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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대한제국3. 러시아 제국 → 전 러시아 임시정부4. 소련5. 일본 제국6. 프랑스 제3공화국7. 독일 제국 → 바이마르 공화국8. 미합중국9. 대영제국10.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11. 청나라 → 중화민국12. 폴란드 제2공화국13. 이탈리아 왕국14. 오스만 제국 → 튀르키예국15. 불가리아 왕국16. 체코슬로바키아 군단17. 벨기에 왕국18. 그리스 왕국
1. 개요
본 문서는 한국의 대체역사 웹소설 『조선에는 쿠데타가 필요해요』에 나오는 등장인물과 그 행적을 서술한다.2. 대한제국
2.1. 군부
김민재가 김시혁에 빙의한 1894년 시점에는 한성구락부로 뭉친 근왕파, 허진을 중심으로 한 대원군파, 안경수, 우범선, 이두황 등을 포진한 친일파로 나뉘어 알력 싸움이 치열했다. 이후 대원군이 사망하면서 대원군파가 자연스럽게 와해되자 근왕파와 친일파라는 양강 체제가 성립되었다.[1] 이후 을미사변과 1차 친위 쿠데타를 거쳐 근왕파가 주도권을 쥔다.내각의 친일파는 1903년 2차 쿠데타와 1905년 극동 전쟁 승리를 거쳐 비로소 척결되나, 군부는 1895년 1차 쿠데타를 기점으로 친일파를 대부분 털어내는 데에 성공하여, 2차 쿠데타 직전 친일파 고급 지휘관은 강종의 비호를 받은 이병무 1명뿐이었다. 대원군 시절 군인 우대 정책과 2차례 쿠데타를 거친 탓에 자칫 군국주의로 흐를 위험성을 내포하게 되었으며, 수장인 김시혁이 문민통제를 철저히 강조해 이를 제어하고 있다.
1차 세계대전이 무대인 2부에서는 게릴라전 경험만 있어 적극적 참전을 주장하는 남부 출신과 사람 목숨이 종잇장보다 가벼운 전면전을 겪어 보고 신중론을 주장하는 북부 출신 지휘관들의 성향이 나뉘는 모습을 보인다.
충청도를 경계로 지휘관들의 위상이 확연히 갈리는데 영관급 이상 고급 지휘관 절대다수가 극동전쟁에 공을 세운 북부, 특히 서북 출신들이고 일부 예외도 기호 지방 출신들이 차지하고 있다.[2] 군부를 견제할 기회만 노리던 강종은 출세길에서 밀려난 영호남 출신 장교들을 근황파로 끌어들여 갈라 치기를 시도한다. 김시혁이 확실한 구심점으로 존재할 때는 단순한 의견 다툼 선에서 정리될 수 있었으나 김시혁이 유럽으로 떠난 사이 강종이 근황파를 키워주겠다며 지속적으로 군 내부에 침투해 구주원정군을 제외한 잔류 육군부대 상당수가 오염된다.[3] 이 군 내 근황파가 주축이 되어 2.27 계엄령을 일으키나 김시혁에 의해 제압되고 강종도 퇴위하면서 군부 내 근황파는 뿌리가 뽑혔다.
2.1.1. 육군
- 김시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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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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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계훈
작중 초기에 빙의한 김시혁과 함께 경복궁에서 일본군과 싸우며 만났다. 무예는 쓸만하지만 뺀질거려서 못 미더운 장교였던 김시혁의 변화에 감탄하고 그의 조언에 따라 친위영 창설을 돕는다. 김시혁, 이규태, 원세록과 함께 한성구락부라는 이름의 군관 및 관료 모임을 발족시켰으나, 강종이 김시혁의 조언을 무시한 탓에 을미사변 때 원래 역사대로 전사한다. 함께 한 시간은 짧지만 일개 장교였던 김시혁이 현재의 위치에 도달하는데 많은 도움을 준 후원자.
- 이규태
홍계훈과 함께 김시혁이 처음 만난 후원자이자 전우. 경복궁 습격에서 김시혁의 활약을 눈여겨보고 먼저 다가와 친한 사이가 되었다. 동학 농민 운동 진압을 함께 했으며, 홍계훈 전사 이후 든든한 상급이자 한성구락부 창설 멤버로서 김시혁의 방식을 실현하는 데 조력을 아끼지 않는다. 강종의 무리한 대청 선전포고와 남만주 진격 때 평안도 방면군 사령관을 맡아 중앙에서 뭐라 하든 무리한 진격을 지양하고, 한인촌들만 점령하는 신중한 움직임으로 불필요한 희생을 막았다. 이때 강종에 대한 인식이 완전히 틀어져 2차 쿠데타 때 근위사단장으로서 적극 협력했으며 극동전쟁이 발발하자 근위사단장 겸 황해, 경기, 강원 병마를 통솔하는 삼도통어사를 겸임했다.[4] 이 시기 주로 담당한 업무는 근위사단장으로 강종을 보필하며 그의 헛소리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기. 극동전쟁 종결 후 육군 대장 겸 원수부 총관으로 영전한다.
김시혁이 구주원정군을 이끌고 출국한 뒤 국내에 남아있는 한국군을 이끌며, 연해주에 있는 한인들을 보호하기 위해 직접 군을 이끌고 연해주로 출병하려 했지만 이승만이 일본과 밀약을 맺고 철군을 지시하자 분노하지만 어쩔 수 없이 철군한다. 그러나 이승만에게 골탕을 먹이기 위해 철군하면서 2만 여정의 화기와 탄환 500만 발을 비적의 습격을 받아 잃어버린 척하며 호르바트 총독의 군사들과 연해주 한인 민병대에게 전달했다.
강종이 한성부에서의 시위를 강경진압하면서 3사단과 8여단까지 한성에 불러들이려 하자 충무계획을 발동시키며 김시혁이 역습을 위해 원수부 병력 대다수를 이끌고 출동한 사이 헌병대가 원수부를 함락시키러 오자 이갑에게 자신의 권총을 주면서 최선을 다해 원수부를 사수한다. 이후 2.27 계엄령이 진압되고 체포된 강종이 의친왕에게 양위를 거절하고 발악하자 거부하면 어떻게 될지 모른다며 칼자루를 잡고 압박한다.
- 원세록(元世祿)
전주에서 동학 토벌할 때 홍계훈을 보좌한 장위영 대관. 김시혁, 홍계훈, 이규태와 함께 한성구락부 창설 멤버. 경복궁 습격 이후 신설된 친위영에선 1중대장을 역임했고 동학 2차 봉기 진압에도 함께한다. 을미사변에서 홍계훈이 전사한 이후 다른 구락부 멤버들과 마찬가지로 은인자중하다 을미의병 토벌 명령을 받고 남부에 파견되었을 때 성하영, 남만리와 함께 부대 전체를 이끌고 의병에 합류해 버린다. 이규태도 나주에서 민종렬에 합세해 버려 전력이 절대적으로 부족해진 친일 내각은 평양에 있던 김시혁을 불러들이는 자충수를 둘 수밖에 없었다. 1차 쿠데타 성공 이후 병기와 탄약 조달을 책임진 포공국장에 임명되어 김시혁이 무기 개발이나 작전 계획 시 우선적으로 찾는 사람이 된다. 시혁이 수류탄과 척탄통 개발할 예산을 부탁하러 갔을 땐 강종이 즉위 40주년 열병식에 쓸 공포탄을 제조하느라 예산을 다 끌어가 남는 돈이 없다는 맥빠지는 대답을 들려줬다. 극동전쟁이 종전되고 3년 후에 병사했다고 언급된다.
- 엄주익
원세록의 후임 포공국장. 강종이 총애하는 엄귀비의 7촌 조카로 강종과 각을 세운 원수부 내 대부분 인사들에게 백안시 당하나, 김시혁에게 무척 우호적이고 군수보급 측면에서 인식이 무척 깨어있어 김시혁은 믿고 중용한다. 극동전쟁 종전 후 일본군의 패전 원인은 보급 문제임을 지적하는 책을 써서 김시혁에게도 호평을 받았고, 군의 개혁을 위해선 교육이 우선시 되어야 한다며 엄귀비를 설득해 학교를 세우는 등 이 시대 기준으로 무척 선진적인 안목의 소유자이다.
포공국장에 오른 뒤 가장 적극적으로 추진한 사업은 소총 개량인데, 한국군 주력 소총인 아식보총이 한국인 체형에 맞지 않으며 산이 많은 지형에서 불필요하게 길고 무겁다는 문제의식을 품고 개량 개발을 적극 주장했다. 극동전쟁의 전투 양상을 철저히 분석해 소총수 간 교전 거리가 평균 50~150m 사이이며 길어도 200m을 넘지 않음을 자료로 제시하고, 현장에서 실전을 겪은 지휘관, 참모들의 공감을 끌어냈으며, 직접 사비로 견본까지 제작해 강력하게 밀어붙인 끝에 M91/10이라 명명된 단축형 모신나강이 한국군 제식 화기로 빠르기 자리 잡는다. 총이 가벼워지면서 야지에서 피로도가 감소하고, 탄도 더 많이 휴대할 수 있어 산악전, 기동전 위주인 한국군의 전력 상승에 크게 기여했다.
서부전선 참전을 앞두고선 김시혁이 소극적인 가운데 적극적으로 밀어붙여 대전차 소총을 개발해 보급했다. 업무 특성상 군수국장 민영찬과 자주 합을 맞춘다.
- 백성기
군부협판. 신식 군제와 군 규모 증강에 따르는 내부 모순과 기강 해이를 방지코자 서구식 육군법원, 군사법제도 정착에 앞장섰다. 군비 확장에도 비판적으로 원수부의 장교들과는 자주 얼굴을 붉혔고, 국가헌병대 초대 국장인 민영환과도 서로의 영역을 침해한다고 생각해 자주 부딪친다. 하지만 공사 구분이 확실하고 관료로서 책임감이나 능력엔 모자람이 없어서 러시아와의 모신나강 도입 사업을 최대한 한국 쪽에 유리하게 짜이는 데 공헌했고 한성을 포기하는 것을 전제로 한 김시혁의 오방색 전쟁계획에 대해서도 한성 방위는 어렵다며 적극 지지해 주었다. 의화단 진압에 군대를 보내 개입하겠다는 강종의 선언에 끝까지 반대했고, 정식으로 청에 선전포고하고 전쟁을 최대한 길게, 크게 키워 자신의 권위를 세우려는, 대한제국의 얼마 안 되는 여력을 다 까먹게 할 강종의 몽니에 대해서 민영환에게 김시혁에게 최대한 물자를 지원해 줘 예정보다 빨리 북상시키는 방안을 제안하여 대한제국이 씻을 수 없는 피해를 입는 걸 막았다.
의화단 진압이 마무리 된 후에는 앙심을 품은 강종의 보복으로 육군법원으로 좌천되었는데, 법원을 설립하고 군법을 만들며 원수부 인사들과 부쩍 가까워진다. 대한제국 해군이 창설될 때는 구 수군통제사 출신을 국장으로 세워야 한다는 한규설, 민영환에 맞서 출신 불문하고 바다를 잘 알면서 체계를 세울 수 있는 인재를 세워야 한다는 주장했고, 김시혁도 그를 지지해 장기렴을 국장으로 세운다. 김시혁의 2차 쿠데타에도 순순히 협력해 전시내각에서 활동했고 10년이 지난 2부 프롤로그 시점에선 극동전쟁 이후 몇 년간 잠시 농상공부대신을 역임한다.
2부 시점에서는 경기 관찰사 겸 내부 참판으로 가택연금된 김가진을 대신해 내부 업무를 맡으며 원수부, 군부, 해군부에 기관총으로 무장한 경기 경무청에 순검대를 파견해 주겠다고 제안했지만 헌병대가 이것을 빌미로 공격할 수 있어 원수부, 군부, 해군부는 이를 거절한다. 육군법원장 재직 시절 원수부 검사국과 함께 '상관의 지시가 합당하지 않거나, 혹은 반란 내지 반역에 준하는 상황으로 연결되는 경우 예하의 지휘관 내지 장병들이 이를 거부해도 좋다'는 규정을 발표해서 군부가 강종의 비이성적인 발포 명령을 거부할 수 있는 법적 근거를 제공했다.[5] 2.27 계엄령이 진압된 이후 의친왕의 지시를 받고 대장 진급을 스스로 포기한 뒤 육군법원장 겸 원수부 검사국장으로서 2.27 계엄에 책임이 있는 자들에 대한 재판을 전담한다. 저격수 거리를 조성해 시민들을 사살한 헌병대원들에게는 교수형을, 계엄과 학살의 주동자인 이재곤, 이근상, 박두영에게는 이등졸 강등후 총살형을 선고한다.
- 김석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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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승환
왕성한 공격 정신으로 주목받은 지휘관으로 의화단 진압부터 극동전쟁까지 쭉 참전한다. 원래 역사에서 일본의 군대 해산에 항거해 자결한 인물답게 패전 후 자결하는 청군 지휘관들의 심정을 이해하고 동질감을 느끼는 장면이 있다. 극동전쟁 당시에는 참장 겸 근위사단 제1여단장으로 강종을 보위해 함흥에 먼저 들어갔다 함흥 사창리 전투에 참전.[6] 2여단장 이기표와 함께 후방 차단을 담당해 6여단의 맹공에 무질서하게 퇴각하는 일본 2사단을 와해시키고 사단장을 생포하는 전과를 올렸다. 2부 도입부에선 5사단장을 역임했고 본편에선 수도보병사단장으로 전임되어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다.
러시아 시베리아 군단과 수도사단의 전투지경선을 파고든 독일 41군단 2개 사단의 맹공을 1개 사단만으로 감내해야 하는 상황에서 많은 피해를 보면서도 전선을 유지해냈고 지원 병력과 함께 역으로 41군단의 숨통을 끊는 공세를 성공시킨다. 하지만 서부전선에서는 목표를 빠르게 이루겠다는 욕심에 제1근위기병사단 소속 정찰중대를 상부보고 없이 멋대로 빼서 사용했다가 김시혁의 분노를 샀다.
귀국한 이후 수원에 주둔하던 도중, 시위 강경 진압을 막기 위해 원수부에서 충무 계획이 떨어지자 사적으로 친한 관계였던 수원부 유수를 포섭하며 헌병 분견대를 제압한 뒤 수원역을 점거하며 제8보병여단과 대치한다. 그러던 도중 황제가 의친왕으로 교체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된 제8보병여단이 결국 항복하자 이들을 무장해제시킨다. 김시혁이 전우와 동학 잔당의 반란을 토벌 할 때 곁에서 보좌한다.
- 이기표
의화단 진압 당시 참령 계급으로 시위보병대를 인솔해 참전했고 귀국 후 근위사단 제2여단장으로 보직된다. 사창리 전투에서 박승환과 함께 후방 차단 역할을 맡아 도주하는 일본군 2사단 패잔병 2천 명을 포로로 잡는다. 1차 세계대전 당시 김시혁이 원정사령관이 되어 작전국을 떠나자 작전국장 대리를 맡았으며, 그 뒤 대장 진급 및 작전국장 취임이 예정되어 있었지만, 원래 9사단장이었던 노백린이 호로군 문제 수습을 위해 서부전선에서는 참전을 못하자 대장 진급을 스스로 포기하고 9사단장이 되어 서부전선에 참전한다. 귀국한 이후 개성에 주둔하던 도중, 시위 강경 진압을 막기 위해 원수부에서 충무 계획이 떨어지자 개성 부윤과 함께 근황파인 개성 유수를 제압한다. 이후 영등포에서 3사단의 진입을 저지하던 도중 구축함이 한강을 거슬러 올라가자 해군 근황파 장교가 무단 이탈하여 원수부를 공격하는 줄 알고 놀라 이를 원수부에 알렸지만 장기렴이 원수부 지원을 위해 출동시킨 구축함이라는 연락을 받고 안심한다.
- 민영기
경기도 방위를 책임진 진위대 3여단장. 머릿수만 겨우 채웠을 뿐 제대로 된 훈련을 받지 못하고, 무장도 부실한 3여단이 방어에 부적합하니 퇴각하라는 원수부 지시를 거부하고 주안산에서 일본군을 저지하는 길을 택한다. 일본군은 그가 반정부 성향이 강하고 일본군과 친밀한 탓에 아무런 저항 없이 통과할 수 있을 거라 기대했지만, 정치적 현실이 마음에 안 들었을 뿐 조국이 어디인지 정도는 알았던 인사이기에 저항을 택한다. 원수부에서 무슨 일이 있어도 3일간은 일본군을 저지하라는 지시를 하달 받은 뒤 전화에 달라붙어 예하 제대 하나하나 전술 지시하는 신들린 솜씨로 버텨냈으나, 수적으로 월등한 일본군 상대로 한계가 또렷했고 전투 3일차에 지휘소까지 난입한 일본군과의 육박전 끝에 전사한다. 비록 그는 전사했으나 포병대의 지원에 힘입어 함락 위기에서 벗어난 3여단은 원수부에서 지정한 3일보다 이틀을 더 버텨내고 잔존 병력을 수습해 퇴각하는 데 성공한다. 죽기 전까지 그가 들고있던 권총은 황준성이 가지고 있다.
- 성하영(成夏永)
김시혁이 친위영 2중대장으로 발령받았을 때 3중대장으로 함께 한 인물. 4중대장 남만리와 함께 창설 멤버인 김시혁, 홍계훈, 이규태, 원세록에 바로 뒤이어 들어온 한성구락부 초창기 멤버이기도 하다. 김시혁, 이규태, 남만리와 함께 동학농민군 진압에 활약했다. 을미의병 토벌을 명 받자 다른 멤버들과 함께 그대로 의병에 합류해 친일 내각이 평양의 김시혁을 불러들이는 선택을 하게 만든다. 1차 쿠데타 이후 남만리와 함께 친위대 연대장 이규태를 보좌하는 대대장으로 임명되었으며 대청개전 이후 이뤄진 북벌 때는 실질적인 참모 역할을 수행해 아군 피해를 줄이는 데 이바지했다. 극동전쟁 때는 진위대 4여단장. 그가 이끈 4여단은 6여단과 함께 가장 먼저 창설되었고 평양 방어의 핵심으로 진위대 중에서도 손꼽히는 부대였으나 예비대로 분류되어 평양 방어전 때는 참전하지 않았다. 2부 시점에서는 일선에서 물러나 원수부 인사국장을 역임한다. 동부전선 참전이 확정되고 인선이 발표되자 강종이 김시혁의 측근 지휘관들로만 꾸려진 인선에 불만을 품고 있다는 사실을 넌지시 알려준다. 김시혁이 유럽에 가있는 사이 추진된 연해주 출병에 참여했으며 이승만의 개입으로 출병이 좌절되자 불편한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3월 혁명이 끝난 뒤 지병과 고령으로 더는 직을 수행하기 힘들다는 이유로 전역계를 제출한다.
- 신태휴
극동전쟁 시점 진위대 7여단장. 평안도 방어전에 주축을 담당, 흑교에서 일본군 근위사단 절반, 황주에서 일본군 2사단과 12사단, 한국주차군 소속 후비대까지 총동원한 대군을 여단 병력으로 저지하는 임무를 맡는다. 수적으로 압도적인 일본군을 악착같이 틀어막아 남포 방면으로 접근하는 일본군을 섬멸하고 재편성할 시간을 벌어준다. 기존 여단 병력에 투입된 예비대까지 모두 소모전 끝에 녹아버리는 처참한 피해를 입고 본인도 부상을 입은 상태로 최후의 항전을 준비해야 할 상황에 몰렸다가 원수부에서 급히 지원한 강습보병대대와 독립기병대와 협력해 간신히 일본군을 밀어낸다. 사실상 전투력을 상실한 7여단은 종전 때까지 재편성에 주력했다. 2부 시점에선 일선에서 물러나 현흥택과 함께 신병 육성에 전념한다.
- 현흥택
한성구락부에 가입한 모습으로 첫등장했으며, 극동전쟁 시점 진위대 8여단장. 2부 시점에선 일선에서 물러나 신태휴와 함께 정예신병 양성에 주력한다. 서부전선 참전을 앞두고 프랑스 현지에 신설된 FTC(야전훈련사령부) 실질적 총책임자가 되어 오합지졸 미군을 싸울 수 있는 군대로 훈련시킨다. 귀국 후 전역한 성하영의 후임 인사국장으로 임명되어 헌법 반포식, 정식 즉위식, 열병식 같은 대규모 행사를 도맡아 진행한다.
- 노백린
무관학교 1기생. 의화단 운동 당시 6여단 1대대 1중대장으로 국경을 침범한 비적들을 상대하며 등장한다. 의화단 진압을 위해 편성된 임시연대에 배속되어 중국 본토에서 전투를 치렀고 극동전쟁 때는 6여단 3대대장으로 진급해 사창리 전투에서 일본군 2사단 병력을 유인하는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한다. 의화단 진압 당시 이탈리아 왕국군 베르살리에리에 깊은 인상을 받아 귀국 후 자신이 지휘하는 6여단 3대대 병사들을 한국판 베르살리에리로 탈바꿈 시킨다. 그의 3대대는 군모에 수탉 깃을 꽂아 장식하고 기병대에 뒤지지 않는 기동성을 자랑하는 보병으로 유명해진다. 극동전쟁이 종결되고 1914년 장작림 토벌 시점에는 7여단장. 1차 세계대전 참전이 결정되자 김시혁의 강력한 추천으로 정해진 기간보다 훨씬 빠르게 부장으로 진급해 원정군 9보병사단장에 임명된다.
마녀의 숲 전투에서 1개 사단으로 1개 군단을 상대하는 극한 상황에 내몰리나 적절한 예비대 운용과 원정군 사령부의 지원으로 방어선 사수에 성공한다. 동부전선에서 귀환한 후 근황파들이 제대로 꼬아 놓은 호로군 문제 수습을 위해 만주로 떠나게 되어 서부전선 원정군에서는 빠진다. 이후 이승만의 전보를 받은 김시진이 합이빈에 도착하자 맞이하며 김시진에게 현재 이동하기 어려운 상황과 맹은원이 불온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어 만주 사정도 여의치 않다고 알려주며 어차피 김시혁이 독단적인 행동을 용인하지 않을테니 빌미주지 말고 김시혁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자고 제안한다.
- 어담
무관학교 1기생. 노백린의 동기로 병과는 포병. 서남해 해적 토벌에 임관을 앞둔 생도들도 뒤따르게 하면서 첫 실전을 겪는다. 김시혁 앞에서 구닥다리 극노백포의 단점과 이 단점이 불러오는 전술적 제약을 상세히 설명하면서 상당한 인상을 주었고 동기와 마찬가지로 순조롭게 진급해 극동전쟁 시점에선 원수부 포병 참모로서 원수부의 화력 계획 전반을 입안하는 중책을 실수 없이 수행한다. 1차 세계대전 참전이 결정된 1915년 시점에선 참장 진급을 앞둔 정령이었고 원정이 시작될 무렵 참장으로 등장한다. 극동전쟁 때와 마찬가지로 원정군의 화력 계획을 전담하게 되는데 조금만 삐끗해도 보급난으로 허덕이게 되는 이역만리 동유럽 땅에서 끝없는 반복 숙달 훈련과 현지 지형, 기후를 철저히 반영한 계획 수립으로 최소한의 포탄 소모로 최대의 효과를 뽑아내는 데 성공한다.
김시혁은 어떤 상황에서도 가장 경제적이고, 효과적인 화력 계획을 세워 지휘부의 의도를 수행해 내는 유일한 포병지휘관이라고 높이 평가하며 전폭적인 신뢰를 보낸다. 볼로디미르 점령 이후 포탄 사용을 3분의 1 이상 줄여야 한다는 군수참모의 제안에 대해 난색을 표하면서도 김시혁이 변함없는 신뢰에 해보겠다며 가진 역량을 총동원해 효율적인 화력전을 전개한다. 그 덕에 독일 제국 측에서도 김시혁과 함께 한국군에서 가장 경계해야 할 지휘관으로 손꼽히기도 했다. 원정군이 동부전선에서 귀국한 이후 부장으로 진급했다.
최소한 포탄 걱정은 할 필요가 없어진 서부전선에서는 새로 도입된 155mm 중(重)포와 기존의 75, 105mm 운용 노하우를 더해 프랑스, 독일 포병보다 훨씬 빨리 75mm-105mm-155mm 3단계 운용 교리를 확립한다. 아군 기동로 보존과 인마살상, 종심타격을 동시에 원활히 수행해는 포병의 예술로 독일 100만 대군을 막아세우는 원정군의 망치로 활약.
- 이갑
일본육사 유학생 출신으로 원수부 주요 보직을 역임하는 이채로운 인물. 그의 일본 유학은 을미사변과 1차 쿠데타 이후 한반도에서 영향력을 상실한 일본이 펼친 유화책의 일환으로 장차 일본에 충성하는 장교를 육성하려는 포석이었지만, 정작 이갑을 비롯한 유학생 전원이 조국과 운명을 함께 하겠다며 함흥으로 가버린 탓에 일본은 죽 쒀서 개 준 신세가 되었다. 괄괄한 성격으로 일본물 먹었다는 곱지 않은 시선에도 아랑곳 않고 할 말 다 하고 사는 인물. 첫 등장 때도 김시혁을 상대로도 대담하게 이견을 제기한다. 관북전선의 일본군 주력이 아직 여유가 있다고 판단한 김시혁과 달리 적의 공세 패턴이 전과 전혀 다름을 지적, 일본의 공세 역량이 한계에 달했다는 의견을 피력했고 정확히 들어맞았다. 이갑의 이의 제기가 없었다면 한국군 주력의 진군이 늦어져 원산을 탈환한 강습보병대와 원수부 직할수색대로서는 퇴각하는 일본군 본대에게 전멸하는 결말밖에 없었으니 굉장히 시기적절한 조언이었다.
극동전쟁 종전 후 작전국 제1과 과장으로 임명. 군 예산 편성 방향을 두고 세방과 해방으로 주장이 나뉘자 세방을 지지하며 해군 4성장군 장기렴과도 언쟁을 벌인다. 동부전선 참전이 결정된 시점에 참장 진급을 앞둔 정령이었고 원정이 시작될 무렵 참장이 되어 원정군 참모장으로 임명된다. 원정군이 동부전선에서 귀국한 이후 부장으로 진급했고 이응준을 마음에 들어 해서 사위로 삼는다.[7] 헌병대 부총관 박두영과 앙숙 관계라 1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헌병대가 점점 기승을 부리자 가족들이 보복 당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 가족들을 사위 이응준을 통해 미리 수원부로 보낸다. 이후 익문사 독리 이호석의 작전으로 병력이 거의 없는 원수부를 헌병대가 공격하여 원수부가 위기에 처하자 비전투병과 인원들까지 전부 추스려 해군이 도착하기 직전까지 방어전을 펼친다. 전투를 독려하다 어깨에 총상을 입어가면서도 항전 의지를 불태웠고 해군 도착시까지 버티는 데 성공한다.
1921년부터 시작되는 2부 외전 시점에서는 대장으로 진급하며 원수부 작전국장이 된다.
- 김인수
군내에서 러시아어에 가장 능통한 인물로 러시아식 이름은 빅토르 김. 러시아에서 파견된 군사고문단을 맞이하며 등장한다. 극동전쟁이 발발하자 이범윤이 간도에서 창설한 후비기병대 지휘권을 넘겨받고 미쉔코 준장의 제1시베리아 군단과 함께 행동했다. 미쉔코 준장이 만주 전선으로 재배치된 다음에는 아니시모프 소장이 지휘하는 러시아군 2만과 호흡을 맞춰 함남과 강원을 돌파, 일본 해군 주요 육상시설이 있는 죽변까지 동해안 축선 전체를 밀어내는 전공을 세웠다.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러시아에 관전무관단으로 파견, 러시아군의 지리멸멸한 실태를 보고한다. 이후 러시아 황실 일가와 차르를 따르는 궁정 귀족들, 충성파 병력과 체코 군단, 폴란드 군단이 퇴각 작전을 할 때 동행했으며 김시진이 먼저 하얼빈으로 간 사이 차르 일가를 호위한다.
- 이범윤
훈춘 방면에서 온갖 무리수로 지역 민심을 악화시키고 병력 피해를 가중시킨 이근택을 해임하며 등장. 북간도 관리사로 재직하며 간도 지역을 대한 영토로 굳히는 데 힘쓴다. 간도 방위에 차출될 수 있는 정규군 전력이 함경도에서 막 창설 중인 진위대 2개 여단뿐이어서 별도로 충의대란 민병대를 창설하는데, 민병대인데도 숙련도가 높아 극동 전쟁 때 일선으로 차출되어 활약했다. 극동전쟁 승전 후 10년이 지난 2부 시점에도 평북관찰사 겸 간도관리사로 간도를 책임지고 있다. 이범진과 함께 조정 내에서 중국에 대해 가장 강경한 인사이기도 하다. 이승만 내각 때 이범진과 함께 참정대신에 임명되었지만 박제순이 궁내부대신에 그대로 유임되자 분노해 사직한다. 2부 외전 시점에서는 내부대신. 총리인 길영수가 워싱턴 해군 군축회의 참석을 위해 미국에 간 사이 총리 대리를 맡으며 대일강경파라 보수적으로 해군조약과 관련된 방침을 정해 제공하는 역할을 맡는다.
- 민영찬
극동전쟁 시기 일본과의 내통이 드러나 도주한 민영철을 대신해 관서사령관 서리직을 수행. 2부 시점에서는 원수부 군수국장을 역임한다. 신규 창설된 기계화부대에 효율적으로 유류를 보급해 줄 방안을 두고 포공국장 엄주익과 몇 날 며칠을 머리 싸매고 고심하다 김시혁의 조언으로 제리캔을 개발한다. 충무 계획 이후 강종이 원수부를 제압하려 하자 1근위기병사단의 연료 소모량을 '오기'했다며[8] 1근위기병사단이 한성으로 와 원수부를 지킬 수 있을 정도의 연료가 있을 것이라고 알려준다.
- 홍범도
을미의병에 참여했다 해산한 뒤 포수로 돌아갔으나 벌이가 여의치 않던 차에 신식 군대 창설 공고를 보고 모집에 응하는 것으로 첫 등장한다. 극동전쟁 당시 진위대 제3여단 수색중대장(정위)으로 경인가도 전투에 참전. 3여단이 압도적 열세에서 5일간 버티는 데 공헌했다. 경인가도 전투가 끝난 뒤 게릴라전을 수행하다 원수부에 합류. 울릉도의 일본군 전신 시설을 폭파해 동해에서 일본 해군 활동을 제약시키는 작전을 성공시켰고, 원산 상륙 작전 때는 배를 타고 움직인 강습보병대와 별개로 해안선을 따라 이동하며 일본이 설치한 해안 감시초소들을 타격했다. 이후 원산을 탈환한 김시진의 강습보병대와 합류, 문산에서 함께 처절한 방어전을 벌이고 생존한다. 이때 전면에서 방어하는 강습보병대의 측면을 사수하며 일본의 지장 우메자와 소장을 전사시켰다. 2부 시점에선 참장으로 진급하였고 제2강습보병여단장이 되어 동부전선에 참전한다.
졸로치에서 지청천이 멋대로 행동하자 분노했지만 그래도 자신의 부대 소속이라 감싸주었다. 부크강 집단군과의 전투에선 예비대로 한 발짝 물러서 있다가 한국군 예비대 규모를 오판한 11사단의 배후를 습격, 하룻밤 만에 독일군 정규사단을 궤멸시키는 대전과를 올린다. 종전 이후 협상 때 독일을 압박할 수단으로 다른 부대들이 귀국할 때 그와 제2강습보병여단만 유럽에 남아있는다. 이후 배상금을 깎기 위해 비협조적으로 행동하는 독일을 압박하기 위해 프랑스, 벨기에와 함께 자를란트를 점령한다. 이후 부장으로 진급한 뒤 라일란트-자를란트 주둔군 사령관이 된다. 프랑스와 벨기에와 달리 민사작전을 잘해 현지의 독일인에게 그나마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다. 그러던 중 카프 폭동이 일어나 베를린의 주요 정부 청사가 자유군단에게 점령당하자 프랑스에게 이를 진압할 것을 요청받고 지원군을 보낸다.
- 윤영렬
윤웅렬의 동생. 극동 전쟁 시점 육군 정령으로 이갑이 일본의 공세 역량이 한계에 달했다는 의견을 피력하자 신중을 표한다. 이후 김석중이 전 육군 부장이라고 언급하는 것을 보아 부장으로 전역했다. 이승만 내각 설립후 군무대신에 취임했으며 겨울철 갑자기 불어닥친 땔감 부족과 민심 악화의 배후에 강종이 있다는 것을 꿰뚫어 본다. 이승만 내각에서 대신이 되었으나 이승만하고 사이는 좋지 않은데 총리인 이승만이 군부에 협조를 요청하고 이를 받아들일지는 윤영렬이나 현역 지휘관들의 의사에 달린 모습이 연출된다. 조카인 윤치호가 강종을 비판하는 사설을 게재했다가 체포령이 떨어지게 되자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것을 무시하려 했지만 그래도 조카인지라 윤보선과 함께 체포령이 해제되도록 도와준다.
충무 계획 발동 이후 원수부, 군부, 해군부가 위험에 처하자 이규태와 함께 원수부, 군부, 해군부를 이끌며 제1근위기병사단을 불러들일 것을 제안했다. 이후 헌병대에 공격으로 위험에 처했을 때 해군육전대가 와 원수부를 구원하는 데 성공하자 감격하며 나이를 핑계로 눈물을 흘린다. 계엄령이 완전히 진압된 이후 장기렴과 함께 군도를 찬 상태로, 체포된 강종에게 당장 의친왕에게 양위하겠다는 문서에 서명하라고 압박한다.
- 김정우
군기창장이자 김경천의 부친으로, 병기 설계와 양산을 책임진 기술사관. 김시혁이 강습소총을 만들고 도입할 때 협조했으며, 강종이 러시아에게 1개 군단 파병과 물자 제공을 하겠다고 상의도 없이 비밀전보를 보낸 것을 알게 되자 빌어먹을 인간이라고 욕한다. 오래 공들인 연해주 출병이 이승만에 의해 엎어지자 격분해 무시해 버리자는 주장을 한다. 강종의 친위 쿠데타로 기세가 오른 헌병대가 방역을 핑계로 민중들을 탄압하자 이에 분노하며 김시진과 노백린의 병력들을 차출하여 의주와 평양에 보내 헌병대가 오기 전에 상황을 억제할 것을 건의한다.
- 지석영
1부 초반에 동학농민군을 토벌했다고 언급되었다. 극동 전쟁 당시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해 야전병원에서 사망한 환자가 많자 이를 해결하기 위해 구급낭을 개발해 야전병원 후송 이전에 응급처치를 할 수 있도록 했다. 이후 이 공로를 인정받아 의무국장 겸 육군의무학교장이 된다. 김정우가 방역을 핑계로 민중들을 탄압하는 헌병대에 대해 분노하자 황명이니 어쩔 수 없다고 한탄한다. 이후 김정우에게 의주와 평양에 김시진과 노백린의 병력을 차출하여 헌병대가 오기 전에 미리 상황을 억제하자는 건의를 듣자 찬성한다. 이후 헌병대가 시위 강경 진압에 의해 육군 병원에 온 부상자들을 잡아가야 한다고 행패를 부리고 삼청동의 군 의료 시설을 점거해 원수부의 인원들을 쫓아내자 분노하며 헌병대가 한성병원에 진입하지 못하게 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2.27 계엄령이 종결된 이후 청계천에서 사망한 시신들을 조사해 총상으로 사망한 이는 2할도 채 되지 않는다며 나머지는 헌병대가 공포심 조장을 위해 고의적으로 끔찍하게 사살한 것 임을 밝혀낸다.
- 황준성
극동전쟁 당시 진위대 3여단 1대대장. 주안산 전투에서 3여단장이었던 민영기가 전사하자 대신 잔존 3여단을 지휘한다. 잠시 휴전을 하는 사이 수색중대장인 홍범도에게 여단기를 맡기며 순무영에 합류하라고 지시한 뒤 본인은 일본군 상대로 게릴라전을 벌인다. 2부 시점에서는 제1헌병여단 독립대대 대대장. 이용익의 측근으로 다른 헌병대랑 달리 엄정한 군기를 유지하며 1916년 한성 폭동 당시에도 총기 사용 없이 최소한의 인명 피해로 이를 진압했다. 2.27 계엄령 이후 의정부를 통제하지만 인민들에게 발포하지 말라는 명령을 내려 비교적 조용하게 통제하고 있다. 시위 강경진압이 옳은 것인가 고민하던 도중 호형호제하던 사이인 조동윤의 연락을 받고 그에게 설득되어 옛 상관 민영기의 유품인 권총을 차고 근황파 헌병 장교들을 제압한 후 원수부와 협조하기로 결정한다. 3월 혁명 이후 황제가 된 의친왕에게 인민을 지키는 아주 중대한 역할을 했다며 태극장 훈 1등과 더불어, 1계급 특진을 서훈받게 되었고 개편될 헌병 조직의 총책임자로 선임된다.
- 윤치성
윤영렬의 아들로, 극동 전쟁 시점 당시 기병연대 정찰중대 1소대장으로 첫 등장했다. 2부 시점에서는 제1근위기병사단 흉갑기병연대장으로 동부전선에 참전했고, 원정군이 동부전선에서 귀국한 이후 김석중과 함께 기병대의 기계화를 주도한다. 저돌적이면서도 적절하게 치고 빠지는 맹수의 본능을 갖고 있어 김석중과 죽이 잘 맞는다. 서부전선에서는 이 점을 높이사 라모트-와퓨제로 진격하는 독일군을 1차로 막아세우는 임무를 부여받는다.
- 구완희
동학 농민 운동 때는 충청감영병을 이끄는 영관으로 첫 등장했으며, 이후 극동전쟁 때는 순무영 참모관이 되어 김시혁의 평양에서 철수해야 한다는 말에 반대했다.
- 남상덕
극동전쟁 당시 진위대 3여단 수색중대 3소대장으로 첫등장했다. 2부 시점에서는 정령이 되어 수도보병사단 참모장을 맡고 있으며 습격당한 노무단 수습을 위해 노보플린스크로 내려갔다. 서부전선에서 무종 요새를 공격하기 전 박승환에게 수도보병사단이 제1근위기병사단 소속 정찰중대를 상부보고 없이 멋대로 빼서 사용한 것에 대해 김시혁이 분노한 것과 무종 요새 공격에 2강습보병여단이 지원할 것임을 보고한다.
- 신팔균
막 군제개혁을 시작할 때부터 극동전쟁까지 김시혁을 보좌한 전속부관. 주로 김시혁에게 서류 지옥을 안겨주는 역할. 2부에선 정령으로 진급, 원수부 제2과 과장으로 1과 과장 이갑과 함께 원수부 참모진을 이끄는 중핵이 된다. 가혹할 정도로 현실적인 이갑과 달리 융통성이 있으나 그 때문에 너무 이상적이라는 평도 받는다. 이후 한국군 원정군 부참모장으로 임명된다. 동부전선에서 귀환한 후에는 참장으로 진급했다. 종전 이후 나머지 원정군을 이끌고 충무함을 타고 3월 1일에 귀국한다. 이때 충무함을 본 3사단이 갑자기 서해함대사령부에게 항복하는 상황을 보고 의문을 가졌으나 이동휘에게 2.27 계엄령에 대해 듣게 되고 자신들이 이 일에 휘말리지 않은 것이 다행인지 불행인지에 대해 생각하며 원수부로 귀환한다. 2부 외전 시점에서는 부장으로 진급하며 이갑의 뒤를 이어 원수부 제1과 과장이 된다.
- 서왈보
대한제국군 항공대장. 러시아와 발맞춰 도입한 프랑스제 뉴포르 10, 11로 기종 전환 훈련 중이라는 언급으로 처음 등장. 공군의 잠재력을 간파하고 원시적인 스트라이크 패키지를 구성하고, 공중 포병으로 활용하겠다는 브루실로프의 구상에 맞춰 지상군을 위한 정찰 임무, 폭격기 호위 임무를 수행한다. 렘베르크 탈환 시점에서는 숫적 우위로 밀어 붙이는 독일군 항공대에 고전하고 있다는 묘사가 나오며 머지않아 독일과 러시아 간에 대규모 항공전이 벌어질 것 같다고 예상을 내놓는다. 여담으로 제이슨이 한국 공군 중에서는 2번째로 에이스 칭호를 얻었다 했고 잠시 후 착륙한 서왈보의 뉴포르 11에 킬마크가 무수히 새겨져 있는 것을 보면 대한제국 공군 중에서는 그가 최초로 에이스 칭호를 얻은 것으로 보인다. 동부전선에서 활약한 이후 항공사령관으로 영전하며 참장으로 진급한다.
- 김필순
구주원정군 의무대장. 미군 사이에서 스페인 독감의 감염이 확산되자 이를 조치하지 않는다면 심각한 문제가 벌어질 수 있다고 경고한다. 이후 한성병원장이 되며 강종이 사망했을 때 그의 시신을 확인하러 하얼빈으로 파견된다.
- 윤치병
윤영렬의 사남. 아버지인 윤영렬과 사이가 좋지 못한 탓에 춘천 유수로 임명되었지만[9] 그래도 청렴하고 담백하면서 불의를 싫어하는 군인이라 이 때문에 원수부가 제1근위기병사단을 한성부로 불러들이려 할 때 협조할 것이라고 윤영렬은 예측했었고 이후 윤영렬의 예상대로 제1근위기병사단에 협조한다.
- 안무
동부전선 시점에서는 9사단 부사단장으로, 사단장 노백린을 보좌해 전투를 독려하던 중 독일군 1개 연대가 지경선을 파고들어 침투했다는 급보에 공병대로 이뤄진 예비대를 이끌고 막아선다. 아군 보병대를 희생해 포병을 끌어내고 그 사이 맹공을 퍼붓는 독일군 포병에 일순 당황하나, 독일군 포병이 대부분 평사포로 구성되어 살상력이 떨어진다는 사실을 떠올리고 급조 참호에 최대한 엄폐하는 한편, 침착한 태도로 병사들을 독려해 사기를 유지한다. 그렇게 전선을 유지하는 사이 본부에서 보낸 장갑중대와 강습보병중대의 지원으로 독일군을 격퇴하는데 성공한다. 이후 임시 공병연대장이 되어 시베리아 소총병 여단과 협조한다. 서부전선 시점에서는 1근위기병사단 부사단장이 되어 참전하며 아미앵 전투에서 1근위기병사단을 이끌었다. 전쟁 후반기 독일 영토에 협상국 깃발을 꽂는 특임대의 지휘관이 되어 말메디를 지나 아헨과 쾰른을 공식적으로 점령하는 데 성공한다.
- 오의선
극동전쟁 때 근위사단 제1여단 소속으로 박승환과 함께 일본군과 싸웠다. 1차 세계대전 시점에서는 수도보병사단 1연대장. 서부전선에서 무종의 요새를 공략할 때 선봉에 서며 간신히 요새를 함락시킨 뒤 26연대와 임무 교대 한다.
- 권중협
극동전쟁 때 근위사단 제1여단 소속으로 박승환과 함께 일본군과 싸웠다. 1차 세계대전 시점에서는 수도보병사단 26연대장으로 양세봉이 독일군과의 전투에서 큰 공을 세우자 그를 부위에서 정위로 진급시킨다.
- 차도선
포군에 몸담다 극동 전쟁을 맞아 38세의 늦은 나이로 임관, 속성으로 교육받고 장교가 된 흔치 않은 이력을 갖고 있다. 원산 상륙작전 성공 직후 군을 나눠 한쪽은 한성을, 한쪽은 동부 축선을 수복할 때 아니시모프, 김인수가 이끄는 기병대에 포함되어 공을 세웠다. 2부 시점에서는 1근위기병사단 제2근위보병연대장. 2.27 계엄령이 진압된 이후 이재곤, 이근상, 박두영의 총살 집행을 감독하며 군복을 입고 죽게 해 달라는 이 셋의 요구를 단호히 거절한다. 집행인들이 박두영을 고통스럽게 죽게 할 목적으로 즉사시키지 않자 이들을 꾸짖는 대신 아직 죽지 않은 박두영에게 다가가 인민이 흘린 피의 무게가 바로 이런 거라고 말하며 확인사살한다.
- 민긍호
정찰 저격수 3조 조장으로 첫 등장. 등장 시 계급은 원역사에서 의병전쟁을 시작했던 때와 비슷한 특무정교. 구주원정군의 일원으로 독일군 저격수들을 사냥하며 코벨 전투에도 참여해 오스만군의 전령이나 지휘관들을 사냥하고 있다.
- 왕유식
군수지원단 소속 부령. 테르노폴에 도착해야 할 탄약수송열차가 탈선하여 당장 원정군에 보급해야 할 포탄이 전부 사라지자, 러시아 내 슈나이더사 공장과 접촉해 신품 탄약들을 어떻게든 끌어오라는 강권에 가까운 지시를 받고 모스크바로 향한다. 이후 의친왕과 함께 탄약들을 어떻게든 끌어와 원정군에게 보급하는 데 성공한다.
- 박용만
이승만의 의형제. 독립운동 방법론이나 한인단체 주도권을 두고 부딪칠 일이 사라져 돈독한 사이를 유지 중이다. 미국 유학을 마친 이승만과 함께 귀국. 원정으로 빈자리가 다수 발생한 원수부로 들어간다. 이후 무관학교에서 속성반을 담당하는 지위에 올랐다고 언급된다. 강종이 친위쿠데타를 일으켜 위험에 처한 이승만에게서 정변을 일으키자는 제의를 받지만 그간 이승만이 군부와 척지는 행동을 한 것과 자신은 고작 무관학교 교관일 뿐이라고 거절하며 그를 비판한다. 하지만 결국 이승만에게 미대사관으로 가서 몸을 피하고 구주원정군에게 전보를 전하라는 아이디어를 준다.
- 여운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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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청천
2부 프롤로그에서 장작림군을 상대하던 강습보병대 소속 부위로 등장한다. 무관학교 성적도 좋았고 집이 서울이라 가까운 데서 출퇴근하려고 근위여단을 지망했지만, 강습보병여단장 김시진이 그 자질을 높이 사서 점찍어 둔 탓에 강습보병여단에 전입됐다. 강제로 진로가 확정되었지만 강습보병대에 금방 녹아들었고 능력도 빼어나서 동기 중 진급 속도가 가장 빨랐다.
1차 세계대전에는 제2강습보병대 예하 중대장으로 참전, 졸로치 전투에서 김좌진과 함께 오헝군을 기습해 큰 피해를 입혔지만 부대를 이탈한 상황 속에서 멋대로 행동하여 작전에 차질이 생기게 한 처벌받을 뻔했다.[10] 하지만 그의 능력을 눈여겨 본 김시혁이 다시는 이런 일을 벌이지 못하게 전쟁사 문제 사례에 박제하겠다는 조건 하에 처벌은 받지 않는다. 동부전선에서 귀환한 후 김경천의 강력한 추천으로 김시혁의 부관이 된다. 박승환이 멋대로 제1근위기병사단 소속 정찰중대를 빼서 사용한 것 때문에 분노한 김시혁이 담배를 찾자 본인 담배를 건네주는 와중에 본인의 전력이 떠올라 다른 이들보다 더 긴장한다.
강종이 김시혁의 강경진압 반대를 물리치고 그를 경복궁 밖으로 끌어냈을 때 김시혁을 끌고 가는 호위대 장교들을 보고 분노해 그들을 두들겨 패다가 헌병대 장교의 중재를 받는다. 계엄령 이후 김시혁의 지시를 받고 남만리에게 가서 혹시라도 헌병대가 김시혁의 자택을 공격할 상황을 대비할 수 있도록 지원을 요청했다. 이후 김시혁과 함께 장갑차를 타고 원수부로 가며 가는 도중 깐깐한 헌병 장교를 만나 위험에 처하자 운전을 해주던 기록국 직원의 등을 걷어 차면서 '길이 없으면 만들어서 나가는 것이 강습보병의 강령'이라며 돌격하라고 지시해 막고 있던 헌병대 차량을 박살내고 총탄 세례를 뚫으며 돌파해 원수부로 도착하는 데 성공한다.[11] 이후 김시혁이 역습을 가하기 위해 직접 나서려 하자 이를 말리려 했지만 김시혁의 고집에 그만두며 최로하에게 말할 거라며 투덜거린다. 이후 김시혁과 함께 진격하던 도중 헌병대에 의해 학살당한 사람들의 시신들이 널려 있는 것을 보자 분노한다. 계엄령이 진압된 이후 민중들에게 구타당한 강종의 처참한 몰골을 보며 인민들을 지켜야하는 이가 인민들에게 총구를 돌린 대가라고 읊조린다.
1921년 시점에는 전속부관 보직을 3개월 남겨두고 부령 진급과 참모학교 진학을 앞둔 상태였다. 동부전선에서 귀환한 1917년부터 21년까지 장장 5년 가까이 부관으로 보좌해 전임자 김경천보다 더 오래 모셨다.[12] 덕분에 진가배탕 타는 솜씨가 일품으로 김시혁의 취향에 딱 맞춰 차가움 정도를 조절할 수 있게 되었다.
