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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9-17 11:42:43

강종(조선에는 쿠데타가 필요해요)


조선에는 쿠데타가 필요해요등장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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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작중 행적3. 평가4. 김시혁과의 관계5. 기타

1. 개요

조선에는 쿠데타가 필요해요의 등장인물.

원 역사의 고종 황제와 동일인물이다. 김시혁적대적 공생 관계인, 본작 핵심 반동 인물이자 사실상 제2주인공.

2. 작중 행적

노련한 일본 공사가 '약함을 이용할 줄 안다.'라며 치를 떨고 내각 구성원들 모두 경계할 정도로 음흉하고 위험한, 역사 속 고종을 그대로 구현한 모습으로 등장한다. 약하면 그대로 잡아 먹히는 제국주의 시대에 나라를 운영할 능력은 전무하나, 권력을 쥐고 유지하는 능력만큼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노괴. 시간이 흐른 2부에서는 정세를 보는 안목마저 급격히 끌어올려 정말 상대하기 어려운 군주가 되어 간다.

1차 친위 쿠데타로 왕권도 강화했고 황제 즉위까지 했으며 의화단 운동 개입으로 세종 이후 가장 많은 영토를 확보한 군주라는 업적도 챙겼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원 역사를 능가하는 발암 행보를 벌여 독자들도 고종 언제 퇴장하냐며 난리를 쳤고 극동전쟁 개전 직전 일어난 2차 쿠데타로 실권을 사실상 전부 빼앗긴다. 그럼에도 황위는 지킨 덕에 언젠가 김시혁을 또 엿먹이려는 거 아니냐는 우려는 남아있었고 예상대로 되었다.

전제군주정이 당연했던 20세기 초반, 500년 전제군주국의 왕이 민중의 의사, 언론을 능수능란하게 움직여 막후에서 좌지우지 한다는 전위적 발상을 실현에 옮겼고, 이를 위해 역신이라며 치를 떨던 서재필과 그가 운영하는 독립신문을 참된 언론이라며 후원하는 짓도 마다하지 않았다. 조동윤이 밝혀낸 바에 의하면 김시혁의 위신을 떨어뜨리고 약점을 잡기 위해 몇달간 사생활을 캐고 다니기도 했는데 김시혁이 꼬투리 잡힐 짓을 전혀 하지 않아 헛물만 킨 적도 있다고.

극동전쟁 종전 이후 거의 10년 간 뒤에서 조장한 민의를 바탕으로 군부와 내각도 손댈 수 없는 거대한 정치적 압력을 자아내는 데 성공했고, 이를 활용해 중추원황국협회 일변도로 채우고, 황실경위원과 제국익문사, 국가헌병대를 기반으로 내각, 군부를 견제한다. 극동전쟁 승리를 이끌어낸 성과는 있으나 본질적으로 고종의 신하라는 데서 정당성을 얻는 내각과 군부는 간접적인 견제 이상은 하지 못하는 상태.

엄밀히 따지면 제2차 쿠데타 이후 정권을 장악한 테크노크라트들이 전후에도 비상 대권을 놓지 않은 탓이 크다. 황제의 신임에 기반한 내각인데도 황제를 배제한 채 국정을 주도하여 집권 정당성이 현저히 부족한 내각이기에, 실권을 상실했던 고종이 여론을 업고 공작을 지속하는 것만으로도 흔들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국가의 외교도 내각과 황실이 따로 전개하는 상황으로, 이로 인해 외교도 꼬여버려 러시아가 역으로 뤼순을 일본에 넘겨버리고 남만주를 유지하고 싶다면 파병하라는 요구를 해서 한국을 발칵 뒤집어 놓기에 이른다.

동부전선 원정군이 김시혁 측근 지휘관들로 꾸려지자 이를 견제하기 위해 정적인 의친왕을 감찰관 명목으로 붙여 둘다 곤경에 빠트릴 궁리를 하면서도, 김시혁을 대신할 지휘관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으며 그의 능력이 자신에게 꼭 필요함을 알기에 김시혁을 숙청하자는 박제순의 건의는 일언지하에 잘라버린다. 오히려 김시혁을 원정군 사령관으로 추대하도록 여론을 조장했고, 원정 나간 뒤에는 군사 부분에 일절 관여하지 않았다.

헌법 제정을 떡밥으로 던져 내각과 중추원을 갈라치고 자기 편을 늘릴 계획을 수립 중이며, 전쟁으로 도시의 물가가 가파르게 상승하자 임오군란 이상의 대규모 소요 사태가 발생할 수 있음을 감지하고 유사시 강제로라도 유통망을 확대하기 위해, 더하여 한성을 자신의 친위 세력으로 둘러싸기 위해 헌병대의 규모를 확충하고 이를 기존 근위사단과 강습보병대 주둔지에 밀어넣는다. 내장원이 장악한 황무지 다수를 목장으로 개간하여 황실 차원에서 도시로의 육류 공급을 보장하려고 애쓰는 것은 덤.[1]

동부전선이 진행중에 한성에서 폭동이 발생하자 군의 힘을 빌리려는 이용익을 제어하고 헌병대와 경무청, 금화군 병력만 동원해 물대포와 둔기만으로 진압하게 한다. 한성에서 근황 세력의 파이를 늘린 김에 군부내 근황파을 더 키워주려고 호로군 무장해제에 동원시켰다가 무능한 근황파가 일을 키워서 막 귀환한 김시혁이 급히 수습하는 불상사가 발생하기도 했다.

