 가지지 않고는 짐꾼들에게 술이라도 사먹으라고 줬으나, 짐꾼들마저 불상을 판 돈이라 받기를 거부하여 마부에게 주었는데, 마부조차 받기를 거부했다.

불교 건축이나 미술 계통 문화재 파괴도 대대적으로 시행되었다. 숭유억불 문서에서 이 당시 유교 원리주의자에 의해 소실된 문화재 목록을 볼 수 있다. 경주의 많은 불상의 목을 잘랐다. 에밀레종도 녹일 뻔 했고 팔만대장경도 버릴 뻔 했다가 간신히 살아남았다. 심지어 이성계와 얽힌 절도 불태울 정도였다. 한국에 중국이나 일본처럼 웅장하고 화려한 문화재가 적고 소박함이 키워드가 된 원인 중 하나가 숭유억불인 셈이다.

다만 그래도 아예 불교를 뿌리 뽑거나 철폐해버리려는 정도는 아니었다. 비록 가문의 망신이라는 소리는 들을지언정 선비가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되는 것도 가능은 했으며,[15] 조선 말 까지도 전국의 절들은 계속 건재했다. 태조 이성계는 말년에 불교에 심취했으며, 태종과 세종도 꾸준히 불사를 시도하여 신하들과 마찰은 빚은 기록이 있다.[16] 유학적으로 용서받기 힘든 짓을 저지른 세조는 아예 호불 군주를 자처했다. 문정왕후는 승과까지 실시했는데, 그녀가 나중에 유학자들에게 호되게 비판 받는 요소로도 작용했다. 조선 내내 왕실은 불교에 생각보다 호의적이었으며, 위의 김정희나 경허 선사의 일화도 조선 후기, 그리고 조선 이후의 일이다.

중국 후한 시대에 불교가 들어올 때만 해도 중국인들은 오랑캐의 가르침이라면서 불교 유입에 민감했다. 한대에 융성했던 유교 문화는 현실적, 윤리적인 도덕 철학을 강조했는데 그 때문에 처음 들어올 때만 해도 중국인들은 불교 이론을 허무맹랑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위진남북조시대, 오호십육국시대를 거치며 중국 대륙이 쑥대밭이 되는 과정에서 불교가 전국적으로 확산된다.

그 이유는 불교의 사상이 민중의 정신적인 귀의처가 되어주었고, 윤회론에 입각한 내세관, 방대한 경전체계, 인도 의술에 능통한 승려들의 의약구제, 위정자들에게 부담이 없는 구세이념[17], 전술 지식을 알려주는 신승들의 전술적 가치, 한족 중심적이었던 유교와는 달리 호(胡)족들에게 친화적이었던 이방 이념들이 당시 중국인들의 필요조건에 맞아 떨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항상 무탈한 것만은 아니었고, 잊힐만 하면 국가 차원에서의 불교 탄압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6. 한국 토속신앙

이미 화엄경에도 주성신(主城神), 주지신(主地神), 주산신(主山神), 주림신(主林神), 주하신(主河神), 주해신(主海神), 주수신(主水神), 주화신(主火神), 주풍신(主風神), 주공신(主空神) 등 자연의 요소들이 가진 특성을 신격화 하고 있으며 이들의 수행계위를 밝히고 있다. 즉 불교는 이미 그 대상이 한국이든 미국이든 자연 및 만물과 분리되지 않은 인간의 삶을 다루고 있기에 이를테면 무속에서 숭앙하는 '관운장' 같은 만들어진 인격신이 아닌 산신 등 토속 신앙의 신들을 중요시 한다. 특히 우리나라 전래의 북두칠성 사상의 주신은 인간의 수명을 주관하는 의미에서 단순한 신급이 아닌 석가모니 부처님이나 아미타불과 동급의 지위의 칠성불이라 하여 신앙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

석가모니도 보리수 아래에서 항마촉지인의 자세로 땅을 손으로 가리키며 대지의 여신이 자신의 깨달음을 증명한다고 했다.

한국은 불교 도입에 상당히 적극적이었다.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토속신앙을 한꺼번에 묶을 필요가 있던 지배층들은 불교 수용에 긍정적이었고, 덕분에 유달리 한국에서는 불교와 토속신앙 간에 융합이 빠르게 이루어졌다. 그리하여 토속신앙의 불교화와 불교의 기복적/주술적인 토속신앙의 의례/관념 수용이 빠르게 이루어졌다. 당장 현재 한국동남아 불교의 같은 의례를 놓고 비교해도 엄청나게 다르다.

그렇다고 토속신앙이 뵌교와 티베트 불교처럼 완전히 동일화되진 않았다. 불교의 교리나 요소를 일부 차용했을 뿐, 불교에 완전히 동화된 것은 아니다. 물론 승려보살로 칭하는 무속인들의 경우에는 상당히 불교색이 강하지만, 무당 문서에서 볼 수 있듯이 지역별/개인별 차이는 크며, 오히려 근래에는 민족종교로서 차별성이 두드러지는 추세다.

사실 현재 한국불교와 토속신앙의 강한 유착관계는 불교가 한국에 들어오면서 토속신앙과 섞인 것도 있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미륵 신앙. 기복적인 토착 천신/용신 숭배사상과 완전히 결합하였다. 이러한 문화가 고착화된 것은 조선시대 숭유억불의 영향이 컸다. 숭유억불 정책 하에서 불교와 토착신앙이 살아남기 위해 융합하면서 남사당패, 점이나 굿을 하는 스님들도 일부 등장하게 된 것.

현재 한국 불교와 무교 양측에서는 예전처럼 꼭 결합해야만 할 일도 없기에 각자 개성을 살리는 쪽이긴 하나, 불교 종파마다 차이가 크다. 일례로 대한불교조계종 같은 경우 순수불교 정신을 내세우며 절에서 하는 천도재, 49재 등도 대폭 간소화한 데 반해, 한국불교태고종 같은 경우 예전부터 내려오던 기존의 의례 대부분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이 때문에 신도들이 조계종의 단순한 의례에 만족을 못해, 태고종 스님들을 모셔오거나 의례를 배워와서 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18]

한국 불교계에서는 이러한 부분을 불교 포교를 위한 방편으로서의 측면만을 부각시키는 경향이 있다. 학계에서는 역사적 사례나 불교하고 아예 접점이 없는 가택신 신앙(특히 조왕신)이나 북두칠성 신앙, 민간신앙에서 불교를 철저하게 무속신의 일부로 보는 점 등을 근거로 인정하지 않거나, "불교의 대중화"와 "불교화된 민속신앙"을 엄연히 구분해야 한다고 본다.[19] 실제로 현재 국내에 조왕신 신앙의 흔적을 사찰에서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오히려 일반 민가보다 더 쉽게 찾을 수 있는 경우도 있다. 또 북두칠성연명경처럼 기복적인 토속신앙의 영향하에 만들어진 경전도 있다.

