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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3-04 14:02:35

조제프 조프르

파일:attachment/조제프 조프르/joffre2.jpg
조프르 원수의 사진
이름 조제프 자크 세제르 조프르
(Joseph Jacques Césaire Joffre)
출새 1852년 1월 12일
사망 1931년 1월 3일 (향년 78세)
계급 프랑스군 원수(Maréchal de France)
장례식 1931년 1월 7일

1. 개요2. 1차 대전 이전3. 초반의 실패4. 마른 전투: 방어의 성공5. 마른 전투 이후6. 리모자주7. 말년8.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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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세기 말 ~ 20세기 초 프랑스의 군인.

제1차 세계대전 초 서부전선에서 독일의 속전속결 시도를 저지하고, 제1차 마른 전투에서 성공적인 방어선을 구축하여 '마른의 승리자'로 명성을 얻었다.

그러나 이후 베르됭 전투에서는 대놓고 공세가 있을 것이라는 낌새와 첩보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등한시하였다. 결국 이 판단 실책으로 인해 비교적 잘 막을 수 있었던 싸움에서 막대한 피해를 입었으며, 이후 현장지휘권을 박탈당하고 사임했다.

그래도 마른 전투의 공이 있었기에 원수로 임명되었다.[1]

2. 1차 대전 이전

에콜 폴리테니크를 졸업한 뒤 파리 공략(1870~71)에 소위로 참전했고, 그후 인도차이나·서(西)아프리카·마다가스카르 등지에서 복무했다. 1905년 사단장으로 승진한 그는 1911년에 참모본부장으로 임명되었고, 3년 후 1차대전이 일어나자 총사령관이 되었다.

2.1. 중포

1917년 전까지 프랑스군이 독일군에게 열세였던 가장 중요한 이유로 중포 부족이 꼽히곤 한다. 이 문제는 곡사포 문제로 이어진다. 중포와 곡사포가 같은 의미로 쓰이곤 하지만 당대엔 중포가 평사포나 박격포일 수도 있었고, 곡사포로 한정할 것 없이 중포 자체가 문제이기도 했기 때문에 정확히 뭘 언급하는 건지 문맥에 주의가 필요하다. 어쨌거나 이 문제로 조프르는 당대에나 지금이나 많은 비난을 받는다. 그의 위치를 생각하면 비난이 당연하지만, 책임이 얼마나 컸는지는 따져볼 문제다.

이 문제를 이야기하기 전에 일단 전쟁부 예산에 대해서 알아보자. 프랑스에선 국방예산을 의회가 결정했다. 그리고 프랑스 국회의원들은 군비를 깎기 위해서라면 어떤 대가라도 치룰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런 것 치곤 전쟁 중과 전후에 열린 회기에서는 군인들이 달라고 하는 건 전부 줬다고 주장했지만 말이다. 사실 그렇게 주장하지 않을 정치적 이유는 없었다. 당대 프랑스인들도 인식하고 있었던 중포 문제의 책임을 지고 싶진 않았을테니 말이다. 최종 예산안은 전쟁부 산하 병과부들 및 국회 임시위원단 간의 협의를 통해서만 결정되었다. 총참모부의 요청대로 예산을 받을 일이 없고, 참모총장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는 이야기다. 조프르는 참모총장이 된 후 예산 준비 과정에라도 관여하고자 노력했지만 전쟁장관 직할 재정통제부의 막강한 권한에 대항할 방법은 없었다. 알렉상드르 페르상은 부사관 월급을 올려야 한다고 재정통제부에 요청했다가 '부사관이 민간인보다 돈을 많이 버는 건 정신나간 일이다.'라는 답변을 들으며 만장일치로 거절당했다.[2] 군비가 아가디르 위기가 터진 1912년 이래 계속 올라가긴 했다. 하지만 3년 징병법을 유지하느라 인건비에 더 많은 예산이 나가게 되었기에 특정 분야에선 오히려 예산이 줄어들기도 했다. 참고로 1914년 전쟁부 예산은 약 1,000,000,000프랑이었다. 해군부 예산까지 합치면 전체 예산의 30%를 잡아먹은 것으로, 예지 능력이 없는 사람들 입장에선 전쟁도 없는데 군비 지출이 너무 심한 거 아니냐는 말이 나올만도 했다.

포병 이야기로 돌아가서, 1914년에 전쟁이 발발했을 때 프랑스군은 중포연대가 고작 5개밖에 없었다. 군이 부족한 자원을 아껴쓰는 전형적인 방법으로 중앙집권화되어 5개 야전군에 중포연대가 각각 하나씩 편제되었다. 그럼 중포라는 자원이 왜 부족했을까? 조프르가 참모총장으로 임명된 1911년으로 돌아가보면, 독일 군단은 총 160문의 화포를 보유했고 구경은 77, 105, 150mm였으나 프랑스 군단은 120문의 화포밖에 없었고 그마저도 전부 75mm였다. 동원령이 실시되면 각 군단이 2개 중포대대로 증원되었는데, 중포대대가 보유한 포가 겨우 2문 뿐이니 각 군단이 4문만 보유하게 되는 것이다. 이 중포는 전부 1904년식 리마이로 155mm CTR(court à tir rapide)였다. 그 유명한 1897년식 75mm 야포와 같은 기술이 적용된 최초의 현대식 중포이자 곡사포로, 분당 6발의 발사속도를 지녔다.

당대 프랑스군은 포를 크게 2종류로 분류했다. 첫번째는 야포다. 1897년식 75mm 야포가 여기에 들어가고, 그 전에 개발된 드 방주 체계 80, 90mm 화포도 야포로 분류했다. 경포라 부르기도 했다. 두번째는 명칭이 더 다양했다. 우선 리비에르 요새 체계에 배치하기 위해 생산했기에 요새포였다. 요새에 올릴 수 있는 물건이므로 당연히 해안포이기도 했다. 동시에 요새 공략에 쓰기 좋은 대구경이었기에 공성포였다. 그리고 대구경인 만큼 느려터져서 보행포였다. 가장 큰 집합으로 부르자면 중포였다. 평사포가 다수였고, 소수지만 곡사포도 있었다. 박격포도 빼놓을 수 없고 말이다. 그리고 단포신도 있었고 장포신도 있었다. 구경은 120~270mm까지 다양했는데, 120mm와 155mm 장포신이 가장 많은 수를 차지했다. 리비에르 요새 체계가 건설된 기간(1874년)을 보면 알겠지만, 이것들은 1904년에 나온 리마이로 155mm같은 현대식 중포가 아니라 드 방주 체계의 구식 중포였다.[3] 구식이라 방렬하려면 유압 브레이크가 달린 특수한 전용 받침대에 설치해야 했는데, 그 받침대의 무게가 무려 6톤이고 설치엔 10시간이 걸렸다. 해체에도 10시간이 걸렸고 말이다. 일단 설치하면 120~155mm 기준으로 분당 1발의 발사속도가 나왔고, 장포신 기준으로 사정거리는 8~9km였다. 구형 중포는 너무 무겁고 구식이라 기동전에 써먹을 수가 없었다. 이게 프랑스군이 중포 투자에 무관심했던 핵심적인 이유다. 기술 발전으로 이 문제가 해소되기 시작했으나 프랑스군은 그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구식 중포는 총 3000문 이상이었다. 구경과 특성이 다양한 것들이 이렇게 숫자도 많으니 포를 역할에 따라 세세하게 나눠서 운용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고급장교가 많았던 것도 당연하다. 프랑스군에서 중포는 요새군 전용이고 경포는 야전군 전용이라는 인식이 굳어지기 시작했다. 리비에르 요새 체계도 이런 인식을 만드는 데 일조했다. 당대 프랑스인들은 이런 사고방식에 갇혀버렸다. 이 때문에 중포병의 현대화를 전쟁 직전에야 시작했다.