서부전서 파병을 앞두고 전차 도입건으로 김시혁과 협의한 끝에 르노 전차 도입을 확정지었고 징병 문제로 어수선한 정국을 수습코자 삼남에서 만주 합이빈까지 순행길에 나선다. 순행길에 동행한 이용익과 향후 국가시책에 대한 논의를 주고받는데 토지 개혁의 필요성을 납득하고 점진적으로 지원해주기로 했으며 만주를 점령지가 아닌 온전한 제국의 강역으로 삼기위해선 대대적인 행정체제 개편과 800만에 달하는 만인들을 한국인으로 융화시켜야 한다는 이용익의 주장을 받아들이고 적극 추진한다.

한성에서 고위층 부인, 여식들을 중심으로 여성 참정권 시위가, 삼남에선 농민들의 형평 운동으로 시작된 참정권 시위가, 평양에선 노동자들의 임금 인상과 처우 개선 요구를 최종적으로 참정권 요구에 도달해 시위가 발생하자 원래부터 황실에 반항적인 데다 여성 노동자들도 대거 포함된 탓에 수용시 체제를 완전히 갈아 엎게 될 가능성이 높은 평양의 참정권 시위는 각하,[2] 황실에 충성스럽고 인구가 많은 삼남의 형평 운동은 어차피 진짜 정치에 관심 있는 운동가는 한줌이니 내장원 환곡놀이의 중심이자 그간 방패막이로 써먹던 흥친왕을 처벌하고, 농협을 설립해 풍흉에 따라 곡가가 들쭉날쭉해지는 현상을 차단해 금융 자본을 확대하는 큼지막한 당근으로 무마시키고, 식자층으로 구성되어 가장 온건하며 황실의 후원을 받고 있어 상대적으로 황실에 친밀한 한양 여성 시위대의 요구는 받아들여 여성 참정권 운동을 계급으로 갈라쳐버리기로 한다.[3]

그렇게 잘 나가나 싶었는데... 1919년 아직 1차대전 전후협상이 다 끝나지 않은 시기에 갑자기 친위 쿠데타를 터뜨리면서 독자들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전후처리 논의에서 자신이 배격당한 것을 계기로 자신 사후에는 황실이 옥새나 찍어줄 것임을 직감하고 무엇보다 1차 대전으로 소위 문명 세계에서 전제 국가들이 모두 사라지고 대한제국만 남은 것을 목도한 고종은 자신의 정치력으로 유지되는 전제정을 불변의 규범으로 굳혀버리기 위해 친위 쿠데타를 기획한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고종도 자신이 행사한 것과 같은 황권을 다음 임금이 누릴 수 있으리라 기대하진 않는다. 입헌이란 미명하에 군주가 옥쇄만 찍는 상징물로 전락하는 사태를 방지하고 숫제 왕정폐지를 내세우는 공화주의자들의 뿌리를 뽑아 군주가 일정한 권력은 유지한 채 체제를 항구히 이어가기 위해 일을 벌였다.

기존에 황실과 균형을 이루던 군부는 김시혁이 엄선된 장교들을 거느리고 유럽에 발이 묶이며 빈틈이 생겼고, 민영환이 이끌던 내각은 전쟁으로 인한 경제불황과 물가상승으로 지지도가 낮아졌다. 근황파 측에는 유능하고 선을 지키는 이용익이 병환으로 시한부 선고를 받아 고종이 시키는 것 이상은 기대할 수 없는 부패한 무능력자들만 남겨졌다.

이 모든걸 호재로 생각한 고종은 남만주 획득으로 증가한 영토와 인구의 민의를 오롯이 대변하고 새로 헌법을 제정하는 데는 250석의 중추원 내각으론 모자라다는 명분으로 내각을 해산시키고 의석을 400석으로 늘리는데 황국협회와 독립협회의 텃밭을 일부러 하나로 묶어 의석수를 줄여버리고 자신이 미는 어용 정치인들이 대거 당선되도록 선거구를 조작한다. 동시에 수도권 안정을 명목으로 무장 정치깡패 집단인 헌병대를 대대적으로 증강하고 젊은 풋내기 이승만을 끌어들인다. 마음만 먹으면 이승만을 즉시 반역 혐의로 처단할 수 있는 증거를 미리 모아둔 다음 그를 호출해 게리맨더링으로 선거에서 이겨 총리가 되던가, 역도로 처형되던가 2가지 결말을 제시해 전자를 고르게 하고 그가 일본과 밀약을 맺는 것까지 방치하며 당연히 현역 총리가 전후 협상에 참여해야 한다는 내각의 중론을 무시하고 민영환을 유럽으로 파견하도록 유도한다.

이승만 내각은 출범 직후부터 황제에게 아첨하는 낙루총리 + 연해주의 동포들을 팔아넘긴 친일 정권이란 낙인 + 군부의 불신임 + 나아지지 않는 경제 사정까지 겹쳐 순식간에 지지율이 최하를 갱신하는데 고종은 박제순 몰래 헌병대를 움직여 한성으로 유통되는 땔감을 빼돌리고 자신은 아무것도 모른척 뒤로 빠져 모든 책임을 이승만과 그간 온갖 비위 행위를 눈감아주며 놔뒀던 궁내부 대신 박제순에게 떠넘긴다. 여기에 만주에서 창궐한 스페인 독감이 무시무시한 속도로 본토로 들이닥치면서 역대 최악을 갱신하자 방역을 핑계로 한성을 봉쇄하고 군부대신과 해군대신을 제외한 대신들을 일제히 억류한다.

군부와 내각은 제대로 대응하지 못 했는데 고종이 영관급은 원수부의 엄격한 심사를 받지 않는다는 점을 노려 수도권 인근 부대 영관급에 삼남 출신 근황파 장교들을 배치했고 경무청을 경부로 승격시키려는 이승만의 시도도 엎어버린 다음 경무청 내부에 끄나풀들을 심었기 때문. 무엇보다 대한제국의 정체성 자체가 고종의 일련의 행위들을 정당화 시켜줬다.