다만 토속신앙에 대한 대접엔 한계가 있다. 어디까지나 절의 중심은 붓다/보살이지 토속신이 아니니까. 그래도 관련된 재와 법회도 정기적으로 지내주고, 불교를 잘 믿고 선행을 하면 복을 주고 도와주지만 그렇지 않으면 독자적으로 징벌을 내리는 강력한 호법신으로 인식하고는 있다. 원광대학교 조용헌 교수는 저서 <조용헌의 사찰기행>에서 이러한 인식을 법(부처)은 멀고 주먹(산신)은 가깝다고 한 줄로 요약한 바 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는 토속신은 어디까지나 호법선신으로서 절과 불법을 수호하고 신도나 승려들이 필요할 경우 도와주는 존재라고 여겨질 뿐, 일반적으로는 아미타불, 미륵불, 석가모니부처님/보살같은 존숭의 대상은 아니다.

토속신들이 대우받는 것은 불교가 토속신을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당장 삼성각을 따로 짓지 않는 수준의 작은 절이라도 대웅전에 합사할 때 토속신을 신중과 마찬가지로 하단에라도 배치한다. 불교 교리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혹자는 이런 것을 기복신앙적 불자들이나 무속인들이 시주하는 재물 수입이 쏠쏠하니 그만큼 투자를 하는 것뿐이라고 색안경 쓰고 바라 볼 수도 있다. 신중신앙이 지금보다 흔했던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절에서 신중 법회/재는 고려시대만큼은 아니더라도 나름대로의 비중을 차지했다. 근현대 조계종의 불교개혁운동 이전에는 신중단에도 절을 하였으나, 성철 스님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드는 승려가 부처님을 수호하는 신중에게 절할 수 없다'고 주장하면서 이렇게 되었다.

물론 이런 주장은 이미 구한말~일제강점기부터 불교를 근대화시키자는 승려들 사이에서 끊임없이 논의되던 사안이었으나, 해방 후 성철 스님을 비롯한 개혁주의 성향의 승려들이 결정타를 내리면서 한국 불교의 신중신앙과 토속신 신앙은 동시에 크게 쇠퇴하였다.

토속신들은 원래 불교의 요소였으며 한국인들에게 불교 전래 이전부터 오랫동안 친근한 존재였고, 동시에 불교 전래 이후에도 신앙관에 깊은 영향을 주고 있었기에 개혁주의 성향 승려들이 대부분 입적하면서 다시 한국 불교 내부에서 신앙의 대상이 되었지만, 정작 원래 불교의 일원이던 신중들은 예전만큼 큰 영향력을 되찾지 못하고 있다. 봉암사에서 결사를 이끌던 시절 비불요소 철폐를 외치며 토속신 전각은 물론 신장탱조차 없애고 여러 불공을 철폐했던 것으로도 유명한 성철 스님의 생전에는 토속신앙적 기복신앙에 배타적이었던 해인사가 결국 독성각으로 복원한 것도[20], 전술했듯 근본주의 사상이 강한 조계종도 서울 조계사를 제외하면 조계종의 간략화된 불교의례보다 기존의 해오던 재래식 불교의례를 신도들이 원한다고 유지하는 데는 이런 속사정이 있다. 참고로 성철 스님이 결사를 열었던 봉암사는 결사 당시에는 토속신앙 건물을 철거하였으나(참조), 지금은 대웅전을 확장하고 산신각을 복원한 지 오래다. 특정한 기간이 아니면 일반인들에게 개방하지 않는 사찰인데도 말이다.

일부 종파의 경우 독립된 토속신을 모시는 전각을 찾을 수 없다. 대한불교천태종, 밀교 종단인 대한불교진각종과 여기서 갈라져 나온 총지종은 밀교거나 밀교적 성향이 있음에도 이런 이유로 토속신을 모시는 전각은 물론 밀교에서 중시하는 신중이나 명왕을 위한 전각이 없다. 다만 천태종의 경우 법회/재를 주관하고 신도들을 위해 복을 빌고 기도해주는 부전승이 다른 종파와는 달리 정식으로 교단에 일원으로 소속되어 있고, 의전국이라는 전담부서도 있다.

천룡팔부 같은 원래부터 불교에 있었던 신중의 경우 해방 후 현대 한국불교에서는 대웅전 내 한 구석에 작게 신중전을 차려놓는 선에서 끝나는 게 일반적이고 절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적은 편. 법회가 열려도 보통은 토속신들과 같이 하단을 차지할 뿐이고, 독립적인 법회나 재는 찾기 힘들다. 당장 우리나라 절에서 산신과 산신재 혹은 산신법회가 차지하는 비중을 떠올려 보면 답이 나오는데, 과거 밀교가 나름대로 번창하던 때는 삼국유사에도 나오듯이 제석이나 사천왕 같은 경우 토속신앙의 천신/오방신 신앙과 결부되어[21] 해당 위격만을 모시는 절도 있었지만, 나머지 신중들은 그런 것도 없었다. 재를 지낸다 해도 대부분 예불 때 신중단을 바라보며 반야심경 읽는 정도가 고작. 그마저도 신중단에 반야심경을 읇는 것은 신중을 높이는 의미에서 독경하는 게 아니라, 신중에게 설법을 하는 의미로서 읽는 것이다.[22]

토속신앙의 신들이 대부분 독자적인 전각(칠성각, 삼성각 등)을 세워 따로 모신 것에 비하면 큰 차이점이다. 일본에도 사찰 안에 작은 신사를 세운 사례는 있으나 그 반대의 경우도 있고, 그 빈도도 웬만한 절이면 거의 토속신앙의 신을 모신 제대로 된 전각이 있는 한국에 비하면 드문 경우가 많다.

7. 신토

일본의 경우 아스카 시대에선 신토는 상당히 긴 시간 동안 전쟁을 해왔다. 실제로 불교가 처음 일본으로 도입될 당시 위에서 나온 대로 귀족 정치전쟁과 맞물려 친불교파인 소가씨와 반불파인 모노노베씨 간에 엄청난 전쟁들이 많이 시작된 데다, 현세구복을 중요시하던 토속신앙인 신토와 보다 고급 철학에다가 수입품이라는 이점까지 지닌 불교 간에 이권 다툼(?)형 전쟁들을 벌일 수밖에 없었는데, 이때 모노노베씨와 신토가 소가씨/불교 세력에 밀려나 버리고 만다. 소가씨는 왕실의 외척으로서 힘을 행사했고, 스이코 덴노쇼토쿠 태자 이후 불교는 적극적으로 유입되어 일본에 자리잡게 된다.

다만 소가씨가 도래인을 자청한 가문이고 백제와 가까웠다는 것을 생각할 때, 토착종교를 믿던 토착민과 외래종교를 신봉한 도래인의 알력다툼으로도 볼 수 있다. 실제로 정체성과 종교 문제가 겹치는 경우는 동서고금을 불문하고 매우 많다. 왜냐하면 민족이 곧 해당 신앙이었던 시절이었기 때문. 실제로 아스카 시대 때 불교에 심취한 왕들은 백제를 비롯한 중국, 한반도같은 외국과 가까운 자들이 많았으며, 시대가 흐르고 불교가 토착화되면서 그와 별도로 자리잡힌다.

