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위 문서: 조선에는 쿠데타가 필요해요
[clearfix]
1. 개요
본 문서는 한국의 대체역사 웹소설 『조선에는 쿠데타가 필요해요』에 나오는 등장인물과 그 행적을 서술한다.2. 대한제국
2.1. 군부
김민재가 김시혁에 빙의한 1894년 시점에는 한성구락부로 뭉친 근왕파, 허진을 중심으로 한 대원군파, 안경수, 우범선, 이두황 등을 포진한 친일파로 나뉘어져 알력 싸움이 치열했다. 경복궁 습격 때는 내부 친일파가 군령을 위조해 평양 기영병들이 사수하던 영추문 방어력을 약화시켰을 정도. 노쇠한 대원군이 사망하면서 대원군파는 자연스럽게 와해되고 근왕파와 친일파로 양분 되었다 을미사변과 1차 친위 쿠데타를 거쳐 근왕파가 주도권을 쥔다.내각의 친일파는 1903년 2차 쿠데타와 1905년 극동 전쟁 승리를 거쳐 비로소 척결되나, 군부는 1895년을 기점으로 친일파를 대부분 털어내는 데에 성공하여, 2차 쿠데타 직전 친일파 고급 지휘관은 고종의 비호를 받은 이병무 1명 뿐이었다. 대원군 시절 군인 우대 정책과 2차례 쿠데타를 거친 탓에 자칫 군국주의로 흐를 위험성을 내포하게 되었으며, 수장인 김시혁이 문민통제를 철저히 강조해 이를 제어하고 있다.
1차 세계대전이 무대인 2부에서는 게릴라전 경험만 있어 전쟁 무서운 줄 모르고 적극적 참전을 주장하는 남부 출신과 사람 목숨이 종잇장보다 가벼운 전면전을 겪어 보고 신중론을 주장하는 북부 출신 지휘관들의 성향이 나뉘는 모습을 보인다.
충청도를 경계로 지휘관들의 위상이 확연히 갈리는데 영관급 이상 고급지휘관 절대 다수가 극동전쟁에 공을 세운 북부 출신이고 일부 예외도 기호 지방 출신들이 차지하고 있다.[1] 군부를 견제할 기회만 노리던 고종은 출세길에서 밀려난 영호남 출신 장교들을 근황파로 끌어들여 갈라치기를 시도한다. 김시혁이 확실한 구심점으로 존재할 때는 단순한 의견 다툼 선에서 정리될 수 있었으나 김시혁이 유럽으로 떠난 사이 고종이 근황파 키워주겠다며 일을 벌여 한바탕 홍역을 치른다.
2.1.1. 육군
- 김시혁
문서 참조.
- 김시진
김시혁의 동생. 1880년생으로 형과는 6살 차이다. 김민재가 빙의하기 이전, 한량이였던 김시혁이 갑자기 사람답게 행동하는 것에 감격하는 것으로 첫 등장한 이후 형을 따라 군에 입대, 김시혁이 서남해안에 해적을 토벌하고 왔을 때 편지 한 장 달랑 던지고 러시아로 유학을 떠났다.[2] 졸업하고 난 뒤에 의화단 운동이 발발하자 신설된 강습보병대대의 소대장으로서 파병되어 톈진성 성문을 돌파하는 공을 세우는 것을 시작으로 승승장구하며 순조롭게 진급, 대대장까지 승진하여 극동 전쟁에서도 대활약. 원산 상륙작전을 성공시키고 문산에서 겨우 600명으로 2만이 넘는 일본군을 막아내는 대공을 세웠다.
불같은 성격에 전술적 임기응변에서는 형에 뒤지지 않아 급한 상황이 닥치면 일단 저지르고 보는 경우가 많다. 소속 병과인 강습보병에 대한 애착이 굉장해서 형이 밀어주는 포병 병과에 대한 경쟁심을 불태우기도 한다. 제1차 세계 대전 참전이 결정될 무렵 참장으로 진급하였고, 익숙한 강습보병여단을 떠나 러시아가 극동 지역 한인들로 구성해 한국군에 배속해준 독립 시베리아 소총병 여단의 지휘관으로 전임해서 인종만 한국인이고 속은 러시아인 여단원들을 러시아 화기로 무장한 한국 표준형 부대로 바꾸는 역할을 맡는다.
니콜라이의 몽니로 인해 강제적으로 공세를 시도한 러시아군이 비스와강에서 참패하고 다시금 갈리치아를 되찾고자 밀려오는 동맹군을 저지하기 위해 벌어진 코벨 전투에서 시베리아 소총병 여단이 주력으로 투입되자 방어전의 주역도 자연히 그가 되었고 형의 지지와 어담의 협력 아래 전술 입안과 지휘까지 전부 도맡아 수행했다.
귀환 시 최소한 1개 여단 이상은 남겨 달라는 러시아의 강권에 핏줄만 한인인 러시아군 소속 러시아인이라 부담이 적은 시베리아 여단이 남기로 결정되었고, 자연히 여단장인 그도 남게 된다. 니콜라이 2세는 이들 한인부대에 근위 칭호를 내리고 파벨이 소모시킨 근위대를 대체하려 했는데, 이로 인해 러시아 혁명에 휘말리게 된다.
무장을 해제하고 길을 열어주면 안전을 보장하겠다는 반란군의 제의를 일언지하에 거절한 채 겨울궁전과 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를 거점삼아 교전, 12,000명에 불과한 병력으로 근위대가 가세한 8만의 반란군을 120시간 동안 저지한 것도 모자라 역공까지 성공시키며 철저하게 두들겨 패버리는 기염을 토한다. 거기에 2차 혁명 시점에서도 자신은 의리를 지켜야한다며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남는데, 이로 인해 독자들은 러시아에 와서 사귀었다는 귀족 영애가 혹시 황녀가 아닌가 의심하고 있다.[3]
별명은 원수부의 늑대. 만주의 호랑이란 별명을 가진 형과 나란히 호랑이와 늑대라 불린다.
- 홍계훈
작중 초기에 빙의한 김시혁과 함께 경복궁에서 일본군과 싸우며 만났다. 무예는 쓸만하지만 뺀질거려서 못 미더운 장교였던 김시혁의 변화에 감탄하고 그의 조언에 따라 친위영 창설을 돕는다. 김시혁, 이규태, 원세록와 함께 한성구락부라는 이름의 군관 및 관료 모임을 발족시켰으나, 고종이 김시혁의 조언을 무시한 탓에 을미사변 때 원래 역사대로 전사한다. 함께 한 시간은 짧지만 일개 장교였던 김시혁이 현재의 위치에 도달하는데 많은 도움을 준 후원자.
- 이규태
홍계훈과 함께 김시혁이 처음 만난 후원자이자 전우. 경복궁 습격에서 김시혁의 활약을 눈여겨보고 먼저 다가와 친한 사이가 되었다. 동학농민운동 진압을 함께 했으며, 홍계훈 전사 이후 든든한 상급이자 한성구락부 창설 멤버로서 김시혁의 방식을 실현하는 데 조력을 아끼지 않는다. 고종의 무리한 대청 선전포고와 남만주 진격 때 평안도 방면군 사령관을 맡아 중앙에서 뭐라 하든 무리한 진격을 지양하고, 한인촌들만 점령하는 신중한 움직임으로 불필요한 희생을 막았다. 이때 고종에 대한 인식이 완전히 틀어져 2차 쿠데타 때 근위사단장으로서 적극 협력했으며 극동전쟁이 발발하자 근위사단장 겸 황해, 경기, 강원 병마를 통솔하는 삼도통어사를 겸임했다.[4] 이시기 주로 담당한 업무는 근위사단장으로 고종을 보필하며 그의 헛소리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기. 극동전쟁 종결 후 육군 대장 겸 원수부 총관으로 영전한다.
- 원세록
전주에서 동학 토벌할 때 홍계훈을 보좌한 장위영 대관. 김시혁, 홍계훈, 이규태와 함깨 한성구락부 창설 멤버. 경복궁 습격 이후 신설된 친위영에선 1중대장을 역임했고 동학 2차 봉기 진압에도 함께한다. 을미사변에서 홍계훈이 전사한 이후 다른 구락부 멤버들과 마찬가지로 은인자중하다 을미의병 토벌 명령을 받고 남부에 파견되었을 때 성하영, 남만리와 함께 부대 전체를 이끌고 의병에 합류해 버린다. 이규태도 나주에서 민종렬에 합세해 버려 전력이 절대적으로 부족해진 친일 내각은 평양에 있던 김시혁을 불러들이는 자충수를 둘 수 밖에 없었다. 1차 쿠데타 성공 이후 병기와 탄약 조달을 책임진 포공국장에 임명되어 김시혁이 무기 개발이나 작전 계획시 우선적으로 찾는 사람이 된다. 시혁이 수류탄과 척탄통 개발할 예산을 부탁하러 갔을 땐 고종이 즉위 40주년 열병식에 쓸 공포탄을 제조하느라 예산을 다 끌어가 남는 돈이 없다는 맥빠지는 대답을 들려줬다. 극동전쟁이 종전되고 3년 후에 병사했다고 언급된다.
- 엄주익
원세록의 후임 포공국장. 고종이 총애하는 엄귀비의 7촌 조카로 고종과 각을 세운 원수부 내 대부분 인사들에게 백안시 당하나, 김시혁에게 무척 우호적이고 군수보급 측면에서 인식이 무척 깨어있어 김시혁은 믿고 중용한다. 극동전쟁 종전 후 일본군의 패전 원인은 보급 문제임을 지적하는 책을 써서 김시혁에게도 호평을 받았고, 군의 개혁을 위해선 교육이 우선시 되어야 한다며 엄귀비를 설득해 학교를 세우는 등 이 시대 기준으로 무척 선진적인 안목의 소유자이다.
포공국장에 오른 뒤 가장 적극적으로 추진한 사업은 소총 개량인데, 한국군 주력 소총인 아식보총이 한국인 체형에 맞지 않으며 산이 많은 지형에서 불필요하게 길고 무겁다는 문제 의식을 품고 개량 개발을 적극 주장했다. 극동전쟁의 전투 양상을 철저히 분석해 소총수 간 교전 거리가 평균 50~150m 사이이며 길어도 200m을 넘지 않음을 자료로 제시하고, 현장에서 실전을 겪은 지휘관, 참모들의 공감을 끌어냈으며, 직접 사비로 견본까지 제작해 강력하게 밀어붙인 끝에 M91/10이라 명명된 단축형 모신나강이 한국군 제식 화기로 빠르기 자리잡는다. 총이 가벼워지면서 야지에서 피로도가 감소하고, 탄도 더 많이 휴대할 수 있어 산악전, 기동전 위주인 한국군의 전력 상승에 크게 기여했다.
서부전선 참전을 앞두고선 김시혁이 소극적인 가운데 적극적으로 밀어붙여 대전차 소총을 개발해 보급했다. 업무 특성상 군수국장 민영찬과 자주 합을 맞춘다.
- 김석중
원역사에서 동학농민혁명 당시 유격장으로서 활약했다가 을미의병 진압 때 전사하는 인물로, 작중에서도 동학농민혁명 때 김시혁과 처음 만난다. 압도적인 숫자를 앞세운 동학군을 상대하기 위해 김시혁이 급조한 임시 기병대 지휘관으로 활약. 이 인연으로 의화단 진압과 극동전쟁 때까지 쭉 기병대 대장으로 활약한다. 의화단 진압 때 김시혁이 배속시킨 개틀링들을 기병과 훌륭하게 조합해 운용하는 등 제병합동이나 최신 전술에 무지한 사람은 아니지만, 기병대를 적진에 들이받아 와해시키는 전근대적 로망에 대한 미련을 쉽게 놓지 못해 예하 지휘관 중에서도 김시혁이 특히 통제에 신경을 많이 쓰는 인물이다. 2부 시점의 지위는 제1근위기병사단장으로 계급은 부장. 박승환, 김시진, 홍범도, 노백린 등과 함께 동부전선 핵심 지휘관으로 참전한다. 김시혁은 그의 번뜩이는 저돌성이 수치화, 계량화에 집착하는 독일군의 허를 찌를 거라 판단하고 볼로디미르 공략에 그가 이끄는 근위사단을 내세웠고 멋지게 성공해낸다.
무식하게 돌격만 할 줄 안다는 주변의 우려가 늘 따라다니나, 이를 비웃기라도 하듯 전장의 환경, 군마의 보존, 아군과의 연계, 적의 밀도를 철저히 살펴 성공할 수 밖에 없는 각을 잡아두고 적을 향해 치닫는 이상적인 돌격대장의 모습을 꾸준히 보여준다. 김시혁은 자신보다 기병 이해도가 높은 유일한 지휘관이라 평하며 대한 제일의 기병사령관이라 추켜세워주길 주저치 않는다.
러시아군이 운용한 장갑차의 유용함에 주목해 동부전선 귀환 후 한국군에도 장갑화된 전투차량의 도입을 강력하게 주장하고 여론을 모은다.[5] 르노 전차 도입이 결정된 후에는 김시혁의 어드바이스를 받으며 기병대의 기계화를 주도한다.
- 박승환
왕성한 공격 정신으로 주목받은 지휘관으로 의화단 진압부터 극동전쟁까지 쭉 참전한다. 원래 역사에서 일본의 군대 해산에 항거해 자결한 인물답게 패전 후 자결하는 청군 지휘관들의 심정을 이해하고 동질감을 느끼는 장면이 있다. 극동전쟁 당시에는 참장 겸 근위사단 제1여단장으로 고종을 보위해 함흥에 먼저 들어갔다 함흥 사창리 전투에 참전.[6] 2여단장 이기표와 함께 후방 차단을 담당해 6여단의 맹공에 무질서하게 퇴각하는 일본 2사단을 와해시키고 사단장을 생포하는 전과를 올렸다. 2부 도입부에선 5사단장을 역임했고 본편에선 수도보병사단장으로 전임되어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다.
러시아 시베리아 군단과 수도사단의 전투지경선을 파고든 독일 41군단 2개 사단의 맹공을 1개 사단만으로 감내해야 하는 상황에서 많은 피해를 보면서도 전선을 유지해냈고 지원 병력과 함께 역으로 41군단의 숨통을 끊는 공세를 성공시킨다.
- 이기표
의화단 진압 당시 참령 계급으로 시위보병대를 인솔해 참전했고 귀국 후 근위사단 제2여단장으로 보직된다. 사창리 전투에서 박승환과 함께 후방 차단 역할을 맡아 도주하는 일본군 2사단 패잔병 2천 명을 포로로 잡는다.
- 민영기
경기도 방위를 책임진 진위대 3여단장. 머릿수만 겨우 채웠을 뿐 제대로 된 훈련을 받지 못하고, 무장도 부실한 3여단이 방어에 부적합하니 퇴각하라는 원수부 지시를 거부하고 주안산에서 일본군을 저지하는 길을 택한다. 일본군은 그가 반정부 성향이 강하고 일본군과 친밀한 탓에 아무런 저항없이 통과할 수 있을거라 기대했지만, 정치적 현실이 마음에 안 들었을 뿐 조국이 어디인지 정도는 알았던 인사이기에 저항을 택한다. 원수부에서 무슨 일이 있어도 3일간은 일본군을 저지하라는 지시를 하달받은 뒤 전화에 달라 붙어 예하 제대 하나하나 전술 지시하는 신들린 솜씨로 버텨냈으나, 수적으로 월등한 일본군 상대로 한계가 또렷했고 전투 3일차에 지휘소까지 난입한 일본군과의 육박전 끝에 전사한다. 비록 그는 전사했으나 포병대의 지원에 힘입어 함락 위기에서 벗어난 3여단은 원수부에서 지정한 3일보다 이틀을 더 버텨내고 잔존 병력을 수습해 퇴각하는 데 성공한다.
- 성하영
김시혁이 친위영 2중대장으로 발령받았을 때 3중대장으로 함께 한 인물. 4중대장 남만리와 함께 창설 멤버인 김시혁, 홍계훈, 이규태, 원세록에 바로 뒤이어 들어온 한성구락부 초창기 멤버이기도 하다. 김시혁, 이규태, 남만리와 함께 동학농민군 진압에 활약했다. 을미의병 토벌을 명 받자 다른 멤버들과 함께 그대로 의병에 합류해 친일 내각이 평양의 김시혁을 불러들이는 선택을 하게 만든다. 1차 쿠데타 이후 남만리와 함께 친위대 연대장 이규태를 보좌하는 대대장으로 임명되었으며 대청개전 이후 이뤄진 북벌 때는 실질적인 참모 역할을 수행해 아군 피해를 줄이는 데 이바지했다. 극동전쟁 때는 진위대 4여단장. 그가 이끈 4여단은 6여단과 함께 가장 먼저 창설되었고 평양 방어의 핵심으로 진위대 중에서도 손꼽히는 부대였으나 예비대로 분류되어 평양 방어전 때는 참전하지 않았다. 2부 시점에서는 일선에서 물러나 원수부 인사국장을 역임한다. 동부전선 참전이 확정되고 인선이 발표되자 고종이 김시혁의 측근 지휘관들로만 꾸려진 인선에 불만을 품고 있다는 사실을 넌지시 알려준다.
- 신태휴
극동전쟁 시점 진위대 7여단장. 평안도 방어전에 주축을 담당, 흑교에서 일본군 근위사단 절반, 황주에서 일본군 2사단과 12사단, 한국주차군 소속 후비대까지 총동원한 대군을 여단 병력으로 저지하는 임무를 맡는다. 수적으로 압도적인 일본군을 악착같이 틀어막아 남포 방면으로 접근하는 일본군을 섬멸하고 재편성할 시간을 벌어준다. 기존 여단 병력에 투입된 예비대까지 모두 소모전 끝에 녹아버리는 처참한 피해를 입고 본인도 부상을 입은 상태로 최후의 항전을 준비해야 할 상황에 몰렸다가 원수부에서 급히 지원한 강습보병대대와 독립기병대와 협력해 간신히 일본군을 밀어낸다. 사실상 전투력을 상실한 7여단은 종전 때까지 재편성에 주력했다. 2부 시점에선 일선에서 물러나 현흥택과 함께 신병 육성에 전념한다.
- 현흥택
한성구락부 초기 멤버로 등장했으며, 극동전쟁 시점 진위대 8여단장. 2부 시점에선 일선에서 물러나 신태휴와 함께 정예신병 양성에 주력한다. 서부전선 참전을 앞두고 프랑스 현지에 신설된 FTC(야전훈련사령부) 실질적 총책임자가 되어 오합지졸 미군을 싸울 수 있는 군대로 훈련시킨다.
- 노백린
무관학교 1기생. 의화단 운동 당시 6여단 1대대 1중대장으로 국경을 침범한 비적들을 상대하며 등장한다. 의화단 진압을 위해 편성된 임시연대에 배속되어 중국 본토에서 전투를 치렀고 극동전쟁 때는 6여단 3대대장으로 진급해 사창리 전투에서 일본군 2사단 병력을 유인하는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한다. 의화단 진압 당시 이탈리아 왕국군 베르살리에리에 깊은 인상을 받아 귀국 후 자신이 지휘하는 6여단 3대대 병사들을 한국판 베르살리에리로 탈바꿈 시킨다. 그의 3대대는 군모에 수탉깃을 꽂아 장식하고 기병대에 뒤지지 않는 기동성을 자랑하는 보병으로 유명해진다. 극동전쟁이 종결되고 1914년 장작림 토벌 시점에는 7여단장. 1차 세계대전 참전이 결정되자 김시혁의 강력한 추천으로 정해진 기간보다 훨씬 빠르게 부장으로 진급해 원정군 9보병사단장에 임명된다.
마녀의 숲 전투에서 1개 사단으로 1개 군단을 상대하는 극한 상황에 내몰리나 적절한 예비대 운용과 원정군 사령부의 지원으로 방어선 사수에 성공한다. 동부전선에서 귀환한 후 근황파들이 제대로 꼬아 놓은 호로군 문제 수습을 위해 만주로 떠나게 되어 서부전선 원정군에서는 빠진다.
- 어담
무관학교 1기생. 노백린의 동기로 병과는 포병. 서남해 해적 토벌에 임관을 앞둔 생도들도 뒤따르게 하면서 첫 실전을 겪는다. 김시혁 앞에서 구닥다리 극노백포의 단점과 이 단점이 불러오는 전술적 제약을 상세히 설명하면서 상당한 인상을 주었고 동기와 마찬가지로 순조롭게 진급해 극동전쟁 시점에선 원수부 포병 참모로서 원수부의 화력 계획 전반을 입안하는 중책을 실수 없이 수행한다. 1차 세계대전 참전이 결정된 1915년 시점에선 참장 진급을 앞둔 정령이었고 원정이 시작될 무렵 참장으로 등장한다. 극동전쟁 때와 마찬가지로 원정군의 화력 계획을 전담하게 되는데 조금만 삐끗해도 보급난으로 허덕이게 되는 이역만리 동유럽 땅에서 끝없는 반복 숙달 훈련과 현지 지형, 기후를 철저히 반영한 계획 수립으로 최소한의 포탄 소모로 최대의 효과를 뽑아내는 데 성공한다. 원정군이 귀국한 이후 부장으로 진급했다.
김시혁은 어떤 상황에서도 가장 경제적이고, 효과적인 화력 계획을 세워 지휘부의 의도를 수행해내는 유일한 포병지휘관이라고 높이 평가하며 전폭적인 신뢰를 보낸다. 볼로디미르 점령 이후 포탄 사용을 3분의 1 이상 줄여야 한다는 군수참모의 제안에 대해 난색을 표하면서도 김시혁이 변함 없는 신뢰에 해보겠다며 가진 역량을 총동원해 효율적인 화력전을 전개한다. 그 덕에 독일 제국 측에서도 김시혁과 함께 한국군에서 가장 경계해야 할 지휘관으로 손꼽히기도 했다.
- 이갑
일본육사 유학생 출신으로 원수부 주요 보직을 역임하는 이채로운 인물. 그의 일본 유학은 을미사변과 1차 쿠데타 이후 한반도에서 영향력을 상실한 일본이 펼친 유화책의 일환으로 장차 일본에 충성하는 장교를 육성하려는 포석이었지만, 정작 이갑을 비롯한 유학생 전원이 조국과 운명을 함께 하겠다며 함흥으로 가버린 탓에 일본은 죽 쒀서 개 준 신세가 되었다. 괄괄한 성격으로 일본물 먹었다는 곱지 않은 시선에도 아랑곳 않고 할 말 다 하고 사는 인물. 첫 등장 때도 김시혁을 상대로도 대담하게 이견을 제기한다. 관북전선의 일본군 주력이 아직 여유가 있다고 판단한 김시혁과 달리 적의 공세 패턴이 전과 전혀 다름을 지적, 일본의 공세 역량이 한계에 달했다는 의견을 피력했고 정확히 들어맞았다. 이갑의 이의 제기가 없었다면 한국군 주력의 진군이 늦어져 원산을 탈환한 강습보병대와 원수부 직할수색대로서는 퇴각하는 일본군 본대에게 전멸하는 결말 밖에 없었으니 굉장히 시기적절한 조언이었다.
극동전쟁 종전 후 작전국 제1과 과장으로 임명. 군 예산 편성 방향을 두고 세방과 해방으로 주장이 나뉘자 세방을 지지하며 해군 4성장군 장기렴과도 언쟁을 벌인다. 동부전선 참전이 결정된 시점에 참장 진급을 앞둔 정령이었고 원정이 시작될 무렵 참장이 되어 원정군 참모장으로 임명된다. 원정군이 동부전선에서 귀국한 이후 부장으로 진급했고, 이응준을 마음에 들어해서 사위로 삼으려 한다.[7]
- 김인수
군내에서 러시아어에 가장 능통한 인물로 러시아식 이름은 빅토르 김. 러시아에서 파견된 군사고문단을 맞이하며 등장한다. 극동전쟁이 발발하자 이범윤이 간도에서 창설한 후비기병대 지휘권을 넘겨 받고 미쉔코 준장의 제1시베리아 군단과 함께 행동했다. 미쉔코 준장이 만주 전선으로 재배치된 다음에는 아니시모프 소장이 지휘하는 러시아군 2만과 호흡을 맞춰 함남과 강원을 돌파, 일본 해군 주요 육상시설이 있는 죽변까지 동해안 축선 전체를 밀어내는 전공을 세웠다.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러시아에 관전무관단으로 파견, 러시아군의 지리멸멸한 실태를 보고한다.
- 이범윤
훈춘 방면에서 온갖 무리수로 지역 민심을 악화시키고 병력 피해를 가중시킨 이근택을 해임하며 등장. 북간도 간리사로 재직하며 간도 지역을 대한 영토로 굳히는 데 힘쓴다. 간도 방위에 차출될 수 있는 정규군 전력이 함경도에서 막 창설 중인 진위대 2개 여단 뿐이어서 별도로 충의대란 민병대를 창설하는데, 민병대인데도 숙련도가 높아 극동 전쟁 때 일선으로 차출되어 활약했다. 극동전쟁 승전 후 10년이 지난 2부 시점에도 평북관찰사 겸 간도관리사로 간도를 책임지고 있다. 서제 이범진과 함께 조정 내에서 중국에 대해 가장 강경한 인사이기도 하다.
- 민영찬
극동전쟁 시기 일본과의 내통이 드러나 도주한 민영철을 대신해 관서사령관 서리직을 수행. 2부 시점에서는 원수부 군수국장을 역임한다. 신규 창설된 기계화부대에 효율적으로 유류를 보급해줄 방안을 두고 포공국장 엄주익과 몇날 며칠을 머리 싸매고 고심하다 김시혁의 조언으로 제리캔을 개발한다.
- 홍범도
을미의병에 참여했다 해산한 뒤 포수로 돌아갔으나 벌이가 여의치 않던 차에 신식 군대 창설 공고를 보고 모집에 응하는 것으로 첫 등장한다. 극동전쟁 당시 진위대 제3여단 수색중대장(정위)으로 경인가도 전투에 참전. 3여단이 압도적 열세에서 5일간 버티는 데 공헌했다. 경인가도 전투가 끝난 뒤 게릴라전을 수행하다 원수부에 합류. 울릉도의 일본군 전신 시설을 폭파해 동해에서 일본 해군 활동을 제약시키는 작전을 성공시켰고, 원산 상륙 작전 때는 배를 타고 움직인 강습보병대와 별개로 해안선을 따라 이동하며 일본이 설치한 해안 감시초소들을 타격했다. 이후 원산을 탈환한 김시진의 강습보병대와 합류, 문산에서 함께 처절한 방어전을 벌이고 생존한다. 이때 전면에서 방어하는 강습보병대의 측면을 사수하며 일본의 지장 우메자와 소장을 전사시켰다. 2부 시점에선 참장으로 진급하였고 제2강습보병여단장이 되어 동부전선에 참전한다.
부크강 집단군과의 전투에선 예비대로 한발짝 물러서 있다가 한국군 예비대 규모를 오판한 11사단의 배후를 습격, 하룻밤만에 독일군 정규사단을 궤멸시키는 대전과를 올린다.
- 김정우
군기창장. 김경천의 부친. 병기 설계와 양산을 책임진 기술사관. 김시혁이 강습소총을 만들고 도입 할 때 협조했으며, 고종이 러시아에 무리한 제안을 한 것을 알자 빌어먹을 인간이라고 욕한다.
- 신팔균
막 군제개혁을 시작할 때부터 극동전쟁까지 김시혁을 보좌한 전속부관. 주로 김시혁에게 서류 지옥을 안겨주는 역할. 2부에선 정령으로 진급, 원수부 제2과 과장으로 1과 과장 이갑과 함께 원수부 참모진을 이끄는 중핵이 된다. 가혹할 정도로 현실적인 이갑과 달리 융통성이 있으나 그때문에 너무 이상적이라는 평도 받는다. 이후 한국군 원정군 부참모장으로 임명된다.