대한국 국제를 기본으로 하는 대한제국은 전제 제국으로 모든 권력과 정당성이 황제에게서 나왔고 최장기간 재임 군주이자 만주를 획득한 전승 군주가 본래 자기 것이라 규정된 권력을 다지기 위해 벌이는 일을 거부할 명분이 존재하지 않았다. 기존에는 김시혁이 이끄는 군부와 민영환이 이끄는 내각이 개인의 위상을 바탕으로 견제해 왔던 것이고 두 사람이 모두 유럽으로 떠나버린 자리를 메울 사람은 없었다.

한성 봉쇄에 성공한 다음에는 전국 각지에서 방역에 종사해야 할 인력들을 모조리 한성으로 끌어모아 지방은 죽든 말든 한성의 민심유지에만 힘쓰며 무능하고 탐욕스럽지만 그래도 충성은 다 했던 박제순에게 일련의 책임을 떠넘겨 구금해버리고 박두영을 다음 장기말로 삼으면서 일본과의 국혼까지 추진하기에 이른다.

그러면서도 군부, 특히 김시혁의 주변은 절대 건드리지 못하게 하는데 이때 하는 말을 들어보면 얄미울 정도로 대한제국의 정체성과 자신의 권한을 잘 꿰고 있다. 자신이 법으로 정해진 권한을 되찾을 뿐인 이상 우직한 군인인 김시혁은 그것을 막을 수 없다는 것.

헌병대의 무능하고 폭압적인 방역으로 한성부 민심에 폭발 직전에 이르렀을 때 시민들을 폭도 취급하며 무차별 진압하려는 박두영을 힐난하고 예복 차림으로 기자단을 맞이해 일단 민심을 수습한다. 경상도에 파견된 여흥 민씨 지방관들이 김시혁에게 거병을 권했다는 익문사 보고를 듣고는 김시혁을 환대하는 척하며 은근슬쩍 섭정이 되라 떠본다. 순전히 가식만 떤건 아니고 그 와중에 흉중을 털어놓기도 하는데 황태자 이척의 절망적인 용태에 대해서도 솔직하게 인정하고, 철천지 원수인 일본과의 국혼이 말이 되냐는 시혁에게 민씨도, 윤씨도, 이씨도 누구도 믿을 수 없으니 차라리 외척이 될 수 없는 일본 황녀가 낫다고 답한다.

섭정 제안을 딱 잘라 거절한 시혁에게 다시 예편하고 출마해 총리가 되라는 권유를 하고 역시 거절하자 그제야 떠보기를 멈추고[4] 아들을 걱정하는 아버지의 얼굴로 바뀌어서는 자신의 사후 황태자와 영친왕의 안위를 부탁하고 박두영과 헌병대를 치우고 김시혁과 군부로 그 자리를 채울 것을 암시한다.

토사구팽을 감지한 박두영과 헌병대는 일부러 시위 보고를 뭉개고 한양으로 들어오는 교통로를 개방해 경복궁 앞에 모인 시위대의 규모를 키우는 공작을 진행한다. 한성에 30만명에 가까운 인원이 모여들자 임오군란갑신정변의 트라우마가 도진 고종은 강경진압을 결심하고 김시혁을 소환해 진압을 명한다. 김시혁이 피의 일요일 사건까지 언급하며 온건대응을 부탁하자 저 혼자 믿었던 신하에게 배신당한 비련의 군주로 빙의해 김시혁을 내치고 박두영에게 전권을 넘긴다.

박두영은 시위대를 흥분시켜 발포할 명분을 쥐기 위해 강경진압에 반대한 김시혁이 연금당했다는 사실까지 흘리고 격앙된 군중들을 향해 인민을 향한 고종의 선전포고나 다름없는 윤음이 전달된다.
...광무 12년, 2월 27일 오후 10시를 기하여 대한제국 육해군 대원수이신 황제 폐하의 지엄한 명령에 의거, 대한제국 전역에 비상 계엄을 발효하며, 이에 불응할 시 계엄법에 의거하여 처벌될 수 있음을 고지하는 바이다! 따라서 이곳에 있는 너희들은, 황제 폐하의 해산령에 따라 즉시 흩어질 것을 명하며 이에 불응할 시 발생하는 모든 귀책사유는 너희들에게 있음을 상기하라!
- 2부 885화.

계엄령을 듣고도 황제를 믿고자 하는 신민들을 향해 황제의 지시를 받은 무차별 포화가 쏟아지고 무수한 무고한 이들의 피를 뒤집어쓴 신민은 황제의 손에 의해 인민이 되었다.

수도권 인근 정규군 부대 투입을 요청하러온 박두영에게 좁은 면적에 지나치게 많은 부대를 투입했음을 지적하며 자신이 직접 3사단을 지휘하겠다고 나선다. 인민을 폭도로 몰아 학살하는 작업을 지시한 것도 모자라 직접 진두지휘하게되면서 어떠한 책임 회피도 불가능해졌다.

미리 연료를 빼돌려 둔 1기병사단이 한성으로 이동을 시작하고 8여단은 수도사단에게 잡혀 1기병사단이 먼저 한성에 들어오느냐 그전에 원수부를 떨어뜨리느냐 시간 싸움으로 전개되자 은밀히 북한산성으로 이어할 계획을 만지작 대는 한편 헌병대의 남은 전력과 야포 전부를 중랑천 방면에 배치해 1기병사단을 저지하게 하고 이근상이 지휘하는 호위대 3천여명으로 별도의 예비 병력이 없는 용산의 원수부를 직접 타격하라는 지시를 내린다. 혹여 이근상이 머뭇대며 김시혁과 협상하려 들때를 대비해 익문사 독리 이호석을 보내 압박하며 공세를 채근한다.