후에 헤이안 시대 진언종과 천태밀교 등 밀교가 본격적으로 수입되자 신토의 신과 불교의 신들을 동일하게 여기며 불보살이 일본의 신의 모습으로 불교전래 이전에 이미 와 있었다는 소위 본지수적설에 입각하여 신토와 불교가 결합하고, 더 나아가 기존 신토의 신들을 모두 불교의 부처님/보살의 화신(아바타)로 격하시키고, 나중에는 아예 전원 신중으로까지 눌러댔다. 심지어 아마테라스의 경우 관음보살의 협시신중인 우보동자라는 작은 신으로 격하되는 시기를 겪을 정도. 이러한 신불습합, 본지수적을 피한 것은 자체적인 신토 철학을 만들고 경제적 기반을 가진 이세신궁 정도이며, 대부분의 신사와 절이 합쳐져 절의 승려들이 대를 이어 신사의 신관이 되는 일이 빈번했다.

이후 신토는 지속적으로 불교의 위세 앞에서 큰 힘을 내지 못했다. 에도 막부 중기에 민간의 아마테라스에게 복을 비는 관습이 등장해 사정이 나아진 적이 있었다. 당시 일본인들의 기복신앙은 대단해서, 아마테라스에게 복을 비는 순례 시 봉건질서를 무시하는 행위를 민중들이 저질러도 막부에서 어지간하면 눈 감고 넘어갈 정도였다. 이런 시절에도 일본 정토진종의 승려들은 민중들의 신사 참배를 제지하는 행위를 하다 문제가 생겼을 정도.

그러다가 본격적으로 신토가 불교를 누른 것은 에도 시대 말~메이지 유신 초기를 거치면서 일본 철학계에서 자체적으로 불교에 대한 검증과 비판이 일어나고, 그 결과물은 바로 국가신토. 일본메이지 유신 때는 오히려 불교를 억누르고 신토를 분리시키려 하기도 했다지만, 일본이 조선을 침탈하기 위해 가장 먼저 한 정책이 바로 승려에 대한 도성 개방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까지 국가신토는 일본 제국주의전체주의를 옹호하는 침략의 도구로서 줄창 이용되어 온 끝에 전쟁 패망 이후 정상적인 신토로 돌아가게 되고, 불교는 불교대로 평범한 관계로 돌아오게 되었다.

8. 창가학회

1200년대 가마쿠라 막부 시기에 니치렌(日蓮, 1222년~1282년)이 제안한 불교계 신흥 종교이자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로 알려진 그 일본 종교이다. 법화경(法華經)을 중시하며 사찰에서 활동하는 전통적인 불교와 다른 모습을 보인다. 국제창가학회(SGI: Soka Gakkai International)로 활동하다가 1970년대에 한국에 진출했다. 그동안 아베 닛켄(阿部日顕, Abe Nikken, 1922~2019)의 일련정종과 함께하다가 1991년에 결별했다.

니치렌은 자신의 불교관을 체계화하는 과정에서 천태종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법화경을 중시한다는 점도 그렇고, 일념삼천[23]이라는 개념을 매우 중요하게 여긴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이는 니치렌이 천태종 소속으로 승려 생활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다만 니치렌의 불교관은 천태종에서보다도 법화경을 더욱 절대화했으며, 이로 인해 염불, 좌선 등에 효용이 없다고까지 주장할 만큼 과격한 면이 있었다. 이 입장은 창가학회도 과격성은 덜할지언정 그대로 공유하기 때문에, 제목("남묘호렌게쿄")을 외우고 법화경, 니치렌의 어서 등을 읽는 것 외에 사마타, 위빠싸나, 염불, 화두선 등의 수행을 일부러 할 필요가 없다고 여긴다.

9. 기독교

중국에서는 당나라 때 네스토리우스 계열의 선교사들은 불교의 요소를 적극 차용하는 등 친불교적이었으나, 대항해시대 이후 가톨릭 예수회 선교사마테오 리치 신부가 명나라에서 선교할 때, "유교의 기본적인 가르침은 그리스도교와 모순이 없다"고 주장했다. 반면 불교에 대해서는 매우 비판적인 입장이었다. 불교에 대한 이런 비판은 당시 명나라 사대부들에게 점수를 따기 위한 목적 역시도 있었을 것으로 강하게 추정되고 있다.

교리적인 이유들도 있다. 불교와 달리, 그리스도교윤회를 믿지 않으며, 단 한 번의 창조-구원-공심판과 종말이라는 직선적인 세계관을 가진다. 단 과거부터 끈질기게 제기되는 주장 중 하나로서, 예수의 근본적인 가르침인 사해동포주의와 사랑 그리고 현실에 대한 직시는 불교의 가르침과 대동소이하다고 해석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외 나머지 부분은 사도 바오로의 재해석이라는 주장.

또한 신(神)관, 구원관이 정반대다. 그리스도교에서 원죄[24] 를 지닌 채 수고와 애씀으로 점철된 삶을 살며 보잘것없는 인간의 구원은, 유일신이며 생명 그 자체이자 창조주인 하느님의 인간에 대한 사랑과 은총, 즉 참 하느님이며 참 사람인 예수 그리스도의 강생[25], 십자가상 수난과 죽음, 부활, 성령의 활동 등에 대한 믿음으로 얻어진다고 가르친다. 인간 개개인의 노력 역시도 중요하지만, 이는 하느님의 은총에 대한 개인의 '응답'일 뿐, 구원의 전제조건은 아니다. 반면 불교는 그러한 의미를 지닌 신(유일신, 창조주)이 있다는 견해를 자아에 대한 집착의 연장선상으로 보아서 부정하거나 무시하는 종교이며,[26] 생명이라는 고정된 관념(산냐)과 그에 대한 집착을 경계하고, 개인의 수행과 노력으로[27] 자아에 대한 집착을 여의고 해탈을 얻어 번뇌의 고통에서 벗어난다고 가르친다. 물론 불교 역시 파고들면 정토종이나 아미타불 같은 케이스가 있는 만큼, 이렇다 저렇다 한 마디로 요약하기는 어렵다. 다만 전체적으로는 개인의 역량이 상당히 강조된다.[28]

즉, 말하자면 구원의 주체가 교리나 신앙이냐의 차이이다. 불교의 경우 교리에 대한 절대적인 이해를 바탕으로 수행을 쌓음이 요체며 그것이 신앙으로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신앙의 주체는 결국 교리 그 자체이지 부처는 아니다. 하지만 기독교는 무엇보다 신앙이 전제되어야 하며, 신앙의 주체는 예수 그리스도이며 거기에 대한 세부 교리는 신앙을 실천히기 위한 수단이다.

물론 그리스도교와 불교는 모두 교리상 평화와 사랑과 자비를 중시하는 등의 공통점도 많지만, 앞에서 말한 차이점으로 인해 교리적으로는 호환이 불가하다. 때문에 마테오 리치 신부는 저서 <천주실의>에서도 불교를 매우 비판했다.[29] 그러나 중국에서는 기독교 자체가 흥하지 못했던지라[30] 신자들끼리의 이렇다 할 분쟁은 없었다.