- 이희두
김시혁이 평양에서 훈련대 3대대장을 맡아 거느릴 당시 3중대 1소대장이었다. 2부에서 부장 계급으로 재등장. 고종에게 회유되어 민감한 사안에서 근황파 편을 공공연하게 들고 다니다 한직으로 좌천되어있었다. 김시혁이 원정군을 이끌고 유럽으로 떠난 사이 근황파 장교들에게 공적을 챙겨주려는 고종의 욕심으로 호로군 무장해제를 지휘할 작전사령관에 임명되나 지리멸렬한 지휘로 상황을 악화시킨다. 이후 상황을 악화시킨 근황파 장교들이 책임을 지고 사임하거나 한직으로 쫓겨났다는 언급이 있는 것을 보아 그도 사임하거나 한직으로 쫓겨났을 것으로 보인다.
- 황준성
극동전쟁 당시 진위대 3여단 1대대장. 여단장이었던 민영기가 전사하자 대신 잔존 3여단을 지휘했다.
- 나중소
극동 전쟁 시점 강습보병연대장.
- 윤치성
윤영렬의 아들로, 극동 전쟁 시점 당시 기병연대 정찰중대 1소대장으로 첫등장했다. 2부 시점에서는 제1근위기병사단 흉갑기병연대장으로 동부전선에 참전했고, 원정군이 동부전선에서 귀국한 이후 김석중과 함께 기병대의 기계화를 주도하고 있다.
- 구완희
동학농민운동 때는 충청감영병을 이끄는 영관으로 첫등장했으며, 이후 극동전쟁 때는 순무영 참모관이 되어 김시혁의 평양에서 철수해야 한다는 말에 반대했다.
- 남상덕
극동전쟁 당시 진위대 3여단 수색중대 3소대장으로 첫등장했다. 2부 시점에서는 정령이 되어 수도보병사단 참모장을 맡고 있으며, 습격당한 노무단 수습을 위해 노보플린스크로 내려갔다.
- 지청천
2부 프롤로그에서 장작림군을 상대하던 강습보병대 소속 부위로 등장한다. 무관학교 성적도 좋았고 집이 서울이라 가까운데서 출퇴근하려고 근위여단을 지망했지만, 강습보병여단장 김시진이 그 자질을 높이 사서 점찍어 둔 탓에 강습보병여단에 전입됐다. 강제로 진로가 확정되었지만 강습보병대에 금방 녹아들었고 능력도 빼어나서 동기 중 진급 속도가 가장 빠르다. 1차 세계대전에는 제2강습보병대 예하 중대장으로 참전, 졸로치 전투에서 김좌진과 함께 오헝군을 기습해 큰 피해를 입혔지만 부대를 이탈한 상황 속에서 멋대로 행동하여 작전에 차질이 생기게 한 처벌받을 뻔 했다.[8] 하지만 그의 능력을 눈여겨 본 김시혁이 다시는 이런 일을 벌이지 못하게 전쟁사 문제 사례에 박제 하겠다는 조건 하에 처벌은 받지 않는다. 동부전선에서 귀환한 후 김경천의 강력한 추천으로 김시혁의 부관이 된다.
- 이응준
유학중인 의친왕을 수행하는 무관으로 등장. 고향 선배 노백린의 추천으로 친왕을 보좌하는 무관단으로 선발되었다. 파락호로 유명한 친왕을 모시고 호화로운 유럽 생활을 꿈꿨으나 의친왕이 유흥은 질렸다며 전쟁터로 향하는 바람에 전전긍긍하는 처지가 된다. 의친왕이 정식으로 원정군 책임자가 되면서 전쟁터를 벗어날 길이 막혀 버렸고, 노보폴린스크로 향하는 노무단을 위문하는 의친왕을 수행하다가 독일 기병대의 습격에 휘말려 불운의 정점을 찍는다. 의친왕이 도피를 거부하고 중화기가 없는 치중대 지휘관이 이응준과 호위병력이 가진 강습소총의 화력 지원을 요청하면서 교전에 참여하나, 치중대는 중과부적으로 끝내 전멸했다. 다른 호위병들도 후위를 자처하여 하나둘씩 스러져가면서 종국에는 의친왕과 단 둘이서 쫓아오는 독일 기병을 상대하며 노보폴린스크로 향하게 된다. 쭉 총기를 사용한 의친왕과 달리, 총알이 소진된 뒤부터 검을 들고 육박전을 벌였고, 의친왕을 공격하는 울란을 저지하다 팔에 중상을 입는다. 중간에 역시 낙오한 엄복동 일행을 만나 서로 도움을 주고 받고 함께 노보폴린스크로 향한다.
쓰러뜨린 독일군이 마지막 발악으로 쏘아 올린 신호탄을 보고서 주변의 기병대가 몰려오는 데다가 의친왕의 적의 사격으로 말을 잃게 되자, 엄복동의 자전차에 의친왕을 실어 보내고 자신은 뒤에 남아 시간을 번다는 선택을 한다. 그리고 정말 놀랍게도 중상을 입어가면서도 추격해 온 기병대 10여 명을 전부 베어 쓰러 뜨리고는 한국군 수색대에게 구조되어 살아 남는다.
이때 의친왕과 이응준을 잡겠다고 노보폴린스크 지척까지 쫓아왔다 발생한 독일 울란과 예거부대의 손실이 무려 1개 중대였다는 사실이 밝혀지는데, 마지막에 한국군 수색대가 처리한 예거들을 제외해도 단 둘이서 최소한 수십 명을 쓰러트렸다는 소리이기에 무쌍이라 봐도 무방할 정도다.
이후 의친왕에게 잠시 휴가를 받고 고국으로 돌아오자 이갑에게 딸을 소개받는다.
- 김좌진
지청천 기수의 1기수 후배. 장작림의 침공 때 무관학교를 차석으로 졸업하고 5사단에 부임한 부위로 등장. 이때까진 행정업무만 맡으며 실전 지휘 경험은 없었으나, 전선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자 유일하게 남는 장교였던 그가 투입된다. 첫 실전에도 훌륭한 지휘력으로 위기를 진화하는데 성공했으며 이후에도 대대장에게 과감한 작전을 제시해 본인이 직접 나서서 활약한다. 장교로서 자부심이 강해 거추장스러운 군도를 늘 옆에 차고 다닌다. 장작림 토벌이 마무리 되고 1차대전 참전이 결정될 무렵엔 제1근위기병사단 소속 소대장으로 보직을 옮겨 전쟁에도 참여한다. 드넓은 동유럽 평원에서 길을 잃고 헤매다 역시 길을 잃은 지청천과 만나고 그의 권유에 따라 계획에 없는 기습에 참여하여 공을 세운다. 다만 부대를 이탈한 상황에서 멋대로 활동한 거라 그 역시도 처벌 받은 위기였으나 선배인 지청천의 권유에 따랐을 뿐이라 따로 처벌을 받진 않았다.
- 김석원
무관학교 갓 졸업한 포병 참위로 등장. 트레이드 마크인 카이젤 수염을 젊은 시절부터 기르고 있어 시혁이 바로 알아봤다. 기존 작계보다 더 빠르게 움직인 강습보병여단에 맞춰 어떻게 행동할 것인지를 묻는 시혁의 질문에 훌륭하게 대답해 칭찬을 듣는다. 원 역사에선 자질은 뛰어났으나 전간기 군대인 일본군에서 복무한 탓에 구시대적 사고를 벗어나지 못했는데 여기선 당대 가장 선진적인 육군인 한국군에서 복무하며 훨씬 뛰어난 지휘관이 될 싹을 보여줬다. 1차 세계대전 시점에서 부위 계급이 되었으며 원정군 제1포병단 제2포대장으로 참전해 신형 105mm 곡사포를 운용한다. 이때 6문 1개 포대로 대대급 일제사 효력을 내라는 어담 참장의 지시를 TOT 사격으로 훌륭히 수행한다.
- 지석영
초반에 동학농민군을 토벌했다고 언급되었으며, 2부에서는 의무국장 겸 육군의무학교장으로 직접 등장한다.
- 서왈보
대한제국군 항공대장. 러시아와 발맞춰 도입한 프랑스제 뉴포르 10, 11로 기종 전환훈련 중이라는 언급으로 처음 등장. 공군의 잠재력을 간파하고 원시적인 스트라이크 패키지를 구성하고, 공중포병으로 활용하겠다는 브루실로프의 구상에 맞춰 지상군을 위한 정찰임무, 폭격기 호위 임무를 수행한다. 렘베르크 탈환 시점에서는 숫적 우위로 밀어 붙이는 독일군 항공대에 고전하고 있다는 묘사가 나오며 머지 않아 독일과 러시아 간에 대규모 항공전이 벌어질 것 같다고 예상을 내놓는다. 여담으로 제이슨이 한국 공군 중에서는 2번째로 에이스 칭호를 얻었다 했고 잠시후 착륙한 서왈보의 뉴포르 11에 킬마크가 무수히 새겨져 있는 것을 보면 대한제국 공군 중에서는 그가 최초로 에이스 칭호를 얻은 것으로 보인다. 동부전선에서 활약한 이후 항공사령관으로 영전하며 참장으로 진급한다.
- 김성수
원수부 공보국장. 언론을 무기로 휘두르는 황제에 대응하고 군의 대외보도와 선전을 담당하기 위해 신설된 부서의 책임자. 와세다대학 유학을 마친 뒤 언론사를 운영하려는 포부를 갖고 한성에 왔으나 한창 여론 장악에 열을 올리던 황실과 궁내부가 신생 언론사에 마구 제동을 거는 바람에 곤란을 겪던 중에 조동윤에게 포섭되어 군인이 되었다. 금수저 집안에 원래 군인 지망도 아니었고 하는 일도 야전과는 거리가 멀다보니 옷만 군복이지 말투나 행동거지는 민간인 기자나 다름없다.
- 여운형
극동전쟁 시점에 어린 아이로 첫 등장한다. 한국군을 취재하려는 매켄지의 현지 가이드로서 안내는 물론 이런저런 보좌까지 해내고 있었다. 경인가도 전투를 마치고 게릴라전을 벌이던 홍범도와 메켄지가 접촉할 수 있게 거들었고 고종과 김시혁의 인터뷰를 따려는 매켄지를 따라 함흥까지 수행한다. 어린 나이에도 영어에 능통하고 대범해서 대화를 나눈 홍범도가 깊은 인상을 받는다.
2부에서 원수부 법무감으로 재등장. 본래는 관료를 꿈꿨으나 딱히 황실에 충성심이 깊지도 않고, 동학에 발 담근 전적이 있는 집안 내력을 경계한 황실과 궁내부의 입김으로 칙임관 시험에 우수한 성적으로 붙은 그를 관우를 죽인 여몽과 같은 성씨라는 얼토당토 않은 핑계로 비토, 백수로 5년 허송세월하다 김시혁의 스카우트를 받아 군에 들어온다. 법무관직을 제안한 김시혁에게 궁지에 몰렸을 때 살길을 열어줄 능력이 있으니 그 능력을 살릴 수 있는 법무감직을 달라고 역으로 제안하는 대범함을 보였고 그 호언장담이 전혀 과장이 아니라는 걸 탁월한 일처리 능력으로 증명했다. 친화력, 언변, 패션센스 등이 고루고루 빼어나 백수 시절에도 한성 사교계 유명인사였고 김시혁과는 야구를 좋아한다는 공통점도 있어 정말 빨리 친해진다.
당연히 군문에서 활동 중인데다 김시혁 라인이다 보니 동부전선 원정군에도 참여했고 졸로치의 오스트리아-헝가리 군에게 항복을 권유할 전령으로 지목되어 졸지에 세객 노릇을 하게 된다. 이때 살짝 긴장하는 듯 했으나 막상 회담에 돌입하자 특유의 언변을 여지없이 발휘해 항복을 받아내며 군의 피해를 줄이는데 기여한다.[9]
- 안무
동부전선 시점에서는 9사단 부사단장으로, 사단장 노백린을 보좌해 전투를 독려하던 중 독일군 1개 연대가 지경선을 파고들어 침투했다는 급보에 공병대로 이뤄진 예비대를 이끌고 막아선다. 아군 보병대를 희생해 포병을 끌어내고 그 사이 맹공을 퍼붓는 독일군 포병에 일순 당황하나, 독일군 포병이 대부분 평사포로 구성되어 살상력이 떨어진다는 사실을 떠올리고 급조 참호에 최대한 엄폐하는 한편, 침착한 태도로 병사들을 독려해 사기를 유지한다. 그렇게 전선을 유지하는 사이 본부에서 보낸 장갑중대와 강습보병중대의 지원으로 독일군을 격퇴하는데 성공한다. 이후 임시 공병연대장이 되어 시베리아 소총병 여단과 협조한다. 서부전선 시점에서는 1근위기병사단 부사단장이 되어 참전한다.
- 오의선
극동전쟁 때 근위사단 제1여단 소속으로 박승환과 함께 일본군과 싸웠다. 1차 세계대전 시점에서는 수도보병사단 1연대장.
- 권중협
극동전쟁 때 근위사단 제1여단 소속으로 박승환과 함께 일본군과 싸웠다. 1차 세계대전 시점에서는 수도보병사단 26연대장으로 양세봉이 독일군과의 전투에서 큰 공을 세우자 그를 부위에서 정위로 진급시킨다.
- 이학균
1부 초반 한성구락부의 멤버로 등장했으며,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막으려 했으나 실패한다.
- 김경천
군기창장 김정우의 아들. 정위(진) 시절부터 2년간, 2부 내내 김시혁을 보좌했던 부관. 김시혁을 따라 동부전선에도 다녀왔고 참령 진급을 앞둔 상태로 후임으로 지청천을 추천하며 근위기병사단으로 전임된다. 이후 거기서 대대참모를 거쳐 참모학교를 거친 뒤 제2흉갑기병대대장이 된다.
- 홍사익
제1근위기병사단 예하 수색대대 2중대장으로 등장. 구주원정군에 참여해 볼로디미르 최전방에 참호선을 구축중이던 독일군 병력을 적당히 두들기고 빠져나와 아군의 규모와 상황을 오해시키는 기만 작전을 훌륭하게 수행해낸다.
- 민긍호
정찰 저격수 3조 조장으로 첫등장. 등장시 계급은 원역사에서 의병전쟁을 시작했던 때와 비슷한 특무정교. 구주원정군의 일원으로 독일군 저격수들을 사냥하며 코벨 전투에도 참여해 오스만군의 전령이나 지휘관들을 사냥하고 있다.
- 박용만
이승만의 의형제. 독립운동 방법론이나 한인단체 주도권을 두고 부딪칠 일이 사라져 돈독한 사이를 유지 중이다. 미국 유학을 마친 이승만과 함께 귀국. 원정으로 빈 자리가 다수 발생한 원수부로 들어간다. 계급은 부령.
- 왕유식
군수지원단 소속 부령. 테르노폴에 도착해야 할 탄약수송열차가 탈선하여 당장 원정군에 보급해야 할 포탄이 전부 사라지자, 러시아 내 슈나이더사 공장과 접촉해 신품 탄약들을 어떻게든 끌어 오라는 강권에 가까운 지시를 받고 모스크바로 향한다. 이후 의친왕과 함께 탄약들을 어떻게든 끌어와 원정군에게 보급하는 데 성공한다.
- 양세봉
수도보병사단 26연대 소속으로 독일군과의 전투에서 큰 활약을 해 권중협에게 칭찬을 듣고 부위에서 정위로 진급한다.
2.1.2. 해군
수장인 장기렴이 고종의 무리한 대청 선전포고에 부화뇌동해 사상자만 3천을 낸 이근택에게 직언하다 보직 해임된 인물인데다, 뜸만 들이던 고종이 해군 창설을 적극 지원하게 된 계기가 의화단 진압 과정에서 노획한 마제은 백만 냥을 꿀꺽하려다 들켜서 울며 겨자 먹기로 한 것이다 보니, 태생부터 고종과 척을 졌다.전력 확충 과정에서 밀덕후 고종이 열심히 구상하던 함명을 가뿐히 까버리고 해군이 알아서 지으며 각을 세우다가 고종이 어뢰정 8척 구매 계약을 엎어 버리고 다 낡아 빠진 이름만 순양함이고 실제로는 폐품인 양무호를[10] 강제로 떠안게 만든 것을 계기로 돌이킬 수 없는 사이가 된다.[11] 그러나 자기 돈으로 발족한 해군을 사유재로 여긴 고종은 식단부터 전함 도입까지 끊임없이 간섭을 이어가는 한편 해군의 반항심이 왕 목 잘라 본 프랑스 교관들에게 배워서라고 생각해 신실한 신민들의 나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해군과 제휴를 추진하고 이것이 또 다른 나비 효과를 부른다.
초창기 해군 창설을 주도한 장기렴과 이동휘는 육군에서 넘어온 드라이 네이비였고, 극동전쟁을 거치고 규모를 키워가면서 항해장교, 상선사관 출신들이 속속 등장하는데, 둘 사이에 미묘한 알력이 있다.
- 장기렴
대한제국의 해군 수장. 김시혁과는 충청도 일대 해안의 해적을 토벌하면서 처음 만났으며 의화단 진압 당시 진위대 6여단 참모장으로서 고종의 대청 선전포고와 간도 공격에 부화뇌동해 무수한 피해를 발생시킨[12] 이근택을 제지하다 보직 해임 당한다. 해임 된 뒤 중앙에 이근택의 악행을 보고하였고, 간도관리사 이범윤, 부령 계급장과 함께 이근택에게 돌아가 그를 해임시킨다.
의화단 진압 후 신설된 해군의 총사령관직으로 영전되어 시대를 뛰어넘는 언사와 과감한 작전으로 배수량 3백톤짜리 구축함 6척이 전부인 해군이 할 수 있는 것 이상의 활약을 펼치며 김시혁을 놀라게 한다. 전쟁 이후 해군대장으로 진급해 해군 내 유일한 제독이 되었고 2부 시점에선 해군부 대신으로 영전.
- 이동휘
장기렴에 이은 해군 2인자. 고종의 몽니로 떠안게 된 양무호의 인수 요원으로 파견되었다. 척 봐도 절대 인수하면 안 될 양무의 상태를 보고 재고를 극력 주장했으나 고종의 총신 이근택에게 거부당한다. 이때 고종에 대한 감정이 완전히 상해서 김시혁 앞에선 고종을 제정신 아닌 사람이라고 대놓고 비난한다.
- 신순성
상선사관으로 일하다가 대한제국 해군에 합류한다. 젊은 나이에도 조함 기술이 굉장히 뛰어나서 백두산함 함장으로서 맹활약한다. 남해로 들어온 일본 수송선단 습격의 선봉에 섰고 300톤에 불과한 구축함으로 한 겨울 동해바다 악기상을 뚫고 울릉도 전신 시설 파괴 작전을 성사시킨다. 마지막엔 쓰시마 해전을 막기 위한 정보전의 실행 요원이 되어 발트함대의 항로를 정확히 예측하고 무사히 접선, 전쟁을 완벽한 승리로 매조지했다. 이후 함대 건설 프로젝트장이 되었다가 갑작스런 보로디노급 전함 매입으로 프로젝트가 꼬이자 사표를 냈다가 반려당했다고 언급된다.
1차 세계대전 참전이 확정된 후 유럽원정함대의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지중해로 향하고 프랑스와 이탈리아 해군 간 알력 다툼 속에서 이탈리아 해군이 원정함대의 지휘권을 가져가려 하자 노련하게 대처한다.
- 김윤복
해군 정보참모부장. 해군 내에서 가장 화려한 이력의 소유자로, 양무호의 기관장으로 시작해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유학 생활을 했다. 대한해군이 나아갈 방향으로 드레드노트급 전함 도입을 강력하게 주장한다.
- 김성진
충무함의 함장. 타란토로 근접하자 그에 대한 감상을 신순성 사령관과 함께 나누며 자신의 아이들은 자신이 모는 고물 전드레드노트급 전함을 끌지 않길 바란다는 말을 꺼낸다.
- 유동열
원래는 육군 출신으로, 쑨원의 호국군에 고문관으로 파견되어 차오쿤의 진압군을 격파할 수 있게 도왔으나 고문직에 장기간 묶이면서 원하던 유럽 전선 차출이 좌절되고, 동유럽에서 무공을 쌓은 후배들에게 진급으로 밀려버린다. 속끓이게 된 차에 서부전선 파병이 결정되자 김시혁의 추천으로 제1해군육전여단장에 임명되어 장성으로 진급함과 동시에 해군으로 보직을 옮긴다.
- 김양한
원 역사에선 최초로 근대 조선 기술을 습득한 기술자. 해군 기술국장으로 신형 한산급 구축함의 설계 이념을 정립했다.
2.1.3. 기록조사실
군제 개혁 과정에서 온 사방에 꽂혀 있는 일본의 빨대들을 잘라낼 필요성을 실감하여 창설된 첩보 조직. 작중에서는 원 역사의 정보대와 상무영을 대신한다.초창기에는 김시혁과 조동윤 사이에 권한 문제로 살짝 알력이 있었으나, 고종의 익문사 창설을 계기로 갈등을 봉합하고 교통정리가 이뤄진다. 친일파를 처단하고 고종의 권한을 제한하는 황색 계획과 극동전쟁 제2 전선 형성에 크게 기여했으며, 중화민국을 활용한 북양군벌 견제와 중국을 둘러싼 일본과의 대리전에서도 꾸준한 성과를 올렸다. 원세개 몰락 이후 일본은 첩보전에서 한국의 우위를 인정한 채 사실상 승부를 포기한 상태로 다이쇼 덴노가 어전 회의에서 콕 집어 지적할 정도로 공공연한 비밀이다.
내부적으론 황제가 관할하는 제국익문사, 황실경위원, 국가헌병대와 라이벌 관계이며 내각 관할하의 경무사 정보대와도 미묘한 견제와 협력을 오가는 사이. 하지만 일본으로 망명한 친일파들을 사냥하는 일 만큼은 제대로 협력한다.
이런 유능함은 단순히 소설적 허용이 아니라 원 역사 대한제국이 방첩 역량만큼은 우수했기에 자연스럽게 나온 전개다. 황제가 거느렸던 익문사,[13] 경위원, 정보대는 비록 일본에 규모와 자금력에선 뒤쳐졌으나 질적인 면에서는 호각이었으며, 일본은 대한제국 곳곳에 협력자를 두고도 이들을 상대하는 데 애를 먹어 결국 무지막지한 물량 공세로 승부해야 했다.
- 조동윤
원래 역사에서는 친일파였으나, 역사가 바뀌어 매우 노련한 군 정보기구의 수장이 된다. 원수부 예하 기록국에 신설된 조사실의 수장으로 의화단 진압 이전부터 첩보, 방첩, 국내 정보 수집 등에 주력한다. 본래 김시혁과는 데면데면한 사이였으나, 고종이 기록조사실을 견제할 황제 직속 정보기구로써 익문사를 창설하자 위기감을 느끼고 먼저 손을 내밀어 연대를 청한다. 첩보, 방첩, 정보수집 임무에선 김시혁 이상으로 유능한 인물로 김시혁의 「반도전쟁론」에 따라 일본에 점령된 남부 지역에서 제2 전선을 형성시키고 일본군 주요 정보들을 빈틈 없이 수집하여 아군의 전투를 수월하게 돕는다. 극동전쟁 기간에도 2부 시점에서도 원수부 내에서 김시혁 다음과는 존재감과 위상을 지닌 2인자로 호랑이 김시혁과 대비되는 원수부의 여우로 불린다.
대한제국 전국에 전보국과 유선 전화망을 설치한 것도 조동윤의 공. 참고로 조동윤이 정보전의 미래를 바라보고 전보 및 전화 시설 확충에 예산을 요구했을 때, 김시혁은 전형적인 한국군 스타일로 '그 돈이면 대포를 몇 문 더 살 수 있지 않을까?'라고 반응하여 독자들에게 소소한 재미를 주었다.
계급은 육군 대장.
- 김창수
기록조사실 직원. 공작시에 사용하는 가명은 김구. 1부에서 안경수를 심문하는 조사실 직원으로 처음 등장했으며 채찍과 당근을 적절히 활용해 박영효가 대한측 암호전신 해독문을 일본에게 헐값에 넘긴 사실을 알아낸다. 2부에선 기록조사실에 모이는 정보들을 정서하고 통제해 축적하는 통계실 실장으로서 사실상 조동윤의 후계자로 낙점된 상태이며, 일본을 감시하고 중국 내부의 움직임을 주시하는 등 동북아 쪽 업무를 주로 맡는다. 대적관이 확실하고 무수한 방첩 및 공작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했으나, 경험이 부족한 탓인지 대국을 보는 안목은 상관 조동윤에 비해 아직 모자라다.
2.2. 황실
- 고종
김시혁과 적대적 공생 관계인, 본작 핵심 반동 인물이자 사실상 제2 주인공.
노련한 일본 공사가 '약함을 이용할 줄 안다.'라며 치를 떨고 내각 구성원들 모두 경계할 정도로 음흉하고 위험한, 역사 속 고종을 그대로 구현한 모습으로 등장한다. 약하면 그대로 잡아 먹히는 제국주의 시대에 나라를 운영할 능력은 전무하나 권력을 쥐고, 유지하는 능력만큼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노괴.
1차 친위 쿠데타로 왕권도 강화했고 황제 즉위까지 했으며 의화단 운동 개입으로 세종 이후 가장 많은 영토를 확보한 군주라는 업적도 챙겼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원역사를 능가하는 발암 행보를 벌여 독자들도 고종 언제 퇴장하냐며 난리를 쳤고 극동전쟁 개전 직전 일어난 2차 쿠데타로 실권을 사실상 전부 빼앗긴다. 그럼에도 황위는 지킨 덕에 언젠가 김시혁을 또 엿 먹이려는 거 아니냐는 우려는 남아있었고 예상대로 되었다.
전제군주정이 당연했던 20세기 초반, 500년 전제군주국의 왕이 민중의 의사, 언론을 능수능란하게 움직여 막후에서 좌지우지 한다는 전위적 발상을 실현에 옮겼고, 이를 위해 역신이라며 치를 떨던 서재필과 그가 운영하는 독립신문을 참된 언론이라며 후원하는 짓도 마다하지 않았다. 조동윤이 밝혀낸 바에 의하면 김시혁의 위신을 떨어뜨리고 약점을 잡기 위해 몇달간 사생활을 캐고 다니기도 했는데 김시혁이 꼬투리 잡힐 짓을 전혀하지 않아 헛물만 킨 적도 있다고.
극동전쟁 종전 이후 거의 10년 간 뒤에서 조장한 민의를 바탕으로 군부와 내각도 손댈 수 없는 거대한 정치적 압력을 자아내는 데 성공했고, 이를 활용해 중추원을 황국협회 일변도로 채우고, 황실경위원과 제국익문사, 국가헌병대를 기반으로 내각, 군부를 견제한다. 극동전쟁 승리를 이끌어낸 성과는 있으나 본질적으로 고종의 신하라는 데서 정당성을 얻는 내각과 군부는 간접적인 견제 이상은 하지 못하는 상태.[15] 국가의 외교도 내각과 황실이 따로 전개하는 상황으로, 이로 인해 외교도 꼬여버려 러시아가 역으로 뤼순을 일본에 넘겨버리고 남만주를 유지하고 싶다면 파병하라는 요구를 해서 한국을 발칵뒤집어 놓기에 이른다.
동부전선 원정군이 김시혁 측근 지휘관들로 꾸려지자 이를 견제하기 위해 정적인 의친왕을 감찰관 명목으로 붙여 둘다 곤경에 빠트릴 궁리를 하면서도, 김시혁을 대신할 지휘관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으며 그의 능력이 자신에게 꼭 필요함을 알기에 김시혁을 숙청하자는 박제순의 건의는 일언지하에 잘라버린다. 오히려 김시혁을 원정군 사령관으로 추대하도록 여론을 조장했고, 원정나간 뒤에는 군사 부분에 일절 관여하지 않았다.