호위대의 공세가 김상옥이 이끌고 온 A7V의 합세로 돈좌되자 현장에 있는 이근상을 소환해 거듭 채근하고는 한성 진입을 앞둔 제1 기병사단의 근위 칭호를 박탈하고 자신이 직접 원수부 공략부대를 지휘하겠다며 나선다. 도중에 김시혁이 직접 전차를 앞세워 반격해왔다는 급보를 들으나 청계천 적토에 발이 묶일 거라는 내용에 김시혁에 더는 여력이 없으리라 판단, 자신이 김시혁을 이길 수 있다며 회심의 미소를 짓는다.

그러나 김시혁은 한밤중에 최대한 도하가 용이한 지점을 찾아내고, 민가를 뜯어 마련한 자재로 다리를 놓아 기어이 전차를 청계천 너머로 올리는 데 성공했고 원수부에 보낸 헌병대마저 해군에 의해 막히면서 원수부에게 내지른 회심의 일격까지 실패하자 절망하며 해군을 욕한다. 결과적으로 1기병사단을 막겠다고 헌병대 병력을 중랑천으로 뺀게 패착이었다. 해당 병력과 호위대 3천까지 붙여서 원수부에 쏟아부었다면 해군이 도달하기 전에 원수부 함락을 노려볼 수 있었으나 괜히 어설프게 전술가 놀음하다 유일한 기회를 날려버렸다. 이 시기로 가면 군부에서도 고종을 황제 취급하지 않아 즉위 전 이름인 이명복이라 부르면서 잡히면 끝장내 버리겠다고 벼르는 모습은 덤. 사실 한성 학살에 말려들었다 살아남은 유림들도 (전근대 기준으로) 반정당해 마땅한 폭군으로 간주 중이라서 죄다 황제 취급 안 한다.

이후 북한산성으로 이어하려 했지만 이호석으로부터 해군의 포격에 겁먹고 지휘본부에서 이탈한 박두영이 잔여 병력을 이끌고 북한산성에 들어가는 바람에 이어가 불가능해졌다고 보고를 받자 당황한다. 결국 이재곤과 이근상이 황실 인원들을 데리고 청량리역으로 피신하나[5] 청량리역은 1강습보병여단이 이미 점거한 상태였으며 1강습보병여단은 고종의 행렬을 청량리역을 지원하러 온 헌병대로 착각하여 파상공세를 퍼붓는다. 용케 총탄에는 맞지 않았고 부상당한 이재곤, 이근상을 버리고 육해군대원수 예복까지 벗어 던진채 홀로 도망친다. 노인의 걸음으로 야밤에 한성을 벗어나는 게 현실적으로 불가능함을 아는 강습보병대는 1개 중대를 차출해 추적에 나서는 한편 선조는 도망이라도 잘 쳤고 인조는 3번(이괄의 난, 정묘호란, 병자호란) 다 한성 밖으로 도망쳐 보기라도 했지 이명복은 한성 밖으로 도주도 못했다고 조롱한다.

속옷 바람에 빨랫줄에 걸린 옷가지를 훔쳐 걸치고 필사적으로 달아나다 시위에 나섰다 가족, 지인을 잃은 시민들 손에 붙잡히고 지난날 자신이 뿌렸던 어진과 사진이 족쇄가 되어 정체를 들킨다.
"사, 살려주시오... 나는 황제가 아니오. 황제가 아니란 말이오!"
- 2부 936화.
필사적으로 자신은 황제가 아니라 외치나 통할리 없고 몽동이와 발길질에 실컷 구타당한 다음 정미소에서 거꾸로 메달려 맞아 죽는 무솔리니 엔딩을 맞는가 했지만, 타이밍 좋게 도착한 강습보병대가 주민들을 설득해 맞아 죽는 건 피하고 체포된다. 이때 끌려가며 원술처럼 음식, 물을 찾자 그를 체포한 강습보병대 장교는 죽어간 자들의 핏물로도 갈증이 해소되지 않냐며 비아냥 거린다.

인민들이 모여있는 경복궁으로 끌려와 유림, 관료, 학생에 일개 무지렁이까지 모든 계층의 인민에게 질타당한다. 기다리고 있던 김시혁을 보고는 언제부터 역심을 품었냐며 그를 비난하지만 김시혁은 고종 스스로가 실패를 마주 볼 용기가 없어 자초한 일이라고 응수한다. 이후 군부, 중추원 등으로부터 의친왕을 황태자로 임명하는 문서와, 황태자가 된 의친왕에게 바로 양위한다는 양위서에 서명하라는 압박을 받자 발악하며 의친왕을 지지하는 황족들 사이에 서있는 의양군 이재각을 보고 분노해 그가 익문사 독리 이호석이라는 것을 폭로해 버린다. 그러나 폭로를 하자마자 바로 이재각이 기록국 요원들에 의해 끌려가며 험악한 분위기가 조성되고 군부 장성들이 군도를 뽑을 기미를 취하자 굴복해[6] 결국 양위하여 상황으로 전락한다.

