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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28 00:47:39

제1차 마른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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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토리오 베네토 전투 파일:이탈리아 왕국 국기.svg 이탈리아 왕국 파일:프랑스 국기(1794-1815, 1830-1958).svg 프랑스 제3공화국 파일:영국 국기.svg 영국 파일:미국 국기.svg 미국 파일: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국기.svg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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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536349> 제1차 마른 전투
Première bataille de la Marne
First Battle of the Marne
Erste Marneschlacht
제1차 세계 대전 서부전선의 일부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774px-Battle_of_the_Marne_-_Map.jpg
좌로부터 빨강이 독일의 우익인 육군 1군(클루크), 2군(뷜로), 그리고 파랑이 프랑스 육군 6군, 영국 원정군, 프랑스 육군 5군이다. 1, 2군간의 연결이 끊기고 1군의 우측 측면이 6군에게 위협받자 점선 지역으로 전선을 물렸다. 지도상에서 프랑스 4군과 독일 3군의 단대호를 관통하여 동쪽으로 흘러 점선 지역을 관통해 파리로 흘러들어가는 강이 마른강이다.
날짜
1914년 9월 5일 ~ 1914년 9월 12일
장소
프랑스 마른강 일대
협상국 동맹국
교전국
[[독일 제국|]][[틀:국기|]][[틀:국기|]]

[[프랑스 제3공화국|
프랑스 제3공화국
프랑스
]][[틀:국기|]][[틀:국기|
속령
프랑스
]]

[[영국|]][[틀:국기|]][[틀:국기|]]
지휘관 [[틀:깃발|
기 명칭
]][[틀:깃발|
깃발 명칭
]][[헬무트 요하네스 루트비히 폰 몰트케|
헬무트 요하네스 루트비히 폰 몰트케
]]
[[틀:깃발|
기 명칭
]][[틀:깃발|
깃발 명칭
]][[조제프 조프르|]]
[[틀:깃발|
기 명칭
]][[틀:깃발|
깃발 명칭
]][[틀:깃발|]]존 프렌치
병력 약 900,000명 약 1,080,000명
피해 규모 사상자 약 250,000명 사상자 약 263,000명
프랑스 250,000명
영국 13,000명
결과
영국-프랑스 연합군의 전략적 승리
영향
독일군 슐리펜 계획 좌절
서부전선 참호전 개시
전쟁의 장기화
1. 개요2. 배경3. 전개
3.1. 대후퇴(Great Retreat)3.2. 독일의 진격 약화와 시작된 전투3.3. 독일군의 철수 결정
4. 결과5. 독일의 조기 승전은 가능했을까?

[clearfix]

1. 개요

제1차 세계 대전 초반인 1914년 9월 5일~ 9월 12일, 파리 근처 마른 강 유역에서 일어난 전투. 이 전투에서 협상군이 승리함에 따라 프랑스를 재빠르게 제압한다는 독일 제국슐리펜 계획이 중단되었다. 이후 양측은 교착상태에 빠지게 되며 참호전 양상으로 전장이 변하기 시작한다.

2. 배경

OverSimplified에서 설명한 제1차 마른 전투

제1차 세계 대전의 초반 독일 제국프랑스 제3공화국 양측은 모두 짧은 시기 동안만 진행되는 전쟁 계획에 기반해 전쟁을 전개했다. 독일은 우익[1]에 병력을 모은 뒤 벨기에를 지나 프랑스 육군을 대규모로 포위해 섬멸시키겠다는 슐리펜 계획에 따르고 있었고, 프랑스는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당시 잃은 알자스-로렌 지방 회복을 위해 마찬가지로 우익[2]에 병력을 모아 알자스-로렌 지방을 되찾는다는 제17계획에 따르고 있었다.

그런데 막상 전쟁을 시작하니 프랑스의 제17계획은 독일 육군 제6군에 막혀서 진격이 지지부진했고, 반대로 슐리펜 계획을 진행시키고 있던 독일 우익의 육군 제1, 2군은 벨기에와 프랑스 북부를 지나면서 빠른 진격을 거듭한다.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프랑스-영국 지휘부는 이러한 독일 육군의 우익이 절대 주력이 아니라는 기대심리에 사로잡혀 있었으나, 독일 육군 우익의 목적을 알아챈 뒤 우익에서 좌익으로 바쁘게 병력을 이동시키고 예비군을 편성하였다.

