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밝은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2-10-25 12:29:05

유식(불교)

唯識

1. 개요2. 식(識)이란?3. 법상종의 유식4. 같이보기

1. 개요

산스크리트어 vijñapti-mātra[1]의 번역으로, 삼라만상은 심식 밖에 실존하지 않으며, 우주의 종극적 실재는 마음뿐으로서 외계(外界)의 사물은 마음의 변현(變現)이라는 뜻. 한 마디로 '모든 것은 생각하기 나름이다.' 일체유심조를 말한다. 모든 것은 마음 먹기에 달려 있다는 말.

우리가 정보를 받아들일 때 , , , , 피부 등을 통해 시각, 촉각, 후각, 미각 등을 느끼고 생각하게 된다. 이런 정보들이 ‘마음’이라는 필터로 인해 왜곡될 수 있다는 것이 '유식' 사상의 핵심 주장이다.

대표적인 예로 길 가던 나그네 앞에 뱀(처럼 생긴 노끈)이 갑툭튀하여, 그것을 본 나그네는 깜짝 놀랐고 또 매우 무서웠는데, 다시 보니 뱀이 아니라 노끈이었다는 얘기가 있다. 이처럼 무서운 감정은 '잘못된 정보'가 들어왔기 때문이며, 마찬가지로 부정적 감정들의 대부분은 왜곡, 확대, 재생산되어 우리들을 괴롭힌다. 이러한 '왜곡된 정보'가 무지로서 괴로움의 원인이 되며, 단지 이것 때문에 무서운 감정이 들었다는 것을 '아는 것'이, 괴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한 방법이다. 이렇게 내가 보고 느끼고 생각하는 것이 내 마음을 바꾸기도 하고, 또한 내 마음이 내가 보고 생각하고 느끼는 것을 바꾸기도 하므로, '모든 것은 마음의 문제' 라고 말하였다.

2. 식(識)이란?

식(識)은 산스크리트어 비야나(Vijñāna)를 번역한 것으로 요별(了別) 또는 비사나(毘闍那)라고도 번역되는데, 말하자면 대상을 인식하는 정신의 주체(主體), 6경[2]을 맞아서 인식하는 마음의 작용를 말한다. 초기 불교에서는 마음 작용을 안식 · 이식 · 비식 · 설식 · 신식 · 의식의 6식(識)으로 분류했다.

불교에서는 심왕(心王)과 심소(心所)라고 해서 의식작용의 본체. 객체에 대해 그 일반적인 상을 인식하는 정신 작용의 본체를 심왕이라고 부르고 그 심왕에 종속되어 있는 것이 심소이며, 오직 심왕에게만 '식'이 존재하고 심소는 심왕의 식에 따라서 식을 받아 정신작용을 일으키는 객체에 불과하다고 본다.

심왕에게 존재하는 식을 여섯 가지로 나눈 것이 보고(眼識)ㆍ듣고(耳識)ㆍ맡고(鼻識)ㆍ맛보고(舌識)ㆍ닿고(身識)ㆍ아는(意識) 인간의 기초적인 감각에 대한 6식이며, 유식종에서는 여기에 제6식(의식)을 세분화해서 말나식(末那識)[3]과 아뢰야식(阿賴耶識)[4]을 더하고 8식으로 설명한다. 여기에 또 암마라식(菴摩羅識, amala-vijnana)[5]과 건률다야식(乾栗陀耶識, hrdaya-vijnana)을 더해서 10식이 나왔다. 에기에 무량식(無量識)을 더해서 11식으로 구분하기도 한다.