현대식 중포 양산 지연의 또다른 이유로는, 당대 포병장교들이 이보다 많은 화포가 필요하리라고 예상치 못했기 때문도 있다. 알렉상드르 페르상은 우리 화포가 적은 게 아니라 독일군이 지나치게 많은 거라고 주장했다. 프랑스 포병 교리의 지도적 이론가였던 이폴리트 랑글루아는 화포가 대피호와 참호에 박혀있는 보병 상대로 비효율적이라며 같은 논지의 주장을 했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화포가 그나마 제일 효율적이라는 사실은 깨닫지 못한 것이다. 최고사령부는 중포와 중포탄의 엄청난 무게에서 나오는 낮은 기동성과 병참 부담이 기동전에 방해되리라 여겼다.

한가지 짚고 넘어가자면, 전쟁 극초반엔 중포 부족이 심각한 문제는 아니었다. 왜냐하면 75mm 야포가 너무 우월해서 이것만으로 거의 모든 상황을 해결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독일군의 보고서를 보면 명확하다. 적 중포와 포격전을 벌일 때는 확실히 문제가 있었지만, 그마저도 포병장교들의 교리 무지와 포수들의 훈련 부족보다는 훨씬 덜 중요한 문제였다. 심지어 1915년 전까지도 프랑스 포병이 겪은 가장 큰 문제는 중포 부족이 아니라 75mm 포탄 부족이었다. 프랑스군이 이동탄막사격을 1914년 9월에 개발했음에도 포탄 부족 때문에 조프르가 직접 금지해야 했을 정도로 말이다.

실전에서 75mm 야포의 발사속도는 분당 15발이었다. 개활지에서 6000~7000m 거리의 적에게도 무시무시할 정도로 효과적이었으나, 전쟁 전 마지막으로 갱신된 프랑스 포병교리에선 약 3000m를 의미하는 중거리에서 효과적이라고 서술한다. 교범을 작성한 장교들이 이를 예상치 못한 이유는, 저런 거리에선 포탄이 어디에 떨어지고 있는지 포대 근처에서 관측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교리에 비행기를 날아다니는 전방관측반으로 활용하는 방법이 나와있긴 하다. 하지만 프랑스군은 악천후의 영향을 강하게 받는 비행기의 특성과 통신 기술의 한계 때문에 관측기를 써도 한계가 크다고 생각했다. 또한 교범은 대포병사격을 피하기 위해 포대를 언덕 역경사나 숲에 방렬해 간접사격할 것을 추천하지만, 중거리가 야포를 소총처럼 조준해서 쏘는 게 가능한 거리다 보니 실전에선 대부분의 부대가 직접사격을 선호했다.

75mm 야포는 전설적인 명작이지만 약점도 있었다. 첫번째로, 고폭탄 위력이 불충분했다. 프랑스군이 고폭탄과 유산탄의 비중을 비슷하게 두었기에 유산탄을 지나치게 사랑한 영국군 보다는 사정이 훨씬 나았지만 말이다. 두번째로, 부앙각이 낮았다. 따라서 계곡 안쪽과 언덕 역경사를 타격하기가 거의 불가능했다. 프랑스군도 이를 알고 포탄을 급격히 낙하시켜 야포를 곡사포처럼 쓸 수 있게 하는 플랑크트 말랑드랑을 생산해놓긴 했지만, 포탄에 장착하는 이 CD처럼 생긴 물건은 막상 써보니 임시방편에 불과한 형편없는 발상이었다.

드 방주 120, 155mm는 75mm 야포와 똑같은 문제를 가지고 있었다. 참고로 두 중포가 사용한 포탄의 무게는 각각 20, 40kg이었다. 그러니 프랑스군이 해결해야 했던 문제는 이렇다. 첫번째로, 야전에서 기동전에 방해가 되지 않을 무게의 중포가 필요했고, 부앙각이 높은 중포가 필요했고, 무게와 위력 사이에서 적절한 균형을 찾은 포탄을 쓰는 중포가 필요했다. 이 모든 문제를 해결한 물건이 현대식 곡사포다.

조프르는 공병 출신이고 전투를 거의 겪어보지 못했음에도 중포에 꽤나 관심을 기울였다. 프랑스군이 포병을 공병과 똑같은 기술 병과로 묶고 같은 기관에서 교육했기 때문일까? 어쨌든 1911년 7월 19일에 조프르가 상임전쟁심의회에서 중포를 회의 안건으로 올렸다. 이때 참모총장은 빅토르 콩스탕 미셸이었다. 첫 논의 주제는 '포병에게 야전 곡사포가 필요한가?'였다.[4] 미셸을 포함해 여러 장군들이 중포를 야포처럼 야전에서 쓰자는 발상에 반대했지만, 찬성자가 훨씬 많았기에 심의회가 승인하고 어떤 곡사포를 쓰고 곡사포대 편성은 어떻게 할지 논의했다. 결론이 나지 않긴 했지만 곡사포 구경은 조프르가 주장한 최대 120mm로 하기로 결정났다. 두번째 논의 주제는 기동 중포대 창설이었다. 이 논의엔 조프르가 기여하지 않았다. 심의회는 이 문제가 곡사포대 편성에 달려있다고 결론내리고 논의를 미루기로 했다.

심의회는 10월 15일에 다시 한번 중포 문제를 검토했다. 무기와 조직을 고려한 논의가 길게 이어졌다. 프랑스의 최선임 장성들은 중포를 야전에서 운용할 필요가 있음을 인식하고 있었다. 그나마 크게 반대한 사람은 조제프 갈리에니 정도였는데, 그도 결국 조프르에게 설득당했다. 심의회는 야전군 수준에서 수량 부족을 고려하여 곡사포 뿐만 아니라 평사포도 사용해 중포연대를 창설하기로 결정했다. 군단 수준에선 어찌 할지는 가능성만 남겨두기로 했는데, 중포 수량이 부족했고 저출산 때문에 병력도 부족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조프르가 제17계획에서 야전의 중포병으로 운용될 야전군 수준의 4개 중포연대와 1개 보행포연대의 배치도 구상하게 되었다. 각 연대는 4개 포병대대로, 각 포병대대는 3개 포대로 구성되었다. 채택한 곡사포는 리마이로 155mm와 바케 120mm와 경곡사포라 부를 수 있는 슈나이더 105mm였다. 리마이로 155mm는 최초의 현대식 중포다보니 문제점이 꽤 많아서 전쟁 초기엔 유용하게 써먹었지만 나중엔 완전히 퇴출했고 바케 120mm는 1890년에 나온 물건이라 빠르게 퇴출했다.[5] 포는 해안포를 뜯어내서 해결했고, 인력은 3년 징병법 덕분에 해결할 수 있었다.

조프르는 포병에 관심의 끈을 놓지 않았고, 프랑스군이 독일군처럼 중포를 야포로 쓰게 만들기 위해 여러가지 노력을 다했다. 프랑스 장성진들이 변화를 그다지 거부하지 않았고, 조프르가 생각하지 못한 발전안까지 알아서 떠올리고 논의했지만, 그들이 관심을 끄고 있던 중포 문제를 수면 위로 끌어올린 사람은 조프르다. 그러니 조프르가 중포에 관심이 없었다는 비난은 하지 말아야 한다. 비난할거면 여기서 더 나아가지 못하도록 장애물을 쳐놓은 병과부와 싸워 이기지 못한 것을 비난해야 한다.