반대로 파리를 향해 하루 40km에 달하는 진격을 하던 독일군은 보급 문제와 병사들의 체력 문제로 점차 약화되기 시작해 계획상 7:1이었던 우익:좌익의 병력비가 3:1까지 약화되면서 우익을 담당하던 1, 2군의 공세력이 둔화되었는데, 이때 독일군 지휘부는 독일군 좌익의 제6군을 돌파시켜 협상군을 포위하는 것을 노리기로 한다.

이러한 배경 속에 우익을 담당하던 독일 육군 제1군이 파리를 향해 진격하던 중 협상군 대군과 마주해 격전을 벌인 뒤 같은 우익에 있던 제2군과의 거리가 50km까지 벌어지는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는데 이렇게 되면 적군이 아군 사이로 비집고 들어와 연락을 끊어버릴 수 있는 문제로 독일군 지휘부는 제1군과 제2군의 진격을 포기하고 뒤로 전선을 후퇴시켜 벌어진 간격을 줄이기로 결정하였다. 제1군과 제2군의 후퇴는 제3, 4, 5군의 퇴각도 요구했고, 이리하여 9월 11일 서부 전선의 독일군 7개 군 중 우익의 5개 군은 엔 강까지 철수하고 말았다. 사실상 협상군이 독일군의 진군을 가로막는데에 성공한 것이다.

이 전투의 결과, 애초에 단기속전을 노린 슐리펜 계획은 사실상 실패로 돌아갔고, 이후 각자 측면을 치기 위해 해안가 쪽으로 전선을 확대시키며 제1차 세계 대전 서부전선의 상징과도 같은 참호전이 전개되기 시작한다. 제1차 마른 전투는 독일군의 대프랑스 전쟁 계획 자체를 무력화시키고 전선을 고착화 시켜 프랑스를 유지하는데 성공했다는 평가를 받으나 이 승리가 독일 제국 몰락에 어느정도까지 영향을 미쳤는가에 대해서는 다양한 이견이 있다.

3. 전개

3.1. 대후퇴(Great Retreat)

제1차 마른 전투는 바로 이전 국경 전투와 맥락을 같이 한다. 국경 전투 이후 협상군은 독일군의 진격 아래 끊임없는 후퇴를 거듭했다. 프랑스 제5군은 8월 22일 샤를루아 전투[3] 동안 삼브레 강에서 약 15km 떨어진 곳으로 후퇴해 다음날 8월 23일 삼브레 강 남쪽 지역에서 대규모 철수를 시작했다. 그날 저녁에는 나무르에 있던 12,000명의 벨기에군 또한 프랑스가 통제 중인 지역으로 철수했고, 디낭에서 674명의 남자, 여자, 아이들이 독일 제3군의 작센군에 의해 학살당했다.

프랑스군의 상황은 계속 악화되어 가고 있었다. 프랑스 제1군과 제2군은 생디에베보주와 낭시 사이에서 독일 제6군과 제7군의 공격으로 후퇴했으며, 프랑스 제3군은 베르됭 동쪽에서 독일 제5군의 공격에 맞서고 있었고, 프랑스 제4군은 몽메디 남쪽에서 서쪽으로 스당, 메지에르, 퓨메까지 방어선을 유지했다. 영국군의 상황 또한 좋지 않았다. 8월 23일 몽스 전투[4]에서 영국 원정군은 독일 제1군에 맞서 몽스-콩테 운하 방어선을 지키려고 노력하였으나, 독일군의 수적 우위와 위에서 언급된 프랑스 제5군의 갑작스러운 후퇴에 따라 결국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비록 이 영국군의 철수가 전술적으로 계획되고 실제로 질서정연하게 실행되었지만, 영국군은 2주 동안 몽스에서 400km 떨어진 지점까지 후퇴해야 했다.

심지어 영국군이 퇴각하는 동안 영국 원정군 사령관 존 프렌치 경은 프랑스의 상황이 최악의 국면으로 다다를 것을 대비해 영국 해협 항구로 완전히 퇴각하기 위한 비상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으나, 9월 1일 영국 전쟁 장관인 키치너 경이 해협으로 철수 하지 말라고 명령하면서 없던 일이 되었다. 프랑스에 남은 이 영국 원정군들은 파리 외곽 쪽으로 후퇴한 뒤 곧 있을 제1차 마른 전투에서 프랑스군과 함께 반격을 가한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프랑스군과 영국군은 프랑스 국경에서 완전히 철수해 파리 근처 마른강까지 후퇴할 수밖에 없었고 독일군은 파죽지세로 프랑스의 수도를 위협하기 시작했다.