- 김경천
군기창장 김정우의 아들. 정위(진) 시절부터 2년간, 동부전선까지 김시혁을 보좌했던 부관. 김시혁을 따라 동부전선에도 다녀왔고 참령 진급을 앞둔 상태로 후임으로 지청천을 추천하며 근위기병사단으로 전임된다. 이후 거기서 대대참모를 거쳐 참모학교를 거친 뒤 제2흉갑기병대대장이 된다.
- 김좌진
지청천 기수의 1기수 후배. 장작림의 침공 때 무관학교를 차석으로 졸업하고 5사단에 부임한 부위로 등장. 이때까진 행정업무만 맡으며 실전 지휘 경험은 없었으나, 전선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자 유일하게 남는 장교였던 그가 투입된다. 첫 실전에도 훌륭한 지휘력으로 위기를 진화하는데 성공했으며 이후에도 대대장에게 과감한 작전을 제시해 본인이 직접 나서서 활약한다. 장교로서 자부심이 강해 거추장스러운 군도를 늘 옆에 차고 다닌다. 장작림 토벌이 마무리되고 1차대전 참전이 결정될 무렵엔 제1근위기병사단 소속 소대장으로 보직을 옮겨 전쟁에도 참여한다. 드넓은 동유럽 평원에서 길을 잃고 헤매다 역시 길을 잃은 지청천과 만나고 그의 권유에 따라 계획에 없는 기습에 참여하여 공을 세운다. 다만 부대를 이탈한 상황에서 멋대로 활동한 거라 그 역시도 처벌받은 위기였으나 선배인 지청천의 권유에 따랐을 뿐이라 따로 처벌을 받진 않았다. 서부전선 시점에서는 근위보병대대 3중대장.
- 이응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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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철호
제1근위기병사단 2근위보병연대 근위보병대대장으로 마흑셀카브 방면의 전투단을 총괄 지휘하고 있다. 온화한 김경천과 달리 괄괄하고 불같은 성품을 가졌다. 2.27 계엄령 주역들의 재판과 조리돌림이 끝나고 책임자인 차도선 정령 밑에서 이재곤, 이근상, 박두영의 사형 절차를 지휘했다. 사형 집행인에 장교와 부사관 자원자만 받으려고 했지만 병들까지 2연대 5대대 전체가 자원하고 나서는 바람에 진정시키느라 애썼다.
- 홍사익
제1근위기병사단 예하 수색대대 2중대장으로 첫등장. 구주원정군에 참여해 볼로디미르 최전방에 참호선을 구축 중이던 독일군 병력을 적당히 두들기고 빠져나와 아군의 규모와 상황을 오해시키는 기만 작전을 훌륭하게 수행해낸다. 서부전선에도 몸 성히 참전해 수색대를 이끈다.
- 김성수
원수부 공보국장. 언론을 무기로 휘두르는 황제에 대응하고 군의 대외보도와 선전을 담당하기 위해 신설된 부서의 책임자. 와세다대학 유학을 마친 뒤 언론사를 운영하려는 포부를 갖고 한성에 왔으나 한창 여론 장악에 열을 올리던 황실과 궁내부가 신생 언론사에 마구 제동을 거는 바람에 곤란을 겪던 중에 조동윤에게 포섭되어 군인이 되었다. 금수저 집안에 원래 군인 지망도 아니었고 하는 일도 야전과는 거리가 멀다 보니 옷만 군복이지 말투나 행동거지는 민간인 기자나 다름없다. 1차 대전이 발발하자 동서 전선에 모두 참전해 원정군의 전과 보도와 선전 임무를 수행한다. 2.27 계엄이 최종적으로 진압되고 광화문을 앞에 두자 김시혁에게 이 사건을 가장 상징적이면서 대내외적으로 보여줄 수 있도록 1기병사단 전차로 광화문 정문을 박살낼 것을 제안했다.
- 김석원
무관학교 갓 졸업한 포병 참위로 등장. 트레이드 마크인 카이저수염을 젊은 시절부터 기르고 있어 시혁이 바로 알아봤다. 기존 작계보다 더 빠르게 움직인 강습보병여단에 맞춰 어떻게 행동할 것인지를 묻는 시혁의 질문에 훌륭하게 대답해 칭찬을 듣는다. 원 역사에선 자질은 뛰어났으나 전간기 군대인 일본군에서 복무한 탓에 구시대적 사고를 벗어나지 못했는데 여기선 당대 가장 선진적인 육군인 한국군에서 복무하며 훨씬 뛰어난 지휘관이 될 싹을 보여줬다. 1차 세계대전 시점에서 부위 계급이 되었으며 원정군 제1포병단 제2포대장으로 참전해 신형 105mm 곡사포를 운용한다. 이때 6문 1개 포대로 대대급 일제사 효력을 내라는 어담 참장의 지시를 TOT 사격으로 훌륭히 수행한다.
- 양세봉
수도보병사단 26연대 소속으로 독일군과의 전투에서 큰 활약을 해 권중협에게 칭찬을 듣고 부위에서 정위로 진급한다.
- 김홍일
이범석과 함께 제1근위기병사단의 촉망받는 장교로, 무관학교를 졸업하면서 향후 한 세기 간 소총의 구경은 작아지고, 야포는 갈수록 대구경화가 진행될 것이라는 논문을 교육국에 제출했다. 이후 서부전선에서는 제2흉갑기병대대 3중대 1소대장. 이후 독일 본토까지 당도하자 이범석, 곽송령과 함께 독일 영토에 깃발을 꼿기 위한 임무부대로 투입된다. 귀국한 이후 2.27 계엄령 때 근황파를 제압하기 위해 1기병사단이 투입되었을 때 이범석과 함께 선봉에 서서 중랑천을 넘어 경복궁에 도달한다.[13]
- 이범석
서부전선에서 첫 실전을 겪은 어린 참위로 등장. 제1근위기병사단 신속대응부대 소속 소대장으로 사단장 김석중이 일찌감치 눈여겨본 신입 장교 2명 중 한 명. 어학 능력이 매우 뛰어나 능숙한 독일어로 적의 항복을 받아낸다. 능숙한 독일어 덕분에 협상 때도 불려 다녔으며 연합군이 독일로 진격할 때 국자 맞고 기절한 히틀러를 사로잡았지만 진격에 바빴기 때문에 후속 병력에게 알아서 투항하려며 건빵과 모포만 던져주고 가버린다. 이후 독일 본토까지 당도하자 김홍일, 곽송령과 함께 독일 영토에 깃발을 꼿기 위한 임무부대로 투입된다.
귀국한 이후 2.27 계엄령 때 근황파들을 제압하기 위해 1기병사단이 투입되었을 때 김홍일과 함께 선봉에 서서 중랑천을 넘어 경복궁에 도달한다. 광화문 앞에서 김시혁을 만나며 그의 지시로 광화문 정문을 박살낸다.
- 곽송령
본래 청나라 봉천성 출신으로, 극동전쟁 이후 사는 곳이 러시아의 소유가 되면서 호로군 소속이 되었으나 신해혁명으로 청나라가 멸망하고 호국전쟁이 일어나며 정체성의 혼란을 느꼈다. 제1차 세계대전 때 러시아가 힘을 잃어가고 대한제국이 러시아 총독부를 정식으로 인수할 때 한국군과 김시혁이라는 인물에게 매료되어 한국군 소속이 된다. 이후 한국무관학교를 졸업한 뒤 참위 계급을 받고 아미앵 전투 때 피해를 입은 제1근위사단 전차 지휘관의 공백을 메꾸기 위해 파견되었으며, 김홍일, 이범석과 함께 독일 영토에 깃발을 꼿기 위한 임무부대로 투입된다. 귀국한 이후 2.27 계엄령 때 근황파를 제압하기 위해 1기병사단이 투입되었을 때 김홍일, 이범석과 함께 선봉에 서며 강습보병대가 건승을 빌자 기대에 부응하겠다고 대답한다.
- 엄복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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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2. 해군
수장인 장기렴이 강종의 무리한 대청 선전포고에 부화뇌동해 사상자만 3천을 낸 이근택에게 직언하다 보직 해임된 인물인데다, 뜸만 들이던 강종이 해군 창설을 적극 지원하게 된 계기가 의화단 진압 과정에서 노획한 마제은 백만 냥을 꿀꺽하려다 들켜서 울며 겨자 먹기로 한 것이다 보니, 태생부터 강종과 척을 졌다.전력 확충 과정에서 밀덕후 강종이 열심히 구상하던 함명을 가뿐히 까버리고 해군이 알아서 지으며 각을 세우다가 강종이 어뢰정 8척 구매 계약을 엎어 버리고 다 낡아 빠진 이름만 순양함이고 실제로는 폐품인 양무호를[14] 강제로 떠안게 만든 것을 계기로 돌이킬 수 없는 사이가 된다.[15] 그러나 자기 돈으로 발족한 해군을 사유재로 여긴 강종은 식단부터 전함 도입까지 끊임없이 간섭을 이어가는 한편 해군의 반항심이 왕 목 잘라 본 프랑스 교관들에게 배워서라고 생각해 신실한 신민들의 나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해군과 제휴를 추진하고 이것이 또 다른 나비 효과를 부른다.
초창기 해군 창설을 주도한 장기렴과 이동휘는 육군에서 넘어온 드라이 네이비였고, 극동전쟁을 거치고 규모를 키워가면서 항해장교, 상선사관 출신들이 속속 등장하는데, 둘 사이에 미묘한 알력이 있다.
1910년대 들어 동해 정어리 어장을 중심으로 일본과의 어업 분쟁이 격화되어 유혈 충돌로 번져가자 민간인에 대한 물리력 행사가 제한되는 해군 대신 해상 치안을 유지할 조직이 필요함을 절감하고 홍익정밀에서 기선을 임대하고 포군 인력을 충원한다.
상대적으로 규모가 작고, 훨씬 폐쇄적인 조직 특성상 꾸준히 군내 근황파를 침투시켜온 강종과 익문사도 해군 내에 협력자들을 심는데는 실패했다. 충무 계획이 발동하자 동남서해의 사령부가 일제히 원수부의 지시를 따르겠다는 전갈을 보내고 강습보병여단, 현지 순검대와 협조해 강원도의 근황파 병력을 제압했다. 인천에 주둔한 서해함대는 한산급 구축함 함흥과 해군육전대를 갈수기 한강을 따라 올려보내 원수부를 함락 직전에 몰아넣은 헌병대를 섬멸하고 경복궁과 헌병 주력에 포격을 가하겠다고 위협해 전세를 원수부 쪽으로 기울게 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규모에 비해 한족과 만주족 비율이 대단히 높은 편으로 1921년 해군 총원 4만 6천 중 8천이 한족과 만주족 출신이었다.
- 장기렴
대한제국의 해군 수장. 김시혁과는 충청도 일대 해안의 해적을 토벌하면서 처음 만났으며 의화단 진압 당시 진위대 6여단 참모장으로서 강종의 대청 선전포고와 간도 공격에 부화뇌동해 무수한 피해를 발생시킨[16] 이근택을 제지하다 보직 해임 당한다. 해임된 뒤 중앙에 이근택의 악행을 보고하였고, 간도관리사 이범윤, 부령 계급장과 함께 이근택에게 돌아가 그를 해임시킨다.
의화단 진압 후 신설된 해군의 총사령관직으로 영전되어 시대를 뛰어넘는 언사와 과감한 작전으로 배수량 3백 톤짜리 구축함 6척이 전부인 해군이 할 수 있는 것 이상의 활약을 펼치며 김시혁을 놀라게 한다. 전쟁 이후 해군대장으로 진급해 해군 내 유일한 제독이 되었고 2부 시점에선 해군부 대신으로 영전. 강종의 친위 쿠데타를 둘러싼 정국의 혼란 상에 황실에 반감을 스스럼없이 드러내면서도 섣불리 군이 움직이는 것은 자제해야 할 것을 주장한다. 이후 원수부 지원을 위해 한산급 구축함 함흥과 해군육전대를 출동시켜 위험에 처한 원수부를 구원하며 박두영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항복하지 않으면 포격을 가하겠다고 위협해 근황파 병력을 물러나게 하는데 성공한다. 계엄령이 완전히 진압된 이후 윤영렬과 함께 군도를 찬 상태로, 체포된 강종에게 당장 의친왕에게 양위하겠다는 문서에 서명하라고 압박한다.
2부 외전에서는 새로 도입할 전함 6척의 함명을 놓고 각개 각층의 이해가 충돌하는 바람에 고심하다가 김시혁을 찾아가 의논하려 한다.[A] 해군의 일에 육군이 함부로 관여하는 선례를 남겨선 안 된다며 거절하려는 김시혁에게 협조해 주지 않으면 당신 이름으로 함명을 삼겠다고 협박(?)을 해가며 논의에 끌어들인다. 장고 끝에 3월 혁명과 1차대전 승전지를 함명으로 쓰자는 아이디어가 나오자 기꺼워하며 찬동한다.
- 이동휘
장기렴에 이은 해군 2인자. 강종의 몽니로 떠안게 된 양무호의 인수 요원으로 파견되었다. 척 봐도 절대 인수하면 안 될 양무의 상태를 보고 재고를 극력 주장했으나 강종의 총신 이근택에게 거부당한다. 이때 강종에 대한 감정이 완전히 상해서 김시혁 앞에서 강종을 제정신 아닌 사람이라고 대놓고 비난하며 그 뒤로도 공식적인 자리에서도 강종을 공공연하게 모독하고 다닌다.
1차 세계대전 시점에는 인천의 서해함대사령부를 담당했고 2.27 계엄이 선포되자마자 다른 제독들과 마찬가지로 원수부, 해군대신의 통제에 복종할 것을 선서했다. 인천에 주둔한 3사단을 경계하느라 27일 당일에는 출동하지 못한 채 관망하다가 근황파가 해군에 관심을 두지 않음을 확인한 28일 밤, 한산급 구축함 함흥과 긁어 모은 해군육전대 2개 중대를 한강을 타고 용산까지 올려보내는 용단으로 함락 직전에 원수부를 구원하고 근황파가 내지른 회심의 일격을 꺾었다. 이후 3사단의 항복을 접수하고 귀국한 신팔균에게 2.27 계엄령이 일어났었음을 알려준다. 2부 외전 시점에는 대장으로 진급하며 해군작전참모장으로 승진한다.
- 신순성
상선사관으로 일하다가 대한제국 해군에 합류한다. 젊은 나이에도 조함 기술이 굉장히 뛰어나서 백두산함 함장으로서 맹활약한다. 남해로 들어온 일본 수송선단 습격의 선봉에 섰고 300톤에 불과한 구축함으로 한 겨울 동해바다 악기상을 뚫고 울릉도 전신 시설 파괴 작전을 성사시킨다. 마지막엔 쓰시마 해전을 막기 위한 정보전의 실행 요원이 되어 발트함대의 항로를 정확히 예측하고 무사히 접선, 전쟁을 완벽한 승리로 매조지했다. 이후 함대 건설 프로젝트장이 되었다가 갑작스러운 보로디노급 전함 매입으로 프로젝트가 꼬이자 사표를 냈다가 반려당했다고 언급된다.
1차 세계대전 참전이 확정된 후 유럽원정함대의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지중해로 향하고 프랑스와 이탈리아 해군 간 알력 다툼 속에서 이탈리아 해군이 원정함대의 지휘권을 가져가려 하자 노련하게 대처한다. 이후 이탈리아 해군과 함께 오트란토 해전을 승전으로 이끈다. 한불동맹 체결 과정에서 광저우만 할양과 전후 배상함 문제가 논의되자 중국 국민정부를 자극해 만주까지 위협할 가능성이 높은 광저우만 할양은 반대, 배상함으로 현역 함선이 아닌 미완공 상태로 놓여있는 마켄젠급 순양전함 4척과 바이에른급 전함 2척을 선택한다.
1921년 3월 1일에 배상함으로 받은 3월 혁명함 등을 이끌고 귀국한다. 이후 3월 혁명함, 충무함 등 주력함이 배치된 7전단의 전단장을 맡는다. 워싱턴 군축 협상이 진행되는 와중에 일본에게 무츠 예외를 인정하고 배수량 5만톤 정도 더 해주고 일본은 한국측 배상 전함에 왈가왈부 않는 정도로 타협할 것을 주장한다. 어차피 미국이 존재하는 이상 일본은 전력을 한국에 투입할 수 없고, 대한제국 해군은 배상함으로 넘어온 전함 6척을 소화하기도 버거운 와중에 일본 해군과 군비 경쟁할 할 여유가 없으며. 이 6척을 전부 소화하고 독자적으로 전함을 건조해야 할 때(대략 10년후)쯤엔 이 조약은 효력이 다 했을테니 상관없다는, 군의 입장만 고려한 게 아니라 정치, 경제 등을 감안한 넓은 견지에서 나온 주장.
- 민병승
해군무관학교장. 아버지 민응식의 뒤를 이어 해군을 양성하는 직을 맡게 되었다는 자부심이 가득하다. 도입할 6척의 전함 함명이 쉽사리 결정되지 않자[A] 장기렴에게 함명 추천을 상신한다.
- 김윤복
해군 정보참모부장. 해군 내에서 가장 화려한 이력의 소유자로, 양무호의 기관장으로 시작해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유학 생활을 했다. 대한해군이 나아갈 방향으로 드레드노트급 전함 도입을 강력하게 주장한다.
- 상호
원 역사에선 도쿄제국대학에서 정식으로 조선 공학을 이수한 한국 최초의 공학도. 해군 조선국장. 김양한과 함께 노르망디급 전함을 수십 년 뒤 미래에서까지 사용하려면 세 가지의 개선이 필요하다고 분석한다. 동해 정어리 어장을 중심으로 일본과의 어업 분쟁이 격화되어 유혈 충돌로 번져가자 이를 해결할 방법으로 홍익정밀에서 기선을 임대하고 포군 인력을 충원할 것을 건의했다.
- 김양한(金亮漢)
원 역사에선 최초로 근대 조선 기술을 습득한 기술자. 해군 기술국장으로 신형 한산급 구축함의 설계 이념을 정립했다. 상호와 함께 노르망디급 전함을 수십 년 뒤 미래에서까지 사용하려면 세 가지의 개선이 필요하다고 분석한다.
- 이능권
영국 대사관 주재무관 겸 해군 관전무관단의 일원으로 계급은 부령. 해군부에 유틀란트 해전에 대한 보고서를 보낸다. 이후 영국 측 외교관과의 식사 자리에서 주영 대사인 이한응과 함께 한국 관전무관단에게 사격통제장치를 보여줄 것을 요청했다. 1918년 11월에는 영국 해군성의 초청을 받고 스캐퍼플러항에 와 무장해제 된 독일의 대양함대를 본 뒤 배상함 배분 회의에 참석했지만 곧 독일 승조원들이 전함들을 모두 자침 시켰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 김성진
충무함의 함장. 타란토로 근접하자 그에 대한 감상을 신순성 사령관과 함께 나누며 자신의 아이들은 자신이 모는 고물 전드레드노트급 전함을 끌지 않길 바란다는 말을 꺼낸다. 이후 이탈리아 해군과 함께 오트란토 해전을 승전으로 이끈다. 배상함을 어떤 것을 고를지 결정하는 회의에서 유럽원정함대 참모장이 다 같은 전함 아니냐며 미완공함을 받아올 것이라면 노르망디급 전함을 받아오자고 제안하자 충무함의 부족한 성능을 얘기하면서 반발하며 부족한 성능이 많은 노르망디급 전함에 대한 불쾌감을 드러냈다.
- 유동열
원래는 육군 출신으로, 쑨원의 호국군에 고문관으로 파견되어 차오쿤의 진압군을 격파할 수 있게 도왔다. 그러나 고문직에 장기간 묶이면서 원하던 유럽 전선 차출이 좌절되고 동유럽에서 무공을 쌓은 후배들에게 진급으로 밀려버린다. 이 때문에 속 끓이게 되던 차에 서부전선 파병이 결정되자 김시혁의 추천으로 제1해군육전여단장에 임명되어 장성으로 진급함과 동시에 해군으로 보직을 옮긴다. 제1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귀국하며 2.27 계엄령 때 원수부의 지시를 받고 제1강습보병여단과 함께 원산부의 근황파 병력을 제압한다.
- 신성모
경기함(스베틀라냐급 방호순양함)에서 항해장교로 근무하다 함이 격침되었다. 김시혁이 전후 배상함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보낸 전문을 신순성에게 전달한다. 배상함으로 받아낼 적당한 매물이 없어 고민하는 신순성에게 바이에른급과 마켄젠급 같이 독일의 미완성 전함을 받아내자는 건의를 한다. 이후 구주원정군이 철수할 때 신순성의 추천을 받고 김시혁과 동행하며 원정군이 탄 화이트 스타 라인의 여객선을 부산항으로 유도했다.
근황파가 인천과 강화의 해군에 신경쓰고 있지 않음을 확인한 이동휘가 구축함과 해군육전대를 한강을 따라 올려보낼 때 긁어 모아 최대한 규모를 늘린 해군육전대 2개 중대를 지휘해 용산에 도달, 위험에 처한 원수부를 때맞춰 구원한다. 그리고 바로 용산역으로 진격하여 헌병대를 몰아내고 용산역을 확보하는 데 성공한다.[19] 이후 1기병사단과 함께 경복궁을 돌파하기 전 민중들이 해군육전대를 보고 '대한해군만세!'를 외치며 환호하자 경례로 답한다. 의친왕이 황제가 된 이후 임시로 1년 동안 그의 호위를 담당했다.
- 민제호
신악과 함께 장기렴이 가장 눈여겨 보고 있는 구축함 함장. 유럽원정함대에도 소속되었으며 3월 혁명 시점에는 아직 브린디시에 주둔하고 있는 중이라서 혁명에 참여하지는 못했다.
- 신악
민제호와 함께 장기렴이 가장 눈여겨 보고 있는 구축함 함장. 호국 전쟁에서 차오쿤의 군대를 강상 작전으로 유린한 적이 있다. 1919년 시점에서는 한산급 구축함 8번함인 함흥의 함장으로, 장기렴의 지시를 받고 신성모의 해군육전대와 함께 한강을 타고 올라와 원수부를 지원하며 경복궁과 헌병 주력부대에 공포를 포격하면서 근황파 병력을 위협한다. 이후 김시혁에게 경복궁에 진짜로 포격하면 안되냐고 몇 번이나 묻는다.[20]
2.1.3. 기록조사실 → 기록국
군제 개혁 과정에서 온 사방에 꽂혀 있는 일본의 빨대들을 잘라낼 필요성을 실감하여 창설된 첩보 조직. 작중에서는 원 역사의 정보대와 상무영을 대신한다.초창기에는 김시혁과 조동윤 사이에 권한 문제로 살짝 알력이 있었으나, 강종의 익문사 창설을 계기로 갈등을 봉합하고 교통정리가 이뤄진다. 친일파를 처단하고 강종의 권한을 제한하는 황색 계획과 극동전쟁 제2 전선 형성에 크게 기여했으며, 중화민국을 활용한 북양군벌 견제와 중국을 둘러싼 일본과의 대리전에서도 꾸준한 성과를 올렸다. 원세개 몰락 이후 일본은 첩보전에서 한국의 우위를 인정한 채 사실상 승부를 포기한 상태로 다이쇼 덴노가 어전 회의에서 콕 집어 지적할 정도로 공공연한 비밀이다.
내부적으론 황제가 관할하는 제국익문사, 황실경위원, 국가헌병대와 라이벌 관계이며 내각 관할 하의 경무청 정보과와도 미묘한 견제와 협력을 오가는 사이. 하지만 일본으로 망명한 친일파들을 사냥하는 일 만큼은 제대로 협력한다.
이런 유능함은 단순히 소설적 허용이 아니라 원 역사 대한제국이 방첩 역량만큼은 우수했기에 자연스럽게 나온 전개다. 황제가 거느렸던 익문사,[21] 경위원, 정보대는 비록 일본에 규모와 자금력에선 뒤처졌으나 질적인 면에서는 호각이었으며, 일본은 대한제국 곳곳에 협력자를 두고도 이들을 상대하는 데 애를 먹어 결국 무지막지한 물량 공세로 승부해야 했다.
이 우세는 1차 대전 중 일본이 방첩에 예산과 인력을 쏟아붓기 시작하자 흔들리기 시작해 일본쪽 라인 대부분이 끊어지는 지경에 처한다. 여기에 중국쪽 정세 급변으로 신뢰할만 한 기록국 요원들이 해외에 대거 투입되면서 반대로 국내 방첩이 흔들려 강종에게 암약할 빌미를 주게 된다. 3월 혁명 이후에는 해체된 익문사, 헌병대 조직을 상당부분 흡수함으로서 경무청 정보과와 함께 대한제국의 양대 정보기관으로 자리잡는다. 원래부터 활동 영역이 군사정보, 방첩에만 걸쳐 있지 않았는데 광범위한 민간 사찰, 사보타주까지 가능해지자 내각에서도 익문사 이상의 위협이 될 불안을 느끼고 견제에 들어간다.
국군조직법 제정을 두고 내각과 협의중이던 김시혁도 조동윤 이후를 예비해 기록국 권한에 제한을 둘 필요가 있음을 인정하고 협조를 요청했고 조동윤 측은 진행중이던 우장춘 망명을 완료된 후 조율에 응하겠다 답변한다.
- 조동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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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창수
기록조사실 직원. 공작시에 사용하는 가명은 김구. 1부에서 안경수를 심문하는 조사실 직원으로 처음 등장했으며 채찍과 당근을 적절히 활용해 박영효가 대한측 암호전신 해독문을 일본에 헐값에 넘긴 사실을 알아낸다. 2부에선 기록조사실에 모이는 정보들을 정서하고 통제해 축적하는 통계실 실장으로서 사실상 조동윤의 후계자로 낙점된 상태이며, 일본을 감시하고 중국 내부의 움직임을 주시하는 등 동북아 쪽 업무를 주로 맡는다. 대적관이 확실하고 무수한 방첩 및 공작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했으나, 경험이 부족한 탓인지 대국을 보는 안목은 상관 조동윤에 비해 아직 모자라다. 1차 대전기에는 익문사의 침투를 막아내고 방첩망을 복구하기 위해 조동윤과 동분서주한다.
강종의 근황령에 호응해 한성으로 진입하려는 3사단을 저지하기 위해 오류역으로 향한다. 이봉창이 인솔하는 현지 철도노조원들의 협력과 프랑스산 최루탄으로 철도경비대를 제압하고 이봉창의 조언을 따라 통표폐색을 중단해 열차 진입을 일단 저지하는 데는 성공한다. 역을 탈환하기 위해 헌병대 분견대가 들이닥치자 철도 노동자들과 힘을 합쳐 혁명이 완수되는 순간까지 저지해낸다. 3월 혁명 이후 권력을 노리고 막나가던 이승만이 남산 기록국으로 끌려왔을 때 그가 난리치지 못하도록 붙잡았으며 이승만이 주미 대사가 되는 것을 선택하자 그대로 끌고가 미국행 배에 태운다.
- 신규식
극동전쟁 때 일본군과 싸우다 포격에 휘말려 한 쪽 눈 시력을 잃는다.[22] 전후 기록국으로 적을 옮겼고 미쓰이 그룹을 통해 쑨원을 지원하는 임무를 수행한다. 1921년. 우장춘을 한국으로 망명시키는 작전의 현장 지휘역으로 참가한다. 외무성의 노력으로 방첩 역량을 대폭 끌어올린 일본이 빠르게 대응 인력을 풀자 배가 아닌 육로, 북경에서 열하를 거쳐 봉천으로 향하는 열차를 이용하는 것으로 작전을 변경했다. 열하에서 일본의 사주를 받은 중국 군경이 길을 막자 대사의 친척 행세를 해 위기를 모면하고, 봉천에서 고모토 다이사쿠가 보낸 훙후즈로 위장한 중화민국군의 습격에 격전을 벌이다 변계강무서 기마순검대의 도움으로 무사히 작전을 성공시킨다.
- 이 주임관
기록국 소속 요원으로 의화단 전쟁 당시에는 주청공사였던 김가진을 호위했다. 2부 시점에서는 김시혁의 가족과 자택을 호위하는 업무를 맡으며 헌병들의 불온한 낌새를 눈치챈다. 김시혁을 가택연금시킨 헌병대가 자신들이 호위를 담당하겠다며 기록국 요원들을 몰아내려 하자 무능한 주제에 어떻게 호위를 맡기겠냐고 저항해 헌병대를 일시적으로 물러나게 한다.
2.2. 황실
- 광무제 → 상황 → 강종 이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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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순헌황귀비
자기 자식인 영친왕을 후계로 만들기 위해 의친왕을 견제하고 있다. 원 역사에선 1911년에 사망하나 사망 원인이 만성질환이 아니라 전염병인 장티푸스인지라 역사가 바뀌는 과정에서 감염을 피했다.
- 황태자 이척
역사가 바뀌어 김홍륙 독차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으나,[23] 애초에 총명함이나 기민함과는 거리가 먼, 순하기만 한 인물이라 존재감은 없다시피 하다. 이토 히로부미가 한국을 방문했을 때 별생각 없이 조병창 방문을 허락했다가 뒤늦게 김시혁의 눈치를 본다. 2부 들어서는 건강이 급격하게 악화된 상태. 극동전쟁 때 아버지를 따라 함흥으로 파천했다 함경도 겨울 바람에 몸이 상하고, 함흥 전투에서 벌어진 전투소음에 스트레스성 발작까지 생겨 소변도 제대로 가리지 못 할 정도로 쇠약해졌다. 아버지인 강종 조차 앞으로 5~6년 정도가 고작이라 단언하는 상황. 2.27 계엄령 때 포성으로 정신이 반넘어 나간 상태였고 경복궁이 원수부 병력에게 넘어갈 위기에 처하자 강종 등과 함께 청량리역으로 피신하던 도중 어둠 때문에 흩어지게 된다. 수색에 나선 강습보병대에게 신병이 확보되었고 의친왕과의 면담을 요청한다. 이후 강종의 양위식에서 의친왕을 지지하는 황족들 사이에 끼며 의친왕에게 황태자 자리를 넘기고 따뜻한 남쪽으로 내려가 요양할 희망을 밝힌다.
- 의친왕 → 황제 이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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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친왕 이은
강종 소생 황자들 중 사실상 막내.[24] 강종은 군과 민중에 확고한 지지세가 있는 의친왕 대신 영친왕을 몸 약한 황태자 이척 다음으로 정하고 일본 황녀와의 국혼을 은밀히 추진한다.[25] 정작 본인은 정치에 별 관심이 없다고. 2.27 계엄령 때 경복궁이 원수부 병력에게 넘어갈 위기에 처하자 강종, 이척, 종친들과 함께 청량리역으로 피신하던 도중 어둠속에서 길을 잃고 흩어졌다 강습보병대에게 신병이 확보된다. 이때 깔끔히 저항을 포기하고 이척과 동반으로 의친왕과의 면담을 요청하며 의친왕의 편에 설 것을 사실상 선언했으며 이후 강종의 양위식에서 의친왕을 지지하는 황족들 사이에 낀다. 다이쇼 천황은 3월 혁명 이후로도 영친왕과 일본 황녀의 국혼을 의욕적으로 추진중이고 물가 폭등을 막기 위해 한국과 관계정상화 및 경제협력이 필요한 일본 내각, 영친왕을 일본 황녀와 결혼시킴으로서 보위 계승서열에서 완전히 탈락시킬 수 있는 황제 이강도 부정적이지 않아서 정말 성사될 가능성이 높다. 영친왕 본인에게도 제위를 둘러싼 다툼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다는 장점이 있긴 하다.
- 흥친왕 이희
2부에서 내장원을 관리하고 있다. 단순히 떡고물 챙기는 수준을 넘어 환곡까지 부활시켜 이자놀음까지 하는 등 전횡을 심하게 부리고 있으며 이 때문에 탁지부에서 여러 차례 경고를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다. 강종은 적당한 시기에 토사구팽 해서 황실지지세 끌어올리는 용도로 쓸 생각을 하고 있다.[26] 결국 탁지부 소속 순검들에게 붙잡혀 조사실에 끌려가는 굴욕을 겪었고 이후 강도 높은 조사를 받은 뒤 자택에 칩거해 두문불출해 버린다. 2.27 계엄령이 진압된 이후 강종의 양위식에서 의친왕을 지지하는 황족들 사이에 낀다.
- 의양군 이재각(이호석)
익문사 독리. 강종의 최측근으로 다른 강종의 측근들은 이호석 이름만 알지 그것이 본명인지 가명인지 여러 명이 한 이름을 돌려 쓰는 것인지, 남자인지 여자인지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할 정도로 변장술에 능하고 베일에 쌓인 인물. 김시혁이 귀국했을 때 여러 관찰사와 부윤을 만난 것을 보고한다. 원수부 내에도 스파이를 두고 있어 강종의 계엄령과 시위대 학살로 내전 국면이 되었을 때 김시혁과 협상하려던 호위대 총관 이근상을 찾아가 이근상이 사절로 보낸 조성근이 이미 원수부에 체포되었음을 알리고 강종의 명을 받들지 않으면 이자리에서 사살하겠다고 협박하여 이근상의 복종을 이끌어 낸다.
익문사 조직을 통해 허위 정보를 뿌려 강종과 사이가 나쁜 해군이 원수부를 지원하는 것을 방해하고, 이후 경복궁으로 역습해오는 것처럼 진격한 김시혁이 청계천에서 멈춘 이유가 병력 부족 겸 기만 작전일 것이기 때문이라고 추측하고, 마침 청계천에 진흙이 쌓였을 시기라 김시혁의 전차가 청계천의 진흙 때문에 곤란할 터이니 이 틈을 노려 비어있는 원수부를 타격하라는 건의를 강종에게 올린다. 그러나 결국 김시혁과 해군이 근황파 병력을 몰아붙이자 위기를 감지한 강종이 북한산성으로 이어하려는 순간 박두영이 잔여 병력을 이끌고 북한산성으로 들어가는 바람에 이어가 불가능해졌다고 보고한다.[27]
이후 강종이 도망치는 과정에서 행방이 묘연해졌는데 붙잡힌 강종이 강제로 양위를 하던 도중 의친왕을 지지하던 황족들 사이에 의양군 이재각이 있는 것을 보고 내가 너를 아껴 익문사 독리로 임명했는데 배신하냐고 소리치면서 이호석의 정체는 이재각이었음이 밝혀진다. 이때 이재각은 당황하며 아니라고 부정하지만 결국 기록국 요원들에게 잡혀 끌려나간다. 이후 다른 계엄령 주모자들처럼 처형을 당했을 것으로 보인다.
- 덕혜옹주
강종이 늘그막에 얻어 애지중지하던 옹주. 2.27 계엄령 때 경복궁이 원수부 병력에게 넘어갈 위기에 처하자 강종 등과 함께 청량리역으로 피신하던 도중 어둠 때문에 흩어지게 되었으나 순검들에게 신병이 확보된다.
2.3. 관료
의화단 진압과 남만주 점유를 거치며 지주가 주축이 된 남부와 실업가 중심의 북부로 파벌이 갈린다.- 박정양
김시혁의 1차 쿠데타 이후 새 내각의 총리대신을 맡았다. 징병제 도입 시점에서는 중추원 의장을 맡았다.
- 윤웅렬
김시혁의 1차 쿠데타에 협조했으며 새 내각의 군무대신을 맡았다.
- 한규설
원역사에서 을사조약 반대와 한일합방 이후 일본이 수여한 귀족 작위를 거부하는 등 적극적인 반일 행보를 보인 대한제국의 충신. 소설상에서도 일본 측이 강경파로 보는 등 반일 행보는 여전하다. 외교무대에서 활동하며 극동전쟁 때는 총리대신으로 전시내각을 이끌었다. 강종을 무척 불신하고 김시혁을 더 신뢰하는 모습을 보였다. 2부 시점에선 고령으로 사직하고 낙향했다.
- 조병식
방곡령으로 유명한 인물. 작품 속에선 미스터 방곡령이라 불리며 방곡령의 화신 취급을 받는다. 현실대로 부패한 면은 존재하지만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목적을 달성하는 노회하고 유능한 관료이기도 하며 일본으로부터의 뇌물만은 절대 받지 않는 반일주의자라 대일본 외교에서 활약한다. 일단 조병식이 나서면 일본은 짜증부터 내며 독자들은 잠가라 쌀독 드립을 친다. 이용익, 어윤중과 함께 일본이 가장 경계한 조선 관료 3명으로 개중에서도 특히 으뜸이었다. 극동전쟁 직전 출범한 전시내각에서 농상공부대신직을 역임하다 종전 직전 노환으로 사망하며 "일본에는 쌀 한 톨, 콩 한 조각 팔지 말라."라는 그 다운 유언을 남겼다.
- 김가진
경복궁 습격 때 끝까지 저항하는 김시혁을 설득하는 역할로 파견된다. 항복을 거부하는 김시혁을 무모하게 여기면서도 일본 측 상황을 슬며시 알려주는 배려를 보인다. 의화단 운동 때 북경에 외교관으로 파견되었다가 죽을 뻔했으나 경호차 파견된 원수부 요원들의 헌신으로 버텨내고 생환한다. 본래 친일 성향이 있었으나 일신의 영달을 위해 친일하는 부류가 아니었기에 일본의 야욕이 점점 노골화되자 노선을 전환했다. 조병식 후임으로 농상공부대신이 되어 극동전쟁 종전 후 쌀 수출 물량 증감을 두고 일본과 협상을 벌였고 이때 일본 측 제안으로 동양척식주식회사가 설립된다.
2부 도입부 시점에선 내각 총리대신. 관료로서 역량이나 청렴함은 흠잡을 구석이 없었으나, 아직 제대로 된 기반도 잡히지 않은 상황에서 의회정치에 지나친 믿음을 드러내 역대 어느 총리보다 많은 중추원에 많은 권한을 넘겼고, 이를 파고든 강종은 중추원을 친황파 황국협회로 채워 넣어 원수부와 내각을 압박하는 데 써먹는다. 1차 세계대전 참전이 확정되고 일본의 관동주 매각 등 외교참사의 책임을 묻는 불신임 투표가 부쳐지려 하자 투표 전에 자진 사임하며, 지방에서 농사나 지으면서 살게 된다. 그렇게 정치 인생을 마무리짓는 듯 했으나 민영환이 물러나고 관력이나 지지도가 모자란 이승만 내각이 들어서며 내부대신으로 초빙된다. 그러나 이승만이 여러가지 한심스러운 행동을 보이자 실망해 이도재, 이범진, 이범윤, 민영규처럼 사직하고 낙향하려 했지만 이승만이 그의 집을 찾아 눈물을 흘리며 빌자 계속 내부대신으로 남는다.[28] 이후 강종이 친위쿠데타를 일으키자 이를 남만리와 함께 진압하려 했지만, 강종에게 포섭된 신우균이 배신하는 바람에 무장해제되고 가택연금을 당한다.
2.27 계엄령이 진압된 이후 가택연금에서 풀려나며 삼남과 만주의 민심을 고려해[29] 김시혁의 의친왕을 입헌군주제 황제로 올리자는 말을 지지한다. 이후 체포된 강종의 구타당한 흔적을 보자 끔찍한 몰골이라고 뇌까린다. 강종이 황태자를 교체한다는 문서에 서명하자 바로 가져가 민중들에게 황태자가 교체되었다고 발표한다.
- 어윤중
조세개혁이 가장 큰 소망인 탁지부 대신. 설사 임금이라도 주먹구구식 예산 집행은 용납하지 않는 강직한 성격으로 강종이 이미 러시아제 소총 도입이 확정된 상태에서 즉위 40주년 기념식에 쓰려고 30년식 소총 15만어치, 대포와 속사포 20만원치, 도합 35만원치 무기 구매를 덜컥 약속하는 사고를 쳤을 때 국고는 단 한 푼도 각출할 수 없으니 내탕금에서 지출하라 일갈한다. 군제 개혁도, 병기 개발도 모두 돈싸움인 만큼 내각에서 김시혁과 직접적으로 얽히는 일이 가장 많은 인물이며 김시혁도 최대한 탁지부 권한을 존중하려 애쓴다. 한규설이 낙향한 다음에도 조정에 남아 최장수 대신이 되었으나 1차 대전 원정군의 뒷바라지를 하느라 고령에 과로로 건강이 심하게 축나 자리보전을 하고 만다. 노구를 이끌고 광양에 한국 최초의 제철소가 들어서는 순간을 참관하는 것이 회광반조였고 이후론 국사에 참여하지 못할 정도로 악화된다.
- 민영환
젊은 시절부터 노련한 모습을 보이는 관료로 민씨 척족 중 단연 돋보이는 인물. 2차 쿠데타 직전 신설된 헌병대 사령관을 부임했다. 강종이 그를 헌병사령관에 부임시킨 건 군부를 견제하려는 의도였으나 정작 그는 이용익의 설득을 받아들여 이완용의 협조 요청을 거부하고 쿠데타를 묵인하는 것으로 답한다. 전쟁이 발발하자 김시혁과 함께 평양으로 북상, 도주한 관서사령관을 대신한 자신의 동생인 민영찬과 함께 헌병사령관 직위를 이용해 치안을 유지하고 포로들을 관리하는 데 주력한다. 황주 방면 7여단을 지원할 때는 또다시 소모전을 벌이려는 김시혁을 제지하고 양동 작전을 제안했다. 이 양동 공격이 성공하면서 7여단은 간신히 살아남고 한국군은 함흥으로 후퇴할 여유를 얻는다.
2부 도입부에선 육군대신으로 직을 옮겨 등장. 강종에게 무작정 충성하지 않고 합리적인 방안을 찾던 그가 떠난 뒤 국가헌병대는 급격히 강종의 친위기관이 된다. 1차 세계대전 참전이 결정되고 총리대신 김가진이 사임하자 유능함을 인정받아 왔고 러시아를 잘 아는 그가 원수부와 내각, 중추원 모두의 지지를 받아 군부대신 겸 총리대신직에 오른다. 총리가 되자마자 러시아 극동총독을 설득, 한국군의 참전을 1916년으로 미루어 필요한 시간을 버는 수완을 발휘하며 이후로도 협상국과의 막후 협상, 근황파&군부와의 조율 등으로 국내외를 오가며 바쁜 나날을 보낸다. 전쟁으로 인한 물가 상승과 경기 불황으로 민심이 악화되자 내각이 해산되며 총리직에서 내려오고 베르사유 회담에 한국 대표로 참석한다. 본래라면 현직 총리인 이승만이 참석하는 게 순리에 맞았으나 자신이 떠나있는 사이 세력싸움에서 밀리는 걸 우려한, 강종에게 뻔히 속아 넘어간 이승만은 민영환의 참석을 강력하게 주장해 관철시켰고 강종을 견제할 관록있는 정치인인 사라진 사이 강종의 친위 쿠데타 계획이 착착 진행된다.
암울한 조선 말기를 중앙 정계에서 겪어 본 마지막 세대로 민씨 척족이란 거대한 배경에 군부, 내각, 중추원의 신임을 골고루 받고 있어서 가장 강종이 경계한 대신이었다.
- 민종렬(閔種烈)
나주목사를 역임하며 남접 주력과 합류하지 않고 독자행동하던 김개남을 수차례 격퇴한다. 을미의병 때는 의병을 일으켜 이규태와 협력했다. 군무와 행정에 모두 능해 그가 전라도 관찰사로 있을 때는 남방 지역의 문제가 덜 했었다고 언급된다. 의화단 전쟁 이후 민심이 이반된 함경도를 위무하고, 큰 피해를 입은 지역 포군들을 재정비하러 파견된다. 1917년 시점에서는 평안북도관찰사로 민종묵과 함께 군부와 힘을 합쳐 사라진 호로군을 대신할 철도, 국경경비대를 만주인과 한인들로 신설하는 계획을 진행한다.
- 김홍륙
원역사에서 고종과 순종을 독커피로 독살하려 한 김홍륙 독차 사건의 주범.[30] 다만 여기서는 김시혁 덕에 계속 중용되면서 독차 사건 없이 한성부 판윤으로서 잘나가고 있다. 강종의 의사를 반영한 한성부 재정비를 주도했으며 극동 전쟁을 맞아 정부 시설을 함흥으로 옮길 때 누군가는 남아서 한성의 백성들을 지켜야 한다며 한성에 남아 무저항 도시를 선언했다. 이후 괴뢰 정부에 협력하는 척하고 있다가 한성 탈환 타이밍에 맞춰 내부에서 호응해 준다. 2부에선 한동안 등장이 없다가 1919년 친위 쿠데타 이후 오랜만에 등장. 여전히 한성판윤으로 재직중이다. 중추원 의원들과 함께 전염병 실태를 시찰하러 나왔다 부유층이 거주하는 한성 서부에만 신경 쓰고 빈민들이 많이 사는 한성 동부를 나몰라라 하는 것도 모자라 애걸하는 가난한 시민들을 폭행하기까지 하는 헌병대의 작태에 경악하지만 총을 만지작대며 황명을 핑계대는 헌병대의 서슬로 물러서야만 했다.
- 민종묵
학부대신. 원래 역사에선 을사조약 시기까지 반일을 고수하다 한일병합 즈음 회유되어 친일파로 남으나, 작중에서는 바뀐 역사의 수혜를 입어 존경받는 유림 관료로 남게 되었다. 자신은 상투를 고수할 정도로 옛 법도에 충실하나 앞으로는 신식 교육이 주축이 되어야 한다는 열린 소신을 지닌 온건 보수로, 김시혁도 늘 깍듯이 예의를 지킨다. 교육보국 백년대계 구호를 내세우며 학교 설립에 주력, 재임 기간 동안 전국에 4,000개의 크고 작은 학교를 세우는 괄목할 성과를 냈다. 남만주의 중국인들을 신뢰할 수 없으니 추방해야 한다는 이범진의 주장에 단호히 반대하며 교육을 통해 서로 다른 이들을 하나로 묶을 수 있으며 그것이 유자의 짐이라 강변한다.
지속적인 동질화 교육과 황제, 내각의 지원으로 남만주 만주족과 한족들에게 한국인이란 소속감을 심거나 최소한 한국의 통치를 받아들이게 하는 데는 괄목할 성과를 냈고, 2차로 군부와 힘을 합쳐 사라진 호로군을 대신할 철도, 국경경비대를 만주인과 한인들로 신설하는 계획을 진행한다. 강종이 전국을 순방할 때 동행했으며 박제순이 김순애 등의 여권 신장 시위가 빨갱이 조짐이라며 강경 진압을 주장하자 엄귀비와 의친왕비 등도 시위에 참여했고, 양반가의 여인들을 천한 외간 남정네들을 시켜서 잡아 끌어내자는 것이냐며 분노한다. 3월 혁명 이후 임시 거국내각에서 참정대신을 맡으며 전우의 재판에서 전우가 처형되면 그의 제자들에 의해서 순교자가 될 수 있고 또 어차피 곧 죽을 사람이니 처형해서 무엇하냐고 종신형을 주장해 관철시킨다. 이후 정식 신민당-한민당 연립 내각이 구성되었을 때 다시 학부대신이 된다.
- 이도재
한성 조약 이후, 이완용 후임 전라도 관찰사로 임명되어 일진회를 정리했다. 극동전쟁 때는 한성 함락 후 일본군이 세운 괴뢰 정부에 의해 전라도 관찰사에서 해임되었으며, 이후 의병을 일으켜 제2전선에 합류했다. 2부 시점에서는 남만주에 변계강무서를 설치해 남만주의 지배권을 확실시하고 있으며 장쭤린을 상대로 노련하게 대처하고 있다. 이승만 내각 때 법부대신에 임명되었지만 박제순이 궁내부대신에 그대로 유임되자 며칠만에 사임하고 북방으로 떠난다.
- 홍종우
프랑스 군사고문으로 파견된 페르디낭 포슈와 김시혁의 대화를 통역해 주며 등장. 한국에서 러시아에 가장 능숙한 사람이 김인수라면 프랑스어에 가장 능숙한 사람은 홍종우라 프랑스와의 각종 협상, 외교무대에선 어김없이 등장했다. 2부에선 주 프랑스 대사를 맞아 수행하며 러시아가 다롄, 뤼순을 일본에 판매하겠다고 나서 한국이 뒤집어졌을 때 러시아의 동맹인 프랑스 측과 실무 교섭에 나서 극동주 매각을 전후로 미루는 성과를 냈다. 이후 내각이 개편되며 외부대신 서리가 된다. 러시아가 관동주가 매각이란 초강수까지 두게 된 건 황제와 내각 모두의 책임이라며 냉소적인 반응을 보인다. 안중근과 함께 대불 외교 실무를 전담하며 한불동맹 체결을 주도했다. 파리 강화 회의에도 한국 대표로 참석했으며 2.27 계엄령 이후 델카세에게 한국 몫 배상금을 늘려주는 대신 양국의 함대 건설 비용으로 함께 쓰자고 제안한다.