말나식은 제6식(의식)과 아뢰야식의 매개가 되는 식인데 의(意)라고 번역되며, 끊임없이 인식하고 분별하고 생각하고 헤아리고 비교하는 마음 작용으로, 아치(我癡) · 아견(我見) · 아만(我慢) · 아애(我愛)의 네 번뇌와 항상 함께 일어나는 자의식이다. 아뢰야식은 말하자면 무의식으로, 인간이 과거에 경험한 인식, 행위, 학습 등을 모두 마음의 심층부에 가라앉혀 저장해두고 있는 마음의 잠재력을 말한다. ‘장식(藏識)’이라 한다. 과거에 경험한 인식 · 행위 · 학습 등을 저장하고 있는 마음 작용으로, 심층에 잠재하고 있다. 이러한 과거의 경험들이 아뢰야식에 잠복 상태로 저장되어 있는 잠재력을 종자(種子) 또는 습기(習氣)라고 한다. 유식삼십론송에서는 보고(眼識)ㆍ듣고(耳識)ㆍ맡고(鼻識)ㆍ맛보고(舌識)ㆍ닿고(身識) 하는 5식이 모두 아뢰야식에 의해서 조건에 맞춰 일어나며, 어느 때는 함께 일어나고 어느 때는 함께 일어나지 않는데[6] 파도(전5식)가 (아뢰야식)에 의지해 일어나는 것과 같다고 설명하고 있다. 안식 · 이식 · 비식 · 설식 · 신식, 즉 전5식은 조건에 따라 심층에 잠재하고 있는 아뢰야식의 영향을 받기 때문에 바깥 대상을 있는 그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자동적으로 그 대상을 덧칠해서[7] 자기 나름대로 지각한다. 즉, 그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 보고 피부에 닿고 하는 다섯 가지 식은 모두 아뢰야식이라는 색안경을 통해 바깥 대상을 지각한 결과라는 것이다.

말나식은 보고 듣고 맡고 맛보고 닿고 하는 식처럼 바깥의 대상을 인식하는 게 아니라 아뢰야식을 대상으로 해서 일어나고, 생각하고, 헤아리고, 비교하는 것을 본질로 삼는다. 자신에 대해 어리석은 아치, 자신을 독립적인 존재라고 착각하는 아견, 자신을 높이고 남을 낮추는 아만, 자신만 아끼고 소중히 여기는 아애와 항상 함께 일어나기 때문에 ‘에고’의 본바탕이 되며, 아뢰야식에 의지해서 일어나기 때문에 과거의 경험들과 함께한다. 따라서 말나식의 내용은 ‘에고’를 바탕으로 한 상상 · 허상이고, 이것은 바깥 대상과 관계없이 그냥 내면에서 떠오르는 번뇌이고 분별이고 자의식이다. 그래서 수행자는 말나식이 일어나면 곧바로 알아차리고 잠깐 ‘틈’을 가져야 한다. 이 틈이야말로 말나식을 약화시키는 유일한 길이다. 예를 들어 남에게 화를 내려거나 부정적인 말을 하려고 할 때, 그것을 즉각 알아차리고 잠깐만 틈을 가지면 그 충동이 누그러진다. 이 틈을 계속 반복해서 가지면, 에고가 점점 약화되고 감소되어간다. 이게 유식학의 지향점이다.

다시 말하면, 상상과 허상을 따라가지 않고, 자신의 선입견이나 감정으로 대상을 채색하지 않는 게 마음의 소음을 줄이는 길이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말나식이 일어날 때, 즉각 그것을 알아차리고 한발짝 물러서서 잠깐 관조하는게 말나식을 약화시키는 길이다. 말나식은 ‘에고’의 본바탕이고, 이 에고가 괴로움의 뿌리이다. 에고는 자신을 드러내고 내세우려는 마음의 소음이다.

열반에 이르는 데 장애가 되는 가장 근본적인 번뇌인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도 에고를 바탕으로 해서 일어나고, 괴로움의 원인인 갈애도 에고에서 일어난다. 그래서 말나식이 일어나자마자 자동으로 반응하지 않고, 그것을 자각해서 누그러뜨리는 게 수행의 시작이다. 모든 번뇌를 완전히 끊어 열반을 성취한 아라한, 모든 마음 작용이 소멸된 멸진정, 모든 번뇌를 떠난 출세간도에서는 말나식이 일어나지 않는다.

아뢰야식은 너무나 미세하고 마음의 심층에 잠복된 상태에서 움직이기 때문에 감지할 수 없고,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으며, 끊임없이 흐르는 것이 급류 같다. 그런데 잠복 상태에 있는 아뢰야식의 종자가 어떤 자극으로 의식에 떠오르면 탐욕 · 분노 · 고락 · 선악 등으로 나타난다. 비유하면 무슨 씨앗인지 잘 구별되지 않는 좁쌀 같은 갖가지 씨앗이 바구니에 가득 담겨 있는데, 그 하나를 집어내어 물을 주면 싹이 돋아나 그 본색을 드러내는 것과 같다.