헌법 제정을 떡밥으로 던져 내각과 중추원을 갈라치고 자기 편을 늘릴 계획을 수립 중이며, 전쟁으로 도시의 물가가 가파르게 상승하자 임오군란 이상의 대규모 소요 사태가 발생할 수 있음을 감지하고 유사시 강제로라도 유통망을 확대하기 위해, 더하여 한성을 자신의 친위세력으로 둘러싸기 위해 헌병대의 규모를 확충하고 이를 기존 근위사단과 강습보병대 주둔지에 밀어넣는다. 내장원이 장악한 황무지 다수를 목장으로 개간하여 황실 차원에서 도시로의 육류 공급을 보장하려고 애쓰는 것은 덤. 민간의 설렁탕 가격 변동에 내재된 의미를 파악하고 기민하게 대응하는 모습은 바뀌는 시대에 적응 못하고 끌려내려간 동시대 전제군주 누구에게서도 찾아볼 수 없는 탁월한 면모로, 고종의 발암행각에 치를 떨던 독자들조차 혼자 보법이 다르다며 혀를 내두르는 중.
극중에서 반동인물 위치에 있으면서도 지식인이 아닌 민간인들이나 외국인들 사이에선 이미지가 무척 좋은 편인데, 백성들 관점에서는 조선 왕조 역사상 가장 많은 영토를 새로 획득한 전승군주에 영조의 재위기록마저 넘어선 최장수 나랏님을 부정적으로 볼 이유가 없고, 외국인 시선에는 민권 향상에 적극적이고 서구 문물에도 전혀 배타적이지 않은 세련된 군주이기 때문이다.[16]
맥심포 총성이 클래식보다 감미롭다고 당당하게 말하는 밀덕후로서, 단순히 화력이나 크기만 보는 게 아니라 디자인의 유려함과 미감까지 살피는 미학있는(?) 밀덕이라 삐까번쩍한 장비나 전함, 열병식이라면 사족을 못 쓴다. 군사적 안목은 전무하나 이 밀덕 기질 덕분에 대한제국군의 신규 장비 도입은 쉽게 쉽게 되는지라 도움이 되긴 한다. 구식 파먼 복엽기를 뉴포르로 교체하려는 군부의 요청을 탁지부에서 예산 문제로 반려했을때 새 비행기를 보고 싶다는 욕망으로 끼어들어 내탕금을 제공해줬고 노급 전함에 꽂혀서 프랑스와 미국을 찔러보았으며 프랑스제 전차 도입도 주도하는 등 최소 장비 도입 측면에서는 최고의 도우미라 봐도 될 정도다.
빙의 대상이 아니면 조기 리타이어 전개가 보통인 고종을 원래 역사에서 보여준 모습을 바탕으로 재구성해 민의를 바탕으로 독재하고 싶은 전제군주라는 골 때리는 조합으로 기존 대역에 없는, 그리고 엄청나게 빡치는 새로운 고종상을 제시하는 데 성공했다.[17] 인품상으로는 원 역사보다 더 나빠졌지만 능력상으로는 원 역사보다 훨씬 유능해진 셈.
자기 권력 확보에는 이토록 열심이나 막상 후대까지도 강력한 황권을 누려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는 것도 특이점이다. 황실이 계속 강력한 권위를 갖기를 원했다면 군부와 민중의 지지세가 확실한 의친왕을 순종 다음으로 지명해야 했지만, 아무런 존재감 없는 영친왕을 후계로 밀겠다는 뜻을 꺾지 않으면서 이용익에게 자기 사후에는 김시혁과 발맞춰 만사를 진행하라 지시한다. 순종이나 영친왕이 제어 못할 게 뻔한 근황파 역시 자기가 죽기 전에는 정리해버릴 생각이었다. 권력을 누리는 건 자신까지고 후대들은 왕업을 이어가는 것으로 족하다 여긴다는 점에서 동시대 다른 전제군주들과는 확연히 차이를 보인다.
- 순헌황귀비
자기 자식인 영친왕을 후계로 만들기 위해 의친왕을 견제하고 있다. 원 역사에선 1911년에 사망하나 사망 원인이 만성질환이 아니라 전염병인 장티푸스인지라 역사가 바뀌는 과정에서 감염을 피했다.
- 순종
황태자로 역사가 바뀌어 김홍륙 독차 사건이 일어나지 않으면서 건강을 해치진 않았으나, 애초에 총명함이나 기민함과는 거리가 먼, 순하기만 한 인물이라 존재감은 없다시피하다. 이토 히로부미가 한국을 방문했을 때 별 생각 없이 조병창 방문을 허락했다가 뒤늦게 김시혁의 눈치를 본다.
- 의친왕
1차 세계대전을 다룬 2부 본편 1화에서 관전무관단의 일원으로 등장. 유럽에서 유흥을 즐기다가 갈리치아에 있던 관전무관단에 합류하여 보좌하는 이응준 정위를 아연실색하게 만든다. 일본에서 벌어진 추대 사건은 김시혁의 개입과 상관 없는지라 여기서도 아버지에 찍혀서 귀국길이 막힌 처지.
극동전쟁의 영웅 김시혁의 열렬한 팬을 자처하며 답장 여부에 상관없이 팬레터에 가까운 편지를 잔뜩 보내오곤 했다고. 오랜 타국 생활에서 오는 공허함을 달래고자 각종 군사 서적을 탐독하고 총기에 관심을 쏟았는데, 덕분에 방구석 밀덕후 아버지나 금치산자 형과는 달리 군사적 안목이 제대로 잡혀서 오스트리아-헝가리 군의 전투방식이 한국의 것을 벤치마킹 했음을 즉시 알아보고 김인수 부장과 전황에 대해 막힘없는 대화를 나눈다. 바로 옆에서 포탄이 떨어져도 개의치 않는 대범함을 갖춰서 세간에선 고종보다 더 대원군을 닮았다는 평을 받고 있고 그 탓인지 고종은 의친왕의 거듭된 귀국 요청을 칼같이 차단하고 있다.
동부전선 참전을 위해 결정된 원정군 주요 지휘관으로 모두 김시혁의 측근으로 구성된 데[18] 불만을 품은 고종은 의친왕을 원정군 사령부 감찰관이자 한국군 대표로 내정한다. 당연히 선의는 아니고 패전하면 양쪽에 다 책임을 묻고, 승전하면 과실은 자신이 챙기며 의친왕과 원정군 수뇌부 사이에 연결점을 빌미삼아 공작을 벌이기 위해서 였다. 다만, 의친왕 본인은 김시혁의 열렬한 팬을 자처하고 있어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 그를 돕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19]
비단 의친왕 본인만 친숙하게 구는 게 아니라 사동궁 전체가 김시혁과 그 일가에 적극적으로 다가가려 하는데, 의친왕의 며느리는 로하에게 외국어 교습을 받으며 친구처럼 지내고, 의친왕비 김씨는 한성 폭동 때 직접 전화를 걸어 김시혁의 집이 안전하도록 보살폈다. 나중엔 1차 대전 중에 태어난 김시혁 아들의 이름을 의친왕이 지어주는 게 어떻겠냐는 권유까지 하고 분위기에 휩쓸린 로하가 어어하다 승낙하면서 김시혁은 본의아니게 황실내 분란에 휩쓸려 들어가게 생겼다.
부크강 집단의 공세가 격화되는 와중 노보플린스크로 향하는 노무단을 격려하기 위해 동행했다 제1 시베리아 군단의 허술한 지경선을 파고든 독일 기병대의 기습에 휘말린다. 도피하라는 권고를 뿌리 치고 치중대에 합류해 친왕 신분에 권총을 들고 교전에 참여하게 된다. 수와 화력에서 너무 불리했던 치중대는 거듭된 기병 돌격에 전멸해버렸고[20] 그 결과 시종무관 이응준과 단 둘이서 쫓아오는 울란들을 맞상대하며 도주하길 반복하다 엄복동 일행과 조우, 노보폴린스크까지 호송해 줄 것을 부탁한다. 사격 솜씨는 무척 좋아서 권총만으로 독일의 정예 기병들을 능숙하게 제압했고, 러시아, 미국, 독일 등 서방 각국 총기를 다채롭게 다뤄봐서 한국군 장교들에겐 생소한 독일산 기병총도 능숙하게 다룬다. 도중에 이응준과 떨어지는 불상사가 발생했으나 엄복동 일행과 한국군 수색대의 도움으로 무사히 탈출에 성공해 노보폴린스크에 합류한다.
노보폴린스크에 도착한 뒤 일련의 독일군 부대가 한국군 보급창을 노리고 접근한다는 보고를 받자 타군보다 대량으로 배치된 기관총과 강습소총 화력을 총동원해 아군 규모를 속이는 기만책을 제시한다. 정작 숙련된 독일군은 화력에 비해 병력의 밀도가 낮고 포격 지원이 없다는 사실만으로 바로 기만책임을 눈치채나, 한국군이 기만책을 쓰는 이유가 독일군을 끌어들여 정비를 마친 러시아군과 함께 쓸어버리려는 속셈이라 오해하는 바람에 결과적으로 노보폴린스크를 사수하는 데는 성공한다.
경술국치가 사라지고 정국이 바뀐 영향인지 원래 역사와 후계구도가 달라졌다. 원 역사에선 정실 부인 김덕수와의 사이에서 자녀가 없었고, 첫번째로 공인 받은[21] 자식이 1909년생 이건인데, 작중에선 1916년 시점에 임신한 의친왕의 며느리가 등장한다.
- 영친왕
고종 소생 황자들 중 사실상 막내. 고종은 군과 민중에 확고한 지지세가 있는 의친왕 대신 총애하는 엄귀비 소생의 영친왕을 몸 약한 황태자 이척 다음으로 정하고 후사를 준비하려 한다.
- 흥친왕
2부에서 내장원을 관리하고 있다. 단순히 떡고물 챙기는 수준을 넘어 환곡까지 부활시켜 이자놀음까지 하는 등 전횡을 심하게 부리고 있으며 이 때문에 탁지부에서 여러 차례 경고를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다.
2.3. 관료
의화단 진압과 남만주 점유를 거치며 지주가 주축이 된 남부와 실업가 중심의 북부로 파벌이 갈린다.- 박정양
김시혁의 1차 쿠데타 이후, 새 내각의 총리대신을 맡았다.
- 윤웅렬
김시혁의 1차 쿠데타에 협조했으며, 새 내각의 군무대신을 맡았다.
- 한규설
원역사에서 을사조약 반대와 한일합방 이후 일본이 수여한 귀족 작위를 거부하는 등 적극적인 반일 행보를 보인 대한제국의 충신. 소설상에서도 일본 측이 강경파로 보는 등 반일 행보는 여전하다. 외교무대에서 활동하며 극동전쟁 때는 총리대신으로 전시내각을 이끌었다. 고종을 무척 불신하고 김시혁을 더 신뢰하는 모습을 보였다. 2부 시점에선 고령으로 사직하고 낙향했다.
- 조병식
방곡령으로 유명한 인물. 작품속에선 미스터 방곡령이라 불리며 방곡령의 화신 취급을 받는다. 현실대로 부패한 면은 존재하지만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목적을 달성하는 노회하고 유능한 관료이기도 하며 일본으로부터의 뇌물만은 절대 받지 않는 반일주의자라 대일본 외교에서 활약한다. 일단 조병식이 나서면 일본은 짜증부터 내며 독자들은 잠가라 쌀독 드립을 친다. 이용익, 어윤중과 함께 일본이 가장 경계한 조선 관료 3명으로 개중에서도 특히 으뜸이었다. 극동전쟁 직전 출범한 전시내각에서 농상공부대신직을 역임하다 종전 직전 노환으로 사망하며 "일본에는 쌀 한 톨, 콩 한 조각 팔지 말라."라는 그 다운 유언을 남겼다.
- 김가진
경복궁 습격 때 끝까지 저항하는 김시혁을 설득하는 역할로 파견된다. 항복을 거부하는 김시혁을 무모하게 여기면서도 일본측 상황을 슬며시 알려주는 배려를 보인다. 의화단 운동 때 북경에 외교관으로 파견되었다가 죽을 뻔했으나 경호차 파견된 원수부 요원들의 헌신으로 버텨내고 생환한다. 본래 친일 성향이 있었으나 일신의 영달을 위해 친일하는 부류가 아니었기에 일본의 야욕이 점점 노골화되자 노선을 전환했다. 조병식 후임으로 농상공부대신이 되어 극동전쟁 종전 후 쌀 수출 물량 증감을 두고 일본과 협상을 벌였고 이때 일본측 제안으로 동양척식주식회사가 설립된다.
2부 도입부 시점에선 내각 총리대신. 관료로서 역량이나 청렴함은 흠잡을 구석이 없었으나, 아직 제대로 된 기반도 잡히지 않은 상황에서 의회정치에 지나친 믿음을 드러내 역대 어느 총리보다 많은 중추원에 많은 권한을 넘겼고, 이를 파고든 고종은 중추원을 친황파 황국협회로 채워넣어 원수부와 내각을 압박하는 데 써먹는다. 1차 세계대전 참전이 확정되고 일본의 관동주 매각 등 외교참사의 책임을 묻는 불신임 투표가 부쳐지려 하자 투표 전에 자진 사임한다.
- 어윤중
조세개혁이 가장 큰 소망인 탁지부 대신. 설사 임금이라도 주먹구구식 예산 집행은 용납하지 않는 강직한 성격으로 고종이 이미 러시아제 소총 도입이 확정된 상태에서 즉위 40주년 기념식에 쓰려고 30년식 소총 15만어치, 대포와 속사포 20만원치, 도합 35만원치 무기 구매를 덜컥 약속하는 사고를 쳤을 때 국고는 단 한 푼도 각출할 수 없으니 내탕금에서 지출하라 일갈한다. 군제 개혁도, 병기 개발도 모두 돈싸움인 만큼 내각에서 김시혁과 직접적으로 얽히는 일이 가장 많은 인물이며 김시혁도 최대한 탁지부 권한을 존중하려 애쓴다. 한규설이 낙향한 다음에도 조정에 남아 최장수 대신이 되었으나 1차 대전 원정군의 뒷바라지를 하느라 고령에 과로로 건강이 심하게 축나 자리보전을 하고 만다. 그래도 중간에 급사하거나 하는 일은 없어 노구를 이끌고 광양에 한국 최초의 제철소가 들어서는 순간을 참관한다.
- 민영환
젊은 시절부터 노련한 모습을 보이는 관료로 민씨 척족 중 단연 돋보이는 인물. 2차 쿠데타 직전 신설된 헌병대 사령관을 부암했다. 고종이 그를 헌병사령관에 부임시킨 건 군부를 견제하려는 의도였으나 정작 그는 이용익의 설득을 받아들여 이완용의 협조 요청을 거부하고 쿠데타를 묵인하는 것으로 답한다. 전쟁이 발발하자 김시혁과 함께 평양으로 북상, 도주한 관서사령관을 대신한 자신의 동생인 민영찬과 함께 헌병사령관 직위를 이용해 치안을 유지하고 포로들을 관리하는 데 주력한다. 황주 방면 7여단을 지원할 때는 또 다시 소모전을 벌이려는 김시혁을 제지하고 양동 작전을 제안했다. 이 양동 공격이 성공하면서 7여단은 간신히 살아남고 한국군은 함흥으로 후퇴할 여유를 얻는다.
2부 도입부에선 육군대신으로 직을 옮겨 등장. 고종에게 무작정 충성하지 않고 합리적인 방안을 찾던 그가 떠난 뒤 국가헌병대는 급격히 고종의 친위기관이 된다. 1차 세계대전 참전이 결정되고 총리대신 김가진이 사임하자 유능함을 인정받아 왔고 러시아를 잘 아는 그가 원수부와 내각, 중추원 모두의 지지를 받아 군부대신 겸 총리대신직에 오른다. 총리가 되자마자 러시아 극동총독을 설득, 한국군의 참전을 1916년으로 미루어 필요한 시간을 버는 수완을 발휘하며 이후로도 협상국과의 막후 협상, 근황파&군부와의 조율 등으로 국내외를 오가며 바쁜 나날을 보낸다.
- 백성기
군부협판. 신식 군제와 군 규모 증강에 따르는 내부 모순과 기강 해이를 방지코자 서구식 육군법원, 군사법제도 정착에 앞장섰다. 군비 확장에도 비판적으로 원수부의 장교들과는 자주 얼굴을 붉혔고, 국가헌병대 초대 국장인 민영환과도 서로의 영역을 침해한다고 생각해 자주 부딪친다. 하지만 공사구분이 확실하고 관료로서 책임감이나 능력엔 모자람이 없어서 러시아와의 모신나강 도입 사업을 최대한 한국쪽에 유리하게 짜여지는 데 공헌했고 한성을 포기하는 것을 전제로 한 김시혁의 오방색 전쟁계획에 대해서도 한성 방위는 어렵다며 적극 지지해주었다. 의화단 진압에 군대를 보내 개입하겠다는 고종의 선언에 끝까지 반대했고, 정식으로 청에 선전포고하고 전쟁을 최대한 길게, 크게 키워 자신의 권위를 세우려는, 대한제국의 얼마 안 되는 여력을 다 까먹게 할 고종의 몽니에 대해서 민영환에게 김시혁에게 최대한 물자를 지원해줘 예정보다 빨리 북상시키는 방안을 제안하여 대한제국이 씻을 수 없는 피해를 입는 걸 막았다.
의화단 진압이 마무리 된 후에는 앙심을 품은 고종의 보복으로 육군법원으로 좌천되었는데, 법원을 설립하고 군법을 만들며 원수부 인사들과 부쩍 가까워진다. 대한제국 해군이 창설될 때는 구 수군통제사 출신을 국장으로 세워야 한다는 한규설, 민영환에 맞서 출신 불문하고 바다를 잘 알면서 체계를 세울 수 있는 인재를 세워야 한다는 주장했고, 김시혁도 그를 지지해 장기렴을 국장으로 세운다. 김시혁의 2차 쿠데타에도 순순히 협력해 전시내각에서 활동했고 10년이 지난 2부 프롤로그 시점에선 농상공부대신을 역임한다.
- 민종렬
을미의병 때 의병을 일으켜 이규태랑 협력했다. 그가 전라도 관찰사로 있을 때는 남방 지역의 문제가 덜 했었다고 언급된다. 의화단 전쟁 이후 민심이 이반된 함경도를 위무하고, 큰 피해를 입은 지역 포군들을 재정비하러 파견된다. 1917년 시점에서는 평안북도관찰사로 민종묵과 함께 군부와 힘을 합쳐 사라진 호로군을 대신할 철도, 국경경비대를 만주인과 한인들로 신설하는 계획을 진행한다.
- 김홍륙
원역사에서 고종과 순종을 독커피로 독살하려 한 김홍륙 독차 사건의 주범. 다만 여기서는 김시혁 덕에 계속 중용되면서 독차사건 없이 한성부 판윤으로서 잘 나가고 있다. 고종의 의사를 반영한 한성부 재정비를 주도했으며 극동 전쟁을 맞아 정부 시설을 함흥으로 옮길 때 누군가는 남아서 한성의 백성들을 지켜야한다며 한성에 남아 무저항 도시를 선언했다. 이후 괴뢰 정부에 협력하는 척하고 있다가 한성 탈환 타이밍에 맞춰 내부에서 호응해준다.
- 안중근
외부 관료를 역임하다 아시아주의자인게 문제가 되어 퇴직. 의병활동을 하다 김시혁에게 합류를 청하며 등장한다. 김시혁은 그를 김홍륙에게 보내 함께 움직이게 한다. 아시아주의자라 불이익을 받았고, 친일파 박영효와도 교분이 있어 그를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기에 한양 내 저항 세력 구축의 중심이 된다. 문산 전투 이후 벌어진 한성 탈환 때 김홍륙과 함께 내부에서 호응했으며 살려달라 애걸하는 박영효에게 죄값을 치르란 말을 남긴다. 10년 뒤에도 외부참판으로 봉직하다 기존 프랑스 대사 홍종우가 외부대신서리가 되면서 프랑스 대사로 전임된다.
- 이용익
고종의 총신으로 작중에 겸직하는 역할이 가장 많은 인물. 고종에 대한 충성은 변치 않으나 고종이 하는 일이 나라 가져다 일본에 바치자는 거라 김시혁의 쿠데타에 협력, 헌병대와 경무국을 설득해 쿠데타 성공에 크게 기여한다. 극동 전쟁 발발 이후에는 함흥에서 후방 보급을 책임지다시피 했으며 장작림 토벌 이후에는 일본과의 외교전에서도 상당히 활약한다. 2부 본편 시점에선 헌병대 사령관. 헌병대를 증강해 한성을 친위세력으로 둘러 싸려는 고종과 고종을 불신하는 내각, 원수부 사이를 중재해 합의를 이뤄낸다.[22] 고종이 멱살잡고 끌고가는 근황파에서 유일하게 실무 능력과 배포를 겸비한 원로이자 고종과 대립하는 내각, 원수부와 사이를 이어질 수 있는 유일한 인물.
- 민종묵
학부대신. 원래 역사에선 을사조약 시기까지 반일을 고수하다 한일병합 즈음 회유되어 친일파로 남으나, 작중에서는 바뀐 역사의 수혜를 입어 존경받는 유림 관료로 남게 되었다. 자신은 상투를 고수할 정도로 옛 법도에 충실하나 앞으로는 신식 교육이 주축이 되어야 한다는 열린 소신을 지닌 온건 보수로, 김시혁도 늘 깍듯이 예의를 지킨다. 교육보국 백년대계 구호를 내새우며 학교 설립에 주력, 재임기간 동안 전국에 4,000개의 크고 작은 학교를 세우는 괄목할 성과를 냈다. 남만주의 중국인들을 신뢰할 수 없으니 추방해야 한다는 이범진의 주장에 단호히 반대하며 교육을 통해 서로 다른 이들을 하나로 묶을 수 있으며 그것이 유자의 짐이라 강변한다.
지속적인 동질화 교육과 황제, 내각의 지원으로 남만주 만주족과 한족들에게 한국인이란 소속감을 심거나 최소한 한국의 통치를 받아들이게 하는 데는 괄목할 성과를 냈고, 2차로 군부와 힘을 합쳐 사라진 호로군을 대신할 철도, 국경경비대를 만주인과 한인들로 신설하는 계획을 진행한다.
- 이도재
한성 조약 이후, 이완용 후임 전라도 관찰사로 임명되어 일진회를 정리했으며, 극동전쟁 때는 원수부 총관을 맡았다. 2부 시점에서는 남만주에 변계강무서를 설치해 남만주의 지배권을 확실시 하고 있으며 장쭤린을 상대로 노련하게 대처하고 있다.
- 박제순
김시혁이 가장 먼저 만난 을사오적. 김시혁이 동학 토벌을 명받고 남쪽에 파견되었을 때 충청감사로서 무능한 주제에 김시혁 하는 일이 사사건건 트집을 잡으며 악연을 쌓는다. 충청감영에 집결한 병력까지 모아 동학군 집결지를 들이쳐야 한다는 타당한 요청을 뭉개버리는 바람에 김시혁이 포함된 친위영 병력은 압도적인 수적 열세 속에 싸워야 했다. 극동전쟁 때는 고향에 내려가 칩거하고 있었기에 전후 벌어진 숙청에서 무사했고 친위세력이 필요한 고종은 그를 기어이 재등용해 종전 협상단까지 끼워넣는다. 친일내각에 협력하진 않았으나 자세한 행적이 밝혀진 것도 아니어서 의혹의 눈길이 늘 따라다녔고 종전 3년도 지나지 않은 시점에 뜬금없이 한청일 삼국 동맹을 맺어야 한다고 주장하다 뭇매를 맞고 낙향해 한동안 칩거해야 했다. 의지할 게 임금의 신임 밖에 없는 그를 손발로 써먹기로 한 고종은 그를 늘 옆에 두었고 1915년에는 궁내부 대신으로 승승장구하며 고종의 총애를 바탕으로 총리대신을 노리나 고종을 지지하는 중추원 황국협회 의원들조차 박제순은 불신했기에 불발된다.
고종의 측근이 된 뒤로는 툭하면 김시혁을 제거하자, 김시혁을 견제하자고 노래를 부르는 중. 욕심은 가득하지만 정치가로서 능력은 전무해서 그를 중용하는 고종도 전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고 도구로 여길 뿐이다. 그 한심한 식견에 최소한의 격식조차 생략한채 노골적으로 면박을 주기도 한다.
- 홍종우
프랑스 군사고문으로 파견된 페르디낭 포슈와 김시혁의 대화를 통역해주며 등장. 한국에서 러시아에 가장 능숙한 사람이 김인수라면 프랑스어에 가장 능숙한 사람은 홍종우라 프랑스와의 각종 협상, 외교무대에선 어김없이 등장했다. 2부에선 주 프랑스 대사를 맞아 수행하며 러시아가 다롄, 뤼순을 일본에 판매하겠다고 나서 한국이 뒤집어 졌을 때 러시아의 동맹인 프랑스측과 실무 교섭에 나서 극동주 매각을 전후로 미루는 성과를 냈다. 이후 내각이 개편되며 외부대신서리가 된다. 러시아가 관동주가 매각이란 초강수까지 두게 된 건 황제와 내각 모두의 책임이라며 냉소적인 반응을 보인다.
- 이범진
주로 외교 업무를 맡아 활동했다. 조정 내에서 중국에 가장 강경한 인사로 대한제국이 점령한 남만주에 유입된 중국 유민들을 모두 추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 이윤용
극동전쟁 시점 경무사. 이용익의 설득을 받아들여 김시혁이 2차 친위 쿠데타를 일으켰을 때 방관한다. 한성탈환 때도 협조했으며, 극동전쟁이 끝난 이후에는 치안이 혼란스러워지자 대대적인 토벌령으로 진압한다.
- 남만리
성하영과 함께 한성구락부 창설 직후에 가입한 초기 멤버. 경복궁 습격 이후 신설된 친위영 4중대장으로 2중대장 김시혁, 3중대장 성하영과 함께 동학군 진압에 공을 세웠다. 을미사변 이후 의병을 진압하라는 명을 받았지만 다른 구락부 멤버들과 마찬가지로 오히려 의병에 합류했다. 1차 쿠데타 이후 성하영과 함께 친위대 연대장 이규태를 예하 대대장에 임명되었고 고종의 대청 선전포고에 이어 진행된 북벌 때도 밑에서 보좌했다. 이후 어느 시점에 군을 떠나 경무청에 투신하여 2부 시점에선 경무사로 내각의 유일한 무력집단이자 정보기관의 장을 역임 중이다.
- 김만석
김시혁이 훈련대 3대대장이었을 당시 평안감사로, 김시혁과 협력해 열병식을 하거나,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조언을 구한다.
- 이상설
포츠머스 회담에서 일본이 무리한 요구를 하자 분노하며 고무라 주타로에게 삿대질을 하며 일갈을 날리다가 이범진이 말리자 진정한다. 1916년 전시 내각으로 바뀌기 전까지 외부대신이었으며, 이후 제1차 세계 대전 참전이 결정되고, 전시내각으로 바뀌자 주러 대사로 전임된다.
- 이한응
극동 전쟁 당시 주영 공사로 이승만, 홍종우 처럼 기자들 앞에서 한국의 정당한 투쟁과 자주독립을 부르짖으며 열변을 토했다. 2부 시점에서도 계속 주영 대사이며, 참전 이후에는 외부참판으로 영전한다.
- 신채호
황성신문 및 대한매일신보의 주필을 맡은 언론인이었으나 만주에 자신의 이익지대를 확보하려한 고종이 그의 영웅주의 사관에 주목해 궁내부 전례관에 임명했다. 황실의 재정지원 아래 을지문덕전을 시작으로 고구려의 고토인 만주에 대한 격동적인 글을 써 식자층이, 그 중 특히 젊은 학생들이 만주에 관심을 가지게 하였다.
- 김규식
외부참판으로 첫 등장. 브루실로프 공세 승전 소식이 전해진 후 한성에서 벌어진 폭동으로 중국인, 일본인 피해가 발생하자 이를 항의하는 중일 사절을 응대한다.