조프르 비난자들은 그의 앞에 놓인 것이 철벽이었음을 간과하곤 한다. 이 시기 프랑스 전쟁부엔 병과 관련 산하기관만 12개였다. 조프르는 1911년 개혁 중 이 병과부들을 총참모부 관할로 넣는 데 실패했다. 병과부들은 조프르를 무시했는데, 그 중 포병부인 제3부는 극도로 강력한 권한까지 보유하고 있었다.

프랑스 병과부들은 어째선지 1차대전을 다루는 대부분의 영어 서적에서 언급되지 않거나 간단히 다루어지지만, 그래서는 안될 정도로 극히 중요한 조직이다. 병과부는 사기업과 계약을 직접 체결했을 뿐만 아니라, 군대가 필요로 하는 거의 모든 장비를 소유한 공장에서 직접 생산했다. 이들은 국가 안의 국가였다. 심지어 전쟁장관조차 병과부에 손댈 수가 없었다. 이 문제는 전쟁장관이 휙휙 바뀌게 만든 프랑스의 정치적 혼란 때문에 절대 해결이 불가능했다. 포병부는 심지어 공식적으로 존재하기 전부터 군수부처럼 작동했다. 포병부가 화포 뿐만 아니라 전반적인 장비의 설계와 생산을 담당했고, 폭발물 제조까지 통제했다. 포병부가 부르주, 퓌토, 타르브, 생테티엔에서 수많은 조병창을 운영하며 노동자에게 월급을 줬다. 르 크뢰소 등 민간 기업이 포병부가 조병창에서 완성할 미완성품을 공급했기 때문에 화포 생산에 관련된 모든 단계가 완벽하게 장악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맨 위에서 언급한 중포의 역할에 대해 굳어버린 사고방식, 75mm 야포에 버금가는 역사적 명작을 만들고 싶어 안달난 포병장교들의 완벽주의가 괴물과 상승작용을 일으키고 말았다. 그래서 신형 화포의 개발과 채택이 느렸고, 채택되더라도 괴팍한 도자기 장인이 땅에다 완성품을 내려친 것마냥 생산이 시작되지도 않는 일이 벌어졌다. 조프르는 포병부를 각성시켜 보려고 해외에 심의회가 찾던 물건을 판매하던 사기업에 관심을 주었다. 물론 포병부는 대부분의 조직이 그렇듯이 긍정적인 자극을 받기 보다는 특권을 침해당했다며 화를 냈지만 말이다.

이런 상황이니 조프르가 더 할 게 없었다. 1881~1904년 사이에 빛을 본 곡사포는 4개다. 드 방주 155mm 단포신 곡사포, 바케 155mm 단포신 곡사포, 리마이로 155mm 현대식 곡사포, 특수 받침대가 포와 결합되어 있는 드 방주 155mm 단포신 곡사포의 개선판. 이중 야전에서 쓸만한 물건은 리마이로 155mm 뿐이었다. 이 시기 프랑스군의 중포 개발을 보면, 완고한 포병부 때문에 확실한 노선이 존재하지 않아 마구잡이로 시행착오를 거치고 있다는 인상이 든다. 이건 포병부에 맞먹는 괴물이었던 공병부, 즉 제4부를 보면 더 명확해진다. 공병부는 비 내리고 풀 자라면 사라지는 참호 보다는 (초중포탄이 떨어지기 전까진) 영원해보이는 요새에 집착하며 변화를 거부했다. 밑에 써놧지만 조프르는 요새보다 참호망이 낫다고 여겼다.

조프르는 전쟁 초기에 중포 부족을 보완하기 위한 여러가지 조치를 취했다. 첫번째로 요새에 방치되어 있던 드 방주 120, 155mm 장포신에 어느정도 기동성을 부여했다. 이것들은 곡사포가 아니라서 75mm 야포와 같은 문제를 가지고 있었지만 위력은 훨씬 좋았으며, 단순한 구조 덕분에 장시간 전투에도 견고했다. 문제는 기동성을 부여할 방법을 찾는 것이었다. 기동성을 날려버는 주범인 6톤짜리 받침대 없이 방렬할 방법이 필요했다.

해답 중 하나는 이탈리아군이 발명한 rotaie a cingolo였다. 프랑스군은 이 물건을 1913년에 채택했다. 두꺼운 다수의 블록을 바퀴에 부착하는 일종의 무한궤도인데, 바퀴가 지면과 접촉하는 표면적을 늘려 험지에서도 중포가 이동할 수 있게 해주었다. 블록은 발사시 브레이크 역할도 겸했다. 드 방주 120mm는 rotaie a cingolo를 달았을 때와 유압식 브레이크가 달린 특수 받침대에 설치했을 때 성능 차이가 없었다. 프랑스군은 일부 120mm는 트랙터로 견인해보기도 했다. 전쟁이 시작되었을 때 트랙터로 견인되는 120mm 포대는 3개였다. 이는 프랑스 최초의 차량화포병이지만, 당대엔 기동포병이라고 불렀다. 심의회가 결의했던 기동 중포병 창설이 실제로 이루어진 것이다. 사실 드 방주 중포는 기존 포가를 무르세 포가라는 또다른 해답으로 대체해 더 일찍 개량될 수 있었다. 하지만 포병부가 역사의 증인 앞에 부끄럽지 않을 걸작으로 개량되기 전까지는 절대로 세상에 내놓지 않겠다고 윽박질렀다. 프랑스군은 전쟁이 터질 줄 몰랐기 때문에 시간압박을 느끼지 않았다. 이런 이유로 대전쟁이 발발했을 때 프랑스군은 중포가 부족했고 그중 현대식 중포는 100문에 불과했다. 반면 독일군은 현대식 중포만 700문이나 있었다.

2.2. 제17계획

항목 참조

3. 초반의 실패

조프르는 프랑스-­독일 국경을 넘어 쳐들어가는 대규모 침공 작전을 세웠고, 프랑스 육군은 이 작전에 따라 1914년에 독일을 공격했지만 그 결과는 비참하게 끝났다. 독일군 주력부대가 벨기에를 통해 우회하는 바람에 조프르를 비롯한 프랑스군 지휘관들은 오히려 적으로부터 협공을 당하게 되었다. 연합군은 측면에서 포위당할 위기에 빠졌으며 파리도 언제 함락될지 모르는 상태였다.

4. 마른 전투: 방어의 성공

프랑스군은 초기에 실패를 겪었지만 아직 전역에서 패배하지는 않았고 희망을 가질 이유도 여럿 있었다. 프랑스군은 독일군과 달리 효과적인 지휘통제 체계와, 최초의 손실에도 자신감을 잃지 않은 지휘관들이 있었다. 독일군의 통신체계가 붕괴된 반면, 프랑스군의 통신체계는 안정적이고 신뢰할 수 있게 정보를 전달했다. 조프르는 급속한 상황 변화를 바라보았고 여러 번 자신의 주요 지휘관들과 회동했다. 프랑스군은 병력 배치를 위한 완벽하고 신뢰할 수 있는 철도망도 갖추고 있었다. 프랑스군은 1871년의 패배 이후 철도망을 상당히 개선했고 대규모 병력과 장비를 한쪽 국경에서 다른 쪽 국경으로 용이하게 이동시킬 여러 철도선을 새로 만들었다. 1914년에 프랑스군은 우익에서 좌익으로 병력과 장비를 수송하면서 조프르의 위협대처 능력을 크게 개선시켰다.