3.2. 독일의 진격 약화와 시작된 전투

그러나 반대로 프랑스로 계속 진격하던 독일은 보급 문제와 병사들의 체력 문제로 인해 계획상 7:1이었던 우익:좌익의 병력비가 3:1까지 약화되면서 우익을 담당하던 1, 2군의 공세력이 둔화되는 문제에 봉착했다. 때마침 독일군 좌익의 제6군이 초기 방어전에서 좋은 결과를 거두면서 독일 육군 총참모부는 단익포위에서 제6군의 돌파에 따른 양익포위를 동시에 노렸으며, 동부전선의 러시아 제국군이 예상보다 빠르게 전투 태세에 돌입하여 진격해오면서 동프로이센이 함락당할 위기에 놓이자[5] 상당한 병력을 동부전선으로 차출하면서 우익의 공세탄력은 더욱 둔화했다.

그런 상황에서 8월 31일 클루크가 이끄는 독일 육군 제1군은 기동 중 접전 뒤 승리를 거뒀던 눈앞에 있는 프랑스 5군을 포위하기 위해 갑자기 파리 포위기동을 포기하고 파리 북동부 노아용과 콩피엔 방향으로 진로를 바꾸었는데, 제2군 또한 그러한 제1군의 움직임에 같이 파리 동쪽에 흐르는 마른 강을 건너 따라간다.[6] 그런데 9월 7일 프랑스군 사령관 조제프 조프르는 이때까지 철수를 중지하고 돌연 공세를 취하기 시작하였고, 프랑스군의 지휘를 받고 있던 영국군도 이에 합세하자 영국군과 프랑스군이 계속 후퇴하리라 믿고 있던 독일군은 당황하기 시작하였다.

프랑스 제5군과 신편된 프랑스 제6군, 영국 원정군은 독일 제1군의 측면을 잡아내는데 성공하고 독일군 1군과 2군은 병력 부족[7]으로 연락이 끊겨 서로 간의 간격이 50km까지 벌어지고 말았다. 독일군은 곧 혼란을 수습하고 격렬하게 전투를 벌였으나, 3면에서 공격받는 상황이라 어느 한 쪽에 반격을 가하기가 어려운 상황이었다.
파일:external/i.telegraph.co.uk/French-infantry_2691948b.jpg
파일:external/i1238.photobucket.com/taxisdelaMarne2.jpg
파리 광장에 집결하는 택시와 병력을 수송하는 택시들

이때 프랑스는 이미 파리 함락을 기정 사실로 보고 정부를 보르도로 옮긴 후 장기전을 준비중이었다. 그나마 독일군이 연합군을 돌파할 여지가 가장 많았던 전면(프랑스 제6군)은 파리에서 택시 부대가 끌고 오는 신병까지 받으면서 온 힘을 다해 독일군의 진격을 저지했다. 택시 뿐만 아니라 우유배달차, 자전거, 트럭, 자가용 등 바퀴가 달린 것은 모두 다 동원했다.

3.3. 독일군의 철수 결정

한편 이때 룩셈부르크에 있다가 참모총장의 대리로 전권을 위임받고 마른 전선으로 오게된 독일 육군 작전참모부의 상황통제장교 리하르트 헨취(Richard Hentsch) 중령은 마른 전선시찰에 나섰는데, 시찰 중 1군과 2군 사이에 50km나 간격이 생긴 것을 보고 무척 위험하다고 판단했다. 만약 1군과 2군 사이 공간에 적군이 들이닥친다면 1군과 2군이 연락이 끊겨 무척 위험한 상황으로 발전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헨취 중령은 9월 8일 제2군 사령부에게 이 상황을 설명하고 만일 1군과 2군 사이에 적군이 돌입한다면 철수할 것을 권고했다. 그러고 나서 이튿날 이번에는 제1군 사령부를 찾아가 적군 1군과 2군 사이에 돌입한다면 2군은 퇴각할 것이며, 아마 지금쯤은 퇴각 중일 것이라고 조언했다. 이 말을 들은 1군 사령관 클루크는 승전 직전에 있던 울크 강변 전투를 중지시키고 오후 2시 후퇴를 명령했다.[8]