2.4. 친일파
1, 2차 쿠데타와 극동전쟁을 거치며 다 제거되거나 망명하거나 친일 노선을 버렸다. 일본이 현지 협력자 포섭 수단으로 적극 활용한 아시아주의는 사실상 매국의 다른 이름이 되어 대한제국 내에선 뿌리가 뽑혔다.[23]- 김홍집
원역사랑 비슷하게 매국형 친일파는 아니지만, 1부 초반 친일 내각을 이끌며 부족한 상황 속에서 최선을 다했지만, 김시혁의 1차 친위쿠데타 이후 원역사랑 비슷한 운명을 맞았을 듯 하다.
- 이완용
정국이 원 역사와 달라지면서 조금 이르게 친일파로 전향한다. 극동전쟁 시기에 친일파로서 괴뢰 정부의 수장격 존재가 되지만 일본군이 밀리면서 괴뢰 정부가 무너지고 도망치다가 김석중이 이끄는 기병대에 붙잡혀 편곤으로 구타당한 뒤 재판을 받고 공개 총살된다.
- 박영효
송병준과 함께 이 소설에 나온 친일파들 중에서도 악질로 묘사되는데 특히 주요 군사 정보들을 뇌물 받고 팔아먹었다는 이완용도 하지 않은 행위를 한데서 더더욱 실드를 쳐줄 요소가 없다. 그 결과 극동전쟁 중 세워진 괴뢰정부에도 합류하지만, 한성이 탈환되자 분노한 한성 주민들에게 잡혀 얻어 터지게 되고 김홍륙과 안중근에게 구원을 청하지만 싸늘하게 거절 당한 뒤 다시 끌려 가는 것으로 출연 종료. 다른 곳에서 붙잡혀 온 이완용, 송병준과 함께 공개 총살로 생을 마감했다. 임금의 부마 씩이나 되는 인사가 가장 적극적으로 나라를 팔아먹으려 든 사례라 이쪽 세계에선 이완용을 대신해 최악의 친일파로 남을 전망이다.
- 송병준
원역사 정미칠적 중 하나이자 이 소설상 박영효와 함께 친일파 중 최악의 악질. 그래도 한국인의 정체성은 가지고 있던 박영효와 달리, 이쪽은 아예 노다 헤이지로라고 이름까지 일본식으로 쓰고 일본어를 주로 쓰는 등 철저히 일본인스럽게 행동한다. 한성이 수복되고 용케 제물포까지 탈출하는데는 성공했지만 하필 주안산에서 마주친 진위대 3여단 병력들이 경비를 서고 있었던지라 그대로 붙잡힌다. 이완용, 박영효와 함께 서소문 바깥에서 공개 총살로 처형되었다.
- 권중현
원역사 을사오적 중 하나로 역시나 친일파답게 괴뢰정부에 합류했다. 이후 일본이 밀려나면서 한양 방위책임을 떠넘기다시피 받게 되고 당연하겠지만 이미 시세를 눈치채고 있던 그는 오히려 한양 문을 대한제국군에게 열어주며 다시금 편을 바꾼다. 부인 못 할 악질 친일파이자 부역자라 사면 약속 따위 무시하고 처형해 버려도 상관없음에도 고종은 박제순과 마찬가지로 군부, 내각 견제 카드로 쓰기 위해 살렸고 김시혁 견제를 위해 군사 쪽에 박아 넣으려 했지만, 친일 이력이 너무 뚜렷해 살려두는 것 조차 은혜인 그를 용납할 이는 근왕파 중에도 드물었고 바로 정치적 맹공을 받아 완전히 은퇴당하게 된다.
- 유길준
초반부 박영효가 내무대신에서 쫓겨난 뒤 후임으로 임명되었다. 김시혁이 이끄는 평양진위대의 한양 입성을 반대하나 실패, 불안감이 맞아들어 김시혁의 첫번째 친위 쿠데타가 일어나자 몸을 빼내 일본으로 망명. 1903년까지 일본에 머무르다 한성 괴뢰정부에 합류하지만 일본이 패전하며 또 망명길에 오른다. 기록조사실에서 찾아내려 모진 애를 썼지만 미국으로 빼돌려 버려 찾지 못했고 1차 대전 서부전선에 일본이 참전한 것을 계기로 수면 위에 등장한다. 일본이 구성한 자원병 여단에 종군하겠다며 시모노세키 일대의 친일파들을 선동하고 있다고. 원 역사의 유길준은 친일파는 맞고, 매국노는 아니었으나 을미사변 이후 정국이 본격적으로 비틀리며 김홍집처럼 조선인 손에 죽거나, 철저하게 일본에 의탁하거나 두 가지 선택지가 남은 상황에서 후자를 고르며 이완용 이상의 악질 친일파로 남게 되었다.
- 조희연
박영효랑 훈련대 1대대장 신태휴의 교체를 두고 알력 다툼을 벌였다. 김시혁의 1차 쿠데타가 일어나자 일본으로 망명한다.
- 허진
군내 대원군파의 중심인물. 고종이 만든 친위영을 감시하기 위해 참모관으로 임명되었다.
- 우범선, 이두황
이들을 무력화시켜야 한다는 김시혁의 조언을 고종이 거부하면서 원역사처럼 을미사변에 가담했고, 김시혁의 첫번째 친위 쿠데타로 인해 일본에 망명했다. 이후 일제가 친일 내각을 세우기 위해 다시 귀국하지만, 김시혁의 두번째 친위 쿠데타 이후 잡혀 처형된다.
- 이근택
처음에는 반일 인사였다가 일본과 대한의 차이가 압도적이라는 사실에 경도되어 친일로 전향한 인물. 1차 쿠데타로 우범선, 안경수, 이두황 등이 모두 해외도피한 상태에서 얼마 안되는 친일 군맥으로 군부를 견제하기 위해 고종이 의도적으로 키운 인물. 청의 선전포고에 똑같이 선전포고로 대응하고 남만주 점령을 명한 고종이 함경도 방면군 사령관으로 전격 발탁, 2만의 병력을 이끌고 훈춘 방면으로 진격한다. 평안도 방면에서 진격한 이규태가 고종의 재촉을 최대한 뭉개며 불필요한 손실을 줄인 것과 달리 무리한 진격으로 현지 민병대와 충돌하고 콜레라까지 발병해 3천의 사상자를 낸다. 끝까지 제지하던 참모장 장기렴을 해임하고 무리한 진격을 이어가느라 함경도 일대에서 무리한 징발을 자행. 북청 일대에서 소요 사태가 발생하기에 이른다.
결국 함경도 지방관들의 직소와 장기렴의 증언을 수렴한 북간도 관리사 이범윤에 의해 해임 조치된다. 해임된 뒤에도 고종의 총애를 받아 황실경위원장에 임명되어서는 김시혁이 올리는 일본의 침공 징후에 대한 정보를 모두 차단하고 있었다. 이후 김시혁이 2차 쿠데타를 일으키자 도주했다.
- 이병무
1903년 2차 쿠데타 직전 군내에 거의 유일하게 남아있던 친일파 고급지휘관. 군부를 견제하고 갈라치기 위해 고종이 의도적으로 중용한 인물로 2차 쿠데타 직전까지 포병사령관을 역임 중이었다. 군인으로서 실력은 전무하며 일찌감치 퇴근해 자신이 꽂아 넣은 친일 장교, 친한 일본군 장교들과 요정에서 주색잡기로 노는 것이 일상. 2차 쿠데타 당일에도 퇴근 시간보다 앞서 기생집을 찾았다 기록국 요원들에게 습격받자 속옷만 입고 창문으로 달아나는 추태를 보이다 체포된다. 그 뒤 처형되지는 않은 채 수감되어 있다가 일본의 침공으로 풀려났고 한성이 수복될 때 용케 달아나 일본으로 몸을 뺐다. 일본 측에서는 그를 다시 상해의 영국 조계지에 숨겨놓은 탓에 기록조사실이 찾지 못했고 1차 세계대전 서부전선에 일본이 참전하자 친일 부역자들로 구성된 대대의 참모로서 재등장한다.
- 안경수
김시혁의 첫번째 친위 쿠데타 이후 일본으로 망명했으나, 망명생활에 심한 염증을 드러내다 기록조사국의 공작에 걸려든다. 당근과 채찍을 교묘하게 활용한 조사국 요원들의 심문에 박영효가 한국군 암호를 팔아넘긴 것 등 각종 기밀 사항들을 실토하며 목숨을 보전했다.
- 민영철
관서사령관 겸 평안남도관찰사였지만, 풍경궁 예산을 착복한 것으로도 모자라 일본 근위사단과 내통해 평양을 무력화시키려 했다. 이후 기록국에 의해 내통 사실이 들통나자 도주한다. 이후 일본이 패전하자 일본으로 망명해 시모노세키에서 아시아주의자들의 거두가 되었으며, 1차 세계대전 서부전선에 일본이 참전하자 이병무와 함께 친일 부역자들로 구성된 대대의 참모가 된다.
- 장석주
극동전쟁 때 일본이 세운 신정부에 법부대신으로 임명되어 적극 협조했으나, 일본이 패전하자 일본으로 망명해서 다카타니 요시라는 이름으로 개명한 뒤 일본인인 척 살았지만, 기록국 22과, 27과 요원들에게 참살당한다.
- 구연수
극동전쟁 때 일본의 삼광작전에 적극 협력했으나, 일본이 패전하자 일본으로 망명했지만, 나가사키에서 기록국 22과, 27과 요원들에 의해 납치되어 정식 재판을 받게 된다.
2.5. 독립협회
중추원이 자리잡으며 황제와 황국협회에 대응되는 야당으로 자리잡는다. 뚜렷한 구심점 없이 언론사와 실업가의 후원을 받는 구파와 지주와 학생계를 중심으로 한 신파[24]로 파벌이 나뉘며 그 안에서도 인물과 성향에 따라 자잘한 파벌들이 존재한다.- 서재필
독립신문 사주. 미국 국적을 따고 돌아와 조선에 의회 도입을 위해 준비하다가 김시혁과 엮이게 된다. 김시혁과는 견제하면서도 협력도 하는 입체적인 관계. 원래 역사에서도 만주 점령을 주장했던 사람이라 한국군의 남만주 점유와 장작림 토벌을 아주 열성적으로 지지했으며 한국군이 영구를 이미 점령해다는 오보를 고의적으로 내기도 했다. 민의와 그 민의를 불러일으키는 언론의 잠재력에 주목한 고종은 갑신년의 역적이라며 혐오하던 서재필이 이끄는 독립신문을 참된 언론이라는 공치사까지 붙여 전폭 후원해준다.
- 이승만
김시혁의 제안으로 원역사보다 이른 미국 유학을 가게 된다. 둘 간의 밀담은 꽤나 대담한 편인데, 누가 들으면 역적이라고 말해도 할 말이 없을 지경의 내용이었다. 극동전쟁이 벌어지고 나서는 미국 내에서 여론전을 주도하고 있다. 언변이 좋아서 주미 일본 공사관 직원들도 그를 주요 경계 대상으로 보는 중. 그러거나 말거나 이승만은 미국 의회에서 연설을 가지고, 국무장관과의 회담까지 하면서 여론전에서 승기를 잡고 미국인들의 감성을 자극하여 전쟁채권을 판매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이후 원래 역사대로 우드로 윌슨 아래 수학해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1916년, 데모크라시에 대한 열망을 가득 품은 채 귀국한다. 황국협회 소속인 윤치호와는 자주 의견 차이로 다투어 병원에 입원할 정도로 심하게 싸우기까지 한다.
- 박은식
1916년 시점 중추원 의장으로 등장. 구심점 없이 파벌 싸움만 치열하느라 황제에게 여론전으로 밀리는 상황을 냉소적으로 바라본다.
- 안창호
갓 중추원에 입성한 신진 의원으로 등장. 신·구파의 갈등, 지나치게 과격한 이승만 계파의 부상을 우려한다. 김시혁에게 무척 우호적인 시선을 견지하고 있으며 그와 의친왕을 끌어들여 독립협회를 묶을 구심점으로 삼자고 주장한다.
2.6. 황국협회
중추원의 규모가 커지면서 근황파 여당으로 정착한다. 고종을 구심점으로 확실하게 뭉쳐있어 결속력에 우위를 가진다.- 길영수
황국협회 소속 보부상으로 고종의 최측근. 초창기 모든 면에서 열세였던 한성구락부와 고종을 잇는 연락책이자 공작원으로 활동하며 친위 쿠데타 성공에 중요한 조력자 역할을 했다. 극동전쟁 시점에서는 육군 참장이 되어 황국협회를 이끌며 의병들에게 전쟁 물자를 보급하거나 봉기를 일으키게 한다. 2부 시점에서도 황국협회를 이끄는 수장으로 있다.
- 윤치호
황국협회 소속 중추원 의원으로 등장. 본디 독립협회 소속이었으나 독립협회의 방향성에 회의를 느끼고 노선을 바꿨다. 뛰어난 외국어 구사 능력과 문필력으로 고종의 대외적 이미지 상승에 기여했다. 이승만과는 사사건건 부딪치는 앙숙 관계로 중추원에서 대놓고 주먹다짐을 벌인다. 심지어 제대로 얼굴에 주먹을 가격하기까지 해서 구치소에 구금되기까지 했다. 원 역사에선 세상만사에 좌절한 염세주의자였는데 역사가 개변되며 정반대로 과하게 격정적이되었다.
- 현상건
윤치호가 이승만의 얼굴을 가격해 병원에 입원시키자 길영수와 함께 입원한 이승만에게 방문해 사과한다.
2.7. 기타
- 최씨 어르신
평양에서 활동하는 유상 중 하나로 성이 최씨라는 것만 밝혀지고 이름이 밝혀지지 않아 어르신이라 칭해진다. 젊은 시절엔 산포수로 두 차례 양요에 모두 참전했다. 신미년에 죽을 뻔한 걸 김시혁의 아버지 덕에 살아남았고, 그걸 마음의 빚으로 여겨 상인이 되고 나서 김시혁의 집안을 물심양면으로 도왔다고. 청일전쟁의 여파로 장사가 잘 되지 않아 고민하고 있었으나 김시혁의 도움으로 군납의 길이 열려 재기에 성공하고 다시금 번영을 누리며 이에 따라 김시혁을 계속 돕고 있다. 자신의 딸인 로하와도 맺어주려 하는데, 둘의 나이차가 상당한 탓에 김시혁이 거절했으나 이후 둘이 결혼하면서 장인어른이 되었다. 이후로도 김시혁이 자금문제로 곤란할 때 가장 먼저 도움을 요청하는 인물이지만, 확실한 명분과 이익이 든다 생각되지 않으면 퇴짜를 놓는다고 한다.
그가 창업한 기업 홍익 정밀은 1차 대전 시점에 제국 유통망과 군수산업의 6할을 거머쥐고 대한 제일의 기업으로 성장해간다. 로하 외엔 자식이 없고 친척들도 못미더운 이들 뿐이라 시혁이 후계를 이어주길 바랬으나 군을 떠날 수 없는 사정도 알기에 결국 단념하고 전문 경영인들에게 맡기기로 한다. 대신 홍익 지분의 일부를 사위와 딸에게 증여했다.
- 최로하
위에 나온 어르신의 딸. 무척 당돌한 성격으로 상업에 종사하며 일찍부터 개화한 아버지의 영향으로 전통적 조선 여인상이 아닌 19세기 신여성상으로 묘사된다. 김시혁에게 처음부터 호감을 품고 있었고 김시혁도 마찬가지였으나 나이차 탓에 애써 외면하다 극동전쟁 종전 후 외전에서 서로 마음을 터놓고 김시혁과 맺어지는 데 성공했다. 직업은 영어와 불어를 가르치는 교사. 극동전쟁 때는 잠깐이나마 여군지원병으로 복무하며 한성에서 열린 승전기념 열병식에도 참여했다. 순 저질 발음인 김시혁과 달리 원어민에 가까운 불어를 구사한다. 김시혁이 동부전선으로 떠나기 직전 둘째를 잉태했고 이후 편지로 뱃속 아이가 아들이라는 소식을 전한다. 이 소식을 접한 원정군 장군들이 김시혁 아들이 장차 우리 병과로 와야 한다고 투닥거리는 게 소소한 웃음 포인트.
- 김민정
김시혁과 최로하의 고명딸. 2부 프롤로그에서 어린 시절 모습으로 첫 등장. 아버지를 무척 좋아하며 군복 입은 아빠 그림을 그리며 자기도 군인이 되고 싶다는 희망을 밝힌다. 어린 아이가 그냥 하는 말이라고 생각한 시혁은 별 생각없이 그래하고 마는데 바로 뒤에 시혁이 인생에서 가장 후회하는 일 중 하나라는 언급이 나와 정말 군인의 길을 걸을 것으로 보인다.[25] 부전자전이라고 아버지의 재능을 이어받았다는 묘사가 대놓고 나온다.[26]
- 김민
김시혁의 아들. 1차 대전 출발 직전에 잉태되어 아버지가 아직 유럽에 있을 때 태어났다. 이름 "민"(旻)은 의친왕이 지어주었다.
- 전봉준
동학 남접 지도자로, 김시혁이 최초로 격파한 적 지휘관. 예상을 깨고 선수 쳐서 이안-효포 가도로 뛰쳐나온 김시혁, 성하영의 친위영 병력을 격파하기 위해 2만에 달하는 대군을 이끌고 도전했으나 망치와 모루 전술에 얻어 맞아 참패하고 달아나서는 행적이 묘연해진다. 전주성에서 홍계훈에게 참패한 뼈저린 경험이 있어 호전적인 다른 접주들보다 훨씬 신중한 모습을 보이나 결국 동학이 전봉준 아래로 단일한 집단이 아니었던지라 통제력에 한계를 내비친다.
- 김개남
남접 접주. 지배층에 극도로 적대적이고 다른 접주들과 발 맞추는 대신 노골적으로 세력 확장에만 전념하는 수상한 행보를 보여준다. 전봉준이 고전하고 있을 때도 8천의 무리를 이끌고 따로 떨여져 세력 확장에만 골몰하고 있었다. 전봉준이 패퇴하고 실종된 다음에야 본거지를 버리고 북상, 15,000의 대병력으로 청주성을 위협한다. 청주성 인근 신탄진에서 한성구락부가 이끄는 친위영과 이두황이 지휘하는 장위영, 충청 지역 민보군의 연합 작전에 패배하고 종적이 묘연해진다.
- 이회영
방직공장사업을 하다 극동전쟁이 일어나자 김시혁에게 군수 물자를 지원하며 최대한 협조한다.
- 임병찬
극동전쟁 도중 의병을 일으켜 친일파 군수를 처형하고, 게릴라전을 벌인다.
- 엄복동
극동전쟁 후 한일간 국교가 어느정도 정상화되고 만주에 합작회사도 세워지자 홍보와 투자 개념으로 유행하던 자전거 대회에서 여럿 우승했다. 그러나 양국의 사이가 나빠지며 자전거 대회가 중단되었고, 생계가 팍팍해지자 자전거 도둑질을 하기 시작해서 나중에는 아예 전문 털이범이 되어 버렸다. 물론 잡히기도 많이 잡혔지만 과거의 유명세 덕분에 큰 처벌은 받지 않고 훈방되어 도둑질을 이어가던 와중, 지청천의 자전거를[27] 훔치다 걸려서 감옥행 혹은 노무자로 참전이란 양자택일을 하게 되었다. 결국 입대를 선택하여 1차대전 러시아 원정군의 자전거 보급 부대에 편성된다.
무난하게 노무자 생활을 하다 노보플린스크로 향하던 날, 한국군이 보급선을 노린 독일 기병대의 대대적인 습격을 받아 생사의 위기에 처한다. 예의 자전차 실력을 십분 발휘 노무단이 궤멸하는 와중에도 도피하는 데 성공했고, 길을 잃고 해매다 교전과 도주를 반복하던 의친왕, 이응준과 조우해 서로 도움을 주고 받게 된다. 의친왕에게 노보플린스크까지 호송을 부탁받아 인생에 큰 전기가 될 지 모를 기회를 얻었다.
이후 의친왕을 모시며 노보폴린스크에 도착한 뒤, 의친왕을 무사히 노보폴린스크에 호송한 것과 노보폴린스크 방면 전투에 향방을 가를 수 있도록 한 공로를 인정받아 다른 노무단 2명과 함께 훈장을 받는다. 동부전선에서 귀국할 때 지청천과 다시 만나며 귀국하면 의친왕에게 받은 은사금으로 가게를 열겠다는 포부를 밝혔으나 한편으론 동료들을 죽인 독일에 복수하고 싶다는 열망에 끓고 있었고 서부전선 파병이 결정되자 가게는 미뤄두고 전차병으로 자원한다.
- 이상재
정계에서 은퇴한 후 한성대학을 설립하고 이승만을 교수로 초빙한다.
3. 러시아 제국
모든 군사 교리는 해당 국가의 사회, 문화, 역사 전반이 아우러진 총체라는 설명과 함께 질을 뛰어넘어 양의 위엄을 선보이지만, 동시에 동맹국을 파트너가 아니라 종속국 취급하는 러시아 외교의 고질적인 문제점이 그대로 드러난다. 그래도 대한제국에 있어서는 1순위 우방이라 대한제국도 나름 러시아는 잘 돕고 있다. 1차 대전 발발 이후로 영국과 프랑스에 혐성 가득한 행보가 주목받으며 막무가내긴 해도 가식적이지 않은 러시아는 다시 보니 선녀같은 우방국이 되었다.러일전쟁 패전과 1차 대전에서의 고전만 보고 무능력한 장군들이 많았을 거란 일반적인 편견과 달리 언제든 초개처럼 목숨을 내놓을 수 있는 유능한 군인과 식견 있는 관료들이 많이 존재했으며 러시아 국민들도 전쟁 승리를 위해 기꺼이 희생을 감내했으나, 제일 위에 있는 멍청한 차르 부부와 그를 둘러싼 궁정귀족들 탓에 희생만 몇 배로 내고 쇠락하는 운명을 막지 못했다.
- 니콜라이 2세
러시아 제국의 차르로 여기서도 대역물에서 고려천자 2세로 대우받는 행보를 이어간다. 니콜라이의 성향을 잘 아는 김시혁이 이를 잘 이용해 모신나강 소총을 더 쉽게 들여오는 등 나름 잘 써먹기도 하지만, 무능한 차르답게 발암행보를 보이는 지라 독자들 사이에선 고종과 함께 2대 발암충으로 불린다. 자기가 군사적으로 무능하다는 것 정도는 자각하고 있는 고종과 달리 이쪽은 진심으로 자기가 뛰어난 전략가인줄 안다는 게 골때리는 부분.
일단 출진한 다음에는 작전에 관여하지 않는 고종과 반대로 황제 자리에서 할 수 있는 트롤링은 빠짐없이 저질러 러시아군에 피해를 누적시킨다. 보드카 중독 막겠다고 증류주 금지령을 내려 세수에서 막대한 비중을 차지하는 주세를 통째로 증발시켜 전쟁 수행능력에 타격을 입히는가 하면, 툭하면 전방에서 싸우는 군인들을 위한 기도회를 열어서 어느 부대가, 어디로 가서 싸울지 작전 기밀을 기도문에 섞어 술술 다 불어 버리고,[28] 한국군이 도착하기 전까지는 공세를 지양하고 최대한 전력을 보존해야 한다는 스타프카의 의견을 자기 체면을 구실로 무시하고 무리한 공세를 밀어붙여 군단 하나를 날려먹는가 하면 볼로디미르에서 독일군의 전면 공세를 막아내야 하는 김시혁에게 승전 축하 무도회 초대장을 보내기까지 한다. 그야말로 독일 첩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활약상.[29] 브루실로프는 황제가 기도회에서 기밀을 다 불어 버리는 사태를 막아보고자 최선을 다해 두리뭉실하게 보고를 뭉갠다. 본인의 잘못으로 피해가 누적되었는데 유약한 성정이 또 그걸 못 견뎌서 우울증이 발병했고 치료약으로 마약 성분이 든 차를 지속적으로 복용하는 바람에 슬슬 정신을 놓아가고 있다.
김시혁 덕분에 원래 역사의 브루실로프 공세에서 얻지 못 한 코벨을 수복하고 비스와 강을 사이에 두고 양분하는 구도를 구축했으나 간신히 얻어낸 성공에 만족할 줄 모르고 무능한 궁정귀족들의 요구를 받아들여 기어이 공세를 재추진, 러시아에 남은 마지막 훈련된 병력들을 비스와 강에서 이를 갈며 기다리는 독일군의 아가리 속으로 밀어 처넣는 악수를 두며 다시금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위험에 처하게 만들었고, 결국 하얼빈 남부 철도 운영권을 조건으로 한국군에게 다시 도움을 청한다.
요청을 받아들인 한국군이 코벨에서 승리하며 다시 위기를 넘겼으나 전선 유지에만 전념해도 모자랄 상황에 협상국과 루마니아가 요청한다며 기어이 또 공세를 추진하다가 나라가 뒤집어지며 머저리 짓에 종지부를 찍었다. 한국군이 귀환하며 남기고 간 시베리아 소총병 여단에 새로 모집된 한인 병사들을 더해 사단으로 재편하고 소모된 근위대 대신 친위세력으로 삼으려 했는데, 정작 그 조치 탓에 분노한 근위대가 혁명에 합류했다.[30] 그나마 본인이 키운 새 친위세력인 시베리아 소총병 사단의 분전으로 원역사처럼 바로 폐위당하는 운명은 피했다. 그러나 이후로도 똥볼을 차며 2차 혁명이 터지는 것을 막진 못했다.
- 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
니콜라이 2세의 황후로 부창부수. 원역사 그대로 무능한 전시지도자 차르 옆에서 무능한 황후 역할을 충실히 해낸다. 무능한 수호믈리노프를 전쟁장관으로 밀어줘서 전선 붕괴에 일조했고 이후로도 전선의 상황 따윈 아무래도 좋다는 듯 자기 친한 사람만 싸고 도는 행보를 보인다.
- 파벨 알렉산드로비치
알렉산드르 2세의 6남이자 니콜라이 2세의 숙부. 재혼을 귀천상혼으로 하는 바람에 프랑스에서 망명생활을 하다 1차 대전을 앞두고 귀국해 군적에 배치되어 근위대를 맡게 된다. 원 역사에서 제정이 망하는 순간까지 차르, 황후 알릭스와 가깝게 지낸 인물답게 그들과 완벽하게 똑같은 수준을 자랑한다. 러시아군에서 가장 잘 보전된, 그래서 반드시 아껴야 하는 예비대로 진정한 싸움법, 나폴레옹 전쟁 시대의 전투를 보여주겠노라 당당히 외치는 인물.
근위대 장교들을 몽땅 자기 같은 얼간이 귀족 장교들로 채워서 분위기를 조성한 탓에 근위대는 사병들조차 근거 없는 자신감에 빠져 있는 걸로 악명 높다. 한국군이 부크강 집단군을 잡아끌고 손실을 누적시켜 러시아군이 루츠크에서부터 쭉 밀고 들어갈 수 있는 찬스를 만들어줬는데 최중요 예비대인 근위대를 초전에 앞장 세워주지 않는다며 사령관 브루실로프에게 어깃장을 놓고, 그래도 들어주지 않으면 차르에게 이르겠다며 왈왈거린 끝에 공세의 한 축을 얻어낸다.
공세에 참여하게 해 줬음에도 주공이 아니란 사실에, 세련되고 우아한 싸움법. 군악대와 총검을 앞세운 나폴레옹 시대의 전투 방식을 구현할 수 없다는 사실에 불만을 품고 기어이 사령관 작계를 씹어먹고 강과 습지를 끼고 있는 오스트리아군 주방어선에 근위대 2개 군단을 끌고 가 들이받아버린다.[31] 덕택에 브루실로프가 세운 모든 공세 계획은 어그러져 공세 자체가 돈좌될 위기에 놓인다. 아군에 사전에 포격하기로 한 지역에 연락 한 번 없이 막무가내로 밀고 들어간 탓에 아군의 포격과 적의 화력을 한꺼번에 뒤집어써 러시아에서 가장 상태 좋던 예비대가 순식간에 녹아내리는데, 그런 상황에서도 자기 잘못은 전혀 없고 브루실로프가 잘못했다며 남 탓을 하다가 직접 왕림한 브루실로프에게 찍소리도 못하고 근위대 지휘권을 넘겼으며 공세 이후에도 스타브카의 줄기찬 해임 요구를 버티지 못해 형식적인 훈장 수훈 후 명예직으로 좌천된다.