조프르가 독일군의 전략을 느리게 파악하고 적의 주공 지역도 늦게 파악했지만, 그는 독일군의 의도를 이해한 후 신중하게 프랑스군의 작전상 배치를 재조정했다. 프랑스에게는 운 좋게도 몰트케의 전략은 조프르가 빠르게 병력을 재배치하고 서쪽에서 독일 제1군과 제2군의 바로 앞에 병력을 수송하게 허용해 주었다. 8월 24일에 조프르는 제1군과 제2군이 우익에서 위치를 고수하라고 명령했고, 제3, 4, 5군과 벨기에군은 남쪽으로 후퇴시켰다. 조프르는 독일군을 솜 강에서 베르됭에 이르는 선에 고착시키려 했다. 조프르는 좌익을 강화하려고 새로 편성된 2개 야전군을 집결시켰다.

조프르는 독일군이 프랑스군의 왼쪽 측면에 공격을 강화할 것이라고 확신하여 병력을 그쪽으로 돌리고, 독일군의 포위 공격에 대처하기 위해 제6군을 창설하여 직접 지휘를 맡았다. 가장 어려운 이 시기에 그의 뛰어난 자질이 드러났다. 조프르의 침착하고 강인한 성격과 용기로 프랑스는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프랑스군은 파리 북쪽으로 조여들고 있는 막강한 독일군으로부터 끊임없이 위협을 받으면서, 독일군이 파리에 바싹 접근할 때까지 후퇴를 계속했다. 이와 동시에 현실을 인정하고 동쪽에 있던 병력을 대대적으로 서쪽으로 옮겨 병력을 확보했다. 이 당시에 파리에 있던 차량이란 차량은 모두 동원해서 병사들을 이동시켰다고.[6] 새로운 제6군이 미셸 J. 모누리(Michel J. Maunoury)의 지휘 아래 파리 일대에 집결했고, 제9군은 페르디낭 포슈(Ferdinant Foch)의 지휘 아래 후퇴하는 제4군과 제5군 뒤에 위치해 두 야전군 사이에 발생한 틈을 막았다.

다른 변화도 프랑스군의 효율을 높였다. 조프르는 전술을 고려하며 야전군 사령관들에게 보병이 반드시 포병의 공격준비사격 이후에 공격하라고 알렸고, 대규모 공격을 금지했다. 이건 300,000명의 사상자가 발생하고 배운 전술적 지혜였다. 조프르는 제3군과 제5군 사령관을 비롯한 지휘 구조도 바꾸었다. 수십 명의 여단장 및 사단장들도 면직당했다. 이런 조치는 가끔 불공정하기도 했지만, 냉철하고 자신감 넘치는 투사인 루이 프랑셰 데스프리(Louis Franchet d'Espèrey)가 지휘 구조에 들어왔다. 이 과정에서 평시에는 훌륭했지만 실전에서는 성과가 좋지 못했던 장교들이 좌천당했다.

조프르가 좌익을 강화할 동안, 독일군의 작전계획에도 변화가 생겼다. 핵심적인 계획수정은 독일 제1군 사령관인 알렉산더 폰 클루크(Alexander von Kluck)가 자신의 병력을 파리 동쪽 끝으로 이동시킨 것이었다. 클루크는 파리 서쪽 끝으로 진출해 파리를 포위하기보다는 동쪽을 택했다. 슐리펜의 거대한 바퀴가 계속 돌자, 클루크의 결정은 독일군의 좌익을 파리에서 오는 공격에 노출시켰고 독일군의 작전개념을 근본적으로 바꿔 놓았다.

8월 2일에 프랑스 정부는 조제프 갈리에니(Joseph Galieni) 장군에게 파리 방어 임무를 맡겼다. 모누리의 제6군이 요새화된 파리 시로 들어가 갈리에니의 지휘를 받으면서, 파리 방어 병력은 서서히 증가했고 예비군과 식민지 부대들도 파리로 들어왔다. 프랑스군은 초기에 파리를 방어하려 했지만, 제6군의 규모가 증가했고, 독일군의 우익이 채널 해협을 통해 계속 노출되자, 결정적인 행동을 취할 기회가 왔다.

9월 4일에 갈리에니는 항공기 여러 대를 보내 파리 북쪽과 서쪽을 정찰하게 하였다. 조종사들이 돌아와 갈리에니에게 클루크의 제1군 소속 4개 군단이 마른 강을 파리 북동쪽에서 도하하고 있고 1개 군단이 독일군 우익 전체를 방어하려 남았다고 보고했다. 그 날 프랑셰 데스프리가 영국군 병력과 조우했다. 데스프리는 영국군의 좌익을 파리에 있는 병력으로 보호해 주겠다고 약속하며 영국군을 공세에 가담시켰다.

조프르는 그날 저녁 늦게 데스프리에게 영국군과 만난 결과를 보고받았고 갈리에니와 취약해진 독일군 측방으로 빠르게 반격을 개시하려고 열띤 대화를 전화로 나누었다. 갈리에니가 여기에 얼마나 영향을 끼쳤는지는 알 수 없지만, 조프르는 9월 6일 아침에 반격을 시행하기로 결정했다.

몰트케는 룩셈부르크에 있는 사령부에서 클루크가 운명적인 결정을 내린지 하루 뒤인 9월 4일에 제1군의 우익, 즉 독일군 전선 전체의 우익이 파리에 있는 프랑스 제6군의 공격에 노출되었다는 상황을 알았다. 몰트케는 선택의 여지가 없이 우익의 제1군과 제2군의 진격을 중지시켰다. 몰트케는 우익의 제1군과 제2군이 승리를 거둘 수 없다고 판단하자 제3, 4, 5군에게 중앙에서 계속 공격을 하라고 명령을 내렸고 좌익에서는 남쪽으로 공격을 하라고 명령했다. 제1군과 제2군은 파리 바로 앞에서 정지해 독일군의 우익을 방어했다. 클루크의 제1군은 마른 강 북쪽에 있을 뿐만 아니라 노출된 지점을 뒤로 뺐다.

마침내 9월 5일 프랑스군의 왼쪽 측면을 맡고 있던 부대가 파리 바로 밖에서 병력이 훨씬 우세한 독일군을 맞아 싸우기 시작했다. 이에 맞추어 조프르는 9월 6일 연합군의 반격개시 명령을 내렸다. 이것이 마른에서 벌어진 첫번째 전투였다. 이 전투에서 연합군은 독일군의 진격을 부분적으로 물리쳤고, 이로 말미암아 서부전선에서의 독일군의 작전은 오랫동안 교착상태를 면하지 못했다.

연합군이 6일에 반격을 개시했을 때, 작전의 성패는 모누리의 제6군과 존 프렌치(John French) 경의 영국 대륙원정군, 그리고 데스프리의 제5군에 달려 있었다. 상황은 연합군에 유리했다. 폰 클루크의 야전군은 마른 강 남쪽과 북쪽으로 쪼개져 있었다. 클루크는 몰트케에게서 온 전신을 받고 선택의 여지가 없음을 알았지만 그의 선두 부대가 이미 마른 강을 건넜다. 클루크는 전력을 북쪽으로 옮겨 야전군을 파리에서 오는 프랑스군에 대적하게 하려 하다가 제2군과의 사이에 틈을 만들었다. 그동안 프랑스군의 독일 제2군 우익에 대한 공격은 독일 제1군과 2군 사이에 더 큰 틈을 만들었다.

실마리를 잡은 영국원정군과 프랑스 제5군의 좌익이 이 틈을 통해 북쪽으로 이동하며 적의 수색 부대만 상대했다. 연합군 병사들은 독일 제1군과 제2군 사이를 지나간다는 것의 중요성을 모른 채 느리게 이동했다. 8월 9일 아침에 영국군이 샤토티에리(Chateau-Thierry) 근처에서 뫼즈강을 도하해 뫼즈강과 독일 제1군과 2군 사이에 교두보를 만들었다. 이러한 성취로 독일의 2개 야전군이 방어를 취할 수가 없게 되었다.