그래서 수행자는 분노가 일어날 때 즉각 알아차려서 그것에 휘둘리지 않고, 따라가지 않으며, 한 걸음 물러서서 그냥 지켜보기만 해야 한다. 즉 분노의 종자에 물을 주지 않음으로써 그 종자의 잠재력을 약화시키는 것이다. 이런 통찰을 반복하면 그 종자는 말라 죽게 되는데, 그 온갖 종자가 다 말라 죽은 경지에 이른 성자가 아라한이다.[8]

3. 법상종의 유식

법상종에서는 이 유심의 이론을 성립시키면서 만유의 현상에 속한 심식(心識)에 대한 4분(分) 이론을 세웠다. 이는 우리가 인식하는 과정에 있어 그 의식 작용을 4단으로 나눈 것이다.

1. 상분(相分). 우리는 바로 객관의 사물을 인식하는 것이 아니고, 일단 마음에 그 그림자를 그려서 인식한다. 그 그림자를 상분이라 한다.
2. 견분(見分). 마음이 발동할 적에 상분이 변현하는 동시에 그것을 인식하는 작용이 생긴다.
3. 자증분(自證分). 견분은 거울에 상이 비치는 것과 같으므로, 이에 통각적(統覺的)[9]인 증지(證知)[10]를 주는 작용이 필요하다. 이 작용을 자증분이라 한다. 또, 자증분은 상분ㆍ견분의 근거가 된다.
4. 증자증분(證自證分). 자증분에 대한 증지(분명하게 아는) 작용. 자증분과 증자증분은 서로서로 증지하는 것이므로 제5분(分)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우리들이 인식하는 대경(對境)으로 삼는 '객관'이라는 것은 실은 인식 작용으로부터 독립하여 존재하는[11] 실경(實境)이 아니고, 견분(見分) 즉 눈에 보이는 대로 마음 속에 비치는 상분(相分), 곧 본질을 연(緣)으로 삼아 생긴 영상에 불과하며, 그 본질이라는 것도 제8 아뢰야식에 들어있는 종자로부터 생겨난 것이므로 마음으로 만든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일체의 사물은 모두 심식으로 변현한 것인즉 삼계란 유식 즉 마음으로 인지하는 과정만이 종극의 실재요, 그밖에 따로 다른 법이 없다는 것이다.

또 『대승기신론』이나 화엄종 등에서는 만유의 본체인 진여심(眞如心)과 관련해서 이론을 세웠다. 만유는 모두 일심진여(一心眞如)로 나타냄에 불과한데, 진여심에는 수연(隨緣)[12]과 불변(不變)[13]의 두 방면이 있어, 불변하는 방면(불변진여)으로는 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지만, 수연하는 방면(수연진여)으로는 염정(染淨)[14]에 따라 갖가지 차별된 현상을 나타낸다. 그러므로 만상은 일심진여의 현현이고 그 본체는 진여를 떠나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님. 이것이 3계가 한마음뿐이요, 마음 밖에 다른 법이 없다고 하는 학설이다.

유식을 기반으로 성립된 불교 종파가 유식종, 즉 법상종으로, 법상종에서는 모든 경론에 나오는 유식의 글과 뜻을 모두 거두어 5종으로 분류했다. 이를 오종유식이라고 하며, 만법유식(萬法唯識)의 진리를 관하는 데 있어 그 깊이에 맞춰 5중의 관법(灌法)을 정했다. 이것이 오중유식관이다.
- 경유식(境唯識). 만물은 오직 식(識)의 변화로 생긴 것이라고, 경(境)에 나아가 유식의 이치를 밝힌 것.
- 교유식(敎唯識). 교유식. 만유(萬有)는 오로지 식(識)의 변현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하는 교설. 『능가경』ㆍ『화엄경』ㆍ『해심밀경』 등의 학설.
- 이유식(理唯識).
- 행유식(行唯識). 보살의 수행에서 만유는 오직 식이 변해 나타난 것에 불과하다고 관하는 것같이, 수행하는 데에 유식의 뜻이 나타나는 것을 행유식이라 함.
- 과유식(果唯識). 경론 가운데서 말한 우주의 종극적 실재는 오직 마음 뿐이고, 외계(外界)의 사물은 그의 변현에 지나지 않는다는 유식의 이치를 생각하고 관찰하여 얻은 과지(果智)를 밝히는 것.