- 이범진
김시혁이 붙잡은 해적들을 법부대신으로서 처벌했으며 의화단 전쟁 시점에서는 총리대신이었다. 극동전쟁 시점에는 외부대신으로 포츠머스 회담에 한국 대표로 참석했다. 1913년 시점에서는 내부대신이었으며, 조정 내에서 중국에 가장 강경한 인사로 대한제국이 점령한 남만주에 유입된 중국 유민들을 모두 추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승만 내각 때 이범윤과 함께 참정대신에 임명되었지만 박제순이 궁내부대신에 그대로 유임되자 분노해 사직한다. 이후 신민당-한민당 연립 내각이 구성되었을 때 농상공부대신을 맡고 있다.
- 심상훈
극동전쟁 시점 내부대신. 이범진에게 프랑스와 독일이 우리에게 도움을 줄 수 있겠냐고 물어본다.
- 민영규
이승만 내각 때 민영환이 실각한 것에 대해 여흥 민씨들의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 체신 대신에 임명되었으나 이승만이 연해주를 두고 일본에 유화적으로 행동하자 분노해 낙향한다. 2부 외전 시점에서는 요동 관찰사로 봉천 일본 영사관을 상대로 강경하게 대응하고 있다.
- 민정식
2부 시점 경상남도 관찰사. 민형식과 함께 귀국한 김시혁과 구주원정군을 환영한 뒤 열차를 기다리면서 현재 한성부 상황과 삼남의 민심을 알려주며 강종과 헌병대의 만행에 분노해 부윤들과 함께 지원해 줄 터이니 거병할 것을 제안하나 김시혁은 거절한다. 김시혁이 전우와 동학 잔당의 반란을 토벌 할 때 진주부윤과 함께 경상도 순검들을 차출해 주었다. 이후 신민당-한민당 연립 내각이 구성되었을 때 참정대신이 되어 민종묵을 보좌한다.
- 민영달
2부 시점 전라북도 관찰사. 전우가 반란을 일으키며 협조하라고 요청하자 이를 거절했다. 이 때문에 3월 2일에 전우의 반란군에게 공격을 받았지만 순검 600명과 포군 병력 4000여명을 소집해 이를 격퇴한다.
- 이윤용
극동전쟁 시점 경무사. 이용익의 설득을 받아들여 김시혁이 2차 친위 쿠데타를 일으켰을 때 방관한다. 한성탈환 때도 협조했으며 덕분에 이완용의 의붓형임에도 불이익 없이 관력을 이어갔다. 극동전쟁이 종전 직후 극도로 혼란스러운 치안을 안정화시키기 위해 대대적인 토벌 작전을 실시한다. 탐관오리로 악명 높지만 능력만은 확실해서 민간으로 대량으로 풀린 총기를 제어할 방안으로 민간인의 화기 소유는 인정하되, 탄약을 철저히 관리하는 대책을 내놓는다. 군벌, 비적과 수시로 교전해야 하는 압록-두만 이북 지역을 제외하고 민간에 풀리는 탄약의 수량과 가격을 엄격하게 통제하고 해수 구제와 포군 소집 훈련에만 사용할 수 있도록 까다로운 제약과 원칙을 확립해 일주일에 한두번은 총기 사고가 발생하던 치안을 안정시켰다.
- 남만리
성하영과 함께 한성구락부 창설 직후에 가입한 초기 멤버. 경복궁 습격 이후 신설된 친위영 4중대장으로 2중대장 김시혁, 3중대장 성하영과 함께 동학군 진압에 공을 세웠다. 을미사변 이후 의병을 진압하라는 명을 받았지만 다른 구락부 멤버들과 마찬가지로 오히려 의병에 합류했다. 1차 쿠데타 이후 성하영과 함께 친위대 연대장 이규태를 예하 대대장에 임명되었고 강종의 대청 선전포고에 이어 진행된 북벌 때도 밑에서 보좌했다.
이후 어느 시점에 군을 떠나 경무청에 투신하여 2부 시점에선 경무사로 내각의 유일한 무력집단이자 정보기관의 장을 역임 중이다. 강종에 의해 친위쿠데타가 일어나자 김가진과 함께 진압하려 했지만 신우균의 배신으로 무장해제된다. 이후 한성부 내부에서 외부의 경무사로 보직변경 되었지만 그와 그의 부하들은 2.27 계엄령 때 시위대를 쏘는 헌병들에게 총구를 돌리며 저항하며 김시혁과 김시혁 자택에 있는 사람들이 헌병들에 의해 위험에 처하자 시민군들과 함께 헌병들을 제압한다. 이후 김시혁에게 경희궁 쪽을 지원하라는 지시를 받는다. 김시혁이 관용차량을 타고 원수부로 가려하자 관용차량보다는 헌병대에게서 노획한 장갑차를 타라고 제안한다.[31] 계엄령이 진압된 이후 양위식 때 육해군 장군들 바른편에서 강종을 압박한다.
- 이시영
이용익이 쓰러지기 전 후임으로 임명한 조폐국장. 박제순이 혼란스러운 경제 상황을 별것 아닌 것 취급하자 대놓고 이용익과 비교하면서 면박을 주며 현경제 상황을 설명한다. 2부 외전 시점에서는 탁지부 대신.
- 이상설
포츠머스 회담에서 참사관으로 참석하며 일본이 무리한 요구를 하자 분노하며 고무라 주타로에게 삿대질을 하며 일갈을 날리다가 이범진이 말리자 진정한다. 1916년 전시 내각으로 바뀌기 전까지 외부대신이었으며, 이후 제1차 세계 대전 참전이 결정되고 전시내각으로 바뀌자 주러 대사로 전임된다. 브루실로프 공세 이후 러시아가 또다시 무리하게 공세를 가했다가 위험에 처하는 바람에 한국군에게 지원을 요청했을 때 폴리바노프와 협상해 한국군이 다시 도와주는 대가로 하얼빈 이남의 철도 노선 지분을 한국에 매각하는 형식으로 전부 넘기고 이를 공식 문서화할 것을 요구해 이를 관철시킨다. 이후 러시아가 혁명으로 인해 현지 상황이 악화되자 토마시 가리크 마사리크와 비밀회담을 하여 러시아 황실 일가와 차르를 따르는 궁정 귀족들, 충성파 병력과 체코 군단, 폴란드 군단, 시베리아 소총병 사단과 함께 시베리아 횡단철도로 만주-한국 본토까지 철수한다.
- 이한응
극동 전쟁 당시 주영 공사로 이승만, 홍종우처럼 기자들 앞에서 한국의 정당한 투쟁과 자주독립을 부르짖으며 열변을 토했다. 2부 시점에서도 계속 주영 대사이며, 참전 이후에는 외부참판으로 영전한다.
- 민형식
양아버지 민영휘와 달리 너그럽고 올곧은 성품으로 강종에게 밉보여 경상북도 관찰사로 사실상 좌천되었다. 민정식과 함께 귀국한 김시혁과 구주원정군을 환영한 뒤 열차를 기다리면서 현재 한성부 상황과 삼남의 민심을 알려주며 강종과 헌병대의 만행에 분노해 부윤들과 함께 지원해 줄 터이니 거병할 것을 제안하나 김시혁은 거절한다.
- 안중근
외부 관료를 역임하다 아시아주의자인게 문제가 되어 퇴직. 의병활동을 하다 김시혁에게 합류를 청하며 등장한다.[32] 김시혁은 그를 김홍륙에게 보내 함께 움직이게 한다. 아시아주의자라 불이익을 받았고, 친일파 박영효와도 교분이 있어 그를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기에 한양 내 저항 세력 구축의 중심이 된다. 문산 전투 이후 벌어진 한성 탈환 때 김홍륙과 함께 내부에서 호응했으며 살려달라 애걸하는 박영효에게 죗값을 치르란 말을 남긴다. 10년 뒤에도 외부참판으로 봉직하다 기존 프랑스 대사 홍종우가 외부대신 서리가 되면서 프랑스 대사로 전임된다. 홍종우와 함께 한불간 대등한 동맹 체결을 주도했다. 홍종우가 극동 연해주 출병 관련 문제로 일본 측 협상 대표단과 접촉하는 사이 델카세에게 대한제국이 소비에트와 협상을 할 것을 알리며 프랑스의 협조를 요청했다.
- 신채호
황성신문 및 대한매일신보의 주필을 맡은 언론인이었으나 만주에 자신의 이익지대를 확보하려한 강종이 그의 영웅주의 사관에 주목해 궁내부 전례관에 임명했다. 황실의 재정지원 아래 을지문덕전을 시작으로 고구려의 고토인 만주에 대한 격동적인 글을 써 식자층이, 그중 특히 젊은 학생들이 만주에 관심을 가지게 하였다. 본래는 만주의 한인, 만인들을 2등 내지는 3등 신민 취급하며 교화하고 가르쳐야 할 미개인 취급했으나 만인을 한국인에 동화시키려는 강종의 지시를 받고 방향을 선회. 만주족은 고구려와 발해 유민의 후예이자 오래전에 잃어버린 형제 민족이라고 논설을 발표한다. 이를 강조하기 위해 청의 애신각라씨가 실제로는 김 씨라는 주장까지 한다. 부황을 퇴위시키고 즉위한 이강도 고구려사에 관심이 많아서 3월 혁명 후에도 궁내부 특진관 자리를 유지한다. 새로 도입할 전함 6척의 함명을 짓는 위원회에 궁내부측 입장을 대변하는 역할로 참석해 해군에서 적지 않은 머릿수를 차지하는 한족, 만주족 사병들의 입장을 고려해야 함을 강조한다.
- 김규식
외부참판으로 첫 등장. 브루실로프 공세 승전 소식이 전해진 후 한성에서 벌어진 폭동으로 중국인, 일본인 피해가 발생하자 이를 항의하는 중일 사절을 응대한다. 이후 전쟁업무를 돕기 위해 프랑스에 있는 외부대신 서리 홍종우를 대신해 여러 외교 업무를 수행하며 바쁜 나날을 보낸다. 3월 혁명 이후 소련의 국교정상화 요청을 이강에게 보고하고 전권대표로 나선 김시혁 곁에서 실무진으로 보좌한다.
- 조소앙
외부 제1국장 서리. 원래 일본 메이지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했으며 이 때문에 한성부 고등재판소에서 요직을 제안받았지만,[34] 대한제국이 만국을 상대하려면 국제법이라는 새로운 무기를 가지고 외교전에 들어가야 한다며 외부에서의 관료 생활을 자청해서 들어갔다.
- 조병옥
공주부 경찰 총순. 전북의 전우군과 전남의 남접 잔당을 토벌해야 하는데 농번기라 포군 동원에 한계가 있어 영남과 호서에서 순검대를 대대적으로 차출할 때 포함되었다. 순천 전투에서 남접 잔당에게 치명적인 패배를 안기는 공을 세운다. 원역사처럼 다혈질이고 토벌 시 과잉 진압을 했다는 의혹이 있다. 전우의 제자가 김시혁을 모욕하자 분노해 그를 죽이려 했지만[35] 김시혁의 제지로 그만둔다.
2.4. 친일파
1, 2차 쿠데타와 극동전쟁을 거치며 다 제거되거나 망명하거나 친일 노선을 버렸다. 일본이 현지 협력자 포섭 수단으로 적극 활용한 아시아주의는 사실상 매국의 다른 이름이 되어 대한제국 내에선 뿌리가 뽑혔다. 일본의 아시아주의는 극동전쟁에서 패배하고, 한국이 1차 대전에서 유럽 열강 군대를 격파하는 모습을 보면서 크게 변하게 되는데, 일본이 아닌 한국을 중심에 두거나 최소한 한국의 역할을 매우 강조하는 형태로 변화했고, 일본을 유일무이한 중심에 두는 기존 아시아주의는 일부 강경파들의 전유물이 되었다. 돌아갈 곳이 없는 한국인 친일파들은 당연하다면 당연하게도 후자에 완전히 매몰된 채 극단적인 자기정당화에 치중한다.- 김홍집
매국형 친일파는 아니지만, 김시혁에 의해 비틀린 역사는 그에게 조선의 대신으로 죽거나, 매국노가 되어 사는 선택지만을 남겼다. 친일 내각을 이끌며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지만, 김시혁의 1차 친위쿠데타 이후 원역사와 같은 운명을 맞았다.
- 이완용
정국이 원 역사와 달라지면서 조금 이르게 친일파로 전향한다. 극동전쟁 시기에 친일파로서 괴뢰 정부의 수장격 존재가 되지만 일본군이 밀리면서 괴뢰 정부가 무너지고 도망치다가 김석중이 이끄는 기병대에 붙잡혀 편곤으로 구타당한 뒤 재판을 받고 공개 총살된다.
- 박영효
송병준과 함께 이 소설에 나온 친일파들 중에서도 악질로 묘사되는데 특히 주요 군사 정보들을 뇌물 받고 팔아먹었다는 이완용도 하지 않은 행위를 한데서 더더욱 실드를 쳐줄 요소가 없다. 그 결과 극동전쟁 중 세워진 괴뢰정부에도 합류하지만, 한성이 탈환되자 분노한 한성 주민들에게 잡혀 얻어터지게 되고 김홍륙과 안중근에게 구원을 청하지만 싸늘하게 거절당한 뒤 다시 끌려가는 것으로 출연 종료. 다른 곳에서 붙잡혀 온 이완용, 송병준과 함께 공개 총살로 생을 마감했다. 임금의 부마 씩이나 되는 인사가 가장 적극적으로 나라를 팔아먹으려 든 사례라 이쪽 세계에선 이완용을 대신해 최악의 친일파로 남을 전망이다.
- 송병준
원역사 정미칠적 중 하나이자 이 소설상 박영효와 함께 친일파 중 최악의 악질. 그래도 한국인의 정체성은 가지고 있던 박영효와 달리, 이쪽은 아예 노다 헤이지로라고 이름까지 일본식으로 쓰고 일본어를 주로 쓰는 등 철저히 일본인스럽게 행동한다. 한성이 수복되고 용케 제물포까지 탈출하는데는 성공했지만 하필 주안산에서 마주친 진위대 3여단 병력들이 경비를 서고 있었던지라 그대로 붙잡힌다. 이완용, 박영효와 함께 서소문 바깥에서 공개 총살로 처형되었다.
- 권중현
원역사 을사오적 중 하나로 역시나 친일파답게 괴뢰정부에 합류했다. 이후 일본이 밀려나면서 한양 방위책임을 떠넘기다시피 받게 되고 당연하겠지만 이미 시세를 눈치채고 있던 그는 오히려 한양 문을 대한제국군에게 열어주며 다시금 편을 바꾼다. 부인 못 할 악질 친일파이자 부역자라 사면 약속 따위 무시하고 처형해 버려도 상관없음에도 강종은 박제순과 마찬가지로 군부, 내각 견제 카드로 쓰기 위해 살렸고 김시혁 견제를 위해 군사 쪽에 박아 넣으려 했지만, 친일 이력이 너무 뚜렷해 살려두는 것 조차 은혜인 그를 용납할 이는 근왕파 중에도 드물었고 바로 정치적 맹공을 받아 완전히 은퇴당하게 된다.
- 유길준
초반부 박영효가 내무대신에서 쫓겨난 뒤 후임으로 임명되었다. 김시혁이 이끄는 평양진위대의 한양 입성을 반대하나 실패, 불안감이 맞아들어 김시혁의 첫 번째 친위 쿠데타가 일어나자 몸을 빼내 일본으로 망명. 1903년까지 일본에 머무르다 한성 괴뢰정부에 합류하지만 일본이 패전하며 또 망명길에 오른다. 기록조사실에서 찾아내려 모진 애를 썼지만 진즉 미국으로 빼돌려 버려 찾지 못했고 1차 대전 서부전선에 일본이 참전한 것을 계기로 수면 위에 등장한다. 일본이 구성한 자원병 여단에 종군하라며 시모노세키 일대의 친일파들을 선동하고 있다고.[36] 원 역사의 유길준은 친일파는 맞고, 매국노는 아니었으나 을미사변 이후 정국이 본격적으로 비틀리며 김홍집처럼 조선인 손에 죽거나, 철저하게 일본에 의탁하거나 두 가지 선택지가 남은 상황에서 후자를 고르며 이완용 이상의 악질 친일파로 남게 되었다. 여담으로 원역사에서는 1914년에 사망했지만 여기서는 그 이후에도 살아남아 활동을 이어갔다.
- 조희연
박영효랑 훈련대 1대대장 신태휴의 교체를 두고 알력 다툼을 벌였다. 김시혁의 1차 쿠데타가 일어나자 일본으로 망명한다.
- 허진
군내 대원군파의 중심인물. 강종이 만든 친위영을 감시하기 위해 참모관으로 임명되었다.
- 우범선, 이두황
이들을 무력화시켜야 한다는 김시혁의 조언을 강종이 거부하면서 원역사처럼 을미사변에 가담했고, 김시혁의 첫 번째 친위 쿠데타로 인해 일본에 망명했다. 이후 일제가 친일 내각을 세우기 위해 다시 귀국하지만, 김시혁의 두 번째 친위 쿠데타 이후 잡혀 처형된다.
- 이근택
처음에는 반일 인사였다가 일본과 대한의 차이가 압도적이라는 사실에 경도되어 친일로 전향한 인물. 1차 쿠데타로 우범선, 안경수, 이두황 등이 모두 해외 도피한 상태에서 얼마 안 되는 친일 군맥으로 군부를 견제하기 위해 강종이 의도적으로 키운 인물. 청의 선전포고에 똑같이 선전포고로 대응하고 남만주 점령을 명한 강종이 함경도 방면군 사령관으로 전격 발탁, 2만의 병력을 이끌고 훈춘 방면으로 진격한다. 평안도 방면에서 진격한 이규태가 강종의 재촉을 최대한 뭉개며 불필요한 손실을 줄인 것과 달리 무리한 진격으로 현지 민병대와 충돌하고 콜레라까지 발병해 3천의 사상자를 낸다. 끝까지 제지하던 참모장 장기렴을 해임하고 무리한 진격을 이어가느라 함경도 일대에서 무리한 징발을 자행. 북청 일대에서 소요 사태가 발생하기에 이른다.
결국 함경도 지방관들의 직소와 장기렴의 증언을 수렴한 북간도 관리사 이범윤에 의해 해임 조치된다. 해임된 뒤에도 강종의 총애를 받아 황실경위원장에 임명되어서는 김시혁이 올리는 일본의 침공 징후에 대한 정보를 모두 차단하고 있었다. 이후 김시혁이 2차 쿠데타를 일으키자 도주했다. 결국 종전 이후 붙잡혀 이근상을 제외한 형제들과 함께 처형된다.
- 이병무
1903년 2차 쿠데타 직전 군내에 거의 유일하게 남아있던 친일파 고급 지휘관. 군부를 견제하고 갈라치기 위해 강종이 의도적으로 중용한 인물로 2차 쿠데타 직전까지 포병사령관을 역임 중이었다. 군인으로서 실력은 전무하며 일찌감치 퇴근해 자신이 꽂아 넣은 친일 장교, 친한 일본군 장교들과 요정에서 주색잡기로 노는 것이 일상. 2차 쿠데타 당일에도 퇴근 시간보다 앞서 기생집을 찾았다 기록국 요원들에게 습격 받자 속옷만 입고 창문으로 달아나는 추태를 보이다 체포된다. 그 뒤 처형되지는 않은 채 수감되어 있다가 일본의 침공으로 풀려났고 한성이 수복될 때 용케 달아나 일본으로 몸을 뺐다. 일본 측에서는 그를 다시 상해의 영국 조계지에 숨겨놓은 탓에 기록조사실이 찾지 못했고 1차 세계대전 서부전선에 일본이 참전하자 친일 부역자들로 구성된 대대의 참모로서 재등장한다.
- 안경수
김시혁의 첫 번째 친위 쿠데타 이후 일본으로 망명했으나, 망명생활에 심한 염증을 드러내다 기록조사국의 공작에 걸려든다. 당근과 채찍을 교묘하게 활용한 조사국 요원들의 심문에 박영효가 한국군 암호를 팔아넘긴 것 등 각종 기밀 사항들을 실토하며 목숨을 보전했다.
- 민영철
관서사령관 겸 평안남도관찰사였지만, 풍경궁 예산을 착복한 것으로도 모자라 일본 근위사단과 내통해 평양을 무력화시키려 했다. 이후 기록국에 의해 내통 사실이 들통나자 도주한다. 이후 일본이 패전하자 일본으로 망명해 시모노세키에서 아시아주의자들의 거두가 되었으며, 1차 세계대전 서부전선에 일본이 참전하자 이병무와 함께 친일 부역자들로 구성된 대대의 참모가 된다.
- 장석주
극동전쟁 때 일본이 세운 괴뢰정부에 법부대신으로 임명되어 적극 협조했다.[37] 극동전쟁 이후 일본으로 망명해서 다카타니 요시라는 이름으로 개명한 뒤 일본인인 척 살았지만, 기록국 22과, 27과 요원들에게 집요한 추적 끝에 사로잡혀 참살당하고 목은 한강에 버려지게 된다.
- 구연수
극동전쟁 때 신정부군을 이끌며 일본의 삼광작전에 적극 협력했다. 극동전쟁 이후 일본으로 망명했지만 나가사키에서 기록국 22과, 27과 요원들에 의해 납치되어 정식 재판을 받은 후 처형된다. 시체는 분노한 민중들에 의해 갈갈이 찢겨 진다.
- 배정자
다야마 사다코라는 일본 이름으로 불리며 한국과 일본 이중간첩으로 행동했으며, 기록조사실에서 붙잡으려 시도했지만 어떻게든 살아남는데 성공한다. 2부 시점에서도 박두영과 접촉하며 다이쇼 덴노가 건강이 좋지 않다는 소식을 전한다.
2.5. 독립협회 → 신민당
중추원이 자리 잡으며 황제와 황국협회에 대응되는 야당으로 자리 잡는다. 한성부를 비롯한 도시가 주요 지지기반. 뚜렷한 구심점 없이 언론사와 실업가의 후원을 받는 구파와 지주와 학생계를 중심으로 한 신파[38]로 파벌이 나뉘며 그 안에서도 인물과 성향에 따라 자잘한 파벌들이 존재한다. 이승만이 제 지지세력을 데리고 민본당으로 떨어져 나가고 남은 계파들이 모여 신민당으로 개편된다.주 텃밭은 기호지방과 삼남.
- 서재필
독립신문 사주. 미국 국적을 따고 돌아와 조선에 의회 도입을 위해 준비하다가 김시혁과 엮이게 된다. 김시혁과는 견제하면서도 협력도 하는 입체적인 관계. 원래 역사에서도 만주 점령을 주장했던 사람이라 한국군의 남만주 점유와 장작림 토벌을 아주 열성적으로 지지했으며 한국군이 영구를 이미 점령해다는 오보를 고의적으로 내기도 했다. 민의와 그 민의를 불러일으키는 언론의 잠재력에 주목한 강종은 갑신년의 역적이라며 혐오하던 서재필이 이끄는 독립신문을 참된 언론이라는 공치사까지 붙여 전폭 후원해 준다. 강종의 친위 쿠데타 이후 강종과 정국을 강하게 비판한 윤치호의 사설을 게재해줬다는 이유로 헌병대에 끌려갔고 며칠 뒤 온 몸이 멍투성이가 된 채 풀려났다.
- 박은식
1916년 시점 중추원 의장으로 등장. 구심점 없이 파벌 싸움만 치열하느라 황제에게 여론전으로 밀리는 상황을 냉소적으로 바라본다. 이승만의 일민주의에 대해서는 대한을 지옥을 구렁텅이로 빠뜨릴 아주 위험한 것이라며 혹평한다. 윤치호, 현상건과 회동했다 한일 국혼에 대해 전해듣고 경악한다.
- 안창호
갓 중추원에 입성한 신진 의원으로 등장. 신·구파의 갈등, 지나치게 과격한 이승만 계파의 부상을 우려한다. 김시혁에게 무척 우호적인 시선을 견지하고 있으며 그와 의친왕을 끌어들여 독립협회를 묶을 구심점으로 삼자고 주장한다. 흡연자로 서양식 궐련이 아닌 곰방대를 애용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고증이다. 만인과 한인을 포용하려는 정책에 대해 큰 틀에서는 동의하지만 고루한 황국협회 구당이 주도하는 것에 대해 불만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승만이 정권 탈취를 위해 나라가 엄청난 혼란에 빠질 것을 알고도 파시즘적 사상을 내세우며 일민주의를 강조하는 것을 보며 경악한다. 황국협회의 분화와 독립협회의 내흥을 지켜보던 강종은 여성참정권 요구 시위를 계기로 온건파인 그와 박은식과 연결 고리를 만들어 두려 한다.
이후 시위에서 중추원의 소집령을 듣고 합류하려 했지만 무장한 시위대와 헌병대의 교전에 휘말려 합류하지 못하고 김시혁의 집으로 와 윤보선과 함께 김시혁이 시민군을 이끌어야 한다고 설득한다. 계엄령이 진압된 이후 강종을 그냥 끌어내리자는 의견을 길영수와 함께 반대하며 정당한 절차로 끌어내리자고 말해 관철시킨다. 이후 강종의 양위서를 길영수와 함께 의친왕에게 바친다.
2.6. 황국협회 → 한국 민주당
중추원의 규모가 커지면서 근황파 여당으로 정착한다. 강종을 구심점으로 확실하게 뭉쳐있어 결속력에 우위를 가졌으나 기독교계 신파가 점점 세를 불리면서 독립협회처럼 분열하기 시작한다. 구파는 전통적 유림의 사고방식을 따로 황실에 충성하고, 한족, 만주족에 대해서도 교화에 중점을 둔 동화, 흡수 정책을 추구하나 신파는 서양식 사회진화론과 개신교 사고방식에 입각해 제국주의적 면모를 아주 강하게 드러낸다. 텃밭은 평안도, 함경도, 황해도.당의 수장인 길영수는 1차대전 전후로 강종과 결별을 택하고 정책정당으로 개편을 시도한다. 이 과정에서 길영수를 따르는 청류파와 강종 개인에게 맹목적으로 충성하는 탁류파로 나뉘었고 청류파가 당권을 쥠으로서 축출된 탁류파는 세력기반인 보부상 청년조직 상당수를 이끌고 헌병대에 합류한다. 민영환이 자리를 비운 사이 강종이 추진한 내각 해산과 게리멘더링을 통한 어용내각 구성으로 힘없는 야당으로 밀려나 강종과 더욱 대립각이 심해진 상황에서 친위 쿠데타와 2.27 계엄, 시위대 학살에 경악하며 강종 퇴위에 동조하게 된다. 3월 혁명 이후 당명을 한국 민주당으로 바꾸고 정책 정당으로 완전히 거듭난다.
- 길영수
황국협회 소속 보부상으로 강종의 최측근으로 활동했다. 초창기 모든 면에서 열세였던 한성구락부와 강종을 잇는 연락책이자 공작원으로 활동하며 친위 쿠데타 성공에 중요한 조력자 역할을 했다. 극동전쟁 시점에서는 육군 참장이 되어 황국협회를 이끌며 의병들에게 전쟁 물자를 보급하거나 봉기를 일으키게 한다.
2부 시점에서도 황국협회 전체를 이끄는 수장으로 있다. 황국협회를 강종의 개인의 사당이 아닌 정책과 방향성을 기반으로 한 정책정당으로 바꾸기 위해 노력 중이며 이로 인해 통제 가능한 친위세력을 원하는 강종과 정치적으로 결별하게 된다. 친위 쿠데타 이후 김홍륙과 다른 중추원 의원들과 함께 역병 방역 실태를 시찰하려 했으나 헌병대에 가로막혀 힘없이 돌아서고 만다. 무고한 인민을 향한 헌병대의 무차별 발포를 전해듣고는 즉시 미약한 힘이 나마 보태기 위해 강종 퇴위를 골자로 한 규탄안을 발표하고 봉기를 독려한다. 계엄령이 진압된 이후 강종을 그냥 끌어내리자는 의견을 안창호와 함께 반대하며 정당한 절차로 끌어내리자고 말해 관철시킨다. 이후 강종이 양위서에 서명하자 바로 가져가 민중들에게 이것은 의친왕에게 양위하겠다는 문서이며 더 이상 강종은 황제가 아니라고 소리친다. 그러고 나서 안창호와 함께 양위서를 의친왕에게 바친다.
신정부의 총리가 되어 임시 거국내각을 이끌며 김시혁에게 소련과의 외교 협상 전권대표로 나서줄 것을 부탁한다. 러시아어에 능통해서 한소 수교 소식을 듣고 예고도 없이 찾아온 올가 여대공을 접견을 급히 맞았으나 워낙 흥분해 있어 결국 황제가 나서야 했다. 이후 정식 신민당-한민당 연립 내각이 구성되었을 때도 총리를 맡는다. 워싱턴 해군 군축회의에 한국측 대표로 참석하며 일본이 한국의 해군 전력을 깎기 위해 수작질을 부리자 봉천 사건의 전말을 이미 다 알고 있다며 일본을 압박한다. 이후 일본이 무츠에 대한 용인과 3.5의 배수량에 대해서 반대하지 말 것을 요구하자 그나마 말이 통하는 일본 내각과의 관계 유지를 위해 받아들인 뒤 미국 부통령 후버와 회담한다.
- 윤치호
황국협회 신파의 거두. 본디 독립협회 소속이었으나 독립협회의 방향성에 회의를 느끼고 노선을 바꿨다. 뛰어난 외국어 구사 능력과 문필력으로 강종의 대외적 이미지 상승에 기여했다. 이승만과는 사사건건 부딪치는 앙숙 관계로 중추원에서 대놓고 주먹다짐을 벌인다. 심지어 제대로 얼굴에 주먹을 가격하기까지 해서 구치소에 구금되기까지 했다. 원 역사에선 하나같이 잘 안 풀리면서 세상만사에 좌절한 염세주의자였는데 역사가 개변되며 잘 풀리기 시작하자 정반대로 과하게 격정적이 되었다. 약육강식, 우승열패의 제국주의 논리를 바탕으로 만주에 총독 또는 부왕을 두어 직접 지배할 것을 주장한다. 기본적으로 강종에 우호적이나 이건 그가 김시혁 같은 강자, 승리자였기 때문이고 강종이 여흥 민씨 다음으로 경계하는게 해평 윤씨라서 완전히 신뢰하진 않는다. 강종의 게리맨더링으로 근황파들을 중추원에 집어 넣은뒤 친위 쿠데타를 일으키자 정치적 실권을 잃고 몰락하게 되어 완전히 돌아선다. 독립신문에 강종과 현 시국을 강력하게 비판하는 사설을 게재했다가 체포령이 떨어진 것을 용산의 원수부로 도피해 숙부인 군부대신 윤영렬에게 빌고, 5촌 조카 윤보선이 적극적으로 구명 운동을 벌여 간신히 체포를 면한다.
이후 박제순을 통해 강종이 은밀히 영친왕과 일본 황녀의 국혼을 추진하고 있음을 전달받아 박은식, 현상건에게 이를 알려준다.[39] 대책을 고심하는 그들에게 강종이 건드릴 수 없는 대한매일신보의 베델과 데일리 뉴스의 메켄지를 움직여 폭로하면 된다는 방안을 제시한다. 황제의 계엄령 선포와 시위대를 향한 무차별 진압에 맞서 황국협회와 신민당 의원들이 궐기할 때 망설이면서도 남아 함께 자리를 지킨다. 특유의 문필력을 발휘해 인민 대중의 궐기를 촉구하는 격문을 썼고 전기가 끊기기 직전 전송에 성공한다.
{{{#!folding [ 격문 전문 ]일어나라, 인민들이여! 우리의 남은 명을 거두기 위해 노란 개들이 전진해 오고 있다!무장하라, 인민들이여! 그대들이 사랑하는 처자의 목숨을 거두기 위해, 저기 도시 너머에서 피에 굶주린 자들이 전진해 오고 있다!저항하라, 인민들이여! 우리가 마침내 선봉에 서리니, 산 자들이여 따르라!광무 19년, 아니, 이제는 서기 1919년 대한제국의 황제라는 자가 마침내 가면을 벗어던지고 인민을 대적하기 위해, 가장 폭압적이고 잔인한 방법을 꺼내 들었다.이미 우리는 수많은 피와 땀을 흘리며 이 나라 대한을 위해 싸우고, 죽어가며, 산업과 농업의 현장에서 굶주림과 고단함을 애써 잊은 채 지금의 대한을 일궈왔다. 하지만 이에 대해서 황제는, 그리고 그의 성총을 가린 모리배들은 우리 인민들을 기망하고 배신했다.그들은 우리에게 총격을 가하고, 대포를 쏘며 마치 적이라도 되는 마냥 가혹하게 대했다. 수천 명의 인민들이 차가운 한성부의 동토에서 숨을 거뒀고, 폭압적인 이 상황에 저항하던 용감한 자들의 생사는 알 수가 없다.그러니 인민들이여, 일어나라, 무장하라, 저항하라!저들이 구제로의 복고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우리 인민들에게 총을 들이댔으니, 그에 맞서 우리는 새로운 세상을 위해, 어두운 밤을 떨치고 일어날 새벽을 위하여 우리가 선봉에 선다.총창과 그들의 탄환은 더 이상 두렵지 않다.아무리 창밖을 가린다고 해도 결국 새벽은 오듯이, 저들이 우리의 입을 무거운 죽음의 공포로 물들인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절대로 멈추지 않으리라.1919년 2월 28일 자정, 중추원 의원 윤치호가 대한인민들에게 올리는 격문
계엄령이 진압된 이후 김시혁이 이승만의 편지를 보고 불쾌감을 드러내자 차라리 김시혁이 군정을 이끌 것을 여운형이 제안하자 옆에서 동조한다. 이후 신민당-한민당 연립 내각이 구성되었을 때 법부대신을 맡으며 죽은 이형의 묘호를 고르고 있을 때 강(槺)종과 유(謬)종을 추천했다.[40]
- 현상건
황국협회 구파의 수장. 윤치호가 이승만의 얼굴을 가격해 병원에 입원시키자 길영수와 함께 입원한 이승만에게 방문해 사과한다. 강종이 친위 쿠데타를 일으키고 중추원에 거수기 역할할 근황파들을 다수 침투시키면서 끈 떨어진 연 신세가 되었다. 친위 쿠데타에 대응할 방안을 강구코자 윤치호, 박은식과 은밀한 만남을 가지고 거기서 한일 국혼 논의를 전해듣고 경악한다. 경복궁 앞 시위 현장에 나갔다 헌병대의 학살에 휘말려 보좌진 대부분이 사망하고 간신히 허위를 구출해 현장을 빠져나와 신민당과 황국협회에 이 사실을 전한다.
2.7. 민본당 → 한국 자유당
강종의 총리 제안을 받아들인 이승만이 자신을 따르는 독립협회 강경파와 강종이 미리 포섭해둔 근황파 거수기들을 데리고 꾸린 신생 정당. 이승만은 내심 당명으로 민주를 쓰고 싶었으나 그랬다간 강종이 즉시 역적으로 몰아 파묻어 버릴 게 뻔해서 민본으로 타협했다. 게리맨더링이란 편법으로 의석수를 불리면서 잡다한 인간 군상들이 영입되다보니 또렷한 지역적 기반은 부재하다. 2.27 계엄과 3월 혁명으로 기껏 구축한 내각이 붕괴되고 잔존 세력을 결집시키려던 이승만이 미국대사로 임명되어 사실상 유배당하면서 미래가 불투명해졌다.이후 남은 잔재 세력들이 모여 한국 자유당을 창설하고 야당이 되어 새로운 체제에 인정받고 싶어하는 만인과 한인을 끌어들이며 대일 강경책을 주장하고 다닌다.
- 이승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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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익희
이승만의 수행원. 장래 서대문에서 출마할 예정이라고 소개된다.
- 윤보선
이승만의 수행원이자 윤치호의 5촌 조카. 여흥 민씨 견제를 위해 해평 윤씨를 키워주려는 이승만의 의중으로 그의 측근으로 영입된다. 윤치호가 헌병대에 체포될 위기에 처하자 적극적으로 구명 운동을 벌였다. 이후 경운궁에서 시위를 하다가 헌병대의 발포를 피해 김시혁의 집으로 도망치며 안창호와 함께 김시혁이 시민군을 이끌어야 한다고 설득한다.
- 이기붕
이승만을 열렬히 추종하는 청년당원. 이승만 옆에서 비서처럼 온갖 궂은 일을 다 하며 미국 대사관에도 같이 갔다. 이승만의 지시를 받고 그의 편지를 김시혁에게 전달했다. 그러나 김시혁은 물론 군부 장성들, 중추원 의원들과 대신들까지 이 편지를 보고 불쾌감을 드러내자 당황한다.
2.8. 근황파
- 이용익
강종의 총신으로 작중에 겸직하는 역할이 가장 많은 인물. 김시혁이 외적으로부터 사직을 지킨 방패라면 이용익은 정치, 경제, 군사, 외교 모든 분야에 관여하며 사직을 떠받든 기둥이라 할 수 있다. 1부 초반에는 조폐국장 겸 내장원경 겸 육군피복제조소장을 역임하고 있었다. 의화단 진압을 위한 원정군 출병을 앞두고 현지 기후를 고려해 반팔, 반바지 군복을 입히자는 김시혁의 제안을 풍토병을 이유로 반려했고 김시혁도 수긍한다. 강종에 대한 충성은 변치 않으나 강종이 하는 일이 나라 가져다 일본에 바치자는 거라 김시혁의 쿠데타에 협력, 헌병대와 경무국을 설득해 쿠데타 성공에 크게 기여한다. 극동 전쟁 발발 이후에는 함흥에서 후방 보급을 책임지다시피 했으며 장작림 토벌 이후에는 특명전권대신으로 일본과의 외교전에서도 상당히 활약한다. 2부 본편 시점에선 헌병대 사령관. 헌병대를 증강해 한성을 친위세력으로 둘러싸려는 강종과 강종을 불신하는 내각, 원수부 사이를 중재해 합의를 이뤄낸다.[41] 강종이 멱살 잡고 끌고간 근황파에서 실무 능력과 배포를 겸비한 원로로 강종과 대립하는 내각, 원수부와 사이를 이어질 수 있었던 유일한 인물.
1차 대전 이후 물가폭등으로 어수선한 민심을 다잡기 위해 전국 순방을 실시한 강종을 보좌하며 내장원의 전횡과 토지 개혁의 필요성을 강종에게 설명해 납득시켰고 남만주 통치 방안을 둘러싼 논의에서 프랑스의 데파르트망을 참고해 한반도와 만주를 완벽하게 동일한 행정 구역으로 재편할 것과 800만에 달하는 만인들에게 참정권을 부여해 동등한 한국인으로 융화시키는 방안을 제시한다.
작중 이용익의 가장 큰 업적은 성균관의 싱크 탱크화이다. 개항 이후 유명무실해졌다 1894년 폐쇄된 성균관을 복원시키는데 힘을 보탰고 여기서 더 나아가 성균관을 유럽의 왕립 학술원이나 아카데미 같은 정책 연구기관으로 탈바꿈시킨다. 극동 전쟁 종전 직후라 성균관 복원에 앞장선 민종묵조차 빠듯한 형편에 고등 연구기관은 시기상조 아니냐며 의문을 표했으나 이용익은 단순히 대학을 세워 가르치는 데 만족해서는 안 되며 학계와 학풍이 발생하며 생기는 혼란과 분열을 정리하고 국가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이끌기 위해서는 반드시 상위 연구기관이 필요함을 역설해 설득시키고 러시아, 프랑스와 접촉해 저명한 학자들을 고문으로 초빙했다. 성균관의 재탄생으로 막 길러져 나온 젊은 연구자들은 돈 걱정 없이 해외의 연구와 저작을 탐독하며 정책 연구에 전념할 장소를 얻었고 1910년대부터 괄목할 성과[42]를 내기 시작했다.
환갑을 넘긴 노구로 격무에 시달리는 와중 강종의 전국 순회까지 동행한 후유증으로 건강이 급격하게 나빠지는 바람에 1918년 쓰러졌고 길어도 6개월 밖에 살지 못할 것이라는 진단을 받는다. 그리고 강종은 본격적으로 친위 쿠데타를 준비하기 시작한다.
- 박제순
김시혁이 가장 먼저 만난 을사오적. 김시혁이 동학 토벌을 명받고 남쪽에 파견되었을 때 충청감사로서 무능한 주제에 김시혁 하는 일이 사사건건 트집을 잡으며 악연을 쌓는다. 충청감영에 집결한 병력까지 모아 동학군 집결지를 들이쳐야 한다는 타당한 요청을 뭉개버리는 바람에 김시혁이 포함된 친위영 병력은 압도적인 수적 열세 속에 싸워야 했다. 극동전쟁 때는 고향에 내려가 칩거하고 있었기에 전후 벌어진 숙청에서 무사했고 친위세력이 필요한 강종은 그를 기어이 재등용해 종전 협상단까지 끼워넣는다. 친일내각에 협력하진 않았으나 자세한 행적이 밝혀진 것도 아니어서 의혹의 눈길이 늘 따라다녔고 종전 3년도 지나지 않은 시점에 뜬금없이 한청일 삼국 동맹을 맺어야 한다고 주장하다 뭇매를 맞고 낙향해 한동안 칩거해야 했다. 의지할 게 임금의 신임밖에 없는 그를 손발로 써먹기로 한 강종은 그를 늘 옆에 두었고 1915년에는 궁내부 대신으로 승승장구하며 강종의 총애를 바탕으로 총리대신을 노리나 강종을 지지하는 중추원 황국협회 의원들조차 박제순은 불신했기에 불발된다.
강종의 측근이 된 뒤로는 툭하면 김시혁을 제거하자, 김시혁을 견제하자고 노래를 부르는 중. 욕심은 가득하지만 정치가로서 능력은 전무해서 그를 중용하는 강종도 전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고 도구로 여길 뿐이다. 그 한심한 식견에 최소한의 격식조차 생략한 채 노골적으로 면박을 주기도 한다. 이용익이 병환으로 쓰러지자 강종의 총애를 독점하며 일견 승승장구하는 듯 보였으나 강종은 그를 백성의 분노를 받아낼 화살받이 삼아 토사구팽할 생각이었다. 헌병대를 움직여 땔감 파동을 일으킬 때 모두가 그를 의심했으나 정작 박제순은 철저하게 소외되어 헌병대 주둔지에 땔감이 쌓이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다. 나중에야 진상을 알고 경악하지만 한참이나 강종의 개로 살아온 그에게는 솟아날 구멍이 없었다. 친위 쿠데타가 일어나자 헌병대에 체포되어 구금되고 구금되기 전 윤치호를 만나 강종이 한일 국혼을 추진하고 있음을 알려줬다.
인생사 새옹지마라고 토사구팽 당한 덕분에 강종과 헌병대가 이후에 저지른 계엄령과 학살에는 일절 연관되지 않아 강종을 포함한 다른 근황파들이 모두 처리될 때도 살아남을 가망이 생겼다.
- 이희두
김시혁이 평양에서 훈련대 3대대장을 맡아 거느릴 당시 3중대 1소대장이었다. 2부에서 부장 계급으로 재등장. 강종에게 회유되어 민감한 사안에서 근황파 편을 공공연하게 들고 다니다 한직으로 좌천되어 있었다. 김시혁이 원정군을 이끌고 유럽으로 떠난 사이 근황파 장교들에게 공적을 챙겨주려는 강종의 욕심으로 호로군 무장해제를 지휘할 작전사령관에 임명되나 지리멸렬한 지휘로 상황을 악화시킨다.
이후 상황을 악화시킨 근황파 장교들이 책임을 지고 사임하거나 한직으로 쫓겨났다는 언급이 있는 것을 보아 그도 사임하거나 한직으로 쫓겨났을 것으로 보였으나 2부 889화에서 인천에 주둔 중인 3사단장으로 재직 중임이 밝혀지며 강종은 시위대 진압에 3사단을 불러와 자신의 지휘하에 한성부민들을 토벌하려 하나 기록국에서 오류역을 차단해 도보와 우마차로 이동해야 했고 선발로 나선 수색대는 9사단 특임대의 설득에 한강 도하를 포기하고 돌아감으로서 저지된다.
이후 23연대 소속 2개 대대를 제외한 3사단의 나머지 부대들이 모두 항복하거나 흩어지게 되었으며 또한 황제가 의친왕으로 교체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항복하자는 참모들의 의견을 거부한 뒤 월미도의 해군기지를 공격해 점거하고 선박을 통해 호남에 있는 전우의 근황군과 합류할 계획을 세웠지만 전함 충무가 귀국해 인천 외항으로 입항하자 혼란에 빠져 정신이 반쯤 나가버린다. 결국 이희두 대신 3사단 참모장이 서해사령부에 항복하면서 잔여 병력은 무장해제되고 그와 3사단 지휘부는 체포되어 구금된다. 외전에서 종신형에 처해졌다는 언급이 나온다.
- 이재곤
강종의 측근이자 2부 시점 황실경위원 총관. 박두영이 다야마 사다코 이야기를 꺼내자 질색한다. 이후 한성부에 역병이 퍼지자 박두영과 함께 서로 책임전가를 하며 다툰다. 시위의 규모가 점점 커지자 강경진압을 주장하며 김시혁이 강경진압을 반대하자 삿대질을 하며 모욕한다. 계엄령 이후 김시혁과 원수부가 역습을 가해오자 이를 막기 위해서 김시혁에게 무전을 보내 대화로 하자고 설득하지만 분노한 김시혁의 전차로 머리통 다 날려 버릴 테니 목 씻고 기다리라는 선언을 듣는다.
강종이 북한산성으로 이어하는 동안 경복궁을 최후까지 사수하라는 명령을 받지만 도망친 박두영이 잔여 병력을 이끌고 북한산성으로 들어가는 바람에 이어가 불가능해지자 이근상과 함께 청량리역으로 이동하자고 말하며 강종과 황실을 이끌고 간다. 그러나 청량리역은 이미 1강습보병여단이 점거한 상태였으며 1강습보병여단은 강종의 행렬을 청량리역을 지원하러 온 헌병대로 착각하여 공격했고 이 때문에 당황하다가 어깨에 총을 맞고 쓰러지며 강종과 이근상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버려지고 곧 사로잡히게 된다. 의친왕이 황제에 즉위하고 새 정부가 구성된 후 학살 책임을 물어 군사재판을 받고 이근상, 박두영과 함께 이등졸로 강등되어 조리돌림 당한뒤 총살형에 처해진다.
- 이근상
이근택의 동생으로 다른 형제들이 친일 부역으로 처형되었지만 유일하게 극동전쟁 당시 아무것도 하지 않아 살아남았다. 그 때문에 살기 위해서 강종에게 적극 충성한다. 2부 시점에서는 호위대 총관. 다야마 사다코 이야기가 나오자 이재곤과 함께 질색한다. 박두영이 일본 황실에서 친왕비를 뽑자고 주장하자 이에 당황하며 반발이 클 것이라고 우려한다. 이후 스페인 독감으로 추정되는 역병이 돌고 있다는 소식을 듣자 이를 걱정하며 별것 아닌 것으로 치부하는 박두영과 부딪힌다. 박제순이 체포된 이후 궁내부대신 서리가 되며 한성부에 점점 역병이 퍼지자 부유한 층이 많은 서부만 챙기고 가난한 빈민들이 사는 동부는 아예 봉쇄해 버린다. 한성부의 시위 규모가 커지자 헌병대로는 어림도 없고 3사단과 8여단을 투입해야 한다며 강경진압을 주장한다.
가택연금 상태였던 김시혁이 원수부에 합류하고 제1근위기병사단이 한성 진군을 시작해 한끝으로 승부가 갈리는 상황에 강종이 호위대를 예비대로 쓰겠다며 김시혁이 있는 원수부를 치라는 지시를 내리자 당황해 조성근 편으로 강종을 배반하고 원수부에 협조하겠다는 의사를 보낸다. 하지만 곧바로 강종이 보낸 익문사 독리 이호석이 찾아와 강종이 모든 것을 다 알고 있으니 즉시 원수부를 공격해 김시혁을 처단하고 공신이 될 것인지, 이 자리에서 역적으로 죽을 것인지를 협박하자 결국 협박에 굴복해 원수부 총공격 명령을 내린다.
선봉으로 보낸 대대가 큰 피해를 입자 후퇴를 건의하던 선봉대대의 지휘관을 즉시 해임해 버리고 도주하던 호위대 병사들까지 즉결 처형하면서 원수부 청사가 보일 정도로 밀어 붙이는데 성공하지만 김상옥이 이끌고 온 A7V 전차가 나타나자 경악하며[43] A7V를 상대하기 위한 무기를 찾지만 익문사를 통해 바로 상황을 보고 받은 강종에게 호출된다. 공을 세워 과를 씻기 위해 강종에게 병력을 재편성하자마자 바로 공격하겠다고 말하지만 오히려 꾸중을 듣고 잠시 제5헌병연대를 배치할 때까지 대기하라는 명령을 받는다. 그러다 김시혁이 역습해오자 박두영과 함께 이를 보고하며 북한산성으로 이어해야 한다고 건의한다.