황제가 된 이강의 첫 조치로 하얼빈 종신 유배에 처해진다. 법정에 세우자니 전제군주국에서 군주의 월권을 처벌하는 법안이 부재해서 근거가 없었고, 군법회의에 넘길 경우 대외적으로나 대내적으로나 대한이 군국주의 국가로 비쳐질 위험이 있기에, 정식 재판에 넘길수는 없기에 부득이하게 내린 결정이었다. 원 역사에서의 수명을 이미 넘긴데다, 노인이 골병들어 기력 쇠하는건 21세기에도 약이 없기에 얼마나 더 살 수 있을지는 불명.[7]

혁명이 끝나고 설립된 신정부는 제일 먼저 고종의 뒷주머니인 내장원을 혁파해 국가 제정을 일원화하는 작업에 돌입했는데 만주와 삼남의 대규모 농장과 광산, 벌목지, 각종 시설과 은닉한 토지, 비자금을 다 털어보니 1차 대전에 참전한 장병들의 상여금과 2.27 계엄으로 발생한 피해자들의 보상금을 다 지불하고도 돈이 한참을 남아 탁지부를 경악시켰다. 국고로 환수할 수 있는 걸 다 환수하고 나서도 이런저런 투자 회사에서 나오는 배당금만으로 연간 수십여억의 수익이 나왔다고.

하얼빈에서는 말이 상황이지 시가지에서 멀리 떨어진 허름한 오두막에 갇혀 산책도 마음대로 못하는 위리안치된 죄인과 다름없는 생활을 하게 된다. 바깥과 완전히 고립된 채 시중드는 사람 없이 손수 밥을 짓고, 감시하는 순검에게도 무시당하며, 땔감이 떨어져 뒷편 숲으로 몰래 주우러 들어갔다 마적들에게 붙잡혀 죽을 뻔하고 소변을 지리는 등 갖은 고생을 한다. 폐위 2년 후인 1921년, 바뀐 경찰서장이 호의로 보내준 신문에서 자신이 광무함이라 이름 지으려했던 작센의 함명이 3월 혁명함으로 결정되었다는 사실에 분개해 길길이 날뛰다 화병이 도져 추하게 사망한다.

이강은 자식으로서 한성에 시신을 운구해 최소한 장례는 치뤄주고자 했으나 국민 여론의 극심한 반발과 파업 예고까지 나오자 결국 철회하고 시신은 현지에 매장한 뒤 단촐한 비석만 세우도록 조치한다. 시호를 두고 악시의 대명사인 양(煬), 영(靈), 여(厲)가 거론되었으나 중국에서 먼저 써서 워낙 유명한 시호들이라 반려되고 윤치호가 주장한 강(槺: 흉년이 되어 곡식이 없다)과 유(謬: 이름과 실적이 부합하지 않는다.) 중에서 강이 선택되어 강종(槺宗)이 된다.[8]

3. 평가

전제정이 왜 시대의 흐름속에 이어질 수 없었는지를, 전제정의 문제가 단순히 군주의 유무능에 달려있지 않음을 보여주는, 권력에 대한 욕심은 너무나도 악랄한 사태로 이어질 수 있음을 보여주는 인물상이다.

빙의 대상이 아니면 조기 리타이어 전개가 보통인 고종을 원래 역사에서 보여준 모습을 바탕으로 재구성해 민의를 바탕으로 독재하고 싶은 전제군주라는 골 때리는 조합으로 기존 대역에 없는, 그리고 엄청나게 빡치는 새로운 고종상을 제시하는 데 성공했다. 심지어는 현실의 21세기 선진국을 기준점으로 잡더라도, 작중 고종만큼 친대중적인 정치인은 드물다. 인품상으로는 원 역사보다 더 나빠졌지만 능력상으로는 원 역사보다 훨씬 유능해진 셈. 작중에서 묘사되는 고종의 정치질 능력은 원 역사의 고종보다 훨씬 뛰어나다는 평이다.

자기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애쓰는 방향성 자체는 변하지 않았고, 그러다보니 호로군 무장해제 과정에서 벌어진 소요 같은 실책을 말년에도 종종 저질렀지만 이건 김시혁과 이용익이 안팍에서 노력해 메워줄 수 있는 범위였다. 두 명신의 보조를 받으며 제한된 권력 내에서 활로를 찾은 것에 전념한 고종은 왕권 행사와 공적 이익이 불합치되던 1부의 허물을 벗고 국가의 이익과 자신의 이익을 같은 선상에 놓는데 성공했다. 권력 행사에 제동이 걸려 왕권의 사적 남용이 틀어막힌 게 전화위복이 된 것. 러시아의 니콜라이 2세처럼 절대권력이 주어졌다면 유능한 신하들이 제때 커버해주지 못 해 오히려 실패했을 가능성이 높다.[9]

