칭다오 전투 | ||
독일 제국군에게 포격을 가하는 일본군 | ||
제1차 세계 대전의 일부 | ||
기간 | ||
1914년 10월 30일 ~ 11월 7일 | ||
장소 | ||
중화민국 산둥 반도 키아우초우및 인근 해상 | ||
교전국 | [[틀:깃발| | ]][[틀:깃발| ]][[일본 제국| ]]|
지휘관 | [[틀:깃발| | ]][[틀:깃발| ]][[틀:깃발| ]] 카미오 미츠오미[[틀:깃발| | ]][[틀:깃발| ]][[틀:깃발| ]] 알프레트 마이어
결과 | ||
일본군의 승리 | ||
병력 | 24,500명 | 3,750명 |
피해 | 2000여 명 사상 | 700여 명 사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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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칭다오 전투(청도 전투)는 제1차 세계 대전 중 일본 제국이 영국 해군과 협력, 독일 제국의 조차지인 키아우초우를 습격해 함락함으로써 승전국 지위를 챙긴 전투다. 일본은 1922년까지 해당 지역을 지배하다가 워싱턴 해군 군축 조약의 결과로 중국에 반환하였다.2. 배경
제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자 영일동맹을 맺었던 일본은 대독 선전포고를 감행하였다.영일동맹으로 인해 참전 의무가 발생한 것은 아니었고 영국 역시 1914년 8월 1일 주일 대사관을 통해 전쟁에 참전하지 않아도 된다는 의견을 보내 우회적으로 참전하지 말 것을 표현했으며, 일본 해군 내에서도 독일과의 전쟁에 회의적인 의견은 존재했다.
그러나 영국은 칭다오의 독일군과 독일의 동양함대의 존재가 영국령 홍콩과 웨이하이 등, 중국 내 영국 이권을 침탈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기 시작했고 1914년 8월 4일에 영국은 외무부를 통해 일본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일본 역시 8월 4일 독일의 함대가 츠시마 앞바다에서 러시아 선박을 임검한 일이 일어나자 독일 함대로 인한 통상 파괴 행위 문제가 제기됐고 동시에 산둥 반도에 있는 독일 조차지를 점령하여 중국에서의 영향력을 확대를 위해 독일과 전쟁을 하는 쪽으로 의견이 굳어졌다.
일본은 대독 최후통첩에 교주만을 중국에 반환하기 위해 9월 15일까지 일본에 내어주라는 문장을 포함시키며 일본에겐 영토 야심이 없음을 선전하였고 최후통첩의 답변 기한인 8월 23일까지 독일의 답변이 없자 공식적으로 독일에 선전포고했다.
3. 전개
3.1. 해전
공고급 순양전함 1번함 공고[1]
일본 해군은 총 2개의 함대로 나뉘어 전투에 참여했는데, 먼저 카토 토모사부로 중장이 지휘하는 제1함대는 일본 해군이 자랑하는 최신예 드레드노트급 전함과 순양전함 4척(공고급 순양전함 공고, 히에이 카와치급 전함 카와치와 세츠)과 경순양함 4척, 1개 수뢰전대(구축함 12척)으로 구성되었으며 황해의 순찰과 육군 부대의 수송을 호위하면서 독일 동양함대가 출격하는 것을 저지하는 견제 임무를 맡았다.
그러나 1914년 8월 13일 폰 슈페(Maximilian von Spee) 중장이 지휘하는 장갑 순양함 2척과 방호 순양함 4척으로 구성된 독일 동양 함대 주력은 칭다오를 나섰다.[2] 뒤늦게 동년 9월부터 전노급 전함 3척, 해방함 2척, 장갑순양함 1척, 방호순양함 5척, 수상기 모함 1척, 2개 수뢰전대(구축함 24척)으로 구성된 일본 해군 제2함대와 영국 해군 전노급 전함 HMS 트라이엄프, 구축함 HMS 케네트, 어스크가 칭다오의 독일 제국 동양 함대를 압박하기 위해 포위를 하기 시작했지만, 동양 함대의 주력은 이미 유럽 전선을 돕기 위해 이탈한 뒤였고[3] 항구에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해군 소속 경순양함 카이제린 엘리자베트, 19세기에 만들어진 구식 방호순양함 코모란, 일티스급 등의 건보트 몇 척, 그리고 어뢰정 S-90 정도만이 남아있는 상태였다.