한국의 경우는 초기 조선 천주교나 불교나 세트로 국가로부터 탄압당하던 처지라 동병상련의 심정이 있었는지, 상당히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31] 천주교를 공부하는 수많은 신자들을 받아들여 집회를 하게 하였다. 천주교의 성지들 중 그래서 은근히 절터가 많다. 신자들끼리는 그럭저럭 우호적인 편이었다. 박해로 순교한 천주교 신자들에게 승려가 명복을 빌어주는 사례도 있었다. 물론 교리적으로 볼 때 가톨릭과 불교는 다른 점이 많으나, 신자 개개인 단위에서는 의외로 호의적인 경우가 많다. 일반 신자들 외에도 사제와 승려들이 친밀하게 지내는 것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오늘날에도 불교 승려성당에서, 가톨릭 신부에서 강연을 하는 사례가 있으며, 크리스마스부처님오신날에 서로 축하 메세지도 보내곤 한다.[32] 심지어 가톨릭 신부가 되기 위한 필수 코스인 가톨릭 신학대학의 수업 과정 중에 불교 교리에 대한 과목까지 있을 정도. 즉 가톨릭 신부 정도 되면, 불교 교리에 대한 지식이 어지간한 일반인은 물론이고 불자들 수준이거나 그 이상이다.

단 그렇다고 해서 가톨릭이 불교의 교리까지 믿는 것은 결코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가톨릭은 개신교와는 달리 타 종교(의 교리, 구원)도 인정한다는 오해를 하는 경우가 있는데, 가톨릭예수 그리스도만이 확실하고 유일한 구원의 길이라는 교리를 포기한 적이 없다(Extra Ecclesiam nulla salus). 애초에 여긴 자기들에게서 직접 갈라져 나간 개신교마저 인정하지 않는 곳이다. 다만 구원은 인간이 판단하는 문제가 아니라 오직 하느님께서 판단하고 주시는 것이므로 타 교파ㆍ타 종교 신자들에게 함부로 "너 지옥"이라고 판단하고 저주하지 않으며, 비신자들 역시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존엄한 인간이며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존재들이므로, 사랑과 친절로 존중하며 대하라는 소리일 뿐이다. 가톨릭은 자신들을 어디까지나 기독교의 한 분파로 인정한다. 허나 구원을 받을 수 있는 대상은 가톨릭(보편) 교회에 속한 사람으로, 비기독교인들은 고사하고 같은 기독교인 개신교인들마저 교회적 공동체로 부르며 구원의 대상인 보편교회에 속하지 않은 것으로 본다.[33]

다만, 불교의 계율과 교리를 믿지는 않더라도 존중하라는 것이 천주교의 공식적인 가르침이다. 때문에 천주교 신자가 불상을 파괴한다든지 하는 것은 지양한다.
불교에서는 여러 종파에 따라 이 무상한 세계의 근본적 불완전성을 긍정하고, 신심과 확신으로 완전한 해탈의 경지에 이르거나 아니면 자기 노력이나 위의 도움으로 궁극의 깨달음에 이를 수 있는 길을 가르친다. 그 밖에 전 세계에서 볼 수 있는 다른 종교들도 교리와 생활 규범과 신성한 예식 등을 제시하고, 여러 가지 방법으로 인간 마음의 불안을 극복하려고 노력하며 그 길을 가르친다. 가톨릭교회는 이들 종교에서 발견되는 옳고 거룩한 것은 아무것도 배척하지 않는다. 그들의 생활양식과 행동 방식뿐 아니라 그 계율과 교리도 진심으로 존중한다. 그것이 비록 가톨릭교회에서 주장하고 가르치는 것과는 여러 가지로 다르더라도,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진리의 빛을 반영하는 일도 드물지는 않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 - 비그리스도교와 교회의 관계에 대한 선언)

개신교와의 관계는 복잡한 편이다. 왜냐하면 개신교란 하나의 특정한 기독교 종파가 아니며, 원래 가톨릭과 정교회 둘 중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는 독립된 교파, 교단들을 묶어서 부르는 단어이기 때문이다. 또한 상술했듯이 기독교와 불교의 교리는 상극이라기보다는 딴판이기 때문에 개신교계에서 먼저 불교계에 접촉하기도 뭐하다. 일부 극단주의자들이 불교와 마찰을 빚기는 하지만, 집단으로 궐기해서 양측이 충돌하는 경우는 없기 때문에 다른 나라들의 종교 갈등에 비한다면 그리 큰 사회적 파장을 일으키지는 않고 있다. NCCK[34]한국기독교장로회, 향린교회, 반들교회 등 중도 내지 진보적인 곳은 부처님 오신 날에 축하메세지를 발표하거나 법당을 방문하여 종교화합을 위한 다채로운 행사[35]를 함께 하는 경우가 있으나, 이런 것 또한 교파연합과 개별 교단 및 교회가 알아서 결정하거나 참여하는 것이기 때문에 개신교라는 체계에 의거하여 긍정적으로나 부정적으로나 불교에 대한 어떤 통일된 관점을 고수하지 않는다.

다만 단체적인 입장은 스펙트럼이 꽤 큰 편이라 하나로 정의할 수 없으나, 신자들의 감정은 확실히 좋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나이 지긋하신 개신교 신자가 "불교 믿으면 지옥 간다"고 말하는 경우도 많고, 개신교 집안 아이들이 불교 집안 친척 집에 놀러가서 "지옥 간다"라는 말을 시작으로 분쟁을 일으킬 때도 있다.[36] 일반적인 개신교 신자나 목회자의 경우, 불교 수행자를 보고 스스로 지혜를 깨달아 성스러워지려고 노력하지만, 그래봤자 인간의 노력에 불과하고,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고 신을 섬기지 않는 오만을 위선으로 감추는 것일 뿐이며, 신앙이 기반이 되지 않았기에 신의 은총이 따르지 않을 테니 괜한 수고와 애씀에 불과하다고 본다. 즉, 보수적인 기독교 신자들 사이에서 불교 믿으면 지옥 간다는 것은 사실상 상식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불교의 입장에서는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단 하나도 없고, 스스로 수행을 하여 자아를 비워서 인간에게 괴로움을 주는 변하는 것들에 대한 집착을 없애고 악업에서 벗어나면 해탈하여 열반에 이를 수 있다는 게 불교의 가르침이기에, 기독교적 유일신론이야말로 자아 관념에서 파생된 것이어서 무아론에 위배되는 '전도된 몽상'에 해당하므로, 개신교가 신의 존재를 공리처럼 절대화하는 것 역시 무의미하다고 여기며, 다른 존재에게 의지하려는 태도는 수행을 통하여 번뇌에서 벗어나지 못한 중생의 태도로 본다.[37][38]

반면 개신교에서는 죄란 하나님의 뜻과 어긋나는 것을 말하고, 피조물이 변하는 까닭은 인간의 죄로 인해 세상이 저주받았기 때문이며,[39] 하나님은 언제나 변치 않고 완전하시기 때문에 불교의 세계관은 근본적으로 잘못된데다가, 불교는 세상에 변하지 없는 것은 없다더니 불교적 교리는 절대화하고 있으며, 하나님과의 관계의 단절을 유도하는 불교의 수행법을 따르면 확실히 지옥에 간다고 본다.[40]

때문에 개신교 내의 극단주의자들이 사찰에 단체로 쳐들어가 땅밟기를 하는 사례도 있어서 타 종교나 개신교 내에서 비판을 받기도 한다.[41] 유사한 사례로 불교가 기득권을 틀어쥐고 있는 동국대학교에서는, 거꾸로 불교가 개신교를 차별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한다. 물론 개신교 측이 훼불 사건 등의 반달리즘을 저지른 것은 사실이나, 2018년 초에는 학교 당국과 대치하며 본관 점거농성을 벌이고 있는 청소노동자들이 일요일에 개신교 인권운동가인 정진우 목사를 초청하여 본관에서 예배를 드렸다는 이유로 불교 언론들이 나서서 "불교 대학에서 예배를 드리는 게 말이나 되냐"며 비난하기도 했다.