영국군의 선두가 전방으로 갈 동안, 갈리에니는 모누리의 제6군을 증원하려고 애를 썼다. 갈리에니는 택시 600대를 동원해 1개 사단을 파리에서 수송해 왔다. 클루크는 프랑스 제6군을 막아내고 파리로 이동하려 했으나, 독일 제1군이나 제2군 모두 두 야전군 사이의 틈을 메우거나 연합군이 이 틈으로 들어오는데 대응을 할 수가 없었다. 조프르가 파리에서 독일군 좌익을 공격하려 시도하다 실패했지만, 영국군과 프랑스군은 제1군과 제2군 사이의 틈으로 진격하며 독일군이 후퇴 말고는 방법이 없게 만들었다.

독일군이 파리 인근에서 후퇴하면서 전쟁의 서부전선 개전 전역이 끝났다. 독일군 우익의 다른 야전군들도 후퇴했고 이후 독일군과 연합군 모두 서로의 측방을 우회하려는 "바다를 향한 경주"가 실패하며 영국 해협의 니우포르트(Nieuwpport)부터 남쪽의 누아용(Noyon, 파리에서 북동쪽으로 100 km), 동쪽의 베르됭, 그리고 남동쪽의 콜마르(Colmar)까지 이어진 참호선이 형성되었다. 조프르는 프랑스를 길고 잔혹한 전쟁에서 구하지 못했고 전역 초기에 여러 끔찍한 실수를 범하긴 했지만, 그는 결국 독일군의 결정적 승리를 막았다. 결국 프랑스군의 작전수행 능력이 "마른 강의 기적"을 달성하게 한 것이다.[7]

5. 마른 전투 이후

사람들은 조프르와 계속 함께 하기보다는 악몽에서 깨어나기 위한 도박을 할 준비가 되어있었다. 무언가 달라진다면 누구라도 좋았다! 사람들은 희망, 어쩌면 공허한 희망에 매달렸으나, 조프르는 실망을, 사람들이 과장했을지 몰라도 너무 많은 실망을 안겨줬다.

-샤를 뷔뉴에 중령, 페르디낭 포슈의 전속부관

1914년말에 이르자 서부전선은 수많은 참호가 설치된 철통 같은 방어선으로 굳어졌고, 이 방어선은 1918년까지 유지되었다. 1915년 조프르가 지휘하는 프랑스군은 희생을 치르면서 독일군 진지를 돌파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조프르의 명성은 점차 떨어지기 시작했다. 1916년에 독일군이 베르됭을 침공했을 때 프랑스군이 이에 대비하지 않은 것은 그의 책임이었다.

조프르는 직접지휘권을 박탈당한 뒤 1916년 12월 26일 사임했고, 같은 날 프랑스 육군원수로 임명되었다.

6. 리모자주


당대 프랑스에서 쓰인 표현 중 하나로 제네로 리모제가 있다. 이건 사령부에서 쫒겨난 장군들, 즉 리모주로 보내진 장군들, 다시 말해 리모자주를 당한 장군들을 의미한다. 다르게 말하자면 숙청당한 장군들이다. 리모주는 제12 군관구의 행정 중심지다. 꼭 리모주로 보내짐으로써 쫒겨나지는 않았고, 브상송이나 디종 등으로 보내지기도 했다. 우선 총사령관인 조프르가 리모자주를 전적으로 책임지진 않았다는 사실을 밝혀두겠다. 전쟁장관에게 리모자주 당한 장군도 있다.(대부분 요새 지휘관) 이 글에선 장군의 사례만 다루지만 영관급과 위관급도 리모자주 대상이었다.

어쩌다 이들이 숙청당했을까? 다양한 이유가 있는데, 그 중엔 지극히 의학적인 이유도 있다. 부상을 입거나 심한 스트레스를 견디지 못해 직위를 유지하지 못하게 된 장교가 지휘권을 잃었다. 이들이 신체적 혹은 정신적으로 회복해 복귀한다 하더라도, 한직에 배치되었다. 스트레스, 즉 전투에서 오는 긴장은 병사 뿐만 아니라 장교도 무시할 수 없는 전쟁의 요소였다. 공포, 좌절감, 막대한 사상자 뿐만 아니라 신체적, 정신적 긴장을 풀 시간이 없었던 것도 이유였다. 숙청당한 장군 대다수가 이미 신체적, 정신적으로 무너진 상태였다. 그리고 휴식시간 부족은 장기간 전투에 대비해 지휘소를 조직하지 못한 그들의 무능함이 원인이다. 제대로 조직되지 않은 지휘부와 참모부를 데리고 수십시간 동안 잠도 못잔 채 나쁜 소식만 들어오면 당연히 무너지는 법이다. 몇몇 사령관은 전선에서 혹은 리모자주 당한 후 후방에서 스트레스를 견디지 못하고 자살했다. 대전쟁 발발 당시 대부분의 장성이 장기간의 정신적 압박을 견뎌내는 훈련을 해보지 않았고, 1차대전이 최초의 현대전이기 때문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예상하지 못했다. 전쟁 전엔 대부분의 전투가 몇시간만 이어지리라 생각했으나, 실제론 대부분의 부대가 두달 동안 휴식없이 전투를 벌였다. 부하들 앞에서 눈물을 보이거나 자제심을 잃어버리거나 냉철한 사고능력을 상실한 장군에 대한 기록이 셀 수도 없을 정도다. 르그랑 지라르드 장군은 부하들 앞에서 자신이 무너졌음을 솔직하게 인정했는데, 이렇게 부하 앞에서 사기가 떨어진 모습을 보인 장군이 매우 많았다. 조프르가 전선이 붕괴되든 말든, 파리가 위험하든 말든 신경쓰지 않고 하루 8시간의 숙면을 취했다고 비난받곤 하는데, 그는 단순히 언제라도 명확한 상황판단과 결정이 가능하도록 스트레스를 관리했을 뿐이다. 조프르에게 부당한 리모자주를 당했다고 평가받곤 하는 랑르자크는 같은 시기 조프르와 달리 이런 상태였다.
'나는 그의 모습에 큰 충격을 받았다. 그의 얼굴은 피로에 찌들어 있었다. 충혈된 눈, 노란 피부, 그의 신경 상태를 보여주는 몸짓...'
무능이 스트레스의 원인이었으나, 동시에 스트레스가 무능의 원인이었다. 지휘가 불가능해진 장군 혹은 이상하게 지휘하기 시작한 장군 대부분이 신체적, 정신적으로 한계에 몰려 그렇게 되었다. 1914년 8월 기준으로 프랑스군엔 160명의 소장과 260명의 준장이 필요했다. 하지만 실제론 각각 120명, 220명에 불과했다. 부족한 숫자는 예비역으로 채워야 했는데, 이들은 평균 연령이 높았다. 이 고령의 장군들은 상당수가 건장하지 않았고, 승마를 포기한 이들도 있었다. 당대엔 말이 이동에 필수적이었기 때문에 모든 장군이 최소 두마리의 말을 보유했다. 그 시대 장교에게 승마는 단순한 운동이 아니라 지휘할 능력이 있다는 증표였다. 승마를 할줄 알아야 병사에게 가까이 갈 수 있었는데, 당대 통신기술 수준 때문에 상황을 빠르고 명확하게 파악하고 싶으면 이래야만 했다. 괜히 프랑스군에서 장교가 병사보다 사망률이 훨씬 높았던 게 아니다. 승마를 못하는 고령의 장군은 명확한 상황 파악이 불가능했고, 그렇기에 스트레스를 더 심하게 받았고, 그렇기에 무능해지거나 무능이 심해졌다.