전투 초반에 수상기 모함 와카미야가 기뢰에 접촉해 대파되었다. 그리고 어뢰정 S-90은 일본 해군의 나니와급 방호순양함 2번함 타카치를 격침시키고, 영국 해군의 구축함 HMS 케네트를 대파시켰지만, 연료부족으로 자침했다. 이후 해안포대의 공격으로 카미카제급 구축함(1905) 22번함 시로타에를 침몰시키고 영국 전노급 전함 HMS 트라이엄프에 손상을 주는 성과도 올렸지만, 공고급 순양전함과 카와치급 전함을 위시한 일본해군 제 2함대가 나타나 해안포대를 공격하고, 피해가 워낙 컸기 때문에 항복 이후 전 함선을 자침시켰다.
3.2. 지상전
산둥반도에 상륙한 일본 육군 제18사단은 상륙하자 마자 바로 공격을 감행하지 않고 240mm 야포, 150mm 곡사포 등 각종 중장비가 상륙할 때 까지 기다린 후 9월 말부터 정찰을 시작했다. 이후 포병전력이 충분히 확대될 때 까지 기다린 이후, 야포와 곡사포, 산포 등을 일제히 사격하여 일본 해군 2함대의 함포 사격과 함께 독일 제국군의 비스마르크 포대와 몰트케 포대를 파괴하고, 항구에 정박해있던 경순양함 카이제린 엘리자베트함도 격침시켰다. 이후 쑥대밭이 된 독일군 방어선을 넘어 일본군이 진격하기 시작했다.3.3. 결과
며칠간 독일군의 미약한 저항이 있었으나 워낙 전력차가 극심했던 탓에 얼마 지나지 않아 남아있는 약 4,000명의 독일군과 소수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해군[4] 또한 일본군에 항복하고 포로로 이송되었다.4. 식민지 조선 관련
- 훗날의 한국광복군 총사령관 지청천도 당시 일본군 사관생도 신분으로 이 전투에 참여하여 부상을 입었다. 이후 일본군에 임관한 그는 임관 직후 탈영하여 만주로 가 독립운동에 가담한다.
- 1927년에 이왕직에서 편찬한 순종실록부록(경술국치 이후의 순종실록은 순종실록부록으로 간주한다.)에 따르면, 1914년 식민지 조선에서의 경성신사[5]에서 청도 함락 봉고제(靑島陷落奉告祭)가 있었고, 당시 이왕직의 장관이자 자작이었던 민병석이 참례하였다. 왕실(경술국치 이후로 이왕으로 격하됐다.)에서는 폐백료를 냈으며, 민병석을 통해 청도 함락에 대한 축사를 보냈다.
5. 기타
- 일본으로 끌려 간 독일 제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군인들은 항구에서부터 큰 환영을 받았고 상상 이상으로 좋은 생활을 영위했다. 국제법을 준수하고 자국이 문명개화한 나라라고 보여지고 싶은 일본의 노력과 독일과의 관계가 지나치게 나빠지고 싶지 않다는 외교적 배려가 결부되어 일본 각지에 분산 수용된 포로들은 매월 월급을 받으면서 비교적 자유로운 생활과 경제활동을 보장받았고, 또한 적십자를 통해 가족들과 자유롭게 소통할 수 있었다. 게다가 일본 정부의 배려로 정기적으로 관광지나 해수욕장에 여행하는 것은 물론, 각 부문 지식인과 예술인들은 각 학교에 선생으로 초빙되거나 순회공연을 벌이기도 했고 독일식 요리나 농업을 전수해주기도 했으며, 심지어 축구팀을 결성해 일본 내 도장깨기를 하고 다니는 등 일본의 민간인들과 높은 수준의 문화교류를 하며 지냈다. 이들은 일본 내에 독일 문화붐을 일으켰고, 수용소가 있었던 지역 사회 발전에도 큰 공헌을 한다. 대표적으로 소시지, 베토벤 교향곡 9번, 바움쿠헨 등 오늘날에도 일본인들이 사랑하는 독일 문화 요소들이 일본에 소개된 것이 이 때다. 그리고 일본 생활에 감명받은 이들 중 170명이 귀국하지 않고 일본으로 귀화했으며, 오늘날에도 일본에서 유명한 고급햄 제조사 혹은 베이커리 등을 차리기도 했다.# 태평양 전쟁 때 포로에게 푸대접을 하던 것과 정반대인 부분.
- 그러나 독일인에게 잘 해준 것과는 달리 일본군은 점령한 조차지에 있던 중국인들을 상대로 살인, 강간, 방화, 약탈 등을 저질러 97명을 살해하고 238명을 부상시키면서 앞으로 있을 세계사에서 가장 피비린내 나는 전쟁 중 하나인 제2차 중일전쟁의 프롤로그를 작성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