오중유식관은 견허존실식(遣虛存實識)ㆍ사람류순식(捨濫留純識)ㆍ섭말귀본식(攝末歸本識)ㆍ은렬현승식(隱劣顯勝識)ㆍ견상증성식(遣相證性識)이다.
- 견허존실식. 자기의 감정이나 욕망에 따라 일어나는 주관의 차별적 고집에 의하여 파악하는 대상이란 오직 주관의 감정에서만 참인 듯하고, 객관의 이치에서는 없다. 전혀 실재성이 없는 것이므로 이는 허망한 것이며, 자체와 작용이 없다고 보아 공한 것이라고 부정하여 치우고, 서로서로 인과의 이치에 따라 존재하는 일체 만상과 우주의 본체인 진여와는 객관의 진리에서 존재한 것이므로, 이 모든 법의 본체는 진실한 것이어서 후득지(後得智)ㆍ근본지(根本智)의 대상이라고 보아 참말로 있다고 인정하는 관법.
- 사람류순식. 견허존실식에서 만유의 모든 법을 마음 밖에 실재한 실법(實法)인 줄로 보던 만유관(萬有觀)을 버리고, 참말 세계는 인연 화합의 모든 상(相)과 그 이성(異性)인 진여라고 관하였으나, 다시 다른 것에 의지하는 모든 법을 관할 적에 연려(緣廬)되는 대상과 연려하는 마음 작용이 있어 모두 마음 안에서 발현된 것이지만, 마음의 대상으로 보이는 것은 마음 밖의 존재임과 같이 생각되기 쉬우므로, 관심상(觀心上)의 용의(用意)로써 마음 밖의 실경(實境)이라고 뒤섞이기 쉬운 상분(相分)을 버리고, 이것을 인지하고 또 인지되는 것을 증명하는 마음인 견분(見分)ㆍ자증분(自證分)ㆍ증자증분(證自證分)을 머물러 두어, 세계는 오직 연려 작용인 마음, 견분 등의 3분(分)뿐이라고 관하는 것.
- 섭말귀본식. 유식종에서 만유가 유식으로 변현(變現)한 것임을 관하는 관법인 5중(重) 유식관의 1. 유식종에서 우리의 인식 과정에 4분(分)을 세운 중에 상분(相分)과 견분(見分)은 식(識)의 자체분(自體分)에서 갈려져 나온 것이라 하므로 이 견분ㆍ상분을 자체분에 거두어 돌려 보내서 유식의 이치를 관함.
- 은렬현승식.
- 견상증성식. 앞에 제4중에서 남아 있는 심왕(心王)은 다른 것을 의지하여 일어난 것이므로 이제는 이것을 버리고 유식의 참 성품인 진여를 증득하는 관법.

4. 같이보기



[1] Vijñapti는 ‘마음 작용’, mātra는 ‘오직’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유식이란 ‘모든 현상은 오직 마음 작용에 지나지 않는다’는 뜻이다.[2] 객관적 만유의 대상. 즉 색(色)ㆍ성(聲)ㆍ향(香)ㆍ미(味)ㆍ촉(觸)ㆍ법(法).[3] 산스크리트어 manas의 한역이다.[4] 산스크리트어 ālaya(저장)의 한자 음역이다.[5] 천태종에서는 암마라식을 진여, 자성 등과 동의어로 보았다. 그러나 법상종에서는 이러한 견해를 인정하지 않고, 진여자성이란 번뇌에 오염되었던 아뢰야식이 불법에 대한 바른 이해를 통해 변화를 일으켜, 오염되지 않은 대원경지(大圓鏡智)로 바뀐 상태라고 본다.[6] 아뢰야식의 작용이 끊겨 바깥 대상을 있는 그대로 직관하는 상태이다.[7] 말 그대로 자신의 선입견이나 감정으로 그 대상을 덮어씌운다는 뜻이다. 따라서 어떤 대상에 대한 판단도 제각각이고, 어떤 사람에 대한 평가도 제각각일 수밖에 없다. 이것은 심층에 잠재하고 있는 아뢰야식이 다 다르기 때문이다.[8] 출처: 곽철환 <불교의 모든 것>[9] 어떤 의식 내용을 명료하게 하는 과정. 분트(Wundt, W.)는 이러한 통일의 과정을 능동적 과정이라 생각했고, 이것을 의지 과정과 동일시했으며, 이 과정에는 생리적 대응 과정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했다.[10] 분명하게 증명하여 아는 것[11] 그러니까 내가 어떻게 생각하건 말건 돌은 돌이고 풀은 풀인 것처럼.[12] 만유의 본체는 변함이 없는 것이지만 인연에 의하여 여러 가지 모양으로 나타나는 일.[13] 일체 평등하고 불생불멸하여 변화가 없는 상.[14] 염(染)은 더럽히는 것으로 번뇌. 정(淨)은 번뇌를 떠나 청정한 상태를 말하며, 염정은 때로는 선악(善惡)과 같은 뜻으로 사용한다.

분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