그리고 이 똥볼은 1부의 러시안 스팀롤러를 기대하고 읽던 독자 전원을 경악시켰는데, 이게 작가의 창작이 아니라 원래 역사의 브루실로프 공세 때 벌어진 파벨 대공의 '실화'라는 것도 작가가 밝히면서 독자들은 일제히 지구작가를 원망하고 있다.[32] 브루실로프의 발 빠른 대처로 간신히 루츠크에서 오스트리아군을 몰아내는 데는 성공했으나 예비대가 지나치게 소모되어 도심지를 끼고 지연전을 벌이는 적을 밀어낼 병력이 없어서 포위, 섬멸에는 실패. 후퇴를 허용하고 코벨을 포위하는 데도 실패함으로써 조기 종전도, 즉 로마노프 왕조가 살아날 마지막 기회도 사라졌다.[33] 워낙 결정적이고 심한 트롤링이라 작중에서는 훗날 수많은 if를 낳은 루츠크 전투라고 설명되며 이쪽 세계 대체역사물은 파벨이 트롤링하지 않는 전개로 if를 돌릴 거라는 감상이 많다.
이래봬도 60만 일본군도, 20만 독일제국군도, 30만 오스트리아-헝가리군도 해내지 못 한, 김시혁을 쓰러뜨리는 위업을 달성한 인물이다. 당연히 러시아군이 코벨을 포위했을 줄 알았던 김시혁은 파벨의 머저리짓으로 코벨 근처에도 못 갔다는 소식을 듣고 경악해 휘청이며 몸을 가누지 못했다.
이후 근위대가 혁명에 가담하자 황실은 러시아에 연고가 없어 차르의 신뢰만 믿고 바라볼 수 밖에 없는 외국인들로 근위대를 채웠고 그 근위대의 지휘관으로 믿을만한 장군들이 없어 다시 기용되었으나 브루실로프 공세의 막판을 말아먹은 악명이 사라진 건 아니라 러시아 민심의 분노만 키우는 역효과가 나버렸다.
- 세르게이 사조노프
1차 세계 대전 당시 러시아의 외무대신. 고전하는 전황을 타개할 대책으로 일본에 관동주 매각을 조건으로 지원을 얻어내고, 대한제국에는 남만주 영유권 인정을 대가로 원정군 파견을 요구하는 방안을 고안해 폭풍을 불러 일으킨 장본인.
- 알렉세이 쿠로팟킨
한국의 소총 판매 요청건을 씹으려던 전쟁성 장관이 해임되고 그 뒤를 이어 전쟁성 장관이 된다. 이후 극동전쟁 시기에 원역사대로 본인이 직접 만주로 가서 전쟁 지휘를 하게 된다. 원역사와 달리 대한제국이 확실히 러시아 편에 붙어 일본 1군을 붙들어 준 덕분에 뤼순이 원역사보다도 더 길게 버티는 등 수월하게 방어전을 진행했고 이어지는 봉천 전투에서도 원역사와 달리 승리를 거머쥔다. 1차 대전 이전에 퇴역하고 무능한 수호믈리노프가 황후 인맥으로 전쟁대신이 되면서 러시아군은 극동전쟁의 전훈을 교리로 체계화하는데 실패한다.
타넨베르크 전투 패전의 충격으로 수호믈리노프가 해임되자, 이전 극동전쟁에서의 전훈을 다시 살리고자 하는 군부 개혁의 일환으로 5군 사령관으로 다시 복귀해 북부전선군을 책임진다. 발트 방면에서 힌덴부르크에 맞서 지연전을 벌이다 흥분한 하급 지휘관 제어에 실패해 패전을 겪지만, 한국군의 렘베르크 점령으로 힌덴부르크가 패잔병 추격에 온전히 집중할 수 없게 되면서 수습에는 성공했다.
병력을 수습한 뒤에는 브루실로프의 남서집단군이 재편과 공세에 전념할 수 있도록 힌덴부르크군 10만을 최대한 잡아끄는 역할을 수행한다. 이후 브루실로프 공세가 성공하면서 지연전 이전의 영토를 대부분 수복하나 비스와 강의 기적 때 다시 한 번 밀려난다. 탈린까지 내주고 에스토니아 끝자락인 나르바까지 밀렸으나 패주하는 병력을 기어이 수습해 전선 붕괴를 막았고 코벨의 승전으로 힌덴부르크가 물러설 때까지 버텨내는 데 성공한다. 전술적 역량은 브루실로프, 미쉔코보다 한 수 아래이나 용감하고 악착같아 극한까지 몰린 상황에서도 뚝심 있게 버텨내며 힌덴부르크를 질리게 만들었다.
- 알렉세이 폴리바노프
수호믈리노프 후임 전쟁대신.
- 드미트리 푸차타
원역사와 마찬가지로 한국에 파견된 러시아 군사고문단의 수장. 프랑스 군사고문단과 자기 휘하 장교들과 함께 대한제국군의 근대화에 공을 세우며 그 공을 인정받아 극동전쟁 시기에 준장으로 승진하며 전쟁 중에 한국에 남아 군사작전 수행을 도왔다. 2부에서도 1차 대전 참전을 놓고 양국간 합의를 위해 대한제국을 방문. 김시혁과 서로의 조건을 조율했다.
- 파벨 미쉔코
제1시베리아 군단을 지휘하는 러시아 육군 소장. 자신의 상급자인 자술리치 중장보다 유능하다고 평가받는다. 만주군 총사령관 쿠로팟킨이 동부지대를 지휘하는 자술리치가 졸전을 거듭하자 해임시키고 파벨 미쉔코에게 전선을 맡길 정도. 개전 초기 가장 먼저 평양 방면 전투에 투입되어 전선을 잘 막았으며, 이후 뤼순 공방전에서 제2군의 후방을 들이치며 원래의 역사에서 보여준 것 이상의 활약을 펼친다. 마지막 전투인 봉천 전투에서도 그리펜베르크가 지휘하는 제2만주군의 예하에 소속되어 노기 마레스키가 지휘하는 제3군의 후방을 들이쳐 승부에 쐐기를 박았다. 그가 이끄는 기병대는 일본이 전쟁 내내 굉장히 껄끄러워한 상대였는데, 만주 전역에 참전하기 전에 한국군과 어깨를 맞대고 싸우며 그들의 전투 방식을 어느 정도 도입했기 때문이다. 극동전쟁 당시 갓 30을 넘긴 젊은 장군이라 새로운 것에 열린 자세를 견지했고 본인도 비주류인 우크라이나 출신이다보니 동양인 김시혁과도 스스럼 없이 지냈다.
2부 시점에선 대장으로 진급해 시베리아 야전군을 이끌고 김시혁의 구주원정군과 함께 싸워 졸로치와 렘베르크를 함락시키는 공을 세운다. 이후 한국군이 볼로디미르를 함락하고 부크강 집단군과 맞서는 사이 남쪽 렘베르크에서 올라오는 보급선을 사수하며 보트머가 지휘하는 독일남부군-오헝 제2 야전군 잔존 병력의 공세에 맞섰고 코벨 점령 이전까지 버티는데 성공했다. 이후 코벨로 올라와 코벨 서부에서 공격해오는 오헝-불가리아 연합군을 칼닙카 전투에서 성공적으로 막아낸다.
- 로만 콘트란체코
러시아 공병의 희망으로 꼽히는 명장. 1902년 대한으로 파견되어 평양 남부에 콘크리트 요새 지대를 축조하고 뤼순으로 돌아갔다. 너무 이른 개전으로 완성에 한참 못미친 뤼순의 방어망을 지휘해 일본군에게 막대한 손실을 강요했으나 끝내 전사한다.
- 오스카르 그리펜베르크
결정적인 한 방을 위해 차르인 니콜라이 2세가 극동 방면으로 급파한 러시아 육군 대장. 예하에는 오데사 방면에 주둔하던 제8군단을 비롯해 10만 여 명의 러시아 정규부대가 소속되어 있다. 러시아군 장성 중에서 대한제국군의 방식에 주목하고 그것을 벤치마킹하여 1개 군단을 재편성했다. 이후 '차르의 망치' 라는 별명에 걸맞게 봉천 전투에서 노기 마레스케가 이끄는 제3군을 포위했으며 원래 역사와는 달리 승전을 거둔다. 극동전쟁 이후에 퇴역하고 1차 대전 이전 세상을 떠났다. 그와 쿠로파트킨이 군을 떠나고 무능한 이들이 군부 중추에 자리잡으면서 러시아가 극동 전쟁에서 얻은 교훈은 교리로 계승되지 못하고 사장되는 듯 했으나 타넨베르크의 충격으로 인해 러시아 군부가 개혁을 결심하며 다시 살아날 여지가 생겼다.
- 지노비 로제스트벤스키
그리펜베르크와 마찬가지로 니콜라이 2세가 결정적 한 방을 위해 급파한 발트 함대의 지휘관. 원역사와 다르게 봉천 전투의 승리와 대한제국군의 분투로 일본 육군이 쪼그라들어 서두를 필요가 없어 보였지만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의 독촉으로 원 역사와 비슷하게 대한해협을 통해 블라디보스토크로 가려 했으나 대한제국이 필사적으로 정보를 알려온 덕분에 대한해협 루트를 포기하고 쓰가루해협 루트를 고르며 쓰시마 해전을 치르지 않게 되었다.
- 페트로 베조브라조프
극동전쟁 시점 블라디보스토크 순양함대 지휘관으로 대한제국 해군과 함께 일본의 수송선단을 공격해 여러 차례 승전을 거두었다.
- 알렉세이 브루실로프
러시아 제국의 명장으로 1부 시점에서는 해외 유학중이라 나오지 못했고 1차대전을 다루는 2부에서 처음 등장했다. 2부 시점에서 남서전선군 사령관으로 복무 중이며 타넨베르크 전투 이후 무너진 러시아군을 재건하기 위해 분투 중인데, 이때 그리펜베르크가 남긴 유산인 한국군 보병조전을 유용하게 활용한다. 1916년, 직접 조우한 김시혁을 비밀 작전회의에 대동하는 등 예우해준다. 러시아군에서 가장 열린 안목을 지닌 장군으로 공세를 앞두고 적의 종심을 최대한 파고들어가기 위해서는 열강 중 최약체인 중포 전력을 반드시 보완할 필요가 있음을 절감, 일리야 무로메츠 폭격기를 공중포병으로 활용하는 계획을 세운다.
그런 그에게 김시혁이 미래 항공전은 항공우세를 기반으로 한 세력과 열세를 인정하고 공중접근거부를 기반으로 한 세력으로 나뉘게 될 것이란 개념을 제시해주자 항공우세를 선택, 폭격기, 정찰기, 전투기를 한데 묶은 기초적인 스트라이크 패키지를 도입한다.
버차니의 필사적인 방어로 루츠크 점령에 실패하자 김시혁을 직접 찾아가 독일군을 끌어줄 것을 부탁하고 장갑차 부대를 지원해준다. 한국과 독일이 코벨 남부에서 사투를 벌이는 사이 러시아에 잔존한 훈련받은 인력을 최대한 끌어모아 소모된 남서집단군을 단기간에 30만 대군으로 재편하는 데 성공한다. 낙후된 제국의 군대로 한국군의 전투법을 온전히 구현하는 건 불가능함을 인정하고 어느 정도 따라잡을 수 있는 포병 교리만 최대한 받아들여 오스트리아군의 방어선을 두들기기로 하고, 러시아의 강점인 압도적인 인력을 적극 활용, 선봉에 선 부대를 피해를 감수하고 인력의 파도로 덮는 카르파티아 전술을 전선에 구현하려 했으나 파벨 대공의 돌발행동으로 작계가 망가져 당혹해한다.
여느 러시아군 장성들과 달리 병사들 목숨을 가벼이 여기는 성향은 아니나, 근위대를 버림패로 쓸 수 밖에 없는 현실을 받아들이고 본래 모루 역할로 예정되어 있던 8군을 예비대로 전환, 2개 근위군단 11만을 통째로 미끼로 써서 오스트리아 2개 군단을 잡아끌고 12기병사단과 3군단으로 텅 빈 키베르트를 돌파, 합스부르크의 퇴로를 끊고 포위 섬멸할 계획을 세운다. 직접 근위대 지휘소를 찾아 파벨 대공의 지휘권을 박탈하고 근위대 귀족 장교들에게 너희 목숨으로 책임을 지라 고상하면서도 명료하게 설명하는 카리스마가 압권.
이후 코벨을 되찾은 뒤 그곳에 사령부를 설치해 주둔하고 있다가 차르가 입안한 무리한 공세 계획에 기반한 피의 가을로 정예병이 갈려나가가고 코벨이 무너질 위기에 쳐하자 윗선에 이를 바득바득 갈다가 한국군이 왔다는 소식에 성자들의 군대가 왔다며 안도했고 이들과 함께 코벨을 방어하는데 성공한다.
이후 러시아 혁명이 터지자 이미 전쟁에 환멸을 느끼고 있었고, 독일에 대해 굴종적으로 나온 임시정부에게 불만을 품어 볼셰비키를 지원한다.
- 칼 구스타프 에밀 만네르헤임
12기병사단장. 근위군단 11만을 통째로 던져 시간을 끄는 사이 비어버린 북쪽 측면의 공백을 메우고 키베르트 시를 돌파하라는 브루실로프의 명령을 받는다. 1914년까지 몸담았던 근위대가 형편없는 반동 집단이 되어 소모되는 현실에 씁쓸해 하면서도 사령관의 명령을 빈틈없이 수행한다. 이후 코벨 전투에서 김시혁에게 합류해 그를 수행한다.
- 그리고리 라스푸틴
우울증에 시달리며 정신을 놓아가는 니콜라이 2세 곁에 서있는 장면으로 첫 등장. 루마니아의 고전으로 추가 파병 주장이 솔솔 피어 오를 때 다시 등장해 추가적인 전선 확대를 반대하는 상식적인 면모를 보인다. 실제로 라스푸틴이 전쟁에 부정적이었고, (차르의 위신 저하라는 부작용과 별개로)정치에 미친 영향력은 보잘 것 없었다는 점을 고증한 것. 정작 니콜라이를 둘러싼 궁정귀족들은 저런 놈 말 무시하라며 똥볼을 차고 있는지라 독자들이 살다살다 라스푸틴이 정상으로 보이는 건 처음이라며 혀를 내두르는 중.
- 미하일 드로즈돕스키
9군에서 11군을 지원하기 위해 보낸 64사단 참모장. 분견대를 이끌고 두보브를 지킨다. 그러던 중 사령부에서 철수 명령이 떨어지자 거부하고 결사항전하려 했으나 한국군이 지원군으로 왔다는 소식을 듣고 분견대의 생존자들을 최대한 수습해 두보브에서 철수한다. 이후 두보브를 되찾으려는 시베리아 소총병 여단에 합류했으며 가볍게나마 독가스 중독 증세를 앓고 있음에도 자청해서 전장에 나서 스톰트루퍼 연대의 후방을 습격해 그들이 철수하게 만든다.
- 알렉산드르 케렌스키
러시아 제국 임시정부 총리. 원역사대로 임시정부를 이끌지만 상황이 악화되는 것을 막지 못한다.
- 라브르 코르닐로프
상트페테르부르크 군관구를 지휘하던 임시정부군 총사령관. 겨울궁전에 쿠데타를 일으켜 무너진 질서를 회복하고 빨갱이를 때려잡겠다는 구호를 내걸고 공격했지만, 근위군단과 시베리아 소총병 사단에 의해 별 다른 전투 없이 삽시간에 붕괴된다. 이 쿠데타 탓에 군 사기가 떨어지며 방어선이 무너져 볼셰비키 군대가 상트페르부르크 입구까지 밀려들어오게 된다.
3.1. 한국계 러시아인
- 최재형
김시혁의 장인인 최씨 어르신과 사업 파트너로 함께 홍익 정밀을 이끈다.
- 김상겸
원 역사에서의 초대 5여단장이며, 작중에서는 시베리아 소총병 여단 참모장이다. 러시아 사관학교 출신으로 러시아군 전술에 젖어있는 탓에 김시진과 충돌이 많다.
- 최운산
시베리아 소총병 여단 1대대장. 코벨 전투에서 오스만군 61보병연대장의 항복을 받아낸다.
- 오하묵
시베리아 소총병 여단 수색중대 2소대장.
3.2. 볼셰비키
4. 일본 제국
작중 메인빌런 포지션 국가. 같은 대체역사 장르의 다른 작품에선 호구 취급받는 일본 제국이지만 여기서는 대공황과 관동대지진, 군부의 폭주를 거치며 본격적으로 망가지기 이전이라는 점을 착실히 고증해서 말석으로나마 열강 자리에 앉은 것이 괜히 앉은 것이 아니라는 점을 여실히 보여준다.2부 시점서도 여전히 확장을 노리고 있으며 결국 대한제국이 러시아가 일제의 확장을 용인하지 않는걸 댓가로 1차대전에 참전하게 되는 원인이 된다.
4.1. 황실
- 다이쇼 덴노
치머만 전보를 협상국에 알릴 것인지를 두고 갑론을박하는 관료들 사이에서 등장. 아버지 메이지 덴노와 달리 존재감이 거의 없다고 은연 중에 무시당하는 인물이나 일본이 주변국과 비교해 어느게 낫고, 어느 게 열세한지 정확하게 파악할 안목은 충분하다. 치머만 전보를 뭉개야 한다는 군인 관료들의 의견을 조리 있게 반박하며 최소한 영국에는 통보해 줘야 함을 지적한다.
아시아 국가끼리 뭉쳐아한다고 생각하면서 한국과의 관계를 신경쓰고 있어서, 극동전쟁 때도 질책했고 황실 간 혼인을 추진해본 적도 있었다고 한다. 덕분에 일본 내 강경파들은 덴노를 은근히 탐탁치 않게 생각하는 듯. 덴노 본인도 군부가 전에 막부를 날려버렸듯이 자신도 갈아치울 수 있음을 생각하며 그들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다.
4.2. 군부
4.2.1. 육군
- 오야마 이와오
원역사대로 육군 총사령관으로서 만주에서 러시아 군과 싸운다. 그러나 원역사에 없던 대한제국군의 항쟁으로 1군의 발이 묶이며 뤼순이 원역사보다 2달 더 버틴 것으로 일이 꼬이기 시작했고 그럼에도 뤼순을 먹었으니 봉천을 밀면 된다고 봉천 전투를 벌이지만 한국식 보병전술을 도입한 그리펜베르크에게 밀려 패하고 멘탈이 작살난 채로 뤼순으로 퇴각한다.
- 도조 히데노리
1군 산하 중장으로 1군 장성 중 유일한 정상인 포지션. 유격대 대처 건이나 한국의 달라진 모습에 대해 상식적인 대처를 요구하는 등 정상적인 요구를 하지만 한국을 무시하던 윗선들에게 다 씹히고 그리고 큰 코 다친 윗선을 항상 비웃는 것이 대표 레퍼토리다. 패전이 확정된 후 원산에서 김시혁에게 직접 자신의 일본도를 건내주고 항복했으며 다른 장군들처럼 자결하는 대신 한국군을 본따 일본군을 개혁하기 위해 각종 선진적인 청사진을 내놓았다. 따로 구해 읽어 본 김시혁조차 감탄했을 정도로 합리적이고 선구적인 개혁안이었으나 육군을 잠식한 야마가타 번벌에 의해 비겁자로 몰려 모욕과 암살 위협에 시달리다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채 쓸쓸히 퇴역, 군사서적을 출간해 근근히 먹고 살다 1차 대전 발발 무렵 사망. 조선과는 절대 싸우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
침략자인 일본군 지휘관 중 유일하게 한국군 장성들에게 호평을 받았으며 김시혁도 그가 전역을 이끌었다면 훨씬 어려웠을 것이라 순순히 인정한 일본 최고의 군사이론가였으나 일본은 스스로 거위 배를 갈라버렸다.
- 가쓰라 다로
극동전쟁 시기 일본 총리. 이토 히로부미와 함께 대한제국을 병참기지화하려 공작을 펼쳤으나 실패하고 이후 전쟁도 패전으로 끝난다.
- 데라우치 마사타케
극동전쟁 시기 육군대신이자 원역사의 초대 조선 총독. 대한제국을 은연 중에 깔보고 있었지만 극동전쟁에서 일본군이 대한제국군에게 거하게 털리자 할 말을 잃게 된다. 종전 이후 이뤄진 고위 지휘관 할복 러쉬를 용케 피했는지 야마가타가 사이온지에게 차기 총리로 데라우치를 밀어달라는 요청으로 언급되어 원역사보다 이른 시기에 총리가 되었지만 대한제국이 호법전쟁에서 호법군을 도와 위안스카이를 몰락시키고 브루실로프 공세에서 독일군을 떡바르는 등 잘 나가는 덕에 골머리를 썩고 있다. 이후 결국 총리직에서 사퇴한다.
- 구로키 다메모토
러일전쟁 당시 1군 사령관. 원역사와 달리 대한제국이 일본에 선전포고 하면서 한반도 전선으로 파견된다. 그러나 상대가 미래인인 김시혁인 만큼 대한제국의 준비도 철저해 고전을 면치 못했고 거기다 삼남지방에서 의병들과 지방 진위대가 유격전을 벌이자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삼광 작전을 펼쳐 자신이 직접 지휘하나 완전한 토벌엔 실패했고 한성이 수복당한 시점에선 조선 주차 일본군 대부분이 흩어지고 본인도 포위된다. 투항을 거부하고 완강하게 저항하다 끝내 할복했으며 그가 사용한 검은 역시 자결한 하세가와의 검과 함께 장충단에 모셔진 전사자들의 비석 앞에 바쳐진다.
- 노기 마레스케
러일전쟁기 3군 사령관. 원역사보다 훨씬 꼬여버린 상황에서 3군을 지휘하지만 한국 전술을 도입한 러시아 8군단의 공격을 직격으로 쳐맞으며 파국을 맞게 되며 본인 역시 포로로 잡히게 된다. 이후 외전에서 패전의 책임을 지고 할복했다고 언급된다. 원역사에서는 메이지 천황 사후 할복했으니 원역사보다 빨리 죽은 것이다.
- 야마가타 아리토모
원 역사 일본 유신지사 계의 거물. 군부에서 십수 명의 장성들이 배를 가르는 동안, 그는 민심을 진정시키는 연설을 했는데, 실체는 외무성도 책임을 져야 한다는 면피면책성 발언으로서 유신 테러를 사주했다. 내 돈은 내 돈, 남의 돈도 내 돈이란 신조의 소유자라 한국을 바짝 경계하면서도 한국이 주는 뇌물은 넙죽 넙죽 다 받아 챙기는 이중적인 면모를 보인다.
- 노즈 소좌
원역사에서 주한일본공사관 무관으로 근무하며 한국군에 무기를 팔아주거나 군사유학생들을 지원해주는 등 도움을 준 인물. 여기서도 김시혁이 군제 개혁을 할 당시에 먼저 접근해 30년식 소총을 공급해주겠다며 미쓰이 물산과 연결해주기도 한다.[34] 극동전쟁 이후 친한 인사인데다 한국에 자국 무기를 넘겼다는 이유로 군에서 강제전역 당했으며 이후 미쓰이 물산에 취직했다. 다행히 한국에서도 노즈 소좌와 미쓰이 물산을 "대체로 무해함"이라고 할 정도로 적대적으로 보지 않아서 미쓰이 물산의 한국 전담사원으로 순조롭게 정착했으며 그 덕에 쑨원을 지원할 대상으로 뽑히기도 했다.
한국 기록국이 일본 내각을 데라우치 내각에서 민간 내각으로 바꾸기 위한 공작을 펼칠 때 야마가타 아리모토에게 뇌물을 주며 협조했으며 민간 내각으로 바꾸는 데 성공했으나, 이후 대일 첩보망이 붕괴되고, 미쓰이 물산 담당자들이 물갈이 되면서 그의 행방도 묘연해졌다.
- 하세가와 요시미치
1부에서 극동전쟁 당시 경성 주차군을 이끌었다. 극동전쟁에서 점점 밀리는 조짐을 보고 전전긍긍하고 있다가 본국에서 발송한 통감 임명 서한을 보고 어이 없어한다. 그래도 아득바득 한성은 지키려하지만 김시혁의 기동전과 제2전선에 말려 실패. 고립된 상황에서 투항을 거부하고 완강하게 저항하다 할복했으며 그가 사용한 검은 역시 자결한 구로키의 검과 함께 장충단에 모셔진 전사자들의 비석 앞에 바쳐진다.
- 우메자와 미치하루
일본 좌관급 중 도조 히데노리랑 비슷한 포지션. 극동전쟁 때 제4근위연대장이었다가 평양 공방전 이후 제1근위여단장으로 영전하고 장성이 되지만 종전까지 살아남지 못하고 홍범도에 의해 문산에서 전사한다.
- 다나카 기이치
1917년 시점 일본 육군대신. 영국으로부터 서부전선 참전 요구가 오자 여러가지 이유를 들어 참전에 반대한다. 이후 연합국으로부터 압박이 오자 자원병 6,000명으로 퉁치려 했으나, 영국에게 전후 아시아 질서를 아예 재편할 수도 있다는 경고를 듣고 자원병으로 퉁치려던 계획을 포기하고 야마가타 아리모토에게 조언을 듣고, 정부에 반항적이고 경제적으로도 가난한 관동에서 5만을 징발해 파병하기로 한다.
- 우가키 가즈시게
일본의 참전 회피에 분노한 영국의 조치에 군수뇌부가 당황하던 중 이 사태를 넘길 대책을 말하는데, 그 대책이라는 게 퇴역군인, 아시아주의자, 막 졸업한 소장파 장교들로 구성된 자원병 2,000명을 파병하자는 것이었다.
- 가미오 미쓰오미
칭다오 전투에서 연합군을 지휘했으며, 서부전선 파병이 결정되자 서부전선 일본군 지휘관이 된다. 실권은 거의 없고 한프미군 상대로 정치질하는 헤이그 원수의 딸랑이 애완견 신세.
- 야마구치 케이조
김시혁을 패배(?)시킨 유일한 지휘관. 경복궁 전투 당시 11연대 2대대장으로, 마지막까지 저항하던 김시혁을 기절시키고 사로잡았다. 경복궁 전투와 청일전쟁에서 연달아 공을 세우고 극동전쟁 앞두고 11사단장으로 영전해 순탄한 군생활을 이어갔으나 극동전쟁이 일본의 대참패로 끝나자 뤼순 공방전에서 입은 손실을 구실로(실제론 김시혁을 살려줬다는 이유로) 면직당했다. 하릴없이 지내다 지원병 여단을 이끌, 능력있는 예비역 장성을 물색하던 군부 눈에 들어 자원병 여단 여단장으로 군문에 복귀하고 김시혁과 재회한다.
- 도조 히데키
서부전선에 파병된 한국군에 배속된 일본 관전무관단의 일원으로 등장. 극동전쟁에서 장교가 너무 많이 죽어버린 탓인지 이립 33세에 대좌 계급장을 달고있다.[35] 원 역사의 도조도 젊은 시절엔 부하들을 끔찍이 챙기고, 나름대로 합리적인 지휘관이었는데, 역사가 바뀌며 그런 면모가 더 강해져 원래 역사를 아는 김시혁은 깊은 인상을 받는다.
- 이시와라 간지
일본군 자원병 여단의 참모. 육사 차석으로 지원병 여단 지휘부를 소장파로 꾸리면서 원정에 합류했다. 일본 육군 소장파 대부분이 그렇듯 김시혁을 열렬히 숭배한다.