일본의 경우 에도 막부 초기에 키리시탄 탄압 때 제일 먼저 나선 종교가 불교였고, 상당수의 승려들이 앞장서서 후미에를 실시했다. 그 이유는 오다 노부나가가 원래 무신론자에 반불교 성향이기 때문에 자신에게 반대하는 불교 세력들이 많아, 이 불교 세력들을 억제하기 위해 가톨릭을 지원한 데에 있다. 그러니 아즈치모모야마 시대 당시의 정권에 반하는 입장인 도쿠가와 막부에선 키리시탄들이 눈엣가시일 수밖에 없으며[42], 이때 일본 불교는 더더욱 반기독교 성향이었다.

가톨릭 신앙 금지령을 내린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모든 백성들이 불교도가 되길 바랄 정도로 독실한 불교도였지만, 당시 기독교 교리 자체가 일본 사회에 맞지 않았던 이유가 크다. 가톨릭 자체가 유일신 신앙이라 불교와 다신교신토를 부정할 수밖에 없으며[43], 자살을 죄악시했기 때문에 할복을 금지시켰고, 일부다처제도 부정하기까지 했으니, 가톨릭의 확산은 당시 근세 일본 사회에 있어 위협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었다. 카쿠레키리시탄 참조. 거기에 안 그래도 이런 식으로 일본 내부에서 가톨릭의 평판이 영 좋지 않은 상황이었는데 가톨릭이 중심이 되어 일으킨 반란인 시마바라의 난까지 일어나 버리니 일본에서 가톨릭은 돌이킬 수 없는 지경까지 가고 말았다. 그리고 이렇게 시작된 일본의 기리시탄 탄압은 메이지 유신까지 계속된다.

한편 스리랑카에서는 불교인들의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탄압이 일어나고 있다. 내전 당시에는 힌두계 타밀족에 대한 핍박을 주로 했으나, 내전이 끝나니까 그리스도인들도 핍박받게 되었다. 그리스도인들한테 반감이 있는 이유도, 과거 유럽 열강에게 식민지배를 받던 당시에, 가톨릭이 불교 승려들을 처형하는 등으로, 불교를 극심하게 탄압한 탓이 크다. 이 당시에는 불교도들의 사회적 지위가 매우 낮아 고위직에 오를 수 없었다.

10. 이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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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반도에서 불교가 거의 사그라 든 것은[44] 바로 이슬람교 때문이다. 비단 인도뿐만 아니라 8세기 이후 중앙아시아에서 불교가 사그라 든 것도 이슬람교의 확산과 맞물린 일이다. 즉 8세기 이후 중앙아시아-인도의 이슬람교도 확산은 불교의 축소와 연관되어 있다. 다만 불교가 완전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은 아니라 중앙아시아 발흐, 사마르칸드, 부하라 등의 도시의 불교 대학들이 이슬람 건축이나 이슬람 대학 시스템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 특히 이슬람의 신학 학교들인 마드라사들은 중앙아시아 불교 사원, 특히 아프가니스탄 발흐의 나우바하라 불교 사원의 체계에서 기원한다. 그리고 몽골의 침략 이전 중앙아시아의 마드라사들은 이슬람 교리를 집대성하는 학문적 중추로 기능한다. 그리고 불교 교리는 이슬람 수피즘, 쉬아파 교리에 간접적인 영향을 주었다.

서기 10~11세기 오늘날 우즈베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 일대에서 활동하던 천문학자 겸 역사학자 알 비루니는 오늘날의 파키스탄과 북인도를 여행한 후 인도의 철학과 종교, 역사와 언어, 문화 등을 다룬 <키탑 알 힌드>라는 책을 저술하는데 이 책에서 알 비루니는 힌두교 경전이나 철학서 이외에도 불교 관련한 기록도 상세히 남겼다. 물론 무슬림인 알 비루니 입장에서 불교 신도들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기는 어려웠고 대신 비루니는 석가모니 부처를 칭송하는 기록을 남겼다. 알 비루니는 인도의 석조 수조를 보면서 아직 무슬림들의 기술 수준은 아직 이 정도로 발전하지 못했다는 기록을 남겼다가 비판을 받았을 정도로, 자문화 중심주의에서 벗어나 인도 문명을 객관적으로 파악하는데 상당한 노력과 성과를 보여준 인물이기도 했다.

한편 몰디브에서는 1153년에 국왕인 이븐 압둘라 술탄이 자발적으로 불교에서 이슬람으로 개종했고, 이후 일반 민중들에게까지 이슬람이 포교되면서 불교를 밀어내고 이슬람교가 주류종교가 되었다. 이 경우에는 왕권강화[45]와 교역상 이득을 동시에 노린것인데, 당연히 마찰이 없던것은 아니라서 수도권인 말레는 순조로운 개종이 이루어졌지마, 지방에서 아직 불교를 믿던 세력들이 강했는데, 지방세력들에게 이슬람을 포교하는 과정에서 승려를 처형시키는 등 법난이 있던것으로 보이며, 지방세력들도 이슬람으로 개종하면서 이슬람화가 되었다.

일부 고전 무슬림 학자들은 불교도를 넓은 의미에서 성서의 백성(Ahl al-Kitab)으로 볼 수 있다는 견해를 피력했다. 이 '성서의 백성' 개념은 본래 기독교도나 유대교도를 주로 지칭했지만, 지역에 따라 그 지칭 범위가 확대되어 조로아스터교도, 힌두교도, 유교도, 불교도에게도 적용되었다. 이는 이슬람이 교세를 확장하고 현지인과 융화되어 가는 과정 중 일부이기도 했다. 단, 조로아스터교는 무슬림 초창기의 아랍인들에게 알려져 있었음이 분명하나, 힌두교, 유교, 불교는 그보다 불분명하기 때문에 의견을 달리하는 학자들도 많다.

이슬람에는 무함마드 이전의 여러 예언자 중에서 두 알키플(Dhu al-Kifl)을 언급한다. 두 알키플은 대체로 에제키엘을 지칭하는 것으로 해석되지만 그 외에도 다양한 해석이 있으며, 여호수아, 오바디야, , 심지어 붓다까지 후보군에 포함된다. 이런 해석이 가능한 이유는 '키플(Kifl)'을 석가모니의 출신지인 '카필라바스투(Kapilavastu)'의 와전으로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만약 두 알키플을 붓다로 해석할 경우, 불교 경전 역시 예언자의 말씀을 기록한 책이 되므로, 불교도 역시 '성서의 백성'이 될 자격을 충족한다고 해석할 여지가 생긴다.

태국에서는 태국 남부에 이슬람을 믿는 지역에 불교도를 이주시키고 승병이 조직되는 일도 있었다. 현재는 충돌이 많이 약해졌지만, 불교급진파가 늘면서 힌두교 말고도 소수 이슬람이나 기독교에 대해서도 굉장한 거부감을 보이고, 교회나 마스지드를 불교성지에 지었기에 불교도 시위대가 가서 없애버릴 것을 요구하는 사례가 늘어났다. 또한 소수 이슬람과 갈등으로 이슬람 급진파 공격을 받자 승려들이 무장하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다.

