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536349> 카포레토 전투 Battle of Caporetto Battaglia di Caporetto Zwölfte Isonzoschlacht | |||
이탈리아 전선의 전투 중 하나 | |||
카포레토 전투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의 공격 | |||
날짜 | |||
1917년 10월 24일 ~ 11월 12일 | |||
장소 | |||
이탈리아-오스트리아 간 접경 이손초강 유역[1] | |||
결과 | |||
동맹국의 승리 | |||
동맹국 | 협상국 | ||
교전국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틀:국기| ]][[틀:국기| ]] [[독일 제국| ]][[틀:국기| ]][[틀:국기| ]] | [[이탈리아 왕국| ]][[틀:국기| ]][[틀:국기| ]] | |
지휘관 |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콘라트 크라프트 폰 델멘징엔| ]] (제14군 참모장) [[틀:깃발| ]][[틀:깃발| ]][[헤르만 폰 슈타인| ]] (제3바이에른군단장)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알베르트 폰 베러(제51군단장) †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 에버하르트 폰 호파커(제51군단장) [[틀:깃발| ]][[틀:깃발| ]][[오이겐 폰 외스터라이히테셴| ]] (오이겐 군집단 사령관) [[틀:깃발| ]][[틀:깃발| ]][[알렉산더 폰 크로바틴| ]] (제10군 사령관) [[틀:깃발| ]][[틀:깃발| ]][[알프레트 크라우스| ]] (제1군단장) [[틀:깃발| ]][[틀:깃발| ]][[카를 스코티| ]] (제15군단장) [[틀:깃발| ]][[틀:깃발| ]][[스베토자르 보로예비치 폰 보이나| ]] (보로예비치 집단군 사령관) | ]][[틀:깃발| ]][[오토 폰 벨로| ]](제14군 사령관)[[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루이지 카펠로(제2군 사령관)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알베르토 카바치오키(제4군단장)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피에트로 바돌리오(제27군단장) | ]][[틀:깃발| ]][[틀:깃발| ]]루이지 카도르나(육군참모총장)|
병력 | 2개 군 350,000명 이상 화포 2,213문 | 2개 군 400,000명 이상 화포 2,200여 문 | |
피해 규모 | 사상자 2만여 명 | 사상자 4~6만여 명 포로 27만 5천여 명 | |
결과 | |||
동맹국의 승리 | |||
영향 | |||
이탈리아 전선의 주도권이 동맹국에게 넘어감 이탈리아 왕국군은 방어전으로 전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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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1차 세계 대전 중이던 1917년 10~11월에 걸쳐 진행된 이탈리아 전선의 전투. 제12차 이손초(Isonzo) 전투로도 불린다. 이 전투를 통해 이탈리아 전선의 주도권이 완전히 뒤바뀌게 된다.2. 배경
1915년 이탈리아 왕국이 삼국 동맹을 파기하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선전포고한 이래, 오스트리아-헝가리는 발칸 전선, 동부전선에 이어 이탈리아 전선까지 강요받게 되었다. 발칸 전선은 독일의 도움과 불가리아의 개입으로 정리했지만 이때 오스트리아-헝가리가 입은 피해는 안 그래도 취약한 오스트리아-헝가리의 동원병력 규모와 맞물려 오스트리아-헝가리에게 심각한 부담으로 작용하였으며, 결국 1916년 동부 전선의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을 목표로 한 러시아 제국의 브루실로프 공세가 성공하는 요인이 되었다. 여기에 에르데이를 노린 루마니아 왕국이 협상국 편으로 새로 참전하면서 가뜩이나 부담이 심한 동부전선의 길이가 종전보다 훨씬 길어졌다. 루마니아의 공세는 독일의 진두지휘 아래 독일 & 오스트리아-헝가리 & 불가리아 3개국군이 역으로 밀어버리면서 대충 수습하긴 했지만 1916년 말 이중제국의 구심점 역할을 하던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의 사망까지 결부되어 이중제국은 급격히 흔들리고 있었다.러시아 혁명으로 무너진 제정을 대신해 새로 들어선 임시정부가 아직 전쟁을 지속하고 있는 상황에서, 독일 제국군 수뇌부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이러한 상황을 염려했고, 또 계속되는 이탈리아의 공세로 오스트리아-헝가리가 행여 무너지지 않을까 우려했다. 실제로 이탈리아 왕국군은 카포레토 전투 이전까지는 오스트리아-헝가리를 상대로 대체로 공세적인 모습을 보였으나, 알프스 산맥의 괴물과 같은 지형에 제대로 된 성과도 없이 삽질성 공세를 남발하는 걸로 전락했고, 이미 상황이 말이 아니었던 오스트리아-헝가리 측도 전선을 유지하는 방어전에서는 좋은 성과를 냈지만 근본적인 역습을 가하는 능력이 없었다. 1917년 무렵에 들어가서는 오스트리아-헝가리군과 이탈리아군은 매번 전투를 벌일 때마다 쌍방에 막대한 피해를 강요하면서도 별 성과도 없는 충돌을 지속했으며, 이 와중에 숱한 장병들이 전투보다 알프스 산맥의 혹한과 낙설, 산사태 등에 죽어나갔다.