김시혁과 해군이 근황파 병력을 몰아붙이자 도망친 박두영 대신 이를 보고했으며 북한산성으로 이어하는 강종을 호위하라는 명령을 받지만 도망친 박두영이 잔여 병력을 이끌고 북한산성으로 들어가는 바람에 이어가 불가능해지자 이재곤과 함께 청량리역으로 이동하자고 말하며 강종과 황실을 이끌고 간다. 그러나 청량리역은 이미 1강습보병여단이 점거한 상태였으며 1강습보병여단은 강종의 행렬을 청량리역을 지원하러 온 헌병대로 착각하여 공격하자 강종을 데리고 장갑차를 타 달아나려 했으나 집중 포화를 맞고 담장을 들이받는다. 이후 혼자 도망치려는 강종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버려지고 의식을 잃으며 곧 사로잡힌다. 의친왕이 황제로 즉위해 구성된 새 정부에서 군사재판을 받고 이재곤, 박두영과 나란히 이등졸 강등후 조리돌림 당한뒤 총살형에 처해진다.
- 박두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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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형식
국가헌병대 제2여단장. 동명이인인 경상북도 관찰사 민형식이 너그럽고 올곧은 성품을 가진 것과 달리 전형적인 탐관오리. 중랑천 너머에 오고있는 1기병사단을 막는 임무를 부여받아 배봉산에서 방어선을 구축했지만[44][45] 본인은 1기병사단이 왔을 때 피난민 행세를 하거나 항복하려 하고 있다. 그러던 중 북한산성으로 도망친 박두영이 방어선을 거두고 북한산성으로 철수하라고 무전이 오자 다른 아군 부대들을 제쳐두고 후퇴할 수 없다고 거부했지만 박두영의 지시를 받은 참모장에게 살해당한다.[46]
- 신우균
일본 육군사관학교에서 유학했었으며 경무청에 투신했다. 이장녕 후임 경무사로 임명되며 원래는 또다른 경무사였던 남만리와 죽이 잘 맞았지만, 강종에게 포섭되어 강종에 의한 친위쿠데타가 일어났을 때 협조하여 김가진과 남만리를 무장해제시킨다. 2.27 계엄령 당시 학살에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어떻게 행동을 할지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우유부단하게 고민하다가 박두영이 북한산성으로 도망칠 때 근황파 총순들에 의해 얼떨결에 같이 북한산성으로 들어가게 된다. 이후 불리한 상황에다가 박두영 편에 계속 있으면 어느 쪽이 오든 처벌을 받을 것이 분명해 김상설을 설득해 그와 함께 박두영, 정훈 등 헌병대 수뇌부를 붙잡아 항복하려 했지만 헌병대 수뇌부는 이를 바로 포착해 방어선을 구축했고 복잡한 북한산성 지형에 의해 순식간에 포위당하자 물자 창고로 도망친다. 이후 자포자기하려 했지만 암문을 발견해 창고 물자를 불태우고 남은 부하들과 함께 도주한다.
- 조성근
호위대 부총관. 이근상의 명령을 받고 원수부에 사절로 간다. 시종 뻔뻔한 태도로 김시혁과 다른 장군들의 눈총을 사는데도 아랑곳않고 호위대는 원수부에 협조하겠다면서 강종의 신병을 넘기겠다는 제안을 한다. 하지만 호위대의 제안이 사실상 제2의 헌병대가 되겠다는 것을 본 김시혁이 협상을 거부하고, 그 자리에서 기록국에 체포되어 고문을 받고 근황군의 진압계획을 털어놓게 된다.
- 김상설
국가헌병대 제1여단 4대대장. 강종에 의한 친위쿠데타 때 신우균과 함께 김가진과 남만리를 무장해제시킨다. 2.27 계엄령이 종결될 무렵 박두영이 북한산성으로 도망칠 때 함께 도주했다. 신우균이 헌병대 수뇌부를 붙잡아 항복하자고 제안하자 경악했지만 결국 동참한다. 그러나 헌병대 수뇌부는 이를 바로 포착해 방어선을 구축했고 복잡한 북한산성 지형에 의해 순식간에 포위당하자 물자 창고로 도망친다. 이후 자포자기하려 했지만 암문을 발견해 창고 물자를 불태우고 남은 부하들과 함께 도주한다.
- 정훈
국가헌병대 정보참모로 계급은 참령. 시위대의 규모에 난색을 표하는 헌병대 장교들 사이에서 그까짓 놈들 몇백명 쯤 세워두고 기관총을 쏴주면 그만이라는 막말을 퍼붓는다.[47][48] 이후 무리한 진압작전으로 인해 상황이 꼬이고 대다수의 순검들이 총구를 돌리자 강종에게 지원을 요청해야 한다고 박두영을 설득해 관철시킨다. 강종이 구금한 다른 대신들은 처리하되 가택연금된 김시혁은 건드리지 말라고 명령하자 김시혁을 억류하고 그의 가족을 인질로 잡으려고 시도했지만 남만리가 이끄는 순검들과 시민군에 의해 실패한다. 이후 원수부가 김상옥이 가져온 A7V를 통해 호위대를 격퇴하는 데 성공하자 원수부가 원래부터 반란 계획을 세우고 있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익문사 독리 이호석과 함께 유이하게 근황군에서 머리가 잘 돌아가는 위협적인 존재이다.
한산급 구축함 함흥이 경복궁과 헌병대 주력 부대에게 공포 포격을 하자 겁을 먹고 누구보다 빠르게 탁자 밑으로 숨는다. 이후 박두영이 잔여 병력을 이끌고 북한산성으로 도망칠 때 같이 도망쳤다. 이후 토벌당할 것을 걱정하는 박두영에게 북한산성은 200의 병력으로도 1만의 군사를 막을 수 있고 물자도 충분하니 버틸 수 있다고 주장하지만 신우균, 김상설의 봉기로 인해 물자가 다 타버린다. 게다가 헌병대를 토벌하러 온 제1강습보병여단이 항복하지 않으면 몰살시켜 버리겠다고 위협하자 북한산성 내부에서 혼란이 발생해 완전히 무력화된다. 결국 박두영 등 헌병대 수뇌부와 함께 체포된다. 저격수 거리에서 비무장 시민을 학살한 헌병대 사병들은 교수형에 처해졌고, 이를 지시한 박두영, 이재곤, 이근상은 이등졸 강등 후 총살되었으나 정훈은 조금이라도 살아남기 위해 기록국에 이승만의 반역 행위에 대해 모은 정보들을 제공하여 조금 더 명줄을 붙이고 있다. 그래도 조동윤의 말을 보면 곧 사형당할 듯하다.
- 전우
호남의 거유. 원 역사에서 친일은 하지 않으나 항일도 전혀 하지 않는 복지부동 행보로 정치집단으로서 유림을 끝내버린 인사답게 임병찬, 허위와는 전혀 다른 퇴행적 현실 인식을 보인다.[49] 강종의 파행에 맞서 항거한 두 사람과 달리 근황령에 응답해 호남에서 궐기하나 전북관찰사 민영달 등 현지 지방관들의 미적지근한 반응에 부딪친다. 순수하게 충의로 일어난 것조차 아니고 성균관 대사성 자리를 주겠다는 약조를 받고 움직였다. 3월 1일 근황파 세력이 모조리 진압되고 강종과 대립하던 의친왕이 황제로 즉위하자 의친왕을 역적으로 선포하고 제자들과 함께 반란을 일으켜 전북의 포군 무기고 다수를 장악하고 가산을 풀어 병력을 모으는데 옛 동학당 잔당들이 여기에 끼어들어 전남에서 무장집단화, 빨치산이 되는 바람에 전남 지역 관군만으로는 진압이 불가능한 지경에 이른다. 결국 가장 강력한 카드인 김시혁이 직접 수도사단과 9사단에서 차출한 야전군을 이끌고 삼남으로 내려가게 된다.
자신들에게 호응하지 않는 전주와 익산, 군산 등 도시지역에 '근황의 기치'를 보여주겠다며 3월 2일 전주부 코앞의 용머리고개를 공격했다 미리 대기하고 있던 순검 600명과 포군 4,000의 반격에 패퇴한다. 이때 동조한 유림 상당수가 죽거나 사로잡혔으며 본인은 제자 200명과 함께 해남까지 도주했다가 순검대에게 체포된다. 압송되기 직전 가진 김시혁과의 대담에서 뛰어나고 용감한 자들이 을미의병과 계묘왜란에서 전사하고 남은 이들이 인민과 학문을 나누거나, 2.27일 한성에서 불의에 항거할 때 홀로 아무 것도 하지 않아 허명을 얻었을 뿐인 기회주의자에 불과하다는 차가운 사실 적시를 듣는다.[50]
그나마 헛소리[51]로나마 김시혁 앞에서 항의라도 한 제자들과 달리 전우 본인은 이때마저도 아무것도 안하고 있다가 즉결처분되지 않고 재판에 회부한 것에 성은이 망극하다며 벌벌 기기만 하며 졸렬함의 절정을 보여준다. 재판정에서도 검찰측 증인으로 나온 임병찬, 허위와 논쟁하여 처참히 논파당하고 결국 기호지역은 물론이고 영호남 유림 전체가 만인소를 올려 사문난적으로 낙인찍히고 종신형을 받아 의주 너머에 새로 지어진 감옥소에 수감, 주요 제자들은 반역죄로 교수형에 처해진다.
독자들의 평은 매우 나쁜데 성리학의 이름을 더럽히는 시대착오적인 유교 탈레반으로 여겨지며, 원 역사에서 아무것도 안 하고 현실도피만 해서 해방 이후 유림의 명맥을 끊어놓은 인물답다는 평이다. 진정한 유림은 다 독립운동하다 죽었다는 비아냥은 덤. 작중에서도 전우를 체포한 김시혁이 같은 취지의 말로 전우를 꾸짖는다.
2.9. 기타
- 최씨 어르신
평양에서 활동하는 유상 중 하나로 성이 최 씨라는 것만 밝혀지고 이름이 밝혀지지 않아 어르신이라 칭해진다. 젊은 시절엔 산포수로 두 차례 양요에 모두 참전했다. 신미년에 죽을 뻔한 걸 김시혁의 아버지 덕에 살아남았고, 그걸 마음의 빚으로 여겨 상인이 되고 나서 김시혁의 집안을 물심양면으로 도왔다고. 청일전쟁의 여파로 일본군이 징발해간 물자들에 지급한 군표의 상환을 거부해 파산직전이라 고민하고 있었으나 김시혁의 도움으로 군납의 길이 열려 재기에 성공하고 다시금 번영을 누리며 이에 따라 김시혁을 계속 돕고 있다. 자신의 딸인 로하와도 맺어주려 하는데, 둘의 나이차가 상당한 탓에 김시혁이 거절했으나 이후 둘이 결혼하면서 장인어른이 되었다. 이후로도 김시혁이 자금 문제로 곤란할 때 가장 먼저 도움을 요청하는 인물이지만, 확실한 명분과 이익이 든다 생각되지 않으면 퇴짜를 놓는다고 한다.
그가 창업한 기업 홍익 정밀은 1차 대전 시점에 제국 유통망과 군수산업의 6할을 거머쥐고 대한 제일의 기업으로 성장해간다. 로하 외엔 자식이 없고 친척들도 못 미더운 이들 뿐이라 시혁이 후계를 이어주길 바랐으나 군을 떠날 수 없는 사정도 알기에 결국 단념하고 전문 경영인들에게 맡기기로 한다. 대신 홍익 지분의 일부를 사위와 딸에게 증여했다. 한국 굴지의 기업이고 시대가 시대인만큼 그에게 돈 타러 오는 정치인이 많다. 민본당 창당 준비를 하던 이승만도 그에게 접근해 정치자금을 얻어갔다.
- 최로하
위에 나온 어르신의 딸. 무척 당돌한 성격으로 상업에 종사하며 일찍부터 개화한 아버지의 영향으로 전통적 조선 여인상이 아닌 19세기 신여성상으로 묘사된다. 김시혁에게 처음부터 호감을 품고 있었고 김시혁도 마찬가지였으나 나이차 탓에 애써 외면하다 극동전쟁 종전 후 외전에서 서로 마음을 터놓고 김시혁과 맺어지는 데 성공했다. 직업은 영어와 불어를 가르치는 교사. 극동전쟁 때는 잠깐이나마 여군지원병으로 복무하며 한성에서 열린 승전기념 열병식에도 참여했다. 순 저질 발음인 김시혁과 달리 원어민에 가까운 불어를 구사한다. 김시혁이 동부전선으로 떠나기 직전 둘째를 잉태했고 이후 편지로 뱃속 아이가 아들이라는 소식을 전한다. 이 소식을 접한 원정군 장군들이 김시혁 아들이 장차 우리 병과로 와야 한다고 투닥거리는 게 소소한 웃음 포인트.
1차 대전으로 물가가 5배나 상승해 서민들의 생활이 극히 고달파진 가운데 왕십리쪽에서 온 빈민들이 과거에 김시혁 아래서 싸웠다며 도움을 청하자 이주임관의 만류에도 직접 곳간을 열고 장작과 쌀을 꺼내주었다. 구국 영웅의 아내이자 굴지의 대기업 회장의 외동딸이고 그 자신도 학식 깊은 재녀임에도 신분제 관념이 뿌리박힌 경화사족 여성들에겐 미천한 상인의 여식, 무관 따위와 끼리끼리 만난 사이 같은 괄시와 비웃음을 들어 상처가 많았고 고향인 평양으로 돌아가고 싶어했으나 2.27 계엄과 3.1 혁명으로 불가능해졌다.
- 김민정
김시혁과 최로하의 장녀. 1908년생. 2부 프롤로그에서 어린 시절 모습으로 첫 등장. 아버지를 무척 좋아하며 군복 입은 아빠 그림을 그리며 자기도 군인이 되고 싶다는 희망을 밝힌다. 어린아이가 그냥 하는 말이라고 생각한 시혁은 별생각 없이 그래하고 마는데 바로 뒤에 시혁이 인생에서 가장 후회하는 일 중 하나라는 언급이 나와 정말 군인의 길을 걸을 것으로 보인다.[52] 어머니의 괄괄함에 아버지의 재능과 담력을 이어받았다는 묘사가 2부 내내 잊을만하면 나온다. 일화들이 상당히 비범한데1. 주둥이가 좁은 병안에 든 사탕을 꺼내 먹으려 한 움큼 쥐었는데 주먹 때문에 손이 빠지지 않자 손을 놓는 정석 대신 유리병을 깨는 발상의 전환으로 기어이 사탕을 가졌다. 발상도 발상이지만 더 돋보이는 건 담력.2. 인형 대신 장난감 병정이나 아버지가 손수 깎아 준 목제 칼, 총을 갖고 놀기 좋아한다.3. 또래보다 머리 하나 큰 신장에 남자아이들 이상으로 씩씩해서 골목대장 노릇을 했다.4. 성에 갇힌 공주님을 구출하는 기사들이 등장하는 동화를 읽고 나서 하는 말이 먼저 나가서 공격하면 더 오래 버틸 수 있는데 왜 성안에 가만있기만 하냐 였다고. 공세적 방어 개념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다.5. 숙련된 카우보이들조차 애먹는 아할 테케, 비르시나의 마방에 숨어들어가 기어이 타고 내달렸다. 김시혁을 제외한 모든 사람에게 예민하게 난폭하던 말이 이 꼬맹이는 잘만 태우고 달렸다.6. 김시혁의 가족을 살해하려는 헌병대 분견대를 가까스로 무장해제한뒤 아버지는 위험을 무릅쓰고 용산으로 이동하고 다른 가족들은 대피하는 급박한 순간에 울거나 하는 일 없이 아버지가 금연 약속 깬 거에만 신경 쓰고 있었다. 담배를 입에 문 아버지에게 '어른은 어쩔수 없어'하는 시선을 던지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있었다고.
처음 군인이 된다는 떡밥이 나왔을 땐 완력을 덜 요구하는 공군 파일럿이 되지 않을까 하는 예상이 많았으나 이런 에피소드가 쌓이고 쌓이며 공군설은 쏙 들어가고 여자 패튼(...)이 될 거란 예상이 많아지고 있다.
- 김민
김시혁의 아들. 1916년생. 1차 대전 출발 직전에 잉태되어 코벨에서 독일-오스만군과 싸우고 있을 때 태어났다. 이름 "민"(旻)은 의친왕이 지어주었다.
- 전봉준
동학 남접 지도자로, 김시혁이 최초로 격파한 적 지휘관. 예상을 깨고 선수 쳐서 이안-효포 가도로 뛰쳐나온 김시혁, 성하영의 친위영 병력을 격파하기 위해 2만에 달하는 대군을 이끌고 도전했으나 망치와 모루 전술에 얻어맞아 참패하고 달아나서는 행적이 묘연해진다. 전주성에서 홍계훈에게 참패한 뼈저린 경험이 있어 호전적인 다른 접주들보다 훨씬 신중한 모습을 보이나 결국 동학이 전봉준 아래로 단일한 집단이 아니었던지라 통제력에 한계를 내비친다. 원 역사와 달리 갑자기 종적을 감춰 오랫동안 행방불명 상태였다. 극동 전쟁이 발발하자 정부에 협력하는 북접과 남은 남접 잔당을 제2 전선으로 편성하려는 조동윤의 의도로 전봉준이 생존해있고 일본에 저항하는 군세를 일으켰다는 소문을 퍼뜨려 동학 출신 지원자들을 모아 유격전을 치뤘다.
조정에서 일단 사면령을 먼저 내려줬음에도 여전히 세상에 나오지 않아 오랫동안 의혹으로 남았는데 1919년 경제 불황과 역병, 땔감 부족으로 전국이 뒤숭숭한 가운데 정감록을 끄집어내며 종말론을 퍼뜨리는 동학 잔당들이 출몰하기 시작해 거취가 밝혀질 가능성이 높아졌다. 3.1 혁명에 반발한 전북의 유림 전우가 반란을 일으켜 호남 지역이 혼란에 빠질 때 남접을 사칭하는 동학당 잔당들이 끼어들어 날뛰다 무력 진압 당하는 과정에서 행방이 알려졌는데, 2차 봉기가 실패한 후 남접의 사이비화를 막으면서 (정부에 협조적인) 북접과 소통하려 했으나 이에 반발한 다른 접주들의 부추김을 받은 김개남에게 살해당했다는 것이 밝혀졌다. 정확한 살해 시점은 불명이며[53] 그의 무덤은 자신과 김개남을 살해한 사이비 교주들에 의해 성지화되는 고인 능욕을 당했다.
- 김개남
남접 접주. 지배층에 극도로 적대적이고 다른 접주들과 발맞추는 대신 노골적으로 세력 확장에만 전념하는 수상한 행보를 보여준다. 전봉준이 고전하고 있을 때도 8천의 무리를 이끌고 따로 떨여져 세력 확장에만 골몰하고 있었다. 전봉준이 패퇴하고 실종된 다음에야 본거지를 버리고 북상, 15,000의 대병력으로 청주성을 위협한다. 청주성 인근 신탄진에서 한성구락부가 이끄는 친위영과 이두황이 지휘하는 장위영, 충청 지역 민보군의 연합 작전에 패배하고 종적이 묘연해진다. 1919년 경기 불황과 역병, 땔감 부족 등으로 전국이 뒤숭숭한 가운데 정감록을 근거로 종말론을 퍼뜨리는 동학 잔당들이 3.1 혁명의 반발한 전우의 반란에 끼어들어 호남이 혼란에 빠뜨리고 이들이 진압되는 과정에서 행방이 알려졌는데, 사이비화한 남접 과격파의 꼬드김에 넘어가 전봉준을 살해하고 권력 다툼을 벌이다 자신도 과격파에게 살해당하고, 무덤이 사이비들의 성지로 악용되는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피해자 입장인 전봉준과 달리 이쪽은 자업자득이다.
- 이회영
정미소, 제분소 사업을 하다 극동전쟁이 일어나자 김시혁에게 군수 물자를 지원하며 최대한 협조한다.
- 최익현
극동전쟁 중 만주에서 의병을 모집하고 있다고 언급된다.
- 임병찬...가장 용감한 자들이 폐하께 답하오니, 지난 500년 사직을 숭상하고 수많은 군주들을 섬긴 서울의 대신들부터 시골에 유생에 이르기까지, 군부와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땐 다른 한 손으로는 검을 기꺼이 들었습니다. 선비란, 말에 앞서 먼저 행하며 의를 위해 싸우고 충으로써 죽을 지어니, 저희의 주검으로써 폐하께서 거하신 곳으로 향하는 흉악한 왜적들의 총창을 막아낼 수만 있다면... 기꺼이 거병하여 그들의 앞을 막아설 것입니다.- 1부 255화.
면암 최익현과 함께 을미의병을 이끌었던 호남의 유림 지도자. 극동 전쟁이 발발하고 함흥으로 파천한 강종에게 의병을 독려하는 밀지를 전달받는다. 자신을 따르는 유림과 미리 제2 전선을 준비하고 있던 원수부 기록국의 조력을 받아 궐기. 일본에 협력하는 정읍군수를 손수 참하고 게릴라전을 벌인다. 일본의 삼광 작전과 집요한 추격을 뿌리치며 종전까지 버텨냈고 다시 재야로 돌아간다.
1919년 아미앵 독감이 창궐하고 이상저온 현상 속에 가난한 빈민들이 많은 한성부 동부가 봉쇄당하자 봉쇄를 풀어달라는 가두시위에 참여한다. 자신들이 보는 앞에서 궁에 들어갔던 김시혁이 끌려나와 가택연금되자 그가 연금된 이유가 강종과 권신들의 시위 강경 진압을 반대한 것 이라는 소문이 사실이고, 소문을 퍼뜨린 범인이 시위대의 혼란을 유도해 강경진압의 명분을 얻으려는 헌병대인 것을 직감한다. 함께 시위에 나선 불교계 대표 한 사람이 강경 진압을 걱정해 철수해야 하는 것이 아니냐고 묻자 시위대가 이제 와 철수하겠냐고 되물으며 우리는 계속 이곳에서 죽는 한이 있더라도 버텨야 한다고 말한다. 결국 계엄이 공표되고 헌병대의 총탄이 쏟아질 때 어떻게든 몸을 빼는데 성공해[54] 김시혁의 집까지 와 명례방으로 같이 가자고 설득한다. 계엄이 혁명으로 마무리 된 후에는 호남으로 내려가고 향촌의 안정에 힘쓰는 한편, 목소리를 내야할 땐 아무것도 안 해놓고 다 끝나니 반란을 일으킨 삼한 제일의 거유(?) 전우를 규탄하는 만인소를 올리고 법정에 출두해 규탄한다.
- 허위
극동전쟁 막바지 13도 창의군을 이끌고 김시혁을 도와 한성을 탈환하는 데 일조한다. 종전 이후 내각에서 그에게 작위와 함께 중추원 의관직을 제수했지만 낡은 유림이 한 자리 차지하고 있는 것은 매국이라며 거절하고 고향(경북 구미)으로 낙향했다.
2부에서 독감으로 인해 가난한 빈민들이 많은 한성부 동부가 봉쇄당하자 제자들과 상경하여 봉쇄를 풀어달라는 가두시위에 참여한다. 강종의 부름으로 경복궁으로 입궐하던 김시혁을 만나 영남, 호남, 호서의 유림, 지식인, 종교인들과 함께 쓴 만인소를 강종에게 전달해 달라고 부탁한다. 그러나 김시혁이 가택연금을 당하자 당황하며 시위대를 지키기 위해 임병찬 등과 함께 계속 버티며 한성부가 피바다가 되는 일이 없기를 빈다. 그러나 결국 계엄령이 떨어져 헌병대가 시위대를 향해 발포하자 절망하며 제자들의 피하자는 말도 거절하고 죽으려 하였으나 현상건 덕분에 목숨을 건져 중추원으로 이동한다. 계엄이 혁명으로 마무리되자 다시 고향으로 내려가 향촌 민심을 다스리는 한편 호남의 임병찬과 함께 반란을 일으킨 전우를 규탄하는 만인소를 써내려간다. 기호학맥을 아예 끊어버릴 생각으로 단단히 벼르고 있다고. 한성에서 전우의 재판이 시작되자 직접 출두해 그의 궁색한 근황논리를 논박하고 사문난적임을 선포한다.
- 이상재
정계에서 은퇴한 후 한성대학을 설립하고 이승만을 교수로 초빙한다.
- 조병택
조선중앙은행장. 이용익, 어윤중과 함께 프랑스 금본위제 시책에 따라 연동하는 계획을 했으며 이때 부족한 화폐량을 일본의 제일은행권 화폐처럼 유사 화폐를 뽑아서 유통하자고 제안했지만 어윤중에게 기각되었다. 그러던 중 이용익이 전국 순방을 하느라 조폐국 자리를 오래 비우게 되었고 어윤중은 건강이 나빠져 더이상 부름에 응하지 못하느라 본인이 주도권을 잡게 되었다. 그러나 이는 큰 실책으로 연결되었는데, 가용한 금의 총량이 충분하다는 기만책을 통해 통화량을 극단적으로 늘려서 공급하겠다는 정책을 내놓았으나 이 때문에 1억 원의 통화가 증발되어버리는 참사가 일어나게 되었고 이 때문에 국내 경제를 뒷받침할 정도의 통화가 정말 본토에 있는지에 대해서 다각도로 상당한 의구심과 더불어, 프랑스와 미국이 내어준 차관에 대한 상환 능력이 있느냐에 대한 의심이 1차 세계대전 종전 이전부터 계속해서 생겨나게 된다.
- 맹은원
장작림 이전에 길림을 주름잡던 군벌. 대한제국이 내만주를 본격적으로 경략하기 이전에 수시로 부딪혔던 적수였으나 장작림과 길림의 패권을 두고 일전을 벌였다 참패하고 대한제국에 귀부했다. 귀부한 후에도 세력권을 인정받아 길림 일대의 산림 자원을 반쯤 사유화하여 부를 쌓고 있었는데 잠채를 막는다는 핑계로 옛 부하들을 불러들여 무장을 시작해 대한제국 군대를 긴장케 한다. 이렇게 무장할 수 있었던 것은 강종이 몰래 만주에서 자신의 지지세를 키울 수 있게 지원한 것임이 밝혀진다. 2.27 계엄 이후 강종이 몰락하며 끈 떨어진 연 신세가 됐는데 김시진에게 짓눌려 신정부에 대한 복종을 맹세했다고 언급된다.
- 김상옥
용산역 근처에서 영덕자동차공업상회를 운영하며 살았다. 2.27 계엄에 휘말려 거느리던 직공들을 포함한 수많은 사람들이 죽자 분개하여 시민군에 합류하려 경무서로 향했지만 자원자들이 넘쳐 총이 전부 불출되어 어쩔 수 없이 돌아가던 도중 용산역에 방치되어 있던 A7V를 발견해 엔진을 손본 뒤 직접 운전해 원수부에 합류한다. 원수부 남부 청사에 치장중이던 노획 독일 기관총을 거치한 A7V를 몰아 원수부를 공격하던 호위대의 진격을 돈좌시키는 활약을 한다. 호위대의 공격으로 터진 장갑차의 바퀴를 자신의 공업소에 있는 바퀴를 가져와서 교체해 전력에 도로 합류시켰고 김시혁이 역습을 가하려 하자 A7V의 엔진을 다시 손본 뒤 동행한다.
- 최창학
삼성광산을 채굴하는 데 성공하여 황금왕이라는 별명을 얻고 대한광물공사에 고빙되어 젊은 나이에 사장 대리를 맡게 된다.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과 관련한 회의에 참석하여 일본 해군이 압박을 가하는 것이 우려된다면 무연탄 공급을 통제하면 된다는 의견을 낸다.
- 김철수
공산주의 사상을 가지고 있어 불순분자로 낙인찍혔고 이 때문에 유학을 핑계로 일본으로 망명을 갔다. 그러나 여전히 한국을 조국으로 여기고 있어 유길준이 자원병 여단에 지원한 이들을 독려 할 때 그의 멱살을 잡고 '조국을 배신한 매국노 놈이 어디서 이들을 더러운 혓바닥으로 꾀어내 피비린내 나는 전장으로 끌고 가느냐!'라고 호통을 쳤다. 이후 그 모습을 본 우장춘과 대화를 나눌 때 원역사와 비슷하게 당신 아버지는 역적질하다 죽었으니 그 죄를 값으려면 조국인 대한을 위해 봉사하라고 말한다.
- 우장춘
우범선의 아들. 우범선이 황색 작전으로 인해 처형당한 뒤 가세가 기울어 한때 고아원에 갈 정도로 사정이 좋지 못했다. 이후 어머니와 함께 히로시마로 이사해 그곳에서 일진회의 학비 지원을 받고 1916년에 동경제국대학 농과대학에 진학한다. 그러던 와중 자원병 여단에 원래 들어가려 했으나 김철수가 유길준에게 호통을 치는 것을 보고 그와 대화를 나눈 뒤 한국인과 일본인 사이에 정체성 혼란을 가지게 된다. 이후 1920년에 졸업한 이후 농림성 산하 연구소에 들어갔지만 여러 차별 대우를 받았고 결혼한 아내 역시 자신과 결혼했다는 이유로 처가에서 의절당하자 결국 기록국과 접촉해 한국으로 망명한다. 이때 망명하는 열차 안에서 자신이 만든 방식의 화투를 친다.[56] 일본의 사주를 받고 훙후즈로 위장한 중화민국군의 습격을 받기도 했지만 기록국과 변계강무서 기마순검대의 도움을 받고 한국에 도달하는데 성공하며 자신의 망명 작전을 지휘한 신규식과 헤어지면서 그에게 권총을 선물받는다.[57]
- 이봉창
오류역 철도노조 대표. 글을 깨쳐서 겨우 열아홉에 노조 대표를 맡고 있었다. 3사단의 한성 진입을 저지하려는 김창수와 협조해 역을 장악한다. 열차를 멈출 또렷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아 고민하고 있는 김창수에게 통표폐색을 중단해 진입을 저지하는 방법을 알려주고 직접 실행한다.[58] 역 통제권을 수복하기 위해 헌병대가 공세를 시작하자 무장 시킨 노조원들을 통솔해 기록국 요원들과 함께 사수에 돌입한다.
- 유관순
1919년 이화학당 고등부 1학년생으로 등장. 동무들과 몰래 금강산 유람을 나왔다 계엄령으로 열차 운행이 중단되어 기숙사로 돌아가지 못하고 삼방역에 갇혀있었다. 원산의 제1강습보병여단을 진입시키기 위해 반드시 삼방역 통제권을 확보해야 했던 기록국 공작조와 우연히 접촉. 이화학당 선배라 칭하는 기록국 여성 요원의 부탁으로 삼방역에 갇힌 무수한 승객들 사이를 돌며 곧 열차 운행이 재개될 것이라는 유언비어를 퍼뜨리는 역할을 맡게 된다. 헌병대에 들켜 해를 입을 뻔 했으나 기록국 요원들에게 구해지고 작별한다.
3. 러시아 제국 → 전 러시아 임시정부
모든 군사 교리는 해당 국가의 사회, 문화, 역사 전반이 아우러진 총체라는 설명과 함께 질을 뛰어넘어 양의 위엄을 선보이지만, 동시에 동맹국을 파트너가 아니라 종속국 취급하는 러시아 외교의 고질적인 문제점이 그대로 드러난다. 그래도 대한제국에 있어서는 1순위 우방이라 대한제국도 나름 러시아는 잘 돕고 있다. 1차 대전 발발 이후로 영국과 프랑스의 혐성 가득한 행보가 주목받으며 막무가내긴 해도 가식적이지 않은 러시아는 다시 보니 선녀 같은 우방국이 되었다.러일전쟁 패전과 1차 대전에서의 고전만 보고 무능력한 장군들이 많았을 거란 일반적인 편견과 달리 언제든 초개처럼 목숨을 내놓을 수 있는 유능한 군인과 식견 있는 관료들이 많이 존재했으며 러시아 국민들도 전쟁 승리를 위해 기꺼이 희생을 감내했으나, 제일 위에 있는 멍청한 차르 부부와 그를 둘러싼 궁정 귀족들 탓에 희생만 몇 배로 내고 쇠락하는 운명을 막지 못했다. 그래도 바뀐 역사 덕에 차르 일가는 목숨을 보전했고 현재 연해주를 중심으로 임시정부를 구성 중이다.
차르에게 충성하던 장군들은 같은 백군의 배신과 외면속에 고군분투하다 전사하고 남은 백군 장군들은 군벌화되어 따로 놀고, 연해주의 러시아 관리들은 일본에 뇌물받고 주권 침탈과 범죄를 눈감아주고, 유일한 후원자인 대한제국도 소비에트 연방을 러시아 유일의 합법 정부로 인정하고 외교정상화, 경제 교류를 시작할 예정에 차르 부부는 탈출하지 않고 소비에트의 재판을 기다리고 있어 미래가 매우 어둡다. 탈출한 차르의 가족들도 현실을 인정하고 대한제국으로의 망명을 택한다.
3.1. 황실
- 니콜라이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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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
니콜라이 2세의 황후로 부창부수. 원역사 그대로 무능한 전시 지도자 차르 옆에서 무능한 황후 역할을 충실히 해낸다. 무능한 수호믈리노프를 전쟁장관으로 밀어줘서 전선 붕괴에 일조했고 이후로도 전선의 상황 따윈 아무래도 좋다는 듯 자기 친한 사람만 싸고도는 행보를 보인다. 러시아 혁명 이후 니콜라이 2세와 함께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남는다. 이강은 러시아 제국의 종말이 다가왔음을 깨닫고 그 책임을 지고자 남은 것이라 추정한다.
- 올가 여대공
니콜라이 2세의 장녀. 간신히 탈출한 황실을 대표해서 대한제국 황실에 지원을 요청하는 친서를 보냈다고 한다. 황태자인 남동생의 건강문제로 대신 움직이고 있다고 추정되고 있다. 대한 - 소비에트 협정이 체결되자 직접 의친왕을 찾아가 반쯤 애걸하면서 따지지만 그에게서 충성심 없이 권력만 쫓는 백군의 현실을 듣고 남은 로마노프 황족들을 지켜주겠다는 약속을 받은 뒤 감사를 표하고 즉위식 때 동생들을 데리고 돌아올 것을 약속하고 하얼빈으로 귀환한다. 마침 알현을 청해 들어온 김시혁과 조우하자 그가 김시진의 형임을 알고 그의 연인이 자비의 자매단에서 동고동락한 자신의 친우임을 알려준다. 이때 자신이 묻고 가야할 개인적인 일, 옛 기억에 담긴 자신의 푸념을 슬그머니 언급하는데 김시진을 짝사랑했고 나름대로 드러나기도 했지만 김시진은 눈치채지 못 했던 모양.[59]
- 파벨 알렉산드로비치 대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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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오르기 미하일로비치 대공
한국이 동부전선에 참전하기 이전 일본을 방문해 지원을 받으려고 했지만 일본이 관동주, 사할린, 동청철도 이양과 중국에서 일본의 외교적 선택을 지지해 달라고 무리한 요구를 하자 불쾌해했다. 이후 한국으로 가서 파병 약속을 확실히 받아내고 연회에서 차르가 김시혁에게 3개 군단의 지휘권을 맡길 것을 결정했다고 알려주며 김시혁에 대한 기대감을 드러낸다.
3.2. 관료
- 세르게이 비테
극동전쟁의 종결을 위해 포츠머스 회담에 러시아 대표로 참석했다.
- 블라디미르 수호믈리노프
1차 세계 대전 초기 러시아 전쟁대신으로, 심각한 무능으로 러시아군을 약화시키고 동맹군을 얕보아 한국군이 참전하기 이전까지 러시아가 위험에 처하게 한다. 결국 전쟁대신 직에서 해임되고 수감된다.
- 알렉세이 폴리바노프
수호믈리노프 후임 전쟁대신. 친한파 인사로 러시아가 브루실로프 공세 이후 또다시 무리하게 공세를 가했다가 위험에 처하자, 한국군을 반부탁, 반협박으로 코벨 전투에 협력하게 한다.
- 세르게이 사조노프
1차 세계 대전 당시 러시아의 외무대신. 고전하는 전황을 타개할 대책으로 일본에 관동주 매각을 조건으로 지원을 얻어내고, 대한제국에는 남만주 영유권 인정을 대가로 원정군 파견을 요구하는 방안을 고안해 폭풍을 불러일으킨 장본인. 러시아 제국이 패망할 때 니콜라이 일행과 함께 극동으로 떠났다. 러시아 임시정부와 소련 모두 종전 협상에서 배제당한 상황에서 그나마 말이 통한다 여긴 대한제국 사절단에게 사람을 보내 일본이 과거 자신이 제안했던 관동주 매각 제안을 빌미로 관동주를 꿀꺽하려는 협잡을 벌이고 있음을 알린다. 러시아 임시정부의 생존을 위해 포시예트를 넘기는 것도 불사하며 한국에 협조를 요청한다.
- 알렉산드르 미하일로비치 베조브라조프
차르의 신노선을 지지하는 강경파의 대표. 극동으로서의 확장을 주장하고 일본을 경계하며 대한제국을 지원할 것을 주장한다. 원역사랑 달리 실각당하지 않았으며 대한제국과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할 때 대표로 갔다. 극동 전쟁 도중 발트 함대가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하는 것에 성공하자 계속 일본군을 몰아붙이자고 주장했다.
- 알렉산드르 케렌스키
러시아 제국 임시정부 총리. 원역사대로 임시정부를 이끌지만 상황이 악화되는 것을 막지 못한다.
3.3. 군부
3.3.1. 육군
- 알렉세이 쿠로팟킨
한국의 소총 판매 요청 건을 씹으려던 전쟁성 장관이 해임되고 그 뒤를 이어 전쟁성 장관이 된다. 이후 극동전쟁 시기에 원역사대로 본인이 직접 만주로 가서 전쟁 지휘를 하게 된다. 원역사와 달리 대한제국이 확실히 러시아 편에 붙어 일본 1군을 붙들어 준 덕분에 뤼순이 원역사보다도 더 길게 버티는 등 수월하게 방어전을 진행했고 이어지는 봉천 전투에서도 원역사와 달리 승리를 거머쥔다. 1차 대전 이전에 퇴역하고 무능한 수호믈리노프가 황후 인맥으로 전쟁대신이 되면서 러시아군은 극동전쟁의 전훈을 교리로 체계화하는데 실패한다.
타넨베르크 전투 패전의 충격으로 수호믈리노프가 해임되자, 이전 극동전쟁에서의 전훈을 다시 살리고자 하는 군부 개혁의 일환으로 5군 사령관으로 다시 복귀해 북부전선군을 책임진다. 발트 방면에서 힌덴부르크에 맞서 지연전을 벌이다 흥분한 하급 지휘관 제어에 실패해 패전을 겪지만, 한국군의 렘베르크 점령으로 힌덴부르크가 패잔병 추격에 온전히 집중할 수 없게 되면서 수습에는 성공했다.
병력을 수습한 뒤에는 브루실로프의 남서집단군이 재편과 공세에 전념할 수 있도록 힌덴부르크군 10만을 최대한 잡아끄는 역할을 수행한다. 이후 브루실로프 공세가 성공하면서 지연전 이전의 영토를 대부분 수복하나 비스와 강의 기적 때 다시 한번 밀려난다. 탈린까지 내주고 에스토니아 끝자락인 나르바까지 밀렸으나 패주하는 병력을 기어이 수습해 전선 붕괴를 막았고 코벨의 승전으로 힌덴부르크가 물러설 때까지 버텨내는 데 성공한다. 전술적 역량은 브루실로프, 미쉔코보다 한 수 아래이지만 용감하고 악착같아 극한까지 몰린 상황에서도 뚝심 있게 버텨내며 힌덴부르크를 질리게 만들었다. 코벨 전투가 끝나고 떠나는 시혁에게 우정의 증표로 아할 테케 25마리를 선물했다. 러시아 내전 당시에도 황실을 지키고자 싸웠으나 코르닐로프의 반란으로 죽음을 맞는다.
- 드미트리 푸차타
원역사와 마찬가지로 한국에 파견된 러시아 군사고문단의 수장. 프랑스 군사고문단과 자기 휘하 장교들과 함께 대한제국군의 근대화에 공을 세우며 그 공을 인정받아 극동전쟁 시기에 준장으로 승진하며 전쟁 중에 한국에 남아 군사작전 수행을 도왔다. 2부에서도 1차 대전 참전을 놓고 양국 간 합의를 위해 대한제국을 방문. 김시혁과 서로의 조건을 조율했다. 적백내전이 일어나기 직전 병사한다.
- 파벨 미셴코
제1시베리아 군단을 지휘하는 러시아 육군 소장. 자신의 상급자인 자술리치 중장보다 유능하다고 평가받는다. 만주군 총사령관 쿠로팟킨이 동부지대를 지휘하는 자술리치가 졸전을 거듭하자 해임시키고 파벨 미쉔코에게 전선을 맡길 정도. 개전 초기 가장 먼저 평양 방면 전투에 투입되어 전선을 잘 막았으며, 이후 뤼순 공방전에서 제2군의 후방을 들이치며 원래의 역사에서 보여준 것 이상의 활약을 펼친다. 마지막 전투인 봉천 전투에서도 그리펜베르크가 지휘하는 제2만주군의 예하에 소속되어 노기 마레스키가 지휘하는 제3군의 후방을 들이쳐 승부에 쐐기를 박았다. 그가 이끄는 기병대는 일본이 전쟁 내내 굉장히 껄끄러워한 상대였는데, 만주 전역에 참전하기 전에 한국군과 어깨를 맞대고 싸우며 그들의 전투 방식을 어느 정도 도입했기 때문이다. 새로운 것에 열린 자세를 견지했고 본인도 비주류인 우크라이나 출신이다 보니 동양인 김시혁과도 스스럼 없이 지냈다.
2부 시점에선 대장으로 진급해 시베리아 야전군을 이끌고 김시혁의 구주원정군과 함께 싸워 졸로치와 렘베르크를 함락시키는 공을 세운다. 이후 한국군이 볼로디미르를 함락하고 부크강 집단군과 맞서는 사이 남쪽 렘베르크에서 올라오는 보급선을 사수하며 보트머가 지휘하는 독일남부군-오헝 제2 야전군 잔존 병력의 공세에 맞섰고 코벨 점령 이전까지 버티는데 성공했다. 이후 코벨로 올라와 코벨 서부에서 공격해오는 오헝-불가리아 연합군을 칼닙카 전투에서 성공적으로 막아낸다. 러시아 내전이 발발한 뒤에도 황실에 충성하며 부족한 병력으로 모스크바를 사수했으나 데니킨이 차르와 김시진의 거듭된 모스크바 지원 요청을 거부하고 관망하기만 하면서 중과부적으로 전사한다.
- 파벨 폰 렌넨캄프
극동 전쟁 당시 기병사령관. 전쟁 초반 쿠로팟킨에게 중원 병력을 이끌고 한국으로 가서 일본 1군을 전멸시키자고 제안했으나 쿠로팟킨은 그의 제안을 기각한다. 이후 봉천 전투에서 일익을 담당하며 일본군에게 큰 피해를 입힌다.
- 로만 콘드라첸코
러시아 공병의 희망으로 꼽히는 명장. 1902년 대한으로 파견되어 평양 남부에 콘크리트 요새 지대를 축조하고 뤼순으로 돌아갔다. 너무 이른 개전으로 완성에 한참 못 미친 뤼순의 방어망을 지휘해 일본군에게 막대한 손실을 강요했으나 끝내 전사한다.
- 오스카르 그리펜베르크
결정적인 한 방을 위해 차르인 니콜라이 2세가 극동 방면으로 급파한 러시아 육군 대장. 예하에는 오데사 방면에 주둔하던 제8군단을 비롯해 10만 여 명의 러시아 정규부대가 소속되어 있다. 러시아군 장성 중에서 대한제국군의 방식에 주목하고 그것을 벤치마킹하여 1개 군단을 재편성했다. 이후 '차르의 망치'라는 별명에 걸맞게 봉천 전투에서 노기 마레스케가 이끄는 제3군을 포위했으며 원래 역사와는 달리 승전을 거둔다. 극동전쟁 이후에 퇴역하고 1차 대전 이전 세상을 떠났다. 그와 쿠로파트킨이 군을 떠나고 무능한 이들이 군부 중추에 자리 잡으면서 러시아가 극동 전쟁에서 얻은 교훈은 교리로 계승되지 못하고 사장되는 듯했으나 타넨베르크의 충격으로 인해 러시아 군부가 개혁을 결심하며 다시 살아날 여지가 생겼다.
- 드미트리 슈체르바초프
러시아 7군 사령관. 테르노필에서 한국군과 임무교대를 하면서 테르노필 너머에 자연환경을 숙지시켜 준다. 이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에게 시달리던 것과 포병 전력이 부족해 큰 피해를 입은 것을 한탄하며 한국군에게 무운을 빌어준다.
- 블라디미르 베조브라조프
제2근위군단의 사령관. 파벨 대공을 보좌하며 파벨이 근위군단을 이끌고 오헝군 정예군이 있는 방어선에 막무가내로 밀고 들어가는 것을 막지 못하며 근위군단이 점점 궤멸되자 당황한다.
- 드미트리 호르바트
블라디보스토크 임시총독. 원래 총독이 소비에트가 근접해오자 대한제국으로 망명하는 바람에 인망이 있던 그가 총독이 되었다. 그 뒤 연해주에 남은 군대를 지휘하며 소비에트를 상대로 버티고 있다. 영국의 지시를 받고 일본군 수만 명이 와서 시베리아와 연해주 일대에서 횡포를 부리자 이들을 좋게 보지 않고 사실상 적 취급을 하며 한국군과 연계하고 있다. 한국에서 3월 혁명 이후 의친왕이 황제가 되자 직접 특사가 되어 찾아왔고 계속 지원을 하겠다는 답을 받아내자 감격한다.
- 칼 구스타프 에밀 만네르헤임
12기병사단장. 근위군단 11만을 통째로 던져 시간을 끄는 사이 비어버린 북쪽 측면의 공백을 메우고 키베르트 시를 돌파하라는 브루실로프의 명령을 받는다. 1914년까지 몸담았던 근위대가 형편없는 반동 집단이 되어 소모되는 현실에 씁쓸해 하면서도 사령관의 명령을 빈틈없이 수행한다. 이후 코벨 전투에서 김시혁에게 합류해 그를 수행한다. 이후 적백내전 시기에는 원역사대로 핀란드 쪽에서 적군과 맞서고 있다.
- 라브르 코르닐로프
상트페테르부르크 군관구를 지휘하던 임시정부군 총사령관. 겨울궁전에 쿠데타를 일으켜 무너진 질서를 회복하고 빨갱이를 때려잡겠다는 구호를 내걸고 공격했지만, 근위군단과 시베리아 소총병 사단에 의해 별다른 전투 없이 삽시간에 붕괴된다. 이 쿠데타 탓에 군 사기가 떨어지며 방어선이 무너져 볼셰비키 군대가 상트페테르부르크 입구까지 밀려들어오게 됐으며 쿠로팟킨이 죽는 결과를 야기했다.
- 안톤 데니킨
남러시아를 근거지로 한 러시아 군벌. 코르닐로프와는 상관과 부하 관계였던 인물로 반란에 실패하고 남은 병력과 예카테리노다르로 도주한 코르닐로프와 동행하고 있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사수하던 김시진에게 상대적으로 느슨한 모스크바 방어선을 지원해줄 것을 수차례 요청받으나 보급과 병력 부족을 핑계로 차일피일 미룬채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면서 흑해로 들어온 영국 해군에게 전차와 항공기를 지원받아 자기 병력을 강화하고 흑해함대를 끌어들여 흑해 인근의 재해권까지 장악한다. 강력해진 군사력으로 흩어진 임시정부군을 끌어들이고 남러시아 볼셰비키 군세를 격파해 7~8만에 달하는 병력을 확보했는데도 모스크바를 구원하려는 시도는 일절 하지 않았다.[60]
결국 상트페테르부르크와 모스크바가 동시에 공격받아 모스크바가 함락되고 툴라 조병창에서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올라가던 보급이 끊어져 더는 싸울 수 없게된 김시진은 가진 역량을 총동원해 볼셰비키 군세를 격파한 뒤 트로츠키와 협상을 벌여 극동으로 떠난다. 두 도시가 함락된 다음에야 볼셰비키를 물리치고 임시정부에 영토를 돌려주겠다며 공세를 시작하는데 실제로는 김시진에게 당한 상흔이 극복되지 않은 볼셰비키를 쳐서 러시아를 대표하는 권력이 되려는 시커먼 야욕이었다. 이는 아주 어리석은 선택이었는데 모루이자 망치가 되어 볼셰비키의 정예를 홀로 다 받아내고 분쇄하던 김시진이 떠남으로서 유럽 러시아를 장악한 볼셰비키는 맘 놓고 대군을 데니킨 쪽에 쏟아부을 수 있었고 결국 이들을 막을 역량이 없던 데니킨은 한국에서 3월 혁명이 벌어질 때쯤 패퇴하는 신세가 된다. 1921년 시점에는 남은 병력과 함대를 이끌고 남하. 폰토스 공화국을 도와 터키 대국민회의와 맞서 싸우고 있다고 언급된다.