 참모총장이자 총사령관인 조프르에겐 장성급, 영관급을 해임하거나 임명할 권한이 없었다. 프랑스군에선 연대부터 야전군까지 모든 장교가 각료회의를 통해 임명받았고, 공식 임명장을 소지했다. 강제 전역은 상임전쟁심의회 의견 표명을 받아들인 공화국 대통령의 승인으로만 가능했다. 그렇기에 프랑스군은 한직으로 보내 알아서 은퇴하라는 암시를 줘서 처리하곤 했다. 그러다 1914년 8월 15일에 전쟁장관 아돌프 메시미가 1912년 법률을 개정해 군인이 군인을 강제전역 시킬 수 있도록 조치하겠다고 조프르에게 통보했다. 총사령관이 전쟁장관에게 사후결재만 받으면 되는 방식으로 변한 것이다. 8월 24일이 되자 메시미가 조프르에게 다시 편지를 보냈다.
'나는 당신에게 무자비를 촉구합니다. 일부 비겁하거나 무능한 장교가 말 그대로 처형되기를 바랍니다.'
이는 비유가 아니다. 메시미는 정말로 전투에서 패배한 장군을 처형하길 원했고, 이에 필요한 절차까지 상세하게 설명했다. 조프르가 이런 조치에 필요한 심도있는 수사를 할 시간과 수단이 없다며 난색을 표했기에 숙청이 정말 총살로 이어진 경우는 없다. 그럼에도 메시미는 퇴임할 때까지 처형을 입담는 편지를 수차례 보냈다. 메시미의 후임은 밀르랑이다. 그 또한 숙청에 관심을 지녔지만, 메시미와 달리 훨씬 온건한 접근법을 취했다. 사실 조프르는 메시미의 통보가 도착하기 이틀 전인 8월 13일에 야전군 사령관들에게 이런 서한을 보냈다.
'만약 부하 장군이나 예하 지휘관 중 조금이라도 결함이 있는 자를 발견하면(또한 발견해야만 한다.) 나에게 긴급 사안으로 보고하라. 그리하면 그 장교를 즉시 교체할 것이고, 더 심각한 조치를 취할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겠다.'

이는 조프르가 프랑스 장교단의 상태를 매우 빠르게 파악했고, 대규모 숙청의 필요성을 깨달았다는 뜻이다. 좌천을 통한 교체와 더 심각한 조치인 강제 전역으로 말이다. 15일에 메시미의 통보를 받고 전쟁부의 지지를 확신한 조프르는 영관급으로도 눈을 돌렸다. 또한 조프르는 13일에 보낸 같은 서한에서 두각을 드러낸 장교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그는 뛰어난 장교를 공석이 된 직책에 임명할 수 있도록 보고하라고 요구했다. 그 결과 매우 방대하고 불규칙적인 인사이동이 일어났다. 포슈, 페탱, 파욜이 이러한 조치 덕분에 초고속으로 승진했다. 하지만 어떤 부대는 연속으로 사령관이 바뀌는 등, 효율성 측면에서 부작용도 있었다.

뱅센 기록보관소엔 1914년 8월 12일부터 9월 30일 사이 조프르에게 숙청당한 96명의 장교 명단이 있다. 여기엔 12일부터 31일 사이 전쟁장관이 해임한 이도 포함되어 있다. 이 문제의 장교들은 절대다수가 장성급이다. 다만 이는 불완전한 목록으로 보이는데, 랑르자크와 다마드 등 일부 장교가 누락되었기 때문이다. 이들을 리모자주한 과정을 알아보자. 조프르가 직접 숙청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일반적으로 조프르는 제거해야할 장교에 대한 보고가 들어올 때까지 기다렸다. 특정 장교에 대한 정보를 요청하기도 했으나, 그 장교의 상관이 만족을 표하면 개입하지 않았다. 조프르의 연락장교들은 랑르자크 등 특정 장군이 부당하게 숙청당하도록 만들었다고 비난받곤 한다. 그들의 업무를 제대로 된 관점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조프르는 연락장교의 보고에만 의존해서 숙청하지 않았고, 필요하면 직접 보고가 정확한지 평가했다. 예를 들어, 8월 20일에 조프르가 제3야전군 사령관 뤼페와 직접 대화를 나누었다. 이 일은 연락장교 벨 소령이 GQG로 돌아와선 제14용기병연대장을 현 작전에 대한 신체적, 정신적 부적합을 이유로 강제 전역시켜야 한다고 보고하며 시작되었다. 조프르는 즉시 뤼페에게 전화를 걸어 긴급 사안이니 이 평가를 직접 전화해서 확인하라고 요구했다. 거의 언제나 3명이(특정 경우엔 4명이) 동의해야 숙청이 결정되었다. 그 문제의 장교의 상관, 야전군 사령관, 그리고 최종 결정을 내리는 조프르 말이다. 총사령관에게 평가를 숙고할 시간이 부족했음은 사실이다. 하지만 조프르의 정적들이 주장한 바와는 다르게 맹목적인 비난에 근거하여서만 판단을 내리진 않았다. GQG 연락장교들이 한 역할 하긴 했지만, 전반적인 인상과 분위기를 파악하는 데 더 많은 역할을 했다. 야전군 사령관들은 종종 숙청을 제지하려 했고, 매우 신중하고 꼼꼼하게 불만을 서면으로 제기했다. 이 때문에 조프르가 독선적으로 결정을 내린다는 인상이 생겼지만, 실제로는 결정을 재고하곤 했다. 예를 들어, 8월 23일에 조프르가 뤼페에게 L, G, M 장군을 리모자주 해달라는 요청을 승인하겠다.는 서한을 보내면서도 이렇게 덧붙였다.
'그러나 어떤 사건으로 인해 이 장군들에 대한 평가가 바뀐다면 지금까지 취한 결정을 재고할 용의가 있소.'
실제로 그는 8월 25일에 제8사단장 L 장군 숙청을 취소했다. 그리고 조프르는 자기가 받은 보고가 편향되거나 부정확하다고 판단되면 부하를 질책하며 문제를 객관적으로 진술하라고 요구했다. 1916년 8월에 조프르는 제264보병여단장 T대령과 H대령의 교체 문제로 포슈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다.
'지나치게 모호하고 지루할 정도로 횡설수설하는 R장군의 보고서를 그냥 지나칠 수 없었소. 132사단장이 표현한 불안감엔 근거가 전혀 없소. 이러한 불안감이 최고사령부의 결심을 혼란시킬 일은 없을 것이고, R장군의 우유부단과 주저가 받아들여질 일도 없을 것이오'