그런데 이미 제2군은 정오에 퇴각해 있었다. 적 보병 부대가 대규모로 제1군과 제2군 사이 간격으로 돌입하고 있다는 정보를 정찰기로부터의 보고를 받았기 때문인데, 사실 이 정찰기가 발견한 것은 어디로 가는 줄도 모르고 간격에 들어온 영국군 군단으로 특정한 목표가 있는게 아니라 그냥 우연히 들어온 것이지만 제2군 사령관 뵐로우는 이것이 적군의 전략적 행동이라 판단했던 것이다.

한편 제1군과 제2군의 퇴각은 연이어 제3, 제4, 제5군의 퇴각 또한 요구하게 했고, 이윽고 9월 11일 서부 전선의 독일군 7개 군 중 우익의 5개 군은 엔 강까지 철수하고 말았다. 슐리펜 계획이 사실상 물거품이 되어버린 것이다. 마른 수건 쥐어짜듯이 모든 것을 쏟아부어서 노도와 같이 밀려오던 독일군을 방어하는 데 성공한 프랑스는 이 전투를 마른의 기적[9]이라고 칭송하였다.

4. 결과

이 전투의 결과, 단기결전을 노린 슐리펜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고 이후 각자 측면을 치기 위해 독일군과 연합군 판 바다로의 행진[10]이 시작되었다. 이것이 1차 세계대전 동안 최악의 소모전으로 유명한 참호전의 시작이였다. 이 전투가 끝난 이후 독일 육군은 프랑스의 점령지 일부를 뱉어냈지만 미처 못 점령하던 벨기에의 영토 대부분을 흡수하여 악명 높은 예페르(Ieper = 이프르)전선을 세웠고, 여전히 파리에서 100km 밖에 떨어지지 않은 누아용을 최전선으로 삼아 상대적으로 유리한 전선을 만들었다.

이 전투로 인해 서부 전선이 교착 상태에 빠지자, 프랑스를 조기제압 및 점령하여 영국의 개입의지를 꺾은 뒤 병력을 러시아로 돌려 러시아군 또한 격파하고 유리한 조건으로 강화하는 것이 목표였던 독일은, 오히려 반대로 세 나라 군대에게 둘러싸여 무한정 소모전을 지속하게 되었다. 베르됭 전투 등 독일군의 피해를 최소화하며 영국군, 프랑스군의 피해를 극대화하려는 시도가 여러 차례 있긴 했으나 서로 잘 아는 상대끼리 죽어라 싸우다 보니 결국 모든 전술이 간파당하면서 1~1.2 정도 비율로 결국 독일측의 피해도 계속 누적되었다.

미국의 개입으로 숨이 좀 더 빨리 끊어지긴 했지만, 이미 이 시점에 독일에 남은 것은 그냥 더 크게 피해를 보기 전에 협상하는 것과 모든 걸 쥐어짜고 망한 다음 항복하는 것 두 가지밖에 없었다. 독일은 후자를 택했고, 세계대전은 3년을 더 끌면서 수백만에 달하는 청년이 전장에서 추가로 사라졌다.

5. 독일의 조기 승전은 가능했을까?

위에서 보듯 본 전투는 독일의 단기결전을 위한 시도가 좌절되면서 제1차 세계대전이라는 4년에 걸친 장장의 총력전을 열었다는 데에 의의가 있다. 다만 만약의 경우로 설령 독일이 이 전투에서 이겼다고 해도 조기 승전은 어려웠으리라는 견해가 있다.

첫번째는 파리가 점령되었다 해도 프랑스가 굴복했을 가능성은 낮았다는 것이다. 실제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당시에도 파리 점령 이후 프랑스는 상당 기간 저항했고 독일군이 이를 물리치고 점령할 수 있었던 것은 개전 초기 주력군을 섬멸하는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1차 대전에서는 이것이 애초부터 힘든 여건이었다.