- 무타구치 렌야
일본 지원병 여단의 일원인 햇병아리 대위로 등장. 지원병 여단의 실태와 앞으로의 대처 방안을 설명하는 브리핑에 참석해 처참하다는 말로도 모자란 지원병 여단의 훈련도를 그나마 정예한 병력들을 모아 자동화기를 몰아준, 특공중대 편성으로 보완하는 차악에 대해 설명한다. 렌야가 희대의 졸장으로 남게 된 가장 큰 원인은 이렇다 할 전투지휘 경력 없이 행정직으로 돌았던 인물이 파벌을 타고 출세해 버려서인데 위관 시절부터 1차 대전 최전방에 내몰려 다르게 성장할 여지가 생겼다.[36]
4.2.2. 해군
- 야마모토 곤노효에
극동전쟁 시점 일본제국 해군대신. 극동전쟁 때도 대표 강경파로 나서며 대본영이 그렇듯 한국을 무시하고 있다. 그러나 극동 전쟁이 예상과 전혀 다른 전개로 가면서 서서히 불안감을 느끼고 있었고 결국 그 불안은 현실이 되고 만다.
- 도고 헤이하치로
원역사대로 극동전쟁 때 연합함대 총사령관을 맡고 있다. 대한제국군에게 털리던 육군과 달리 전력을 그런대로 유지 하고 있었고, 만주와 한반도에서 육군이 사실상 소멸되자 이제 최후의 희망은 자신들 뿐임을 알고 발트함대를 격파해 완전한 최악만은 면하고자 한다. 그러나 원역사와 달리 대한제국의 정보 전달로 발트함대가 츠가루 해협으로 향하며 함대결전도 못해보고 무기력하게 패배를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 가토 도모사부로
1917년 시점 일본 해군대신.
4.3. 내각
- 이토 히로부미
역시나 원역사대로 미쳐 돌아가는 일본 속에서 나름 정상인으로 묘사된다. 시대가 시대라 제국주의적 면모는 있지만 노회한 여우라 불리는 만큼 외교술 등에서 뛰어난 면모를 보이며 외교 협상장에 모습을 자주 보인다. 그러나 극동전쟁에서 패하면서 내각에 속해있던 그의 입지가 흔들리기 시작했고 결국 1909년에 원역사와 비슷하게 암살당하는 것으로 작중에서 퇴장한다. 다만, 원역사에선 안중근에게 암살당했다면 여기서는 같은 일본인의 손에 암살 당했다.
- 사이온지 긴모치
이토와 마찬가지로 일본 안에 보이는 몇 안되는 정상인. 이토 사후 내각총리대신이 되어 폭주할 기미가 보이는 군부를 그나마 억누르고 있다. 그러나 차기 총리로 군부에 속한 데라우치가 확정되면서 결국 일본이 폭주하는 길로 향하는 것을 완전히 막지 못했다.
- 하라 다카시
데라우치 내각 총사퇴 이후 일본 총리가 되었다.
4.4. 기타
- 스기무라 후카시
1부 초반 주한 일본 서기관으로 김시혁을 경계했다. 그러나 김시혁의 1차 친위 쿠데타가 성공하자 분노한 일본 내각에 의해 구금된다.
- 하야시 곤스케
극동전쟁 직전 주한 일본 공사로, 고종을 꼬드겨 대한제국을 일본의 병참기지로 만들려고 하였으나, 김시혁의 2차 쿠데타로 물거품이 된다.
5. 프랑스 제3공화국
러프동맹의 인연 덕에 대한제국과 맺어진 또 하나의 우방이며, 열강이지만 아직 산업화 등이 늦어 도움의 요소가 적은 러시아와 달리 제대로 된 도움을 주는 사실상 진정한 우방.[37] 실제로 프랑스도 대한제국을 나름 수평적 파트너로 생각한다는 묘사가 글 곳곳에서 보인다. 다만 이쪽도 2부 시점을 보면 제국주의 열강으로서의 혐성이라는 한계를 뚜렷이 보여주는 까닭에 러시아가 선녀같다는 의견도 독자들 사이에선 나오는 편. 그러나 영국의 서부전선 개입이 확정된 후 혐성과 협잡질이 가히 배후중상 수준에 달하면서 상대적 천사가 되었다.- 페르디낭 포슈
프랑스에서 대한제국에 파견한 군사고문으로 첫 등장. 처음에는 진급 길도 사실상 막힌 터에 먼 타국으로 좌천되었다 생각해 좌절해 있었으나 김시혁을 만난 이후 기운을 얻어 열심히 일하게 된다. 이후 김시혁과 함께 엘랑 비탈을 기반으로 하여 '러시아의 육신, 프랑스의 정신'을 가진 군대를 육성하기 위해 많은 도움을 주며,[38] 특히 포병과 관련된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 이후 전쟁으로 인해 군사고문 임무가 종료되자 귀국길에 올랐으나, 귀국 도중 극동전쟁 관전무관 자격으로 다시 한국에 돌아오고, 한국의 현대식 보병 전술을 보며 만족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후 외전에서는 다시 귀국해 육군대학 교장으로서 후임들을 양성하며 자신이 한국에서 본 신전술을 퍼뜨리고자 했으나, 프랑스 장교들이 그걸 어설프게 받아들이고 있는지라 골머리를 썩던 중, 조프르에 의해 제20군단장 보직에 앉게 된다. 처음에는 실전 경험이 없어 거절했지만 곧 군단장이라면 자신이 뭔가 해볼 수 있다고 달리 판단해 보직을 받아들이게 된다. 이후로도 김시혁과 꾸준히 편지로 교류하며 전훈과 현대식 전술을 받아들이고 한국에서 개발한 강습소총과 105mm 곡사포를 도입해 이를 기반으로 독일군을 어찌저찌 막아내며 무훈을 쌓는다.
헤이그와 조프르가 강력하게 밀어붙인 솜 전투에서 영국군이 어마어마한 피해를 입은 가운데, 포슈의 북부집단군은 대한식 제병협동교리를 바탕으로 방어선을 일부 돌파하는 성과를 올리고 원 역사에 비해 사상자를 5만여 명 줄이는데 성공한다. 하지만 헤이그를 대신해 악화된 협상국 간의 균열을 채울 정치적 희생양으로 지목되어 육군참모총장으로 좌천된다.[39] 그러나 그가 프랑스군 위주로 판단하지 않고 정치적 기반이 미약하다는 것에 주목한 영국 측의 제안으로, 최고 전쟁 사령부의 사령관으로 선택된다.
- 빅토르 콜랭 드 플랑시
주한프랑스공사로 여기서도 한국을 돕는 대표 조력자 중 한 명이다.
- 조제프 조프르
2부 프롤로그에서 등장하는 프랑스군 참모본부장. 대한제국에서 김시혁과 함께 개발한 전술을 도입하려던 포슈의 계획을 지지해주고 있으며 그를 20군단장에 임명해 나름 힘을 실어주려 한다.
- 폴 두메르
1901년 한성 대타협 당시 프랑스 사절단 대표.
- 필리프 페탱
포슈와 함께 프랑스군을 대표하는 지휘관. 병사들의 지지와 인망 면에서는 포슈보다 월등하다. 야전 원수로서 역량은 탁월하고 시각도 열려 있어 포슈가 정립한 최신 제병합동 교리를 받아들여 성과를 냈으나, 협상국이 아닌 프랑스군의 승리를 우선한다는 문제점이 있다. 그래도 공격정신 밖에 없는 헤이그와 달리 군사적으로 유능하다보니 합리적인 근거를 들어 설명하면 받아들이긴 한다.
- 막심 베이강
포슈의 측근으로 영국군과 연락 및 작전 협조를 위해 원정군 사령부로 파견되었다. 영국군이 대규모 작전에 익숙하지 않아 프랑스군과 발을 맞추기 어렵다고 평가하며 영국군의 능력을 불신한다. 마르세유에 한국군이 도착하자 이들을 맞이한다.
- 조르주 클레망소
전쟁장관 대리로 미국 전쟁성 주도로 이루어진 워싱턴 회의에서 대한제국 대표인 민영환과 함께 프랑스 대표로 참석한다. 온 프랑스가 불타는 한이 있어도 독일에 맞서야 한다는 초강경파로 카포레토 전투로 협상국 전체가 공황 상태에 빠졌을 때 비장의 카드로 등판해 전시 총리가 된다. 총리가 되자마자 화친파와 친독파를 국가반역죄로 체포해 정국을 일소하고 전시 체제에 도움이 되지 않는 잡다한 파벌싸움도 모두 정리하고 일원화시켜 오직 독일과 싸우는 데 모든 것을 맞춘다. 대한제국 원정군을 위해 여러모로 편의를 봐주면서도 한국에 이미 파병하기로 한 10만 외에 남프랑스를 지킬 추가 파병을 요구하며 대신 프랑스와 대한제국간 동맹을 제안한다.
- 비달 대령
프랑스 군사 고문단 포병 교관 소령으로 첫등장하여 한국에 여러 도움을 주었다. 2부에서는 대령으로 전역해 로노사 소속이 되어 김시혁과 고종에게 르노 FT 도입을 제안한다.
6. 독일 제국
'전술적'인 면에서는 명실상부 유럽 최강이자 김시혁도 승패를 장담하지 못 하는 유일한 국가. 본작에서는 흔히 악의 제국 이미지 때문에 실제 역량보다 과대평가되는 나치 독일군보다 군축 후유증을 겪지 않았고, 처음부터 총력전으로 달려드는 열강들을 양면으로 맞상대한 제2제국 독일군이 전술적으로 훨씬 뛰어난 군대라는 점이 강조된다.주도적으로 공세에 임하는 상황이건, 기습을 받아 밀리는 상황이건 가리지 않고 기존의 적들과는 차원이 다른 움직임을 보여준다.
이런 독일군의 가장 큰 특징은 '전쟁은 과학'이라는 명제 아래 진행되는 지독할 정도의 통계, 자료 수집과 이에 기반한 분석. 야구에 비유하면 철저한 데이터 야구를 추구하는 팀이라고 표현된다.
극동전쟁 때 한국군을 상대한 일본군이 교환비 6:1로 열세였고, 렘베르크 방면에서 교전한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이 10:1로 밀린데 반해 마녀의 숲 전투까지 2.5:1에서 많이 잡으면 4:1 가량으로 한 세대 앞선 선진군대인 한국군 상대로 가장 준수한 교환비를 내며 선전했었다. 브루실로프 공세가 종료된 시점에 최종 교환비는 대략 7:1.
독자들이 보급도 간당간당한데 이놈들을 대체 어떻게 이기냐고 질려했을 정도로 철두철미한 전쟁기계의 면모를 보여주었으나 결국 통계와 자료 수집에 의존하는 방식의 맹점을 극복하지 못 해 허를 찔린다.[40]
작품이 진행되면 될수록 '전투만 잘 할 뿐 전쟁은 못 하는' 독일의 고질적인 문제점도 드러나고 있다. 2차대전까지 독일군을 비판할 때 흔히 거론되는 '킬딸충' 성향은 물론 북독일 프로이센의 남독일(바이에른, 바덴뷔르템베르크)을 향한 은근하고 치졸한 차별,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죄다 징고이스트 소굴에 내각과는 아예 다른 나라에 가까운 군부 등등.
1910년대 독일답게 한국군을 바라보는 시선이나 언사에서 인종적인 편견이 굉장히 심하게 드러나는 데 그것과 별개로 지휘는 굉장히 신중하고 정석적으로, 떠올릴 수 있는 최선의 수단을 강구하는 것도 특징. 전자는 시대상 고증이며 동서양 군대의 대결을 그린 대역물에서 일반적인 전개이나 후자쪽, 그럼에도 허술하게 대응하지 않고 최대한 한국군의 의중을 따라가고, 위협적인 상황도 연출하는 것은 기존 대역물에서 보이지 않았던 전개 방식이다.
- 빌헬름 2세
독일 제국의 카이저. 1부에서는 고종의 요청을 받아 1901년 대타협을 위한 협상 때 독일 대표단을 파견한다. 이후 극동전쟁이 터졌을 때는 대한제국이 완전히 함경도로 밀리기 전까지는 군수품을 지원해주기도 했다. 이후 2부 시점에서는 이러한 호의에도 대한제국이 자신을 배신했다며 길길이 날뛰다가[41] 치머만의 보고서를 보고 일본과 중국에 대한제국을 공격해 달라는 전보를 보낼 계획을 하게 된다.[42] 갈리치아의 패전 소식을 듣고 거의 졸도할 뻔 했다가 팔켄하인과 독대했으며 너무 큰 패배를 당한지라 당장은 구심점이 필요해 팔켄하인을 유임시켰다.
- 테오발트 폰 베트만홀베크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의 총리.
- 에리히 폰 팔켄하인
아시아에서 근무했던 것을 반영해 대한제국군 훈련 참관을 위해 교주만에서 파견을 왔다가 포슈와 신경전을 벌이게 된다. 이후 김시혁에게 나름 조언을 해주면서 극동에 관련해 놀라운 식견을 보여주기도 한다. 2부 시점에서는 원역사대로 독일군 참모총장으로 서부 전선을 담당한다. 동부전선에 한국군이 참전했다는 소식에 인종적 편견에 젖어 무시한 참모들과 달리 바짝 경계하며 동부전선의 힌덴부르크에게 각별히 주의하란 전갈을 보낸다. 김시혁과 만난 시간은 짧았으나 그 능력을 즉시 간파했고 10년이 더 지난 시점에도 기억하고 있었는데 인종적 편견에 젖은 서양 지휘관이 신생 동양군대를 무시하는 클리셰가 일반적이었던 지금까지의 대역물들을 생각하면 놀라운 묘사. 문제는 그가 동부전선을 책임진 힌덴부르크와 사이가 몹시 나쁘다는 점이었고 실제 힌덴부르크는 그 전갈에 너나 잘하세요라고 답을 해버리며[43] 팔켄하인을 피꺼솟하게 만든다.
원래는 베르됭 공세 실패 이후 참모총장직에서 잘려야 했지만, 한국군의 개입으로 훨씬 크고 빠르게 독일군의 패전이 유력해지면서 오히려 유임되었다. 그가 주도한 서부전선에서 패배가 확정되기 전에 동부에서 일이 틀어졌고,[44] 그게 너무 치명타라 함부로 장수를 바꿀 수도 없었기 때문.
하지만 이후 니벨 공세에도 프랑스가 꺾이지 않고 반격하는 상황 속에서 결국 해임되었고 원역사대로 오스만 제국에 파견되었다고 힌덴부르크에 의해 언급된다.
- 파울 폰 힌덴부르크
원 역사에서 1차대전 당시 동부전선에서 복무했고 이후 참모총장을 거쳐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 대통령까지 오르는 인물. 첫 등장은 동부전선의 한국군을 신경쓰라는 팔켄하인의 전언에 너나 잘하라며 일침을 놓는 장면이었으며 이후 코벨 전투에서 본격적으로 등장한다. 렘베르크 점령 이후에도 한국군을 무시하고 있었으며 그에 따라 러시아군만 분석해놓은 상태였는데 정작 한국군이 예상을 깨고 코벨로 진격해오자 상당히 당황하며 뒤늦게 한국군 분석 자료를 찾지만 당연하게도 한국군을 동양의 야만인이라며 무시한 독일 제국에 그런 게 있을 리 없었고[45][46] 자신들이 패배할 가능성이 생겼다는 사실에 조금이나마 흔들리는 모습을 보인다.
그래도 쿠로팟킨을 잘 밀어붙이며 리가와 빌뉴스까지 올라갔지만 갈리치아에서 털린 탓에 철수 명령이 떨어져 분노하지만 철수의 필요성은 알고 있던 덕에 진정한다. 다만 OHL의 명대로 동프로이센까지 철수했다간 팔켄하인에게 자신이 잘리는게 뻔한지라 순순히 명령을 듣지 않고 메멜-카우나스 선에 방어선을 구축한다.
이후 비스와 강의 기적 때 다시금 나르바까지 진격하지만 코벨에서 패배하는 바람에 눈물을 머금고 다시 메멜-카우나스 선으로 철수한다. 혁명이 일어난 러시아의 단독 강화로 동부전선이 정리되고, 팔켄하인이 실각하자 그의 뒤를 이어 참모총장이 되며 OHL을 이끌고 서부 전선을 총괄하는 위치에 서게 된다. 2차 파스샹달 전투와 말메종 요새 함락으로 불리한 상황에서 카포레토 공세를 기획해 대승을 거두고 북이탈리아와 남프랑스를 위협, 협상국을 패전의 공포로 몰아넣는다.
- 알프레트 폰 발더제
의화단 운동 당시 연합군 총사령관으로 등장하며 이후 1901년 대타협 때도 독일 측 대표로 참석한다.
- 한스 폰 젝트
2부 시점에서 동부전선에서 싸우다가 잠시 에리히 폰 팔켄하인에게 와서 대책 회의에 참석해 렘베르크와 슈타니슬라우를 포기하는 대신 코벨에 모든 것을 집중해 야전을 벌이자는 한편 슬슬 오헝군의 지휘권도 가져오자는 의견을 개제한다. 그 뒤 팔켄하인의 지시 하에 오헝 제3야전군 지휘권을 인수해 코벨에 도착하고 비참하게 패배한 전우들을 맞이한다.
- 알렉산더 폰 린징겐
브루실로프 공세를 맞상대한 부크강 집단군 사령관. 루츠크의 오스트리아군을 신속하게 증원해 급한 불을 끄는 데 성공했고 볼로디미르를 점령한 한국군을 막아선다. 한국군이 보급난에 직면해 공세에 나설 수 없음을 즉시 파악했고 힌덴부르크가 파견한 호프만과 부르흐 뮐러의 제안을 받아들여 공세를 준비한다. 노장의 직감으로 지나칠 정도로 순조로운 전황에 우려를 표하며 예비대인 41군단 투입을 주저하나 참모들의 강권으로 결국 악수를 두고 만다.
41군단을 투입시켜 한국군의 보급로를 차단한 다음에는 투항 권유 사절을 보낼 정도로 여유만만했으나 전혀 예상 못 한 한국군 예비대가 튀어나와 11사단을 전멸시켰다는 소식을 듣고 공황에 빠진다. 남은 병력이라도 보전하기 위해선 코벨로 퇴각해서 방어전을 벌여야 했으나 이미 쏟아부은 매몰비용이 너무 아까워 제때 손절하지 못하고 41군단의 퇴각조차 불허한채 다시금 공세를 계획한다.
그러나 김시혁은 그가 고안할 수 있는 모든 방안을 예상하며 최소 두 수는 앞서 있었고 전부 파훼당한 끝에 3개 군단이 상처투성이 1개 사단으로 줄어든 채 비참하게 퇴각하는 현실을 받아들여야 했다.
이후 온갖 지탄을 받다가 카이저의 배려로 요양을 갔지만, 러시아군이 다시 공세를 가하자 야전원수로 진급하여 오스만, 오헝군과 함께 러시아군을 섬멸하고 명예를 회복한다. 그러나 러시아가 한국군의 이동 상황을 철저히 기밀에 붙인 탓에 한국군의 코벨 도착을 제때 인지하지 못했고, 고분고분하지 않은 오스만군을 길들인다며 중화기를 지급하라는 OHL의 지시를 무시한 채 그들을 선봉에 세우는 실책을 저지른다.[47]
그러나 그가 예상 못한 한국군이 또 등장하면서 일디림 군단을 갈아버리자 다시 한 번 현타를 느끼며 공세 중단을 선언한다.
전투가 종료된 후 항복한 오스만 군인이 기관총이 더 있었다면 더 잘 싸울 수 있었을 것이라고 한탄하는 모습도 나왔고 기자 인터뷰에서 김시혁이 오스만 군에게 중화기가 더 많았다면 더 고전했을 것이라고 인증까지 해버려서 책임론이 안나올 수 없는 상황이 펼쳐졌다.
- 고틀립 폰 야코프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의 외무장관.
- 아르투어 치머만
원래 역사대로 치머만 전보 사건을 벌인다. 그것도 중일과 멕시코 양쪽으로. 우려를 표하는 야고프 장관에게 중일과 한국을 이간시켜 철수를 유도하는 계략이며 미군은 정예 병력이 2만에 불과하니 신경 쓸 필요도 없고 설사 참전하다 쳐도 편성과 파병에 최소 6개월에서 1년이 걸릴테니 무제한 잠수함 작전으로 충분히 견제가 가능하다며 큰소리를 빵빵 친다.
- 막스 호프만
탄넨부르크 전투와 마수리안 전투를 승리로 이끈 독일 제일의 참모장교. 힌덴부르크가 원할한 작전 지휘를 위해 부크강 집단군에 파견한 두 참모 중 한 명. 한국군의 배치 상황을 전부 파악하지 못 해 고민하는 린싱겐 상급대장에게 그들의 배치는 몰라도 전체 규모는 잘 알고 있음을 지적하며 2개 군단을 동원, 부크강과 볼로디미르 사이의 숲지대 전체에서 압도적인 수적 우위로 한국군을 압박하자는 작전을 제시한다.[48] 보급난과 수적 열세에 고민하는 한국군의 맹점을 날카롭게 찌르는 작전이었으나, 한국군이 원래 장갑차를 운용하지 않다보니 사전에 정보를 얻을 방법이 없었던 한국군의 장갑차 대대 운용 방식과 독일군보다 압도적인 한국군 보병 화력을 잘못 판단해 한국군에 예비대가 소수만 남기고 모두 동원되었다고 판단하는 우를 저지르고 만다. 이후 41군단이 전멸 직전에 놓이자 지금이라도 코벨로 퇴각해야한다 주장하지만 린징겐에게 컷당한다.
- 게오르크 부르흐뮐러
독일 제2제국에서 가장 뛰어난 포병지휘관이자 허리케인 포격의 창시자. 힌덴부르크가 부크강 집단군에 파견한 두 참모 중 한명. 호프만의 작전을 실행하기 앞서 독일군의 포병 숫자와 조직 체계가 한국군에 비해 열세함을 지적하고 중포와 경량 보병포로 나뉜 전체 포병을 통제하고 조율할 수 있는 조직체계를 구성이 선행되어야 함을 지적한다.
상급대장인 자신 앞에서 영관급 장교가 당당히 자신의 견해를 피력한 그를 높이 산 린싱겐은 임시 대령 지위와 집단군 내 모든 포병 자산을 맡기며 통합된 포병지휘부 구성을 명령하고 부르흐 뮐러는 단 12시간 내에 이를 해내는 수완을 발휘한다.
그러나 당연히 프랑스의 영향을 받아 평사포와 곡사포를 혼성 운용할 줄 알았던 한국군 포병대는 포병이 전장의 주력이라는 독트린에 따라 지형 극복능력이 빼어난 곡사포로 통일된 상태였고, 급조된 독일군 포병은 압도적인 포병 조직력 차이로 말미암아 얼마 안 되는 귀중한 곡사포를 대거 소실하고 만다. 그런 상황에서도 전의를 불태우며 한 번 붙어보려 하지만 한국군 예비대 규모 계산을 잘못한 시점서 이미 망한 전투라...
- 한스 폰 그로나우
부크강 집단군 예하 41군단 군단장. 41군단을 이끌고 한국군과 러시아군의 지경선을 파고들어 돌파구를 형성한 뒤 포위 섬멸하라는 지시를 받는다. 한국군의 예비대가 거의 다 소진되었으며 남아있다 해도 1개 사단 내지 여단일 것이라는 게 집단군 지휘부에서 전달받은 결론이었고 그런 상황에서도 신중하게 공세를 시작해 사보타주와 침투는 성공적으로 수행했고 때마침 만난 한국군 보급부대를 반쯤 섬멸하는 성과도 낸다.
소위 '킬딸'에 집착하는 독일군의 병폐를 부정하는 행보를 쭉 보여주는 데 노보폴린스크를 찔러 보라는 윗선의 지시에 윗선의 지시보다 더 적은 1개 중대만 파견해 정말 탐색만 했고, 추격에 신이 난 울란들에게 적당히 하고 빠져서 군단 예비대로 전환하라는 지시를 내릴 정도로 정석적인 지휘를 했다. 그러나 한국군의 예비대 규모를 완전히 잘못 판단하고 있었고 이로 인해 군단 예비대 격인 11 사단은 한국군 방면엔 1개 대대만 둔 채 러시아 쪽에 집중하고, 그로나우 본인은 81, 82 사단으로 수도사단을 무너뜨리는 데 전력을 집중하고 있었다.
11사단이 괴멸하고 퇴각이 불허당하자 포위 당하기 전에 뚫고 나가기 위해 예비대까지 총동원한 공세를 시작하나 조금 더 빠르고, 압도적으로 유연했던 수도사단의 공세에 무너진다.
이후 러시아군에 포로로 잡혀 정중히 대우받다가 김시혁과 만나 당시 전황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다. 한국군이 귀환할 때 다른 포로들과 함께 한국으로 넘어왔고 이들을 통해 본인 위신을 세우려는 고종의 의중으로 좋은 대우를 받으며 유유자적하게 보낸다.[49]
- 프란츠 할더
41군단 참모부 소속 소령으로 등장. 41군단 예하 81, 82 사단이 한국군 수도사단과 격돌한 사이 한국군과 러시아군 지경선으로 침투하는데 성공한 제11 바이에른 보병사단으로 한국군 보급기지인 노보플린스크를 점령하자는 의견을 제시한다. 11사단을 소모전의 끝에 생성된 돌파구로 밀어 넣어 마지막 창날로 쓰려던 군단장 그로나우는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나 할더는 다소의 피해를 감소하고라도 적의 보급 중심지를 무너뜨려야 작전이 수월해질 것이란 의견을 굽히지 않는다.
한국군 강습여단의 공세에 궤멸당한 11사단 본부와 전신이 끊어지자 한국군에게 아직 예비대가 남아 있었을 가능성을 예리하게 지적하고 본부에서 예비대를 차출해 보내야 함을 역설해 관철시킨다. 울란 대대 일부를 차출해 11사단 방면으로 보내라는 군단장 그로나우의 지시를 독단적으로 변경해 울란 대대 전체를 11사단 쪽으로 보내고 남은 예비대인 예거 대대와 용기병 대대에도 출동 대기 명령을 내린다.
- 파울 폰 크노이슬
41군단 예하 제11 바이에른 보병사단장. 소칼의 러시아 시베리아 군단과 노보폴린스크의 한국군 사이를 차단해 보급선을 차단하는 역할을 맡아 수행한다.
이후 수색중대의 보고를 받고 노보폴린스크의 한국군 병력이 기만책을 쓴다고 판단하며 한국군 방면에 1개 대대만 방어선을 지키게 한 뒤 주력을 소칼의 러시아군 쪽에 배치했으나 한국군에겐 예비대가 남아 있었고 더군다나 그 예비대가 압도적인 기동력과 훈련도에 기동포병까지 운용하는 강습여단이라 아무런 대비도 못 한 상황에서 일방적으로 찢겨지고 겨우 2시간 만에 22연대와 사단 지휘부가 괴멸 당하자 멘탈이 박살나 내 사단을 돌려내라 울부짖다 낙하하는 적의 포탄을 바라보며 모든 걸 놓아 버린다.
- 에리히 루덴도르프
동부전선에서 힌덴부르크를 보좌하는 참모로 등장한다. 역시나 능력은 뛰어난지라 힌덴부르크가 가장 신뢰하는 참모 중 1명으로, 동부전선이 한러연합군에게 작살난 뒤에 힌덴부르크가 현 상황을 수습 가능한 이로 자신과 팔켄하인과 더불어 그를 같이 언급했을 정도다. 실제로 힌덴부르크 휘하에서 다양한 공을 세우나, 한국군의 활약으로 원역사보다도 힘을 내지 못한다.
그 후 이탈리아 전선으로 파견되어 원 역사의 카포레토 전투에서 거둔 것 그 이상의 성과를 이루지만 미카엘 공세를 준비하는 힌덴부르크가 귀환할 것을 명령하자 분통을 터트리며 베네치아까지 함락한 후 귀환한다. 그렇게 귀환한 후 빨리 미카엘 작전을 시작할 것을 독촉하지만 이번에는 러시아 내전에 개입해서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대답을 들으며 우울해한다.