- 표트르 브란겔
크림반도에서 데니킨과 행동을 같이 했었고[61] 김시진이 극동으로 떠난 이후 소비에트에 맞섰지만 패퇴한다. 원역사에선 러시아 정식정부로 인정받던 러시아국에 합류할 것을 주장했었으나 데니킨을 설득하는 데는 실패했었는데 여기서도 유사한 행보. 데니킨은 스타브카에서 근무하고 서부전선 사령관까지 역임해본 고위 장성이었고 브란겔은 보다 합리적이긴 했으나 1차 대전 때까지 사단급 병력을 지위한 적조차 없고, 퇴역했다 볼셰비키에게 잡혀 죽을 뻔 하고 백군에 투신한거라 자신을 뜻을 관철시킬 만한 발언권이 부족했다. 이후 폰토스 공화국을 도와 터키 대국민회의와 맞서 싸우고 있다고 언급된다.
- 블라디미르 그리고리예비치 표도로프
표도로프 자동소총 개발자. 열악한 러시아 제국의 공업 능력으로는 표도르프 소총을 더 양산하기 어렵자, 한국에서 양산해 줄 수 있을지 요청했다.
- 미하일 드로즈돕스키
9군에서 11군을 지원하기 위해 보낸 64사단 참모장. 분견대를 이끌고 두보브를 지킨다. 그러던 중 사령부에서 철수 명령이 떨어지자 거부하고 결사항전하려 했으나 한국군이 지원군으로 왔다는 소식을 듣고 분견대의 생존자들을 최대한 수습해 두보브에서 철수한다. 두보브 수복에 나선 시베리아 소총병 여단에 합류한 뒤 가볍게나마 독가스 중독 증세를 앓고 있음에도 자청해서 전장에 나서 스톰트루퍼 연대의 후방을 습격해 그들이 철수하게 만든다. 투철한 전제군주제 지지자로 러시아 내전이 발발하자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사수하다 부상을 입고 후유증으로 사망한다. 원역에서는 흑해 연안 쿠반 전역에서 사망한 것과 달리 수도를 지키다 전사했다.
- 로만 폰 운게른슈테른베르크
만주 지역의 러시아 군벌. 일본은 그를 세묘노프와 함께 관동주 점령에 대한제국 견제로 이용하려 한다. 호르바트, 대한제국, 소련 모두에게 토벌 대상으로 여겨지고 있다.
- 그리고리 세묘노프
일본과 접촉한 러시아 군벌. 여러모로 문제가 많아 호르바트는 그를 아예 토벌 대상으로 보고 있으며, 일본 역시 그를 탐탁지 않아 한다.
3.3.2. 해군
- 예브게니 알렉세예프
극동 총독이자 의화단 운동 당시 러시아군 지휘관. 대한제국에 여러 도움을 줬으며, 대한제국군 고문관 제임스 하코트가 일본군을 구타한 일로 인해 갈등이 일어났을 때 이를 중재했다. 한성 대타협 때도 러시아 대표로 참석했다.
- 지노비 로제스트벤스키
그리펜베르크와 마찬가지로 니콜라이 2세가 결정적 한 방을 위해 급파한 발트 함대의 지휘관. 원역사와 다르게 봉천 전투의 승리와 대한제국군의 분투로 일본 육군이 쪼그라들어 서두를 필요가 없어 보였지만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의 독촉으로 원 역사와 비슷하게 대한해협을 통해 블라디보스토크로 가려 했으나 대한제국이 필사적으로 정보를 알려온 덕분에 대한해협 루트를 포기하고 쓰가루해협 루트를 고르며 쓰시마 해전을 치르지 않게 되었다.
- 표트르 베조브라조프
극동전쟁 시점 블라디보스토크 순양함대 지휘관으로 대한제국 해군과 함께 일본의 수송선단을 공격해 여러 차례 승전을 거두었다.
- 알렉산드르 콜차크
전 러시아 임시정부 해군 총사령관. 대한제국에서 혁명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자 이를 우려했다.
3.4. 한국계 러시아인
- 최재형
김시혁의 장인인 최 씨 어르신과 사업 파트너로 함께 홍익 정밀을 이끌며 김시혁이 수류탄, 척탄통 등을 만들어 생산할 때 협조했다.
- 김상겸(金相謙)
원 역사에서의 초대 5여단장이며, 작중에서는 시베리아 소총병 여단 참모장이다. 러시아 사관학교 출신으로 러시아군 전술에 젖어있는 탓에 김시진과 충돌이 많다. 이후 한국군으로 소속을 옮기고 정령으로 진급한 뒤 폴란드에 군사고문단으로 파견되었다. 선제 공격한 붉은 군대에 역공을 가하고 민스크를 함락하며 전과를 올리지만 만만찮은 피해를 입는다.
- 최운산
시베리아 소총병 여단 1대대장. 브루실로프 공세 당시 비니차에서 방어선을 구축했다. 코벨 전투에서는 포위된 오스만군을 공격해 두보브에 먼저 진입했으며 이후 오스만군 61보병연대장의 항복을 받아낸다.
- 오하묵
1914년 탄넨베르크 전투에서 한인 연대가 괴멸하자 자원입대하여 1915년에 이르쿠츠크에서 군사교육을 받았다. 이후 시베리아 소총병 여단 수색중대의 2소대장이 되며 여러 전투에서 활약해 소위보에서 곧바로 중위까지 진급한다. 코벨 전투에서 철모에 총탄이 스치는 등 죽을 뻔 하기도 하지만 간신히 버티며 오스만군을 격퇴하는데 성공한다.
3.5. 기타
- 바실리 덱타료프
표도로프의 조수로, 표도로프와 함께 표도르프 소총을 한국에서 양산해 줄 것을 요청했다.
- 그리고리 라스푸틴
우울증에 시달리며 정신을 놓아가는 니콜라이 2세 곁에 서있는 장면으로 첫 등장. 루마니아의 고전으로 추가 파병 주장이 솔솔 피어오를 때 다시 등장해 추가적인 전선 확대를 반대하는 상식적인 면모를 보인다. 실제로 라스푸틴이 전쟁에 부정적이었고, (차르의 위신 저하라는 부작용과 별개로) 정치에 미친 영향력은 보잘것없었다는 점을 고증한 것. 정작 니콜라이를 둘러싼 궁정 귀족들은 저런 놈 말 무시하라며 똥볼을 차고 있는지라 독자들이 살다 살다 라스푸틴이 정상으로 보이는 건 처음이라며 혀를 내두르는 중.
4. 소련
물자 공급이 끊어져 생존 위기에 직면한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노동자들 중심으로 들고일어난 원 역사와 달리 한국군의 개입과 갈리치아에서의 승전으로 전쟁에 지친 장병들과 농민들이 볼셰비키를 지지해 봉기의 중심이 되면서 레닌, 트로츠키 등 핵심 지휘부를 제외한 기반부터 원 역사와 달라지게 되었다. 차르를 끌어내리지도 못하고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점령하는 데도 실패해서 최종적으로 차르의 축출도 승전이 아닌 협상으로 이뤄졌다.이러다 보니 위신에 손상이 가서 위신을 만회하고자 동유럽과 중앙아시아, 서아시아에 적극적인 공세를 퍼붓고 있어 아직 1차대전 종전협상이 안 끝난 상황에서 유럽 국가들은 동유럽에서 소련과 시즌 2로 싸우고 있어 다들 죽는 소리를 하고 있으며, 튀르키예 공화국 정부와도 손잡고 서남아시아로 광폭적인 남정을 행하고 있어 각국의 경계를 사고 있다. 이 때문에 영국에서는 독일에 대한 재무장을 허락해야 한다고 주장했다가 피꺼솟한 프랑스와 벨기에의 반대로 인해 협상이 계속 밀리는 중.[62]
현재 김시진에게 패배해서 위신에 손상이 간 트로츠키를 제외하면 전체적으로 대한제국에 대한 이미지는 마냥 나쁘지 않은 편이다. 볼셰비키의 주 관심사는 어디까지나 유럽과 중앙-서남아시아라서 극동에 있는 대한제국에 대한 관심이 적고 김시혁-김시진 형제라는 인간 핵병기(?)를 상대로 침공하는 건 부질없다 여긴다. 극동전쟁과 1차대전 때 대한제국이 러시아 제국을 도와줘서 소련 대중들 사이에서 대한제국의 이미지도 괜찮은 편이고, 러시아 제국 시절부터 대한제국과 활발한 무역을 하다 보니 적백내전 이후 무역이 마비되자 그 여파가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까지 왔다고 한다. 이러다 보니 트로츠키를 제외한 볼셰비키들 사이에서는 괜히 긁어 부스럼을 만드는 것보다 대한제국과 적당히 타협해서 블라디보스토크를 비롯한 연해주를 사수하고 무역을 회복해서 적당히 공존하자는 인식이 강하다.
소련이 제일 먼저 수교에 나선 나라가 대한제국이었고, 대한제국에게 관리 못하고 있던 북만주를 양도하고 연해주의 보장과 무역 회복, 국체 승인을 받아내서 현재는 나름 무난한 관계를 형성한 편이다. 이후 소련은 대한제국의 중재를 받아 프랑스와도 수교를 맺었고, 이 영향으로 원 역사와 달리 전간기에 국제적으로 여러 나라와 정식으로 국교를 맺게 되었으며, 극동을 통해 프랑스-한국 동맹 경제권과도 이어지게 되었다. 미국이 프랑스-한국 경제권에 적극적으로 진입을 시도하고 있으며 대한제국도 이를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에 대한제국을 통해 미국과 소련 경제도 간접적으로 이어질 듯하다.
독자들은 레닌 사후 스탈린이 정권을 잡을 경우 대한제국과 소련이 전간기에 나름 괜찮은 공생관계를 이루지 않을까 추정 중이다. 본래 소련이 제안한 것보다 더 적은 영토로 만족하며 적대할 의사가 없음을 명백히 내비친 대한제국보다 합법적인 소련 영토인 연해주를 불법 점유한 일본을 향한 적개심이 클 수 밖에 없는데다 역사 개변으로 도시 노동자가 아닌 농민층의 지지로 혁명에 성공하면서 원 역사처럼 대대적인 쿨라크 숙청이 어려워진 소련에게 대한제국과의 교류로 중공업 우선정책에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식량, 경공업 제품의 부족 문제를 완화하고 농촌에 닥칠 피해도 줄이는 건 매력적인 선택지이기 때문. 미국 자본가들도 대한제국을 통해 간접적으로 소련과 교역할 생각을 갖고 있어 잘만 하면 홀로도모르 같은 피해를 최소화하며 더 효율적인 공업화가 가능할지도 모른다.
4.1. 최고지도자
- 블라디미르 레닌
볼셰비키의 지도자로 간간이 언급되다 2부 958화에서 처음으로 등장한다. 열강의 개입으로 발트 3국과 폴란드로의 공세가 지지부진한 상황에서 동쪽이라도 안정시키고자 대한제국에 외만주 영토 일부를 넘기는 것을 골자로 한 협상을 진행한다. 붉은 군대는 가장 강력하다며 반발하는 트로츠키에 김시진에게 그렇게 깨지고도 정신 못 차렸냐는 투의 힐난을 가한다.
4.2. 정치인/관료
- 레프 트로츠키
50만 붉은 군대를 이끌고 상트페테르부르크와 겨울 궁전 점령을 노렸지만, 김시진이 이끄는 근황군에 크게 패한다. 정치장교에 10분의 1형까지 만들어 탈영병들을 억제하려고 했지만 여전히 패전이 반복되며 결국 6번이나 깨진 끝에 황실과 근황파 군대를 극동으로 빠져나가는 길을 보장해 주는 신사협정에 조인할 수밖에 없는 결과를 초래한다.[63] 이로 인해 자신의 권력과 정당성에 타격을 입자 그 정치적 위기를 외부로 돌려 독일과 맺었던 평화조약을 깨고 서진한다. 원 역사와 달리 적백내전에서 김시진이 트로츠키의 붉은 군대를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다 갈아버리면서 심각한 인력난을 일으킨 것 때문에 소련 초기 역사가 원 역사와 비교해서 상당한 변화가 생길 것으로 추정된다.# 동유럽을 향한 야심찬 공세가 영프의 개입으로 지지부진해지는 가운데 대한제국과 협상하려는 레닌에게 강경한 반대 의사를 표명하나 그가 검은 남작을 언급하자 바로 쭈그러든다. 이후로도 강경 발언은 이어 가지만 이미 볼셰비키 내부에선 대한제국과의 협상이 중론이 된 상태였고 결국 떠밀리듯 협상에 동의한 뒤 언젠가 복수하겠다고 이를 간다.
- 이오시프 스탈린
김시진의 역공으로 본진까지 전면 붕괴할 뻔한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적군을 수습해 건제만은 유지시킨 정치장교.[64][65] 트로츠키가 김시진에게 연달아 6번 깨질 때 5번째 공세에서 아군의 전열을 수습했고 모스크바 방면으로 내려가 승리를 거두고 툴라 조병창에서 올라오는 보급을 끊어 김시진이 협상장으로 나오게 만들었다. 러시아의 두 보석이라는 상트페테르부르크와 모스크바 점령의 핵심공로자. 대한제국의 국력과 군사력에 대해 정확히 분석하며 트로츠키의 군사모험주의를 공박하고 레닌의 대 한국 관계 개선책을 지지한다.
- 니콜라이 부하린
레닌 휘하에서 경제정책 총책임자로 일하고 있다. 대한제국과의 협상이 논제가 된 회의에서 기존 러시아에서 만든 대한제국과의 경제 커넥션이 상당히 중요함을 언급하며 이를 회복하기 위해서라도 대한제국과 협상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 막심 리트비노프
대한제국과 외교 협상에 나선 전권대표. 유창한 프랑스어로 협상의 분위기를 푼 뒤 소련을 정식 국가로 인정해 달라고 요청한다.
- 뱌체슬라프 몰로토프
대한제국과의 외교 협상 대표단원으로 있던 도중, 한국이 프리모리예를 노린다고 생각해 이곳은 절대로 넘겨줄 수 없다고 마구 날뛰다가 김시혁이[66] 한국은 포시예트만 할양하면 프리모리예를 노릴 생각이 없다고 단언하자 그제서야 진정한다.
4.3. 군부
- 알렉세이 브루실로프
자세한 내용은 알렉세이 브루실로프(조선에는 쿠데타가 필요해요) 문서
#!if (문단 == null) == (앵커 == null) 를
#!if 문단 != null & 앵커 == null 의 [[알렉세이 브루실로프(조선에는 쿠데타가 필요해요)#s-|]]번 문단을
참고하십시오.#!if 문단 == null & 앵커 != null 의 [[알렉세이 브루실로프(조선에는 쿠데타가 필요해요)#|]] 부분을
- 세묜 부됸니
붉은 군대 제1적기병군의 지휘관. 상트페테르부르크 공방전 막바지에 미셴코가 전사하고 나서야 뒤늦게 움직인 데니킨과 브란겔의 군대를 격퇴한다.
5. 일본 제국
작중 메인 빌런 포지션 국가. 같은 대체역사 장르의 다른 작품에선 호구 취급받는 일본 제국이지만 여기서는 대공황과 관동대지진, 군부의 폭주를 거치며 본격적으로 망가지기 이전이라는 점을 착실히 고증해서 말석으로나마 열강 자리에 앉은 것이 괜히 앉은 것이 아니라는 점을 여실히 보여준다. 2부 시점에서도 여전히 확장을 노리고 있으며 결국 대한제국이 러시아가 일제의 확장을 용인하지 않는 걸 대가로 1차대전에 참전하게 되는 원인이 된다. 정식 열강은 아니라서 외교적인 대접은 열강에 준하는 나라 수준의 취급이며,[67] 2부 외전에 따르면 원 역사에서는 1차대전을 통해 정식 열강의 반열에 오른 반면 본작에서는 대한제국의 존재와 어쩡쩡한 태도 때문에 협상국에게 찍혀 결국 정식 열강의 취급을 못 받게 되었다.[68]1918년 연해주에 파병된 장병들이 본국의 통제를 벗어나서 원 역사 2차대전기에 보이는 광기를 표출하기 시작해 독자들의 우려를 사고 있다.[69] 극동 전쟁 이후 최근 육군 애들 말하는 게 단체로 이상해진 것 같다고 하라 다카시가 1918년에 속으로 깐 걸 고려하면 극동 전쟁으로 기존 인적체계가 박살 난 후유증으로 인해 원 역사보다 더 빨리 폭주가 두드러지는 듯하다.
그래도 1919년까지는 경륜과 능력을 갖춘 문민 관료들이 고삐를 잡고 있어 파리강화회담에선 열강다운 노회함을 보여주기도 하고 한국과의 관계에도 3.1 혁명에 불개입 선언하고 관계 개선을 추진하는 전향적인 모습을 보여주나[70] 문제는 이 문민 관료들이 20년대 대부분 군부와 우익 세력에게 암살당한다는 것.
1부 외전부터 대한제국에게 자원 수입을 의존하고 있다는 떡밥이 있었는데, 2부 외전에서 그 의존도가 상상 이상으로 커서 국력에 제약이 걸릴 정도라는 것이 밝혀졌다.[71]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상황을 인정하지 않고 자신들이 대한제국보다 위라고 생각하며 고압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어서[72] 독자들이 어이없다는 평을 내리고 있다. 그나마 상식적인 내각까지 이 모양이다.[73] 그러나 대한제국에서는 아니꼽기는 해도 뇌가 있는 건가 의심스러운 군부와 극우 세력이 정권 잡고 폭주할 바에는 말이라도 통하는 문민 내각이 차악이라는 이유로 의도적으로 각종 배려를 해주고 있다.[74]
대한제국은 문민 내각이 통제권을 유지하며 정상국가화되는 것이 낫다고 여기고 있어 현재까지는 아슬아슬한 공존이 이루어지고 있지만, 문민 내각들이 대한제국의 은근한 도움을 받음에도 불구하고 극우, 군국주의 세력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고 있고 2부 외전에서 "어느 누가 미치지 않고서야 한국과 미국에게 동시에 전쟁을 걸겠냐"는 발언이 나오면서 독자들은 3부에서 원 역사의 일제가 그랬듯이 중일전쟁 대신에 한국과 싸우고 원 역사처럼 태평양 전쟁이 동시에 일어날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5.1. 황실
- 메이지 덴노
비중은 별로 없으며, 이토 히로부미의 포츠머스 회담에 대한 대응을 허가한다.
- 다이쇼 덴노
치머만 전보를 협상국에 알릴 것인지를 두고 갑론을박하는 관료들 사이에서 등장. 아버지 메이지 덴노와 달리 존재감이 거의 없다고 은연중에 무시당하는 인물이나 일본이 주변국과 비교해 어느 게 낫고, 어느 게 열세한지 정확하게 파악할 안목은 충분하다. 치머만 전보를 뭉개야 한다는 군인 관료들의 의견을 조리 있게 반박하며 최소한 영국에는 통보해 줘야 함을 지적한다.
아시아 국가끼리 뭉쳐야 한다고 생각을 품고 있어 한국과의 우호 증진에 여러모로 심혈을 기울인다. 극동전쟁 때 군부를 질책했고 직접 한국어를 배우고 황실 간 혼인을 추진해 본 적도 있었다고 한다. 덕분에 일본 내 강경파들은 덴노를 은근히 탐탁지 않게 생각하고 있으며 덴노 본인도 군부가 전에 막부를 날려버렸듯이 자신도 갈아치울 수 있다고 여겨 그들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다.[75] 그러나 격무로 건강이 완전히 망가져서 소극적인 의사 표명 이상의 행동은 하지 못하는 상태.
1919년에도 여전히 한국과 국혼을 시도하고 있으며 의친왕 즉위식 축하 사절단 대표로 나시모토노미야 모리마사 왕을 보낸다. 이를 보아 원 역사처럼 영친왕과 나시모토노미야 마사코 여왕을 혼인시키려 했던 듯하나 1919년 3월 혁명으로 강종이 사실상 폐위당하고 이강이 즉위하면서 오리무중이 되어버렸다. 다만 대한제국 입장에서도 영친왕의 계승구도에서 아예 탈락시켜 이강의 후계구도를 안정화시키는 메리트가 있으며, 한소 국교정상화로 시베리아 출병이 헛수고가 되어 궁지에 몰린 일본 육군과 물가 안정화를 위해선 한국과 관계를 개선할 필요가 있는 일본 내각도 국혼 필요성에 뜻을 모으고 있어 무산되지는 않았다. 이강은 오히려 긍정적으로 검토하고 있는 상황.
- 나시모토노미야 모리마사 왕
한일 국혼과 관련하여 이야기가 나왔을 때 딸인 마사코 여왕이 후보로 뽑혔었다. 의친왕이 3.1 혁명 이후 황제로 즉위하자 이를 축하하는 일본 사절단 대표가 된다.
5.2. 군부
5.2.1. 육군
- 야마가타 아리토모
원 역사 일본 유신지사 계의 거물. 군부에서 십수 명의 장성들이 배를 가르는 동안, 그는 민심을 진정시키는 연설을 했는데, 실체는 외무성도 책임을 져야 한다는 면피면책성 발언으로서 유신 테러를 사주했다. 내 돈은 내 돈, 남의 돈도 내 돈이란 신조의 소유자라 한국을 바짝 경계하면서도 한국이 주는 뇌물은 넙죽넙죽 다 받아 챙기는 이중적인 면모를 보인다. 2.27 계엄령이 터졌을 때 양아들인 이사부로가 한국의 내전이 조기종결할 것 같다는 내용의 서신을 보내자 이를 보고 한국 내전 개입을 반대했다.
- 오야마 이와오
원역사대로 육군 총사령관으로서 만주에서 러시아 군과 싸운다. 그러나 원역사에 없던 대한제국군의 항쟁으로 1군의 발이 묶이며 뤼순이 원역사보다 2달 더 버틴 것으로 일이 꼬이기 시작했고 그럼에도 뤼순을 먹었으니 봉천을 밀면 된다고 봉천 전투를 벌이지만 한국식 보병전술을 도입한 그리펜베르크에게 밀려 패하고 멘탈이 작살난 채로 뤼순으로 퇴각한다.
- 도조 히데노리
1군 산하 중장으로 1군 장성 중 유일한 정상인 포지션. 유격대 대처 건이나 한국의 달라진 모습에 대해 상식적인 대처를 요구하는 등 정상적인 요구를 하지만 한국을 무시하던 윗선들에게 다 씹히고 그리고 큰코다친 윗선을 항상 비웃는 것이 대표 레퍼토리다. 패전이 확정된 후 원산에서 김시혁에게 직접 자신의 일본도를 건네주고 항복했으며[76] 다른 장군들처럼 자결하는 대신 한국군을 본따 일본군을 개혁하기 위해 각종 선진적인 청사진을 내놓았다. 따로 구해 읽어 본 김시혁조차 감탄했을 정도로 합리적이고 선구적인 개혁안이었으나 육군을 잠식한 야마가타 번벌에 의해 비겁자로 몰려 모욕과 암살 위협에 시달리다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채 쓸쓸히 퇴역, 군사 서적을 출간해 근근이 먹고살다 1차 대전 발발 무렵 사망한다. 조선과는 절대 싸우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
침략자인 일본군 지휘관 중 유일하게 한국군 장성들에게 호평을 받았으며 김시혁도도 그가 전역을 이끌었다면 훨씬 어려웠을 것이라 순순히 인정한 일본 최고의 군사이론가였으나 일본은 스스로 거위 배를 갈라버렸다. 독자들 사이에서도 일본은 하늘에 우리에게 김시혁 같은 SSR급 무장을 안 주셨습니까라고 하늘을 원망하지만 하늘은 일본에도 김시혁급은 아니더라도 적어도 SR급은 되는 명장을 줬는데 그걸 못 쓴 건 일본이라며 조소를 보내는 경우가 많았다.
- 가쓰라 다로
극동전쟁 시기 일본 총리. 이토 히로부미와 함께 대한제국을 병참기지화하려 공작을 펼쳤으나 실패하고 이후 전쟁도 패전으로 끝난다.
- 데라우치 마사타케
극동전쟁 시기 육군대신이자 원역사의 초대 조선 총독. 대한제국을 은연중에 깔보고 있었지만 극동전쟁에서 일본군이 대한제국군에게 거하게 털리자 할 말을 잃게 된다. 종전 이후 이뤄진 고위 지휘관 할복 러시를 용케 피했는지 야마가타가 사이온지에게 차기 총리로 데라우치를 밀어달라는 요청으로 언급되어 원역사보다 이른 시기에 총리가 되었지만 대한제국이 호법전쟁에서 호법군을 도와 위안스카이를 몰락시키고 브루실로프 공세에서 독일군을 떡 바르는 등 잘나가는 덕에 골머리를 썩다가 결국 총리직에서 사퇴한다.
- 구로키 다메모토
러일전쟁 당시 1군 사령관. 원역사와 달리 대한제국이 일본에 선전포고하면서 한반도 전선으로 파견된다. 그러나 상대가 미래인인 김시혁인 만큼 대한제국의 준비도 철저해 고전을 면치 못했고 거기다 삼남지방에서 의병들과 지방 진위대가 유격전을 벌이자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삼광 작전을 펼쳐 자신이 직접 지휘하나 완전한 토벌엔 실패했고 한성이 수복당한 시점에선 조선 주차 일본군 대부분이 흩어지고 본인도 포위된다. 투항을 거부하고 완강하게 저항하다 끝내 할복했으며 그가 사용한 검은 역시 자결한 하세가와의 검과 함께 장충단에 모셔진 전사자들의 비석 앞에 바쳐진다.
- 노기 마레스케
러일전쟁기 3군 사령관. 원역사보다 훨씬 꼬여버린 상황에서 3군을 지휘하지만 한국 전술을 도입한 러시아 8군단의 공격을 직격으로 처맞으며 파국을 맞게 되며 본인 역시 포로로 잡히게 된다. 이후 외전에서 패전의 책임을 지고 할복했다고 언급된다. 원역사에서는 메이지 천황 사후 할복했으니 원역사보다 빨리 죽은 것이다.
- 노즈 소좌
원역사에서 주한일본공사관 무관으로 근무하며 한국군에 무기를 팔아주거나 군사유학생들을 지원해 주는 등 도움을 준 인물. 여기서도 김시혁이 군제 개혁을 할 당시에 먼저 접근해 30년식 소총을 공급해 주겠다며 미쓰이 물산과 연결해 주기도 한다.[77] 극동전쟁 이후 친한 인사인데다 한국에 자국 무기를 넘겼다는 이유로 군에서 강제전역 당했으며 이후 미쓰이 물산에 취직했다. 다행히 한국에서도 노즈 소좌와 미쓰이 물산을 "대체로 무해함"이라고 할 정도로 적대적으로 보지 않아서 미쓰이 물산의 한국 전담사원으로 순조롭게 정착했으며 그 덕에 쑨원을 지원할 대상으로 뽑히기도 했다.
한국 기록국이 일본 내각을 데라우치 내각에서 민간 내각으로 바꾸기 위한 공작을 펼칠 때 야마가타 아리모토에게 뇌물을 주며 협조했으며 민간 내각으로 바꾸는 데 성공했으나, 이후 대일 첩보망이 붕괴되고, 미쓰이 물산 담당자들이 물갈이 되자 상하이로 도주한다.
- 고다마 겐타로
만주군 총참모장. 봉천 전투에서 일본군이 밀리자 남은 병력을 통제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오야마와 함께 뤼순으로 철수한다.
- 하세가와 요시미치
1부에서 극동전쟁 당시 경성 주차군을 이끌었다. 극동전쟁에서 점점 밀리는 조짐을 보고 전전긍긍하고 있다가 본국에서 발송한 통감 임명 서한을 보고 어이없어한다. 그래도 아득바득 한성은 지키려 하지만 김시혁의 기동전과 제2전선에 말려 실패. 고립된 상황에서 투항을 거부하고 완강하게 저항하다 할복했으며 그가 사용한 검은 역시 자결한 구로키의 검과 함께 장충단에 모셔진 전사자들의 비석 앞에 바쳐진다.
- 이지치 고스케
3군 참모장. 봉천 전투에서 결국 일본군이 패전하자, 뤼순으로 철수해야 해군이 제대로 싸울 수 있을 것이라고 오야마를 설득했다.
- 아사다 노부오키
하세가와가 한국주차군 사령관으로 영전하자 근위사단장으로 조기 승진했다. 한국군을 얕보았지만 황주, 진남포 전투에서 큰 피해를 입자 당황했으며 이후 분노한 구로키 다메모토에게 갈굼받는다. 함흥 전투에서 도조 히데노리와 우메자와 미치하루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무리하게 공세를 진행했지만 실패했고, 원산으로 철수하지만 그곳에 상륙한 강습보병대대에게도 패전하며 포로가 된다.
- 아키야마 요시후루
극동전쟁에서 일본이 패전하자 다리를 잃고 포로로 붙잡혔다. 포로에서 풀려난 이후 노기처럼 할복했다고 언급된다.
- 니시지마 스케요시
극동전쟁 시점 일본군 2사단장. 사창리 전투에서 한국군과 전투를 벌였으나 근위사단과 6여단에게 포위당하며 패전하고 박승환에게 포로로 붙잡힌다.
- 이노우에 히카루
극동전쟁 시점 일본군 12사단장. 12사단 23여단이 주안산에서 큰 피해를 입자 한국군을 경계하며 파벌도 다르고 한국군을 얕보는 아사다 노부오키와 자주 충돌한다. 이후 황주 전투에서 한국군에게 밀리자 의견 차이로 서로 싸우는 지휘관, 참모들을 진정시키고 구로키에게 황주 점령을 미루고 개성으로 퇴각할 것을 건의한다.
- 우메자와 미치하루
원 역사에선 무장이 열악한 후비 보병대로 러일전쟁에서 맹활약한 유능한 장교. 도조 히데노리와 함께 극동전쟁기 일본군 지휘관 중 가장 유능한 모습을 보여준다. 제4근위연대장이었다가 평양공방전 이후 제1근위여단장으로 영전하고 장성까지 되지만 종전까지 살아남지 못하고 홍범도에 의해 문산에서 전사한다.
- 시바 고로
의화단 진압 당시 주청 일본공사관 무관. 공사관 구역을 점령하려는 의화단을 물리치며 함께 싸운 기록조사실 요원을 보고 동질감과 기시감을 느끼면서 더이상 그들은 약한 조선군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 아카시 모토지로
극동 전쟁 당시 원역사처럼 러시아 내의 무정부주의자들과 사회주의 운동가들이나 불평분자 등 폴란드, 핀란드, 크림반도, 투르키스탄 등지에 분리주의 세력들과 접촉해 러시아에 대한 저항을 독려하여 피의 일요일 사건이 일어나도록 했다. 이를 듣게 된 김시혁은 일본의 명장은 아카시 하나뿐이라고 생각한다. 2부 시점에서는 대만 총독.
- 오시마 겐이치
2부 초반 일본 육군대신. 데라우치가 러시아 총기 지원을 위해 소총 20만 정과 가용 가능한 탄약을 나가사키에 집결시키라고 명령하자 탄식하며 시간을 달라고 요청한다. 이후 러시아에게 관동주를 넘어서 봉천, 장춘, 하얼빈까지 할양받은 뒤 한국군을 압박할 생각을 했지만 해군이 그곳을 받아낸다고 해도 한국군에게 밀릴 수 있다고 육군의 의견에 반대하자 표정이 일그러젔지만 김시혁의 이름이 언급되자 움찔거린다. 하지만 곧 해군의 제안을 듣자 그렇게 하면 한국 육군이 공격할 때 뤼순 전투와 칭다오 전투처럼 될 것이라며 비웃는다.
- 다나카 기이치
1917년 시점 일본 육군대신. 영국으로부터 서부전선 참전 요구가 오자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참전에 반대한다. 하지만 연합국으로부터 압박이 오자 자원병 6,000명으로 퉁치려 했으나, 영국에 전후 아시아 질서를 아예 재편할 수도 있다는 경고를 듣고 자원병으로 퉁치려던 계획을 포기하고 야마가타 아리모토에게 조언을 듣고, 정부에 반항적이고 경제적으로도 가난한 관동에서 5만을 징발해 파병하기로 한다. 이후 영국에서 니콜라이 2세를 데려오기 위해 일본에도 시베리아 파병을 요청하자 이를 기회로 관동주를 점령하려는 계획을 세웠지만, 외무성의 전보를 이 사실을 알게 된 영국에 의해 실패한다.
한일 국혼 이야기가 나왔을 때 이를 추진하려 했으며, 2.27 계엄령으로 인해 한국이 내전 상태에 돌입하자 영국의 요청에 따라 개입할 것을 주장했지만 내전이 조기종결할 것이라고 본 하라 다카시의 반대와 야마가타 역시 개입 반대를 주장하자 어쩔 수 없이 의견을 접으며 얼마 안 가 계엄령이 시민군의 승리로 조기종결했다는 소식을 듣는다. 이후 하라 다카시가 한일 관계 개선과 함께 과거 육군에서 추진했던 한일 국혼을 고려해 보자고 하자 받아들인다.
- 오타니 기쿠조
1918년 시점 일본군 육군참모총장. 다나카 기이치, 이치노에 효에와 함께 관동주 점령 작전을 구상했으며, 고토 신페이에게 관동주 점령이 불가능한 이유를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고집을 부렸고, 이후 이 사실을 듣게 된 영국으로부터 경고를 받았음에도 계속해서 관동주를 점령하자고 고집을 부린다.
- 이치노헤 효에
1918년 시점 일본군 교육총감. 다나카 기이치, 오타니 기쿠조와 함께 관동주 점령 작전을 구상했다.
- 우가키 가즈시게
일본의 참전 회피에 분노한 영국의 조치에 군 수뇌부가 당황하던 중 이 사태를 넘길 대책을 말하는데, 그 대책이라는 게 퇴역군인, 아시아주의자, 막 졸업한 소장파 장교들로 구성된 자원병 2,000명을 파병하자는 것이었다. 이후 관동주를 그냥 점령할 것을 주장하는 오타니 기쿠조와 이치노에 효에를 말리며 반대한다.
- 가미오 미쓰오미
칭다오 전투에서 연합군을 지휘했으며, 서부전선 파병이 결정되자 서부전선 일본군 지휘관이 된다. 실권은 거의 없고 한프미군 상대로 정치질하는 헤이그 원수의 딸랑이 애완견 신세. 헤이그에게 떠밀려 아미앵에 파견되고 나서는 전차 부대 지휘권을 요구하다 고프의 일갈에 쭈그러들고, 사방에 흩어진 독일군 잔적을 처리하라는 김시혁의 지시에 우리에게 그런 하찮은 임무만 맡기냐며 발끈하고 대드는 등 무능한 모습만 보여준다. 독일의 미카엘 공세 실패 원인 중 하나가 조각난 영국군 병력을 제대로 처리하지 않았다가 그들의 지연전에 후속 병력이 발목을 잡힌 탓이고 그걸 분명히 설명하며 잔적 처리를 맡기는 상급자에게 하찮은 임무라며 대들고 있는 것. 그러나 아래의 지휘관들이 김시혁에게 영도된 상태라 오히려 가미오를 겁쟁이라 비판하며 김시혁의 작전 안에 적극 찬성하자 아무것도 못하고 쭈그러들고 만다.
- 야마구치 케이조
김시혁을 패배(?)시킨 유일한 지휘관. 경복궁 전투 당시 11연대 2대대장으로, 마지막까지 저항하던 김시혁을 기절시키고 사로잡았다. 경복궁 전투와 청일전쟁에서 연달아 공을 세우고 극동전쟁 앞두고 11사단장으로 영전해 순탄한 군 생활을 이어갔으나 극동전쟁이 일본의 대 참패로 끝나자 뤼순 공방전에서 입은 손실을 구실로(실제론 김시혁을 살려줬다는 이유로) 면직당했다. 하릴없이 지내다 지원병 여단을 이끌, 능력 있는 예비역 장성을 물색하던 군부 눈에 들어 자원병 여단 여단장으로 군문에 복귀하고 김시혁과 재회한다.
- 도조 히데키
서부전선에 파병된 한국군에 배속된 일본 관전무관단의 일원으로 등장. 극동전쟁에서 장교가 너무 많이 죽어버린 탓인지 이립 33세에 대좌 계급장을 달고 있다.[78] 원 역사의 도조도 젊은 시절엔 부하들을 끔찍이 챙기고, 나름대로 합리적인 지휘관이었는데, 역사가 바뀌며 그런 면모가 더 강해져 원래 역사를 아는 김시혁은 깊은 인상을 받는다.
- 고모토 다이사쿠
원 역사 황고둔 사건의 주모자로, 김시진이 이끄는 군사들과 러시아 차르 일가가 시베리아로 오자 그들이 탄 열차를 폭파시키자는 제안을 했다가 하라 다카시에게 질책 받는다. 러시아 황제 일가가 영국 왕의 사촌이라 영국이 대한제국에 직접 구출을 요청한 거라서 그런 짓을 했다가는 물주인 영국이 노발대발해서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의 결과가 돌아올 것이 분명하다는 이유로, 하라 다카시는 요즘 육군 꼬라지가 왜 이 모양이냐고 혀를 찼다.
2부 외전 시점에서는 진저우에 있는 중화민국 육군 부대 고문관으로 우장춘의 망명을 저지하라는 명령을 받자 우장춘이 탄 열차의 철도 노선을 폭파시키는 작전을 세웠다가 다나카 기이치에게 질책받는다.[79] 이후 작전을 바꾸어 자신이 통제하는 부대를 이끌고 훙후즈로 위장한 뒤 우장춘과 기록국 요원을 제거하려 한다.[80] 그러나 작전은 실패하고 우장춘을 놓친 것은 물론, 혼란 중에 아군인 일본 영사관 경비대와 오인교전이 일어나고 적의 습격으로 오해한 일본 영사관에서 기밀문서와 암호장비를 파기해버려 큰 손해를 입힌 데다가 본인도 자살도 못하고 한국 경찰부대에 의해 사로잡혀 사건의 전말에 대해 자백해버리는 추태를 보인다.
- 이시와라 간지
일본군 자원병 여단의 참모. 육사 차석으로 지원병 여단 지휘부를 소장파로 꾸리면서 원정에 합류했다. 일본 육군 소장파 대부분이 그렇듯 김시혁을 열렬히 숭배한다.
- 무타구치 렌야
일본 지원병 여단의 일원인 햇병아리 대위로 등장. 지원병 여단의 실태와 앞으로의 대처 방안을 설명하는 브리핑에 참석해 처참하다는 말로도 모자란 지원병 여단의 훈련도를 그나마 정예한 병력들을 모아 자동화기를 몰아준 특공중대 편성으로 보완하는 차악에 대해 설명한다. 렌야가 희대의 졸장으로 남게 된 가장 큰 원인은 이렇다 할 전투지휘 경력 없이 행정직으로 돌았던 인물이 파벌을 타고 출세해 버려서인데 1차 대전 최전방에서 직접 특공중대를 지휘하게 됨으로써 완전히 다르게 성장할 여지가 생겼다.[81] 야간기습을 하던 독일군 스톰트루퍼와의 백병전 중 신체적 조건 덕분에 구사일생하는 에피소드가 백미. 함께 작전하던 영국군 전차 위에 올라가 만세를 부르던 그의 사진을 찍은 일본인 기자가 독일 전차를 격파하고 포효하는 무타구치 대위라고 헤드라인을 내는 바람에 단숨에 전쟁영웅이 되었다.
- 도미나가 교지
일본군 자원병 여단 3대대장으로 그의 대대는 가장 광신적이라고 평가받는다. 아미앵의 입구인 빌레르-브르토뇌로 진입하는 독일 스톰트루퍼들의 공세에 가장 먼저 상대해 중화기 전부와 절반 이상의 병력을 망실하는 피해를 입는다. 그런 위기 속에서도 최대한 오래 수화기를 붙들고 야간전에 귀중한 각종 정보 사항을 전달한 뒤 처절한 근접전을 벌여 스톰트루퍼 중대를 격퇴해내며 지휘관으로서의 소양을 제대로 보여준다. 원 역사에서 줄타기와 민사작전 외에는 군사적 능력이 없다시피 하다는 평을 들은 걸 생각한다면 대단한 부분.
5.2.2. 해군
상대적으로 안정을 중시하는 노장 중심의 해군 좌파와 강경 소장파 중심의 해군 우파로 쪼개져서 치열한 물밑 파벌싸움을 벌인다.- 야마모토 곤노효에
극동전쟁 시점 일본제국 해군대신. 극동전쟁 때도 대표 강경파로 나서며 대본영이 그렇듯 한국을 무시하고 있다. 그러나 극동 전쟁이 예상과 전혀 다른 전개로 가면서 서서히 불안감을 느끼고 있었고 결국 그 불안은 현실이 되고 만다.
- 도고 헤이하치로
원역사대로 극동전쟁 때 연합함대 총사령관을 맡고 있다. 대한제국군에게 털리던 육군과 달리 전력을 그런대로 유지하고 있었고, 만주와 한반도에서 육군이 사실상 소멸되자 이제 최후의 희망은 자신들 뿐임을 알고 발트함대를 격파해 완전한 최악만은 면하고자 한다. 그러나 원역사와 달리 대한제국의 정보 전달로 발트함대가 츠가루 해협으로 향하며 함대결전도 못해보고 무기력하게 패배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고 결국 극동전쟁 이후 해임된다. 그러나 해임은 됐어도 해군 내 영향력이 죽지는 않아서 '해군우파'라 불리는 강성 소장파 장교들의 후원자 노릇을 한다.
- 가토 도모사부로
2부 시점 일본 해군대신. 한국군에 대한 자격지심과 격차 무시한 호전성을 강하게 드러내는 육군 수뇌부와 달리 국제정세와 한국군의 역량을 솔직하게 인정하면서 육군과의 대립에서 해군의 몫을 지켜내는 적대적 공생 관계를 유지하길 원한다. 육군이나 해군 소장파들 주장처럼 우격다짐으로 관동주를 점령해 봐야 이어진 한국군의 공격을 버텨낼 수도 없고 영미의 극동 전략을 어그러뜨려 혹독한 대가를 치를 게 뻔하니 괜히 매달리지 말고 한국 해군의 증강을 일본 해군의 증강 명분으로 삼아 84함대로 깎인 건함 계획을 88함대로 되돌릴 방안을 모색한다.
2.27 계엄령때 육군 수뇌부가 개입을 강력하게 주장하는 가운데 유보적인 입장을 내놓았다. 사태가 시민군의 승리로 종결되자 당연히 김시혁이 군정을 실시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오히려 군정을 거부하고 입헌에 의한 민간 정부 구상을 지지했다는 소식을 듣자 당황해한다. 탄력을 받은 하라 다카시 총리가 내놓은 한일 관계 개선방안을 제시하자 파나마 운하 개통으로 미 해군이 빠르게 극동으로 진입할 수 있게 된 상태에서 한국, 프랑스, 네덜란드까지 전부 상대할 순 없다는 이유로 지지의사를 표명한다.
워싱턴 해군 군축회의에도 참석해 하라 다카시를 보좌하며 일본 3.5, 한국 1.79로 배정받을 것을 주장한다. 외무성 관료가 미국을 걱정하자 미치지 않고서야 대한, 대미 개전을 동시에 진행하겠냐고 반박한다.
- 시마무라 하야오
2부 시점 일본 해군 군령부장. 고토 신페이가 육군이 계획한 관동주 출병을 반대할 때 동조했다. 이후 가토 도모사부로와 함께 관동주에 매달리지 말고 한국 해군의 증강을 일본 해군의 증강 명분으로 삼아 84함대로 깎인 건함 계획을 88함대로 되돌릴 방안을 모색한다.
5.3. 내각
- 이토 히로부미
역시나 원역사대로 미쳐 돌아가는 일본 속에서 나름 정상인으로 묘사된다. 시대가 시대라 제국주의적 면모는 있지만 노회한 여우라 불리는 만큼 외교술 등에서 뛰어난 면모를 보이며 외교 협상장에 모습을 자주 보인다. 러일전쟁 패배로 재정이 휘청이는 상황에서 1907년 미국발 공황으로 인해 경제에 큰 타격을 입었고, 일본의 인구가 폭등하면서 쌀 소비량이 더 이상 버티지 못하게 되어 한국에게서 쌀 수입을 늘려야 하는 상황이 오자 동양척식회사를 세워 양국이 서로 미개간지를 개간한다는 명목으로 만주와 한반도에 영향력을 확대하고 마음에 안 드는 인간들을 만주나 한반도로 추방해 인구압을 줄이자는 발상이었지만, 1909년 대뜸 한국과 손잡으려 한다고 급발진한 야마가타가 보낸 자객에게 암살당한다. 사후 사이온지에게 정확한 설명을 들은 뒤에는 급발진했다고 인정하기는 했지만. 이 소식을 들은 김시혁은 전생에는 한국인에게 죽더니 이번 생에는 같은 일본인 손에 죽었으니 더 좋았을 거라고 속으로 비꼬았다. 한국 쪽에서도 일본의 속셈을 알기는 했지만 한국도 인구가 늘어나고 있었고 개척에 필요한 자금 문제 때문에 플랜 자체는 받아들여졌다.
- 사이온지 긴모치
이토와 마찬가지로 일본 안에 보이는 몇 안 되는 정상인. 이토 사후 내각총리대신이 되어 폭주할 기미가 보이는 군부를 그나마 억누르고 있다. 그러나 차기 총리로 군부에 속한 데라우치가 확정되면서 결국 일본이 폭주하는 길로 향하는 것을 완전히 막지 못했다. 이후 파리 강화 회의에 특명전권대사로 참석하며[82] 영국, 우드로 윌순과 함께 수작을 부려 관동주를 얻고 한국에게 불이익을 주려 했지만, 오히려 관동주를 일본의 위임통치령으로 인정 받는 대신 비무장화한 상태로 얻게 되자 당황하며 분노하지만 어쩔 수 없이 인정하게 된다.
- 고무라 주타로
김시혁의 1차 친위 쿠데타 이후 주한 일본 공사를 맡았고, 극동전쟁 시점에서는 외무대신으로 극동전쟁이 종전에 이를 무렵 이토 히로부미와 함께 포츠머스 회담에 참석했다.
- 모토노 이치로
1916년~1918년 2월 초 일본 외무대신. 영국이 한국을 견제하려는 목적으로 시베리아 출병을 제안하자 한국군 주력이 자리를 비운 틈에 관동주를 점령할 계획을 육군과 모의했지만 논의 도중 위암으로 급사한다.
- 하라 다카시
데라우치 내각 총사퇴 이후 일본 총리가 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육군의 압박에 고생하며 러시아 황실이 타고 있는 열차를 폭파시키자는 고모토 다이사쿠의 제안을 단번에 물리치며 왜 육군에 점점 저런 놈이 늘어나는지 의문을 가지며 골치 아파한다. 파리 강화회의 일본측 대표로 사이온지 긴모치를 지명하고 삼고초려 끝에 파견했고 관동주를 비무장 위임통치령으로나마 얻어내는 성과를 냈다. 한국에서 2.27 계엄이 발생하자 내심 개입을 원하면서도 김시혁이 시민군에 섰다는 첩보에 사태가 조기종결할 것이라 보고 개입 불가로 방침을 정했다. 해군은 유보, 육군은 개입, 총리는 불개입을 고수한 가운데 3일만에 시민군의 승리로 일단락나자 의기양양해한다. 육군이 풀이 죽은 것을 기회로 한국과의 외교 관계 개선을 주장하며 과거 육군이 추진했던 한일 국혼 문제도 재추진할 의사를 밝혀 육군의 협조를 얻는다. 나름대로 소신있고 정상적인 사고를 하는 정치인인데 문제는 극우단체 사주를 받은 미성년자에게 암살당하는 미래가 머잖았다는 것.
이후 워싱턴 해군 군축회의에서 한국 총리 길영수와 회담하면서 일본의 해상 안보를 이유로 한국이 슈퍼 드레드노트급 전함 6척을 가지는 것을 인정할 수 없다며 3척만 가지라고 요구했으나 오히려 길영수에게 그렇게 한다면 일본도 무츠를 포기하라는 말과 봉천 사건의 전말을 밝히겠다는 말을 듣게 되자 당황하며 한국의 요구 사항을 듣게 된다.
- 고토 신페이
모토노 이치로 후임 외무대신. 모토노 이치로가 급사하는 바람에 관동주 점령 계획에 대해 듣지 못해, 육군이 관동주 점령을 주장할 때 당황하며 반대한다. 전쟁하는 거 말고는 아무 데나 관심 없는 군부에 영일동맹에 대항하는 한프동맹의 잠재력과 프랑스-중화민국-대한제국의 연계 가능성, 네덜란드령 동인도라는 변수까지 거론하며 입 아프게 설명하다 육군 하는 일에 일단 반대하고 보는 해군 측의 지원 사격으로 간신히 관동주 출병만은 미루는데 성공한다.
- 마키노 노부아키
파리 강화 회의에 사이온지 긴모치와 함께 특명전권부사로 참석하며 영국, 우드로 윌슨과 함께 수작을 부려 관동주를 얻고 한국에게 불이익을 주려 했지만, 오히려 관동주를 일본의 위임통치령으로 인정 받는 대신 비무장화한 상태로 얻게 되자 당황하며 분노하여 이대로 넘어갈 것이냐며 사이온지 긴모치에게 항의하나 본인도 딱히 뾰족한 수는 없던지라 곧 수긍하고 만다.