이를 보면 알겠지만 잘못된 보고는 보고자의 인상을 나쁘게 만들었다. R장군은 우유부단[8]하다고 질책받았지만, 자기가 역으로 숙청당할 위기를 모면할 순 있었다. 하지만 그러지 못한 장군도 있다. 바로 뤼페와 랑르자크다. 이 둘은 부하를 숙청하는 데 뛰어났고, 특히 뤼페가 그러했다. 결국 두 사람의 차례가 되자 뤼페와 랑르자크라는 이름이 프랑스군의 전투서열에서 영원히 모습을 감추었다. 뤼페의 평가는 상당히 직설적이었다. 그는 C대령이 완전히 패닉에 빠졌으며, 부대기를 부러뜨렸다고 보고했다. 또한 뤼페는 제5야전군의 장성급, 영관급 장교들과 중대장들의 정신 상태가 끔찍하다고 불평했다. 그는 이렇게 덧붙였다.
'사단장들의 사기가 완전히 무너졌고 부하들 앞에서 결점을 숨기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B장군에 대해선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라고 평가했다. 조프르는 8월 30일에 뤼페를 직접 숙청했다. 뤼페는 전쟁장관과 총사령관에게 더 낮은 부대여도 괜찮으니 다른 지휘부를 맡겨달라고 간절하게 비는 편지를 두차례 보냈다. 그는 1915년 5월 22일에 다시 시도했다. 그는 메츠-티옹빌과 스트라스부르에서 전개될 작전에서 자길 기용해달라고 부탁했다. 조프르는 답장을 보내지도 않았다. 결국 뤼페는 1917년에 은퇴했다. 랑르자크는 뤼페보다는 부하를 제거하려는 시도가 덜했다. 언급할만한 사례는 제5군단장 소레인데, 그는 상브르 전투를 지휘했던 사람이자 전투 내내 어디에 처박혀 있었는지 모습을 보이지 않은 사령관이다. 랑르자크는 조프르에게 소레의 실패를 전화로 직접 보고했다. 소레가 전투 내내 예하부대들이 어디에 있는지도 몰랐다는 내용이었다. 소레는 부적합 판정을 받아 리모자주 되었고, 군단장 자리는 아슈에게 돌아갔다. 랑르자크는 9월 3일에 쫒겨났지만 조프르는 마지막까지 그의 숙청을 망설였다. 전쟁이 끝난 후 조프르 비난자들이 이 결정을 둘러싼 논란을 엄청나게 부풀렸기에 결정의 객관적인 이유가 가려져 랑르자크가 숙청되어 마땅했는지 이야기하기 어려워졌다. 조프르는 회고록에서 여러 페이지를 할애하여 랑르자크를 숙청한 이유를 설명했다. 그에 따르면 랑르자크가 영국원정군 사령관 존 프렌치와 계속 마찰을 일으켜 연합군의 협력 관계가 무너질 위험이 있었고, 랑르자크의 우유부단함과 고집스러울 정도의 조심성과 불확실한 태도에 대한 증언도 많았다. 이 때문에 랑르자크의 야전군 사령관 자리가 제1군단장이었던 데스페레에게 갔다.

숙청은 대상의 체력, 정신력, 능력으로 정당화되었다. 체력 문제가 질병이 아닌 전투 스트레스에서 기인한 경우, 정신력도 함께 고려했다. 병에 걸리거나 중상을 입어 어쩔 수 없이 리모자주된 경우도 있다. 예를 들어 G 장군은 두명의 연락병에게 보고받던 중 근처에서 중포탄이 터져 치명상을 입는 바람에 기적적으로 생환했음에도 자리를 잃었다. 누군가를 숙청할 때마다 정당화를 위해 휴식의 필요성이 언급되었다. 휴가를 요청하면 어지간해선 수리해줬지만, 동시에 숙청했다. 랑글 드 카리는 떨림 증상, 더듬증이 생기고 이해력이 떨어진 제70예비사단장의 리모자주를 요청한 적이 있고, 어떤 소령에 대해선 '그의 뇌가 터지지 않도록 예방 조치를 취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라고 보고했다. 어떤 기병 대령은 폐기종 때문에 리모자주 당했다. 조프르는 평정심을 잃은 장교, 나약하거나 우유부단한 모습을 보인 장교, 자신감 부족을 드러내는 언행을 한 장교, 즉 정신력이 약한 장교를 용서하지 않았다. 그는 회고록에서 누군가가 침착함과 결단력을 보일 때마다 기쁘게 언급한다. 침착함과 자신감이 그의 회고록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표현이다. 정신력이 약해진 장교는 자동으로 무능해지므로 정당한 판결이다. 또한 패배주의적 태도나 회의감을 다른 사람도 아니고 부하 앞에서 드러냈다간 즉시 숙청당했다. 세번째 이유인 능력 부족도 숙청하는 이유로 자주 언급되었다. 기록 부족 때문에 장군들의 리모자주로 이어진 실책이 얼만큼 사실이었는지 판별하기 불가능하나, 기록된 실책 자체는 매우 다양하다. 임무형 지휘를 거부한 어리석은 장군부터, 전투 내내 아무런 명령을 내리지 않은 장군까지 말이다. 숙청된 많은 장군들이 교리를 무시하여 아방가르드 운용을 하지 않았거나, 제대로 하지 않았다는 혐의를 받았다. 그러나 많은 경우엔 단순히 직업적 부적합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세부사항이 언급될 땐 그가 정확히 무엇을 잘못했는지 파악하기 힘들 정도로 모호한 용어로 기술했다. 예를 들어 뒤바이는 제55보병여단장 리모자주를 요청하며 '전술과 여단 운용이 무능합니다.'라고 보고했다. 이게 정확히 무슨 뜻일까? 다른 예시를 들자면, 조프르가 제5군단에게 사단장 중 '임무에 적합하지 않은' 두 명에 대한 보고를 요청했다. 뒤르발은 T장군이 '허술하게 지휘'했다고 보고했다. X장군의 경우 지휘권을 행사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였음에도 해임되었다고 기록되었다. 이런 경우가 매우 많다.

프랑스군은 장교들의 무능 때문에 큰 사상자를 입곤 했다. 예를 들어, 교리를 무시하고 아방가르드를 운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행군 중 포격과 기관총 사격에 당하는 사태가 벌어지곤 했다. 위처럼 교리 무시가 큰 피해의 원인이면 숙청당했으나, 그렇지 않다면 심한 사상자가 숙청으로 이어지는 법은 없었다. 예외가 딱 한 사람 있는데, 바로 제67보병사단장이다. 이 장군은
저는 적이 초래한 치명적인 피해를 직접 재현하고 우리 병사들이 다치는 것을 군사 작전의 목표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장성급 장교를 처음 봅니다.

라는 보고가 조프르에게 올라갔기에 숙청당했다.

가끔 군사적이지 않은 이유로 숙청당하는 장군도 있었다. 예를 들어, 1915년 8월에 조프르가 포슈에게 자기 지휘소가 위치한 마을로 여자를 한명 데려와 몇주동안 함께 지내 병사들의 사기를 낮춘 B 장군에 대한 조사를 요청한 적이 있다. 이 장군은 몇달 전에 무능하다는 근거가 부족하다고 숙청을 면했었는데, 결국 여자 문제로 리모자주 당했다.

숙청된 이들이 즉시 반응한 사례는 찾기 힘들다. 아마 결정이 내려지면 반응할 새도 없이 조치가 취해졌기 때문일 것이다. 이들은 한직으로 전출되거나 직업을 잃어 집으로 돌아간 후, 몇주 혹은 몇달 동안 가만히 있다 전쟁부나 총사령부에 편지를 보냈다. 주로 다른 자리나 다른 지휘부를 요청하는 내용이었다. 또한 자기가 리모자주를 당할 때의 일을 설명하기 위해 노력했다. 제53예비사단장은 20페이지에 달하는 자기 변호서를 전쟁장관에게 보냈고, 소레는 실패의 책임을 참모장에게 전가하는 8페이지의 변명서를 보냈다. 어떤 이들은 새로운 상관을 통해 요구를 전달했다. 상관이 내 부하가 체력, 정신력 면에서 완전히 적합하므로 요구가 정당하는 의견을 전달하곤 했다. 여기엔 숙청된 장교가 병원에서 뗀 진단서가 첨부되었다. 이러한 요청 중 하나는 전쟁 전엔 뛰어난 기병이었고 전쟁이 발발한 후엔 제103향토사단을 지휘한 B장군이 보냈다. 다만 그의 상관이 된 펠레가 B장군의 요청을 GQG에 전달하며 이러한 사족을 달았다.
그는 브뤼제르의 향토사단에서 기병 지휘에 뛰어나지 않았습니다. 현 위치에 계속 두어야 합니다.