- 막시밀리안 바이어
스톰트루퍼 대대장. 코벨 전투에서 오스만 군과 함께 시베리아 소총병 여단과 전투를 벌였지만 패전한다.
7. 미합중국
1부에서는 큰 비중이 없었고 2부에서부터 비중이 증가한다. 잠재력과 머릿수는 어마어마하지만 오합지졸 당나라 군대였던 1차 대전기 미군의 실태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존 조지프 퍼싱
러일전쟁이 발발한 후 관전 무관으로 등장한다. 현대 보병전술을 이식한 대한제국군의 모습에 감명받고 보고서를 작성하여 본국에 알리나, 유럽식 전술에 익숙하고 예산이 부족했던 미군은 이 보고서를 서류 보관소에 처박아버리고 만다. 그나마 서술에서 1차대전 직전에 다시 세상 빛을 본다고 밝혔으니 그나마 다행. 귀국한 이후로도 꾸준히 김시혁에게 지속적으로 조언을 구함과 동시에 대한에서 새로 개발한 강습소총을 사비로 구매, 휘하 병사들을 강습보병화를 시도한다.
그와 그를 지지하는 파벌은 잡다한 군종을 하나로 묶어서 운용하려 든다는 이유로 반대파에게 '프랑켄슈타인 마피아'란 멸칭으로 불린다. 그러던 중 대한제국군의 승전에 영향을 받아 미군 내의 파벌싸움이 프랑켄슈타인 마피아의 승리로 끝나게 되면서 미군의 유럽 파병을 책임지게 된다. 하지만 미국 원정군을 조직하면서 그야말로 오합지졸 당나라 군대인 미군의 실태에 충격받고, 파벌싸움에서 패배한 '올드 해빗'이 질질 잡고 늘어지는 상황이라 계속 고통을 받는다.[50]
머리를 쥐어 싸매는 와중에 한국군으로부터 위탁교육 및 교관단 지원 약속을 받고, 김시혁의 제안으로 프랑스 현지에 FTC(야전훈련사령부)를 개설해 일단 실전을 겪으면서 재훈련 시키는 방식을 채택하기로 한다. 그리고 퍼싱의 원정군 사령부를 지원하기 위해 대한제국군에서 미국 본토와 프랑스 현지의 FTC로 교관단을 파견했다.
최고전쟁사령부에서 회의 중에, 헤이그가 대놓고 미군과 대한제국군의 지휘권을 빼앗고 총알받이로 쓰려고 하자 솜 전투와 파스샹달 전투를 언급해 면전에서 긁어버렸다.
- 허버트 후버
본래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취업하려고 했으나, 대한제국에서 내세운 조건이 워낙 좋았고, 미지의 세계에서 성공신화를 써내려가는 이른바 "프론티어 정신"에 이끌려 고민끝에 대한제국에서 취업을 결정했다. 이후 대한제국의 금광 및 기타 광산들을 기반으로 한 거대한 자본가가 되었으며 극동전쟁기에도 그 막대한 자본으로 대한제국을 서포트한다.[51] 2부 시점에서도 사업 규모가 엄청난 것으로 보이는데 대한제국이 세계에서 손꼽히는 금 생산국으로 각광받으며 독일 제국의 분석에 따르면 대한제국의 금 덕분에 파운드화, 루블화, 프랑화의 붕괴가 유예되고 있다 할 정도니 그 사업 규모를 짐작할 만 하다. 1911년 금의환향하여 원역보다 훨씬 빠른 시기에 상원의원이 되었다.
- 제임스 하코트
해당 작품의 오리지널 캐릭터. 전형적인 딕시이며,[52] 후버의 친구 쪽 지인이라는 설정이다. 후버의 광산에서 경비직을 서던 중 미합중국 기병대에서 복무한 경험을 살려 기병 고문직을 구하던 대한제국 육군에 입대한다. 딕시스러운 행동거지로 여러 문제를 일으켰지만[53] 김시혁에게 일침을 듣고 마음을 고쳐먹었는지 극동 전쟁 시기에 들어서는 인간관계에 꽤나 진전이 있었다.
이후 굵직한 전투마다 등장하며 꽤나 큰 인상을 남겼다. [54] 2부 시점에서는 함흥에 정착해 목장을 운영하고 있으며 대한제국군과 군마 공급 계약을 체결해 안정적인 삶을 누리고 있다. 이후 1차대전에 대한제국이 참전해 늘어난 군마 수요 감당을 위해 얀코프스키를 연결해주기도 한다.
- 윌리엄 다이
고종에게 고용된 미국인 군사고문으로 한성구락부의 초창기 협력자. 친위영 2중대장에 임명된 김시혁이 일본의 농간으로 그나마 정예한 장위영 병력을 빼앗기고 총도 제대로 못쏘는 오합지졸들을 넘겨 받았을 때 왕년의 교관 가락을 발휘해 쓸만한 병사로 조련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미군 고문관 중에 유일한 사관학교 경력자였기에 신설된 무관학교의 부교장에 임명, 한국군 군제 개혁의 주춧돌이 된다. 원래 역사에선 1899년에 미국으로 돌아가 사망하나 여기선 1905년 극동전쟁 종전 시까지 조선에 머물며 생존해 종전 협상을 참관했으며 마지막 봉사로 '대한제국 방어 계획'을 입안하는 등 명예로운 말년을 보냈다.
- 페르디난트 닌스테드
다이와 함께 고용된 미국인 고문. 다이 옆에서 무관학교 교관으로 재임하며 한국군 개혁의 초석을 놓아 주었다. 2차 쿠데타가 일어났을 때는 다이와 함께 불안함에 몸서리치는 고종을 호위했고 극동전쟁 종전 후 다이와 함께 극동전쟁 종전협상을 참관했다.
- 엘리후 루트
극동전쟁 당시 미국 전쟁장관. 퍼싱이 보낸 보고서를 보고 사무엘 볼드윈에게 의견을 물어본다.
- 사무엘 볼드윈
극동전쟁 당시 미국 육군 참모총장. 퍼싱이 올린 보고서를 혹평하여 그 보고서가 서류 보관소에 처박히게 했다.
- 제이슨 하코트
제임스 하코트의 손자. 유년 시절 할아버지가 한국에 정착하면서 가족 전체가 한국으로 이민올 때 같이 들어와 오랜 기간 조선에 살았다.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제이슨이 목장 일을 물려받기를 바랬으나 모험심이 강한 성격이라 이를 거절하고 몰래 가출해 대한제국의 육군항공대에 지원하였고,[55] 몇 개월간의 훈련을 마친 뒤 구주원정군에 참여, 5월 20일 작전 개시 이후부터 20번의 작전에 투입해 총 5기를 격추시키며 서왈보의 뒤를 잇는 2번째 에이스 칭호를 얻게 된다.
- 존 브라우닝
김시혁이 신형 소총을 만들기 위해 고용하였고, 원 역사에서 M1 카빈의 초안이 된 M1929를 설계하는 동생 조나단 브라우닝과 함께 강습소총을 제작했다. 강습소총은 엄밀히 말해 작중 대한제국의 기술력을 넘어선 물건이었고, 이름 높은 존 브라우닝도 중간탄을 쓰는 가스작용식 개인화기에 대한 설계능력은 검증된 바가 없는데[56] 김시혁과 홍익정밀이 기본적인 작동개념과 자금을 제공하고 존 브라우닝과 카빈의 초안을 잡은 조나단 브라우닝까지[57] 형제가 함께 세부적인 설계를 하는 것으로 역할을 분담해 개연성을 확보했다. 강습소총을 설계하고 미군에도 일정 수량 채용이 되자 스스로 자동화기 설계에 관심을 기울여 원 역사보다 몇 년 빨리 BAR를 설계해 내놓았다.
- 우드로 윌슨
원역사대로 이승만의 스승으로서 언급된다. 1916년 시점에서는 이미 대통령 재선까지 된 상태이고 미국도 1차대전에 얽히는 만큼 조만간 출연 가능성이 높다. 솜 전투 이후 본격적으로 언급되는데 서부전선이 꼬이자 급히 군을 준비하려했으나 너무나도 만신창이인 미군의 현실을 보고 경악해 공화당의 연방군 강화책을 지지하고 있다고 언급된다.[58]
- 뉴턴 D. 베이커
전쟁성 장관. 유럽 전선에 파견된 관전무관단의 보고를 종합하여 프랑켄슈타인 마피아가 추종하는 한국군의 방식이 단순히 동양 소국에만 적용되는 특수한 사례가 아닌 추후 모든 군대가 추구해야 할 방향임을 지적하며 채용한 강력한 군사 개혁을 주장한다.
- 프레드릭 펀스턴
멕시코 방면의 작전 부대를 총괄하던 중에 육군참모차장으로 영전한다. 행정부와 베이커 장관이 분노한 보수파들로부터 퍼싱의 개혁파를 보호하기 위해 고른 인선.
- 제임스 하버드
미 원정군 병창감.
- 빌리 미첼
미 육군 통신대 지휘관으로, 미군 항공대에 전력이 부실하자 전력을 증강시키기 위해서 한국 항공대에서 제이슨 하코트를 데려오려 했지만, 한국 항공대 사령관인 서왈보의 의해 거절당해 낙담했으나 한국군 고문단을 받는 것으로 해결한다.
- 조셉 E. 쿤
독일에 관전무관으로 파견된 미 육군 장교. 동부전선에서 독일의 패배와 한국군에 대한 상세한 분석, 솜 전투에서 영국군의 피해 상황을 면밀히 분석해 전쟁성에 보고한다.
- 조지 C. 마셜
프랑켄슈타인 마피아의 일원인 대위로 등장. 퍼싱 아래서 실무를 맡아 함께 고생한다.
- 더글러스 맥아더
한국 참모학교에 위탁교육을 받으러 파견된 미 육군 소령으로 등장. 한국군 근위기병사단의 차량화, 기계화 개편 방향에 깊은 인상을 받는다. 한국군의 발전 방향을 부러워하며 미군도 그러한 부대를 만들 수 있기를 바라는 그에게 김시혁은 협상국들의 지원에 의지해야 하는 한국보단 미국이 훨씬 쉬울 거라며 타일러준다. 연수를 마친 뒤 유럽원정군의 일원으로 참전했으며 퍼싱 앞에서 직접 요구해 새로 배치된 전차들을 자기 부대에 일괄배치 받도록 허락받는다. 비대한 에고는 여기서도 마찬가지로 퍼싱 앞에서도 자신을 3인칭으로 칭한다.
- 조지 S. 패튼
프랑켄슈타인 마피아의 일원인 젊은 장교로 등장. 스스로를 기사로 자처하고 군마를 동등한 전우로 대하는 기인이면서도 미래 전장의 흐름과 그에 필요한 개혁을 정확히 예측하는 기민한 모습을 보인다. 전차와 제병합동을 제대로 운용할 줄 아는 지휘관이 필요하다는 맥아더의 요청으로 사령부에서 맥아더 밑으로 적을 옮긴다.
8. 대영제국
2부들어 본격적으로 등장한다. 독자들의 감상은 1부의 일본을 뛰어넘은 2부 메인 빌런이자 혐성국 그자체. 한국을 얕보고 일본과 동맹하고 있지만 막상 일본도 그냥 사냥개 정도로 대우하면서 혐성을 보이는 것은 물론 한창 전쟁 중에 승기가 보이는 것도 아니고 패배도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판국에 정치질에만 몰두하며 전선을 어렵게 만들고, 자기들이 요청해 한국군을 출병시켜 놓고 일본을 충동질해 한국의 등을 찌르게 만드는 등 온갖 협잡질과 고구마 제조를 책임지고 있다. 독자들은 후대에 배후중상 음모론이 나와도 이상할 게 없다며 치를 떨고 있다.- 프레더릭 매켄지[59]
원역사에서 한국인들이 정미의병하면 흔히 떠올리는 사진을 찍은 것으로 유명하며 이후로도 반일 언론 활동을 지속해 한국 독립유공자에 서훈된 영국 기자. 본디 일본군의 종군 기자단에 소속 되어 있었고 일본이 말한 러시아로부터 조선을 해방시킨다는 말을 믿었지만 경인가도 전투를 지켜보고 생각이 바뀌어 한국의 사정을 취재하기 위해 몰래 일본군을 피해 홍범도가 이끄는 한국군에 합류한다. 그 뒤 한국군을 취재하면서 함흥까지 가게 되고 거기서 김시혁과 인터뷰를 하면서 Korea will never surrender라는 제목의 기사를 만들어 국제 여론전에서 한국이 우위에 설 수 있게 해준다.
- 어니스트 베델
원역사에서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해 반일 언론 활동을 벌여 한국 독립유공자로 서훈된 영국 기자. 역시나 메켄지와 같은 이유로 일본군을 탈출해 한국군을 취재하려 했으나[60] 메켄지의 탈출 이후 감시가 삼엄해지며 탈출에 실패하지만 우연히 삼광 작전의 일환으로 삼남 지방에서 벌어지는 대학살에 대한 실마리를 잡게 되어 잠입 취재에 들어가고 삼광 작전에 대한 진실을 기사로 폭로해 일본의 전쟁 명분이 거짓임을 밝혀낸다. 외전에서 밝혀지길 원역사대로 한국에 눌러앉아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했다. 건강을 헤쳤던 일제와의 송사가 사라져서인지 1909년에 세상을 떠난 원역사보다 훨씬 오래 살고 있다.
베델이 사장으로 있는 대한매일신보는 고종도 건드릴 수 없었기에 고종은 반대급부로 독립신문을 적극 후원해 가장 잘 팔리는 신문사로 만들어 여론 형성에 써먹는다.
- 윈스턴 처칠
전 해군장관이자 신임 군수장관. 아무리 사단이 많아도 한꺼번에 투입할 수 없는 전장환경을 설명하며 전황에 비관적인 전망을 내놓는다. 전쟁장관이 갈리폴리를 언급하자 움찔하지만 회의 석상이라 화를 내진 못한다. 이한응과 접촉해 4만의 추가 병력을 지원해주면 일본 관할하의 남양 군도를 넘겨주겠다는, 지켜질 리도 없고 지켜져도 유지가 불가능하며, 국제관계에 폭탄만 될 게 뻔한 독약을 제안이랍시고 내밀었다.
-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
1차 대전 전시 총리. 어두운 전황에 속 끓이든 중 일본의 티배깅에 가까운 파병 제안을 받는다. 각료들이 격분히 다들 한 소리 하는 가운데 병사 한 명이 아까운 상황을 고려 6천 파병을 받아들이는 한편 영일동맹을 주도한 아서 벨푸어에게 병력을 더 받아오지 못하면 극동전략을 전면 수정할 수 밖에 없음을 경고한다.
한국이 프랑스와 손잡고 영향력을 행사해 영국이 극동에서 밀려날 것을 걱정해 일본을 부추켜 견제하려 하지만, 일본이 기대이상으로 날뛰는 계기를 줘버렸다.
- 아서 밸푸어
극동에서 러시아를 견제하고자 영일동맹을 결성하고 극동전쟁 패배 이후에도 일본에 지속적으로 예산과 전함을 퍼다준 장본인. 그렇게 열심히 퍼다준 일본이 영국의 지원 요청에 맨몸 뿐인 지원병 6천으로 화답하자 격분한 총리 로이드 조지에게 일본으로 가서 병력을 더 받아 오던가 아니면 전후 극동전략을 전면 수정할 수 밖에 없다고 전하라는 통보를 듣는다. 한국이란 호랑이를 적절히 제어하는 프랑스와 대비해 일본이란 밑빠진 독에 일방적으로 퍼주기 바쁘다며 벨푸어를 조롱하는 만평이 개제되는 등 안팍으로 압력을 받고 있다.
- 더글러스 헤이그
솜 전투의 막을 올리면서 등장. 동부전선에서의 승리로 장병들이 잔뜩 고무된 상황에서 황인종들도 했는데 백인인 우리가 못할리 없다며 제대로 준비 되지 않은 병력으로 공세를 추진한다. 포슈가 동부전선과 서부전선의 차이, 신병이 많이 포함된 영국군의 부족한 준비 등을 짚어주나 일절 듣지 않았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솜 전투에서 영국군은 개박살이 나고 만다. 그러고도 정신을 못차리고 성급한 고프 장군에게 파스샹달 공세를 이끌게 했다 또 한 번 큰 손실을 입는다. 아주 전형적인 정치군인으로 본국의 화친론, 염전론에 굴하지 않고 전선을 지탱하는 뚝심은 대단하나 그 뿐.
한국군과 일본군이 도착하고 최고전쟁사령부가 가동되기 시작한 상황에서도 인종차별과 군사적 무능함, 고집으로 똘똘 뭉쳐 한프미 상대로 정치질만 일삼아 독일군보다 더 짜증나는 내부의 적으로 자리잡는다. 협상국 전체의 승리보다 자국군의 승리를 우선한다는 점은 같으나, 합리적인 근거를 들어 설명하면 납득하긴 하고 군사적 능력도 더 뛰어난 페탱과 달리, 고집 꺾을 줄도 모르고 지휘도 세련되지 못하며 비백인 군대와 미군을 깔아보고 자기 휘하에서 고기 방패로 부리고픈 욕망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결국 퍼싱에게 '미합중국은 (솜과 파스샹달처럼)도살장에 군대 밀어넣는 방식으로 싸우지 않는다.'라며 면박을 듣고, 뒤로 불러서 제안한 시혁에게도 우리는 협상국의 승리를 위해 왔지 (일본군처럼)영국을 위해 파견된 군대가 아니라며 무시당한다. 다만 능력이 없는 건 아니라 김시혁이 말한 독일군의 아미앵 공격에 대한 정보를 진지하게 고민하며 이를 다른 사령관들과 논의하는 모습도 보인다.[61] 그러나 결국 고정관념을 버리는 데는 실패해서 독일군 공세가 예정된 아미앵 방면엔 가장 약하고 준비 안 된 5군과 일본을 배치하고 독일군이 아미앵에 포격을 퍼붓기 직전까지도 정치질에 매달린다. 김시혁은 언젠가 회고록을 집필하면 이때 일을 반드시 박제해 주겠다고 이를 가는 중.
- 헨리 윌슨
영국군 야전원수.
- 허버트 플러머
영국 제2군 사령관. 고프의 후임으로 2차 파스샹달 전투를 이끈 지휘관. 영국군에서 단연 발군인 지휘관으로 한국군의 전투 방식과 솜과 파스샹달에서 피로 습득한 소부대 전술을 접목시켜 이전의 손실을 설욕하고 독일 제4군에 큰 타격을 입힌다. 헤이그가 김시혁에게 아미앵을 조심하라는 조언에 고민하자 그냥 무시해서는 안된다고 조언한다.
- 휴버트 고프
영국 제5군 사령관. 1차 파스샹달 전투를 맡아 무모한 공세로 막대한 피해를 초래했다. 헤이그가 김시혁에게 아미앵을 조심하라는 조언에 고민하자 동양 놈이 뭘 알겠나며 무시하자고 주장한다. 5군의 예비대로 훈련도가 부족한 일본군을 받게되자, 이를 불평했지만 결국 받아들인다. 용맹하지만 그것 뿐인 인물로 파스샹달에서 독일군의 종심방어에 그토록 고전해놓고도 전력이 취약한 5군 병력으로 종심 방어를 하는 대신 얇게 늘어 뜨린다.
9.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 막시밀리안 치체리치 폰 버차니
원역사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군대를 개혁하려했던 장군. 극동전쟁 당시 관전무관으로 파견되어 대한제국의 전술을 보고 이것이 앞으로의 전장을 지배할 것이라 판단해 대한제국에 오헝 제국 공사관이 정식 개관한 것을 기회로 한국을 찾아와 김시혁에게 조언을 구하려 한다. 이후 대한제국군의 훈련을 참관하고 귀국해서 자신이 본 것을 기반으로 한 군제개혁을 강력히 주장했고 그 결과 육군학교장이 되어 자신이 원하는 장교들을 육성하게 된다. 그리고 이렇게 육성한 장교들이 동부전선에서 활약하며 원역사의 그 허접 오헝군의 이미지를 완전히 지워버리는 나비효과가 생긴다. 동부전선에서 러시아군과 세르비아군을 갈아버리다가 23군단장으로 부임되어 이손초로 갈 예정이었으나 이손초로 10개 사단이 가면서 생긴 빈 틈을 메우고자 13군단장으로 다시 투입된다. 그 상황에서 한국군과 김시혁이 동부전선에 왔다는 소식에 경계하며 그들을 무시하던 4군 사령관 요제프 페르디난트 대공에게 일침을 가하기도 한다.
브루실로프 공세를 맞아 압도적으로 불리한 상황에서 루츠크를 사수하며 결사 항전. 독일군이 지원올 때까지 버티는 데 성공한다. 압도적인 수적 우세를 내세운 러시아군에 맞서 처절한 방어전을 벌이는 와중, 브루실로프의 지시를 무시한 파벨이 근위군단을 끌고 정면으로 치고 돌어오자 이를 한국군의 선전에 발 맞추는 러시아군의 전면 공세로 오인. 전력을 보전한 채 북쪽 측면을 사수하던 13군단을 빼서 포위섬멸을 시도하는 오판을 저지르고 만다.
버차니 탓을 할 수 도 없는 게 러시아 군에서도 유일하게 소모없이 완편 상태였던 2개 군단 11만이 사실 사령관 작계 씹어먹고 멋대로 움직인 병력이라고 누가 생각했겠는가.... 오히려 그런 상황에서도 일방적으로 밀리지 않은 채 참모들의 조언을 적절히 받아들여 전력을 보전해 코벨로 퇴각하는 데 성공했다. 이후 비스와 강의 기적에서도 공세의 한축을 담당하며 코벨 전투 직전 시점에서는 코벨 서쪽에서 러시아군을 밀어붙였지만 칼닙카 전투에서 미쉔코에게 패배한데다 두보브의 오스만 군도 무너지며 철수할 수 밖에 없게 된다.
- 게오르크 루트비히 폰 트랍
원역사에서 오스트리아 해군 잠수함 에이스이자 사운드 오브 뮤직에 나온 트랩 대령의 모티브. 역시나 주한 오헝 제국 공사관이 정식 개관하자 공사관 무관으로 파견을 와서 버차니와 함께 김시혁에게 조언을 구하려 한다.
- 프란츠 콘라트 폰 회첸도르프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의 육군 장군참모장. 1911년에 버차니의 개혁 요구를 회의장에서 듣는 것으로 첫 등장한다. 정치적으로는 보수 성향이지만 군사 쪽에서만큼은 진보적이었다는 걸 고증한 것인지 버차니의 개혁 요구를 듣고 반발하는 육군 내 전통주의자들을 찍어누른 뒤 버차니를 황립 및 왕실 육군대학 교수로 임명해 그가 극동에서 보고 배운 것을 오헝 제국군에 퍼트리게 한다. 그리고 이는 1차 세계대전에서 오헝군이 대선전을 하게 만들었으며 대한제국이 동부전선에 파견되게 하는 결과를 낳았다.
- 요제프 페르디난트 폰 외스터라이히토스카나
페르디난트 대공으로 불리는 갈리치아 전선 총사령관. 한국군이 파병왔다는 소식을 듣고 동양인이라며 무시하고 그들은 절대 만만한 적이 아니라는 버차니의 충고조차도 무시한다. 그리고 너무나 당연하게도 브루실로프 공세 때 대차게 깨지며 멘탈이 작살나고 만다.
- 알 토르자
졸로치의 병참사령관이자 제5혼베드 기병사단의 지휘관. 졸로치에서 한국군과 싸웠지만 패전하고 여운형의 설득으로 항복한다. 독일군 포로들보다 몇 달 먼저 한국에 들어와서 우호적인 대우를 받으며 부하 기병장교들과 함께 전국의 목장들을 돌며 군마 육성에 대한 조언을 해준다.
- 호르티 미클로시
경순양함 SMS 노바라의 함장. 독일에게서 무제한 잠수함 작전에 동참할 것을 요구하는 서류를 받고 자신이 이를 생각했다지만 이런 방식은 아니었다며 씁쓸해하지만 그래도 군인으로서 이길 방법을 생각하다 원역사대로 오트란토 해협 해전을 구상해낸다. 그리고 이 소설에서 나오는 어지간한 명장들이 그러하듯 그 역시도 한국 해군을 경계하고 있다.
10. 청나라→중화민국
- 섭사성
대한제국군과 전투를 벌인 것을 제외하면 원역사랑 비슷한 운명을 맞는다.
- 위안스카이
원역사랑 비슷한 행보를 보였으나 대한제국에게 사사건건 방해를 받은데다가, 호국전쟁에서도 참패하자 홧병으로 사망한다.[62] 이때 유언으로 "조선이, 조선이 감히 나를!!!!" 이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원역사에서도 조선을 수탈하며 본격적으로 정계에서 성장했음을 생각하면 조선 덕에 성장하고 조선 덕에 망했다는 완벽한 수미상관을 이루었다.
- 쑨원
원역사에서 중화민국의 국부라 일컬어지는 인물로 본디 한국의 남만주 영향력 인정을 조건으로 지원을 받아왔으나 복잡한 국내 정세로 영향력 인정을 철회했다가 그 댓가로 지원이 끊겨 고생한다. 이후 장작림 전쟁 때 대한제국이 다시 그를 끌어들일 필요성을 느껴 같은 조건으로 다시 지원을 받게 된다.[63] 이후 대한제국의 지원을 기반으로 위안스카이를 무너트리고 호국전쟁에서 승리하며 중국의 패권을 거머쥐게 된다.
- 리위안훙
위안스카이 사후 중화민국 대총통 직을 인수했다. 외교에 관한 안목은 돤치루이보다 떨어진다.
- 돤치루이
위안스카이 사후 중화민국 총리가 되었다. 독일에서 대한제국을 흔들어 달라는 요청이 오자 현실적인 이유로 요청을 거부할 것을 주장하며 리위안훙을 설득했다.
- 장쭤린
2부 프롤로그 메인 빌런. 여기서는 극동 전쟁이 러시아에 유리해지자 러시아에 붙어 살아 남았으며, 이후 러시아와 일본 사이에서 줄타기를 잘해내고 일본으로부터 군사 고문을 들여 군의 근대화도 성공시키며 원역사처럼 만주에 상당한 세력을 구축하는 데 성공했다. 다만, 그 과정에서 대한제국이 영향력을 행사 중인 남만주에 진출하려 하면서 대한과 충돌을 빚게 되었는데, 문제는 그 대한제국이 일본을 발라버린 김시혁의 국가라는 점이었고, 결국 자전거 보병화된 강습보병과 신규 무기인 강습소총에 제대로 당하면서 본거지인 영구까지 밀려났으며 기껏 키운 군대도 전멸해버리다시피 하여 요서에서 쥐죽은 듯 잔존 세력 수습에만 매달리는 신세가 된다. 그대로 몰락하는 듯 했으나 김시혁이 자리를 비운 사이 고종과 근황파가 졸렬한 지휘로 호로군 무장 해제에 실패하고 호로군 기병영 1만이 요서로 달아나 장쭤린측에 합류하며 어느 정도는 세력을 회복하게 된다. 이후 여전히 세력 키우기에 골몰하며 아이신기오로 푸이를 영구에 데려오려는 공작을 진행하려 한다.
- 장쭤샹
장쭤린의 의형제. 장쭤린에게 아이신기오로 푸이를 영구에 데려오는 공작을 제안한다.
- 차오쿤
쑨원이 이끄는 호법군과 맞서 싸웠지만, 참패한다.