- 고무라 긴이치
고무라 주타로의 아들. 외무성 정보부장. 2.27 계엄령에 개입하는 것을 반대했으며 계엄 이후에도 한국의 정보망이 견고하자 할 수 있는 것은 새 황제 즉위를 축하하는 사절단을 보내는 것뿐이라고 말한다. 우장춘이 기록국을 통해 한국으로 망명하려는 것을 알게 되자 이를 막으려고 중국 쪽 인력을 총동원한다. 그러나 결국 육군의 실책으로 우장춘을 잡는 데 실패하며 봉천 영사관의 기밀 자료까지 불타는 등 여러 문제가 생기자 분노한다.[83]
5.4. 기타
- 스기무라 후카시
1부 초반 주한 일본 서기관으로 김시혁을 경계했다. 그러나 김시혁의 1차 친위 쿠데타가 성공하자 이를 사전에 인지하지 못한 죄로 분노한 일본 내각에 의해 을미사변이 일어나는 것을 막지 못했다는 명목으로 구금된다.
- 하야시 곤스케
극동전쟁 직전 주한 일본 공사로, 강종을 꼬드겨 대한제국을 일본의 병참기지로 만들려고 하였으나 김시혁의 2차 쿠데타로 물거품이 된다. 한국군에게 계속 농락당해 분노한 하세가와가 잔적들을 소탕한다는 명목으로 한성부를 쑥대밭으로 만들어 버리려 하자 평소에 유순한 성격과 달리 강경하게 나서 이를 저지한다.
- 야마가타 이사부로
2부 시점 주한 일본 대사. 야마가타 아리모토의 양아들. 한성에서 일어난 폭동으로 인해 일본인이 피해를 입자 김규식에게 항의를 하지만, 그와 동시에 또 다른 비공식적인 제안을 한다. 이승만 내각이 들어서자 이승만과 협상해 극동전쟁 도중 친일파들에 의해 일본으로 넘겨진 국새 황제지보를 돌려주며 동시에 연해주에 출병 예정이었던 한국군이 철군하게 한다. 2.27 계엄령이 터지자 미국 대사관 쪽으로 대피했으며 양아버지인 야마가타 아리모토에게 한국의 내전이 조기종결될 것이라고 보고한다.
- 요시다 시게루
텐진 주재 일본 영사 겸 외무성 정보부 텐진 총책. 고무라 긴이치에게 우장춘이 한국으로 망명하려는 것 같다고 보고한다.
- 야다 시치타로
봉천 일본 영사 대리. 우장춘을 잡을 준비를 하고 있었으나 훙후즈가 영사관을 공격하자 당황한다.[84] 즉시 방어선 구축과 각지에 지원을 요청하며 부하들에게 기밀문서 소각을 지시한다.
6. 프랑스 제3공화국
러프동맹의 인연 덕에 대한제국과 맺어진 또 하나의 우방이며, 열강이지만 아직 산업화 등이 늦어 도움의 요소가 적은 러시아와 달리 제대로 된 도움을 주는 사실상 진정한 우방.[85] 실제로 프랑스도 대한제국을 나름 수평적 파트너로 생각한다는 묘사가 글 곳곳에서 보인다. 다만 이쪽도 2부 시점을 보면 제국주의 열강으로서의 혐성이라는 한계를 뚜렷이 보여주는 까닭에 러시아가 선녀같다는 의견도 독자들 사이에선 나오는 편. 그러나 영국의 서부전선 개입이 확정된 후 혐성과 협잡질이 가히 배후중상 수준에 달하면서 상대적 천사가 되었다. 사실 원 역사의 프랑스가 의외로 대한제국과 대한민국 임시정부에게 호의적이었음을 고려하면 고증이다.1918년 4월. 한국과 20년짜리 동맹조약을 체결해 정식으로 파트너가 된다.
전간기에 원 역사와 가장 행보가 많이 달라진 나라 중의 하나인데, 한국과 파트너쉽을 맺은 영향이 매우 컸다. 1차대전 때 한국군의 도움을 받기는 했지만 합동 계획한 작전안으로 막바지에 자국군 영토를 모두 수복한 것은 물론이고 한국군을 용병으로 파견해 루르 일대를 함락시켰고, 이를 기반으로 1차대전 이후 라인란트 일대에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으며 이를 위해 한국군의 일부를 주둔시키기도 했다. 러시아 제국이 무너지면서 그레이트 게임이 종결되자 이후에는 프랑스가 영국과 드잡이질하며 경쟁하게 되었는데, 1차대전 때 환율 방어를 위해 많은 화폐를 찍어내고 이를 남중국에서 모두 소화시키는 한편 행정구역상 본국인 알제리에 별개로 있는 중앙은행과 병용시켜 화폐 방어에 성공한 것은 물론, 금 방어도 상당히 해내서 전후 재정 상황이 영국보다 여유롭다고 한다. 다만 전간기 동안 프랑스의 세력권 유지를 위해 소련과 손잡은 튀르키예군과 드잡이질 중이며, 적백내전 때 한국군에게 굴욕을 당해 백군을 완전히 제압시키지 못한 것에 피꺼솟한 소련이 이를 만회하겠답시고 동유럽에 대규모 군사활동을 벌이는 걸 막느라고 쉬지 못하고 싸우고 있어 회복은 요원하다.
남중국 경제의 주도권을 한국과 프랑스가 갖게 되었고, 네덜란드가 영일동맹의 존속에 불만을 품고 인도네시아 사수를 위해 프랑스로 편을 갈아타면서 한반도-남중국-프랑스령 인도차이나-네덜란드령 동인도로 이어지는 동아시아~동남아시아 경제망을 구축했으며 이는 군사, 정치, 외교적인 연계이기도 했다. 동아시아에서는 영일동맹이 맺은 일본-북중국-류큐-대만-영국령 말레이-인도로 이어지는 경제망이 있어 현재 두 세력이 힘싸움을 하고 있고, 이는 미국의 정치 구도에도 영향을 끼쳐 미국은 두 세력의 사이를 중재하는 방식으로 고립주의 노선을 유지하는 한편, 미국 자본의 유입을 철저히 막고 있던 영일동맹과 달리 미국 자본의 유입을 흔쾌히 허락한 한프동맹과 경제적으로는 밀착한 관계이다.
프랑스도 한국과의 시너지가 굉장히 만족스러웠는지 대한제국에게 여러 편의를 봐주는 모습이 많고, 대한제국도 그런 프랑스와 충실히 협력하면서 순탄하게 함께하는 중이다. 전반적으로 전간기의 제3공화국과 달리 대한제국과의 동맹이 프랑스 정계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묘사가 많아서, 원 역사처럼 번아웃이 와서 내부적으로 무너지는 일은 적어도 대공황 때까지는 일어나지 않을 것으로 보고 있다.
6.1. 관료
- 조르주 클레망소
전쟁장관 대리로 미국 전쟁성 주도로 이루어진 워싱턴 회의에서 대한제국 대표인 민영환과 함께 프랑스 대표로 참석한다. 온 프랑스가 불타는 한이 있어도 독일에 맞서야 한다는 초강경파로 카포레토 전투로 협상국 전체가 공황 상태에 빠졌을 때 비장의 카드로 등판해 전시 총리가 된다. 총리가 되자마자 화친파와 친독파를 국가반역죄로 체포해 정국을 일소하고 전시 체제에 도움이 되지 않는 잡다한 파벌 싸움도 모두 정리하고 일원화시켜 오직 독일과 싸우는 데 모든 것을 맞춘다. 대한제국 원정군을 위해 여러모로 편의를 봐주면서도 한국에 이미 파병하기로 한 10만 외에 남프랑스를 지킬 추가 파병을 요구하며 대신 프랑스와 대한제국간 동맹을 제안한다. 대독일 강경파답게 전후 대한제국이 배상함으로 미완성된 마켄젠급과 바이에른급을 챙기고 완공을 위하여 독일 현지 인력과 프랑스의 자원을 쓴다는 것에서 독일의 산업의 다시 복구시키는 것에 불만을 드러냈지만 이내 전후 배상금을 생각하여 이를 동의해 주기로 한다.
- 테오필 델카세
한성 대타협과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프랑스의 외무장관. 홍종우에게 서부전선에도 한국군 추가 파병을 해줄 것을 요청했다. 한불동맹 체결 과정 전반에 관여했으며 1919년 전후 협상 와중에 일어난 2.27 계엄 이후 근황파를 지원해 내전을 장기화시키자는 영국의 제안을 단호하게 거절하고 시민군에 대한 지지를 표명했으며 혁명 성공에 축하를 보낸다. 정치적인 이유도 있지만 프랑스 공화국의 여론이 대한제국의 혁명을 강력히 지지하고 있어서 공화국의 정통성을 위해 지지한 것이기도 하다고. 3일만에 상황이 정리된 것에 놀라며, 처음에는 김시혁이 군정을 성립시킬 거라 예측했지만 김시혁이 일선에서 물러나 의친왕을 내세워 입헌군주정을 세운 것을 알고 싱숭생숭한 감정을 느꼈다. 이후 홍종우와 교섭해 한국 몫의 배상금을 늘려 달라는 요청을 받는다. 처음에는 난색을 표했으나 그 돈을 한국이 가져가는 대신 프랑스 현지에서 해군을 건설하는데 사용할 것이라는 설명을 듣고 입장을 바꾼다.
- 폴 두메르
1901년 한성 대타협 당시 프랑스 사절단 대표.
- 빅토르 콜랭 드 플랑시
주한프랑스공사. 한국에 우호적인 편으로 군사 개혁 시기부터 교관단 초청, 장비 도입 등으로 교섭을 가졌다. 1차 대전기에도 쭉 주한대사로 장기근속.[86] 2.27 계엄령 당시 경운궁에 에워싸인 형태로 자리잡은 각국 공사관은 경운궁에서 날아온 유탄과 구조를 요청하며 도망쳐 온 한성부민들, 수시로 난입해 시민들을 잡아가려 드는 헌병 분견대로 혼란 그 자체였는데 가장 수비 병력이 충실했던 프랑스와 미국 공사관이 중심이 되어 입구를 봉쇄하고 도망쳐 온 시민을 보호하며 헌병대에 맞서다 상황을 어느 정도 정리한 의친왕의 방문을 받고 안전을 약속 받으며 한숨을 돌린다. 의친왕 중심 신왕정 수립에 긍정적인 시선을 보내고 당장의 공화국화는 시기상조라는 입장을 취한다.
6.2. 군부
- 페르디낭 포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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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if 문단 == null & 앵커 != null 의 [[페르디낭 포슈(조선에는 쿠데타가 필요해요)#|]] 부분을
- 조제프 조프르
2부 프롤로그에서 등장하는 프랑스군 참모본부장. 대한제국에서 김시혁과 함께 개발한 전술을 도입하려던 포슈의 계획을 지지해 주고 있으며 그를 20군단장에 임명해 나름 힘을 실어주려 한다.
- 필리프 페탱
포슈와 함께 프랑스군을 대표하는 지휘관. 병사들의 지지와 인망 면에서는 포슈보다 월등하며 프랑스 정치인들도 포슈와 패탱 중에서는 페탱을 더 믿음직하게 여긴다.[87] 야전 원수로서 역량은 포슈와 막상막하일 정도로 탁월하고 시각도 열려 있어 포슈가 정립한 최신 제병합동 교리를 받아들여 성과를 냈으나, 협상국이 아닌 프랑스군의 승리를 우선한다는 문제점이 있다.[88] 아미앵으로 적 주공이 확실해지고 독일이 기용 가능한 야전부대를 전부 아미앵 방면에 쏟아부어 생캉탱 방면이 텅 비게 되자 포슈의 협력 제안을 받아들여 독일군 80만을 포위하는 대반격에 일익을 담당한다. 이후 대공세에도 김시혁과 함께 군을 이끌어 독일 본토에 협상국 깃발이 휘날리게 하는 데 성공한다.
- 막심 베이강
포슈의 측근으로 영국군과 연락 및 작전 협조를 위해 원정군 사령부로 파견되었다. 영국군이 대규모 작전에 익숙하지 않아 프랑스군과 발을 맞추기 어렵다고 평가하며 영국군의 능력을 불신한다. 마르세유에 한국군이 도착하자 이들을 맞이하고 한국군과 현지 병력 사이에서 중재자 역할을 수행한다. 대공세가 시작되자 제1중전차대대를 모체로 하여 Fcm-1A 15대, 생샤몽 및 슈네데르 CA1 75대와 FT-17 105대에 프랑스군 정예부대인 샤쇠르 1개 연대까지 배속 받은 제1전투집단을 이끌고, 최고전쟁사령부의 전략예비대인 한국군과 함께 행동하고 있다. 종전 이후 카프 폭동 진압을 위해 샤를 망쟁 후임 군정 사령관이 된다.
- 샤를 망쟁
니벨 공세에서 당시 제6군 사령관으로, 가장 괄목할 만한 성과를 냈지만 너무 공격적으로 부대를 운용하는 바람에 '도살자'라는 증오 섞인 별명으로 부하들에게 불리게 되었다. 니벨이 해임될 당시 그와 마찬가지로 대규모 사상자 발생에 대한 책임을 져 해임되었다. 그래도 포슈와 예비집단군 사령관 에밀 파욜은 그의 진가를 알아보고는 일선으로 복귀시키고자 했고, 본인도 계속 일선 야전 지휘관으로 복귀를 희망하던 중, 간신히 미카엘 공세가 진행될 때 10군 사령관으로 복귀하며, 아미앵의 지원군 부대로 김시혁을을 도우러 온다. 김시혁 앞에서 아무런 악의 없이 인종차별적 발언을 해서 독자들을 아연케 했다. 200여 대의 전차를 앞세운 강철군단을 이끌고 아미앵으로 미카엘 공세를 역포위하는 대반격의 선봉에 선다. 일일 15km 이상 진격하며 4개 야전군을 문자 그대로 갈아버린 뒤 뒤베니와 교대했다. 종전 이후 라일란트 군정사령관이었지만 카프 폭동 진압을 우해 막심 베이강과 교체된다.
- 루이 프랑셰 데스페레
발칸전선에서 맹활약한 프랑스의 명장. 케말이 이끄는 대국민의회의 맹공으로 폰토스 공화국이 멸망 직전에 몰리자 야전군 5만을 이끌고 구원군으로 투입된다.
- 모리스 가믈랭
알제리 사단장. 2차 대전의 무능함만 알려져 있으나 리즈시절인 이때는 1차 마른 전투를 승리로 이끄는 데 기여하고 단 3년 만에 소령에서 준장으로 승진하고 포슈와 조프르의 신뢰를 한몸에 받던, 엘리트 장교를 넘어 유럽을 대표할 명장이 될 재목으로 촉망받던 장교였다.
- 폴리외크트 비달
프랑스 군사 고문단 포병 교관 소령으로 첫 등장하여 한국에 여러 도움을 주었다. 2부에서는 대령으로 전역해 르노사 소속이 되어 김시혁과 강종에게 르노 FT 도입을 제안한다.
- 앙리 구로
1차대전 당시 프랑스군 군사이론의 선각자로 유기적인 통신 체제를 이용해 숲을 돌파하는 기동을 처음으로 펼친 건 물론, 아르덴 숲을 돌파해서 독일 본토로 고속 진격한다는 기동전 이론을 내놓기도 했다. 해당 이론은 김시혁이 들고 가서 미래 지식(원 역사 낫질 작전, 벌지 전투)으로 계획을 세부적으로 다듬어 포슈를 설득해 아르덴 숲을 돌파하여 독일 본토로 진공하여 아헨을 함락시키고 쾰른의 항복을 받아내는 쾌거를 이루는 데 도움을 주었다. 이후 소련의 서방 공세가 진행되자 유럽 방면군을 이끌고 이들과 맞설 준비를 한다.
- 프랑수아 다를랑
원래 라인 소함대 지휘관으로 부임하여 독일의 행동을 하나하나 감시하는 역으로 내정되어 있었지만 상황이 바뀌어 동맹인 한국 정부의 요청에 따라 킬과 빌헬름스하펜에서 건조 중인 독일의 미완공 전함들을 관리 및 감독, 그리고 감시의 목적으로 파견되었다. 신순성에게 미완공 전함 건조 진척에 대해 보고한다.
- 에밀 뮈즐리에
극동 전쟁 이전, 신순성과 대화하면서 일본 해군과 싸우게 되면 구축함 6척에 불과한 한국 해군은 전멸할 터인데 왜 그렇게 필사적이냐며 묻는다.[89] 각주에 나온 신순성의 대답을 듣고나선 자신이 말을 잘못했다며 신순성에게 사과했다.
- 귀스타브 페이외르
실존인물로,[90] 1부 78화 시점에 프랑스에서 대한제국으로 파견한 군인이다. 삼청동 병기창에서 러시아 기술자 우렘노프와 함께 고문으로써 업무를 총괄한다. 병기창 생산분 야포들을 검수하고 척탄통 개발에 방향을 조언한 것도 이 인물. 극동 전쟁에서는 프랑스군 소속인 자신의 신분을 이용해 일본군이 삼청동 병기창에 손을 대는 것을 막았고, 이 공으로 훈위 서성대수장을 수여받는다.
7. 독일 제국 → 바이마르 공화국
'전술적'인 면에서는 명실상부 유럽 최강이자 김시혁도 승패를 장담하지 못하는 유일한 국가. 본작에서는 흔히 악의 제국 이미지 때문에 실제 역량보다 과대평가되는 나치 독일군보다 군축 후유증을 겪지 않았고, 처음부터 총력전으로 달려드는 열강들을 양면으로 맞상대한 제2제국 독일군이 전술적으로 훨씬 뛰어난 군대라는 점이 강조된다.주도적으로 공세에 임하는 상황이건, 기습을 받아 밀리는 상황이건 가리지 않고 기존의 적들과는 차원이 다른 움직임을 보여준다. 이런 독일군의 가장 큰 특징은 '전쟁은 과학'이라는 명제 아래 진행되는 지독할 정도의 통계, 자료 수집과 이에 기반한 분석. 야구에 비유하면 철저한 데이터 야구를 추구하는 팀이라고 표현된다.
극동전쟁 때 한국군을 상대한 일본군이 교환비 6:1로 열세였고, 렘베르크 방면에서 교전한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이 10:1로 밀린데 반해 마녀의 숲 전투까지 2.5:1에서 많이 잡으면 4:1 가량으로 한 세대 앞선 선진 군대인 한국군 상대로 가장 준수한 교환비를 내며 선전했었다. 브루실로프 공세가 종료된 시점에 최종 교환비는 대략 7:1. 독자들이 보급도 간당간당한데 이놈들을 대체 어떻게 이기냐고 질려 했을 정도로 철두철미한 전쟁기계의 면모를 보여주었으나 결국 통계와 자료 수집에 의존하는 방식의 맹점을 극복하지 못해 허를 찔린다.
예를 들어 장갑차를 따로 운용해본 적이 없는 상태로, 러시아군의 장갑차 대대를 넘겨받은 한국군이 당연히 러시아의 장갑차 운용 독트린에 따라 대단위 부대를 딸릴 것이라 여겼으나 정작 김시혁은 1개 장갑차 중대에 강습보병 1개 중대만 붙이는 바람에 한국군 예비대 계산이 완전히 틀려버렸고 프랑스 교관들에게 배우고, 프랑스제 야포를 사용하는 한국군 포병대가 프랑스식 평사포, 곡사포 혼성 운용을 할 것이라 여겼으나 한국군 포병대는 곡사포로 통일된 상태라 일방적으로 밀린 끝에 곡사포를 대거 망실하고 만다.
작품이 진행되면 될수록 '전투만 잘할 뿐 전쟁은 못 하는' 독일의 고질적인 문제점도 드러나고 있다. 2차대전까지 독일군을 비판할 때 흔히 거론되는 '킬딸충' 성향은 물론 북독일 프로이센의 남독일(바이에른, 바덴뷔르템베르크)을 향한 은근하고 치졸한 차별,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죄다 징고이스트 소굴에 내각과는 아예 다른 나라에 가까운 군부 등등.
1910년대 독일답게 한국군을 바라보는 시선이나 언사에서 인종적인 편견이 굉장히 심하게 드러나는데,[91] 그것과 별개로 지휘는 굉장히 신중하고 정석적으로, 떠올릴 수 있는 최선의 수단을 강구하는 것도 특징이다. 전자는 시대상 고증이며 동서양 군대의 대결을 그린 대역물에서 일반적인 전개이나 후자 쪽, 그럼에도 허술하게 대응하지 않고 최대한 한국군의 의중을 따라가고, 위협적인 상황도 연출하는 것은 기존 대역물에서 보이지 않았던 전개 방식이다.[92]
전쟁 종결 당시와 전후 융커들이 보이는 태도가 하도 심각해서 사실 진정한 배후중상은 융커 놈들 아니냐고 독자들에게 쌍욕을 먹고 있다.
7.1. 황실
- 빌헬름 2세
독일 제국의 카이저. 1부에서는 강종의 요청을 받아 1901년 대타협을 위한 협상 때 독일 대표단을 파견한다. 이후 극동전쟁이 터졌을 때는 대한제국이 완전히 함경도로 밀리기 전까지는 군수품을 지원해 주기도 했다. 이후 2부 시점에서는 이러한 호의에도 대한제국이 자신을 배신했다며 길길이 날뛰다가[93] 치머만의 보고서를 보고 일본과 중국에 대한제국을 공격해 달라는 전보를 보낼 계획을 하게 된다.
사실 이것도 말이 안 되는 게 우선 중국은 호국전쟁 중이라 여력도 없는 데다 우세를 보이고 있는 호법군의 수뇌부는 대한에게 지원을 받은지라 굳이 독일의 말에 휘둘릴 이유도 없다. 칭다오라도 있었다면 모를까 이 시기 칭다오는 이미 일본에 장악되었으니 독일이 직접 외압을 넣을 방법도 없다. 일본은 대한제국에 대한 적개심은 확실하지만 이미 러시아의 관동주 매각 떡밥에 혹해서 자국군용 소총까지 탈탈 털어 지원한 지라 여력도 없고 무엇보다 독일의 적국인 영국과 동맹이다. 즉, 대한제국 공격은커녕 이 전보를 고스란히 영국에 넘기지만 않아도 다행일 지경이다.
갈리치아의 패전 소식을 듣고 거의 졸도할 뻔했다가 팔켄하인과 독대했으며 너무 큰 패배를 당한지라 당장은 구심점이 필요해 팔켄하인을 한동안 유임시켰으나 결국 해임하고 개인적으로 탐탁찮아 하는 힌덴부르크로 교체한다. 황화론에 심취한 사람이라 한국군에게 번번히 패하는 상황을 수용하는 태도가 군부나 내각과는 차이가 있다. 종전협상을 두고 군부와 내각이 부딪치는 가운데 독감에 감염된 채로 아미앵 전투에서 생환한 장병들에게 훈장 수여 행사를 강행했다 원역보다 몇 달 빨리 독감에 감염되어 중태에 빠진다. 정신적으로 쇠약해진 탓이었는지 가볍게 앓고 회복했던 원역보다 훨씬 심하게 앓아 혼수상태에 빠졌고 그 사이에 힌덴부르크가 주도한 군부의 쿠데타와 아라스 방면 공세가 발생한다.
독감에서는 회복되었으나 권력을 빼앗기고 유폐된 상태인 건 변하지 않았고 외부에 힌덴부르크의 술책임을 알리기 위해 의도적으로 건강한 모습을 노출시킨다. 린징겐과 젝트가 주도한 역 쿠데타로 연금 상태에선 벗어나나 군과 각료들에게 만사를 일임하는 무기력한 모습을 보인다. 원래 역사보다 4개월가량 빠른 1918년 7월 12일 새벽자로 퇴위하고 공화국이 출범한다.
7.2. 군부
7.2.1. 육군
- 에리히 폰 팔켄하인
아시아에서 근무했던 것을 반영해 대한제국군 훈련 참관을 위해 교주만에서 파견을 왔다가 포슈와 신경전을 벌이게 된다. 이후 김시혁에게 나름 조언을 해주면서 극동에 관련해 놀라운 식견을 보여주기도 한다. 2부 시점에서는 원역사대로 독일군 참모총장으로 서부 전선을 담당한다. 동부전선에 한국군이 참전했다는 소식에 인종적 편견에 젖어 무시한 참모들과 달리 바짝 경계하며 동부전선의 힌덴부르크에게 각별히 주의하란 전갈을 보낸다. 김시혁과 만난 시간은 짧았으나 그 능력을 즉시 간파했고 10년이 더 지난 시점에도 기억하고 있었는데 인종적 편견에 젖은 서양 지휘관이 신생 동양 군대를 무시하는 클리셰가 일반적이었던 지금까지의 대역물들을 생각하면 놀라운 묘사. 문제는 그가 동부전선을 책임진 힌덴부르크와 사이가 몹시 나쁘다는 점이었고 실제 힌덴부르크는 그 전갈에 너나 잘하세요라고 답을 해버리며[94] 팔켄하인을 피꺼솟하게 만든다.
원래는 베르됭 공세 실패 이후 참모총장직에서 잘려야 했지만, 한국군의 개입으로 훨씬 크고 빠르게 독일군의 패전이 유력해지면서 오히려 유임되었다. 그가 주도한 서부전선에서 패배가 확정되기 전에 동부에서 일이 틀어졌고,[95] 그게 너무 치명타라 함부로 장수를 바꿀 수도 없었기 때문.
하지만 이후 니벨 공세에도 프랑스가 꺾이지 않고 반격하는 상황 속에서 결국 해임되었고 원 역사대로 오스만 제국에 파견되었다고 힌덴부르크에 의해 언급된다.
- 파울 폰 힌덴부르크
원 역사에서 1차대전 당시 동부전선에서 복무했고 이후 참모총장을 거쳐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 대통령까지 오르는 인물. 여차하면 내각을 협박하고 황제를 압박하는 짓도 서습치 않는 철저한 군국주의자라 빌헬름 2세와는 불편한 관계.
첫 등장은 동부전선의 한국군을 신경쓰라는 팔켄하인의 전언에 너나 잘하라며 일침을 놓는 장면이었으며 이후 코벨 전투에서 본격적으로 등장한다. 렘베르크 점령 이후에도 한국군을 무시하고 있었으며 그에 따라 러시아군만 분석해놓은 상태였는데 정작 한국군이 예상을 깨고 코벨로 진격해오자 상당히 당황하며 뒤늦게 한국군 분석 자료를 찾지만 당연하게도 한국군을 동양의 야만인이라며 무시한 독일 제국에 그런 게 있을 리 없었고[96][97] 자신들이 패배할 가능성이 생겼다는 사실에 조금이나마 흔들리는 모습을 보인다.
그래도 쿠로팟킨을 잘 밀어붙이며 리가와 빌뉴스까지 올라갔지만 갈리치아에서 털린 탓에 철수 명령이 떨어져 분노하지만 철수의 필요성은 알고 있던 덕에 진정한다. 다만 OHL의 명대로 동프로이센까지 철수했다간 팔켄하인에게 자신이 잘리는 게 뻔한지라 순순히 명령을 듣지 않고 메멜-카우나스 선에 방어선을 구축한다.
이후 비스와 강의 기적 때 다시금 나르바까지 진격하지만 코벨에서 패배하는 바람에 눈물을 머금고 다시 메멜-카우나스 선으로 철수한다. 혁명이 일어난 러시아의 단독 강화로 동부전선이 정리되고, 팔켄하인이 실각하자 그의 뒤를 이어 참모총장이 되며 OHL을 이끌고 서부 전선을 총괄하는 위치에 서게 된다. 2차 파스샹달 전투와 말메종 요새 함락으로 불리한 상황에서 카포레토 공세를 기획해 대승을 거두고 북이탈리아와 남프랑스를 위협, 협상국을 패전의 공포로 몰아넣는다. 루덴도르프와 함께 미카엘 작전을 입안해 진행시키나 또 다시 한국군에게 저지당하자 이판사판이란 심정으로 28개 사단을 추가로 증원했으나 김시혁과 포슈를 넘지 못 한다.
미카엘 공세 실패로 패전이 확정된 상태에서도 외교적 해결을 중시하는 의원, 관료들을 비난하며 동부에 배치된 병력를 데려와 영국군을 격파하면 유리한 상황에서 종전을 맞이할 수 있다는 고집을 부려 충돌한다. 빌헬름 2세가 감염으로 사경을 헤매는 사이 베를린에도 창궐한 아미앵 역병을 차단한다는 구실로 라이히스탁과 내각을 억류하고 베를린 전역을 봉쇄하는 군사 쿠데타를 자행한다. 권력을 틀어진 채 아라스 공세를 밀어붙이나 한국군의 역습으로 사흘 만에 좌절된다. 동부전선에서 온 예비대와 안트베르펜에서 방어선을 구축하던 부대까지 전부 판돈으로 던저버려 지크프리트선에서 틀어박히는 것조차 불가능해진 상황에서 해군을 동원해 로열 네이비를 밀어내고 템즈강을 기습하자는 몽상적인 주장들을 늘어놓는다.
해군의 반란을 틈타 일으킨 린싱겐과 젝트의 역 쿠데타로 수세에 몰리자 협상을 통해 자신을 따르는 병력을 데리고 베를린에서 퇴각한다. 퇴각하면서 무기고를 전부 개방해 소요 사태를 배가시켰다.
- 에리히 루덴도르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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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프레트 폰 발더제
의화단 운동 당시 연합군 총사령관으로 등장하며 이후 1901년 대타협 때도 독일 측 대표로 참석한다.
- 한스 폰 젝트
2부 시점에서 동부전선에서 싸우다가 잠시 에리히 폰 팔켄하인에게 와서 대책 회의에 참석해 렘베르크와 슈타니슬라우를 포기하는 대신 코벨에 모든 것을 집중해 야전을 벌이자는 한편 슬슬 오헝군의 지휘권도 가져오자는 의견을 개제한다. 그 뒤 팔켄하인의 지시하에 오헝 제3야전군 지휘권을 인수해 코벨에 도착하고 비참하게 패배한 전우들을 맞이한다. 이후 린징겐을 보좌해 비스와 강의 기적을 이끄나 코벨에서 다시 한국군에게 참패해 고배를 마신다. 패전에 책임을 질 위치가 아니었기에 서부전선으로 옮겨와 루덴도르프를 보좌해 미카엘 공세에 참여한다. 프랑스군의 움직임을 제때 파악하지 못하고 가용할 수 있는 모든 부대를 아미앵으로 이어진 좁은 종심에 집중시키는 루덴도르프에게 포위 섬멸 가능성을 경고하나 차마 공세를 중단해야 한다는 말은 하지 못한다. 동부전선에서부터 한국군의 쓴맛을 단단히 본지라 아미앵 때도, 이어진 아라스 공세 때도 거듭 신중할 것을 주장하나 받아들여지지 못했고 실성한 루덴도르프가 실려간 뒤 대장으로 진급해 그를 대리해 서부전선을 총괄하게 되나 최후의 예비대까지 다 소진한 상태에서 등판한 그에겐 물러서는 것 외에 선택지가 없었다.
잠시 본국으로 돌아가 있다 린징겐의 역 쿠데타에 합류해 핵심 브레인 역할을 했고 이후로도 주도 면밀하게 움직이며 사민당을 중심으로 한 민간 정치인들에게 패전 책임을 떠넘기고 군부 조직을 유지할 계략을 꾸민다. 게르만 민족의 국가인 독일에는 충성하나 정부에 충성할 의사는 처음부터 없는 인물. 이후 카프 폭동에서 린징겐과 노스케에게 지원을 부탁받지만 정치적 중립을 핑계로 거절한다.[98] 하지만 속내는 정부 관료들과 자유군단, 철모단이 군을 거스르지 못하게 하려는 수작이며 결정적인 순간 군이 일을 해결하려는 모습을 보여 독일인의 지지를 얻으려 하고 있다. 이후 베를린의 주요 정부 청사가 자유군단에게 점령당하자 열차를 보내줘 주요 정부 관료들을 대피시켜 준다. 이후 프랑스가 한국, 벨기에, 폴란드 군사들을 끌어들여 카프 폭동을 진압하려 하자 도움을 요청하는 카프와 뤼트비츠에게 대통령 명령 없이는 군을 움직일 수 없다고 거절한다.[99] 이후 프랑스가 이끄는 협상국 군대가 통과하도록 하라는 대통령의 명령을 수행할 것 임을 알리며 살고 싶으면 도망이나 치라고 카프와 뤼트비츠를 조롱한다. 이후 부하들에게 대통령과 내각 인사들의 신병을 한국군에게 넘기라고 지시를 내린다.
본작에서 가장 독자들의 평판이 나쁜 인물 중에 한 명으로, 특히 전간기에 보인 행패가 전형적인 군벌의 그것이라서 대숙청을 당했어야 했다, 이러니까 나치가 친위대를 만들었다고 대차게 까이고 있다. 젝트의 이런 행태가 고증이라서 더 기가 막힌다는 평.
- 알렉산더 폰 린징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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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막스 호프만
탄넨부르크 전투와 마수리안 전투를 승리로 이끈 독일 제일의 참모장교. 힌덴부르크가 원할한 작전 지휘를 위해 부크강 집단군에 파견한 두 참모 중 한 명. 한국군의 배치 상황을 전부 파악하지 못해 고민하는 린싱겐 상급대장에게 그들의 배치는 몰라도 전체 규모는 잘 알고 있음을 지적하며 2개 군단을 동원, 부크강과 볼로디미르 사이의 숲 지대 전체에서 압도적인 수적 우위로 한국군을 압박하자는 작전을 제시한다.[100] 보급난과 수적 열세에 고민하는 한국군의 맹점을 날카롭게 찌르는 작전이었으나, 한국군이 원래 장갑차를 운용하지 않다보니 사전에 정보를 얻을 방법이 없었던 한국군의 장갑차 대대 운용 방식과 독일군보다 압도적인 한국군 보병 화력을 잘못 판단해 한국군에 예비대가 소수만 남기고 모두 동원되었다고 판단하는 우를 저지르고 만다. 이후 41군단이 전멸 직전에 놓이자 지금이라도 코벨로 퇴각해야 한다 주장하지만 린징겐에게 컷 당한다. 동부전선이 마무리된 후 젝트, 부르흐뮐러와 함께 서부전선으로 옮겨가 루덴도르프를 보좌하다 미카엘 공세가 김시혁과 포슈에게 뒤집히는 순간을 목도한다.
- 게오르크 부르흐뮐러
독일 제2제국에서 가장 뛰어난 포병지휘관이자 허리케인 포격의 창시자. 힌덴부르크가 부크강 집단군에 파견한 두 참모 중 한 명. 호프만의 작전을 실행하기 앞서 독일군의 포병 숫자와 조직 체계가 한국군에 비해 열세함을 지적하고 중포와 경량 보병포로 나뉜 전체 포병을 통제하고 조율할 수 있는 조직체계를 구성이 선행되어야 함을 지적한다.
상급대장인 자신 앞에서 영관급 장교가 당당히 자신의 견해를 피력한 그를 높이 산 린싱겐은 임시 대령 지위와 집단군 내 모든 포병 자산을 맡기며 통합된 포병지휘부 구성을 명령하고 부르흐 뮐러는 단 12시간 내에 이를 해내는 수완을 발휘한다.
그러나 당연히 프랑스의 영향을 받아 평사포와 곡사포를 혼성 운용할 줄 알았던 한국군 포병대는 포병이 전장의 주력이라는 독트린에 따라 지형 극복 능력이 빼어난 곡사포로 통일된 상태였고, 급조된 독일군 포병은 압도적인 포병 조직력 차이로 말미암아 얼마 안 되는 귀중한 곡사포를 대거 소실하고 만다. 그런 상황에서도 전의를 불태우며 한 번 붙어보려 하지만 한국군 예비대 규모 계산을 잘못한 시점서 이미 망한 전투라... 참패 이후에도 계속 독일 포병의 발전을 이끌며 미카엘 공세 때도 포병 총지휘관으로 참여한다. 한국군이 선보인 색채 교리와 이동 탄막 사격에 자신이 구상한 허리케인 포격까지 융합해 포연탄우를 퍼부으나 영국군의 파괴 행각과 독일의 열악한 운송 수단 문제로 중포들을 동원하지 못해 협상국 중포 사거리 안에서 싸우다 화학탄 일격을 얻어맞고 주춤한다. 일시적으로 물러났다 병력을 수습한 뒤에는 어담이 이끄는 협상국 포병대와 물고 물리는 격전을 벌였으나 끝내 패배. 중포와 공성용 포탄을 거의 망실한다.
- 한스 폰 그로나우
부크강 집단군 예하 41군단 군단장. 41군단을 이끌고 한국군과 러시아군의 지경선을 파고들어 돌파구를 형성한 뒤 포위 섬멸하라는 지시를 받는다. 한국군의 예비대가 거의 다 소진되었으며 남아있다 해도 1개 사단 내지 여단일 것이라는 게 집단군 지휘부에서 전달받은 결론이었고 그런 상황에서도 신중하게 공세를 시작해 사보타주와 침투는 성공적으로 수행했고 때마침 만난 한국군 보급부대를 반쯤 섬멸하는 성과도 낸다.
소위 '킬딸'에 집착하는 독일군의 병폐를 부정하는 행보를 쭉 보여주는 데 노보폴린스크를 찔러 보라는 윗선의 지시에 윗선의 지시보다 더 적은 1개 중대만 파견해 정말 탐색만 했고, 추격에 신이 난 울란들에게 적당히 하고 빠져서 군단 예비대로 전환하라는 지시를 내릴 정도로 정석적인 지휘를 했다. 그러나 한국군의 예비대 규모를 완전히 잘못 판단하고 있었고 이로 인해 군단 예비대 격인 11 사단은 한국군 방면엔 1개 대대만 둔 채 러시아 쪽에 집중하고, 그로나우 본인은 81, 82 사단으로 수도사단을 무너뜨리는 데 전력을 집중하고 있었다.
11사단이 괴멸하고 퇴각이 불허당하자 포위 당하기 전에 뚫고 나가기 위해 예비대까지 총동원한 공세를 시작하나 조금 더 빠르고, 압도적으로 유연했던 수도사단의 공세에 무너진다.
이후 러시아군에 포로로 잡혀 정중히 대우받다가 김시혁과 만나 당시 전황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다. 한국군이 귀환할 때 다른 포로들과 함께 한국으로 넘어왔고 이들을 통해 본인 위신을 세우려는 강종의 의중으로 좋은 대우를 받으며 유유자적하게 보낸다.[101]
- 게오르크 폰 데어 마르비츠
독일 제2군 사령관. 미하엘 공세 때 영국군 5군을 거의 괴멸시켰다. 이후 식량창고를 장악하자 병사들이 배를 채우고 사기를 높일 수 있도록 식량을 가져가 먹어치우는 것을 그대로 둔다. 루덴도르프의 공세 계속 지시에 피해를 감수하고 좁은 종심에 병력을 밀어 넣다 한국군 측의 반격 소식에 무언가 꺼림칙함을 알아차리고 전령 장교에게 거듭 물어 부대들이 엉망으로 뒤엉켜 제대로 싸우기도 전에 와해되고 있다는 사실을 파악한다. 김시혁의 작전에 완벽히 말려들었음을 깨달았지만 주력 병력을 최대한 수습하며 후방에 지원을 요청하는 것 외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페론에서 협상국 군대에 완전히 포위당하자 최소한 백인 군대에 투항하려 했으나 프랑스군도 영국군도 심지어 미군조차 접수를 거부해 한국군에 항복한다.
- 리하르트 폰 콘타
독일 4예비군단장. 44예비보병사단이 아미앵을 점령한 줄 알고 여유를 부리고 있었으나, 곧 한국군에 의해 아군이 밀리고 군단 지휘부까지 공세를 받게 되자 당황한다.
- 알프레드 폰 라리쉬
독일 54군단장. 빠른 아미앵 점령을 위해 인해전술을 써야 하는 현실을 개탄하면서도 군인답게 희생하려 한다. 그래도 한국군이 이미 사용한 전술에 또 당하는 일은 없을 거라 생각하지만...
- 오토 폰 셰르닝
OHL 의료국 총감. 힌덴부르크에게 독감이 퍼지고 있는 문제와 빌헬름 2세의 건강 상태에 대해 보고한다. 힌덴부르크가 독감 방역을 핑계로 쿠데타를 일으키자 이것이 옳은 일인지 의문을 가지지만 협조하며 빌헬름 2세와 접촉한 내각 관료들과 의원들을 격리시킨다는 명목으로 병영에 구금한다.
- 파울 폰 크노이슬
41군단 예하 제11 바이에른 보병사단장. 소칼의 러시아 시베리아 군단과 노보폴린스크의 한국군 사이를 차단해 보급선을 차단하는 역할을 맡아 수행한다.
이후 수색중대의 보고를 받고 노보폴린스크의 한국군 병력이 기만책을 쓴다고 판단하며 한국군 방면에 1개 대대만 방어선을 지키게 한 뒤 주력을 소칼의 러시아군 쪽에 배치했으나 한국군에겐 예비대가 남아 있었고 더군다나 그 예비대가 압도적인 기동력과 훈련도에 기동포병까지 운용하는 강습여단이라 아무런 대비도 못 한 상황에서 일방적으로 찢기고 겨우 2시간 만에 22연대와 사단 지휘부가 괴멸 당하자 멘탈이 박살 나 내 사단을 돌려내라 울부짖다 낙하하는 적의 포탄을 바라보며 모든 걸 놓아 버린다.
- 오토 하스
독일 44예비보병사단장. 한국군 신속대응부대가 버티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 채 아미앵 점령을 위해 접근했다가 한국군 기갑과 포병에게 사단이 와해된다. 린징겐처럼 살 수는 없다며 부하들만 후퇴시킨 뒤 자결한다.
- 빌헬름 폰 그로덱
독일 208예비보병사단장. 아라스 방면에서 대치하던 17군단의 선두에 있다가 갑자기 아미앵으로 이동하라는 명령을 받는다. 너무 급하게 내려온 명령에 제대로 준비할 시간도 없이 부랴부랴 이동하던 중 캐나다 기병여단의 기습을 당해 사단의 허리가 끊어진다.[102] 17군단 후위의 부대들이 포위망을 피해 달아날 때 바폼므를 차단하려는 영국 2, 3군의 맹공에 노출되었고 결국 항복하고 만다.
- 발터 폰 뤼트비츠
바이마르 공화국 베를린 군구 사령관이지만 실제로는 카프 폭동의 배후로 에어하르트 해병여단을 압세워 베를린의 주요 정부 청사를 점령한다. 이후 프랑스가 이끄는 협상국이 폭동을 진압하러 오자 젝트에게 군의 지원을 부탁하지만 젝트가 대통령 명령 없이는 군을 움직일 수 없다는 말과 함께 도와줄 생각이 전혀 없는 모습을 보이자 분노하며 결국 카프와 함께 국경 밖으로 도주한다.
- 프란츠 할더
41군단 참모부 소속 소령으로 등장. 41군단 예하 81, 82 사단이 한국군 수도사단과 격돌한 사이 한국군과 러시아군 지경선으로 침투하는데 성공한 제11 바이에른 보병사단으로 한국군 보급기지인 노보플린스크를 점령하자는 의견을 제시한다. 11사단을 소모전의 끝에 생성된 돌파구로 밀어 넣어 마지막 창날로 쓰려던 군단장 그로나우는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나 할더는 다소의 피해를 감소하고라도 적의 보급 중심지를 무너뜨려야 작전이 수월해질 것이란 의견을 굽히지 않는다.
한국군 강습여단의 공세에 궤멸당한 11사단 본부와 전신이 끊어지자 한국군에게 아직 예비대가 남아 있었을 가능성을 예리하게 지적하고 본부에서 예비대를 차출해 보내야 함을 역설해 관철시킨다. 울란 대대 일부를 차출해 11사단 방면으로 보내라는 군단장 그로나우의 지시를 독단적으로 변경해 울란 대대 전체를 11사단 쪽으로 보내고 남은 예비대인 예거 대대와 용기병 대대에도 출동 대기 명령을 내린다. 그러나 결국 한국군에게 패전하며 러시아군에게 포로로 잡힌다. 이후 그로나우와 함께 김시혁을 만나 당시 전황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다.
- 그라이프 대위
독일기갑기계화분견대 지휘관. A7V를 이끌며 한국군과 전투를 벌이나 김홍일의 소대에 측면 공격으로 인해 밀리기 시작한다. 아미앵 공세가 돈좌되고 제때 퇴각하지 못하고 포로로 잡혀 프랑스군에 A7V에 대해 진술한다.
- 아돌프 히틀러빌어먹을 유대인 놈이 이 전쟁을 처음부터 망쳤어. 스스로는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기생충 같은 족속들이, 제 분수에 맞지도 않는 장군 자리에 올라서 감언이설로 제국을 망하게 만들었겠지. 무슨 일이 있어도 그 유대인 놈들에게 알맞은 징벌을 해줄 테다. 어떻게든 살아남아서....
미카엘 공세가 돈좌되고 영국 2, 3군의 반격에 으스러지던 제16 바이에른 예비보병연대 소속 상병으로 등장. 전령 임무를 부여받고 포탄이 쏟아지는 전쟁터를 뛰어다니며 패전의 원인은 린싱겐을 비롯한 유대인에게 있으며 이들을 절대 살려두지 않겠다며 증오를 불태운다. 협상국의 대공세가 시작되던 시점까지 살아남았고 대한군이 아르덴을 돌파해 거대한 낫질을 시작할 땐 16연대 잔족 병력 100여 명과 함께 정처 없이 퇴각 중이었다.
전령으로 지휘부를 오가며 지도를 눈에 익혔다는 점을 어필해 길잡이 역할을 해 처음으로 우두머리 노릇을 해서 잔뜩 고무된 차에 열등인종인 황인종에게 항복할 수 없다며 한밤중에 이동을 강행하다 이범석이 소속된 기갑수색대의 아가리 속으로 들어가 버린다. 항복은 안 된다며 맨몸으로 달려들다 급양반장이 무심코 휘두른 국자에 머리를 맞고 기절해 그대로 생포. 진격에 바빴던 수색대는 후속 병력에게 알아서 투항하려며 건빵과 모포만 던져주고 가버렸는데 후속 부대들도 진격해야 한다며 계속 거절해 무려 5번의 퇴짜 끝에 포로수용소에 들어갈 수 있었다.
독가스에 노출되어 후송되어간 원 역사보다 훨씬 추하고 맥빠지는 종전을 맞았다. 열등인종이 준 음식은 먹을 수 없다며 질질 짜다 하사가 억지로 입에 넣어준 건빵을 열심히 씹는 모습이 백미. 원 역사 헨리 텐디의 전설은 히틀러를 포로로 잡고도 사살하지 않은 이범석과 1사단 수색대의 것으로 바뀌게 되었다.[103]
종전 이후 옛 전우들이 다수 몸담고 있던 뮌헨의 2보병연대에 투신해 사민-공산 정부를 위한 질서 유지 활동을 한다. 전쟁 때부터 드러내던 인정 욕구를 채우기 위해 무척 열성적으로 임해 바이에른주의 공산당원들로부터 칭찬을 받기도 했다. 카프 폭동을 일으킨 자유군단과 철모단이 정부를 전복시키자 2보병연대는 졸지에 빨갱이 부대로 낙인찍혀 해산당하고 히틀러도 죽을 뻔 하지만 자유군단에 속해 있던 옛 중대장의 도움으로 간신히 목숨을 건진다. 이후로는 자유군단 소속이 되어 같은 편이었던 사민-공산당 탄압에 열정적으로 임해 '한때 잘못된 길에 들었던 빨갱이지만, 이제는 독일을 위한 진정한 투사'라는 호평을 받으며 1920년 2월까지 일했다. 그러나 1920년 3월, 한국군이 뮌헨으로 진입하고 젝트의 방관 속에 감히 교전할 엄두를 못 낸 자유군단은 무장해제 당한다. 두 번 이나 유색인종의 포로가 되었다는 사실에 치욕스러워 하며 자신을 도구로 쓰다 버린 공화국, 군부, 융커를 대한 복수를 다짐한다.
7.2.2. 해군
- 헤닝 폰 홀첸도르프
독일 해군참모총장이었으나, 템스강 유역을 포격하여 영국을 위협해 평화협상에서 유리한 지점을 점거하라는 힌덴부르크의 무리한 명령을 거부했다가 건강 악화를 핑계로 강제로 물러난다.
- 라인하르트 셰어
홀첸도르프 후임 독일 해군참모총장. 힌덴부르크가 템스강을 습격하고 영국군을 공격하라는 지시를 내리자 석탄 부족을 이유로 거절했지만, 힌덴부르크가 계속 억지를 부리며 자신의 말만 하고 나가자 분노한다. 이후 남은 린싱겐과 젝트에게 사실 빌헬름 2세가 건강이 회복되었고, 힌덴부르크가 억지로 전쟁을 계속하고 있다는 사실을 듣게 되자 내가 무엇을 도우면 되겠냐고 물으며 역쿠데타에 참여해 힌덴부르크를 몰아낸다.
