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cond Battle of the Ypres 2차 이프르 전투 | ||
제1차 세계 대전 중 서부전선의 일부 | ||
기간 | ||
1915년 4월 22일 ~ 1915년 5월 25일 | ||
교전 지역 | ||
이프르, 벨기에 | ||
교전국 | ||
프랑스 제3공화국 영국 벨기에 | 독일 제국 | |
동원 병력 | ||
:사단 2개 :사단 6개 | :제 4군[1] | |
사령관 | ||
호레이스 스미스-도리엔 존 프렌치 허버트 플러머 | 뷔르템베르크 공작 알브레히트 | |
피해 | ||
21,973명 전사 59,275명 전사 | 35,000명 이상 전사 | |
결과 | ||
무승부[2] | ||
영향 | ||
독가스 사용의 시작, 화학전 돌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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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2차 이프르 전투는 1915년 4월 22일과 5월 25일 사이에 발발한 독일제국군과 영프 연합군의 전투이다.2. 전투 전
독일의 화학자이자 자원해서 군대에 입대한 발터 헤르만 네른스트[3]는 독가스인 염소가스를 제조해 막스 바우어 대령에게 이를 사용하자고 제안하였다. 에리히 루덴도르프은 신무기 사용에 동의하였고, 이렇게 살상 목적의 독가스가 처음으로 실전에 나오게 되었다.[4] 일부 독일군에게만 방독면을 지급하였다.3. 전투
3.1. 그라벤스타펠 능선 전투(1915년 4월 22~23일)
1915년 4월 22일 오후 5시 쯤, 독일의 4군은 랑게마크의 작은 마을에 염소가스를 폭격하며 전투는 시작되었다. 무려 171톤의 염소가스를 배출하였다. 가스로 인해 프랑스군은 2~3,000명의 사상자를 냈고 800~1,400명의 사망자를 냈다. 사실상 독일군을 향한 영프군의 저항은 없었다. 그래서 쉽게 이프르를 점령할 수 있을줄 알았다.3.2. 성 줄리엔 마을 전투 (4월 24일 – 5월 5일)
첫 독가스 공격으로 인해 수많은 사상자가 생겼다. 이에 캐나다군은 후방으로 가서 군대를 재편성했다. 캐나다군은 성 줄리엔 마을의 서쪽에 위치하였는데, 4월 24일 아침, 독일군이 바로 이쪽으로 독가스를 쐈다. 이미 독가스가 무엇인지 안 캐나다군은 대책으로 손수건에 소변을 보고 코와 입에 대라는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이 조치는 너무 허접하였으며, 금방 마을은 독일군에 의해 점령되었다. 이날 독일군의 독가스를 맞은 대대는 거의 전멸하였다.이후 독일군은 프랑스군을 대항하여 영프군의 참호에 독가스를 발사하였다. 처음에 영프군은 독일군이 연막작전을 쓰는 줄 알았으나, 독가스인것을 알아차린 영프군은 캐나다군이 했던 대로 조치를 취하였다. 그러나 독일군도 가스가 무서웠는지 제대로 돌격하지 못하였다. 이후 소변의 암모니아 성분이 독가스의 염소성분을 중화시킨다는 것을 깨달았고, 소변을 뭍힌 방독면을 보급하였다.
3.3. 프레젠베르크 전투 (5월 8일~5월 13일)
독일군은 야포를 이용해 영프군을 상대하려고 하였다. 하지만, 영프군은 이를 뚫고 독일군을 몰아낼 수 있었다. 동시에 독일군은 거센 반격으로 진격할 수 없었다. PPCLI사단이 꽤나 큰 공을 세웠는데 700명으로 구성된 사단이 150명의 생존자가 남을때까지 싸웠으며, 독일군의 공세를 막아냈다. 이 전투로 "Holding up the whole damn line" 라는 말이 유행이게 되었다.3.4. 벨와르드 전투(5월 24일~25일)
5월 24일, 독일군은 벨와르드에 독가스를 방출했는데, 이는 꽤나 큰 영향을 주었다. 하지만 소규모의 공격인 탓에 금방 끝났다.4. 이후
제2차 이프르 전투는 양쪽에 엄청난 사상자만 만든 채 무승부로 끝났다. 독일군이 약 35,000명의 희생으로 전진한 땅은 3마일, 즉 약 4.8km 뿐이었다. 제2차 이프르 전투는 소모전이 무엇인지 제대로 보여주었다. 그리고 이 전투 이후 독일군 및 연합군도 독가스의 강력함을 알게 되었고 끔찍하게도 전쟁은 계속되었다.동부전선에서도 가스 공격을 퍼부었던 오소비에츠 전투에서도 사용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