이미 이탈리아 왕국군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은 1915년 1차 이손초 전투를 시작으로 1917년의 11차 이손초 전투까지 양군 합계 100만명에 달하는 누적 사상자가 발생한 상황이었다.#참고 양측 모두 병력을 수도 없이 갈아넣었으며, 이탈리아 전선 하나에만 집중할 수 있는 이탈리아와는 달리 동부전선에서 이중전선을 부담해야 하는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의 전력이 서서히 이탈리아군에게 밀리기 시작하여 오스트리아-헝가리에게 매우 큰 부담이 되고 있었다. 자세한 것은 이손초 전투 항목 참조.
한편, 합스부르크 이중제국의 새로운 황제 카를 1세는 제11차 이손초 전투의 패배 이후 독일의 빌헬름 2세에 구원을 요청하며 계속되는 이탈리아 전선의 압박을 호소하며 이를 해결하기 위해 오스트리아-헝가리가 이탈리아 전선에 총력을 다할 테니 독일이 대신 동부전선 전부를 맡아달라는 요청을 한다. 빌헬름 2세와 논의한 독일 제국군 총참모장 파울 폰 힌덴부르크 원수는,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제안을 거절하는 대신 이탈리아 전선에 독일군을 파병하여 직접 전투에 나서기로 결정했다. 이 전투의 규모는 초기에는 주의분산용으로 기획되었으나, 최종적으로는 이탈리아군에 통렬한 일격을 가하여 전선 주도권을 되찾는 것으로 전략목표를 변경하기에 이른다.
본격적인 공세를 하기로 합의한 뒤에도 양국은 전략에 있어 의견 차이를 두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은 전 전선에서의 일제적인 공세를 제안한 반면 독일군은 관전단을 통해 전선을 유의깊게 살펴본 후 이손초 강 유역 북쪽에 위치한 카포레토를 공세지역으로 삼고자 했으며, 결국 독일군의 주장[2]대로 카포레토 방면에서의 공세가 결정되었다.
3. 전개
1917년 10월 24일 새벽 2시를 기해 동맹군은 전면 공세로 돌입한다. 독일-오스트리아 혼성 17개 사단으로 구성된 독일 제14군은 독가스와 포병사격을 신호로 이탈리아 왕국군 방어선을 향해 공격을 개시했다. 동맹군은 기상 예측을 바탕으로 바람이 거의 없는 시간대를 골라 공격을 가했고, 이는 서부전선과 달리 대규모 독가스 사용이 거의 없던 이탈리아 전선에서는 상당히 위력적으로 작용했다. 물론 이탈리아 전선에서도 독가스가 안 쓰인 건 아니었지만 이런 대대적인 사용은 유례가 드문 일이었던데다, 이탈리아제 방독면은 영 신통치 않아 무용지물이거나 오래 버티지 못했다고 영국, 프랑스의 파견장교들이 기록하고 있다.
더군다나 이탈리아군은 동맹군의 대규모 증원 및 공세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이탈리아군 사령부는 조간만 오스트리아의 반격이 있을 것이라는 예상은 했으나 이렇게 빨리 대규모로 올 것이라고는 예상치 못했으며, 무엇보다 독일군이 전선에 출현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이는 독일-오스트리아군이 야간에만 움직여 이탈리아군 정찰기에 포착되지 않은 덕분이기도 했다. 덕분에 이탈리아군 주력은 여전히 이손초 방면으로 크게 돌출된 상태를 유지했으며, 주력이 죄다 최전선에 쏠린 덕에 후방 종심은 지극히 취약했다. 독일군은 이 지점을 정확히 찔러들어왔다.