아울러 전례없이 거대한 양의 보급을 필요로 하는 대전기 전장에서 보급은 기본적으로는 철도를 통해서 이루어졌으나 적들이 철도 시설물에 피해를 입힌 경우가 많아 철도역에서부터 적지 않은 거리[11]의 운송을 인력, 혹은 말이 끄는 마차를 이용하는 수밖에 없었다. 문제는 이러한 마차를 이용한 수송 자체가 제한적일 수밖에 없어 최전방 전선에서는 병사들이 보급도 제대로 못 받아 빵쪼가리나 씹으면서 탄약, 피복 등의 물자 부족에 시달리는 반면 후방 기차역에서는 기껏 보급품을 받아 놓고도 이걸 최전방까지 실어 나를 수단이 마땅찮아 헛되게 썩어가곤 했다.[12] 따라서 장거리를 진격하는 것은 당시의 보급 능력이 도저히 따라갈 수 없고 특히나 이겨서 꽤 많이 진격했다 해도, 거기까지의 철도 시설은 당연히 후퇴하는 적이 모두 파괴했을 것이고 이러면 몇 안되는 마차, 인력 수송에 의지하는 보급선이 진격 거리만큼 길어지는 결과로 돌아왔을 것이다. 설령 전선에서 승리를 거두었더라도 필요한 만큼 기동을 할 수가 없어서 조기 승전은 불가능했다는 것이다.

물론 조기 승전을 100% 단언할 수 없다는 것이지, 본 전투에서 독일이 승리했다면 설령 마찬가지로 총력전에 돌입한다고 해도 실제 역사보다 심적/물적으로 우월한 여건에서 전쟁을 이어나갔을 것이다.


[1] 프랑스 측 입장에서는 좌익.[2] 독일 측 입장에서는 좌익.[3] 국경 전투의 일부.[4] 국경 전투의 일부.[5] 원래 총참모부의 계획은 프랑스를 항복시킬 때까지는 반격없이 러시아군의 공세를 받아내며 필요하면 동프로이센과 포젠은 러시아군에게 내주자는 것이었으나 문제는 정치계를 주름잡고 있는 인사들 중 상당수가 러시아군의 진격 목표인 동프로이센을 비롯한 동부 지방의 지방 귀족들인 융커들이었다. 자기 땅이 적들한테 짓밟히는 걸 그냥 보고만 있을 리가 없었다.[6] 이 때 독일 육군은 제2차 세계 대전 당시와 달리 군과 참모부 사이에 집단군급 지휘부가 없어서 제1야전군사령관인 알렉산더 폰 클루크 대장이 독단적으로 이 결정을 내렸다.[7] 참모총장이자 당시 슐리펜 계획의 수정안을 작성한 헬무트 요하네스 루트비히 폰 몰트케타넨베르크 전투를 지원하기 위해 2개 사단을 전선에서 빼돌린 뒤 동쪽으로 이동시켰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2개 사단들은 타넨베르크 전투는 종료될 때까지 전선에 도착하지 못했다.[8] 이토록 중요한 결정을 중~대장급 장군들에게 중령이 사실상 명령했다는 사실이 잘 이해가 안 갈 텐데, 독일 육군이 유달리 참모의 힘이 강했던데다 선술했듯 육군참모총장에게 전권을 위임받았기에 가능했다. 이는 다른 국가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비슷한데, 특정 단위 부대의 참모 장교는 대개 자신이 속한 부대의 예하부대장들보다 계급이 낮지만, 공문 발송시 등엔 자신의 지휘관의 이름을 빌려 "명령문" 형식으로 하여 사실상 자신의 상급자에게 지시를 내릴 수도 있다. 비슷한 시기 동부전선의 탄넨베르크 전투에서도 영관급 참모장교이던 막스 호프만 육군 중령이 작전을 짜서 러시아 육군을 물리쳤다.[9] 참고로 폴란드에도 이와 같은 '비스와강의 기적'이 있다.[10] 물론 윌리엄 테쿰세 셔먼의 바다로의 행진을 재현하기에는 둘 다 성과가 그닥이었지만.[11] 최소 수십 km[12] 반면 2차대전 서부전선에서는 미국이 거대한 자동차 산업에 힘입어 엄청난 숫자의 트럭으로 이러한 보급 소요를 어느 정도 충족시킬 순 있었지만, 말이 먹을 식량의 문제와 같이 수송 부대가 필요로 하는 유류 소모량 문제는 여전해서 보급선이 정도 이상으로 길어지면 여러 가지 애로사항이 꽃피는 건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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