다만 태국 문서나 스리랑카 문서를 참고하면 좀 복잡한 면이 있다. 스리랑카의 경우 싱할라족 불교 근본주의 단체인 부두발라세나의 영향이 크다. 스리랑카 내에 반이슬람 여론을 강력히 이끌어가고 있으며, 종교의 영역뿐만 아니라 수틀리면 정치의 영역으로 진출하겠다는 의지를 강력히 천명하고 있으며, 미얀마의 극단주의 불교세력인 969과도 협력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자세한 내용은 이 기사를 참조할 것.

불교가 중앙아시아에서 크게 번성한 적이 있었지만 이슬람, 기독교, 조로아스터교와는 상당히 악연으로서 이들의 우상파괴 논리에 의해 수많은 미술품이 파괴되고 박해를 당하기도 하였다. 아프가니스탄 탈레반들이 바미안 석불을 파괴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46] 현재의 중앙아시아의 종교는 이슬람이 대다수이다.

중앙아시아와 인도 불교가 이슬람의 공세로 쇠퇴하던 시기 이후에도 티베트 불교는 직접 이슬람과 대치하던 상황이 이어졌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8세기 당시 신장 지역 서부 오늘날의 우즈베키스탄에 해당하는 지역은 무슬림들이 정복하여 급속한 이슬람화가 진행되었으나, 토하리스탄의 경우 토번 제국이 무슬림들의 진공을 저지하였고 이로 인해 위구르인들이 완전히 이슬람화하는 시점은 14~15세기로 늦춰졌다.

역사적으로는 인도아라비아 반도는 매우 가깝고, 중앙아시아 불자들이 인근 페르시아로 가서 불교를 성공적으로 전파하여 페르시아 만 일대에는 많은 불교 사원 유적들이 남아있다. 그러나 서기 3세기 경 조로아스터교를 국교로 삼는 사산조 페르시아가 불교를 탄압하고 기독교 교세가 늘어난데다 결정적으로 이슬람 세력이 중동을 장악하면서 중동 불교는 씨가 마르게 된다.[47]

여담으로 대한민국에서 1970년대부터 중동-이슬람권 경제 진출이 활발할 때 파견간 노동자들의 경우 불교 '신자'가 대부분이었다고 한다. 그렇다고 불교 신자들을 선발해서 일부러 파견을 갔다는 뜻은 아니고 다른 이유가 있다. 이슬람교에서는 무신론자/무종교를 대단히 부정적으로 바라보기 때문에 노동자들도 형식상으로나마 종교가 있어야 했다. 하지만 한국의 다른 메이저 종교인 기독교(개신교, 천주교 등)는 이슬람교와의 충돌이 매우 우려되기 때문에 서류상 종교를 대부분 불교로 통일시켰다고 한다.

11. 원불교

원불교는 불법의 시대화 생활화 대중화를 목표로 소태산 박중빈 대종사에 의해 창시된 종교다. 별도의 원불교 교전을 가지고 있고, 불교와 별개 종교로 분리되기는 하지만 그 가르침이 불법에 바탕하고 있고 소태산 역시 스스로 석가모니에 연원을 대었으므로[48] 넓은 의미에서는 불교의 범주로 볼 수도 있다. 실제로 원불교 교도에게 원불교가 불교라고 하면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또 불교가 아니라고 하면 그건 또 그것대로 아니라고 한다. 종교로는 구분되어있지만 근본 가르침을 공유하는 특수한 관계 때문이며, 그냥 천주교와 개신교의 관계 정도로 생각하면 편하다. 원불교는 창시 당시 불법에 바탕을 하면서도, 이 불법을 대중들에게 제대로 전하지 못하는 당시의 불교에 대해 혁신의 필요성을 제기하면서 만들어졌기 때문에 남녀 출가자 차별 철폐, 출재가 평등, 생활중심의 수행 등 기존 불교 종단들과는 많이 다른 모습으로 발전했다. 그러나 글로벌하게 보면 세계 불교도 연맹에 가입되어 있기도 하다. 합리성을 추구하는 성향이 서양인들과 잘 맞아서 외국인 교무를 꾸준히 배출하는 등 해외 포교에서도 성과를 내고 있기도 하다.

12. 뵌교

13. 유대교

13.1. 유대인 불자(JewBu)

영미권 등 서구 불교 신자 중 30% 정도가 유대인이라고 한다. 불교로 아예 개종하는 경우도 있는 한편, 유대교 전통을 유지한 채 불교 수행을 하는 경우도 있다. 이들을 주부(JewBu, Jubu, Jewish Buddhist)라고 일컫는다고 한다. 유독 유대인들이 불교에 흥미를 느끼는 이유에 대해서는, 유대교에 부족한 영적 수행 요소, 불교의 개방성 등이 꼽힌다. # #
그 외 목록 #