독일군 보병부대는 이탈리아군이 점령한 산악지대와 그 참호선을 눈 깜작할 사이에 돌파하며 순식간에 이탈리아 주력군의 배후를 들이치기 시작했다.[3] 전체적인 측면에서 독일군의 전략은 이탈리아군의 후방을 들이치는 것이었고 지금까지 오스트리아군만 상대하던 이탈리아군은 독일군의 맹공에 순식간에 무너져내렸다. 특히 단순한 참호전과 보병전만 경험한 이탈리아군은 수류탄과 화염방사기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새로운 방식의 공세에 대응하지 못했다. 서부전선과 같은 개활지의 참호전이 아닌 산악지대에서의 전투에서 수류탄과 화염방사기의 대대적 활용은 탁월한 선택이었다.
안그래도 전선 정면에서 대대적인 공세로 패주중인 와중에 후방으로 동맹군이 깊숙히 침투하려는 모습이 명백해지자 전선을 맡은 이탈리아 제2군 및 제3군은 일제히 붕괴하고 전면패주를 시작한다. 전투개시 3일째인 10월 26일이 되자 이탈리아군 수뇌부는 퇴각을 허가하지 않을 수 없었고 새로운 방어선으로 이손초 강 서쪽의 탈리아멘토 강을 선택했으나 순식간에 돌파당했다. 결국 11월 3일에는 피아베(Piave) 강까지 퇴각해야 했다. 이탈리아군은 여전히 상황을 수습하지 못했으나 동맹군이 늘어진 보급선 문제로 공세를 지속할 수 없었기에 겨우 전선을 형성하고 방어선을 구축할 수 있었다.
주전선의 붕괴로 트렌티노 일대 산악지대에서 약간 진격한 상태였던 이탈리아 제3군도 급히 후퇴, 이로 인해 이탈리아군은 오스트리아 영내에서 획득한 지역을 모조리 상실하고 오히려 자국 영토로 크게 후퇴해야 했으며, 북부의 주요도시 중 하나인 베네치아를 잃어버릴 위기에 처하게 된다. 피아베 강에서 베네치아까지는 더 이상 자연적인 방어선이 없었다.
약 2주간에 걸친 이 전투의 결과 이탈리아군은 전사 약 1만~1만 3천여 명에, 포로만 265,000여 명[4]이라는 경이적인 인명피해를 기록한다. 카포레토 전선에 투입했던 이탈리아 2군, 3군 병력이 총 40만임을 감안할 때 70%에 육박하는 경이적인 병력손실율이었다. 거기에다가 추가로 35만에 이르는 전선 이탈자가 발생했지만 이후 대부분 수습되었다. 물론 1차대전은 참호전이라는 미친 짓 때문에 이 정도의 높은 병력손실이 속출하긴 했지만, 중요한 건 병력손실의 대부분이 포로라는 것.
4. 결과
카포레토 전투의 참패로 이탈리아 전선은 파국을 맞이할 뻔 했다. 이탈리아군은 거의 30만에 가까운 병력을 보름여만에 잃었다. 전투 전 65개였던 보병사단은 전투 후 33개로 말 그대로 반토막이 나버렸다. 이런 상황에서 전선을 유지하기 매우 힘들었다. 그나마 다행인건, 이탈리아 전선이 부차적 전선이어서 독일군도 오스트리아 영내에서 이탈리아군을 축출해낸 것에 만족하고 1918년 루덴도르프 공세를 위해 죄다 서부전선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는 것이었다.이탈리아 왕국은 즉시 패전의 후폭풍에 휩싸였다. 이탈리아군 사령관 카도르나 대장은 카포레토 전투 당시 혼란을 제대로 통제하지도 못하는 한심한 지휘력을 보여줬고, 상황이 통제되지 않으니 휘하 장교들을 상대로 즉결처형까지 남발해댔으며 심지어 깨지고 나서도 "나는 쿠스토차[5]와 아드와에서 패배한 군대를 이끌었을 뿐이다", "이게 다 아군이 파업을 벌여서 일어난 대참사"라는 비범한 변명을 시전하다가 경질됐다. 신임 사령관인 아르만도 디아츠(Armando Diaz)는 그라파 산지와 피아베 강을 따라 방어선을 세운 후 방어전으로 전환했다.[6]
하지만 카포레토 전투에서 정말 열나게 얻어터진 이탈리아군은 독일군의 죽빵 한 방에 제대로 정신을 차린 건지, 정부와 왕실은 '로마를 빼앗기고 시칠리아까지 밀려나도 절대 항복은 없다'며 항전을 선언했고 이탈리아 전역에서 거국적인 자원입대 열풍이 불었다. 디아츠의 노력으로 이탈리아군은 완전 붕괴까지 가지 않고 방어선 안쪽에서 재편성에 성공했으며 전선이탈자들 역시 대부분 수습되었다. 그리하여 이탈리아군은 베네치아 북쪽의 그라파 산지에서 필사적으로 저항해 베네치아를 목표로 남하해오는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을 저지하는데 성공했으며 1918년 6월 피아베 강에서는 이탈리아를 협상장으로 끌어내기 위해 마지막 여력을 쥐어짜 공세를 가해온 오스트리아-헝가리군에 거의 20만에 이르는 피해와 함께 패배를 안겼다. 피아베 강 공세의 실패로 오스트리아-헝가리는 전쟁을 지속할 모든 여력을 상실했으며 이후 최후의 전투인 비토리오 베네토 전투에서는 오스트리아-헝가리군에 최후의 한 방을 불어넣어 50만에 이르는 피해를 안겨 30만의 피해를 입은 지난 패배에 덤을 얹어 되갚아주었다. 그리고 이미 한계에 달해 내부에서 무너져 내리고 있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비토리오 베네토의 패배를 버티지 못하고 붕괴되면서 이탈리아의 최종 승리로 끝이 났다.