1905년 극동 전쟁 때 삼남 지방에 일본이 200만에 달하는 인명을 학살했는데[10] 10년 뒤인 1910년대 후반에 삼남 도시와 농촌을 거의 다 복구시키는데 성공했다는 언급이 있다. 내장원이 대체 뭘 했길래 복구에 성공한 건지는 불명이나 이건 버스가 아니라 진짜 고종의 대업적이 맞다. 이외에도 극동전쟁의 여파로 기존 행정체계가 박살나서 23부제와 13도제를 섞어서 운용하다가 프랑스의 데파르트망을 참고해 행정구역을 만주까지 포함해서 전면 개편시키려는 시도를 하거나, 만주 편입으로 다민족제국화되면서 만주 일대의 만주족과 한족 분류를 통해 신해혁명 이전부터 터잡고 살던 만주 한족과 청조 멸망 이후에 유입된 한족을 갈라치기하려는 시도 등등[11] 정치적으로 능수능란한 모습을 보여 독자들의 호평을 받고 있다. 1차 대전 이후 대한제국에 파시즘이 본격적으로 고개를 들면서 아예 대제의 풍모(...)가 있다고 자조하기도.[12]
맹자가 이르길, 인을 해치는 자는 적이라 하고, 의를 해치는 자는 잔이라 하며, 잔적은 일개 필부라고 하였소. 그리고 필부인 주를 죽였다는 말은 들었으나, 임금을 시해했다는 말은 듣지 아니하였는데, 당신이 이제 와서 우리에게 충성을 운운하기에는 너무나도 뻔뻔하지 않소? 당신은 걸주보다도 못한 자요! - 유생
더 이상 그대는 만민의 아버지도 지아비도 아니요, 그렇다고 하여 대한 인민들의 황제도 아니오! 그대는 그저, 수많은 인민들을 도살한 살인마일 뿐이오! 세상이 귀순하면 천자요, 이반하면 폭군이라 하였거늘, 폐하께서는 어디에 속한다고 보십니까?! 지금 고개를 들어 주변을 바라보시오! -유생
어찌하여 국가의 인민을 지켜야 할 황제가, 제 국법조차도 무시하고 이리 나올 수 있는 거요? 그 낡은 시대의 부산물인 대한국 국제의 수정본에서조차도 인민주권과 의회주의, 권리장전을 보장하게끔 되어 있거늘, 어찌하여 당신은 스스로 만든 법 위에서조차 그런 폭거를 휘두른 것이오? 이건 군주라고 할 수 없으며, 단지 인민의 적이라고 할 수 밖에 없소! -학생
체제를 위협하는 것이 폭도라면, 그것은 바로 당신을 의미하는 거요. 당신은 이 대한의 인민들이 일궈온 수많은 업적들을 송두리째로 무너뜨리려고 했고, 당신 개인의 욕심과 영달을 위해 수많은 자들을 핏물 속에서 허우적거리게 만들었소. 그것이 폭도가 아니면, 무엇이 폭도란 말이오? -경찰서장
인민의 대표인 중추원이, 당신의 폭압적이고 잔혹한 무력에 항거할 때 나온 격문과 선언서의 내용은 이제 한성부민 중에 모르는 이가 없습니다! 당신은 더 이상 우리의 황제가 아닙니다! 수많은 관료들이 눈물로 지난밤을 지새우며 이 도탄에 빠진 나라를 어찌 구할지 논할 때, 당신은 무엇을 했습니까! - 관료
2부 943화 中
그리고 2부 후반. 백성이 국민이 시대에 전제정은 유무능의 문제가 아님을 드러내며 나라를 도탄에 빠뜨린다.

다른 전제 제국들의 처절한 몰락을 지켜보며 고종 스스로 진행한 쿠데타는 굉장히 치밀하게 몇년의 시간을 두고 진행되었고 이 과정에서 보여준 정략과 술수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수준이었다. 특히 이승만은 그냥 가지고 놀았다. 그러면서도 군부는 일절 건드리지 않는 균형감각을 보여줬고 특히 김시혁에 대해서는 그는 무슨 일이 있어도 사직을 뒤집지 않는다는 절대적 확신을 보였다. 불필요한 의심으로 명장을 숙청한 군주들이 얼마나 많은지 고려하면 전제군주로서 고종은 대단히 유능한 인물이 맞고 한 18세기만 되었어도 명군 소리 듣는데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시대가 바뀌고 전제정이 더 이상 유지될 수 없어진 20세기에 국가와 신민을 군주의 소유로 규정한 전제정의 지도자는 아무리 유능해도 국가에 해가 될 수 밖에 없었다. 그는 자신이 세운 전제정을 만세일계로 내리기 위해 의도적으로 백성을 도탄에 빠뜨리고 출신과 계급으로 분열시켰으며 불필요한 대치에 국력을 희생시켰다. 의중 자체는 자신조차도 황태자가 나약한 인물인 건 알고 있고 종친과 외척들을 믿을 수 없어서 차라리 국내 정치에 개입 못할 일본 황녀가 외척으로서 적합할거란 판단이었지만 결과적으로 그가 촉발한 것은 그 자신도 온전히 통제할 수 없었고 최종적으로 자기 자신도 몰락시켜 버린 파국이었다.

또한 그의 파멸에 이른 과정을 살펴보면 결국 다 자업자득이었는데, 먼저 시위가 발생한 원인은 그가 기획한 일본과의 국혼이었다. 또한 시위가 통제불가능으로 확대된 것은 박두영과 헌병대의 트롤링이지만, 트롤링이 발생한 이유 역시 그가 앞서 수 차례 보여준 토사구팽으로 인해 '다음은 우리 차례다' 라는 것을 박두영과 헌병대가 직감했기 때문이다. 즉, 시위의 확대와 통제불가능 역시 그가 자초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시위의 진압 역시 온건하게 해결할 방향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기회를 걷어찼으니 무능이고, 러시아가 어떻게 혁명에 이르렀는지를 봤으면서도 그 전철을 똑같이 밟았으니 역시 무능이다. 결국 민중여론을 자기 뜻대로 주무를 수 있다고 과신한 오만함, 부하들과 신하들을 장기말처럼 쓰고 치워버리면서도 계속 컨트롤 할 수 있을거라 생각한 안일함, 사태를 바로잡을 수 있는 충언을 무시한 독선과 아집, 과거의 유사 사례를 잘 알고 있으면서도 배우지 못한 무지함이 그의 파멸을 불러온 원인으로, 그가 유능한 것은 정치질에서만 유능했을 뿐 진정한 대중정치인으로서의 유능함과는 거리가 멀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4. 김시혁과의 관계

아버지, 형제, 자식, 처가측근. 그 누구도 믿지 않는 노년의 독재자가 유일하게 믿는 사람이 김시혁이다. 평생 아랫사람들을 속이고, 분열시키고, 이용해먹다 때가 되면 팽해버린 고종이지만 김시혁에 대해서만큼은 확고한 신뢰를 내비쳤다.