- 프란츠 폰 히퍼
빌헬름스하펜 대양함대 지휘관. 힌덴부르크의 템스강을 습격하려는 무리한 명령이 내려오자 OHL이 갈 때까지 가버렸다고 한탄하지만 그래도 실행하려 한다. 그러나 결국 불만을 품은 수병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놀라 기함으로 가려 하지만, 위험하다는 이유로 레더에게 만류된다. 그나마 빌헬름스하펜의 반란은 3시간 만에 진압한다.
- 에리히 레더
히퍼의 부관. 수병들의 반란이 일어나자 기함으로 가려는 히퍼를 위험하다고 만류하고 진압을 위해 지원군을 요청할 것을 건의한다.
7.3. 정치인/관료
- 게오르크 폰 헤르틀링
1917년 시점 독일 총리. 힌덴부르크가 일으킨 쿠데타에 의해 구금된다.
- 알프레트 폰 티르피츠
해군 출신 독일 조국당 당수로, 해군의 반란으로 인한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 임시 총리에 오르며 협상국과 종전 협상을 한다.
- 고틀립 폰 야코프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의 외무장관. 치머만이 중일과 멕시코에 각각 전보를 보내자 이를 우려한다.
- 아르투어 치머만
원래 역사대로 치머만 전보 사건을 벌인다. 그것도 중일과 멕시코 양쪽으로. 우려를 표하는 야고프 장관에게 중일과 한국을 이간시켜 철수를 유도하는 계략이며 미군은 정예 병력이 2만에 불과하니 신경 쓸 필요도 없고 설사 참전하다 쳐도 편성과 파병에 최소 6개월에서 1년이 걸릴 테니 무제한 잠수함 작전으로 충분히 견제가 가능하다며 큰소리를 빵빵 친다.
- 프리드리히 에베르트
바이마르 공화국 초대 대통령. 원역사처럼 카프 폭동을 겪게 되며 정규군들이 정치적 중립을 핑계로 이들을 막지 않으려 하자 골치 아파한다. 결국 자유군단 최고 정예 부대인 에어하르트 해병여단이 베를린에 진입하자 젝트가 준비한 열차를 타고 피신한다. 이후 젝트에 의해 대한제국군에게 다른 내각 관료들과 함께 신병이 확보된다.
- 구스타프 노스케
바이마르 공화국 국방장관. 군이 자신의 말을 듣지 않고 공화국을 뒤집으려 하자 괴로워 한다. 린징겐과 함께 젝트에게 가서 카프 폭동을 진압해 줄 것을 요청했지만 거절당하자 그에게 분노한다.
- 볼프강 카프
원역사처럼 카프 폭동을 일으키며 에어하르트 해병여단을 압세워 베를린의 주요 정부 청사들을 점령하며 총리를 칭한다. 이후 프랑스가 대한제국, 벨기에, 폴란드에서 군을 동원해 폭동을 진압하러 오자 젝트에게 가서 군의 지원을 부탁하지만 젝트가 대통령 명령 없이는 군을 움직일 수 없다고 거절하며 도와줄 생각이 없는 모습을 보이자 총리 직도 주겠다며 애원했지만 도망이나 치라는 조롱을 듣는다. 결국 어쩔 수 없이 뤼트비츠와 함께 국경 밖으로 도주한다.
- 콘라트 아데나워
한국군이 아헨을 함락시킬 때 아헨 시장의 설득으로 1차대전 종전 직전에 항복한 쾰른 시장으로 언급된다.
- 로자 룩셈부르크
독일 공산당의 당수로 원역사와 달리 1919년에 살해당하지 않았다. 카프 폭동이 일어나자 한국의 3월 혁명처럼 이들과 맞서 싸우려 했지만 역부족이었고 이후 베를린의 주요 정부 청사들이 점령당하자 도피한다.
7.4. 기타
- 파울 요제프 괴벨스
쾰른의 대한제국 군정사령부에서 근무하는 군속으로 등장. 능숙한 회계 실력으로 빠르게 승진해 군정사령부의 회계업무 총괄 겸 독일인 군속 50여명을 통솔하는 위치에 올랐다. 처음에는 동양인에 대한 인종적 편견에서 자유롭지 못했으나 장애 대신 능력을 보고 우대해주며 꼬박꼬박 박사라고 불러주는 친숙한 태도에[104] 금방 친해지고 경제 사정도 원 역사보다 윤택해진다. 공산당, 사민당, 자유군단 모두 조국을 사랑하는 애국자임은 같다고 생각해서 조국의 내전과 분열을 진심으로 안타깝게 생각하며 폴란드계 유대인이며 자신과 같은 절름발이에 여자라는 핸디캡에도 당당하게 투쟁하는 로자 룩셈부르크에 존경심을 갖고 있다.[105] 카프 폭동을 피해 쾰른으로 피신해온 사민당-공산당 간부들의 숙소와 생필품을 지원해달란 지시를 받아 수행한다. 라인란트 폭동 당시 히틀러와 반대되는 모습을 보인 데다, 특히 한국군과 관련한 관점이 다르다는 점이 강조되면서 본작에서는 원 역사와 달리 히틀러와 척 치는 게 아니냐는 설이 제기되고 있다.[106]
8. 미합중국
1부에서는 큰 비중이 없었고 2부에서부터 비중이 증가한다. 잠재력과 머릿수는 어마어마하지만 오합지졸 당나라 군대였던 1차 대전기 미군의 실태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107]역사 개변의 나비효과로 2부부터 미국 자본가들이 대한제국을 통해 동아시아~동남아시아 시장 개척을 적극적으로 하고 있었는데, 2부 외전에서 고립주의로의 회귀를 표방한 하딩 시절에도 미국 자본가들과 대중들은 "고립주의는 고립주의고 시장 개척은 시장 개척이다"라며 적극적으로 시장 개척을 하고 있다고 한다. 영국과 일본은 미국이 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 시장에 진출하는 걸 철저히 막고 있던 반면 대한제국과 프랑스는 미국 자본의 유입에 호의적이라서 서로 적극적으로 협력하고 있는데, 이 때문에 1910~1920년대 미국 자본가들과 대중들은 한국에게 호의적이고 일본에게 적대적이라고 한다.[108] 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와 활발히 무역하는 걸 고려하면 광란의 20년대가 원 역사를 능가하는 규모일 듯. 대공황의 원인 중 하나가 과잉투자라는 점 때문에 원 역사보다 미국의 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 시장의 규모가 훨씬 커진 본작에서는 대공황이 일어나도 원 역사보다 피해가 줄어드는 게 아니냐는 설이 있다.
원 역사와 달리 한프동맹이 동아시아~동남아시아 권역에서 영일동맹의 아시아 권역과 팽팽하게 경쟁 중이라서 경제가 아닌 정치외교적인 측면에서는 둘 사이의 중재를 하는 수준이며, 원 역사와 달리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 시점에서도 영일동맹 해체에 크게 매달리지는 않는다. 그러나 일본의 팽창욕구와 시장 방해, 각종 외교적 결례로 인한 신용도 부족,[109] 2부 외전에서 일본이 한국과 미국에게 동시에 싸움을 걸 거라는 떡밥이 나오면서 원 역사처럼 태평양 전쟁이 일어나는 것이 확실시되고 있다.
8.1. 대통령
- 시어도어 루스벨트
극동전쟁 당시 미국 대통령. 일본의 요청을 받고 포츠머스 회담을 열어 전쟁을 중재했다.
- 우드로 윌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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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워런 G. 하딩
2부 외전 시점 미국 대통령. 원 역사와 달리 허버트 후버를 부통령으로 데리고 당선되었다. 본인 스스로 인정했듯 대통령으론 모자란 사람이었다 보니 부통령 후버가 실세 노릇을 한다. 부통령이 얼굴 마담에 불과했던 20세기 초반임을 감안하면 이례적인 상황. 이 때문에 후대 미국인들이 하딩을 대통령 취급 안 하는 거 아니냐는 말도 있다.
8.2. 정치인/관료
- 허버트 후버
본래 호주쪽 광업 회사에 취업하려고 했으나, 대한제국에서 내세운 조건이 워낙 좋았고, 미지의 세계에서 성공 신화를 써 내려가는 이른바 "프론티어 정신"에 이끌려 고민 끝에 대한제국 국영 광업 회사에 취업을 결정했다. 이후 대한제국의 금광 및 기타 광산들을 기반으로 한 거대한 자본가가 되었으며 극동전쟁기에도 그 막대한 자본으로 대한제국을 서포트한다. 자본을 기반으로 미국 정계에 로비를 하며 친한파 정치인 세력 구성에 한몫을 했다. 일본 역시 한국 광산업을 꽉 쥐고 있는 그를 포섭하려 했으나 지금 나보다 돈 많은 건 한청일 삼국의 지도자들뿐인데 겨우 그 돈으로 나를 포섭하려고 하냐며 쿨하게 무시했다. 2부 시점에서도 사업 규모가 엄청난 것으로 보이는 데 대한제국이 세계에서 손꼽히는 금 생산국으로 각광받으며 독일 제국의 분석에 따르면 대한제국의 금 덕분에 파운드화, 루블화, 프랑화의 붕괴가 유예되고 있다 할 정도니 그 사업 규모를 짐작할 만하다.
1911년 금의환향하여 원역보다 훨씬 빠른 시기에 상원의원이 되었다. 팬덤에서는 후버가 원 역사보다 훨씬 빨리 상원의원이 되었다는 점을 들어 1920년 공화당 경선 때 하딩 대신 선출되어 대통령이 되는 것이 아닌가 추측하고 있다. 1차 대전이 막바지로 접어드는 시점에는 공화당 중진이자 식량청(United States Food Administration)장으로서 미국의 식품 생산, 유통, 소비를 관리하는 막강한 권한을 행사하고 있었다. 이승만의 요청을 수락한 딘스모어 주한 미대사에게 유럽의 한국군을 본국으로 이송할 선박 지원을 요청받고 이를 수락. 일반 상선보다 훨씬 빠르면서 한 번에 1만명 이상을 실어나를 수 있는 화이트 스타 라인의 대형 여객선들을 차출해 김시혁과 구주 원정군이 신속히 귀국할 수 있도록 돕는다.
윌슨이 영국과 손잡고 강종과 근황파를 지원해 대한제국의 내전을 장기화 시키려들자 '입으로는 각국의 자유와 주권을 이야기하면서, 개인의 욕심으로 폭군을 지원하는 자기부정'임을 통렬하게 지적해 윌슨의 계획을 좌절시키는데 큰 몫을 했다. 소련과 국경을 확정짓고 정식 외교관계를 맺은 대한제국으로부터 만주 내 미국 기업들의 이권을 보장하겠다는 밀약을 전달받았다. 미국 정계 제일의 아시아통에 극동 전쟁 때 전쟁터가 된 한국에서 버티며 성공한 부분이 자유와 독립을 지지하는 동시에 충만한 도전정신으로 무장한 성공한 사업가라는, 미국인이 좋아하지 않을 수 없는 인물상을 부여해 시민들의 지지도도 높으며 자기가 운영한 광산 회사에 극동 진출을 노리는 기업체들과 연결 고리까지 탄탄해(정치자금이 풍족해)[110][111] 공화당은 물론 민주당 상하원 의원들과도 우호적인 관계를 형성해 윌슨조차 무시할 수 없는 거물로 부상한다. 여세를 몰아 한국에서 근무해 본 외교관, 기업가 출신 의원들과 한국 클럽을 결성해 친한파 정치인임을 공공연히 하고 미-한 우호 여론을 결집하는 자금을 뿌리고 다닌다. 이것이 기반이 되어 1920년 대선에서 러닝 메이트가 되었고 부통령으로 당선된다.[112] 하딩 대통령이 취임 후 2년 만인 1923년에 세상을 떠나는 걸 생각하면 못해도 6년은 대통령 직무를 수행할 것으로 보인다.[113]
20세기 초반 미국에선 상당히 낯선 실세 부통령으로 워싱턴 군축 회의의 전반적인 조율, 한국과의 막후 회담을 당연하다는듯 도맡아 처리한다. 한국에서 10년 가까이 거주하며 한국어에 능통해서 귀국 10년이 지난 워싱턴 군축 회의 시점에서도 제법 능숙하게 구사하며 길영수, 이승만과의 회담을 진행했다.
- 엘리후 루트
극동전쟁 당시 미국 전쟁장관. 퍼싱이 보낸 보고서를 보고 새뮤얼 영에게 의견을 물어본다.
- 뉴턴 베이커
전쟁성 장관. 유럽 전선에 파견된 관전무관단의 보고를 종합하여 프랑켄슈타인 마피아가 추종하는 한국군의 방식이 단순히 동양 소국에만 적용되는 특수한 사례가 아닌 추후 모든 군대가 추구해야 할 방향임을 지적하며 강력한 군사 개혁을 주장한다.
- 에드워드 M. 하우스
윌슨의 외교고문. 영국의 스파이로 파리 강화회의에서 윌슨이 영국과 일본의 편을 들도록 했다. 이후 한국과 소련의 합의에 광분하는 윌슨을 진정시키며 한국이나 소련이 14개조 평화원칙에 위배될 만한 행동을 하지도 않았고, 어깃장 놓으려 들었다 공화당과 대기업들의 전면공세에 직면할 것임을 지적한다.
- 휴 딘스모어
2부 시점 주한미국대사. 이승만이 강종의 친위쿠데타를 피해 대사관으로 망명을 오자 받아주었으며 김시혁의 구주원정군이 빠르게 귀국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2.27 계엄령 당시 경운궁에 에워싸인 형태로 자리잡은 각국 공사관은 경운궁에서 날아온 유탄과 구조를 요청하며 도망쳐 온 한성부민들, 수시로 난입해 시민들을 잡아가려 드는 헌병 분견대로 혼란 그 자체였는데 가장 수비 병력이 충실했던 프랑스와 미국 공사관이 중심이 되어 입구를 봉쇄하고 도망쳐 온 시민을 보호하며 헌병대에 맞서다 상황을 어느 정도 정리한 의친왕의 방문을 받고 안전을 약속 받으며 한숨을 돌린다. 이때 이승만이 시위대를 이끌기 위해 밖으로 나가려 하자[114] 경비 병력과 함께 이를 막으며 이승만이 계속해서 빠져나가려 하자 아예 한구석에 격리시킨다.
- 찰스 에번스 휴즈
2부 외전 시점 미국 국무장관. 워싱턴 해군 군축회의 미국 대표로 주력함 톤수 배정 첫 회의에서 미국 5, 영국 5, 일본 3, 프랑스, 이탈리아, 대한제국 1.75로 제안했다가 프랑스, 이탈리아, 대한제국이 불쾌감을 드러내고 나가는 것을 보게된다.
- 캘빈 쿨리지
하딩 정권의 상무장관. 후버와 원 역사의 포지션을 맞바꿨다. 워싱턴 국축 협상 진행을 논의하며 한국이 일본과의 막후 협상을 통해 얻어낸 화북 진출과 국경 안정화로 얻은 경제적 이득을 추산한다.
- 에드윈 덴비
하딩 정권의 해군장관. 워싱턴 군축 회의 진행중 일본이 한국과의 막후 협상안을 준수하겠냐는 원초적인 의문에 그럴 수 밖에 없다고 답한다. 강경하게 조약 자체를 반대하는 해군 우파에 맞서는 해군 좌파와 연대한 민간 내각은 자신들의 우위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합의를 지켜야만 하고 한국 역시 민간 내각이 유지되길 바라니 맞춰줄 것이니 지켜질 수 밖에 없다고 단언한다. 한프동맹에 맞서 가진 전력을 온전히 미국을 상대하는데 쏟을 수 없는 영일동맹의 상황을 상세히 설명하며 영일동맹을 그대로 유지시키는 게 미국의 안보에 훨씬 도움이 된다는 견해를 제시한다.
8.3. 군부
- 존 조지프 퍼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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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윌리엄 다이
강종에게 고용된 미국인 군사고문으로 한성구락부의 초창기 협력자. 친위영 2중대장에 임명된 김시혁이 일본의 농간으로 그나마 정예한 장위영 병력을 빼앗기고 총도 제대로 못 쏘는 오합지졸들을 넘겨받았을 때 왕년의 교관 가락을 발휘해 쓸만한 병사로 조련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미군 고문관 중에 유일한 사관학교 경력자였기에 신설된 무관학교의 부교장에 임명, 한국군 군제 개혁의 주춧돌이 된다. 원래 역사에선 1899년에 미국으로 돌아가 사망하나 여기선 1905년 극동전쟁 종전 시까지 조선에 머물며 생존해 종전 협상을 참관했으며 마지막 봉사로 '대한제국 방어 계획'을 입안하는 등 명예로운 말년을 보냈다.
- 페르디난트 닌스테드
다이와 함께 고용된 미국인 고문. 다이 옆에서 무관학교 교관으로 재임하며 한국군 개혁의 초석을 놓아 주었다. 2차 쿠데타가 일어났을 때는 다이와 함께 불안함에 몸서리치는 강종을 호위했고 극동전쟁 종전 후 다이와 함께 극동전쟁 종전협상을 참관했다.
- 애드너 채피
의화단 전쟁 당시 미군 사령관. 베이징 점령 때 대한제국과 협조해, 원역사 달리 영국군보다 먼저 공사관 구역을 해방시킨다.
- 새뮤얼 영
극동전쟁 당시 미국 육군참모총장. 퍼싱이 올린 보고서를 혹평하여 그 보고서가 서류 보관소에 처박히게 했다.
- 프레드릭 펀스턴
멕시코 방면의 작전 부대를 총괄하던 중에 육군참모차장으로 영전한다. 행정부와 베이커 장관이 분노한 보수파들로부터 퍼싱의 개혁파를 보호하기 위해 고른 인선. 그러나 원역사처럼 심장마비로 사망한다.
- 헌터 리겟
미군 제1군단장. 맥아더가 보고도 없이 멋대로 42사단을 이끌고 독일군을 공격한 것을 알게되자 재빨리 정신을 차리고 맥아더에게 책임소재를 따지는 대신 즉시 군단 예비대를 동원해 42사단이 막고 있던 부분을 틀어막고 생미이엘 방어에 투입된 1사단을 공세로 전환시키면서 상황을 수습하여 아군 전선이 무너지는 것을 막는다.
- 제임스 하버드
미국 원정군 병참감. 올드 해빗의 일원으로 퍼싱을 적대했지만 미국 원정군을 입히고 재우고 먹일 수 있는 능력을 갖춰서, 퍼싱이 병참감으로 기용했고 본인도 사적인 감정과 공적인 감정을 구분하여 이를 받아들였다. 마셜의 능력을 아껴 그를 맥아더가 데려가지 못하게 막는다.
- 휴 알로이시우스 드럼
미군 제1군 참모장. 전형적인 올드 해빗. 연이은 승전에 고무되어 19세기부터 1차 대전까지 독프 양국이 번갈아 끊임없이 겹겹이 쌓아 올린 메츠의 요새 지대에 보병으로 정면에서 들이받는 어리석은 계획을 밀었다 큰 손실을 입고 진격이 돈좌되자 꿀 먹은 벙어리가 된다.
- 빌리 미첼
미 육군 통신대 지휘관으로, 미군 항공대에 전력이 부실하자 전력을 증강시키기 위해서 한국 항공대에서 제이슨 하코트를 데려오려 했지만, 한국 항공대 사령관인 서왈보가 거절하자 낙담했으나 한국군 고문단을 받는 것으로 해결한다.
- 조셉 E. 쿤
독일에 관전무관으로 파견된 미 육군 장교. 동부전선에서 독일의 패배와 한국군에 대한 상세한 분석, 솜 전투에서 영국군의 피해 상황을 면밀히 분석해 전쟁성에 보고한다.
- 조지 C. 마셜
프랑켄슈타인 마피아의 일원인 대위로 등장. 퍼싱 아래서 실무를 맡아 함께 고생한다. 유럽에 파병되고 나서는 뛰어난 업무 능력으로 하버드의 총애를 받지만, 본인은 내심 야전으로 가고 싶어 한다.
- 더글러스 맥아더
한국 참모학교에 위탁교육을 받으러 파견된 미 육군 소령으로 등장. 한국군 근위기병사단의 차량화, 기계화 개편 방향에 깊은 인상을 받는다. 한국군의 발전 방향을 부러워하며 미군도 그러한 부대를 만들 수 있기를 바라는 그에게 김시혁은 협상국들의 지원에 의지해야 하는 한국보단 미국이 훨씬 쉬울 거라며 타일러준다.
연수를 마친 뒤 미국 원정군의 일원으로 참전했으며 퍼싱 앞에서 직접 요구해 새로 배치된 전차들을 자기 부대에 일괄배치받도록 허락받는다. 비대한 에고는 여기서도 마찬가지로 퍼싱 앞에서도 자신을 3인칭으로 칭한다. 김시혁에게는 철저히 칼각을 재며 존경하면서도 경쟁심을 불태우는 모습을 보이는데, 실제로 시혁은 1874년생, 맥아더는 1880년생으로 6살 차이밖에 안 난다.
이후 루덴도르프 공세 당시, 생미이엘 방면에서 제42사단을 이끌고 독일군 2개 사단을 갈아버리며 메츠에서 35km 떨어진 지점까지 진격하는데 성공한다. 덕분에 힌덴부르크에게서 미치광이 미국 놈들이라는 평가를 받았을 정도. 하지만 이 과정에서 상급부대와의 소통 없이 독단적으로 반격했기에, 원정군이 일시적으로 위기에 몰리는 상황이 발생하기도 했다. 게다가 의욕이 앞섰던 탓에 비전투 손실도 상당히 발생했기에 퍼싱에게 질책 받는다.
다만 미국 본토에서 제42사단이 가지는 정치적 의미가 컸고, 포슈와 페탱과 사이가 안 좋던 카스텔노가 미군을 밀어주기 위해 레지옹 도뇌르를 추천하겠다고 나섰으며, 퍼싱 본인이 맥아더의 능력을 인정했기에, 전술을 다듬고 제대로 된 체계를 거쳐 임명된 원수들과 사령관들 사이에서 겸손함을 배워올 겸 제42사단과 함께 파리로 향하게 된다.
42사단은 협상국 최고전쟁사령부 직속으로 돌려졌다 올드 해빗들의 우행으로 메츠에서 돈좌된 전황을 되돌릴 히든카드로 다시 소환되어, 퍼싱이 독일군의 시선을 끌어내는 사이에 티옹빌로의 전략적인 우회기동을 성공시킨다. 그리고 이 직전에 다른 미군들이 공적을 올리고 있는데 42사단만 후방에 박혀 있다고 협상국 최고전쟁사령부에 따지러 갔다가, 강화된 보안 때문에 경비를 서던 대통령 근위대에 잡혀 철창에 가둬진 것을 우연히 맥아더의 차를 본 시혁의 보증으로 석방되어 작전 계획을 전달받았다고 한다.[115]
- 조지 S. 패튼
프랑켄슈타인 마피아의 일원인 젊은 장교로 등장. 스스로를 기사로 자처하고 군마를 동등한 전우로 대하는 기인이면서도 미래 전장의 흐름과 그에 필요한 개혁을 정확히 예측하는 기민한 모습을 보인다. 전차와 제병합동을 제대로 운용할 줄 아는 지휘관이 필요하다는 맥아더의 요청으로 사령부에서 맥아더 밑으로 적을 옮기고 뫼즈 강 방면 공세의 최선봉에서 활약한다. 맥아더와 함께 파리로 가 개선식에 참가하고 지휘참모 과정에 들어갔다가 맥아더가 퍼싱의 호출을 받을 때 함께 호출. 특유의 저돌성을 물씬 발휘해 맹활약한다.
8.4. 하코트 가
- 제임스 하코트
해당 작품의 오리지널 캐릭터. 전형적인 딕시이며,[116] 후버의 친구 쪽 지인이라는 설정이다. 후버의 광산에서 경비직을 서던 중 미합중국 기병대에서 복무한 경험을 살려 기병 고문직을 구하던 대한제국 육군에 입대한다. 딕시스러운 행동거지로 여러 문제를 일으켰지만[117] 김시혁에게 일침을 듣고 마음을 고쳐먹었는지 극동 전쟁 시기에 들어서는 인간관계에 꽤나 진전이 있었다.[118]
이후 굵직한 전투마다 등장하며 꽤나 큰 인상을 남겼다. 특히 남포에서 흉갑기병대를 이끌고 일본군 근위기병연대를 궤멸시키면서 연대기를 탈취하기도 했다. 2부 시점에서는 함흥에 정착해 목장을 운영하고 있으며 대한제국군과 군마 공급 계약을 체결해 안정적인 삶을 누리고 있다. 이후 1차대전에 대한제국이 참전해 늘어난 군마 수요 감당을 위해 얀코프스키를 연결해 주기도 한다.
- 제이슨 하코트
제임스 하코트의 손자. 유년 시절 할아버지가 한국에 정착하면서 가족 전체가 한국으로 이민 올 때 같이 들어와 오랜 기간 조선에 살았다.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제이슨이 목장 일을 물려받기를 바랐으나 모험심이 강한 성격이라 이를 거절하고 몰래 가출해 대한제국의 육군항공대에 지원하였고,[119] 몇 개월간의 훈련을 마친 뒤 구주원정군에 참여, 5월 20일 작전 개시 이후부터 20번의 작전에 투입해 총 5기를 격추시키며 서왈보의 뒤를 잇는 2번째 에이스 칭호를 얻게 된다.
8.5. 기타
- 존 브라우닝
김시혁이 신형 소총을 만들기 위해 고용하였고, 원 역사에서 M1 카빈의 초안이 된 M1929를 설계하는 동생 조나단 브라우닝과 함께 강습소총을 제작했다. 강습소총은 엄밀히 말해 작중 대한제국의 기술력을 넘어선 물건이었고, 이름 높은 존 브라우닝도 중간탄을 쓰는 가스작용식 개인화기에 대한 설계 능력은 검증된 바가 없는데[120] 김시혁과 홍익정밀이 기본적인 작동 개념과 자금을 제공하고 존 브라우닝과 카빈의 초안을 잡은 조나단 브라우닝까지[121] 형제가 함께 세부적인 설계를 하는 것으로 역할을 분담해 개연성을 확보했다. 강습소총을 설계하고 미군에도 일정 수량 채용이 되자 스스로 자동화기 설계에 관심을 기울여 원 역사보다 몇 년 빨리 BAR를 설계해 내놓았다.
- 제임스 M. 개빈
제1차 세계대전 종말 시점에는 아직 신문을 사람들에게 읽어주는 어린아이로 군인에 대한 꿈을 키우고 있다. 이후 후버에게 웨스트포인트에 가면 너의 꿈을 이룰 수 있을 것이라는 말을 듣는다.
9. 대영제국
2부 들어 본격적으로 등장한다. 독자들의 감상은 1부의 일본을 뛰어넘은 2부 메인 빌런이자 혐성국 그 자체. 한국을 얕보고 일본과 동맹하고 있지만 막상 일본도 그냥 사냥개 정도로 대우하면서 혐성을 보이는 것은 물론 한창 전쟁 중에 승기가 보이는 것도 아니고 패배도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판국에 정치질에만 몰두하며 전선을 어렵게 만들고, 자기들이 요청해 한국군을 출병시켜 놓고 일본을 충동질해 한국의 등을 찌르게 만들고 3.1 혁명이 발생하자 강종과 근황파를 지원해 한국을 두쪽내는 내전으로 끌고갈 구상을 내놓는 등 온갖 협잡질과 고구마 제조를 책임지고 있다.독자들은 후대에 배후중상 음모론이 나와도 이상할 게 없다며 치를 떨고 있다. 물론 현실에서도 혐성국, 현대사의 원흉 중에 대영제국을 찍으면 반은 맞는다 밈이 있을 정도로 신나게 까이는 중이긴 하지만 여기 세계선에서는 그게 더 심해질 것으로 보인다.
단, 높으신 분들과 별개로 일선의 장병들은 김시혁이 경의를 표할 정도로 용감하고 감투정신이 넘쳐흐르는 전사 그 자체의 모습을 보여준다. 헤이그와 고프가 거의 패작을 하는 상황에서 아미앵이 무너지지 않은 데는 산산조각나 전멸하는 순간까지 악착같이 맞선 영국군 제대의 분전이 컸다. 그리고 패작을 하는 지휘관들만 있는 게 아니고 허버트 플러머나 잭 실리 같은 뛰어난 지휘관들도 존재한다.
3.1 혁명 이전까지 대한제국을 러시아와 프랑스 따까리로 보고 강력하게 견제 중이었지만, 3.1 혁명으로 대한제국이 입헌군주정으로 전환되자 포섭 가능성이 있다며 이전보다 유화적으로 나가고 있다.[122]
9.1. 왕실
- 조지 5세
1차대전 당시 영국의 국왕. 차르 일가가 볼셰비키와의 적백내전으로 위험해지자 영국 총리에게 직접 자신의 친척인 차르 일가 구출을 요청했다.[123] 한국에서 혁명이 일어나 의친왕이 황제로 즉위하고 입헌군주제로 전환하자 이한응을 불러 이를 축하하며 같은 체제를 공유하게 돼서 기쁘다며 호의를 드러낸다.
9.2. 정치인/관료
- 윈스턴 처칠
전 해군장관이자 신임 군수장관. 아무리 사단이 많아도 한꺼번에 투입할 수 없는 전장 환경을 설명하며 전황에 비관적인 전망을 내놓는다. 전쟁장관이 갈리폴리를 언급하자 움찔하지만 회의 석상이라 화를 내진 못한다. 이한응과 접촉해 4만의 추가 병력을 지원해 주면 일본 관할 하의 남양 군도를 넘겨주겠다는, 지켜질 리도 없고 지켜져도 유지가 불가능하며, 국제관계에 폭탄만 될 게 뻔한 독약을 제안이랍시고 내밀었다.
-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
1차 대전 전시 총리. 어두운 전황에 속 끓이든 중 일본의 티배깅에 가까운 파병 제안을 받는다. 각료들이 격분히 다들 한 소리 하는 가운데 병사 한 명이 아까운 상황을 고려 6천 파병을 받아들이는 한편 영일동맹을 주도한 아서 벨푸어에게 병력을 더 받아오지 못하면 극동전략을 전면 수정할 수밖에 없음을 경고한다. 전후 한국이 프랑스와 손잡고 영향력을 행사해 영국이 극동에서 밀려날 것을 걱정해 일본을 부추겨 견제하려 하지만, 일본이 기대 이상으로 날뛰는 계기를 줘버렸다.
- 아서 밸푸어
극동에서 러시아를 견제하고자 영일동맹을 결성하고 극동전쟁 패배 이후에도 일본에 지속적으로 예산과 전함을 퍼다 준 장본인. 그렇게 열심히 퍼다준 일본이 영국의 지원 요청에 맨몸뿐인 지원병 6천으로 화답하자 격분한 총리 로이드조지에게 일본으로 가서 병력을 더 받아 오던가 아니면 전후 극동전략을 전면 수정할 수밖에 없다고 전하라는 통보를 듣는다. 한국이란 호랑이를 적절히 제어하는 프랑스와 대비해 일본 이란 밑 빠진 독에 일방적으로 퍼주기 바쁘다며 벨푸어를 조롱하는 만평이 개제되는 등 안팎으로 압력을 받는다.
- 에릭 게디스
영국 제1 해군경. 전후 프랑스와 동맹 상태인 대한제국과 미합중국의 연계 및 아시아에서의 영향력을 우려를 표한다. 이에 따라 독일해군의 배상함을 각기 미국과 한국 그리고 일본에 6:3:1 수준으로 양도하도록 하며 특히 대한제국에게는 카이저급 전함 4척을 비롯한 많은 배상함을 넘김으로써 대한제국이 감당하지 못하게 하는 방향을 제시한다.
9.3. 군부
- 더글러스 헤이그
자세한 내용은 더글러스 헤이그(조선에는 쿠데타가 필요해요) 문서
#!if (문단 == null) == (앵커 == null) 를
#!if 문단 != null & 앵커 == null 의 [[더글러스 헤이그(조선에는 쿠데타가 필요해요)#s-|]]번 문단을
참고하십시오.#!if 문단 == null & 앵커 != null 의 [[더글러스 헤이그(조선에는 쿠데타가 필요해요)#|]] 부분을
- 헨리 휴즈 윌슨
영국군 야전원수. 한국군 본대의 출동을 가로막는 협상국 수뇌부에 분노한 의친왕을 만류하며 아미앵 주변의 영국군 부대와 일본군 후속 사단의 지휘권을 한국 측에 넘기는 딜을 건다. 포슈가 헤이그와 페탱이 독일군이 아미앵을 노리는 것이 분명함에도 지원군을 보내지 않으려고 하는 것에 분노하여 이탈리아 방면에 있는 군사들을 빼서 아미앵을 지원하려 했을 때 그를 말렸다. 아미앵 전투 이후 헤이그가 해임될 뻔 했을 때 유일하게 헤이그를 변호해 그가 바로 해임되는 것은 면하게 해준다.
- 허버트 플러머
영국 제2군 사령관. 고프의 후임으로 2차 파스샹달 전투를 이끈 지휘관. 영국군에서 단연 발군인 지휘관으로 한국군의 전투 방식과 솜과 파스샹달에서 피로 습득한 소부대 전술을 접목시켜 이전의 손실을 설욕하고 독일 제4군에 큰 타격을 입힌다. 헤이그가 김시혁에게 아미앵을 조심하라는 조언에 고민하자 그냥 무시해서는 안 된다고 조언한다. 루덴도르프 공세가 시작되자 무작정 측면을 비워버린 고프와 달리 재빨리 상황을 파악하고 독단적으로 예하 제대를 차출하고 바잉까지 설득해 아미앵 북부 간선도로를 틀어막는데 전력한다. 3월 28일부터 가동한 포슈의 대 포위망에도 적극 협력 북쪽 캉브레와 바폼므를 차단한다. 아미앵 전투가 승리로 끝난 후 바잉, 실리와 함께 파리에서 열린 개선식에 초대된다.
- 휴버트 고프
영국 제5군 사령관. 1차 파스샹달 전투를 맡아 무모한 공세로 막대한 피해를 초래했다. 헤이그가 김시혁에게 아미앵을 조심하라는 조언에 고민하자 동양 놈이 뭘 알겠나며 무시하자고 주장한다. 5군의 예비대로 훈련도가 부족한 일본군을 받게 되자, 이를 불평했지만 결국 받아들인다. 용맹하지만 그것뿐인 인물로 파스샹달에서 독일군의 종심방어에 그토록 고전해놓고도 전력이 취약한 5군 병력으로 종심 방어를 하는 대신 얇게 늘어 뜨린다. 독일의 공세가 시작된 후에는 패닉에 빠져 사전 통보도, 대안도 없이 무턱대고 다른 곳 병력을 전부 빼서 아미앵 쪽에 축차투입해 버리는 바람에 한국군 본대가 예비대 필요성을 이유로 출동하지 못하는 대형 사고를 초래한다. 노발대발한 포슈는 그를 해임하려 했으나 영국군의 발언권 축소를 우려한 헤이그의 정치질에 저지되고 김시혁의 지시로 사령부를 떠나 후방으로 가는 선에서 정리된다. 완전히 기가 죽어서 일본 쪽 지휘관이 김시혁의 명령을 따르려 하지 않자 오히려 핀잔을 주는 모습이 나온다. 독일이 아라스 방면으로 재공세를 노리자 연락장교 몽고메리 소령과 함께 한국군 사령부에 파견되었으나 꿔다 논 보릿자루처럼 자리만 지켰다.
- 줄리안 바잉
영국 제3군 사령관. 아라스 방어선에 남부를 담당하던 중 플러머에게 영국 제5군 소식을 전해 듣는다. 플러머의 독단에 반신반의하면서도 예비대를 차출해 아미앵 북쪽을 차단하는 데 힘을 보탰고 대 포위망이 발동하자 플러머와 함께 캉브레, 바폼므에 맹공을 퍼부었다. 아미앵 전투 승리 후 파리에서 열린 개선식에 당당히 참석했다.
- 잭 실리
캐나다 기병여단장. 바잉 사령관의 명령을 받고 아미앵 북쪽을 차단하러 이동했으나 너무 갑작스럽게 지시가 떨어져 후속 부대가 도착하지 못한 상태에서 이동 중인 독일군 대부대를 포착하게 된다. 겨우 800의 장병들로 사단급인 적과 교전하면 전멸이 뻔함에도 아미앵을 사수하기 위해 기꺼이 적진에 뛰어든다. 돌격의 대가로 600명의 기수와 군마 전부를 잃고 200명만 살아남아 도보로 퇴각해야 했지만 208예비보병사단을 주저 앉히고 아미앵 북부를 사수해낸다. 전투가 끝난 후 상관인 플러머, 바잉과 함께 파리에서 열린 개선식의 일원으로 참가할 자격을 얻었다.
참고로 애스퀴스 내각에서 전쟁장관까지 맡았던 유력한 정치인이었다.
- 버나드 로 몽고메리
5군 본부 소속 소령으로 등장. 신속대응부대를 인솔해 등장한 김시혁이 5군 지휘권을 인수하자 자연스럽게 그를 보좌해 아미앵 전투에 참전하게 된다. 이후 독일의 아라스 방면 공세에 대비하는 한국군 지휘부에 연락장교로 파견. 한국군 참모들 이상으로 열성적으로 김시혁을 보좌하고 대반격, 대공세까지 함께한다.
9.4. 기타
- 프레더릭 매켄지[124]
원역사에서 한국인들이 정미의병하면 흔히 떠올리는 사진을 찍은 것으로 유명하며 이후로도 반일 언론 활동을 지속해 한국 독립유공자에 서훈된 영국 기자. 본디 일본군의 종군 기자단에 소속되어 있었고 일본이 말한 러시아로부터 조선을 해방시킨다는 말을 믿었지만 경인가도 전투를 지켜보고 생각이 바뀌어 한국의 사정을 취재하기 위해 몰래 일본군을 피해 홍범도가 이끄는 한국군에 합류한다. 그 뒤 한국군을 취재하면서 함흥까지 가게 되고 거기서 김시혁과 인터뷰를 하면서 Korea will never surrender라는 제목의 기사를 만들어 국제 여론전에서 한국이 우위에 설 수 있게 해준다. 그가 선임기자로 있는 데일리 뉴스는 대한제국에 거주중인 외국인들 사이에서 가장 많이 읽히는 신문이라 윤치호는 베델과 그를 통해 한일 국혼을 폭로할 계획을 세운다.
- 어니스트 베델
원역사에서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해 반일 언론 활동을 벌여 한국 독립유공자로 서훈된 영국 기자. 역시나 메켄지와 같은 이유로 일본군을 탈출해 한국군을 취재하려 했으나[125] 메켄지의 탈출 이후 감시가 삼엄해지며 탈출에 실패하지만 우연히 삼광 작전의 일환으로 삼남 지방에서 벌어지는 대학살에 대한 실마리를 잡게 되어 잠입 취재에 들어가고 삼광 작전에 대한 진실을 기사로 폭로해 일본의 전쟁 명분이 거짓임을 밝혀낸다. 외전에서 밝혀지길 원역사대로 한국에 눌러앉아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했다. 건강을 해쳤던 일제와의 송사가 사라져서인지 1909년에 세상을 떠난 원역사보다 훨씬 오래 살고 있다.
베델이 사장으로 있는 대한매일신보는 강종도 건드릴 수 없었기에 강종은 반대급부로 독립신문을 적극 후원해 가장 잘 팔리는 신문사로 만들어 여론 형성에 써먹는다. 1919년 친위 쿠데타가 발생한 시점에 강종이 건드릴 수 없는 대한제국내 유일한 언론인이라 윤치호는 그를 통해 강종이 추진하는 한일 국혼을 폭로한다. 이에 강종은 영국과의 마찰을 불사하고 헌병대를 보내 기자들을 체포하고 신문사를 강제 폐간시킨다. 이에 체포를 피한 기자들이 윤전기에서 막 나온 신문 기사를 무료로 한성 여기저기에 뿌려서 대한매일신보를 구독하지 않던 이들조차 한일국혼에 대해 알게 되고 경복궁 앞의 시위 행렬은 더욱 늘어났다.
- 존 맥리비 브라운
조선 해관 총세무사. 일본과 결탁해 대한제국의 개혁을 방해했지만, 김시혁의 계략으로 탁지부의 조사를 받게 되면서 처벌받지 않는 조건으로 추방된다.
-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
세브란스 의학교 세균학, 감염의학 교수. 대한제국에 창궐한 아미앵 독감 피해 상황을 조사해 본토에서만 전체 인구의 3분의 1이 감염되었고 직접 사망 25~30만. 합병증으로 인한 간접 사망자까지 포함시 최대 50만의 인명 피해가 발생했다는 보고서를 올린다.
10.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1차 대전의 역사가 본격적으로 바뀌는 계기를 마련한 국가. 황권 강화에 골몰하던 강종은 구주 한복판에서 수백 년간 막강한 권위를 향유한 전제군주국인 이중 제국을 눈여겨보고 먼저 다가가면서 대한제국과 교류가 늘었고 이 과정에서 본래 추진하던 군사 개혁이 탄력을 받아 원역사보다 더 많은 정예 병력을 양성해 성공적으로 보전해 러시아를 밀어붙인다. 그러나 이 개혁의 원조격인 대한제국이 1차대전에 참전하여 브루실로프 공세에서 대차게 박살나버렸고 그 뒤에 비스와 강의 기적 때 다시금 반격을 시도하나 역시나 저지되어버렸고 이후에는 원역사와 비슷한 행보를 걷다 제국 해체의 운명을 맞는다.10.1. 황실
- 카를 1세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마지막 황제. 전쟁을 끝내기 위해 노력을 했으나 수포로 돌아갔고 악화되는 전황과 독일에 끌려가는 악순환 속에 17세 청소년들까지 징병해서 내보내야 하는 처지에 놓인다. 버티다 못 한 신민들이 폭발해 보헤미아 지역을 중심으로 대대적인 징병 폭동이 발생하고 오스트리아의 마지막 정예 병력은 베네치아와 스당에 각각 포위되어 죽어가는 가운데 강경책을 제안하는 회첸도르프를 제지하고 대타협을 제안해 어떻게든 상황을 수습하려 하나 실패한다.
- 요제프 페르디난트 폰 외스터라이히토스카나
페르디난트 대공으로 불리는 갈리치아 전선 총사령관. 한국군이 파병왔다는 소식을 듣고 동양인이라며 무시하고 그들은 절대 만만한 적이 아니라는 버차니의 충고조차도 무시한다. 그리고 너무나 당연하게도 브루실로프 공세 때 대차게 깨지며 멘탈이 작살나고 만다.
10.2. 군부
10.2.1. 육군
- 막시밀리안 치체리치 폰 버차니
원 역사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군대를 개혁하려 했던 장군. 극동전쟁 당시 관전무관으로 파견되어 대한제국의 전술을 보고 이것이 앞으로의 전장을 지배할 것이라 판단해 대한제국에 오헝 제국 공사관이 정식 개관한 것을 기회로 한국을 찾아와 김시혁에게 조언을 구하려 한다. 이후 대한제국군의 훈련을 참관하고 귀국해서 자신이 본 것을 기반으로 한 군제개혁을 강력히 주장했고 그 결과 육군학교장이 되어 자신이 원하는 장교들을 육성하게 된다. 그리고 이렇게 육성한 장교들이 동부전선에서 활약하며 원 역사의 그 허접 오헝군의 이미지를 완전히 지워버리는 나비효과가 생긴다. 동부전선에서 러시아군과 세르비아군을 갈아버리다가 23군단장으로 부임되어 이손초로 갈 예정이었으나 이손초로 10개 사단이 가면서 생긴 빈틈을 메우고자 13군단장으로 다시 투입된다. 그 상황에서 한국군과 김시혁이 동부전선에 왔다는 소식에 경계하며 그들을 무시하던 4군 사령관 요제프 페르디난트 대공에게 일침을 가하기도 한다.
브루실로프 공세를 맞아 압도적으로 불리한 상황에서 루츠크를 사수하며 결사 항전. 독일군이 지원 올 때까지 버티는 데 성공한다. 압도적인 수적 우세를 내세운 러시아군에 맞서 처절한 방어전을 벌이는 와중, 브루실로프의 지시를 무시한 파벨이 근위군단을 끌고 정면으로 치고 들어오자 이를 한국군의 선전에 발맞추는 러시아군의 전면 공세로 오인, 전력을 보전한 채 북쪽 측면을 사수하던 13군단을 빼서 포위섬멸을 시도하는 오판을 저지르고 만다.
버차니 탓을 할 수도 없는 게 러시아 군에서도 유일하게 소모 없이 완편 상태였던 2개 군단 11만이 사실 사령관 작계 씹어 먹고 멋대로 움직인 병력이라고 누가 생각할 수 있었겠는가.... 오히려 그런 상황에서도 일방적으로 밀리지 않은 채 참모들의 조언을 적절히 받아들여 전력을 보전해 코벨로 퇴각하는 데 성공했다. 이후 비스와 강의 기적에서도 공세의 한 축을 담당하며 코벨 전투 직전 시점에서는 코벨 서쪽에서 러시아군을 밀어붙였지만 칼닙카 전투에서 미쉔코에게 패배한 데다 두보브의 오스만 군도 무너지며 철수할 수밖에 없게 된다. 동부전선이 종결된 이후에는 이탈리아 전선으로 파견되었다. 초반에는 나름대로 이탈리아군을 밀어붙였으나 남북 이탈리아의 거국적 단결로 소모된 병력 이상의 대군을 짜낸 이탈리아와 이들을 지원하는 프랑스군의 협공 속에 전면 패주, 베네치아에 포위되어 전멸과 투항, 2가지 선택지만 남게 된 상황에서 카를 1세에게 항복해도 된다는 윤허를 받은 뒤 이탈리아군에 항복한다.
- 프란츠 콘라트 폰 회첸도르프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의 육군 장군참모장. 1911년에 버차니의 개혁 요구를 회의장에서 듣는 것으로 첫 등장한다. 정치적으로는 보수 성향이지만 군사 쪽에서만큼은 진보적이었다는 걸 고증한 것인지 버차니의 개혁 요구를 듣고 반발하는 육군 내 전통주의자들을 찍어누른 뒤 버차니를 황립 및 왕립 전쟁대학 교수로 임명해 그가 극동에서 보고 배운 것을 오헝 제국군에 퍼트리게 한다. 그리고 이는 1차 세계대전에서 오헝군이 대선전을 하게 만들었으며 대한제국이 동부전선에 파견되게 하는 결과를 낳았다. 미카엘 공세와 아라스 공세가 연달아 실패하고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정예 병력이 독일의 고기 방패가 되어 죽어가는 가운데 징병 폭동이 일어나지 강경하게 진압하려 하나 카를 1세에게 제지당하고 군부 일선에서 물러나게 된다.
- 알 토르자
졸로치의 병참사령관이자 제5혼베드 기병사단의 지휘관. 졸로치에서 한국군과 싸웠지만 패전하고 여운형의 설득으로 항복한다. 독일군 포로들보다 몇 달 먼저 한국에 들어와서 우호적인 대우를 받으며 부하 기병장교들과 함께 전국의 목장들을 돌며 군마 육성에 대한 조언을 해준다.
- 에두아르트 폰 뵘에르몰리
렘베르크를 방어하고 있는 제2군 사령관. 졸로치 함락을 보고받는 것으로 첫 등장. 어떻게든 렘베르크를 사수하고자 황립 전쟁성과 팔켄하인의 OHL에 화학탄 투발을 요청하지만 거절당하고 오히려 최대한 버티다가 질서정연하게 후퇴하라는 명예로운 최후를 강제당한다. 시가전을 통한 소모전을 유도할 수 있을만한 병력은 있었지만 도시 내 민간인들의 피난 시간을 벌고자 외곽 방어를 선택한다.[126] 하지만 결국 중과부적이었고 독일군도 구원군을 보낼 생각이 없자 온전한 도시를 넘기는 조건으로 도시민 및 2군 잔존 병력의 안전한 퇴거를 보장해 줄 것을 요청하는 협상을 참모장과 시장을 보내 진행시킨다. 만일 협상이 결렬되면 주요 간선도로와 철도를 터트리고 최후의 1인까지 싸우겠다는 반협박성 협상이었다. 미쉔코는 이를 무시하고 질량으로 덮어버리려 했지만 렘베르크를 통한 온전한 보급로를 확보하고자 했던 그리고 더 이상의 학살극을 없애고자 했던 김시혁의 설득으로 협상은 무사히 타결된다.
- 요제프 메츠거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 제1사단장으로, 무종의 요새를 지켰으나 한국군 수도보병사단과의 전투에서 패하고 포로로 잡힌다.
10.2.2. 해군
- 게오르크 루트비히 폰 트랍
원역사에서 오스트리아 해군 잠수함 에이스이자 사운드 오브 뮤직에 나온 트랩 대령의 모티브. 역시나 주한 오헝 제국 공사관이 정식 개관하자 공사관 무관으로 파견을 와서 버차니와 함께 김시혁에게 조언을 구하려 한다.