이 전투는 대영제국과 프랑스 제3공화국에도 영향을 끼쳤다. 눈깜짝할 사이에 이탈리아 전선이 붕괴되는 꼴을 본 영프 양국은 동부전선을 맡아주던 러시아 제국이 러시아 혁명으로 리타이어하자 동부전선이 종식되어 서부전선에 대한 압력이 크게 늘어나는 것을 걱정하던 차에, 이탈리아까지 박살나 버리자 공포에 휩쓸렸다. 결국 양국은 이탈리아의 지원군 요청을 받아들여 얼마 없는 병력을 쪼개어 이탈리아 전선에 파병하였다. 또, 이런 패전의 이유 중 하나로 협상국 간 공조체계 미비라고 보고 각국별로 따로따로 되어있는 전쟁지휘부를, 대영제국-프랑스 제3공화국-이탈리아 왕국-미합중국 4개국이 하나로 통합하여 지휘하기로 합의한다.
5. 여담
- 당시 이 전투를 치르고 돌아가던 군인들은 안타깝게도 생 미셸 드 모린 열차 참사로 목숨을 잃거나 부상을 입었다.
- 이탈리아군에 장교로 입대한 미국인과 영국인 간호사의 사랑을 다룬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소설 무기여 잘 있거라의 3부가 카포레토 전투 시기를 배경으로 한다.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남주인공이 몇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긴다. 이 소설은 카포레토 전투에 대한 묘사 때문에 무솔리니 정권 당시 금서가 되었다고 한다. 1957년판 『무기여 잘 있거라』
- 다이스가 제작한 게임이자 제1차 세계 대전을 배경으로하는 FPS 게임인 배틀필드 1에서 아포칼립스 DLC로 추가된 맵의 배경으로 나온다.
[1] 현재는 슬로베니아 영토[2] 다만 이것은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장군인 프란츠 콘라트 폰 회첸도르프의 작전을 바탕으로 두었다.[3] 이 전투에서 에르빈 롬멜이 이끄는 독일군 1개 대대는 이탈리아군 방어선 깊숙히 돌파하여 이탈리아군을 혼란에 빠트렸고, 대규모 적군이 후방에 침투하는 걸로 착각한 이탈리아군은 단체로 멘붕해서 도망치거나 항복하기 바빴는데, 이때 롬멜의 소대는 이탈리아군 살레르노 여단 5개연대의 집단항복을 받아내어 포로만 9,000여 명을 잡는다.[4] 제2차 세계 대전에서도 비슷한 일이 반복된다. 사상자는 미국이나 영국 수준인데 전쟁 포로는 사상자에 비해 상당히 많다.[5] 1866년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 당시 이탈리아군 12만이 오스트리아군 8만에게 무참한 패배를 당한 전투. 숫적으로 우세했음에도 이탈리아군은 8천명 이상이 사상했고 오스트리아군은 5~6천명 정도의 피해를 입었다.[6] 이 때 국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의 사촌이자 이탈리아 3군 사령관이었던 2대 아오스타 공작 에마누엘레 필리베르토(Emanuele Filiberto)가 카도르나의 후임 사령관으로 임명될 것이라는 예측이 나왔으나 실현되지 않고 디아츠가 임명되었는데, 이에 대해 이탈리아어 위키백과에서는 전쟁의 패배로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가 퇴위하여 당시 왕위계승서열 2위었던 에마누엘레 필리베르토가 섭정이 될 가능성(당시 성인인 남자 왕족 중 에마누엘레 필리베르토가 가장 서열이 높았다)을 염두에 둔 결정이라는 추측이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