조프르는 그 의견을 받아들였다. 그래도 B장군은 1년 후 전선으로 복귀하는 데 성공했다. 요청이 아주 감정적인 경우도 있었다. 나폴레옹 전쟁에서 활약한 엑셀망의 후손인 E장군은 자기가 현역에 있지 않으면 엑셀망의 명예가 훼손될 것이라며 조상을 팔았다. 제10군단포병을 지휘한 D 장군은 조프르에게 '제 아들들은 전부 지휘 중이고, 한 아들은 이미 전사했는데 저 혼자 후방에 있는 건 잔인한 일입니다.' 라는 문장이 적힌 편지를 보냈다. K 장군도 비슷한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가 아들이 모두 전사하자 요청을 철회했다. 1914년에 리모자주 당한 많은 장교가 결국 1915년 말에 전선으로 복귀하긴 했다. 다만 리모자주는 마지막까지 멈추지 않았다. 모뒤이는 전쟁 동안 리모자주를 2차례 당한 끝에 종전까지 후방에서 지내게 되었다. 1917년 이후 일어난 리모자주의 대표적인 사례는 두번째 총사령관 니벨, 북부집단군 사령관 데스페레, 그리고 슈망 데 담에서 독일군의 공세를 막아내는데 실패한 뒤셴 장군이다. 당대 프랑스군에서 장교의 식사 시간은 그저 휴식 시간이 아니었다. 식사 중에 장교들은 의견을 공유하고 참모에게 조언을 받았다. 하지만 뒤셴은 난폭한 성질 때문에 식사 중 의견 공유와 조언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이 조사를 통해 밝혀졌고, 정치계와 언론에서까지 엄청난 비난을 받으며 해임되었다.

리모자주는 프랑스군을 정상화하기 위한 시도였고, 성공한 시도였다. 하지만 조프르는 대가를 치뤄야 했다. 리모자주가 시작되고 2년 동안 대전쟁 발발 당시 현직에 있던 육군 장성의 80% 이상이 숙청당했는데, 이들은 조프르에게 원한을 품었고 마지막까지 전선으로 복귀하지 못한 경우엔 증오심까지 품었다. 게다가 장군 쯤 되면 알고지내는 하원의원이나 상원의원이 한명 정도는 있었기에 조프르를 정치적으로 공격하기 수월했다. 숙청 결정이 다소 성급하게 내려지곤 했지만, 이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대규모 분쟁 중엔 상급사령부의 교체가 불가피하게 벌어지는 법이다. 카스텔노, 카리, 포슈조차 해임되거나 신임을 잃은 적이 있다. 영국군의 경우 1차대전을 마지막까지 이끈 사람은 존 프렌치가 아니라 더글라스 헤이그였다. 이탈리아군도, 독일군도 마찬가지다. 끊임없는 숙청의 위협이 파편화된 사상의 축으로 인해 전쟁 전부터 분열되어 있던 프랑스 장교단에 좋은 영향을 주지 못한 건 사실이다. 전쟁 전부터 존재했던 개인적 우정과 적대감이 심화되었다. 거의 모든 장군이 자유롭게 말할 기회가 생길 때마다 동지를 물어뜯게 되었다. 숙청당한 장군은 자기가 정치적인 이유로 해임당했다고 주장하곤 했다. 르그랑 지라르드가 본인도 리모자주 당했음에도 이들에 대해 '전장에서 승진할 기회를 잃자 언론과 정치인과의 관계로 기회를 얻으려 했다.'라고 비난했을 정도로, 정치적으로 군 것은 숙청당한 자들이다. 조프르는 혁명기에 전임자들이 한 일을 반복했을 뿐이다. 메시미가 원했던 대규모 총살형이 아니라 훨씬 온건한 방식으로 말이다. 조프르는 2등급 장교들을 참을 수가 없었다. 결국 조프르의 차례가 왔다. 중간에 니벨이 끼어들긴 했으나, 조프르의 해임이 필리프 페탱은 총사령관이 되고 페르디낭 포슈가 참모총장이 되는 길을 열었다. 포슈는 더 나아가 연합군 총사령관이 되었다. 리모자주가 조직력은 매우 뛰어났으나 전술에 대해선 아무것도 모르고 작전적으로도 무능한 조프르 본인의 몰락으로 완성된 것이다.

7. 말년

전쟁 후에도 13년을 더 살았고, 1931년에 타계했다. 그가 죽은 이듬해인 1932년에 2권으로 된 그의 《회고록 Mémoires》이 출판되었다.

여담으로 1922년 일제강점기였던 조선을 방문하여 창덕궁에서 순종황제를 알현했다.

8. 기타


[1] 종전 당시 프랑스군의 원수는 총 세 명이었으며 나머지 둘은 필리프 페탱페르디낭 포슈다.[2] 1차대전에서 프랑스군이 독일군에게 교환비가 조금씩 밀렸던 원인으로 부사관의 질적 수준이 꼽힌다.[3] 다만 드 방주 말고 다른 사람이 설계한 물건도 있다. 바케가 설계한 1890년형 120, 155mm 곡사포라던가.[4] 굳이 앞에 야전이라는 단어를 붙인 이유는 초반에 설명한 프랑스군의 사고방식을 떠올리면 알 것이다.[5] 바케 120mm도 최초의 현대식 곡사포라 부를 수 있지만 구식 개념과 신식 개념이 혼재하기 때문에 진정한 의미의 최초는 리마이로 155mm라고 본다.[6] 독일의 공격을 막기 위해서라면 강력한 요새지역이었던 베르됭을 포기할 각오까지 했다고 한다. 2차대전 프랑스와 아주 크게 비교되는 선택으로, 2차대전 프랑스군은 정 반대로 마지노선을 지키기 위해 아르덴-스당쪽으로 보낼 수 있는 병력 중에 일부를 마지노선으로 보내기까지 했다. 결과는 아시다시피...[7] 출처: Robert A. Doughty, "French Operational Art 1888–1940", in Historical Perspectives of Operational Art (Washington D.C.: Center of Military History, 2005), pp.79-82.[8] 조프르가 제일 혐오했던 자질이다.[9] 1914년에 한 말.[10] 제17계획이 공격 작전계획이라는 선동도 이 요새 신봉자들이 1920~1930년대에 조프르를 비난하기 위해 만들어낸 것이다. 국경의 비밀은 요새를 찬양하며 기동전을 군사적 아마추어 행위라고 조롱하는데, 마침 조프르가 1914년 기동전에 실패했으니 자기들 주장을 강화하는데 쓰기 딱 좋은 샌드백이었다. 제17 계획이 슐리펜 계획[17]에 대응되는 계획이라는 잘못된 정보는 이러한 정치적 선동을 영어권 학자들이 무비판적으로 인용하며 퍼졌다.[11] 그 전엔 전쟁장관에게 지휘권이 있었다.[12] 물론 그것과 별개로 베르됭 전투에서 큰 피해를 입은 건 조프르 때문이다. 국경 전투 때부터 상상력 없는 지휘로 악명높았던 조프르 때문에 베르됭 전투가 완벽한 기습으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경고 신호를 무시하며 베르됭의 방어망을 강화해야 한다는 모든 요구를 묵살했다.[13] 이상 출처 - "그래픽노블 1차 세계대전" 부록, 프랑스 역사학자 장 피에르 베르네.[14] 특히 국경 전투 중 조프르의 작전명령과 지시에선 후대가 배울 점이 하나도 없을 정도로 불명확, 누락, 실수가 가득하다.[15] 조프르는 무능한 장교들을 파악한 뒤 보직해임시켜 리모주 등 후방으로 전보하는 조치를 취했다. 그 때 프랑스 정치권에서는 무능한 장교들을 실제로 처형하라는 요구를 하고 있었다.[16] 조프르는 앞서 본 바와 같이 이런 장교들을 무자비하게 숙청(보직해임 후 전보 조치)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