[1] 범천(梵天). 제석천. 우주 만물을 만들었다는 최고 절대신을 말한다.[2] 유대교그리스도교가 비옥한 초승달지대의 사유들과 교류하며 발전하고, 또한 그리스 철학과 교류한 것과 비교하면 꽤 흥미로운 비교가 될 수 있다. 유대교는 지혜서에서 플라톤의 사추덕(현명, 정의, 절제, 용기)을 서술하는 등 그리스 철학과 상당한 교류를 하였으며, 이러한 사유들은 그리스도교 교회로 이어진다. 대승불교의 경우도 중국의 여러 사상들과 경쟁 및 교류하며 발전했는데, 심지어 노장사상의 계승자는 도교가 아니라 선종이라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 그리스도교를 빼놓고 서양철학사의 서술이 불가능하듯, 대승 불교를 빼놓고 동아시아 철학사를 서술하는 것도 불가능한 지경이다. 고등학교 한국사에서 원효, 지눌 등의 사상을 교육하는 것도 이런 이유.[3] 오히려 불교가 중국 사상을 관념론적으로 한 단계 높혀놓았다. 도교는 물론이고 현실지향적이던 유교의 형이상학화(성리학)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4] 그러나 불교가 철학적인 토대를 탄탄한 배경을 갖추었다고 하더라도 종교성이 부정되는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교 역시 플라톤 철학과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받아들여 나름의 논리를 갖추었지만 종교임을 부정하는 사람은 없지 않은가(...). 당장 신약의 복음서들만 하더라도(특히 요한 복음서) 그리스 철학적 색채가 강한 편이고, 심지어 필리피서에서는 형상(Forma)이라는 상당히 플라톤적인 용어로 예수의 신성을 설명한다. 물론 고대에는 철학과 종교가 명확히 구분되지는 않았기에 철학과 종교 둘 다에 해당할 수는 있지만, 종교라는 특성이 부정되기는 어렵다.[5] 초기경전인 아함경 중 증일아함경에도 염불수행에 대해 나온다.[6] 여기서 당취는 땡추중, 즉 땡중의 어원이 되는 단어다. 일설에 따르면 이 당취는 임진왜란승병의 중심이 되었다고 하는데, 임진왜란 발발 당시 조정에서 불교의 대우를 개선하겠다는 조건을 내걸어 거병케 했고, 전쟁이 끝나고 어느 정도 개선이 이루어져 많은 당취들이 양지로 나오게 되었지만, 대부분의 사대부들은 여전히 승려들을 무시했으며 큰 개선은 없었다. 금강산 당취의 잔재세력인 운부(雲浮)는 조정의 태도에 불만을 품고 장길산과 손을 잡아 1696년(숙종 22) 봉기하여 거사를 도모하려 했다. 그러나 일면에서는 국초보다 불교에 대한 실질적 상황이 좋아졌다고 볼 수 있다. 대표적으로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다시 지어진 '법주사 팔상전'을 보면 새롭게 힘을 얻게 된 부농층과 상인계층이 공사에 크게 힘을 실어줬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사실 사대부들 중에서도 남들 앞에서는 불교 엄청 까대면서도 정작 본인 죽고 난 뒤에는 49재를 반드시 올리도록 지시한 사람들이 꽤나 많았다. 일단 왕실부터가 불교 신도들이 많았으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삼국시대 이래로 현대 한국의 기독교, 천주교인들도 49재를 지내는 걸 보면 알 수 있듯 불교의 중요 사상과 문화는 어떤 정치적 상황에 처하더라도 그것과는 상관 없이 민간인의 입장에서는 토착화된 종교로 받아 들여지고 있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7] 그리고 이는 비단 불교뿐만 아니라 다른 종교에서도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가령 탈레반이 바미안 석불을 내렸을 당시 무슬림들 대다수가 탈레반에 사이비라며 극렬하게 반대하였고, 일부는 불교 문화권의 국가들이나 신자들에게 사죄의 말을 전하기도 했다. 그나마 온건한 사람마저 '파괴는 너무 공격적이고 극단적인 수단 아니냐', '올바른 무슬림의 자세가 아니다'라며 비판했을 정도였다.[8] 샹카라는 나가르쥬나의 사상을 꽤 많이 받아들였는데 그래서 당시에 다른 브라만교 학자들로부터 '가면을 쓴 불교도'라는 비아냥을 듣기도 했다. 하지만 최종 결론에서 불교의 공 사상이 아닌 범아일여 사상을 주창한다.[9] 석가모니가 활동할 당시 힌두교(당시는 브라만교)에 반발하여 나온 수행집단을 일컫는다. 본래 힌두교(브라만교)에서 진리를 탐구하는 구도행위는 '브라만' 출신이만이 얻을 수 있는 특권이었다. 이에 반발하여 계급에 큰 관계없이 누구나 나와 구도를 할 수 있음을 주창하던 이들이 바로 사마나이다. 물론 사마나 모두가 카스트에 반발했던 것은 아니고, 그 외의 철학적 견해의 다름으로 뛰쳐나온 사마나들도 있었다.[10] 현대의 힌두교는 범아일여를 필두로하여 나와 우주를 일치시키려하는 신비주의적 성향이 강한데에 비해 불교는 예나 지금이나 철저히 '괴로움의 소멸'이 목적이다. 불교에 신비주의적 성향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신비주의적인 것들 조차 괴로움을 없애기 위한 '수단'으로 쓰일 뿐 결코 '목적'이 되는 경우가 없단 소리다.[11] 불교수행법 중 아나빠나사띠(Anapanasati) 같은 수행법은 최초 소개자가 부처 그 자신이며 힌두교에서 찾아볼 수 없는 독자적인 수행법이다.[12] 나가르주나의 중관학파에서 차용한 용어로써의 '중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본래 의미에서의 중도, 즉 고행과 안정 사이에서 균형을 찾는 '중도'를 말하는 것이다. 현재에와서도 이를 중요한 교리로 다루는 것은 불교만의 매우 독특한 색깔이다. 오히려 '중관학파'가 주장하는 의미로써의 '중도'는 현대 힌두교에서 이미 차용한 부분이 너무 많아 실제 둘을 비교해 보면 엇비슷할 때가 많다.[13] 특히 원나라 몽케 칸 시절에는 아주 크게 대판 싸워 도교의 도사들이 절을 빈번히 약탈하자 몽케 칸이 쿠빌라이 칸에게 두 종교의 분쟁을 풀도록 시켰는데, 1258년 쿠빌라이는 승려와 도사들을 불러 입배틀을 시켰다. 도사들이 승려들에게 지자 쿠빌라이는 강제로 237개 도장을 불교 사원으로 바꾸고 도교 경전을 불태웠다.[14] 중국에서 불교는 애당초 이민족 왕조의 귀족계층을 중심으로 전래되고 확산된 귀족적 성격의 외래 종교였다.[15] 대표적으로 율곡 이이가 한때 스님이 된 바 있다.[16] 왕들이 불교 행사를 여는 대부분의 이유는 사랑하는 가족이 죽었을 경우 명복을 빌기 위해서였다. 유교가 현실적인 필요에 의해 탄생한 종교인 만큼, 사후세계에 대해서는 별다른 언급이 없어 소위 ‘남은 사람들’의 아픔을 위무하기엔 제약이 많다.[17] 말그대로 세상을 '구하는' 것이다. 유교에서 말하는 '치세'의 이념과는 다르다. 군주에게 엄격한 도덕을 강조하는 유교에 비해서 위정자들에겐 상대적으로는 널널한 것이었을 듯.[18] 구미래, <한국인의 죽음과 사십구재> 민속원, 2009. 참조[19] 홍윤식, <불교문화와 민속> 동국대학교 출판부, 2001. 참조[20] 원래는 독성, 용왕, 산신을 같이 모신 삼성각이었으나, 삼성각의 토속신 중 그나마 불교 영향이 강한 독성만 다시 모셨다.[21] 사천왕사에 토속신인 오방신을 모셨다고 나오고, 통도사에는 불사에 사용하던 오방신 탱화가 지금도 보관 중이다.[22] 최준식, <조선의 도인들> 소나무, 2012. 