- 호르티 미클로시
경순양함 SMS 노바라의 함장. 독일에게서 무제한 잠수함 작전에 동참할 것을 요구하는 서류를 받고 자신이 이를 생각했다지만 이런 방식은 아니었다며 씁쓸해하지만 그래도 군인으로서 이길 방법을 생각하다 원 역사대로 오트란토 해협 해전을 구상해낸다. 그리고 이 소설에서 나오는 어지간한 명장들이 그러하듯 그 역시도 한국 해군을 경계하고 있다.
11. 청나라 → 중화민국
청 멸망 후 군벌들의 난립과 외세의 개입으로 북중국을 장악한 북양정부와 남중국의 국민정부로 나누어졌다.11.1. 청나라 구세력
- 섭사성
대한제국군과 전투를 벌인 것을 제외하면 원역사랑 비슷한 운명을 맞는다.
- 서수붕
한-청 수교 문제로 대청흠차출사대신 직을 받고 대한제국에 왔지만 대한제국에 온지 반년만에 의화단 전쟁이 터져 베이징으로 한국군이 진격하자 대한제국 외무대신인 박제순에게 항의하지만 오히려 역공당한다. 한-청 수교 조약 이후 초대 주청 한국 공사가 되며 사과문을 전달한다.
- 아이신기오로 푸이
청의 마지막 황제. 장훈복벽이 무위로 돌아간 뒤 자금성에서 쥐 죽은 듯 사는 신세였으나 복벽 사건에서 드러난 옛 군주로서 영향력이 그를 북양군벌과 대한제국 사이의 뜨거운 감자로 떠오르게 한다. 영구에서 말라죽어가던 장쭤린은 한국 관할 하 남만주로 떠나는 한족과 만주족을 붙잡고 세를 키우기 위해, 남만주 영토화에 온 힘을 쏟던 강종은 아직 나라님으로 추앙받는 그를 이용해 남만주 지배력을 굳히기 위해 각자 영구와 한성으로 데려오는 공작을 진행한다. 3월 혁명으로 강종이 퇴위당한 다음에도 이 공작의 유용성은 인정받았고 만주인들에 대한 포용 정책이 더욱 적극적으로 진행됨에 따라 그를 만주로 데려와 만주부왕으로 삼는 계획을 세우고 공작을 이어간다. 여기에 일본까지 한국의 만주 통치를 흔들려는 의도로 끼어들면서 그를 둘러싸고 음지에서 치열한 첩보전이 벌어진다.
11.2. 북양정부
- 위안스카이
원 역사랑 비슷한 행보를 보였으나 대한제국에게 사사건건 방해를 받은 데다가, 호국전쟁에서도 참패하자 화병으로 사망한다. 이때 화병의 계기는 대한제국 덕이었는데 우선 대한제국이 만주에서 움직임을 보이며 주력군이 묶인 탓에 호법군을 제압하지 못한 것이 1차 원인이요.(이때 눈에 보인 집기류는 다 부숴버렸다고 한다.) 그래서 해군에게 지원을 요청하자 해군이 쑨원 지지를 선언하며 위안스카이에게 사임하라고 종용한 것이 2차 원인이고 자신이 이렇게 망한 배후에 조선과 프랑스가 있음을 안 것이 결정타로 작용했다. 이때 유언으로 "조선이, 조선이 감히 나를!!!!"이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원 역사에서도 조선을 수탈하며 본격적으로 정계에서 성장했음을 생각하면 조선 덕에 성장하고 조선 덕에 망했다는 완벽한 수미상관을 이루었다.
- 리위안훙
위안스카이 사후 중화민국 대총통 직을 인수했다. 외교에 관한 안목은 돤치루이보다 떨어진다.
- 돤치루이
위안스카이 사후 중화민국 총리가 되었다. 독일에서 대한제국을 흔들어 달라는 요청이 오자 현실적인 이유로 요청을 거부할 것을 주장하며 리위안훙을 설득했다.
- 차오쿤
쑨원이 이끄는 호법군과 맞서 싸웠지만 참패한다.
- 차오루린
1913년 당시 중화민국 외교부 장관. 봉천군벌 토벌 이후 평화협상을 위해 특사로 파견된다.
- 루정샹
파리 강화 회의 때 영일동맹이 초청한 중화민국 대표단장으로 국민정부 대표단장인 탕사오이랑 마주치자마자 삿대질과 심한 욕설을 하며 설전을 벌이다가 회의장을 경비하던 경찰들에게 끌려 나간다.
11.2.1. 봉천군벌
- 장쭤린
2부 프롤로그 메인 빌런. 여기서는 극동 전쟁이 러시아에 유리해지자 러시아에 붙어살아남았으며, 이후 러시아와 일본 사이에서 줄타기를 잘해내고 일본으로부터 군사 고문을 들여 군의 근대화도 성공시키며 원 역사처럼 만주에 상당한 세력을 구축하는 데 성공했다. 다만, 그 과정에서 대한제국이 영향력을 행사 중인 남만주에 진출하려 하면서 대한과 충돌을 빚게 되었는데, 문제는 그 대한제국이 일본을 발라버린 김시혁의 국가라는 점이었고, 결국 자전거 보병화된 강습보병과 신규 무기인 강습소총에 제대로 당하면서 본거지인 영구까지 밀려났으며 기껏 키운 군대도 전멸해버리다시피 하여 요서에서 쥐 죽은 듯 잔존 세력 수습에만 매달리는 신세가 된다. 그대로 몰락하는 듯했으나 김시혁이 자리를 비운 사이 강종과 근황파가 졸렬한 지휘로 호로군 무장 해제에 실패하고 호로군 기병영 1만이 요서로 달아나 장쭤린 측에 합류하며 어느 정도는 세력을 회복하게 된다. 이후 여전히 세력 키우기에 골몰하며 아이신기오로 푸이를 영구에 데려오려는 공작을 진행하려 한다.
- 장쭤샹
장쭤린의 의형제. 장쭤린에게 아이신기오로 푸이를 영구에 데려오는 공작을 제안한다.
11.3. 국민정부
- 쑨원
원역사에서 중화민국의 국부라 일컬어지는 인물로 본디 한국의 남만주 영향력 인정을 조건으로 지원을 받아왔으나 복잡한 국내 정세로 영향력 인정을 철회했다가 그 대가로 지원이 끊겨 고생한다. 이후 장작림 전쟁 때 대한제국이 다시 그를 끌어들일 필요성을 느껴 같은 조건으로 다시 지원을 받게 된다. 정확히 말하면 직접 지원해 주는 건 일본의 기업인 미쓰이 물산으로 한국은 직접 지원할 수단을 미쓰이 물산에 지급해 세탁 과정을 거친다. 이후 대한제국의 지원을 기반으로 위안스카이를 무너트리고 호국전쟁에서 승리하며 남중국의 패권을 거머쥐게 된다.
- 탕사오이
파리 강화 회의 때 프랑스와 대한제국이 초청한 국민정부 대표단장으로 중화민국 대표단장인 루정샹이랑 마주치자마자 삿대질과 심한 욕설을 하며 설전을 벌이다가 회의장을 경비하던 경찰들에게 끌려 나간다.
- 왕징웨이
파리 강화 회의 국민정부 대표단 인원 중 한명으로, 국민정부 대표단에게 일본의 인종평등안건에 대해 고려할 만하다고 목소리를 내는 바람에 분위기를 살짝 어색해지게 한다. 이후 일본에게 관동주를 위임통치령으로 주자는 이야기가 나오자 분개한다.
12. 폴란드 제2공화국
- 유제프 피우수트스키
실제 역사대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 산하 폴란드 군단의 장군으로 있으며, 렘베르크 전투에서 러시아의 카자크 기병대에 맞서 분투한다. 그러나 김시혁이 있는 시베리아군에게 결국 패배하며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이 렘베르크에서 퇴각할 때 한국군을 향해 손을 흔들며 "전장에서 다시 보자, 명예로운 적들이여!"라고 소리친다. 이후 전쟁이 끝나자 원역사처럼 폴란드 제2공화국을 수립하며 지도자가 되며 영국, 프랑스의 지원을 받으면서 소비에트의 전선을 압박한다.
프랑스에서는 소련을 견제하기 위해 피우수트스키의 인테르마리움(미엥지모제) 계획을 지원해주고 있으며 소련이 전간기에 적극적으로 동유럽을 공격하고 있다는 차이점이 생겨서 진짜로 꿈을 이룰 가능성도 보이고 있다.
13. 이탈리아 왕국
- 파울로 타온 디 레벨
이탈리아 해군 참모총장. 타란토에 입항한 대한제국 해군 원정함대를 직접 마중 나온 것으로 첫 등장했으며 그들을 간당간당하고 있는 오트란토로 보내려 하며 지휘권을 빼앗으려는 모습을 보이지만, 신순성이 노련하게 대처하며 무위로 돌아간다.
- 알포레도 엑튼
레지아 마르게리타의 함장. 오트란토 해전을 앞두고 신순성과 협력하는데, 비록 규모가 작은 함대를 이끌지만 자신보다 계급이 높은 신순성을 우대해 준다.
- 아르만도 디아츠
신임 이탈리아 육군 총사령관. 6만 명의 인력과 남부에서 소집한 15개 사단으로 가리발디 방어선을 구축하고 있다. 전쟁 종말에 베네치아에서 최후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인 버차니의 야전군으로부터 항복을 받아낸다.
14. 오스만 제국 → 튀르키예국
- 야쿱 셰브키 파샤
오스만 15군단의 지휘관으로 린징겐에게 공격을 재촉하며 역정을 낸다. 오스만 최정예라는 명성은 헛되지 않아서 전투가 시작되자 독일, 오헝군과 함께 러시아 3군, 8군을 섬멸시킨다. 오스만과 독일은 대등한 동맹국이라는 인식 아래 할 말은 하는 성격인데, 대령 계급인 그의 이런 모습을 못마땅하게 여긴 린징겐은 오스만군에 독일제 기관총과 중포를 지급하라는 OHL의 지시조차 무시하며 길들이기를 시도한다. 그리고 그 결과 일디림 군단은 한국군의 간담이 서늘할 정도로 놀라운 감투 정신을 발휘하고도 대패를 당했으며 뒤이은 러시아 제국 공군의 폭격 세례로 괴멸되고 만다.
-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
오스만 군인들 중에서 가장 유능하고 불같은 사람이라고 언급된다. 종전 이후 원역사대로 대국민의회 정부를 세워 아나톨리아에서 그리스, 협상국 세력을 몰아내기 위해 분투 중이다. 대 터키 강경론자였던 로이드-조지 총리가 극동에서 도박을 하면서 영국의 지중해 통제력이 원역보다 약해진 대신 원역에서 소극적이었던 프랑스가 풍족한 재정을 바탕으로 아나톨리아 전선에 뛰어들고 프랑스의 후원을 받은 그리스군이 훨씬 강해졌다. 물자가 부족한 민병대로 프랑스-그리스군에 맞서기 위해 서방 공세를 시작한 소련과 손을 잡는다.[127] 1921년 시점에는 승승장구하며 그리스군을 콘스탄티노플 지척까지 밀어붙이고 시노프와 트라브존 수복을 눈앞에 뒀으나 크림 반도에서 퇴출당한 데니킨과 브랑겔의 백군이 남은 흑해함대 전력을 대동해 폰토스 공화국에 합세하고, 프랑스가 데스페레 휘하의 야전군 5만을 추가로 투입하면서 멈칫하게 된다.
15. 불가리아 왕국
- 블라디미르 바조프
플레벤 제9보병사단 분견대를 지휘하며 겨우 8천의 병력으로 러시아-루마니아군 15만을 막아냈으며 이후 버차니와 함께 코벨 전선에 참가했다. 서유럽에서 독일의 공세가 진행되는 동안 테살로니카 전선에서 영프 2군과 세르비아, 그리스군을 상대했고 특히 도이란에서 영프연합군 7만을 단, 2만의 병력으로 저지해냈다.
16. 체코슬로바키아 군단
- 토마시 가리크 마사리크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의 지휘관으로 이상설과 비밀리에 회담을 하여 체코 군단, 폴란드 군단 그리고 시베리아 소총병 사단과 함께 시베리아 횡단철도로 만주-한국 본토까지 철수하는 것에 동의한다. 김시진, 차르 일가와 함께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무사히 빠져나와 시베리아에서 막아서는 적군을 상대하며 만주로 향하는 여정을 돌입한다. 적군과 싸우는 사이 저 멀리 조국에선 종군 거부 운동을 일으킨 체코 민족주의 세력에 의해 지도자로 추대되었다.
17. 벨기에 왕국
- 알베르 1세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벨기에 국왕. 김시혁에게 이번 공세를 통해 벨기에를 탈환할 수 있는지 물었고, 가능하다는 대답을 받자 김시혁의 계획을 전적으로 지지한다.
18. 그리스 왕국
- 엘레프테리오스 베니젤로스
파리 강화 회의 당시 그리스 총리. 김시혁에게 동부전선에서 오스만군을 격퇴해준 것에 대해 감사를 표현하고 향후 정국에서 대한제국의 만주 영유 안건을 지지해주는 대신 원역사에서는 논의만 있었던 폰토스 공화국 설치 안건을 지지해줄 것을 요청했다.
[1] 군부내 친일 세력의 영향력이 상당히 큰 편인데 경복궁 습격 당시 내부 친일파가 군령을 위조해 평양 기영병들이 사수하던 영추문 방어력을 약화시켰을 정도.[2] 조선 왕조 시절부터 한양에 뿌리내리고 있던 무반 명가들은 대원군의 군사 개혁과 임오군란, 갑신정변 등 수차례의 정변 끝에 신헌(신팔균의 조부)의 가문을 제외하면 소멸했다. 본래 억세고 상무적 기풍이 강했던 북부 출신들은 조선 왕조 내내 차별받다 보니 보수적인 유림층이 없어서 빠르게 근대화의 흐름을 탔고 극동전쟁이란 전면전에서 공을 세워 날아올랐다. 상무적 전통이 희미했던 영호남은 극동전쟁에서도 제2전선으로 돌려진 탓에 실력이건 실적이건 경쟁이 되지 못했는데, 한편으로 유림의 본산이자 농업 중심의 경제 체제를 유지함으로서 근대화 흐름이 늦어 군주를 보위하는 전통적 사고방식에 더 익숙하다 보니 강종이 포섭하기에는 아주 좋았다.[3] 수도권 인근의 3사단과 8여단은 영관급 이상 장교들이 근황파, 평양의 2사단과 만주의 6사단은 위관급에 근황파가 대거 자리잡으며 그외에도 철도경비대나 경무청 등 준군사조직 요소요소에도 근황파가 들어가 박혔다. 향후 대대적인 숙군이 필요해졌다.[4] 경기도의 진위대 3여단을 제외하면 정규군 부대가 없어서 관서, 관북은 물론 서간도와 북간도 병마까지 전부 통솔하는 양서순무사 김시혁의 권위가 훨씬 높았다.[5] 독자들은 4.19 혁명이 떠오른다는 평이 많다. 이승만의 군 사병화 시도에 꾸준히 불편한 입장을 드러내고, 미국의 에버레디 계획에 은밀히 협조할 의사도 내비쳤던 군은 강경진압을 거부하고 국민 여론에 협력했다.[6] 나무위키에 문서가 개설된 사창리 전투는 6.25 전쟁 당시 동명의 강원도 화천군 마을에서 벌어진 전투이다. 작중 등장하는 함경도 사창리는 실제 역사에서는 북한에 의해 신창리로 통합되었다. #[7] 원역사에서도 이응준은 이갑의 사위였다.[8] 근황파는 일부러 1근위기병사단에게 연료를 부족하게 보급해 유사시 한성에 진입할 수 없도록 하려 했으나 민영찬은 이를 짐작하고 SI 단위계와 야파법, 척관법의 차이를 노려 서류상에 기록된 것 보다 훨씬 많은 연료를 배급했다.[9] 강종이 군부, 관료를 견제하기 위해 주요 관방지의 유수들을 임명할 때, 확실히 근황파로 분류된 인사들과 군부, 관료와 갈등이 있는 인사들을 임명했다.[10] 사실 김좌진과 함께 오헝군을 급습한 것도 어차피 낙오당해서 늦었다고 벌받을 테니 기왕에 벌받을 거 일이나 하나 저질러보자는 마인드로 지른 거다... 물론 비록 결과는 대성공이었으나 곧바로 단독 행동했다고 대대장에게 까였다.[11] 장갑차가 러시아군 사양보다 장갑이 훨신 강화된 특주품이라 집중 사격을 받고도 총상을 입진 않았으나 야간에 쫒기면서 이동한 탓에 원수부 담장을 들이박아 머리에 상처를 입는다.[12] 부관 생활을 오래하는 건 장기복무를 노리는 장교에게 좋은 일이 아니다. 진급을 위한 경력관리에 필요한 주요 지휘관 보직 다는 게 그만큼 늦어지기 때문. 그래도 지청천은 부관달기 전에 참전 경력과 전공을 적잖이 쌓아뒀고 원수한테 눈도장도 찍었으니 상황이 좀 낫다.[13] 사단 지휘부는 원래 이범석만 보내려고 했었지만 이범석이 엉뚱한 짓을 하는 것을 억제하기 위해 같이 투입되었다.[14] 작중 양무호는 성능은 보잘것없는 주제에 연료인 석탄 소모량은 매우 커서 전력 부족에 시달리던 대한제국에서도 운용을 포기하고 그냥 항구에서 놀고 있었다. 오죽하면 원산 상륙작전에서 1회용 병력 수송선으로 활약한 걸 두고 '군밤의 혜안(...)'이라고 할 정도다...[15] 작은 어뢰정 8척이 뭐 그리 대단한가 싶겠지만, R/D 없이 오직 견시에 의존하던 시기에는 섬 많고 꼬불꼬불한 한국 남해안에 매복시켜 치고 빠지면 일본 입장에서는 무척 골치 아픈 적수가 될 수 있었다.[16] 현지 게릴라들과 교전 및 콜레라 발생으로 3천의 사상자가 발생한다. 게릴라 진압한다고 혼춘 일대에서 학살 행위를 벌이고 열악한 보급을 보충한답시고 북청, 성진, 경흥, 함흥 등지에서 과도한 징발을 해 함경도 사정까지 악화시킨다.[A] 시도급 지명은 순양함과 구축함 함명에만 사용하게 규정 되어있는데도 전국 지자체가 김칫국 마시며 달라 붙는 바람에 진즉 각하, 삼남은 충무공 이순신을 쓰자고 하나 이순신은 대한제국이 직접 건조한 최고, 최강의 함선에만 허락되어야 한다는 해군이 반대, 평양을 중심으로 서북에선 김시혁의 이름을 붙이자고 하나 김시혁 본인이 후대에 험한 꼴 보기 싫다며 완강하게 거부하고 황제도 살아있는 사람 이름 붙였다 배 가라앉기라도 하면 어쩌냐고 완곡하게 거부, 더 과거에 활약한 장군들 이름을 붙이자니 중국, 여진족 때려잡은 장군들이 많아서 만주를 동화시켜야 하는 정책 기조와 맞지 않았다.[A] [19] 이때 헌병대에게 '우리가 이곳에 직접 당도한 이상, 희망을 버려라!' 라고 소리친다.[20] 김시혁은 그때마다 그의 의견을 기각했다.[21] 익문사는 당시의 정보기관 중 인지도는 가장 높으나 경운궁 화재로 인한 문서 소실 탓에 오늘날 구체적인 학술 연구가 불가능하다. 실체를 두고 이런저런 추측만 나도는 상황.[22] 원역사에서는 을사늑약 이후 자결하려다 실패해서 시력을 잃었다.[23] 사실 이 독차 사건은 조사 과정에 석연찮은 부분이 너무 많아서 고종의 자작극 아니냐는 의혹이 학계 일각에서 제기되고 있다.[24] 원 역사에서는 요절한 이복 남동생들이 있었다.[25] 원 역사에서도 일본 황실의 일원인 이방자 여사와 결혼 했던 것을 생각하면 나름 원역사 흐름대로 가는 셈이다.[26] 극동 전쟁으로 초토화된 삼남 복구를 주도한 게 내장원이고 참전용사에게 지불할 수당과 연금도 내장원 수입에서 나오고 있어 강종이 이용익과 대담에서 전격적인 토지 개혁 필요성에 공감했음에도 바로 손대지는 못했다.[27] 이때 박두영이 이럴 줄은 예상 못 했는지 처음으로 당황한다.[28] 이 때문에 이승만은 낙루 총리라는 별명을 얻게 된다.[29] 삼남 농촌은 극동 전쟁 이후 황실의 내탕금 덕분에 간신히 살아날 수 있었으며 만주인들은 일민주의의 기세를 막기위해 황실에 기댈 수 밖에 없었다.[30] 정확히 말하면 진위 여부를 두고 왈가왈부가 많은 사건이다. 2010년대 이후 고종이 거슬리는 신하를 제거하고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벌인 자작극이라는 반론이 제기되고 있다.[31] 이 장갑차 덕분에 김시혁은 간신히 헌병대의 사격을 뚫고 원수부로 도달할 수 있었다.[32] 이때 왼손 약지 손가락을 자른 상태였다.[33] 이후 그의 후임으로 임명된 신우균이 강종의 친위쿠데타에 협조한 것을 보면 강종이 친위쿠데타를 위해 일부러 그를 경질시킨 것으로 보인다.[34] 대륙법에 영향을 받은 일본법에 영향을 받은 게 대한제국 사법부라 다른 부처보다 유독 친일 성향이 강했다. 극동 전쟁 당시 법부대신 장석주를 비롯한 다수의 법조인들이 일본 측에 가담했다 숙청되어 지방은 순회판사 제도로 운용해야 할 정도로 만성적 인력 부족이 생겼다.[35] 이때 '저놈 끌어내!'라고 소리친다.[36] 이때 김철수에게 '조국을 배신한 매국노 놈이 어디서 이들을 더러운 혓바닥으로 꾀어내 피비린내 나는 전장으로 끌고 가느냐!라는 호통을 듣고 도망치기도 했다.[37] 대륙법에 영향을 받은 일본법에 영향을 받은 게 대한제국 사법부라 법부는 다른 부처보다 유독 친일 성향이 강했다.[38] 일반적으로는 지주 세력이 가장 보수적인 세력으로서 진보적이기 마련인 학생 세력과 대립할 가능성이 높겠지만, 작중에서는 극동전쟁 때 벌어진 일본군의 잔혹행위로 말미암아 상황이 크게 달라졌다. 추정 100만에 가까운 학살이 벌어진 삼남에서 전통적인 지주 세력은 소멸했고 내장원이 주인 잃은 빈땅을 난민들에게 불하하는 방식으로 전후 복구가 이뤄져 이전 지주세력과는 접점이 없는 새로운 지주세력이 나타났다. 이들이 자녀들에게 고등교육을 이수케 함으로서 자연스럽게 지주와 학생이 하나의 파벌로 뭉치게 되었다.[39] 익문사에 적발되면 즉시 처리당할거라 수첩에 적어 알려준 보여준 다음 종이를 찢어 삼킨다.[40] 여기서 강(槺)종이 선택되어 이형의 묘호는 강종이 된다.[41] 증강된 헌병대는 원정군이 복귀하는 즉시 한성을 떠나 남만주로 재배치, 수집한 정보는 원수부, 내각과 공유, 수사권 문제는 경무청에 양보.[42] 작중 성균관의 연구 성과로 언급된 사안을 살펴보면 만주와 본토를 아우르는 행정 구역 개편, 농업협동조합 설립을 통한 삼남 지방에서의 금융 자본 확대, 러시아 제국 멸망과 소비에트 연방 출범에 대응한 북방정책, 원양에서 작전 가능한 대함대 설립 필요성 등 정치, 외교, 경제, 군사 등 국가 운영에 중요한 모든 방면에 걸쳐 있다.[43] 이근상은 과거 A7V를 보고 원정군이 저런 양철 상자에 고전했냐고 비아냥 거렸지만 막상 A7V가 자신들을 상대하자 당황했다.[44] 이때 2여단의 소속된 인원들은 황국협회에서 축출된 근황파 탁류파 보부상들이 대거 들어가 있고 매관매직 등 부패가 심각해 평소에 민형식 본인도 한 몫 챙기면서 살던 도중 방어선을 구축하라는 명령이 내려져 초조해 했다.[45] 게다가 2여단 인원들은 반역자들을 처벌하겠답시고 눈에 띄는 사람들을 아무나 잡아다가 함부로 대하거나 협조하겠다고 한 경무서까지 습격해 감옥소에 갇힌 사람들을 마구잡이로 사살해 순검들까지 시위대에 합류하게 만드는 등 사고를 치고 있으며 이를 어느정도 통제하려 한 민형식도 위협하면서 막나가고 있다.[46] 민형식을 죽인 참모장은 민형식이 비겁한 겁쟁이스러운 면모를 보였다고 욕하지만 제1강습보병여단이 기습하자 바로 항복해 버린다.[47] 정훈은 원 역사에서도 일본 육사 출신 친일파로 일본에 항거하는 조선인들에 대해 몇백 명만 종로 거리에 세워서 총살하면 된다는 막말을 입버릇처럼 하곤 했다.[48] 비슷한 시기를 다루는 다른 한국 대체역사소설 조선, 혁명의 시대에서도 1930년대에 기무부대장으로 육군 강경파 쿠데타를 주동하고 항의하는 시민들을 유혈진압하는 악역으로 등장했다.[49] 전우는 이이와 송시열에서 내려온 기호학파의 맥을 이은 인사라 제자가 가장 많았지만 적극적이든, 소극적이든 항일은 일절 하지 않았다. 3.1 운동은 단발한 이들과 함께 할 수 없다며 패싱하고 3.1 운동에 참여하지 않은 경상도와 충청도 유림들이 반성과 더불어 추진한 파리 장서 사건때는 충청도 유림지도자 유준근의 간곡한 설득에도 참여를 거부했다. 유준근과의 면담에서 그는 민족대표 33인을 이교라 폄하하고 이교에 뒤를 따라 독립운동에 참여하는 것은 치욕이며 수신하며 도를 닦는 게 유림이 할 일이라는 경악스러운 발언으로 유준근에게 당신이야말로 민족반역자란 일갈을 듣는다.[50] 특히 근황을 부르짖으며 반란까지 일으켜 놓은 주제에 그 강종이 일본에 맞서 궐기를 독려했던 극동 전쟁때는 아무것도 안 했으니 기회주의자 소리 들어도 할 말이 없었다.[51] 미천한 무관 주제에 어디서 유림의 도를 논하는가!, 고려가 전쟁을 숭상하다 망했다, 너희는 참람하게 부국강병을 논해 이 나라를 고려처럼 망조가 들게 하고 있다 등등. 당연히 김시혁에 의해 전부 논파당했으며 특히 김시혁이 성종 시기 대사헌이었던(즉, 현 유림에게는 대선배님인) 이서장의 말까지 인용하자 입을 다물 수 밖에 없었다.[52] 김시혁은 인생에서 가장 후회하는 일이 3가지 있는데 첫째는 군인이 되겠다는 민정의 말을 흘려들은 것, 둘째는 오스트리아-헝가리 무관단에게 별 생각 없이 대한군 교리를 전수해 준 것, 셋째는 제위에 오른 의친왕에게 쭉 옆에서 보필하겠다는 선언해 은퇴를 포기한 것.[53] 일단 극동 전쟁 이전임은 확실하다.[54] 극동전쟁 당시 일본군의 요시찰 인물로 등록되었음에도 요리조리 검문 검색을 피하고 게릴라전을 벌이던 실력이 여기서도 발동되었다고.[55] 엄귀비와 의친왕비, 최로하도 지지하는 내용이다.[56] 우장춘은 농학 연구도 연구거니와 오늘날의 고스톱 룰을 정립한 사람이기도 하다.[57] 아내 역시 우정국 기선을 통해 망명하는데 성공한다.[58] 생소한 개념을 이해하지 못하는 기록국 요원들에게 알아듣기 쉽게 설명해준다며 교통 정리하는 여순검을 거론한다.[59] 의친왕은 대번에 올가의 말에 담긴 저의를 파악하는데 김시혁은 끝끝내 눈치를 못 챈다.그 아우에 그 형[60] 이때 차르가 직접 지원을 청했음에도 임시정부의 총리 및 장관들의 인사권을 주면 고려해보겠다면서 지원을 차일피일 미뤘다고 한다. 즉, 차르의 명령도 씹은 것이다.[61] 데니킨은 차르가 직접 모스크바 지원을 청했음에도 임시정부의 총리 및 장관들의 인사권을 주면 고려해보겠다면서 지원을 차일피일 미뤘다고 한다. 즉, 차르의 명령도 씹은 것이다.[62] 원 역사에서도 전간기에 영국은 이 논리로 독일을 도왔다가 독일이 프랑스와 벨기에를 밀어버리고 영국을 먼저 침공한 뒤에 소련을 침공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따라서 프랑스와 벨기에가 소련이고 뭐고 독일 재무장을 허락하지 않는 건 타당한 판단이다.[63] 그나마 모스크바는 점령하고 남쪽의 툴라 조병창에서 올라오는 보급을 끊는 데는 성공해서 저렇게 협상이라도 한 것이다. 이것조차 못 했다면 김시진에게 일방적으로 끌려갈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64] 처음 언급된 건 2부 786화. 정식으로 스탈린임이 밝혀진 건 2부 959화. 무명의 정치장교로 언급되었을때부터 독자들은 스탈린이라 추정했는데 원 역사와 혁명의 방향성과 주요 인력 구조가 바뀌었기 때문에 원 역사와 달리 아직 스탈린의 인지도가 다소 처질 만하기 때문이다.#[65] 본작에 누구나 알법한 유명 인사들의 이름을 공개하지 않고 활동상만 슬쩍 보여주는 패턴이 꽤 있다. 독일 사이드에선 누가봐도 롬멜인 산악부대 장교가 동부와 이탈리아 전선에서 활약하는데 이름은 끝까지 언급이 안 된다.[66] 이때 몰로토프를 타바리쉬(동지)라고 부르자 흠칫했다.[67] 당시 열강의 서열은 국력보다 외교적 입지, 패권이 더 중요했다. 당장 미국의 경제력이 1차대전 이전에 유럽 전체 수준으로 올라왔음에도 불구하고 신대륙 국가라는 이미지와 각종 내부적 문제 때문에 1차대전 전까지 2류 열강 취급을 받았다.[68] 본작 1차대전 당시 일본이 보인 태도에 기존 열강들의 불신과 짜증을 샀음에도 불구하고 여러 이권을 쟁취하는데 성공했음을 고려하면, 대한제국처럼 유럽 파병을 적극적으로 했을 경우 대우가 달라졌을 가능성이 높다. 어찌 보면 자업자득.[69] 현지 군인들이 정부의 명령을 무시하는 건 기본에, 군인들이 성병에 많이 걸린다고 하자 위안부 소리를 하거나 연해주에서 절찬리에 학살을 벌여 러시아인과 러시아계 한국인들을 모조리 적으로 돌린 상황에서 뒤늦게 러시아 황실 일가가 탈출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 러시아 황실이 타고 오는 열차를 폭파시키면 연해주를 손에 넣을 수 있다는 소리나 하고 있다.[70] 처음에는 군부처럼 개입하려 했지만 김시혁이 가담했다는 말을 듣자마자 결과는 정해졌다며 손 뗐다고 한다. 가만히 있으면 중간은 간다[71] 국가의 체급 자체는 일본이 대한제국보다 크지만, 정작 그 체급 유지를 위한 핵심 요소인 식량(쌀), 경제(금), 연료(무연탄)에 대해 대한제국이 일본의 목줄을 쥐고 있는 상황이다.[72] 당장 영일동맹으로 일본과 같이 묶인 영국조차 일본이 아닌 대한제국을 아시아 1위 열강으로 인정할 정도다.[73] 이에 대해선 김시혁이 처음 빙의한 1894년 당시 일본보다 조선이 아래였던 시절을 잊지 못해서 그러는 것이라 추측하는 이들도 있다. 실제로 이때 일본은 운요호 사건, 임오군란, 동학 농민 혁명, 청일전쟁 등의 굵직굵직한 사건에 개입하며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한창 올리고 있었기에 그 시절만 해도 아래였는데...! 라며 과거 그 시절을 잊지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74] 원 역사에서도 가상적국이지만 집권 세력이 상대적 온건파일 경우에는 강경파의 득세를 막기 위해 일부러 편의를 봐주는 경우가 종종 있었는데, 특히 상시 핵전쟁 위협에 시달리던 냉전기에 자주 나타난 현상이었다.[75] 사실 다이쇼의 판단이 틀린 것도 아닌 게, 역사적으로 일본의 권력자들이 자기 입맛에 맞는 덴노로 갈아치우며 강제 퇴위당하거나 심지어 폐위당한 덴노들은 꽤 많다. 다이쇼에게 있어 막부나 군부나 거기서 거기이니 당연하다.[76] 다른 지휘관들의 군도는 일반적인 노획물자 처리 규정에 따라 한데 모아서 처리했지만 히데노리의 검은 그가 개인 자격으로 건네준 것이라 김시혁이 그대로 소장했다. 히데키를 만난 김시혁은 혹여 검을 돌려받고 싶다면 돌려줄 생각이었으나 히데키는 그 검은 부친이 장군께 직접 건네주신 것이고 김시혁 장군의 전술을 배울 수 있다면 그깟 검은 얼마든지 줄 수 있다는 말을 남겼다며 돌려받을 생각이 없다고 전했다.[77] 물론 김시혁은 러시아의 모신나강을 들이기 위해 딱히 도입 생각은 없었지만 그래도 경쟁자가 있으면 좋겠다 생각이 들어 일단 프로모션은 들어봤다. 이후 강종의 독단으로 인해 선계약이 체결되면서 곤욕을 치르나 30년식 소총 계약금은 강종의 사비로 낸다는 조건으로 계약이 대충 성사되며 이렇게 도입된 30년식 소총은 의병 게릴라 부대가 나름 잘 써먹게 되며 종전 후에도 만주 쪽 개척촌과 경무청에서 잘 굴리고 있다.[78] 원래 역사에선 1915년에 육군대학 졸업한 뒤 대위로 진급한 상태였고 스위스 주재무관을 거쳐 1920년에 소좌로 진급한다.[79] 그 철도 노선은 영국의 통제를 받고 있기 때문에 이를 폭파시키며 당연히 외교적 문제가 생기기 때문이다.[80] 막상 자신은 잡히면 안된다는 이유로 후방에 남아있는다.[81] 젊은 시절의 무타구치는 일본군의 시베리아 출병 당시 캄차카반도의 페트로파블롭스크에 잠입하여 목숨 걸고 정탐 활동을 벌일 담력은 있었지만, 이건 야전부대 지휘관에게 필요한 전투 경험은 아니었다. 현지 파르티잔과 싸워 본 경험도 없고, 1917년 육대 졸업 후 육군성 운수부 선박반에 배치되어 중국으로 좌천되는 1936년까지 대략 18년간 배부르고 등 따뜻한 육군성과 참모본부만 돌며 야전에서 지휘 경험을 쌓지도, 1차 대전 관전장교로 파견되지도 않았다. 군임임에도 전쟁이 얼마나 어렵고, 무서운지 전혀 모른 채 팬대만 잡다 나이 먹고 계급만 올라간 무타구치는 노구교에서, 임팔에서 연달아 무책임한 행각을 벌인다.[82] 원래는 몸이 아프다고 몇 번이나 고사했지만 하라 다카시가 삼고초려한 끝에 임명되었다.[83] 그와중에 육군성이 책임을 외무성에게 돌리자 더 분노해 할복하겠다고 날뛴다.[84] 이 훙후즈는 사실 훙후즈로 위장한 중화민국 부대로 고모토 다이사쿠가 연락도 없이 멋대로 행한 일이었는데 이들은 반쯤 마적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에 일본 영사관도 공격한 것이다.[85] 물론 러시아도 극동전쟁 때 같이 싸워준 혈맹이니만큼 프랑스에 비하면 적을 뿐이지 도움 자체는 잘해준 편이다.[86] 한국에 오래 지내며 이런저런 유물 콜렉션들을 잔뜩 모아두었고 1919년 계엄령 선포 후 유탄이 날아오는 와중에도 챙길 정도로 애지중지한다.[87] 라이시테를 엄격히 준수하는 프랑스 정치인들이 보기에 독실한 예수회 집안에서 자라 매일 아침 기도문 외우는 포슈나 군종신부 없어졌다고 개인 신부를 대동하고 다닌 노엘 드 카스텔노 같은 장군들은 못 미더운 장군이었다. 반면 페탱은 21살 어린 이혼녀와 결혼했을 정도로 종교를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88] 페탱은 자기보다 낮은 사람들에겐 자상하고 세심하게 챙겨주고 나이와 계급을 넘어 부하 장교들과 교리 연구하는 것도 전혀 꺼리지 않는 사람이었지만 동등 혹은 더 높은 사람들과 친해지는 사교성은 아예 없었다. 군인과 정치인을 막론하고 동급 이상의 인사와는 끊임없이 마찰을 빚어냈기 때문에 원수 계급인 김시혁과는 인종 문제가 아니더라도 섞일 수가 없었다.[89] 이때 신순성은 운명의 결정 앞에선 결과론적인 숫자놀음은 필요 없으며, 단지 그것에 맞설 것인가, 아니면 순응할 것인가의 차이만 있을 뿐이라고. 그리고 인간이 강한 이유는 정해진 운명에 순응하기보단, 스스로 그것에 맞설 방법을 선택하기 때문이라고 대답한다.[90] 원래 역사에서도 한국에 왔던 인물. 군부 포공국 기기창 수석기사로 1901년에서 1904년까지 근무했다.[91] 애초에 전통적으로 유럽에서 가장 인종차별 성향이 심한 민족들 중 하나가 독일인이었다. 괜히 나치즘이 창궐해서 홀로코스트같은 대형사고를 친 것이 아니다. 그 외에는 반쯤 유럽과 따로 노는 러시아가 자강두천(...)을 이루고 있다.[92] 검은머리 미군 대원수에서 미군 소속 황인 사단장과 흑인 장병이라는 이유로 인종차별적 방심을 하다가 아미앵 전투에서 이틀 만에 사단 하나가 갈려버려 루덴도르프 공세까지 돈좌되는 대형 참사가 난 것과 비교하면 명확한 차이다. 물론 이때 호되게 당한 이후에는 다시는 방심하지 않았다. 깜둥이 주제에 제국의 고급 전술을 따라 쓴다고 욕하는 등 레이시즘은 여전했지만.[93] 다만 이때는 독일의 외교 장관이 대한제국은 러시아와 프랑스의 사실상 종속국이라 우리보다 그들과 더 친밀했을 것이라는 팩트를 들려준 덕에 머지않아 진정되긴 했다.[94] 동부전선도 신경 써달라는 힌덴부르크의 요청을 무시하고 독일 전력의 6할 이상을 서부 전선에 배치한 게 팔켄하인이라 자업자득이다.[95] 브루실로프 공세에서 독일군이 털리던 당시 서부전선의 베르됭 공세는 두오몽 요새를 함락시키며 독일 입장에서 승산이 보이던 상황이었으니 이쪽 세계에선 베르됭 전투가 아닌 한국군의 참전이 1차 대전의 결정적 분기로 받아들여질 가능성이 높다. 물론 일부 전쟁사 연구자들은 한국군이 참전하지 않았어도 독일군은 베르됭에서 돈좌되고 주도권을 내줬을 거라 주장하겠지만 일찌감치 역사가 바뀌어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이 러시아군에게 너무 큰 패배를 안겨주고 그게 서부전선에도 영향이 간지라 다수설이 되긴 힘들것이다. 오히려 대부분의 사람들은 한국군 미참전시 베르됭에서 독일이 이겼을 것이라 if를 돌릴 가능성이 크다.[96] 정확히 말하면 팔켄하인이 소령 시절 적은 보고서가 있긴 했지만 그것도 10년이 넘게 지나 현 1차대전 시점에서 쓰기에는 지나치게 낡은 정보였다.[97] 물론 당시 러시아 제국을 제외한 유럽에서 김시혁과 한국군의 진상을 정확히 아는 인물은 페르디낭 포슈와 팔켄하인 정도뿐이라 힌덴부르크만 뭐라 할 순 없다.(미국까지 포함한다면 퍼싱도 존재한다.) 그 시점에서 한국이 당대 유럽 국가들보다 전술 측면에서 앞선다는 걸 당대 유럽인 중 누가 쉽게 믿겠는가?[98] 린징겐이 그를 설득하기 위해 대한제국의 3월 혁명의 예시를 들었지만 독일군 내에 한국군처럼 하는 사람이 어딨냐고 반문했다.[99] 바로 며칠 전에 폭동을 진압하라는 대통령의 명을 거절했다.(...)[100] 보급선에 가해질 위협 탓에 수적 열세에도 방어 전면을 줄일 수 없는 한국군은 남겨둔 예비대를 전부 끌어올 수밖에 없고, 넓은 방어선을 지탱하느라 과부하가 걸렸을 때 남겨둔 군단으로 크게 우회해 한국군의 후방을 타격, 보급선을 완전히 차단하고 앞뒤로 포위 섬멸한다는 계획.[101] 장병들 처우도 좋아서 군악대원들은 오페라 극장 공연을 시작으로 여기저기 초청을 받고, 제빵병들은 독일식 베이커리를 황제 식탁까지 올리며 돈을 버는 데 원 역사에서의 일본이 그랬듯 전간기에 일부가 정착하거나, 독일계 문화가 이식될 가능성이 높다.[102] 그로덱은 같은 시대를 다루는 검은머리 미군 대원수에서 주인공과 흑인 부대원들을 유색인종이라 얕보다 처참하게 패하는 모습으로 등장해 국내 대역 팬덤에 알려진 인물인데 여기서는 일말의 방심도 하지 않는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갑작스러운 이동으로 정신없는 와중에 적의 매복할 만한 지점을 정확히 짚어내고 정찰을 지시했으니 이미 캐나다 기병여단이 목숨 내놓고 돌격할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103] 이때 히틀러를 잘 챙겨준 하사가 원 역사에서 히틀러의 상병 시절 히틀러를 잘 챙겨줘서 히틀러가 홀로코스트 때 구해준 유대인 하사라는 설이 있다.[104] 이때는 아직 박사 학위를 따기 전이었지만, 세상이 평화로워지면 박사 학위를 딸 거라고 말하고 다녔고 머리 좋고 성실해서 한국군이 존중의 의미로 박사라 부르게 된다.[105] 괴벨스는 나치당 결성 이후에도 좌파로 분류될 정도로 좌익 성향이 강했고 처음부터 반유대주의를 신념으로 삼은 것도 아니었다. 암울한 현실에 찌들어 살다 만난 히틀러를 독일과 자신을 구원할 메시아로 보고 그의 신도가 되면서부터 반유대주의를 부르짖게 된다.[106] 원 역사에서도 처음에는 히틀러를 미덥지 않게 보았다가 나중에 심취했다.[107] 1차대전 당시 미 육군의 참담한 상태는 검은머리 미군 대원수 시절에도 잘 묘사되었지만, 1차대전 파트가 초반부에만 있는 데다 주인공 팀의 혼신의 캐리 덕분에 1차대전 후반부에는 특유의 물량으로 단점을 상쇄시키는데 성공해서 큰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108] 일본의 경우에는 대동아공영권에 대한 야망을 일찌감치 눈치채고 경계하는 것도 있다.[109] 2부 외전에서 한국은 미국에게 적어도 거짓말은 안 하는 반면 일본은 미국 외교가에 거짓말을 한 적이 많고 막무가내로 행동해서 미국 외교관들을 곤란하게 한 적이 여러 번 있다고 한다.[110] 본인이 운영하는 광산 회사에서 나오는 막대한 자금 때문에 정치자금을 받는 게 아니라 공화당, 민주당 정치인들에게 주는 쪽이라고 한다. 물론 미국 정치의 특성상 본인도 여러 기업인들에게 정치자금을 받고 있겠지만 말이다.[111] 이때 본인의 광산 회사가 한국뿐만 아니라 본래 바라던 호주에도 사업체가 진출해서 돈 크게 벌고 있다고 언급되는데, 호주가 일본의 야욕을 일찌감치 간파해 반일 정서가 매우 심해서 아시아 패권을 방어하기 위해 일본을 지원하는 영국 본토의 의사를 씹고 만일의 경우를 대비해 한국, 프랑스와 몰래 연줄을 댈 거라는 떡밥이 있었는데 그것과 관련된 것일 수도 있다.[112] 원역사에선 부통령은 캘빈 쿨리지고 후버는 하딩 정권의 상무장관으로 근무했다. 후버가 부통령이 되면서 쿨리지는 자연스럽게 상무장관직에 취임했다.[113] 3선 금지가 법에 못 박히지 않았고 율리시스 그랜트, 테디 루스벨트 등 대놓고 3선 노렸다 당내 반발로 실패한 사례들이 있어서 깔끔하게 물러날지는 불명.[114] 이대로 대사관에만 있으면 자신의 입지가 줄어들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115] 원 역사와 검은머리 미군 대원수처럼 사복 입고 갔다가 오해 사서 체포당했다.(...)[116] 김시혁과의 첫 대면에서부터 너무 자연스럽게 인종차별적인 발언이 나와서 살짝 지적하자 오히려 뭐가 문제였냐면서 되묻는가 하면, 도중에 부친이 목화밭에서 흑인들을 채찍질하던 것을 회상하는 묘사도 나와 독자들이 기겁했다.[117] 의화단 운동 당시 남부연합 국기를 걸어두었다가 미군과 시비가 트여 김시혁이 중재하는데 고생했고 하코트에게 일침을 먹이기도 한다.[118] 사실 하코트의 행동을 보면 특별히 성격이 악하다기보다는 잘못된 교육을 받아서 사고방식에 문제가 있는 쪽에 더 가깝다.[119] 이때 집에 있던 카메라를 전당포에 맡겨서 여비를 확보했는데 그의 이름을 본 김시혁이 그 할아버지에 그 손자라고 웃으며 합격시켜주는 동시에 전당포에 맡겨진 카메라도 다시 찾아와 줬다.[120] 존 브라우닝이 설계한 반자동 화기인 Auto-5나 레밍턴 모델 8는 롱 리코일 작동 방식이며, 그가 설계한 각종 권총이나 기관총들 대다수가 블로우백, 쇼트 리코일로 작동한다. M1895 콜트-브라우닝 기관총과 M1918 브라우닝 자동소총이 가스 작동식이지만 둘 다 큼지막한 소총탄을 쓰는 물건이기에, 원역에서 그가 제작한 총기 중 중간탄과 가스작동식이 조합된 화기는 없다.[121] 콜트 M1929. 원역에서 미군 반자동 소총 사업에 참여했다 탈락했으며 이 소총의 설계를 기반으로 제작한 게 M1 카빈이다.[122] 처음 3.1 혁명이 일어났다는 말을 듣고 김시혁이 20세기의 나폴레옹이 되는 건가 싶어 발작을 했지만, 김시혁이 의친왕을 새 황제로 추대하고 내각에게 정권을 넘긴 뒤 정치에 손 떼고 지방에서 반란군 잔당 소탕에만 전념하고 있자 진정한 뒤 결과적으로 영국처럼 입헌군주정이 들어섰다는 이유 때문에 생각이 다소 바뀌었다고 한다.[123] 니콜라이 2세는 조지 5세의 이종사촌, 알렉산드라 황후는 고종사촌으로 조지 5세는 사적으로는 이 둘과 친했다.[124] 정확히 말한다면 캐나다 국적이지만, 1부의 배경인 동학 농민 혁명~러일전쟁 시기 캐나다는 완전한 독립국이 아니라 자치령이었으므로 내정 자치권은 있었어도 외교권과 군사권은 영국이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매켄지가 죽을 때도 캐나다는 여전히 독립된 상태가 아니었기에 매켄지의 국적은 영국 국적이라 할 수 있다.[125] 이때 주한 영국영사가 멋대로 종군 기자단 이탈해 한국 취재하면 바로 체포한다고 엄포를 놓자(영국은 일본의 동맹이었기 때문.) 잡을 테면 잡아보라는 패기를 선보인다.[126] 렘베르크는 현재 우크라이나의 르비우를 독일어로 부르는 명칭이며, 폴란드어로는 르부프라고 부른다. 부르는 명칭만 3개일 정도로 민족 구성이 다양했는데 약 5%의 독일계와 절반가량의 폴란드계, 20%가량의 유대계가 친 오스트리아 주민이었고 나머지 25%의 우크라이나계가 친 러시아 주민이었다. 이들은 도시의 주민이 바뀔 때마다 상대를 추방하거나 학살을 저질렀다고 한다. 다시금 이런 학살이 벌어지지 않도록 독일, 폴란드, 유대계 주민들의 피난 시간을 벌고자 외곽 방어를 택한 것. 참고로 미래에서 온 김시혁은 이를 정확히 간파했으나 동생 김시진은 형의 설명에 대해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한다.[127] 원 역사에서도 영국이 유럽에서 잡은 오스만 포로들의 석방을 일부러 늦춰서 민병대만 데리고 그리스와 영프에 맞서 승리했다. 뛰어난 정치인 이전에 일세를 풍미한 명장 케말의 역량이 발휘된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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