- 아이신기오로 푸이
청의 마지막 황제. 장훈복벽이 무위로 돌아간 뒤 자금성에서 쥐 죽은 듯 사는 신세였으나 복벽 사건에서 드러난 옛군주로서 영향력이 그를 북양군벌과 대한제국 사이의 뜨거운 감자로 떠오르게 한다. 영구에서 말라 죽어가던 장쭤린은 한국 관할 하 남만주로 떠나는 한족과 만주족을 붙잡고 세를 키우기 위해, 남만주 영토화에 온 힘을 쏟던 고종은 아직 나랏님으로 추앙받는 그를 이용해 남만주 지배력을 굳히기 위해 각자 영구와 한성으로 데려오는 공작을 진행한다.
11. 폴란드
- 유제프 피우수트스키
실제 역사대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 산하 폴란드 군단의 장군으로 있으며, 렘베르크 전투에서 러시아의 카자크 기병대에 맞서 분투한다. 그러나 김시혁이 있는 시베리아군에게 결국 패배하며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이 렘베르크에서 퇴각할 때 한국군을 향해 손을 흔들며 "전장에서 다시 보자, 명예로운 적들이여!"라고 소리친다.
12. 이탈리아 왕국
- 파울로 타온 디 레벨
이탈리아 해군 참모총장. 타란토에 입항한 대한제국 해군 원정함대를 직접 마중나온 것으로 첫 등장했으며 그들을 간당간당하고 있는 오트란토로 보내려 하며 지휘권을 빼앗으려는 모습을 보이지만, 신순성이 노련하게 대처하며 무위로 돌아간다.
- 알프레도 악톤
레지아 마르게리타의 함장. 오트란토 해전을 앞두고 신순성과 협력하는데, 비록 규모가 작은 함대를 이끌지만 자신보다 계급이 높은 신순성을 우대해준다.
- 아르만도 디아츠
신임 이탈리아 육군 총사령관. 6만 명의 인력과 남부에서 소집한 15개 사단으로 가리발디 방어선을 구축하고 있다.
13. 오스만 제국
- 야쿱 셰브키 파샤
오스만 15군단의 지휘관으로 린징겐에게 공격을 재촉하며 역정을 낸다. 오스만 최정예라는 명성은 헛되지 않아서 전투가 시작되자 독일, 오헝군과 함께 러시아 3군, 8군을 섬멸시킨다. 오스만과 독일은 대등한 동맹국이라는 인식 아래 할 말은 하는 성격인데, 대령 계급인 그의 이런 모습을 못마땅하게 여긴 린징겐은 오스만군에 독일제 기관총과 중포를 지급하라는 OHL의 지시조차 무시하며 길들이기를 시도한다. 그리고 그 결과 일디림 군단은 한국군의 간담이 서늘할 정도로 놀라운 감투 정신을 발휘하고도 대패를 당했으며 뒤이은 러시아 제국 공군의 폭격 세례로 괴멸되고 만다.
-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
오스만 군인들 중에서 가장 유능하고 불같은 사람이라고 언급된다. 갈리폴리에서 영국군을 막아냈던 최정예 19사단이 동부전선에서 궤멸 당해 앞날이 험난해졌다. 그래도 이후 대 터키 강경론자였던 로이드-조지 총리가 극동에서 도박을 하면서 전후에 협상국의 지중해 통제력이 약해진다는 기회도 생겼다.
14. 불가리아 왕국
- 블라디미르 바조프
플레벤 제9보병사단 분견대를 지휘하며 겨우 8천의 병력으로 러시아-루마니아군 15만을 막아냈으며 이후 버차니와 함께 코벨 전선에 참가했다고 언급된다.
15. 체코슬로바키아 군단
- 토마시 가리크 마사리크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의 지휘관으로 이상설과 비밀리에 회담하 체코 군단, 폴란드 군단 그리고 시베리아 소총병 사단과 함께 시베리아 횡단철도로 만주-한국 본토까지 철수하는 것에 동의한다.
[1] 조선 왕조 시절부터 한양에 뿌리내리고 있던 무반 명가들은 대원군의 군사 개혁과 임오군란, 갑신정변 등 수 차례의 정변 끝에 신헌(신팔균의 조부)의 가문을 제외하면 소멸했다. 본래 억세고 상무적 기풍이 강했던 북부 출신들은 조선 왕조 내내 차별 받다보니 보수적인 유림층이 없어서 빠르게 근대화의 흐름을 탔고 극동전쟁이란 전면전에서 공을 세워 날아올랐다. 상무적 전통이 희미했던 영호남은 극동전쟁에서도 제2전선으로 돌려진 탓에 실력이건 실적이건 경쟁이 되지 못 했는데, 한편으로 유림 본산이자 농업 중심으로서 근대화 흐름이 늦어서 군주를 보위하는 전통적 사고방식에 더 익숙하다보니 고종이 포섭하기에는 아주 좋았다.[2] 이 때의 인연으로 독실하지는 않아도 러시아 정교회 신자다.[3] 나이 차이 많이 나는 귀족 영애와 사귄다는 언급 때만 하더라도 황녀 설은 소수였는데, 혁명이 내전으로 번진 와중에도 아득바득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남는 것을 보고 많은 독자들이 김시진이 황녀와 사귀는 걸 사실상 확정으로 보고 있다. 형이 주도한 고종 손발 자르는 쿠데타에 행동대장으로 적극 참여한, 군주제를 딱히 신봉하지도 않는 시진과 외국인 차르의 의리가 50만 볼셰비키가 밀려오는 가운데도 남아서 지켜줄 정도의 깊다는 묘사가 없었기에 분명 이유가 있을 건데, 황녀와 사귀고 있다면 간단히 설명이 되기 때문이다(황녀라면 신분상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벗어나기 쉽지 않다). 독자들은 1918년 시점서 20대인 올가나 타티야나를 시진의 여친 후보자로 추측하는 중이다. 니키와 알릭스가 자녀들을 사교계에 보내지 않고 꽁꽁 싸고돌아 러시아 귀족들도 자주 못 보는 존재였고 21세기에 흔히 알려진 OTMAA의 모습은 10대 때 찍은 흑백 사진이라 멀찍이서 본 김시혁이 황녀임을 못 알아봐도 전혀 이상할 게 없다.[4] 경기도의 진위대 3여단을 제외하면 정규군 부대가 없어서 관서, 관북은 물론 서간도와 북간도 병마까지 전부 통솔하는 양서순무사 김시혁의 권위가 훨씬 높았다.[5] 유럽에서는 아직 전차를 단순한 참호 돌파용으로 취급하는 지휘관이 많은 반면 김석중과 한국군 장교들은 군마에겐 없는 방어력, 험지돌파력, 화력을 갖춘 차량을 적시에 지휘관이 원하는 장소에 '기동'시킴으로써 얻을 전술적, 작전적 이점에 주목했다는 점이 돋보인다.[6] 나무위키에 문서가 개설된 사창리 전투는 6.25 전쟁 당시 동명의 강원도 화천군 마을에서 벌어진 전투이다. 작중 등장하는 함경도 사창리는 실제 역사에서는 북한에 의해 신창리로 통합되었다. #[7] 원역사에서도 이응준은 이갑의 사위였다.[8] 사실 김좌진과 함께 오헝군을 급습한 것도 어차피 낙오당해서 늦었다고 벌받을 테니 기왕에 벌 받을 거 일이나 하나 저질러보자는 마인드로 지른 거다... 물론 비록 결과는 대성공이었으나 곧바로 단독행동 했다고 대대장에게 까였다.[9] 특히 항복 설득 성공으로 졸로치에 보관된 적의 군수물자들도 고스란히 원정군 손아귀에 들어가게 되면서 여운형의 언변이 큰 공을 세웠음을 입증했다. 만일 설득이 실패했다면 오헝군이 항전 과정에서 군수물자들이 멀쩡하게 러시아군 손에 들어가도록 놔두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10] 작중 양무호는 성능은 보잘것 없는 주제에 연료인 석탄 소모량은 매우 커서 전력 부족에 시달리던 대한제국에서도 운용을 포기하고 그냥 항구에서 놀고 있었다. 오죽하면 원산 상륙작전에서 1회용 병력 수송선으로 활약한 걸 두고 '군밤의 혜안(...)'이라고 할 정도다...[11] 작은 어뢰정 8척이 뭐 그리 대단한가 싶겠지만, R/D 없이 오직 견시에 의존하던 시기에는 섬 많고 꼬불꼬불한 한국 남해안에 매복시켜 치고 빠지면 일본 입장에서는 무척 골치 아픈 적수가 될 수 있었다.[12] 현지 게릴라들과 교전 및 콜레라 발생으로 3천의 사상자가 발생한다. 게릴라 진압한다고 혼춘 일대에서 학살 행위를 벌이고 열악한 보급을 보충한답시고 북청, 성진, 경흥, 함흥 등지에서 과도한 징발을 해 함경도 사정까지 악화시킨다.[13] 익문사는 당시의 정보기관 중 인지도는 가장 높으나 경운궁 화재로 인한 문서 소실 탓에 오늘날 구체적인 학술 연구가 불가능하다. 실체를 두고 이런저런 추측만 나도는 상황.[14] 원역사에서는 을사늑약 이후 자결하려다 실패해서 시력을 잃었다.[15] 엄밀히 따지면 제2차 쿠데타 이후 정권을 장악한 테크노크라트들이 전후에도 비상 대권을 놓지 않은 탓이 크다. 황제의 신임에 기반한 내각인데도 황제를 배제한 채 국정을 주도하여 집권 정당성이 현저히 부족한 내각이기에, 실권을 상실했던 고종이 여론을 업고 공작을 지속하는 것만으로도 흔들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16] 민권 확대에 적극적인 이유는 간단하다. 도시가 아닌 지방에서는 고종 지지세가 압도적이니까. 설령 하루 아침에 대통령제 공화국으로 바뀌어도 황국협회 소속 후보로 출마해 압도적으로 당선 가능한 지지세라 민권이 확대되면 될수록 근황파가 커진다.[17] 심지어는 현실의 21세기 선진국을 기준점으로 잡더라도, 작중 고종만큼 친대중적인 정치인은 드물다.[18] 제1근위기병사단장 김석중, 수도보병사단장 박승환, 제9보병사단장 노백린, 제2강습보병여단장 홍범도, 독립 시베리아 여단장 김시진.[19] 41군단 궤멸 이후 둘이 마침내 만났을 때 주인 좋다고 달려드는 골든 리트리버가 생각날 정도로 친밀하게 굴었다. 황실 인사들과 가까이 지내서 좋을 게 없는 시혁이 떨뜨름해 하자 나혼자 친한 줄 알았냐고 상처 받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활짝 웃으며 친밀한 포즈를 잡는다.[20] 급조한 총창방진과 이응준과 의친왕 호위부대가 보유한 강습소총 화력으로써 처음 돌격한 용기병대는 막아냈으나, 충격력에서 비교도 안 되는 울란의 공격은 수적·화력적 열세 탓에 막아낼 방법이 없었다.[21] 의친왕이 순종과 달리 남성으로서 능력에 아무 문제가 없었고 젊어서부터 여성 편력이 화려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건은 첫 자식이라기보단 처음으로 공인받은 자식일 가능성이 높다. 이건 역시 생모 수관당 정씨에 대해 알려진 게 거의 없고 의친왕의 이유 없는 냉대까지 더해 실은 일본인 소생이라는 소문이 돌았다.[22] 증강된 헌병대는 원정군이 복귀하는 즉시 한성을 떠나 남만주로 재배치, 수집한 정보는 원수부, 내각과 공유, 수사권 문제는 경무청에 양보.[23] 일본의 아시아주의는 극동전쟁에서 패배하고, 한국이 1차 대전에서 유럽 열강 군대를 격파하는 모습을 보면서 크게 변하게 되는데, 일본이 아닌 한국을 중심에 두거나 최소한 한국의 역할을 매우 강조하는 형태로 변화했고, 일본을 유일무이한 중심에 두는 기존 아시아주의는 일부 강경파들의 전유물이 되었다. 돌아갈 곳이 없는 한국인 친일파들은 당연하다면 당연하게도 후자에 완전히 매몰된 채 극단적인 자기정당화에 치중한다.[24] 일반적으로는 지주 세력이 가장 보수적인 세력으로서 진보적이기 마련인 학생 세력과 대립할 가능성이 높겠지만, 작중에서는 극동전쟁 때 벌어진 일본군의 잔혹행위로 말미암아 상황이 크게 달라졌다. 추정 100만에 가까운 학살이 벌어진 삼남에서 전통적인 지주 세력은 소멸했고 내장원이 주인 잃은 빈땅을 난민들에게 불하하는 방식으로 전후복구가 이뤄져 이전 지주세력과는 접점이 없는 새로운 지주세력이 나타났다. 이들이 자녀들에게 고등교육을 이수케 함으로서 자연스럽게 지주와 학생이 하나의 파벌로 뭉치게 되었다.[25] 김시혁은 인생에서 가장 후회하는 일이 3가지 있다고 하는데 2부 도입부까지 공개된 건 군인이 되겠다는 딸의 말을 흘려들은 것, 오스트리아-헝가리 무관단에게 대한군 교리를 전수해준 것 2가지.[26] 주둥이가 좁은 병 안에 든 사탕을 꺼내 먹으려 한웅큼 쥐었는데 주먹 때문에 손이 빠지지 않자 손을 놓는 정석 대신 유리병을 깨는 발상의 전환으로 기어이 사탕을 가졌다. 인형 대신 장난감 병정 가지고 놀기 좋아하고 피지컬도 남다른데 소학교 입학 앞둔 시점에 또래보다 머리 하나는 더 커서 여자아이인데도 골목대장 노릇을 했다고.[27] 그냥 쌀집 자전거도 지금의 승용차에 해당하는 고가품인데 지청천의 자전거는 강습보병대가 군마를 대신할 기동수단으로 도입한 거라 타이어 하나부터 수입산 특주품인, 정말 비싼 물건이다.[28] 오흐라나로 대표되는 러시아의 방첩 역량은 결코 독일에 뒤떨어지지 않았다. 니콜라이가 이 짓을 할 때마다 밑에선 제발 자중하라며 경고했으나 니콜라이는 방첩부서에서 알아서 잘 막으면 될 것 아니냐며 무시했다. 물론 중립국 외교관은 물론 기자들까지 대거 참석하는 기도회에서 주절주절 떠들어댄 말을 틀어막을 능력은 오흐라나가 아니라 그 누구에게도 없었다. 최종결정권자인 차르의 입에서 나온 말들은 독일이 시긴트와 휴민트로 수집한 잡다한 정보들의 거름망으로 유용하게 활용되었다. 니콜라이 2세의 머저리스러움을 대표하는 일화.[29] 다만 볼로디미르 함락 당시 니콜라이는 이미 제정신이 아니었던지라 저 초대장을 보낸 건 알렉산드라 황후였다.(물론 공로에 대한 포상이라는 좋은 의도긴 했으나 전시상황이 끝나지 않은 만큼 차라리 현장으로 훈장을 보내는 게 더 나았다.) 오히려 당시 니콜라이는 독일군이 온다는 소리에 빨리 군대를 보내라고 성화였다.[30] 그냥 주둔만 시켰으면 모르겠는데 대대적으로 증강시키고 근위 칭호까지 내리려 하니 원조 근위대인 우리는 버림받았다는 박탈감과 이 사태를 초래한 멍청한 황족 지휘관(파벨) 및 그를 임명한 황제에 대한 분노가 더해져 이 사달이 났다.[31] 참호선 돌파에 유용한 표도로프 자동소총과 척탄통, 한국에서 수입한 60, 80mm 박격포와 공병연대에 배정된 화염방사기, 방탄 방패를 농노들이나 쓰는 저급만 무기라 거부하고 소총에 총검, 기관총, 평사포만 인수했다. 그래서 고착된 적 진지를 빠르게 돌파할 수단 자체가 없었다.[32] 파벨이 대포밥으로 던져버린 11만 명의 2개 군단은 러시아가 온갖 악조건 속에서도 소모시키지 않고 완편 상태로 보전했던 몇 안 되는 부대이자 차르에 대한 충성심이 가장 강한 귀족 자제들로 구성된 근위대다. 구중궁궐 속 차르가 군내에 영향력을 투사할 수 있게 해주는 손발이었고 정권 보위의 핵심이었다. 이들이 단 한 번의 전투로 소멸하고 간신히 살아남은 생존자들은 제정에 회의를 품게 되면서 니콜라이 2세는 군내에 영향력을 상실하게 된다.[33] 정확히 말하면 브루실로프 공세 자체는 원 역사보다 훨씬 크게 성공해서 차르에게 회의적이던 자들 조차도 "일단 한 번만 더 지켜보자."라는 반응을 보일 정도의 여론 반전을 이뤄냈다. 추가로 헛짓거리만 하지 않았어도 '미래를 팔아 현재를 샀다'치고 어찌어찌 다음을 기약할 수 있었으나 멍청한 니콜라이와 궁정귀족들은 기어이 추가 공세를 벌임으로써 전부 말아먹는다.[34] 물론 김시혁은 러시아의 모신나강을 들이기 위해 딱히 도입 생각은 없었지만 그래도 경쟁자가 있으면 좋겠다 생각이 들어 일단 프로모션은 들어봤다. 이후 고종의 독단으로 인해 선계약이 체결되면서 곤혹을 치르나 30년식 소총 계약금은 고종의 사비로 낸다는 조건으로 계약이 대충 성사되며 이렇게 도입된 30년식 소총은 의병 게릴라 부대가 나름 잘 써먹게 된다.[35] 원래 역사에선 1915년에 육군대학 졸업한 뒤 대위로 진급한 상태였고 스위스 주재무관을 거쳐 1920년에 소좌로 진급한다.[36] 젊은 시절의 무타구치는 일본군의 시베리아 출병 당시 캄차카반도의 페트로파블롭스크에 잠입하여 목숨 걸고 정탐 활동을 벌일 담력은 있었지만, 이건 야전부대 지휘관에게 필요한 전투 경험은 아니었다. 현지 파르티잔과 싸워 본 경험도 없고, 1917년 육대 졸업 후 육군성 운수부 선박반에 배치되어 중국으로 좌천되는 1936년까지 대략 18년간 배 부르고 등 따뜻한 육군성과 참모본부만 돌며 야전에서 지휘 경험을 쌓지도, 1차 대전 관전장교로 파견되지도 않았다. 군임임에도 전쟁이 얼마나 어렵고, 무서운지 전혀 모른채 팬대만 잡다 나이 먹고 계급만 올라간 무타구치는 노구교에서, 임팔에서 연달아 무책임한 행각을 벌인다.[37] 물론 러시아도 극동전쟁 때 같이 싸워준 혈맹이니 만큼 프랑스에 비하면 적을 뿐이지 도움 자체는 잘해준 편이다.[38] 흔히 생각나는 무작정 닥돌이나 열화된 일본식 버전이 아닌, 포슈가 주창하던 대로 재대로 된 교리로 이식된다.[39] 당시 육군참모총장은 전략 및 작전을 제안하고 조언할 수 있을 뿐인 자리였다.[40] 장갑차를 따로 운용해 본 적이 없는 상태로, 러시아군의 장갑차 대대를 넘겨받은 한국군이 당연히 러시아의 장갑차 운용 독트린에 따라 대단위 부대를 딸릴 것이라 여겼으나 정작 김시혁은 1개 장갑차 중대에 강습보병 1개 중대만 붙이는 바람에 한국군 예비대 계산이 완전히 틀려버렸고 프랑스 교관들에게 배우고, 프랑스제 야포를 사용하는 한국군 포병대가 프랑스식 평사포, 곡사포 혼성 운용을 할 것이라 여겼으나 한국군 포병대는 곡사포로 통일된 상태라 일방적으로 밀린 끝에 곡사포를 대거 망실하고 만다.[41] 다만 이때는 독일의 외교 장관이 대한제국은 러시아와 프랑스의 사실상 종속국이라 우리보다 그들과 더 친밀했을 것이라는 팩트를 들려준 덕에 머지 않아 진정되긴 했다.[42] 사실 이것도 말이 안되는 게 우선 중국은 호국전쟁 중이라 여력도 없는데다 우세를 보이고 있는 호법군의 수뇌부는 대한에게 지원을 받은지라 굳이 독일의 말에 휘둘릴 이유도 없다. 칭다오라도 있었다면 모를까 이시기 칭다오는 이미 일본에게 장악되었으니 독일이 직접 외압을 넣을 방법도 없다. 일본은 대한제국에 대한 적개심은 확실하지만 이미 러시아의 관동주 매각 떡밥에 혹해서 자국군용 소총까지 탈탈 털어 지원한 지라 여력도 없고 무엇보다 독일의 적국인 영국과 동맹이다. 즉, 대한제국 공격은커녕 이 전보를 고스란히 영국에게 넘기지만 않아도 다행일 지경이다.[43] 동부전선도 신경 써달라는 힌덴부르크의 요청을 무시하고 독일 전력의 6할 이상을 서부 전선에 배치한 게 팔켄하인이라 자업자득이다.[44] 브루실로프 공세에서 독일군이 털리던 당시 서부전선의 베르됭 공세는 두오몽 요새를 함락시키며 독일 입장에서 승산이 보이던 상황이었으니 이쪽 세계에선 베르됭 전투가 아닌 한국군의 참전이 1차 대전의 결정적 분기로 받아들여질 가능성이 높다. 물론 일부 전쟁사 연구자들은 한국군이 참전하지 않았어도 독일군은 베르됭에서 돈좌되고 주도권을 내줬을 거라 주장하겠지만 일찌감치 역사가 바뀌어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이 러시아군에게 너무 큰 패배를 안겨주고 그게 서부전선에도 영향이 간지라 다수설이 되긴 힘들것이다. 오히려 대부분의 사람들은 한국군 미참전시 베르됭에서 독일이 이겼을 것이라 if를 돌릴 가능성이 크다.[45] 정확히 말하면 팔켄하인이 소령 시절 적은 보고서가 있긴 했지만 그것도 10년이 넘게 지나 현 1차대전 시점에서 쓰기에는 지나치게 낡은 정보였다.[46] 물론 당시 러시아 제국을 제외한 유럽에서 김시혁과 한국군의 진상을 정확히 아는 인물은 페르디낭 포슈와 팔켄하인 정도 뿐이라 힌덴부르크만 뭐라 할 순 없다.(미국까지 포함한다면 퍼싱도 존재한다.) 그 시점에서 한국이 당대 유럽 국가들보다 전술 측면에서 앞선다는 걸 당대 유럽인 중 누가 쉽게 믿겠는가?[47] 한국군이 장비만 1차 대전~전간기 수준인 현대군이라 기관총 넘겨줬어도 쉽진 않았겠지만 부르실로프 공세 때처럼 아군은 할 수 있는 모든 수를 다했지만 적의 수준이 그보다 더 높아 패한 것이 아닌, 이쪽에서 모셔온 동맹국 군대를 고의적으로 지원하지 않은 상황을 연출해버렸고 이건 패배의 책임을 린징겐 개인에게 돌려버릴 수도 있는 사안이다.[48] 보급선에 가해질 위협 탓에 수적 열세에도 방어 전면을 줄일 수 없는 한국군은 남겨둔 예비대를 전부 끌어올 수 밖에 없고, 넓은 방어선을 지탱하느라 과부하가 걸렸을 때 남겨둔 군단으로 크게 우회해 한국군의 후방을 타격, 보급선을 완전히 차단하고 앞뒤로 포위 섬멸한다는 계획.[49] 장병들 처우도 좋아서 군악대원들은 오페라 극장 공연을 시작으로 여기저기 초청을 받고, 제빵병들은 독일식 베이커리를 황제 식탁까지 올리며 돈을 버는 데 원 역사에서의 일본이 그랬듯 전간기에 일부가 정착하거나, 독일계 문화가 이식될 가능성이 높다.[50] 퍼싱과 프랑켄슈타인 마피아는 12,000~18,000명 규모의 현대식 사단 편제를 선호하고 있으나, 올드 해빗은 적들보다 훨씬 많은 예비대를 구사해 진정한 공포를 가져다준다는 주장으로 25,000~28,000명 규모의 대규모 사단을 편성해야한다고 주장하는 중이다. 무시하고 가자니 1차 대전기 미군 훈련 상태가 워낙 부실해서 이게 꼭 틀린 말도 아니라는 게 문제.[51] 자본을 기반으로 미국 정계에 로비를 하며 친한파 정치인 세력 구성에 한 몫을 했다. 일본 역시 한국 광산업을 꽉 쥐고 있는 그를 포섭하려 했으나 지금 나보다 돈 많은 건 한청일 삼국의 지도자들 뿐인데 겨우 그 돈으로 나를 포섭하려고 하냐며 쿨하게 무시했다.[52] 김시혁과의 첫 대면에서부터 너무 자연스럽게 인종차별적인 발언이 나와서 살짝 지적하자 오히려 뭐가 문제였냐면서 되묻는가 하면, 도중에 부친이 목화밭에서 흑인들을 채찍질하던 것을 회상하는 묘사도 나와 독자들이 기겁했다.[53] 의화단 운동 당시 남부연합 국기를 걸어두었다가 미군과 시비가 트여 김시혁이 중재하는데 고생했고 하코트에게 일침을 먹이기도 한다.[54] 특히 남포에서 흉갑기병대를 이끌고 일본군 근위기병연대를 궤멸시키면서 연대기를 탈취하기도 했다.[55] 이때 집에 있던 카메라를 전당포에 맡겨서 여비를 확보했는데 그의 이름을 본 김시혁이 그 할아버지에 그 손자라고 웃으며 합격시켜주는 동시에 전당포에 맡겨진 카메라도 다시 찾아와 줬다.[56] 존 브라우닝이 설계한 반자동화기인 Auto-5나 레밍턴 모델 8는 롱 리코일 작동방식이며, 그가 설계한 각종 권총이나 기관총들 대다수가 블로우백, 쇼트 리코일로 작동한다. M1895 콜트-브라우닝 기관총과 M1918 브라우닝 자동소총이 가스 작동식이지만 둘 다 큼지막한 소총탄을 쓰는 물건이기에, 원역에서 그가 제작한 총기 중 중간탄과 가스작동식이 조합된 화기는 없다.[57] 콜트 M1929. 원역에서 미군 반자동소총 사업에 참여했다 탈락했으며 이 소총의 설계를 기반으로 제작한 게 M1 카빈이다.[58] 이게 놀라운 이유는 윌슨 대통령은 민주당 소속이기 때문. 즉, 군대가 너무 심각하게 보인 나머지 반대당의 정책을 지지하고 있는 것이다.[59] 정확히 말한다면 캐나다 국적이지만, 1부의 배경인 동학 농민 혁명~러일전쟁 시기 캐나다는 완전한 독립국이 아니라 자치령이었으므로 내정 자치권은 있었어도 외교권과 군사권은 영국이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매켄지가 죽을 때도 캐나다는 여전히 독립된 상태가 아니었기에 매켄지의 국적은 영국 국적이라 할 수 있다.[60] 이때 주한 영국영사가 멋대로 종군 기자단 이탈해 한국 취재하면 바로 체포한다고 엄포를 놓자(영국은 일본의 동맹이었기 때문.) 잡을테면 잡아보라는 패기를 선보인다.[61] 애초에 헤이그는 제1차 세계 대전 이전에, 보어 전쟁에서 추태를 보였던 영국군의 개혁 당시 실무를 총괄했던 인물이다. 다만, 아내를 통해 얻은 왕실의 지지를 바탕으로 정치질로 자신의 역량보다 더 높은 자리에 앉은게 문제였던 것이다.[62] 이때 홧병의 계기는 대한제국 덕이었는데 우선 대한제국이 만주에서 움직임을 보이며 주력군이 묶인 탓에 호법군을 제압하지 못한 것이 1차 원인이요.(이때 눈에 보인 집기류는 다 부숴버렸다고 한다.) 그래서 해군에게 지원을 요청하자 해군이 쑨원 지지를 선언하며 위안스카이에게 사임하라고 종용한 것이 2차 원인이고 자신이 이렇게 망한 배후에 조선과 프랑스가 있음을 안 것이 결정타로 작용했다.[63] 정확히 말하면 직접 지원해주는 건 일본의 기업인 미쓰이 물산으로 한국은 직접 지원할 수단을 미쓰이 물산에 지급해 세탁 과정을 거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