물론 이게 삼국지연의에 나오는 그런 건 낭만적인 건 아니고 김시혁이 법에 규정한 명령 체계에 순응하고 일체 다른 생각을 하지 않기 때문에 유지되는 신뢰 관계라 평정심을 상실한 고종의 정당하지 못한 요구를 김시혁이 거절한 순간 깨어졌다.
짐이 다른 것은 몰라도 김 원수에 대해서는 너무나도 잘 알지. (중략) 그는 그런 값싼 권력에 눈이 먼 자들과는 근본부터 다르네.
그는 만고의 충신이지. 좋은 쪽으로나 나쁜 쪽으로나 말이야. 이게 무슨 뜻인지 이해했나? 그는 옆에서 누가 뭐라고 하든 간에 본질적으로 정치나 권력에 대해 초연한, 태생부터 잔뼈 굵은 칼찬 무관이란 사실을 잊지 않았단 말일세.
- 2부 855화.
김시혁을 경계하는 박두영을 힐난하며 한 이 발언은 군인으로서, 인간으로서 김시혁에 대한 각주나 다름없다. 박두영, 박제순 같은 모리배는 물론 이승만, 안창호 같은 민선 정치인들. 군부의 장교들까지 다들 정도의 차이는 있으되 자기가 바라는 김시혁의 형상을 마음속에 그려놓고 추종하는 모습을 보이는데 고종만큼은 김시혁을 거울 들여다 보듯 또렷하게 꿰뚫어보고 있었다.

물론 처음부터 이랬던 것은 아니다. 1부까지만 해도 고종이 김시혁을 바라보는 시선은 민영환이나 윤영렬을 바라보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쉴 새 없이 어깃장을 놓았고 일부러 대장진급과 공신책봉을 미루는 유치한 수작까지 부리며 김시혁을 견제하려 들었다. 하지만 김시혁은 두 차례의 쿠데타와 숱한 감정 싸움을 겪으면서도 문민통제라는 선을 절대 넘지 않은 채 고종이 저지른 사태를 수습하고 군부를 제어했고 오랜 시간에 걸쳐 확신을 얻은 고종은 김시혁에 대한 확고한 믿음과 애증을 넘어 애정이라 해도 좋은 감정을 갖게 된다. 그리하야 뒤틀린 애정과 확고한 믿음, 일방적인 요구와 치졸한 견제가 뒤섞인 군주와 그에게 충성하지 않지만 충성을 다 하는 신하의 기묘하디 기묘한 군신관계가 완성된다.
당연한 것이 당연하지 않은 세상이 작금의 세태일세. 그리고 경은 그 당연하지 않은 것을, 당연하다는 듯 의무로서 받아들이는... 별종 정도로 해두지.
(중략) 맡은 바 임무에 충실하게, 그리고 짐의 사후 황태자와 영왕의 안위를 부탁하네. 경이 아니고서야 그 아이들을 맡길 이가 없네.
- 2부 869화.
여느 신하라면 골백번도 더 돌아섰을 행동을 저질러 놓고도 고종은 김시혁이야말로 황제가 이끄는 대한제국이 영속할 수 있게 해주는 주춧돌이자 믿을 수 없는 경화사족이나 정치인들로부터 체제를 수호하고 황실을 지탱할 후견자라는 확신을 숨기지 않았고 김시혁은 고종에게 충성하지도 않고, 그가 시대를 역행하려 듬을 알면서도 여흥 민씨의 거병 제안을 단호히 뿌리치고 적지나 다름없는 한성으로 향했다. 그리고 고종은 누구보다 열렬하게 그를 기다렸고 자신의 믿음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인한 뒤 후사를 부탁함과 동시에 사실상의 동맹제안을 한다.

김시혁은 고종의 방법을 인정은 못해도 이해는 하고 넘어가는 모습을 보였고 직접 고종을 시위해 경복궁 앞에 몰려온 시위대를 진정시키려 했으나(국가원수로서 고종을 존중하려 했으나) 권력에 대한 강박적인 집착과 두려움에 눈이 돌아간 고종이 급발진하며 군신 관계는 최악의 방식으로 깨어졌고 한때 경복궁을 끝까지 사수했던 이가 경복궁을 들이치게 만들었다.

5. 기타

본작의 주인공 김시혁은 문민 통제를 철저하게 지키려는 올곧은 군인형 주인공이다 보니 고종과 불편한 동거가 성립될 수 있었다. 만약 군사뿐만 아니라 정치 감각까지 괴물 수준인 주인공이었으면 그런 거 없었을 거라는 게 정설이다.

극중에서 반동인물 위치에 있으면서도 계엄령 이전까진 지식인이 아닌 민간인들이나 외국인들 사이에선 이미지가 좋은 편이었다. 백성들 관점에서는 조선 왕조 역사상 가장 많은 영토를 새로 획득한 전승 군주에 영조의 재위 기록마저 넘어선 최장수 나랏님을 부정적으로 볼 이유가 없고, 외국인 시선에는 민권 향상에 적극적이고 서구 문물에도 전혀 배타적이지 않은 세련된 군주이기 때문이다.[13]

맥심포 총성이 클래식보다 감미롭다고 당당하게 말하는 밀덕후로서, 단순히 화력이나 크기만 보는 게 아니라 디자인의 유려함과 미감까지 살피는 미학있는(?) 밀덕이라 삐까번쩍한 장비나 전함, 열병식이라면 사족을 못 쓴다. 군사적 안목은 전무하나 이 밀덕 기질 덕분에 대한제국군의 신규 장비 도입은 쉽게 쉽게 되는지라 도움이 되긴 한다. 구식 파먼 복엽기를 뉴포르로 교체하려는 군부의 요청을 탁지부에서 예산 문제로 반려했을때 새 비행기를 보고 싶다는 욕망으로 끼어들어 내탕금을 제공해줬고 노급 전함에 꽂혀서 프랑스와 미국을 찔러보았으며 프랑스제 전차 도입도 주도하는 등 최소 장비 도입 측면에서는 최고의 도우미라 봐도 될 정도다. 원 역사에서도 신문물 애호 기질이 있었음을 생각하면 나름 고증이다.