참조[23] 100계×10여시×3세간=3,000으로 계산해서, 마음 하나가 3천 가지 세계를 지어내며 이는 모든 중생이 공유하는 바라는 설이다.[24] 가톨릭에서만 인정. 정교회는 인정하지 않는다.[25]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시어 이 세상에 오심.[26] 불교 역시도 천룡팔부 등 신 개념이 존재하지만, 그리스도교의 신 개념과는 매우 거리가 있다. 불교에는 윤회 사상이 있어서 대놓고 말하지 않을 뿐이지, 알고보면 보수적인 불교 입장에서 볼 때 자기 자신을 의지하여 깨달음을 얻으려 하지 않고 신을 의지하려는 기독교도들은 깨달음을 얻지 못한 중생이라서 지옥에 가게 된다. 반면, 기독교 입장에서는 하느님과 교회의 존재를 알면서도 믿지 않고 자기 자신을 의지하려는 불교도들이야말로 지옥에 가게 된다.[27] 혹은 극단적인 수행과 노력이 아니더라도, 실상에 대한 올바른 이해에 바탕한 세계관의 전환 그 자체로.[28] 여담으로 여신전생 시리즈에서 LAW광신자의 상징인 메시아교는 그리스도교 계열인데, 그와 대치하는 CHAOS인 가이아교는 상당히 불교색이 짙은 경향이 있는 것이 이런 점 때문이다. 이렇다 보니 불교의 가르침이 무신론에 가깝다고 보는 오해가 있을 정도. 참고로 아미타불은 극락 보내 주는 것이지, 성불시켜 주는 것이 아니다. 극락은 성불하기 최적의 조건을 갖춘 수행 장소일 뿐이다.[29] 다만 마테오 리치 신부의 불교 비판은, 오늘날 가톨릭 신자의 관점에서 보면 좀 과한 면도 있다. 이를테면 불상을 보고 못생겼다고 깐다든지(…)[30] 아래에서 설명할 일본도 기독교가 흥하지 못한 국가 중 하나이지만, 센코쿠 시대~에도 막부 초기에는 그래도 꽤 교세가 있었다.[31] 사대부들은 그 둘이 같다고 생각한 듯한데, 채제공천주교에 대해 논의하는 자리에서 천주교를 불교의 별파로 봤다.[32] 참고로 이 두 날이 모두 공휴일인 나라는 한국뿐이다.[33] 이전에는 "예수하느님을 믿는다면, 심지어 예수를 믿지 않더라도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살았다면 연옥을 통해 구원을 받는다"고 적혀 있었는데, 이는 가톨릭이 비신자들에게도 친근할 것이라고 믿으며, 거기에 막연한 환상을 갖는 비기독교 대중들의 전형적인 착각 중 하나다. 연옥도 가톨릭에 속해 대죄/중죄를 짓지 않아 구원을 받을 수 있는 대상이 여전히 죄가 많아 사후 보속하는 과정에 대한 개념이며, 예수와 가톨릭을 알고도 예수를 믿지 않거나 가톨릭교회에 다니지 않으면 당연히 구원을 받을 수 없다. 유일한 예외 대상은 전혀 하느님이나 가톨릭교회에 대해 들어본 적이 없거나 가톨릭교회에 속할 기회를 아예 갖지 못한 사람이라면 구원의 대상이 될 수 도 있다는 경우 뿐이다.[34] NCCK는 국내 개신교에서 가장 큰 교세를 지닌 예장통합이 소속된 곳이다.[35] 특히 서울 장충동 소재의 경동교회(한국기독교장로회)는 오래전부터 불교 정토회와 교류가 있어왔고, 담임목사가 법당을 방문하여 설교하고, 크리스마스 예배 때는 정토회 법우들이 경동교회를 방문하여 함께 성탄예배를 드리고 캐롤을 부르는 모습이 매년 보도되기도 한다.[36] 그런데 이런 경우는 그냥 애들끼리의 유치한 자존심 싸움 정도에 불과하며, 정말로 콩가루 집안이 아닌 이상 나이 먹은 성인들끼리는 차라리 의절을 하고 말지 이런 식으로 하지는 않는다.[37] 다만 성경은 하나님 이외의 것을 의지하려는 태도를 죄로 규정하고 있기는 하다. (예레미야 2:13, 예레미야 17:5)[38] 성철(승려)의 유언에서 자신은 그동안 사람들을 속였고 또한 지옥에 갈 것이라고 한 것은 이와 같은 불교의 사상을 토대로 사람들로 자기 자신을 의지하게 해야 함에도 그렇게 하지 못했고 죽어서는 지옥에 가서 불교를 설파함으로써 지옥에 있는 사람들을 구원하겠다는 의미인데, 개신교계에서는 이 말이 기독교가 진리인데 자신은 그동안 비진리인 불교를 퍼뜨렸고 예수를 안 믿은 결과로 자신은 지옥에 가게 되었다는 뜻으로 곡해되어 퍼져있다. 어찌되었든 성철은 기독교 교리상으로는 확실히 사람들에게 비진리를 퍼뜨려왔고 죽어서도 지옥에 가는 사람이긴 하다.[39] 이러한 관점은 창세기의 서술을 근거로 한다. 인간의 신체가 무상해지고 고통을 겪도록 만들었다는 것 때문이다. 다만 이러한 관점은 사람이 겪는 무상함(인무아)에 대해서는 부분적으로나마 설명해주더라도, 세상의 무상함(법무아)은 설명해주지 못한다는 맹점이 있다. 창세기에 따르면, 세상은 이미 인간 이전에 현재의 모습과 같이 창조되었는데, 불교의 입장에서는 세상이 변하지 않으면 오온의 화합으로 인한 물질 세계 역시 거시적으로 성립하지 않으므로 설정 오류이자 희론이 되기 때문이다.[40] 개신교에서는 마귀는 사람과 하나님의 관계만 갈라놓으면 되기에 불교, 뉴에이지 등에서 명상을 하는 사람들이 릴랙스되는 것은 비진리에서 평안을 찾게 하려는 마귀의 짓이라고 보기도 한다.[41] 그런데 땅밟기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이건 한국 무교와 개신교가 기묘하게 결합된 형태의 행위라 원래 2008년 이후로 일반 교단들에서도 금지하는 이단 행위이다. 가톨릭, 정교회, 미국 청교도, 영국 성공회 등은 물론이고, 애초에 일반적인 개신교 내에서도 유례를 찾을 수가 없다. 즉, 근본 자체가 없는 행위인 것.[42] 단,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그리스도인들의 횡포 때문에 바테렌 추방령을 내리는 등 가톨릭 신앙에 압박을 가했지만 이것은 치안 유지의 차원이었지, 에도 막부 시절 같은 탄압은 없었다. 이때 일본은 불교 신자들과 가톨릭 신자들의 갈등이 심했고, 심지어 다이묘들 간에도 종교 때문에 감정 상하는 일이 많았다. 한국에도 널리 알려진 앙숙 관계인 가토 기요마사고니시 유키나가도, 가토의 영지에서 탄압받던 가톨릭 신자들을 고니시가 두둔한 일로 서로 날을 세운 적이 있다. 다만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경우 세키가하라 전투 당시 키리시탄들이 싹 다 서군에 붙는 바람에 정권 유지의 차원으로 탄압했고 그것도 세키가하라 전투가 끝나고 잠시 중단하다가 가톨릭 교도들이 일으킨 시마바라의 난 때문에 에도막부는 어쩔 수 없이 가톨릭을 탄압하게 된다. 다른 건 다 둘째치더라도 시마바라의 난이 제일 크다.[43] 신토 부정은 천황 부정이고 일본 체제의 붕괴를 의미하기도 하였다.[44] 현재 인도의 불교 신자 수는 기독교 신자보다도 더 적다.[45] 이 시기는 몰디브가 통일된지 얼마 안되었던 시절이었다.[46] 이와는 반대로 동남아미얀마 등지에서는 불교도들이 무슬림들에게 폭력을 행사하거나 혹은 모스크를 불태우거나 하는 일도 있었다.[47] 몽골 제국 시대에 몽골인들이 불교 사원을 다시 몇 개 건설하긴 했지만 중동의 몽골인들이 이슬람으로 금새 개종해버리는 바람에 현지인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지는 못했다.[48] 소태산은 스님이 아니었을 뿐 아니라, 불법과 별 인연 없이 스스로 깨침을 얻은 케이스다. 그러나 깨달음을 얻은 직후 여러 종교의 경전을 열람하고 금강경에 감명을 받아 석가모니 부처님을 스스로 연원으로 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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