원 역사처럼 커피애호가에 와플 같은 달달한 간식을 선호하는데 건강을 위해 양보할 생각은 없는지 환갑 넘어서 전국 순행이라는 빡빡한 일정을 소화하는 와중에도 야식으로 설탕이 듬뿍 뿌려진 와플을 즐긴다.

1부 초반부에 김시혁의 독백에서 혁명을 암시하는 구절이 있었고 3.1 혁명 당시 초기 제목대로 '쿠데타까지는 하고 싶지 않았는데'라고 독백하는 모습을 고려하면 고종이 1919년 3.1 혁명으로 파멸한다는 전개는 본작을 처음 구성할 때부터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원 역사의 3.1 운동도 고종의 석연찮은 죽음이 시위에 일조했으며, 민주 공화국의 성립을 모토로 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성립으로 이어져 당대인들이 3.1 혁명으로도 불렸다는 것을 고려하면 나름 고증.


[1] 민간의 설렁탕 가격 변동에 내재된 의미를 파악하고 기민하게 대응하는 모습은 바뀌는 시대에 적응 못하고 끌려 내려간 동시대 전제군주 누구에게서도 찾아볼 수 없는 탁월한 면모로, 고종의 발암 행각에 치를 떨던 독자들조차 혼자 보법이 다르다며 혀를 내둘렀다.[2] 기존에는 연간 일정 금액 이상을 납부하거나, 병역을 마친 18세 이상 남성에게 중추원 의원 선거권을 부여했는데 노동자 여성에게 참정권을 주려면 병역 의무도, 납부 의무도 지지않는 자들에게 참정권이 부여되어 기존 체제를 완전히 뒤집어 엎어야 했다. 부유층 여식이기에 납부를 명분 삼아 참정권 부여가 가능한 한양 여성들과는 달랐다.[3] 신분제 사회는 인종보다도 신분이 우선이라 귀족 여성들은 자국 평민보다 외국인 귀족에 더 동질감을 느꼈다. 영국 여성 참정권 운동때도 상류층 여성들에게 참정권을 부여하자 노동 계급 여성들은 어찌되었든 만족하고 떨어져 나갔다.[4] 뒤따르던 내관들을 무장시켜 여차하면 즉시 김시혁을 체포할 수 있게 해둔 상태였다.[5] 평양이나 삼남 쪽으로 피하려 했다.[6] 이와중에 정신 못차리고 의관을 갖추게 해달라고 요청했으나 욕만 얻어먹는다.[7] 냉정하게 말해 하얼빈 유배 자체가 '호모 사케르'형에 가깝다. 작중 시점에서 만주는 일단 대외적으로는 조선이 우위를 점하고는 있지만 완전하지는 않으며, 그 밑에서는 온갖 세력들이 난무하는 무법지대다.[8] 사실 이형을 연산군, 광해군처럼 익성군(翼成君)으로 격하시켜 버리고 익종의 양자에서 파양해 흥선대원군의 아들로 되돌린 뒤, 의친왕은 이형과 항렬이 같은 헌종의 법적인 양자로 넣어 버려서 배제해 버리는 수법이 있긴 한데(정조가 효장세자의 양자 자격으로 즉위한 것과 비슷하다.) 본작에서는 1920년대라 문화가 다르기도 하고 오랫동안 왕-황제로 군림하며 해온 일이 있어서 황제였다는 것까지는 부정당하지는 않았다. 사실 조선과 달리 신라고려에서는 폐주라고 해도 왕의 시호를 주는 게 관례기는 했다.[9] 작품 외적으로는 1부와 달리 2부 시점으로 넘어가면 작중의 갈등, 문제 해결 구도가 1부와 많이 달라져서 고종까지 1부처럼 트롤링 캐릭터로 묘사하면 대한제국이 터져서 스토리 진행이 안 되기 때문에 고종의 행보가 달라진 것으로 추정된다.[10] 여러 정황 묘사를 보아 호왈이 아니라 진짜로 1~2개월 만에 200만 넘게 죽인 르완다 학살, 킬링필드에 비견되는 학살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와 별개로 일본과 이런저런 물자 교환이 있으며 원 역사처럼 1910년대 후반 부산부가 일본과의 무역으로 너무 커져 동래부를 역으로 먹었다는 언급이 있는 걸 보아 전후 원한과 별개로 무역은 한 듯하다.[11] 작중에서 만주 소재 만주족을 800만으로 설정했는데, 원 역사에서 당대 만주 거주 만주족은 100~200만 이내였다. 독자들은 800만 분류가 청 말기에 봉금령 무시하고 들어와 신해혁명 이전까지 만주에 터잡고 살던 한족들을 만주족으로 신분세탁하고 신해혁명 이후 유입되는 한족을 견제하는 용도로 사용하기 위해 일부러 800만으로 분류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작중에서 고종이 만주족에게 '성을 내려준다'는 등의 여러 묘사를 통해서도 짐작할 수 있는 부분.[12] 근현대 역사를 보면 혁명 세력이나 민주적으로 집권한 내각보다 구 왕실이 훨씬 유화적인 경우가 흔하다.[13] 민권 확대에 적극적인 이유는 간단하다. 도시가 아닌 지방에서는 고종 지지세가 압도적이니까. 설령 하루 아침에 대통령제 공화국으로 바뀌어도 황국협회 소속 후보로 출마해 압도적으로 당선 가능한 지지세라 민권이 확대되면 될수록 근황파가 커진다.